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

김선미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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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선미 기자입니다.

kimsunmi@donga.com

취재분야

2025-11-06~2025-12-06
문화 일반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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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CEO3%
미술3%
경제일반3%
  • 곰 떠난 자리, 350살 밤나무… 만추(晩秋)의 광릉숲엔 철학이 있다[김선미의 시크릿가든]

    수북하게 쌓인 낙엽은 ‘바스락’ 소리를 내는 단풍칩 양탄자였다. 계수나무 낙엽에서는 여전히 달콤한 향이 났다. 봄부터 가을까지 소명을 다하고 땅에 내려온 낙엽은 저마다 찬란했을 삶의 초상(肖像). 그들은 비로소 자유로울까, 회한이 남았을까. 광릉숲에 자리한 국립수목원에서 낙엽을 밟으면 걸음이 느려지고 말수는 준다. 560년 된 숲에 조성된, 특별한 정원 두 곳이 만추(晩秋)에 깊은 사유를 일으킨다.● 감금의 흔적을 품은 정원시멘트벽에 걸린 반달가슴곰 사진 위로 가을 햇살이 철창 형태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달 초 국립수목원에 새롭게 선보인 ‘곰이 떠난 자리, 숲의 정원’(3000㎡)이다. 1991년부터 2017년까지 곰 사육장이었던 이곳은 동물원 폐쇄 후 폐허처럼 방치돼왔다. 녹슨 철창, 벽면에 찍힌 곰 발바닥 자국…. 정원은 그 감금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품었다.1998년 11월 이 사육장에 살던 백두산 반달가슴곰이 죽었다. 정확한 사인(死因)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시멘트 독(毒)이 올라 곰이 발바닥을 딛고서지 못하고 ‘낮은 포복’하듯 기어 다녔다”는 방문객의 목격담이 당시 신문기사에 실려 있다. 몸을 숙여 곰이 살던 비좁고 어두운 방을 둘러보니 죽은 곰이 떠올라 마음이 먹먹해졌다. 밖으로 나와 농익은 가을빛이 스민 광릉숲을 보고나서야 숨이 트였다. 잠시 나는 곰이 되었던 걸까.벽체 일부를 걷어내 숲의 경관을 끌어들인 옛 사육장엔 자생식물이 들어섰다. 빛이 스며들 때 그림자가 아름다운 식물을 심은 섬세함이 돋보였다. 여전히 빛이 거의 닿지 않는 곳에는 이끼나 버섯으로 감금의 시간을 은유했다. 사육사가 곰의 출산을 지켜보던 벽체의 작은 구멍에 눈을 갖다 대니, 루페(확대경) 렌즈를 통해 안쪽 식물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깊은 주의를 기울여 바라보자 식물의 생명력을 새삼 알아차리게 됐다. 정원은 기억 위에 생명을 불어넣었다.사육사가 머물던 공간에는 식물 수집가 고(故) 어니스트 헨리 윌슨(1876~1930)이 100여 년 전 한반도에서 찍은 숲의 사진을 전시했다. 우리가 여력이 없던 시절 이방인이 남긴 숲의 기록은 친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올여름 수해 때 쓰러진 전나무로 만든 벤치에 앉아 건물 위를 올려다보자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숲은 고요하지 않다’. 식물, 동물, 미생물이 끊임없이 소통하며 살아가는 숲의 의미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보였다.국립수목원은 왜 폐허를 정원으로 만들었을까. 이 사업은 산림청이 공공정원 확대를 위해 추진 중인 ‘생활권역 실외정원 조성사업’의 일환이다. 버려진 땅에 생태적 회복의 의미를 부여해 다양한 생명체가 숲의 주권자임을 드러내겠다는 취지다.공사 과정을 지켜본 입장에서 처음엔 의문이 들었다. 그대로 둬도 훌륭한 숲에 굳이 정원이라는 인위성을 더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지금은 참회인지 감동인지 모를 방문객들의 눈물을 본다. 최근 국립수목원에서 열린 ‘2025 국제정원치유 심포지엄’ 발표자로 방한한 덴마크 코펜하겐대의 울리카 K. 스티그도터 교수도 이 정원을 함께 둘러보며 말했다. “좁은 공간에 동물을 가두었던 과거를 드러내고 자연을 회복시키는 방식을 다른 나라에서 본 적이 없다. 이곳에서 누구나 자연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치유라고 부르든 치료라고 부르든 우리의 행동을 되돌아보게 하는 감동적인 정원이다.”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곰을 가뒀던 인간이 그 흔적 위에 정원을 만든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비로소 곰의 시선에서 숲을 대하고 있을까. 정원에서 숲으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침대형 의자가 놓여 있었다. 여기에 누워 나무를 올려다보자 30m 떨어진 계곡의 물소리가 비로소 들리기 시작했다.● “평양냉면을 닮은 한국의 숲 정원”광릉숲의 역사는 조선 제7대 세조의 능림(陵林)이 조성된 14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왕릉으로 엄격하게 보존 관리돼 온대 중부 낙엽활엽수림의 극상림(생태계가 안정된 숲의 마지막 단계)을 보여주는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이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늘 궁금해한다. ‘이 오래된 숲의 속살은 어떤 모습일까?’ 안타깝게도 광릉숲의 대부분 구역은 생태 보전을 위해 일반에게 개방되지 않는다. 광릉숲 2426ha 중 국립수목원 전시원은 102ha 규모다.국립수목원이 지난해 가을 조성한 ‘비밀의 정원’(7000㎡)은 이런 고민에서 비롯됐다. ‘보여줄 수 없는 숲을 보여주자’. 인간이 의도적으로 질서를 만들어낸 수목원 내 전나무 인공림을 통과하면 어느 순간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천연림으로 전이되는 공간이 나온다. 그곳이 ‘비밀의 정원’의 시작점이다.쓰러진 나무로 만든 문을 열고 들어서니 숲속에 폭 1.8m의 길이 이어졌다. 양쪽에는 오래된 나무와 그 아래에서 막 자라기 시작한 어린나무가 함께 서 있었다. 나이가 들어 힘이 빠져야 천연기념물 장수하늘소를 품는다는 서어나무는 나무껍질이 근육질처럼 우람했다. 물푸레나무는 잎을 떨군 뒤라 까막딱따구리가 커다랗게 파놓은 둥지가 선명했다. 오래돼 쓰러진 졸참나무는 나무가 살아온 시간을 상상하게 했다.길 따라 걷다 보면 광릉숲에서 가장 오래된 350살 밤나무를 만난다. 천천히 이 나무를 만나도록 길은 일부러 둥글게 돌아간다. 가슴둘레가 4m가 넘는 밤나무를 안아보니 나무가 견뎌낸 세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무를 감상하도록 조금 떨어져 놓인 의자에 앉으니 나무 뒤로 해가 비추었다. 이 광경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왜 ‘비밀의 숲’이 아니라 ‘비밀의 정원’일까. 임영석 국립수목원장은 “단지 미개방지역을 연 게 아니라, 숲의 서사를 발견해 드러냈다”고 말한다. 졸참나무, 서어나무, 엄나무가 엉켜 있는 자리에는 ‘치열한 공존’이란 푯말이 붙어 있었다. 몸을 비틀거나 가지 틈으로 뻗으며 함께 자라던 나무들은 죽어서도 서로를 받쳐준다. 다래가 층층나무에 해를 입히지 않고 감아 올라가는 모습엔 ‘슬쩍 기대어 살아가는’이란 문구가 있었다. 인간의 개입을 덜어내자, 더불어 살아가는 나무들이 현자(賢者)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정원을 둘러본 조경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말했다. “비밀의 정원은 평양냉면 같다. 양념에 의존하지 않고 재료에 집중하는 평양냉면처럼 숲의 본질을 드러낸 ‘한국형 숲 정원’의 모범이다.”정원이 과잉소비되는 시대, ‘곰이 떠난 자리, 숲의 정원’은 숲의 주권자가 인간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낮은 목소리로 일깨운다. 온전한 숲이 유지됐기에 가능했던 ‘비밀의 정원’에서는 오래된 나무들이 삶의 태도를 가르쳐준다. 그래서 말할 수 있다. 철학이 있어야 정원이다. 글·사진 포천=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202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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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력 단절 딛고 연 매출 1500억 원 일군 여성 CEO 스토리

    국내 아동복 신화를 일군 ‘더캐리’ 이은정 대표(45)가 자기계발 에세이 ‘캐리 온: 10년 후, 꿈꾸던 내가 되었다(에피케)’를 최근 펴냈다. 25만 원으로 사업을 시작해 연 매출 1500억 원을 올리는 글로벌 패션그룹을 일군 기록이다. 2010년 블로그 ‘솔맘 스토리’가 엄마들 사이에서 유명해지면서 2014년 유아동복 ‘베베드피노’의 법인을 설립한 뒤, 주니어 브랜드 ‘아이스비스킷’, 키즈 편집숍 ‘캐리마켓’ 등을 만들어온 여성 창업가로서의 궤적을 담았다. 두 아이를 둔 워킹맘인 이 대표의 이야기가 ‘골든걸’ 독자들에게 영감과 용기를 줄 것 같아 최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사업의 시작은.“첫째 아이 돌잔치 때 입힐 옷을 찾는데 국내 브랜드 중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뭔가 다른 옷’을 찾다가 색감이 알록달록한 북유럽 브랜드에 꽂혔다. 해외 사이트에서 ‘직구’를 해서 블로그에서 엄마들에게 돌복을 대여해주다가, 결국엔 아동복을 직접 만들게 됐다. 아이를 들쳐 매고 서울 남대문 시장을 돌며 원단을 구해 옷을 만들었다. 순전히 입소문으로 블로그, 카페, 온라인, 오프라인숍으로 베베드피노 사업이 확장됐다.”-어려운 일은 없었나.“매 순간 늘 많았다. 베베드피노를 입고 자란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아이스비스킷을 입을 줄 알았는데 10∼20%도 연결되지 않아 2∼3년 고전했다. 책가방을 아이스비스킷의 대표 아이템으로 삼고 노력했더니 언젠가부터는 눈에 보이는 아이들마다 우리 가방을 들고 다녔다.”-패션 감각은 타고났나.“부모님이 패션 일을 해서 자연스럽게 보는 눈이 남달랐던 것 같다. 친구들이 쇼핑 갈 때면 ‘네가 골라주는 걸 제일 잘 입는다’며 항상 데려갔다.”-어머니는 어떤 분이었나.“엄마가 진짜 멋진 분이셨다. 부모님 사업이 어려워져 대구로 내려가 출판사와 화장품회사 방문판매를 하셨는데 실적이 늘 톱이었다. 자주 손님을 집에 초대해 10인분, 20인분 뚝딱 밥을 차려내고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게 했다. 엄마의 생활력과 배포를 어려서부터 배웠다.”-책을 읽어보니 더캐리에 공동대표로 합류한 남편의 ‘외조’도 놀라웠다.“남편은 삼성디자인학교(SADI)를 수석으로 졸업한 성실의 아이콘이다. 난 지방대 출신에 해외유학파도 아니어서 스펙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학창시절부터 알고 지낸 남편은 늘 ‘너만큼 패션을 아는 사람은 없다’고 칭찬해줬다. 엄마가 암투병할 때엔 신혼 옥탑방 살림인데도 모시고 살자고 했고, 회사를 일부러 옮겨 마련한 퇴직금으로 엄마 간병비를 댔다. 이듬해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남편이 참 고맙다.”-일을 쉬다가 창업했다고 책에 썼다.“엄마를 간병하면서 일을 쉬고 아이를 낳았다. 돌이켜보면 육아의 시간이 참 답답하고 힘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가 스스로와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가장 많이 생각한 시간이었다. 지금의 ‘베베드피노’가 탄생한 때다.”-처음 다닌 회사는 어떤 회사였나.“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패션 수입회사에 패션 머천다이저로 들어갔다. 작은 회사여서 기획에서부터 마케팅, 판매까지 다 했다. 그런데 그때 진짜 일을 많이 배웠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무 대기업만 가려 하지 말고, 나중에 내 일을 할 수 있는 걸 배운다는 마음으로 직장을 고르라고. 난 내가 기획한 제품에 대해 고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해 현장 판매지원도 자진해 나갔다.”-현재 ‘더캐리’ 사업은.“지난해 매출이 1500억 원이었다. 국내 206개 매장, 중국에 20여 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미국과 일본 진출도 모색 중이다. 지난해엔 ‘푸마 키즈’ 사업도 시작했다. 건강기능식품 등 패밀리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요즘 일과는.“퇴근 후 저녁 약속은 거의 잡지 않는다. 대신 운동하고 무조건 밤 9시 반에는 잠자리에 드는 루틴이다. 여행을 가면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물멍’이나 ‘하늘멍’한다. 그럴수록 좋은 사업 아이디어가 많이 떠오른다. 건강한 일상이 건강한 생각을 낳는다.”-‘골든걸’ 독자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요즘엔 엄마 아빠의 마음으로 만들어지는 브랜드가 진짜 많다. ‘더캐리’도 육아가 없었다면 태어날 수 없었다.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으면 해서 책을 썼다. 시작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건 자신을 믿는 마음과 열정이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2025-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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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흙으로 빚은 명화, 복제가 기억이 되다

    이곳이야말로 일찍이 앙드레 말로가 말했던 ‘상상의 박물관’이 아닐까. 일본 도쿠시마현 나루토시 오츠카국제미술관에서 여러 생각이 휘몰아쳤다. 일본에서 가장 유속(流速)이 빨라 신비로운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 나루토 해협 부근에 자리한 이 거대한 미술관은 ‘세라믹 복제의 낙원’이다. 이탈리아 시스티나 대성당 천장화와 벽화에서부터 프랑스 파리 오랑주리미술관에 있는 클로드 모네의 ‘수련’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0여 점의 세계 명화가 실제 크기의 도판(陶板) 명화로 재현돼 있다. 말로가 사진 복제의 시대를 예견하며 세계 명화를 한 데 모으는 것을 상상한 것을 이 미술관은 100% 복제품으로 구현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미술관지난달 21일 오전 7시 인천공항에서 출발해 1시간 40분 후 일본 도쿠시마 공항에 내렸다. 렌터카로 곧장 오츠카국제미술관으로 향했다. 지하 3층부터 2층까지 전시가 4km 관람로로 이어지는 2만 9412㎡ 규모의 장대한 미술관이다. 가히 ‘걸어서 감상하는 세계 미술사’다.도판은 흙을 이용해 구운 도기 판을 뜻한다. 1000도 이상의 고온에 구워 원작을 재현한 것이 ‘도판 명화’다. 이 미술관은 ‘포카리스웨트’ 음료로 우리에게 친숙한 오츠카 제약그룹의 창립 75주년 기념사업으로 1998년 문을 열었다. 오츠카 그룹은 나루토 해협의 흰 모래를 활용해 타일을 만드는 ‘오츠카 오미 도업 주식회사’를 1973년 세웠다가 바로 그해 제1차 오일쇼크를 맞았다. 석유 가격이 급등해 각종 건설이 전면 중지되자 머리를 맞대 내놓은 대안이 ‘도판으로 미술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원화 본연의 크기로 복제해 대형 미술 도판을 만든 건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미술관을 방문하기 전에는 솔직히 큰 기대가 없었다. ‘오리지널이 아니잖아.’ 그런데 반나절을 보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이 미술관은 오츠카 오미 도업㈜의 도판 기술로 원작의 느낌을 구현해 교과서에 나오는 전 세계의 명화, 정확히는 명화 복제품을 ‘원스톱’ 감상할 수 있게 했다. 교복을 입은 학생부터 노년의 관람객까지 실물 크기의 복제품을 자유롭게 보고 만진다. 예나 지금이나 전 세계를 다니며 원본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이곳은 ‘예술 접근성의 민주화’를 실현했다는 평가가 나온다.원작 소장 기관들은 저작권과 색감, 촬영방식 등에 대한 엄격한 계약을 맺고 시장 가치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교육·문화적 접근을 허용한다. 그 결과 오츠카 그룹의 고향인 일본의 시골에 있는 이 미술관에 지난해 57만 9000명이 다녀갔다.>> 복제의 미술관이 던지는 질문들발터 벤야민은 저서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원작이 가진 ‘아우라’의 상실을 예견했다. 예술이 대량복제되면 진품의 유일무이한 역사성과 장소성이 사라진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오츠카국제미술관은 바로 그 경계의 지점에 서 있다. 원작의 향기와 장소성은 없지만, 아우라의 부재가 오히려 새로운 사유를 일으킨다. 복제된 이미지 속을 걷다 보면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말로가 품었던 생각을 이 미술관은 도판 기술로 현실화한 셈이다.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개념도 관람 내내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는 복제가 현실을 모방하는 단계를 넘어 현실을 대체하는 상태, 즉 ‘시뮬라크르’로 나아간다고 보았다. 오츠카국제미술관은 벤야민의 원작의 부재, 즉 아우라의 소멸을 기술로 메우는 시뮬라크르적 공간이 아닐까.오츠카국제미술관의 철학은 분명하다. 전쟁, 화재, 환경오염 등에 예술품의 원작은 훼손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수 있을까. 2000년 이상 지나도 색과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는 도판 명화는 이런 불안에 정면으로 맞선다. 원작의 모습을 보존한 복제품이 미래의 기억 장치가 되겠다는 것이다.이 미술관을 만든 오츠카그룹은 기본적으로 기술기업이다. 그들의 복제 과정은 예술적 재현이라기보다는 도판 기술의 정밀함을 과시하는 산업적 프로젝트에 가깝다. 여기에서 또 질문이 던져진다. 기술적 완벽함이 예술적 진정성을 대체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진 것인지도 모른다.>> 야외 정원에 설치된 모네의 ‘수련’오츠카국제미술관은 다양한 실험을 한다. 일례로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 원작은 프랑스 파리 오랑주리미술관의 타원형 방에 전시돼 있지만 오츠카국제미술관은 이 작품의 도판을 야외 정원에 설치했다. 이 정원에서는 모네가 생전에 그토록 그리고 싶어 했던 푸른 수련을 10월 하순에도 볼 수 있었다. 분명히 원작은 아니지만, 또 다른 감각의 확장을 제공하고 있었다.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작품 7점을 한곳에 모은 전시구역은 이 미술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구역 중 하나다. 1945년에 소실된 한 점을 비롯해 현재 각국에 나뉘어 소장된 작품들의 도판 명화를 한데 모아 놓았다.‘걸어서 세계 미술사 여행’은 계속되며 이따금씩 개인적 경험과 맞닻는다.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미술관에서 봤던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봤던 교회를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오베르의 교회’…. 추억이 깃든 그곳들에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비록 복제품이지만 세계의 명화들을 한 자리에서 감상하는 경험은 새로웠다. 이곳에서 ‘미메시스(모방)’ 개념은 세상을 경험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승화되는 것 같았다.관람을 마치고 뮤지엄숍에 들러 미술관 입장료보다 비싼 도판 명화 기념품을 세 개나 샀다. 소실된 고흐의 ‘해바라기’, 고흐의 ‘오베르의 교회’(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이날 유독 마음에 들었던 휴 골드윈 리비에르의 ‘에덴의 정원’이다. ‘에덴의 정원’의 경우 오츠카국제미술관은 런던 길드홀 아트 갤러리의 소장품을 브리지먼 아트 라이브러리의 자료를 이용해 도판으로 재현했다고 명확히 표기함으로써 복제의 윤리를 제도화했다. 복제가 단순한 재생산이 아니라, 기억의 기술로 변모한 것이다.언젠가 영국에 가서 ‘에덴의 정원’의 원작을 보고, 그림 속 장소로 추정되는 공원을 걸어보고 싶다. 그리고 내 인생의 화양연화 시절에 가보았던 프랑스 오베르 교회를 꼭 다시 가보고 싶다. 복제의 공간을 걷는 일은 원본의 빈자리를 채우는 예술의 또 다른 길을 목도하는 일이었다. ‘복제의 신전’이라는 오츠카국제미술관이 내게 준 선물이다. 오츠카국제미술관 관람 정보위치: 일본 시코쿠섬 도쿠시마현 나루토시 나루토초 나루토공원 내개관 시간: 오전 9시 30분∼오후 5시 (월요일 휴관)입장료: 일반 3300엔/대학생 2200엔/초중고생 550엔나루토=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2025-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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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과 자연이 함께 차린 식탁, 용인 ‘포도와’ 기부 만찬

    해가 천천히 산등성이 뒤로 물러나며 포도넝쿨 사이로 금빛이 흘렀다. 빛은 유리잔에 닿아 별무리처럼 반짝였다. ‘포도와’에서의 만찬은 그렇게 시작됐다.‘포도와’는 2019년 경기 용인시 백암면에 문을 연 800평 규모의 유기농 포도농장이다. 김민아 대표가 남편과 함께 도시의 삶을 내려놓고 귀농해 국내에서는 드문 지중해 품종 포도나무 68주를 기르고 있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건강해지는 농장’을 꿈꾸며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토양과 생명의 순환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다. 포도 시즌이면 포도 따기 등 각종 체험행사를 연다.지난달 12일, 이곳에서는 특별한 자선 만찬이 열렸다. 4년째 이어온 기부 만찬 행사로, 올해의 주제는 ‘팜 파티(Farm Party·농장 파티)’였다. ‘포도와’는 그동안 환경 보호와 노숙인 지원 등에 수익금을 나눠왔고, 올해는 신생아 위탁 기관에 전액을 기부한다.농장 한가운데 놓인 긴 테이블에는 대지의 색을 닮은 린넨 테이블보가 깔려 있었다. 그 위로 포도송이와 넝쿨, 마른 수국, 허브 잎이 놓였다. 황혼이 깔리자 양초와 샹들리에의 불빛이 와인잔과 유리병에 반사돼 포도밭 전체가 따뜻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손님들은 포도 향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며 금세 어우러졌다. 복합문화공간 대표, 도예가, 원예 전문가, 의사 등 하는 일은 달라도 정원과 미식에 대한 관심은 한결같이 높았다. 한 손님이 데려온 ‘시월이’라는 이름의 강아지, 밤의 포도 농장을 아장아장 걷던 오리들도 이 특별한 순간을 함께 한 생명체들이었다.이날의 코스 메뉴는 포도와 포도잎이 주제였다. 장미향과 은은한 산미가 어우러진 ‘머스캣 함부르크’, 고급스러운 향의 ‘알렉산드리아’ 등 지중해 품종의 포도들이 다양한 요리로 변주됐다.머스캣 함부르크 포도즙에 향신료를 더해 끓인 따뜻한 뱅쇼가 가장 먼저 나왔다. 입안 가득 번지는 온기가 마음까지 덥혔다. 이어서 알렉산드리아와 머스캣 함부르크 포도로 만든 처트니(과일 절임), 단새우·관자·청포도를 곁들인 세비체(생선회 무침), 건포도를 올린 땅콩호박 스프가 이어졌다.메인 요리는 레몬 버터 소스를 곁들인 프랑스식 가자미구이. 머스캣 함부르크 포도잎으로 싼 돌마(포도잎으로 고기와 쌀 등을 싸서 쪄낸 음식)가 함께 나오자 손님들은 “맛있다”고 탄성을 질렀다. 이어진 적포도 소스 돼지고기에는 개복숭아 트러플 절임이 곁들여져 향긋함이 더해졌다. 포도와 치즈 플래터, 그리고 포도 소르베와 파운드 케이크가 식사의 여운을 마무리했다.만찬이 끝날 즈음엔 깜짝 이벤트도 있었다. 김 대표가 손님들에게 가위를 나눠주며 밤의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게 한 것. 이날이 올해 포도와 농장의 마지막 포도 수확날이었다. 다들 잠시 어린아이가 된 듯 천진난만하게 포도를 땄다.이날 테이블 스타일링은 ‘윤릴리안’, 꽃 디자인은 ‘라플롱트 스튜디오’, 음식은 ‘소요살롱’이 협업했다. 행사를 준비한 이들은 “밤의 향기가 포도밭을 감싸고 촛불 아래 웃음이 번질 때마다 그동안의 수고로움이 고요한 기쁨으로 바뀌는 걸 느꼈다”며 “지치고 외로운 순간에 마음 속 포도 한 알을 터뜨려 그 향기로 위로받는 시간이길 바란다”고 했다. 그 말이 가슴에 포도알처럼, 보석처럼 박혔다. ‘오늘의 이 포도 향기가 살면서 든든한 힘이 되겠구나.’포도와의 자선 만찬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었다. 인간과 자연이 다시 관계를 맺는 방식, 느리게 익어가는 삶의 미학을 보여주는 작은 축제였다. 음식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나눔이 되는 자리였다. 근사한 농장 파티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의 땅, 우리의 계절에서도 가능했다. 기후위기 시대에 농업을 근간으로 예술적 농장 모델을 실험하는 용인의 작은 포도 농장의 진심이 깊이 느껴졌다.용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2025-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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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암미술관 ‘옛돌정원’과 ‘희원’, 이우환 작가의 신작 상설 전시

    호암미술관이 그동안 관람객에게 공개하지 않던 호수 주변 ‘옛돌정원’을 최근 공개하면서 이우환 작가의 조각 설치 작품 세 점을 새롭게 선보였다. 또 전통정원 ‘희원’에도 이 작가의 신작 ‘실렌티움(묵시암)’을 전시했다.삼성문화재단은 이 작가의 작품을 오랜 기간 수집하고 소장해왔으나 2003년 호암갤러리와 로댕갤러리 회고전 이후 작가의 예술 세계를 본격적으로 조망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호암미술관의 유려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이번 프로젝트는 이 작가가 직접 제안한 것으로, 국제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그의 예술 세계를 수도권에서 상시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는 것이 호암미술관 측의 설명이다.이번에 처음 일반에 공개된 옛돌정원은 호암미술관 앞 너른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얕은 구릉지 산책로에 조성됐다. 이곳에 설치된 이 작가의 대형 신작 세 점은 철과 돌을 통해 문명과 자연의 만남을 보여준다.지름 5m의 스테인레스스틸 링 작품인 ‘관계항-만남’은 향후 링 양쪽을 마주 보는 두 개의 돌이 더해져 완성될 예정이다. 직선으로 뻗은 20m 길이의 슈퍼 미러 스테인레스 스틸 판과 돌로 이뤄진 ‘관계항-하늘길’은 거울처럼 반사되는 작품 표면에 비친 하늘을 보며 하늘 위를 걷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위쪽 산책로에 설치된 ‘관계항-튕김’은 튕겨 나갈 듯 구부러진 두꺼운 철판과 두 개의 자연석이 역동적 균형을 이룬다.전통정원 ‘희원’에 설치된 ‘실렌티움(묵시암)’은 실내 작품 세 점과 야외 설치 한 점으로 구성됐다. 실렌티움(Silentium)은 라틴어로 ‘침묵’, 묵시암(默視庵)은 ‘고요함 속에서 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작가는 “내 작품은 보자마자 감각이나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생동감이나 에너지가 중요하다”며 “관람객이 침묵 속에 머물며 세상 전체가 관계와 만남, 서로의 울림과 호흡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용인=글 사진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2025-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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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암미술관 ‘비밀의 정원’이 열렸다…이우환과 정영선의 ‘무위(無爲)’[김선미의 시크릿가든]

    가는 세월 붙잡을 수 없는 게 유독 아쉬운 계절이다. 단풍이 절정인 지금, 오랫동안 닫혀 있다가 드디어 열린 ‘비밀의 정원’이 있다. 경기 용인시 처인구 호암미술관에 이달 4일 문을 연 ‘옛돌정원’이다. 호암미술관은 잔잔한 호수를 향해 있다. 에버랜드와 호암미술관을 조성할 때 만들어진 인공 호수로, 넓이가 약 3만6000평이라 ‘삼만육천지’로 불린다. 삼성 창업주 고(故) 이병철 회장의 호를 따 ‘호암호’로도 불린다. 매표소에서 이 호수를 따라 걸으면 주차장이 나오는데 안쪽은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호암미술관의 전통정원 ‘희원’처럼 일찍이 만들어 두고도 공개하지 않던 ‘비밀의 정원’. 그곳이 마침내 열렸다.계기는 세계적 작가 이우환(89)의 제안이었다. 그는 호암미술관의 유려한 자연을 배경으로 신작을 선보이고 싶다는 뜻을 미술관 측에 전했다. 이에 홍라희 리움미술관 명예관장은 “많은 이들이 언제든지 (이우환) 선생님의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한다”며 정원 개방을 결정했다.그렇게 열린 옛돌정원에는 이우환의 ‘관계항(關係項)’ 시리즈 신작 세 점이 설치됐다. 동선상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건 지름 5m의 스테인리스 스틸 링 작품인 ‘관계항-만남’이다. 그런데 아직 미완성이다. 작가는 문명과 자연의 만남을 구현할 두 개의 돌을 여전히 찾고 있다고 한다. 어떤 돌이 놓일까. 사람 간의 관계, 사람과 사물의 관계는 얼마나 많은 인연과 우연의 결과일까. 이 정원과 작품의 만남이 그러했듯이….정원은 조경가 정영선(84)이 맡았다. 그는 호암미술관 희원도 조성한 한국을 대표하는 1세대 조경가다. 옛돌정원이 자리 잡은 지형은 호수 건너편 루이즈 부르주아의 ‘거미’ 조각이 내려다보이는 완만한 구릉지. 그의 조경 철학인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음)’를 펼치기에 제격인 장소다.정원의 억새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노랗게 잎이 물든 생강나무와 히어리, 빨간 열매를 매단 가막살나무와 쑥부쟁이는 가을의 농익은 색감을 전했다.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관계항-만남’의 철제 링이 단풍을 반사해 비추고 있었다. 그 순간, ‘내가 걷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와 함께 걷는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것이 노자가 말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이 아닐까. 억지로 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하게 두는 것.이우환은 “버리고 비우면 보다 큰 무한이 열린다”고 했다. 그의 말은 노자의 ‘도덕경’ 제 48장을 떠올리게 한다. ‘배움을 행하면 날마다 보태지고, 도를 행하면 날마다 덜어진다. 덜고 또 덜어내면 무위의 지경에 이르는구나. 무위를 행하면 되지 않는 일이 없다. 천하를 차지하는 것은 항상 일거리를 없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거리를 만들면 천하를 차지할 수가 없다.’서울대 미대에 입학했다가 일본 도쿄 니혼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이우환은 마르틴 하이데거와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 니시다 기타로의 장소론 등에 심취했다. 1960년대에는 ‘모노하’(物派) 운동을 주도하며 ‘사물을 만들지 않고 존재하게 둔다’는 태도를 견지해왔다.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관계와 여백 속에서 세계의 질서를 드러내려는 시도였다. 그의 대표작 ‘관계항’은 ‘존재는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는 사유에서 출발한다. 돌과 철, 빛과 바람, 관람자까지 모두 하나의 관계항이 된다.이우환의 철은 하늘을 비추고, 정영선의 억새는 바람을 드러낸다. 둘의 관계는 ‘무위’ 즉, ‘하지 않음’에서 만난다. 정영선의 ‘검이불루 화이불치’는 자연의 리듬을 존중하고 억지로 꾸미지 않는 데 있다. 이우환이 비움을 통해 관계성을 추구하는 것과 닮았다.더 걷자 ‘관계항-하늘길’이 나타났다. 청명한 가을 하늘을 비추는 20m 길이의 직사각형 스테인리스 스틸 판 위에 서니 마치 하늘을 걷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작품 ‘관계항-튕김’은 휘어진 철판과 두 개의 돌이 마주 선 형태. 낙엽이 내려앉은 바닥의 하얀 자갈을 밟아보니 걸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흰 눈밭의 정적 속 에너지가 이런 걸까. 길 건너 전통정원 ‘희원’에는 이우환의 또 다른 신작 ‘실렌티움(Silentium·묵시암)’이 설치됐다. 실렌티움은 라틴어로 침묵, 묵시암은 ‘고요함 속에 본다’는 뜻이다. 빛과 어둠, 실내와 실외,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것이 만난다. “침묵 속에 머물며 세상 전체가 관계와 만남, 서로의 울림과 호흡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 작가가 관람객에게 바라는 바다. 옛돌정원에서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걷다가 호수를 향해 앉아 고요하게 같은 방향을 응시했다.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종종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해 그토록 서두르는 걸까. 옛돌정원에는 억지로 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하게 두는 걸음들이 있었다. 걷고, 멈추고, 다시 흘러갔다. 이우환의 ‘비움’이 정영선의 ‘절제’ 위에서 빛을 얻고 있었다. 정원은 예술과 조경이 서로를 허락하는 무위(無爲)의 공간이었다.용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202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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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외 정원으로 나온 모네의 ‘수련’…우리 시대 복제의 의미는? [김선미의 시크릿가든]

    이곳이야말로 일찍이 앙드레 말로가 말했던 ‘상상의 박물관’이 아닐까. 일본 도쿠시마현 나루토시 오츠카국제미술관에서 여러 생각이 휘몰아쳤다. 일본에서 가장 유속(流速)이 빨라 신비로운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 나루토 해협 부근에 자리한 이 거대한 미술관은 ‘세라믹 복제의 낙원’이다.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에서부터 프랑스 파리 오랑주리미술관에 있는 클로드 모네의 ‘수련’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0여 점의 세계 명화가 실제 크기의 도판(陶板) 명화로 재현돼 있다. 말로가 사진 복제의 시대를 예견하며 세계 명화를 한 데 모으는 것을 상상한 것을 이 미술관은 100% 복제품으로 구현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미술관지난달 21일 오전 7시 인천공항에서 출발해 1시간 40분 후 일본 도쿠시마 공항에 내렸다. 렌터카로 곧장 오츠카국제미술관으로 향했다. 지하 3층부터 2층까지 전시가 4km 관람로로 이어지는 2만 9412㎡ 규모의 장대한 미술관이다. 가히 ‘걸어서 감상하는 세계 미술사’다. 도판은 흙을 이용해 구운 도기 판을 뜻한다. 1000도 이상의 고온에 구워 원작을 재현한 것이 ‘도판 명화’다. 이 미술관은 ‘포카리스웨트’ 음료로 우리에게 친숙한 오츠카 그룹의 창립 75주년 기념사업으로 1998년 문을 열었다. 오츠카 그룹은 나루토 해협의 흰 모래를 활용해 타일을 만드는 ‘오츠카 오미 도업 주식회사’를 1973년 세웠다가 바로 그해 제1차 오일쇼크를 맞았다. 석유 가격이 급등해 각종 건설이 전면 중지되자 머리를 맞대 내놓은 대안이 ‘도판으로 미술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원화 본연의 크기로 복제해 대형 미술 도판을 만든 건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미술관을 방문하기 전에는 솔직히 큰 기대가 없었다. ‘오리지널이 아니잖아.’ 그런데 반나절을 보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이 미술관은 오츠카 오미 도업㈜의 도판 기술로 원작의 느낌을 구현해 교과서에 나오는 전 세계의 명화, 정확히는 명화 복제품을 ‘원스톱’ 감상할 수 있게 했다. 교복을 입은 학생부터 노년의 관람객까지 실물 크기의 복제품을 자유롭게 보고 만진다. 예나 지금이나 전 세계를 다니며 원본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이곳은 ‘예술 접근성의 민주화’를 실현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원작 소장 기관들은 저작권과 색감, 촬영방식 등에 대한 엄격한 계약을 맺고 시장 가치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교육·문화적 접근을 허용한다. 그 결과 오츠카 그룹의 고향인 일본의 시골에 있는 이 미술관에 지난해 57만 9000명이 다녀갔다.●복제의 미술관이 던지는 질문들발터 벤야민은 저서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원본이 가진 ‘아우라’의 상실을 예견했다. 예술이 대량복제되면 진품의 유일무이한 역사성과 장소성이 사라진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오츠카국제미술관은 바로 그 경계의 지점에 서 있다. 원작의 향기와 장소성은 없지만, 아우라의 부재가 오히려 새로운 사유를 일으킨다. 복제된 이미지 속을 걷다 보면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말로가 품었던 꿈을 이 미술관은 도판 기술로 현실화한 셈이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개념도 관람 내내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는 복제가 현실을 모방하는 단계를 넘어 현실을 대체하는 상태, 즉 ‘시뮬라크르’로 나아간다고 보았다. 오츠카국제미술관은 벤야민의 원작의 부재, 즉 아우라의 소멸을 기술로 메우는 시뮬라크르적 공간이 아닐까.오츠카국제미술관의 철학은 분명하다. 전쟁, 화재, 환경오염 등에 예술품의 원작은 훼손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수 있을까. 2000년 이상 지나도 색과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는 도판 명화는 이런 불안에 정면으로 맞선다. 원작의 모습을 보존한 복제품이 미래의 기억 장치가 되겠다는 것이다.이 미술관을 만든 오츠카그룹은 기본적으로 기술기업이다. 그들의 복제 과정은 예술적 재현이라기보다는 도판 기술의 정밀함을 과시하는 산업적 프로젝트에 가깝다. 여기에서 또 질문이 던져진다. 기술적 완벽함이 예술적 진정성을 대체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진 것인지도 모른다. ●야외 정원에 설치된 모네의 ‘수련’오츠카국제미술관은 다양한 실험을 한다. 일례로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 원작은 프랑스 파리 오랑주리미술관의 타원형 방에 전시돼 있지만 오츠카국제미술관은 이 작품의 도판을 야외 정원에 설치했다. 이 정원에서는 모네가 생전에 그토록 그리고 싶어 했던 푸른 수련을 10월 하순에도 볼 수 있었다. 분명히 원작은 아니지만, 또 다른 감각의 확장을 제공하고 있었다.한편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작품 7점을 한곳에 모은 전시구역은 이 미술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구역 중 하나다. 1945년에 소실된 한 점을 비롯해 현재 각국에 나뉘어 소장된 작품들의 도판 명화를 한데 모아 놓았다. ‘걸어서 세계 미술사 여행’은 계속되며 이따금씩 개인적 경험과 맞닻는다.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미술관에서 봤던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봤던 교회를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오베르의 교회’…. 개인적 추억이 깃든 그곳들에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비록 복제품이지만 세계의 명화들을 한 자리에서 감상하는 경험은 새로웠다. 이곳에서 ‘미메시스(모방)’ 개념은 세상을 경험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승화되는 것 같았다. 관람을 마치고 뮤지엄숍에 들러 미술관 입장료보다 비싼 도판 명화 기념품을 세 개나 샀다. 소실된 고흐의 ‘해바라기’, 고흐의 ‘오베르의 교회’(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이날 유독 마음에 들었던 휴 골드윈 리비에르의 ‘에덴의 정원’이다. ‘에덴의 정원’의 경우 오츠카국제미술관은 런던 길드홀 아트 갤러리의 소장품을 브리지먼 아트 라이브러리의 자료를 이용해 도판으로 재현했다고 명확히 표기함으로써 복제의 윤리를 제도화했다. 복제가 단순한 재생산이 아니라, 기억의 기술로 변모한 것이다. 언젠가 영국에 가서 ‘에덴의 정원’의 원작을 보고, 그림 속 장소로 추정되는 공원을 걸어보고 싶다. 그리고 내 인생의 화양연화 시절에 가보았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 교회를 꼭 다시 가보고 싶다. 복제의 공간을 걷는 일은 원본의 빈자리를 채우는 예술의 또 다른 길을 목도하는 일이었다. ‘복제의 신전’이라는 오츠카국제미술관이 내게 준 선물이다. 나루토=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2025-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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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만원으로 시작해 연 매출 1500억 일군 경단녀 성공 스토리

    국내 아동복 신화를 일군 ‘더캐리’ 이은정 대표(45)가 자기계발 에세이 ‘캐리 온: 10년 후, 꿈꾸던 내가 되었다(에피케)’를 최근 펴냈다. 25만 원으로 사업을 시작해 연 매출 1500억 원을 올리는 글로벌 패션그룹을 일군 기록이다. 2010년 블로그 ‘솔맘 스토리’가 엄마들 사이에서 유명해지면서 2014년 유아동복 ‘베베드피노’ 법인을 설립한 뒤, 주니어 브랜드 ‘아이스비스킷’, 키즈 편집숍 ‘캐리마켓’ 등을 만들어온 여성 창업가로서의 궤적을 담았다. 두 아이를 둔 워킹맘인 이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업의 시작은.“첫째 아이 돌잔치 때 입힐 옷을 찾는데 국내 브랜드 중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뭔가 다른 옷’을 찾다가 색감이 알록달록한 북유럽 브랜드에 꽂혔다. 해외 사이트 ‘직구’를 해서 블로그를 통해 돌복을 대여해주다가, 결국엔 아동복을 직접 만들게 됐다. 아이를 들쳐 매고 서울 남대문 시장을 돌며 원단을 구해 옷을 만들었다. 순전히 입소문으로 블로그, 카페, 온라인, 오프라인숍으로 베베드피노 사업이 확장됐다.”-어려운 일은 없었나.“매 순간 늘 많았다. 베베드피노를 입고 자란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아이스비스킷을 입을 줄 알았는데 10~20%도 연결되지 않아 몇 년을 고전했다. 책가방을 아이스비스킷의 대표 아이템으로 삼고 노력했더니 언젠가부터는 눈에 보이는 아이들마다 우리 가방을 들고 다녔다.”-패션 감각은 타고났나.“부모님이 패션 일을 해서 자연스럽게 보는 눈이 남달랐던 것 같다. 친구들이 쇼핑갈 때면 ‘네가 골라주는 걸 제일 잘 입는다’며 항상 데려갔다.”-어머니는 어떤 분이었나.“엄마가 진짜 멋진 분이셨다. 부모님 사업이 어려워져 서울 살다가 갑자기 대구로 내려갔다. 엄마가 출판사와 화장품회사 방문판매를 했는데 실적이 늘 톱이었다. 자주 손님을 집에 초대해 10인분, 20인분 뚝딱 밥을 차려내고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게 했다. 엄마의 생활력과 배포를 어려서부터 배웠다.”-책을 읽어보니 더캐리에 공동대표로 합류한 남편의 ‘외조’도 놀라웠다.“남편은 삼성디자인교육원(SADI)을 수석으로 졸업한 ‘성실의 아이콘’이다. 난 지방대 출신인데다 해외유학파도 아니어서 스펙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학창시절부터 알고 지낸 남편은 늘 ‘너만큼 패션을 아는 사람은 없다’고 칭찬해줬다. 엄마가 암투병할 때엔 신혼 옥탑방 살림인데도 모시고 살자고 했고, 회사를 일부러 옮겨 마련한 퇴직금으로 엄마 간병비를 댔다. 이듬해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남편이 참 고맙다.”-‘경단녀’(경력단절여성)였나.“첫째 낳고 엄마 간병하고 둘째 낳기까지 4년간 경단녀였다. 경단녀였던 시절, ‘더캐리’의 시작인 ‘베베드피노’ 브랜드가 탄생했다. 돌이켜보면 육아의 시간이 참 답답하고 힘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가 스스로와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가장 많이 생각한 시간이었다.”-처음 다닌 회사는 어떤 회사였나.“지방대를 졸업하고 작은 패션 수입회사에 머천다이저로 들어갔다. 작은 회사여서 기획부터 마케팅, 판매까지 다 했다. 그런데 그때 진짜 일을 많이 배웠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무 대기업만 가려 하지 말고, 나중에 내 일을 할 수 있는 걸 배운다는 마음으로 직장을 고르라고. 난 내가 기획한 제품에 고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해 현장 판매지원도 자진해 나갔다.”-현재 ‘더캐리’ 사업은.“지난해 매출이 1500억 원이었다. 국내 206개 매장, 중국에 20여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미국과 일본 진출도 모색 중이다. 지난해엔 ‘푸마 키즈’ 사업도 시작했다. 건강기능식품 등 패밀리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요즘 일과는.“퇴근 후 저녁 약속은 거의 잡지 않는다. 대신 운동하고 무조건 밤 9시 반에는 잠자리에 드는 루틴이다. 여행을 가면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물멍’이나 ‘하늘멍’한다. 그럴수록 좋은 사업 아이디어가 많이 떠오른다. 건강한 일상이 건강한 생각을 낳는다.”-동아일보 독자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요즘엔 엄마 아빠의 마음으로 만들어지는 브랜드가 진짜 많다. ‘더캐리’도 육아가 없었다면 태어날 수 없었다.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으면 해서 책을 썼다. 시작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건 자신을 믿는 마음과 열정이다.”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2025-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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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치고 외로울 때 마음 속 포도 한 알을 터뜨려 위로받기를” [김선미의 시크릿가든]

    해가 천천히 산등성이 뒤로 물러나며 포도넝쿨 사이로 금빛이 흘렀다. 빛은 유리잔에 닿아 별무리처럼 반짝였다. ‘포도와’에서의 만찬은 그렇게 시작됐다.‘포도와’는 2019년 경기 용인시 백암면에 문을 연 800평 규모의 유기농 포도농장이다. 김민아 대표가 남편과 함께 도시의 삶을 내려놓고 귀농해 국내에서는 드문 지중해 품종 포도나무 68주를 기르고 있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건강해지는 농장’을 꿈꾸며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토양과 생명의 순환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다. 포도 시즌이면 포도 따기 등 각종 체험행사를 연다. 지난달 12일, 이곳에서는 특별한 자선 만찬이 열렸다. 4년째 이어온 기부 만찬 행사로, 올해의 주제는 ‘팜 파티(Farm Party·농장 파티)’였다. ‘포도와’는 그동안 환경 보호와 노숙인 지원 등에 수익금을 나눠왔고, 올해는 신생아 위탁 기관에 전액을 기부한다.농장 한가운데 놓인 긴 테이블에는 대지의 색을 닮은 린넨 테이블보가 깔려 있었다.그 위로 포도송이와 넝쿨, 마른 수국, 허브 잎이 놓였다. 황혼이 깔리자 양초와 샹들리에의 불빛이 와인잔과 유리병에 반사돼 포도밭 전체가 따뜻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손님들은 포도 향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며 금세 어우러졌다. 복합문화공간 대표, 도예가, 원예 전문가, 의사 등 하는 일은 달라도 정원과 미식에 대한 관심은 한결같이 높았다. 한 손님이 데려온 ‘시월이’라는 이름의 강아지, 밤의 포도 농장을 아장아장 걷던 오리들도 이 특별한 순간을 함께 한 생명체들이었다.이날의 코스 메뉴는 포도와 포도잎이 주제였다. 장미향과 은은한 산미가 어우러진 ‘머스캣 함부르크’, 고급스러운 향의 ‘알렉산드리아’ 등 지중해 품종의 포도들이 다양한 요리로 변주됐다.머스캣 함부르크 포도즙에 향신료를 더해 끓인 따뜻한 뱅쇼가 가장 먼저 나왔다. 입안 가득 번지는 온기가 마음까지 덥혔다. 이어서 알렉산드리아와 머스캣 함부르크 포도로 만든 처트니(과일 절임), 단새우·관자·청포도를 곁들인 세비체(생선회 무침), 건포도를 올린 땅콩호박 스프가 이어졌다.메인 요리는 레몬 버터 소스를 곁들인 프랑스식 가자미구이. 머스캣 함부르크 포도잎으로 싼 돌마(포도잎으로 고기와 쌀 등을 싸서 쪄낸 음식)가 함께 나오자 손님들은 “맛있다”고 탄성을 질렀다. 이어진 적포도 소스 돼지고기에는 개복숭아 트러플 절임이 곁들여져 향긋함이 더해졌다. 포도와 치즈 플래터, 그리고 포도 소르베와 파운드 케이크가 식사의 여운을 마무리했다.만찬이 끝날 즈음엔 깜짝 이벤트도 있었다. 김 대표가 손님들에게 가위를 나눠주며 밤의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게 한 것. 이날이 올해 포도와 농장의 마지막 포도 수확날이었다. 다들 잠시 어린아이가 된 듯 천진난만하게 포도를 땄다.이날 테이블 스타일링은 ‘윤릴리안’, 꽃 디자인은 ‘라플롱트 스튜디오’, 음식은 ‘소요살롱’이 협업했다. 행사를 준비한 이들은 “밤의 향기가 포도밭을 감싸고 촛불 아래 웃음이 번질 때마다 그동안의 수고로움이 고요한 기쁨으로 바뀌는 걸 느꼈다”며 “지치고 외로운 순간에 마음 속 포도 한 알을 터뜨려 그 향기로 위로받는 시간이길 바란다”고 했다. 그 말이 가슴에 포도알처럼, 보석처럼 박혔다. ‘오늘의 이 포도 향기가 살면서 든든한 힘이 되겠구나.’ 포도와의 자선 만찬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었다. 인간과 자연이 다시 관계를 맺는 방식, 느리게 익어가는 삶의 미학을 보여주는 작은 축제였다. 음식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나눔이 되는 자리였다. 근사한 농장 파티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의 땅, 우리의 계절에서도 가능했다. 기후위기 시대에 농업을 근간으로 예술적 농장 모델을 실험하는 용인의 작은 포도 농장의 진심이 깊이 느껴졌다.용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2025-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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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를 품은 돌봄의 숲길…남산하늘숲길 걸어보니 [김선미의 시크릿가든]

    코로나19 시절, 거의 매일 남산을 찾았다. 돌이켜보니 남산은 사랑이었다. 새벽의 남산도, 밤의 남산도 든든하고 아련했다. 다만 딱 한 가지가 아쉬웠다. 늘 오르던 코스로는 친정엄마와 함께 걷기 어려웠다는 것. 가파른 계단이 이어져 어르신이 오르기엔 힘겨운 길이었다.26일 이른 아침, 남산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다가 전날 시민에게 공개된 ‘남산하늘숲길’을 걸어보았다. 남산도서관 옆, 그러니까 남산 주차장으로 들어서기 전 오른편에서 시작하는 1.45km 무장애 나무 데크길이다. 완만한 경사를 따라 편안하게 걸으면 어느덧 남산 정상 가까이에 닿는다.개장 이틀째였는데도 이른 시간부터 시민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걷다가 이 길을 점검하러 나온 오세훈 서울시장과 딱 마주쳤다. 강병근 서울시 총괄건축가, 설계자인 조경설계회사 HEA의 백종현 대표도 함께였다. 그렇게 우리는 같이 걷게 됐다.나는 자타공인 남산 애호가다. 남산에서 걷고 뛰고 자전거 탄 세월이 쌓여 몇 시 무렵 어느 지점에 ‘캣맘(길고양이를 돌보는 여성)’이 등장하는지, 어떤 달리는 무리가 활동하는지 안다. 그래서 서울시가 남산에 정원을 만들고 각종 정비를 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굳이~’ 싶었다. 이미 훌륭한 숲에 굳이 손댈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남산하늘숲길은 그런 나의 우려를 단번에 걷어냈다. 내딛는 걸음마다 행복했다. 단풍나무 군락지를 지나니 잎이 손바닥처럼 생긴 튤립나무가 반겼다. 산 중턱 데크길에서 만난 나무는 훨씬 가깝고 정겹게 느껴졌다. 길 양쪽에 심어진 노란 털머위꽃, 붉게 물들기 시작한 화살나무에도 절로 시선이 향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새로운 길은 새로운 시야를 만들고, 관점과 생각을 낳는다는 것을.남산하늘숲길은 데크를 들어 올려 설치해 자연 지형을 최대한 보존했다. 완만한 경사여서 휠체어도 불편 없이 오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시민이 건강한 환경에 접근할 권리를 갖는 환경복지이고 문화복지다. 탐조 애호가들이 사랑하는 남산의 새소리를 이젠 이동 약자들도 찾아와 들을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이 길은, 공공의 공간을 만드는 일이 다른 사람의 감각을 돌보는 일이란 것을, 여러 생명체와 어우러져 살게 하는 일이란 것을 일깨운다.이 길은 자전거와 러너들이 다닐 수 없어 고요하다. 옆 사람 혹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며 걷는 길이다. 그렇게 천천히 걷다 보면 폭설로 쓰러진 목재를 재활용해 만든 곤충 호텔, 남산에서 채취한 종자로 심었다는 어린 소나무들이 나타난다. 지구에 함께 사는 생명체들을 생각하게 된다.서울에는 서대문구 안산처럼 잘 조성된 데크길이 여럿 있지만, 도심 한복판에서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남산의 데크길은 가히 독보적이다. 유리 펜스를 활용해 공중에 뜬 느낌을 주는 노을전망대, 숲을 배경으로 도심을 조망하는 바람전망다리,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한 추억을 주는 모험놀이데크와 탐험가의 정원 등 다양한 조망 포인트와 정원이 있다. 군데군데 놓인 의자마다 앉아보았다. 각 자리에서 보이는 풍경과 들리는 소리가 다 달랐다. 그 길을 걷고 내려오다가 아침 산책을 나온 지인과 마주쳤다. 길이라는 건, 그렇게 우연하고 반가운 만남을 이끄는 마법이 있다.앞으로 외국인 친구가 한국을 방문하면 도심과 자연을 잇는 이 보행네트워크를 가장 먼저 데려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봤다면 남산하늘숲길 안내 표지판 위에 갓 쓰고 살포시 앉은 까치 조각상을 얼마나 귀여워할까. 남산하늘숲길이 시민들로부터, 한국을 흠모해 찾아오는 세계인들로부터 꾸준히 사랑받는 길이기를 바란다. 이제 한국은 앞만 보고 빨리 달리는 길이 아니라 세심하게 주변을 배려하고 돌보는 길을 만드는 수준이 되었다. 조만간 엄마와 그 길을 걸어야겠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2025-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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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 귀족 저택에 피어난 한국 정원의 속삭임

    영국 사우스요크셔의 작은 마을 웬트워스에는 18세기 귀족 저택 ‘웬트워스 우드하우스’가 있다. 건물 정면 길이가 185m에 달하는 영국 최대 규모 개인 주택 중 하나다. 1804년 창립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원예단체인 영국왕립원예협회(RHS)는 올해 7월 이곳에서 처음 플라워쇼를 열었다.왜일까. 영국은 정원을 통해 문화유산과 지역을 되살리는 품격 있는 방식을 택한다. RHS는 112년 전통의 세계적 정원 디자인 쇼인 ‘첼시 플라워쇼’를 비롯해 영국 전역에서 플라워쇼를 열며 지역의 삶을 회복시키는 문화를 만든다.웬트워스의 황갈빛 석조 저택 앞 잔디밭 위에 흰 기둥의 정원이 피어났다. 이번 쇼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의 중간 단계인 실버 길트(Silver-gilt) 메달을 받은 한국 조경팀(최혜영 성균관대 교수·최연길 현대건설 책임)의 ‘정원이 속삭이다’(Garden Whispers) 작품이다. 이 정원을 만든 세 사람, 즉 최 교수와 최 책임 그리고 식재 디자이너인 주례민 ‘오랑쥬리’ 대표를 최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한국 정원의 속삭임한국 조경팀의 정원은 이번 플라워쇼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대부분의 출품작이 영국 시골풍 정원(코티지 가든)인데 비해 ‘정원이 속삭이다’는 높낮이가 다른 하얀 기둥(지름 5cm, 높이 35∼185cm) 473개가 곡선의 플랫폼 위로 리듬감 있게 서 있었다. 빛과 그림자가 기둥 사이를 오가며 관람객의 시선을 따라 각기 다른 장면을 만들었다. 바람에 따라 식물이 흔들거리는 모습, 햇빛이 움직이며 남기는 그림자는 관람객에게 명상의 시간을 선사했다. 보랏빛 에린지움과 그라스류는 공간에 깊이를 주고 오이풀과 뱀무는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했다.심사 과정에서 친환경 재료와 첨단 기술의 조화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현대자동차의 헤드라이트 플라스틱을 재활용한 3D 프린팅 의자, 아모레퍼시픽 화장품 공병을 활용해 반짝임을 준 바닥은 정원 애호가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정원은 내년 현대건설이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문을 여는 ‘디에이치 방배’에 재현될 예정이다. 최 책임은 “현대건설은 2018년부터 ‘디에이치’ 브랜드를 시작하면서 주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한 ‘헤리티지 가든’을 만들어 왔다”며 “이제 아파트는 단순한 조경을 넘어 ‘세계적 정원을 집 앞에서 매일 즐기는 공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적 돌봄의 정원RHS 플라워쇼의 중요한 심사 기준 중 하나는 ‘클라이언트 브리프’(Client’s Brief)다. 정원 설계의 의도와 상상 속 대상 고객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항목이다. 이번에 한국 팀은 현대미술관을 상정해 설계한 반면 다른 팀들은 어린이 호스피스센터처럼 사회적 돌봄이 필요한 기관을 설정하고 실제 스폰서도 받아 참여했다.친환경, 지속가능성과 함께 ‘누구나 정원을 누릴 수 있는가’도 주요 심사 기준이었다. 휠체어가 자유롭게 지나갈 수 있는 동선 설계는 기본이었다. 최 교수는 “플라워쇼의 주요 관람객이 중장년층이고, 고령사회에서 정원은 복지 공간의 역할을 한다”며 “공공성을 중시하는 RHS는 식재도 사계절 유지 관리될 수 있는지 엄격하게 심사했다”고 전했다.“영국에서는 기업이나 기관이 후원한 정원이 플라워쇼에 선보인 후 그곳으로 옮겨져요. 돈만 내는 게 아니라 정원의 위로와 효과를 실제로 가져가는 거죠.”》 지속가능한 삶의 터전을 위하여RHS는 단지 정원을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유서 깊은 저택과 마을을 지속가능한 삶의 터전으로 되살리는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정원을 통해 건축과 자연, 지역사회가 다시 관계를 맺는 것이 영국이 오랜 세월 유지해온 정원 문화의 힘이다. 주 대표는 “런던에서 2시간여 차를 몰아야 하고 7만 원이 넘는 입장료에도 하루에 수만 명이 찾아와 진지하게 묻고 감상했다”며 “꽃과 가드닝 제품을 살 수 있는 가든 센터가 지역의 문화 허브 역할을 하는 게 부러웠다”고 말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국내 정원박람회들도 단순히 보여주기 전시가 아니라 이렇게 지역 삶의 터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이번 프로젝트에는 현대건설뿐 아니라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도 힘을 보탰다.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은 지난해 전라남도와 함께 미국 뉴욕한국문화원에 한국 소쇄원 애양단(愛陽壇)을 본딴 한국 정원을 조성하고 앞으로 세계에 한국 정원을 늘려나간다는 계획이다. 세계가 K-콘텐츠에 관심을 갖는 지금, 어떤 한국 정원을 국제 무대에 선보여야 할지 많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꼭 전통 정자나 담장을 표현해야만 한국 정원일까. 확실한 것은 이번 웬트워스 플라워쇼에서 세계인들이 한국 정원의 3D 프린팅 의자에 앉아 바람결과 풀잎의 속삭임을 들었다는 것이다.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2025-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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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가 옛 대명리조트?”… ‘소노캄 경주’의 고품격 변신

    경북 경주시 보문단지 ‘소노캄 경주’에서 하룻밤 머물고 난 후 든 생각은 ‘아, 이젠 경주에 적어도 2박3일을 하러 와야겠구나’였다. 하루는 요즘 ‘핫’한 경주의 문화공간들을 다니고, 하루는 이 숙소에서 오롯이 쉬어야겠다고. 그러고 보니 잔잔한 보문호를 원 없이 바라보며 차와 디저트를 즐길 수 있는 이 호텔 1층 카페 이름도 ‘오롯’이다.객실의 첫인상도 신선했다. 가장 먼저 한국의 전통미를 구현한 툇마루. 침실이 따로 있지만, 툇마루에 침구를 펴면 4∼5인 가족도 넉넉하게 잘 수 있겠다 싶었다. 한국 차를 우려 마실 수 있는 전통 다기 세트와 넷플릭스 ‘오징어게임’을 통해 세계인에게 알려진 공기놀이를 객실에 구비해 둔 디테일도 세심했다. 보문호의 벚꽃잎을 모티브로 한 ‘화양연화’와 경주의 맑은 바람과 달빛을 허브 블렌딩으로 표현한 ‘청충명월’ 차를 다기로 우려내고 있노라니 호텔 객실이 아니라 차실(茶室) 같았다.대명소노그룹 소노인터내셔널은 1700억 원을 투입해 1년여 전면 리뉴얼을 거쳐 기존의 소노벨 경주를 5성급 프리미엄 리조트 ‘소노캄 경주’로 탈바꿈시켰다. 과거 대명리조트가 2006년 소노벨 경주로 바뀐 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또 다시 거듭났다. 지하 2층∼지상 12층, 9182평 규모로 418개 객실과 400명 이상 들어가는 연회 공간 등을 갖췄다.단연 돋보이는 시설은 ‘웰니스 풀앤스파’다. 대명리조트 경주 시절부터 유명했던 약알칼리 온천수를 활용해 보문호수를 바라보는 야외 스파 수영장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풀장의 설계가 현대적이면서도 한국적이다. 경주의 동궁과 월지, 포석정 등을 재해석해 깊지 않은 따뜻한 물길이 굽이친다. 어르신들이 ‘아쿠아로빅’하듯, 이 물길을 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물길 따라 걸으면 하나둘씩 나오는 프라이빗 카바나와 북유럽풍 건식 사우나는 진정한 쉼의 공간이다. 보문호수를 바라보는 프라이빗 카바나에 누우면 윤슬이 비치는 저 물은 호수인지 바다인지 싶다. 물놀이 공간 군데군데 놓인 커다란 돌들은 수영장을 물길로 해석한 수변공간의 조경이다. 수영장에 심어진 은목서의 단아한 향기가 고급스럽게 퍼졌다. 야외 공간에는 ‘심상의 기원’이라는 명상 공간도 있다. 이곳에도 물길이 흐른다. 혼자서 또는 단체로 명상이나 요가를 해도 좋고, 그저 앉아 가만히 머물러도 좋겠다.이 호텔 12층에는 국내 최대 규모(569㎡·약 172평)의 정상급 숙소(프레지덴셜 스위트·PRS)가 마련돼 이번 APEC 기간 국빈과 수행원이 숙박하게 된다. 천장 높이 4m에 거실 전면이 통유리창이라 보문호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통 온돌 시스템을 적용했고, 전용 출입통로를 통해 프라이버시와 보안성을 높였다. 손선원 소노인터내셔널 홀딩스 상무는 “한식당과 객실, 유니폼 등 모든 요소에 한국의 아름다움을 녹여내려고 했다”며 “이번 APEC을 통해 소노캄 브랜드를 전 세계에 각인시킬 것”이라고 말했다.경주로 온전한 쉼을 떠난다면 굳이 차량을 대여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서울역에서 2시간 KTX를 타고 경주역에 도착한 후 30분간 택시를 타거나 버스를 타면 보문단지 내 소노캄 경주에 도착한다. 주요 유적은 경주 시티버스로도 둘러볼 수 있다.경주=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2025-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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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케이팝 데몬 헌터스’ 노래 따라부르며 즐기는 환상의 에버랜드 불꽃쇼

    에버랜드가 신규 야간 공연 ‘케이팝 데몬 헌터스 싱어롱 불꽃쇼’를 연말까지 매일 밤 펼치고 있다.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오리지널 영상과 음악이 포시즌스가든에 마련된 길이 24m, 높이 11m의 초대형 LED 스크린 및 이머시브 사운드 시스템 등을 통해 흘러 나오며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한다.11분간 이어지는 이 공연에서는 골든(Golden), 하우 잇츠 던(How It’s Done), 소다 팝(Soda Pop), 유어 아이돌(Your Idol) 등 영화 속 히트곡들이 흐른다. 영상 속 자막을 통해 대부분의 가사가 제공돼 관객이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싱어롱(singalong) 형태로 진행된다.노래에 맞춰 발사되는 불꽃과 조명, 특수효과 등이 어우러져 콘서트 현장 못지않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팬들에게 최고의 떼창 순간을 선물한다.에버랜드가 넷플릭스와 협업해 지난달 26일 오픈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 테마존에서는 매일 아침 국내외 팬들의 오픈런이 이어지며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다. 이 테마존에서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캐릭터와 세계관을 포토존, 미션게임, 영상, OST 등 다양한 콘텐츠로 몰입감 있게 경험할 수 있다.작품 속 무대의상을 빌려입고 사진을 찍거나, 현장에서 나오는 ‘골든’과 ‘소다팝’ 등 OST에 맞춰 춤을 추는 등 테마존 일대가 아이돌 콘서트 현장을 방불케하는 흥겨운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오직 현장에서만 만날 수 있는 38종의 한정판 콜라보 굿즈도 선풍적 인기다.에버랜드 관계자는 “세계적 열풍을 이어가고 있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불꽃쇼로 확장해 하루종일 몰입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고 말했다.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2025-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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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 가을, 멋쟁이는 갈색을 입는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은 구호플러스, 구호, 빈폴레이디스 신상품을 통해 올해 가을·겨울의 유행 색상으로 꼽히는 갈색을 활용한 패션 스타일링을 제안했다.색채 연구소 팬톤은 올해의 컬러로 따뜻함과 절제미가 느껴지는 갈색 톤의 ‘모카무스’를 선정한 바 있다. 최근 몇 년간 이어지는 ‘조용한 럭셔리’ 트렌드와 올해 정점을 찍은 스웨이드 소재 유행에 맞물려 떠오르는 색이 갈색이다.갈색은 정돈된 오피스 룩부터 편안한 캐주얼 룩까지 다양하게 등장한다. 모직, 캐시미어, 가죽, 스웨이드, 코듀로이 등 다채로운 질감의 소재에서 활용된다. 예전에는 스웨터 등을 중심으로 사용됐다면 최근에는 스커트, 바지, 코트까지 폭넓게 확장되는 추세다. 여러 색상과 조화를 이루는 갈색은 베이지와 회색 등과 함께 입어도 좋다.구호플러스는 이달 공개한 겨울 컬렉션의 핵심 색상으로 갈색과 빨강을 제안했다. 갈색 모직 코트에 빨강의 니트 상의를 포인트로 더하거나, 벽돌색 니트 조끼와 빨간 장갑을 매치하는 등 갈색과 빨강을 활용한 스타일링을 선보였다.구호는 올해 가을 겨울 시즌에 갈색 계열 상품의 공급 물량을 전년 대비 30% 이상 늘렸다. 재킷과 바지의 색상을 갈색으로 통일하거나, 채도가 다른 롱 코트와 상의를 조합한 스타일을 제안했다. 구호의 대표 아이템인 캐시미어 코트와 니트도 갈색으로 선보였다. 빈폴레이디스는 스웨이드·코듀로이 점퍼, 트위드 재킷 등 다양한 겉옷을 활용한 갈색 코디를 선보였다. 무게감 있는 갈색 코듀로이 점퍼와 스웨이드 스커트에 파랑이나 빨강 스웨터를 조합해 경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임지연 삼성패션연구소장은 “클래식한 멋을 지닌 갈색의 인기와 영향력은 내년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2025-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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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 저택에 피어난 한국 정원의 속삭임 [김선미의 시크릿가든]

    영국 사우스요크셔의 작은 마을 웬트워스에는 18세기 귀족 저택 ‘웬트워스 우드하우스’가 있다. 건물 정면 길이가 185m에 달하는 영국 최대 규모 개인 주택 중 하나다. 1804년 창립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원예단체인 영국왕립원예협회(RHS)는 올해 7월 이곳에서 처음 플라워쇼를 열었다. 왜일까. 영국은 정원을 통해 문화유산과 지역을 되살리는 품격 있는 방식을 택하기 때문이다. RHS는 112년 전통의 세계적 정원 디자인 쇼인 ‘첼시 플라워쇼’를 비롯해 영국 전역에서 플라워쇼를 열며 지역의 삶을 회복시키는 문화를 만든다.황갈빛 석조 저택 앞 잔디밭 위에 흰 기둥의 정원이 피어났다. 이 쇼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의 중간 단계인 실버 길트(Silver-gilt) 메달을 받은 한국 조경팀(최연길 현대건설 책임·최혜영 성균관대 교수)의 ‘정원이 속삭이다’(Garden Whispers) 작품이다. 이 정원을 만든 세 사람, 즉 최 책임과 최 교수, 식재 디자이너인 주례민 ‘오랑쥬’ 대표를 최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한국 정원의 속삭임한국 조경팀의 정원은 이번 플라워쇼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대부분의 출품작이 영국 시골풍 정원인데 비해 ‘정원이 속삭이다’는 높낮이가 다른 473개의 하얀 기둥(지름 5cm, 높이 35~185cm)이 곡선의 플랫폼 위로 리듬감 있게 서 있었다. 빛과 그림자가 기둥 사이를 오가며 관람객의 시선을 따라 각기 다른 장면을 만들었다. 바람에 따라 식물이 흔들거리는 모습, 햇빛이 움직이며 남기는 그림자는 관람객에게 명상의 시간을 선사했다. 보랏빛 에린지움과 그라스류는 공간에 깊이를 주고 오이풀과 뱀무는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친환경 재료와 첨단 기술의 조화도 돋보였다. 현대자동차의 헤드라이트 플라스틱을 재활용한 3D 프린팅 의자, 아모레퍼시픽 화장품 공병을 활용해 반짝임을 준 바닥이 정원 애호가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정원은 내년 현대건설이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문을 여는 ‘디에이치 방배’에 재현될 예정이다. 최 책임은 “현대건설은 2018년부터 ‘디에이치’ 브랜드를 시작하면서 주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한 ‘헤리티지 가든’을 만들어 왔다”며 “이제 아파트는 단순한 조경을 넘어 ‘세계적 정원을 집 앞에서 매일 즐기는 공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사회적 돌봄의 정원RHS 플라워쇼의 중요한 심사 기준 중 하나는 ‘클라이언트 브리프’(Client’s Brief)다. 정원 설계의 의도와 상상 속 대상 고객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항목이다. 이번에 한국 팀은 현대미술관을 상정해 설계한 반면 다른 팀은 어린이 호스피스센터처럼 사회적 돌봄이 필요한 기관을 설정하고 실제 스폰서도 받아 참여했다. ‘누구를 위해, 어떤 마음으로 정원을 만드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영국 정원의 근간이다. 친환경, 지속가능성과 함께 ‘누구나 정원을 누릴 수 있는가’도 주요 심사 기준이었다. 최 교수는 “휠체어가 지나기 어려운 좁은 길이 심사에서 감점 요소가 된 것 같다”며 “공공성을 중시하는 RHS는 식재도 사계절 내내 잘 유지 관리될 수 있는지 엄격하게 평가했다”고 전했다. ●지속가능한 삶의 터전을 위하여 RHS는 단지 정원을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유서 깊은 저택과 마을을 지속가능한 삶의 터전으로 되살리는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정원을 통해 건축과 자연, 지역사회가 다시 관계를 맺는 것이 영국이 오랜 세월 유지해온 정원 문화의 힘이다. 주 대표는 “런던에서 2시간여 차를 몰아야 하고 입장료도 7만 원이 넘는데도 하루에 수만 명이 찾아와 진지하게 묻고 감상했다”며 “꽃과 가드닝 제품을 살 수 있는 가든 센터가 지역의 문화 허브 역할을 하는 게 부러웠다”고 말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국내 정원박람회들도 단순히 보여주기 전시가 아니라 이렇게 지역 삶의 터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이번 프로젝트에는 현대건설뿐 아니라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도 힘을 보탰다.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은 지난해 전라남도와 함께 미국 뉴욕한국문화원에 한국 소쇄원 애양단(愛陽壇)을 본딴 한국 정원을 조성하고 앞으로 세계에 한국 정원을 늘려나간다는 계획이다. 어떤 한국 정원을 선보여야 할지 고민이 많이 필요한 시점이다. 꼭 정자나 담장을 표현해야만 한국 정원일까. 확실한 것은 이번 웬트워스 플라워쇼에서 세계인들이 한국 정원의 3D 프린팅 의자에 앉아 바람결과 풀잎의 속삭임을 들었다는 것이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202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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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의 시간에 더한 예술적 경관… APEC 앞둔 경주의 변신[김선미의 시크릿가든]

    15일 경주역에 내리자 가을 햇살 사이로 모과 향이 번졌다. 외국인 관광객도 부쩍 눈에 많이 띄었다. 이달 말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둔 경북 경주시는 막바지 공사로 어수선하면서도 설렘과 활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시월의 경주는 색감이 참 고왔다. 대릉원 일원의 감나무, 감포 이관정 근처 골목길의 석류나무, 첨성대 앞 핑크뮬리,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경북천년숲정원 칠엽수…. 경주가 벌써 그립다.● 우아함, 연민, 그리고 가능성 평소 경주에 대해서는 양가감정이 있었다. 이 도시가 품는 우아함을 흠모하면서도, 찬란했던 과거에는 왠지 못 미치는 것 같은 현재에 대한 연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교촌한옥마을에서 경주의 가능성을 보았다. 식용 꽃을 얹은 비빔밥을 먹는 독일인 부부, ‘1년간 한국에서 살아보기’ 중이라며 월정교에서 촬영을 부탁한 프랑스인 여성의 표정엔 정중한 호기심이 흘렀다. 이들이 마을 내 경주 최부자 댁 ‘노블리스 오블리주’(높은 신분에 따르는 사회적 책임) 정신까지 새겨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월정교에서 차로 4분만 가면 국립경주박물관이다. 최근 22년 만의 타종 행사 덕분일까. ‘에밀레종’으로 불리는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 앞이 북적였다. 어떻게 이 종은 천 년간 한결같은 소리를 낼까. 종에도 마음이 있다면, 맑은 마음이라 가능한 일 아니었을까. 박물관을 찾은 진짜 이유는 ‘신라천년서고’가 궁금해서였다. 1970년대 지어진 박물관 수장고를 리모델링해 2022년 문을 연 박물관 내 도서관으로, 요즘 ‘눕독’(누워서 독서) 명소로 통한다. 안락한 소파에 몸을 파묻고 경주와 신라를 주제로 엄선된 책을 살펴보다가 큰 창에 액자처럼 담긴 정원에 눈을 씻는 고요한 시간이 좋았다.● 50살 보문단지의 변신오후 7시 반, 어둠이 내려앉은 보문단지에 빛이 일렁였다. 1979년 우리나라 최초의 컨벤션센터로 지어진 ‘육부촌’(六部村·‘신라를 이룬 여섯 부족’이라는 뜻으로, 현재 경상북도문화관광공사 건물)이 미디어아트로 장식된 것. 호반광장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알을 형상화한 15m 높이의 APEC 상징조형물도 등장했다. 미디어아트가 알 위를 꽃으로 수놓는 모습이 보문단지의 부활을 알리는 것 같아 뭉클했다. 보문단지(851만 ㎡)는 1975년 국내 관광단지 1호로 지정돼 1979년 문을 열었다. 수학여행과 신혼여행, 가족의 추억이 켜켜이 쌓인 명실상부한 국민 여행지다. 시작은 신라 유산을 보존하고 국제 관광도시로 성장시키려는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친필 지시를 남겼다. “신라 고도는 웅대, 찬란, 정교, 활달, 진취, 여유, 우아, 유현(幽玄·깊고 그윽한 아름다움)의 감이 살아날 수 있도록 재개발할 것.”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과 비천상 문양의 대회의장 벽면을 갖춘 육부촌, 박 대통령이 머물며 보문호를 내려다봤던 코모도호텔의 1114호(경상북도 산업유산 72호)는 그 시절의 꿈을 여전히 품고 있다. 보문정 물레방아 앞 돌비석엔 이렇게 쓰여있다. ‘대한민국 관광 역사, 이곳에서 시작되다.’ 보문단지는 한국 조경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1972년 미국에서 활동하던 오휘영 조경가가 첫 대통령 조경담당 비서관으로 임명됐고, 이듬해 서울대와 영남대에는 국내 최초로 조경학과가 개설됐다. 그 무렵 심어진 보문단지 벚나무가 지금도 봄마다 연분홍 물결을 만든다. 보문단지는 올해 관광단지 지정 50주년과 APEC 개최를 맞아 대대적 경관 정비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 ‘경주 아트패스’의 매력 요즘 경주는 ‘예술의 도시’다. 경북문화관광공사가 APEC을 앞두고 7월 22일 선보인 ‘경주 아트패스’는 3000장 넘게 팔렸다. 3만7000원 상당의 입장권을 1만8000원으로 할인해 우양미술관·솔거미술관·PLACE C(플레이스 씨)·불국사박물관 등 네 곳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다.우양미술관은 고(故)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부인 정희자 씨가 1991년 힐튼경주 옆에 세운 ‘선재미술관’이 전신이다. 대우그룹 부도 이후 우양산업개발에 매각돼 2013년 ‘우양미술관’으로 새롭게 태어난 뒤, 지난해부터 올해 7월까지 리모델링을 거쳐 재개관했다. 경주의 힐튼호텔 앞에 서자 곧 철거를 앞둔 서울 힐튼호텔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김종성 건축가가 설계한 두 호텔은 병풍형 배열로 자연을 감싸는 방식이 쌍둥이처럼 닮았다. 11월30일까지 열리는 재개관 특별전의 주인공은 백남준과 아모아코 보아포.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이후 뿔뿔이 소장된 백남준의 비디오 설치 연작 ‘나의 파우스트’ 연작 13개 작품 중 ‘경제학’과 ‘영혼성’ 두 점을 관람할 기회다. 크리스찬 디올과 협업했던 아프리카 가나 출신 보아포의 작품 속 인물들의 옷은 화려한 꽃밭이다.솔거미술관은 신라 유적 테마파크인 경주엑스포대공원 안에 있다. 소산 박대성 화백이 작품 830여 점을 기증해 2015년 문을 연 경주 최초의 공립 미술관이다. 매실나무와 살구나무가 심어진 숲길도, 경주 시민들의 사진 명소인 ‘비밀의 정원’도 좋은데 미술관 상설 전시실의 네모난 창 너머로 보이는 차경(借景)은 더 좋다. 엑스포대공원에서는 유명 건축가들의 건축을 한 곳에서 만난다. 승효상(솔거미술관), 이타미 준(경주타워), 구마 겐고(경주세계문화엑스포기념관)에 이어 APEC을 앞두고 김찬중 건축가도 합세했다. 경주 고분을 형상화한 한국수력원자력 기업홍보관 ‘SSNC’(SMR 스마트 넷제로 시티)가 그의 작품이다. 경주타워 옥상 전망대에 올라 경주 시내를 내려다보니 찬란했던 과거를 지닌 이 도시의 미래가 궁금해졌다.2023년 경주 오릉 인근에 문을 연 한옥형 복합문화공간 플레이스 씨는 젊은 감각의 전시와 정원, 카페와 한식당, 글램핑 공간으로 도시와 예술을 잇는다. 고 우장춘 박사가 육종 연구를 했던 터라고 한다. 불국사 경내에 2018년 문을 연 불국사박물관에서는 호젓하게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다.● 한국적이면서 감각적인 경주 APEC 기간 각국 정상들과 기업인들의 활동이 보문단지 내 호텔들에서 활발하게 열리게 된다. 최근 완벽한 변신을 보여준 곳은 ‘소노캄 경주’. 소노인터내셔널이 1700억 원을 들여 기존의 소노벨 경주를 5성급 리조트로 리뉴얼했다. 객실들에 툇마루를 구현하고, 스파 수영장은 보문호의 물결을 형상화했다. 포석정을 연상시키는 물길, 카바나 사이사이에 놓인 돌, 은목서 향기가 한국적이면서 감각적이다.올해 4월 경주 대릉원 서쪽에 문을 연 오아르미술관은 경주 출신 미술품 수집가가 세운 사립미술관이다. 노서동 고분군 쌍분을 마주하는 ‘왕릉 뷰’와 설계를 맡은 유현준 건축가의 유명세가 더해져 개관 6개월 만에 18만 명이 다녀갔다. 초록색 왕릉을 코앞에서 바라보니 유럽의 도심 묘지처럼 우리나라에도 삶과 죽음이 일상에 어우러진 장소가 있었고, 그곳이 경주였음을 새삼 깨달았다. 경주에는 깊고 그윽한 ‘유현’의 미감(美感)이 있었다. 본래의 아름다운 경관에 빛과 예술, 젊은 감성이 더해지고 있다. 천년의 시간 위에 새 숨을 불어넣는 경주의 변신이 기대된다.글·사진 경주=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2025-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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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의 변신은 무죄입니다, 경주[김선미의 시크릿가든]

    15일 경주역에 내리자 가을 햇살 사이로 모과 향이 번졌다. 외국인 관광객도 부쩍 눈에 많이 띄었다. 이달 말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둔 경북 경주시는 막바지 공사로 어수선하면서도 설렘과 활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시월의 경주는 색감이 참 고왔다. 대릉원 일원의 감나무, 감포 이관정 근처 골목길의 석류나무, 첨성대 앞 핑크뮬리,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경북천년숲정원 칠엽수…. 경주가 벌써 그립다.●우아함, 연민, 그리고 가능성평소 경주에 대해서는 양가감정이 있었다. 이 도시가 품는 우아함을 흠모하면서도, 찬란했던 과거에는 왠지 못 미치는 것 같은 현재에 대한 연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교촌한옥마을에서 경주의 가능성을 보았다. 식용 꽃을 얹은 비빔밥을 먹는 독일인 부부, ‘1년간 한국에서 살아보기’ 중이라며 월정교에서 촬영을 부탁한 프랑스인 여성의 표정엔 정중한 호기심이 흘렀다. 이들이 마을 내 경주 최부자 댁 ‘노블리스 오블리주’(높은 신분에 따르는 사회적 책임) 정신까지 새겨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월정교에서 차로 4분만 가면 국립경주박물관이다. 최근 22년 만의 타종 행사 덕분일까. ‘에밀레종’으로 불리는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 앞이 북적였다. 어떻게 이 종은 천 년간 한결같은 소리를 낼까. 종에도 마음이 있다면, 맑은 마음이라 가능한 일 아니었을까. 박물관을 찾은 진짜 이유는 ‘신라천년서고’가 궁금해서였다. 1970년대 지어진 박물관 수장고를 리모델링해 2022년 문을 연 박물관 내 도서관으로, 요즘 ‘눕독’(누워서 독서) 명소로 통한다. 안락한 소파에 몸을 파묻고 경주와 신라를 주제로 엄선된 책을 살펴보다가 큰 창에 액자처럼 담긴 정원에 눈을 씻는 고요한 시간이 좋았다.●50살 보문단지의 변신오후 7시 반, 어둠이 내려앉은 보문단지에 빛이 일렁였다. 1979년 우리나라 최초의 컨벤션센터로 지어진 ‘육부촌’(六部村·‘신라를 이룬 여섯 부족’이라는 뜻으로, 현재 경상북도문화관광공사 건물)이 미디어아트로 장식된 것. 호반광장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알을 형상화한 15m 높이의 APEC 상징조형물도 등장했다. 미디어아트가 알 위를 꽃으로 수놓는 모습이 보문단지의 부활을 알리는 것 같아 뭉클했다.보문단지(851만㎡)는 1975년 국내 관광단지 1호로 지정돼 1979년 문을 열었다. 수학여행과 신혼여행, 가족의 추억이 켜켜이 쌓인 명실상부한 국민 여행지다. 시작은 신라 유산을 보존하고 국제 관광도시로 성장시키려는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친필 지시를 남겼다. “신라 고도는 웅대, 찬란, 정교, 활달, 진취, 여유, 우아, 유현(幽玄·깊고 그윽한 아름다움)의 감이 살아날 수 있도록 재개발할 것.”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과 비천상 문양의 대회의장 벽면을 갖춘 육부촌, 박 대통령이 머물며 보문호를 내려다봤던 코모도호텔의 1114호(경상북도 산업유산 72호)는 그 시절의 꿈을 여전히 품고 있다. 보문정 물레방아 앞 돌비석엔 이렇게 쓰여있다. ‘대한민국 관광의 역사, 이곳에서 시작되다.’보문단지는 한국 조경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1972년 미국에서 활동하던 오휘영 조경가가 첫 대통령 조경담당 비서관으로 임명됐고, 이듬해 서울대와 영남대에는 국내 최초로 조경학과가 개설됐다. 그 무렵 심어진 보문단지 벚나무가 지금도 봄마다 연분홍 물결을 만든다. 보문단지는 올해 관광단지 지정 50주년과 APEC 개최를 맞아 대대적 경관 정비에 나선다는 계획이다.●‘경주 아트패스’의 매력요즘 경주는 ‘예술의 도시’다. 경북문화관광공사가 APEC을 앞두고 7월 22일 선보인 ‘경주 아트패스’는 3000장 넘게 팔렸다. 3만7000원 상당의 입장권을 1만8000원으로 할인해 우양미술관·솔거미술관·PLACE C(플레이스씨)·불국사박물관 등 네 곳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다.우양미술관은 고(故)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부인 정희자 씨가 1991년 힐튼경주 옆에 세운 ‘선재미술관’이 전신이다. 대우그룹 부도 이후 우양산업개발에 매각돼 2013년 ‘우양미술관’으로 새롭게 태어난 뒤, 지난해부터 올해 7월까지 리모델링을 거쳐 재개관했다. 경주의 힐튼호텔 앞에 서자 곧 철거를 앞둔 서울 힐튼호텔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김종성 건축가가 설계한 두 호텔은 병풍형 배열로 자연을 감싸는 방식이 쌍둥이처럼 닮았다.11월30일까지 열리는 재개관 특별전의 주인공은 백남준과 아모아코 보아포.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이후 뿔뿔이 소장된 백남준의 비디오 설치 연작 ‘나의 파우스트’ 연작 13개 작품 중 ‘경제학’과 ‘영혼성’ 두 점을 관람할 기회다. 크리스찬 디올과 협업했던 아프리카 가나 출신 보아포의 작품 속 인물들의 옷은 화려한 꽃밭이다.솔거미술관은 신라 유적 테마파크인 경주엑스포대공원 안에 있다. 소산 박대성 화백이 작품 830여 점을 기증해 2015년 문을 연 경주 최초의 공립 미술관이다. 매실나무와 살구나무가 심어진 숲길도, 경주 시민들의 사진 명소인 ‘비밀의 정원’도 좋은데 미술관 상설 전시실의 네모난 창 너머로 보이는 차경(借景)은 더 좋다.엑스포대공원에서는 유명 건축가들의 건축을 한 곳에서 만난다. 승효상(솔거미술관), 이타미 준(경주타워), 구마 겐고(경주세계문화엑스포기념관)에 이어 APEC을 앞두고 김찬중 건축가도 합세했다. 경주 고분을 형상화한 한국수력원자력 기업홍보관 ‘SSNC’(SMR 스마트 넷제로 시티)가 그의 작품이다. 경주타워 옥상 전망대에 올라 경주 시내를 내려다보니 찬란했던 과거를 지닌 이 도시의 미래가 궁금해졌다.2023년 경주 오릉 인근에 문을 연 한옥형 복합문화공간 플레이스 씨(PLACE C)는 젊은 감각의 전시와 정원, 카페와 한식당, 글램핑 공간으로 도시와 예술을 잇는다. 고 우장춘 박사가 육종 연구를 했던 터라고 한다. 불국사 경내에 2018년 문을 연 불국사박물관에서는 호젓하게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다.●한국적이면서 감각적인 경주APEC 기간 각국 정상들과 기업인들의 활동이 보문단지 내 호텔들에서 활발하게 열리게 된다. 최근 완벽한 변신을 보여준 곳은 ‘소노캄 경주’. 소노인터내셔널이 1700억 원을 들여 기존의 소노벨 경주를 5성급 리조트로 리뉴얼했다. 객실들에 툇마루를 구현하고, 스파 수영장은 보문호의 물결을 형상화했다. 포석정을 연상시키는 물길, 카바나 사이사이에 놓인 돌, 은목서 향기가 한국적이면서 감각적이다.올해 4월 경주 대릉원 서쪽에 문을 연 오아르미술관은 경주 출신 미술품 수집가가 세운 사립미술관이다. 노서동 고분군 쌍분을 마주하는 ‘왕릉 뷰’와 설계를 맡은 유현준 건축가의 유명세가 더해져 개관 6개월 만에 18만 명이 다녀갔다. 초록색 왕릉을 코앞에서 바라보니 유럽의 도심 묘지처럼 우리나라에도 삶과 죽음이 일상에 어우러진 장소가 있었고, 그곳이 경주였음을 새삼 깨달았다.경주에는 깊고 그윽한 ‘유현’의 미감(美感)이 있었다. 본래의 아름다운 경관에 빛과 예술, 젊은 감성이 더해지고 있다. 천년의 시간 위에 새 숨을 불어넣는 경주의 변신이 기대된다. 경주=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202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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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연과 가까워지는 길’… 홋카이도 정원 여행의 선물[김선미의 시크릿가든]

    제 책상 위에는 ‘아사히야마 동물원’이라고 적힌 미니 동물버스 한 대가 놓여 있습니다. 이 동물원으로 유명한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아사히카와(旭川)의 OMO7(오모 세븐)호텔에서 사 온 과자 케이스입니다. 곰과 물개 그림이 귀여워 과자를 다 먹고 나서도 곁에 두고 있어요. 여행자의 낯선 도시 탐험을 돕기 위해 로비에 지역 맛집과 여행 코스를 소개해 둔 이 호텔이 마음에 쏙 들었답니다. 여행의 추억은 더 있습니다. 오비히로(帶廣) 남쪽 ‘롯카노모리(六花の森)’에서 산 사탕입니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원형 용기에는 이 정원을 만든 제과 회사 롯카테이(六花亭)를 상징하는 여섯 송이 꽃이 그려 있어요. 열어 보니 꽃들의 색을 은은하게 머금은 사탕이 보석처럼 빛났습니다.세세한 것 하나하나 기억에 남는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정원 8곳을 잇는 250km 여정의 ‘홋카이도 가든 가도(街道)’ 여행이었어요. 얼굴도, 이름도, 어쩌면 존재 여부도 몰랐을 사람들이 국내 패키지 정원 여행으로 만나 닷새간 함께 했어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정원을 걷던 부부, 생화 액자 포토존에서 인생 사진을 찍었다고 흐뭇해하던 엄마와 딸…. 우리는 벌써 그때를, 서로를 그리워합니다. ● 나비가 머무는 정원 홋카이도는 남한 면적의 약 83%일 정도로 광대합니다. 예전에 홋카이도를 여행했을 때는 삿포로나 오타루 같은 유명 관광지를 다녔는데요. 이번엔 가든 가도를 따라가다 보니 농촌 경관을 두루 보게 됐어요. 동서양은 달라도 북쪽 마을 느낌은 비슷한 걸까요. 낮고 넓은 하늘과 들판 위 소박한 농가 분위기가 아이슬란드나 하와이 빅아일랜드와 닮았더라고요. 홋카이도 가든 가도 정원들은 일본 전통 정원이 아닙니다. 거대한 산맥을 배경으로 땅의 얼굴을 드러내는 ‘도카치(十勝) 천년의 숲’, 꽃보다 잎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는 침엽수 정원 ‘마나베 정원’, 할머니가 일군 정원을 손자가 이어 가꾸는 ‘시치쿠 가든’…. 전통을 내세우지도, 일본식 느낌을 내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같은 생각을 했어요. 일본 경제가 예전만 못해도 정원은 역시 앞선 것 같다고. 지금도 귓가에 선명해요. ‘다이세쓰모리(大雪森)노가든’에 있던 ‘숲의 실로폰’ 소리요. 정원에 있는 ‘놀이의 숲’에는 40m 길이의 목재 실로폰이 있었습니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고무 공을 떨어뜨리니 341개 나무 건반을 내려오면서 바흐의 선율을 연주했어요. 바람 소리, 새 소리, 그리고 공이 나무판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 숲 전체가 하나의 사운드 가든이었어요. 이 실로폰은 일본 최대 이동통신 회사 NTT도코모가 숲 보전 캠페인을 위해 만든 영상 광고 소품이었습니다. 솎아낸 나무로 실로폰을 만들고 이를 광고에 활용해 2011년 프랑스 칸 광고제에서 상도 받았죠. 2015년 홋카이도 가든쇼를 계기로 다이세쓰모리노가든에 설치됐어요. 카미카와초(上川町)가 소유한, 우리나라로 치면 지방 정원인 이곳에서 생각했어요. 우리도 지역과 기업이 더 많이 협력해 숲의 가치를 감성적으로 전하면 좋겠다고요.정원 콘셉트는 숲속의 집입니다. 산지 지형을 크게 손대지 않고 숲의 거실, 숲의 부엌 이런 식으로 공간을 나눴어요. 그런데 놀라운 건요. 그야말로 ‘꽃 반, 나비 반’인 거에요. 나비가 어쩜 그리 많을 수 있는지 묻자 정원 관리자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우리는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다. 벌레가 생기는 것도, 나비가 날아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게 곧 자연이다.” 인위적으로 관리해야만 예쁜 정원이 된다는 고정관념을 유쾌하게 깨뜨렸어요. 정원은 여러 생명체가 함께 살아가는 장소였어요.● 미래세대에 전하는 생명력 홋카이도 가든 가도는 2010년 본격화했습니다. 도카치 천년의 숲을 조성한 도카치 마이니치신문 하야시 카츠히코(林克彦) 대표와 아사히카와에 우에노팜을 만든 우에노 사유키(上野砂由紀) 씨가 손잡고 출발해 민간과 지방 정부, 기업이 가세했죠. 2014년 다이세쓰모리노가든까지 합류하면서 8개 정원이 연결됐어요.도카치 천년의 숲에 들어서서 광활한 대지와 초원을 마주한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정원이 단지 꽃을 장식적으로 심는 곳이 아니라는 걸 묵직하게 전하고 있었어요. 정원을 조성한 지역 신문사는 ‘1000년 동안 유지되는 숲’이라는 꿈을 품고 영국 정원 디자이너 댄 피어슨 씨와 함께 고산지대 토착식물로 탄소 중립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개입한 인상을 주지 않는 야생의 감각이 신선하고 고마웠어요. 피어슨 씨는 말합니다. “정원은 자연과 가까워지는 길이자, 환경을 돌보는 과정을 통해 대화를 여는 방식이다. 천년의 숲은 ‘정원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할 것이다. 독특한 개성의 나무 밑 벤치에 앉아 빛의 변화를 느끼기만 해도 우리는 다시금 눈을 뜨고 주변을 바라볼 수 있다. 자연의 깊은 감정을 미래세대에 전하고 싶다.” 바로 그 벤치에 평화롭게 누워 있는 방문객을 보았을 때 참 반가웠습니다. 다음은 우에노 씨. 이 가든 가도를 만든 일등 공신입니다. 정원 8곳 중 3곳을 직접 디자인했죠. 시작은 우에노팜이었습니다. 영국에서 가드닝을 배우고 고향으로 돌아와 대대로 쌀농사를 짓던 가문의 농장에 2001년 영국풍 홋카이도 정원을 만들었어요. 이후 후지TV 드라마 ‘바람의 정원’(2008년)을 탄생시킨 ‘바람의 정원’과 ‘다이세쓰모리노가든’도 그의 손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떻게 꽃을 심을지 안내하는 책도 여러 권 펴냈어요. 자신이 만든 정원처럼 화사한 미소로 설명해 주고 손 흔들어 배웅한 그가 얼마나 정성스레 정원을 돌볼지 짐작이 됩니다. ● 삶의 공간을 지켜내는 실천 일행 중에는 10년 전 롯카노모리에 와 봤던 분이 있었습니다. “꽃무늬 포장지가 예뻐서 과자 사러 또 왔어요.” 정말로 이 포장지에는 그럴 만한 이야기가 있더군요. 제과 회사 롯카테이를 창업한 고(故) 오다 도요시로(小田豊四郎) 씨는 “지역 문화는 과자를 보면 알 수 있다”며 음식을 통한 마을 만들기에 앞장섰습니다. 1960년엔 동시(童詩) 잡지도 창간했어요. 표지 그림을 그리던 산악 화가가 해당화를 비롯한 여섯 송이 꽃을 그린 그림이 롯카테이 포장지이고, 그 꽃들을 심어 2007년 문을 연 정원이 롯카노모리입니다. 마음을 정돈해 주는 곳이었어요. 언덕과 숲 사이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하도 맑아 물속 풀들이 마치 머리를 감고 있는 듯했어요. 작은 오두막 갤러리들에서는 지역의 자연을 그린 그림을 전시하고, 카페에서는 지역 농축산물을 활용한 음료와 과자를 내놓았죠. 한국에서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분은 우유를 안 마신 지 오래됐는데, 깨끗한 환경의 홋카이도에서는 안심하고 마실 수 있다고 했어요. 정원은 지역과 삶의 공간을 지켜내는 실천이었습니다.남편과 걷는 뒷모습이 유독 아름다웠던 여성 분이 숲에서 찾은 네 잎 클로버를 제게 선물로 건넸습니다. “홋카이도에 와서, 정원은 꽃을 보러 오는 곳이 아니라 빛과 바람을 느끼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땅의 온기와 부지런함도 배웠어요. 두고두고 기억할게요.” 고맙습니다. 제 마음도 딱 그래요. 함께 걷고 웃던 정원의 기억을, 네 잎 클로버와 함께 오래오래 간직하겠습니다.글·사진 아사히카와·오비히로·후라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2025-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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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은 홋카이도 정원 여행이 준 선물입니다 [김선미의 시크릿가든]

    제 책상 위에는 ‘아사히야마 동물원’이라고 적힌 미니 동물 버스 한 대가 놓여 있습니다. 이 동물원으로 유명한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도시, 아사히카와(旭川)의 OMO7(오모 세븐) 호텔에서 사 온 과자 케이스입니다. 곰과 물개 그림이 사랑스러워 과자를 다 먹고 나서도 곁에 두고 있어요. 여행자의 낯선 도시 탐험을 돕기 위해 로비에 지역 맛집과 여행 코스를 정성스럽게 소개해 둔 이 호텔이 마음에 쏙 들었답니다.여행의 추억은 더 있습니다. 오비히로(帶廣) 남쪽 나카사츠나이(中札內)의 ‘롯카노모리(六花の森)’에서 산 사탕입니다. 손안에 들어오는 원형 용기에는 이 정원을 만든 제과 회사 롯카테이(六花亭)를 상징하는 여섯 송이 꽃이 그려있어요. 뚜껑을 열어보니 꽃의 색을 은은히 머금은 사탕이 보석처럼 빛났습니다.8곳의 정원을 잇는 250km 여정의 ‘홋카이도 가든 가도(街道)’를 다녀왔습니다. 하나하나 기억에 남는 여행이었어요. 얼굴도, 이름도, 어쩌면 존재 여부도 몰랐을 사람들이 국내 패키지 정원여행으로 만나 닷새간 함께 했어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정원을 걷던 부부, 생화 액자 포토존에서 인생 사진을 찍었다고 흐뭇해하던 엄마와 딸…. 우리는 벌써 그때를, 서로를 그리워합니다.● 나비가 머무는 정원홋카이도는 남한 면적의 약 83%일 정도로 광대합니다. 예전에 홋카이도를 여행했을 때는 삿포로나 오타루 같은 유명 관광지를 다녔는데요. 이번엔 가든 가도를 따라가다 보니 농촌 경관을 두루 봤어요. 동서양은 달라도 북쪽 마을 느낌은 비슷한 걸까요. 낮고 넓은 하늘과 들판 위 소박한 농가 분위기가 아이슬란드나 하와이 빅아일랜드와 닮았더라고요.홋카이도 가든 가도의 정원들은 일본 전통 정원이 아닙니다. 거대한 산맥을 배경으로 땅의 얼굴을 드러내는 ‘도카치(十勝) 천년의 숲’, 꽃보다 잎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침엽수 정원 ‘마나베 정원’, 할머니가 일군 정원을 손자가 이어 가꾸는 ‘시치쿠 가든’…. 전통을 내세우지도, 일본식 느낌을 내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같은 생각을 했어요. 오랫동안 편안하게 머물고 싶다고, 일본 경제가 예전만 못해도 정원은 역시 앞선 것 같다고.지금도 귓가에 선명해요. ‘다이세쓰모리(大雪森)노가든’에 있던 ‘숲의 실로폰’ 소리요. 정원에 있는 ‘놀이의 숲’에는 40m 길이의 목재 실로폰이 있었습니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고무 공을 떨어뜨리니 341개 나무 건반을 내려오면서 바흐의 선율을 연주했어요. 바람 소리, 새 소리, 그리고 공이 나무판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 숲 전체가 하나의 사운드 가든이었어요.이 실로폰은 일본 최대 이동통신 회사 NTT도코모가 숲 보전 캠페인을 위해 만든 영상 광고 소품이었습니다. 솎아낸 나무로 실로폰을 만들고 이를 광고에 활용해 2011년 프랑스 칸 광고제에서 상도 받았죠. 2015년 홋카이도 가든쇼를 계기로 다이세쓰모리노가든에 설치됐어요. 카미카와초(上川町)가 소유한, 우리나라로 치면 지방 정원인 이곳에서 생각했어요. 우리도 지역과 기업이 더 많이 협력해 숲의 가치를 감성적으로 전하면 좋겠다고요.정원 콘셉트는 숲속의 집입니다. 산지 지형을 크게 손대지 않고 숲의 거실, 숲의 부엌 이런 식으로 공간을 나눴어요. 그런데 놀라운 건요. 그야말로 ‘꽃 반, 나비 반’인 거에요. 나비가 어쩜 그리 많을 수 있는지 묻자 정원 관리자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우리는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다. 벌레가 생기는 것도, 나비가 날아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게 곧 자연이다.” 인위적으로 관리해야만 예쁜 정원이 된다는 고정관념을 유쾌하게 깨뜨렸어요. 정원은 여러 생명체가 함께 살아가는 장소였어요.● 미래세대에 전하는 생명력홋카이도 가든 가도는 2010년 본격화했습니다. 도카치 천년의 숲을 조성한 도카치 마이니치신문 하야시 카츠히코(林克彦) 대표와 아사히카와에 우에노팜을 만든 우에노 사유키(上野砂由紀) 씨가 손잡고 출발해 민간과 지방 정부, 기업이 가세했죠. 2014년 다이세쓰모리노가든까지 합류하면서 8개 정원이 연결됐어요.도카치 천년의 숲에 들어서서 광활한 대지와 초원을 마주한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정원이 단지 꽃을 장식적으로 심는 곳이 아니라는 걸 묵직하게 전하고 있었어요. 정원을 조성한 지역 신문사는 ‘1000년 동안 유지되는 숲’이라는 꿈을 품고 영국 정원 디자이너 댄 피어슨 씨와 함께 고산지대 토착 식물로 탄소 중립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개입한 인상을 주지 않는 야생의 감각이 신선하고 고마웠어요.피어슨 씨는 말합니다. “정원은 자연과 가까워지는 길이자, 환경을 돌보는 과정을 통해 대화를 여는 방식이다. 천년의 숲은 ‘정원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할 것이다. 독특한 개성의 나무 밑 벤치에 앉아 빛의 변화를 느끼기만 해도 우리는 다시금 눈을 뜨고 주변을 바라볼 수 있다. 자연의 깊은 감정을 미래세대에 전하고 싶다.” 바로 그 벤치에 평화롭게 누워있는 방문객을 보았을 때 참 반가웠습니다.우에노 씨는 가든 가도의 일등 공신입니다. 정원 8곳 중 3곳을 디자인했어요. 영국에서 가드닝을 배우고 고향 아사히카와로 돌아와 가문의 논에 2001년 영국풍 홋카이도 정원을 만든 ‘우에노팜’이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드라마 ‘바람의 정원’(2008)의 배경 정원과 ‘다이세쓰모리노가든’도 그의 작품입니다. 꽃 심는 법을 안내한 책도 여러 권 펴냈습니다. 자신의 정원처럼 화사한 미소로 설명해 주고 손 흔들어 배웅한 그가 얼마나 정성스레 정원을 돌볼지 짐작이 됩니다.● 삶의 공간을 지켜내는 실천일행 중에는 10년 전 롯카노모리에 와 봤던 분이 있었습니다. “꽃무늬 포장지가 예뻐서 과자 사러 또 왔어요.” 이 포장지에는 그럴 만한 이야기가 있더군요. 제과 회사 롯카테이를 창업한 고(故) 오다 도요시로(小田豊四郎) 씨는 “지역 문화는 과자를 보면 알 수 있다”며 음식을 통한 마을 만들기에 앞장섰습니다. 1960년엔 동시(童詩) 잡지도 창간했어요. 표지 그림을 그리던 산악 화가가 해당화를 비롯한 여섯 송이 꽃을 그린 그림이 롯카테이 포장지이고, 그 꽃들을 심어 2007년 문을 연 정원이 롯카노모리입니다.마음을 차분하게 정돈해주는 곳이었어요. 언덕과 숲 사이로 졸졸 흐르는 물은 투명하리만큼 맑았어요. 그래서 물속에서 출렁이는 풀이 마치 머리를 감는 듯 보였나 봐요. 작은 오두막 갤러리들에는 지역 자연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고, 카페에서는 지역 농축산물로 만든 음료와 과자를 내놓았습니다. 한국에서 자연농법을 실천하는 분은 “한국에서는 우유를 안 마시지만, 환경이 건강한 이곳에서는 안심하고 마실 수 있겠다”고 했어요. 정원은 지역과 삶을 지켜내는 실천이었습니다.관람의 마지막 동선에는 카페와 기념품 가게가 있었습니다. 햇살이 내려앉는 통창 너머 정원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시간이 평화로웠습니다. 과자와 사탕뿐 아니라 정원의 꽃문양으로 디자인한 쿠션 커버와 앞치마도 마음을 설레게 했어요. 10년 전 꽃무늬 포장지와 쇼핑백을 고이 보관하고 이번에 다시 찾아온 일행분의 마음이 절로 이해됐어요.● 치유와 회복의 정원후라노(富良野)에 있는 ‘바람의 정원’은 정원→드라마→정원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보여줍니다. 1980년대 인기 드라마 ‘북쪽 나라에서’(후지TV) 대본을 쓴 일본 유명 극작가 쿠라모토 소우(倉本聰) 씨는 우에노 씨에게 뉴 후라노 프린스 호텔 골프장 터에 정원을 만들어달라고 의뢰했어요. 완성된 정원을 배경으로 탄생한 드라마가 ‘바람의 정원’(후지TV·2008년)입니다. 드라마 주인공은 바쁜 일상으로 가족과 멀어졌던 도쿄의 의사. 시한부 말기 암 진단을 받고 고향 후라노로 돌아와 아버지가 가꿔온 정원에서 가족과 화해합니다. 이 정원에는 드라마 장면을 그대로 옮겨온 공간들이 곳곳에 있어요. 정원을 배경으로 드라마를 만들고 드라마를 추억하는 시청자들이 정원을 찾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식물은 치유와 회복의 상징이에요. 정원을 둘러보니 ‘만져 보세요’라는 안내가 있었어요. ‘이 식물은 램스 이어(Lamb’s Ear)입니다. 어린 양의 귀처럼 보드라워요!’ 그 촉감이 어찌나 마음을 어루만져주던지요.오비히로에 있는 시치쿠 가든은 고(故) 시치쿠 아키요(紫竹昭葉) 할머니가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63세에 “어릴 적 들꽃 사이를 뛰놀던 풍경을 만들고 싶다”며 가꾸기 시작한 정원이에요. 할머니는 4년 전 새벽에 정원을 돌보다가 꽃씨를 든 채 쓰러져 남편 곁으로 갔죠. 그 이후가 궁금했어요. 이번에 가보니 할머니의 손자가 씩씩하게 정원을 가꾸며 손님을 맞았어요. 할머니가 즐겨 쓰던 꽃 모자를 비치해 누구나 써볼 수 있게 하고 “이렇게 비스듬히 써야 예쁘다”며 사진 촬영 각도까지 챙겨줬어요. 시치쿠 할머니, 걱정 없이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면 되겠어요.남편과 걷는 뒷모습이 내내 아름다웠던 여성분이 있습니다. 닷새간의 홋카이도 정원여행을 마칠 무렵, 숲에서 찾았다며 네 잎 클로버를 제게 선물로 건넸습니다. “홋카이도에 와서, 정원은 꽃을 보러 오는 곳이 아니라 빛과 바람을 느끼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땅의 온기와 부지런함도 배웠어요. 두고두고 기억할게요.” 고맙습니다. 제 마음도 딱 그래요. 함께 걷고 웃던 정원의 기억을, 네 잎 클로버와 함께 오래오래 간직하겠습니다. 아사히카와·오비히로·후라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2025-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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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연기념물 식물의 고고한 색, K-화장품에 물들다

    궁궐 창문을 열면 눈앞에 고운 풍경이 펼쳐진다. 매서운 겨울 끝에도 굴하지 않고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 여름 장마 속에서 황금빛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모감주나무. 전통이 간직한 이 빛깔과 향기가 K-화장품으로 거듭났다.국가유산청과 K-뷰티 대표 기업인 클리오가 K-컬처 확산을 위해 최근 선보인 ‘프로 아이 팔레트 에어 헤리티지 에디션’ 얘기다. 국가유산의 가치를 담아낸 특별한 스토리텔링 상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천연기념물 식물이 눈가에 피어나다첫 번째 눈화장 제품인 아이 팔레트는 천연기념물 매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매화는 한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가장 먼저 피어나는 꽃으로, 고려와 조선의 문인들이 시와 그림으로 남겼다. 매화는 인내와 고결, 풍류와 강인한 정신을 상징한다. 이를 담아낸 20호 ‘매화 빛 댕기’는 은은한 분홍색 톤으로 절제된 기품을 표현한다.두 번째 팔레트는 천연기념물 모감주나무의 꽃 색상과 황금빛 열매를 구현했다. 모감주나무 군락지는 오랜 세월 한국인의 생태 문화와 함께 했다. 21호 ‘모감주 밑 서재’는 가을빛을 담은 갈색 톤으로 안정감과 깊이를 전한다.두 제품은 자연스러운 색감과 음영을 선호하는 요즘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춰 번들거림과 반짝임을 없앴다. 매끈한 질감과 깊이감 있는 색상이 한국적 미의식 속 절제된 아름다움과 맞닿는다.>> 고증까지 고려한 궁궐의 품격이번 제품 기획의 모티브는 궁궐 속 풍경에서 출발했다. 올리브영 단독 기획 세트의 창틀 디자인은 창덕궁 돈의문이다. 마치 궁궐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서는 느낌이다. 단품 상자 디자인에는 창덕궁 부용정과 낙선재 뒤편의 상량정이 적용됐다. 단청 문양은 경복궁에서 따왔다. 모두 국가유산청의 디지털 데이터를 기반으로 디자인됐다.부용정과 상량정 이미지에는 빛에 따라 은은하게 반짝이는 효과를 줘 전통 자개가 빛나는 듯한 고급스러운 인상을 전한다. 단순한 패키징을 넘어 소비자들이 전통적 미감을 현대적으로 경험하게 했다.팔레트 용기의 양쪽 끝 창틀 밖으로는 매화와 모감주나무의 풍경이 펼쳐진다. 왕비가 창가에 앉아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화장을 즐기는 장면이 절로 연상된다. 전통 요소를 현대 소비자에게 감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국가유산청과 클리오가 치밀하게 고민한 결과다.>> 영친왕비 댕기 영감받은 한정판 굿즈올리브영 단독 기획 세트에는 댕기 머리 장식(스크런치)이 포함됐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왕실 유물인 영친왕비의 앞 댕기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한정판 패션 굿즈다. 클리오는 ‘역사를 손에 쥐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영친왕비 댕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MZ세대 소비자들이 소장 가치를 느껴 열광적으로 구매에 나섰다.이번 협업은 소비 트렌드를 정확히 읽어낸 전략이 통했다. 국가유산이라는 확실한 내러티브를 상품에 입혀 차별화했다. 이달 초엔 호작도 여권 케이스를 선보여 ‘케데헌’(케이팝 데몬 헌터스) 열풍을 이어갔다. 상당수 외국인 관광객이 한국 방문 때 올리브영을 찾는다는 점에 착안해 ‘한국을 기념하는 아이템’으로 제공했다.허민 국가유산청장은 “우리 정체성과 자부심을 일깨워주는 국가유산과 K-뷰티가 만나 K-컬처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돼 뜻깊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협업을 통해 우리 유산의 가치를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될 K-헤리티지 한류이 프로젝트의 성공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홍보전략도 큰 역할을 했다. 클리오는 광복절 전날 밤 9시, 국가적 상징성이 큰 시점에 맞춰 신제품 홍보 콘텐츠를 공개했다. 출시 맥락과 시의성이 맞아떨어지며 큰 파급력을 일으켰다. X(구 트위터)에서는 해당 콘텐츠가 119만 뷰를 기록했다. 댓글에는 “역사와 뷰티의 만남이 감동적”, “소장각”, “한국 여행 가면 꼭 사야겠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서도 언박싱 영상과 뷰티 크리에이터들의 자발적 리뷰가 쏟아졌다. “발색과 제형이 뛰어나면서도 전통 스토리가 특별하다”는 긍정적 평가가 많았다. SNS·오프라인 소비 연결의 모범사례로 평가된다.이번 판매 수익의 일부는 국가유산 보존과 가치 확산에 기부된다. 왕실 유산 가운데 동·식물 문양을 품은 유물의 보존 처리에 쓰일 예정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화장품을 구매하는 순간 국가유산의 보존과 활용에 기여하는 셈이다. ‘아름다움을 소비하며 지켜낸다’는 새로운 개념으로 동참의 의미를 강화하게 된다.한현옥 클리오 대표는 “이번 국가유산청과의 협약은 클리오가 소중한 국가유산을 지키고 계승하는 새로운 문화적 여정의 출발점”이라며 “K-뷰티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지금, 기획 상품 개발과 수익 기부를 통해 전통문화와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다.국가유산청과 클리오는 앞으로도 국가유산을 모티브로 한 다양한 기획 상품을 개발하고, SNS를 통한 글로벌 홍보전략을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이는 K-팝과 K-드라마를 넘어 K-헤리티지가 새로운 한류의 축으로 자리매김할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궁궐 창틀 사이로 보이는 매화와 모감주의 풍경처럼 한국의 전통은 오늘날 세계인의 일상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2025-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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