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74)

  • 입력 1998년 10월 14일 19시 10분


제3장 나에게 생긴 일(17)

그 눈은 교묘하고 무표정했으며 무언가 비밀스러운 일에 몰두한 사람이 그렇듯이, 의연했다. 너희 같은 부류가 가 본 적 없는 세계를 나는 안다는, 예의 그 냉소적이고 비밀을 품은 표정. 나는 그 얼굴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시절 그런 표정들을 나의 거울 속에서 얼마나 자주 보았던가. 그 여자는 바로 나였고 규가 만났던 여자였고 아직도 다른 남자와 게임을 하는 여자였다.

나는 어리둥절한 심정으로 닳은 백동전 같이 희미한 겨울 태양을 쏘아보았다. 오래 보고 있으니 흡사 일식이 일어나는 것 같이 꼭 그만한 크기의 검고 동그란 그늘이 태양을 덮었다. 아픈 눈속으로 지나간 여름의 풍경들이 지나갔다. 휴게소 울타리에 심어진 꽃 핀 무궁화 나무들과 활짝 핀 협죽도 꽃들, 백일홍 나무들과 등나무의 깊은 그늘…. 초록색 격자 창문으로 이루어진 공중전화 부스와 휴게소의 녹슨 문들, 그리고 숲 그늘에서 가끔 흔들리는 금빛 나리꽃들과 붉은 뺨과 땀이 솟던 콧등, 커다란 장단지를 가진 가혹한 운명의 여자 용경….

휴게소 입구로 검은색 승용차가 들어왔다. 차가 나타나자 여자는 재빨리 백미러를 당겨 거울 속의 얼굴을 짧게 살핀 다음 옆자리에 놓인 가방을 채듯이 쥐고 차에서 나왔다. 여자는 길을 건너 재색 승용차가 미처 서기도 전에 운전석 옆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남자와 여자가 짧은 순간 마주 보았다. 그 순간 나의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 마주봄에는 흡사 허공에서 만난 새가 서로의 부리를 베어 무는 듯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그들의 차는 우회전 신호를 보내며 잠시 서 있다가 이내 국도로 들어갔다. 차체가 가볍게 흔들렸다. 차속의 흥분이 나에게 전해왔다. 서로의 체취를 뒤섞는 숨소리, 격렬하게 마주 쥐는 손가락들, 손바닥에 솟는 땀, 굳은 얼굴의 어느 틈에서 거품처럼 빠져나오는 미소, 기대로 입술이 떨리는 옆 얼굴…. 그 순간에 둘 중 누군가가 말할 것이었다.―보고 싶었어요. 괴로울 정도로. 내가 보고 싶지 않았나요?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무릎을 꽉 모은 채 울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짐승의 기괴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산에 표범이 산다고도 하고 가끔 멧돼지를 잡는 마을 사람도 있었고 노루가 커다란 바위 틈에 목이 끼여 밤새 비명을 내지른 적도 있었지만 한낮에 그토록 소름끼치는 비명 소리를 듣기는 처음이었다. 비명 소리가 점점 커지며 산을 뒤흔드는데도 나는 거실 바닥에 등을 대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호경은 여전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서점 문을 닫고 난 뒤에 차디차고 캄캄한 밤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새벽에 서점으로 돌아가 아무 구석에서나 잠을 자는 것 같았다. 나는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남은 삶이 두려워서 상상할 수도 없었다.

숨이 끊어질 것처럼 수가 그리웠다. 생각해보면 삶을 접고도 나의 피가 몸속을 계속 순환할 수 있었던 건 수의 존재 때문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제 아이를 위해 내 인생을 모두 던져 다시 노력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리석은 마음으로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망쳐버렸고 잃어버렸다. 산속의 짐승이 거의 3시간 동안이나 계속해서 울부짖는데도 나는 수가 그린 엄마의 얼굴 그림을 안고 죽은 듯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 눈물이 넘쳐 귀 속으로 목으로 어깨로 흘러내렸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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