《새해 아침. 저마다 바라는 바도, 하고자 하는 일도 많은 한해의 시작이다. 지난해 막바지에 몰아닥친 ‘IMF 한파’ 때문에 어느 해보다 무거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무인(戊寅)년 새해. 그러나 누구에게나 희망과 포부가 있다.
“PC통신하는 시간을 줄이는 등 온갖 절약 아이디어를 짜내겠다.” “일 때문에 소홀히 했던 딸 아이에게 사랑을 심어줘야지.” “축 처진 남편의 어깨가 조금은 펴지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무인년 새해 아침 20, 30대 주부 10명에게 소박하면서도 야무진 소망과 계획을 들어본다.》
〈생활부〉
▼실직 남편 어깨 펴주고▼
지난달 중순 외출했다 집에 돌아온 뒤 보일러를 켜 놓는 것을 깜박 잊었는데 남편이 “왜 이렇게 집이 추우냐”고 한마디했다. 얼떨결에 “IMF시대에는 난방비부터 아껴야지”라고 말했더니 남편은 민망한 듯 “허허”하며 웃어 버렸다.
그런 남편이, 감원 얘기로 회사에서 웅성거릴 때도 자신은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남편이 지난주 실직했다. 요즘에는 집에서나,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나 대화의 주제가 똑같다. 불경기라느니, IMF시대라느니….
새해에는 이전처럼 남편과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눠 활력이 넘치는 가정이 됐으면 좋겠다. 새해에는 예측이 가능한 사회가 되길 바란다.
김주희(회사원/수원 파장동)
▼영어책 다시 잡고 공부▼
그동안 일 때문에 소홀했던 일곱살배기 딸 혜윤이에게 엄마의 사랑을 듬뿍 심어주겠다. 일요일엔 혜윤이 친구들을 불러 도넛 잡채 떡볶이 같은 간식을 만들어 주고 함께 손잡고 놀이터에도 갈거다.
방송사 기자인 남편의 건강도 확실히 챙기겠다. 아이방에 남편 책상을 마련해 온 가족이 함께 공부할 계획이다. 영어공부에 특히 힘을 쏟겠다. 경제가 안좋다고 주눅들지 않고 90년 처음 인테리어일을 시작할 때의 의욕을 되살려 긍정적이고 진취적으로 일할 작정이다.
이명희(인테리어 디자이너)
▼군복무 남편 건강 챙겨▼
다음달부터 장교로 군에 복무하게 되는 남편이 항상 건강하고 무사하기를 바란다. 지금까진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는데 남편의 복무지를 따라 이사하면 살림을 새로 장만해야 할 게 걱정. 장롱 대신 행어만 놓는 등 당분간 소꿉장난식으로 살더라도 큰 지출을 막고 알뜰하게 살겠다.
새해에는 대학원 박사과정을 시작하는 만큼 공부에도 만족할 만한 진전이 있었으면 좋겠다. 서울로 통학하는 데 어려움이 많겠지만 2년차 주부 역할도 충실히 챙기겠다. 예쁜 아기를 갖고 싶은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새해 소망이다.
박수정(대학원생)
▼가정과 일 모두 열심히▼
우리 사회 현실은 주부가 가정과 일을 병행하기 어렵다. 새해에는 일하는 주부들이 마음놓고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됐으면 좋겠다. 우리 단체가 벌이고 있는 ‘평화로운 가정만들기’ 활동에 적극 참여하겠다.
큰딸 은재(7)가 올 봄 초등학교에 들어가는데 걱정이 많다. 아이가 사교육비나 학교폭력 등 학교의 여러 문제에 상처받지 않도록 모든 게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다. 아이에게 자립심을 키워주면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데 나의 힘을 보태겠다.
원유미(참여연대 간사)
▼더힘든 내핍생활 각오▼
3월이면 중3이 되는 딸아이가 무난히 인문계 고교에 진학하는 것이 소망이다. 남편은 사교육비를 줄이는 데 반대했지만 어려운 경제 상황을 고려해 지난해 말로 과외를 끊었다. 딸아이가 자립심을 키우고 스스로 공부하는 자세를 배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여태까지 옷사치를 안하고 외식도 거의 안하는 등 절약해 왔지만 올해는 더욱 내핍생활을 할 계획이다. 애들이 먼저 패스트푸드점에 가지 말자고 나서 다행이다. 전업 주부인 만큼 적극적으로 밖에 나가 돈벌기는 쉽지 않지만 안에서 쓰임새를 줄여나갈 생각이다.
고귀원(서울 목동)
▼아들「컴」교육 내손으로▼
매달 25일 통장으로 들어오는 남편의 월급이 한푼이라도 올라 남편의 처진 어깨가 조금은 펴지는 그런 한 해가 되었으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또 초등학생 외아들의 학원비 지출이 더 이상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나라살림이 나아졌으면 좋겠다. 아이에 대한 적절한 투자가 과소비일 수는 없으니까. 새해에는 아이의 학원비를 줄이는 대신 교재를 구입, 집에서 아이를 가르치는 엄마이자 가정교사가 되겠다. 우선 컴퓨터 다루는 법을 배워 컴퓨터 교육만큼은 내 손으로 할 생각이다.
오소정(서울 논현동)
▼외식횟수 절반 이하로▼
아직까지 IMF한파에 큰 타격을 입지 않았으나 올 한해 사업을 잘 꾸려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베이비시터(아기 봐 주는 이)전문파견업체는 국내에서 아직 인지도가 낮으므로 올해에는 특히 홍보에 주력할 계획이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한다면 불황의 시대라 할지라도 잘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잃지 않겠다.
무엇보다 가계비를 아낄 계획이다. 회사원인 남편은 지난 연말 보너스는 물론 성과급도 받아오지 못했다. 가계에 타격이 예상외로 컸다. 은성(4) 창섭(5)에게도 절약하도록 가르칠 예정이다. 잦았던 외식 횟수도 반이하로 줄이겠다.
김정민(아이들세상 대표)
▼전세빼고 시댁과 합쳐▼
3월이면 아기를 낳는 예비엄마다. 지난 연말 컴퓨터 잡지를 만드는 우리 회사에서 보너스가 나오지 않아 당장 아파트 중도금 내는 데 차질이 생겼다. 전세금을 빼서 은행에 넣고 시댁으로 들어갈 계획이다. 시어머니도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는 친정에 맡겨야 할 것 같다.
회사일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밖에 아기 얼굴을 볼 수 없는 경우도 생기겠지만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것 같다.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나 튼튼히 자랐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박현정(회사원/서울 휘경동)
▼PC통신시간 줄이기로▼
시할머니 시부모 우리 부부 아들(6) 딸(4)이 한 집에서 사는 대가족이다. 지난달부터 시할머니와 시부모님이 나라 걱정을 많이 하신다. 할인점에 갔다와서 물건이 동난 얘기를 하시며 한숨을 쉬시기도 하지만 “6.25도 겪었는데 그때로 돌아가서 살면 된다”며 가족들의 마음을 다잡아 주신다. 시어른들은 워낙 검소하게 사시니까 더 절약할 것은 없을 듯 하다.
밤에 PC통신하는 시간을 줄이겠다. 작은 아이에게 한글 교육 과외를 시키기로 한 것을 취소하고 계란 껍데기에 ‘가나다라’ 글자를 써서 낱말을 가르칠 생각이다.
강혜경(회사원/고양시 대화동)
▼우리집부터 외제추방▼
내가 속한 단체의 신년 계획에 맞게 소비자운동을 나부터 실천하겠다. 원자재를 외국에서 수입해 만드는 상품은 되도록 사용하지 않고 우리 기업의 제품만을 쓸 계획이다.
두살난 큰딸에게 주위에서 학습교재를 사주라고 권하지만 엄마가 놀아주는 것이 최고의 교육이라고 믿는다.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겠다. 또 늦게 귀가할 경우 밖에서 식사를 해결했으나 이제부터는 집에서 만들어 먹겠다. 소비는 풍요로운 삶의 영위에 목적이 있다. 그러나 올해는 ‘합리적 소비’만으로는 안되고 ‘건전한 소비’를 해야겠다.
이은영(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