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란

한애란 기자

동아일보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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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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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31~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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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가 31% 폭락 인도네시아…원인은 ‘전국 무상급식’ 청구서[딥다이브]

    올해 들어 주가지수가 31%나 급락한, 전 세계 증시 수익률 꼴찌를 기록한 나라가 있습니다. 통화가치 역시 폭락해서 거의 외환위기 수준이죠. ‘신흥시장의 총아’에서 골칫거리로 전락한 인도네시아 이야기입니다.한때 돈을 싸들고 인도네시아로 몰려들던 투자자들이 앞다퉈 탈출 중입니다. 그 중심엔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의 정책이 있죠. 급기야 인도네시아 대학생들이 “나라가 파산할 위기”라며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는데요. 인도네시아 경제가 걱정스러운 이유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6월 26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외국인 투자자는 탈출 중요즘 인도네시아 경제뉴스가 나올 때마다 깜짝깜짝 놀랍니다. 몇 달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거든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종합지수는 6월 들어 6000선마저 깨졌어요. 올해 들어 31% 급락하며 전 세계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죠. 자카르타 거래소는 약 10년 만에 동남아시아 시가총액 1위 거래소 자리를 싱가포르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인도네시아 루피아 환율이 6월 한때 달러당 1만8000 루피아를 기어이 넘기고 말았습니다. 1만8000 루피아는 1998년 외환위기 때도 넘긴 적 없는 역대 최고치. 루피아 가치가 곤두박질쳤단 뜻이죠.-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은 비상입니다. 통화가치 급락을 막기 위해 6월 18일 긴급 회의를 열고 또다시 기준금리를 인상했죠. 바로 전날까지 ‘특별 금리 인상은 없다’고 선언했던 걸 뒤집을 정도로 허둥댄 건데요. 이로써 인도네시아 기준금리는 한달 만에 1%포인트나 급등했습니다(4.75→5.75%)이거 보면 마치 경제 위기라도 일어난 것 같잖아요? 그런데 지표상으로 인도네시아 경제는 상당히 순항 중이거든요. 올해 1분기 GDP 성장률은 5.61%로, 3년 반 만에 가장 높았어요. 경제 성장은 오히려 가속화하고 있죠.그런데도 해외 투자자들이 인도네시아 금융시장에서 발을 빼고 있습니다. 어째 돌아가는 분위기가 영 심상찮다고 보기 때문인데요. 투자자들의 걱정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겁니다. ‘프라보워 정부를 더 이상 못 믿겠다.’인도네시아를 지켜온 ‘3% 룰’풍부한 천연자원(팜유, 니켈, 발전용 석탄 수출 세계 1위)과 젊은 2억8000만명의 인구. 인도네시아는 가진 게 많은 나라입니다. 성장 잠재력이야 늘 충분했죠.인도네시아는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으며 한차례 침몰했는데요. 이를 계기로 이 나라는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이뤘고, 경제적으로는 엄격한 재정 규율을 세웠어요. 이른바 ‘3% 룰’, 즉 연간 재정적자를 GDP의 3% 이내로 제한한다고 2003년 법률로 아예 못박아 버렸죠.이 ‘3% 룰’은 거의 헌법 수준의 절대적 성역입니다. 이걸 어긴 정부 예산안은 국회가 무조건 심의를 거부해야 하고요. 만약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이를 위반하면 탄핵소추까지도 가능해요.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거죠. 이렇게나 강력한 재정 규율 덕분에 인도네시아는 투자자들의 신뢰를 되찾았고요. 특히 조코 위도도 전임 대통령(2014~2024년 재임)은 핵심 산업을 전면 개방하면서 외국인 투자 유치에 적극 나섰어요. 한국의 자동차·배터리 기업을 포함한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퉈 인도네시아로 몰려들었죠. 3-4년 전만해도 인도네시아는 모두가 투자하고 싶어 안달난 기회의 땅처럼 여겨졌는데요. ‘조코 위도도의 정책을 계승한다’면서 2024년 10월 취임한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 하지만 그는 초반부터 시장의 기대를 저버리는 정책들을 밀어붙였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건 역시 이거죠. 무상급식.무상급식의 거대한 청구서무려 8300만명의 전국 모든 학생과 임신부에 하루 한끼 무상급식을 제공한다는 프라보워 대통령의 야심찬 계획. 전 세계 최대 규모의 무상급식 실험이죠. 이미 딥다이브에서도 그 진행 상황을 소개해드린 적 있는데요. 인도네시아 정부가 속도전을 펼치면서 불과 1년 반만에 수혜 학생 수가 6250만명으로 불어났습니다.그 많은 아이들이 공짜로 점심을 해결하게 됐으니 잘됐다고요? 그런데 요즘 이 무상급식 사업이 보통 시끄러운 게 아닙니다. 이달 초 무상급식을 총괄해온 다단 힌다야나 국가영양청장이 검찰에 체포됐어요. 본인 소유 재단에 급식운영 계약을 몰아준 부패 혐의로요. 정부 핵심 사업이 얼마나 부실하게 운영됐는지가 확인된 거죠.게다가 집단 식중독 사고는 왜이리 잦은지. 시민단체 통계에 따르면 총 3만7270명이 급식으로 식중독에 걸렸다죠. 정부가 정한 1끼 급식값은 1만 루피아(860원). 단가가 너무 낮아 급식이 부실하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논란이 큰 무상급식 사업에 올해 배정된 예산이 얼마냐. 268조 루피아(23조원)이나 됩니다. 그나마 주 6일 무상급식을 주 5일로 줄여서 원래 계획보다 20% 깎인 거예요. 인도네시아 올해 총 예산(3842조 루피아, 330조원)의 7%를 차지하고요. 보건(의료)이나 인프라 건설 같은 핵심 부문 예산을 한참 뛰어넘는 엄청난 규모이죠.당초 인도네시아 정부는 무상급식을 확대해도 3% 룰은 사수엔 문제없다고 주장해왔어요. 올해 GDP 대비 적자 비율을 2.68%로 막을 수 있다면서요.그런데 2월 말 이란전쟁이 터졌고요. 이제 계산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당초 올해 예산은 ‘국제유가 배럴당 70달러’를 가정하고 짜여졌는데요. 예상치 못한 고유가 탓에 정부가 국영석유공사에 지급해야 할 에너지 보조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버렸거든요. 국제유가는 올랐지만, 가격을 사실상 정부가 정하는 국내 휘발유값은 동결됐으니까요.아니, 이러다가 3% 룰 못 지키게 되는 거 아니야? 글로벌 금융시장이 술렁거렸고요. 신용평가사 피치는 지난 3월 “무상 급식을 포함한 복지 지출 증가로 재정적자 위험이 가중될 수 있다”며 인도네시아 신용등급(현재 BBB) 전망을 ‘부정적’으로 하향조정했어요. 국채 투자자들은 재빨리 달아나기 시작했죠. 진짜로 연말에 3%룰 못 지켜서 신용등급 떨어질 가능성이 있으니 미리 발을 뺀 겁니다. 해외 투자자의 국채 순매도로 환율이 뛰고(루피아 통화가치 약세), 환율이 급등하자 외국인의 ‘셀 인도네시아’가 가속화하는 악순환에 빠져버리고 말았는데요.그리고 이 대목에서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재정적자가 3% 선을 조금 넘긴다고 해서 그게 그렇게까지 큰일 날 일인가?사실 과거 코로나 팬데믹 당시 인도네시아는 재난 극복을 위해 3년간(2020~2022년) 한시적으로 3% 룰 적용을 유예하는 특별법을 만든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죠. 감염병 대응은 일회성이지만, 아이들 밥 먹이는 건 일단 시행하면 되돌리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니까요. 3%라는 숫자 자체보다는 ‘재정 규율의 고삐가 풀리기 시작했다’는 점이 투자자들을 화들짝 놀라 달아나게 만든 겁니다.폭발한 민심이 ‘국가 파산’ 외치는 이유외국인 투자자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환율이 역대 최고로 치솟으면서 인도네시아 정부는 비상입니다. 지금은 어떻게든 연말까지 ‘재정적자 3% 선’을 사수하는 게 최우선 과제이죠. 결국 정부가 극약처방을 내렸어요. 이란전쟁에도 억지로 동결해왔던 비보조금 휘발유(옥탄가 RON 92 이상 고품질) 가격을 6월 10일 자정을 기해 30% 넘게 기습적으로 인상했죠(L당 1030원→1396원). 국영석유공사의 적자 폭을 줄여서 나중에 정부 재정으로 메워야 할 보조금 규모를 줄이려는 건데요.예고 없이 날벼락을 맞은 소비자들. 민심은 들끓었고요. 12일 수도 자카르타에선 이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집니다. 대학생 약 1500명이 노란색과 초록색 학교 점퍼를 입고 거리로 나서 밤까지 행진을 했는데요. 이들이 소셜미디어에서 공유한 해시태그가 인상적입니다. “인도네시아가 파산을 향해 간다(#MenujuIndonesiaBangkrut)”왜 시위대는 국가 파산을 운운했을까요. 단순히 기름값이 오르는 게 문제가 아니라 포퓰리즘적 복지 정책으로 인한 국가 재정 파탄이 진짜 문제라는 걸 간파했기 때문이죠. 휘발유값을 올려 국민에게 부담을 떠넘길 게 아니라, 무리한 무상급식 정책부터 바로잡으라는 겁니다. 시위에 참여한 한 대학생은 BBC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죠. “집단 식중독 사건도 있었고, 이제는 부패까지 겹쳤습니다. 국민들은 이런 일들이 멈추길 바랐지만, 그 요구는 무시당했습니다.”금융시장에선 끊임없이 경고음이 울려대고, 대학생 시위대마저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그럼 프라보워 정부가 이를 계기로 정책 방향을 확 틀게 될까요? 포퓰리즘 정책을 포기하고 재정건전성에 집중할 수 있을까요.일단 무상급식 사업의 일부 후퇴는 시작됐습니다. 얼마 전 국가영양청은 여름 방학 기간엔 무상급식을 중단한다고 발표했고요. 이어 수혜 대상을 지금보다 대폭 축소(6250만명→4900만명)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하죠.하지만 아주 급진적인 전환을 쉽지 않을 겁니다. 왜? 프라보워 대통령의 핵심지지 세력인 농민과 서민층엔 무상급식이 여전히 매우 인기 있는 정책이거든요. 농가나 소상공인은 급식 식자재 납품으로 쏠쏠한 수익을 올리고 있는데, 이 판을 엎기란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여전히 인기가 높은 지도자입니다. 프라보워 지지율은 6월 초 여론조사에서도 72%를 기록했죠. 프라보워 대통령에게 직언을 할 만한 경제 관료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변화에 회의적인 이유인데요. 인도네시아의 재정건전성 수호자로 통하던 스리 물야니 인드라와티 재무장관은 이미 지난해 9월 해고됐고요. 블룸버그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정책 토론을 싫어하는 프라보워 대통령은 정통 관료가 아닌 군인 출신 측근들에 둘러싸여 있다는군요. 지금의 위기 상황을 헤쳐나갈 전문성을 기대하기란 어렵죠.“좋은 시절(호황)은 나쁜 경제 정책을 낳고, 나쁜 시절(불황)은 좋은 경제 정책을 낳는다.” 인도네시아에 전해 내려오는 ‘사들리의 법칙’이란 격언입니다. 저명한 경제학자 모하마드 사들리(1922~2008년)가 남긴 말인데요. 프라보워 대통령 취임 이후 현재까지 상황을 보면 사들리 법칙 중 앞부분 절반은 들어맞은 듯하죠. 과연 나머지 절반도 현실이 될 수 있을까요. By.딥다이브*이 기사는 6월 26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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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앤트로픽 버렸다” 미국 개발자들이 중국 AI로 갈아타는 이유[딥다이브]

    ‘중국판 앤트로픽’이 요즘 미국 IT 업계를 들썩이게 만들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즈푸AI(Zhipu AI). 얼마 전 공개한 신모델 ‘GLM 5.2’가 놀라운 가성비로 찬사를 받고 있는데요. 마침 미국 정부가 앤트로픽 첨단 AI 모델의 해외 접근을 차단한 직후라, 더 눈길을 끌죠.중국 AI 모델은 싼맛에 쓰는 것일 뿐이라고요? 보안 걱정돼서 함부로 못 쓴다고요? 그렇긴 하지만 사실 가성비는 많은 산업에서 승리를 위한 치트키이죠. 중국 가성비 AI 모델의 역습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6월 24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성능은 미국 턱밑, 가격은 10분의 1 “진심으로 감탄했고, 거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변화를 가져올 겁니다.”미국 IT 기업 버셀의 기예르모 라우흐 CEO가 21일 X에 남긴 리뷰입니다. 중국 AI 기업 즈푸AI의 첨단 모델 ‘GLM 5.2’를 직접 써보고 남긴 평이죠. 도대체 어떻기에 충격까지 받을 정도인가, 관심이 쏠렸는데요.우선 성능부터 살펴볼까요. AI 분석회사 아티피셜 애널리시스 평가에서 GLM 5.2는 전체 순위 4위를 차지했습니다. 앤트로픽의 ‘페이블5’과 ‘오푸스 4.8’, 오픈AI의 ‘GPT 5.5’ 다음인 거죠. 구글의 ‘제미나이 3.5’보다는 더 앞섰고요. 미국 첨단 모델과 격차가 없진 않지만, 상당히 따라잡았다 할 수 있죠.더 인상적인 건 가격. GLM 5.2은 API 이용요금이 출력토큰 100만 개당 4.4달러로, 페이블 5(50달러)과 비교하면 10분의 1에도 못 미칩니다. GPT 5.5(30달러)와 비교해도 7분의 1 수준이고요. 경제성 면에서 특히 놀랍다는 평가가 이어집니다.무엇보다 GLM 5.2는 다른 중국 AI 모델과 마찬가지로 오픈소스이죠. 누구나 이걸 공짜로 내려받아 자신의 서버에서 직접 돌릴 수 있다는 뜻인데요(클라우드 연결 없는 로컬 AI). 오픈소스 AI 모델로 이런 훌륭한 성능을 낼 수 있다는 사실에 기술 업계는 흥분했죠. 기술전문가 리나스 벨리우나스는 자신의 뉴스레터에서 이를 “로컬 AI의 챗GPT 순간”이라 소개합니다.기술 업계만 호들갑 떠는 게 아니죠. 주식시장 반응도 이에 못지않게 뜨거운데요. 즈푸AI 주가는 GLM 5.2 출시 이후 열흘 만에 약 100% 뛰었어요. JP모건이 즈푸 AI 매출이 올해 534% 이상 급증하고 2028년이면 흑자로 전환할 거라며 실적 전망치를 상향 조정한 게 영향을 끼쳤죠. 참고로 즈푸AI는 올해 1월 홍콩 증시에 상장했는데요. 상장 뒤 누적 주가 상승률은 1500%가 넘습니다. 미국 안방 파고든 중국 AI이런 호들갑스러운 시장의 반응에도 시큰둥한 분들이 아마 많을 겁니다. ‘아무리 가성비가 좋아도 보안 걱정 때문에 중국 AI 모델을 쓰는 건 좀 그렇잖아?’라면서 말이죠.하지만 통계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합니다.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도 중국 AI 모델의 점유율이 급속히 커지고 있죠. 최근 악시오스가 소개한 미국 AI모델 중개 기업 오픈라우터의 통계를 한번 볼까요.2025년 초 10% 미만이던 중국 AI 모델(빨간색)의 토큰 소비량 점유율이 2026년 6월엔 50% 수준까지 급증했어요. 한때 80%가 넘었던 미국산 모델의 점유율이 중국에 밀리는 게 확연히 보이죠. 오픈라우터 통해 AI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중국 모델을 그만큼 많이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딥시크, 샤오미, 미니맥스, 텐센트 같은 중국 기업의 AI 모델이 이용량 1~4위를 싹쓸이했죠.이렇게 된 건 결국 돈 때문이죠. 요즘 미국 기업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토큰 비용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는 이야기는 이미 전해드렸는데요(). AI 기술 발전으로 사용량은 갈수록 늘 수밖에 없는데 앤트로픽은 최신 모델 요금을 무섭게 올리기만 하니, 부담이 이만저만 아니죠. 그래서 좀 저렴한데 성능 괜찮은 거 없나 찾으려 눈을 돌려보면 온통 중국 AI 모델들입니다. 비용이 조금 싼 정도가 아니라 10분의 1 이하라니, 끌리는 게 당연하고요. 최근 앤트로픽에서 딥시크로 갈아탔다는 미국의 한 파트타임 개발자는 레스트오브월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비용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나요. 솔직히 결과물의 품질 차이는 전혀 모르겠어요.”이미 에어비앤비와 커서 같은 미국 기업은 서비스 개발 과정에서 중국산 AI 모델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이미 인정했고요. 이달 초 미국 AI 에이전트 스타트업 린디는 “트래픽의 100%를 앤트로픽에서 딥시크(중국) V4로 전환해서 수백만 달러를 절약했다”고 X에 공개하기도 했어요. 이 회사 플로 크리벨로 CEO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메일 작성에 신이 필요하지 않듯이, 10분의 1 가격으로 기본적인 AI 기능을 얻을 수 있다면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죠.최근엔 마이크로소프트가 ‘코파일럿 코워크’ 제품에 중국 딥시크 모델 도입을 검토 중이라는 기사까지 나왔는데요. 현재는 미국 AI 모델(앤트로픽과 오픈AI)만 쓰는데, 딥시크 같은 오픈소서 모델을 추가해서 고객에게 저렴한 선택지를 제공하겠다는 겁니다.문 닫는 미국, 열어젖힌 중국정리하자면 ‘폐쇄형 고비용’ 미국 AI 모델과 ‘초저가 오픈소스’ 중국 AI 모델의 대결이 본격화했고요. 둘 사이의 기술 격차가 예상보다 빠르게 좁혀지면서, 중국이 상당히 무섭게 따라붙는 모양새입니다. 심지어 미국 기업들조차 이제 중국 AI 모델을 쓰는 데 거리낌이 없죠.그럼 쫓기고 있는 미국은 어떤 전략으로 대응해야 할까요. 지금보다 더 첨단 AI칩에 대한 수출 통제를 강화해서 중국을 압박하면 될까요. 또는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해서, 첨단 AI 모델의 기술 격차를 다시 벌려놓는 데 집중해야 할까요.이와 관련해 미국 의회 자문기구인 ‘미중 경제안보검토위원회(USCC)’가 지난 3월 발표한 보고서를 참고할 만한데요. 중국 오픈소스 전략이 미국 AI 패권에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다는 경고를 담은 보고서였죠. USCC는 그동안 미국이 해왔던 대로 컴퓨팅 자원을 쏟아붓는 최첨단 폐쇄형 모델을 개발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이렇게 지적합니다.“중국의 오픈소스 전략이 경쟁구도를 완전히 바꿔놨다. 미국 최고 모델들이 근소한 차이로 앞서곤 있지만, 글로벌 사용자 확보 경쟁에서 밀릴 뿐 아니라, 향후 AI 기술 표준과 규범을 설정할 능력까지 잃을 위험에 처했다. 미국이 혁신 리더십을 유지하려면 오픈소스 AI 연구를 가속화해야 한다.”누구나 공짜로 가져다 쓸 수 있는 오픈소스 AI 모델은 전 세계 개발자들을 끌어모을 가장 큰 무기이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쓰느냐에 따라 결국 미래의 AI 패권이 좌우될 거고요. 하지만 당장의 수익성과 IPO(기업공개)를 신경써야 하는 미국 AI 기업들은 돈 되는 폐쇄형 모델 개발에 집중하기 바빴고요. 그 사이 뒷마당은 중국의 오픈소스 모델들이 점령해버릴 태세입니다. 지금이라도 이 오픈소스 영토를 되찾아야 한다는 게 USCC의 주장인 거죠.하지만 미국 정부의 선택은? 어째 정반대로 가는 듯합니다. 지난 12일 미국 상무부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앤트로픽의 첨단 AI 모델 ‘페이블5’와 ‘미토스5’의 해외 수출을 금지해버렸어요. 심지어 미국 기업에 근무하는 외국 국적자까지 접속 차단을 요구했죠. 생태계를 넓히는 대신 문을 걸어 잠그고 기술을 독점하겠다는 일종의 쇄국주의를 택한 건데요.과연 문을 닫으면 중국의 추격을 피할 수 있을까요. 얼마 전 X에 올라온 ‘중국이 언제 페이블(앤트로픽 첨단 모델)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보느냐’라는 질문에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아마도 내년 1분기”라고 답했고요. 이에 즈푸AI 창업자인 탕제 칭화대 교수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댓글을 달았죠. 누구 말이 맞을지 한번 지켜보시죠. By.딥다이브*이 기사는 6월 24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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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급 50만원, 아파트는 4억’ 베트남…청년들 “그냥 평생 월세 살란다”[딥다이브]

    싱가포르보다도 높은 90%의 자가 소유율을 자랑하는 나라. 바로 베트남이죠. 그만큼 ‘집 한 채는 꼭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전통적으로 강한 나라인데요. 그런 베트남에서 요즘에 부쩍 내집 마련을 포기한 젊은 세대가 늘어만 갑니다. 몇 년 새 대도시 집값이 너무 말도 안 되게 뛰었기 때문이죠.결국 베트남 정부가 주택정책의 방향을 전환을 선언했습니다. ‘주택 소유’ 대신 ‘장기 임대’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바꾸겠다는데요. 베트남이 주택 소유를 포기하는 이유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6월 19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폭주한 베트남 집값 “난 평생 일해도 아파트를 못 살 거야.”요즘 베트남 젊은이들이 많이 하는 말입니다. 한국과 비슷하다고요? 그렇긴 한데, 수치상으로 보면 베트남이 더하죠.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통계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베트남 대도시 아파트값 상승률은 300%에 달합니다. 서울 집값 상승률(10년간 약 143%)을 뛰어넘죠. 요즘 호치민이나 하노이에 들어서는 신축 아파트는 ㎡당 분양가가 1억 동(580만원)을 넘는 것도 많아요. 도심의 방 두 개 70㎡(전용면적 21평)짜리 신축 아파트 가격이 약 4억원(70억 동)까지 치솟은 거죠.베트남은 근로자 평균 월급이 900만 동(약 52만원)에 불과하고요. 대기업 신입 개발자 월급이 1500만~2000만 동(86만~115만원) 정도입니다. 월급 2000만동 이상이면 중산층으로 분류되는데요.즉, 지금 베트남 대도시에선 20평대 신축아파트 한 채 값이 웬만한 중산층의 30년치 소득에 해당하고요. 임금이 오르는 속도(연 7~8%)보다 집값이 훨씬 빠르게 뛰고 있어요(연평균 19% 수준). “맨발로 슈퍼카를 쫓는 기분”이란 한탄이 나올 수밖에요.그런데 여기까지 보고 이런 생각을 하는 분도 있을 거예요. ‘어차피 집값은 오르게 돼있어. 그러니까 빚을 내서라도 얼른 집부터 사. 지금 안 사면 영영 못 사!’이런 공포(FOMO)로 인한 부동산 투기 열풍이 절정에 달했던 2024~2025년. 호치민·하노이에선 아파트 분양권에 수억 동의 프리미엄이 붙어 팔려나갔습니다. 거주가 아닌 더 비싸게 되팔려는 목적의 투기꾼들이 몰려들었죠. 집값은 이미 비싸지만, 일단 사면 가격이 무조건 뛸 테니까요. 베트남은 한국과 달리 주택 보유기간이 얼마든 양도세율이 똑같기 때문에, 단기매매에 매우 유리한 구조입니다.집값이 워낙 비싸니 담보인정비율(LTV) 한도인 매매가의 70~80%까지 은행 빚을 내서 집 사는 건 흔한 일이었고요. 또 마침 대출 이자율이 베트남 기준으로는 저금리인 연 5%대였기에, 공격적인 투자자들이 많았습니다. 투기수요만큼이나 공급부족도 심각했어요. 부동산 시장 활황이 지속되면 보통은 건설사들이 앞다퉈 주택 공급 물량을 늘리기 마련인데요. 베트남의 지독한 관료주의가 그걸 틀어 막았기 때문입니다.베트남에선 건설사가 주택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면 9개 정부기관을 거치며 30개 넘는 도장을 받아야 해요. 모든 인허가 절차를 마치는 데 최대 3000일(8.2년)이 걸릴 수 있죠. 끝없는 관료주의의 벽에 가로막혀서 주택 개발 허가 건수는 급감했습니다(2020년 연간 743건→2025년 상반기 58건).이렇게 행정비용이 많이 드니 건설사는 돈이 될 만한 프로젝트만 진행하려고 하죠. 그러니 새로 들어서는 건 온통 비싼 고가 주택뿐입니다. 올해 1분기 호치민시 신규 공급 아파트 중 72%는 분양가가 ㎡당 1억3000만 동(754만원)을 넘었고요. 중산층이 노릴 만한 중급(㎡당 9000만 동, 522만원 이하) 아파트 공급은 아예 제로였어요. 공급은 쪼그라들고 투기꾼은 활개 치는 광기 어린 부동산 시장이 펼쳐졌던 거죠. 대출금리 14%의 날벼락그리고 드디어 이 폭등장의 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최근 베트남의 금리가 아주 무섭게 뛰고 있기 때문이죠. 5%대 대출금리는 옛말이 됐고, 13~14%대 고금리가 다시 돌아왔는데요.베트남 중앙은행은 기준금리 역할을 하는 ‘재융자율’을 3년 넘게 4.5%로 동결 중입니다. 그런데도 왜 은행 대출금리는 이렇게 무섭게 뛰었을까요? 한마디로 시중은행에 돈이 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의 경기호황과 부동산 시장 과열로 대출은 폭증하고 예금은 줄어든 탓이죠. 올해 1분기 베트남 주요 은행의 예대율(예금에 대한 대출 비율)이 100%를 넘어섰어요. 은행이 예금으로 받은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대출을 내줬다, 즉 은행 곳간이 텅 비었다는 뜻이죠. 은행엔 비상상황이라 할 수 있는데요.베트남 은행들은 생존을 위해 예금 끌어모으기에 안달입니다. 4월 초부터 연 7~9%짜리 고금리 정기예금이 쏟아져 왔고요. 일부 은행은 연 10% 특판예금까지 내놨어요. 이렇게 조달금리가 올랐으니, 당연히 대출금리가 치솟을 수밖에요.1~2년 전 변동금리로 은행 대출을 받아서 집을 샀던 이들은 큰일 났습니다. 이미 영혼까지 끌어모아 빚을 냈는데, 갚아야 할 이자가 갑자기 불어나 버렸으니까요. 금리가 치솟자 단기 차익을 노리고 달려들던 투기꾼들은 자취를 감췄고요. 속속 가격을 낮춘 급매물들이 나오곤 있는데, 안 팔립니다. 대출 금리가 14%인데 지금 누가 살 수 있겠어요. 거래는 얼어붙고 집값은 정체된 채 매수자와 매도자 모두 눈치 보는 분위기라 할 수 있는데요. 이대로 베트남 주택시장의 거품이 꺼질지, 아니면 잠시 숨고르기일지는 전망이 엇갈립니다.소유에서 거주로, 패러다임 바뀐다여기서 주목할 건 베트남 젊은 세대의 반응이죠. 한동안 집값이 터무니없이 뛰더니, 이제 금리까지 무섭게 치솟았어요. 그러자 아예 ‘집 사기를 포기한다. 그냥 월세로 살겠다’는 젊은이들이 늘어만 갑니다. 분노와 절망을 넘어 이제 해탈의 단계에 접어든 셈인데요.베트남 언론에 소개된 사례들을 볼까요. 호치민시에서 자영업을 하는 젊은 부부. 합산 월 소득이 4200만 동(247만원)에 달하지만, 집 구매 계획을 취소하고 월 900만 동(53만원)짜리 작은 월세집에서 계속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남편은 이렇게 말했죠. “저희는 35억 동(2억원)짜리 아파트를 사려고 은행 대출을 받을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원리금 상환금이 월 2500만 동(147만원)에 달해서 생활비까지 더하면 감당하기가 힘들겠더라고요.”또다른 29세 직장인도 비슷한 얘기를 합니다. “예전엔 35세 전에 집을 사는 게 목표였는데, 부담감이 너무 컸어요. 그래서 월 1000만 동(59만원)에 45㎡짜리 아파트를 빌렸죠. 투자나 저축을 위한 돈을 마련할 수 있어서 (월세가) 더 좋아요.”‘이자 내면 남는 게 없는 하우스 푸어가 되거나 출퇴근 힘든 외곽에 집을 사느니, 차라리 직장 가까운 데서 월세 살련다’라는 사고방식의 등장. 집의 개념이 ‘소유’에서 ‘거주’로 바뀐 젊은 세대가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현실적인 타협점을 찾은 거죠.그리고 이건 베트남 전통 가치관을 생각하면 꽤 파격적인 변화입니다. 베트남에서 부동산은 오랫 동안 최고의 자산증식 수단으로 여겨졌고요. 집 한 채는 꼭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 강했는데요. 이게 깨지기 시작했습니다.그리고 또다른 중요한 변화. 정부도 방향을 틀기 시작했어요. 5월 24일 토람 국가주석은 공식 회의에서 “주택은 살기 위한 것이지 투기나 자산 축적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며 이렇게 말했죠. “지금부터 2030년까지 분양 주택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특히 주요 도시와 산업단지, 그리고 주택 가격이 소득 수준을 훨씬 초과하는 지역에서는 임대주택을 전략적 축으로 삼아야 한다.”자가 소유율 90%의 베트남이 임대주택 중심으로 전략을 바꾼다니, 패러다임의 큰 전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시 거주자 절반 이상이 임대주택에 사는 독일과 일본을 롤모델로 삼았다는 분석이 나오죠. 지난달 팜 민 찐 총리는 하노이시 정부에 대규모 장기 임대주택 건설 프로젝트를 당장 6월 안에 착공하라고 지시하기도 했어요. 임대주택 늘리기 속도전에 나선 거죠.하지만 ‘소유 대신 거주’로의 전환, 이거 말처럼 쉽진 않은 일인데요. 무엇보다 임대주택은 원래 돈이 무지하게 드는 사업이죠. 천문학적인 초기 투자비용이 드는데 자금 회수엔 수십 년이 걸리다 보니, 적자가 불가피하고요. 따라서 정부가 정책 자금을 투입해서 적극적으로 판을 만들어야만 합니다. 결국 정부의 재정 여력에 따라 성패가 좌우될 수밖에 없죠.도로, 공항, 철도, 발전소 등 기초 인프라 깔기에도 바쁜 베트남 정부가 임대주택까지 할 여력이 과연 있을까요. 방향은 좋고 계획은 원대하지만, 결과는 좀더 지켜봐야 겠군요. 어느 나라나 역시 부동산 문제 해결은 쉽지가 않습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6월 19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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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 많이 쓰는게 혁신?…IBM 몰락시킨 실수 반복하는 기업들 [딥다이브]

    모든 기업이 AX(AI Transformation)를 외치는 요즘. 그럼 똑똑한 개발자들이 AI를 더 많이 쓰게 만들면 일을 훨씬 더 잘하게 될까요? AI가 개발자의 능력치를 극대화해서 기업 생산성을 몇 배로 끌어 올려 줄까요.얼마 전까지 미국 실리콘밸리는 이런 환상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앞다퉈 직원들에게 더 많은 AI 사용, 이른바 ‘토큰맥싱(Tokenmaxxing)’을 독려했죠. 그런데 그 결과는? 불과 몇 달 만에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가 줄줄이 확인되는 분위기인데요. AI 조급증과 ‘토큰 맥싱’ 현상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이 기사는 6월 17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연봉만큼 결제하라” 토큰 맥싱의 바람 “이건 쉬운 돈벌이(easy money)다. 계속 이렇게 하라. 한계는 없다.”지난 2월 메타(Meta) CTO 앤드류 보스워스(Andrew Bosworth)가 한 이 발언, 꽤 화제가 됐습니다. 메타의 최고 엔지니어가 연봉에 맞먹는 금액을 토큰으로 결제했고, 그 결과 생산성을 “5배에서 10배 더 높였다”는 사실을 자랑하면서 했던 말이었는데요.이는 당시 실리콘밸리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 발언이었습니다. 참고로 여기서 토큰(Token)이란 AI 모델이 데이터를 처리하고 생성하는 데 사용하는 연산 단위를 말하고요. 앤트로픽이나 오픈AI 같은 AI 서비스 제공기업은 고객이 쓴 토큰 양에 비례해 요금을 매기는 게 요즘 추세입니다. 첨단 AI 모델일수록 토큰 가격은 비싸죠. 예컨대 앤트로픽의 최신 모델 클로드 오푸스 4.6의 사용요금은 ‘출력’ 토큰 100만개당 25달러에 달합니다.한동안 메타뿐 아니라 미국의 크고 작은 IT 기업들은 너도나도 자기네 개발자들이 토큰을 얼마나 많이 쓰고 있는지를 자랑하기 바빴습니다. 아마존, 우버,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IT 기업들은 ‘내부 순위표’를 만들었죠. 누가 가장 많은 토큰을 쓰고 있는지, 사용량을 집계해 공개했어요. 토큰을 가장 많이 쓴, 즉 회사에 가장 큰 비용을 초래한 개발자일수록 인정을 받았습니다. 토큰을 엄청나게 썼다는 건 그만큼 AI 기술에 잘 적응한 능력자라는 걸 보여주는 지표로 여겨졌죠.특히 이런 경쟁에 기름을 부은 건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3월에 한 이 발언이었죠. “연봉 50만 달러를 받는 엔지니어가 연간 최소 25만 달러어치의 토큰을 소비하지 않는다면 매우 우려스러울 겁니다. 그건 우리 칩 설계자 중 한 명이 ‘글쎄, 난 그냥 종이와 연필만 쓸 거야. CAD(컴퓨터 지원 설계) 툴은 필요 없을 것 같아’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죠.”이렇게 ‘AI 토큰 사용량=생산성과 혁신성의 척도’라며 가급적 많은 토큰 소비를 독려하는 분위기. 이걸 일컫는 용어가 바로 ‘토큰맥싱(Tokenmaxxing)’이고요. 토큰맥싱은 AI 시대 실리콘밸리의 대세로 통했습니다.‘순위표’가 만든 황당 꼼수들토큰 사용량이 AI 기술 사용량을 보여주는 정량적 지표인 건 분명하죠. 기업이 직원들에게 혁신적인 기술을 돈 걱정 없이 마음껏, 더 많이 쓰라고 장려하는 건 어찌 보면 부럽기도 한데요. 하지만 기업들이 ‘내부 순위표’까지 공개하면서 AI 사용을 강하게 압박하자, 실제로 현장에서 벌어진 일은 다음과 같았습니다.<아마존>아마존에선 직원들의 사내 AI에이전트 ‘메쉬클로(Meshclaw)’ 사용량이 폭증했습니다. 메쉬클로는 이메일 분류나 슬랙(Slack) 앱과의 상호작용 수행 같은 업무를 하는 AI에이전트인데요. 업무에 그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저 토큰 사용 수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쓴 거죠. 예컨대 날씨 확인 같은 쓸데없는 일에도 말이죠. 메쉬클로 같은 AI 에이전트는 백그라운드에서 지속적으로 작업을 수행하기 때문에 대화형 챗봇보다 토큰을 1000배쯤 더 많이 소모할 수 있거든요.이런 비효율이 이어지자, 5월 말 아마존은 결국 토큰 사용량을 공개하는 내부 순위표인 ‘키로랭크’를 없앴어요. 데이브 트레드웰 수석부사장은 직원들에게 이렇게 당부했죠. “AI를 단지 쓰기 위해 쓰진 말아달라.”<마이크로소프트>마이크로소프트 역시 직원별 토큰 사용량을 올 1월부터 공개했어요. AI 사용을 장려한다는 취지야 좋았죠. 하지만 익명의 MS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는 기술 뉴스레터 ‘프래그매틱 엔지니어’에 이렇게 털어놨습니다.“토큰 사용량 지표를 부풀리기 위해 제가 하는 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AI에 이미 문서에 있는 코드에 대해 질문해요. AI는 문서를 검색하고 처리한 후 결과를 제공하는데, 이 과정은 (직접 검색하는 것보다) 10배 느리지만 토큰은 엄청나게 소모되죠. 저는 실제로 개발할 의도가 없는 기능의 프로토타입을 AI에 요청합니다. 몇 번 더 시도해 본 후, 결과물을 모두 버리죠. 직접 손으로 훨씬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작업이라도 항상 AI 에이전트를 사용하도록 설정해요. 그러고는 에이전트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을 지켜봅니다.”마이크로소프트는 토큰 사용량 대시보드를 없애진 않았는데요. 대신 개발자들에게 제공해 온 앤트로픽의 ‘클로드 코드’ 라이선스를 6월 말 대거 해지한다고 공지했어요. 명분은 자체 AI 도구 사용을 장려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제론 너무 불어나 버린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란 해석이 나오죠. <메타> 메타에서도 직원들의 토큰 사용량을 공개하는 순위표가 만들어졌어요. 최상위권에 오르면 ‘세션 불멸자(Session Immortal)’ 또는 ‘토큰 전설(Token Legend)’이란 명예로운 칭호를 부여받을 수 있었죠.그런데 그 순위표 이름이 하필 ‘클로도노믹스(Claudonomics)’였답니다. 메타가 수십조원을 쏟아부어 만든 자체 AI 모델 ‘라마(Llama)’ 대신 경쟁사 앤트로픽의 ‘클로드(Claude)’ 모델을 내부 개발자들이 쓰고 있다는 걸 인정한 셈이었죠.가장 놀라운 건 이렇게 AI 사용을 독려했더니 한 달 동안 메타 직원들이 소비한 토큰이 자그마치 73조7000억개에 달했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수치냐면, 이걸 앤트로픽 요금으로 환산하면 약 10억 달러(1조5000억원)어치에 해당합니다. 고작 한 달 만에 쓴 게 말이죠. 물론 메타 같이 큰 기업은 요금 할인을 적용받았겠지만, 그래도 최소 1억 달러는 썼단 뜻입니다.도대체 이 무슨 낭비인가요. AI에 투자한다면서 직원도 수천 명이나 해고한 회사가. 결국 메타는 이런 추세이면 올해 토큰 비용만 수십억 달러가 들 거라며, 클로도노믹스 순위표를 없앴고요. 대신 팀별 토큰 사용량을 모니터링해서, 비정상적으로 지출이 급증하면 경고를 띄우는 ‘AI 게이트웨이’ 시스템을 도입한다고 공지했죠. 불과 4개월 전 “한계는 없다”고 큰소리쳤던 앤드류 보스워스 CTO 역시 180도 말을 바꿨습니다 . “모든 움직임이 진전을 의미하는 건 아니며 토큰 사용량만으로는 어떤 영향도 측정할 수 없다”고 말이죠.지표가 목표가 될 때: 굿하트 법칙세계적 빅테크 기업에서 이 무슨 어리석은 짓인가 싶습니다. 고연봉의 고급 엔지니어들이 순위표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려고 AI 에이전트에 쓸데없는 일을 시키며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니 말이죠.그럼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사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고요. 이를 일컫는 ‘굿하트의 법칙’이란 용어도 있습니다. 영국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가 1975년 “측정 지표가 목표가 되는 순간, 더 이상 좋은 지표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한 데서 유래했는데요.기술업계의 대표적 ‘굿하트 법칙’의 사례로 꼽히는 IBM의 운영체제(OS) 개발 스토리를 한번 볼까요. 1985년 컴퓨터 시장의 절대 강자였던 IBM은 떠오르던 기업 마이크로소프트와 차세대 PC용 OS를 공동 개발했어요. IBM은 당시의 관행대로 개발자의 생산성을 ‘코드 라인 수’로 측정하던 대기업이었죠. 더 긴 줄의 코드를 작성할수록 생산성 높은 개발자라고 평가하는 시절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 개발자들은 달랐죠. 그들은 짧고 간결하고 가벼워야 좋은 코드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았기에, 기존 IBM 코드를 최적화해서 확 줄여놨어요. 그런데 이걸 보고 IBM 경영진이 뒤집어진 거죠. 그들은 “코드를 늘려야지, 왜 줄이냐”고 황당해하며 다시 늘리라고 했고요. 이렇게 해서 탄생한 운영체제 ‘OS/2’는 당연히 무겁고 느리고 버그가 많았죠.이런 IBM의 관료주의에 질린 마이크로소프트는 비밀리에 ‘윈도우 3.0’ 독자 개발 프로젝트를 가동했고요. 1990년 출시된 가볍고 빠르고 효율적인 윈도우 3.0은 대히트를 쳤습니다. 이후 IBM은 PC시장의 주도권을 영영 잃고 말았죠.당시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는 코드 라인 수에 집착하는 IBM 임원들에게 이런 독설을 날렸다고 해요. “소프트웨어 생산성을 코드 라인 수로 측정하는 건 비행기 제작의 진척도를 무게로 측정하는 것과 같다.” 눈에 보이는 지표(코드 라인 수/무게)에만 집착하면 본질(소프트웨어 성능/비행 능력)을 놓칠 수 있다는 경고였습니다.어떤가요. 지금의 토큰 사용량에 대한 집착이 40년 전 IBM의 코드 길이 집착과 어딘가 비슷하지 않나요. 토큰 사용량은 어디까지나 입력값일 뿐, 그 자체로 결과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간과됐던 거죠.실리콘밸리에 거세게 일었던 토큰맥싱의 바람은 불과 몇 달 만에 잦아들었고요. 이젠 ‘얼마나 많은 토큰을 썼는가’ 대신 ‘토큰당 얼마나 가치 있는 결과를 냈는가’를 들여다보는 걸로 바뀌고 있습니다. 양보다는 효율을 따지기 시작한 거죠. 생각보다 금세 끝나버린 토큰맥싱 파티. 역시 아직 우리는 AI 시대의 극초기 단계를 지나고 있을 뿐이고 갈 길이 멀다는 걸 깨닫게 해주네요. By.딥다이브* 이 기사는 6월 17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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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 발전할수록 간병비는 뛴다? 물가의 역설[딥다이브]

    치솟는 물가가 걱정거리인가요. 월급이 올랐는데도 생활비는 늘 쪼들리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똑같은 고민을 미국과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인이 요즘 하고 있거든요. 어느 나라에서나 모든 것이 너무 비싸게 느껴집니다.그리고 이 원인을 설명해주는 경제학 용어가 ‘보멀 효과(Baumol Effect)’이죠. 기술이 발전하고 생산성이 향상될수록 서비스 비용은 오히려 더 오르는 아이러니를 뜻하는데요. 달리 표현하자면 ‘에어컨은 저렴해지고 에어컨 수리비용은 비싸지는’ 시대랄까요. 기술혁신과 보멀효과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6월 12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기술혁신이 만든 가격 파괴사람들은 무엇이 가장 시급한 경제적 과제라고 생각할까요. 이런 설문조사를 하면 항상 1위는 ‘물가안정’입니다. 올해 3월 리서치뷰의 여론조사도, 지난해 한국경제인협회 설문조사도 모두 마찬가지였죠.그럼 물가가 그렇게나 많이 뛴 걸까요. 조금 장기로 통계를 뽑아볼게요. 지난 20년간 근로자 평균 월급은 85.3% 뛰었고요,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지수는 57.6% 상승했어요. 그러니까 물가가 오르는 속도보다 더 빨리 임금이 올랐습니다. 전반적으로 과거보다 생활이 더 풍요로워졌단 뜻이죠.아니, 뭔가 이상하다고요? 한번 우리가 쓰는 물건 가격을 따져보세요. 의외로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 없는 제품이 많습니다. 예컨대 모나미 153 볼펜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 자루에 200원대에 살 수 있고요. 청바지 한 벌은 20년 전 동네 옷가게에서 3만원대였는데, 지금도 패스트패션 브랜드에선 3만원대에 팔죠. 다이소에 가면 플라스틱 반찬통은 여전히 1000원이고요.가전제품은 더 합니다. 20년 전에 당시 가장 큰 55인치 벽걸이 TV는 700만원 가까이하는 ‘부의 상징’으로 통했는데요. 요즘엔 75인치 LED TV도 200만원이 채 안 됩니다. 화질 차이까지 생각하면 가격이 폭락한 거나 마찬가지죠.통신요금은 또 어떤가요. 2006년은 아직 아이폰이 나오기 이전의 피처폰 시대였고요. 당시 피처폰으로 노래 한 곡 다운받으면 최소 3000원, 뮤직비디오 한 편 다운받으면 십 수만원의 요금 폭탄이 터졌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월 6만원이면 데이터 무제한인 요금제도 있잖아요. 이걸 ‘데이터당 요금’으로 환산해보면, 상당히 극적인 가격 파괴가 벌어진 겁니다.항공권도 마찬가지죠. 20년 전엔 국제선에 취항한 국내 항공사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밖에 없었고요. 일본 한번 가려고 해도 왕복 항공권이 40만원은 넘었는데요. 저가 항공사가 여럿인 지금은 20만원대에도 가능합니다.이게 모두 기술이 발전하고, 세계화가 확대되면서 생산성이 극적으로 향상된 경제발전의 성과라 하겠는데요. 하지만 선뜻 이에 동의하게 되질 않습니다. 도대체 그럼 왜 이렇게 다 비싸게만 느껴지는 거죠?사람 손 닿을수록 가격은 폭등1977년 사후에 출간된 아가사 크리스티의 자서전엔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나는 차를 소유할 수 있을 만큼 부자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동시에, 차는 살 수 있으면서 가정부는 고용할 수 없다는 것이 인생의 아이러니이다.”가정부는 삶의 필수품인데 자동차는 꿈도 못 꿀 사치품이었던 1920년대를 회고하면서 남긴 얘기인데요. 50년 전 책 속의 문구가 지금의 물가 상황과도 너무나 잘 들어맞습니다.다시 20년 전과 지금의 물가를 비교해볼게요. 대량생산되는 공산품 가격은 분명 떨어졌는데 짜장면, 냉면 같은 외식 물가는 두세배로 뛰었고요. 만원이 채 되지 않았던 커트 비용이 이제 2만원을 웃돕니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집이라면 아이돌보미 비용(시급 1만3000~1만5000원)이 3배 정도로 뛰면서 이제 부부 중 한 사람 월급은 다 나갈 정도이고요. 20년 전 하루 5만~6만원이었던 간병비도 이제 15만원 가까이 돼서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죠. 한마디로 공장에서 대량생산되지 않는 사람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서비스 분야일수록 가격은 무섭게 뛰었습니다.공산품 가격은 날로 저렴해지는데 노동집약적인 서비스 비용은 갈수록 비싸지는 현상. 도대체 왜 생겨날까요. 경제학자 윌리엄 보멀은 1966년 낸 논문 ‘공연예술의 경제적 딜레마’에서 이를 분석했는데요.기술 발전으로 근로자 1인당 생산성이 높아지면 그에 따라 임금이 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죠. 하지만 1965년 현악 사중주를 연주하는데 드는 노동력은 1865년과 똑같았습니다. 즉, 경제학적으로 바이올리니스트의 생산성은 전혀 향상되지 않은 거죠. 그런데도 전문 바이올리니스트의 임금은 1865년보다 훨씬 높았어요. 왜? 임금을 높이지 않으면 음악가들이 조건이 더 좋은 다른 직업을 찾아 떠날 테니까요. 그들이 계속 연주를 하게 하려면, 생산성과는 상관없이 임금을 높여줘야만 하는 거죠. 결과적으로 산업혁명으로 이후 제조업에서 일어난 혁신과 발전이 제조업은 물론이고, 아무 상관없어 보였던 바이올리니스트의 소득까지 증가시킨 겁니다.이렇게 생산성 증가율이 높은 산업의 임금 상승에 따라 생산성이 정체된 산업의 임금까지 상승하는 것. 이를 경제학에선 ‘보멀 효과’ 또는 ‘보멀의 비용병(Cost Disease)’이라 칭하죠. 이를 접목시켜보면 왜 미용실 커트비나 아이돌보미와 간병인 비용이 점점 뛸 수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용사는 기술적으로 숙련된다고 해도 한 번에 한 사람 머리밖에 자를 수 없고요. 아이돌보미나 간병인이 하는 일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습니다. 아무리 디지털과 AI 기술이 발전한들 생산성을 높이긴 어려운 분야이죠.그럼 생산성이 그대로니까 임금도 올릴 필요가 없느냐? 그건 아닌 거죠. 그랬다간 미용사가 될 청년들이 차라리 돈 잘 버는 제조업 분야를 택하겠죠. 간병인 할 인력이 쿠팡을 선택할 거고요.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임금을 다른 업종에 맞춰 줘야만 하고요. 그러니 소비자 입장에서 보자면 받는 서비스는 그대로인데 비용은 점점 비싸지게 됩니다.그리고 이런 서비스 분야는 좀처럼 소비를 줄이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갈수록 맞벌이가 늘면서 외식이나 돌봄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늘어나는 추세죠. 결국 제조업과 첨단 기술산업의 생산성과 임금 수준이 높아질수록 서비스 비용도 덩달아 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AI 로봇에 헤어컷을 맡기거나 아기 기저귀 가는 일을 시키는 시대가 되지 않는 한 말이죠.AI 로봇은 구원이 될까존 콜리슨 스트라이프 공동창업자는 이렇게 농담처럼 말한 적 있어요. “오늘날 미국에 살고 있다면, 벽에 구멍이 났을 때 벽을 고칠 수리공을 부르는 것보다 평면 TV를 사서 구멍 앞에 놓는 게 더 저렴할 겁니다.”좀 과장되긴 했지만 틀린 얘기는 아니죠. AI와 자동화로 산업현장의 생산성이 극적으로 향상되고 관련 제품과 서비스 가격이 내려갈수록, 기술혁신이 미치지 못한 분야는 상대적으로 더 비싸질 겁니다.그리고 이게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환자 입장에선 간병비가 오르는 건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간병인 입장에선 반가운 일이니까요. 어찌 보면 보멀 효과는 기술혁명과 생산성 향상으로 인한 번영이 주변으로 퍼져나가서 모두 함께 성장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그럼 AI 시대에도 피할 수 없는, 어쩌면 더 가속화될지 모르는 서비스 비용의 급등을 소비자는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바로 이와 관련해 제시된 전혀 다른 두가지 해법이 흥미로운데요.하나는 기술주의적 시각입니다. AI 기술 발전을 더욱 가속화해야 한다는 거죠. 앤드리슨호로위츠의 알렉스 단코는 이렇게 강조했어요. “(AI 기술이 발전하면) 언젠가는 ‘마지막 1%의 인간 취업 가능 기술(예를 들어 개 산책)’이 남을 겁니다. 그 지점까진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때까지는 (AI 기술을 통한) 생산성 향상에 집중합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풍요로운 사회로 만들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기술이 더 발전하면 지금은 보멀효과가 나타나는 영역 중 상당 부분까지 기계화, 자동화해서 생산성을 끌어올릴(가격을 떨어뜨릴) 수 있을 거라 보는 겁니다. 이를 테면 간병 로봇 같은 기술이 그런 사례가 되겠죠.다른 하나는 심리학적 접근, 즉 ‘정신 승리’인데요. 롤랜드 프라이어 하버드대 교수(경제학)는 월스트리트저널 칼럼에서 이렇게 조언했어요.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없는 삶을 상상해보세요. 1975년을 떠올려 보면, 에어백도 없고, 강도 당할 위험도 훨씬 높았고, TV 방송국은 세 개뿐이었죠. 우린 이런 변화에 완벽하게 적응해서 더 이상 변화처럼 느끼지 못하고 있어요. 중산층 행복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은 육아비용이 아니라, 삶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알아차릴 여유조차 없다는 겁니다.” 경제구조의 변화는 어찌할 수 없으니 받아들이고, 대신 과거보다 나아진 부분에 집중하는 게 정신건강엔 나을 거란 조언입니다.여러분은 어느 쪽 이야기가 더 와닿나요? 참고로 20년 전인 2006년에 한국에 아직 없었던 것(또는 매우 드물었던 것)을 몇가지 꼽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스마트폰, 로봇청소기와 건조기, 모바일 뱅킹과 모바일 내비게이션, 카카오톡, 유튜브, 넷플릭스, 쿠팡, 배달의민족…. 어떤가요. 이런 게 없던 20년 전보다는 지금 삶이 좀 나아진 것 같나요? 아님, 차라리 그때가 더 나았을까요. By.딥다이브*이 기사는 6월 12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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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위는 넘치는데 세상은 왜 안 바뀔까?(feat. 과잉정치)[딥다이브]

    요즘 부쩍 전 세계가 시끌시끌합니다. 올봄 미국에선 ‘노 킹스(No Kings)’를 외치는 반트럼프 시위, 영국에선 ‘유나이트 더 킹덤(Unite the Kingdom)’을 외치는 반이민 시위가 벌어졌고요. 지난해 네팔·인도네시아·필리핀을 휩쓸었던 Z세대 시위는 올해 인도 ‘바퀴벌레당’으로 퍼졌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잠실 ‘개표소 시위’까지. 분노에 찬 시위의 물결이 곳곳에서 넘실대는데요.전 세계적으로 시민들의 정치 활동이 유난히 활발했던 지난 10년. 하지만 그 많았던 대규모 시위가 무엇을 남겼는지 따져보면 좀 애매합니다. 정치적 에너지는 넘치지만, 실질적 변화를 만들어내진 못하는 상황. 벨기에 역사학자 안톤 예거(Anton Jäger)는 이를 ‘하이퍼폴리틱스(Hyperpolitics)’, 즉 ‘과잉정치’라 칭하죠. 정치가 넘치는 과잉정치 시대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안톤 예거의 저서 ‘하이퍼폴리틱스’와 그의 칼럼·인터뷰, 그리고 관련 서평을 참고해 나름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이 기사는 6월 10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탈정치의 종말, 정치의 부활2000년대만 해도 선거철이면 으레 저조한 투표율을 걱정하는 기사가 나왔던 걸 기억합니다. 2008년 18대 총선은 투표율이 고작 46.1%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었죠. 미국 역시 1990년대~2000년대 정치적 무관심이 극에 달했는데요. 시민들은 정치에 관심을 끄고 의사결정은 엘리트(기술관료)에 맡겨버리는, 이른바 ‘탈정치(Post-Politics)’의 시대였습니다.그런데 요즘은 어떤가요. 얼마 전 한국의 지방선거 투표율은 61%로 31년 만에 가장 높았고요(1995년 68.4% 이후 역대 2위). 1996년 51%까지 떨어졌던 미국의 대선 투표율은 2020년 66.6%, 2024년 64%로 역사적인 고공행진을 이어갑니다.대규모 정치적 시위는 점점 빈번해지고 있죠. 미국에선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Black Lives Matter(흑인생명도 소중하다) 시위엔 역사상 최대 규모인 2600만명이 참여했고요. 올해 미국 전역에서 벌어진 ’노킹스‘ 시위엔 800만명이 동참했어요. 또 지난해 벌어진 미국 대학가의 친 팔레스타인 시위와 미국 각지에서 벌어진 이민 단속 반대 시위까지. 정치적 집회가 끊이지 않죠.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가 무려 세 번이나 있었습니다. 1981년 레이건 대통령 암살 시도 이후 40여 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죠. 그만큼 정치적으로 뜨거운 시기란 뜻입니다.이런 추세는 유럽도 마찬가지에요. 2014년 역대 최저(42.6%)로 떨어졌던 유럽의회 선거 투표율은 2024년 30년 만에 최고치(51%)를 기록했고요. 각종 시위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최근에도 스페인에선 주택난 항의 시위가, 영국에선 반이민 시위가 거세게 일었죠.정리하자면 탈정치는 종말을 맞았습니다. 죽은 줄로 알았던 정치가 다시 살아 돌아왔어요. 그것도 이전보다 한층 강해져서 말이죠. 안톤 예거에 따르면 최근 미국과 유럽의 ‘정치화(정치 참여 열기)’ 수준은 파시즘과 공산주의 대두로 혼란스러웠던 1930년대와 맞먹는 수준입니다. 시위의 규모와 빈도, 정치적 테러 시도, 투표율 같은 수치를 종합한 결과이죠. 이제 정치는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정치화되고 있는 거죠. 어떤 브랜드를 소비하는지, 어떤 스포츠를 보는지, 심지어 영화나 드라마 캐스팅(PC주의 논란)에까지도 정치가 침투했어요. 문화도, 경제도 모두 정치의 영역이 된 겁니다.시위는 많은데 변화는 없다여기까지 보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정치 참여 열기가 높아지면 좋은 거 아닌가? 그게 뭐가 문제지?네, 시민들이 다시 정치에 열을 올리는 것, 그 자체는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무관심한 것보다는 훨씬 낫죠. 안톤 예거가 지적하는 건 지금의 정치화가 너무 허무하단 겁니다. 폭발적인 에너지에 비해 실질적으로 이뤄내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인데요.앞에서 언급한 미국 역사상 최대 시위였던 2020년의 ‘Black Lives Matter(BLM)’를 볼까요. 이 운동은 요즘의 많은 시위가 그렇듯이 조직적인 리더가 따로 없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결집한 군중들이 주인공이었죠. 그들의 핵심 요구사항은 ‘경찰 예산 삭감’이었고요. 그래서 대대적인 시위 이후 어떤 성과가 있었을까요? 전혀요. 2021년 관련 법안은 상원에서 좌초됐고요. 삭감됐던 경찰서 예산은 바로 복원되거나 오히려 더 늘었습니다. 경찰 폭력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2022년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죠.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요. 수백, 수천만명이 모이긴 했지만 ‘조직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셜미디어 선동가가 시민들을 끌어모아 순식간에 거리를 점령하게 만들 수는 있죠. 하지만 정책을 바꾸는 건 길고 지루한 작업입니다. 지속적인 조직 없이는 그런 인내심을 발휘할 수가 없어요.SNS를 통해 폭발적으로 터져나왔지만 지속성은 없는 정치활동. 이건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는 공통 현상입니다. 예거는 인종 차별과 경찰 폭력에 항의한 미국 ‘BLM’ 시위와 2021년 국회의사당을 습격한 부정선거론자들이 조직 측면에서 보면 유사하다고 지적하죠. 지속 기간이 짧고, 회원 명부가 유지되지 않고, 지지자들이 규율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요. 그래서 성과는 미미하고, 결과는 공허합니다. 분노가 폭탄처럼 터지면서 연기만 자욱했을 뿐, 정작 기존 권력이 입은 실질적 타격은 거의 없죠.예거는 이를 ‘탈 제도화’ 현상과 맞물려 설명하는데요. 전 세계적으로 제도화된 참여, 즉 정당·노동조합·종교단체·시민단체 등에 회원으로 가입된 사람이 빠르게 줄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최저 수준이죠. 그 결과 온라인엔 정치적 표현이 넘치지만, 이를 제도의 틀로 끌어올 만한 연결고리는 매우 약해진 상황입니다. 이를 그래프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죠.정치도 주식처럼 단타 치는 시대시민의 정치적 관심은 매우 활발하게 분출되지만, 이를 뒷받침할 조직적 기반은 극도로 취약한 상황. 이것이 ‘하이퍼폴리틱스(Hyperpolitics)’의 정의입니다. 번역하자면 ‘과잉 정치’쯤 되겠죠.소셜미디어가 이런 과잉정치의 토양이 됐다는 건 너무 당연한 분석입니다. 소셜미디어 덕분에 정치적 의사 표현에 드는 비용은 획기적으로 낮아졌죠. 굳이 정당에 가입하지 않고도 밈과 해시태그 공유만으로 정치활동을 할 수 있으니까요. 예거는 이러한 “낮은 헌신과 낮은 비용”이 하이퍼폴리틱스의 특징이라고 지적해요. 정치 참여의 문턱이 확 낮아진 대신, 언제든 팔로워를 취소하고 빠져나갈 수 있게 된 거죠. 당연히 인내심이 부족하고 지속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는데요.이를 두고 예거는 개인의 정치 참여가 주식시장 투자자의 행동방식과 비슷해졌다는 분석도 내놨습니다. 꽤 그럴 듯한 비유인데요. “투자수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즉시 자원을 회수하는” 주식 투자자처럼 정치 참여도 인내심 없이 단기에 그친다는 거죠. 그는 뉴욕타임스 칼럼에선 이렇게 표현했어요. “마치 정치 주식시장의 변동처럼, 투자자들은 주식을 사들이기 위해 몰려들지만 내일이면 다시 팔아치울 수도 있습니다.”영국 사회학자 윌리엄 데이비스도 비슷한 주장을 했는데요. “정치가 점점 더 온라인 현상이 되어가면서 과거 금융시장의 전유물이었던 거품, 폭락, 광풍에 똑같이 노출돼있다”는 설명입니다. 금세 뜨겁게 달아오르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식어버리고 다른 테마로 쉽게 정치적 관심이 옮겨가곤 하는 거죠.아마 지금까지의 분석에 동의한다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정치가 달라질 수 있는데?사실 답은 이미 나와있죠. 온라인상의 일시적인 폭발을 넘어서는 지속 가능한 집단적 참여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문제는 이제 와서 갑자기 사람들을 정당에 가입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그걸 어떻게 하느냐인데요.안톤 예거는 “일상생활 속 공통의 관심사”를 강조합니다. 거창한 대의명분이 아니라 보육·간병·주거처럼 매일 맞닥뜨리는 일상의 문제에서 출발해야만 의미 있는 참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거죠. 에이, 너무 뻔한다고요? 그런데 그걸 아직 깨우치지 못한 정당과 정치인이 많은 듯한 건 왜일까요. By.딥다이브 *이 기사는 6월 10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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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린 바퀴벌레다” 인도 Z세대, 토요일 광장에 집결한다[딥다이브]

    인도의 ‘바퀴벌레인민당(Cockroach Janta Party)’을 아시나요? 인도 청년의 좌절감을 풍자해 생겨난 가상정당이 순식간에 인도 Z세대를 끌어모으더니, 이제 조직을 갖추고 전국적인 청년운동으로 진화 중입니다. 이번주 토요일인 6월 6일엔 첫 거리 시위까지 예고했죠.단순한 온라인 밈이 거리 시위로 번지기까지 고작 20일 남짓. 인도 청년들이 그동안 얼마나 억눌려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 하겠는데요. 그런데 왜 이들은 시위에서 “교육부 장관 퇴진”을 외치는 걸까요. 인도를 뒤흔드는 바퀴벌레당 현상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이 기사는 6월 5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그래, 우리는 바퀴벌레다“사회에는 시스템을 공격하는 기생충들이 존재합니다. 바퀴벌레처럼 일자리도 없고 전문 분야에 자리도 없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그중 일부는 언론, 소셜미디어, 정보공개 청구운동, 기타 시민운동가로 활동하며 모든 사람을 공격합니다.”아니, 이 무슨 망언인가요. 5월 15일 수리야 칸트 인도 대법원장이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생충에 바퀴벌레? 인도의 청년 실업자들로선 참을 수 없이 모욕적 발언이었는데요.다음날, 미국에서 유학 중인 서른살의 인도인 아비짓 딥케가 ‘바퀴벌레인민당’을 창당했다며 홈페이지를 엽니다. “게으르고 온라인에 중독됐고, 최근엔 바퀴벌레라는 소리를 듣는 젊은이들을 위한 정당”이라면서 말이죠. 정당 이름의 약자는 CJP. 인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소속된 집권당 BJP(인도 인민당)에 대한 풍자였습니다.바퀴벌레라는 모욕에 되레 ‘그래, 우리는 썩은 시스템 때문에 바퀴벌레가 됐다’고 되받아치며 탄생한 바퀴벌레당. 이에 인도 청년들은 열광했고요. 바퀴벌레당의 SNS 계정 팔로워와 웹사이트 가입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갑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줄로 알았던 Z세대가 보여준 이례적이고 놀라운 결집이었죠. 수많은 청년이 딥케에게 DM으로 “당신이 유일한 희망이니 제발 이 문제를 제기해달라”고 호소했다고 해요.바퀴벌레당은 비록 정식 정당은 아니지만, ‘2029년 총선을 위한 5개 어젠다’도 제시했는데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걸 보면 현재 인도 정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죠.-대법원장에 퇴직 후 보상으로 상원의석을 주지 않는다 (사법권 독립)-부정투표가 발생하면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테러방지법에 따라 체포한다 (공정한 선거)-국회의원과 내각 장관직의 50%를 여성에게 할당한다 (성평등)-암바니와 아다니(인도의 대표 재벌)가 소유한 모든 언론사의 면허를 취소한다 (언론 독립)-정당을 옮긴 주의원과 국회의원은 20년 동안 출마를 금지한다 (철새 정치인 퇴출) 젊은 민심의 심상찮은 움직임. 인도 정부가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겠죠. 인도 정부는 ‘국가 안보 및 주권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바퀴벌레당의 X 계정 접속을 차단했어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같은 ‘외세와 결탁한 불순한 세력’이라는 낙인을 찍은 거죠.그럼, 정부의 압박에 바퀴벌레들이 자취를 감췄을까요. 그럴 리가요. 오히려 ‘우리 목소리를 억누르려는 시도가 우리가 옳다는 증거’라는 인식만 심어줬고요. 바퀴벌레당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는 하루에 수백만 명씩 쭉쭉 늘어서 순식간에 2200만명을 돌파합니다. 12년째 집권 중인 인도 인민당의 인스타 팔로워 수(약 900만명)를 압도해 버린 거죠.비리와 부패로 얼룩진 대학 입시인도 Z세대를 위한 새로운 정치 커뮤니티의 탄생. 하지만 이것 역시 한때의 인터넷 유행에 그치는 게 아닌가 했는데요. 때맞춰 청년층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을 만한 대형 스캔들이 줄줄이 터져 나옵니다. 의대 입시 시험지 유출 스캔들과 대입 채점 부실 스캔들이죠.의사는 인도에서도 부와 명예가 보장되는 직업으로 통해요. 전국 정원이 11만명인 의대에 입학하려면 반드시 봐야 하는 시험이 의대 입학시험(NEET)인데요. 올해도 227만명의 수험생이 몰렸습니다.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겨뤄서 그중 단 5%만 통과하는 서바이벌인 거죠.그런데 5월 3일 지필 시험이 끝난 뒤, 수상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일부 과목 시험문제가 메신저를 통해 약 40만원에 팔렸던 ‘예상 문제’와 정확히 일치했죠. 인도 사회가 발칵 뒤집히면서 수사가 벌어졌는데요. 그 결과 내부 출제 전문가와 브로커, 학원 강사들이 결탁해 조직적으로 문제를 빼돌린 충격적인 비리가 확인됩니다.결국 시험은 취소됐고 전면 재시험을 치르기로 했는데요. 아니, 밤잠 아껴가며 고생해서 몇 년을 공부했더니만, 시험지 유출 비리로 재시험이라니. 수험생과 학부모 입장에선 날벼락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죠. 실제로 합격을 눈앞에 뒀다고 생각했는데, 재시험 통보를 받고 심리적으로 무너져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이 여럿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인도에선 우리의 대학수학능력시험과 비슷한 ’12학년 보드 시험’을 2~4월에 걸쳐 보는데요. 인도 중앙중등교육위원회가 5월 13일 성적을 발표한 뒤 난리가 났습니다. 점수가 이상한 사례가 너무나도 많았던 거죠.문제는 올해 처음 도입한 디지털 채점 시스템에 있었습니다. 답안지가 다른 사람과 아예 뒤바뀌거나, 너무 흐릿하게 스캔돼서 몽땅 0점 처리됐거나, 답안지 뒷장이 통째로 누락되면서 점수가 우수수 깎인 거죠.이 사건은 국가적 스캔들로 번졌는데요. 알고 보니, 이 채점 시스템을 담당한 업체는 이미 2019년 한 지역에서 대규모 성적 오류를 일으켜서 수험생 18명이 목숨을 끊게 만든 부실 업체였고요. 당연히 입찰을 금지했어야 하는데, 어떤 이유인지 입찰 자격요건이 수정되면서 계약을 따냈습니다. 정부는 부인하지만, 정부 기관이 부실 업체와 결탁해 특혜를 줬을 거란 의혹이 나올 수밖에 없죠.이건 생존이 걸린 시험이다한 문제를 맞느냐 틀리느냐에 따라 대학에 붙느냐 떨어지느냐가 걸려있는 입시. 그런데 사설 학원엔 유출된 의대 입시 시험지가 나돌고, 수능 답안지는 채점 실수로 0점 처리되다니. 이만저만 큰일이 아닙니다. 이번에 의대 입학시험을 본 한 인도 청년은 분통을 터뜨렸죠. “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시험에 합격하려고 모든 걸 포기했는데, 재시험을 봐야 하다니. 내년에도 또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나요?”이런 절망은 인도의 극심한 청년 실업률과도 맞물려있습니다. 인도는 대학 진학률이 꾸준히 높아졌지만 아직 28% 정도이죠. 대학 나온 사람이 여전히 소수인 나라인데요. 문제는 이렇게 대학 교육까지 받은 고학력자들을 위한 취업문이 너무 좁다는 겁니다. 대졸자들이 원하는 괜찮은 일자리가 워낙 부족하기 때문이죠. 고용 능력이 큰 제조업이 약하고, 금융·IT 같은 소수의 첨단 서비스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 탓인데요.인도에선 매년 약 500만명의 대졸자가 배출되지만, 이들이 선호하는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는 170만개에 불과합니다. 미스매치가 대단히 심각하죠. 학력이 낮으면 노점이라도 차려서 밥벌이를 할 텐데, 비싼 돈 들여 대학 공부를 한 바람에 이도 저도 못 하고 실업자가 되는 대졸자가 너무 많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25세 미만 대졸자 실업률은 무려 39.3%, 25~29세 대졸자 실업률도 20%에 달한다죠(2023년 기준).일부 상위권 대학을 제외하면 졸업 뒤 실업자가 되거나 평생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머물 확률이 상당히 높습니다. 그러다 보니 명문대 선호 현상이 더욱 커져가죠. 높은 연봉까지 보장되는 의대, 공대 입학은 최고의 꿈이고요. 그게 아니면 학맥을 쌓을 만한 좋은 대학을 나와서 공무원으로 취업하는 게 가장 안정적인 길입니다.즉, 인도에서 명문대 입학은 간판이나 출세의 문제를 뛰어넘어요. 훨씬 더 절박한 생존이 달린 문제이죠. 꼭 대단한 성공을 바라서가 아니라, 하위 계층에서 탈출하려면 일단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만 합니다.그러니 대학 입시 공정성에 목을 매지 않을 도리가 있나요. 그런데 문제 유출이라니, 부실 채점이라니, 비리와 부정부패라니. 형편없는 국가 시스템을 향해 분노하는 게 당연합니다.바퀴벌레, 이제 광장으로그래서 바퀴벌레당이 이 문제에 나섰습니다. 바퀴벌레당은 다르멘드라 프라드한 교육부 장관의 사임을 요구하는 온라인 청원에 80만명의 서명을 모았고요. 6월 6일 뉴델리 잔타르 만타르 광장에서 평화시위를 연다고 공지했어요.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인 창립자 딥케는 6일 아침 뉴델리로 돌아가기로 했죠. SNS로 그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 메시지가 빗발치고 있는데도 말이죠.그는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엄청난 호응이 있고, 수만 명이 시위에 참여할 걸로 예상합니다. 우리가 이 운동을 하는 이유는 현재 정치권에서 아무도 우리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린 청년의 관심사와 열망을 중심으로 국가 정치가 이뤄지는 진지한 운동이 되길 바랍니다.”바퀴벌레당은 조직 체계를 갖추기 위해 3명의 공식 대변인도 임명했어요. 기자·작가·컨설턴트 출신의 대변인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는 인도 청년 전체의 당이다. 설사 아비짓 딥케가 체포되더라도 시위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고요. 집권 여당이 제기하는 ‘야당 공작설’과 ‘불법 자금 조달설’ 같은 루머에도 적극적으로 반박했죠.든든한 지원 세력도 합류했습니다. 저명한 시민운동가 소남 왕추크가 6일 바퀴벌레당의 시위에 동참한다고 공식 선언했어요. 그는 바퀴벌레당의 주장에 대해 “젊은 세대의 매우 건설적인 의견”이라며 “정부도 불안해하지 말고 그들의 의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지지를 표명했는데요. 시위의 정당성과 무게감을 한층 더해주는 인물입니다.이제 전 세계가 주목합니다. 인도 정부는 과연 바퀴벌레당의 첫 시위를 순순히 허용할까요? 이미 정부 측 인사와 친정부 언론이 ‘바퀴벌레당은 반국가적 외국 세력의 음모’라고 공격하면서 탄압의 빌미를 찾는 분위기인데요. 권위주의 체제를 굳혀가고 있는 모디 정권이기에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을 겁니다.하지만 바퀴벌레당이 이미 선언한 대로 와이파이가 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들의 본부가 있고요. 정부가 그들을 억누를수록 오히려 더 강해질 겁니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죠. 그게 바로 바퀴벌레의 힘이니까요. By.딥다이브*이 기사는 6월 5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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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도체로 부유해진 대만 경제의 그림자: 대만병과 거지 슈퍼맨 [딥다이브]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열풍을 타고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 어디일까요. 한국이면 좋겠지만 아니고요. 바로 대만입니다. 주식시장 시가총액과 1인당 GDP(국내총생산) 같은 지표에서도 대만은 이미 한국을 추월했죠.그런데 이상합니다. 나라가 이렇게 부유한데, 먹고살기가 팍팍하다는 대만 국민은 늘어만 가요.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는 수출 기업 중심의 왜곡된 정책 탓이란 전문가 분석이 나오는데요. 오늘은 잘나가는 대만 경제의 그림자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5월 29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역대급 호황인데, 내 지갑은 왜?요즘 대만 경제엔 놀라운 소식이 가득합니다. 우선 올해 1분기 경제성장률이 무려 13.69%를 기록했어요(전년 대비). 지난해 연간 성장률(8.63%)도 대단했는데, 이건 뭐 경이적인 수준이죠. 1987년 이후 39년 만에 가장 높은 분기 성장률이라는데요. TSMC를 중심으로 한 반도체 수출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성장을 이끌었죠. (참고로 한국 1분기 성장률은 전년 대비 3.6%)2026년 대만의 1인당 GDP는 4만 달러를 돌파할 게 확실시됩니다. 이미 한국을 제쳤는데, 격차가 더 벌어지는 거죠. 동아시아 1위 자리를 더 굳건히 하게 됐고요.주식시장은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이미 3년 연속(2023~2025년) 20% 넘는 상승률을 기록한 자취안 지수는 올해 들어서도 48% 올랐고요. 대만 증시 시가총액은 4월엔 캐나다, 얼마 전엔 인도를 제치며 세계 5위로 올라섰어요. 참고로 TSMC가 자취안 지수 시총의 42%를 차지하죠.최근엔 TSMC 직원들이 성과급 때문에 동요한다는 소식이 나옵니다. 웨이저자 TSMC 회장이 “성과급 최소 30% 인상”을 약속했지만 불만은 가라앉지 않는다는데요. 이 역시 TSMC가 너무 잘나가서 생기는 현상이죠.반도체가 만들어낸 대만 경제의 눈부신 성장.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데요. 이 놀라운 호황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이를 체감하는 국민이 생각보다 적다는 점입니다. 최근 나온 여론조사 결과에서 이런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데요.27일 발표된 포모사의 ‘5월 국민정치여론조사’ 결과를 보실까요. 현재 국내 경제상황이 좋다고 응답한 비율은 40.2%, 나쁘다는 응답은 55.1%에 달했어요. 이게 라이칭더 총통이 취임한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은 건데요. 특히 지방 거주, 30대, 고졸 학력에서 경제가 나쁘다는 응답이 많았습니다. 반면 타이베이시에 사는 고학력자는 경제가 좋다는 응답 비율이 더 높았고요.3월 나온 대만 취업포털 ‘예스123’의 설문조사 결과도 의외였는데요. 39세 이하 대만 직장인 중 약 40%가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재정적자를 겪고 있다고 응답했어요. 또 23%는 모아둔 저축이 아예 0이고, 72%는 현재 빚을 지고 있다고 답했고요. 무엇보다 무려 54.9%가 스스로를 “인생의 실패자”라고 여긴다는 우울한 답변을 내놨죠.계란 껍질로 밀려나는 청년들정리하자면 경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 그 온기를 체감하지 못하는 국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의 역대급 호황을 주도하는 건 반도체 산업이고요. 거기에 속한 일부 선택받은 이들만 그 과실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죠.TSMC를 포함한 반도체 산업은 대만 GDP의 20% 이상을 차지하는데요. 이 분야의 고용인원은 고작 30만명. 대만 전체 노동자(1100만명)의 3%가 채 안 되죠. 범위를 IT 제조업으로 넓혀 잡아도 고용인원은 총 100만명 정도인데요. 서비스업이나 전통 제조업에서 일하는 나머지 90% 이상의 근로자엔 이 AI 붐이 딴 세상 이야기일 뿐입니다.이를 실감할 수 있는 통계가 있는데요. 대만 경제가 그렇게 잘 나가고 1인당 GDP는 4만 달러라는 데도, 대만 통계청이 집계한 근로자 평균월급은 고작 4만6000대만달러(220만원)에 그쳤어요. 한국(월 383만원)의 60%에도 못 미치는 거죠. 중위 임금(일렬로 세웠을 때 가운데 수치)은 3만8000대만달러(182만원)으로 더 낮고요. 그나마 이게 지난 10년 동안 최저임금을 꾸준히 올려서 이 정도라는데요. 사실 대만은 한국보다도 평균 노동시간이 연간 100시간 이상 더 긴, 세계적으로 오래 일하기로 유명한 나라이거든요. 일은 많이 하는데, 손에 쥐는 건 보잘 것 없다는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그래도 대만은 물가가 싸니까 먹고살만 하지 않냐고요? 예전엔 그랬죠. 하지만 최근엔 이야기가 좀 달라졌습니다. 물가, 그 중에서도 특히 집값과 임대료가 유독 말도 안 되게 뛰었거든요.우리가 흔히 집값이 가장 비싼 도시라고 하면 홍콩을 떠올리는데요. 수도 타이베이의 최근 중위소득 대비 주택가격 비율은 15.41배로, 이미 홍콩(14.4배)을 넘어섰어요(참고로 서울은 13.9배). 보통의 근로자가 소득을 한 푼도 안 쓰고 15.41년 동안 모아야 겨우 집 한 채 장만한단 얘기죠. 이게 2년 전엔 16배였는데, 그나마 대만 정부가 부동산 규제를 강화하면서 좀 낮아진 겁니다. 한마디로 미친 집값이죠.이제 타이베이는 물론이고 수도권에서는 웬만한 직장인 월급으론 집 사는 게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습니다. 대만 주택시장에선 ‘계란 노른자 구역(타이베이 핵심지)’과 ‘계란 흰자 구역(주변 위성도시)’이란 표현이 흔히 쓰이는데요. 요즘엔 흰자도 아닌 ‘계란 껍질 구역’에 집을 얻는 젊은층이 늘어갑니다. 인프라가 열악하고 도심 접근성이 떨어지는 변두리로 밀려난 거죠.타이베이에 원룸이라도 얻으려는 사회 초년생이라면 부담은 더 큰데요. 대졸 초임(반도체 기업이 아닌 경우)은 약 3만5000대만달러(167만원)에 불과한데, 도심 원룸은 아무리 작고 낡은 방도 월 1만5000대만달러(70만원)은 줘야 해요. 월급 받아 월세 내고 나면 별로 남는 게 없죠.이렇게 팍팍한 대만 젊은이들의 삶을 반영한 요즘 트렌드가 있습니다. 바로 ‘거지슈퍼맨(乞丐超人)’.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임박해 할인 판매하는 식품만 골라사는 알뜰족을 일컫는 말인데요. 보통 대만 편의점은 저녁 시간이 되면 도시락 같은 신선식품을 30~35% 할인하기에, 이들은 편의점 앱의 ‘실시간 재고 지도’를 켜고 기다렸다가 매장으로 번개처럼 달려갑니다. 그 모습이 마치 비밀 임무에 투입된 히어로 같다고 해서 ‘슈퍼맨’이라 부르죠.왠지 좀 짠한데요. 한 푼이라도 아끼려면 어쩔 수 없죠. 지난해 한 네티즌은 1년간 편의점 할인식품을 구매하면서 모은 스티커 364장을 빼곡히 붙인 ‘2025년 거지슈퍼맨 기록부’를 스레드에 공개했더군요. 이렇게 해서 1년 동안 절약한 금액이 1만688대만달러(52만원)에 달했다고 합니다.이런 걸 보면 왜 요즘 대만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지 알 것만 같죠. 대만의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695명으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어요. 저출산 순위에서마저 한국을 제친 거죠.수출 기업을 키우기 위해 국민이 치른 대가혹시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몰라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에 따라 빈부 격차가 발생하는 건 어쩔 수 없지 않나? 양극화가 심화하는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잖아?그런데 여기서 꼭 해야할 질문이 있습니다. TSMC를 포함한 대만 반도체 산업이 이룬 놀라운 성공이 오로지 기업과 임직원의 역량으로 거둔 성과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성장의 발판을 마련해주기 위해 대만 국민이 감수해야 했던 희생과 부담은 없을까요.바로 이 점을 지적해 큰 화제가 됐던 책이 있습니다. 4명의 대만 경제학자가 2021년 공동집필한 ‘치부의 특권(부자가 되는 특권, Privilege of Wealth)’인데요. 부제(지난 20년간 우리가 중앙은행 정책에 치른 대가)에 나와 있듯이 대만 중앙은행의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한 책입니다. 이 책에 따르면 대만 중앙은행은 수출 대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대만 달러의 통화가치를 낮게 유지(평가절하)하는 정책을 펼쳐왔어요. 이에 따라 경제성장률이나 물가상승률과 비교해 비정상적으로 낮은 초저금리를 고수했고요. 중앙은행이 찍어낸 돈으로는 미국 달러를 왕창 사서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쌓았죠(대만 외환보유액은 세계 6위로 12위인 한국보다 훨씬 많음).통화가치를 낮추면 기업은 해외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을 높일 수 있죠. 이런 중앙은행 정책이 수출 대기업엔 정부가 주는 일종의 보조금 혜택으로 작용했어요. 반면 수입물품을 사야 하는 일반 소비자엔 추가 세금을 부과하는 것과 같았죠. 사실상 가계의 자산을 기업으로 이전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요.그리고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장기간 초저금리로 풀린 막대한 유동성이 부동산 시장으로 쏠린 거죠. 살인적인 집값 폭등을 야기해서 국민의 삶의 질을 무너뜨리고 출산율까지 떨어뜨린 그 주범. 따져보면 바로 수출 기업 밀어주기에 올인해온 중앙은행이었던 셈입니다. 국민을 가난하게 만들면서 대기업을 키워주는 왜곡된 정책이 이런 부작용을 낳은 거죠. 이 현상을 설명하면서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이를 “‘대만병’ 또는 ‘포모사 독감’이라 부를 수 있다”고 지적했는데요.물론 대만 중앙은행은 인위적으로 통화가치를 낮게 유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진 않아요. 아니, 할 수가 없죠. 그랬다간 ‘환율조작국’으로 찍힐테니 말이죠. 하지만 빅맥지수로 유추했을 때 대만달러는 그 어느 주요국 통화보다도 가장 저평가돼있는 건 사실이고요(미국 달러 대비 59.6% 저평가). 지난해 8.63%라는 놀라운 GDP 성장률에도 불구하고 2년 넘도록 기준금리는 2%로 동결 중입니다.‘치부의 특권’이 출간된 지 5년이 지났지만 통화가치 절하와 저금리라는 정책 기조는 여전히 달라진 게 없죠. 역대급 경제성장에도 국민의 삶은 쪼들리는 모순이 해결될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데요. 과연 대만 경제는 그동안의 성공공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대만병을 치료할 결심을 할 수 있을까요. By.딥다이브*이 기사는 5월 29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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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의 제품도 실패한다…화이자·미쉐린이 놓친 ‘혁신의 사각지대’ [딥다이브]

    인공지능(AI) 혁신의 시대, 승자로 올라서기 위한 기업들의 경쟁이 치열하죠. 그럼 누가 승리할까요? 가장 똑똑한 AI 모델을 개발하는 천재 엔지니어? 소비자를 사로잡을 ‘와우 포인트’ 서비스를 한발 앞서 선보이는 기업?글쎄요. 기업의 세계에선 최고의 혁신 제품을 가장 빨리 출시하고도 처참히 실패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왜? 혁신이란 건 기업 혼자 잘해봤자 소용없거든요. 혁신의 ‘생태계’를 만드는 게 중요하죠. 기업의 발목을 잡는 ‘혁신 사각지대’를 분석한 책 ‘더 와이드 렌즈(The Wide Lens)’를 들여다봤습니다.(전략 전문가인 론 애드너(Ron Adner) 다트머스대 터크 경영대학원 교수가 2012년 쓴 책. 한국에선 ‘혁신은 천 개의 가닥으로 이어져 있다’는 제목으로 2012년 나왔지만 절판됐습니다.)*이 기사는 5월 27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선구자가 망하는 이유1979년 출시돼 전 세계를 휩쓴 소니 ‘워크맨’. 시대를 앞서나간 혁신 제품의 대표적 성공 사례인데요. 그럼 이건 어땠을까요. 1998년 한국의 새한정보시스템이 세계 최초로 출시한 MP3 플레이어 ‘MP맨’.MP맨은 꽤 훌륭한 제품이었습니다. ‘디지털화’라는 시장 변화를 정확히 파악했고, 적절한 파일형식(MP3)을 채택했죠. 하지만 출시 직후 ‘충격의 문제작’으로 화제를 끌었던 MP맨은 결국 실패했고요. MP3 플레이어 시장의 진짜 승리자는 3년이나 늦게 나온 애플 ‘아이팟’이 됩니다.그럼 MP맨은 왜 워크맨처럼 ‘선발주자의 이점’을 누리지 못했을까요. 혁신 생태계가 미처 준비되기 전에 너무 일찍 나온 탓이었죠. 1998년만 해도 MP3 파일을 살 수 있는 통로가 거의 없었습니다. 불법 다운로드가 있긴 했지만, 28.8kbps의 느린 모뎀으로 앨범 하나를 다운로드하려면 몇 시간씩 걸렸죠. 그게 바로 워크맨과 다른 점이었습니다. 워크맨은 카세트 테이프의 표준화(1972년)가 끝나고 널리 보급된 이후에나 출시됐으니까요.론 애드너 교수는 이를 ‘공동 혁신의 위험’으로 설명합니다. 아무리 기업이 혼자 빨리 치고 나가도, 그 생태계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이 맞춰지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괜히 풀 악셀을 밟으며 가장 먼저 치고 나와봤자, 어차피 저 앞 빨간 신호에 걸려서 기다리는 건 경쟁자들과 똑같은 거죠.이와 비슷한 사례가 노키아의 3G폰입니다. 2002년 노키아는 엄청난 기술적 난관을 극복하고 세계 최초의 GSM/WCDMA 호환 3G폰인 ‘노키아 6650’을 출시했어요. 에릭슨과의 기술 경쟁에서 승리했죠.문제는 3G폰으로 이용할 3G 서비스-예컨대 스트리밍 서비스-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엄청난 투자금을 쏟아부었지만, 소비자 입장에서 3G폰은 그저 업그레이드된 2G폰일 뿐이었어요. 노키아 6650은 ‘도로 없는 세상의 페라리’ 같은 신세였죠. 3G 서비스가 실제 의미 있는 매출로 이어지기 시작한 건 2008년이 돼서 였어요.필립스의 HDTV 사례도 마찬가지인데요. 필립스는 1980년대 중반 고화질 TV 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고요. 고객이 열광하고 경쟁사가 따라잡을 수 없는 뛰어난 화질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는데요. 하지만 정작 HDTV 구현을 위한 고화질 카메라와 전송 표준의 혁신까진 한참 걸렸고요. 20년 뒤 마침내 HDTV가 대중화됐을 때, 필립스는 되레 25억 달러의 자산을 상각해야 했습니다.결국 혁신은 ‘어떻게’ 못지않게 ‘언제’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가 강한 추진력을 발휘해 온갖 난관을 뚫고 혁신을 이뤄내는 영웅담에 열광하는데요. 진짜 리더라면 ‘생태계를 구성하는 공동의 혁신가는 지금 어디까지 와있나’까지 계산해야 하는 겁니다. 마지막 퍼즐이 놓이길 기다렸다가 단숨에 치고 나와서 MP3 시장에서 승리를 거둔 스티브 잡스처럼 말이죠.2008년 잡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은 꽤 천천히 일어납니다. 기술의 흐름은 일어나기 훨씬 전에 볼 수 있고, 어떤 흐름을 탈지 현명하게 선택해야 하죠.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하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할 수 있지만, 현명하게 선택하면 실제로는 꽤 천천히 전개됩니다. 몇년이 걸리죠.”미쉐린과 화이자의 값비싼 실수“고객 목소리에 귀 기울여라.” “고객 관점에서 생각하라.” 흔히 이렇게 기업에 조언합니다. 고객을 생각한다는 건 분명 혁신의 성공을 위해 중요한 부분인데요.그런데 그 고객은 누구일까요? ‘타이어 제조사 고객=운전자, 제약사 고객=환자, 영화제작사 고객=관객’인 걸까요? 론 애드너 교수는 기업이 최종 소비자만 바라봐서는 혁신이 성공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그 제품이 최종 소비자에 다다르는 중간 과정에 있는 “모든 고객”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에 따르면 “최고의 제품이 실패하는 건 소비자가 선택할 기회가 없을 때”입니다.세계적 타이어 제조사 프랑스 미쉐린의 실패 사례를 볼까요. 미쉐린은 7년의 개발 끝에 야심작 ‘PAX 시스템’을 2000년 선보였죠. 타이어가 펑크 나도 시속 88㎞로 200㎞까지 달릴 수 있는 신개념 런플랫 타이어였습니다. 미쉐린은 ”10년 후엔 PAX 외엔 다른 종류의 타이어가 없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했고요. 메르세데스 벤츠, 아우디, 르노, 혼다 같은 주요 자동차 제조사도 속속 이 타이어를 채택했죠. 하지만 시장의 열정은 빠르게 식어갔어요. 미쉐린이 간과했던 고객이 있었기 때문이죠. 바로 정비소였습니다. PAX 타이어는 워낙 혁신적인 제품이라 수리를 위해선 새로운 장비가 필요했는데요. 정비소 입장에선 그런 투자를 할 이유가 없었고요. 타이어 수리를 받지 못하게 된 운전자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집단소송이 줄줄이 제기됩니다. 결국 2007년 미쉐린은 막대한 손실을 입은 채 PAX 사업을 중단해야 했죠.이게 바로 ‘채택 사슬의 위험’입니다. 혁신가와 최종 소비자 사이엔 유통업체, 소매업체, 영업사원 같은 ‘중간자’가 있고요. 그중 단 한 곳에서라도 채택을 거부하면, 그 제품은 최종 소비자에 도달할 기회를 아예 잃고 말아요.또 다른 초대형 실패 사례, 화이자의 ‘흡입형 인슐린’을 볼까요. 2000년대 초, 제약업계를 뜨겁게 달군 아이디어는 ‘주사 없는 인슐린’이었죠. 커다란 천식 흡입기처럼 생긴 ‘흡입형 인슐린’ 개발에 주요 제약사들이 앞다퉈 뛰어들었는데요.2006년 1월, 화이자가 ‘엑수베라’를 출시하면서 경쟁에서 승리했습니다. 화이자는 2010년까지 엑수베라가 2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릴 거라 예상했죠. 초대형 블록버스터 신약의 탄생인 것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2007년 10월, 출시한 지 불과 22개월 만에 화이자는 엑수베라 생산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화이자는 28억 달러를 손실 처리해야 했죠. 제약업계 역사상 가장 큰 실패로 남았는데요.도대체 왜? 화이자가 놓친 사각지대가 있었습니다. FDA는 엑수베라를 승인하면서 환자가 간단한 폐기능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는데요. 문제는 인슐린 처방권을 가진 내분비내과 전문의의 진료실엔 폐활량 측정기가 없단 점이었죠. 즉, 내분비내과 전문의가 엑수베라를 처방하려면 일단 그 환자를 호흡기내과 의사에 보낸 다음, 다시 진료 예약을 잡아야 했어요. 그 번거로움을 감수할 전문의가 없었던 거죠.혁신은 ‘윈윈윈윈’이다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지 않나요. 미쉐린이 PAX 타이어 수리 기계를 정비소에 대거 깔았더라면? 화이자가 내분비내과 전문의 대신 폐활량 측정기가 이미 있는 일반의를 먼저 공략했더라면? 그럼 결과가 다르지 않았을까요.이게 바로 론 애드너 교수가 ‘넓은 시야(The Wide Lens)’를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만약 새한 ‘MP맨’처럼 주변 기술이 문제일 땐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만, 중간 고객이 채택을 거부하는 문제라면 그건 해결할 수 있습니다. 혁신 기업이 직접 나서서 생태계를 재구성하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죠. 미국의 ‘디지털 시네마’ 도입 과정이 그 예인데요. 커다란 릴에 감긴 필름을 영사기에 돌려가며 영화를 상영했던 아날로그 시절을 기억하시나요? 이를 디지털화한 디지털 프로젝터가 최초로 출시된 게 1996년이었습니다. 1999년 뉴욕과 LA에선 ‘스타워즈 에피소드1-보이지 않는 위험’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필름 없이 디지털 프로젝터로 상영됐죠.디지털 시네마는 영화 제작사가 막대한 필름 인쇄·운송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하는 혁신 기술입니다. 덕분에 배급사는 드디어 ‘전 세계 동시 개봉’이 가능해졌고요. 관객들은 한층 밝고 선명하고 몰입감 있는 화면을 경험하게 됩니다. 모두가 원하던 혁신이었죠.하지만 2006년까지 미국 영화관 스크린 중 디지털 프로젝터를 사용한 비중은 고작 5% 미만. 이 혁신에 유독 저항하는 연결고리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죠. 바로 비싼 디지털 프로젝터를 사서 설치해야 하는 영화관 소유주(극장주)였습니다. 안 그래도 극장은 운영 마진이 빠듯한데(극장의 주 수입은 관람료가 아닌 팝콘 판매), 스크린당 7만~10만 달러나 드는 업그레이드 비용을 감당할 길이 없었던 겁니다. 혁신을 가로막는 단 하나의 병목 지점. 이걸 해결하기 위해 결국 영화 제작사(스튜디오)들이 나섰습니다. 제작사들이 기금을 마련해서 극장의 디지털 프로젝터 초기 구매 비용을 지원해주기 시작한 거죠. 이를 통해 극장주는 디지털 전환 비용의 약 80%를 보조받을 수 있게 됐고요. 디지털 시네마가 극장주에 더 이상 손해가 아닌 이익이 되자, 급속도로 도입이 이뤄집니다. 혁신 생태계의 막힌 혈이 뚫린 거죠.결국 혁신은 기업과 최종 소비자, 둘의 ‘윈윈’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중간 참여자까지 포함한 모두의 ‘윈윈윈윈윈’이 돼야만 마침내 성공할 수 있는 거죠. 혁신은 경주가 아니라 ‘퍼즐 맞추기’에 가까우니까요. 기업이 승리하려면 앞만 보고 빨리 뛰는 경주마가 아닌, 파트너까지 함께 뛰게 만드는 생태계 리더가 돼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물론 그게 말처럼 쉬울 리는 없겠지만요. By.딥다이브*이 기사는 5월 27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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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경2800조원’ 우주시장 노리는 스페이스X…‘실패’ 경고에도 열광[딥다이브]

    단언컨대, 이런 기업공개(IPO) 투자설명서는 처음일 겁니다. 기업의 야망은 놀랍도록 거창하고, 지배구조는 말도 안 되게 한 사람에 집중돼있고, 투자의 위험요인은 끝도 없죠. 일론 머스크의 우주기업 스페이스X 이야기입니다.역사상 최대 규모이자 세기의 자본시장 빅이벤트가 될 스페이스X IPO. 상장하마자 테슬라를 뛰어넘어, 전 세계 시가총액 6위로 올라설 전망인데요. 이런 대왕고래급 상장기업을 미리 뜯어볼 수 있는 자료가 나왔으니, 그냥 넘어갈 순 없겠죠. 투자자가 주목해야 할 스페이스X의 핵심 포인트를 짚어봤습니다.*이 기사는 5월 22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시총 세계 6위 기업이 온다 일단 알아두실 점. 스페이스X의 정확한 공모 규모와 상장 날짜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1조7500억~2조 달러의 기업가치로, 최대 750억 달러를 조달할 걸로 알려져있죠. 2019년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의 기록(1조7000억 달러 기업가치, 260억 달러 조달)을 깰 게 확실시 되고요.상장 날짜는 6월 12일이 될 거란 보도가 나옵니다. 한동안 미래에셋증권을 통해 한국 개인 투자자도 공모주에 직접 투자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있었는데요. 일정이 촉박해서 그건 어려워 보여요.스페이스X는 아마 나스닥100 지수에 조기 편입될 겁니다. 나스닥의 ‘패스트 엔트리(Fast Entry)’ 규칙에 따라 초대형 IPO는 상장 후 15거래일 만에 나스닥 100에 편입되거든요. 나스닥100 지수를 추종하는 수많은 ETF가 모두 스페이스X를 담게 되겠죠. 엄청난 자금의 이동이 예상됩니다. 스페이스X에 크게 관심 없는 투자자라도, 나스닥 ETF에 관심 있다면 반드시 들여다 봐야하는 기업인 건데요.사실 2조 달러의 기업가치는 2025년 매출(186억 7천만 달러)의 107배, 2026년 예상 매출의 약 75배에 해당합니다. 게다가 이 회사는 지난해 연간 49억4000만 달러, 올 1분기엔 42억80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죠. 재무제표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초고평가라 하겠는데요. 도대체 무엇이 이를 정당화하는 걸까요.4경원의 시장을 노린다‘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체 시장 규모(TAM, Total Addressable Market)를 파악했습니다. 당사의 TAM은 28조 5000억 달러(약 4경2800조원)로 추산됩니다.’스페이스X가 제출한 예비 투자설명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큰 수치인데, ‘중국과 러시아 시장은 제외한 것’이란 설명을 덧붙였죠. 어떻게 이런 숫자가 나왔는지를 따져보면, 스페이스X가 도대체 앞으로 뭘 하려는지를 알 수 있는데요. 크게 세 분야입니다.①우주 부문(Space): 3700억 달러=우주선 제조, 발사 서비스가 중심이죠. 스페이스X는 이미 전 세계 궤도 발사량의 80% 이상을 점유하는, 이 분야에서 따라올 경쟁자가 없는 기업입니다. 스페이스X가 장기적으로 노리는 ‘달 경제(Lunar Economy)’는 이 계산에 넣지 않았다고 해요. 달(또는 화성)로 여객과 화물 수송하고, 제조 시설을 건설하고, 소행성을 채굴하는 사업에 대해선 ‘수조 달러 규모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언급했죠. ②연결성 부문(Connectivity): 1조 6000억 달러=현재 스페이스X가 하는 사업 중 유일하게 이익을 내고 있는 ‘스타링크’ 서비스를 말하죠. 스타링크의 위성인터넷 서비스는 전 세계에 1000만명 넘는 가입자를 확보했고요. 위성과 휴대폰을 연결하는 모바일 서비스도 본격적으로 확장할 예정입니다. 스페이스X는 이미 스타링크용 위성을 9600대나 우주에 띄웠고요. 이걸 단기간에 따라잡을 기업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독주체제를 이어갈 겁니다. 스타링크는 앞으로도 이 기업의 ‘현금 창출 기계’ 노릇을 톡톡히 할 거예요.③ 인공지능 부문(AI): 26조5000억 달러=스페이스X가 가장 크게 기대를 거는 분야는 역시나 AI이죠. 기업과 소비자용 AI 소프트웨어 시장은 물론 AI 인프라(데이터센터) 시장에서도 강자로 도약한다는 목표인데요.스페이스X는 이미 AI 모델 ‘그록(Grok)’ 개발사 xAI를 합병하며 우주와 AI를 아우르는 기업으로 변신했어요. 하지만 그록은 시장점유율에서 아직은 3강(오픈AI, 앤트로픽, 구글)에 한참 뒤집니다. 그래서 좀 의아했어요. 뭘 믿고 이렇게 자신만만하지?그런데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그록의 성능이 월등히 뛰어나서가 아니라요. AI모델을 다른 누구보다도 싸고 빠르게 대규모로 제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압도적 가성비(낮은 토큰당 비용)로 경쟁사를 압도하겠다는 거죠. 어떻게? 궤도 AI 컴퓨팅, 즉 우주 데이터센터를 통해서요.‘스페이스X는 궤도 AI 컴퓨팅을 대규모로 해결할 수 있는 전 세계 유일한 기업입니다. 우리는 AI 리더십이 컴퓨팅 용량을 신속하게 확장하는 능력에 따라 결정될 거라고 믿습니다.’스페이스X는 우주 데이터센터에 연간 100GW 전력을 공급하려면 인공위성을 실은 우주 발사체를 매년 수천번 발사해야 한다고 설명하는데요. 그걸 할 수 있는 건 스페이스X가 개발 중인 ‘스타십’ 밖에 없죠. 스타십은 궤도 진입비용을 과거의 100분의 1로 낮춰줄 초대형 발사체이니까요. 우주 데이터센터 구축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기업이라는 설명이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무료 핵융합 발전소’인 태양 에너지와 스타십의 저렴한 발사비용, 스타링크로 쌓아온 거대 위성군 운영 능력, 그리고 인텔·테슬라와 손잡고 설립하는 ‘테라팹(Terafab)’에서 생산할 AI 칩까지. 이 모든 걸 결합해 AI 시장의 절대 강자로 올라선다는 게 스페이스X의 야심 찬 계획입니다.머스크 하고 싶은 거 다 해! 어떤가요. 스페이스X의 계획이 그럴 듯하게 와닿나요? 사실 어쩌면 너무 거창해서 뜬구름 잡는 얘기처럼 보일 수 있는 이 계획에 현실성을 불어넣는 건 바로 이 사람이죠. 일론 머스크 스페이스X 이사회 의장 겸 CEO.머스크는 31살이던 2002년 스페이스X를 창업했고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봤던 로켓 재사용과 민간 우주 시대의 개막을 현실로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사실상 머스크는 스페이스X 자체이죠. 배런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머스크가 없었다면 스페이스X의 가치가 얼마였을지를 정확히 말하기 어렵지만, 2조 달러는 아니었을 게 확실합니다.물론 그럼에도 스페이스X의 지배구조는 놀라움을 불러오는데요. 스페이스X 주식은 1주당 의결권 1표를 갖는 A주와 10표를 갖는 B주로 나뉘고요. B주의 93.6%를 보유한 머스크는 전체 의결권의 85.1%를 보유한다고 해요. 극단적인 1인 지배체제인 거죠.머스크는 오직 B주 주주의 투표에 의해서만 해임될 수 있는데요. 본인이 B주를 거의 다 가졌으니까, 사실상 해고는 영원히 불가능한 셈입니다. 뉴욕과 캘리포니아 공공 연기금 담당자들이 “미국 공개 시장에서 가장 경영진에게 유리한 지배구조”라며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고 밝힌 이유인데요.그럼에도 스페이스X에 투자하려는 자산운용사가 줄을 섰다는 게 중요하죠. 경영 감시 따윈 포기한 채 머스크의 천재성에 거액을 걸고 있는 셈입니다. 그가 테슬라에서 보여준 마법(10년간 주가 약 3000% 상승)이 재현될 거란 기대 때문이죠.스페이스X의 놀라운 인센티브 구조도 이를 반영하는데요. 머스크는 화성에 최소 100만 명이 정착하는 식민지를 만들고, 시가총액 7조5000억 달러를 달성하면 10억 주(B주)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우주 데이터센터 용량을 100테라와트까지 확장하면 추가로 3억 주를 받게 되고요. 목표도, 보상규모도 모두 황당할 정도로 어마어마한데요. 결국 그 목표 달성할 때까지 쭉 머스크가 회사를 이끌어가라는 뜻인 거죠.계획과 다를 수 있음 주의 모든 IPO 투자설명서엔 그 회사가 처한 위험요인이 빼곡히 적혀있습니다. SEC 제출 서류는 법적 구속력이 있어서, 허위정보를 적으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인데요.그래서 투자설명서 앞부분은 거창한 사명과 비전으로 가득찼지만-‘우리는 인간이 공룡과 같은 운명을 맞길 원하지 않는다’, ‘생명체가 다행성에서 살 수 있도록 하고,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며, 의식의 빛을 별까지 확장한다‘- 뒤에 가선 스페이스X도 이렇게 솔직히 털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당사의 여러 계획, 예컨대 궤도 AI 컴퓨팅 등은 검증되지 않았거나 아직 존재하지 않는 기술을 수반하며, 상업적 타당성을 확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스타십의 개발이 실패하거나 지연되면 당사의 성장 전략이 지연되거나 제한될 수 있습니다.’ 과연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지, 얼마의 비용을 들여 언제쯤 달성 가능할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건데요. 하긴 돌이켜보면 테슬라 역시 마찬가지였죠. ‘3년 안에 완전 자율주행이 가능하다’(2015년), ‘2020년 로보택시를 상용화한다’(2019년), ‘3년 안에 2만5000달러짜리 보급형 전기차를 생산한다’(2020년)던 머스크의 약속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았으니까요.‘알면서도 속아준’ 낙관주의자들이 결국 지금의 테슬라와 전기차 시대를 만들었는데요. 그게 과연 우주에서도 통할 수 있을까요. 투자자는 아니지만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그 답이 궁금합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5월 22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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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타에서 쫓겨난 괴짜 천재, ‘91조 방산 기업’으로 복수하다[딥다이브]

    ‘파괴적 혁신을 이끄는 괴짜 천재 창업가’라고 하면 누가 떠오르시나요?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팔란티어의 알렉스 카프?그들보다 훨씬 젊고, 경력과 외양 면에서 더 독특한 인물이 있습니다.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실리콘밸리의 거물, 팔머 럭키(Palmer Luckey) 안두릴 인더스트리(Anduril Industries) 창업자(1992년생)이죠.‘방산업계의 테슬라’, ‘팔란티어의 하드웨어 버전’으로 불리는 무기제조 스타트업 안두릴. 얼마 전 자금조달 라운드에서 기업가치 610억 달러(약 91조원)를 인정받으며, 설립 9년 만에 ‘세계에서 12번째로 큰 비상장 기업’으로 급성장했는데요. 현실의 ‘토니 스타크’를 꿈꾸는 엔지니어 기업인, 팔머 럭키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5월 20일(수요일) 발행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차고에서 코일건 만들던 소년 17살(2009년), 캠핑카에서 가상현실(VR) 헤드셋 시제품을 만들기 시작.20살(2012년),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서 첫 번째 VR 헤드셋 제품 ‘오큘러스 리프트’가 대박.22살(2014년), 페이스북(현 메타)이 오큘러스를 20억 달러에 인수, 억대 자산가로 등극. (포브스 선정 ‘30세 이하 영향력 있는 30인’)25살(2017년), 정치적 이유(트럼프 지지)로 페이스북에서 해고당함.2017년 안두릴을 창업하기 이전까지 팔머 럭키의 경력입니다. 대단히 화려하죠?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집안이 부유했거나, 운이 좋았겠지. 하지만 팔머 럭키의 오큘러스 스토리는 그렇게 뻔하지 않다는 게 재미있는 점인데요.자동차 딜러의 아들인 팔머 럭키는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대신 어머니의 홈스쿨링을 받았습니다. 산만하고 에너지 넘치고 공상과학 소설과 비디오게임에 푹 빠진, 본인 말대로 “요즘 같았으면 ADHD라고 했을” 아이였죠.시간이 많았던 럭키는 10대 시절 집 차고에 처박혀 지냅니다. 거기서 온갖 전자제품을 분해하고 조립하며 놀았죠. 12살쯤엔 홈디포에서 산 가죽장갑에 일회용 카메라 플래시 콘덴서를 잔뜩 붙인 ‘전기충격 장갑’을 만들었고요(금속을 뚫을 수 있었음). 전자기력으로 금속 탄환을 순식간에 가속해 날려 보내는 ‘코일건’을 제작하다가 감전 사고도 당했죠. 이 위험천만한 취미생활을 통해 그는 공학을 독학했습니다.17살에 대학(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롱비치캠퍼스 저널리즘 전공) 입학과 함께 집에서 쫓겨나 집 앞에 주차된 낡은 캠핑 트레일러에서 살게 된 럭키. 비좁은 트레일러 안에서 모니터 6대짜리 컴퓨터를 두고 ‘어떻게 게이밍 PC를 업그레이드할까’를 고민하다, 한가지 결론에 이릅니다. ‘게임의 궁극적 종착지는 가상현실(VR)이 될 것’이란 생각이었죠. 그때부터 그는 VR에 푹 빠졌는데요.당시는 VR 헤드셋이 ‘이미 실패로 끝난 기술’로 취급되던 시절입니다. 소니·도시바 같은 기업들이 1990년대 수천~수만 달러짜리 헤드셋을 내놨다가, 모두 처참하게 실패했기 때문이었죠. VR은 일종의 조롱거리에 불과했는데요.럭키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단종된 헤드셋 수십 개를 헐값에 사 모았어요. 그걸 뜯어보면서 왜 VR이 실패했는지를 연구했죠. 그리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스마트폰의 기성 부품들을 조합해 자신의 첫 번째 시제품을 탄생시킵니다. 고해상도 디스플레이와 저지연 센서 같은 스마트폰 부품 가격이 과거에 비해 폭락한 시점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그는 이후 2년 동안 트레일러에서 50개 넘는 VR 헤드셋 시제품을 만들어 냈는데요. 당연히 부모님의 금전적 지원은 전혀 없었고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개발비를 마련하기 위해 쉼 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죠. 고장 난 아이폰을 수리해서 되팔아서 짭짤한 수입을 올렸고, 롱비치 세일링 센터에서 요트 갑판 청소와 엔진 수리도 했어요.2012년 8월, 럭키가 VR 헤드셋 ‘오큘러스 리프트’ 판매 프로젝트를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킥스타터’에 공개합니다. 전에 없던 넓은 시야각(110도)을 제공하고 최초로 멀미 현상을 없앤 혁신적인 신제품이었죠. 처음 럭키가 기대했던 펀딩의 목표는 “부품, 제조, 배송, 신용카드/킥스타터 수수료를 충당하고, 축하 피자와 맥주를 사 먹을 10달러 정도만 남기는 것”. 그런데 이 프로젝트는 ‘둠(Doom)’을 개발한 3D 게임계의 전설 존 카맥의 지지를 받으면서 대박이 났고요. 오큘러스엔 거액의 투자금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성공 신화가 시작된 거죠.그리고 이 오큘러스 헤드셋에 반해버린 또 다른 괴짜 기업인이 있었으니. 바로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현 메타) CEO였어요. 그는 오큘러스 본사에서 차세대 헤드셋 시제품을 체험한 지 사흘 만에 오큘러스에 인수를 제안했죠. 2014년 3월, 오큘러스는 20억 달러에 페이스북에 팔립니다. 이 거래로 럭키는 단숨에 수억 달러의 순자산을 보유한 갑부가 됐죠. 부자가 된 기념으로 그는 12만 달러짜리 테슬라 모델S를 장만했어요.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22살의 성공한 기술 덕후의 앞날은 창창한 듯했죠.페이스북에서 쫓겨나다 럭키는 페이스북에 팔린 뒤에도 오큘러스에서 일했습니다. 여전히 VR 헤드셋의 성공을 위해 매진했죠. 오큘러스는 그에겐 ‘아이’ 같은 소중한 존재였으니까요.하지만 2016년 그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트럼프 지지단체 ‘님블 아메리카’에 익명으로 9000달러를 기부한 후원자가 팔머 럭키란 사실이 언론에 공개된 거죠. 갑자기 ‘오큘러스 창업자가 인종·성차별주의적 밈을 만드는 단체를 후원했다’면서 온갖 비난이 쏟아졌어요.럭키는 가짜뉴스라며 맞서려 했어요. 님블 아메리카는 인종·성차별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페이스북 측은 이를 막았고, 오히려 그에게 트럼프 지지를 철회하라고 압박했죠. 거세지는 비난 여론 속에서 럭키의 사내 입지는 쪼그라들었고요. 결국 2017년 3월 페이스북은 럭키를 해고합니다. 그의 ‘아이’가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서 말이죠.럭키는 좌절하는 대신 복수심에 불탔습니다. “저는 경력의 정점에 있을 때 해고당했어요. 정말 화가 났고, 제가 단지 반짝스타가 아니라 여전히 큰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죠.”럭키는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마음먹었고요. 비만 퇴치, 교도소 개선 같은 사업을 고민하다가, 방위산업으로 결정합니다. 영화 ‘아이언맨’ 속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현실판을 만들기로 한 거죠. 새 스타트업은 영화 ‘반지의 제왕’ 속 아라곤의 검 이름에서 딴 ‘안두릴 인더스트리’. 오큘러스와 팔란티어 출신 엔지니어들이 여기에 합류합니다.판을 뒤집는 안두릴의 전략 팔머 럭키가 방위산업을 선택한 건 단지 어릴 적 취미 영향은 아니었어요. 실리콘밸리가 외면해 온, 가장 기술적으로 후진적인 분야였기 때문이죠. “기술 기업들은 국가 안보를 남의 문제로 치부했어요. 그 결과 테슬라의 AI는 어떤 미국 항공기보다 뛰어나고, 룸바는 미 국방부 무기 체계보다 자율 주행 능력이 뛰어나며, 스냅챗 필터는 최첨단 군사 센서보다 컴퓨터 비전 기술을 더 많이 사용하죠.”록히드마틴·보잉·제너럴 다이내믹스 같은 전통의 기업이 꽉 잡고 있는 방위 산업을 뒤흔들기 위해 안두릴은 세 가지 핵심 전략을 세웠습니다. 아예 판을 뒤집어버리려는 전략인데요.①‘내 돈 내 산’ 개발 방식: ‘방위 제품 회사’의 속도전=기존 방산기업은 화려한 파워포인트 발표로 계약을 따낸 뒤, 정부 예산으로 제품을 설계·개발하죠. 안두릴은 정부 자금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회사 자체 자금을 들여 제품을 만든 다음, 작동하는 완성품(시제품)을 들고 찾아가서 계약을 따내죠. 당연히 다른 기업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제품을 공급하게 됩니다.럭키는 기업이 자기 돈을 투자하며 위험을 감수해야만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해요. “두려움 속에서 사는 기업인지, 납세자들의 돈으로 라운지를 누리는 기업인지는 큰 차이를 만듭니다. ‘납세자들에게 연간 수천억 달러를 절약해 주면서 우리는 수백억 달러를 버는 것’이 안두릴이 할 일이죠.”안두릴이 보잉과 록히드 마틴을 제치고 2024년 4월 수주한 미 공군 최초의 자율 전투기 ‘퓨리’는 계약 체결 후 첫 비행까지 556일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하죠. 럭키는 “한국전쟁 이후 가장 빠른 신형 전투기 개발 기록”이라고 자랑스러워합니다.②무기의 두뇌를 지배하다: AI 운영체제 ‘래티스(Lattice)’=자율 전투기, 자율 탱크, 순항 미사일, 잠수함, 감시타워 등 안두릴의 모든 제품은 ‘공통된 두뇌’를 공유합니다. 바로 AI 운영체제 ‘래티스’인데요.럭키는 “안두릴은 래티스 개발부터 시작해 그 위에 다양한 제품을 개발했다”고 설명합니다. 하드웨어 중심인 기존 업체와 달리, 소프트웨어가 핵심인 거죠. 래티스가 ‘방산업계의 테슬라’로 불리는 것도 이런 소프트웨어 중심의 운영 때문인데요. 테슬라 전기차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만으로 성능이 달라지듯, 무기체계 역시 코드 수정만으로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AI를 이용해 무기 체계가 더 똑똑하고 강력해지죠.③과자처럼 찍어내는 무기: 대량생산으로 이기는 법=만약 미국이 중국과 지금 당장 전쟁을 벌이면 미군이 보유한 탄약이 단 8일 만에 동날 거라고 하죠. 드론전쟁 시대에 소수의 정교하고 비싼 무기로 맞서는 건 비효율적이란 점이 이란전쟁에서도 드러났는데요.안두릴은 자동차나 트랙터 생산라인에서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그런 무기를 만듭니다. 부품 수를 획기적으로 줄여서 제조공정을 단순화한 거죠. 예컨대 가성비 순항미사일 ‘바라쿠다’는 기존 미사일보다 부품 수가 90%나 적습니다. 그래야만 압도적인 무기 생산물량으로 적을 압도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인 전투함과 잠수함을 만들어서 포장지에 싸인 트윙키(방부제가 많이 든 과자)처럼 창고에 넣어 둘 겁니다. 그건 1000년 동안 보관할 수 있겠죠.”안두릴의 비전은 미군 현대화를 추진하던 미국 정부의 방향과 맞아떨어졌고요. 특히 트럼프 2기에 들어선 국방 예산 증액의 수혜를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안두릴은 미 육군의 VR 헤드셋 프로젝트, 미 해병대의 드론 방어 시스템, 국방부의 저비용 순항 미사일 공급을 속속 따냈고요. 올여름엔 오하이오주에 무기 공장 ‘아스널 1’을 완공하고 무인전투기 초기 생산에 들어갈 예정이죠. 지난해 안두릴의 매출은 22억 달러, 체결한 계약은 60억 달러에 달합니다. 최근엔 앤드리슨 호로위츠가 주도한 50억 달러 신규투자를 유치하면서, 안두릴의 기업가치가 610억 달러(91조원)로 불어났어요. 1년 만에 두배가 된 거죠.물론 안두릴의 무기 제조 역량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도 나옵니다. 드론 추락, 무인 전투함 오작동 같은 테스트 과정의 실패가 이어졌고요. 미국 내 제조 공급망을 다시 구축한다는 건 여전히 쉽지 않은 과제니까요. 세마포 보도에 따르면 국방부 실세 스티븐 파인버그 차관조차 취임 초기엔 안두릴이 “진짜 회사”인지 아니면 “장난감만 만드는 회사”인지 의문을 제기했다는데요.하지만 팔머 럭키는 “똑똑한 사람들은 무언가를 하지 못할 수백만 가지 이유를 찾는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처럼 생각하라. 만약 저 자신을 한마디로 정의해야 한다면 이겁니다. ‘팔머 럭키, 문제 창조자가 아닌 문제 해결사’” By.딥다이브*이 기사는 5월 20일(수요일) 발행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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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부가 예금 뺏어갈라? 러시아인이 ‘은행 대신 유리병’ 찾는 이유[딥다이브]

    9일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군사 퍼레이드. ‘강한 러시아’란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이 국가적 행사가 올해는 유독 소박했습니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탱크, 미사일 같은 무기가 하나도 등장하지 않았거든요. 정부는 보안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과시할 무기가 없다’, ‘우크라이나 드론 공격이 무서워서다’라는 수군거림이 나왔죠.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인 지 어느덧 5년째. 러시아 국민은 지쳐가고, 한동안 반짝했던 경제마저 급격히 가라앉고 있어요. 이젠 ‘우리가 승리하고 있다’는 크렘린의 선전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 분위기인데요. 푸틴 대통령의 운이 다해가는 걸까요. 흔들리는 러시아 경제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5월 15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종이지도와 삐삐의 부활인구 1300만명의 대도시에서 예고 없이 수시로 모바일 인터넷이 끊기면 어떻게 될까요. 내비게이션이 먹통이 되면서 운전자들이 길을 잃고, 신용카드 결제와 모바일 뱅킹이 막히고, 음식 배달기사와 온라인 쇼핑몰 사업자들은 주문이 끊기고, 은행엔 현금을 찾으려는 예금자들이 몰려들죠.이게 폭격 맞은 이란 테헤란 얘기가 아니고요.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지난 3월부터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특히 9일 전승절을 앞두고는 일반 휴대전화 통신까지 끊겨서 구급차조차 부를 수 없게 되어버렸었죠.시민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현지언론 보도에 따르면, 종이지도와 무선호출기(삐삐), 유선전화 판매가 급증하는 기현상이 나타났고요. 온라인 거래에 의존하는 소상공인이나 배달 기사는 생계마저 위협받을 위기에 처했죠.러시아 정부는 ‘인터넷 블랙아웃’이 방어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주장합니다. 우크라이나 드론이 러시아 내부 기지국 신호를 이용해 공격해서 어쩔 수 없이 차단했단 거죠. 또 비슷한 이유로 러시아인이 가장 많이 쓰는 메신저 서비스 ‘텔레그램’ 접근까지 제한했어요(러시아 1억4500만 인구 중 약 9000만명이 이용). 우크라이나 정보기관이 텔레그램을 통해 러시아 민간인을 포섭할 수 있다면서요.하지만 정말 그게 이유일까요? 인터넷 차단해도 우크라이나 드론은 날아오던데?(스타링크 이용) 텔레그램을 버리고 러시아 정부가 만든 ‘맥스’ 메신저를 사용하라고? 이거 개인 메신저까지 검열하겠단 뜻 아닌가요?정보를 통제해서 비판적인 여론이 확산하는 걸 막으려는 러시아 정부의 빤한 의도를 눈치채지 못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시민들의 불만이 들끓고 있죠. 특히 정치나 전쟁에 무관심했던 이들까지 비판에 가세하기 시작했는데요.이런 민심의 변화를 보여준 대표적 인물이 유명 인플루언서 빅토리아 보냐입니다. 지난달 그가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푸틴 대통령께 드리는 호소’라며 18분짜리 영상을 올렸죠. “보안기관은 끊임없이 이것저것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직한 러시아인들을 착취하고 이 나라에서 삶을 견딜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파티 참석이나 요트 타는 영상을 주로 올리던, 정치색이 전혀 없는 패션 인플루언서가 이토록 용감하게 사회비판 발언을 하다니. 이 영상은 3100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단숨에 큰 화제가 됐고요. 결국 크렘린 대변인이 “영상이 다룬 주제에 대해 조사가 진행 중”이라고 언급해야 했죠.BBC 보도에 따르면 최근 러시아 대통령 행정실 건물 앞에는 수십 명이 긴 줄을 늘어선 이례적인 모습이 포착됐어요. ‘인터넷 검열과 차단을 중단해달라’고 촉구하는 청원서를 푸틴 대통령에게 전달하려는 사람들이었죠. 사실 러시아에선 이렇게 공개적으로 정부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현하는 건 특이하고 위험한 일이거든요. 그만큼 민심의 동요가 심상찮다는 뜻입니다.국영 여론조사 기관이 발표한 푸틴 대통령의 최근 지지율은 65.6%. 3월 73.3%에서 7주 연속 하락한 건데요.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이후 최저라고 하죠.2차 대전보다 길어진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난 지 4년이 지났지만, 러시아 국민 상당수는 한동안 전쟁에 무관심한 편이었습니다. 정부가 동원령을 내린 게 아니라 지원병 체제를 유지했기 때문이죠. 높은 입대 보너스(약 4300만원 수준)에 이끌린 가난한 시골 청년들만 주로 전쟁터로 나갔고요. 또 전쟁 때문에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실업률이 뚝 떨어지고 임금이 뛰는 바람에, 오히려 노동자 입장에선 먹고 살기가 괜찮았어요. 무기 공장이 24시간 쉼없이 돌아가면서 러시아 경제성장을 이끌었고요.하지만 2025년부터 슬슬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왜? 일단 전쟁이 길어도 너무 길어졌고요. 무엇보다 러시아 정부가 돈이 바닥났기 때문이죠.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벌인 전쟁(러시아에선 ‘대조국전쟁’이라 칭함)보다도 길어졌어요. 지금 러시아 청년들은 증조할아버지 세대보다 더 긴 전쟁을 겪고 있는 셈이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군 사상자는 약 100만명. 점점 전쟁으로 다치거나 죽은 친척과 지인을 둔 사람들이 늘어만 갑니다.게다가 전쟁이 이제 국경지대만이 아니라 내륙까지 번졌어요. 그동안 우크라이나 장거리 드론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정유시설과 항만까지 타격하기 때문이죠. 집 근처에서 울리는 폭발음이 전쟁을 실감케 합니다.오랜 전쟁과 서방의 제재로 러시아 정부 곳간은 빠르게 비어가고 있어요. 한해 예산의 40%를 전쟁에 쏟아붓고 있기 때문이죠. 러시아 연방 재무부가 집계한 올 1~4월 누적 재정적자는 약 800억 달러. 2026년 한 해 적자 목표치의 절반을 이미 훌쩍 넘어버렸습니다. 이란전쟁으로 유가가 뛰고 러시아산 원유 수출이 늘었다곤 하지만, 이 막대한 적자를 메우긴 역부족이죠.돈이 없으면 돈 나올 구멍을 어떻게든 만들어야겠죠. 그래서 러시아 정부는 지난해부터 세금과 공공요금을 무섭게 올리고 있습니다. 2025년엔 법인세율을 대폭 높이더니(20→25%), 올해는 부가가치세를 인상했죠(20→22%). 수입 차와 가전제품엔 ‘재활용 부담금’을 붙이고, 대기업엔 ‘횡재세(초과이윤세)’를 물리고, 해외 송금에 대한 ‘환전세’를 대폭 올렸고요. 한마디로 전쟁을 위해 온갖 세금을 올려서 국민들을 쥐어짜는 중입니다.민생과 직결된 공공서비스 역시 요금인상 폭탄이 터지고 있어요. 가스, 전기, 수도요금이 전국적으로 평균 12%씩 뛰었죠. 정부가 발표하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5%대이지만, 아무도 그걸 신뢰하지 않습니다. 중앙은행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국민이 현재 체감하는 물가상승률은 약 14%에 달하죠.곳곳에서 아우성이 터져나옵니다. 중소기업 면세 혜택이 사라지면서, 세금 때문에 가게 문을 닫는 동네 미용실, 식당, 카페가 늘어가고요. 적자 기업이 늘면서 러시아 회사채 시장 물량 중 25%가 디폴트(채무불이행) 위험에 처했다는 분석이 나오죠. 의료 예산이 부족한 탓에 일부 항암제 공급이 끊기면서 암환자들의 불만이 폭주하고요. 이 와중에 최근엔 이런 루머까지 돌기 시작했어요. ‘정부가 예산 적자를 메우기 위해 루블화 예금을 강제로 몰수하거나 동결할 거래.’물론 정부는 헛소문이라고 일축했지만, 불안감은 커집니다. 안 그래도 요즘 모바일 뱅킹이 자꾸 끊기는데, 이게 혹시 예금 동결과 관련 있나 싶은 거죠. 그래서 아예 은행에서 예금을 왕창 인출해서 현금을 집에 보관하는 사람들이 급증했어요. 연 13%에 달하는 예금이자를 포기하면서까지 말이죠. 1991년의 소련도 아니고 21세기 러시아에서 이게 뭔 일인가 싶은데요. 요즘 러시아에선 ‘반크(러시아어로 은행) 대신 반카(유리병)’이란 씁쓸한 언어유희가 유행이라고 합니다.군사 주도 성장의 한계올해 1분기 러시아 GDP 성장률은 -0.3%. 2023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고요. 12일 러시아 경제개발부가 수정한 올해 경제성장률은 0.4%. 지난해 9월 전망치(1.3%)를 대폭 낮췄습니다. 알렉산드로 노박 부총리는 인터뷰에서 “고성장 이후 조정이 뒤따르는 건 정상”이라면서도 “지출 우선순위 설정”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강조했죠. 한마디로 정부가 돈이 부족하니까 아껴 써야 한단 뜻입니다.이게 바로 군사지출로 만든 성장의 한계입니다. 정부가 빚을 내서 무기를 생산하면 당장은 GDP를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죠. 하지만 전쟁으로는 경제의 선순환을 만들어낼 수가 없어요. 탱크나 미사일은 전장에서 파괴되고 사라질 뿐, 새로운 부를 창출해내지 못하니까요. 오히려 전쟁으로 모든 자원(인력과 자본)을 빼앗기면서 민간 부문은 말라 죽어가고 있습니다. 성장의 기반 자체가 무너지는 거죠.러시아는 오는 9월 총선을 앞두고 있습니다. 현재 집권여당인 통합러시아당 지지율은 30% 아래로 추락했어요. 여당 지지율과 푸틴 대통령 지지율은 별개이지만, 그래도 민심 이반을 드러내주는 수치이죠.그럼 혹시 이번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하면 푸틴 대통령의 권력 기반도 흔들리는 거냐고요? 에이, 그럴 리가요. 일단 러시아 정부는 선거를 조작해서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고요. 어차피 의회 내 야당은 사실상 크렘린에 맞서지 않는 ‘관제 야당’에 불과하거든요. 선거 하나로 푸틴 시대가 저무는 그런 일은 러시아에선 일어나지 않습니다.그래도 선거인데, 푸틴 정권으로선 신경 쓰일 수밖에 없긴 하죠? 바로 그게 요즘 인터넷 검열이 부쩍 강화된 이유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특히 구 소련의 비밀경찰 KGB를 계승한 정보기관 연방보안국(FSB)이 이런 ‘디지털 철의 장막’ 구축의 중심에 있다고 하죠.하지만 터져 나오는 민심을 언제까지 억지로 틀어막을 수 있을까요. 역사를 보면 1917년 러시아 혁명은 황제에게 바치는 민중의 청원 행렬을 군대가 총칼로 제압한 ‘피의 일요일’ 사건(1905년)이 단초가 됐습니다. 민심을 억누르면 오히려 더 큰 폭발로 이어진다는 것, 그걸 가장 잘 기억하는 나라는 다름 아닌 러시아입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5월 15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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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가 내 일자리 뺏을까? ‘창조적 파괴’가 답하다[딥다이브]

    컴퓨터 프로그래머, 고객 서비스(CS) 담당자, 데이터 담당자, 시장 애널리스트…. 앤트로픽이 ‘인공지능으로 대체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던 직업들이죠. 미국에선 AI 영향으로 이미 신입 회계사와 컨설턴트 채용이 줄고 있단 소식도 들리는데요.그래서 이런 질문이 끊이지 않습니다. 인공지능(AI) 기술 혁명은 인간의 일자리를 사라지게 만들까요?이에 대한 논의는 수도 없지만, 이 개념으로 많은 걸 설명할 수 있겠죠. 창조적 파괴(Creative Distruction). 결론부터 말하자면 AI 같은 기술 혁명은 일자리의 상실과 창출, 두 가지 모두를 가져오고요. 그 역동성 속에서 성장이 싹 틀 겁니다.이 ‘창조적 파괴’로 2025년 노벨경제학상을 공동수상한 피터 하윗 브라운대 교수가 14일(목요일) ‘2026 동아국제금융포럼’의 기조 강연을 할 예정인데요. 그의 방한을 기념해 ‘창조적 파괴’와 성장으로 가는 길을 들여다보겠습니다. 2021년 출간된 책 ‘창조적 파괴의 힘(필리프 아기옹, 렐린 앙토냉, 시몽 뷔넬 지음)’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이 기사는 5월 1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200년을 관통하는 성장의 원리 창조적 파괴.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1942년 저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제시한 개념이죠. 이후 피터 하윗과 필리프 아기옹이 1992년 슘페터의 아이디어를 수학적 모델로 발전시키면서, 관련 후속 연구가 쏟아져 나오게 됐는데요.기초 개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①기술 혁신이 경제성장의 근본 동력이다. ②새로운 혁신은 기존 혁신을 파괴한다. 너무 뻔한 얘기 아니냐고요? 디지털카메라에 밀린 코닥, 아이폰과의 경쟁에서 진 노키아, 온라인 쇼핑에 밀려 문 닫는 대형마트, 넷플릭스로 타격받은 케이블TV, 중국 전기차 공습에 고전하는 독일 자동차 업계 등. 창조적 파괴와 관련지을 만한 사례는 수없이 많죠. 2000년대 IT 혁명을 이미 겪었고, 2020년대 에너지 대전환과 AI 기술 혁명을 지켜보고 있는 우리 입장에선 익숙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요.슘페터는 1940년대에 이미 이를 간파했다는 점이 놀랍지 않나요? ‘창조적 파괴’는 물레방아와 풍차를 대체한 ‘증기기관 혁명’이 일어난 1820년대 이후 줄곧 반복되어 온 경제성장의 원리입니다. 증기기관·전기·철도·자동차 등, 지난 200여년 간 벌어진 모든 기술 혁명을 관통하는 개념이죠.이 논리에 따르면 더 많은 창조적 파괴가 일어날수록 경제는 더 빠르게 성장합니다. 즉, 기술혁신으로 새로운 기업이 떠오르고(창조) 도태된 기업이 밀려나는 일(파괴), 두 가지 모두 활발한 게 성장을 위해선 가장 좋은 일이죠.정말 그럴까요?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위원회가 소개했던 미국의 산업별 그래픽을 한번 보시죠.ⓐ새로운 일자리가 활발하게 만들어질수록 ⓑ새로운 기업(법인)이 많이 들어올수록 ⓒ새로운 사업체(지점 또는 공장)가 많이 생길수록 ⓓ비효율적 사업체가 많이 퇴출될수록, 그 산업의 노동생산성이 높다는 걸 보여주는 그래프입니다. 성장하는 산업은 진입과 퇴출, 모두 활발한 역동성이 특징으로 나타났죠. 반대로 물갈이 없이 현실에 안주하는 ‘고인물’만 가득한 산업은 성장성이 떨어집니다.파괴의 고통을 줄이려면 요약하자면 ‘기술혁신으로 쓸모없게 되어버린 제품과 기업이 퇴출돼야, 거기 묶였던 자원(노동력과 자본)이 재배치되면서 경제가 성장할 수 있다’라는 게 창조적 파괴의 핵심 논리입니다. 경제 성장을 위해선 ‘창조’만이 아니라 ‘파괴’도 필수인 거죠.혁신은 생산성을 끌어올리기에, 경제 전체로는 ‘혁신으로 사라지는 일자리<새로 생긴 일자리’가 됩니다. 과거 기술 혁명의 역사를 돌이켜봐도, 우려했던 대규모 실업사태가 일어난 적은 없었죠. 피터 하윗 교수는 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인구의 50%가 농장에서 일했던 150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150년 뒤에는 인구의 1% 정도만 농업을 한다’고 하면 그들이 믿겠는가. 또 이들이 나머지 49%가 무슨 일을 할지 상상할 수 있겠나. 제트기 조종사, 자동차 정비사, 블로거 같은 직업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지금의 AI 혁명 역시 우리가 상상도 못 할 새로운 직업과 기회를 열어줄 날이 오겠죠.하지만 이거 어딘가 좀 불편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개인에 초점을 맞추면 낙관적이기가 쉽지 않거든요. 기업 폐쇄로 실업자가 된 사람이 한창 떠오르는 혁신산업에 합류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예컨대 미국 피츠버그는 철강산업이 붕괴한 뒤 ‘생명공학 허브’로 거듭났고, 조선업이 몰락한 스웨덴 말뫼는 이제 친환경 대학도시로 변신한 지 오래인데요. 그렇다고 해서 과거 그 지역에서 일자리를 잃었던 이들의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바로 이 점에서 연구자들이 강조한 게 사회 안전망입니다. 창조적 파괴는 필연적으로 일정 부분 실업의 위험을 높이기 때문에, 이들을 보호해 줄 제도를 국가가 고민해야 한다는 거죠. 그 대표적인 사례가 덴마크의 ‘플렉시큐리티’ 제도인데요. 덴마크는 기업의 직원 해고가 쉬운 대신, 실직자엔 최대 3년간 임금의 90%(현재 상한액 약 월 470만원)를 실업수당으로 지급합니다. 그 결과, 미국과 달리 덴마크에선 직장 폐쇄로 일자리를 잃은 경우에도 노동자의 건강상태나 사망률이 악화하지 않았다고 하죠.IMF 외환위기의 역설전기차 시장을 가장 앞서 개척한 테슬라나 AI 업계의 선두주자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 중인 오픈AI와 앤트로픽 같은 기업은 모두 스타트업으로 출발했죠. 대체로 과감한 혁신을 주도하는 건 신규 진입자들입니다. 잃을 게 없기 때문에 더 파격적으로 치고 나올 수 있는 거죠.이에 비해 대기업일수록 이미 장악한 시장을 파괴할까봐 혁신에 소극적인 경우가 많고요. 심지어 적극적으로 혁신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정부에 로비해서 규제 문턱을 높여 새로운 기업의 진입을 막는 거죠. 혁신은 뒷전인 채 정치적 연줄에만 신경 쓰는 대기업은 성장의 적입니다. 결국 성장을 위해 정부는 경쟁을 촉진하는 개방적인 경제정책을 펼치는 게 중요한데요. ‘창조적 파괴의 힘’에서 그 대표 모범사례로 꼽은 게 한국입니다. 역설적으로 1997년 외환위기의 충격이 한국이 ‘중진국 함정’에 빠지지 않고 경제적 도약을 이루게 했다고 보는 거죠.당시 한국은 IMF 요구로 해외투자자의 지분 투자 한도를 대폭 높이고, 독과점 기업에 대한 규제는 대폭 강화하는 식으로 제도를 바꿔야만 했고요. 그 결과 “재벌 기업과 정부의 야합에 의해 방해받던 ‘비재벌’ 기업의 혁신을 촉진함으로써 재벌의 영향력을 제한하고, 한국을 경쟁에 개방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게 연구자들의 분석입니다. 반강제적으로 이뤄진 경제 개혁이 이후 혁신을 이끈 동력이 됐다는 거죠. IMF 외환위기 당시 우리 국민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생각하면, 왠지 묘한 기분이 드는 해석입니다. 예측 대신 행동하라 ‘중국발 공급과잉 충격’은 전 세계적인 화두입니다. 2001년 중국의 WTO 가입 이후 중국산 값싼 수입품이 각국으로 쏟아져 들어왔고요. 이로 인해 시장을 잃고 밀려나는 제조업 기업이 점점 늘어만 가는데요.그럼, 자국 기업의 혁신 의욕을 꺾는 중국산 수입품을 밀어내는 게 답일까요? 관세 방어막을 높이 세워서?프랑스에서 이뤄진 연구 결과는 좀 달랐습니다. 중국발 충격이 기업에 미치는 영향 자체가 제각각이었거든요. 연구진은 이를 ‘공부를 매우 잘하는 전학생이 새로 온 학급’에 비유해 설명하는데요. 원래 성적이 좋았던 학생이라면 전학생에 자극을 받아서 전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할 테지만, 그 반대 경우엔 의욕만 떨어져서 공부를 손 놓게 됩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생산성 상위 10%였던 프랑스 기업은 중국산이 밀고 들어오자, 혁신의 속도를 오히려 더 높였고요. 이와 달리 하위 10% 기업은 더 가라앉고 말았습니다.무엇보다 관세 장벽은 중국의 보복 조치를 불러와서 수출을 가로막을 테니, 성장엔 부정적이고요. 또 관세 장벽이 있으면 국내 기업이 굳이 국내 시장을 지키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게 되니 혁신이 줄어드는 부작용을 초래합니다. 필리프 아기옹 콜레드 주 프랑스 교수가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 직후 기자회견에서 최근의 탈세계화 추세를 두고 “이제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다”고 걱정했던 이유이죠.그럼, 중국산 수입품이 국내 시장을 휘젓도록 그냥 두고 보란 말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이들이 제시하는 해법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정부가 연구개발을 지원하는 겁니다. 기업의 연구개발을 촉진하는 세액공제나 보조금, 금융지원은 물론이고요. 1958년 스푸트니크 쇼크로 탄생한 미국 국방부 산하 DARPA(국방고등연구계획국)처럼 국가가 직접 예산을 들여 기초연구에 투자할 필요성도 강조합니다. 물론 상당한 예산이 드는 일이긴 한데요. 이로 인해 생산성이 높아지고 가계 소비가 늘어나는 효과가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을 겁니다.‘창조적 파괴의 힘’에서 저자들은 이렇게 강조하죠. “자본주의는 혈기왕성한 말과 같아서 제어 불가능할 정도로 날뛸 수도 있다. 하지만 고삐를 단단히 조이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달릴 수 있다.” 어쩐지 프랑스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성채(Citadelle)’ 속 유명한 구절이 떠오르는군요. “미래에 대한 당신의 임무는 예측하는 게 아니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By.딥다이브2026 동아국제금융포럼 5월 14일 오전 9시 서울 중구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등록 및 안내: 동아인사이트 홈페이지 www.dongainsight.com)*이 기사는 5월 1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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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혼다 넘은 스즈키, 약자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나[딥다이브]

    일본 자동차 시장에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2025년도 신차 판매 2위 자리에 혼다를 제치고 사상 처음으로 스즈키가 올라섰어요. 특이한 건 스즈키가 수입차 판매 1위까지 차지했다는 거죠. 인도에서 생산한 스즈키 차량이 일본으로 역수입돼 돌풍을 일으킨 겁니다.44년 전 불모지나 다름없던 인도 자동차 시장에 진출했던 스즈키. 그 도약의 중심엔 고 스즈키 오사무 전 회장(1930~2024년)이 강조했던 ‘중소기업형 경영’이 있죠. 약자가 승리하는 방법이 뭔지를 보여주는 사례, 스즈키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5월 8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인도산 스즈키’가 이룬 역전‘경차의 강자’. 일본 자동차 브랜드 스즈키의 오랜 별명이죠. 그 명성은 1979년 경차 ‘알토’를 47만 엔이란 충격적인 저가에 출시하면서부터 시작됐는데요. 라디오는 물론 시가 라이터까지, 일체의 낭비와 장식을 생략한 알토는 당시 ‘경차=최소 60만 엔’이었던 시장의 공식을 파괴했고요.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일본에 ‘경차 전성시대’를 열었습니다.스즈키는 일본에선 지금도 경차로 유명하죠. 하지만 2025년도(2025년 4월~2026년 3월) 스즈키가 사상 처음 일본 신차(승용차) 판매 2위로 올라선 건 경차 덕분이 아니었습니다. 소형 SUV ‘프롱크스’와 오프로드 SUV ‘짐니 노마드’가 성장을 견인했죠. 특히 짐니 노마드는 단 4일 만에 5만 건 넘는 사전 주문이 몰려 예약 접수를 중단해야 했을 정도로 인기가 폭발적이었다고 해요.프롱크스와 짐니 노마드는 모두 인도산 차량입니다. 스즈키의 인도 합작사인 마루티 스즈키의 현지 공장에서 생산됐어요. 그래서 지난해 스즈키의 약진은 일본 수입차 시장의 판도까지 뒤흔들었죠. 독일 3사(메르세데스-벤츠, BMW, 폭스바겐)가 장악했던 수입차 시장 1위에 처음으로 스즈키가 오른 겁니다.여러모로 새로운 현상이라 하겠는데요. 그만큼 인도산 스즈키 차량의 품질을 일본 소비자도 신뢰한다는 뜻이겠죠. 마루티 스즈키는 인도에선 40% 안팎의 압도적 점유율로 부동의 1위를 지키는 최대 자동차 제조사이니 말입니다.인도에서의 탄탄한 입지 덕분에 스즈키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죠. 인도 자동차 시장이 무섭게 성장해 어느덧 일본을 제치고 세계 3위 판매량을 기록 중이니까요. 스즈키는 2012년 미국, 2018년 중국 시장에서 일찌감치 철수했는데요. 그 덕분에 트럼프 관세 폭탄과 중국 전기차와의 혈투를 피하게 됐습니다. 세계 1, 2위 자동차 시장을 모두 포기한 덕분에 되레 잘 나가고 있는 셈이죠. 미국에 치이고 중국에 밀려서 적자 수렁에서 허우덕 대고 있는 혼다, 닛산과는 대조적입니다.그럼 스즈키는 어떻게 40여 년 전에 인도에 진출할 생각을 했을까요. 인도 시장의 놀라운 잠재력을 간파한 선견지명 덕분일까요? 이에 대해 고 스즈키 오사무 전 회장은 “선견지명은 없다”고 여러 번 밝혔습니다. “대기업처럼 선진국에 진출하고 싶었지만, 경차를 만들어 달라는 나라는 없었다”면서 말이죠. 2021년 퇴임 기자회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냥 직감에 의존하는 편이었죠. 막무가내로 나아가다 보니 인도가 보였고, 상륙해 보니 꽤 잘 풀렸습니다. 지구상에는 아직 보지 못한 새로운 땅이 있으니 계속 걸어가세요. 행동력으로 발견해 나가면 괜찮을 겁니다.”꼭 1등을 하고 싶었다 1980년대 초, 스즈키의 경차는 꽤 인기를 끌었지만 여전히 일본 자동차 업계 순위에선 하위권이었습니다. 도요타나 닛산, 혼다 같은 대형 자동차 제조사와 비교하면 자본과 기술, 모든 면에서 열세였고요. 솔직히 게임이 되질 않았죠. 그런데도 스즈키 오사무 당시 사장은 “어딘가에선 1위를 차지하고 싶다”고 강렬히 열망했습니다.“일본 시장은 어디나 똑같다. 어느 현이든 1위는 도요타, 2위는 닛산이다. 후발 주자인 스즈키가 어느 현에서 1위를 차지한다는 건, 고향인 시즈오카에서도 무리다. 그렇다면 해외로 나가서 1위를 차지하자. 1위를 차지하면 직원 사기는 올라간다. 하지만 선진국에선 스즈키가 잘하는 소형차론 이길 수 없다. 자동차 제조사가 없는 나라에 진출하면 틀림없이 1위가 될 수 있다. 간단하다.” 그렇게 기회를 엿보던 1982년, 오사무 사장은 파키스탄 출장 중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인도 정부가 국민차 생산을 위한 합작 파트너를 찾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보게 됩니다. 그는 곧바로 인도대사관을 찾아갔고요. 이미 모집 마감 기한이 지난 후였지만, 간신히 마지막 예비후보로 이름을 올렸죠.얼마 뒤 인도 정부 대표단이 일본으로 찾아왔어요. 그들은 도요타, 닛산, 미쓰비시 같은 주요 자동차 회사를 먼저 만났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난 스즈키 사장은 공장 배치도를 보여주며 열정적으로 의지를 피력합니다. “스즈키는 대형 자동차 제조사만큼 충분한 자금은 없습니다. 하지만 정성을 다해 기술을 전수해 드릴 수 있습니다.”당시 다른 기업 CEO들은 인도 대표단에 잠깐 얼굴만 비친 뒤, 협상은 임원한테 맡겼다고 해요. 기술 이전에 대해서도 구식 모델만 할 수 있다는 식의 소극적 태도였고요. ‘인도에서 차가 팔려봤자 얼마나 팔리겠어’라며 시큰둥했던 거죠. 인도 시장에 진심이었던 CEO는 스즈키 사장뿐이었습니다. 그 엄청난 열의가 인도 대표단을 사로잡았죠.하지만 스즈키 내부에서조차 인도 진출은 무모하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당시 인도는 연간 자동차 판매량이 고작 4만대 미만인 보잘것없는 시장이었고요. 인프라와 기술력, 노동환경, 규제 등 모든 조건이 척박하기 짝이 없었죠. ‘성공할 리 없다’는 주변의 경고와 설득이 이어졌지만, 그해 10월 스즈키 사장은 인도 정부와의 합작 계약에 서명합니다. 스즈키가 50억 엔(초기 지분율 26%, 현재는 56%)을 투자해 인도 합작사 ‘마루티 스즈키’가 출범했죠.1983년 12월, 합작법인의 첫차 ‘마루티 800’이 나왔습니다. 인디라 간디 총리가 직접 1호차 열쇠를 전달했을 정도로 국가적인 이벤트였죠. 일본 스즈키의 경차 ‘알토’를 기반으로 만든 작고 세련된 디자인과 뛰어난 연비(L당 15~18㎞), 저렴한 가격(400만원대)까지. 인도 최초의 국민차 탄생에 인도인은 열광했고요. 마루티 800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이후 십수 년간 인도 승용차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합니다. 인도식 실행력과 일본식 시스템자신만의 강점(소형차 기술력+비용 절감)을 살릴 수 있는 틈새시장을 집중 공략해 성공을 거둔 스즈키. 하지만 인도 문화에 일본식 경영을 접목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죠. 특히 인도의 주가드(Jugaad), 즉 ‘대충 돌아가게 만들면 된다’는 임기응변식 사고방식과 일본의 엄격한 장인정신 ‘모노즈쿠리’, 이 둘은 달라도 너무 달랐는데요.마루티 스즈키를 설립 단계부터 이끌어온 인도인 경영자 R.C. 바르가바는 “마루티 스즈키가 불가능을 가능케 한 기적을 일으킨 건 팀워크·기술·시스템이라는 일본식 경영과 신속한 의사결정이란 인도의 특징이 상충하지 않고 훌륭한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많은 인도 노동자들이 일본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일본의 정교한 생산 시스템을 직접 배웠고요. 스즈키는 인도 근로자의 창의적 해결법을 현장개선(카이젠)에 활용했죠. 이를 통해 인도의 울퉁불퉁한 도로에 맞춰 차바닥을 조금 높이고, 먼지와 고온에 맞춰 에어컨 성능을 강화하는 식의 현지화가 이뤄졌습니다. 일본식 제조 철학과 인도식 실행력이 결합한 독특한 기업 문화가 탄생한 거죠. 1983년 ‘마루티 800’ 탄생과 함께 본격화한 인도 자동차 산업의 이후 성장세는 눈부실 정도입니다. 2025 회계연도(2025년 4월~2026년 3월) 인도에서 판매된 승용차는 무려 464만대. 이제 판매량에서 인도는 세계 3위의 자동차 시장이고요(1위 중국, 2위 미국). 생산 대수에선 중국·미국·일본에 이어 세계 4위입니다.스즈키의 인도 공장 연간 생산량은 210만대. 일본 내 생산량(99.5만대)의 두배를 이미 넘었고요. 인도에서 생산한 차량이 중남미와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이제 일본까지 수출되고 있습니다. 스즈키는 지난해 발표한 ‘중기 경영계획’에선 2030년까지 인도 내 생산능력을 400만대로 확대할 거라고 밝혔죠. 300만대는 인도 내수 시장, 100만대는 아프리카 등 세계시장 수출용이 될 거라고 합니다. 인도가 스즈키의 가장 중요한 시장이자 글로벌 수출 거점이 되는 거죠.화려함 대신 ‘딱 좋다’를 팔다“자동차 산업의 미래 같은 거창한 이야기는 대기업에 물어보라. 스즈키는 하마마츠의 중소기업일 뿐이다.” 인도 시장의 놀라운 성공 뒤에도 고 스즈키 오사무 전 회장은 늘 스즈키를 ‘중소기업’이라고 칭했습니다. 2009년 펴낸 자서전 제목도 ‘나는 중소기업 사장이다’였고요.이는 단순한 겸손의 뜻이 아닙니다. 기업 규모가 커져도 ‘중소기업의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죠. 현 CEO인 스즈키 토시히로 사장 역시 ‘중소기업형 경영’이 스즈키의 중요한 행동 이념이라고 강조하는데요.스즈키의 중소기업형 경영방식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 중 하나가 금융 자회사가 없다는 점입니다. 보통 대형 자동차 제조사는 자동차 대출을 취급하는 금융 자회사를 운영하잖아요. 그래야 금융 프로모션으로 판매를 촉진할 수 있으니까요. 스즈키는 그게 없어요. ‘작고 좋은 차를 만든다’는 본업에만 집중하기 위해서죠. 덕분에 스즈키는 자동차 제조사 중 자산수익률(ROA)이 10.73%로 유독 높습니다(2025년 기준). 방대한 자산이 필요한 금융 자회사가 없으니 자산 효율성이 높아질 수밖에요.자체 기술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업계 선두주자와의 제휴에 적극적이란 점도 특징인데요. 스즈키는 1981년엔 미국 제너럴모터스(GM), 2009년엔 폭스바겐과 제휴 관계를 맺었었죠. 물론 폭스바겐이 친환경 기술은 제대로 주지 않고 자회사 취급을 하는 바람에, 둘의 관계는 국제소송전으로 번졌고 결국 파탄 났지만요. 이후 2016년 스즈키 오사무 당시 회장이 직접 도요타 쇼이치로 당시 명예회장을 찾아가 요청하면서 ‘도요타-스즈키 연합’이라는 강력한 동맹이 탄생했고요(도요타가 스즈키 지분 5% 보유). 이제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자율주행 기술 개발과 관련해 두 회사는 공고한 협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결국 강점을 살릴 ‘이길 수 있는 영역’을 택하고 다른 데로 눈 돌리지 않는 지독한 ‘선택과 집중’이 지금의 스즈키를 만든 전략인데요. 그래서 스즈키에 대해선 미래지향적 기술 혁신이 부족하단 비판도 나오지만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작고 가벼운 차를 싸게 잘 만드는 것 자체가 남다른 기술이라고 믿기 때문이죠.“고객 여러분이 ‘딱 좋다’, ‘이걸로 충분해’라고 느낄 수 있는 자동차를 계속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가볍고 안전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호화롭고 복잡한 장비를 피하는 것, 그리고 단순하고 사기 쉬운 가격을 중시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성능이라고 고객이 구매해 주지 않으면 좋은 상품이라 할 수 없으니까요.” (스즈키 토시히로 사장의 2025년 인터뷰) By.딥다이브*이 기사는 5월 8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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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한애란]은퇴 자금 7조원 몰린 ‘착시의 금융’

    ‘연금’ 또는 ‘노후 현금 흐름’을 얘기하는 주변인이 늘어가는 걸 보면서 나이를 실감한다. 2∼3년 전만 해도 투자와 담쌓고 지냈던 친구들도 이제 이런 질문을 한다. “개인형 퇴직연금(IRP) 또는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에 담을 만한 상장지수펀드(ETF)로 뭐가 있을까?” 정년 연장이 논의되고 있다지만, 월급 없이 30∼40년을 지낼 생각을 하면 솔직히 막막하다. 은퇴까지 남은 몇 년 동안 열심히 투자해서, 죽을 때까지 생활비 걱정은 면할 만한 현금 흐름은 만들어 두고 싶다. 국민연금 빼고 월 200만 원 정도? 기왕이면 300만 원?안정적으로 돈 벌고 싶단 욕구 2030에 비해 모아둔 자산은 많지만, 다가오는 은퇴로 불안한 4050세대. 이들의 투자 성향은 모순적이다. 자산을 불리고는 싶지만, 삐끗해서 원금을 잃을까 두렵다. 앞으로 5∼10년이 자산 성장을 극대화할 마지막 기회이지만, 지금 망하면 재기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여겨서다. 그래서 ‘안정적인데 기대 수익률은 높은’ 금융상품을 찾게 된다. 이 무슨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소리인가 싶다. 그런데 이 모순적 욕구를 교묘하게 파고드는 상품이 있다. 바로 ‘커버드콜’이란 이름이 붙은 월 배당 ETF다. 연 15% 안팎에 달하는 분배금을 매달 현금으로 꽂아준다는 특징이 있다. ‘월급처럼 세후 200만 원 꼬박꼬박’이란 홍보 문구가 예비 은퇴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커버드콜이란 주식을 보유하면서, 그 주식의 주가가 오를 때 수익 낼 권리(콜옵션)를 팔아 현금을 챙기는 걸 말한다. 이런 전략 때문에 커버드콜 ETF는 주가가 크게 오르지 않아도 높은 분배금을 나눠줄 수 있다. 요즘엔 보유한 주식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콜옵션을 팔고, 나머지는 그대로 보유해 주가 상승분까지 챙기는 2세대 커버드콜 ETF가 대세다. 안정적인 현금 확보와 주가 상승 수익,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해서다. 설명대로라면 환상적이다. 지난 1∼2년 과거 수익률 기록도 상당히 좋다. 게다가 국내주식형 커버드콜 ETF는 배당소득세도 거의 없다니 더 솔깃하다. ‘배당+성장 다 잡는다’, ‘원금 안 까먹고 월 300 나온다’며 월 배당 ETF를 홍보하는 유튜브 영상이 수도 없이 쏟아진다. 올해 들어 커버드콜 ETF엔 7조 원 넘는 투자금이 몰려, 순자산이 50% 가까이 불어났다.‘원금이 감소할 수 있음’ 하지만 생각해 보자. 원금이 깎이지 않고 영원히 연 15% 분배금을 지급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의 역사적 연평균 수익률도 약 10%에 불과하다. 지수를 5%나 초과한 수익률을 계속 이어간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자산운용사는 상품설명서에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이익금을 초과하는 분배금 지급 시 원금이 감소할 수 있음.” 이익이 안 나면 원금을 깎아서 분배금을 주겠다는 뜻이다. 높은 분배율만 보고 투자했다가, 자칫 해지하려고 보니 원금이 쪼그라들게 될 수도 있다. 이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은퇴 자산을 투자한다면 자칫 낭패를 볼 우려가 있다. 무엇보다 자산운용사의 수익 구조를 따져보자. 코스피200 같은 지수를 추종하는 일반 지수형 ETF의 수수료율은 0.01∼0.03%에 불과하다. 수수료가 매우 저렴하다는 게 ETF의 큰 강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커버드콜 ETF는 수수료율이 0.5% 안팎으로 수십 배 더 비싸다. 운용사들이 앞다퉈 새로운 커버드콜 ETF 출시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다. 노후에 대비한 투자는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투자엔 원금 손실의 위험이 따르는 법이고, 자산운용사는 고객 수익률과 상관없이 상품을 많이 팔아야 돈을 버는 구조다. 은퇴를 준비하는 개인 투자자라면 이 기본 규칙을 명심해야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한애란 경제부 기자·부장급 haru@donga.com}

    •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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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짜 부자는 누구인가? 브라질 상위 0.1%에 대한 인류학 보고서[딥다이브]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는 동경의 대상이죠. 특히 타고난 부자, 예컨대 재벌 2세나 3세의 삶은 강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들이 입는 것, 먹는 것, 노는 것의 사소한 부분까지 모두 궁금증을 유발하죠.좀처럼 닿기 어려운 최상위 부자들의 삶을 제 3자 시선으로 관찰해 기록한 흥미로운 책이 있습니다. 아쉽게도 한국은 아니고요. 브라질 인류학자 미셸 알코포라도가 브라질의 상위 0.1% 부자 80여 명(상위 0.01% 부자 60명 포함)을 인터뷰해 쓴 책 ‘부자들의 것(Coisa de Rico)’인데요. 2025년 8월 출간해 지난해에만 10만권 넘게 팔리며 큰 화제를 끌었죠. 흥미로운 가십과 통찰력 있는 인류학 논문이 뒤섞인 듯한 이 책의 핵심 내용을 간추려 소개합니다. 아마 한국 상황과도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책의 본문을 그대로 인용한 경우는 굵은 글씨로 표기했습니다.)*이 기사는 4월 29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부는 은행 잔고가 아니다진짜 부자란 누구일까요. 나인원한남에 살면 부자일까요? 순자산 100억이 넘으면 부자일까요?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여행 다니면 부자일까요?브라질 인류학자 알코포라도는 2010년부터 부자의 삶을 관찰, 연구해 박사학위 논문을 썼는데요. 그의 결론은 이겁니다. “브라질에서 부유함은 ‘조건’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내부인(=부자들) 관점에서 보면, 누구도 진정한 부자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부자인 것입니다. 재산만으로는 상류사회 진입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즉, 아무리 돈이 많아도, 다른 부자들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이 세계에선 소용없습니다. 그래봤자 외부자인 ‘졸부’에 불과하다고 모두들-남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도- 여기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는 ‘경계 투쟁’이 벌어집니다. 전통 부자들은 암묵적으로 같은 계층만 공유하는 표식을 만들어 벽을 쌓고요. 신흥 부자들은 그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여서, 어떻게든 그 경계 안으로 침투하려고 애쓰죠. 이 점에서 소유물(=남에게 보여지는 모든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자들이 유명 작가의 미술품을 수집하고, 값비싼 와인을 마시고, 해외 여행을 다니고, 명품을 걸치는 건 단순한 ‘돈 자랑’이나 ‘세련된 취향’이 아닙니다. “부자의 소유물이 갖는 힘은 가격보다는 타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방식에서 비롯됩니다.”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록의 거대한 그림을 집에 걸어둔 사업가는 미술 애호가일까요? 작가의 부자 친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이 그림에 수백만 달러를 쓴다면 얼마나 돈이 많을지 상상해 보세요. 틀림없이 성공한 부자이니, 나도 그들과 함께 투자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들은 예술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요.” 루부탱 하이힐에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는 바로 브랜드의 상징인 빨간색 밑창이죠. 하지만 구두를 일단 신고 밑창에 땅에 닿는 순간 그 힘이 바래버리고 만다는 게 큰 문제인데요. 그래서 한 파티장에선 구두 수선 디자이너가 소개한 ‘마법의 물약’이 여성들의 대환영을 받았습니다. 바로 빨간색 루부탱 밑창을 완벽하게 되살릴 중국산 빨간 매니큐어였죠.전통의 부자일수록 중요한 건 외부가 아닌 내부인의 인정입니다. 저자는 부유한 가문 출신 올리비아를 만났을 때 ‘참 수수하게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다른 부자가 올리비아에게 “그 셔츠 안느 거니?”라고 묻는 걸 보고 뒤늦게 깨달았죠. 그건 ‘세계 최고의 화이트 셔츠’로 알려진 프랑스 안느퐁텐 제품으로, 그 중에서도 올리비아가 입은 수놓은 맞춤형 셔츠는 최소 6000유로(약 1000만원)짜리라는 걸요.문제는 이제 소셜미디어에 관련 정보가 넘쳐나면서 일부 명품은 상상력을 잃어가고 있단 점입니다. 한 여성 사업가는 길에서 마주친 강도가 자신에게 이렇게 외친 것에 좌절했어요. “롤랙스 시계를 내놔!” 과거엔 부자들만 알아챘던 롤랙스의 특징을 이젠 누구나 알게 되면서 롤랙스가 부자들에게 위험한 물건이 되어버린 거죠. 시계를 뺏긴 뒤 그는 이렇게 다짐합니다. “난 이제 까르띠에를 살 거야. 그 불쌍한 사람들은 까르띠에가 뭔지도 몰라.” 전통 부자의 개미 탐지기부자는 ‘구별’을 통해 완성되기에, 부자들은 외부인에게 허투루 틈을 내주지 않습니다. 최대한 다른 집단과 멀리 떨어지려하죠. 90세가 넘은 부유한 할머니는 이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알잖아? 발을 헛디디거나, 넘어지거나 하면 개미떼가 몰려드는 거야. 개미떼가 들끓는 집은 질투 때문에 무너져 내릴 인생이지. 없애버려야 해. 개미떼가 완전히 지배하기 전에 말이야.”연구 초반 저자 알코포라도가 번번히 인터뷰에 실패한 이유도 부자들의 ‘개미 탐지기’가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은 낯선 이가 접근하면 까다로운 테스트를 거쳐 판별하는데요. 그들이 중요하게 보는 기준 중 하나는 이겁니다. 얼마나 바쁜 사람인가?브라질 부자들은 바쁩니다. 사전 약속 없이 ‘지금 만날까?’라고 번개 쳤을 때 응하는 부자는 없습니다. 실제로 사업 때문에 일정 빡빡하든, 아니면 직함만 ‘예술가’인 사실상 백수이든 상관없이요. 그래서 바쁨을 과시하고 불필요한 만남을 차단하기 위해 부자들에게 꼭 필요한 게 비서이죠. ‘비서의 수’는 곧 부유함의 척도입니다.작가는 초기에 한 기업 비서로부터 ‘사장님과의 오찬 일정 조율을 위해 비서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요. “비서가 없다”고 그가 솔직히 답하자 연락이 끊겨버렸습니다. 질문 하나로 판별이 끝난 거죠.그래서 그는 비서를 만들었습니다. 진짜 비서는 아니고요. ‘레나타’라는 이름의 가짜 이메일 계정을 만들어서, 비서인 척하며 연락을 주고 받았죠.만약 부자들을 처음 만난 자리라면 취향에 대한 테스트를 각오해야 합니다. 미술, 시계, 여행지, 와인 같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은근히 지식 수준을 떠보는 거죠. 또 인맥도 중요합니다. 유명인을 이름 대신 별명으로 언급하면서, 그걸 이해하고 있는지 보는 거죠. 당연히 테스트 통과는 쉽지 않습니다.신흥 부자들이 자신과 자녀의 영어 학습에 목을 매는 것도 그게 중요한 기준이기 때문이죠. “외국어 구사능력은 신흥부자가 되는 첫 번째 중요한 이정표이자 전환점입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건 극소수만 가능한 일이고, 새롭게 부유해진 이들은 여기 속하길 열망하며 영어 실력 향상에 매진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명품은 상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려면 시간이 걸리죠.”부자는 언제나 타인초반에 고전했던 알코포라도는 ‘럭셔리 인류학자’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획득한 뒤에야 부자 사회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런던에서 명품 브랜드 경영을 공부하면서 SNS로 이름을 알린 뒤, 브라질 언론들과 ‘리우데자네이루 시민의 명품 소비 행태’를 주제로 한 인터뷰가 히트를 친 덕분이었죠.갑자기 부자들이 그를 초청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여전히 내부자는 아니었지만, ‘럭셔리 인류학자’로서의 그의 전문성이 관심을 끌었습니다. 부자들은 이걸 전문가에게 확인받고 싶어했거든요. 이건(또는 이 사람은) 럭셔리한가요, 아닌가요? “나는 그들의 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 지식이 확실성을 보증하는 요소라고 믿었기 때문에 나를 영입하고 싶어했죠. 럭셔리 인류학자인 나는 효과를 예측할 수 있는 판단자였어요.”그리고 본격적으로 진짜 부자들을 인터뷰하면서 그가 가장 질리도록 들은 말은 이거였어요. “나는 부자가 아니야.”“이들은 스스로 가난하다고 여기진 않지만, 부유층으로 분류되는 걸 배제함으로써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정의합니다. 수년간의 연구 과정에서 인터뷰 대상자들은 자신들이 부자가 아니라는 것을 저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지칠 줄 몰랐죠. 그들은 ‘진정한 부자는 언제나 남들’이란 확신에 차 있었어요.” 상위 0.1%의 부자들조차 항상 더 위를 바라봅니다. 방탄 차, 파리의 저택, 사설 경호원을 둔 이웃을 보며 “나 말고 저 사람이 부자”라고 말하는 거죠. 그러면서 ‘난 그저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상류 중산층’이라고 여기는데요.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특권을 누리는 게 부당하단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아무 노력 없이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은 자신의 특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사회 불평등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도덕적 부담이나 죄책감에서 벗어납니다. 연구를 진행하면서 들은 수많은 말처럼 이렇게 말하죠. ‘나는 별로 가진 게 없어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게 잘못은 아니잖아요. 우리가 어디서 태어날지는 선택할 수 없으니까요.’”그러니 당연히 자신이 사회 불평등 문제의 일부라는 생각도 없죠. 빈부 격차 해소는 국가의 책임이라고 여기고요. 자선이나 기부활동에도 인색합니다. 영국 자선지원재단(Charities Aid Foundation)이 발표한 ‘세계 기부 종합 지수’에서 브라질은 38점으로 하위권에 머물렀는데요. 참고로 한국은? 브라질과 동점(38점)입니다.“인터뷰 대상자들이 자신들의 소박한 삶을 강조하는 모습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트란코소의 한적한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저택은 그들에게 있어 소박한 곳이었습니다. 최고급 이집트산 면으로 만든 침대 시트, 크리스털 잔, 디자이너 가구, 유명 화가의 그림, 대리석 욕실까지. 부자들에게 편안하다는 것은 그 물건을 살 돈이 있다는 뜻이니까요.”이 책의 마지막 사례는 ‘내가 원하는 건 단지 소박하고 편안한 삶을 유지하는 것뿐’이라며 이혼 과정에서 남편에게 연간 207만 헤알(약 6억원)의 생활비 지급을 요구한 상속녀 이야기인데요. 특히 이혼 뒤 자신의 가슴 보형물 교체 수술 비용까지 전 남편이 낼 것을 요구해, 양측이 법정에서 맞붙었죠. 이 사건과 관련해 저자는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가슴 보형물은 ‘사치품(럭셔리)’일까요, 아닐까요?” By.딥다이브*이 기사는 4월 29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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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개월 침묵의 딥시크…엔비디아는 떨고 있다?(feat. 화웨이)[딥다이브]

    요즘 인공지능(AI) 업계는 속도전이 장난 아니죠. 차세대 AI 모델 출시까지 걸리는 기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데요. 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유독 느리게 움직이는 기업이 있습니다.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DeepSeek)이죠.15개월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딥시크의 차세대 AI 모델 출시가 계속 미뤄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설립 뒤 처음으로 딥시크가 외부 투자를 유치한다는 소식도 나오죠. 딥시크엔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왜 딥시크 움직임을 예의주시할까요. 오늘은 조용해서 더 궁금한 딥시크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24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돈 많은데 투자 유치?혹시 기억하시나요?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가 한때 전 세계를 들었다 놨었죠. 2025년 1월 출시한 추론모델 ‘R1’ 때문이었는데요. 성능은 업계 최고인데 훈련비용은 100분의 1로 줄인 미친 가성비에 업계가 깜짝 놀랐고요. 엔비디아 주가까지 요동치게 만들었어요.그리고 15개월이 지난 지금, 다들 이걸 궁금해합니다. 딥시크 차세대 모델, 왜 안 나오죠?딥시크의 차세대 모델 V4가 곧 나올 거란 얘기는 작년부터 있었고요. 애초 2월 설 연휴 무렵이 유력하다는 설도 돌았는데요. 이후 3월로 미뤄지더니, 이젠 4월 말 출시설이 보도됐어요.‘이거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라는 분위기가 파다한 가운데, 얼마 전 새로운 소식이 나왔습니다. 딥시크가 처음으로 외부 투자를 유치한다는 거예요.딥시크는 2023년 설립 뒤 한 번도 외부에서 투자받은 적 없습니다. 투자 제안이 와도 모두 거절했는데요. 창업자 량원펑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 적 있어요. “벤처캐피털은 수익을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요.” 수익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AI 기술 개발에만 매진하는 연구소처럼 딥시크를 운영하겠단 거죠.그럴 수 있는 게 모기업이 워낙 돈이 많아요. 량원펑의 헤지펀드 ‘하이플라이어’가 자금을 지원하는데요. 운용자산 약 800억 위안(17조원)의 하이플라이어는 지난해 벌어들인 수수료 수익만 7억 달러(약 1조원)에 달할 걸로 추정됩니다.요즘 중국 증시에선 하이플라이어가 너무 잘 나가서 개인투자자들 사이에서 량원펑에 대한 원성(=퀀트 헤지펀드가 이익을 독차지한다)이 자자할 정도이거든요. 그러니 돈이 부족해서 딥시크가 투자를 받는 건 아닐 겁니다. 그럼, 목적이 뭘까요?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보도에 따르면 직원 이탈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네요. 미국 빅테크 못지않게 중국 AI 업계도 인재 쟁탈전이 매우 치열하죠. 특히 딥시크 연구원은 업계에서 가장 인기가 높고요. 지난 몇 달 동안 실제로 딥시크 핵심 연구원들이 속속 경쟁사로 떠났다고 해요. 특히 딥시크 R1 모델 개발을 이끌었던 수석 연구원 궈다야(郭大雅)가 현금과 주식 인센티브를 포함해 약 1억 위안(216억원)을 제시받고 바이트댄스로 이직해서 화제가 됐죠.물론 딥시크도 직원들에게 스톡옵션을 나눠줬어요. 문제는 그 스톡옵션이 얼마짜리인지 지금은 모른다는 거죠. 외부 자금 조달로 시장이 인정하는 기업가치를 확인해야, 스톡옵션의 금전적 가치를 계산할 수 있으니까요. 바로 이번에 그걸 하려는 겁니다. 지분의 금전적 가치를 확인시켜 줘서 직원들을 다독이려는 거죠. 딥시크가 이번 투자라운드에서 얼마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을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 디 인포메이션은 ‘200억 달러(약 30조원) 이상’, 월스트리트저널은 ‘100억~300억 달러(15조~45조원), 홍콩 SCMP는 ‘1000억 달러(약 150조원) 이상’이란 예상치를 각각 보도했는데요. 이미 올해 초 홍콩증시에 상장한 중국 AI 기업 즈푸AI(83조원)나 미니맥스(53조원) 시가총액과 비교한다면, 1000억 달러도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닐지도 모르죠.엔비디아에서 화웨이로 이주 중? 그럼 딥시크의 차세대 모델 출시가 지연되는 건 인력 이탈 때문일까요. 업계에선 그보다 이게 더 큰 이유가 아닐까 추측합니다. 화웨이 칩으로의 이전.딥시크는 기존 모델인 V3 학습에 엔비디아 H800 GPU를 사용했죠. 다른 중국의 AI 모델 개발업체들(알리바바, 바이트댄스, 텐센트, 샤오미, 즈푸, 미니맥스, 문샷)도 여전히 엔비디아 칩을 사용합니다. 최고 성능의 기본 모델을 처음부터 학습시키는 건 엔지니어링적으로 매우 복잡한 일이거든요. 수만 개의 AI 칩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몇 달 동안 학습을 해야 하니까요. 오류를 최소화하고 시간과 비용 낭비를 막으려면 가장 믿을 만하고 검증된 AI칩을 써야 하고요. 그게 바로 엔비디아 GPU인 겁니다.하지만 중국 기업은 이제 엔비디아의 고성능 AI 칩을 구하기 어렵죠. 한동안은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 수출을 막았고, 지금은 트럼프 정부가 H200 GPU의 수출을 허용했는데도 중국 정부가 막고 있어요. 엔비디아 말고 중국산 AI 칩을 쓰게 하기 위해서죠. 그리고 이달 초 미국 매체 디 인포메이션은 이런 단독 보도를 했어요. “딥시크의 차세대 AI모델이 화웨이 칩에서 구동된다.” 딥시크가 개발 중인 V4 모델이 화웨이의 최신 AI 칩인 ‘어센드 950PR’에 최적화된 형태로 출시될 거란 보도였죠. 이게 정확히 무슨 뜻이냐고요? 딥시크가 V4 모델의 초기 학습 단계부터 화웨이 칩을 썼다는 건지, 아니면 학습은 엔비디아 칩으로 했지만 실행은 화웨이 칩에 최적화했단 뜻인지는 아직 알 수 없어요. 아무래도 후자(학습은 엔비디아, 실행은 화웨이)일 가능성이 훨씬 커보이긴 하죠. 아직 화웨이 칩이 대형 AI 모델 학습에 쓸 정도로 그렇게까지 성능이 뛰어나진 않으니까요.하지만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긴 합니다. 엔비디아 칩으로 만든 모델을 화웨이 칩에서 성능 저하 없이 돌리기 위해서, 연산자를 통째로 재작성했다는 뜻이니까요. 즉, 엔비디아 칩의 언어인 ‘CUDA’를 버리고 개발자들이 화웨이의 ‘CANN’으로 코드를 처음부터 일일이 다시 쓴 거죠. 조금만 실수해도 성능이 떨어질 수 있어서, 정말 어려운 작업입니다. 왜 출시가 이렇게 지연될 수밖에 없는지 이해가 되죠.이런 시도가 얼마나 성공적일지는 V4 모델이 나온 뒤에나 확인할 수 있을 텐데요. 만약 딥시크가 이번에 성공한다면, 다른 중국 경쟁사도 그 뒤를 따르게 될 겁니다. 엔비디아 칩 구매가 사실상 막힌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하니까요. 어쩌면 공고했던 엔비디아 생태계에 딥시크가 작은 균열을 일으킬지도 모르겠어요.젠슨 황은 왜 “끔찍하다”고 하나딥시크의 이런 ‘탈 엔비디아’ 시도를 가장 걱정하는 건 당연히 엔비디아입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이달 중순 한 팟캐스트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어요.“딥시크가 화웨이에 먼저 적용되는 날은 우리나라(미국)에 끔찍한(horrible) 결과가 될 겁니다. (딥시크 모델이) 화웨이에 최적화돼 있고, 화웨이 아키텍처에 맞춰져 있다면 우린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에게 나쁜 소식은 전 세계에서 개발된 AI 모델이 미국산 하드웨어(엔비디아 칩)가 아닌 곳에서 가장 잘 작동하는 겁니다. 그거야말로 배드 뉴스죠.”이런 주장에 대해 팟캐스트 진행자인 드와르케시 파텔은 적극적으로 반박했어요. 화웨이가 엔비디아보다 성능에서 한참 뒤처지는데, 왜 화웨이 칩이 엔비디아를 대체할 거란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냐고요. 하지만 젠슨 황 CEO가 물러서지 않으면서 둘 사이엔 한바탕 토론이 벌어졌죠. 젠슨 황은 “이 중요한 시기에 전 세계 모든 AI 모델이 미국의 기술 스택을 기반으로 구축되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어요. 중국의 AI 생태계 자립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중국 기업이 엔비디아 칩에 계속 의존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였죠.둘 중 어느 주장에 동의하시나요. 젠슨 황 CEO 말대로, 이대로 가면 중국이 AI 칩 성능의 한계를 딛고 ‘탈 엔비디아 생태계 구축’에 성공해서 미국의 기술 패권을 위협하게 될까요? 아니면 그건 중국 시장 점유율이 아쉬운 기업인의 과장 어법일 뿐일까요?현재까지 미국 의회의 입장은 후자입니다.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는 올해 초 ‘AI 감시법’을 통과시켰어요. 엔비디아가 고성능 블랙웰 칩을 중국에 판매하는 걸 전면 금지하고, H200 칩 수출 역시 의회가 막을 수 있게 하는 법안이죠. AI 칩 수출을 거의 무기 수준으로 감시하려는 겁니다. “중국 AI 연구소가 더 나은 모델을 훈련시키는 데 필요한 컴퓨팅 자원을 판매하는 건 어리석은 짓”(보수 싱크탱크 미국기업연구소)이란 판단인데요.젠슨 황 말대로 딥시크는 다시 한번 미국을 놀라게 할까요. 아니면 극복할 수 없는 두 나라의 AI 칩 성능 격차를 확인시켜 줄까요. 일단 앞으로 나올 딥시크 V4를 지켜보시죠. By.딥다이브*이 기사는 4월 24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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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가 걱정, 왜 안 해요? 석유 탱크가 비어가는데 [딥다이브]

    이란전쟁발 에너지 쇼크, 얼마나 걱정하시나요? 주식시장만 보면 이제 전쟁은 거의 다 끝났고 기름값 걱정은 잊혀가는 듯한데요.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죠. 석유 재고량이 빠르게 줄면서 에너지 시장의 충격파가 본격적으로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전 세계적 ‘항공유 대란’이 이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장인데요. 석유 보릿고개를 걱정하는 이유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22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호르무즈 열려도 석유가 부족하다배럴당 99달러. 21일 브렌트유 선물 가격은 3월 말과 비교하면 15% 넘게 떨어졌습니다. 아직 불확실성은 크지만, 적어도 이란전쟁이 최악으로 치닫지 않고 종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보는 거죠.그런데 이건 또 무슨 얘기일까요. “이번 주에 전쟁이 끝나더라도 전 세계 원유와 석유제품 재고는 6월 말까지 8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질 전망이다.” 씨티은행이 20일 내놓은 분석입니다. 이미 전쟁 전보다 전 세계 석유류 재고량이 5억 배럴 줄었는데, 6월 말까지 추가로 4억 배럴이나 더 감소할 거란 전망이죠. 전쟁은 끝나도 에너지 쇼크는 최소 두 달 이상 더 이어질 거란 뜻인데요.도대체 왜? 이유는 간단합니다. 호르무즈 해협이 당장 열린다 해도, 배가 있어야 석유를 실어 나를 수 있으니까요.만약 모두의 희망대로 미국-이란의 2차 종전 협상이 조만간 성공적으로 이뤄져 호르무즈 해협이 완전히 열린다고 가정해 볼게요. 그럼, 해상운송 세계에선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일단 지금 중동 항구에 정박 중인 유조선들이 서둘러 출항하겠죠. 여기 실린 원유(약 1억6000만 배럴)가 목적지인 아시아 국가에 도착해 하역을 마치기까지 25일쯤 걸릴 겁니다. 그럼 그때부턴 아시아 국가의 지상 재고량이 쭉쭉 늘어나기만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죠. 빈 유조선이 다시 중동에 가는 데 16일, 기름 싣고 오는 데 25일이 또 걸리니까요. 그 사이엔 각국이 보유한 재고를 소진하며 계속 버텨야 합니다.급하니까 다른 지역에 있는 빈 유조선을 중동에 투입하자고요? 현재 미국산 원유를 아시아로 실어 나르려고 미국 항구로 향하고 있는 초대형 유조선이 70척쯤 되는데요. 운임을 엄청 높게 부른다면 이 배들이 유턴해서 호르무즈 해협으로 향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게 아니라 이 배들이 미국산 원유를 싣고 아시아에 하역해 준 다음,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서 중동 항구에 도착하려면? 최소 80일쯤 걸릴 겁니다. 빨라야 7월에나 가능하겠네요.왜 호르무즈 해협이 열려도 최소 두 달 이상 공급부족이 이어지는지 아시겠죠? 게다가 한번 생산을 중단한 유전은 스위치 켜듯이 곧바로 재가동이 안 됩니다. 유정에 주입한 물과 가스의 압력 균형을 맞추는 데 보통 몇주가 걸리고요. 특히 쿠웨이트·이라크의 중질 유전은 4~5개월까지 걸린다고 해요. 또 미사일 공격 받은 시설 수리도 해야 하는데요. 이란이나 카타르의 일부 석유·LNG 생산시설은 피해가 심해서, 복구에 몇 년이 걸릴 겁니다.돌아보면 지난 3월 이란전쟁 이후 국제유가가 배럴당 120달러까지 급등했지만, 사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왜 이것밖에 안 뛰지?’라는 반응도 있었어요. 세계 석유 공급량 감소가 역사상 최대(하루 1100만~1300만 배럴 추정)였던 것 치고는 그동안 유가가 꽤 선방했는데요. 리스타드에너지는 이게 “충격을 흡수할 완충장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전쟁 전 쌓아뒀던 과잉 재고, 전쟁 직전 유조선에 실린 채 운송 중이었던 원유, 그리고 대대적인 비축유 방출. 이 세 가지 덕분에 한동안은 버틴 거죠.하지만 그 단계는 이미 지나갔고요. 이제 전 세계가 육상 석유 재고량을 빠르게 소진하고 있습니다. 이란전쟁으로 인한 타격이 가장 적은 나라로 꼽히는 미국조차 지난주 예측(210만 배럴 증가를 예상)을 깨고 재고량이 감소세(실제론 91만 배럴 감소)로 돌아섰고요. 이번 주부터는 훨씬 빠른 속도로 줄어들겠죠. 미국 에너지정보청이 매주 수요일 발표하는 미국 석유 재고량 통계는 석유 선물 시장 투자자들이 예의주시하는 중요한 정보인데요. 재고가 급감한 게 수치로 확인된다면 시장이 화들짝 놀랄지 모릅니다.참고로 한국의 현재 석유 재고량은 공개되진 않았는데요. 민간 정유사의 재고 고갈 위기에 대응해 정부가 시행한 정책이 ‘비축유 스와프(교환)’입니다. 기업이 새로 물량을 구하긴 했지만 배가 들여오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 석유가 선적된 것만 증명하면 정부가 비축유를 빌려주는 거죠. 현재까지 국내 4대 정유사의 비축유 스와프 신청 물량은 3200만 배럴에 달합니다. 그만큼 재고 압박이 심하단 얘기죠.‘항공유 대란’이란 폭풍의 눈 결국 호르무즈 해협이 당장 열리더라도, 석유 시장의 ‘보릿고개’는 피할 수 없게 됐습니다. 한동안은 궁핍의 고통을 견뎌야 한단 뜻이죠. 물론 부자나라는 타격을 덜 입긴 하겠지만,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습니다. 그걸 보여주는 현장이 바로 ‘항공유 대란’이죠.항공권에 붙는 유류할증료가 몇 배씩 폭등해서 난리라고요? 어쩌면 그 가격을 주고라도 휴가철에 비행기를 탈 수 있으면 다행일지 모릅니다. 최근 각국 항공사들이 폭등한 항공유 가격 때문에 항공편을 속속 취소한다는 소식이 마구 쏟아져나오고 있거든요.스웨덴의 스칸디나비아항공(SAS)은 4월에만 1000편의 항공편을 취소했고요. 아일랜드 에어링구스는 올여름 500편을 감축합니다. 에어캐나다는 토론토-뉴욕을 포함한 6개 노선 운항을 중단했고요. 미국 유나이티드 항공도 전체 항공편 5%를 취소한다고 밝혔죠. 태국 타이항공은 5월부터 대폭 감축해서 서울-인천 노선도 하루 3편에서 1편으로 줄이고요. 에어 뉴질랜드는 두 달간 1100편 항공편을 감축했어요. 독일 루프트한자는 21일 “10월까지 총 2만 편의 단거리 항공편을 운항 스케줄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죠. 유류할증료를 올리면 되지, 아예 취소하면 어쩌냐고요? 국제 항공유 가격이 두배 넘게 폭등하면서, 유류 할증료를 최대로 올린다 해도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된 거죠. 일부 노선은 비행기를 띄울수록 손해가 날 판이니까요. 유나이티드항공의 스콧 커비 CEO는 “연료비조차 충당하지 못할 정도로 손해 보는 항공편을 운항하는 건 아무 의미 없다”고 말합니다.또 비용 문제와 별개로 정말 ‘연료가 없어서 날 수 없는’ 상황도 코앞으로 닥쳤습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최근 보고서에서 유럽의 항공유 재고량이 6주 치밖에 남지 않았다고 경고했는데요. S&P 글로벌에너지의 펠리페 페레스 이사는 “그것(6주)도 후한 추정치”라며 항공유가 이번 위기의 “폭풍의 눈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래 가능한 항공유가 46% 줄었습니다. 설령 지금 해협이 개방된다고 해도 항공사와 공항이 정상화하는 데는 몇 달이 걸릴 겁니다.”항공유 대란은 단순히 여름철 해외여행을 못 가서 아쉬운 차원의 문제가 아니죠. 항공사는 수익 급감을 피하기 어렵고요. 특히 재정구조가 취약한 일부 저가 항공사는 생존이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또 항공 화물료가 아주 무섭게 뛰고 있죠. 특히 인도-유럽 노선은 운송료가 두배로 올랐다는데요. 이게 전부 제품 원가에 반영되면서 물가 상승을 부추길 게 뻔합니다.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상당해요. 특히 유럽은 항공 여행이 연간 8510억 유로(1482조원)의 GDP와 1400만명의 일자리를 지탱할 정도로 중요한 산업인데요. 최대 성수기 여름 휴가철을 이대로 놓친다면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유럽연합(EU)이 27개 회원국과 ‘항공유 공유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며 대응에 나선 이유죠.고유가가 쏘아 올린 금리인상이렇게 석유 시장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가면서 시장이 예의주시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각국 중앙은행의 움직임인데요.최근 싱가포르 중앙은행인 싱가포르통화청(MAS)이 4년 만에 처음으로 통화정책을 긴축으로 전환했어요. “중동의 공급이 재개되더라도 세계 에너지 가격은 당분간 높은 수준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였죠. 고유가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질 것에 대비해 선제적으로 나선 겁니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아시아 국가가 가장 취약한 상황이니까요.다른 에너지 수입국 역시 금리 인상을 피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오죠. 최근 IMF는 유럽중앙은행(ECB)이 올해 0.5%포인트 기준금리 인상에 나설 거라 전망했고요. 일본은행 역시 당장 이번 달엔 동결하더라도 6월엔 기준금리를 인상할 거란 전망이 대세를 이룹니다. 그럼, 한국은행은? 이제 막 새로운 총재가 취임한 직후라서 아직 힌트가 많진 않은데요. 시장에선 ‘연내 동결’과 ‘하반기 한 차례 인상’ 전망이 팽팽히 맞서고 있죠.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경우, 제롬 파월 의장이 지난달 “이란전쟁으로 인한 유가 상승 충격은 일시적”이라고 언급한 적 있죠. 당분간은 이런 ‘관망 모드’가 이어질 걸로 예상됩니다. 주요 IB들은 연준이 다시 금리 인하에 나설 시점을 점점 뒤로 미루고 있어요. IB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9월에 금리 인하를 재개해서 연말까지 두 차례 인하할 거란 전망인데요. 금리인하 기대가 빠르게 후퇴하고 있단 뜻입니다. 탄탄한 미국 경제도 유가 불안에선 자유롭지 않은 거죠.이란이 2차 협상에 응하지 않자, 21일(현지시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휴전 연장”을 발표했습니다. 이거 어째 쉽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분위기인데요. 이 에너지 보릿고개를 전 세계가 슬기롭게 버틸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By.딥다이브 *이 기사는 4월 22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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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우디 왕세자의 ‘1경3000조원’ 프로젝트 멈췄다…“감당 안 돼”[딥다이브]

    중동 부국 사우디아라비아가 감당하기에도 너무 원대한 꿈이었을까요. ‘비전 2030’의 핵심인 미래도시 ‘네옴(Neom)’ 프로젝트 공사가 상당 부분 중단됐습니다. 막대한 건설비를 쏟아부은 공사 현장이 거대한 공터로 남게 됐죠.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의 야심찬 꿈이 재정적 현실에 가로막혔는데요. 사우디는 이제 공상과학 영화 같은 미래 도시 대신 좀 더 현실적인 프로젝트에 집중하기로 전략을 바꿨습니다. 꿈에서 현실로 내려온 사우디 ‘비전 2030’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17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사막에 남겨진 거대한 공터2022년 11월 사우디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의 방한으로 경제계가 들썩거렸던 것 기억하시나요. 당시 국내 기업과 290억 달러 규모의 MOU가 체결됐고요. ‘제2 중동 붐’에 대한 기대가 한바탕 일었는데요.지난달 이런 소식이 나왔습니다. 현대건설·삼성물산 컨소시엄의 ‘더 라인’ 지하터널 공사 계약 해지. 170㎞의 선형 도시 ‘더 라인’을 관통하는 고속철도용 터널 공사가 발주처 요청으로 중단된 겁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고속철도를 위해 조성된 도랑엔 바람에 날린 모래가 쌓이고, 한때 활기 넘쳤던 노동자 캠프는 유령 도시처럼 변했다’는 전직 직원의 말을 전했죠.계약이 해지된 네옴 사업은 더 라인만이 아닙니다. 중동 최초의 야외 산악 스키 리조트 ‘트로예나’의 상징인 거대한 인공호수와 다목적댐 건설 계약도 지난달 말 해지됐죠. 이 공사는 이탈리아 건설사 위빌드가 진행해 왔는데요. 메인 댐 건설을 위해 지난해 말까지 투입된 롤러 다짐 콘크리트(CRC) 양만 무려 100만㎥에 달하는 엄청난 대공사였어요(공정률 30%). 이제 계약 해지로 인해 거대한 미완성 콘크리트 구조물만 덩그러니 남겨지게 됐죠. 역시 트로예나에서 스키 빌리지 철골 공사를 진행해 온 말레이시아 건설사 에버센다이도 얼마 전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고요.네옴 프로젝트의 첫 가시적 성과물이었던 ‘신달라’ 아일랜드도 언제 완공될지 기약이 없습니다. 신달라는 2024년 10월 화려한 개장 파티를 열고 부분 개장했지만, 보수 공사를 위해 시설이 폐쇄됐고요. 월스트리트저널은 ‘고급 레스토랑에선 바카라 크리스털 잔과 악어가죽 의자를 창고에 실었고, 수만 달러에 달하는 23㎏ 어치의 벨루가 캐비어를 버렸다’고 최근 분위기를 전합니다.그렇다고 해서 네옴 프로젝트가 폐기된 건 아닙니다. 야시르 알-루마얀 사우디 국부펀드(PIF) 총재는 15일 5개년 투자 계획(2026~2030년)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네옴 프로젝트를 “상업적 타당성”에 따라 재조정하고 있다고 설명했죠. 당장 수익 내기 어려운 더 라인이나 트로예나 대신 부유식 첨단 산업도시 ‘옥사곤’ 완공에 우선 집중한다는 겁니다. 항만과 그린수소 플랜트가 들어서는 옥사곤은 네옴 프로젝트에서도 가장 돈이 될 만한 사업이기 때문이죠. SF 영화 같은 화려함 대신 실용주의를 택한 겁니다.한계에 부닥친 오일머니 ‘포스트 석유 시대’를 대비한다며 빈 살만 왕세자가 2016년부터 야심 차게 추진해 온 ‘비전 2030’. 그중에서도 핵심인 네옴 프로젝트가 전면적으로 재조정된 이유는 한마디로 돈이 부족해서죠. 사우디는 석유 부국이긴 하지만 오일머니에도 한계가 있으니까요.사우디는 지난해 재정적자가 2766억 리얄(약 111조원)로 2020년 팬데믹 이후 최대였습니다. 지난해 국제유가가 배럴당 60~70달러에 머물면서 재정을 떠받친 석유판매 수입이 급감했기 때문인데요. IMF에 따르면 사우디는 유가가 배럴당 96~105달러여야만 재정 균형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 차액만큼이 고스란히 재정적자가 되는 거죠. 이를 메우기 위해 정부가 국채를 찍어내면서 국가 부채는 GDP 대비 32%로 높아졌어요. 다른 나라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지만 10년 전 12%와 비교하면 급증한 거죠. 사우디는 열심히 해외 투자 유치에 나섰지만, 기대만큼의 성과는 내지 못했습니다. 외국인 직접 투자(FDI) 유치의 목표치는 높았는데(2030년 연 1000억 달러), 현실은 한참 못 미친 거죠(2025년 355억 달러). 그래서 사우디 국부펀드는 국영 석유공사 아람코 지분을 일부 더 팔았고요. 이제 국내 부유한 자산가와 펀드매니저, 민간 기업에 ‘애국 투자’를 독려 내지 압박하고 나섰는데요. 그런 와중에 이란전쟁까지 터졌으니, 골치가 아플 겁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석유 수출량이 평소의 절반으로 뚝 떨어지면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거든요.빠듯해진 자금 여건은 사우디를 현실주의로 돌아서게 만들었어요. 월스트리트저널이 입수한 내부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네옴은 최종 완공(2080년)까지 무려 8.8조 달러(1경3000조원)가 들어갈 거라고 하죠. 말도 안 되는 규모의 사업인 건데요. 사우디 국부펀드가 1조 달러 넘는 운용자산을 보유했다지만, 현실적으로 감당이 불가능합니다.사우디는 네옴 프로젝트를 대폭 축소·재조정하는 동시에, 좀 더 현실적인 프로젝트에 힘을 쏟기로 했어요. 2030년 세계 엑스포와 2034년 월드컵 개최처럼 당장 코앞에 닥친 이벤트들이 먼저인 거죠. ‘미래의 꿈’ 같은 네옴과 달리 엑스포나 월드컵은 국가 신인도가 달린 현실의 약속이니까요. 이미 네옴 공사 현장에 있던 중장비들은 리야드의 공항과 경기장 건설 현장으로 대거 이동했습니다.일상이 된 ‘비전 2030’아마 여기까지 읽고 ‘현실성 떨어지는 망상 같은 계획이 애초에 문제’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실제로 계획이 너무 거창한데, 누구도 감히 왕세자를 말리지 못했던 게 큰 문제였던 게 맞습니다. 특히 더 라인의 경우, 빈 살만 왕세자의 SF 영화 취향에 맞추다 보니 고층 건물 두 개가 일직선으로 길게 뻗어있는 희한한 구조로 설계됐다고 하죠.하지만 아주 최악은 아닙니다. 이제라도 틀린 걸 깨닫고 계획을 전면 수정했단 점에선 말이죠. 이에 대해 사우디 칼럼니스트 압둘라흐만 알 라시드는 이렇게 설명해요. “왕세자는 쫓기듯 서두르지 않고, 업적이나 언론의 시선에 크게 신경 쓰지도 않습니다. 틀에 갇혀있는 많은 지도자와는 다르죠. 2030년이 2040년이 된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요.”사실 10년 전 서른 살의 빈 살만 왕세자가 경제개혁 청사진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다들 그게 되겠냐며 코웃음 쳤어요. 당시 왕세자를 인터뷰했던 이코노미스트지가 “급진적인 경제 개혁은 위험한 도박”이라고 지적했을 정도였죠. 사우디 정부 관료가 그걸 해낼 역량이 없고, 국민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라 봤기 때문인데요.돌아보면 그때만 해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것 중 일부는 이미 실현됐습니다. 여성 운전이 허용되면서(2018년) 여성 노동 참여율이 대폭 상승한 게(2017년 18%→2025년 34%) 가장 눈에 띄는 변화이죠. 이미 2030년 목표치(30%)를 조기 달성했을 정도입니다. 논란이 많았지만, 이전에 없던 부가가치세를 도입하는 데도 성공했고요(2018년). 심지어 초기 5%였던 부가가치세율은 이제 15%로 높아졌어요.무엇보다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경제를 다변화하는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비석유 부문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17년 35%에서 2024년 55%로 껑충 뛰었죠. 특히 관광과 엔터테인먼트 분야가 이제 사우디 경제의 성장을 이끄는 원동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2025년 1월 6개 노선 전 구간이 개통된 리야드 메트로는 사우디의 변화상을 실감 수 있는 현장인데요. 개통 직후부터 폭발적으로 이용객이 늘어난 이 무인 도시철도는 출퇴근 시간이면 늘 만원을 이룹니다. ‘비전 2030’이 실제로 시민의 일상을 바꾸고 있는 거죠.관광지로 개발 중인 리야드 외곽 디리야 지구의 모습도 놀랍습니다. 이곳의 ‘부자이리 테라스’엔 세련된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한데요. 이곳에선 탁 트인 야외 테라스에 젊은 남녀가 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10년 전만 해도 이건 종교경찰에 잡혀갈 일이었는데 말이죠.리야드 근교에 조성 중인 엔터테인먼트 도시 ‘키디야’엔 세계에서 가장 크고 빠른 롤러코스터가 있는 식스 플래그 테마파크가 지난해 말 문을 열었고요. 이달 말엔 중동 최대이자 사우디 최초의 야외 워터파크 ‘아쿠아라비아’도 개장합니다.홍해의 섬과 내륙 사막 지역을 묶어 개발한 리조트 단지 ‘더 레드 씨’는 2024년부터 이미 리조트가 운영되고 있죠. 식스센스 서던 듄스, 세인트 레지스 레드 씨 리조트 같은 초호화 리조트는 전 세계 유명 인사들이 찾는 곳이 됐습니다.물론 네옴과 비교하면 저비용의 소박한 프로젝트라 하겠는데요. 적어도 ‘진짜 변화가 시작됐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핫스폿들입니다. 이제 비전 2030을 발표한 지도 만 10년. 화려한 조감도, 야심 찬 슬로건만이 아닌 눈에 보이는 성과가 필요한 시점이니까요.이란전쟁으로 불확실성이 극에 달했던 3월, 사우디의 건설 계약 규모는 전달보다 450% 급증했습니다. 신기루 같은 네옴은 멈췄지만, 수도 리야드 중심으로 현실적인 건설사업은 늘어나고 있어서죠. 이 새로운 흐름이 부디 한국 기업에 또 다른 기회를 열어주길 기대해 봅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4월 17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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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냉장고가 TV를 삼켰다…헝가리 ‘포퓰리즘 원조’의 몰락[딥다이브]

    ‘민족주의 포퓰리즘’의 원조가 결국 무너졌습니다. 12일 헝가리 총선에서 야당인 티서당이 압승하면서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16년 만에 물러나게 됐죠. 유럽 극우 정당과 미국 마가(MAGA) 세력에 영감을 줬던 선구자의 극적인 몰락입니다.입법·사법·언론은 물론 재계까지 장악하며 장기집권의 공고한 성을 쌓았던 오르반 정권. 하지만 반시장적 포퓰리즘 정책이 한계에 다다르며 민심은 돌아섰고요. 시대가 바뀌면서 더 이상 구식 프로파간다도 통하지 않게 됐는데요. 오르반의 참패가 남긴 교훈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15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무너진 오르반노믹스138석(티서당) 대 55석(피데스당). 4월 12일 치러진 헝가리 총선은 야당 티서(Tisza)당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16년 만의 정권 교체이자, 티서당이 단독 개헌이 가능한 의석수(3분의 2 이상)까지 차지한 거죠. 앞서 네 차례 선거에서 모두 압승했던 여당 피데스(Fidesz)당의 참패입니다.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르반 정부는 이번에도 총선을 앞두고 필살기를 발휘했습니다. 달콤한 선심성 정책을 마구 쏟아냈죠. 공공요금 인하, 연 3% 고정금리의 주택담보대출 출시, 공무원에 연 100만 포린트의 주택 보조금(480만원) 제공, 세 자녀를 둔 어머니에 대한 평생 개인소득세 면제, 휘발유·경유 가격 상한제까지. 서민을 위하는 정부라는 이미지로 어필하려 했는데요.하지만 이번엔 통하지 않았습니다. 국민들이 그간의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죠. 당장 달콤한 그 혜택들이 사실은 미래 성장을 갉아먹는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걸요.2020년대 초까지 헝가리는 유럽에서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는 모범사례로 통했습니다. EU에서 가장 낮은 법인세(9%)를 무기로 외국 제조업체의 생산기지(독일 자동차, 한국과 중국 배터리)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고요. 대대적인 공공 근로 프로그램을 통해 실업률을 3%대로 끌어내렸죠. 또 외국 자본이 보유한 통신·금융·교통·유통기업엔 ‘특별세’를 부과해 국가 재정을 강화했습니다. 이를 못 견딘 외국기업들이 떠나면서 전략산업이 속속 헝가리 기업으로 넘어갔고요. 무엇보다 파격적인 출산 장려 정책(세 자녀는 주택담보대출 원금 전액 탕감)으로 그 어렵다는 출산율 반등에까지 성공했어요. ‘외세(EU)를 배격하고 경제 주권을 되찾겠다’던 오르반 총리의 독창적 전략이 통하는 듯했죠.하지만 2022년을 기점으로 분위기는 반전됩니다. 그해 4월 총선을 앞두고 야당 지지율이 들썩거리자 오르반 정부는 대대적인 현금 살포 정책을 펼쳤어요. 자녀가 있는 부모들에게 2021년 낸 소득세를 전액 환급해줬고, 연금 수급자에겐 월 지급액의 100%를 추가로 얹어줬죠(이른바 ‘13개월차 연금’ 지급). 청년들엔 소득세를 면제해주고, 군인·경찰엔 특별 보너스를 제공했어요. 이렇게 수조 원을 뿌린 덕분에 오르반 정권은 총선에선 압승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 재정적자는 한층 불어나고 말았죠. 팬데믹이 끝나고 재정을 재정비해야 할 시기에 거꾸로 간 겁니다.이 총선 직후 EU 집행위원회는 헝가리에 대한 지원금 지급을 동결했습니다. “공공 조달 절차의 심각한 체계적 부정행위”가 이유였죠. EU 기금 중 상당 부분이 오르반 총리 가족과 측근이 운영하는 기업으로 줄줄 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골적인 정경유착은 오르반 정권의 장기집권을 지탱해주는 중요한 시스템이었으니까요. 선거 승리를 위해 돈은 잔뜩 풀어놨는데, EU에서 들어올 외화는 막혔으니. 외환시장은 뒤집어졌죠. 포린트화 통화가치는 채 1년도 안 돼 30% 넘게 급락합니다.설상가상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폭등했죠. 그 여파로 유럽 전역에 인플레이션이 닥쳐왔는데요. 통화가치가 폭락한 헝가리는 최악의 물가고에 처합니다. 2023년 초 헝가리의 연간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무려 25%. 계란·빵·버터·치즈 같은 식품 가격은 1년 만에 50~60%씩 뛰었어요. 임금보다 물가가 훨씬 더 빠르게 오르면서 중산층과 서민들은 실질임금이 깎이며 급속히 가난해집니다.헝가리의 미친 물가는 학교와 병원까지 덮쳤어요. 고물가와 낮은 처우에 항의해 교사들이 전국적인 시위를 벌이다 해고되는 사태가 벌어졌고요. 생활고에 처한 의사들이 다른 나라로 떠나면서 지방병원 응급실과 분만실이 속속 폐쇄됩니다. 민생의 기본 인프라까지 무너진 거죠.냉장고가 텅 비었다 2025년 헝가리 경제성장률은 0.4%. 인근의 폴란드(3.6%)는 물론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와 비교해도 한참 뒤집니다. 특히 가난한 이웃나라로 여겼던 루마니아마저 1인당 GDP에서 헝가리를 추월하면서 헝가리인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죠.다른 경제 성적표도 처참합니다. 2025년 재정적자는 5.7조 포린트(약 27조원)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요. 국가부채는 2년 연속 늘어서 GDP 대비 74.6%로 불어났죠. 한동안 자랑했던 ‘완전 고용’은 이제 옛말이 됐고, 2026년 2월 공식 실업률은 4.8%로 10년래 최고를 찍었습니다.지금의 경제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은 병원인데요. 예산 고갈로 병원엔 기본 의료 소모품마저 동나서 거즈, 소독약, 화장지까지 환자가 준비해야 할 지경이고요. 수술을 하려면 1~3년, 외래진료도 6개월이나 대기해야 할 정도로 의료 시스템이 붕괴됐습니다. 이렇게 쪼들리는데 출산율이 오를 리가 없겠죠. 2021년 1.61명까지 높아졌던 출산율은 이후 해마다 낮아져 2025년 1.31명으로 추정됩니다. 오르반 정권이 대대적인 출산장려정책을 내놓기 전인 2009년 수준으로 다시 돌아간 거죠. 정부가 GDP의 5.5%라는 막대한 예산을 가족정책에 투입한 것을 생각하면 허무한 결말입니다.그렇습니다. 결국 문제는 경제였던 거죠. 어느 정부든 경제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아무리 인기 영합적인 정책을 펼치고,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 한들 말이죠.‘TV와 냉장고의 싸움’. 과거 러시아에서 선거판을 설명하며 나온 표현이죠. 정치적 선전(TV)과 국민의 경제적 현실(냉장고) 중 어느 게 승리하느냐에 선거 결과가 좌우된다는 뜻인데요. 전 주헝가리 미국 대사인 데이비드 프레스먼은 이번 헝가리 총선 결과를 두고 뉴욕타임스에 이렇게 말합니다. “(오르반 정권이) TV와 냉장고 사이의 간극을 메울 수 없게 됐습니다. 시민이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면서 총리가 호화로운 시골 저택에서 희귀동물(얼룩말)을 키운다면 선전 활동이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죠.”TV를 무력화한 스마트폰헝가리는 언론 산업 대부분을 정부가 사실상 장악한 나라입니다. 오르반 총리는 취임 직후부터 친정부 언론사엔 정부 광고비를 몰아주고, 독립 언론엔 벌금을 물리는 식으로 입맛에 맞게 시장을 재편했죠. 이 과정에서 많은 언론사가 오르반 총리 측근 기업 소유로 넘어갔고요. 아예 친정부 성향 매체 500개를 묶어 관리하는 ‘중부유럽 언론 미디어 재단’이란 재단이 생겨났을 정도인데요. 인쇄 매체와 라디오 시장의 80% 이상, TV 시장의 57%가 정부의 관리 아래 있는 겁니다.그래서 헝가리 언론매체는 사실상 정부 기관지 노릇을 해요. 일간지들의 헤드라인 제목과 사진이 모두 똑같을 정도죠. 편파보도는 당연합니다. 2025년 국영방송 MTVA 뉴스 방송의 약 4분의 3을 집권여당이 차지했다고 하죠. 애초에 공정한 게임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헝가리 친정부 매체들은 선거전 초반부터 야당 티서당 대표인 페테르 머저르를 ‘가정폭력범’, ‘배신자’, ‘자기애적 인격장애(나르시시스트)’로 몰아갔어요. 머저르는 브뤼셀(EU)의 꼭두각시일 뿐이며, 정권이 바뀌면 헝가리 청년들이 우크라이나 전쟁터에 끌려갈 거란 흑색선전이 난무했죠.예전 같으면 이런 대대적인 언론 공세에 야당은 속절없이 당했을지 몰라요. 하지만 2026년의 선거판은 달랐죠. 이제는 TV(정부의 일방적 선전)와 냉장고(국민의 실제 삶)의 일대일 싸움이 아니거든요. 스마트폰(디지털 미디어)이란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으니까요.디지털 미디어는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고요. 45세의 페테르 머저르는 디지털 콘텐츠의 문법을 아는 사람이었죠. 그는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를 직접 관리하며 민첩하게 소통했는데요. 예컨대 자신을 겨냥한 가짜뉴스나 딥페이크 영상이 나오면 바로 페이스북 라이브를 켜고 실시간으로 반박했고요. 하루 5~6곳을 돌며 강행군하는 유세 현장도 SNS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중계했어요.특히 머저르와 그 지지자들은 흑색선전까지 밈(meme)으로 유머러스하게 역이용했는데요. 머저르가 작은 보트 위에서 춤추는 틱톡 영상이 그 예이죠. 친정부 매체가 자신을 춤추고 술 마시며 놀기 좋아하는 인간이라며 깎아내리자 ‘그래, 나도 춤추고 놀 줄 아는 보통 사람이다’라며 받아치는 듯한 영상을 찍어 올렸어요. 오히려 젊고 열정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는 결과가 됐죠.머저르와 티서당은 단순히 SNS만 잘한 것이 아니라, ‘티서 월드’ 라는 독자적인 플랫폼을 운영했습니다. 머저르에 대한 가짜뉴스가 나오면 바로 앱이 푸시알람을 띄우고 반박용 카드뉴스를 즉시 공유할 수 있는 기능을 탑재했죠. 실시간 팩트체크로 언론매체의 흑색선전을 무력화한 겁니다. 젊은 인플루언서들도 영향력을 발휘했어요. 21세 틱톡커 오시카 칼라이가 대표적인 인물인데요. 개인 일상을 공유하며 인기를 끌었던 그는 선거를 앞두고 “우리의 한 표가 중요하다. 우리 세대가 헝가리를 바꿔야 한다”면서 젊은 층의 투표를 독려했고요. Z세대의 적극적인 투표 참여는 이번 총선의 높은 투표율(79.5%)과 야당의 압승을 이끈 원동력이 됐죠.결국 이번 선거는 일방적인 프로파간다(TV)와 참여형 쌍방향 소통(스마트폰)의 대결이었고요. 당연히 스마트폰의 완승이었습니다. 역대급 홍보 예산을 쏟아부어 TV와 라디오, 신문, 옥외 광고판을 도배하고도 오르반 정권이 패배한 이유죠.전 세계가 주목한 헝가리 총선은 화려하게 막을 내렸지만, 이 나라의 실질적 변화까지 갈 길은 멉니다. 경제 권력은 여전히 오르반 총리의 측근들이 쥐고 있고, 약속한 공약(교사 임금 인상, 의료 시스템 복구 등)을 이행하기엔 정부 곳간이 텅 비었죠. ‘연료비가 3배로 치솟고, 연금이 깎이고, 세금이 뛸 것’이라며 불안해하는 국민들도 많고요. 16년 만의 정권교체가 헝가리의 새로운 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어쩌면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이제부터일지 모릅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4월 15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6-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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