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란

한애란 기자

동아일보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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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거나 유익하거나. 읽을 만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21년차 기자입니다.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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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9~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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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국 환율 왜 이래…범죄자금 유입? 바트화 초강세 미스터리[딥다이브]

    요즘 우리나라는 고환율, 즉 원화 약세가 큰 이슈죠. 치솟은 원달러 환율 때문에 한국은행은 기준금리 인하를 멈추고, 정부는 수출 기업의 달러 환전을 독려할 정도인데요.이와 정반대로 통화가치가 너무 강해서 난리인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태국이죠. 12월 16일 기준 태국 바트화 환율은 1달러당 31.4바트. 올해 들어 통화가치가 10% 넘게 뛰면서 관광산업도, 농산물 수출도 비상 상황인데요. 경제 성장이 그리 강하지도 않은데, 바트화 가치만 무섭게 뛰는 게 영 이상합니다. 그리고 그 숨은 이유가 서서히 드러나는 중이죠. 태국 바트화 강세의 미스터리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2월 1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바트화가 뛴 만큼 관광객이 줄었다-9.8%. 태국 관광청이 예상하는 2025년 외국인 관광객 수 증가율입니다. 전 세계 하늘길이 막히다시피 했던 팬데믹 시기도 아닌데, 이 정도로 급감하다니. 관광대국 태국으로선 굴욕이 아닐 수 없는데요.홍수, 국경 분쟁, 범죄 증가 등. 여러 원인이 거론되지만, 무엇보다 큰 건 환율입니다. 바트화 환율이 2021년 6월 이후 최저로 떨어지면서(=바트화 강세) ‘가성비 좋은 동남아 관광지’라는 장점이 사라져 버렸고요. 다른 동남아 경쟁국(예-베트남)으로 관광객을 뺏기게 된 거죠.관광 성수기에 접어든 파타야 지역 언론은 이렇게 한탄합니다. “파타야를 찾는 관광객에 이번 시즌 가장 큰 충격은 교통 체증, 무더위, 치솟는 식료품 가격이 아닌 환율이다. 한때는 합리적이었던 것들이 이젠 빠듯하게 느껴진다. 술집, 식당, 마사지샵, 시장 상인들은 고객들이 방문할 때 쓰는 돈이 줄어들고 가격에 더 민감해졌다고 말한다.”올해 초 1달러당 34.61바트였던 환율은 이제 31.41바트. 이를 통화가치로 환산하면 10.1% 넘게 뛰었습니다. 통화가치 상승률과 관광객 감소율이 거의 일치하죠.관광산업만 비상이 아닙니다. 태국 수출 기업도 타격을 받았죠. 안 그래도 미국의 트럼프 관세 충격이 여전한데, 환율 때문에 가격 경쟁력마저 떨어졌습니다. 특히 쌀, 고무, 과일 같은 예전엔 저렴했던 태국산 농산물이 이제 해외에서 비싸지면서 수출이 내리막입니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인 태국으로선 큰일이죠.이전과 똑같은 물량을 수출한다 해도, 손에 쥐는 바트화 기준 수익은 줄어드니 수출 기업은 울상일 수밖에 없는데요. 포즈 아람왓 타나온 태국 상공회의소 회장은 정부의 환율 대책을 촉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바트화의 과도한 강세는 태국 경제의 잠재력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국가 경쟁력을 저해합니다.”이게 금 투기 때문이라고?태국 통화가치는 왜 이렇게 올랐을까요. 한동안 태국 정부는 ①미국 연준의 기준금리 인하로 인한 달러화 약세 기조와 ②경상수지 흑자 확대, 이 두 가지를 이유로 설명해 왔는데요. 하지만 약달러 영향은 태국뿐 아니라 모든 나라 공통이고요. 경상수지 흑자라고 무조건 다 통화가치가 오르는 건 아니잖아요. 1~10월 누적 경상수지 흑자가 사상 최대이지만, 원화 약세에 시달리는 한국을 보면 알 수 있죠.그리고 올해 태국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면, 사실 바트화가 약세로 가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이웃 나라 캄보디아와 국경 분쟁으로 무력 충돌을 빚었고요. 패통탄 친나왓 전 총리가 취임 1년 만에 해임될 정도로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거든요. 신흥국에서 이 정도 혼란이 벌어지면 외국인 투자자가 발을 빼면서 통화가 약세를 보이기 마련인데요. 그 반대로 간 겁니다.도대체 중력을 거스르는 바트화 가치 급등의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 각종 분석이 쏟아졌고요. 지난 9월 태국 중앙은행이 한 곳을 지목합니다. 태국의 금 거래 시장이었죠.올해 내내 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한 투자처였죠. 국제 금값은 60% 넘게 급등했는데요. 전통적으로 태국인은 금을 좋아하고 금에 많이 투자합니다. 대대로 금을 물려주는 집이 많고, 그래서 민간이 보유한 금의 양이 상당한데요. 올해처럼 금값이 무섭게 뛸 때면 태국인들은 집안에 고이 간직해뒀던 금을 내다 팔곤 합니다. 그리고 금은방은 이렇게 확보한 금을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팔죠. 그러면서 태국의 금 수출이 급증했는데요.올해 1~9월 태국의 금괴(가공되지 않은 금) 수출액은 3645억 바트(약 17조원). 2024년 같은 기간보다 100% 넘게 급증했습니다. 유례없는 대호황이었죠.전 세계적으로 금 투자가 유행하면서 금을 사려는 외국 자금이 이례적으로 밀려들었고, 그래서 바트화 가치가 이상 급등했다. 이게 당시 태국 중앙은행의 해석이었습니다.“금값은 바트화의 주요 변동 요인입니다. 금값이 오르면 바트화는 다른 통화 대비 강세를 보이고, 반대로 금값이 하락하면 다른 통화보다 더 큰 폭으로 약세를 보입니다.” (태국 중앙은행 금융시장부의 파비니 짓몽콜세마 수석이사)정체불명의 자금 수십조원이 들어오다미친 금값 때문에 태국 통화가치가 덩달아 널뛴다? 제법 설득력 있는 해석이었습니다. 올해 금 투기 열풍이 유별나긴 했으니까요. 이에 태국 중앙은행은 바트화 강세를 막겠다며 금을 살 때 붙이는 세금, 즉 ‘금세’ 신설까지 검토하고 나섰는데요.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았습니다. 왜 금 투기 수요가 다른 데가 아닌 유독 태국으로만 몰리는 거죠? 그 금을 사 간 외국인들은 도대체 누구죠?이렇게 바트화 미스터리가 말끔히 풀리지 않던 중, 태국의 경제학자들이 새로운 해석을 내놓습니다. 키앗나킨 파트라금융그룹의 수석 경제학자인 피팟 루앙나루미차이 박사, 국가경제사회개발위원회의 수파부드 사이추 위원장이 그 주인공인데요. 바트화 강세의 진짜 원인은 금 수출이 아니라 ‘출처를 알 수 없는 자금’의 대량 유입이란 주장이었죠.그들은 태국의 국제수지 통계에서 경상수지나 자본수지로 설명되지 않는 ‘오차 및 누락(Net Errors & Omissions)’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데 주목했습니다. 특히 2024년 연간 통계에선 이 규모가 무려 5300억 바트(약 25조원)로 불어났는데요. 통계에 오차는 있을 수 있지만, 구멍이 커도 너무 큽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불투명한 해외 자금의 비정상적 유입. 이건 혹시 불법 자금세탁의 흔적 아닐까요?경제학자들의 이런 문제 제기는 큰 반향을 일으킵니다. ‘범죄집단의 불법 자금이 태국으로 밀려들고 있다’, ‘태국이 세계적인 자금세탁 중심지로 전락했다’며 여론이 들끓었고요. 중앙은행이 나서서 “국제수지의 오차·누락 규모가 꼭 불법 자금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라고 해명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어차피 그게 불법 자금인지 아닌지는 중앙은행도 알 도리가 없으니까요.결국 정부가 움직였습니다. 총리 지시로 재정정책국·중앙은행·증권거래소·자금세탁방지국·증권거래위원회가 특별 태스크포스를 구성했죠. 바트화 강세의 주범으로 지목된 설명할 수 없는 대규모 자금 유입, 그 출처를 밝혀내기 위해서입니다.뒷문 열린 태국, 불법자금 놀이터 됐다그럼, 범죄자금은 어떤 식으로 태국으로 흘러 들어갔을까요. 아직 정부 TF의 최종 조사 결과가 나오진 않았는데요. 많은 이들이 의심하는 유력한 통로는 가상화폐 거래소입니다.범죄집단이 추적을 피하기 위해 불법 자금을 가상화폐로 관리하는 건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죠. 하지만 검은돈을 영원히 코인으로 둘 순 없고, 언젠가는 이를 현금화해야 할 텐데요. 한국처럼 법에 따라 가상화폐 거래소도 깐깐하게 고객 신원을 확인하는 나라에선 이게 쉽지 않죠. 규제가 가장 약한 곳을 통해 빠져나갈 텐데, 태국이 바로 그런 나라입니다.태국은 가상화폐의 바트화 환전을 규제하는 법률이 아직 없고요. 따라서 별다른 고객 신원확인 절차 없이 가상화폐를 얼마든지 현금으로 인출할 수 있다는데요. 이렇게 바트화로 바뀐 불법 자금은 다시 태국에서 금괴나 호화 콘도, 회사채, 주식 매입으로 흘러갑니다. 검은돈이 태국의 금융·부동산 시장을 거치면서 합법적인 자금처럼 완전히 세탁되는 거죠. 그 결과 시장에선 바트화 유동성이 고갈되면서, 통화가치는 급등하게 됩니다.왜 태국의 금 수출, 특히 캄보디아로의 수출이 급증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죠. 캄보디아를 기반으로 한 범죄집단이 가상화폐를 거쳐 태국에서 바트화로 환전한 돈으로 금을 사고요. 그 금괴를 캄보디아로 보내 자금세탁을 완결하는 겁니다. 즉, 금 수출의 비정상적 급증은 바트화 강세의 원인이 아니라 최종 결과물인 셈이죠.그리고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들이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이달 초 태국 정부는 미국 연방수사국(FBI) 정보를 받아 국제 사기 조직이 태국에서 보유해 온 불법 자산 약 100억 바트(약 4600억원) 어치를 압류했는데요. 적발된 건 캄보디아를 기반으로 하며 국경을 넘나들며 사기 행각을 벌여온 조직-‘임 리악-벤 스미스’, ‘콕 안’, 프린스그룹 천즈 회장-이었고요. 압류된 자산엔 은행 예금, 토지, 콘도미니엄, 유가증권, 요트, 고급승용차 등이 포함됐습니다. 그만큼 막대한 범죄자금이 태국으로 흘러들어와 있었던 거죠.특히 일부 태국의 전현직 고위급 정치인들이 사업가를 가장한 이 범죄조직 수괴들과 친분이 있다는 사실도 이번에 드러났는데요. 혹시 이 사기꾼들이 태국 정치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었던 걸까요. 사건이 정치 스캔들로 번질 조짐입니다.역대급 바트화 강세가 태국 경제의 성장 때문이 아니라 범죄집단의 불법 자금 유입 탓이었다니. 태국 국민들로선 분통 터질 일입니다. 어차피 해외여행을 즐기거나 해외 자산에 투자하는 상류층이 아닌 한 바트화 강세로 덕 볼 일은 거의 없고요. 오히려 그로 인한 피해를 쌀 수출이 줄어든 농가, 관광객 감소로 타격받은 상인들이 고스란히 받고 있으니까요.태국 정부는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섰습니다. 일단 금융기관의 정보를 한 데 묶어서 의심스러운 자금 흐름을 감시하는 ‘데이터국’을 설립했고요. 내년엔 자금세탁방지법을 개정해 규제를 더 촘촘히 할 예정이죠. 금융 범죄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도 약속했고요. 중앙은행은 금은방들이 매일 거래 내역을 보고하도록 의무화할 예정입니다. 참, 뒤늦은 대응이 아닐 수 없는데요. 정부가 제 역할을 소홀히 하면 이런 황당한 상황에 처할 수 있군요. 바트화 급등의 미스터리는 어느 정도 풀렸지만, 이 비정상적 상황이 언제쯤 바로잡힐지는 두고 봐야겠습니다. By.딥다이브지난 6월 1바트에 41원이던 바트화 환율이 이제 46.8원까지 뛰었습니다. 우리 원화는 약세, 바트화는 강세인 탓이죠. 두 나라 모두 환율 때문에 난리로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태국 바트화 강세가 심상찮습니다. 올해 들어서만 10% 넘게 통화가치가 뛰었는데요. 그 결과 외국인 관광객 유입이 크게 줄면서 관광산업은 비상이고요. 쌀을 비롯한 농산물 수출에도 타격이 큽니다. -태국 경제 성장이 그리 강하지도 않은데, 통화가치만 왜 이리 뛰었을까요. 한동안 태국 금시장의 이례적 호황이 원인으로 지목됐습니다. 세계적인 금 투기 열풍이 불면서 태국의 금 수출이 급증한 탓이란 해석이었죠.-하지만 진짜 원인은 따로 있는 게 아닐까요. 전문가들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자금의 대량 유입을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동남아 사기 범죄 집단이 가상화폐 거래소를 통해 범죄 수익을 태국에서 현금화하고 있다는 추측이죠. 실제 이런 식으로 태국에 유입돼 부동산, 주식시장으로 흘러든 불법 자금이 적발되고 있습니다. 태국 정부는 뒤늦게 대책을 마련 중이죠.*이 기사는 12월 1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14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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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재자의 ‘무상 시리즈’…최대 석유국 베네수엘라 빈민국 만들었다[딥다이브]

    베네수엘라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12월 10일. 미국 해안경비대가 베네수엘라의 대형 유조선을 해상에서 나포했습니다. 독재자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축출을 위한 미국의 움직임이 심상찮은 가운데, 베네수엘라가 다시 글로벌 뉴스의 핫이슈로 떠오르는데요.한때 중남미 최고 부국이었지만 이제 ‘망한 나라’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베네수엘라. 여기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석유가 매장된 축복받은 땅이라는 걸 아시나요. 땅만 파면 석유가 펑펑 쏟아질 텐데, 어째서 나라 경제는 이 지경이 됐을까요. 흔히 ‘이게 다 포퓰리즘 탓’이라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오늘은 자원의 저주에 시달리는 베네수엘라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2월 1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너무 가난해진 석유부국지난 12년 동안 국내총생산(GDP)이 3분의 1토막 났습니다(2012년 3725.9억 달러→2024년 1198억 달러). 최근 10년 동안 780만명 국민이 나라를 떠나 난민 신세가 됐죠. 인구의 82%가 빈곤층, 특히 53%는 기본적인 식료품조차 살 수 없는 극빈곤층인 나라(UN 특별보고관 성명). 바로 남미 베네수엘라 이야기입니다.전쟁이나 내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평화 시기에 이런 심각한 경제위기라니. 현대사에선 전례 없는 일인데요. 과거 1970년대 ‘남미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던 베네수엘라이기에 더 극적이면서도 자멸적인 몰락입니다.그리고 이 이야기 중심엔 석유가 있습니다. 1922년 마라카이보 호수 근처에서 석유가 처음 발견된 이래, 지난 100년 동안 석유는 베네수엘라 경제를 지탱해 온 기둥이었죠. 베네수엘라의 확인된 매장량 규모는 무려 3030억 배럴. 전 세계 매장량의 17%로 압도적인 1위입니다.하지만 베네수엘라의 하루 원유 생산량은 고작 100만 배럴 수준. 전 세계 생산량의 1%가량을 차지할 뿐입니다.그럼 베네수엘라는 왜 그 많은 석유를 파내지 못하는 걸까요. 흔히 ‘미국 제재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1954~2013년)이 등장하죠.혁명의 돈줄이 된 석유공사아시아 금융위기로 인한 유가 폭락으로 베네수엘라 경제가 휘청거렸던 1998년. 붉은 베레모를 쓴 카리스마 넘치는 전직 공수부대원 우고 차베스는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킵니다. 부유한 나라였지만 정치를 지배한 소수 엘리트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상당했거든요. 가난한 이를 위한 의료·교육 확대 같은 이른바 ‘볼리바르 혁명’ 약속과 함께 차베스가 대통령에 오릅니다.혁명엔 돈이 필요한 법. 차베스는 국영석유공사 PDVSA 장악에 나섭니다. PDVSA는 그 나라 최고의 돈줄이니까요.이전까지 PDVSA는 공기업이지만 매우 독립적으로 운영됐습니다. 당시 세계 4위 석유회사였을 정도로 수익성 좋고 잘 나가는 기업이었죠. 최첨단 시설은 하루 350만 배럴의 생산량을 기록했고요. 조만간 이를 두 배로 늘린다는 야심 찬 계획도 있었습니다. 직원들은 상당한 고임금을 받는 그 나라 최고 엘리트들이었고요. 당연히 서민 기반의 차베스 정권과는 정치 성향이 크게 달랐는데요.차베스는 기존 임원들을 줄줄이 내쫓고 요직을 전문성 없는 측근들로 채워갑니다. PDVSA 노조는 이에 저항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났고요. 무려 두 달에 걸친 총파업이 벌어집니다. 이들이 생산시설 가동을 중단시키면서, 한때 이 나라 석유 수출이 마비될 정도였는데요.파업은 결국 진압됐습니다. 차베스의 인기가 워낙 높았고, 기득권 귀족 노조의 파업에 일반 대중들이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파업에 참여한 PDVSA 직원 중 즉각 복귀 명령을 따르지 않은 1만8000명이 한꺼번에 해고됐습니다. 주로 중간 직급 이상의 숙련된 엔지니어들이었죠. ‘석유 뿌리기’의 마법적 효과차베스가 장악한 PDVSA는 혁명의 재정적 동력이 됩니다. 무료 진료소, 저렴한 국영 식품 가게 ‘메르칼’, 새로운 공공주택 건설, 무료 안과 진료·수술, 장학금, 무료 교육 프로그램. 각종 파격적인 사회복지 프로그램들이 PDVSA가 석유 팔아 번 돈으로 펼쳐집니다. 이른바 ‘석유 뿌리기(Sowing the oil)’ 정책이었죠.PDVSA는 아예 기업 차원에서 이런 사회사업을 직접 운영했습니다. 느리고 비효율적인 공무원 조직보다 PDVSA가 유능하다고 본 차베스가 이를 맡긴 거죠. 그 결과 PDVSA는 본업을 위한 운영비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사회 사업에 쏟아붓게 됩니다. 거의 석유기업이라기보다는 ‘유전을 보유한 사회적 기업’이나 마찬가지가 된 거죠.무료 의료, 무상 교육,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휘발유. 복지 수혜를 입게 된 서민들은 열광했습니다. 언론인 피터 마스는 2005년 PDVSA가 운영하는 2만평 규모의 ‘자생적 개발센터’에 방문했던 기록을 책에 남겼는데요. 센터 내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작업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PDVSA는 이제 모든 베네수엘라인의 것입니다. 이전엔 소수 집단만이 그 이익을 누렸죠.”실제 통계로 봐도 차베스 집권기인 1999~2012년, 빈곤율은 극적으로 감소했습니다(49.4→23.9%). 실업률도 절반(15→7.4%)으로 뚝 떨어졌고요. 경제 지표는 분명 좋아졌고, 많은 이들은 차베스의 경제이념 차비즘(Chavism)의 마법이라고 환호했습니다.하지만 사실 이 마법을 만든 진짜 주인공은 차베스가 아니라 국제유가였습니다. 차베스는 유가가 배럴당 10달러로 폭락해 바닥일 때 당선됐고요. 그가 취임하자마자 국제유가는 뛰기 시작해 배럴당 100달러대로 치솟았습니다. 베네수엘라는 고유가라는 일종의 복권에 당첨된 셈이었죠. 그리고 차베스는 이 행운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그렇게 지출을 늘렸습니다. 베네수엘라 경제 전체가 정부의 재정 지출에 의존하게 됐고요. 그 돈줄은 사실상 석유, 하나뿐이었죠.파티가 끝나자 초인플레가 닥쳤다2012년 말,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차베스 대통령은 외무장관이던 니콜라스 마두로를 후계자로 정합니다. 버스 운전기사 출신 노동운동가였던 마두로는 카리스마도, 소통 능력도 떨어지는 인물이었죠. 2013년 차베스 사망 뒤 열린 대선에서 그는 50.6%의 낮은 득표율로 간신히 집권합니다.그리고 2014년, 수년간 100달러대로 고공행진하던 국제유가의 추락이 시작됩니다. 유가 거품으로 떠받쳐온 베네수엘라 경제도 무너지기 시작하죠.베네수엘라 경제엔 이런 위기에 대비한 안전장치가 없었습니다. 노르웨이,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다른 산유국처럼 석유 팔아 번 돈을 ‘국부펀드’로 모아두질 않았던 거죠. 오히려 호황기에 워낙 공격적으로 복지지출을 늘린 탓에 정부 부채만 1000억 달러 넘게 쌓여있었는데요.유가 추락으로 수출이 급감하자 외환보유고는 텅 비어갔고요. 통화가치가 급락하고 재정적자는 더 무섭게 불어나고 수입 물가는 뛰기 시작합니다. 총체적 난국이었죠.이럴 땐 사실 방법은 하나뿐. 세수 늘리고 지출 줄이는 긴축재정으로 재정 구멍부터 메워야 하는데요. 마두로 정부는 이를 거부합니다. 대신 중앙은행을 동원했죠. 화폐를 마구 찍어내서 예산을 충당하게 됩니다. 통화 공급량이 매달 20~30%씩 증가했죠.그래서 어떻게 됐을까요. 네,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물가가 급등했고, 그러자 정부는 재정지출을 충당하기 위해 돈을 더 찍었고, 그 결과 미친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경제를 덮쳤습니다. 중앙은행이 발표한 2018년 물가상승률은 무려 13만%. 볼리바르화 가치가 너무 떨어져서 티슈 대신 지폐로 닦는 게 낫다는 말이 나왔죠.정부는 인플레이션에 맞서 가격 통제를 실시했습니다. 하지만 제품 팔아서 원가도 못 건지게 된 제조업체들은 줄줄이 생산을 포기했고요. 마트에선 기본적인 생필품조차 사라집니다.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게 된 국민들이 베네수엘라를 탈출하기 시작하죠. 페루, 칠레, 콜롬비아, 멀게는 미국과 스페인까지. 이주 행렬이 이어집니다. 로사리오대학 분석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조국을 떠난 베네수엘라 국민은 약 780만명.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넘죠.땅속 석유를 파낼 수 없는 이유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나요. 2015년 말 30달러대까지 급락했던 국제유가는 이후 다시 회복세를 보였고, 2022년엔 100달러를 넘기도 했거든요. 베네수엘라는 왜 이런 유가 상승 덕을 보지 못한 채 지금까지 수렁에 빠져있을까요.여기서 과거 차베스 경제정책의 실책이 드러나는데요. 바로 2003년 대규모 해고로 석유공사 PDVSA의 기술 경쟁력을 무너뜨린 겁니다.땅속에 묻힌 석유, 그냥 구멍 뚫어서 파내면 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저류층의 지질학적 특성을 이해하는 엔지니어의 전문지식이 필수인데요. 그런 최고의 전문 인력들이 20여년 전 뭉텅 잘려 나갔습니다.이후 PDVSA 요직은 속속 정부 충성파 측근들로 채워졌고요. 특히 마두로 대통령 취임 뒤엔 그나마 남아있던 전문가들마저 잘리고, 경영진을 군부 출신 비전문가들로 죄다 채웠는데요.전문성 없는 낙하산들이 무슨 경영을 제대로 하겠습니까. 전문인력을 기르지도, 최신 설비에 투자하지도 않았죠. 자연히 생산량은 줄어들고, 시설은 노후화되고, 인력 이탈은 더욱 가속화됐습니다. 로이터 기사에 따르면 PDVSA는 국가방위군 신병을 기술직에 배치할 정도로 인력 부족이 심각하고요. 베네수엘라의 송유관은 지난 50년 동안 개보수된 적이 없을 정도로 낡았죠.지질학적 조건도 불리하게 작용했는데요. 이제 베네수엘라는 정제가 쉬운 경질 원유는 거의 다 파냈고요. 걸쭉하고 끈적한 타르 샌드 중질유만 남았거든요. 이런 중질의 고유황 원유는 생산에 특수 장비와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하죠. PDVSA 역량으론 역부족입니다.게다가 2019년부터는 미국의 제재까지 겹쳤습니다. 부정선거로 재선에 성공하며 독재체제를 굳힌 마두로 대통령. 그를 축출하기 위해 트럼프 1기 행정부는 PDVSA와의 거래를 차단했죠. 사실상 외국 기업의 투자가 막히고 맙니다.그 결과 1999년 355만 배럴에 달했던 베네수엘라 일일 석유 생산량은 곤두박질쳤고요. 이제 그 3분의 1도 채 되지 않습니다. 원유 매장량 1위 국가라는 명성이 무색한 수준인데요.유가에 따라 극단적인 호황과 불황을 오가다 결국 이 지경에 이른 베네수엘라 경제. 이를 보며 드는 생각은 이겁니다. 차라리 석유 대박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어마어마한 석유 매장량이란 일확천금의 횡재가 오히려 이 나라엔 독이 된 게 아닐까요.그리고 이런 현상을 일컫는 용어들이 이미 있죠. 네덜란드병, 자원의 저주, 풍요의 역설 등.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 상황에 딱 들어맞는 예언이 있는데요. OPEC 창설의 주역인 베네수엘라 정치인 후안 파블로 페레스 알폰소(1903~1979년)가 1976년 한 연구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OPEC을 연구하지 말고, 석유가 베네수엘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세요. 10년 후, 20년 후면 알게 될 겁니다. 석유가 우리를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그건 악마의 배설물입니다.” By.딥다이브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마약 밀매 등을 이유로 베네수엘라에 공세를 펼치지만, 실제론 석유 때문이란 해석이 많죠. 베네수엘라엔 미국엔 부족한 중질유가 풍부한데요. 미국이 이를 얻으려면 외국 기업의 사업권을 보장해 줄 새로운 베네수엘라 정부가 필요하단 해석이죠. 역시나 결국 석유가 문제입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GDP는 3분의 1로 쪼그라들었고, 국민 4분의 1이 나라를 떠났습니다. 세계 최대 원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베네수엘라가 너무나 가난해졌습니다.-1999년 ‘볼리바르 혁명’을 내세워 집권한 우고 차베스. 그는 국가 부의 원천이었던 베네수엘라 석유공사를 장악해 혁명의 돈줄이자 수행기관으로 삼았습니다. 마침 국제 유가가 가파르게 치솟던 시기였고, 그의 혁명은 번영을 가져온 것처럼 보였죠.-하지만 후임 마두로가 집권한 직후 유가가 급락하면서 파티는 끝납니다. 마두로 정부가 화폐공급을 무분별하게 늘린 탓에 베네수엘라는 연 13만%라는 경악스러운 초인플레이션에 빠졌죠. 유가는 다시 반등했지만, 베네수엘라엔 이제 원유 생산을 늘릴 인력도, 설비도, 기술도 부족합니다. 땅 밑엔 석유가 잔뜩 있지만 이를 파내지를 못하고 있죠. *이 기사는 12월 1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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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픈AI는 제2의 넷스케이프”…AI 선구자에 회의론 왜?[딥다이브]

    요즘 인공지능(AI) 기업 간 기술 경쟁이 한층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죠. ‘제미나이 3’을 내세운 구글의 맹추격에 오픈AI가 ‘코드 레드’를 발령했습니다. 그야말로 AI 시장이 격동기에 놓여있는데요.온 세상 전문가들이 이에 대한 각자의 분석을 쏟아내는 가운데, 눈에 띄는 두 가지 시각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대표적인 ‘AI 버블론자’ 마이클 버리의 “오픈AI는 제2의 넷스케이프”라는 주장이고요. 다른 하나는 세일즈포스 CEO 마크 베니오프의 “LLM(대규모언어모델)은 새로운 디스크 드라이브”라는 주장입니다. 이들 말대로 챗GPT가 이끌어온 LLM 전성시대는 이제 끝물인 걸까요. 오픈AI 회의론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2월 1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챗GPT 독주체제, 이제 끝?오픈AI가 인공지능(AI) 챗봇 챗GPT를 불쑥 대중에 처음 공개했던 2022년 11월 30일. 이후 AI 열풍이 거대한 쓰나미처럼 전 세계를 덮쳤죠. 지난 3년간 기술업계가 정말 숨 가쁘게, 정신없이 달려왔는데요.대규모언어모델(LLM) 기술을 개척하고 선두주자 자리를 지켜온 오픈AI. 챗GPT의 이용자 수는 놀라운 속도로 증가해 2025년 9월 기준 주간 활성 사용자 수가 이제 8억명에 달하고요. 비상장기업인 오픈AI의 기업가치는 올해 10월 기준 무려 5000억 달러로 불어났습니다. 일론 머스크의 우주기업 스페이스X를 뛰어넘는 ‘세계 최대 스타트업’이 된 거죠.CEO 샘 올트먼이 가는 곳마다 슈퍼스타 대접을 받을 정도로 승승장구해 왔던 오픈AI. 그런데 분위기가 갑자기 급반전됐습니다. 11월 18일 구글이 새 대규모언어모델(LLM) ‘제미나이 3.0’을 공개했는데요. 어, 이게 핵심 벤치마크에서 오픈AI의 최신모델(GPT-5.1)을 앞서면서 현존하는 최강 성능의 AI 모델로 올라섰네요?언제나 오픈AI가 성능 면에서 한참 앞서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저력의 구글이 단숨에 따라붙으면서 이제 동등한 경쟁을 펼치게 된 겁니다.물론 여전히 월간 활성 이용자 수(MAU)를 기준으론 오픈AI가 한참 앞서는데요(챗GPT 8억1000만명>제미나이 3억3600만명). 최근 3개월 MAU 증가율로 따지면 제미나이가 훨씬 높죠(챗GPT 6%, 제미나이 30%). 즉, 구글의 추격 속도가 보통이 아닙니다.챗GPT 독주체제가 흔들리는데? 시장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요. 그러자 샘 올트먼 오픈AI CEO가 사내에 ‘코드 레드(적색경보)’를 발령합니다. 전사적 역량을 챗GPT 성능 개선에 집중하기 위해서였죠. 당초 이달 말 선보일 예정이었던 새 추론모델 GPT-5.2 출시를 2~3주 당겨 공개할 예정입니다. 확실히 급하긴 급했네요.“제2의 넷스케이프”라는 의미생성형 AI 웹의 트래픽 점유율을 따지면 챗GPT은 여전히 71.3%로 압도적 1위입니다. 구글 점유율은 아직 15.1%에 불과하죠(시장조사업체 시밀러웹 기준). 하지만 지난해 말(챗GPT 87%, 제미나이 5.7%)과 비교하면 저울추가 움직이고 있는 게 확연히 드러나는데요.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혁신기업이 경쟁이 격화되면서 흔들리고, 결국 추격자에 따라잡힌 사례. 기업 세계에선 드물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챗GPT와 제미나이의 경쟁 구도를 보면서도 ‘이거 어디서 봤던 장면 같은데?’라는 기시감이 들던 참이었는데요. 마이클 버리가 얼마 전 X에 이렇게 썼습니다.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오픈AI는 제2의 넷스케이프처럼 파산 직전에 몰리고 현금 유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넷스케이프라. 절묘한 비유라며 많은 이들이 공감했습니다. 참고로 마이클 버리는 2008년 금융위기를 예견했고 영화 ‘빅쇼트’의 실제 주인공인 인물이죠. 하지만 최근엔 AI 관련주에 하락 베팅했던 게 빗나가면서 자신의 헤지펀드를 청산했고요. 이후 작가로 변신해 서브스택에서 유료 뉴스레터 서비스를 운영 중인데요.그가 왜 하필 넷스케이프를 거론했는지를 알려면 그 스토리부터 알아야겠죠. 사실 넷스케이프의 흥망성쇠는 스타트업의 고전동화 같은 너무나 유명하고도 극적인 이야기입니다. 그 시작은 일리노이대 졸업생 마크 앤드리슨과 실리콘그래픽스 창업자 제임스 클락, 두 사람이 ‘인터넷 관련 사업을 하자’고 의기투합한 1994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넷스케이프는 설립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상용 브라우저를 개발해 베타 버전을 출시했고요. 1994년 12월 첫 정식 제품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 1.0’을 선보이면서 돌풍을 일으킵니다.내비게이터는 단숨에 시장을 휩쓸며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했죠. 1995년 세계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90%를 차지했고요. 매출은 분기마다 두배 넘게 불어났습니다. 1995년 8월 넷스케이프는 증시에 상장했는데요. 공모가 14달러였던 주가는 장이 열리자마자 71달러로 치솟았고요. 창사 이래 16개월 동안 이익을 내지 못한 회사의 기업가치가 하루 만에 30억 달러로 불어납니다. 그 시절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의 위상은 독보적이었습니다. 사실상 인터넷 세상으로 가는 유일한 관문으로 통했죠.넷스케이프의 이 엄청난 성공은 잠자고 있던 IT 공룡, 마이크로소프트(MS)를 깨웁니다. 1995년 8월, MS가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을 출시했죠. 급조된 소프트웨어였고, 기능 면에서도 내비게이터에 뒤졌는데요.하지만 운영체제의 절대 강자 MS는 익스플로러를 윈도우에 기본 탑재하는 ‘끼워팔기’로 시장을 야금야금 잠식해 나갔고요. 무엇보다 막강한 자본력을 믿고 그해 12월 승부수를 던졌는데요.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영원히 무료로 제공할 것”이라고 발표한 겁니다. 개인용 39달러, 기업용 99달러로 내비게이터를 팔던 넷스케이프엔 충격이 아닐 수 없었죠. ‘브라우저 전쟁’이 시작됩니다.예나 지금이나 MS는 세계 최강의 IT 기업이죠. MS는 이 공짜 소프트웨어에 엄청난 투자비(매년 1억 달러 이상)와 인력(1999년까지 1000명 이상)을 쏟아부으며 대대적인 공세에 나섭니다. 난공불락 같던 넷스케이프의 지위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하죠. 1996년 86%였던 넷스케이프 점유율이 1997년 말 51%로 떨어졌고요. 1998년 9월, 급기야 역전됩니다.여기엔 넷스케이프의 실책도 한몫했죠. 1997년 6월 출시된 ‘넷스케이프 4’는 기업을 위한 ‘그룹웨어’로 방향을 전환하며 새로운 기능을 대거 추가했는데요. 이로 인해 브라우저는 버그투성이가 되면서 느려졌고요. 이전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인터넷 익스플로러4’로 고객들이 이탈한 거죠.넷스케이프는 1998년 AOL에 인수됐지만, 다시 살아나지 못했고요. 2008년 3월, 지원이 종료되며 영영 사라졌습니다. 종료 당시 시장 점유율은 고작 0.6%.혁신 기업 넷스케이프의 몰락은 여러 교훈을 남겼죠.-기술 세계는 빠르게 변화합니다. 아무리 기술력이 뛰어난 선도 기업이라고 해도, 기술 우위는 영원한 게 아닙니다.-제품 품질만큼이나 유통이 중요합니다.-기술 싸움은 자본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거대 기업이 작정하고 자본과 인력을 쏟아붓는다면 기술 격차는 사라질 수 있습니다.이런 교훈은 지금의 AI 모델 경쟁 구도에도 대입할 수 있습니다. AI 기술, 특히 대규모언어모델(LLM)은 훈련과 실행을 위해 막대한 컴퓨팅 비용 투자가 필요한 사업인데요. 오픈AI의 수익은 챗GPT 구독료와 API 라이선싱 정도. 이걸론 운영 비용을 메우기란 불가능하죠. 보도에 따르면 올 상반기 오픈AI 매출은 43억 달러, 순손실은 135억 달러에 달했는데요. 컴퓨팅 비용이 워낙 많이 드는 데다, 그동안 끌어다 쓴 부채 중 일부가 손실로 잡힌 탓에 적자가 더 커졌습니다.2029년 흑자전환을 목표로 한다는 오픈AI. 하지만 돈 들어갈 곳(특히 데이터센터 운영)은 많은데, 돈 벌 만한 새로운 수익모델(예-광고수익)은 아직 찾지 못했고요. 샘 올트먼 CEO가 돈줄을 열심히 끌어오고 있긴 하지만(예를 들어 소프트뱅크)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한데요.이에 비해 구글은 30년 전 MS 못지않은 IT 공룡. 최근 12개월 순이익(2025년 11월 기준)이 무려 1243억 달러(약 183조원)로 전 세계 1위입니다. 세계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버는 기업인 거죠. 게다가 디지털 유통망까지 완전히 장악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검색엔진 시장의 약 90%를 차지하는 구글 검색과 동영상 플랫폼의 절대 강자 유튜브가 있으니까요. 여기 맹렬한 추격으로 어느새 따라잡은 기술력까지. 기시감이 생기는 게 당연합니다.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그런데 여기서 하나 질문. 그 브라우저 전쟁, 최종 승자는 그래서 누구였을까요? MS 익스프로러가 아니죠. 지금 브라우저 시장 1위는 구글 크롬입니다(세계 시장 점유율 68%). 이게 바로 이 넷스케이프 스토리가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인데요.그러니까 인터넷 산업에서 중요한 건 브라우저가 아니었습니다. 진짜 중요한 건 사람들이 이용하는 사이트였고요. 그중 가장 큰 게 바로 검색엔진이었죠. 구글은 바로 이 분야에서 승자로 올라섰고요. 이후 구글이 2008년 출시한 웹브라우저 ‘크롬’은 구글 검색을 통한 대대적인 홍보에 힘입어 빠르게 시장 점유율을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즉, 진짜 혁명이 일어나는 분야는 따로 있었는데, 이를 넷스케이프와 MS 모두 놓친 거죠. 사실 브라우저는 그 자체로는 돈이 되지 않는, 일종의 기본 인프라 같은 거였는데 말이죠. 차라리 브라우저 전쟁에 쏟아부을 자본으로 야후나 구글, 아마존을 일찌감치 인수했다면 어땠을까요?그럼 AI 기술 경쟁으로 돌아와서. 지금의 이 치열한 LLM 경쟁에서 승리하면 AI 시대의 승리자로 올라설 수 있는 걸까요. 혹시 이 LLM 전쟁도 사실은 옛 브라우저 전쟁 같은 건 아닐까요?세일즈포스 CEO 마크 베니오프는 조금 다른 비유를 써서 이렇게 일갈합니다. “LLM은 새로운 디스크 드라이브입니다: 가장 저렴하고 우수한 업체로 핫스왑하는 범용 인프라이죠. 이 모델이 해자라는 환상은 이제 끝났습니다.”오픈AI나 구글 같은 기업이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어 개발하는 최첨단 LLM을 고작 디스크 드라이브에 비유하다니.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한데요. 그는 얼마 전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실 지금 LLM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고 생각해요. 스탠퍼드대 AI 전문가 페이페이 리가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는데요. 그는 다음 모델은 다중감각(multi-sensory) 모델이 될 거라고 봐요. 카메라, 오디오 같은 다양한 구성요소가 필요하고, 4차원으로 이뤄져야 하는 거죠. 이건 LLM이 아니에요. 이게 언젠가 출시되고, LLM을 대체할지도 모르죠. 그러니 현실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 모두 챗GPT 쿨에이드(Kool-Aid, 미국 음료 이름)에 취해 있었던 것 같아요.”만약 베니오프 CEO 말대로 GPT(오픈AI)나 제미나이(구글), 클로드(앤트로픽) 같은 대규모언어모델(LLM)은 모두 AI시대를 열기 위해 필요한 기본 인프라일 뿐이고, 이 인프라를 활용하는 AI 서비스의 진짜 혁명은 아직 오지 않았다면? 조금 허무하지만, 동시에 희망적이기도 하네요. 본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고, 가능성은 모두에게 열려있다는 뜻이니까 말이죠. By.딥다이브3년 전 챗GPT를 보고 세상이 뒤집어졌던 게 생생한데, 이젠 ‘그건 범용 인프라일 뿐’이라니. 기술 트렌드란 적응할 새 없이 순식간에 변화하는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인공지능 모델 개발 경쟁에 불이 붙었습니다. 구글의 ‘제미나이 3.0’ 출시를 계기로 구글과 오픈AI가 기술력에서 동등한 경쟁을 펼치게 됐죠. 선두주자 오픈AI가 급해졌습니다.-혹시 오픈AI가 넷스케이프와 비슷한 함정에 빠진 걸까요? 브라우저 시장을 개척한 혁신기업 넷스케이프가 거대기업 마이크로소프트에 결국 당하고 말았던 30년 전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토록 치열했던 브라우저 전쟁의 최종 승자는 결국 구글이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을지 모릅니다. “LLM은 디스크 드라이브 같은 범용 인프라”라는 베니오프의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이 기사는 12월 1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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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숨 쉬는 공기조차 불평등하다…인도의 대기오염 재앙[딥다이브]

    목걸이처럼 걸고 다니는 ‘휴대용 공기청정기’가 있다는 걸 아시나요? 요즘 인도에서 뜨는 아이템인데요. 가격은 5만대. 이게 과연 효과가 있긴 할지 의심스럽지만 인도, 특히 수도 뉴델리 지역에선 날개 돋친 듯 팔립니다. 왜? 공기 오염 때문에 도무지 견딜 수 없을 지경이니까요!인도 수도권의 늦가을~겨울철 대기 오염은 심하다 못해 재앙적인 수준이죠. 경제 급성장기엔 원래 그러기 마련이라고요? 그렇게 보기엔 그 속에 숨은 사회 불평등과 리더십의 부재 문제가 심각한데요. 떠오르는 강대국 인도의 치명적인 대기 오염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2월 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연일 공기질 ‘위험’ 단계 경고오늘 아침 공기, 상쾌했나요? 인도인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한다는 대기질 지수(AQI) 수치를 확인해 봤는데요. 4일 오전 현재, 서울의 AQI는 28로 ‘좋음(good)’, 같은 시간 인도 뉴델리시는 325로 최고 단계인 ‘위험(hazardous)’을 기록했습니다.위험 단계는 얼마나 나쁜 거냐고요? 한마디로 비상 상황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심혈관·호흡기 질환을 유발할 위험이 클 정도로 공기가 유독하단 뜻이죠. AQI를 담배 연기로 환산한 수치에 따르면 AQI가 324이면 하루 24시간 동안 담배 14개비를 피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그럼, 뉴델리시가 포함된 델리 주정부는 이날 재택근무, 학교 휴교 같은 비상조치를 취했을까요. 아니요. 그냥 여느 날과 다름없이 사람들은 아침에 출근하고, 학교에 가고, 심지어 조깅과 산책도 했습니다. 마스크를 쓴 사람도 많지만, 위험 단계에서 권장되는 N95(한국에선 KF94라 불림) 마스크를 쓴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건 비싸거든요.아니, 왜 이렇게 평온하냐고요? 이게 일상이니까요. 10월부터 1월까지, 인도 북부 수도권 지역에 수년째 되풀이되고 있는 일입니다. 스모그로 앞이 뿌옇고, 하늘은 회색빛이고, 기침과 콧물이 끊임없이 나고, 목이 아프고, 눈이 충혈되고, 입 안이 텁텁하기까지 하죠.그나마 지금은 11월보다는 나아진 겁니다. 11월 말엔 AQI 지수가 500을 넘기도 했는 걸요(=하루 담배 약 30개비에 해당). 수치가 그 정도는 됐을 땐 델리 주정부가 직원 절반 재택근무 조치를 취하긴 했습니다.델리의 공기는 왜 이렇게 최악인 걸까요. 원인은 복합적인데요. 일단 델리는 분지 지형이어서 공기 순환이 잘 안되고요. 10월부터 바람이 약해지면, 차갑고 무거워진 공기가 갇히면서 짙은 스모그를 형성합니다. 공장의 매연과 자동차 배기가스가 주요 오염원이고요. 특히 수도권 인근의 농촌지역에선 여전히 고체연료-나무, 동물 분뇨, 볏짚 등-를 쓰는데, 이게 심각한 오염을 초래하죠. 게다가 10월 말 디왈리 축제를 맞이해 터뜨린 폭죽의 영향까지 겹쳤고요.이 심각한 대기오염은 얼마나 해로울까요. 이를 연구한 결과는 너무 많은데요. 대기오염은 호흡기 질환은 물론, 장기간 노출 시 인지장애와 암 발생 위험, 사망률을 높이고요. 특히 초미세먼지는 혈류로 유입되기 때문에 태아에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 있죠. 이 정도 수준의 대기오염이 지속된다면 인도 전역의 평균 기대수명을 3.5년, 델리 주민으로 한정하면 8.2년 감소시킬 수 있고요. 인도 전체 사망자의 17.8%(167만명)가 대기오염으로 인한 사망이란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불평등을 호흡하다여기서 매우 불편한 진실. 대기 오염이 이렇게 심하다고 해서, 모두가 오염된 공기를 흡입하는 건 아니란 점이죠.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에 따라 마시는 공기가 달라집니다. 이젠 공기청정기라는 게 있으니까요.인도에선 요즘 공기청정기가 엄청나게 팔리죠. 더 이상 사치품이나 계절상품이 아닌 사계절 필수품이라고 얘기할 정도인데요. 특히 최근엔 가정용 공기청정기 제품이 품절 현상을 보일 정도로 수요가 폭증했습니다. 소매업체는 올해 들어 공기청정기 판매량이 30% 급증했다고 전하죠.인도 언론과 유튜브엔 어떤 공기청정기를 사야 할지에 대한 구매 정보가 넘쳐납니다. 현재 시장 점유율은 필립스, 하니웰, 샤프, 유레카포브스 순. 특히 최근엔 프리미엄급 제품 판매가 늘었다는데요. 지난해 102만대였던 인도의 공기청정기 판매 대수는 2032년이면 423만대로 늘어날 거란 전망도 나옵니다.하지만 이 공기청정기 판매 열풍은 인도에선 어디까지나 일부 중상류층 이야기일 뿐이죠. 서민들에게 한 대에 최소 1만 루피(16만원)를 훌쩍 넘는 공기청정기는 그림의 떡입니다. 주기적으로 필터를 사서 갈아줘야 하는 것까지 생각하면 부담이 너무 크죠. 오죽하면 요즘 인도 SNS에선 ‘2000루피(약 3만원)로 DIY 공기청정기 만들기’ 게시물이 큰 호응을 얻고 있을 정도인데요.집과 사무실은 물론이고, 차 안에까지 공기청정기를 설치한 상류층의 모습은 서민들에게 큰 박탈감을 안겨줍니다. 얼마 전 레딧에 인도인이 올린 게시물이 화제였는데요. 한 정부 기관의 공무수행용 차량에 달린 필립스 공기청정기 사진이었죠. 거기엔 이런 글이 달렸습니다. “의사결정권자들은 문제의 불편함과 긴박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긴급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건지도 몰라요. 숨 쉬는 공기조차 더 이상 공평하게 공유되지 않습니다. 이제 이 나라엔 희망이 없어요.”물뿌리기가 오염 방지책? 이쯤 되면 당연히 정부는 뭐하냐는 분통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많이 늦긴 했지만 주정부도 조치를 취하긴 했습니다. 10월 초부터 석탄·장작 사용 금지를 포함한 ‘단계별 대응 조치’를 발동한 거죠.하지만 이게 큰 의미가 없는 게, 가정에서 나무 장작으로 밥 지어 먹는 건 수도권 도시민이 아니죠. 인근 다른 지역 농민들이 땔감을 태워서 나온 연기가 바람을 타고 델리까지 날아옵니다. 즉, 주정부 혼자 나선다고 될 일은 아닙니다.화끈한 해결책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가운데, 법원은 자꾸 엇나간 판결로 발목을 잡습니다. 지난 10월 법원은 2020년부터 금지해 온 디왈리 축제 기간의 폭죽 터뜨리기를 허용했죠. 기존 제품보다 오염물질을 20~30%로 적게 배출하는, 이른바 ‘그린 크래커(Green Crackers)’에 한해 허용한다는 판결이었는데요. 친환경 폭죽이라는 게 가능한 개념일까요.또 델리 주정부는 대기오염을 유발하는 노후 차량(10년 이상 된 경유차, 15년 이상 된 휘발유차)의 도로 주행을 막기 위해 7월부터 모든 주유소에서 연료 공급을 중단했는데요. 서민들만 먹고살기 힘들어진다는 반발이 컸고요. 결국 이 조치 역시 법원 판결로 무력화되면서, 연료 공급은 재개됐습니다.그 결과, 현재로선 눈에 띄는 조치라면 ‘안티 스모그 총’ 정도. 큰 물탱크를 실은 트럭이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분무기로 물을 쏘아 미세먼지를 가라앉히는 건데요. 델리 주정부는 올해 11월부터 이런 차량 200대를 수도권에 배치해 운행 중이죠. 아주 일시적이긴 하지만, 물을 뿌린 곳의 오염도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긴 합니다.하지만 시민들은 이를 반기긴커녕 의심합니다. 도심 곳곳엔 공기질 측정을 위한 관측기가 있는데요. 이 안티 스모그 총이 일부러 관측기 근처에 물을 뿌려서 수치를 좋아 보이게 만들고 있는 것 아니냐는 거죠. 특히 야당은 ‘대기질 측정 관측기 주변에 밤낮으로 물을 뿌려서 데이터를 조작하고 있다’고 비판을 이어가는데요. 많은 이들이 이 ‘조작설’을 상당히 믿는 분위기입니다.얼마 전 인도 언론이 ‘델리의 올해 1~11월 평균 대기질 지수(AQI)가 187로 2020년 코로나 기간을 제외하고 8년 만에 최저’라는 통계 기사를 썼는데요. 레딧에선 이런 반응이 터져 나왔습니다. “뭐야! 정신 나갔어?!”비상상황인데 중앙정부는 어디에?이대로는 도저히 안 됩니다. 아무리 나라 경제가 연 7~8%대 고도성장을 하면 뭘 하나요. 국민들이 숨 쉬고 살기조차 힘들다는데. 설사 공기청정기를 살 만큼 부유하다 해도 대기오염을 옹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 뿌리기 같은 임시방편이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건 주정부가 아닌 중앙정부, 즉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나설 일이죠.인도가 지방분권이 매우 강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3000만명이 사는 수도권의 대기오염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른 건 2018년쯤부터. 언제까지 이렇게 두고 볼 수만은 없죠. 아직은 무능한 주정부를 탓하지만, 언제 그 화살이 모디 정권으로 향할지 모릅니다. 블룸버그 칼럼니스트 미히르 샤르마가 “중앙정부는 이상하게도 지속가능한 해결책 마련에 소극적”이라며 “그건 (모디 총리의) 오판”이라고 지적하는 이유이죠.그리고 중앙정부가 나서서 일관되고 강력하게 정책을 펼친다면, 대기 오염 문제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걸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들이 있는데요. 바로 영국과 중국이죠.1952년 12월 5~9일 런던에 ‘그레이트 스모그(Great Smog)’가 덮치면서 1만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던 영국. 이를 계기로 영국 의회는 1956년 세계 최초로 청정대기법을 제정합니다. 가정 연료를 석탄에서 전기나 가스로 전환하고, 화력발전소를 외곽으로 옮기고 굴뚝은 높이 올렸죠. 이후 검은 연기와 이산화황 농도는 극적으로 떨어졌고, 대기질은 확연히 개선됐습니다.2013년 1월, 중국은 북동부 지역을 덮친 끔찍한 스모그는 무려 한달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중공업 공장에서 배출하는 가스와 차량 매연이 합쳐져 하늘이 회색빛으로 변한 사진이 전 세계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고요. ‘에어포칼립스(airpocalypse·공기오염 대재앙)’라 불렸는데요.2013년 3월 출범한 시진핑 정부는 대기오염 해결을 부패 척결에 버금가는 시급한 과제로 삼았습니다. 이대로 놔뒀다가는 정권을 흔들만한 큰일이라고 판단하고, 칼을 빼 든 거죠. 대기오염과의 전쟁을 위한 1조7000억 위안(354조원) 규모의 대대적인 계획(2013-2017 대기오염 방지 행동 계획)이 실행됩니다. 불법 탄광과 비효율적 제철소를 폐쇄하고, 석탄 난방을 단속하고, 태양광·풍력 발전소에 대규모로 투자하고, 자동차 배출 기준을 강화했죠.2013년 정점을 찍은 중국의 초미세먼지(PM-2.5) 수치는 10년 만에 54% 감소했습니다. 물론 스모그가 가장 극심했던 허베이성은 지금도 겨울만 되면 공기질이 악화되곤 합니다. 하지만 과거 AQI 수치가 500으로 치솟았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150 정도. 공기질이 썩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에어포칼립스’나 ‘에어마겟돈’에선 벗어났습니다. 해외 전문가들이 ‘놀라운 반전’이라고 평가할 정도인데요.결국 얼마나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국가 차원에서 총력전을 펼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지방 분권의 나라, 인도는 언제쯤 ‘대기오염과의 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될까요. By.딥다이브혹시 인도 북부 여행을 갈 일 있으시다면 마스크를 꼭 챙기시길 당부드리며.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대기질 수치 300 이상. 인도의 수도권 델리 지역은 10월부터 극심한 스모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델리 주민 수명을 8년 이상 줄일 정도의 심각한 대기오염이죠.-공기청정기가 품절될 정도로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기청정기를 살 여유가 있는 이들은 인도에선 중상류층뿐. 서민들은 ‘이제 숨 쉬는 공기마저 다르다’면서 분통을 터뜨립니다.-하지만 주정부의 대응은 느리고 부족합니다. 기껏해야 ‘안티 스모그 총’이라며 분무기를 뿌리는 수준. 시민들은 데이터 조작용이라고 의심합니다.-중앙정부 차원의 강력한 대응이 필요한 게 아닐까요. 결국 의지와 실행력의 문제인데, 아직까진 너무 소극적입니다. *이 기사는 12월 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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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도체 자립’ 꿈은 이루어진다? 글로벌 ‘쩐의 전쟁’ [딥다이브]

    인공지능 시대, 전 세계가 갖고 싶어서 안달난 산업이 있죠. 바로 반도체 제조업인데요. 이 반도체 제조업을 키우기 위한 ‘쩐의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부활’을 외치며 마구 내달리는 일본, ‘반도체 제조국’ 문턱에 이제 막 선 인도, 오일머니를 내세운 아랍에미리트까지.특히 정부 지원을 기반으로 가파르게 성장한 중국 반도체 기업의 최근 기세는 무서울 정도입니다. 왜 각국이 지금 반도체에 이렇게까지 사활을 거는 걸까요. 오늘은 글로벌 반도체 쩐의 전쟁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2월 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일본판 TSMC? 그게 돼?“정부가 추진하는 위기관리 투자의 핵심이며, 국가의 이익을 위해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는 국가적 프로젝트입니다.”지난 11월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산업성 장관이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의 제 2공장 신설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렇게 말했죠. 라피더스가 뭐길래 이렇게까지 비장한가 싶은데요. 위탁생산, 즉 파운드리를 전문으로 하는 반도체 기업입니다. 토요타·키옥시아·소니·NTT 등 일본 대기업 8곳이 공동으로 2022년 설립했죠. 사실상 일본 정부가 대기업들을 동원해서 만든 신생 ‘반도체 연합군’입니다.일본은 이걸 왜 하게 됐을까요. 2020년 코로나가 일어나고 한동안 공급 차질로 반도체가 동나서 전 세계가 난리였잖아요. 그때 일본이 깨달은 거죠. 아, 반도체를 우리 스스로 못 만들면 이러다 큰일 나겠구나. 특히 초미세 공정 반도체를 만드는 곳은 대만과 한국, 미국밖에 없는데, 계속 이들 국가에만 의존해선 안 되겠구나.일본은 이미 2000년대 초반, 반도체 미세화 경쟁에서 탈락했습니다. 현재 일본에선 40나노짜리 범용 제품만 양산할 수 있죠. 그런데 일본에서 대가 끊긴 지 오래인 미세공정 파운드리 산업을 되살리겠다고 국가가 깃발을 들고 나선 겁니다. ‘일본의 TSMC’를 만든다는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요.당연히 쉬울 리 없죠. 최첨단 반도체 공정 기술은 양산 경험이 누적되면서 단계적으로 쌓여가는 겁니다. 18, 14, 10, 8, 7, 6, 5, 4, 3나노. 이런 식으로 단계를 거쳐야 2나노, 1.4나노 초미세 공정을 위한 기술 노하우를 쌓을 수 있는 거죠. 경험 없이 돈과 장비만 쏟아붓는다고 갑자기 점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현재 라피더스는 미국 IBM으로부터 미세공정 기술을 공여받아, 이제 막 2나노 공정 시제품을 만드는 단계이고요. 2027년 양산에 들어간다는 계획인데요. 하지만 업계에선 ‘저게 되겠냐’, ‘만들어봤자 사줄 고객사가 없다’라며 회의론도 나옵니다.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2027년 두 번째 공장 착공을 새롭게 발표한 겁니다. 이 새 공장은 1.4나노 공정을 채택한다고 하죠. ‘반도체 부활’의 마지막 희망, 라피더스의 성공에 일본 정부가 사활을 걸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요. 일본 언론은 제2공장 건설에 정부 지원과 대출 보증, 민간기업 출자로 2조엔(약 19조원) 이상이 들 거라고 전망했죠.이렇게 되면 2022년부터 2031년까지 라피더스에 총 7조엔(약 66조원)을 투자한다는 뜻이 되는데요. 일본 정부는 이례적으로 민간기업 라피더스에 대해 대출 보증까지 서면서 영혼까지 끌어모아 지원하고 있죠.솔직히 성공 확률 면에서 여전히 무모한 도전 같아 보이는데요. 다카이치 사나에 정부는 ‘첨단 반도체는 경제 안보의 문제’라고 강조합니다. 그만큼 진심이고 집요한 거죠.“21세기 디지털 다이아몬드”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반도체 제조의 중요성에 눈을 뜬 건 일본만이 아닙니다. 세계 최대 인구 대국, 인도도 마찬가지인데요. 사실 인도는 반도체 설계 분야에선 역량이 상당한 나라입니다. 인텔, AMD 같은 글로벌 기업이 연구개발 센터를 운영 중이니까요. 전 세계 반도체 설계 인력의 20%(약 12만5000명)가 인도에 있습니다.하지만 반도체 제조에선 완전히 불모지이죠. 설계만 하고 만들지를 못합니다. 저사양 반도체를 주로 중국에서 수입해서 쓰곤 있는데, 인도와 중국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죠. 이러다 중국이 갑자기 반도체 수출을 중단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늘 있습니다.그래서 2021년 인도 정부가 이래선 안 되겠다, 우리도 국산 칩을 만들어야겠다면서 ‘인도 반도체 미션(ISM)’이라는 걸 출범시켰어요. 해외 반도체 기업이 인도에 제조공장을 만들면 아주 파격적으로 지원해 주기로 한 거죠. 지원이 어느 정도냐면 인도 정부가 투자비의 절반을 직접 대주고요. 주 정부가 세금 감면과 보조금으로 추가로 20~25%를 지원해 줍니다. 작정하고 마구 퍼주기로 한 건데요.지금까지 ISM 승인을 받은 프로젝트는 10개. 총 예상 투자비가 1조6000억 루피, 한화로 26조원에 달합니다.그리고 이렇게 설립한 반도체 공장에서 최초의 ‘메이드 인 인디아’ 칩이 올해 말쯤 처음 출시될 예정이죠. 물론 저사양 반도체이지만, 그렇게 꿈꿔왔던 반도체 제조국으로 올라선다는 점에서 큰 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반도체를 21세기의 “디지털 다이아몬드”라고 칭합니다. 20세기에 “검은색 금”으로 불리던 석유와 맞먹는다는 뜻인데요. 그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지난 세기는 석유가 지배했지만, 이젠 (세계 경제가) 작은 반도체 칩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는 인도와 함께 반도체의 미래를 건설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제조업에 취약한 인도가 ‘반도체 제조 허브’라는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을까요.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거대한 인프라를 구축한다는 것 자체가 만만찮고요. 벌써부터 인도 국민들 사이에선 반도체 기업에 대한 보조금이 너무 과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죠.그래도 인도 정부의 의지만은 확고해 보입니다. 인도의 싱크탱크 탁샤실라 연구소의 프라나이 코타스타네 부소장은 인도 같은 큰 나라가 반도체 육성에 자원을 대대적으로 쏟아붓는 건 당연하다고 평가하죠. “이러한 노력이 없다면 인도는 단순히 경기에서 밀려나는 게 아니라, 경기장에 들어가지도 못할 겁니다.”중동에 반도체 제조 허브를?반도체 제조국이 되려는 야망에 불타는 부자나라도 있죠. 바로 중동의 석유 부국 아랍에미리트(UAE)인데요. ‘포스트 오일 시대’를 준비 중인 UAE는 반도체 제조 거점이 되겠다며 해외 기업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아부다비 경제개발부는 아예 홈페이지에 “반도체 기업을 유치하겠다”라고 소개하고 있을 정도죠.올봄엔 대만 TSMC가 아랍에미리트에 첨단 반도체 공장을 건립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란 블룸버그 기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일단 TSMC 측이 그럴 계획이 없다고 이를 부인했지만, UAE가 반도체 제조업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는 건 틀림 없는데요. 첨단 반도체 생산이 가능한 제조공장(업계 용어로 ‘팹’)을 하나 건설하려면 200억~400억 달러(29조~58조원)가 들죠. 패키징, 테스트, 연구개발까지 전체 생태계까지 구축하려면 투자액은 1000억 달러(127조원)를 훌쩍 넘을 거고요. 그리고 이에 있어 UAE의 가장 큰 강점은? 단연 자본력입니다. 총 2조4900억 달러(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 3위)에 달하는 막대한 국부펀드를 보유한 나라니까요.또 풍부한 에너지, 물류 인프라, 규제 유연성 역시 UAE가 가진 장점으로 꼽히는데요. “UAE는 대규모 장기 전력 공급이 가능하고, 세계적 수준의 항만과 공항이 있고, 신속한 의사결정이 가능하다”(미국 중동연구소의 모하메드 솔리만 선임 연구원)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죠.물론 반도체 공정엔 깨끗한 물이 필수인데 이를 어디서 끌어오느냐(아마도 담수화?), 그리고 제조 역량을 가진 전문가를 유치할 수 있느냐(대만이나 한국에서 유치?)가 관건인데요. 결국 중요한 건 국가의 확고하고도 전폭적인 지원이 뒷받침되느냐이겠죠.미국 시장조사업체 IDC의 마리오 모랄레스 반도체 그룹 부사장은 “이 지역에서 (반도체 제조가) 실질적인 성과를 내기까지는 10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면서도 긍정적인 관점을 유지합니다. “이런 것들은 개발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걸릴 뿐이죠.”CXMT와 차이나머니의 힘이렇게 정부가 온 힘을 다해 밀어주면 반도체 자립으로 갈 수 있을까요.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나라가 바로 중국입니다. 얼마 전인 11월 23일 중국 D램 반도체 제조기업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 약자로 CXMT가 DDR5 신제품을 내놔서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는데요.DDR5는 2020년 SK하이닉스가 처음 상용화했고, 현재로선 가장 최첨단 D램입니다. 중국 CXMT는 이 전 모델인 DDR4를 주력으로 하는 곳이죠. 프리미엄급이 아닌 범용 제품을 싸게, 가성비 좋게 만들어 파는 기업이고요. 작년부터 DDR5 칩을 내놓긴 했지만, 성능 면에서 한국 제품과 차이가 컸는데요.이번에 CXMT가 8000Mbps 속도의 초고성능 DDR5를 선보인 거예요. 갑자기 기술 격차가 사라진 거죠. 물론 수율, 즉 정상 제품 비율이 얼마나 되느냐가 관건이긴 하지만, 예상보다도 추격 속도가 훨씬 빠릅니다. 앞으로 양산 경험이 쌓이면서 기술이 성숙해진다면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죠.그럼, CXMT는 도대체 어떤 기업이냐. 중국 지방정부가 만들고, 중앙정부가 키운 D램 제조기업입니다. 일단 본사가 있는 허페이시가 최대 주주이고요. 중국 정부가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만든 ‘국가 집적회로 산업투자 기금’이 주요 주주로 돈을 댔죠. 정확한 금액은 확인되지 않지만, 업계에선 중국 국유펀드에서 총 343억 위안(약 7조원)가량을 투자받았을 거라고 추정합니다.여기에 알리바바, 텐센트 등 중국 주요 기업도 투자자로 참여했습니다. 한마디로 민관이 똘똘 뭉쳐서 밀어주고 있어요. 2016년 설립돼 2019년에야 처음 생산을 시작한 CXMT가 단기간 이렇게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건 이런 아낌없는 지원 덕분이죠.D램 시장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이 빅3가 94% 점유율을 기록하는 과점체제인데요. 시장 분석기관인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1분기 6%인 CXMT 점유율이 올 연말이면 8%로 높아질 전망입니다(생산량 기준). 특히 1%에 불과했던 DDR5 시장 점유율이 7%로 커질 거라고 하죠. 물론 아직까진 고객이 중국 기업이긴 한데요. 그래도 꾸준히 점유율을 높여가는 데다, 첨단 제품까지 진출한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그리고 CXMT는 막대한 돈이 드는 반도체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카드도 준비 중인데요. 바로 주식시장 상장입니다. 이미 IPO를 위한 예비 심사를 끝냈다고 하고요. 아마도 내년 초쯤 상장을 신청하지 않을까 싶은데요.벌써부터 CXMT 상장이 중국 상하이 증권거래소 사상 최대 규모의 IPO가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죠. 성공적인 상장으로 투자금을 끌어모은다면, CXMT의 내년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 (HBM3E) 양산은 더 속도를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만큼 한국 메모리 반도체 산업엔 위협요인이 될 거고요. 반도체 시장의 ‘차이나 머니’ 공습이 더 거세집니다. By.딥다이브글로벌 분업화를 바탕으로 성장해 왔던 반도체 산업. 하지만 미·중 갈등과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분업화에 대한 믿음은 깨졌고, 각 나라가 ‘부활’과 ‘자립’을 외치며 제 살길 찾기에 나서는 양상입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반도체 제조업을 키우기 위한 쩐의 전쟁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대가 끊긴 미세 반도체 공정의 부활을 위해 반도체 연합군 라피더스를 2022년 출범시킨 데 이어, 2027년 두 번째 공장 착공을 최근 선언했죠. 반도체 제조를 경제 안보의 문제로 보기 때문입니다.-반도체 제조의 불모지였던 인도도 육성에 대단히 적극적입니다.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지원 덕분에 올해 말 드디어 첫 ‘메이드 인 인디아’ 칩을 생산할 수 있게 됐죠. 20세기 석유가 ‘검은색 금’이었다면 21세기 반도체는 ‘디지털 다이아몬드’입니다.-UAE 역시 첨단 반도체 제조공장 유치를 위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중동의 반도체 제조 허브’가 되기 위한 만반의 준비가 돼 있다고 주장하는데요. 깨끗한 물과 제조 인력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중국은 최근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가 8000Mbps 최첨단 DDR5 칩을 선보이며 업계를 놀라게 했죠. 정부의 막대한 지원에 힘입어 단기간 성장한 중국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이제 IPO로 다시 한단계 도약할 전망입니다. *이 기사는 12월 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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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욕 브루클린 핫플은 왜 공실일까? 글로벌 상업용 부동산의 세계 [딥다이브]

    몇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임대차 계약. 그런데 세입자가 제시된 임대료가 싼지 비싼지도 모른 채 ‘그냥 하던 대로’ 재계약하자는 임대인 얘기만 믿고 덜컥 사인한다면?설마 내가 살 집 구할 때야 이럴 일 없겠죠. 하지만 기업이 사무실을 구할 때, 특히 해외 오피스를 계약할 땐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데요.최근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이 급격히 늘면서 새롭게 뜨는 영역, 기업의 해외 부동산 관리에 대해 전문가와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요즘 가장 뜨거운 오피스 시장은 어딘지도 알려드릴게요. 글로벌 부동산 서비스 기업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의 전혜원 글로벌코리아데스크 팀장입니다.*이 기사는 11월 2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기업의 해외 부동산 운영은 주먹구구식?-최근 들어 한국 여러 대기업의 해외 부동산 자산 관리를 맡으셨더라고요. 대기업은 해외에 조직과 인력이 많잖아죠. 그런 큰 기업은 부동산 업무도 자체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전문업체가 필요하죠?“물론 매우 큰 기업이고, 유능한 직원들을 뽑아 해외로 내보내고 있는데요. 문제는 주재원 임기가 보통 4년이란 점이죠. 엔지니어나 경영직 분들은 보통 부동산 업무를 해본 적도 없고요. 또 매출과 수익성 같은 본업 챙기기 바쁘다 보니, 부동산 임대차 계약을 분석할 시간도 없죠. 그래서 저희가 임대차 계약서를 들여다보면 ‘왜 이 가격에?’라고 할 때가 많아요. 시장이 고꾸라져서 임대료 시세가 하락했는데 10년, 15년째 별다른 협상 없이 계약 연장 중인 거죠. 무엇보다 4년마다 바뀌니까 인수인계도 안 되고 계약서 원본이 없는 경우도 있고요.”-4년 있다 떠나는 주재원이 챙기기엔 역부족이군요.“해외사업이라는 게 지정학적 이슈에 따라 특정 지역이 좋아지기도, 나빠지기도 하거든요. 그럼 어딘가는 추가 투자를 하고 어딘가는 비용을 줄여야 하는데, 기업 입장에서 비용 절감에 가장 효과적인 게 부동산이에요. 본사가 전 세계 부동산 정보를 투명하게 알고 있으면, 그걸 컨트롤할 수 있죠. 구글이나 MS 같은 글로벌 기업은 아예 부동산만 담당하는 전문 팀이 본사에 있거든요. 거기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데, 우리 기업들은 이제 시작 단계이죠.”-그럼 기업의 목표는 결국 효율화이로군요. “그래서 지금 임대차 계약서들을 하나씩 다 들여다보고 있어요. 만약 시장 평균가보다 임대료를 높게 내고 있는 경우엔 뜯어고치는 작업에 들어가야 하니까요.”-그런데 과거보다 임대료가 고꾸라진 지역이 있나요? 미국에도?“미국 오피스 시장은 지금도 아직 두 자릿수대 공실률을 보이고 있어요. 신축과 프라임, A등급 빌딩 쪽으로 쏠림 현상이 나타나서요. 10년 이상 된 오피스빌딩은 평균적으로 공실률이 높죠. 그래서 투자자들이 이걸 재개발해서 호텔, 아파트, 연구개발 센터로 바꾸는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브루클린 핫플은 왜 공실일까 -최근에 미국 뉴욕에 진출한 토스증권과 키움증권의 오피스 신규 임대 프로젝트를 진행하셨는데요. 뉴욕 오피스 시장은 분위기가 어떤가요?“뉴욕은 언제나 전 세계에서 가장 우량한 핵심 안정형 자산이죠. 특히 나스닥 IPO를 노리는 기업이라면 특히 뉴욕을 거점으로 선호하는데요. 투자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 뉴욕 오피스 시장은 완전히 저점을 쳤습니다.오피스 빌딩 가격이 가장 비쌌을 때가 코로나 직전이었어요. 코로나가 터지면서 많은 기업이 재택근무로 전환하고, 공실이 늘다 보니까 투자자들은 임대 수익률도 안 나고, 팔리지도 않아서 골치 아팠는데요. 지금도 여전히 (매매가격은) 코로나 이전 대비 거의 20% 저렴해요.그런데 미국 동료들과 얘기해 보면 지금이 확실히 저점이고요. 조금씩 투자 기조가 회복되고 있어요. 또 연준의 금리 인하 기조까지 고려하면 내년, 내후년엔 거래가 활성화될 전망이고요. 만약 오피스 매물에 투자를 고려한다면 지금 사는 게 맞는 거죠. 다만 팔려고 하는 사람이 없는 게 문제입니다.”-재택근무도 끝나가고 금리도 내리면서 다시 살아나는 분위기로군요.“그런데 임대 관점에서 보자면 좀 달라요. 사실 오피스라는 게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근무한다’는 직원들의 자부심이나, 브랜드 마케팅적인 부분도 있거든요. 그런데 뉴욕은 지난 7월에도 총기사고로 블랙스톤의 유명한 임원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보안이 중요해서요. 보안이 잘 된 신축의 좋은 오피스 자산과 그렇지 않은 자산의 선호도 차이가 커요. B, C등급 자산은 여전히 임대가 잘 안되죠.오피스 자산의 양극화가 분명한데요. 뉴욕 안에서도 주요 대기업과 금융사가 밀집한 미드타운은 거래가 아주 잘 되고요. 그보다 아래쪽에 있는 오피스 자산은 좀 힘들죠. 브루클린에선 오래된 ‘도미노 설탕정제 공장’을 고급 오피스로 만든 게 상당히 주목받고 화제가 됐는데요. 지금은 그걸 보유한 개발사가 임대가 잘 안돼서 힘들어하고 있다고 해요.”-도심 한복판이 아니어서 그럴까요?“교통 접근성이 떨어지기도 하고요. 또 규제 때문에 옛 공장 벽면을 유지하면서 오피스를 만들어야 했는데요. 그러다 보니까 채광이 안 좋아요. 오피스 자산은 교통과 채광, 그 두 가지가 정말 중요하거든요. 업계에선 ‘저걸 왜 오피스로 만들었을까. 주거시설로 만들었으면 참 잘 됐을 텐데’라는 의견이 나와요.”-듣기엔 성수동 같고 멋지겠다 싶은데, 오피스로는 아닌 거군요. 그런데 미국만이 아니라 타이베이, 홍콩, 자카르타, 암스테르담, 리야드 등. 전 세계 여러 도시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셨는데요. 요즘 특히 뜨는 도시가 있을까요?“리야드와 두바이, 중동의 이 두 시장이 오피스 쪽에선 가장 핫해요. 리야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비전 2030’을 발표한 이후에 우리 기업들이 기술 이전을 위해 많이 나가고 있고요. 두바이는 지금 전 세계 기업이 몰리면서 경쟁이 치열할 정도예요.또 인도는 하이드라바드, 벵갈루루같이 IT 중심인 도시들이 핫합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미국이 수요가 많죠. ‘메이드 인 USA’ 기조가 심해지고, 고관세가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보니 현지 생산에 대한 니즈가 커졌고요. 그래서 기업들이 공장과 물류 창고 쪽으로 신규 거점을 많이 찾아보고 있어요.”미국 공장 매입을 말리는 이유 -기업과 일하시면서 특별히 어려운 점이 있을까요?“현지 관행에 대해 이해시켜 드리는 게 좀 어려운 점인데요. 예를 들어 우리 기업들의 약간 특징적인 게, 해외에서 비즈니스를 할 때 꼭 임대가 아니라 매수만 찾는 경우가 있어요. 특히 공장이나 물류창고의 경우에요. 워낙 큰 비용이 드니까, 나중에 팔아서 수익을 올리고 싶어 하는 거죠.”-땅값이 올라서 남을 거라고 계산하나 보네요. 한국에선 그런 경우가 많았으니까.“그런데 미국의 경우 이미 공장을 운영했던 땅을 ‘브라운 필드’라고 부르는데요. 기존 공장을 철거하고 새 공장을 짓기 위해 이런 땅을 매입하는 경우엔 리스크가 있습니다. 만약 해당 주나 도시에서 환경 오염 문제로 소송을 거는 경우, 그 책임을 땅 소유자가 져야 해요.”-그런 소송이 많은가 보죠?“네. 만약 소송으로 가서 손해배상금 판결이 나면 소유자가 물어줘야 해요. 그래서 저희는 브라운 필드를 매매하기보다는 ‘99년 임대’를 추천해 드리기도 하죠.”-99년 임대가 있어요?“네. 사실 미국 기업이 이미 많이 쓰는 전략이에요. 구글도 실리콘밸리 근처에 있는 나사(NASA) 부지를 그런 식으로 장기 임대해서 캠퍼스로 쓰고 있죠.”-99년 임대이면 임대료 같은 건 어떻게 될까요?“저희가 그 99년 동안 임대료가 매년 크게 상승하지 않도록 캡(상한선)을 씌우는 작업을 하고요. 중도해지권도 넣을 수 있어요. 중간에 당국의 규제 등이 바뀌면 해지를 요구할 수 있게 하는 거죠. 사실 99년이라고 하면 거부감을 많이 갖긴 하는데, 중도 해지도 가능하고, 소유해서 지게 되는 법적 책임도 피할 수 있죠. 또 99년이면 초기 공사비용과 인테리어 비용은 충분히 뽑게 되고요. 다만 이런 부분을 실무진뿐만 아니라 그 위 경영진에도 이해시키는 게 좀 어려운 것 같아요.”-여러 기업을 담당하셨는데, 앞으로 이런 서비스를 원하는 고객사가 더 많아질까요?“좋은 브랜드를 가진 한국의 다국적 기업들이 계속 늘어만 가잖아요. 얼마 전 농심의 암스테르담 오피스 신규 계약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요. 네덜란드가 K-푸드 수출액 성장률 1위 국가라고 해서 뿌듯했어요. 우리 기업이 계속 해외로 확장해 나갈 거기 때문에 저희가 할 일은 더 많아질 거고요. 한국을 잘 모르는 해외의 빌딩 임대인에게 좋은 한국 기업들을 소개하는 것도 이 업무를 하는 재미이자 보람입니다.” By. 딥다이브*이 기사는 11월 2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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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생산성 시대: 영어 못하는 중국 개발자, 선진국에서 연 15억 번다[딥다이브]

    바이브 코딩(Vibe coding)을 아시나요. 일상 언어로 인공지능(AI)과 대화하며 ‘느낌(vibe)’을 전달하면 AI가 알아서 코딩을 해준다는 의미인데요. 오픈AI 공동창업자 안드레이 카파시가 올해 2월 처음 소개한 용어로, 얼마 전 영국 콜린스 사전이 ‘올해의 단어’에 선정한 화제의 기술 트렌드입니다.프로그램 개발의 장벽을 허물어버린 AI.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나 1인 창업이 가능하다’, ‘1인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도 나올 거다’라는 말이 나오는데요.이런 트렌드를 생생하게 보여준 한 인물이 최근 미국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특이한 점은 그가 영어를 거의 할 줄 모르는 중국인 개발자라는 점이죠. ‘초생산성’을 달성한 바이브 코더는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1월 26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도대체 이 슈퍼 헤비유저는 누구야?월 200달러(29만원) 요금제 가입자가 한 달 동안 무려 5만 달러(7300만원)어치 토큰을 사용한다면? 지난 7월 AI 모델 ‘클로드(Claude)’를 운영하는 미국 기업 앤트로픽(Anthropic)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누군가가 하루 24시간 내내 말도 안 될 정도의 엄청난 사용량을 기록한 거죠.화들짝 놀란 앤트로픽은 부랴부랴 전체 사용자를 대상으로 속도 제한을 건다고 공지했습니다. 이를 두고 미국 SNS 플랫폼 레딧에선 ‘이 슈퍼 헤비유저는 착취자인가, 정당한 사용자인가’에 대한 한바탕 토론이 벌어졌죠.이 사태를 초래한 주인공은 중국 베이징에 사는 개발자 류샤오파이(刘小排). 중국 IT 기업 치타모바일에서 일하다 10년 전 독립한 프로그래머입니다. 그는 클로드 코드, 커서 같은 ‘바이브 코딩’ 제품을 이용해 AI 소프트웨어 12개를 개발해 출시했고요. 이를 통해 연간 약 100만 달러(약 14.7억원)의 수익을 창출한다는데요.에이, 과장 아니냐고요? 그가 출시한 제품은 이런 겁니다. 이미지 생성기 ‘라파엘AI’, 음성 생성기 ‘애니보이스’, 텍스트나 이미지를 3D로 변환하는 ‘패스트3D’. 들어가 보시면 알겠지만 중국색은 전혀 찾을 수 없죠.12개 제품의 하루 평균 방문자 수는 약 20만명. 대부분이 무료 이용자이지만, 매일 약 200건의 새로운 유료 구독자가 발생한다는데요. 매출이 발생하는 국가 1위는 미국, 2위 독일, 3위 일본 순입니다.아마 이용자들은 이 사이트 개발자가 영어를 거의 못 하는 중국인이란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 겁니다. 언뜻 보기엔 미국이나 유럽 어딘가의 스타트업이 만들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주니까요. 혹독한 현실이 혁신을 낳았다바이브 코딩으로 나 홀로 창업자가 연 매출 15억원이라니. 흥미가 좀 생기시나요? 미국의 IT 전문 작가 아프라 왕이 얼마 전 이 류샤오파이를 인터뷰했는데요. 그는 중국 IT 업계의 혹독한 현실이 중국 바이브 코더들을 강하게 만든다고 설명합니다.중국 시장은 경쟁이 무지막지하게 치열한 데다, 소비자들이 유료 소프트웨어에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죠. 중국 내수 시장에선 웬만해선 AI 스타트업으론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은 처음부터 해외 시장을 노리는데요.중국 IT기업 개발자의 평균적인 삶-‘996(하루 12시간 주 6일 근무)’에 연봉 3만 달러 남짓(중간소득 기준)-이란 실리콘밸리처럼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업에 도전할 만한 거죠.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 사업 모델은 간단합니다. 제 아이디어로 소프트웨어 제품을 만들고 선진국 사용자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거죠. 가장 중요한 건 코딩과 운영입니다.”그는 월 5만 달러어치 토큰 사용은 어렵지 않았다고 얘기합니다. “컴퓨터 여러 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클로드를 계속 실행해서 작업을 처리하면 됩니다. 어렵지 않아요. 잠자는 동안에도 클로드를 계속 작업시키면 하루 1000달러 이상 토큰 사용량은 쉽게 달성할 수 있죠.”그는 코딩뿐 아니라 거의 모든 작업을 AI를 이용해 자동화했는데요. 예를 들어 제품 이름을 정하고 웹사이트 도메인을 정하는 작업을 AI에 맡깁니다. “제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작성한 뒤, 클로드에게 이 정보를 조합해 1만개의 적절한 도메인을 자동 생성하고 등록 상태를 조회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죠. 5~6시간 뒤 결과가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표준 운영 절차를 자동화했어요.”류샤오파이는 베이징 자신의 사무실을 다른 바이브 코더들과 함께 쓰는 공유오피스로 운영합니다. 일종의 바이브 코더들의 커뮤니티를 형성한 건데요. IT 대기업 출신의 전직 프로덕트 매니저(PM)가 커뮤니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는 “주요 기술 기업 출신 프로덕트 매니저(PM)들이 AI 시대의 승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말하는데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기술 대기업이 관료화되면서 천문학적인 내부 커뮤니케이션 비용을 지출하고 있어요. 무언가를 만들려는 PM은 팀원과 상사, 더 위의 상사를 설득해야 하죠.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몇 달이 지나갑니다. (…) PM들은 (제품 개발의) 프로세스를 본능적으로 이해해요. 이전엔 코드 작성만 이해하지 못했죠. 하지만 오늘날 AI 바이브 코딩이 그 공백을 메웠습니다. 이제 아이디어가 생기면 누구에게 구걸할 필요가 없죠. 일주일 만에 직접 만들어 냅니다. 잘 팔리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죠. 다음 주에 다른 걸 시도하면 되니까요.”그러면서 지난해 11월 텐센트를 그만두고 나와서 바이브 코딩을 독학한 뒤, 올해 5월 중국식 사주팔자를 영어로 알려주는 앱을 개발한 바이브 코더 사례를 소개합니다. 처음엔 고작 월 100달러 남짓 벌었지만, 이젠 제품을 추가하면서 하루 1000달러씩 벌고 있다죠.하지만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 내로라하는 기술 대기업들이 전부 AI에 올인하고 있는데. 그 고래들 틈에서 바이브 코더 1인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류샤오파이는 오히려 개인 개발자나 소규모 팀에 기회가 열려있다고 말합니다. 대기업은 포착하지 못하는 틈새시장이 널려있기 때문이라는데요.“핵심은 매우 구체적인 사용자 요구사항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예컨대 틱톡에 올라온 AI 생성 영상을 직접 복제해서 자기 모습을 그대로 옮겨 담을 수 있는 도구를 개발한다면, 사용자는 돈을 낼 겁니다. 이 도구 없이 구글 베오(Veo)나 오픈AI 소라2(Sora2)를 이용해선 이런 결과를 쉽게 얻을 수 없을 테니까요. 바이트댄스나 구글 같은 대기업은 이런 기회를 감지조차 할 수 없습니다. 대기업은 기술을 강조하지만, 현실 세계에선 승리하기 위해 ‘기술적 해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AI 앱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건 기술에 달린 게 아니라, 사용자 니즈를 파악하는 데 달려있으니까요. 제 주변엔 바이브 코딩만으로 월 5만 달러(약 7400만원) 넘게 버는 사람이 12명쯤 있습니다.”‘초생산성’의 시대가 온다AI 기술로 솔로프리너(Solo+Entrepreneur) 시대가 왔다고들 얘기하죠. 혼자서도 AI 기술을 이용해 기업 수준의 시스템을 갖추고 성과를 낼 수 있단 뜻인데요. 베이징의 바이브 코더들이 바로 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미국 실리콘밸리의 연쇄 창업자이자 골든게이트AI 연구소를 운영하는 스티브 뉴먼은 류샤오파이로 대표되는 AI 기술의 이런 새로운 트렌드를 “초생산성(Hyperproductivity)”이라고 명명합니다. 거의 모든 직접적인 업무는 AI에 위임하는 대신, 인간은 이를 관리하고 최적화하는 데만 집중해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거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 자체가 바뀝니다. “초생산적인 개인은 자신의 업무를 직접 수행하지 않습니다. 그 업무를 인공지능(AI)에 위임하죠. 그들은 시간을 들여 AI가 자신의 업무를 더 잘 수행하도록 최적화하는 데 집중합니다.”물론 이렇게 초생산적으로 일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사고방식과 일하는 방식이 필요하고요. 무엇보다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는 게 가장 어려운 점이죠. 반복되는 일상은 이미 자동화됐기 때문에 계속해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새로운 도구와 기술을 끊임없이 익혀야만 합니다. 상당히 도전적인 일인데요.스티브 뉴먼은 ‘초생산성’이란 새로운 트렌드가 지금처럼 소규모 틈새 현상에 머물고 말지, 아니면 더 광범위하게 퍼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만약 초생산성이 기술 업계의 일하는 방식으로 대세가 된다면? 아마도 “빠르게 움직이는 스타트업의 쓰나미”가 일어날 거란 게 그의 전망이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그 거대한 파도에 속절없이 휩쓸려 버리고 말까요, 아니면 파도에 올라탈 수 있을까요. 지금부터 각자 답을 찾아야 할 겁니다. By. 딥다이브 바이브 코딩을 두고는 ‘그것이 바로 일의 미래’라는 시각과 ‘오류투성이의 쓰레기를 만들 뿐’이란 회의론이 공존하죠. 하지만 이런 논쟁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이미 뛰어들어 성과를 올리고 있었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월 200달러 요금제로 5만 달러어치 토큰을 소진한 클로드 유저. 그 정체는 12개 AI 소프트웨어를 출시한 베이징의 바이브 코더였습니다. 연 100만 달러 수익을 올린다는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베이징의 바이브 코더 커뮤니티를 소개했죠.-이들의 타깃 고객은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 사용자들. 구체적인 사용자의 니즈를 해결해 주면 선진국 소비자들은 기꺼이 지갑을 엽니다. 동시에 운영과 관련한 대부분 작업은 AI로 자동화해서 해결하죠. 그렇게 끊임없이 제품을 만들어 나갑니다.-AI 기술로 ‘초생산성’의 시대가 오는 걸까요. 이제 인간이 하는 일은 업무의 직접적인 수행이 아니라, 관리와 최적화로 바뀌고 있습니다. AI를 무기로 삼은 스타트업의 쓰나미가 몰려옵니다.*이 기사는 11월 26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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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한애란]서울대 10개 대신 KAIST 10개 만들기

    이재명 정부의 대표 교육 공약 ‘서울대 10개 만들기’ 방안이 올해 안에 확정된다고 한다. 지역 거점 국립대학 9곳을 서울대 같은 명문대로 키우겠단 구상이다. 구체적으론 서울대(6300만 원)의 40% 수준인 거점 국립대 학생 1인당 평균 교육비(2520만 원)를 70%까지 높일 계획이다. 이를 위해 2030년까지 4조 원 예산을 추가 투입한다. 이걸 왜 할까. 사업의 목적을 찾기 위해 정부 발표자료를 꼼꼼히 들여다봤다. 크게 두 가지였다. ‘수도권 중심의 대학 서열화 완화’와 ‘국가 균형성장 달성’. 그리고 머릿속에서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지방 학생들은 왜 수도권 대학으로 몰릴까. 교육·연구 인프라의 격차 때문일까. 실제론 취업 때문 아닐까. 만약 지역 대학에 우수한 학생이 많이 진학한다면 그 지역이 발전할까. 이들이 졸업 후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떠나 버리면 남는 게 없지 않을까.졸업생이 지역에 남으려면 결국 중요한 건 일자리이다. 수도권 쏠림을 막고 국가 균형성장을 이루려면 괜찮은 일자리를 창출할 기업을 지역이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한다. 대학 실험실과 산업 현장이 연계된 기술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게 바로 정부가 추구할 대학 혁신의 방향이다. 그럼, 대학 교육이 어떻게 바뀌어야 기업이 호응할 수 있을까. 이는 한국의 미래 먹거리가 될 산업이 무엇이냐의 문제다. 대학 교육은 미래 인재를 키우는 일이고, 어떤 인재를 기를지는 곧 어떤 산업을 육성하느냐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 정부는 이미 답을 내놓은 바 있다. ‘인공지능(AI) 3대 강국’이란 슬로건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서울대’는 대학 혁신의 롤모델이 될 수 없다. 서울대는 분명 우수한 대학이지만 모든 분야를 다 아울러야만 하는 종합대학이기도 하다. 두루두루 다 잘하는 만능의 대학을 따라가기엔 시간과 예산 모두 촉박하다. 2030년까지 고작 4조 원 예산을, 그것도 9개 대학에 나눠서는 턱도 없다. 자칫 예산 나눠 먹기 식에 그칠 우려가 있다.대학 혁신의 롤모델은 어디인가 효율성을 생각한다면 서울대가 아닌 한국과학기술원(KAIST) 모델이 답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대표가 콕 집어 언급했을 정도로 KAIST는 AI 연구에 있어 한국 최고의 대학이다. 미국 평가 사이트 CS랭킹 기준으로도 AI 분야에선 KAIST(6위)가 서울대(16위)를 앞선다. 40년 가까이 이공계 특성화 대학으로 한 우물을 판 결과다. 이미 지방에는 울산과학기술원(UNIST), 광주과학기술원(GIST),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한국에너지공대(KENTECH) 같은 이공계 특성화 대학이 운영 중이다. 공학 분야에 특화된 지역 거점 국립대도 있다. 경쟁력 있는 기술 분야에 집중 투자한다면 제2, 제3의 KAIST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파격적인 국가 지원으로 단기간에 AI 명문대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아랍에미리트(UAE)가 2019년 설립한 세계 최초의 AI 대학인 무함마드 빈 자이드 AI 대학(MBZUAI)이다. 불과 설립 6년 만에 AI 분야에서 서울대와 맞먹는 세계 18위 대학으로 평가됐다. 해외 석학을 대거 유치하고, 100% 장학금 혜택을 주면서 전 세계 우수 학생을 끌어모은 결과다. 이런 주장이 교육계에서 받아들여질 것 같진 않다. 교육부가 어렵게 끌어온 예산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의 과학기술원과 나누라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높은 부처 간 장벽을 생각하면 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서울대 10개 만들기’로 지방 국립대를 살릴 것이냐, ‘KAIST 10개 만들기’로 지방을 살릴 것이냐.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한애란 경제부 기자 haru@donga.com}

    • 2025-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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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민자에 밀리고 ‘내 집’은 그림의 떡…스페인 청년들 극우화[딥다이브]

    언젠가부터 유럽 경제를 얘기할 땐 침체, 둔화 같은 단어가 따라붙곤 하죠. 하지만 이런 유럽 경제에도 희망의 나라가 있으니, 바로 스페인입니다.2023년과 2024년, 2년 연속 이코노미스트지 선정 ‘최고의 경제’ 국가로 뽑힌 스페인. 한때 ‘PIIGS(피그스)’로 불렸던 스페인 경제는 화려하게 부활했죠.하지만 이런 호황에도 국민의 불만은 높아져 가고요. 극우 정당 지지율이 다시 높아지면서,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까지 재조명되는 분위기. 도대체 왜 유럽의 가장 번영한 나라에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오늘은 스페인 호황과 그 뒷면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1월 2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이민자 물결이 만든 기적“우린 2년 연속 GDP 성장률에서 선진경제권 1위를 차지할 겁니다. 스페인은 성장 측면에서 매우 예외적인(outlier) 국가입니다. ”카를로스 쿠에르포 스페인 재무장관은 지난 4월 CNBC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죠. 이는 과장이 아닙니다. 최근 스페인 정부는 2025년 GDP 성장률 전망치를 2.7%에서 2.9%로 높여 잡았죠. 성장 속도 면에서 유로존 전체(성장률 1.4%)보다 두 배로 빠른 겁니다.지난 9월 국제 신용평가사 ‘빅3’인 무디스·S&P·피치는 줄줄이 스페인 신용등급을 한단계 올렸죠. “스페인 경제 성과는 예상을 뛰어넘었고, 다른 주요 유로존 국가를 훨씬 앞섰다”(피치)는 이유였는데요. 2012년 경기침체와 재정 위기로 구제금융설까지 나왔던 흑역사의 흔적은 이제 찾아볼 수 없습니다.가히 ‘스페인의 기적’이라 할 만한 이런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일단 팬데믹 이후 전 세계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관광산업이 초호황을 누리고 있고요. 재생에너지(태양광) 비중 급증으로 도매 전기 가격이 40%나 떨어지면서, 외국 기업의 투자가 늘고 있다는데요.가장 큰 동력은 뭐니 뭐니 해도 이겁니다. 이민.스페인은 이민자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지난 4년 동안(2021년 10월~2025년 10월) 스페인 인구는 202만명이나 늘어났는데요(4742만명→4944만명, 4.3% 증가). 인구 증가의 대부분을 외국인이 차지합니다. 즉, 스페인 사람들이 아이를 많이 낳아서가 아니라, 해외에서 이주민이 몰려와서 인구가 빠르게 늘고 있죠.이 이민자 중 약 70%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왔습니다.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페루가 이민행렬의 선두에 있죠. 이들은 스페인어가 유창한 가톨릭 신자들이라 현지 문화에 적응하기 쉽습니다. 현지인들도 거부감이 별로 없고요.그래서 스페인 정부는 이들을 우대합니다. 다른 지역 출신은 귀화 신청까지 10년이 걸리지만, 라틴아메리카 국적자는 2년 만에 스페인 국적을 취득할 수 있죠. 특히 미국 트럼프 정부가 이민 장벽을 높이자, 스페인이 이들의 목적지로 더 인기를 끌게 됐는데요.이민자 급증은 스페인 정부가 노리던 바입니다. 노동력 부족과 연금 고갈이란 위기를 한 번에 해결할 확실한 카드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올해 들어 이민 문을 더 활짝 열었습니다. 비자 제도를 간소화하고, 불법체류자에 대한 거주 허가도 더 빨리 내주고 있죠.이민자들은 젊고 일할 의지가 넘칩니다. 현지인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건설과 소매업, 숙박·식당·관광 같은 접객업 일자리의 절반가량(45~60%)을 이들이 채워주죠. 특히 농업은 외국인이 80%를 차지할 정도로, 이민자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데요.스페인 중앙은행은 최근 이런 분석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2022~2024년 스페인 GDP 성장률 중 52%를 이민자 사회가 기여했다’. 이민 노동자의 급증이 생산과 소비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며 경제 호황을 이끌고 있단 뜻이죠.연금 제도를 생각하면 이민자 효과는 더욱 소중합니다.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이코노미스트인 파블로 가르시아 구즈만에 따르면 스페인은 유럽에서도 유일하게 65세 이상 연금 수급자의 중간 소득이 취업가능연령보다도 더 많은(!) 나라이거든요. 고령화로 은퇴자 수가 급증하면서 이런 관대한 연금제도가 지속 가능한지 논란이 컸는데요.이민자 덕분에 최근엔 이 걱정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연금 지급액이 늘어나는 것보다 더 빠르게 GDP가 성장 중이라 감당할 수 있게 된 거죠. 연금 개혁으로 정권이 뒤집힌 이웃 나라 프랑스와 비교하면 얼마나 다행인가요.파이 커졌지만 더 많이 나눈다 스페인은 유럽에서도 가장 ‘친이민’적인 나라입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스페인 국민의 63%는 이민이 필요하다고 응답했고요. ‘이민을 억제하면 나라가 더 강해진다’는 생각에 유럽 국가 중 가장 적게 동의한 나라이기도 하죠(스페인 33%, 이탈리아 40%, 독일 45%). 뉴욕타임스는 스페인의 분열된 민족 정체성을 그 이유로 꼽습니다. 카탈루냐, 바스크 등 지역의 민족주의가 워낙 강렬하기 때문에, 정작 ‘스페인 국민’으로서의 정체성과 배타성은 약한 거죠.그럼, 이민자 덕분에 나라가 부유해져서 스페인 국민의 행복지수는 좀 상승했을까요. 글쎄요. 별로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일단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 호황을 정작 스페인 국민은 실감하지 못해요. 왜? 1인당 GDP는 거의 제자리니까요.물가 상승을 반영한 스페인의 실질 GDP는 2019년 이후 7.9% 증가했는데요. 1인당 GDP로 계산하면 3.4% 증가에 그쳤습니다. “GDP가 증가한 건 더 많은 사람이 생산하기 때문이지, 한 사람이 더 많이 생산한 게 아니니까요.”(스페인 저축은행재단 이코노미스트 마리아 헤수스 페르난데스)결국 스페인은 빠르게 성장하는 대신, 그 성과를 더 많은 인구와 나누고 있습니다. 그 결과, 데이터와 대중의 인식이 따로 갑니다. 설문조사에선 스페인 국민의 55%가 ‘팬데믹 이전보다 경제 상황이 악화했다’고 답했죠.부정적 인식을 부추기는 건 주택난입니다. 인구가 몰리는 주요 도시 주택 임대료가 무섭게 뛰고 있죠. 평균 임대료 상승률이 2년 만에 21%. 10개 주요 도시에서 침실 2개짜리 아파트를 임대하는 데 드는 돈은 스페인 평균 가구소득의 36%나 됩니다. 바르셀로나 같은 대도시는 소득의 45%를 월세로 내야 한다죠. 웬만해선 감당하기 어렵습니다.주택 매매시장도 심상찮습니다. 스페인 주택시장은 2008년 금융위기로 버블이 꺼진 뒤 거의 10년 동안 바닥을 헤맸는데요. 팬데믹 이후 다시 상승세를 타더니, 급기야 평균 주택 매매가격(㎡당 2153유로, 약 364만원)이 2008년 고점을 17년 만에 돌파했죠.한국 기준으로 보면 2008년 가격을 되찾은 건 별일 아닌 듯하지만, 스페인은 오랜만에 찾아온 부동산 붐으로 들썩거립니다. 인구는 느는데 집은 부족해서 당분간 집값이 뛸 수밖에 없다며 ‘빚내서 집 사자’ 열풍이 불기 시작한 건데요. 더더욱 집이 최대 고민거리로 떠올랐습니다. 최근 설문조사에서 ‘스페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1위’는 정치도, 이민도, 연금도 아닌 주택 문제가 차지했죠.어느 나라나 그렇듯이, 주택시장이 불안할 때 가장 속이 타는 건 젊은층입니다. 빠듯한 월급을 월세 내는 데 쓰고 나면 남는 게 없고요. 집값이 무섭게 뛰는 게 뻔히 보이지만, 돈 모아 내 집 마련은 언감생심이죠.스페인청년협의회는 최근 보고서에서 “(집이 아닌) 방 한 칸 월세의 중간값(월 380유로, 64만원)조차 젊은 직장인 평균 월급(1170유로, 198만원)의 30%가 넘는다”면서 이렇게 반문합니다. “더 많은 일자리, 더 나은 임금도 우리가 독립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죠?”사실 데이터로 보면 스페인 청년 실업률은 2007년 이후 최저(19.1%)이고, 청년 중위 임금은 지난해 10% 넘게 상승했습니다. 하지만 치솟는 월세, 쪼들리는 생활비는 청년들을 불안하게 만들죠. 그리고 이 틈을 교묘하게 파고들고 있는 게 바로 극우 파시스트에 대한 향수입니다.극우로 돌아서는 젊은이들 39년간 스페인을 철권통치한 프란시스코 프랑코(1892~1975년). 참혹한 스페인 내전의 주역이자, 강압적인 독재로 반대파를 탄압한 잔혹한 독재자이죠. 그로 인해 처형·학살 당한 반대파만 수십만 명에 달했습니다. 고통스러운 암흑기로 스페인을 몰아넣었던 인물인데요.프랑코가 사망한 지 딱 50년 된 2025년 11월. 죽은 프랑코의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독재를 비판하는 다큐멘터리나 기사 얘기가 아닙니다. 바로 틱톡에 떠도는 AI 영상들이죠. 프랑코의 모습을 따서 만든 갖가지 영상들이 올라오고 있고요. 거기엔 이런 댓글이 줄줄이 달립니다. ‘프랑코, 돌아와요’, ‘최고의 지도자’, ‘스페인 만세!’.철없는 몇몇 애들의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엔 좀 찝찝한데요. 독재자에 대한 향수는 여론조사에서도 나타납니다. 최근 조사에서 스페인 국민 5명 중 1명 이상(21.3%)이 프랑코 시대를 ‘좋음’ 또는 ‘매우 좋음’으로 평가했죠. 2000년에만 해도 이 비율은 11.2%에 불과했는데 말이죠.프랑코 정권의 급진 민족주의를 계승한 극우 정당 복스(Vox)의 지지율이 다시 상승세를 타는 것도 심상찮은데요. 지난해 지지율이 10%까지 추락해서 ‘다른 유럽과 달리 스페인에선 극우가 먹히지 않는구나’라는 희망을 줬던 것도 잠시. 올해 들어 지지율이 급등세를 타더니 17%를 기록했습니다. 특히 18~35세 젊은층에선 지지율이 30%까지 치솟았다죠.“미래가 희망적이지 못한 상황에서 과거로의 회귀는 매력적으로 들리는 법”(스페인국립연구위원회 마르타 로메로 박사)이란 해석이 나오는데요. ‘주택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부정부패로 국민을 분노케 하는 기득권 정치인’과 차별화된 대안 세력으로 극우가 급부상한 거죠.스페인 양대 정당의 극심한 분열은 이런 흐름을 더 부추깁니다. 앙숙인 좌파 집권 여당(사회당)과 우파 제1 야당(인민당)은 적대적 이념 싸움에 매몰됐습니다. 국회에서 정책 토론은 뒷전으로 밀린 지 오래인데요. 정부 예산안이 2년 연속 국회를 통과하지 못해, 여전히 2023년도 예산안이 연장 중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죠.FT의 분석대로 “경제 호황의 이면에 있는 가장 큰 약점은 스페인의 분열된 정치”라 하겠는데요. 발전하는 경제와 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지리멸렬한 정치. 그 틈에서 죽은 독재자가 다시 생명을 얻고 있습니다. By.딥다이브 스페인의 꺼져가던 극우 바람을 다시 불러일으킨 데는 집권당의 부패 스캔들도 한몫했죠. 산체스 정부는 프랑코 사망 50주년을 맞아, 과거 독재 시대를 비판하는 문화 프로그램을 대대적으로 열고 있는데요. 이런 이념 공세가 오히려 젊은이들을 반대로 몰고 있다는 해석도 나오는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선진 경제권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 바로 스페인입니다. 라틴 아메리카 이민자를 대거 받아들이면서 생산과 소비가 모두 성장세를 탔죠. 높은 GDP 성장률 덕분에 복지국가 유지가 가능해졌습니다.-하지만 국민은 호황을 체감하지 못합니다. 1인당 GDP는 정체돼 있는 데다, 수요 급증으로 주택난은 심각해졌기 때문이죠. 집을 빌릴 수도, 살 수도 없게 된 젊은층의 좌절이 커집니다. -마침 올해는 39년간 스페인을 철권통치한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크의 사망 50주년. 청년층을 중심으로 프랑코 시대에 대한 향수와 극우 정치에 대한 지지가 되살아납니다. 정치가 경제 발전을 따라잡지 못해 생긴 스페인의 역설입니다.*이 기사는 11월 2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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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2년 워너 브라더스는 어쩌다 다시 매물로 나왔나[딥다이브]

    102년 역사의 할리우드 제작사 워너 브라더스. 매트릭스·해리포터·반지의 제왕·다크 나이트 등. 최고의 흥행작을 남긴 ‘영화의 역사’ 같은 기업이 또다시 팔립니다.어디로? 예비 입찰 마감일(20일)이 코앞인 가운데, 인수 희망자로는 이런 곳이 거론되죠. 파라마운트, 넷플릭스, 컴캐스트,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공공투자기금.누가 새 주인이 될진 모르겠지만, 지난 25년간 있었던 세 차례 M&A 실패 사례와는 달라야 할 텐데 말이죠. 다시 매물로 나온 워너 브라더스 이야기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1월 1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할리우드 새로운 거물의 탄생1923년 워너 가의 4형제가 설립한 워너 브라더스. 1927년 세계 최초의 장편 유성영화 ‘재즈 싱어’로 대성공을 거둔 이래, ‘카사블랑카’, ‘마이 페어 레이디’, ‘용서받지 못한 자’ 등 명작들을 쏟아내며 할리우드 최고의 스튜디오로 자리 잡았죠.거듭된 인수합병으로 워너 브라더스 모기업 이름은 계속 바뀌었는데요. 1990년엔 시사잡지 타임과의 합병으로 ‘타임 워너’가 됐고요. 2000년엔 미국 PC통신 기업 AOL이 당시 세계 최대 규모(1820억 달러)의 M&A를 하면서 ‘AOL 타임 워너’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닷컴버블 붕괴로 AOL이 추락하면서 ‘최악의 M&A’라는 평가와 함께 2009년 갈라섰고요(이름은 다시 ‘타임 워너’가 됨). 2018년 미국 통신사 AT&T가 845억 달러에 인수하면서 사명이 ‘워너 미디어’로 바뀝니다.하지만 통신과 콘텐츠의 시너지를 내기란 쉽지 않았고, 비싼 인수가 때문에 빚만 잔뜩 쌓였는데요. 매각을 고민하던 AT&T에 흑기사로 등장한 게 바로 데이비드 자슬라브 디스커버리 CEO였습니다. 네, 다큐멘터리로 유명한 케이블TV 채널 디스커버리 말이죠.디스커버리는 워너 미디어를 430억 달러에 인수해 2022년 4월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를 탄생시켰습니다. 이제 이 기업은 이런 사업을 아우릅니다. 워너 브라더스(영화), DC 엔터테인먼트(슈퍼맨과 배트맨), HBO(TV 드라마), 디스커버리(다큐멘터리), CNN(뉴스), HBO 맥스(OTT).거대 미디어 기업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를 이끌게 된 자슬라브 CEO. 그는 인수 직후 ‘잭 워너(워너 브라더스 창립자)의 그 유명한 워너 브라더스 급수탑을 물려받았구나’라며 꽤나 감격했다는데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선 무명에 가까웠던 그는 단숨에 ‘할리우드의 새로운 거물’로 올라섭니다. 그리고 이 거물이 할리우드를 대혼란에 빠뜨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죠.엔터 기업을 쥐어짜는 방법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 주주들이 자슬라브 CEO에 부여한 과업은 단순했습니다. 바로 ‘비용 절감’이었죠. 앞서 두차례의 인수 합병(2000년 AOL, 2018년 AT&T) 과정에서 불어난 막대한 부채(2022년 당시 500억 달러)의 늪에서 탈출하려면, 어떻게든 쥐어짜야만 했으니까요. 그가 이사회에서 부여받은 목표치는 ‘2년간 30억 달러(4.4조원) 비용 감축’이었습니다.엔터테인먼트 기업은 어떤 식으로 비용을 감축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안 만들면 됩니다. 제작을 멈추거나 취소하는 거죠. 아이러니하게도 돈은 관객들이 보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법입니다.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워너 브라더스엔 이 방식으로 쥐어짤 수 있는 여지가 충분했죠.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제작이 줄줄이 취소되기 시작합니다. 프로그램 취소와 함께 고용됐던 작가, 프로듀서 등도 줄줄이 해고됐고요.그중 가장 놀라운 결정은 영화 ‘배트걸’ 제작 중단이었습니다. 제작비 9000만 달러(약 1318억원)짜리 이 영화는 스코틀랜드에서 촬영을 마친 뒤 막바지 후반작업 중이었는데요. 2022년 8월, 자슬라브 CEO는 거의 완성된 ‘배트걸’의 제작 중단과 폐기를 결정합니다. 할리우드는 충격에 빠졌죠.왜 그랬을까요. 영화 개봉을 위해 마무리 작업과 마케팅에 수천만 달러를 더 쓰느니, 차라리 제작비 9000만 달러를 손실로 처리해서 그에 해당하는 세금(연방 법인세율 21%, 뉴욕주 법인세율 7.25%) 수천만 달러를 아끼는 게 낫다고 본 겁니다. 자슬라브 CEO는 이 결정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제작비로) 1억 달러를 썼는데, 개봉하지 않으면 다 날아가 버립니다. 문제는 이 영화를 극장 개봉하고 홍보에 3000만~4000만 달러(약 440억~586억원)를 더 써야 하는가입니다. 회사의 건전성 때문에 우린 그런 결정(제작 중단)을 내려야 했어요. 그 결정에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했죠.”신규 콘텐츠 제작만 중단된 게 아닙니다. 2022년 HBO 맥스의 라이브러리에선 수십 개의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조용히 삭제됐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어린이 프로그램 세서미 스트리트의 에피소드 200편도 하룻밤 만에 사라졌죠. 왜? 이 역시 비용 절감 때문입니다.프로그램이 플랫폼에 올라가 있는 동안엔 출연자·제작자에 지불되는 비용이 있는데요. 이걸 내려버리면 플랫폼 입장에선 이 비용이 제로가 되죠. 물론 출연자·제작자 입장에선 갑자기 수입이 끊기는 거지만요.또 보통 콘텐츠 비용은 여러 해로 나눠 회계처리하는데요. 아직 이 기간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콘텐츠를 삭제하면, 남은 비용에 대해 한꺼번에 세금 공제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즉, 세금을 줄이려고 이 기간이 남은 프로그램을 골라 삭제한 거죠. HBO 오리지널 콘텐츠의 경우, 이렇게 HBO 맥스에서 내려가면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자슬라브 CEO가 왜 ‘할리우드에서 가장 미움 받는 인물’로 불리게 됐는지 아시겠죠. 그는 프로그램 제작에 투입된 수많은 노력, 팬들의 신뢰 따위는 안중에 없는 냉정한 경영자입니다. 그 결과, 그는 목표치를 초과해 40억 달러 비용 절감에 성공했습니다. 그 공로로 2024년 그는 무려 5190만 달러(약 760억원)의 보상을 받았습니다. 참고로 이는 넷플릭스 테드 사란도스 CEO의 보수(6190만 달러)와 비교해도 큰 차이 없는데요. 다른 점라면 넷플릭스는 그해 87억 달러(12.7조원) 이익을 기록한 데 비해,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는 110억 달러(16.1조원) 적자를 냈다는 점이죠.HBO 맥스의 황당한 리브랜딩 단기적인 비용 절감을 위해 수년간 공들인 콘텐츠들을 희생시키는 게 과연 맞는 방향일까요. 지극히 회의적이지만, 그래도 이 부분에선 찬반이 엇갈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자슬라브 CEO가 한 일 중 누가 봐도 명백한 실패작은 이거였습니다. HBO 맥스의 리브랜딩.2023년 5월 23일, 워너 브라더스의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파티가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열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날, 스트리밍 서비스 ‘HBO 맥스’가 ‘맥스(MAX)’로 이름을 바꾸고 새출발했죠. 디스커버리의 다큐멘터리 콘텐츠까지 흡수해 더 큰 서비스로 재탄생한 겁니다.뭐? 이름에서 HBO를 뗀다고? 모두 귀를 의심했습니다. 왜? HBO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완성도 높은 고품질 콘텐츠’를 상징하거든요. 수십 년 동안 어렵게 구축한 고급 브랜드를 스스로 버리고, 아무 의미도 없는 이름 ‘맥스’를 택한다? 너무 이상한 거죠.비판과 조롱이 쏟아졌습니다. 당시 넷플릭스 CEO 테드 사란도스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죠. “정말 깜짝 놀랐어요! HBO의 행보를 지켜봤는데, 한때 HBO, HBO Go, HBO Now, HBO 맥스까지 있었죠. 그래서 저는 ‘본격적으로 하려면 그 모든 이름이 사라지고 그냥 HBO만 남게 될 거야’라고 말했어요. HBO가 사라질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자슬라브 CEO는 ‘HBO’의 프리미엄 이미지가 고객 확장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더 넓은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HBO 브랜드를 일부러 지운 거죠. 대신 더 저렴하고 편안한 디스커버리의 리얼리티쇼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을 가져와서 정체성을 흐렸고요. 지극히 평범하고 무난한 이름(맥스)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이 파격적인 시도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2년 뒤인 2025년 5월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는 ‘맥스’의 간판을 갈아 끼운다고 발표합니다. 새 이름은? 놀랍게도 다시 ‘HBO 맥스’가 됐죠.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 이전 리브랜딩이 완전히 실수였음을 인정한 겁니다. 그동안 컨설팅과 로고 제작에 든 비용, 직원들이 이에 쏟은 시간 등을 생각하면 최소한 수백만 달러를 허비한 셈 아닐까요.슈퍼맨도 못 구할 워너, 믿을 건 매각뿐3년 연속(2022~2024년) 적자. 무자비한 비용 절감에도 여전히 과중한 부채(2025년 6월 기준 380억 달러). 2025년 봄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 주가는 10달러 밑으로 떨어졌고, 3대 신용평가사는 모두 신용등급을 ‘투기등급’으로 낮췄습니다.이래서는 제아무리 슈퍼맨이 와도 구하기 어려울 지경. 실제 2025년 7월 개봉한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의 ‘슈퍼맨’은 4억 달러 넘는 수익을 올렸지만, 가라앉는 기업의 운명을 블록버스터 영화만으로 되돌리기란 역부족처럼 보였습니다.그런데 웬걸. 9월 이후 주가가 급등세를 보이면서 두 달 새 100% 넘는 상승률을 기록했죠. 처음엔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가 매각될 거란 소문 때문이었고요. 10월 21일 이사회는 회사의 일부 또는 전체 매각을 포함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겠다며 이를 공식화했죠. 공지한 예비 입찰의 마감일은 11월 20일. 곧 레이스가 시작됩니다.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곳은 파라마운트 스카이댄스.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를 통째로 인수 합병해, 넷플릭스나 디즈니에 맞설 거대 미디어 기업을 만든다는 구상입니다. 이 기업 데이비드 엘리슨 CEO는 이미 10월 중순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 측에 주당 23.5달러의 인수가를 제안해 업계를 놀라게 했죠. 하지만 “가격이 낮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당했는데요.여기서 특히 중요한 건 데이비드 엘리슨 CEO의 아버지. 바로 오라클 창업자이자 세계 2위 부자(순자산 2770억 달러) 래리 엘리슨이죠. 그만큼 자금력이 엄청날 뿐 아니라, 트럼프 정부의 지지도 받고 있습니다.이에 맞서는 거물급 후보는 바로 넷플릭스. 넷플릭스는 케이블 채널을 제외한 스튜디오(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 제작)와 스트리밍(HBO 맥스) 부문만 인수를 적극 검토 중이라는데요. 넷플릭스로선 배트맨과 해리포터 지식재산권(IP)을 탐내지 않을 수 없겠죠. 워낙 돈 잘 버는 기업이니 자금력은 문제없고요. 규제 장벽이 관건입니다. 넷플릭스의 스트리밍 시장 지배력이 너무 커지기 때문에 반독점법 위반이란 지적이 벌써부터 나오죠.아울러 미국 케이블 시장 1위 기업 컴캐스트 역시 관심을 보이는데요. 부채가 많은 기업이라 인수 자금 마련에 파트너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컴캐스트 CEO 브라이언 로버트가 최근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사우디 공공투자기금(PIF) 관계자를 만났다죠. 사우디가 컴캐스트와 손잡고 인수전에 뛰어들 거란 추측이 파다합니다.쟁쟁한 3대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겨루는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 변수까지. 이거, 인수전이 상당히 흥미진진해지는데요. 아무리 미디어 환경이 급변한다고 해도, 워너 브라더스는 여전히 모두가 탐내는 할리우드의 보석인가 봅니다.이번 매각이 잘 마무리돼 주주들이 높은 수익률을 올린다면 자슬라브 CEO로선 성공적인 임무 완수이겠죠. 비록 ‘할리우드의 파괴자’란 평은 피할 수 없겠지만요. 부디 이번 워너 브라더스 M&A는 이전과 달리 재앙이 아닌 해피엔딩으로 기록될 수 있기를. By.딥다이브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는 올해 에미상 시상식에서 170번이나 후보에 오르면서 여전히 저력 있는 스튜디오라는 걸 보여줬습니다. 케이블TV 사업의 쇠퇴와 스트리밍 서비스 부문의 막대한 적자로 전체 실적은 부진하지만, 엔터테인먼트 영역에선 대단한 기업임엔 틀림없죠. 누가 새 주인이 될지, 한번 지켜보시죠.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102년 된 할리우드 스튜디오, 워너 브라더스가 다시 매물로 나왔습니다. 2022년 디스커버리의 인수로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가 된 지 3년여 만입니다.-그동안 워너 브라더스는 대혼란을 겪었습니다. 자슬라브 CEO는 대대적인 제작 중단과 프로그램 삭제 등 비용 절감에 올인했고요. 그 과정에서 제작자들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미움 받는 인물’이 되어버렸죠.-무엇보다 스트리밍서비스 ‘HBO 맥스’를 ‘맥스’로 리브랜딩한 게 패착이었습니다. 50년 넘게 구축해온 HBO 브랜드를 스스로 버렸던 거죠. 결국 올해 다시 ‘HBO 맥스’라는 이름으로 돌아옵니다.-빚더미에 앉은 채 주가가 추락했던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 하지만 이를 사기 위해 다시 쟁쟁한 엔터 기업들이 인수전에 뛰어들었습니다. 파라마운트, 넷플릭스, 컴캐스트. 이 3강이 겨루는 가운데, 사우디 공공투자기금이 파트너로 참여할 거란 관측까지 나오죠. *이 기사는 11월 1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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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갬블링 맨’ 손정의 회장, 그의 판이 다시 돌아간다[딥다이브]

    다시 그가 움직입니다.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회장 겸 CEO. 최근 오픈AI에 총 300억 달러(44조원)를 투자하겠다며, 엔비디아 주식(약 8.5조원어치)을 몽땅 팔아치웠죠. 어쩐지 일생을 건 베팅을 준비하는 도박사를 보는 듯한데요.그게 바로 손정의 회장의 방식입니다. 모든 걸 다 걸어서 세상을 놀라게 할 성공을 거두거나, 반대로 거의 망하거나를 반복했죠. 그는 순진한 낙관론자일까요, 오만에 빠진 몽상가일까요. 기업가 손정의를 이해하기 위해 책을 참고했습니다. 파이낸셜타임스 전 편집장 리오넬 바버가 쓴 ‘갬블링 맨(Gambling Man): 세계 최고의 파괴자 손 마사요시의 비밀 이야기’를 바탕으로 손정의 회장을 들여다봅니다.(손정의 회장은 1990년 일본으로 귀화해 본명이 ‘손 마사요시’이지만, 여기선 한국에 익숙한 손정의라는 이전 이름을 씁니다.)*이 기사는 11월 1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300년 제국’의 건설자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는 무엇을 하는 기업일까요. 처음엔 PC용 소프트웨어 유통업으로 출발해서 닷컴 스타트업을 대거 M&A를 하더니, 일본과 미국에서 통신 사업에 매진하는 듯하다가, 이젠 AI 기업에 주로 투자하는 펀드처럼 운영되죠. 1981년 창업 이래 정체성이 끊임없이 바뀌어왔는데요.결국 소프트뱅크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 기업입니다. 자동차나 가전 같은 제품을 제조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획기적인 기술을 발명하거나 소유하지도 않죠. 미국이나 중국의 기술업계 거물과 손정의 회장의 다른 점이라 하겠는데요.기술자가 아니라는 건 그에겐 전혀 마이너스 요인이 아닙니다. 왜? 그는 자신만이 기술이 가지는 어머어마한 잠재력을 꿰뚫어 보는 비전을 가졌다고 믿기 때문이죠. 닷컴버블 정점이던 1999년 인수한 미국 온라인 증권사 ‘이트레이드’ 이사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죠. “내가 미래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그래서 그는 M&A 딜을 할 때, 종종 시장이 놀랄 정도로 비싼 매수가를 제시하곤 합니다. 남들이 못 본 가치에 베팅하는 거죠. 투자금이 클수록 더 큰 수익을 낼 수 있으니까요.이런 남다른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죠.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이 2020년 1월 소프트뱅크에 자사주 매입을 압박할 때의 일입니다. 엘리엇 측이 ‘빌 게이츠와 마크 저커버그’를 지배구조 모범사례로 거론하자, 손 회장이 발끈하며 이렇게 말합니다.“그들은 한 가지 사업에만 집중합니다. 빌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를, 마크 저커버그는 페이스북을 창업했죠. 나는 수백 개 사업에 관여하고 있고, 전체 생태계를 통제합니다. 그들은 나와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적합한 비교 대상은 나폴레옹, 칭기즈칸, 진시황이죠. 나는 CEO가 아닙니다. 난 제국을 건설하고 있다고요.”그는 단기 성과 대신 장기 비전을 늘 말하는데요. 이때 장기란 30년이나 50년이 아니라 300년을 뜻합니다. 그는 길을 잃어버렸을 때는 더 멀리 바라봐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죠.“명확하게 상상할 수 없는 건 시야를 30년으로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대담하게 시작해서 300년 앞을 생각하세요. 그러면 30년 후의 상황을 거꾸로 생각해 볼 수 있죠.”과도한 낙관주의의 매력 비전을 크게 가지는 거야 좋지만, 너무 허황된 건 아닐까요. 손정의 회장 이야기에서 신기한 점은 그의 이런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많은 이들을 매혹시켰단 점입니다. 순진함과 허세가 결합한 모습이 오히려 매력으로 작용하곤 하는데요.‘일본 전자산업의 전설’ 사사키 타다시 샤프 전 부사장(1915~2018년)은 20대 손정의가 사업가로 설 수 있도록 끌어준 인물이죠. 청년의 눈빛에 매료된 그는 자기 집까지 담보로 잡아 소프트뱅크 사업자금을 대줬습니다.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1955~2011년)와의 스토리도 인상적인데요. 닷컴 버블 붕괴로 쫄딱 망했다가, 초고속 인터넷 통신 사업으로 재기에 성공한 손정의 회장. 2005년 여름 잡스를 만나 자신이 한 아이팟 신제품 스케치를 보여줍니다. 단순히 MP3 플레이어가 아니라 데이터와 이미지까지 처리하는 모바일 기기, 즉 스마트폰 스케치였죠.이를 본 잡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형편없는 그림은 주지 마. 내 그림이 있으니까.” 극비리에 개발 중이던 아이폰에 대한 힌트를 잡스가 슬쩍 던진 건데요. 손 회장은 이를 놓치지 않고 “그 제품이 나오면 일본 내 독점 유통권을 달라”고 매달렸고요. 구두로 잡스의 오케이를 받아냅니다.몇 달 뒤 손정의 회장은 이동통신업체 보다폰 재팬 인수 계약을 체결합니다. 그리고 잡스에게 “당신 약속을 믿고 170억 달러짜리 베팅을 했으니 책임감을 가지라”고 말했죠. 잡스는 웃으면서 이렇게 답합니다. “넌 미친놈이야. 얘기했던 대로 할게.” 2008년 아이폰 3G 모델이 일본에 출시됐을 때, 이를 3년 동안 독점 판매한 건 소프트뱅크였습니다.2016년 손정의 회장이 1000억 달러라는 말도 안 되는 큰 규모로 비전펀드 조성에 나섰을 때, 사우디아라비아 측이 처음부터 호의적인 건 아니었죠. 사우디 상무부 장관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따지듯 묻습니다. “당신은 ‘원맨쇼’입니다. 영웅에서 제로(zero)가 됐고, 다시 영웅이 됐죠. 당신이 다시 제로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죠?”손 회장은 이렇게 받아칩니다. “재산의 98%를 잃고도 살아 돌아오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분위기는 누그러졌고, 75분 뒤 두 사람은 끌어안고 기념 촬영을 했죠. 물론 손정의 회장의 마법이 누구에게나 통하는 건 아닙니다. 2017년 손 회장은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을 만나기 위해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를 찾아갑니다. 비전펀드 투자자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죠. 당시 87세였던 버핏은 소박한 사무실에서 일행과 마주 앉습니다. 손 회장은 아이패드 속 투자 자료를 보여주며 자신의 눈부신 과거 투자 실적을 자랑했는데요. 버핏은 자신은 부채에 관심 없는 구식 투자자라며 이렇게 답합니다. “저는 현금 흐름 전문가예요.” 당연히 버핏은 비전펀드에 한 푼도 투자하지 않았습니다.알리바바를 발굴한 직감 손 회장은 자신과 닮은 창업가에 끌리곤 합니다. 그게 바로 그의 인생 최고의 성공, 알리바바 투자의 비결이었죠. 1999년 알리바바가 아직 아무것도 아니던 시절, 그는 단 6분간 마윈을 만난 뒤 투자를 결정합니다. 마윈의 눈빛에 담긴 굶주림과 열망에 끌린 거죠.당시 소프트뱅크 이사회는 알리바바 투자에 반대했습니다. 마윈은 엔지니어도 아니고, 제품 전문가도 아니고, 단지 비전을 가진 젊은이일 뿐이라는 게 반대 이유였는데요. 바로 그 점 때문에 손 회장은 마윈에게서 젊은 시절 자신을 봤습니다.이후 알리바바는 소프트뱅크의 투자를 기반으로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으로 급성장했고요. 2014년 알리바바의 뉴욕증시 상장으로 초대박이 난 건 지분 34%를 보유한 소프트뱅크였죠. 2000만 달러 투자금이 15년 만에 578억 달러로, 3000배가 됐으니까요.그리고 이 강렬한 성공의 기억은 그를 사로잡아, 독이 되고 말았는데요. 2016년 손 회장이 “오늘날 알리바바처럼 보이는 것 그 사람뿐”이라고 찜한 창업가가 있었으니. 바로 공유오피스 위워크의 아담 노이만이었죠. ‘세계의식 고양’이란 허무맹랑한 구호를 외치는 야심가에게 홀딱 반해서 44억 달러를 덜컥 투자했고요. 결국 최악의 투자 실패로 남았습니다.그럼, 이번 소프트뱅크의 오픈AI에 대한 투자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다음 달 225억 달러(약 33조원)를 추가 투자하면 소프트뱅크는 오픈AI 지분의 11%를 확보하게 된다는데요. 오픈AI가 진짜 돈을 벌 수 있느냐에 대한 회의론이 현재로선 큰 상황이죠. 돈 잘 벌고 있는 엔비디아 지분을 전부 팔아서, 적자투성이 오픈AI에 올인하는 게 맞는 결정일까요.물론 결과를 예측할 순 없지만, 이게 바로 손정의 회장의 투자 방식입니다. 그는 디지털 경제에선 고객 수와 시장 점유율이 현금흐름이나 수익성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믿죠. 손실을 감수하고 빚을 늘려서라도 일단 점유율을 키워놓으면, 결국 돈은 따라오기 마련이란 겁니다. (버핏과는 정말 맞지 않습니다)2001년, 빚더미였던 소프트뱅크가 막대한 투자비가 드는 초고속 인터넷 시장에 진출했을 때, 언론은 이를 “(겨울을 앞둔) 9월 중순 모스크바로 진군하는 나폴레옹 같은 미친 짓”이라 꼬집었습니다. 하지만 손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았죠. “이 업계는 선발주자, 개척자가 큰 성공을 거두곤 합니다. 성공한 기업은 처음부터 큰 자본을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비전과 열정을 갖고 있습니다.”그리고 이렇게 반문합니다. “사람들은 소프트뱅크의 현금 흐름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죠. 하지만 나는 제품 판매만 현금 흐름을 창출한다는 생각에 의문을 제기해요. 제품 판매와 기업 상장, 모두 현금 흐름을 창출합니다. 우린 훌륭한 현금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장으로 잭팟을 터뜨리면 한번에 만회할 수 있다는 마인드가 도박사와 비슷하죠. 어쩐지 지금의 상황과도 오버랩됩니다. 모든 걸 잃고 다시 일어서는 자 손정의 회장은 여러 번 거의 망했습니다. 2000년 닷컴버블 붕괴 땐 재산의 98%를 잃고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잃은 사람’이 됐고요. 2008년 금융위기 땐 소프트뱅크 주가 급락으로 순자산이 마이너스(개인 부채>보유 지분)로 떨어지며 사실상 개인 파산 상태가 됐었죠. 특히 위워크를 포함한 비전펀드 투자의 참담한 실패로 2022년 소프트뱅크는 역대 최대 적자를 기록했고요. 한동안 ‘손정의도 끝났다’는 평가가 이어졌는데요.어쨌든 그는 살아남았고, 다시 엄청난 집중력과 열정으로 앞으로 나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그를 두고 영원히 바위를 산 위로 굴리라는 저주를 받은 고대 그리스 왕 시시포스에 비유하죠.그는 어떻게 그렇게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요. ‘갬블링 맨’의 저자 리오넬 바버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는 세상을 다르게 봅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민가에서 태어난다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건 상대적인 겁니다. 그저 원점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다음 고향 도스시 빈민촌의 한국인처럼 다시 일어서는 겁니다.”어떻게 보면 그는 사실 큰 방향에선 옳았습니다. 특히 AI에서 그렇죠. 그는 2016년 비전펀드를 조성할 때부터 ‘AI 혁명’을 외쳤고요. 2019년 방한 당시 문재인 당시 대통령을 만나서도 “한국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AI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문제는 타이밍이었죠. 비전펀드 1호와 2호가 엉뚱한 기업에 투자금을 한참 낭비해버린 뒤에야, 챗GPT가 등장했으니까요. 손 회장도 이제 와선 “타이밍 면에서 우리가 너무 일찍 행동했던 것 같다”고 인정합니다.그리고 이제 그는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공격 앞으로를 외칩니다. 2025년 1월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함께 무려 5000억 달러 규모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발표했고요. 오픈AI뿐 아니라 바이트댄스, 퍼플릭시티AI 등 세계 최고 AI 기업을 포트폴리오로 보유 중입니다. 최근엔 미국 칩 설계사 암페어 컴퓨팅 인수(65억 달러), 스위스 ABB의 로봇팔 제조업 인수(54억 달러)에 합의했죠.올해 소프트뱅크 주가 상승률은 129%. 손 회장은 10월 말 잠시 유니클로 창업자 야나이 다다시를 제치고 일본 최고 부자로 다시 등극했습니다(이후 재역전).이거 또 판이 마구 돌아가기 시작했는데요. 책 속의 표현을 빌리자면, 손정의 회장은 아마도 에이스 카드를 쥐고 있진 않지만, 여전히 최고의 테이블에 앉아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전부를 걸 기세로군요. By.딥다이브*이 기사는 11월 1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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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남아 첫 고속철도가 ‘시한폭탄’이 된 이유(feat. 일대일로)[딥다이브]

    인도네시아 기술 진보의 상징이자 자부심이던 동남아시아 최초의 고속철도 ‘후시(Whoosh)’. 하지만 개통 2년 만에 인도네시아의 최고 골칫거리로 전락했습니다. 고속철도 건설 과정에서 중국에 진 막대한 빚을 갚을 길이 없어 보이기 때문인데요.중국이 판 부채 함정에 인도네시아가 걸려든 걸까요. 아니면 애초에 고속철도 건설 사업 자체가 무리였던 걸까요. 결론 내리긴 이르지만, 곳곳에서 삐걱대는 중국 일대일로 사업의 최신 사례인 건 틀림없어 보입니다. 탈선 중인 인도네시아 후시 고속철도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1월 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시한폭탄 된 고속철도최고속도 시속 350㎞. 3시간 30분 걸리던 자카르타-반둥 간 통근 시간이 약 40분으로 확 단축됐습니다. 2023년 10월 2일 공식 운행을 시작한 자카르타-반둥 고속철도 후시(Whoosh). 동남아시아 최초의 고속철도 개통은 인도네시아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개통식에서 당시 조코 위도도(조코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죠. “이 고속철도는 우리 대중교통 현대화의 상징입니다.”그리고 지난 8월. 인도네시아 철도공사 사장은 국회 청문회에서 이렇게 답변해서 충격을 안깁니다. “이것(후시)은 시한폭탄과도 같습니다.” 고속철도 사업에 참여한 국영기업들이 줄줄이 재정 위험에 처했다는 폭탄선언이었는데요. 고작 개통 1년 10개월 만에 대실패로 낙인찍힌 초대형 인프라 사업. 후시엔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한마디로 장사가 너무 안 됩니다. 승객이 없어 텅텅 빈 채로 운행하다 보니 돈을 못 버는 거죠. 원래 모든 고속열차 사업이 별로 수익성은 없는 법이라고요? 네, 그건 인도네시아 정부도 애초에 알고 있던 바였고, 그래서 투자 원금 회수에 40년쯤 걸릴 거라고 각오하고 시작했는데요.문제는 승객수(하루 평균 1만6400명)가 당초 예측치(5만~7만7000명)의 절반에도 한참 못 미친다는 거죠. 어느 정도냐면 매출을 다 합쳐도 고속철도 건설을 위해 빌린 돈의 이자조차 갚지 못합니다. 지난해 티켓 판매 수입이 1300억원(1조5000억 루피아)이었는데, 연간 이자 부담만 1700억원(2조 루피아)이니 말이죠. 원금은커녕 이자만 갚아도 적자투성이입니다.도대체 그 막대한 이자를 누구한테 갚고 있을까요. 바로 건설비용(10.5조원)의 75%를 빌려준 중국개발은행입니다. 인도네시아 고속철도는 중국이 돈을 대부분 대고 중국 기업이 포함된 합작법인이 건설을 맡는 전형적인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이었거든요.이대로 가면 고속철도의 적자는 계속 누적될 거고, 사업에 참여한 인도네시아 국영기업 컨소시엄마저 파산을 피하기 어려울 상황. 결국 보다 못한 인도네시아 정부가 나섰습니다. 중국 측과 부채 구조조정 협상에 들어갔죠. 이자율 인하, 상환 유예, 위안화 대출로의 전환 등을 요청할 걸로 보이는데요. 이제 막대한 고속철도 부채는 국영기업을 넘어선 국가 대 국가의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11월 4일 프라보워 수비안토 현 대통령은 고속철도 부채를 갚는 데 “기본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어요. 그렇게까지 심각한 일이 아니라며 국민을 진정시키려는 거죠. “매년 1조~2조 루피아를 (이자로) 내야 하지만 교통체증과 오염 감소, 더 빠른 이동이란 이점이 있습니다. 이 모든 건 계산된 결과입니다.”하지만 여론은 심상찮습니다. 일부 정치인은 “중국에 빚을 갚지 못하면 (함반토타 항구 경영권을 중국에 넘긴 스리랑카 사례처럼) 중국이 영토적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면서 국가 주권이 위협받는다고 열을 올리고요. 틱톡 등 SNS엔 ‘비싼 고속철도를 타지도 못하는 평범한 국민이 낸 세금으로 중국에 빚을 갚게 생겼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영상이 줄을 잇습니다.역이 왜 여기 있나요?자카르타-반둥 고속철도는 구간이 너무 짧은 데다(143㎞), 티켓 가격도 비싸서(약 2만2000원) 흥행이 쉽지 않을 거란 우려가 처음부터 많았습니다. 애초에 ‘동남아 최초’라는 멋진 타이틀을 얻기 위해 사업이 무리하게 진행된 면이 없지 않은데요.인도네시아 국민들이 특히 문제 삼는 건 왜 하필 중국을 파트너로 선정했냐는 겁니다. 2015년 입찰 시점엔 더 일찍부터 준비해 온 일본이 유력해 보였거든요.당시 일본은 총사업비 62억 달러를 제시했어요. 이를 일본이 연 0.1% 이자율로 장기 대출해 주되, 인도네시아 정부가 직접 예산으로 갚는 조건이었죠.이와 달리 중국은 사업비를 55억 달러로 더 낮게 잡았고요. 인도네시아 정부가 아닌 국영기업들이 출자한 합작법인(60% 인도네시아, 40% 중국)에 연 2% 이자율로 사업비의 75%를 대출해 주겠다고 했어요. ‘공사비가 더 싸다+정부 예산이 안 든다’는 이유로 인도네시아 정부는 중국의 손을 잡았죠.문제는 막상 완공 시점이 돼서 보니까 실제론 중국 제안이 더 싼 게 아니었단 점입니다. 크게 두 가지가 문제인데요.①공사 지연으로 건설비용이 72억7000만 달러로 불어났습니다.토지매입 등의 절차가 시간을 상당히 잡아먹었고요. 2020년 코로나 팬데믹까지 겹치면서 공사가 지연돼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특히 나중에 추가로 제공된 대출금엔 기존보다 더 높은 3.4%의 이자율이 적용됐죠.아무리 천재지변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 비용과 이자율이면 부담이 여간 큰 게 아니죠. 후시 개통 직후, 인도네시아 경제금융개발원의 수석 경제학자였던 고 파이살 바스리(2024년 사망)는 이런 날카로운 비판을 남겼습니다. “현재 환율로는 (투자금을 회수하는데) 100년이 걸릴 겁니다. 저는 이걸 ‘세상이 끝날 때까지’라고 부를게요. 만약 좌석의 50%만 채워지고, 하루 30회 운행에 요금이 25만 루피아라면 투자금 회수에 최대 139년이 걸릴 겁니다. 계산하긴 쉬워요.”②대도시 접근성이 떨어지는 외진 곳에 역이 들어섰습니다.후시가 승객을 모으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이 엉뚱한 곳에 있기 때문인데요. 자카르타와 반둥, 두 대도시의 정차역이 모두 외곽에 있습니다. 예컨대 후시가 정차하는 할림역에서 자카르타 시내 중심지(두쿠 아타스)로 가려면 경전철로 갈아타고 28분을 가야 하죠. 후시가 정차하는 파달라랑역에서 반둥 시내(반둥역)까지 이동하는 데도 18분 걸리고요.‘고속철도로 자카르타-반둥 40분!’이라고 홍보하지만, 도심을 기준으로 하면 갈아타고 기다리는 시간을 포함해 그 몇 배가 걸립니다. 요금은 일반 열차의 5배인데 말이죠. 손님이 없을 만도 하죠.그럼, 왜 이렇게 불편하게 정차역을 정했을까요. 2015년 일본의 설계안에선 자카르타와 반둥 모두 고속철도 정차역이 시내 한가운데 있는 환승역이었거든요. 그와 비교하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이와 관련해선 중국 네티즌들의 해석이 설득력 있습니다. 변두리에 기존 역과 별도의 고속철도 역을 짓는 게 중국에서 주로 해오던 개발 방식이란 거예요. 대도시 한복판이 아닌 허허벌판에 역을 지으면 비용도 적게 들고 공사도 훨씬 쉽죠. 중국에선 도시가 워낙 빠르게 확장하니까, 이 방법이 그나마 통했는데요. 인도네시아 사정과는 전혀 맞지 않았던 거죠.그리고 인도네시아 국민은 이런 눈에 보이는 문제만이 아닌, 다른 의혹도 제기합니다. 공사비용이 이렇게까지 불어난 건 틀림없이 공무원의 부정부패 때문일 거란 의혹이죠. 2021년 이 프로젝트 담당 장관을 맡았던 루후트 빈사르 판자이탄은 지난달 이런 폭탄 발언을 내놨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미 썩어버린 제품(=후시 프로젝트)을 받았습니다.” 국민들은 경악했죠. 이미 썩어있었다고? 그렇다면 왜 그걸 순순히 받아서 계속 진행한 거죠?루후트는 단순한 장관이 아니라, 조코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실세’ 정치인이었습니다. 결국 조코위의 정치적 야심 때문에 정부가 무리해서 사업을 진행했단 고백이나 다름없는데요. 인도네시아 부패척결위원회는 이 고속철도 사업에 대한 조사에 나섰습니다.어디서 본 듯한 얘기인데중국과 손잡고 대규모 인프라 개발에 나섰다가 부채 위기에 몰린 나라. 인도네시아만 있는 게 아니죠. 중국은 시진핑 주석 임기 초기인 2014년부터 ‘일대일로’ 사업을 시작했고요. 고속도로, 고속철도, 항구, 공항, 댐, 발전소 등. 저개발국 곳곳에서 새로운 ‘실크로드’를 개척해 왔는데요.까다로운 환경·인권에 대한 조건 없이 척척 거액을 빌려주는 중국 국영은행은 저소득국가에 반가운 존재였고요. 인프라 개발이 절실했던 나라들이 빚 무서운 줄 모르고 중국 돈을 끌어다 썼습니다. 그리고 이는 여러 나라에서 국가부채 폭증으로 이어졌는데요.모든 빚이 그러하듯 빌릴 땐 좋지만 불어나는 건 한순간이죠. 중국에 막대한 빚을 진 아프리카 잠비아와 가나는 2020년 코로나 때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지고 말았고요. 케냐를 포함한 아프리카 12개국도 부채 위기에 처했습니다. 특히 케냐의 이른바 ‘아무 데도 가지 않는 철도(The Railway to Nowhere)’는 중국 부채 함정의 상징으로 통하죠. 중국이 대출해 준 대출 자금이 바닥나면서 원래 우간다까지 연결될 예정이었던 철도가 옥수수밭 한복판에서 갑자기 끝나버린 건데요. 물론 이렇게 된 데는 케냐 정치권의 부정부패가 한몫했습니다.동남아시아 국가 중엔 라오스가 대표 사례로 꼽힙니다. 국가 부채가 GDP의 116%일 정도로 위태로운데요.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21년 개통된 라오스-중국 철도가 그 주범입니다. 중국수출입은행의 대출로 건설한 이 철도가 라오스를 파산으로 모는 급행열차가 되어버렸죠.여기에 동남아시아 최대 경제국 인도네시아까지 부채 시한폭탄에 휩싸였으니. 이제 저개발국의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중국 일대일로 사업의 인기는 식어가게 될까요.꼭 그렇진 않아 보입니다. 캄보디아는 여전히 40억 달러 규모의 고속철도 건설을 위한 중국의 지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고요. 미얀마 군부는 중국 국경 지역에서 미얀마 중심지를 잇는 무세-만달레이 철도 건설 자금을 중국에 요청 중이죠. 돈이 급하면 빚에 도사린 위험 따윈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요. 일대일로와 부채 함정 이야기는 아마도 계속될 겁니다. By. 딥다이브해외 투자를 끌어들인 ‘인프라 주도 성장’을 추구했던 전임 조코위 인도네시아 대통령. 재임 시절엔 높은 인기를 누렸지만, 결국 무리한 투자가 부메랑이 돼 돌아오는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인도네시아의 자부심이던 ‘동남아 첫 고속철도’ 후시가 부채 위험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부진한 실적 탓에 중국에 진 막대한 빚의 이자를 갚기조차 어렵기 때문이죠. 인도네시아 정부가 중국과 부채 구조조정 협상에 나섰습니다.-인도네시아가 중국의 ‘부채 함정’에 빠진 걸까요. 중국은 일본보다 낮은 사업비를 제시해 선정됐지만 공사 지연으로 사업비는 불어났고, 접근성 떨어지는 노선 설계로 수익성은 떨어집니다. 국민들은 정치권의 부정부패를 의심합니다. -지난 10여년 간 중국은 저개발국에 막대한 자금을 빌려주며 인프라 건설에 나섰는데요. 그 결과 여러 나라가 빚더미에 앉게 됐습니다. 인도네시아 고속철도는 중국 일대일로 사업 실패의 최신 사례로 기록됩니다.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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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키아의 부활: 스마트폰 패배자에서 AI 슈퍼사이클 승자로[딥다이브]

    오라클, 델, IBM. 한물간 ‘왕년의 스타’ 같던 미국의 오래된 IT 대기업들이 요즘 인공지능(AI) 관련 기업으로 재평가되는 분위기이죠. 그 대열에 합류하려는 유럽 통신 대기업이 있습니다. 핀란드 노키아(Nokia).노키아는 오래 전 망한 휴대전화 제조사 아니냐고요? 네, 노키아의 그 유명했던 휴대전화 사업은 11년 전 마이크로소프트에 팔렸고, 결국 사라진 게 맞는데요. 노키아는 대변신에 성공해, 글로벌 AI 데이터센터 붐에 올라타려 합니다. 죽었다 살아난 노키아의 부활 스토리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0월 3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주가는 10년 만에 최고치10월 28일 핀란드 헬싱키거래소에서 노키아 주가가 20% 넘게 급등했습니다. 주가는 2016년 1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죠. 잠잠했던 노키아 주가의 폭등을 이끈 건 엔비디아가 노키아에 10억 달러(1조4300억원)어치 지분 투자를 한다는 발표였습니다. 이 투자로 엔비디아는 노키아의 2대 주주(지분율 2.9%)로 올라서게 되죠.엔비디아는 왜 노키아에 투자할까요? 당연히 인공지능(AI) 기술 때문이죠. 일단 AI 데이터센터엔 광통신(빛을 이용해 정보를 전달하는 통신)이 꼭 필요한데요. 이 광통신 장비를 누가 만들까요? 중국 업체를 제외한다면(미국이 화웨이 장비를 쓰진 않겠죠) 그 선두 주자가 바로 노키아입니다.또 엔비디아와 노키아는 5G는 물론, AI에 최적화된 6G 시스템 개발에도 협력하기로 했는데요. 노키아는 이미 5G와 6G 네트워크 분야에서 가장 앞서 나가는 통신 기업입니다.아니, 노키아가 언제부터 그런 기업이 됐느냐고요? 11년 전, 그러니까 2014년 노키아 휴대전화 사업부가 마이크로소프트(MS)에 팔리던 시점부터 변화가 시작됐는데요.대변신 이야기에 앞서, 그 이전에 노키아가 망한 스토리부터 살펴보겠습니다.핀란드 전설적 산업의 종말사실 노키아의 몰락은 워낙 유명한 얘기라서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마치 공룡의 멸종 같은 이야기이죠. 한때 전 세계를 주름잡았던 ‘휴대전화의 제왕’ 노키아. 2007년 애플의 아이폰 출시와 함께 스마트폰 시대가 열렸지만, ‘스마트폰은 틈새 상품’이란 오판에 초기엔 외면했고요. 뒤늦게 2009년 ‘아이폰 킬러’랍시고 출시한 신제품 ‘N97’은 노키아 소프트웨어의 총체적 부실을 드러냅니다. 특히 운영체제 ‘심비안’이 문제였죠. 애플 앱스토어엔 10만개 넘는 앱이 있는데 심비안엔 고작 500개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요. 2007년 세계시장 점유율 40%가 넘었던 노키아는 급격히 가라앉기 시작합니다.이런 노키아에 구원투수로 투입된 새 CEO. 마이크로소프트(MS) 출신 캐나다인 스티븐 엘롭이었습니다. 엘롭은 MS에서 클라우드 기반의 ‘오피스 2010’ 출시를 주도해 기록적인 이익을 안긴 경력이 있는데요. 쇄신이 절실히 필요했던 노키아 이사회가 그를 차기 CEO로 낙점합니다. 2010년 9월, 노키아 145년 역사상(노키아는 1865년 종이 공장으로 출범) 최초의 비핀란드인 CEO가 취임했죠.2011년 2월, 엘롭 CEO는 직원 대상 비공개 행사에서 그 유명한 ‘불타는 플랫폼’ 연설을 합니다.“저는 우리가 불타는 플랫폼 위에 서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애플은 시장 판도를 바꿨고, 오늘날 애플은 고급 스마트폰 시장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드로이드가 있습니다. 심비안은 북미 같은 주요 시장에선 경쟁력이 부족합니다. 기기 경쟁은 이제 생태계 경쟁으로 바뀌었습니다. 노키아, 우리 플랫폼이 불타고 있어요!”노키아가 절체절명 위기에 처했다며 절박감을 강조한 극적인 연설이었는데요. 이 내용이 언론에 새어나가면서 투자자들은 화들짝 놀랐고요(‘뭐? 그 정도로 심각했어?’라는 반응). 며칠 뒤, 엘롭 CEO가 충격적인 대책을 발표했죠. 바로 MS와의 전략적 제휴. 노키아가 MS의 윈도우 OS를 채택하기로 한 겁니다. 기존 심비안 OS는 완전히 포기하고 말이죠. 그리고 이때부터 노키아는 진짜로 불길에 휩싸이게 됩니다.노키아와 MS가 공동 개발한 윈도우폰 ‘루미아’는 처절하게 실패했습니다. 윈도우 모바일 OS는 독특한 UI 때문에 사용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고요. 무엇보다 윈도우 생태계가 형편없었거든요. 앱을 만들 개발자를 전혀 끌어들이지 못했습니다. 2010년 29%였던 노키아의 글로벌 휴대전화 시장 점유율은 2014년 1분기엔 11%로 추락했고요(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3% 미만). 무려 14년 동안(1998~2011년) 지켜왔던 휴대전화 시장 1위 자리도 2012년 삼성전자에 넘겨줬죠.노키아가 MS 윈도우가 아닌 구글 안드로이드를 선택했다면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까요. 생태계가 중요하다고 외쳤던 엘롭 CEO는 왜 하필 윈도우를 택했을까요. 정말 그게 노키아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을까요?2014년 4월 노키아는 결국 막대한 적자를 기록한 휴대전화 제조 사업에서 손을 뗍니다. 사업부 전체를 MS에 72억 달러에 팔아넘겼죠. MS에서 디바이스그룹을 이끌게 된 부사장은? 노키아에서 자리를 옮긴 스티븐 엘롭이었습니다.물론 그도 오래가진 못했어요. 이듬해 MS가 휴대전화 사업 철수를 결정하면서 엘롭은 MS에서도 해고됐는데요. 엘롭 CEO 시절 노키아가 어떻게 망해갔는지를 파헤친 핀란드 책 ‘오퍼레이션 엘롭(Operation Elop)’은 이렇게 일갈합니다. “스티븐 엘롭은 세계 최악의 CEO 중 한 명이었다.”엘롭 CEO의 임기 동안 노키아 시가 총액은 295억 유로에서 111억 유로로 추락했고, 누적 적자는 49억 유로에 달했고, 직원 2만명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무엇보다 전설적인 핀란드의 휴대전화 산업은 종말을 맞이했죠.5G 선점 위한 과감한 투자노키아 이야기는 보통 여기에서 끝내는 경우가 많은데요.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2014년 엘롭의 뒤를 이어 취임한 라지브 수리 CEO이죠.인도 출신으로 쿠웨이트에서 자란 수리 CEO는 1995년부터 노키아에서 일하며 회사의 흥망성쇠를 지켜봤습니다. 휴대전화 사업을 잃은 노키아에서 그가 CEO가 되는 건 자연스러웠죠. 그는 수년 동안 노키아의 B2B 네트워크 장비 사업부를 총괄해 왔는데요. 적자투성이였던 사업부를 구조조정을 통해 수익성 있게 변모시키면서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수리 CEO의 비전은 명확했습니다. 5G 네트워크였죠. 비록 스마트폰 시대엔 뒤처져서 몰락했지만, 5G 네트워크에선 한발 앞선 리더가 되겠단 계획이었는데요. 2015년 경쟁사인 프랑스 알카텔-루슨트 인수하며 업계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인수 가격이 무려 156억 유로(약 25.5조원). 노키아 역사상 최대 규모의 M&A였습니다.알카텔-루슨트가 좀 생소한가요. 그래도 이건 많이 들어봤을 겁니다. 벨연구소(Bell Labs). 1925년 미국에서 설립된 벨연구소는 지난 100년 동안 소속 연구원이 받은 노벨상만 10개일 정도로 기술 혁신의 상징과 같은 곳인데요. AT&T를 거쳐 알카텔-루슨트가 소유했던 벨연구소가 노키아로 넘어갑니다. 벨연구소의 엄청난 특허(약 3만개)도 함께 말이죠.이런 과감한 기술 투자로 노키아는 5G 시장을 선도하기 시작합니다. 2018년 노키아가 출시한 5G 전용 칩 ‘리프샤크(Reefshark)’를 보면 알 수 있는데요. 크기도 작고 전력 소비도 확 줄였는데, 속도는 기존보다 훨씬 빠른 혁신적인 제품이죠. 이렇게 기술에 투자한 덕분에 글로벌 5G 단독망(Standalone) 시장에서 노키아는 선두 주자로 올라섭니다.그래서 역시 선견지명이 있다며 수리 CEO에게 찬사가 쏟아졌을까요?아니요. 그 정반대였습니다. 왜? 그의 장담과 달리 5G 시장이 그렇게 금세 열리지 않았거든요. 5G 시장의 성장은 예상보다 더디고 지지부진했습니다.또 노키아가 알카텔-루슨트를 인수하며 광통신과 고정 광대역 네트워크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된 건 좋았는데요. 두 기업의 통합 작업은 쉽진 않았고요. 그 과정에서 원래 주력이었던 모바일 시장(이동통신 기지국 등) 점유율을 경쟁사(에릭슨, 화웨이)에 빼앗기게 됩니다.주가는 뚝뚝 떨어졌고요. 투자자들은 5G 연구개발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배당금이 줄어든다며 경영진을 원망했죠. 결국 2020년 라지브 수리 CEO는 물러납니다.적자의 늪에서 죽어갔던 노키아가 되살아나긴 했지만, 다시 도약하기까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의 사임을 전하며 당시 언론은 이렇게 썼죠. “5G 성장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수리의 예측은 틀린 것으로 판명됐다.”데이터센터와 6G로 다시 뜬다통신 장비 시장은 오랫동안 지루했습니다. 대체로 금리의 오르내림에 따라 고객 수요가 줄었다 늘었다 할 뿐, 별로 재미없는 시장인데요.그런데 분위기가 달라질 조짐입니다. 일단 노키아의 올해 3분기 실적이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었습니다(순 매출 12% 성장). 올해 4월 취임한 저스틴 호타드 CEO는 CNBC 인터뷰에서 노키아가 “AI 슈퍼사이클”에 올라탔다며 이렇게 말합니다.“AI 슈퍼사이클로 인해 네트워크 구축에 대한 엄청난 수요가 있습니다. 이건 수년 동안 지속될 장기 성장 추세입니다. 자율주행 차량, 가상현실, 스마트 글래스, 로봇 공학 보급률은 아직도 매우 낮습니다. 초기 단계에 불과하죠. 데이터센터 확장으로 노키아의 광섬유 기술 수요가 더 증가할 겁니다.”챗GPT가 세상에 선보인 지 3년. AI 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대규모 데이터센터 건설 붐을 촉발했습니다. 시너지 리서치에 따르면 하이퍼스케일러(초대형 데이터센터 운영 기업)들은 이미 1100개 이상 데이터센터를 운영 중이고요. 앞으로 4년 동안 그 용량이 2배로 증가할 거라는데요.자고로 데이터센터 내부 서버 간 통신엔 구리선보다 빠르고 안정적인 광섬유 통신이 필수인 법. 광통신 장비 분야에서 중국 화웨이의 뒤를 잇는 기업이 노키아입니다. 올해 초 미국 경쟁사 인피네라를 인수하며 2위로 올라섰죠. 즉, 만약 미국과 유럽의 데이터센터가 중국산 장비를 피하고 싶다면, 선택지는 노키아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또 자율주행·로봇·드론택시 같은 ‘물리적 AI’ 시대가 진짜 열리려면 중요한 게 통신이죠. 예컨대 자율주행의 경우 차량과 차량, 차와 인프라간 통신이 지연 없이 매우 빠르게 이뤄져야만 합니다. 안 그러면 사고 나니까요. 5G보다 지연시간을 10분의 1로 단축할 수 있는 6G 기술이 꼭 필요한 이유인데요.그래서 미국·중국·한국을 포함한 각국이 2030년까지 6G 기술을 상용화하겠다고 나섰죠. 그런데 그 장비, 미국에선 어디가 만들 수 있을까요. 그런 의문이 생기던 차에 엔비디아와 노키아 손잡고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정확히는 엔비디아가 특수 제작한 이동통신용 칩을 제공하고요. 노키아가 5G에 이어 6G 장비도 미국에서 생산할 거라고 하죠.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AI와 6G로의 전환으로 미국이 다시 통신 기술에서 승리하게 할 겁니다. 이를 실현할 훌륭한 파트너를 확보했죠. 노키아.”왜 엔비디아가 이번에 노키아에 10억 달러를 투자했는지 아시겠죠. 십여 년 전 사망선고를 받았던 노키아는 기어이 살아남았고, 새로운 기회를 잡았습니다.사실 160년 역사 속에서 노키아는 줄곧 변신을 이어왔습니다. 제지공장에서 고무 회사로, 이후 휴대전화 제조사에서 다시 통신장비 업체로 탈바꿈했죠. 이제 AI 인프라에 미래를 건 노키아. 그 베팅이 이번엔 통할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By.딥다이브한번 망한 기업을 다시 되살린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그렇기에 왠지 노키아가 반전 드라마를 써주길 기대하게 되는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멸종된 공룡인 줄 알았던 노키아가 AI 붐을 타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엔비디아가 10억 달러의 지분 투자를 결정했죠. AI 시대에 꼭 필요한 통신 인프라를 제공하는 기업이기 때문입니다.-휴대전화 시장의 절대강자였던 노키아. 2007년 애플 아이폰의 등장과 함께 내리막을 탑니다. MS 출신 스티븐 엘롭 CEO는 노키아가 ‘불타는 플랫폼’이라며 MS와의 제휴를 밀어붙였고요.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2014년 노키아는 휴대전화 사업을 접어야 했죠.-라지브 수리 CEO는 노키아의 살길이 5G에 있다고 봤습니다. 경쟁사 알카텔-루슨트를 인수해 벨연구소의 기술력을 흡수했죠. 덕분에 5G 기술을 선도할 수 있게 됐고요. 하지만 시장 성장은 더뎠고,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았습니다.-AI 시대가 되면서 그동안 노키아가 쌓아둔 기술 잠재력이 발휘됩니다. 급증하는 데이터센터 덕을 톡톡히 보기 시작했고요. 2030년 6G 상용화라는 미래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노키아는 AI 슈퍼사이클을 제대로 타고 다시 승자가 될 수 있을까요. *이 기사는 10월 3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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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은 재산세 폐지 논의중? 논란의 세금, 보유세 이야기[딥다이브]

    6000년 전 고대 수메르 도시국가에도 이 세금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고대문명에선 이것이 공통적으로 있었죠. 조선시대에도 이 세금이 국가 재정의 중심이었고요. 지금도 극히 일부 국가(중동의 석유 부국 등)를 제외하곤 대부분 나라에 존재하는 세금. 바로 부동산 보유세(Property tax)입니다.요즘 보유세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습니다. 이게 한국만의 일이 아니라는데요. 미국·영국·스위스 등 여러 나라에서 보유세가 이슈로 떠올랐죠. 도대체 보유세는 왜 이리 논쟁적일까요. 오늘은 논란의 세금, 부동산 보유세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0월 2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20년 전 보유세 개편의 추억보유세. 말 그대로 부동산(주택, 토지 등)을 보유한 사람에게 부과되는 세금이죠. 보유세를 어떤 식으로 매기느냐는 나라마다 제각각인데요. 현재 한국의 보유세는 두 가지 형태입니다.① 재산세: 주택·토지·건물 등 재산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내는 세금. 부동산이 있는 지역에 내는 지방세입니다. 집이 여러 채여도 이를 합산하진 않고, 각각 세금을 매기죠.② 종합부동산세(종부세): 일정 금액 이상 고가 부동산을 소유한 사람이 추가로 정부에 내는 국세입니다. 재산세와 달리 전국에 소유한 모든 주택 공시가격(정부가 매년 발표하는 기준가격)을 합산해서 세금을 매기죠.우리나라에 종합부동산세가 도입된 게 2005년. 이때 주택소유자에 부과하는 재산세의 과세 기준도 ‘면적’에서 ‘가격’으로 바뀌었습니다.이전까진 면적을 기준으로 삼다 보니 지방 대형 평형 아파트가 집값 비싼 서울 중소형 아파트보다 재산세를 많이 내는 일이 벌어졌다고 해요.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2004년 대구 진로아파트 78평형(당시 기준시가 2억원) 재산세가 95만원, 서울 구의동 현대아파트 32평형(당시 기준시가 3억5000만원)이 18만원이었다는데요. 2005년의 보유세 개편으로 이런 역전 현상은 사라지게 됐습니다.‘조세 형평성’을 기준으로 보자면 이런 변화는 합리적이죠. 하지만 그 결과 서울뿐 아니라 수도권 아파트까지 재산세가 급등하면서 여론은 급격히 악화됐고요. 특히 종부세(당시엔 기준시가 9억원 이상이 대상)를 추가로 내게 된 서울 강남 아파트 소유자들 민심은 폭발합니다.그럼에도 강남 집값이 다시 들썩이자, 당시 정부는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같은 추가 대책을 잇달아 내놨는데요. 거듭된 규제는 주택 공급 물량을 쪼그라들게 만들었고요. 그로 인한 결말-집값 폭등과 정권 교체-은 이미 아실 겁니다.우리도 미국처럼? 그런데 요즘 미국은20년이 지난 요즘, 다시 ‘집값을 잡기 위해 보유세를 올리자’는 얘기가 정부와 여당 곳곳에서 나옵니다. 그 주요 논리 중 하나가 이거죠. 미국은 집값의 1%를 보유세(재산세)로 부과한다. 한국의 보유세 실효세율(0.16~0.2%)이 미국과 비교하면 너무 낮다는 겁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는 얼마 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처럼 재산세를 (평균) 1% 매긴다고 치면 집값이 50억이면 1년에 5000만원씩 보유세를 내야 하는데, 연봉의 절반이 세금으로 나간다면 버티기 어려울 거다.”사실 미국은 보유세율이 1%라는 얘기는 2005년에도 정부 관료들이 똑같이 했었습니다. ‘우리도 미국처럼’이 20년 동안 되풀이되는 보유세 인상론의 핵심 논지인데요.그런데 그거 아세요? 요즘 미국에서 ‘재산세를 폐지하라’는 주장이 불붙고 있습니다. 조지아·뉴멕시코·콜로라도·인디애나·뉴저지·뉴욕주 의회는 재산세 감면안을 이미 통과시켰고요. 텍사스주 의회엔 2031년까지 재산세를 폐지하자는 법안이 공화당 소속 주 의회 의원에 의해 발의됐습니다. 미시간·오하이오주에선 시민단체들이 재산세 폐지를 위한 주민투표안에 서명을 받고 있고요. 플로리다주는 주택에 대한 재산세를 완전히 폐지하는 방안을 2026년 11월 투표에 부치기로 했는데요.재산세는 미국 주 정부 재정의 73%를 떠받치는 기둥인데, 이걸 폐지하자고? 이게 무슨 주 정부의 자살골 같은 주장인가 싶은데요. 재산세 폐지에 앞장선 론 드산티스 플로리다주 주지사(공화당)는 이렇게 말합니다. “개인 주택은 정부로부터 임대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소유해야 합니다!” ‘내 집에 사는데 왜 월세처럼 재산세를 내야 하느냐, 이건 사유재산권 침해’라는 논리이죠.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도 같은 주장입니다. “재산세는 사실상 당신의 집이 정부로부터 임대된다는 걸 뜻합니다.”이걸로 알 수 있는 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보유세(재산세)를 싫어합니다. 2023년 미국의 전국 주의회 협의회(NCSL) 설문조사에서 재산세는 미국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세금’으로 꼽혔죠. 보유세는 다른 세금보다 더 강렬한 거부감을 일으키곤 합니다. 그 이유를 몇 가지 꼽아보면 이렇습니다.①내가 얼마를 내는지가 너무 잘 보입니다.보유세는 보통 1년에 한 번 일시불로 거액을 내죠. 그러다 보니 납세자는 본인이 보유세를 얼마 내는지 또렷이 알게 됩니다. 물건을 살 때마다 야금야금 떼어가는 소비세(부가가치세), 급여에서 아예 원천징수 되는 소득세보다 훨씬 잘 보이죠. 한꺼번에 몰아서 내기 때문에 금액도 커 보이고요. 부담스럽고 싫을 수밖에 없습니다.②납세자가 세금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부가가치세를 적게 내고 싶다면 물건을 덜 사면 되죠. 소득세를 많이 내기 싫다면 누진세율 구간 이하로 소득을 맞추거나 비과세 투자상품을 이용해 절세를 할 수 있을 거고요. 하지만 보유세는 대체로 계획적으로 관리한다고 해서 줄일 수가 없습니다. 보유한 주택을 아예 팔지 않는 한 말이죠.③납세 능력과 상관이 없습니다.소득세는 일자리를 잃고 소득이 끊기면 바로 제로가 되죠. 하지만 보유세는 소득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자산은 많지만, 세금 낼 소득은 부족한 상황에 처하는 이들이 많죠. 어느 나라나 부동산 소유자 중엔 은퇴 전후의 베이비붐 세대가 많다 보니 더 그렇습니다.그리고 보유세에 대한 반발이 바로 지금 미국에서 터져 나오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겁니다. 지난 몇 년간 집값이 너무 가파르게 올랐어요. S&P의 주택가격 지수에 따르면 미국 집값은 전국적으로 지난 5년 동안 49.7%나 급등했습니다. 연평균 8.37%씩 빠르게 상승한 건데요. 이렇게 주택가격이 급등하면서 세금 고지서 숫자도 함께 폭등했고요. 재산세에 대한 혐오가 분노로 바뀌며 폭발한 겁니다.미국에서 부동산값 급등이 재산세에 대한 분노와 납세자 반란으로 이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1970년대 미국 주택 가격은 무섭게 뛰었고요(1970~1978년 미국 주택 매매 중위가격 상승률 147%). 열받은 캘리포니아 납세자들이 들고 일어나, 1978년 주민발의안 13호를 통과시켰는데요. 재산세 부과 기준인 공시가격을 1975년 수준으로 되돌리고, 공시가 상승률을 연 2% 이내로 제한하는 법안이었죠. 기존 주택 소유자의 재산세 급등을 막는 이 법은 지금도 캘리포니아에 남아있습니다.보유세는 경제 성장에 좋은 세금?납세자들의 미움을 받는 보유세. 하지만 정부나 경제학자들이 보유세를 포기할 수 없는 건, 경제적으로 꽤 효율적인 세금이기 때문입니다.세금을 늘리는 것 자체는 경제성장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죠. 그럼 소득세, 소비세(부가가치세), 보유세. 이 중 가장 경제성장에 좋은(=덜 나쁜) 세금은? 바로 보유세라고 합니다. 이건 제 개인 의견이 아니라 여러 경제학 연구의 공통된 결론인데요.IMF 보고서(2012년)에 따르면, GDP 대비 소득세 비중을 1% 포인트 줄이고 이를 소비세로 바꾸면 1인당 GDP 장기 성장률이 약 0.03%포인트 높아집니다. 그런데 소득세 비중 1% 포인트를 보유세로 전환하면? 1인당 GDP 성장률이 0.24%포인트나 높아진다고 하죠. 기왕이면 소득세·소비세보다 보유세로 세금을 걷는 게 경제성장 면에서 그나마 나은 선택이란 뜻인데요.왜 그럴까요. 보유세는 다른 세금에 비해 경제적 의사결정을 왜곡할 가능성이 작다는 게 특징입니다. 예컨대 근로소득세는 노동 참여, 양도소득세는 투자 의욕을 떨어뜨릴 수 있죠. 소비세는 소비를 위축시킬 우려가 있고요. 이와 달리 보유세는 높인다고 해서 국가의 총 부동산 보유량이 줄어드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 경제 성장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습니다.또 다른 보유세 옹호론의 대표 주장은 보유세가 경제적 격차를 줄이는 데 효과적이라는 겁니다. 보유세를 많이 내는 건 아무래도 자산이 많은 부자일 테니까요. 집도, 땅도 없는 가난한 사람은 보유세를 한 푼도 내지 않을 거고요.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느 나라나 보유세와 관련해서는 찬반 여론이 팽팽히 맞서는 법입니다. 집 있는 자는 보유세 폐지나 감면을, 집 없는 자는 보유세 강화를 외치는 게 당연하죠. 그럼 주택 보급률이 낮은 나라에서 보유세 폐지를 국민투표에 부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지난 9월 말 스위스에서 벌어진 일인데요. 스위스는 유럽에서 주택 소유율이 가장 낮은(43%) 나라죠. 이런 스위스가 1934년부터 이어진 재산세의 일종인 ‘귀속 임대가치’ 세금 폐지안에 대한 투표를 실시했는데요. 57.7% 찬성으로 폐지가 결정되는 깜짝 결과가 나왔습니다. 주택소유자의 재산세를 깎아주자는 법안을 세입자들도 상당수가 지지한 셈이죠.이런 의외의 결과는 스위스의 귀속 임대가치(자가 거주자가 집을 임대한다고 가정하고 매긴 가상의 임대료) 계산 방식이 너무 복잡해서 공정하지 않다는 인식이 지난 수십 년 동안 퍼졌기 때문이라는데요. 물론 그 혜택은 스위스 집주인들에게 오롯이 돌아갈 겁니다. 이로 인해 이미 버블 조짐이 있는 스위스 주택 가격이 더 뛸 거란 전망도 나오죠.영국에선 집값 0.5% 보유세 논의반대로 보유세를 신설하자는 목소리가 커지는 나라도 있습니다. 바로 영국인데요. 재정난에 시달리는 영국은 증세가 시급한 상황이죠. 그래서 영국 정부가 검토하는 방안 중 하나로 ‘비례재산세’ 도입이 거론되는데요.영국엔 재산세 성격의 지방세가 있습니다. 1991년 주택 가격을 기준으로 매긴 8개 등급에 따라 차등 부과하는데요. 문제는 그동안 일부 지역 집값이 몇 배로 뛰었는데 등급은 그대로라는 거죠. 수백만 파운드짜리 웨스트민스터 저택의 지방세가 영국 북부 평범한 주택보다 더 적기도 합니다.그래서 이런 엉터리 지방세 대신 모든 부동산의 가치를 매년 평가해 일률적으로 0.48%를 재산세로 물리자는 ‘비례재산세’ 도입 캠페인이 한창입니다. 이들은 대신 지방세와 함께 주택 구매자가 내는 인지세(한국의 취등록세에 해당)까지도 없애자고 주장하죠. 거래세(인지세)는 낮추고 대신 보유세(재산세)를 올리면, 자연히 주택 거래가 살아나고 그럼 심각한 주택 공급난도 좀 트이지 않겠냐는 발상입니다. 논리적으론 그럴듯해 보이는데요.하지만 이런 급진적인 세제 개편을 과연 누가 해낼 수 있을까요.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인데 말이죠. 비례재산세 신설에 언론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고요. 가뜩이나 역대 최저 지지율을 기록 중인 노동당 정권이 감당하기엔 정치적 위험 부담이 너무 커 보입니다.결국 모든 세금이 그렇듯 보유세 역시 정치의 문제입니다. 어떤 방향이든 보유세 개편은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으니까요. 1970년대 미국 상원 재정위원장을 지낸 러셀 롱 상원의원이 남긴 유명한 말이 떠오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건 ‘조세 회피’입니다. 당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그건 ‘세금 개혁’이죠.” 보유세 인상과 인하, 당신에겐 어느 쪽이 세금 개혁인가요? By.딥다이브 예전에 영국인이 가장 혐오하는 세금이 상속세라는 얘기를 전해드렸는데요(). 미국은 그 타이틀이 재산세에 있다니 흥미롭습니다. 한국에서도 설문조사를 한번 해보고 싶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인류 문명과 함께 탄생한 보유세. 한국에선 2005년 종합부동산세 도입으로 한차례 대대적인 개편이 있었는데요. 20년이 지나 다시 보유세를 올리자는 논의가 시동을 걸고 있습니다.-혹자는 미국처럼 보유세가 집값의 1%는 돼야 한다고 주장하죠. 그런데 정작 요즘 미국에선 재산세를 감면하거나 아예 폐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보유세는 특유의 가시성 때문에 사람들이 싫어하고요. 특히 집값이 급등하는 부동산 버블기엔 납세자들의 분노를 불러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보유세는 국가 경제 측면에선 가장 덜 나쁜 세금이기도 합니다. 정부가 보유세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죠.-최근 스위스는 91년 동안 유지된 재산세의 폐지를 국민투표로 결정했습니다. 반면 재정난이 심각한 영국에선 집값의 0.48%를 부과하는 비례재산세를 신설하자는 캠페인이 벌어지죠. 어느 방향이든 승자와 패자가 확연히 갈릴 수밖에 없습니다.*이 기사는 10월 2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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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괴짜 CEO 알렉스 카프가 말하는 팔란티어 그리고 한국[딥다이브]

    괴짜·천재·이단아·악당·철학자·몽상가.이토록 멋진 수식어를 가진 최고경영자라니. 알렉스 카프(Alex Karp) CEO는 미국 소프트웨어 기업 팔란티어를 특별하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팔란티어가 현재 기술업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기업으로 성장한 비결-남다른 발상, 독특한 사명감, 논쟁적인 원칙-을 인간화한 게 바로 카프 CEO가 아닐까 싶은데요.환상적인 주가수익률에 열광하는 팬들의 환호와 빅브라더식 발상에 분노하는 안티들의 비난을 모두 받는 인물. 알렉스 카프 팔란티어 공동 창업자 겸 CEO를 만났습니다. 인터뷰 내용과 함께 알렉스 카프라는 인물을 소개합니다. (인터뷰 현장에서 그가 발언한 내용은 따옴표 안 굵은 글씨로 표시했습니다.)*이 기사는 10월 1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총각김치를 외친 철학박사 CEO내성적이고 ADHD가 있고 극단적으로 솔직하다. 인터뷰 맡은 기자를 긴장케 하는 카프에 대한 인물평이었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단 10분. 서울 성수동의 떠들썩한 팝업스토어 행사장 한켠에서 과연 인터뷰가 제대로 될까, 걱정했는데요.그는 초반부터 이런 말로 분위기를 띄웠습니다. “이건 몰랐을 텐데,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 다 한국인이었고, 첫 여자친구도 한국인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김치찌개를 좋아하는 거예요. 그리고 총각김치!”사교성 없기로 소문난 곱슬머리의 아프리카계 유대인(아버지가 유대인, 어머니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CEO가 총각김치를 외칠 줄이야. 그는 이렇게 덧붙였죠. “한국인의 특징은 높은 수준의 역량과 매우 세련된 미적 감각을 가졌다는 점이죠. 그리고 모두가 이걸 할 줄 알았어요.”그러면서 손가락으로 펜 돌리기를 해 보입니다. “제가 한국인들과 같이 학교에 다녔다는 걸 이걸 보면 알 수 있죠.”미술작가인 어머니 얘기도 꺼냅니다. “저희 어머니는 한국 미술품을 수집하시죠. 예전엔 1년에 석 달은 한국에서 지내셨어요.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미술을 연구하기 위해서요.”카프는 필라델피아의 마그넷 스쿨(시험 보고 들어가는 공립학교)인 센트럴고등학교를 1985년 졸업했습니다. 이후 하버포드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스탠퍼드 로스쿨을 졸업한 뒤,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교에서 사회 이론 박사 학위를 취득했죠. 그가 과거 인터뷰에서 설명한 대로 “기술 학위도 없고, 정부·산업계와 아무 문화적 연관성도 없고, 부모님은 히피족”인, 한마디로 실리콘밸리와 워싱턴 모두에서 아웃사이더나 다름없는 배경인데요.조부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을 바탕으로 성공적인 투자업체를 운영 중이었던 카프. 2003년 36살이던 그를 팔란티어 창업에 끌어들인 건 스탠퍼드대 로스쿨 시절 절친인 피터 틸(Peter Thiel)이었습니다. 이른바 ‘페이팔 마피아의 대부’로 불리는 전설적인 실리콘밸리 투자자이죠.2001년 9·11 테러의 충격을 겪은 뒤 피터 틸이 생각한 건 이거였습니다. 페이팔용으로 설계된 사기 탐지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테러 공격을 차단하는 기술 기업을 만들자. 그렇게 모은 공동창업자 중 한 명이 카프였고, 틸은 그에게 CEO직을 제안했죠.왜? 틸은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알렉스는 CIA에 보낼 세일즈맨 같진 않아 보이죠.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팔 때 역설은 당신이 그 사람과 똑같아야 그가 믿을 수 있단 거예요. 하지만 동시에 그와 매우 달라야만 당신이 자신에겐 없는 무언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죠.”“뛰어난 기술 기업은 예술가 공동체”소설 ‘반지의 제왕’ 속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수정 구슬 ‘팔란티르’에서 이름을 따온 팔란티어. 이름대로 정부기관이나 기업이 가진 방대한 데이터를 통합해 그 연관성·패턴·추세를 다 꿰뚫어 볼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구축하는 일을 하는데요.사업모델은 좀 특이합니다. 고액 연봉을 받는 팔란티어 엔지니어가 고객사 현장에 직접 투입돼, 고객사가 필요로 하는 맞춤형 문제해결 소프트웨어 플랫폼 개발을 도맡아 하죠. 사실상 엔지니어가 ‘스타트업 CTO’가 된 것처럼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율적으로 일하는 방식입니다. ‘전방 배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Forward Deployed Software Engineers)’라고 불리는 이들 한명 한명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한 기업인데요.그래서 카프가 강조하는 게 예술가 정신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기술 공화국(The Technological Republic)’에서 이렇게 말해요. “소프트웨어와 기술 개발은 이론이 아닌 관찰에 기반한 예술이자 과학이다. (…) 가장 생산적인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예술가 공동체와도 같아서 기질적으로 까다롭고 재능 넘치는 영혼들로 가득 차 있다.”실제 팔란티어는 신입 직원들에게 즉흥 연극에 관한 책을 나눠준다죠. 무대 위에서 즉흥 연기를 펼치는 배우와 기존에 없던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엔지니어는 서로 통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위계질서? 권위? 계층? 예술가와 맞지 않는 그런 것들은 팔란티어에 필요 없습니다. 대신 서로 부딪히고, 들이받고, 논쟁하는 조직문화를 추구하죠.그리고 이 ‘기술 개발=예술’이라는 사고방식은 인터뷰에서도 드러났습니다. 그에게 이렇게 물었죠. ‘한국은 반도체 강국이지만 소프트웨어엔 약합니다. 한국이 실리콘밸리처럼 소프트웨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필요한 게 뭐라고 보나요?’ 그러자 이런 답이 돌아옵니다.“실리콘밸리처럼 되려 하기보다는, 한국만의 독특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더 낫습니다. 아마도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하이브리드 형태가 되겠죠. 어설프게 2등이 되기보다는 독창적인 것이 더 낫습니다. 만약 저라면 하드웨어-소프트웨어 파트너십에 집중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낼지 배우려 할 겁니다.”-그럼 한국의 미래가 밝다고 보시나요?“그럼요. 음악 그룹을 만드는 능력과 기술을 다루는 능력 사이엔 엄청난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기술 회사를 만드는 것과 음악 밴드를 만드는 건 사실 그렇게 다르지 않아요. 한국은 비영어권 국가 중 유일하게 음악·예술을 상당한 수준으로 수출하는 나라예요. 다른 어떤 나라도 그렇게 하지 못해요. 그리고 한국은 생존의 역사가 있죠. 무(nothing)에서 시작했고, 억압받았어요. 아시아에서 유일한 기독교 국가이기도 하고요. 제 생각엔 사고방식 전체, 즉 도덕성의 구조 같은 것이 (미국과) 비슷해요.”갑자기 K팝으로 튄 그의 대답이 본인 저서 속 내용과 일맥상통해서 흥미로웠는데요. 혹시 K팝도 듣느냐는 질문엔 이렇게 답합니다.“안타깝게도 제 취향은 아니지만, 잘 팔린다는 건 알죠. 그건 뭐랄까, 카리스마가 있어요. 카리스마 있는 사업을 구축하는 건 사실상 미국만이 해온 일입니다. 제가 영어권 밖에서 그걸 본 유일한 곳이 바로 한국이죠. 제가 보기에 여러분은 그것이 얼마나 독특한지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 같아요.”“팔란티어의 경쟁상대는 …”카프 CEO는 “팔란티어는 매출이 스타트업처럼 성장하고 마진은 높다”고 강조합니다. “미국에서 천문학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면서, 이른바 ‘AI 버블론’에 대한 질문엔 “우리 제품 수요는 매우 강력해서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말하죠.그럴 만도 한 게 지난 2분기 팔란티어 매출은 사상 처음 10억 달러를 돌파하며(전년 동기 대비 48% 증가) 월가를 놀라게 했습니다. 설립 뒤 20년간 줄곧 적자를 기록했던 과거를 완전히 지운 채, 이제 8분기 연속 흑자 행진이죠. 매출총이익률(매출 원가를 뺀 이익의 비율)은 무려 80%. 고객 유치 초기엔 플랫폼 개발에 비용이 많이 들지만, 일단 한번 구축해 두면 이후엔 수익성이 크게 높아지는 사업구조 덕분입니다.그게 바로 지난 1년 324%, 2년 동안 1007%라는 경이적인 주가 수익률의 비결이기도 하죠. 팔란티어는 서학개미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데요. 정부와 기업을 고객으로 둔 B2G, B2B 기업 팔란티어가 14~15일 이틀에 걸쳐 사상 처음 한국에 팝업스토어를 연 이유였죠. 카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은 우리의 가장 큰 개인 투자자 그룹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개인 투자자들을 사랑해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분들이죠.”팔란티어는 2011년 미국 네이비실 대원들에게 사살당한 오사마 빈 라덴을 추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단 점이 알려지며 명성이 높아졌죠. 이제 팔란티어 소프트웨어는 테러범 추적과 마약밀수범 적발 같은 정부 업무뿐 아니라, 투자은행의 사기거래와 자금세탁 적발, 제약사의 신약 개발 데이터 분석, 페라리의 더 빠른 포뮬러1 자동차 개발에도 쓰입니다.팔란티어 플랫폼을 도입한 기업 중엔 극적인 생산성 향상을 경험한 사례가 많죠. 최근 햄버거 체인점 웬디스의 공급망 담당자는 팔란티어의 AI 플랫폼(AIP) 도입으로 15명이 하루 동안 걸렸던 작업을 5분 만에 처리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는데요. 일단 작은 프로젝트에서 효과를 체험한 기업은 팔란티어 기술 적용 범위를 점점 넓혀가곤 합니다.그런데 이런 질문이 당연히 들지 않나요. 팔란티어 소프트웨어로 대체될 그 15명의 일자리는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인간은 일자리에서 밀려나는 걸까요.카프 CEO는 이런 비관론을 거부합니다.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없애는 게 아니라, AI를 통해 ‘진짜 노동’의 가치는 오히려 높아질 거란 논리인데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처럼 고도로 훈련된 전문 기술 인력이 있는 곳에서는 그런 문제(AI로 인한 일자리 감소)가 심각하지 않을 겁니다. 예를 들어 배를 용접하는 사람들 같은 경우요. 그런 사람은 해고당하지 않아요. 솔직히 미국에는 그런 인력을 위한 일자리가 무궁무진하고, 그건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이와 관련해 팔란티어는 ‘업무 지능: AI 낙관 프로젝트’라는 캠페인을 최근 시작했는데요. 그 선언문엔 이런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쓸모없거나 무의미해지는 AI 미래를 강요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르게 봅니다. AI는 일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일을 변화시킵니다. AI는 사람들의 삶의 목적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고된 노동에서 해방시켜 인간이 가장 잘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서학개미의 3대 최애 종목(테슬라, 엔비디아 다음) 팔란티어. 무려 600배에 달하는 PER에도 그칠 줄 모르는 팔란티어 사랑을 보며, 자연스레 떠오르는 의문은 이거죠. 이 미친 주가를 정당화하는 팔란티어의 독보적인 기술 경쟁력은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요. 다른 데이터 분석, AI 설루션 빅테크 기업들이 뒤쫓아와서 팔란티어 지위를 위협하게 되지 않을까요.그래서 투자자의 관점에서 물어봤습니다. 팔란티어의 경쟁자는 누구일까요?“아시다시피, 우린 주로 우리 자신과 경쟁합니다. 가끔 어리석은 짓을 하면서요. 딱히 누구와 경쟁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건 좀 더 아시아적인 관점, 즉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더 나아지게 만들려는 방식으로 생각하는 게 도움 됩니다.”명상과 태극권, 크로스컨트리 스키 마니아다운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10월 1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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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란티어 창업자 “한국의 AI전략, K팝처럼 독특함 살려야”

    “한국은 실리콘밸리를 따라 하기보다는 한국만의 독특한 것을 만들어야 한다.”앨릭스 카프 팔란티어 공동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가 한국 기술 업계에 하는 조언이다. 팔란티어는 매출과 주가 모두 가장 빠르게 급등하는 미국의 인공지능(AI) 소프트웨어 기업. 국내 서학개미들이 열광하는 기업인 팔란티어를 23년째 이끄는 그에게 한국의 AI 기술에 대해 묻자 K팝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위대한 기술 기업을 만드는 것과 음악 밴드를 만드는 건 다르지 않다”면서 “미국처럼 (음악적으로) 카리스마 있는 산업을 만들어낸 비영어권 국가는 한국뿐이니, 그 독특함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실리콘밸리의 철학자 CEO13일 오후 카프 CEO를 만난 곳은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팔란티어 팝업스토어 현장. 갖가지 디자인의 티셔츠와 모자, 에코백 등 팔란티어 로고를 박은 굿즈들이 한편에 전시돼 있었다. 팝업스토어는 14, 15일 일반에 공개된다. 기업 간 거래(B2B)가 중심인 팔란티어가 기업 대 소비자(B2C) 기업의 전유물로 꼽히는 팝업스토어를 선보인 것은 사상 처음이다. 그만큼 한국 기업과의 협력은 물론이고 한국 투자자들에게 관심이 크다는 뜻이다. 카프 CEO는 “우리는 (한국의) 개인 투자자들을 사랑한다”고 애정을 표현했다.팔란티어는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인사이트를 도출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이터 기반 운영체제’를 구축해 주는 기업이다. 파편화된 데이터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통합하는 ‘온톨로지(Ontology)’ 작업이 특징이다. 이를 통해 부서 간 장벽을 없애고, 해결책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조직의 생산성을 극대화한다. 팔란티어는 올 2분기(4∼6월) 매출액 10억 달러(약 1조4300억 원)를 돌파하며 월가를 놀라게 했다. 미 국방부의 핵심 파트너이자 ‘AI 방위산업’의 아이콘으로 불리지만 최근엔 민간에서의 확장 속도가 더 무섭다. 카프 CEO는 “(팔란티어) 제품에 대한 수요가 매우 높다”면서 “매출은 스타트업처럼 성장하면서 높은 마진을 기록 중”이라고 강조했다.카프 CEO는 실리콘밸리의 철학자라고 불린다. 철학 박사 출신으로 지크문트 프로이트 연구소에서 일하기도 했던 그는 스탠퍼드대 로스쿨 동문인 창업자 피터 틸 이사회 의장과 2003년 팔란티어를 창업했다.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벤처 투자로 설립된 팔란티어의 대표 상품은 정부용 플랫폼 ‘고담(Gotham)’이다. 오사마 빈라덴 사살 작전과 러시아군에 맞선 우크라이나군의 선전, 대규모 금융 사기 적발까지 세계를 흔든 사건 뒤엔 고담이 있었다.최근 팔란티어의 성장을 이끄는 건 기업용 AI 플랫폼 ‘AIP’이다. 카프 CEO는 “팔란티어의 제품은 회사를 매우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만들 수 있다”면서 “특히 한국 기업들처럼 (이런)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본 적이 없는 하드웨어 기업들에 효과적”이라고 덧붙였다.서학개미에게 팔란티어는 우상향 신화와도 같은 존재다. 팔란티어는 올해 나스닥100 지수 내에서 가장 높은 상승률(135%)을 찍으며 미국 시총 20위권에 단숨에 진입했다. 글로벌 증권가에서는 기존의 ‘M7(매그니피센트7)’을 팔란티어 등을 포함한 ‘M10’으로 재정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경쟁자는 우리 자신뿐”기업이 팔란티어의 AI 플랫폼을 도입하면 효율성이 높아지는 대신 그동안 불필요했던 업무나 인력이 무엇인지 드러나게 된다. 기술 낙관론자인 카프 CEO는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할 것이란 지적에 대해 진짜 노동의 가치는 오히려 높아질 것이라 말한다. “한국처럼 고도로 훈련된 직업 기술자들이 있는 곳에선 문제 되지 않을 거다. 이들을 위한 일자리는 무궁무진해서 해고되지 않을 것”이란 설명이다.팔란티어는 기업용 AI 플랫폼 선두주자이지만 빅테크들의 추격을 받고 있다. 하지만 경쟁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카프 CEO는 “우리 자신과 경쟁할 뿐 실제로는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경쟁자를 이기려 하기보다 자신을 점점 더 나아지게 하는 아시아적 관점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한애란 기자 haru@donga.com최원영 기자 o0@donga.com}

    • 202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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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장 불륜 고양이’ 구독자가 421만 명? 넘쳐나는 AI 슬롭, 창작자는 어디로 [딥다이브]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 같은 프로필 이미지. 올봄 전 세계적으로 챗GPT 열풍을 일으켰죠. 그럼 이런 건 어떨까요. 나와 친구가 영웅이 돼 악당과 맞서 싸우는 동영상, 나와 내 아이가 함께 바닷속을 탐험하는 동영상, 또는 내가 샘 올트먼 오픈AI CEO를 인터뷰하는 동영상.이런 걸 AI로 뚝딱 만들 수 있는 ‘소라(Sora) 앱’을 오픈AI가 출시했습니다. 아직은 초대받은 극소수만 쓸 수 있지만, 이용자 반응은 한결같죠. ‘이거 너무 재미있다!’동시에 ‘AI 슬롭(Slop)’ 주의보는 더욱 요란하게 울립니다. 기술의 무서운 발전으로 AI로 생성한 콘텐츠는 점점 더 빠르게 넘쳐나고 있고요. 그 압도적인 양과 속도에 인간 창작자가 밀려나는 현상마저 이미 나타나는데요. AI 기술 발전의 어두운 뒷면, AI 슬롭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0월 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맛없는데 많이 먹네, AI 슬롭새우의 몸통과 다리를 가진 예수님, 감자를 튀기는 고양이, 빵으로 만든 말…. 기괴하고 비현실적인 이런 이미지들, 모두 AI로 만들어져 SNS에서 널리 공유됐었죠. 이해할 수 없는 미의식의 이런 AI 생성물을 일컫는 용어가 ‘AI 슬롭(AI Slop)’입니다. 마치 가축에게 먹이로 주는 음식 찌꺼기(Slop)처럼 맛이 없다는 뜻이 담겨있죠. 내용도, 정성도, 애정도 없이 마구 생산됐단 의미입니다.이런 용어까지 생겼다는 건 그만큼 AI 슬롭이 많아졌단 뜻입니다.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그램 릴스를 보다 보면 이런 류의 AI 영상이 종종 보이죠. 요리하는 시바견, 고기 굽는 비숑, 유리 과일을 자르는 영상.영국 가디언지 분석에 따르면 7월 한 달 동안 가장 빠르게 성장한 유튜브 상위 100개 채널 중 9개는 순수 AI 생성 콘텐츠였습니다. AI 슬롭이 유튜브 세계에서도 상당히 선전 중인 건데요. 예를 들어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한 막장 불륜 드라마 채널(슈퍼 캣 리그)은 개설된 지 석 달 만에 구독자 수가 무려 421만명입니다.AI 슬롭은 아직까진 대체로 맛이 없습니다. 아주 질색하며 혐오하는 사람들도 많죠. 하지만 배고픔을 달래줄 순 있습니다. 시간 때우기용, 도파민 자극용 콘텐츠가 필요한 이들의 클릭과 구독이 이어지고 있죠.그래서 플랫폼도 AI 슬롭을 용인합니다. 플랫폼 입장에선 퀄리티가 어떻든, 이용자를 오래 붙잡아놓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요. 오히려 광고 수익을 두둑이 챙겨주며 이런 AI 슬롭 콘텐츠 제작을 장려하는 것처럼도 보입니다.AI 밴드에 밀린 인간 밴드딱 보면 품질이 떨어져서 AI 생성물인 줄 알겠던데. 그런 걸 왜 소비하는지 모르겠다고요? 그런데 정말 우리는 AI가 만들었는지 인간이 만들었는지를 구분할 수 있을까요. 설사 구분한다 한들, 그것까지 따지면서 콘텐츠를 소비하게 될까요.‘블리딩 버스(Bleeding Verse)’는 올해 7월 말 스포티파이에 데뷔한 AI 밴드입니다. 스포티파이 소개글에서 ‘사람의 가사를 AI가 노래로 만들었다’라며 AI 생성 음악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죠. 동시에 유튜브에선 ‘데이시커(Dayseeker)와 홀딩 앱센스(Holding Absence)에 영감을 받았다’면서 ‘AI 지원 악기 연주와 보컬’이라고도 소개했고요.그리고 블리딩 버스의 스포티파이 월간 청취자 수는 무려 90만명. 2015년부터 활동해 온 4인 밴드 홀딩 앱센스의 월간 청취자 수 85만명을 이미 추월했습니다. 네 명의 사람이 10년 동안 만들어낸 기록을 불과 두 달 만에 그들을 모방한 AI 밴드가 앞서간 거죠.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블리딩 버스의 유튜브 채널을 한번 보세요. ‘우리를 계속 치유해 주세요’, ‘정말 아름답고 강력해요’라는 진심 어린 댓글이 줄을 잇습니다.약간 소름 돋지 않나요. 이를 두고 홀딩 앱센스의 멤버는 X에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충격적이고, 실망스럽고, 모욕적입니다. 무엇보다도 경종을 울리는 사건입니다. AI 음악에 반대하지 않으면 우리 같은 밴드는 사라질 겁니다.”스포티파이는 최근 AI 정책을 발표했는데요. 여기서 AI 음악을 금지하진 않을 거란 점을 분명히 했죠. 대량·중복 업로드 같은 사기성이 있는 ‘스팸’ AI 음원 7500만 건은 제거했지만, 동시에 AI를 활용해 만들어진 창의적인 음악은 계속 알고리즘을 통해 홍보할 거라고 밝힌 겁니다.블리딩 버스처럼 AI임을 대놓고 표방하는 음원은 더 늘어만 갈 겁니다. 돈이 되니까요. 스포티파이 알고리즘을 통해 AI 밴드의 음악을 접하고 팬이 된 이용자들은 나중에 ‘그게 AI 음악이었다니’라며 화를 낼까요? 아니면 ‘뭐 어때. 좋기만 한데’라고 어깨를 으쓱하고 말까요.왜 하냐고? 돈이 되니까!AI 슬롭 범람을 막을 수 있는 건 사실상 플랫폼뿐이지만, 돈벌이가 중요한 플랫폼 기업들은 그럴 의지가 없죠. 최근 오픈AI는 차세대 영상 생성 AI 모델인 ‘소라(Sora) 2’를 탑재한 틱톡 스타일의 소셜미디어 앱 ‘소라(Sora)’를 출시했는데요.텍스트만으로 영상을 만드는 건 물론이고요. 이용자 자신을 사람·동물·사물 모습으로 출연시킬 수 있는 ‘카메오’ 기능이 있다는 게 핵심이죠(목소리 포함). 자기 모습 사용을 허락한 친구들까지도 내가 만드는 AI 영상에 출연시킬 수 있다는데요.‘내가 주인공인 영상을 만드는 건 정말 재미있다. 영상 만들기에 푹 빠졌다’는 기자 리뷰가 눈에 띕니다. 동시에 이런 평도 있군요. “사람들은 친구들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 AI의 허술함을 개의치 않을 수 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소라 앱은 아직은 미국·캐나다에서 초대받은 사람만 이용할 수 있지만, 추후 글로벌로 확장할 거라고 하죠.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듭니다. 오픈AI는 인공일반지능(AGI)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대단한 AI 기술 기업 아니었던가요? 갑자기 웬 소셜미디어 앱이죠? 일종의 ‘AI 슬롭 머신’을 만들 셈인가요?답은 물론 돈 때문이죠. 소라 앱엔 개인화된 광고가 붙을 거거든요. 샘 올트먼 CEO는 소라 앱 출시를 비판하는 글에 이렇게 답합니다. “과학을 수행할 수 있는 AI를 구축하려면 자본이 필요하고, 거의 모든 연구 활동을 AGI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멋진 신기술과 제품을 보여주고, 그들을 웃게 만들고, 필요한 컴퓨팅 자원을 고려할 때 수익까지 창출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꽤 솔직한 답변이네요.AI가 위키백과를 무너뜨렸다이런 상황에서 인간 창작자는 점점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AI는 워낙 압도적인 속도와 양으로 콘텐츠를 쏟아내니까요. 빠르고 쉽고 저렴한 AI의 놀라운 효율성을 인간은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는 거죠.그럼 만약 AI 슬롭이 플랫폼을 점령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도 소비자에겐 여전히 볼만 하고 들을 만한 콘텐츠가 제공될 테니, 상관없는 일일까요?이와 관련해 위키피디아(위키백과) 사례를 소개합니다. AI 슬롭의 범람이 플랫폼을 어떤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최신 사례이죠.위키피디아는 340개 넘는 언어의 번역본이 있는 다국어 플랫폼인데요. 지난 9월 위키피디아는 2003년부터 운영해 온 ‘위키피디아 그린란드어판’ 폐쇄를 결정했습니다. 왜? 몇 년 전부터 AI를 이용해 그린란드어로 번역된 엉터리 정보들로 가득 차버렸기 때문이죠.대형언어모델(LLM)을 이용해 누구나 클릭만 하면 몇초 만에 AI 번역을 뚝딱하는 시대입니다. 다만 사용자가 극히 적은 소수 언어는 LLM이 훈련할 만한 데이터가 매우 부족하죠. AI를 이용해 그린란드어 같은 소수 언어로 번역한 경우, 유독 오류가 많고 정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인데요.문제는 너무 많은 외국인이 AI 번역을 이용해 위키피디아 그린란드어판을 채우는 데 기여했단 겁니다. 아마 작성자들은 번역된 그린란드어 문장에서 뭐가 틀렸는지 전혀 알 수 없었을 거예요. 그걸 작성한다고 딱히 돈이 되는 건 아니니, 아마도 선의로(그린란드어판에 좋은 정보를 실어주자!) 그렇게 했겠죠. 그 결과 말도 안 되게 틀린 정보(예-캐나다 인구가 41명이다)는 물론, 아예 문장이 말이 되지 않아 읽을 수조차 없는 내용이 넘치게 됩니다.그리고 진짜 문제는 많은 LLM 모델이 훈련용 데이터로 위키피디아 정보를 이용하고 있단 점이죠. 즉, 위키피디아 그린란드어판이 엉망이 되는 것 자체도 문제이지만, 더 심각한 건 주요 AI 모델이 이로 인해 엉터리 그린란드어를 배우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더욱더 그린란드어 AI 번역은 엉터리가 되고요. 쓰레기를 넣으니 쓰레기가 나오는 ‘파멸의 악순환’에 빠지는 거죠.AI 번역이 초래한 이런 소수 언어 위키피디아의 위기는 아프리카 부족 언어인 풀풀데어, 하와이 원주민 언어인 하와이어판에서도 마찬가지라는데요. AI 슬롭이 어떻게 플랫폼을 황폐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AI 슬롭은 어떤 면에서 스팸(Spam)의 후예처럼 보입니다. 광고·피싱을 위해 마구 뿌려진 스팸이 우리의 메시지함과 메일함을 가득 채워서 골치 아팠던 것처럼, 이젠 원치 않는 AI 슬롭으로 가득 찬 피드를 헤쳐 나가야 하는 상황인데요.스팸메일을 탐지하고 차단하는 기술이 발전해 온 것처럼, AI 슬롭을 걸러내는 기술도 발전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랍니다. 인간 창작자들이 콘텐츠 세상의 주류로 계속 살아남으려면 말이죠. By.딥다이브레터를 쓰는 내내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집니다.머릿속 질문들을 순서대로 정리해 보자면.-어디까지가 ‘AI 슬롭’일까요. 쓰레기 같은 AI 슬롭인지, 아니면 가치를 인정할 만한 AI 창작물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뭘까요.-혹시 그 기준을 ‘인간다움’ 또는 ‘진정성’ 같은 걸로 잡을 수 있을까요?-하지만 진짜 인간이 순수 창작한 콘텐츠도 품질이 형편없거나 부정확하고 왜곡된 엉망인 것들이 너무 많은데요?-결국 소비자의 선택 기준은 품질 아닐까요? AI를 얼마나 썼느냐가 아니라요.-AI 기술이 지금보다 더 발전한다면, 그땐 품질 면에서 AI 생성물이 웬만한 인간 창작물을 뛰어넘지 않을까요.-만약 그렇다면 AI 창작물이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는 건 너무 당연한 결말일까요.-글, 이미지, 영상 등, 사실상 모든 콘텐츠에서 AI를 어느 정도 쓰는 게 당연한 시대가 된다면, 인간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될까요.-AI 없이는 창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건 인간 능력의 퇴화일까요, 아니면 새로운 도구를 이용한 인간의 진화일까요.질문은 많은데, 답을 찾긴 쉽지 않습니다.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요?*이 기사는 10월 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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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자 1800명에 33조원 부유세?…佛, 세금 논쟁에 빠지다[딥다이브]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거둬라!”이런 주장, 어떤가요. ‘그래, 돈 많은 사람들이 세금 더 내야지’라고 찬성할 사람도, ‘부자는 이미 세금 많이 내는데 뭘 더 내라는 거야’라고 반대할 사람도 모두 있겠죠. 하지만 그냥 부자가 아닌 상위 0.01% 극소수 ‘슈퍼 리치’만 대상이라면? 상당수가 슬그머니 찬성 쪽으로 돌아서지 않을까요.바로 이런 논의가 프랑스에서 한창입니다. 이른바 ‘주크만세(Zucman tax)’라고 부르는 슈퍼리치 부유세를 도입하잔 논쟁이죠. 재정적자를 위한 해결책이라며 반기는 국민이 대부분이라는데요. 왠지 프랑스에만 머물진 않을 듯한 이슈, 슈퍼리치 부유세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9월 26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슈퍼리치 부유세에 여론은 대동단결국가부채 비율 113.9%. 재정위기에 시달리는 프랑스는 9월 내내 시끄러웠죠. 복지·의료 같은 공공예산 삭감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와 파업으로 총리가 물러나고 사회 곳곳이 마비됐는데요.국민 반발로 긴축은 사실상 물 건너갔는데, 그렇다고 빚을 마냥 늘릴 순 없는 노릇. 이거, 무슨 뾰족한 수가 없을까요.이와 관련해 프랑스 좌파 정당이 제안한 ‘주크만세(Zucman tax)’가 지금 프랑스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경제학자 가브리엘 주크만 UC버클리대 교수의 아이디어에서 따온 것으로, 극소수 초부유층에만 ‘부유세(순자산세)’를 물리자는 겁니다.내용은 간단합니다. 순자산(자산-부채)이 1억 유로(약 1645억원)가 넘는 부유층에 한해 순자산에 최소 2%를 세금으로 부과합니다. 즉, 해당 납세자가 그해 낸 각종 세금(소득세+사회기여금 등)이 적어도 순자산의 2%는 돼야 하고, 만약 그에 못 미치면 추가로 세금을 물려서 2% 기준선에 맞추겠다는 거죠.이 조건(순자산 1억 유로 이상)에 해당하는 프랑스 납세자는 고작 1800가구. 전체(약 3400만 가구)의 0.005%밖에 되지 않는 극상류층인 셈인데요. 주크만 교수는 이 세금 도입으로 연간 최대 200억 유로(약 33조원) 세수가 추가될 거라 내다보죠. 물론 그건 과장이고 기껏해야 50억 유로(약 8조2000억원)에 그칠 거란 일부 경제학자 주장도 있지만요.어찌 됐든 프랑스는 당장 내년에 440억 유로(약 72조원)의 예산 감축이 필요한 절박한 상황. 최근 여론조사에서 프랑스 국민 중 86%가 주크만세에 찬성했죠. 좌파 유권자는 물론이고, 우파인 르네상스당 지지자의 92%, 공화당 지지자의 89%도 찬성했습니다. 정치커뮤니케이션 전문가가 “여론조사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만장일치”라며 놀라워할 정도죠.당연히 1800명 안에 들어가는 슈퍼리치 당사자는 기겁합니다. 주크만세에서 ‘순자산’이란 주식, 부동산, 은행 예금 등을 모두 포함한 개념인데요. 이게 1억 유로 넘는 건 주로 기업 오너들이거든요.기업인, 특히 아직 적자 상태인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이렇게 반발하죠. “(세금을 내려고) 회사 일부를 팔아야 하는 상황에 빠뜨리는 건 터무니없고 위험합니다.”(프랑스 IT 스타트업 미라클 창업자 필립 코로)급기야 프랑스 최고 부자 베르나르 아르노 루이뷔통모에헤네시 그룹 회장도 나섰는데요. 영국 선데이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크만세는) 자유주의 경제를 파괴하려는 목적입니다. 우리 경제에 치명적일 수 있는 공격적인 행위에요.” 그의 순자산은 현재 1690억 달러(약 235조원). 그 2%가 세금이라면, 그는 연간 4조7000억원을 세금으로 내야 하는 셈입니다. 아르노 회장이 부유세 논쟁의 근원인 주크만 교수를 “자유주의 경제 파괴를 목표로 하는 극좌 활동가”라고 공격한 게 이해도 되네요.소득세의 실패, 초부유층의 승리어떤가요. 슈퍼리치 부유세는 획기적인 해결책일까요? 아니면 부작용을 초래할 극단적 발상일까요? 결론 내리기 전에,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왜 하필 0.01% 슈퍼리치가 타깃일까요.대부분 나라에서 소득세는 누진적이죠. 돈을 잘 벌수록 더 높은 세율을 적용받는 게 공정하다고 여겨집니다. 우리나라도 과세표준이 10억원을 넘으면 소득세율 45%를 적용하고요.그런데 최상위 슈퍼리치는 이 소득세 누진세의 영향권 밖에 있습니다. 왜? 그들의 부의 원천이 소득(급여)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들은 주로 지분을 보유한 기업으로 부자가 됩니다.오랫동안 무급으로 일해온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 기본급이 1달러인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를 보세요. 아마존 제프 베저스는 수년 동안 현금 급여는 연 8만 달러(약 1억1000만원)만 받았고요. 오픈AI의 샘 올트먼 CEO도 2023년 연봉이 7만6000달러(약 1억원)라서 화제가 됐죠. 근로소득세만 보면 그 회사 개발자보다도 훨씬 적게 내는 셈입니다.다른 소득은 어떨까요? 일단 글로벌 빅테크 중엔 배당을 아예 하지 않거나(아마존·테슬라 등), 배당수익률이 매우 낮은(애플·메타·구글 등)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워런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 역시 1967년만 빼고는 한 번도 배당금을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배당소득세도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거죠.결국 슈퍼리치 기업인이 내는 실질적인 세금 중 상당 부분은 소득세가 아니라 그 기업이 내는 법인세라 할 수 있는데요. 법인세는 세율이 소득세보다 낮죠. 또 법인세는 각종 공제와 조세회피처 이용 등으로 줄일 수도 있고요.그래서 사업이 번창해서 기업이 돈을 엄청나게 벌고, 주가가 뛰어서 사주가 세계적인 갑부가 되어도, 상대적으로 그들이 내는 세금(소득세+법인세+재산세+증여세 등등)은 보잘것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그들이 지분을 내다 팔면 그 차익에 대한 양도소득세를 물겠지만, 그런 일은 드무니까요. 미실현 이익엔 소득세를 물리지 않습니다.만약 급여도, 배당도 안 받으면 그들은 무슨 돈으로 그렇게 잘 사냐고요? 대출받으면 됩니다. 주식담보대출을 받으면 기업 지분을 팔지 않고, 소득세도 내지 않으면서 소비도 하고 투자도 할 수 있죠. 당연히 이자가 세금보다 쌉니다.중산층보다 낮은 억만장자 세율‘초부유층 회장님들이 너무 세금을 적게 내고 있다.’이런 문제 제기는 늘 있었지만, 2021년 미국 비영리 언론사 프로퍼블리카의 보도가 불을 붙였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한때 세계 1위 부자였던 제프 베저스는 2007년과 2011년 연방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았어요. 심지어 그는 4000달러의 자녀 세액공제까지 받았다고 하죠. 일론 머스크와 칼 아이컨도 합법적으로 소득세를 피한 적 있다고 하는데요.이와 함께 경제학계에선 슈퍼리치가 도대체 얼마나 세금을 내고 있는지를 추정하는 각종 연구가 쏟아져나옵니다. 각국 연구자들 결론은 하나로 모입니다. 슈퍼리치는 일반적인 고소득자보다도 훨씬 낮은 세율을 적용받고 있다는 거였죠.2024년 G20 의장이던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의 요청으로 가브리엘 주크만 교수가 작성한 ‘초고액 부자에 대한 최저한세율 청사진’ 보고서를 볼까요. 아래 그래프는 4개국(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의 소득별로 실제 부담하는 실효세율을 추정한 건데요. 기업인의 경우엔 그 기업의 이익을 소득에 반영하고, 기업이 낸 법인세를 세금에 포함해서 실효세율을 계산했습니다.그 결과, 부자일수록(그래프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세율이 높아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일정 수준보다 더 큰 부자이면 세율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결과적으로 자산이 10억 달러가 넘는 억만장자(맨 오른쪽 끝)들의 실효세율은 웬만한 중산층보다도 낮죠. 프랑스(파란색 선)는 전 국민 평균 실효세율이 52%인데, 억만장자(10억 달러 이상 초부유층)는 27%입니다.억만장자들은 일반인보다 더 빠르게 부자가 되고 있다고 하죠. 통계에 따르면 1987~2024년 세계인의 평균 자산은 연평균 3.2% 증가했지만, 글로벌 억만장자 자산은 7.1%씩 늘었는데요. 혹시 너무 낮은 세율 덕분에 부자가 더 빠르게 부자가 되는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를 수정하기 위한 새로운 세금이 필요하다는 것, 그게 바로 주크만세의 기본 논리입니다.아마 이런 논리, 예전 같으면 급진 좌파의 주장으로 치부되고 말았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세상이 어떤가요. 미국도, 유럽도 모두 심각한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고요. 특히 유럽은 고령화로 복지지출은 무섭게 불어나는데, 인구 감소로 세금 낼 사람은 줄어만 가서 고민이 큽니다.그렇다고 이제 와서 복지 줄이고 세금 더 올리자니, 프랑스 시위에서 보듯이 모든 국민이 들고일어날 상황. 루이 14세 시절 재무장관인 장 바티스트 콜베르는 유명한 ‘세금 징수는 거위 깃털 뽑기’라는 말을 남겼지만, 요즘 세상엔 깃털에 손도 대기 어렵습니다. 거위를 잘못 건드렸다간 정권이 뒤집힐 거예요.그래서 이 좌파적인 부유세 도입론이 힘을 얻습니다. 99.99%의 국민엔 전혀 영향이 없는, 따라서 정치적 지지를 얻기 매우 쉬운 세금이니까요.동시에 이 점에서 일부 우파 인사도 슈퍼리치 부유세를 지지합니다. 미국 마가(MAGA) 진영 대표 논객인 스티브 배넌은 지난해 말 미국 재정적자 문제를 지적하며 이렇게 말했죠. “소뿔에 들이받혀야 한다면(증세를 한다면), 그건 부자들, 억만장자 계층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중산층과 노동 계층에게선 나올 수 없습니다. 안 돼요. 요즘은 먹고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다고요.”부자 대탈출 막을 방법은?하지만 부유세엔 모두가 다 아는 맹점이 있습니다. 부자들이 세금을 피해 다른 나라로 달아나 버릴 수 있단 점이죠. 2013년 프랑스 국민배우 제라드 드빠르디유는 당시 잠시 도입됐던 부유세를 피해 러시아 시민권을 취득했고요.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 역시 벨기에 시민권 취득을 시도했다가 접은 적 있죠.노르웨이엔 미실현 이익에도 세금을 물리는 부유세가 있는 나라인데요(순자산 2억4000만원 이상은 1%, 29억원 이상은 1.1%). 이를 피해 지난 수년간 약 200명이 스위스로 이주하는 ‘부자 탈출 러시’가 벌어졌습니다. 얼마 전 총선에선 ‘부유세 폐지’가 가장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기도 했죠.(다만 결과는 부유세를 지지하는 좌파 여당의 승리)유럽 국가는 상대적으로 낮은 세율을 적용하는 스위스·이탈리아가 지척이고, 아예 개인소득세가 없는 모나코도 있습니다. 좀 멀긴 하지만, 세금 천국인 아랍에미리트(소득세, 자본이득세 모두 0) 같은 나라도 요즘 부자 탈출구로 떠오르고요. 초부유층은 세금을 피해서 국적을 바꿀 의지와 실행력이 있습니다. OECD 전 조세정책국장인 파스칼 생타망은 FT에 이렇게 말하죠. “억만장자들에게 ‘당신의 충성심은 국가에 대한 것입니까, 아니면 돈에 대한 것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저는 제 돈에 충성합니다’라고 답할 겁니다.”그래서 슈퍼리치 부유세 도입을 주장하는 모든 보고서(주크만 교수팀, 조세정의네트워크, UN 보고서 등)가 공통으로 강조하는 건 이겁니다. 국제 협력. 이주를 통한 세금 회피를 막으려면 여러 나라가 함께 부유세를 도입해야 효과가 있다는 건데요. 물론 나라별 사정이 제각각인 상황이라 쉽진 않습니다. 일단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부터 동의할 리 없죠.그게 어렵다면 출국세(Exit tax, 국외전출세), 즉 해외로 이주할 때 내야 하는 세금을 더 강화하는 게 그나마 방법입니다. 주식을 팔지 않았어도 출국 직전에 판 것과 똑같이 세금을 매기는 거죠. 이미 미국·일본·프랑스·독일·캐나다·호주, 그리고 한국도 출국세를 적용 중입니다(한국은 대주주에만 부과).누진적 소득세는 도입될 때부터 가장 진보적인 세금으로 여겨졌죠. 지난 100년 동안 소득세는 재분배의 강력한 수단이었고요. 하지만 이제 그 한계가 드러나면서 부유세 논의가 불붙고 있는데요. 프랑스에서 시작된 이 논쟁이 어디로까지 번질지 한번 지켜보시죠. By.딥다이브프랑스 시민들의 과격한 ‘국민마비 운동’도 놀라웠는데, 주크만세를 둘러싼 논쟁은 더 흥미롭습니다. 이 급진적 아이디어는 일부라도 현실화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부자들은 어떻게 대응할지가 궁금하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정부의 긴축 예산안이 대대적인 시위에 가로막힌 프랑스. 복지를 줄이기도, 증세를 하기도 어려운 가운데 ‘주크만세’ 도입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습니다. 1억 유로 이상 순자산을 가진 1800명에게 순자산의 2%를 세금으로 매기자는 겁니다. 프랑스 국민 86%가 찬성합니다.-최상위 슈퍼리치들은 누진적 소득세의 영향권 밖에 있습니다. 부의 원천이 소득보다는 그들이 소유한 기업이기 때문이죠. 연구자들에 따르면 억만장자들은 웬만한 중산층보다도 낮은 실질 세율을 적용받고 있습니다.-이를 바로잡기 위해 슈퍼리치에 한해 소득이 아닌 순자산에 세금을 물리자는 주장이 힘을 얻습니다. 타깃이 된 기업인들은 “세금 내려고 기업을 팔아야 하느냐”며 발끈하죠.-부유세의 부작용은 뻔합니다. 부자들이 세금을 피해 다른 나라로 떠나겠죠. ‘국제협력’이 필요하단 얘기가 나오지만 쉽지 않은데요. 이제 막 불붙기 시작한 슈퍼리치 부유세 논쟁이 얼마나 더 번지게 될까요.*이 기사는 9월 26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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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증오에 불을 붙이나…75년 전 매카시즘 다시보기[딥다이브]

    찰리 커크. 2025년 미국 사회는 아마 이 이름과 함께 역사에 기록될 겁니다. 9월 10일 우익 청년 활동가 찰리 커크가 피살 당한 사건은 큰 충격을 줬죠.그의 죽음은 비극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정치폭력이란 점에서 비극이고요. 동시에 그의 죽음을 이용해 또 다른 갈등과 증오를 조장하는 세력이 득세한다는 점에서도 비극이죠.최근 미국에선 사망한 커크의 과거 행적을 비판하는 SNS 게시물을 올렸다는 이유로 언론사, 학교, 기업 직원들이 줄줄이 해고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진보성향 단체를 근거 없이 ‘극좌 테러단체’로 낙인찍는 정부 인사들의 발언도 이어지고요. 디즈니는 진행자 지미 키멜의 발언이 문제가 되자 ABC 심야쇼를 무기한 방영 정지했죠. 이거 어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요.일부에선 이를 두고 75년 전 ‘매카시즘(McCarthyism)’을 떠올립니다. 무고한 이들에까지 공산주의자 낙인을 붙여 대대적으로 숙청했던 시절이죠.에이, 지금이 어느 시절인데 매카시즘 같은 광풍을 걱정하냐고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카시즘의 1950년대와 지금의 미국 사회는 닮은 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매카시즘을 보면 미국 내 강경 우파의 사고방식을 좀더 이해할 수 있죠. 커크 피살사건의 끝이 매카시즘의 부활은 아니기를 바라면서, 75년 전 매카시즘을 다시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9월 1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반공주의의 시작과 강경 우파의 부상1945년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인들은 자신감 넘치고 희망에 차 있어야 마땅했죠.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끔찍한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들은 일상으로의 복귀를 원했지만,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없었죠. 주택도, 일자리도 모두 부족했습니다. 귀환한 흑인 군인들이 전쟁터에서와 같은 평등을 요구하면서 인종 갈등은 극심해졌고요. 오대호 지역과 서부 해안에선 1년 내내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사회는 불안했고, 다들 대공황 같은 불황이 닥쳐올 거라 예상했죠. 새 대통령 해리 트루먼의 지지율은 폭락했고, 1946년 11월 중간 선거에서 야당인 공화당이 압승을 거둡니다.해외에선 소련의 확장세가 심상찮았습니다. 1946년 말, 소련 공산주의자들이 그리스 아테네를 집어삼킬 기세였죠. 미국이 이를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상황. 하지만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한 미국인들에게 ‘자유세계를 위해 다시 싸우자’는 설득이 먹힐 리 없었습니다. 외교정책에 대한 지지를 얻고 추락한 지지율을 끌어올리려면 일종의 공포 마케팅이 필요했죠. 트루먼 정부는 1947년 ‘연방 직원 충성 프로그램’이란 반공산주의 정책을 고안합니다. 연방 정부 공무원의 과거 경력을 대대적으로 조사해 좌익 급진세력과 연관된 ‘반체제 인사’를 색출해 내기 시작한 거죠.트루먼 대통령은 반공주의를 가볍게 이용할 정치적 수단쯤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1948년 엘리트 외교관 앨저 히스가 소련의 간첩이었다는 폭로가 하원 청문회에서 터져 나오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죠. 설마 했는데, 정말 워싱턴에 소련의 스파이가 있었던 겁니다! 그것도 전임 루스벨트 대통령의 총애를 받은 유명 외교관이 말이죠.안 그래도 미국 보수주의자들 사이엔 루스벨트부터 이어진 민주당 정권에 대한 반감이 컸습니다. 정부를 키우고 복지를 늘리는 1930년대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이 그들 기준으론 지극히 사회주의적이기 때문이었죠.당시 미국 보수주의자, 특히 강경 우파에게 ‘진정한 미국’이란 연방정부가 그저 우편함 관리자에 머무는 나라였습니다. 지역 성직자 외에는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는 백인 남성 엘리트가 이끄는 작은 농촌 마을. 그게 바로 미국 본연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죠. 증세와 공공사업, 반독점 규제, 여성의 사회진출 같은 건 그들에게 미국적 가치를 훼손하는 외국의 불순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양성·평등을 외치는 민주당과 좌파 엘리트를 ‘반미주의자’라 불렀죠.일부에선 루스벨트가 소련 공산주의자들과 내통했다는 식의 음모론까지 제기했는데요. 히스 사건이 터지면서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공세를 강화합니다.“205명의 명단이 있다”1949년 세계 정세는 심상찮게 돌아갔습니다. 그해 4월 중국 공산당 인민해방군이 난징에 입성해 국민당 총통부를 차지했고요. 같은 해 8월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죠. 공산주의자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를 장악하고 원자폭탄까지 손에 쥐게 됐습니다. 막연했던 공산 세력의 위협이 갑자기 현실로 다가옵니다.미국인의 불안감은 고조됐고, 공화당 의원들은 “공산주의자가 민주당 정부에 침투해 있다”며 연일 때렸습니다. 1950년 2월. 위스콘신 출신의 초선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국무부에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주제로 연설합니다. AP통신 기자는 연설문 원고 뒷부분에 있던 이 내용을 기사 리드문으로 뽑았죠. “여기 205명의 명단을 가지고 있다.”205명이란 숫자가 부각되자, 주장은 한층 그럴듯해졌습니다. 언론은 미끼를 물었고, 무명의 정치인 매카시가 신문 1면을 장식했죠. 물론 명단 따윈 있을 리 없었습니다. 민주당은 매카시에게 이름을 대라며 압박했고요. 수세에 몰린 매카시는 역공에 나섭니다. 공산주의자 대신 정보기관에서 일하는 동성애자 이름을 폭로한 거죠.그 시절 동성애자는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사실상 공산주의자와 같은 부류인 셈이었죠. 매카시의 폭로는 대대적인 정부 내 동성애자 직원 색출로 이어졌고요. 대중은 이제 그가 숨겨진 진실을 알고 있다고 믿게 됩니다.그의 다음 타깃은 국무부 내 중국 전문가. 이들이 ‘소련의 음모에 따라 중국을 공산당 손아귀에 넘겨줬다’고 주장한 건데요. 증거는 전혀 없었지만, 매카시의 공격을 받은 전문가들은 줄줄이 해고됩니다.‘매카시는 부패한 정부와 맞서 싸우는 투사다.’ 재향군인회, 해외 참전용사 협회를 포함한 대중의 지지 물결이 일어납니다. 매카시즘 불길이 막 타오르기 시작하던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고요.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란 미국인의 공포는 극에 달했죠.기회를 잡은 매카시는 공격 강도를 높입니다. “국무부 집단이 중국 국민당 지원을 방해해서(중국을 공산화해서) 미국 청년들이 한국에서 죽어가고 있다!”반공주의는 극에 달합니다. 영화와 책, 장난감 상자와 풍선껌 종이에까지 반공 메시지가 등장했죠. 미국 의회는 1950년 9월 공산주의 활동을 억압하는 내용의 ‘내부 보안법’을 통과시킵니다. 트루먼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소용없었죠. 매카시를 막을 자는 없어 보였습니다.이제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면 경력은 끝이었습니다. 정부뿐 아니라 민간도 마찬가지였죠. 그중 표적이 된 건 할리우드. 미국 하원의 반미활동위원회(HUAC)는 배우들을 줄줄이 청문회장에 세웠는데요. 업계의 다른 공산주의자 이름을 대라는 요구를 거부한 이들은 즉시 할리우드에서 추방됐고요. 순순히 증언하며 “과거 공산주의 활동은 제 무지의 소치”라고 고개 숙인 이들은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할리우드엔 여러 버전의 ‘블랙리스트’가 나돌았고, 영화 제작자는 작가나 배우를 고용하기 전에 재향군인회에 전화해 의견을 물어볼 지경이었죠.진보적 엘리트들의 산실로 여겨졌던 대학들도 표적이 됐습니다. 12개 이상 주는 공산주의자의 공립대학 강의를 금지했고요. 하버드대를 포함한 여러 대학이 공산주의자를 교수진에서 배제한다는 성명을 발표합니다.1952년 대선. 전쟁 영웅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공화당 후보가 당선됩니다. 무려 20년 만에 공화당이 백악관을 차지하게 된 거죠. 유권자들은 공산주의와 맞서 싸울 수 있을 만한 인물을 원했습니다.공화당의 분열과 매카시의 자멸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3년 취임 뒤 반공과 안보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다른 정책에 있어서는 매카시로 대표되는 공화당 강경 우파와 차이가 컸죠. 아이젠하워는 ‘큰 연방정부’라는 뉴딜정책의 원칙을 이어갔습니다. 사회보장 제도를 확대하고, 국가 고속도로 시스템을 구축하고, 공화당의 예산 삭감 시도를 막는 정책을 펼쳤죠.그는 진보 정책에 대한 강경 우파의 뿌리 깊은 반감엔 별 관심 없었습니다. 오히려 근거 없는 음모론만 늘어놓는 매카시 같은 부류를 혐오했죠. 공화당의 분열이 시작됐습니다.무엇보다 2~3년 사이에 세상은 크게 안정됐습니다. 스탈린은 1953년 3월 사망했고, 한국전쟁은 그해 7월 휴전협정을 체결했죠. 미국 경제는 전후 호황을 누리고 있었습니다.그러나 정권이 바뀐 뒤에도 매카시와 그 일파는 정부 내 공산주의자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국무부 도서관, 정부 인쇄국 등을 들쑤신 그는 급기야 육군에까지 손을 댑니다. 서류상의 실수를 꼬투리잡아 “공산주의자 승진에 책임 있는 장군들의 지휘권을 박탈하라”고 군을 공격했죠.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격분합니다. 다른 기관은 몰라도 군대를 공격하는 건 참을 수 없었죠. 아이젠하워는 언론 성명에서 군의 실수를 인정하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면서 미국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방법을 사용한다면 스스로 패배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마지막 경고였습니다.1950년 무명의 매카시를 영웅으로 띄운 건 신문이었습니다. 1954년 그를 바닥으로 끌어내린 건 TV 방송이었죠.1954년 3월, CBS 기자 에드워드 머로는 자신의 저녁쇼 ‘See It Now’를 매카시에 대한 폭로로 채웁니다. 매카시가 화내고, 협박하고, 무례하게 구는 모습을 생생히 담아 보여줬죠. 당시 TV는 뉴미디어였고, 이전까지 대부분 사람들은 신문 기사와 연출된 사진으로만 매카시를 접해왔습니다. 하지만 TV에서 본 그의 이미지는 완전히 달랐죠. 헝클어진 차림새로 안절부절못하며 횡설수설하는 진짜 매카시가 보였습니다.이후 8주간 이어진 육군-매카시의 청문회는 187시간 넘게 TV로 생중계됐습니다. 이제 미국인들은 매카시의 실체를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50%였던 매카시에 대한 지지율은 이 청문회 뒤 34%로 떨어졌죠. 그의 인기는 급격히 식었고, 이제 공화당 내부에서도 공격이 이어집니다. 매카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까지 비판하며 발버둥 쳤지만, 그럴수록 공화당 의원들은 그를 외면합니다. 그는 워싱턴에서 영향력을 잃었고요. 1957년 급성 간부전으로 사망합니다.1955년 6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백악관 회의에서 이런 유명한 농담을 남깁니다. “매카시즘은 이제 매카시워즘이다(McCarthyism is now McCarthywasm).”1956년 대선에선 더 이상 ‘국내 공산주의’가 쟁점이 아니었습니다. 1957년 6월 대법원은 일련의 공산주의자에 대한 유죄판결을 뒤집고 ‘행동이 아닌 단순한 신념만으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결했죠. 매카시즘의 책임은 매카시라는 선동가에 돌려야 할까요. 매카시에게 일격을 날렸던 그 역사적 방송에서 에드워드 머로는 “매카시의 주요 업적은 대중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죠. “그것은 누구의 잘못일까요? 사실 그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는 이러한 공포 상황을 만든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카시우스가 옳았습니다. ‘친애하는 브루투스, 잘못은 우리의 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머로가 인용한 셰익스피어의 문장대로, 매카시즘은 미국인 마음에 스며든 두려움과 퇴행적인 향수의 결합으로 탄생했습니다. 매카시는 이를 이용하려던 많은 정치인 중 가장 성공적인 인물이었죠. 언론은 그의 보조 역할을 했고요. 75년이 지난 지금, 미국 사회는 그때와 정말 다를 수 있을까요. By.딥다이브(매카시즘 관련 기록과 해석은 뉴욕타임스 기자 클레이 라이슨이 올해 출간한 책 ‘적색 공포: 블랙리스트, 매카시즘, 그리고 현대 미국 건설(Red Scare: Blacklists, McCarthyism, and the Making of Modern America)’을 주로 참조했습니다.)*이 기사는 9월 1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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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호사 사회 미국 vs 엔지니어 국가 중국, 누가 이길까? [딥다이브]

    미국·중국의 패권 경쟁. 아마 2025년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일 겁니다. 최근 이를 주제로 하는 책 한 권이 출간돼 미국에서 관심을 끌고 있는데요. 제목은 ‘브레이크넥: 미래를 설계하려는 중국의 도전(Breakneck: China‘s Quest to Engineer the Future)’. 저자는 중국계 캐나다인인 단 왕(Dan Wang) 스탠퍼드대 후버역사연구소 연구원이죠.그가 말하는 ‘변호사 사회’ 미국과 ‘엔지니어링 국가’ 중국의 극적인 대비는 꽤 흥미진진합니다. 변호사와 엔지니어가 맞붙으면 과연 누가 이길까요? 단 왕은 그 답까지 설득력 있게 제시합니다. 책 내용을 제 나름대로 요약해 봤습니다(구체적 문장 표현과 순서는 책과 다르다는 점 이해해 주세요). 그럼 ‘브레이크넥(위험할 정도로 빠르다는 뜻)’의 속도로 가보시죠.*이 기사는 9월 1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요약 1: 변호사 사회 vs. 엔지니어 국가현대 중국은 엔지니어가 통치합니다. 중국 공산당 최고위층은 공학 전공자들로 채워졌죠. 후진타오 전 주석은 수력공학을, 시진핑 현 주석은 화학공학을 전공했습니다. 2022년 시작된 세 번째 임기에서 시진핑은 정치국을 항공우주·방위산업 출신 공학자들로 채웠습니다. 엔지니어들은 무엇을 좋아할까요? 바로 건설이죠. 미국의 두배에 달하는 고속도로, 일본의 20배인 고속철도망, 전 세계 다른 나라를 모두 합친 것과 같은 규모의 태양광·풍력 발전. 지난 40년간 중국은 끊임없이 건설을 이어왔습니다.반면 미국은 변호사의, 변호사에 의한, 변호사를 위한 정부입니다. 지난 10명의 대통령 중 5명이 로스쿨에 다녔고요. 미국 하원의원의 31%, 상원의 47%가 법학 학위를 가지고 있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경제학을 전공했다고요? 네, 하지만 JD 밴스 부통령은 로스쿨 출신이죠.미국 자체가 변호사 사회입니다. 미국엔 인구 10만 명당 400명의 변호사가 있죠(참고로 한국은 77명). 그리고 변호사들(특히 미국의 변호사들)은 모든 것을 막는 게 특기입니다. 절차에 집착하고, 규칙과 심사를 강화하고, 소송을 걸죠.엔지니어링 국가와 변호사 사회의 차이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게 고속철도 건설입니다. 2008년 캘리포니아 유권자들은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를 잇는 고속철도 건설안을 승인했습니다. 같은 해 중국은 베이징-상하이 고속철도 노선 건설을 시작했습니다.3년 뒤인 2011년, 중국은 360억 달러 공사비를 들여 베이징-상하이 노선(1318㎞)을 개통했습니다. 캘리포니아는? 17년이 지난 현재까지 중간 구간 275㎞만 건설됐을 뿐입니다. 총공사비 추산액은 1270억 달러로 불어났죠. 왜? 정치인들 요구로 정차역을 추가하면서, 산맥을 통과하는 구불구불한 노선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미국 다른 곳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하철역, 버스 정류장, 공중화장실 등. 모든 게 완공까지 너무 오래 걸리고 예산을 초과합니다. 미국인들은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관심을 잃었고, 웬만해선 물리적 풍경이 크게 바뀌는 일이 없죠. 이와 대조적으로 중국은 구이저우성처럼 가난한 외딴 지역조차 최신식 인프라로 가득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상당한 예산 낭비와 부채를 초래했지만요.중국은 너무 많이 건설해서 문제이고, 미국은 너무 안 지어서 문제입니다. 왜 미국에도 건설이 필요할까요. 풍부한 ‘물리적 역동성’이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고속도로, 편리한 대중교통, 풍부한 주택은 그 자체로 사회 불평등을 줄일 뿐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주민들에게 ‘점점 살기가 좋아지고 있어’라는 희망을 심어주죠. 1960년대 이후 미국이 건설을 멈추면서 잃어버린 게 바로 그 낙관주의입니다.중국 공산당 선전기관은 2023년 “미래에 중국 경제가 어떻게 발전하든 중국은 항상 개발도상국(developing country)일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미국도 현상 유지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개발도상국’으로 자랑스럽게 선언할 수 있을까요. 요약 2: 과학자와 제조 기술자의 차이‘중국은 남의 기술을 모방하고 훔칠 뿐이다. 거기엔 혁신이 없다.’중국의 부상을 두고 한때 미국에선 이런 평가가 파다했습니다. 하지만 ‘하드웨어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선전에 가본다면 얘기가 달라질 겁니다. 창의적인 하드웨어 엔지니어들과 전자제품 조립에 능한 수백만 명 노동력이 조합돼 혁신적인 전자 제품을 쏟아내죠.선전을 세계적인 전자제품 생산 허브로 탈바꿈시킨 주인공은 사실 애플입니다. 미국 기업은 1990년대부터 제조시설을 중국으로 이전시키기 바빴고, 그 대표주자가 애플이니까요. 1993년 조지 부시의 수석 경제고문이던 마이클 보스킨(스탠퍼드대 경제학 교수)은 “컴퓨터 칩과 감자칩, 뭐가 다르지?”라고 농담했습니다. 당시 미국 엘리트들은 제조업을 잃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죠. 경제학자, 경영자, 월가는 노조의 해외 이전 반대를 합리성 없는 감상론으로 치부했습니다.미국인들은 NASA나 대학연구실 과학자들에게 혁신을 기대합니다. 세계 최초의 태양전지, 세계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같은 게 혁신이라고 보죠. 하지만 중국에선 기술혁신이 공장 현장에서 시작됩니다. 연구실이 아닌 ‘엔지니어링 기술 생태계’가 혁신을 만들어내고 또 대량생산까지 해내죠.그 대표 사례가 태양광 산업입니다. 미국 벨 연구소는 세계 최초의 태양전지를 발명했고, 독일 기업이 태양광 발전 장비를 생산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2010년대 중반쯤 태양광 가치사슬 전체를 제조하는 방법을 모두 터득했고, 이후 10년 동안 이 산업에 엄청난 효율 향상과 가격 하락을 이끌어왔죠. 인텔의 전설적인 전 CEO 앤디 그로브 말대로 미국이 “신화적인 창조의 순간”보다 제품의 “확장”에 집중했다면, 스토리는 달라졌을지 모릅니다.미국 제조업체의 해외 이전은 제조 기술과 지식의 영구적인 손실을 의미합니다. 미국 국가핵안보국은 1980년대에 제조됐던 핵탄두용 기밀 물질 ‘포그뱅크(Fogbank)’의 생산방법을 몰라서(생산시설 폐쇄, 직원 모두 은퇴), 2008년 6900만 달러를 들여 다시 만들어야 했습니다. 실리콘 밸리는 기술의 ‘발명’에 집착하지만, 실제로는 기술은 ‘사람’과 ‘공정 지식’에 가깝습니다.그래도 미국엔 소프트웨어, 특히 인공지능(AI) 기술이 있다고요? 미국이 AI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점은 오히려 우려됩니다. 알고리즘만으로는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으니까요. 실제로 싸우려면 드론이나 군수품이 필요하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전투용으로 사용되는 중국 DJI 드론을 보세요. 드론·스마트폰·배터리 생산에서의 중국의 장악력은 미국이 갖지 못한 것입니다.이제 미국은 자신들의 기술 역량에 대해 좀 더 겸손해야 합니다. 중국을 배척할 게 아니라 중국을 연구할 가치 있는 경쟁자로 대해야만 새로운 전략을 더 빨리 개발할 수 있습니다. 미시간 같은 주에 중국 전기차·배터리 기업이 공장을 짓도록 허용하면서 기술을 전수하게 하면 어떨까요? 마치 중국 정부가 2018년 테슬라에 상하이 기가팩토리 설립을 허용하면서 중국 전기차 시장의 경쟁을 촉진하는 ‘메기 효과’를 거둔 것처럼 말이죠.요약 3: 그래도 중국이 앞지를 수 없는 이유변호사 대 엔지니어, 연구실 과학자 대 공장 기술자, 소프트웨어 대 하드웨어. 요약하자면 미국과 중국의 대결 구도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여기까지만 보고 ‘그럼 결국 중국이 승리한다는 이야기인가’라고 하실 수 있는데요. 아닙니다. 저자는 “중국이 강대국으로서 미국을 의미 있게 앞지를 수 없다”고 강조하죠.왜냐고요? ‘엔지니어링 국가’이기에 가지는 한계와 부작용이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엔지니어들이 통치하는 나라는 국민을 욕망을 가진 개개인이 아닌 조종할 수 있는 하나의 집단으로 봅니다.-한번 숫자로 목표를 정하면 그 숫자에 종속된 채 고집스럽게 밀어붙입니다.-정치적 논쟁 따윈 없이 과학(또는 과학이라 믿는 것)을 따릅니다. (하지만 그 근거가 되는 데이터는 엉망입니다.)무려 35년간(1980~2015년) 이어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한 자녀 정책이 그 극단적 부작용을 보여주죠. 덩샤오핑의 한 자녀 정책 도입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건 미사일 과학자 쑹젠의 보고서였습니다. 이대로 가면 당시 10억명에 육박한 중국 인구가 2050년엔 30억명을 넘을 텐데, 중국이 감당할 만한 최적 인구는 7억명에 불과하단 연구 결과였는데요. 인구를 마치 미사일 궤적처럼 통제할 수 있다는 기계적 사고는 중국 지도부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제 와서 보면 허튼소리에 불과했지만요. 그리고 이 무식한 정책은 중국에 돌이킬 수 없는 해를 끼친 뒤에야 사라졌습니다.2020~2022년 이어진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도 대표적인 엔지니어적 정책의 실패 사례이죠. ‘제로’라는 숫자에 집착하느라, 이동 통제는 점점 극단적으로 변해갔고요. 결국 상하이시를 8주간 봉쇄하는 말도 안 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결국 “공산당 타도, 시진핑 퇴진!”이라는 구호가 시위대에서 터져 나왔죠.헝다 사태로 시작된 중국의 부동산 거품 붕괴, 앤트그룹 IPO 무산을 포함한 빅테크에 대한 규제 폭풍 등. 중국 정부가 이상하게 스스로를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짓을 하는 것 역시 이런 경직된 엔지니어적 사고방식의 영향입니다. 일단 목표를 잡으면, 토론 따윈 없이 앞뒤 재지 않고 돌진하곤 하죠. 그게 완전히 틀렸다는 게 증명될 때까지.무엇보다 중국의 가장 큰 약점은 중국 공산당이 국민을 불신하고 두려워한다는 겁니다. 창의적인 에너지가 분출하는 것, 다원주의가 꽃피우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죠.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미국은 훨씬 더 희망이 있습니다. 중국 지도부는 미국의 다원주의를 끝끝내 수용하지 않겠지만, 미국은 (어렵긴 하지만) 중국의 건설과 제조 역량을 어느 정도는 배울 수도 있으니까요. 만약 미국이 건설을 위해 기꺼이 어려운 선택도 하겠다는 ‘절박감’을 가질 수만 있다면 말이죠.여기까지가 ‘브레이크넥: 미래를 설계하려는 중국의 도전’의 주요 내용입니다. 어떻게 보셨나요? 해외 언론은 ‘변호사 대 엔지니어’라는 명쾌하고 참신한 설명 자체에 열광하는 분위기입니다. 마침 중국 기술의 부상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던 시점이라 반응이 더 큰데요.‘역시 중국은 위협적이야. 미국이 이제라도 달라져야 해!’라는 이런 식의 반응. 왠지 기시감이 듭니다. 1985년 뉴욕타임스엔 아시아 전문기자 시어도어 화이트가 쓴 ‘일본으로부터의 위험(The Danger from Japan)’이란 장문의 기사가 실렸죠. 이제 미국은 중국을 마치 40년 전 일본처럼 다루고 있습니다.이 책에 한국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문화적 영향력이 취약한 중국과 달리 K팝과 오징어게임을 만들 수 있는 나라라는 언급 정도이죠.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하게 됩니다. 한국은 과연 어떤 나라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한국은 제조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산업구조라는 점에선 엔지니어적 성격이 있긴 한데요. 정치권엔 법조인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고, 최근 6명의 대통령 중 4명이 법조인 출신이죠. 미국처럼 활력을 잃은 ‘변호사 국가’의 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경계심을 가져야 하겠는데요. 결국 성장에 대한 절박감을 놓지 않는 것, 그게 우리에게도 지금 필요해보입니다. By. 딥다이브*이 기사는 9월 1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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