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생활]지리산 6백번째 오른 정지섬씨

  • 입력 1997년 6월 7일 09시 15분


수수께끼의 사내 정지섬씨. 67학번. 나이는 비밀. 매주 금요일밤이나 토요일이 되면 서울 강남구의 거처를 나서 슬슬 지리산으로 소요(逍遙)를 떠난다. 이름하여 「출가산행」. 7일엔 하동 의신마을로 숨어든다. 이번 지리산행이 딱 6백번째. 어언 30여년이 됐다. 이것은 지리산 주능선을 밟았거나 독립봉우리 꼭대기에 오른 것만을 셈한 것. 날씨가 나빠 등산 도중에 그만둔 것은 아예 넣지도 않았다. 92년 11월8일 추성동에서 4백번째를 맞았고 95년 4월29일 뱀사골에서 5백번째를 기록했다. 지리산은 깊고 넓다. 1백번쯤 오르면 되레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 2백번쯤 오르면 모르는게 더욱 많아진다. 3백번쯤이면 조금 아는 정도. 그러나 산속에 파묻히면 어디가 어디인지 깜깜하기는 마찬가지. 4백번쯤돼야 겨우 맨처음 올랐을 때만큼 알게 된다. 5백번쯤이면 비로소 숲속 어디에 던져 놓아도 길이 보인다. 깜깜한 밤중이나 악천후시에도 나아감에 거리낌이 없다. 6백번을 넘으면 산행을 즐기게 된다. 느긋하게 산보나온 것처럼 스스로 한가롭다. 지리산을 아는 이들은 대부분 정씨의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정씨는 평일엔 뭘할까.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책을 읽는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묻지 말라. 돈은 먹고 살 만큼, 매주 지리산에 갈 만큼만 번다. 무슨 책을 읽느냐고? 노자 장자, 각종 불교서적, 주역, 침구(鍼灸)서적 상한론(傷寒論) 황제내경(黃帝內經) 등 한의학서적, 음양오행이론서적, 명리학(命理學)서적, 제갈공명이 쓴 기문둔갑(奇門遁甲), 요가 단전호흡 좌선 등 명상서적, 김용옥 김지하씨가 쓴 모든 책들, 한국 고미술, 한국고대사, 고고인류학, 디자인관련책자 등. 최근엔 「사주팔자와 숙명」이라는 책도 직접 펴냈다. 지리산을 주제로 한 15권짜리 책도 쓸 계획. 정씨가 지리산에 오르는 것은 마음공부 하는 수행과정. 정씨는 「나를 버리러」 지리산에 간다. 그러나 버려도 버려도 일주일을 못간다. 수행부족. 어쩌다 2주일만 지리산에 못가면 안달이 나고 짜증이 난다. 그 많은 산중에 왜 하필 지리산일까. 『다른 산은 아무리 깊이 들어가도 마음이 편치 못하다. 지리산은 그 품에 한번 안기기만 하면 모든 허물을 감싸주는 어머니 품처럼 아늑하다. 그때야 비로소 내 진짜모습이 보인다. 추하고 때에 찌든 나의 부끄러운 참모습이…』 정씨는 지리산행에서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다. 곰도 두번 정면으로 마주쳤다. 구사일생. 믿기 어렵겠지만 90년5월엔 호랑이도 만났다. 피하다 절벽으로 떨어져 발목을 다쳐 석달동안 고생하기도 했다. 그 호랑이는 60년대 구례 왕시루봉 외인별장지대에서 선교사가 키우다 놓아준 호랑이새끼 두마리중의 한마리임에 틀임없다고 주장한다. 마음공부하며 「숨어사는 도사」들도 많이 만난다. 서로 오가는 말은 없지만 마음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여름엔 더워 주로 밤에 산길을 다닌다. 정씨는 지리산에 오를 때 정해진 길을 고집하지 않는다.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곳 모두가 길이다. 모든 진리가 길은 달라도 결국은 한곳에서 만나듯. 정씨는 환갑때까지 지리산에 1천번은 오르려고 생각한다. 〈김화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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