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호

황성호 기자

동아일보 히어로스쿼드

구독 55

추천

입사 후 대부분의 시간을 사회부에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 주로 범법 행위들을 기사로 쓰고 있습니다.

hsh0330@donga.com

취재분야

2026-05-31~2026-06-30
칼럼50%
사회일반27%
사건·범죄17%
국회3%
검찰-법원판결3%
  • [오늘과 내일/황성호]피싱도, 사기도 ‘대포통장’ 막아야 잡힌다

    대포통장을 이용한 주식투자 사기 사건 피해자 김모 씨를 만나기 위해 3월 말 서울 관악구의 한 빌라를 찾았다. 판결문에 나온 그의 주소지에서 2시간째 기다리며 40대로 추정되는 남성을 기다렸지만 집으로 들어선 건 70대 노인이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는 대뜸 “사기꾼이 합의하자고 먼저 나타나지 않는 이상 피해금은 잃어버린 돈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김 씨의 전 장인이라고 했다. 김 씨는 수년 전 사업에 실패한 뒤 노인의 딸과 이혼했고, 현재는 집을 구하지 못해 주소지만 노인의 집에 올려놨다. 노인도 김 씨를 보지 못한 지 10년은 됐다고 했다. 경찰관으로 일하다 은퇴한 이 노인 역시 수년 전 수천만 원을 잃은 사기 피해자였다. 해외에서 붙잡히지 않는 사기꾼들 ‘검은돈의 혈관, 대포통장’ 시리즈를 취재하며 만난 대다수의 사기 피해자가 노인과 같은 체념을 하고 있었다. 온라인 뱅킹이 일상화된 요즘엔 사기 사건을 당하면 피해금은 5분 만에 해외로 빠져나간다. 그러다 보니 돌려받지 못한다. 2024년 보이스피싱 사건 피해금 환수율은 22.2%에 그쳤다. 주범을 잡아야 피해금을 받아낼 수 있을 텐데 대부분의 사기 사건 주범들은 주로 해외에서 머물며 범죄를 저지른다. 주식 투자 사기나 온라인 도박도 마찬가지다. 이들을 일망타진하기 어려운 건 해당 국가와의 수사 공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시리즈 취재 과정에서 유령회사 ‘대한퍼스트’의 설립자 김철민(가명)이 잡혔지만 윗선들은 여전히 해외에 머물고 있단 사실도 알게 됐다. 이들에 대한 수배령이 떨어진 지 수년이 넘었지만 이들은 잡히지 않았다. 이 사건을 수사한 김봉식 인천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 팀장에 대해 김철민의 변호사조차 ‘사건에 진심인 사람’이라고 부를 정도로 윗선을 집요하게 추적했지만 개인의 노력만으론 역부족이었다. 취재진은 윗선의 흔적을 쫓기 위해 대포통장에 주목했다. 사기꾼들이 범죄수익금을 세탁하며 추적을 피하기 위해 대포통장을 필수 도구처럼 쓰기 때문이다. 2003년 ‘대포통장’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노숙자의 개인 통장을 헐값에 사들여 쓰는 게 일반적이었다. 23년이 지난 현재 범죄자들은 더 이상 노숙자를 찾지 않는다. 대포통장 공급 조직마저 생겨나 텔레그램과 같은 온라인상에서 손쉽게 명의를 제공하겠다는 이들을 모집하고 통장을 찍어낸다. 김철민처럼 회사 한 번 세워 본 적 없었던 이들이 유령 회사를 차려 통장을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6일에 불과했다.국내서도 사기꾼 숨통 조일 수 있어 최근 범죄 수법을 보면 대포통장 공급은 체계화된 기업형 비즈니스가 됐다. 불법적으로 범죄조직에 거래되는 대포통장 중 비싼 것은 개당 2000만∼3000만 원에 달한다고 한다. 2003년 25만 원 수준이었던 가격이 100배 이상 뛰었다. 대포통장 공급 조직은 명의 제공자를 해외에 머물 수 있게 하면서 한 달에 300만∼400만 원의 월급까지 준다. 명의 제공자가 자신의 통장에 범죄수익금 수억 원이 수시로 들락날락하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돈에 손대지 못하게끔 ‘당근’을 던져주는 셈이다. 이처럼 범죄 인프라가 견고해지고 가담자가 조직적으로 양산되는 구조에선 말단의 명의자나 해외 총책을 쫓는 것만 대책이 될 순 없다. 국경 밖 사기꾼을 당장 국내로 잡아 올 수 없다면 결국 국내에서 그들의 숨통을 조여야 한다. 대포통장으로 흘러 들어간 피해자의 돈이 국경을 넘기 전에 말이다. 유령 회사를 척결하는 영국의 방식이든, 각 기관이 공조하는 호주나 싱가포르의 방식이든 방법을 찾는 게 정부와 수사기관의 의무다. 황성호 히어로콘텐츠 팀장 hsh0330@donga.com}

    • 2026-06-2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단독]경찰, 대포통장 ‘안준호 일당’ 수사 속도… 통장 집중개설 신협 지점 겨냥

    유령 회사 8개로 최소 60개의 대포통장을 찍어낸 안준호(가명·31) 일당과 관련해, 경찰이 통장을 무더기로 발급해 준 경남 진주시의 한 신용협동조합(신협) 관계자들을 조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금융감독원이 공개한 보이스피싱 통장 1만6854개를 분석해 제보(22일자 A3면 참조)한 내용을 바탕으로 경찰이 본격적인 수사에 나선 것이다. 25일 경찰 등에 따르면 안준호 일당을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로 수사 중인 광주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전날 진주시의 한 신협 지점을 찾아 복수의 관계자를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했다. 경찰은 해당 관계자를 상대로 회사 주소지가 광주인 안준호 일당에게 진주의 신협에서 50개가 넘는 통장을 발급해 준 이유 등을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준호 일당의 회사 8곳이 만든 회사 대포통장은 올해 1월에서 지난달 14일까지 총 60차례 보이스피싱에 쓰인 것으로 확정된 상태다. 단일 대포통장 공급 조직 중 보이스피싱에 쓰인 회사 대포통장을 공급한 규모로는 올해 최대다. 이 통장 중 57개가 이 신협에서 발급됐다. 앞서 경찰은 법원으로부터 통장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안준호 일당이 만든 통장의 자금 흐름을 분석하며 이들이 범죄 자금을 세탁한 경로를 면밀히 따진 것으로 전해졌다. 안준호 일당의 통장은 보이스피싱뿐만 아니라 지난해 초 온라인 도박에도 쓰인 것이 드러난 상태다. 경찰은 31세로 별다른 범죄 경력이 없는 안준호의 윗선이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경찰은 안준호 일당과 같은 대포통장 공급 조직이 한 개의 은행에서 무더기로 통장을 발급받은 사례인 대구 달서구 이곡새마을금고 사건 등을 분석해 수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협중앙회 측은 “이번 사건에서 회사 통장 개설과 관련해 미흡한 점이 발견될 경우 중앙회 차원에서 관리 감독 등을 개선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해당 신협 지점 측은 본보의 해명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임재혁 기자 heok@donga.com}

    • 2026-06-2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대포통장 차단” 법원-정부-국회 나섰다

    법원과 정부, 국회가 대포통장의 몸통으로 꼽히는 유령 회사에 대한 본격적인 단속에 나선다. 보이스피싱 등 각종 범죄의 수익을 실어 나르는 ‘검은돈의 혈관’인 대포통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제히 대책 마련에 나선 것. 25일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유령 회사가 의심되는 사례를 인공지능(AI)으로 걸러내 국세청·경찰·은행에 공유하고, 회사 설립 단계부터 차단하는 시스템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법원행정처는 “회사 등기 제도가 대포통장 개설 등 금융 범죄에 악용되는 상황에 깊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며 “이를 막을 ‘법인정보 통합관리’ 시스템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히든: 검은돈의 혈관, 대포통장’ 시리즈(22∼25일자)에서 기관 간 정보 칸막이 탓에 유령 회사와 대포통장이 방치되는 문제를 조명했다. 정부도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국무조정실이 출범한 전기통신금융사기 통합대응단은 26일 금융 당국 등 관계 기관을 모아 대책 회의를 연다. 이어 다음 달 2일에는 금융위원회가 주관하는 ‘금융권 대포통장 근절 회의’가 열린다. 금융 당국뿐 아니라 은행연합회, 상호금융중앙회 등이 참가해 머리를 맞댄다. 국회도 관련 입법에 나섰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이광희 의원은 유령 회사 감독 책임을 강화하는 법안의 발의를 준비 중이다. 관련 법안에는 흩어진 유령 회사 감독 권한을 한데 모으고 사전 관리를 강화하는 내용이 담겼다.임재혁 기자 heok@donga.com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

    • 2026-06-2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법원, AI로 ‘대포통장 몸통’ 잡는다… 국세청-경찰-은행에 신속 공유

    25일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대포통장 단속과 관련해 “제도 남용을 예방하기 위해 ‘법인정보 통합관리’ 시스템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포통장은 유령 회사 등 가짜 명의로 개설돼 보이스피싱 등 범죄에 악용되는 통장이다. 법인정보 통합관리 시스템의 핵심은 유령 회사의 이상 징후를 포착해 신속히 공유하는 것이다. 짧은 기간에 회사를 여러 개 세우거나, 서로 다른 회사 서류에 같은 사람·주소가 반복 등장하는 경우를 인공지능(AI)으로 골라내 국세청, 경찰, 금융기관에 넘겨 대포통장의 ‘몸통’부터 막겠다는 것이다. 관련 기관으로부터 수사 이력 등을 넘겨받아 유령 회사를 설립 단계부터 차단하는 방안도 검토한다. 의심 요건에 해당하면 실제 사업 여부를 증명할 서류를 추가로 요구하는 방식도 논의된다.● 정부, ‘정보 칸막이’ 해결 위해 합동 회의 소집법원이 대책 마련에 나선 건 대포통장을 찍어 내는 유령 회사가 비슷한 패턴을 보이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1월 1일부터 지난달 14일까지 금융감독원에 오른 보이스피싱 통장 1만6854개를 분석한 결과 이를 가장 많이 발급한 상위 5개 회사의 서류에 모두 안준호(가명·31)의 이름이 등장했다. 이들 회사 임원은 도박 사이트 개설과 문서 위조 전과자 등으로 채워졌고, 주소만 빌려주는 비상주 사무실을 썼다. 한 사람이 여러 회사 서류에 반복 등장하는 패턴이 뚜렷한 만큼, 이런 흔적만 잘 추려도 의심 회사를 걸러낼 수 있다는 게 법원행정처의 판단이다. 국무조정실이 만들고 경찰청이 운영하는 전기통신금융사기 통합대응단은 26일 금융위원회, 국세청 등과 함께 ‘법인 명의 대포통장 대응 관계 부처 실무회의’를 연다. 각 기관이 그동안 따로 추진해 온 대책을 한자리에서 공유하고, 중복되거나 비어 있는 부분을 점검할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 당국도 자체 대책을 준비 중이다. 지금은 보이스피싱 등 사기 피해에 대해서만 송금에 동원된 통장을 최대 72시간 임시로 막아 두는데, 범죄 종류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의심 거래가 확인되는 ‘모든 대포통장’에 이 조치를 그대로 확대 적용하는 방안을 금융위원회가 검토하고 있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이상 거래를 탐지하는 AI 에이전트를 개발 중”이라고 밝혔다. 금융위는 다음 달 2일 금감원 금융사기대응단장과 은행연합회, 저축은행중앙회 및 상호금융중앙회 담당을 불러 대포통장 근절 회의를 열기로 했다.● 檢 “유령 회사 ‘해산명령’ 적극 활용” 이미 있는 제도를 적극 쓰는 방안도 나왔다. 회사를 세운 목적 자체가 불법이면 검사 등이 청구해 법원이 회사를 강제로 없앨 수 있는 ‘해산명령’ 제도다. 법인격을 완전히 박탈하기 때문에 대포통장을 추가로 만들 수 없게 되는 등 효과가 크지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아 활용 사례가 적었다. 유령 회사 ‘대한퍼스트’도 국세청에선 폐업 처리됐지만 해산으로 이어지지는 않아 그 명의로 만든 대포통장은 보이스피싱과 투자 사기 등 총 189명의 피해자를 양산했다. 대검찰청은 앞으로 유령 회사에 대한 해산 절차를 활성화할 방침이다. 최근 경기 의정부지검이 판결문 분석 등을 통해 법인 14곳의 해산명령을 청구했는데, 이 중 3곳이 대포통장 유통만을 목적으로 한 유령 회사였다. 대검은 “유령 회사 해산 등을 별도 전산 시스템으로 관리하고, 관련 통장이 범죄에 악용되지 않도록 전담 체계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해산명령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유령 회사가 범죄에 쓰였다는 걸 확인한 시점은 이미 피해가 벌어진 이후다. 미리 들여다보고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기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로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금감원의 보이스피싱 통장을 분석한 결과 통장이 가장 많이 적발된 회사 10개 중 최소 7개가 아직 해산되거나 청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통장을 내주는 은행 쪽의 허점도 여전하다. 더불어민주당 서삼석 의원이 농협중앙회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통장 개설 시 해당 회사가 실제로 영업하는지 등을 점검하는 ‘실사’를 조건부로 실시한다고 돼 있지만, 중앙회의 감시가 닿지 않는 지역 단위농협의 경우 이를 지키지 않는 경우가 빈번했다. 새마을금고도 마찬가지다. 대구 달서구 이곡새마을금고에서는 임직원이 대포통장 조직과 짜고 자체 감사망을 피해 유령 회사 명의의 대포통장을 무더기로 내준 사례도 있었다. 서 의원은 “특히 농어촌 지역의 고령화가 심화하는 상황에서 농협과 수협은 실효성 있는 대응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與 이광희 의원 “대포통장 근절 법안 발의” 새로운 권한을 만드는 일은 결국 입법으로 풀어야 한다. 지금은 회사 감독 기능이 국세청과 법원 등기소에 나뉘어 있어, 어느 한 곳도 유령 회사 전체를 책임지지 않는다. 회사를 누가 책임지고 들여다볼지가 명확하지 않다 보니, 문제가 생겨도 서로 책임을 미루기 쉬운 구조다. 이에 따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민주당 이광희 의원은 회사 감독 기능을 한곳으로 모으고 위험한 회사를 우선 단속하는 내용의 법안 초안을 국회 법제실에 검토 요청했다. 이 의원은 24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동아일보 ‘히든: 검은돈의 혈관, 대포통장’ 시리즈(22∼25일자) 기사를 공유하며 “대포통장이 더 이상 단순한 금융사기 수단이 아니라, 각종 범죄 수익이 흘러가는 ‘검은돈의 혈관’이 되고 있다”며 “범죄 수익의 흐름을 선제적으로 차단하고 신종 비대면 사기까지 촘촘하게 방어할 수 있도록 후속 입법에도 속도를 내겠다”고 밝혔다.임재혁 기자 heok@donga.com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손준영 기자 hand@donga.com주현우 기자 woojoo@donga.com}

    • 2026-06-2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대포통장 공장’ 통째로 날린 英… 잔가지만 치는 韓[히어로콘텐츠/히든④-上]

    6일 영국 런던 한복판에 있는 할리 스트리트. 고급 의료단지로 유명한 이 거리를 따라 걷자, 고풍스러운 4층 건물이 나타났다. 29번지라고 적힌 목조 대문 옆엔 병원 안내판만 붙어 있었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 나올 법한 이 건물이 7년 전만 해도 영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대포통장 공장’이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웠다.2001년 이곳에 문을 연 회사 설립 대행업체 ‘포메이션 하우스’는 전 세계 45만 개가 넘는 유령 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들은 통장을 무더기로 만들어 보이스피싱 조직 등에 팔았다. 가짜 명의로 범죄 자금을 주고받는 대포통장이었다. 이렇게 흘러간 돈이 총 3억 파운드(당시 약 4462억 원)에 이르는 정황이 2019년 드러났다. 대포통장을 검은돈의 혈관에 비유한다면, 이 건물은 그 피를 돌게 만든 심장이었던 셈이다.현재는 이곳에서 검은돈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대포통장의 ‘몸통’인 유령 회사를 방치해선 안 된다는 여론이 들끓자, 정부가 이를 정조준한 대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포메이션 하우스는 2021년 해산됐다.반면 한국 정부는 통장을 하나씩 막는 데 머물러 있다. 그사이 유령 회사는 활개를 친다. 투자 사기로 전세금 4500만 원을 잃은 유종수(가명·80) 씨도, 보이스피싱으로 2억2800만 원을 뜯기고 신용유의자가 된 송현숙 씨(71)도 모두 실체가 불분명한 회사의 대포통장에 당했다.유령 회사를 신속히 단속할 권한이 있는지가 한국과 영국의 격차를 만들었다. 영국은 회사 관리책임을 기업청 한 곳에 몰아주고, 유령 회사를 직권으로 폐쇄할 권한까지 줬다. 하지만 한국은 회사의 관리 기능이 법원과 국세청에 나뉘어 있다. 통장은 은행이 따로 맡는다. 책임이 여러 곳에 나뉘어 있으니 누구도 확실히 책임지지 않는다. 이를 틈타 이미 문 닫은 회사의 통장이 다시 범죄에 쓰이는 일까지 벌어진다.전문가들은 세 갈래 해법을 제시한다. 첫째, 흩어진 단속 책임을 하나로 모아 유령 회사를 직접 제재하는 영국식 제도다. 둘째, 정보를 가진 모든 기관이 실시간으로 범죄 단서를 나누는 호주·싱가포르식 합동 대응이다. 셋째, 지금은 보이스피싱에만 적용되는 대포통장 동결 제도를 신종 사기와 마약 등으로 넓히고, 감시가 취약한 지역 단위농협 등 제2금융권과 가상계좌까지 아우르는 감시망을 세우는 것이다.대포통장 ‘뿌리’ 뽑아라… 英, 한곳에 권한 몰아 年 1만 곳 해산시켜韓, 회사설립은 법원-등록 국세청거래 정보는 은행으로 권한 쪼개져폐업회사 통장 거래 파악도 어려워英, 기업청에 감독-해산 권한까지대포통장 신속 정지로 피해 줄여“대포통장을 하나하나 막는 데 그쳐선 안 됩니다. 유령 회사라는 ‘뿌리’를 뽑지 않으면 자금 세탁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4일(현지 시간) 영국 맨체스터대 연구실에서 만난 니컬러스 로드 범죄학과 교수는 “자금 세탁 범죄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 자체를 겨눠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로드 교수는 영국 정부의 사기 방지 정책 자문위원과 유럽 조직범죄 실무단(EUROC) 의장을 지낸 자금세탁방지 전문가다. 연구실 벽에 빽빽하게 붙은 자금세탁 범죄 관련 자료가 그간 영국이 벌여온 ‘유령 회사와의 전쟁’을 짐작게 했다. 그는 “오랜 기간 유령 회사가 범죄에 악용되는 구조를 연구해 온 결론은 하나, 대포통장이 범죄에 쓰이면 그 주인인 회사 자체를 폐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만난 국내외 자금세탁 방지 전문가의 진단은 같았다. 곁가지인 개별 통장과 거래를 막는 데 급급하기보다, 대포통장을 찍어내는 범죄 생태계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범죄 자금은 보통 개인 통장을 거친 뒤 한 번에 큰돈을 빼낼 수 있는 회사 통장을 통해 현금으로 빠져나간다. 그 핵심 길목인 회사 통장, 나아가 통장을 찍어내는 유령 회사를 잡지 않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취지다.● ‘허위 서류’만 확인돼도 폐쇄영국 정부는 가짜 회사를 직접 폐쇄할 권한을 갖고 있다. 2023년 경제범죄·기업투명성법(ECCTA)이 시행되면서, 범죄가 의심되거나 허위 정보로 세운 회사를 발견하면 정부가 직권으로 ‘출생 신고’에 해당하는 등기를 지울 수 있게 됐다. 유죄 확정을 기다릴 것도 없이, 서류가 거짓이란 점만 드러나면 회사 문을 닫는다는 뜻이다. 당시 정부 대책을 진두지휘한 존 펜로즈 반부패 총괄 대표는 “범죄 조직이 영국의 사법 시스템을 통해 더러운 돈을 유통하는 걸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그 첫 작품이 ‘해머 헤드 작전’이었다. 영국 기업청이 국세청, 국가범죄청(NCA) 등 기관과 협력해 한국의 ‘비상주 사무실’과 비슷한 회사 설립 대행업체를 집중 점검했다. 허위 정보를 적어 냈거나 진짜 주인을 숨긴 회사를 솎아냈다. 이 작전을 통해 해산시킨 유령 회사가 지난해에만 1만1500개에 이른다. 마틴 스웨인 영국 기업청 정보·수사기관 협력국장은 “ECCTA 통과는 1844년 회사 등록 제도가 생긴 이래 가장 중요한 개혁”이라며 “범죄 정황이 의심되면 여러 정부 기관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 대응 체계가 가동된다”고 설명했다.한국은 정반대다. 회사 통장이 범죄에 쓰인 게 확실해도 곧장 문을 닫을 수 없다. 유일한 길인 해산 명령도 검사의 청구와 법원의 판단을 거쳐야 해 적어도 몇 달이 걸린다. 이런 제도의 격차는 적발 실적으로도 드러난다. 디지털금융범죄대응연구소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적발된 대포통장 주인은 2024년 기준 영국이 332.8명, 한국은 290.1명이었다. 한국의 대포통장 범죄가 영국보다 덜해서가 아니라, 영국이 그만큼 더 잡아내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법원 따로, 국세청 따로… ‘좀비 통장’ 방치차이는 권한이 쪼개진 데서 비롯한다. 한국은 회사의 설립 등기는 등기소, 사업자등록은 국세청이 맡고, 거래 정보는 은행과 금융정보분석원(FIU)에 흩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폐업한 회사가 통장을 계속 써도 알아채기 어렵다. 회사는 사라졌는데 통장만 살아 움직이는 ‘좀비 통장’이다. 실제로 국내 대포통장 조직이 세운 유령 회사 ‘대한퍼스트’가 그랬다. 2023년 10월 국세청에서 폐업 처리된 뒤에도 통장이 석 달 가까이 도박 사이트와 보이스피싱, 투자 사기에 동원됐다. 한국엔 문 닫은 회사 통장이 범죄에 쓰여도 막을 권한을 가진 기관이 없다. 국세청은 “폐업해도 청산 절차 등이 남아 있어 통장을 함부로 막기 어렵다. 통장을 막을 권한이 있지도 않다”고 말했다. 회사 등기 사무를 총괄 지원하는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설립 단계에서 실제 운영 목적 등을 심사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관계기관과 연계해 의심 회사를 조기 식별하는 등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영국은 다르다. 원래 회사 설립 절차 담당이던 기업청에 2023년부터 유령 회사 감독·해산 권한까지 몰아줬다. 그 덕분에 유령 회사의 통장은 신속하게 정지된다. 자금 세탁 방지 분야 권위자인 니컬러스 라이더 영국 카디프대 법학·정치학부 교수는 대한퍼스트 사례를 두고 고개를 갸웃하며 “영국에서는 극히 드문 일”이라고 했다. 그는 직접 정리한 유령 회사 적발 절차 자료를 기자에게 보여주며 “영국이었다면 기업청이 강력한 유령 회사 감독 권한을 쥐고 빠르게 정보를 공유해 신속하게 통장까지 없앴을 것”이라고 했다.● “의심 회사부터 골라내야”국내 전문가들은 회사 주소나 임원 이름 등을 토대로 ‘대포통장 공장’으로 의심되는 유령 회사를 선별하는 게 급선무라고 봤다. 오랜 기간 행정부(국세청)와 사법부(법원)가 관리를 나눠 맡은 상황에서, 바로 등기를 말소해 버리는 영국식 모델을 따라 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것. 그 때문에 기관 간 협력을 통해 감독 기능을 하루빨리 강화하고, 이미 드러난 의심 회사부터 제재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제언이다. 의심 회사 관련 정보를 수사기관에 실시간 전달해 신속하게 해산하는 방식이다.실제로 1995년생인 안준호(가명) 일당은 월 1만 원을 내면 주소를 빌려주는 비상주 사무실을 이용해 유령 회사를 최소 8개 세웠다. 이들 회사 통장은 올 들어 금융감독원의 보이스피싱 명단에 60차례나 올랐다. 그런데도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책임지는 기관이 없어서다.전문가들은 유령 회사를 감시할 책임을 명확히 정하자고 제안했다. 윤해성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금처럼 국세청, 금감원으로 쪼개진 구조에선 유령 회사와 대포통장에 빠르게 대응하기 어렵다”며 “각 기관이 협력하고, 위험 회사를 감독할 책임과 권한도 명확히 부여해야 한다”고 했다.회사와 통장을 만들 때부터 문턱을 높이자는 지적도 나온다. 일부 제2금융권에서는 서류 심사만으로 회사 통장을 발급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국무총리실 산하 정부 합동 부패예방감시단 총괄국장을 지낸 김우석 법무법인 명진 대표변호사는 “은행이 FIU에 의심 거래를 보고하듯, 의심스러운 회사 통장 개설 시도를 보고하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며 “통장을 만드는 사람에게 ‘허위로 만들면 처벌받는다’는 점을 분명히 알리도록 의무화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히든: 검은돈의 혈관, 대포통장’은 각종 범죄의 핵심 도구인 대포통장 문제를 조명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팀장: 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취재: 임재혁 손준영 조승연 기자▽사진: 박형기 기자▽편집: 봉주연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인터랙티브 기획: 김재희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희래 ND▽인터랙티브 디자인 및 영상: 정시은 CDQR코드를 스캔하거나 ‘히어로콘텐츠’(original.donga.com)에 접속하면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임재혁 기자 heok@donga.com손준영 기자 hand@donga.com조승연 기자 cho@donga.com}

    • 2026-06-2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호주, 사기신고 1초만에 은행 공유… 韓, 법원-국세청 빠져 ‘반쪽’[히어로콘텐츠/히든④-下]

    “내가 원하던 삶을 되찾았어요.”호주 퀸즐랜드주에 사는 리키 씨는 투자 사기로 날릴 뻔한 3억1000만 원 상당의 돈을 극적으로 되찾은 뒤 이렇게 말했다. 2024년 그는 온라인에서 찾은 가짜 투자회사에 속아 돈을 보냈다. 그러나 해당 통장이 과거 사기에 쓰인 적이 있다는 기록이 은행 간 시스템에 남아 있었다. 송금을 받은 웨스트팩 은행의 이상 거래 탐지 시스템은 곧바로 24시간 동안 거래를 중지했다. 범죄 조직이 돈을 빼내기 전, 피해금은 전액 리키 씨에게 돌아갔다.대포통장의 숨통을 끊는 무기는 바로 이런 ‘정보의 연결’이다. 보이스피싱이나 리딩방 사기의 단서는 경찰, 은행, 통신사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호주와 싱가포르는 부처와 민관 사이의 칸막이를 허물어 성과를 냈다. 반면 한국은 은행과 수사기관 등이 참여해 의심 통장 정보를 나누는 공유망 ‘ASAP’를 지난해 10월 가동하고도 핵심 정보는 연결하지 못했다. 유령 회사의 숨통을 쥔 국세청이나 등기소, 금융정보분석원(FIU) 등은 보이스피싱과 관련이 작아 보인다는 이유로 공유 범위에서 빠져 있기 때문이다. 대포통장의 몸통인 유령 회사를 잡을 정보가 여전히 칸막이에 갇혀 있는 것이다.● 블랙리스트, 전국 은행에 동시에 꽂혀리키 씨가 재산을 지킨 건, 호주에선 한 은행에서만 대포통장이 적발돼도 곧바로 전국 모든 은행과 통신사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기 때문이다. 호주 국가사기방지센터(NASC)가 참여하는 금융 범죄 정보 공유망(AFCX)에는 정부뿐 아니라 은행과 통신사, 플랫폼 기업이 참여한다. 어느 한 곳에 사기 신고가 들어오면 의심 통장과 전화번호가 참여 기관 전체에 1초 만에 공유된다. 고위험 거래에 대해 사전 경고뿐 아니라 직접 통화를 차단하고 거래를 보류시키는 적극적 조치까지 가능하다. 호주 정부는 이 정보망을 무기 삼아 지난해 4분기(10~12월)에만 사기 전화 1억990만 건과 문자메시지 4110만 건을 차단했다. 같은 회사가 여러 은행에 대포통장을 개설하는 ‘꼼수’를 부려도 걸러낼 수 있다.NASC는 상근 인력 31명 외에도 각종 신종 사기 대응법을 연구하는 민관 합동 조직 ‘퓨전 셀’도 운영한다. 경찰과 은행, 통신사의 실무자와 각 분야 교수 등 전문가가 한자리에 모여 전문 지식까지 나누는 것이다. NASC를 이끄는 호주 경쟁소비자위원회(ACCC) 공보 담당자 로지 자츨러 씨는 “여러 기관과 산업이 복잡하게 얽힌 신종 사기에 대응하려면 민관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설명했다.싱가포르는 한발 더 나아가 물리적 장벽도 없앴다. 2022년 싱가포르 경찰청 내부에 신설된 사기방지사령부(ASCom)에는 경찰과 6개 주요 시중은행 직원이 한 사무실에 모여 나란히 일한다. 이런 공조로 싱가포르 경찰은 2024년 한 해 약 1900억 원에 해당하는 사기 피해금을 회수했다. 또 약 5000억 원 규모의 추가 피해를 사전에 막았다.● 韓, 알맹이 빠진 ‘반쪽짜리 통합’한국도 움직이고 있다. 8월부터 개정 통신사기피해환급법이 시행되면 당사자의 동의 없이도 은행과 통신사, 수사기관이 보이스피싱 예방 목적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다. 기존엔 일부 은행권 안에서만 정보가 돌아, 금융감독원이나 수사기관과 양방향으로 공조하기 어려웠다.그러나 전문가들은 여전히 한계가 적지 않다고 지적한다. 첫째, 가장 중요한 정보가 빠졌다. 유령 회사 정보를 쥔 국세청과 등기소가 ASAP에 들어가 있지 않다. 대포통장의 몸통을 식별할 핵심 퍼즐이 없으니 수사기관은 매번 꼬리(개별 통장)만 쫓는다. 한 통장으로 수많은 가상계좌를 발급해 줄 수 있는 결제 대행사나 가상자산 사업자 등 범죄 자금이 흘러가는 우회로 역시 감시망 밖에 방치되어 있다. 반면 영국은 국세청, 기업청은 물론이고 도박업체까지 무려 200여 개 기관을 하나의 정보망으로 촘촘히 엮어 범죄의 퇴로를 막았다.둘째, 감시 범위가 좁다. ASAP는 현재 진행 중인 보이스피싱과 관련한 자금세탁에만 초점을 둔다. 금융위원회 금융안전과 관계자는 “과거 이력을 오래 쌓아 두면 개인정보 문제가 있어, 발생한 사건 정보를 중심으로 운영할 예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누적된 정보를 활용하지 않으면 대포통장을 누가 발급하고 어디서 사용하는지 패턴을 잡아내기 어렵다.셋째, 수사기관과 은행의 공조가 부족하다. 지난해 출범한 전기통신금융사기 통합대응단의 인력은 사실상 경찰 중심이다. 은행 직원은 한 명도 없다. 경찰과 주요 은행이 한자리에서 일하는 싱가포르와 대비된다. 통합대응단 관계자는 “아직 기관 간 정책 협력 수준에 머물러 있고, 실시간 공동 대응하는 구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설명했다. 은행이 포착한 의심 통장을 수사기관이 곧바로 받아 조치하는 직접 연결 고리가 없으면, 한발 늦은 대응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단서 한 줄’에 막힌 신종 사기 피해자 보호제도의 사각지대도 넓다. 사기 피해가 신고되면 입금에 쓰인 통장을 즉각 동결시키는 제도는 한국이 2011년 도입해 호주나 싱가포르보다 일찍 시행했다. 하지만 15년이 지난 지금껏 보이스피싱에만 적용하고 있다. 리딩방 사기와 같은 신종 범죄의 피해금은 즉각 동결시킬 수 없다. 이를 넓히는 통신사기피해환급법 개정안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이는 해당 법 2조의 단서, ‘재화나 용역의 제공을 가장한 경우는 제외한다’는 한 줄 때문이다. 단순 협박이나 대출 권유는 보이스피싱으로 보고 통장을 동결할 수 있지만, 대가를 약속하는 투자 사기나 로맨스 스캠의 피해자는 이 조항 탓에 보호받지 못한다. 서준배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는 “이런 단서를 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고 했다. 무분별한 신고로 인한 부작용이 우려되면 통장 동결 조치를 72시간으로 제한하거나 싱가포르처럼 허위 신고를 무겁게 처벌하면 된다는 얘기다.통장 동결 제도의 사각지대는 사법 체계에도 있다. 사기 피해자가 대포통장 주인들로부터 ‘돈을 줄 이유가 없다’며 소송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통장 주인이 보이스피싱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피해자가 입증해야 한다. 법에 익숙지 않은 피해자가 홀로 맞서다 보니, 소송을 당한 피해자가 10건 중 9건꼴로 진다. 반면 영국은 수사기관이 중심이 돼 법원에서 자금 흐름을 다툰다. 한국도 사기 신고가 반복된 통장이라면, 피해자가 아니라 통장 주인이 ‘정상 거래’임을 직접 입증하도록 구조를 뒤집자는 제언이 나온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히든: 검은돈의 혈관, 대포통장’은 각종 범죄의 핵심 도구인 대포통장 문제를 조명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팀장: 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취재: 임재혁 손준영 조승연 기자▽사진: 박형기 기자▽편집: 봉주연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인터랙티브 기획: 김재희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희래 ND▽인터랙티브 디자인 및 영상: 정시은 CDQR코드를 스캔하거나 ‘히어로콘텐츠’(original.donga.com)에 접속하면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임재혁 기자 heok@donga.com손준영 기자 hand@donga.com조승연 기자 cho@donga.com}

    • 2026-06-2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대포통장 신고했더니 되레 소송… 피해자 90%가 패소 [히어로콘텐츠/히든③-上]

    “그 사람들, 법원에서 범죄자라고 판결했어요?”이기철(가명·72) 씨는 기자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질문부터 쏟아냈다. 3월 25일 대전 동구의 한 빌라. 방 하나를 여러 세입자와 쪼갠 15.6㎡(약 5평) 남짓한 그의 거처엔 옷과 약봉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이 씨가 묻는 ‘그 사람들’이란 지난해 12월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조진수(39·가명) 일당이었다.조진수는 보이스피싱범과 손잡은 대포통장 조직이었다. 대포통장은 남의 명의로 만들어 범죄에 쓰는 통장을 말한다. 2023년 4월 이 씨가 보이스피싱에 속아 입금한 900만 원은 이 일당의 대포통장을 거쳐 가상자산(코인) 지갑으로 빠져나갔다. 사기 친 돈의 꼬리를 지우는 ‘돈세탁’이었다.괴롭힘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씨가 경찰에 신고하자 일당의 통장은 돈을 빼낼 수 없게 동결됐다. 그러자 조진수 일당은 통장 주인 이름으로 거꾸로 이 씨에게 소송을 걸었다. ‘나는 보이스피싱과 무관하고 물어줘야 할 빚도 없으니 통장을 풀어 달라’는 채무 부존재 확인 소송이었다. 적반하장식 소송이지만, 이기면 통장이 살아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안에 묶여 있던 피해자의 돈까지 합법적으로 빼낼 수 있었다. 변호사 비용조차 없던 노인은 홀로 법정에 섰다가 패소했다. 피해자가 ‘저들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직접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법원은 일당의 소송 비용도 이 씨가 부담하라고 판결했다.조진수 일당이 보이스피싱범으로 단죄된 건 지난해 12월이었다. 진상이 밝혀졌지만 이 씨의 돈은 돌아오지 않았다. 소송 결과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 씨는 자기가 당한 소송이 뭔지 끝내 모르겠다는 듯 “나는 그 재판이 저…, 어렵다”면서 “사기꾼들인데 징역 2년밖에 안 받았냐”고 자꾸만 물었다.최근 채무 부존재 확인 소송은 보이스피싱 조직의 무기로 변질되고 있다. 최근 5년간 법원 판결 306건을 분석해 보니 소송을 건 쪽이 277건을 이겼다. 승소율 90.5%. 이렇게 되살아난 통장 중 일부는 또 다른 피해자의 피눈물을 짜내는 데 다시 쓰였다.대포통장 동결은 사기당한 돈이 세탁돼 사라지는 직전에 붙잡아 두는 마지막 안전장치다. 그런데 그 장치를 합법적으로 풀어 버리는 통로가 법원에 열려 있는 셈이다. 왜 법원은 번번이 통장 주인의 손을 들어줬을까.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판결문 306건을 전수 분석해 그 실태를 쫓았다.‘정상거래’ 각본 짠 대포통장 조직, 피해자에 “갚을 빚 없다” 소송노후자금 900만원 털린 70대 신고사기꾼, 통장 묶이자 적반하장 소송1인2역 코인 거래 증거 치밀한 조작‘피해’ 증명 못한 피해자, 결국 패소사기극 밝혀졌지만 솜방망이 처벌이 씨 앞으로 법원 우편물이 날아든 건 2023년 4월 말이었다. 난생처음 받아 보는 소장(訴狀)이었다. 소송을 건 원고는 변주석(가명·36). 이 씨는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지만 실은 조진수 일당 중 한 명이었다. 소송 이름은 더 낯설었다. ‘채무 부존재 확인의 소.’ 변주석이 이 씨에게 갚을 돈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받겠다는 소송이라고 했다. 이 씨는 어리둥절했다. 그는 변주석에게 돈을 빌려준 적도, 얼굴을 본 적도 없었다.짚이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열흘 전 당한 보이스피싱이었다.● 5분 만에 증발한 노후 자금“금융감독원 서OO입니다. 이기철 씨 명의가 사기 조직에 도용돼 은행에서 6400만 원이 대출됐어요.”4월 13일 오후 6시경 걸려온 전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곧이어 인천지검 수사관이라는 남자가 전화를 걸어 왔다. 그는 “대출을 취소하려면 900만 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미심쩍었던 이 씨는 직접 인천지검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어 그런 수사관이 실제로 있는지 물었다. 진짜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 씨는 그 길로 900만 원을 송금했다. 모두 거짓이었다. 이 씨의 휴대전화는 해킹돼 있었다. 그가 건 전화는 가로채기를 당했다. 안내원인 줄 알았던 목소리도 보이스피싱 조직원이었다.이틀 뒤 이 씨는 경찰에 신고했다. 늦었다. 젊은 시절 공장에 다니고 타일을 붙이며 모은 돈은 송금 당일 대포통장 여러 개를 거쳐 추적이 어려운 해외 코인 거래소로 빠져나간 뒤였다. 걸린 시간은 단 5분. 피해금이 코인으로 바뀌기 전 송금된 계좌가 변주석 명의였고, 이 씨의 신고로 그 통장은 동결됐다. 소장은 그에 대한 응수였다.변주석은 법원에서 자신을 코인 환전업자로 포장했다. 고객 의뢰를 받아 정당하게 코인을 팔고 대금을 받았을 뿐인데 이 씨의 신고 탓에 통장이 막혀 손해가 막심하다는 주장이었다.● 소송까지 설계한 조직, 변호사도 못 구한 노인이 씨는 변호사를 구하러 대전지법 앞 법률사무소를 찾아갔다. 선임비가 500만~700만 원이라고 했다. 노후 자금을 털린 노인에게는 없는 돈이었다. 그는 변호사 없이 법정에 섰다.7개월 뒤 법원은 조진수 일당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도 이 씨가 보이스피싱 피해자라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발목을 잡은 건 대법원 판례였다. 조진수 일당이 “갚을 돈이 없다”고 주장하면, 갚을 돈이 있다는 사실은 이 씨가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기를 당한 피해자가 ‘저 사람은 사기꾼이 맞다’는 걸 스스로 입증해야 했다.칠순 노인이 범죄 조직을 상대로 들이밀 수 있는 증거는 ‘내가 보낸 돈이 5분 만에 변주석 통장으로 흘러갔다’는 거래내역표 한 장이 전부였다. 반면 조진수 일당은 고객과 주고받았다는 코인 거래 대화 내역까지 근거로 제출했다. 법원은 패소한 이 씨에게 조진수 일당 측 소송 비용까지 물렸다.뒤늦게 드러난 조진수 일당의 실체는 2023년 2월부터 보이스피싱 조직과 손잡고 움직인 전문 대포통장 조직이었다. 조진수 일당이 보이스피싱 범죄를 설계한 건 아니었지만, 그들의 대포통장이 없었다면 범죄는 이뤄질 수 없었다. 이들에게 소송은 사전에 기획한 세탁 공정의 마지막 단계였다.수법은 치밀했다. 일당은 자기들끼리 1인 2역을 했다. 다른 조직원은 대포통장의 주인인 척 변주석에게 “코인을 사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변주석은 코인 환전업자인 척 답장했다. 이 가짜 대화를 통째로 갈무리해 법원에 ‘정상 거래의 증거’로 낸 것이다.이들은 소송과 동시에 은행에도 통장 동결에 이의를 제기하며 같은 가짜 대화를 증거로 밀어 넣었다. 현행 제도상 통장 주인이 소송에서 이기면 은행은 동결을 풀어 줘야 한다는 허점을 정확히 찌른 것이다. 조진수 일당은 이 씨 사건 사흘 전 제주의 또 다른 피해자에게서 560만 원을 가로챈 뒤 똑같은 소송으로 통장을 되살렸다. 가짜 환전업자 행세와 허위 대화 내역, 수법도 판박이였다.● 조작극 잡았지만… 피해자는 싸울 힘 잃었다완전 범죄 같던 사기극은 1년여 뒤 엉뚱한 곳에서 금이 갔다. 조직원 한 명이 중고 거래 사기를 치다 경찰에 붙잡힌 것이다. 압수된 휴대전화에는 법원에 제출했던 ‘코인 대화’의 제작 과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기록을 넘겨받은 검찰이 대화를 한 줄씩 뜯어보자 허점이 드러났다. 이 사건을 수사한 임지수 대구지검 김천지청 부장검사는 “면밀히 따져 보니 대화가 오간 시간과 실제 돈이 움직인 시간이 맞지 않았다”고 했다. 검찰은 수사를 소송 사기로 확대해 일당을 재판에 넘겼다. 법원을 속여 동결 통장을 되살린 수법이 법정에 오른 첫 사례였다.올 4월 말 인천지법에서 이들의 2심 선고가 열렸다. 재판부는 “자금세탁책으로 보이스피싱 범죄에 핵심적으로 가담해 불특정 다수에게 막대한 피해를 줬다”며 “사회적 해악이 매우 크다”고 질타했다. 그런데 선고된 형량은 1심보다 오히려 가벼워졌다. 조진수는 징역 2년, 변주석은 징역 1년 6개월 등이었다. “최근 일부 피해자와 합의하고 피해금을 돌려주려 노력했다”는 게 감형 이유였다.선고 직후 법정을 나서는 일당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번졌다. 방청석의 가족과 지인을 돌아보기도 했다. 일주일 전 선고가 갑자기 미뤄졌을 때 굳은 얼굴로 빠져나가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일당 중 일부는 줄어든 형량마저 무겁다며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했다. 조진수 측은 “혐의 대부분을 인정하고 반성한다는 취지를 재판 중에 밝혔다”고 했고, 변주석 측은 “재판 과정에서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고, 피해자들과 합의도 진행했다”고 해명했다.그동안 이 씨의 삶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최근엔 코인 투자 사기까지 당해 남은 재산마저 잃었다. 두 번째 사기 사건도 범인이 대포통장을 써 추적이 어렵다는 이유로 수사에 진척이 없다. 보증금 100만 원인 방의 월세 22만 원은 간신히 기초연금으로 메우고 있다. 피해 후 쓰러져 혈압약을 먹기 시작했고, 한때 운전대를 잡고 해선 안 될 생각까지 했다. 그 뒤 병원을 찾아가 장기기증 서약을 했다. “언제 죽어도 장기는 멀쩡할 거 아니여. 병든 사람한테라도 이식해 주면…”이라고 했다.재심을 권한 사람도 있지만, 그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재판에서 또 지면 그 사기꾼 놈들 변호사 비용을 내가 물어내야 하잖아요. 난 이제 무서워서 법원 근처에도 못 갑니다.” 노인은 마지막 투지마저 잃었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히든: 검은돈의 혈관, 대포통장’은 각종 범죄의 핵심 도구인 대포통장 문제를 조명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팀장: 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취재: 임재혁 손준영 조승연 기자▽사진: 박형기 기자▽편집: 봉주연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인터랙티브 기획: 김재희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희래 ND▽인터랙티브 디자인 및 영상: 정시은 CDQR코드를 스캔하거나 ‘히어로콘텐츠’()에 접속하면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임재혁 기자 heok@donga.com손준영 기자 hand@donga.com조승연 기자 cho@donga.com}

    • 2026-06-2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28년 묵은 판례가 만든 면죄부… ‘그놈’은 웃으며 법정 떠났다[히어로콘텐츠/히든③-下]

    서울 동대문구에서 25년째 피아노를 가르쳐 온 송현숙 씨(71)는 보이스피싱 한 번에 모든 통장이 묶이고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설상가상으로, 피해금이 흘러간 통장의 주인에게 소송까지 당했다.● 2억 잃고 통장까지 묶인 70대시작은 2024년 12월 ‘가짜 검사’의 전화였다. 실존하는 검사의 이름을 댄 상대는 송 씨가 통장을 위조해 1억4000만 원을 투자받았다며 그를 범죄자로 몰아붙였다. 겁에 질린 송 씨는 시키는 대로 영상통화로 신분증과 휴대전화 화면을 내보였다. 일당은 그 정보로 인터넷은행에서 통장을 만들어 1억 원을 대출받았다. 수십 년 적금으로 모은 1억2800만 원에 대출 1억 원까지, 피해액은 2억2800만 원이었다. 은행 직원이 “보이스피싱 아니냐”고 물었을 때도 송 씨는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범인이 전화 너머에서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송 씨의 신고로 대포통장이 동결되자 소장이 날아왔다. 소송을 건 통장 주인은 베트남인이었다. 그는 “보이스피싱은 모르고, 한국 돈을 베트남 돈으로 합법적으로 환전해 줬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정상적인 환전이라면 돈을 받은 뒤에 내주는 게 순서지만, 그는 거꾸로 베트남 돈을 먼저 내준 것으로 드러났다. 그래도 결과는 송 씨의 패소였다.지금 송 씨에게 남은 건 체크카드 한 장이다. 다른 통장은 전부 묶여 20년 부은 보험까지 전부 해약해 대출을 갚았다. 이 일로 남편과는 별거 직전까지 갔다. 송 씨는 체념하듯 내뱉었다. “다 내 잘못인 것 같아요….”● 법정 세탁 4년 새 5배로… 피해자는 90% 졌다취재팀은 법원도서관에 공개된 2021~2025년 채무 부존재 확인 소송 판결문 중 보이스피싱에 연루된 통장의 주인이 제기한 것을 전수 집계했다. 소송을 당한 이가 보이스피싱 피해를 신고했다는 사실을 법원이 인정한 재판만 추렸다. 총 306건이었다.주목할 건 증가세다. 2021년 29건이던 소송은 지난해 156건으로 4년 새 5.4배로 늘었다. 소송이 늘어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기면 통장이 되살아나고, 그 안에 묶여 있던 피해금도 가져갈 수 있다. 통장도 다시 보이스피싱 등에 쓸 수 있다. 대포통장 조직으로선 손해 볼 게 없는 장사다. 이는 지하 금융권에 이미 공식처럼 퍼진 것으로 보인다.피해자가 진 비율은 지난해엔 91.7%까지 치솟았다. 통장 주인이 범죄 조직원으로 확인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피해자가 스스로 물증을 찾아 고소하거나, 이 씨 사례처럼 전혀 별개의 수사에서 우연히 증거가 튀어나와야 하기 때문이다.물론 자기 통장이 범행에 쓰인 줄 몰랐던 주인이 억울하게 묶인 통장을 풀려고 소송한 사례도 섞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판결문 상당수에는 돈이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흩어지는 등 정상 거래로 보기 어려운 정황이 담겨 있었다.● 28년 묵은 판례가 만든 ‘기울어진 운동장’법원이 수상한 통장 주인의 손을 기계적으로 들어주는 배경에는 1998년 대법원 판례가 있다. 통장 주인이 “갚아야 할 돈이 없다”고 주장하면, “있다”는 증거는 피해자가 대야 한다는 논리다. 당시만 해도 이 소송은 주로 계약서를 가진 기업끼리 다투는 데 쓰였다. 하지만 이 논리가 보이스피싱 사건에도 그대로 쓰이면서, 피해자가 “사기가 맞다”는 증거를 대야 하는 구조가 됐다. 피해자로선 수사도 안 끝난 상황에서 얼굴도 모르는 상대가 범죄 조직과 어떤 관계인지 알 도리가 없는데도 말이다.이 판례 탓에 법원은 통장 주인의 주장이 수상해도 그 손을 들어준다. 지난해 2월 서울남부지법은 총 2억6300만 원이 걸린 소송에서 피해자 3명이 아닌 통장 주인에게 승소를 안겼다. 재판부 스스로 “돈이 입금되자마자 몇 분 만에 다른 통장으로 이체되는 거래가 반복됐고, 코인 환전업자라고 주장하지만 거래 자료를 하나도 내지 않았다”고 지적했지만 결론을 바꾸지는 않았다. 피해자가 직접 사기 공모를 입증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석연찮은 해명도 법정에선 줄줄이 통했다. 대전지법 천안지원은 달러 1000만 원어치를 신고 없이 판 통장 주인에게도 승소 판결을 했다. 외화 거래 규정을 위반했다고 해서 그 거래 자체가 가짜라는 증거는 없다는 논리였다. 부산지법은 평일 저녁에 대포통장에서 흘러간 600만 원을 “결혼 축의금”이라고 주장한 주인의 손을 들어줬다.피해자들을 대리해 온 김기연 법무법인 클라스한결 변호사는 “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피해자가 상대와 보이스피싱 조직의 관계를 입증할 방법은 없다”며 “사기로 빈털터리가 된 피해자에게 소송이 2차 가해가 되는 셈”이라고 했다.● 수사 중에도 면죄부… 돈벌이 수단 삼는 로펌경찰 수사가 한창인데 원고가 이기는 일도 벌어진다. 지난해 7월 수원지법 안양지원은 총 3160만 원을 잃은 피해자 2명이 “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호소했는데도 통장 주인의 승소로 결론 냈다. 통장 주인이 피의자가 아닌 참고인 신분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부산지법 동부지원은 불법 환전을 한 정황이 있는 통장 주인에게 “그것만으로 보이스피싱 가담을 단정하기 어렵다”며 승소 판결을 했다.일부 법무법인은 이런 구조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 있다. 한 법무법인은 5년간 관련 소송 수십 건을 맡았는데, 홈페이지에 1998년 대법원 판례를 활용한 그동안의 승소 전략을 알리며 법의 허점을 파고든 소송을 광고했다. 이 법무법인 측은 “예전에 홍보한 내용이고, 최근에는 관련 소송을 많이 맡지 않는다”며 “수임 전에 자료를 충분히 검토하고 사기 연루가 아닌 정말 억울한 사례인 경우에만 수임한다”고 해명했다.통장 주인이 낸 소송에서 피해자가 단 한 번도 못 이긴 법원도 있었다. 인천지법은 2021~2025년 접수된 19건에서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통장 주인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대해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문제가 된 유형의 소송은 대법원 판결을 통한 판례 정립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사법행정 차원에서 개선할 만한 사항이 있는지 살펴보겠다”고 밝혔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히든: 검은돈의 혈관, 대포통장’은 각종 범죄의 핵심 도구인 대포통장 문제를 조명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팀장: 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취재: 임재혁 손준영 조승연 기자▽사진: 박형기 기자▽편집: 봉주연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인터랙티브 기획: 김재희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희래 ND▽인터랙티브 디자인 및 영상: 정시은 CDQR코드를 스캔하거나 ‘히어로콘텐츠’()에 접속하면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임재혁 기자 heok@donga.com손준영 기자 hand@donga.com조승연 기자 cho@donga.com}

    • 2026-06-2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한적한 시골 단위농협… 알고보니 ‘대포통장 발급 전국 2위’[히어로콘텐츠/히든②-下]

    “저희 지점이 대포통장 발급 전국 2등이라고요?”지난달 12일 경남 거창군 가조면에 있는 거창축협 가조지점. 사정을 들은 관계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인구 3394명의 농촌 마을, 직원 6명뿐인 작은 단위농협이다. 오전 11시부터 2시간 동안 지켜봤더니 창구를 찾은 고객은 12명이 전부였다. 대부분 노년층으로 단순 송금이나 보험 문의였다. 회사 명의로 통장을 만들러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그런데 이 한적한 단위농협이 최근 5년 동안 12번 범죄 기록에 이름을 올렸다. 금융감독원은 보이스피싱에 쓰인 대포통장을 모아 ‘채권소멸 사실 공고’라는 이름으로 공개한다. 잔액을 피해자에게 돈을 돌려주기 전에 소명받는 절차인데, 가조지점에서 발급한 회사 명의 통장 12개가 2021년 이후 이 목록에 올랐다. 전국 4800여 개 단위농협 지점 가운데 대구축산농협 대명역지점(13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수다.가조지점 관계자는 “전국 순위권인 줄 전혀 몰랐다”며 “지난해부터는 바깥 지역에 주소를 둔 회사의 통장 개설은 막고 있다”고 해명했다.● 범죄가 옮겨간 곳, 작은 단위농협최근 몇 년 새 대포통장 조직이 통장을 발급받는 은행이 급격히 제2금융권으로 바뀐 것으로 나타났다. 대포통장 조직이 통장을 받아내는 은행은 최근 들어 바뀌고 있다. 2021년만 해도 보이스피싱에 쓰인 회사 대포통장 중 80.9%인 4584개는 시중은행 등 제1금융권에서 발급됐다. 은행별로는 IBK기업은행이 1354개로 가장 많았고, 우리은행과 KB국민은행이 다음이었다. 상위 5개 은행 가운데 제2금융권은 단 한 곳도 없었다.하지만 지난해엔 제2금융권의 비중이 46.8%로 치솟았다. 통장 수로는 4년 만에 2.5배가 된 것. 지난해 말 기준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자산은 모두 합쳐 2684조 원으로, 단위농협과 새마을금고의 자산 합계(844조 원)의 3배가 넘었다. 그런데도 지난해 보이스피싱에 쓰인 회사 대포통장은 5대 시중은행(2095개)과 단위농협·새마을금고(1969개)가 엇비슷했다. 덩치는 3분의 1인데 범죄에 동원된 통장 수는 맞먹은 셈이다.특히 단위농협의 증가세가 심상치 않다. 단위농협에서 내준 회사 대포통장이 보이스피싱에 쓰인 규모는 2021년엔 금융권 6위(8.9%)였지만 2024년엔 1위(18.9%)가 됐다. 지난해엔 비율이 21.3%로 더 높아졌다.5년간 단위농협의 개별 조합 가운데선 대구축산농협(44건)에서 만들어진 회사 대포통장이 가장 많았다. 그중에서도 대명역지점에서만 13개가 쏟아졌다. 농협중앙회는 “문제가 된 시기엔 서류 등 요건만 맞으면 통장 개설을 거절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면서 “최근에는 통장 개설 시 실사를 나가는 등 통제를 강화했다”고 했다.● 허술한 통제… AI 탐지망 참여도 늦어단위농협과 새마을금고의 구조는 닮았다. 단위농협은 농협중앙회로부터 전반적인 관리와 감독을 받지만 전국 1110여 개의 개별 조합 하나하나가 각 지역 조합원의 출자금으로 세워져 독자적으로 조합장을 선출한다. 여기서 운영하는 4800여 개 지점의 인사도 조합이 책임진다. 새마을금고 역시 유사하게 운영된다. 반면 제2금융권 중에서도 본사의 감시가 강한 증권사나 저축은행은 회사 명의 대포통장 발급이 연간 수십 개 수준이었다.이 때문에 두 상호금융회사의 내부통제는 제1금융권에 비해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제1금융권의 시중은행은 본점이 이상 거래를 감시하고 일괄적으로 방어막을 친다. 반면 단위농협과 새마을금고는 조합 하나하나가 독립된 회사다. 중앙회의 통제력은 상대적으로 약해 감시망이 느슨하다.단위농협과 새마을금고에도 유령 회사를 걸러낼 장치는 있다. 통장을 만든 회사가 실제로 존재하고 영업하는지 직원이 현장에 나가 두 눈으로 확인하는 ‘실사’다. 하지만 한 단위농협 지점의 관계자는 “실사는 나가지 않고 통장을 개설할 때 제출받은 회사 등기부등본 등 서류로 대체한다”고 했다. 대구 지역 새마을금고에서 지난해 퇴직한 전직 전무(60)는 “대출 전엔 실사를 나가기도 하지만 통장을 만들 땐 그러지 않았다”면서 “실제로 영업하는지 일일이 조사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라고 했다. 대출해 준 돈을 떼이면 은행에 손실이지만, 통장 개설은 고객의 돈을 추가로 맡아두는 일이라 까다로운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는다는 취지다.제2금융권은 정부의 보이스피싱 대책 참여에도 소극적이다. 금융위원회 등은 지난해 10월 수많은 통장 가운데 보이스피싱 의심 통장을 인공지능(AI)으로 탐지하는 시스템 ‘ASAP’를 가동했다. 올 1월까지 약 130개 금융회사가 참여해 ASAP로 잡아낸 통장은 총 2705개다. 그런데 그중 단위농협과 새마을금고가 적발한 건 3개에 그쳐, 그 비율이 0.001%였다. 제2금융권 중에서는 그나마 중앙집권적 시스템을 갖춘 증권사는 실적 비중(11.7%)이 컸다.금융당국은 이달까지 제2금융권의 시스템 참여를 끌어내 반(反)보이스피싱 방어벽을 높이겠다는 방침이다. 금감원은 “단위농협의 대포통장 문제를 인지하고 개선 작업을 벌여 최근에는 감소했다”고 했다.하지만 쫓는 자보다 쫓기는 자가 한발 빨랐다. 당국이 방어벽을 한 겹 올리는 사이, 범죄 조직은 신고로 묶인 통장마저 되살리는 우회로를 이미 뚫어 놓은 뒤였다. 대포통장 조직이 법정을 어떻게 유린했는지는 3회에서 이어진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히든: 검은돈의 혈관, 대포통장’은 각종 범죄의 핵심 도구인 대포통장 문제를 조명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팀장: 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취재: 임재혁 손준영 조승연 기자▽사진: 박형기 기자▽편집: 하승희 봉주연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인터랙티브 기획: 김재희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희래 ND▽인터랙티브 디자인 및 영상: 정시은 CDQR코드를 스캔하거나 ‘히어로콘텐츠’()에 접속하면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임재혁 기자 heok@donga.com손준영 기자 hand@donga.com조승연 기자 cho@donga.com}

    • 2026-06-2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믿고가던 동네금고 전무, 대포통장 조직 한패였다 [히어로콘텐츠/히든②-上]

    2024년 9월 4일, 대구 달서구에 있는 MG새마을금고 이곡금고에 돌연 검찰의 압수수색 영장이 날아왔다. 이 금고에서 내준 통장 수십 개가 보이스피싱 등 범죄에 쓰였다는 내용이었다. 남의 명의를 빌리거나 가짜 회사를 세워 만든 대포통장이었다. 직원이 10명 남짓한 작은 금고는 발칵 뒤집혔다.이튿날 금고의 실무를 총괄하는 이영환(가명·52) 전무는 조용히 움직였다. 몰래 휴대전화를 꺼내 압수수색 영장을 사진으로 찍었다. 사진은 곧장 ‘구사장’에게 전송됐다. 구사장은 대포통장 유통 조직의 총책 구태영(가명·48)이었다. 며칠 뒤 구사장을 밖에서 만난 이 전무는 경고했다. “‘우리’가 만든 대포통장이 수사받고 있어.” 수사망이 좁혀 오는 순간까지 금고 간부는 범죄 조직과 한 몸이었다.이곡금고와 구사장 조직이 3년 8개월 동안 함께 만들어 낸 대포통장은 총 126개. 불법 도박 사이트를 포함한 온갖 범죄에 쓰였다. 보이스피싱 신고로 통장이 잠기면 이 전무는 신고자 연락처를 구사장에게 넘겼다. 구사장은 신고자를 겁박해 신고를 취하시켰다. ‘어떤 상황에도 정지되지 않는 통장’이라는 명성을 달고 통장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추후 검찰에 붙잡힌 구사장은 “대포통장을 사려는 곳이 너무 많아서 수요를 도저히 못 따라갔다”고 진술했다.이곡금고는 빙산의 일각일 가능성이 있다. 최근 5년간(2021~2025년) 전국에서 보이스피싱에 사용돼 금융감독원에 등록된 회사 명의 대포통장 2만4259개를 전수 분석한 결과, 제2금융권에서 발급된 비중은 2021년 19.1%에서 지난해 46.8%로 치솟았다. 반면 시중은행 등 제1금융권의 비중은 줄었다.제2금융권 중에서도 특히 단위농협과 새마을금고에서 발급된 대포통장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두 곳은 지역 주민이 출자해 세운 독립된 협동조합 형태로, 중앙회의 통제 권한이 약하다. 시중은행이 통장을 내줄 때 회사가 실제로 영업하는지 현장에 나가 확인하는 ‘실사’ 등 절차를 강화하자, 검증이 느슨한 상호금융을 범죄 조직이 파고든 것이다.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이곡금고 사건의 판결문과 내부자 증언을 토대로 컨트롤타워 없는 제2금융권이 범죄의 숙주가 된 과정을 추적했다.금고 전무 “통장 풀었다 ㅎㅎ” 피싱 신고자 신상 508번 조직에 넘겨마을금고 전무와 짠 대포통장 사장 통장 거래 묶이면 신고자 정보 받아 “너 모를것 같아?” 신고 취소 협박금고 전무 “통장 발급이 왜 문제냐” 불법 의심한 직원 업무 바꾸기도은행원과 대포통장 조직. 두 집단의 거래는 2021년 4월 시작됐다. 당시 대포통장 업계에는 “통장 장사가 예전보다 어려워졌다”는 말이 돌았다. 대형 은행들이 통장을 내줄 때 그 회사 사무실을 불시에 찾아가 실제로 영업하는지 확인하는 등 감시를 강화했기 때문이다. 조직들은 통장을 내줄 만한 새 구멍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그 무렵 구사장은 이 전무를 만났다. 대출 서류를 조작해 주는 ‘작업 대출’ 브로커가 인맥을 넘겼다. 몇 번의 만남으로 친분을 쌓은 구사장은 금고 인근의 한 유흥주점에서 본론을 꺼냈다. “저희가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거든요. 판돈을 받을 통장을 좀 만들어 주십쇼.” 이 전무는 수락했다. 3년 8개월간 이어질 공생의 시작이었다.● “통장 다 풀었다 ㅎㅎ”… 은행원과 조직의 핫라인구사장 일당은 가짜 건설사를 차리고 이곡금고를 찾아가 회사 명의로 대포통장을 찍어냈다. 굳이 유령 회사를 세운 건, 회사 명의 통장은 한 번에 수십억 원도 옮길 수 있어서다. 범죄 조직은 새로 개설하면 하루 송금 한도가 1000만 원도 안 되는 개인 명의 통장보다 회사 통장을 선호한다. 보통 새 통장은 한동안 거래 실적이 쌓여야 한도가 풀리는데, 이 전무는 구사장 통장의 한도도 곧바로 풀어줬다.이 전무의 도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은행이나 경찰에 신고하면 해당 통장은 동결된다. 그런데 구사장의 통장이 동결되면, 이 전무는 금고 전산망을 뒤져 신고자의 이름과 연락처를 찾아냈다. 그리고 이를 구사장 일당에게 넘겼다. 검찰이 확인한 것만 508차례. 이때부터 이 전무는 더 이상 은행원이 아니었다. 범죄 조직의 정보원이었다.구사장 일당은 신고자에게 전화를 걸어 혼을 빼놨다. “내가 너 누군지 모를 거 같아, XX야?” 정체 모를 겁박을 받은 이들은 신고를 거둬들였다. 몇몇 신고자에겐 피해액 일부를 돌려주고 합의했다. 신고가 취소되면 동결됐던 통장은 되살아났다. 그 과정에서 이 전무가 직접 신고자에게 전화해 동결을 푼 뒤 이를 구사장 측에 알린 적도 있다.“통장 2개 동결 다 풀었다. 사용해라. ㅎㅎ”(이 전무)“네, 감사합니다. 형님.”(구사장 조직원)이런 뒷배 덕분에 구사장 일당의 통장은 특별해졌다. 어떤 상황에서도 정지되지 않는 ‘명품’ 대포통장, 업계 은어로 ‘메이커장(帳)’이 된 것이다. 일반 회사 대포통장의 한 달 대여료는 500만 원 안팎인데 구사장의 통장은 그 두 배인 1000만 원을 호가했다. 오른 몸값 덕에 아무에게나 팔지도 않았다. 낯선 이가 통장을 사고 싶다고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내면, 아는 조직폭력배에게 ‘이 사람 믿을 만하냐’며 뒷조사를 시킨 뒤에야 통장을 내줬다.2023년 무렵엔 통장을 만들어 주던 ‘갑(甲)’인 금고가 구사장에게 돈을 구걸하는 ‘을(乙)’이 됐다. 앞서 이곡금고가 제대로 심사도 않고 내준 부동산 대출에서 이자가 끊기며 40억 원대 적자가 난 것이다. 부실이 감사에 걸릴까 두려웠던 금고 간부들은 구사장에게 손을 벌렸다. 구사장은 여자 친구 명의 통장으로 3억8400만 원을 이자 없이 빌려줬다. 이 돈으로 당장 급한 연체 이자를 막아 부실을 숨겼다. 범죄 조직을 신고해야 할 금고가 그 조직의 돈으로 연명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무용지물이 된 ‘이중 감시망’이곡금고의 내부 통제 시스템은 허물어져 갔다. 금고의 실무 전반을 쥐고 흔드는 사람이 바로 이 전무였기 때문이다. 부하인 정모 상무와 박모 부장도 범행에 가담했다.금고 안에서 의심을 품은 직원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한 직원은 매일같이 금고를 드나들며 회사 통장을 새로 개설하는 구사장 일당을 수상하게 여겼다. “더는 통장을 못 내주겠다”며 업무를 거부하자 이 전무는 아예 직원의 담당 업무를 바꿔 버렸다. 해당 직원은 “대포통장을 도대체 누구에게 줬고, 밖에서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나도, 다른 직원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했다.금고에는 두 겹의 감시망이 있다. 내부 감사와 새마을금고중앙회의 감사다. 하지만 분기마다 하는 내부 감사는 금융 전문가가 아니라 지역 유지 출신 감사 2명이 형식적으로 진행했다. 범행이 시작되기 전 이곡금고 이사장을 지낸 이모 씨(81)조차 “통상 감사들이 이틀 정도 나와 서류를 보는데, 전문 지식이라곤 중앙회에 가서 일주일 교육받는 게 전부”라고 털어놨다. 2024년 5, 6월 진행된 중앙회 감사에서도 대포통장 발급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수사 중에도 “통장 사고 싶다” 연락 쇄도영원할 것 같았던 이들의 범죄 행각은 결국 꼬리를 밟혔다. 대포통장 조직 내분으로 시작된 투서가 단서였다. 검찰이 이를 단서로 약 410개의 통장과 120건의 관련 사건을 추적해 보니 구사장 일당은 유령 회사 설립과 통장 개설, 판매까지 역할이 세분된 기업형 조직이었다. 검찰이 확보한 휴대전화에는 구사장의 대포통장 리스트와 대여료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통장이 워낙 많다 보니 장부를 꼼꼼하게 만들지 않고서는 관리가 안 됐던 것이다.검찰 수사 중에도 구사장의 텔레그램은 “대포통장을 당장 사고 싶다”는 메시지로 가득 찼다. 구사장은 검찰 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통장을 사려는 곳이 너무 많아서 하루에도 수십 곳씩 연락이 왔습니다.”수사 결과 구사장이 유령 회사 15개를 세워 이곡금고에서 발급받은 대포통장은 총 126개. 법원이 인정한 통장 장사 수익만 29억 원이었다. 이 대포통장을 사들인 다른 범죄 조직들이 얼마나 많은 피해자의 고혈을 빨았는지는 파악조차 되지 않는다.그렇게 검은돈의 혈관을 열어 준 대가로 이 전무 등 금고 임직원이 챙긴 돈은 1509만 원만 법정에서 인정됐다. 구사장에게 갚았어야 할 대출 이자 1358만 원이 그중 대부분이었다. 구사장이 유흥주점 술값을 대거나 현금을 찔러주는 등 총 7500만 원 넘게 준 정황은 있지만 입증할 증거가 부족했다. 부패와 부실이 겹친 이곡금고는 지난해 3월 인근 새마을금고로 합병됐다. 1980년 설립한 이래 45년 만이었다.당시 대구지검에서 이 사건을 수사한 박형철 서울동부지검 검사는 이 전무가 구사장 조직의 규모를 몰랐던 것 같다고 했다. “이 전무는 수사 과정에서 ‘통장 발급해 달래서 해준 게 왜 문제냐’고 항변했다. 구사장 일당이 얻은 수익을 알려주자 그제야 눈빛이 흔들렸다”는 것이다. 검찰 일각에선 이 사건을 빙산의 일각으로 본다. 구사장 일당처럼 체계적으로 대포통장을 찍어내는 기업형 조직은 전국에서 최소 20곳 이상이 활개 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이 전무와 구사장은 금융실명법 위반죄 등으로 각각 징역 4년형이 확정돼 복역 중이다. 둘 다 변호인을 통한 해명 요청에 답하지 않았다. 가담자 중 유일하게 집행유예로 풀려난 박 부장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며 답을 거부했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히든: 검은돈의 혈관, 대포통장’은 각종 범죄의 핵심 도구인 대포통장 문제를 조명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팀장: 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취재: 임재혁 손준영 조승연 기자▽사진: 박형기 기자▽편집: 하승희 봉주연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인터랙티브 기획: 김재희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희래 ND▽인터랙티브 디자인 및 영상: 정시은 CDQR코드를 스캔하거나 ‘히어로콘텐츠’()에 접속하면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임재혁 기자 heok@donga.com손준영 기자 hand@donga.com조승연 기자 cho@donga.com}

    • 2026-06-2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팔순 노인 전세금까지 빨아먹은 ‘악마의 통장’[히어로콘텐츠/히든①-上]

    인천 연수구 송도의 한 대형 오피스빌딩 1810호 앞. 굳게 닫힌 검은 철문에는 태국 출장 마사지 명함이 조잡하게 꽂혀 있었다. 지난달 4일, 왼눈에 하얀 안대를 찬 유종수(가명·80) 씨가 떨리는 손으로 문을 밀어 열었다.“휑하잖어. 아무것도 없잖여, 아무것도….”먼지 냄새가 훅 끼쳐오는 18m²(약 5평) 남짓한 공간을 마주한 유 씨가 허탈한 듯 읊조렸다. 텅 빈 사무실 한가운데는 플라스틱 책상 두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의 손에는 2023년 10월 18일 4500만 원을 이체한 기록이 선명한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다. 아내의 투병 때문에 월세방으로 이사한 뒤 남겨둔 피 같은 전세보증금이었다.유 씨는 가짜 투자 사이트에 속아 돈을 넣었다.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는 광고를 믿고 안내받은 통장으로 4500만 원을 보냈다. 그 돈은 곧바로 ‘대한퍼스트’라는 회사의 통장으로 옮겨졌고, 몇 분 만에 현금으로 인출돼 사라졌다. 통장 주인과 실제 사용하는 사람이 다른 범죄용 통장, 대포통장이었다.정부에 배달 대행업체로 등록된 대한퍼스트는 실은 대포통장을 만들어 범죄 조직에 파는 유령 회사였다. 유 씨의 돈을 가로챈 투자 사기 조직은 따로 있었고, 대한퍼스트는 그 돈을 받아 숨겨주는 통로 역할을 했다.문제의 대한퍼스트를 설립한 김철민(가명·47)은 2024년 10월 붙잡혔다. 법원은 김철민을 사기 공범으로 보고 유 씨에게 투자금을 전액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유 씨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김철민이 돈이 없다고 버텼기 때문이다. 더 기가 막힌 건 유 씨가 돈을 넣었을 때 대한퍼스트는 이미 폐업 상태였다는 점이다. 사망한 회사의 통장이 범죄 수익을 실어 나르는 동안 국세청도, 은행도 경고하지 않았다. 보이스피싱, 투자 사기, 온라인 도박…. 형태는 다양했지만 돈이 오간 통로는 하나, 대한퍼스트의 대포통장이었다. 확인된 것만 30개의 통장에 유 씨를 포함해 최소 189명이 돈을 뜯겼다.한 해 새로 만들어지는 대포통장은 32만 개로 추산된다. 검은돈이 오가는 혈관이다. 범죄 조직은 대포통장이 없으면 돈을 받을 수도, 숨길 수도 없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최근 5년(2021~2025년)간 금융감독원에 등록된 보이스피싱 통장 12만6866개를 분석하고 올 1월부터 5개월간 대포통장 공급 조직 관계자 4명과 피해자 10명, 수사기관 관계자 9명 등 총 58명을 접촉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법망의 틈새에서 범죄의 핵심 부품인 대포통장은 쉴 새 없이 찍혀 나오고 있다.아내 병원비-딸 결혼자금까지… 대포통장 1개社, 189명에 39억 뜯어피해자 신고보다 빠르게 하루 876개꼴 생겨나개인 아닌 회사 명의는 사실상 송금 한도 없어사기-도박-피싱에 5000만원-4500만원 줄송금대표 잡고보니 무일푼… 배후는 3년째 도피중폐업후에도 차단 안된채 피해자 돈 실어날라대포통장은 사기든 도박이든 마약이든, 돈이 오가는 거의 모든 범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범죄 조직은 피해자에게서 뜯어낸 돈을 대포통장을 거쳐 현금으로 빼낸다. 대포통장이 없으면 돈을 받을 수도, 숨길 수도 없다. 거꾸로 말하면 이 통장의 흐름만 틀어막아도 범죄 조직은 괴사한다. 검은돈이 흐르는 혈관을 조이는 셈이다.그런데 이 혈관은 사실상 방치돼 있다. 한 해 새로 만들어지는 대포통장만 32만 개, 하루 876개꼴로 추산된다. 금융감독원의 보이스피싱 통장 데이터를 토대로 황석진 동국대 국제정보보호대학원 교수의 디지털금융범죄대응연구소가 분석한 결과다. 연구소는 “이마저도 적게 잡은 수치일 수 있다”고 했다. 보이스피싱을 뺀 도박, 마약, 투자 사기에 쓰인 대포통장은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대포통장 조직이 12조 원을 세탁하다 적발된 적도 있다.이 지하 혈관을 만드는 비용은 생각보다 훨씬 적었다. 신용불량자 한 명과 6일이면 충분했다.● 같은 통장으로 흘러든 189명의 돈대한퍼스트의 통장을 통해 돈을 잃은 피해자는 최소 189명. 그중엔 배관공 양재호(가명·52) 씨도 있었다. 그는 2023년 9월 유튜브 광고에서 해외 대학교수가 인공지능(AI) 투자 플랫폼을 소개하는 영상을 봤다. 반신반의했지만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는 수익 인증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그는 두 달 후 3년 동안 모은 5000만 원을 넣었다.그런데 석 달 후인 12월 19일, 투자 사이트는 먹통이 됐다. 수익률은 가짜였다. 광고 속 교수는 대역료 30만 원을 받은 배우였다. 그가 보낸 돈은 추적할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진 상태였다. 피해 이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단둘이 산다. 경찰 조사에서 그는 “지금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살아 있는 게 다행일 정도”라고 했다.남옥순(가명·68) 씨는 빵과 옷을 팔아 모은 노후 자금 900만 원을 잃었다. 김진영(가명·59) 씨는 딸의 결혼식 자금 1500만 원을 날렸다. 이들이 처음 돈을 보낸 곳은 평범한 개인 명의 통장이었다. 여기에 돈을 넣으면 조직이 곧바로 대한퍼스트의 회사 통장으로 옮겨 인출했다. 피해자로서는 대포통장인지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해외에서는 돈을 보낼 때 범죄에 연루된 의심 통장이라고 알려주기도 하지만, 한국에는 아직 그런 장치가 없다. 남 씨는 주 6일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생계를 잇는다. 김 씨는 딸에게조차 아직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대한퍼스트의 통장은 투자 사기에만 쓰이지 않았다. 보이스피싱 조직도, 온라인 도박 조직도 이 통장을 거쳐 돈을 받았다. 확인된 범죄 조직만 5개다. 도박 사이트 이용자 중에는 고등학생도 있었다. 보이스피싱 피해 30건도 이 통장을 거쳤다. 그렇게 끌어모은 피해액만 39억 원이었다.대포통장에도 등급이 있다. 대한퍼스트의 회사 통장은 개당 500만 원 선에 거래돼 개인 명의 통장보다 2배 이상 비쌌다고 한다. ‘빠른 현금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새로 만든 개인 통장은 하루 송금 한도가 300만 원에 불과하다. 피해자가 신고하기 전에 거액을 빼내기 어렵다. 가상자산(코인) 지갑으로 빼돌리는 방법도 있지만, 주요 거래소는 이상 거래를 잡아내는 시스템을 갖춰 꼬리를 밟힐 위험이 크다. 반면 회사 통장은 사실상 한도가 없어 수십억 원도 한꺼번에 현금으로 뽑을 수 있다. 회사 통장도 개설할 땐 개인 통장처럼 한도 제한이 있지만 돈이 몇 차례 오가면 정상적인 사업장인 척 허위로 증빙하면 한도를 수십억 원까지 높일 수 있는 것이다.대포통장을 구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과거엔 보이스피싱 조직이 직접 노숙인이나 불법 체류자를 꼬드겨 통장을 사들였다. 그런데 통장이 워낙 중요해지자, 이제는 대포통장만 전문으로 공급하는 조직이 따로 생겨 사기 조직과 분업한다. 통장과 OTP, 명의자 신분증까지 한 묶음으로 넘기고 한 달 단위로 빌려주는 ‘구독’ 방식이다. 범죄 세계에서는 대포통장 조직이 ‘갑(甲)’이다. 대한퍼스트가 바로 그런 조직이었다.또 다른 무기는 ‘일회용 통장’으로 불리는 가상계좌다. 대한퍼스트는 결제 대행사와 e메일, 우편만으로 가맹점 계약을 맺고 회사 통장을 기반으로 가상계좌를 발급받았다. 거래마다 새 번호가 붙기 때문에 사실상 동결되지 않고, 원래 통장도 무사했다. 피해자가 신고하는 속도보다 새 통장이 생기는 속도가 빨랐다.● 마담이 빌려준 돈으로 6일 만에 회사 세워범죄 조직들은 자취를 감췄지만, 대한퍼스트를 세운 김철민의 이름은 수사망에 포착됐다. 경찰은 추적 끝에 2024년 10월 그를 체포했다. 법원은 김철민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며 “유령 회사를 세운 뒤 그 통장을 범죄 수익 세탁에 제공한 죄책이 무겁다”고 꾸짖었다.유종수 씨는 김철민에게 주목했다. 아내의 병원비를 대려면 대한퍼스트의 통장을 거쳐 사라진 4500만 원 중 일부라도 되찾아야 했다. 그는 변호사에게 수임료 620만 원을 주고 김철민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다.하지만 법원에서 드러난 김철민의 실체는 초라했다. 그는 55만 원짜리 월세방에 사는 신용불량자였다. 범행 전에는 물류센터나 갈빗집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었다. 그러다 텔레그램에서 ‘김수현’을 만났다. 김수현은 “회사를 만들어 주면 3억 원을 대출해 주겠다”고 했다. 룸살롱 마담에게서 빌린 1000만 원을 자본금인 척하고 잔액 증명서를 내니 사업자등록증이 나왔다. 회사 명의로 통장을 받기까지 6일이면 됐다.유 씨는 소송에서 이겼지만 김철민은 빈털터리였다. 그에게 배상을 요구한 사람만 19명이 더 있었다. 배후의 김수현은 3년이 지난 지금껏 잡히지 않고 있다.● 폐업한 회사, 닫히지 않은 통장대한퍼스트가 폐업한 뒤에도 그 통장은 금융망에서 차단되지 않고 살아 움직이며 피해자의 돈을 실어 날랐다. 국세청은 2023년 10월 12일 대한퍼스트를 폐업 처리했다. 유 씨는 그로부터 6일 뒤 대한퍼스트의 통장을 거쳐 돈을 뜯겼다. 통장이 온라인 도박에 쓰인 건 폐업한 이후인 2023년 12월부터였다. 보이스피싱 피해액 30건 중 9건도 폐업 이후 통장을 거쳐 갔다.국세청은 “회사 통장 개설과 폐쇄는 금융위원회 소관”이라고 했다. 금융위는 “통장 주인이 스스로 신고하지 않으면 폐쇄가 어려운 구조라 개선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경찰도 통장을 강제로 닫을 권한은 없다.유 씨는 이제 남아 있던 전세보증금 5000만 원도 거의 다 쓴 상태다. 피해를 당한 뒤 한쪽 눈이 급격히 나빠져 종종 병원 신세를 진다. 4월 1일 서울 노원구 그의 자택 서랍장 위에는 베트남전쟁 참전으로 받은 유공 증서만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몇 번이고 들여다봐 너덜너덜해진 판결문을 손에 든 그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이제 판결문 글씨가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히든: 검은돈의 혈관, 대포통장’은 각종 범죄의 핵심 도구인 대포통장 문제를 조명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팀장: 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취재: 임재혁 손준영 조승연 기자▽사진: 박형기 기자▽편집: 하승희 봉주연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인터랙티브 기획: 김재희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희래 ND▽인터랙티브 디자인 및 영상: 정시은 CDQR코드를 스캔하거나 ‘히어로콘텐츠’()에 접속하면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임재혁 기자 heok@donga.com손준영 기자 hand@donga.com조승연 기자 cho@donga.com}

    • 2026-06-2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이름-주소 다 다른 유령회사들, 31세 男 한명이 굴리고 있었다[히어로콘텐츠/히든①-下]

    대포통장만 전문적으로 만들어 유통시키는 유령 회사라면 어딘가에 흔적을 남기지 않을까. 그 단서는 뜻밖에도 정부의 공개 데이터 안에 있었다.금융감독원 홈페이지에는 보이스피싱에 쓰인 것으로 지목돼 소명 절차까지 거친 뒤 동결된 통장 목록(채권소멸 사실공고)이 매주 공개된다.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총 12만6866개가 등재됐다. 이조차 실제 범죄에 사용되는 전체 대포통장의 규모와 비교하면 빙산의 일각일 것으로 추정된다.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올 1월 1일부터 지난달 14일까지 금감원 목록에 새로 올라온 통장 1만6854개의 명의를 추가로 전수 분석했다. 최소 189명의 피해금을 착취한 대한퍼스트처럼, 최근 암시장에서 활동하는 다른 대포통장 조직을 역추적하기 위해서였다. 그중 송금 한도가 커서 범죄 조직이 선호하는 회사 통장은 2053개였다. 가장 많이 적발된 회사를 줄 세웠다. 1위부터 5위까지 회사 등기부등본을 발급받아 나란히 펼쳤다. 회사 이름도, 주소도 달랐다. 그런데 대표나 이사 자리에 빠짐없이 나타나는 이름이 있었다.31세 안준호(가명)였다.● 월 1만 원에 차린 대포통장 공장추적 반경을 넓혀 보니 안준호와 연결된 회사는 8개로 늘었다. 그는 대표 3곳, 이사와 감사 등 모두 11개의 직함을 갖고 있었다. 이 회사들의 흔적을 따라가 보니 일종의 매뉴얼처럼 정형화된 행동 수칙이 보였다.제1원칙: 회사 주소는 비상주 사무실로 해결한다. 사업자등록을 하려면 주소가 필요하다. 안준호 일당은 월 1만 원 안팎에 주소를 빌려주는 서비스를 이용했다. 지난달 7일 찾아간 전남 나주시의 한 비상주 사무실. 좁은 복도에 놓인 우편함 하나를 63개 업체가 공유하고 있었다. 안준호 일당의 회사는 그중 29번째 칸에 이름만 걸어두고 있었다. 사무실 관리자는 “계약은 주로 전화로 한다. 500개 업체를 관리해서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했다. 일부 비상주 사무실은 아예 “은행 실사가 나오면 알아서 대응해 준다”고 광고했다.제2원칙: 은행 통과 프리패스, ‘통신판매업’을 노린다. 회사를 세운 뒤 통장을 만들려면 은행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안준호 일당은 주 업종으로 온라인 쇼핑몰을 내세웠다. 온라인 거래 특성상 초기엔 실물 사무실이나 재고가 없어도 통장을 파기 쉬운 업종이라는 점을 노린 것이다. 범죄 수익을 현금화하기 쉬운 상품권 판매업을 추가한 경우도 있었다.제3원칙: 은행 실사를 피할 ‘위장 쇼윈도’를 꾸민다. 서류만으로는 최근 들어 깐깐해진 은행의 눈을 속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안준호 일당은 아예 가짜 가구 쇼핑몰을 인터넷에 띄웠다. 홈페이지에는 ‘모던 소파 89만 원’, ‘원목 다이닝 테이블 45만 원’ 등 그럴싸한 사진과 가격표가 붙었다. 회원 가입 버튼은 작동하지 않았다. 은행이나 수사당국의 눈을 피하기 위한 전시용이었다.이렇게 찍어낸 대포통장은 추적이 어려운 텔레그램을 타고 각종 범죄 조직으로 팔려 나갔다. 이들 회사의 통장이 올해 보이스피싱에 동원돼 적발된 횟수는 60건에 달했다.● 등기부등본에 올라온 전과자들안준호의 등기상 주소인 광주 북구 두암동의 한 다세대주택 문을 두드렸다. 60대 여성 집주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나왔다. “그런 사람을 왜 우리 집에 와서 찾아요. 남편하고 나하고 둘이 살아요. 월세방도 비어 있어요.”인터넷에서도 안준호는 지워져 있었다. 그가 쓰던 연락처로 카카오톡과 페이스북을 뒤졌지만 얼굴 사진이 한 장도 나오지 않았다. 흔적은 2018년 서울에서 중고 게임을, 2022년 제주에서 노트북을 판 기록 두 건이 전부였다. 별다른 범죄 전력도 없었다.그런데 그의 등기부등본에 함께 이름을 올린 공범들은 달랐다. 조민기(가명·30)가 대표를 맡은 회사 통장은 또 다른 온라인 도박 조직의 자금을 세탁하는 데 동원됐다. 한 남성이 회삿돈 4억5000만 원을 횡령해 90차례 판돈을 입금하다가 적발됐는데, 그 판결문에 조민기의 회사 통장이 등장한 것. 조민기도 2020년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다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었다. 도박장 전과자가 만든 회사 통장이 도박 자금 세탁에 쓰인 것이다.안준호 일당의 회사 두 곳에 이사로 이름을 올린 60대 중반 남성 박동현(가명)은 법무사 사무소 사무장 출신이었다. 그는 2002년 허위 공증과 공정증서 위조 혐의로 처벌받은 전력이 있다. 그는 안준호 일당의 유령 회사 3개가 잇달아 설립될 무렵 한 법무사 사무소에 취업했다. 회사를 법원에 등기하려면 본인이 직접 하거나 법무사나 변호사가 신청서를 대리 제출해야 한다.● “30대 초반 혼자 짠 판이 아니다”경찰은 히어로콘텐츠팀의 데이터 분석 결과를 넘겨받아 안준호 일당을 ‘전문 대포통장 유통 조직’으로 규정하고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기존에 전국 각지에서 개별 보이스피싱 사건으로 흩어져 수사되던 사건들이 데이터를 통해 하나의 조직으로 묶였다. 결정적 단서는 통장을 개설한 장소였다. 광주 일대를 근거지로 한 일당이 연고도 없는 경남 진주시의 특정 신협 지점에서 집중적으로 회사 통장을 개설한 사실이 확인됐다.경찰은 안준호가 ‘바지사장’일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전과 없는 30대 초반을 주축으로 한 조직이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가동된 대포통장 공장을 굴리기는 쉽지 않았을 거란 판단이다. 정교한 흐름의 배후엔 자금을 대고 판을 짠 실질적인 몸통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금감원 데이터에서 안준호 일당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포착된 건 지난달 중순이다. 대포통장 조직이 왜 하필 제2금융권을 노리는지, 그 이유는 2회에서 이어진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히든: 검은돈의 혈관, 대포통장’은 각종 범죄의 핵심 도구인 대포통장 문제를 조명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팀장: 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취재: 임재혁 손준영 조승연 기자▽사진: 박형기 기자▽편집: 하승희 봉주연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인터랙티브 기획: 김재희 기자▽인터랙티브 개발: 임희래 ND▽인터랙티브 디자인 및 영상: 정시은 CDQR코드를 스캔하거나 ‘히어로콘텐츠’()에 접속하면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임재혁 기자 heok@donga.com손준영 기자 hand@donga.com조승연 기자 cho@donga.com}

    • 2026-06-2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황성호]11년의 시간, 세월호의 교훈 잊은 한국

    제주와 전남 목포를 이어주었던 대형 여객선 S호의 김모 선장은 세월호 참사 이듬해인 2015년 한 언론과 인터뷰했다. 주제는 선장으로서 그가 얼마나 안전에 신경 쓰고 있는지였다. 세월호를 수차례 언급한 그는 “문제가 있는 곳이 바로 선장이 있어야 할 곳”이라면서 “(S호가 취항한 이후) 위험했던 순간은 없었다”고 했다. S호는 세월호와 다르다고 강조한 것이다. 참사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때였다. 더구나 S호는 최대 승선 인원이 921명으로 세월호의 2배 수준이었다. 김 선장은 선사를 찾아가 승객과 선원의 안전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고도 했다. 대형 여객선의 선장으로서 응당 가져야 할 책임감이었다. 실제 S호는 잔고장은 있었지만 인명피해 사고는 없었다.“문제 있는 곳에 있어야”라던 선장의 부재 김 선장이 당시 인터뷰까지 나선 까닭은 세월호 선장인 이준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준석은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을 때 승객에게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희생자가 탈출을 주저하게 만든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도 그때 나왔다. 그뿐만 아니다. 세월호가 바다에 침몰하던 순간 이준석은 세월호를 빠져나갔다. 수화물 과적(過積), 안전 불감증, 승무원들의 구조 외면이 겹친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 304명의 죽음이었다. 시간은 기억을 희미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기억을 놓지 않아야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은 더욱 그렇다. 그런데 세월호를 거론하며 인터뷰까지 했던 김 선장의 뇌리엔 세월호 참사의 기억이 적어도 19일 밤엔 없었던 듯하다. 그는 그때 전남 신안군 족도에 267명의 승객을 싣고 좌초된 퀸제누비아2호의 선장이었다. 사고가 난 협수로에서는 안전을 위해 자동 조종장치를 사용하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퀸제누비아2호는 수동 운항을 하지 않았고, 결국 좌초됐다. 경찰은 김 선장이 사고 당시 조타실이 아닌 선장실에서 휴식을 취했다고 보고 사전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그는 “위장 장애로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라고 했지만 선원들은 그가 1000여 차례 항해 동안 조타실에 나오지 않았다고 진술한 상태다. 김 선장만 그랬던 게 아니다. 일등 항해사는 “배를 자동으로 설정해 두고 뉴스를 보고 있었다”고 했다. 홀로 키를 잡고 있었던 조타수는 배가 족도를 향해 가던 순간에 방향을 돌리지 않았다. 수사로 사실관계가 확인돼야겠지만 사고가 난 뒤 안내방송이 뒤늦게 나왔다는 복수의 증언까지 나온다. 적지 않은 승무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정황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안전 불감증은 세월호를 겪고도 별반 바뀌지 않았다.세월호 교훈 망각, 김 선장뿐일까 퀸제누비아2호 승무원이 잊었던 세월호의 교훈은 역설적으로 19일 밤 많은 이들에게 세월호를 떠올리게 했다. 퀸제누비아2호에 탔던 승객뿐만 아니라 뉴스 속보를 접한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이 2014년 4월 16일 오전의 기억을 되새김질했다. 다행히도 참사는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들 일부가 세월호를 잊었다는 점은 분명해졌다. 혹 ‘나는 참사의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해 그 교훈을 잊지 않았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이들에겐 김 선장의 인터뷰 한 대목을 얘기해줬으면 한다. 그도 이듬해 인터뷰에서 참사 당시 상황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선장이 탔던 배가 세월호가 침몰하던 순간 함께 바다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세월호와 거리는) 멀지만, 승객 등을 구하러 가야겠다는 생각에 무전 내용에 귀를 기울였는데 먼저 도착한 주변 선박들로부터 ‘(구할) 사람이 없다’는 내용을 들었다”며 참담해했다. 11년의 시간은 세월호 승객을 구하려 했던 이들까지 망각에 젖어들게 했다. 황성호 사회부 사건팀장 hsh0330@donga.com}

    • 2025-11-2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광화문에서/황성호]日 관광객 사망자 운구비용, 그리고 대한민국의 국격

    지난해 초 일본의 지상파 민방인 TBS에선 한일 간의 러브 스토리를 다룬 드라마 ‘Eye Love You’가 방송됐다. 일본에 건너가 아르바이트하는 한국인 남성과 일본 직장인 여성의 얘기다. 지상파 방송이 황금 시간대인 오후 10시에 방송했고, 현지에선 꽤나 인기를 끌었다. 2일 음주운전 승용차에 치여 사망한 58세의 일본인 여성도 이 드라마의 팬이었다고 한다. 그는 딸과 2박 3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첫날 밤 서울 동대문역 사거리에서 참변을 당했다. 10부작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낙산공원을 가던 길이었다. X(옛 트위터)에서 자신을 이 사건 유족이라 밝힌 인물은 “어머니는 Eye love you라는 드라마 촬영지인 낙산공원에 가고 싶다고 예전부터 말씀하셨다”고 했다. 이런 드라마가 그렇듯 드라마의 마지막 배경이 된 낙산공원은 남녀 주인공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이야기를 마치는 행복의 장소다. 그런 장소를 찾던 한 50대 일본인 여성의 여정이 비극으로 끝난 것이다. 마침표가 있는 드라마와 달리 현실은 계속된다. 그래서 더 비극적이다. 어머니를 잃은 딸은 무릎과 이마를 다쳐 한국의 병원에 입원했고, 일본에 있는 유족들은 급히 한국으로 왔다. 타국에서 황망한 사건 앞에 놓인 유족들에겐 온전히 고인을 추모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시신을 일본으로 운구하기 위한 비용만 1500만 원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이 공개되자 가해자 측에서 이 비용을 내겠다고 나섰다. 그는 소주 3병을 마신 채로 한밤중 테슬라를 몰고 질주하다 이런 사고를 냈다. 우리 정부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다. 운구 비용을 가해자가 아닌 정부가 먼저 지급할 수 있었다면 사망한 일본인 여성의 가족에게 한국이라는 나라가 안겨준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작아지지 않았을까. 그건 한국이라는 나라의 국격과도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일본에선 이번 사건을 가해자 개인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 시선이 고개 들고 있기도 해서다. 아사히TV 등 현지 언론에서는 이미 “한국은 음주운전 치사 처벌이 약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물론 한국 정부도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다. 경찰은 유족이 운구 비용으로 고민에 빠졌다는 점을 공개해 도움을 주려 했다. 한국에 온 유족들에게 숙소도 지원했다. 하지만 적지 않은 돈인 운구비를 내줄 방법은 없었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외국인도 한국에서 범죄 피해를 입었을 때 국가가 나서 피해를 보상해 주는 ‘범죄피해자구조제도’로 보상금을 받을 수 있지만 교통사고와 같은 과실 범죄엔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사고를 당했을 때 정부가 장례비를 지급했던 선례가 있었다는 점도 아쉬움을 남긴다. 2022년 이태원 참사 당시 정부는 외국인 유가족들에게 장례 비용 최대 1500만 원과 생활지원금 2000만 원을 지원했다. 이번에는 과연 방법이 더 없었을까.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은 지난해 1637만 명으로 1년 전보다 약 48% 늘어났다. 올해는 더 많은 손님이 찾는다고 한다. 58세 일본인 여성의 사례가 되풀이되면 안 될 것이다.황성호 사회부 기자 hsh0330@donga.com}

    • 2025-11-0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광화문에서/황성호]수사기관보다 범죄자가 더 AI를 이해한 세상

    올 7월 인공지능(AI) 기술로 음란물을 만들어 유포한 30대 남성 김모 씨가 재판에 넘겨졌지만 무죄가 났다. 김 씨는 텔레그램에서 확보한 성인 여성의 얼굴 사진을 AI 로 합성해 음란물을 만들어 유포했다. 성폭력처벌법상 허위영상물 반포 혐의였다. 흔히 ‘딥페이크 처벌법’으로 불리는 것이다. 그가 무죄를 받은 것은 딥페이크 처벌법의 허점 때문이다. 김 씨 측은 재판 과정에서 “(합성 대상자가) 누군지 모른다”면서 “실존 인물이 아니라 AI 프로그램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딥페이크 처벌법으로 처벌하려면 음란물 속 대상이 그 음란물 제작에 반대 의사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 사람이 아니라 AI가 만든 인물이면 이러한 의견 자체를 가질 수 없으니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다. 재판부는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법률 격언을 따랐다. 재판부는 “검사가 제출한 자료만으로는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이 사건 공소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결문에 적시했다. 다만 재판부는 “사진이나 영상 기술의 발달로 인해 실제 사진과 인위적으로 합성한 사진의 구별이 어려워진 것이 현실”이라며 기술 발전에 따른 법적 판단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 판결에서 곱씹어봐야 할 지점이 여기다. 판결문을 뜯어보면 피고인도, 재판부도 피해자가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지는 못했다. 실존하는 피해자가 있을 가능성도 남아 있는 셈이다. 수사기관이 그 가능성을 명확히 입증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 때문에 불안한 미래가 떠오른다. 딥페이크 처벌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을 피고인들이 진실은 도외시한 채 “피해자는 실존 인물이 아니다”라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 말이다. 실력과 의지가 있는 수사관에게 사건이 배당되지 않는다면 이런 사건들엔 무죄가 선고될 가능성이 높다. 딥페이크 처벌법을 만들어 놓고도 쓰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최근 한 ‘허위 전화’ 사건에서 미국의 대응은 그래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거 전략가 스티븐 크레이머는 AI로 만든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의 목소리로 지난해 1월 유권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투표 관련 허위 정보를 전파했다. 미 대선 후보 경선이 벌어지는 시점이었다. 수사당국의 추적 끝에 잡힌 크레이머와 변호인단은 전화 속 목소리가 자신을 바이든 전 대통령이라고 직접 언급하지 않았으니 사칭이 아니라는 논리로 주장했다. 배심원단은 이를 받아들였다. 성범죄는 아니지만, AI를 활용해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고도 무죄를 받았다는 점에서 김 씨 사건과 공통 분모가 있다. 하지만 크레이머는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미 연방통신위원회(FCC)는 이미 600만 달러(약 83억 원)의 벌금을 부과한 상태였다. 그가 유권자들에게 건 전화에 허위 발신자 정보가 포함됐는데, 이는 통신 규정 위반이라는 것이다. 형사처벌은 피해 갔지만 행정 규제를 통해 책임을 물은 사례다. 법보다 범죄가 AI에 더 가까운 세상에서 정공법만 대책은 아닐 것이다.황성호 사회부 기자 hsh0330@donga.com}

    • 2025-09-0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광화문에서/황성호]마약 청정국 위상잃은 한국, ‘총기 청정국’마저 끝나나

    “유튜브 보고 배웠다.”21일 인천 연수구에서 아들을 사제총기로 살해한 조모 씨(62)의 경찰 진술이다. 총기를 만드는 일을 해본 적도 없던 그가 유튜브만 보고 총을 만든 것이다. 대단한 기술은 필요 없었다. 유튜브만 있으면 됐다.총뿐만 아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더 큰 희생으로 마무리됐을 수도 있었다. 그의 집엔 이튿날 정오로 알람이 맞춰진 시한폭탄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 집은 단독주택이 아니다. 총 38가구가 사는 아파트다. 실제 살상력은 아직은 불분명하지만 최소 화재가 아파트를 덮쳤을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렵다.이번 사건으로 한국인들이 총기 난사 사건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미국을 보며 혀를 차는 시절이 끝났다고 하면 과장일 것이다. 아직 그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총기 청정국’ 같은 수식어가 한국과 나란히 쓰일 일이 조만간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든다. 이 사건의 비극적 면모와 파급력 때문이다. 모방 범죄가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특히나 국가가 일일이 들여다보기 힘든 개인의 집에서 유튜브를 보고 총을 만드는 세상에 이를 막을 방법은 매우 제한적이다.물론 정부도 움직였다. 경찰은 사건 발생 이틀 만에 사제총기 규제 강화 대책을 내놨다. 불법 무기 자진 신고 기간을 늘리고, 유튜브 등 온라인 모니터링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경찰은 최근 5년간 8893건의 총기 제작 관련 게시물을 삭제·차단 요청했다는 점도 공개하며 불안감을 잠재우려 했다.하지만 이 대책에는 한계가 있다. 유튜브와 같이 사제총기 제작법이 공유되는 플랫폼을 규제하는 방법이 없다. 현재 한국 법은 사제총기 제작법 정보를 올린 사람은 처벌한다. 처벌 수위도 강하다. 사제총기로 살해당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 사건으로 관련 처벌 수위를 높인 일본이 최대 1년 징역인데, 한국은 최대 3년 징역이다. 제작법을 유튜브에 올린 사람이나 유튜브 법인이나 그 정보로 수익을 벌어들이는 것은 같다. 왜 유튜브 법인은 처벌 대상에서 제외돼야 하나. 2016년 경찰관이 사제총기에 맞아 사망한 오패산 사건에서도 범인은 인터넷을 보고 총기 제작법을 공부했다고 했었다. 근본적 대책이 없으니 사건이 반복되는 것이다.해외는 다르다. 독일은 불법 콘텐츠를 24시간 내에 삭제하지 않으면 플랫폼에 최대 5000만 유로(약 700억 원) 벌금을 부과한다. 영국은 플랫폼 매출의 10%까지 벌금을 매길 수 있다. 호주도 5억 원 이상의 벌금을 부과한다. 이들 국가는 플랫폼을 단순한 정보 전달자가 아니라 ‘책임 있는 관리자’로 본다.한때 한국엔 ‘마약 청정국’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마약 유통을 제때 제대로 막지 못해 그 지위를 잃었다. 이젠 10대도 마약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총기도 마찬가지다. 불법 무기 제작 정보를 퍼뜨리는 플랫폼을 막지 못한다면 집집마다 총과 폭탄이 숨어 있는 사회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총기를 가진 사람이 늘어나면 미국처럼 자위권을 명목으로 총기를 사용하는 사람 역시 늘어날 수 있다. 누구도 그런 사회를 바라진 않을 것이다.황성호 사회부 기자 hsh0330@donga.com}

    • 2025-07-2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광화문에서/황성호]6·25전쟁 상흔 여전한 에티오피아 ‘강뉴 부대’ 용사들

    1951년 5월 6일. 봄날의 따뜻함은 찾아볼 수 없고 전쟁의 참혹함만이 짙게 드리운 그날, 검은 피부의 남성 1185명이 부산항에 내렸다. 에티오피아 황제의 근위대였던 ‘강뉴 부대’였다. 에티오피아에서 한국까지 바다에서 보낸 날만 꼬박 24일.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는 모국을 떠나는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길 때까지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 당시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은 다소 뜻밖의 일이었다. 한국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국방부 등이 6·25전쟁을 분석한 책에는 현실적인 관점에서 ‘집단안보에 대한 에티오피아의 역사적 경험’을 파병 이유로 설명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에티오피아는 잃어버린 영토인 에리트레아 회복과 군 현대화를 위해 미국 등 국제사회의 도움이 절실했다. 6·25전쟁은 그 기회를 제공했다. 그렇게 파병된 에티오피아군 6000여 명의 참전은 1954년 7월 10일까지 이어졌다. 강원 화천군과 양구군, 경기 연천군 일대가 이들의 주요 전장이었다. 혹독한 겨울 추위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일이었지만, 그들은 총을 들고 끝까지 싸웠다. 전투는 253차례 벌어졌고, 일부 기록은 에티오피아군이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전한다. 대부분의 전투에서 이겼다는 평가도 있다. 뛰어난 전공을 세운 것만은 분명하다. 이들은 1954년 철수할 때까지 121명이 전사했고, 536명이 부상을 입었다. ‘코리아(Korea)’라는 이름조차 낯설던 그들은 이역만리에서 목숨을 바쳤다. 결과적으로 에티오피아 정부는 일정 부분 목표를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파병 직후 에리트레아를 되찾았기 때문이다. 숫자로 기록된 역사 뒤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눈물이 있다. 6·25전쟁 75주년을 맞아 경북 포항 양포교회 등의 초청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한 마미테 훈데 센베타 씨(73·여)는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녀가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한국으로 떠났고, 화천에서 벌어진 전투는 그의 마지막 전장이었다.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의 부재는 가족의 상처로 남았다. 센베타 씨는 1974년 황제의 몰락과 함께 공산 정권이 들어선 뒤 ‘반역자의 딸’이라는 낙인을 안고 살아야 했다. 함께 한국을 찾은 참전용사 틸라훈 테세마 가메 씨(100)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오자 부대는 해체됐고,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다”면서 “정권이 바뀐 뒤의 삶은 참혹해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그의 증언은 전쟁 영웅의 귀환이 반드시 영광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시간이 흘러 한국은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이제는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가 되었다. 에티오피아에도 적지 않은 원조를 해왔다. 하지만 참전용사와 그 후손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은 아직 갈 길이 남아 있다. 에티오피아에서 30년 동안 자원봉사를 하며 이번 참전용사와 그 후손들의 방한을 도운 하옥선 선교사는 “여전히 참전용사와 후손들은 다 낡은 2평짜리 집에서 힘겹게 살고 있는 경우가 많다”면서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강뉴 부대원과 그 후손들에겐 6·25전쟁의 상흔이 여전한 것이다. 황성호 사회부 기자 hsh0330@donga.com}

    • 2025-06-2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광화문에서/황성호]기준도 없이 처벌만 강화한… 약물운전 입법공백의 불합리

    최근 방송인 이경규 씨(65)의 ‘약물 운전’이 논란이 됐다. 이 씨는 병원에서 처방 받은 공황장애 약을 먹고 운전을 했다. 경찰은 처방 받은 약이더라도 그 영향으로 정상적으로 운전하지 못할 때 운전대를 잡으면 도로교통법 위반이라고 했다. 사건은 현재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정밀감정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적지 않은 시민들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나도 약물 운전으로 처벌 받는 것 아니냐”며 불안해하고 있다. 이런 불안감은 약물 운전이 우리 일상생활과 맞닿아 있어서다. 공황장애뿐만 아니라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등에 쓰이는 약을 복용하고 운전해도 같은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이러한 질환을 앓는 사람들은 가파르게 늘고 있다.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은 환자가 100만 명을 넘은 것이 벌써 2022년이다. 2018년 75만 명 선에서 4년 새 약 33% 폭증했다. 2017년 13만 명 정도였던 공황장애 환자도 불과 4년 만인 2021년 20만 명을 넘어섰다. 하다 못해 건강검진에서 수면내시경을 한 뒤 운전하더라도 약물 운전 혐의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있다. 약물 운전이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처벌에 대한 원성도 적지 않다. “아파서 처방 받은 약을 먹고 운전한 것인데 과도한 처벌 아니냐”는 것이다. 택시 기사나 대형 트럭 운전사같이 운전이 생업인 사람들은 공황장애나 우울증에 걸리면 일을 그만둬야 할 수도 있다. 일견 이해가 가는 주장이다. 다만 약물 운전의 위험성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달 1일 법원은 수면제를 복용한 채 운전하다가 1명을 숨지게 하고 7명을 다치게 한 운전자에게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수면내시경 후 충분히 자신의 몸이 회복됐다 여기고 혼자 차를 운전해 집에 왔는데, 나중에 보니 어떻게 운전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는 환자들도 있다고 한다. 음주 운전, 마약 운전만큼이나 약물 운전도 위험한 것이다. 행정부와 입법부가 시민의 일상과 처벌 사이에서 현명한 대책을 내놓아야 하는 까닭이다. 약물 운전에 관련된 현행 법에는 공백이 많다. 한국은 금지 약물을 먹은 뒤 언제부터 운전이 가능한지 규정이 없다. 해외는 다르다. 영국과 독일은 해당 약물 복용 후 ‘24시간 뒤’ 운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호주는 ‘12시간 동안’ 운전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올해 4월부터 약물 운전에 대한 법정 최고형이 징역 3년에서 징역 5년으로 높아졌지만 운전 가능 시간 등을 규정하는 조항은 여전히 없다. 범법자만 양산하는, 정교하지 못한 법이다. 음주 운전의 경우 1962년 도로교통법 시행령이 적용되며 처음 단속 기준이 생겼다. 그해 국내 자동차 수는 불과 1만1449대. 인구 10만 명당 4대 꼴이었다. 경부고속도로가 만들어지기 8년 전에 이미 음주 운전 단속 세부 조항이 마련된 셈이다. 지금 약물 운전의 사정은 어떤가. 국내 우울증 환자는 인구 10만 명당 1944명(2022년 기준)이다. 우울증 약을 복용하는 사람도, 그러고도 운전을 하는 사람도 빠르게 늘고 있다. 입법이 늦어도 너무 늦었다.황성호 사회부 기자 hsh0330@donga.com}

    • 2025-06-1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광화문에서/황성호]나라 흔든 ‘여사 리스크’… 다음 정부에서는 없어야

    2009년 한국여성정치연구소는 전국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바람직한 영부인상’을 묻는 설문 조사를 했다. 당시 가장 많이 나온 응답은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사회봉사 활동에 헌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47.3%)였다. 두 번째도 ‘내조에만 전념하는 현모양처형’(29.0%)으로 비슷했다. 세 번째는 달랐다. ‘자기영역을 갖는 전문가 영부인’(23.2%)이었다. 자기영역을 갖는 전문가란 단순 봉사 정도가 아니라 영부인이 자신의 분야에서는 사회적 역할을 활발히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영부인을 원하는 국민이 설문 당시인 16년 전보다 더 많을지는 의문이다. 온 국민이 아는 ‘여사 리스크’ 때문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 관련 사건이 대표적이다. 검찰은 건진법사 전성배 씨가 통일교 고위간부로부터 받은 샤넬백과 다이아몬드 목걸이, 천수삼의 최종 종착지가 김 여사일 가능성을 의심하고 수사하고 있다. 전 씨 측은 선물을 건네지 않았다고 하고, 김 여사 측 역시 받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진실은 수사로 가려질 것이다. 다만 공적인 직책이 없는 무속인 전 씨가 ‘로비 창구’로 유력가들에게 지목되고, 그에게 일부 선물이 간 것은 사실이다. 그 원인은 김 여사가 전 씨에게 곁을 내줬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전 씨가 윤 전 대통령 대선을 지원한 것이 김 여사의 권유 때문이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윤 전 대통령의 장모 최은순 씨와 전 씨가 지난해 10차례 통화한 사실도 드러났다. 대통령실이 영부인 주변인 관리에 실패한 사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한편에서는 또 다른 ‘김 여사’ 문제도 재점화되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의 옷값을 특수활동비(특활비)로 대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이 의혹이 불거졌을 당시인 2022년 4월 청와대 대변인은 라디오에 나와 “카드든 현금이든 지급 방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이 다 사비라는 것이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세금이 아니라 김정숙 여사의 주머니에서 옷값이 나왔다는 의미다. 최근 서울고법은 대통령기록관 압수수색 영장을 경찰에 발부했다. 앞선 청와대 주장과는 반대로 특활비가 옷값에 사용됐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 관계자는 “(의혹) 그 자체가 놀라운 발상”이라며 부인했는데, 수사 결과가 드러나면 누가 더 놀라운 발상을 했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 혹시라도 특활비를 동원한 것도 부족해 거짓말로 국민을 속였다면 그 죄는 무겁다. 두 명의 ‘김 여사’에게 제기된 의혹은 다르지만 집권 동안 공식 석상에서 대통령보다 더 주목받을 때가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선출된 권력인 대통령보다 선출되지 않은 영부인이 더 돋보일 때 국가 시스템이 망가질 수 있다는 걸 우리 국민은 요즘 피부로 느끼고 있는 셈이다. 한국여성정치연구소의 2009년 조사에서 또 다른 설문 항목은 ‘대선 후보의 부인이 선거 결과에 영향을 끼치는지’였다. 당시 “그렇다”는 비율은 54.7%였다. 다가올 6·3 조기 대선을 앞두고 같은 조사를 한다면 그 결과가 어떨까. “그렇다”의 비율이 더 높아지지 않을까. 황성호 사회부 기자 hsh0330@donga.com}

    • 2025-05-0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광화문에서/황성호]산불 형량 높여도 불길 확산 막지 못한다

    “산림병해충을 예찰(豫察)·방제(防除)하며 산불을 예방·진화하고 산사태를 예방·복구하는 등 산림을 건강하고 체계적으로 보호함으로써….” 우리나라 산지의 나무를 보호하는 법인 ‘산림보호법’의 1항인 ‘목적’ 부분이다. 산림을 훼손하는 주된 원인 하나로 산불이 꼽혔다. 그러나 적시된 원인 중에는 두 번째다. 산불의 위험과 그 대비책 수립 필요성이 산림병해충보다도 간과돼서일까. 이번 산불은 서울 면적의 80%를 불태우고, 30명이 넘는 희생자를 낳았다. 사망자는 산림청이 1987년 관련 통계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로 가장 많다. 최근 각종 방지책 제언이 쏟아지는 것도 산불 예방을 위해 한국 사회가 그만큼 고칠 점이 많다는 방증이다. 그 가운데는 실수로 산불을 낸 사람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이자는 주장도 적지 않다. 현행 산림보호법은 실화(失火)로 산불을 낸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한다. 이번 산불 원인 대부분이 성묘 등의 과정에서 벌어진 실화다 보니 경각심을 가지게 하자는 차원이다. 하지만 이번 산불에서 2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25일을 복기해 보자. 그날은 이번 산불의 교훈으로 발생 원인보다는 확산 방지책에 집중해야 한다는 걸 말해준다. 22일 경북 의성군에서 시작된 산불은 24일까지는 경북에서 희생자를 낳지 않았다. 상황은 25일 급변했다. 비가 오지 않은 상황에서 초속 27m의 강풍까지 겹쳐 청송과 영양, 영덕까지 삽시간에 산불이 번지며 참사가 빚어졌다. 산불 발생 지역에서 영덕 바닷가까지는 직선 거리로 51km인데, 폭주하는 산불을 멈출 수 있는 브레이크는 없었다. 산림청이 집계한 국내 산불 원인 10년 통계(2015∼2024년)는 일견 형량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듯하다. 산불 원인 1위가 ‘입산자 실화’이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평균 171.3건으로 가장 많다. 그 다음이 쓰레기 소각(67.5건)과 농산부산물 소각(60.3건) 순이다. 다만 이 통계를 볼 때 피해 면적도 같이 고려해야 한다. 입산자 실화로 인한 평균 피해 면적은 4.01ha로 쓰레기 소각 때문에 발생한 것(3.58ha)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실수로 누군가 불을 내든 쓰레기를 태우려 낸 불씨든 별다른 차이 없이 확산되는 셈이다. 형량을 높이면 관련 범죄가 줄어드는지는 학계의 오래된 논쟁거리이기도 하다. 사형제가 부활하더라도 살인 등 강력 범죄가 실제로 줄어들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상당수 있다. 더군다나 한국의 실화자 처벌 수위가 미국 등 해외보다 그다지 낮지 않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미국에선 장난으로 폭죽을 던져 산불을 낸 소년에게 400억 원대의 배상금을 내라는 판결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평범한 개인이 마련하기는 힘든 돈이다. 상징적 의미에 그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사고 원인을 개인에게만 묻다가 근본적 대책을 소홀히 해 비슷한 사고를 반복하는 일이 허다하다. 세월호와 삼풍백화점 참사 등이 그랬다. 이번 사태의 해결책으로 실화자의 형량을 높인들 1km 갈 산불이 100m에 그치진 않을 것이다. 산림당국과 국회의 성숙한 해결책을 기대한다.황성호 사회부 기자 hsh0330@donga.com}

    • 2025-04-0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