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보는 세기말]유종호/불확실성 확산…新思考 없는가

  • 입력 1997년 10월 6일 20시 24분


「세기말」이란 것은 환멸과 퇴폐가 특징이라고 생각된 19세기말의 문학과 예술에 적용된 프랑스말 어법이다. 세기말이란 개념에는 종교적 종말론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서기 1000년이 예언된 종말의 해였던 시기가 있었다. 종말의 해는 그후 자꾸만 연기됐지만 종말예언이 위기의식의 표현임은 물론이다. 20세기의 「세기말」을 거론하는 것은 19세기의 그것과의 유추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예측불허의 극히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복천년 밀레니엄」이란 말과의 연관속에서 종말론적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저물어가는 20세기는 굉장한 기술문명 발전의 세기였다. 군사기술을 토대로 전자공업 화학산업 혹은 우주산업의 생산구조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고 이른바 「제3의 물결」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 그러나 20세기는 동시에 엄청난 「문제 세기」였다. 에릭홉스봄은 「역사상 가장 많은 인간을 살해한 세기」라 했다. 브레진스키는 「핵전쟁에서 1백만명의 사망자수를 뜻하는 메가데스의 세기」라 부르고 있다. 그의 계산으로는 전쟁과 전체주의 인간박멸의 희생자는 1억7천만명에 이른다. 아이자이어 벌린도 「인간역사상 가장 고약한 세기」라 정의하고 있다. 이에 따라 계몽주의가 설파했던 중단없는 인간진보란 이념은 뿌리째 동요된다. 단선적이고 목적론적인 진보의 서사로서의 역사관은 설득력을 잃는다. 그렇다고 사회주의의 체제붕괴와 함께 인간 역사발전의 최종단계로서의 「역사의 종언」에 이르렀다는 생각에 쉽게 동의할 수도 없다. 지구파괴의 가능성을 안고 있던 냉전이 끝났다고는 하나 현세계가 당면한 난제들에 대한 뚜렷한 출구가 보이는 것도 아니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터전에서 민족분리주의가 새로운 폭발력으로 분출하고 있다. 이슬람을 위시하여 원리주의가 도처에서 기세등등하다. 금세기 초에 16억이라던 세계인구가 이제 60억명에 이르고 있다. 인구폭발은 두려움을 유발한다. 12억 인구의 중국과 10억 인구의 인도가 근대화에 성공했을 경우를 상상하는 서구인들의 우려를 단지 황화론(黃禍論)의 새 변종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다. 국경을 넘나드는 다국적 기업의 제패와 국민국가의 약체화는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 지속적인 성장은 가능한가. 선진산업사회에서도 심각히 대두되고 있는 실업문제와 고용없는 성장문제는. 이른바 복지사회에서조차 드러나는 새 모순과 그 전망은. 지역간의 점증하는 빈부격차는. 인도네시아와 아마존 유역의 산불이 상징적으로 심각하게 제기하고 있는 지구환경과 생태계의 위기는. 반드시 문화적 보수주의자들만의 탄식일 수 없는 세계적 규모의 정신 공동화 현상은. 시장경제의 치열한 경쟁이 초래하는 삭막한 생활저질감은. 통제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는 러시아 소형핵무기의 행방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떠오르는 이러한 갖가지 문제에 대해서 20세기는 이렇다할 전망도 또 사회적 비전도 준비하지 못한 채 저물어가고 있다. 전문가들조차도 예측하지 못했다는 소련의 해체와 같은 역사적 격변을 경험한 세대에게 앞날의 불확실성은 「세기말」이라는 말에 감정적 전염성을 쉽게 제공해준다. 눈길을 우리 자신에게로 돌릴 때 사태는 더욱 불확실하다. 지난 한세기 동안 우리 사회의 추진력이 돼왔던 것은 성장의 신화였다. 경제성장을 통한 근대화가 자동적으로 소망스러운 사회발전에 이른다는 성장의 신화는 이제 위세를 잃고 있다. 「세계화」는 우리경제의 취약성을 노출시키고 있다.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북의 상황과 맞물려 전쟁재발과 연쇄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조차 일고 있다. 진보에 대한 안이한 믿음과 직선적 목적론적 역사관은 폭력과 연계되기 쉽다. 전쟁도 무력분쟁도 역사진보의 한 형태로 수용되기가 쉽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21세기에 대처하는 종합적 신사고와 처방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맥락에서 세기말이란 말은 유효성과 전파성을 갖고 있는 것을 보인다. 유종호<연세대석좌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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