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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조선산업을 부활시키겠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이렇게 선언했죠. “조선에 많은 돈을 쓰겠다”며 얼마 전 ‘조선업 재건’ 행정명령에 서명하기도 했고요. 유독 배에 진심인데요.왜 그럴까요. 조선업이 해군력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미국 해군 역량을 끌어올리려면 배를 만드는 능력부터 되살려야 한다고 보는 건데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죠. 쇠락한 미국 조선업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2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때는 세계 최강?“우리는 예전에 배를 정말 많이 만들었습니다. 요즘은 아니지만, 곧 아주 빨리 만들 겁니다.”지난 3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의회 연설에서 한 말입니다. 미국의 잊혀졌던 산업, 조선업을 되살리겠다고 선언한 건데요.이것만 보면 미국 조선업이 과거엔 아주 잘 나갔는데, 지금은 쇠락한 것만 같죠.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말한 ‘미국이 배를 정말 많이 만들었던’ 그 시절. 그게 도대체 언제일까요? 아마 미국 조선업이 존재감 있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요. 왜냐하면 1940년대 2차 세계대전 시절이기 때문입니다.1941~45년 미국은 ‘리버티선’이라 불리는 수송선을 무려 2710척이나 만들었습니다. 기록적인 생산량이었죠. 독일 잠수함 공격으로 배가 부족해진 유럽에서 주문이 밀려든 영향이었는데요. 리버티선은 당시 연합국의 전쟁용 물자 수송을 담당하며 활약했습니다. 이 시절, 미국이 잠시 세계 조선 생산 1위 국가에 올랐죠.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전쟁이 끝나고 평시로 돌아오자, 미국 조선업은 급속히 쪼그라듭니다. 애초에 전쟁 때문에 잠시 반짝했던 거지, 사실 미국 조선업의 경쟁력 이전부터 별로였습니다. 근로자 임금과 철강 가격 모두 유럽보다 높다 보니 선박 가격도 훨씬 더 비쌌기 때문이죠.무엇보다 미국 조선소는 굳이 배를 싸게 만들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차피 국내 시장에선 경쟁이 없었거든요. 1920년 제정돼 100년 넘게 지난 지금까지 굳건한 ‘존스법’ 때문입니다.존스법은 무엇존스법(Jones Act). 미국 조선산업이 현재 왜 이 지경이 됐나를 논할 때마다 등장하는 법률입니다. 정식 명칭은 상선법(Merchant Marine Act 1920)이지만 당시 대표 발의자 웨슬리 존스 상원의원 이름을 따서 존스법이라 부르죠.존스법은 전 세계에서 가장 보호무역주의적인 해운 관련 법률로 꼽히는데요. 미국 내 항구를 오가는 선박은 ①미국에서 건조돼야 하고 ②미국인이 소유해야 하고 ③선원의 75% 이상이 미국인이어야 한다는 규정입니다. 이중 특히 ①번, 미국산 배만 미국 내 항구를 오갈 수 있다는 조항이 핵심인데요.존스법은 왜 만들어졌을까요. 당연히 미국 조선업을 키우고, 해군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장비와 물자를 배로 수송해야 하고요. 그래서 민간 상선이 대거 해군수송선으로 동원되곤 합니다. 평시엔 상선을 몰던 선원들은 전쟁이 나면 군수 물자 수송에 투입되죠.즉, 전쟁 상황에서 필요한 배와 선원을 즉각 동원하려면 미국산 상선과 미국인 선원이 꼭 필요하니까, 미국 조선업을 잘 보호해야 한다는 게 존스법 논리였습니다.그래서 실제론 어떻게 됐을까요. 미국산 상선 가격이 자꾸만 치솟습니다. 왜? 미국 배가 아무리 비싸도 미국 내 항로를 이용하려면 해운업자는 그걸 살 수밖에 없거든요. 조선업계는 외국 업체와 수주 경쟁을 할 필요가 없으니, 마음 놓고 가격을 올려 받을 수 있게 된 거죠.1920년대에도 미국에서 제조한 배가 다른 나라보다 20% 정도 비싼 편이었는데요. 가격 차이는 점점 벌어져서 1930년대엔 30%, 1950년대엔 100%가량 비싸졌죠. 지금은? 미국산 선박은 국제가격의 4배쯤 됩니다.동시에 미국 조선업의 제조 역량은 후퇴합니다. 경쟁이 치열한 해외 시장 진출은 포기하고, 마진 높고 안정적인 국내 시장에 안주했기 때문이죠.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배를 마치 레고 블록 조립하듯이 만드는 ‘대형 블록 건조’ 기술입니다. 이 기술 덕분에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리버티선 한 척을 짧게는 며칠 만에 뚝딱 만들 수 있었는데요.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미국 조선사 상당수는 문을 닫았고, 제조법도 이전 방식으로 되돌아갑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생산성을 높일 필요가 없었던 거죠.이 기술은 엘머 한(Elmer L. Hann)이라는 미국인 조선소 관리자를 통해 일본으로 전수됐고요. 이 신기술과 일본 정부의 지원 덕분에 일본 조선업은 급성장을 거둡니다. 1956년 일본은 그때까지 조선업계를 지배했던 영국마저 제치고 세계 최대 조선 강국이 됐죠.100년의 실패존스법은 법이 의도했던 목적과 정 반대 결과를 낳았습니다. 미국 조선업계는 경쟁을 멈췄고 선가는 올라갔고요. 미국 국내 해상운송 역시 점점 쪼그라들고 경쟁력을 잃어갔죠.숫자로 비교하면 더 명확한데요. 미국의 선박 생산량은 1950년대보다 85% 감소했습니다. 1970년대엔 전 세계에서 건조된 선박 중 5%가 미국 조선소에서 생산됐는데요(총 톤수 기준). 이젠 고작 0.1% 수준입니다. 그래프를 그리면 아예 보이지도 않을 정도이죠(아래 그래프 참조). 최근 미국 조선소는 상업용 선박을 연간 3~5척을 생산할까 말까인 수준이고요. 당연히 수십년 동안 미국산 대형 선박의 해외 수출은 없었습니다.2차 세계대전 이전엔 미국 연안 무역에서 약 400척의 선박이 운항했는데요. 이젠 존스법을 준수하는 선박은 100척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트럭 운송과의 경쟁에서 해운업이 뒤쳐진 거죠.그로 인한 부작용은 적지 않은데요. 예컨대 하와이에서 ‘콜로아 럼’이란 양조장을 운영하는 사업가 밥 건터는 제품을 호주로 처음 수출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하와이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편도 운송비용이 5000달러로, LA에서 시드니까지 가는 비용 1900달러보다 훨씬 비쌌죠. 국제 해상운송과 달리, 하와이와 LA 사이 국내 운송은 존스법 적용을 받아서 생긴 일입니다.같은 이유로 미국령인 푸에르토리코는 액화천연가스(LNG)를 미국이 아닌 나이지리아에서 수입해옵니다. 미국에서 천연가스를 운송해줄 존스법 준수 미국산 선박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죠.그럼 존스법은 국가 안보에는 도움이 됐을까요? ‘전쟁을 하려면 자국 선박과 선원이 필요하니까 조선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은 그럴 듯한데요. 실제 결과는 그 반대에 가까웠습니다. 1990~1991년 걸프전쟁을 보면 알 수 있죠. 당시 미군은 중동으로 군수품을 수송하기 위해 외국국적 선박 177척을 빌렸습니다. 동원할 미국산 선박이 너무 모자랐기 때문이죠. 심지어 너무 급해서 소련 국적 화물선 사용을 요청했다가 두번이나 거절 당했다고 하죠.또 ‘사막의 방패’와 ‘사막의 폭풍’ 작전 수행을 위해 미군은 4200명의 상선 선원을 급히 모집했는데요. 그들은 누구였을까요? 대부분이 은퇴한 고령의 전직 선원들이었다고 합니다. 미군 공식 기록에 따르면 대부분이 60, 70대였고요. 80대도 두명 있었고, 심지어 최고령 선원은 92세였다고 하죠.배는 급하면 다른 나라에서 빌려올 수 있지만, 군사작전인데 외국인 선원을 쓸 순 없는 노릇이잖아요. 존스법으로 인해 해운업과 조선업이 하나로 묶인 탓에 둘다 역량이 쪼그라들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케이토연구소는 2019년 보고서에서 이렇게 지적했죠. “존스법은 미국 조선업을 2류로 전락시켰습니다. 100년 간의 실패 끝에 이제 새로운 접근방식이 필요합니다.”건조능력 230배의 격차조선업은 기본적으로 많은 육체노동자가 필요한 노동집약적 산업입니다. 세계 최대 조선 강국의 지위가 1950년대 영국에서 일본으로 2000년대 일본에서 한국으로, 그리고 2010년대 한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게 된 이유인데요.중국은 2006년 제 11차 국가 5개년 경제 계획에서 조선업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한다고 처음 명시했고요. 이후 저렴한 인건비와 철강가격, 정부 보조금에 힘입어 폭풍성장합니다. 2007년 18%였던 중국의 세계시장 점유율(건조량 기준)은 지난해엔 55.7%로 불어났죠. 수주량 기준으로는 중국의 점유율이 지난해 70%에 달했습니다. 중국의 총 건조능력은 2300만t. 미국(10만t)의 230배이죠. 어마어마한 격차입니다.조선업은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죠. 대형선박을 건조하려면 고품질 철강, 초대형 크레인, 선박 엔진 등 각종 부품 산업까지 뒷받침돼야 합니다. 거대한 중공업 시스템이 필요한 건데요. 즉, 미국에서 배를 만든다는 건 비싼 미국산 철강을 쓰면서 높은 관세가 부과되는 수품 부품과 자재에 의존해야 한단 뜻이죠. 영국 런던시립대 마이클 탐바키스 교수가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건 무의미하고 막대한 비용이 드는 사업”이라고 지적하는 이유입니다.미국의 해군 함대 규모는 냉전 종식 이후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군함 수로 따지면 미국은 이미 중국에 한참 뒤집니다. 현재 유인 군함(군수지원함 포함) 보유 수는 미국 295척, 중국 400척이죠. 물론 항공모함(미국 11척, 중국 3척)와 핵잠수함(미국 66척, 중국 12척)에선 미국이 훨씬 앞서기 때문에 질적으론 미국이 한수 위이지만요.미국 군함은 양이 적을 뿐 아니라 노후화되기도 했습니다. 중국 군함은 70%가 2010년 이후 진수된 신형인데 비해, 미국 군함 4대 중 3대는 15년 이상됐으니까요. 이 격차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얘기는 몇년 전부터 해군에서 꾸준히 나왔습니다.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이 위기감을 더 부추겼죠. 미국 해군은 최근 2045년까지 군함을 381척으로 늘린다는 계획을 공개했는데요.너무 도전적인 목표치입니다. 미국 법에선 외국 조선소에서 해군 선박을 조달하는 걸 금지하고 있죠(단, 대통령이 면제할 수 있음). 미국 조선소는 배를 만드는 속도가 너무 느리고 비용도 비쌉니다. 미국 해군의 브렛 사이들 차관보는 의회에서 “(해군 선박) 납품이 약 1~4년 지연되고 있고, 비용은 물가상승률보다 빠르게 계속 상승 중”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많은 배를 만들어낼 능력도, 인력도 미국엔 사실상 없습니다. 미국이 동맹국, 특히 한국 조선업계로 자꾸 눈을 돌리는 이유인데요. 미국 의회엔 이미 동맹국 조선소에서 군함을 건조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이 발의돼 있죠. 존스법을 폐지하자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요.하지만 업계의 반대가 만만찮을 겁니다. 미국 조선업 협의회는 물론 헌팅턴 잉걸스 인더스트리(미국 최대 군용 조선소), 제너럴 다이내믹스(미국 잠수함 제조사) 같은 기업까지. 뿌리 깊은 이해 관계로 얽혀있는 이들이 워낙 많거든요. 과연 트럼프 행정부는 보호무역주의 장벽으로 단단히 둘러쌓인 미국 조선업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요. 아직 많은 것이 미정이고 아마도 그리 쉽지만은 않을 텐데요. 그래도 한국 조선업을 둘러싼 기대감은 커져만 가는 분위기네요. By.딥다이브‘트럼프는 왜 이렇게 조선업에 관심이 많지?’ 요즘 이 질문을 하는 이들이 주변에 종종 있더군요. 단순히 ‘중국보다 군함 수가 너무 적어서’라고 한마디로 설명하기엔 좀더 긴 이야기라 다뤄봤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조선업 부활”을 선언했습니다. 미국 조선업의 전성기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0년대. 전후 미국 조선업은 빠르게 가라앉았고, 이제 전 세계 선박 건조량 중 고작 0.1%만 차지합니다. -미국 안에선 미국산 선박만 운항할 수 있다는 ‘존스법’. 미국 조선업 보호를 위해 105년 전 제정된 이 법이 조선업 경쟁력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미국 조선사는 마진 높은 국내시장에 안주하면서 생산성도, 기술력도 후퇴했습니다.-이제 군함 수에서 미국은 중국에 밀립니다. 이제라도 격차를 따라잡기 위해 조선업 생산능력을 끌어올려야 하는데요. 느리고 비싸기로 유명한 미국 조선업이 이를 해내기엔 역부족입니다. 자꾸 한국으로 눈을 돌리는 이유입니다.*이 기사는 4월 2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오토파일럿으로 주행하던 테슬라 차량이 가짜 벽을 들이받는 실험 영상을 보셨나요? 아니면 중국 샤오미 SU7 전기차가 자율주행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전소해 버린 사진은요?‘자율주행은 아직 위험해’라는 생각을 강화시키는 두 사건. 하지만 오히려 웃는 곳도 있습니다. 바로 ‘자율주행차의 눈’으로 통하는 라이다(LiDAR) 업계인데요.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바보들이나 쓰는 장치”라고 폄하했던 라이다가 암흑기를 벗어나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합니다. 자율주행차와 로봇 시대에 주목할 기술, 라이다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2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자율주행의 눈라이다(LiDAR, Light Detection and Ranging). 레이저 빔을 360도로 발사해 주변 환경을 정확하고 빠르게 3차원으로 감지하는 센서를 말합니다. 빛의 속도는 일정하니까(2억9979만2458m/s), 레이저가 물체에 부딪힌 뒤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을 이용하면 거리를 알아낼 수 있죠.라이다는 최신형 가정용 로봇청소기의 핵심부품이고요. 애플 아이폰에도 들어갑니다. 라이다 스캐너가 야간 인물사진을 더 또렷이 촬영할 수 있게 해주죠.그리고 무엇보다 라이다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자동차의 자율주행 기술입니다. 캄캄한 밤에도, 비나 눈이 와도, 안개가 껴도 라이다가 주변 물체의 크기와 위치를 인식해 자율주행을 할 수 있게 하죠.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자동차에 설치된 라이다는 약 160만 개. 구글 웨이모 같은 무인운전 로보택시는 물론, 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을 갖춘 최신 차량에도 달려있습니다. 예컨대 BMW i7은 이스라엘 기업 이노비즈(Innoviz)의 라이다를, 볼보 EX90은 미국 루미나(Luminar)의 라이다를 장착했죠.미국이 군사기술 용으로 라이다를 처음 개발한 게 1960년대. 하지만 라이다 인식 거리가 200m 이상으로 늘어나고 크기도 작아지면서 차량용 라이다가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건 10년 전쯤부터이죠. 당시 완성차 업체들은 앞다퉈 라이다 제조사와 손잡고 자율주행 기술 개발에 나섭니다. 그때만 해도 금세, 2021~2022년이면 운전대에서 손을 떼고도 달리는 자율주행 단계(레벨3)가 올 것만 같은 분위기였죠. 장밋빛 전망에 각국에서 라이다 제조사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요. 관련 기업엔 투자금이 몰렸고, 화려한 IPO 행진도 이어졌죠.그런데 웬걸. 곧 온다던 레벨3 자율주행 시대는 좀처럼 열리지 않고, 연구개발에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라이다 산업은 돈 먹는 하마로 전락합니다. 급기야 금리마저 오르기 시작하자 적자투성이인 라이다 업계는 직격탄을 맞았죠.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시작됩니다. 2022년 포드·폭스바겐 합작회사였던 아르고AI는 폐업했고, 독일 업체 이베오와 미국 쿼너지시스템은 파산신청을 합니다. 업계 선두주자였던 미국 벨로다인조차 2023년 경쟁사 아우스터에 합병됐고요.2020년 80개 넘게 있던 전 세계 차량용 라이다 업체 중 살아남은 곳은 이제 20곳이 채 되지 않습니다. 혹한기를 버티고 살아남은 생존자들도 상처가 적지 않죠. 1995년생 창업자 오스틴 러셀을 한때 ‘최연소 억만장자’로 만들며 화려하게 상장했던 미국 라이다 제조사 루미나. 하지만 2020년 12월 717달러를 찍었던 주가는 현재 3.63달러입니다. 주가 변동률이 무려 -99.5%에 달하죠. 이스라엘 기업 이노비즈 주가 역시 비슷한 수준이고요(2020년 12월 15.5달러→현재 0.72달러).200달러 라이다의 등장지난 몇 년 동안 미국을 포함한 서방 라이다 업계가 혹한에 떨고 있을 때, 무섭게 치고 나온 후발주자가 있습니다. 바로 중국 라이다 제조사입니다. 지난해 기준 세계 시장 점유율 1, 2위를 다투는 두 중국기업, 허사이와 로보센스가 대표적인데요.로봇공학 박사 출신 창업자가 각각 이끄는 두 기업. 그 기술력을 두곤 논란도 있었습니다. 2019년 미국 벨로다인이 두 회사가 자기네 특허를 침해했다고 소송을 넨 적이 있죠. 미국 의회조사국은 “일부 중국기업이 미국의 라이다 지식재산권을 확보하기 위해 의심스러운 관행을 사용해 왔다”고도 지적하는데요.이들 기업의 성장을 가속화한 건 중국 정부의 지원입니다. 중국 정부는 이미 10년 전에 ‘2025년까지 자율주행의 핵심기술을 완전히 장악한다’는 목표를 잡았고요. 이를 위해 규제를 낮추고, 인프라를 갖추고, 연구개발을 지원하는 정책을 줄줄이 내놨거든요.그동안 자율주행 시장이 열릴 듯하면서도 열리지 못한 가장 큰 걸림돌은 너무 비싼 라이다 가격이었는데요. 막강한 내수 파워를 가진 중국 정부가 대놓고 밀어주면서 이 가격 장벽이 깨집니다. 중국 전기차 업체들이 앞다퉈 라이다 장착에 나서자, 대량생산으로 비용을 절감하게 된 제조사들이 가격을 가파르게 내리게 된 거죠.2016년 당시 미국 벨로다인의 차량용 라이다 가격은 1억원(7만5000달러)에 달했고요. 2020년만 해도 라이다 하나에 1000만원(7500달러) 정도 됐는데요. 지금은? 허사이의 차량용 라이다 센서 가격은 고작 28만원(200달러)입니다.루미나·이노비즈 같은 해외 경쟁업체 제품 가격은 500달러 이상이라고 알려져 있죠. 중국산 가격이 절반 이하인 건데요. 이렇게 내려간 가격은 다시 수요 창출로 이어집니다. 중국 전기차 기업 BYD는 얼마 전 전 차종에 자율주행 시스템을 탑재한다고 선언해 라이다 붐을 예고했고요. 이젠 차값이 2500만원(13만 위안)인 립모터 전기 SUV ‘B10’에도 라이다가 장착됩니다. 비싸서 라이다 못 쓴다는 말이 옛날얘기가 되어버린 겁니다.라이다 VS. 카메라라이다냐 카메라냐. 자율주행에 관심 있는 분들은 이 오랜 논란에 대해 들어봤을 겁니다. 대부분 완성차 업체가 자율주행을 위해 라이다를 채택했지만, 유독 이를 거부하고 다른 길을 간 기업이 있죠. 바로 테슬라인데요.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라이다 진영을 향해 혹독한 비판을 퍼부어 왔습니다. 2019년 그가 한 말은 지금도 회자되죠. “라이다는 바보짓(a fool’s errand)입니다. 라이다에 의존하는 곳은 망할 거예요. 망한다고요. 불필요하고 값비싼 센서들.”머스크는 모든 테슬라 차량에서 라이다를 쓰지 않고요. 원래 있었던 레이더 센서와 초음파 센서까지 제거했습니다. 카메라에만 의존하는 순수 비전 방식을 채택한 거죠. 인간이 시각에 의존해서 운전한다면 기계도 똑같이 할 수 있다는 게 머스크의 주장인데요.전 테슬라 오토파일럿 비전 책임자였던 안드레이 카르파티는 이를 “복잡성” 문제로 설명합니다. 센서가 이것저것 추가될수록 시스템 비용이 증가하고 소프트웨어 작업이 더 어려워진다는 거죠. 카메라의 시각 데이터 하나만 분석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라고 보는 겁니다.그리고 무엇보다 비용도 큰 이슈였습니다. 카메라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에 몇만 원 수준. 차량 한 대에 8개씩 달아도 수십만원에 불과했죠. 몇 년 전만 해도 경제성에선 테슬라 방식이 월등히 앞선 겁니다.하지만 라이다 가격이 급격히 무너진 지금, 얘기가 좀 달라지는 분위기입니다. 물론 카메라를 이용한 비전 기술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면서 사람이 운전하는 것 못지않은 자율주행을 선보이곤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라이다를 살짝 추가한다면? 아주 조금은 더 안전해지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라이다 한두개쯤 추가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어차피 이제 라이다가 별로 비싸지도 않은데.이게 바로 라이다 진영이 요즘 내세우는 논리입니다. 허사이 창업자인 리이판 CEO는 라이다가 “보이지 않는 에어백”이 되었다고 설명하죠. 라이다의 개념이 “고급 기능 부품”에서 “표준 안전 사양”으로 바뀌고 있다는 주장입니다.미국의 과학 유튜버 마크 로버가 지난달 올린 테슬라 가짜 벽 통과 실험 영상은 라이다 진영 논리를 강화하죠. 실험에서 라이다는 가짜 벽을 인식하고 차량을 멈추게 했지만, 카메라만으로 인식하는 테슬라 차량은 벽을 뚫어버렸습니다. 짙은 연기와 심한 비가 시야를 가리는 상황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타났죠. 시각 데이터만으론 만일의 돌발 상황까지 대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걸 확인시켜 주는데요.(물론 이 실험의 정확성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또 3월 29일 중국 샤오미 전기차 SU7이 고속도로에서 가드레일과 충돌한 뒤 전소돼 탑승자 3명이 사망한 사고가 있었는데요. 이 차량은 운전자 보조시스템으로 달리던 중이었고요. 시속 116㎞의 고속으로 달리다가 충돌하기 고작 2초 전에야 경고음을 보낸 뒤 콘크리트 벽을 들이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고가 난 SU7 기본형엔 라이다 없이 카메라만 이용하는 운전자 보조시스템이 장착됐단 사실이 이후 알려졌고요(더 비싼 SU7 프로, SU7 맥스 모델에만 라이다가 탑재). 이로 인해 이 사고가 중국 라이다 업체엔 기회라는 분석이 나오게 됩니다. 카메라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고 라이다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심어준다는 거죠.10년 만에 돈 버는 라이다이제 라이다 시장에서 서방 업체는 영 힘을 못 쓰고요. 가격 경쟁력이 월등한 중국 기업이 휩쓸고 있습니다. 시장조사 업체에 따르면 자동차용 라이다 시장에서 중국 업체 점유율은 90%에 육박합니다. 매출 기준 세계 1, 2위인 허사이와 로보센스 모두 지난해 라이다 판매량이 전년보다 100% 넘게 급증했죠(허사이 50만대, 로보센스 54만대). 허사이는 올해 판매량이 지난해의 3배인 150만대일 거라고 예고했습니다.에이, 그래 봤자 중국 내수 수요 아니냐고요? 그렇긴 한데요. 얼마 전 업계가 놀랄 만한 소식이 나왔는데요. 메르데스-벤츠가 중국 이외 지역 판매 차량에 허사이 라이다를 쓰기로 했습니다. 중국산 라이다에 대한 대우가 사뭇 달라지는 분위기이죠.그리고 주목할 부분. 드디어 돈도 벌기 시작합니다. 허사이는 지난해 연간으로 흑자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는데요. 2014년 설립 이후 10년 만에 처음이고요. 중국은 물론 전 세계 자동차용 라이다 전문 기업 중 첫 흑자 전환이라고 하죠.흔히 중국 기업끼리 치열한 가격 경쟁을 벌이다 보면 ‘제 살 깎아 먹기’이 되곤 하는데요. 그런데 중국 라이다 시장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 대중적인 저가품만이 아니라, 돈 되는 고급 제품 수요도 함께 커져서죠. 무인 로보택시와 로봇에 쓰이는 라이다가 이런 고수익 제품인데요.중국을 넘어 두바이까지 진출하는 바이두의 무인 로보택시 ‘아폴로고’ 차량. 거긴 허사이 라이다가 탑재되고요. 지난 설날 단체로 춤을 춰서 전 세계에 화제가 됐던 중국 로봇기업 유니트리의 휴머노이드 로봇 ‘G1’. 여기엔 로보센스 라이다가 들어갑니다. 성장하는 첨단 산업에 라이다 기업들이 제대로 올라탄 겁니다.그럼 이대로 라이다 시장은 중국이 장악하게 될까요? 단정하긴 이릅니다. 라이다는 애초에 군사용도로 개발된 기술이죠. 미국에선 중국산 라이다가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단 지적이 꾸준히 나오고요. 지난해엔 미국 국방부가 허사이를 블랙리스트에 올리기도 했는데요. 이런 미·중 갈등을 틈타서 치고 나올 기회가 열릴지도 모릅니다.무엇보다 전 세계 시장으로 보면 신차 중 라이다가 장착되는 건 고작 1% 정도. 여전히 완전 초기 단계인데요. 그렇다면 아직은 후발주자에게도 기회가 있는 셈입니다. 한국 기업들이 기회를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By.딥다이브‘라이다 가격이 200달러 수준이 되면 대중화 될 수 있다’. 이런 얘기가 10년 전쯤부터 있었죠. 그런 날이 올까 싶었는데, 이렇게 와버리네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자율주행의 꽃’ 라이다(LiDAR). 하지만 각광 받던 미국과 유럽의 라이다 기업들은 지난 몇년의 혹한기를 거치며 존재감이 희미해졌고요. 그사이 몰라보게 커진 건 중국 제조사들입니다. -정부 지원에 힘입어 세계시장을 휩쓸게 된 중국 기업들. 차량용 라이다 가격을 200달러까지 떨어뜨리며 압도적인 가격 경쟁력을 보이는데요. 이제 메르세데스-벤츠도 중국산을 채택할 정도가 됐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라이다는 바보나 쓴다”고 했었죠. 하지만 가격이 이렇게까지 급락하면서 분위기가 좀 달라지는데요. 무인 로보택시나 휴머노이드 로봇 기술의 발전으로 시장 수요는 점점 커지는 상황. 첨단 기술로 나아가려면 이제 라이다를 다시 들여다봐야 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2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제철 산업의 발상지, 영국이 마지막 남은 용광로 구출 작전을 벌였습니다. 5년 전 중국 자본으로 넘어갔던 영국 스컨소프 제철소의 두 고로(용광로)가 그 주인공이죠. 중국 경영진이 고로를 폐쇄하려 하자, 영국 정부가 이례적으로 긴급히 나서서 이를 막은 건데요.어쩌면 37년 만에 스컨소프 제철소가 다시 국유화될지도 모르는 상황. 아니, 고로가 뭐길래 이렇게까지 뜨거운 이슈가 됐을까요. 왜 이게 중국 탓이란 얘기가 나올까요. 오늘은 영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슈, 스컨소프 제철소를 들여다봅니다.*이 기사는 4월 2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고로 폐쇄를 막아라4월 12일 토요일, 영국 상·하원이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토요일에 영국 의회가 소집된 건 1982년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 발발 이래 43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죠. 그만큼 전쟁에 준하는 위기 상황이란 뜻이었습니다.이날 상·하원이 이례적인 긴급 투표로 통과시킨 건 ‘철강산업법’. 영국 철강회사 브리티시 스틸(British Steel)의 스컨소프 제철소에 대한 통제권을 영국 정부에 주기 위한 비상 입법이었습니다. 브리티시 스틸의 소유주 중국 철강회사 징예(敬业)그룹으로부터 제철소 운영권을 사실상 빼앗아 버린 거죠.160년 역사를 가진 스컨소프 제철소는 폐쇄 일보 직전에 있었습니다. 2020년 주인이 된 징예그룹이 두 개의 고로를 5월 중 닫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죠. 고로 가동을 위해 필요한 필수원료인 코크스와 철광석 주문도 취소한 상태였습니다. 용광로의 특성상 일단 한번 식어버리면 이를 다시 되살리기란 매우 어렵고 엄청난 비용이 들죠. 이대로 몇주만 두면 용광로 불꽃은 완전히 꺼지고, 제철소에서 일하던 2700명은 실업자가 될 상황이었습니다.“중국기업이 고로를 굶겨 죽이려고 한다”면서 노조와 여론이 들끓었고요. 결국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나섭니다. “세계 경제 불안정성을 고려할 때 국내 제조업을 보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총리실 성명)이번 긴급 입법으로 영국 정부는 고로 폐쇄 작업이 진행되는 걸 막았습니다. 일부 해고됐던 근로자들도 복직시켰고요. 원자재도 정부가 나서서 간신히 확보한 덕분에, 고로 가동도 정상화하게 됐죠. 일단 한고비는 넘겼는데요.남은 문제는 이 제철소를 어떻게 처리할 거냐는 것. 기본적으로는 다른 민간 투자자를 물색하겠다는 게 정부 입장이긴 한데요. 조너선 레이놀즈 상무부 장관은 “국유화도 여전히 가능성 있는 옵션”이라고 말하죠.브리티시 스틸은 1988년 마거릿 대처 총리 시절 민영화된 수많은 국영기업(항공·가스·전기·통신·수도 등) 중 하나였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의 파산 위기와 매각을 거쳐, 돌고 돌아 다시 국유화가 논의되는 겁니다.철강은 안보 문제적자투성이인 데다, 글로벌 경쟁력도 떨어지는 영국 철강산업에 정부가 뛰어든다? 솔직히 별로 합리적이진 않아 보이는데요. 하지만 경제성과 효율성 따위는 무시하는 중요한 논리가 있습니다. 바로 국가 안보이죠.이번에 폐쇄될 뻔했던 스컨소프 고로 두 개는 ‘퀸베스’와 ‘퀸앤’. 영국 여왕 이름을 딴 이 고로들이 특별한 건 이 나라에 남은 유이한 고로이기 때문입니다.철강을 제조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죠. 하나는 고로(용광로)에 철광석과 코크스(석탄으로 만든 고체연료)를 넣어 만드는 방식, 또 다른 하나는 전기로에 고철(철 폐기물)을 넣고 전기 에너지로 이를 녹여 만드는 방식입니다.이중 고로를 이용한 철강 제조법은 영국이 원조 격이죠. 코크스 고로를 18세기에 세계 최초로 발명했고, 19세기엔 영국이 전 세계 철강산업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까지만 해도 영국은 세계 5위 철강 생산국이었는데요.다 옛날얘기죠. 이제 영국은 세계 철강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고작 0.3%에 불과한 철강 소국이고요. 특히 고로는 탄소 배출량이 워낙 많아서 환영받지 못합니다. 영국의 다른 제철소들 역시 환경규제 때문에 고로를 닫고 전기로로 바꾸는 추세였는데요.그런데 마지막으로 2개 남은 고로가 곧 폐쇄될 거란 소식이 나오자, 평가가 달라집니다. 만약 이것마저 문을 닫는다면 ‘영국이 G7(미국·일본·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캐나다) 중 유일하게 버진 스틸(Virgin Steel, 고철이 아닌 원석을 재료로 한 강철)을 생산할 능력이 없게 된다’는 논리가 힘을 받게 된 건데요.품질 좋은 최고의 강철은 전기로가 아닌 고로에서 생산되고, 따라서 고로가 사라지면 군수산업이 수입산 철강에 의존해야 해서 국가안보가 위협받는다. 뭐, 이런 주장입니다. 옥스퍼드대학교 블라드 미크넨코 교수(정치경제학)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국과 같은 NATO의 주요 군사 국가가 버진 스틸을 생산하지 않는 건 터무니없는 일입니다.”가뜩이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위협으로 유럽은 안보 문제에 예민한 상황. 이런 안보 논리는 꽤 설득력을 발휘하죠. 최근 여론조사에서 영국 국민 과반이 제철소 국유화에 찬성했다는데요. 워싱턴포스트는 이를 두고 “트럼프의 예상치 못한 파장”이라며 이렇게 전합니다. “영국의 보수층과 기업 리더조차 국유화를 환영하는 이상한 사태가 전개되고 있습니다.”고로의 진실그런데 말이죠. 정말 고로가 없으면 영국의 안보가 위협받게 될까요.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은 좀 다릅니다. 이미 영국은 잠수함이나 군함을 만드는 데 쓰는 철강 대부분을 수입하고 있죠. 사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무기 제조용 철강을 수입해 썼습니다.또 고도 가동에 필요한 철광석과 코크스 역시 100% 수입에 의존하죠. 영국은 수십 년 전에 이미 철광석 광산이 문을 닫았고요. 코크스 공장도 모두 가동을 중단했거든요. 어차피 고로가 있든 없든, 철강의 자급자족이란 불가능합니다.또 전기로로 만든 철강은 품질이 떨어진다는 것도 옛날얘기입니다. 기술 발전으로 전기로에서도 고품질 철강을 생산할 수 있게 됐죠. 예컨대 항공기 랜딩 기어에 쓰이는 고급 강철은 리버티 스틸의 전기로에서 생산됩니다. 영국은 해마다 나오는 700만t 넘는 고철 대부분을 튀르키예 같은 외국으로 수출하는데요. 그걸 영국 내 전기로에서 녹여 재활용한다면 오히려 효율적이죠.따져보면 영국인의 안보의식을 자극하는 ‘고로 구하기’ 논리는 약간 시대착오적입니다. 특히 스컨소프의 두 고로가 수명이 거의 다했다는 걸 감안하면 더 그렇죠. 어차피 몇 년 안에 고로를 폐쇄하고 전기로 같은 새로운 설비로 바꿔야 할 겁니다.만약 영국 정부가 스컨소프 제철소의 완전한 국유화를 추진한다면? 그 비용이 40억~50억 파운드(7.5조~9.5조원)에 달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는데요. 그래서 이코노미스트는 냉정하게 평가합니다. “부실 산업을 지원하는 것이 영국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어리석습니다.”하지만 스컨소프는 제철소 도시입니다. 78세인 지역 주민은 언론 인터뷰에서 “만약 제철소가 망하면 이곳은 망할 것”이라고 말하죠. 5월 지방선거를 앞둔 영국 정치권이 이 지역 민심을 외면할 순 없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너무나 중요한 이슈인 거죠.중국의 음모?스컨소프 제철소 문제는 영국인들의 위기의식을 자극합니다. 제철소 폐쇄를 주도하는 주인이 바로 중국기업이기 때문에 더 그렇죠. ‘중국이 영국 철강산업을 고사시키려 한다’는 위기감. 그게 바로 영국의 여론을 고조시킨 큰 이유인데요.영국 정부는 은근히 중국을 탓합니다. 레이놀즈 상무부 장관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죠. “우리가 실제로 중국과 협력할 수 있는 분야와 없는 분야가 무엇인지 명확히 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중국 기업을 우리 철강 분야에 끌어들이지 않을 겁니다.”언론은 훨씬 노골적으로 중국을 비난합니다. 화제가 된 텔레그래프 칼럼의 한 토막을 소개해 드릴게요.“중국 기업 징예가 이 모든 일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은 놀랍지 않습니다. 영국의 고로를 폐쇄하면 우리가 중국에서 슬래브 강판을 구매해야 한다는 걸 징예는 알고 있죠.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모두 계획의 일부입니다. 징예는 전직 중국 공산당 간부가 운영하고 있고, 이제 우리가 이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혀야 합니다.”중국기업이 중국 공산당과 짜고, 중국산 철강 수출을 늘리기 위해 일부러 영국의 고로를 폐쇄하려 한다. 이런 식의 음모론을 제기한 건데요. 물론 구체적인 근거는 없습니다.이에 대해 징예그룹 측은 스컨소프 제철소에 인수 뒤 12억 파운드(2조2700억원)를 투자했지만 하루 70만 파운드(약 13억3000만원)씩 손실을 보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단지 고로가 “더 이상 재정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아서” 폐쇄를 결정했단 주장이죠.뭐가 진실이냐고요?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하지만 철강 과잉 공급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중국으로선 수출이 절실한 건 사실이고요. 영국의 높은 에너지 비용과 환경 규제, 거기에 트럼프 대통령의 철강에 대한 25% 관세 부과까지. 스컨소프 제철소의 생존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한둘이 아닌 것도 맞습니다. 아마도 그 중간 어디쯤 진실이 있겠죠.전환점스컨소프 제철소 사건은 경제 흐름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미 2020년 브렉시트(Brexit)를 계기로 영국은 탈세계화, 신고립주의로 나아갔고요.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은 경제적 민족주의를 더 부추기고 있죠. 점점 커져가는 유럽의 반이민 정서는 외국인 투자에 대한 경계심과 일맥상통합니다. 예전엔 옳았던 것(자유무역·민영화·세계화)이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렸는데요.동시에 영국이 처한 딜레마도 드러내 줍니다. 영국은 이대로 중국과의 사이가 틀어져도 괜찮을까요? 트럼프의 미국을 상대하기 위해 한동안 영국 정부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해 왔는데 말이죠. 또 제철소를 국유화할 수 있다면 다른 황폐해진 기간산업(수도·전력·철도·정유 등)도 정부가 구하러 나서야 하지 않을까요? 그럼 어디까지가 납세자 부담이 되는 게 맞을까요. 영국 철강산업의 비용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히는 탈탄소 환경 정책, 이제라도 재검토해야 하는 걸까요?계획 없이 갑작스레 제철소를 떠안게 된 영국 정부. 워낙 엉겁결에 벌어진 일이라, 이제부터 여러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야 하는데요. 어쩌면 스컨소프 제철소는 21세기 영국 제조업이 처한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By.딥다이브미국에선 US스틸을 일본기업에 파느냐 마느냐를 두고 시끄러운데( 참고), 영국에선 중국에 팔린 브리티시 스틸이 뜨거운 이슈입니다. 안보 때문이든, 경제 때문이든, 정치 때문이든. 철강산업이 갖는 상징성과 중요성이 남다르구나 싶네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영국 정부가 폐쇄 직전에 놓인 마지막 두 개의 고로 구하기에 나섰습니다. 긴급 입법을 통해 소유주인 중국기업으로부터 제철소 운영권을 빼앗아 버렸죠. 새로운 투자자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37년 만에 제철소가 국유화될 가능성이 큽니다.-철광석을 녹여 철강을 만드는 고로. 고로가 모두 폐쇄되면 품질 좋은 ‘버진 스틸’을 생산할 수 없어서 군사 안보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게 국유화 주장의 논리입니다. 하지만 실제론 안보보다는 정치적 이유가 크다는 지적이 나오죠.-이게 다 중국의 음모라는 주장도 영국에선 힘을 얻는데요.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중국과의 외교관계도 지금 영국에겐 중요한 상황입니다. 산업전략을 짜기도 전에 제철소부터 덜컥 인수하게 생긴 영국 정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죠.*이 기사는 4월 2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미국과 중국의 관세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중국이 미국의 약한 고리를 건드렸죠. 희토류 수출을 통제한다고 발표한 건데요. 그러자 미국이 화들짝 놀랐습니다. 중국산 희토류 공급이 막히면 미국 제조업과 군수산업이 치명타를 입을 수 있어서이죠.도대체 희토류는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한때 세계 희토류 시장을 장악했던 미국은 어쩌다 중국산 희토류에 절절매게 됐을까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우크라이나·그린란드·심해채굴 정책과 희토류의 상관관계는 뭘까요. 생각보다 희귀하진 않지만 생각보다 더 중요한 원소, 희토류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1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희토류 수출이 막히면?희토류(稀土類, Rare-earth). 네오디뮴, 프라세오디뮴, 디스프로슘 같은 이름을 가진 17가지 원소를 일컫는 말이죠. 이름과 달리 ‘흙’이 아니라 금속입니다.희토류가 첨단기술의 핵심 소재란 얘기는 아마 들어보셨을 거예요. 희토류 중 란타늄은 전기차·노트북의 배터리에 필요하고요. 네오디뮴·프라세오디뮴은 전기차 모터나 풍력 터빈에 들어가는 강력한 자석의 재료입니다. 스칸듐·유로퓸은 LED 조명과 디스플레이에 필수적이고요. 애플 아이폰엔 0.24g, 테슬라 전기차 한 대엔 520g, 미국 F-35 전투기 한 대엔 408㎏, 핵잠수함엔 무려 4.2t의 희토류가 사용된다고 하죠. 희토류 없이는 스마트폰·전기차·전투기·핵잠수함을 만들 수 없는 셈입니다.그런데 4월 4일 중국 상무부가 7종의 희토류 수출을 통제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수출금지까진 아니지만 수출 허가를 받아야 하는 절차를 새로 만들었죠.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폭탄을 날리자, 희토류를 무기화하며 맞대응한 건데요.이번엔 수출이 통제된 7종은 원자번호가 높은, 그래서 무거운 ‘중희토류’입니다. 비교적 흔한 경희토류(가벼운 희토류)와 달리 중희토류는 중국에서 집중적으로 생산됩니다. 전투기 엔진 터빈이 고열에 녹아내리지 않게 코팅하는 데 쓰이는 이트륨, 전기차 모터에 들어가는 네오디뮴 자석이 고온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디스프로슘 등이 포함되는데요.미국은 중희토류의 97%를 중국에 의존합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중국 정부가 허가를 내주질 않아서, 현재 중국산 희토류 자석 수출은 차단된 상태이죠. 만약 중국 정부가 미국으로의 수출을 계속 막아버린다면? 재고가 소진되는 몇 달 뒤엔 미국 제조업체, 군수업체가 제품 생산을 중단해야 할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희귀하지 않은 희귀자원여기까지 보고 아마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아니, 미국은 땅도 넓은데 희토류가 없나? 미국 땅에서 희토류 캐내서 쓰면 되지 않나?네, 맞습니다. 미국에 희토류 있습니다. 중국(4400만t)만큼 매장량이 많진 않지만 그래도 제법 됩니다(190만t). 전 세계가 4~5년은 써도 충분할 양이죠.미국엔 유서 깊은 희토류 광산이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모하비사막에 있는 ‘마운틴패스’ 광산은 1950년대부터 희토류를 생산했고요. 한땐(1965~1995년) 전 세계 최대 희토류 생산지였습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은 이 시장을 거의 지배했죠.그동안 주인이 여러 번 바뀐 끝에 지금은 MP 머티리얼스라는 기업이 마운틴패스 광산에서 희토류를 채굴 중인데요. 지난해 희토류 산화물 생산량(4만5455t) 기준으로 세계시장 점유율이 11.4%입니다. 중국 빼고는 가장 높은 거죠. 아니, 그럼 미국은 뭐가 걱정이냐고요? 희토류를 진짜 ‘희귀’하게 만드는 건 채굴이 아닙니다. 희토류는 사실 꽤 흔한 원소입니다. 중국·미국 말고도 베트남·브라질·러시아 등 지구 곳곳에서 발견되니까요. 진짜 어렵고 복잡한 건 채굴된 원석에서 희토류 원소를 분리·정제하는 일입니다.희토류는 암석에 뭉쳐있어서 처리하기가 매우 까다롭습니다. 희토류 원소 17가지는 화학적 성질이 매우 비슷해서요. 웬만해선 잘 분리가 되지 않는데요. 그래서 상당히 여러 단계의 화학반응을 거쳐야만 단일 원소로 분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만큼 과정이 복잡하고 설비비용이 많이 든단 뜻이죠.또 희토류 광석엔 토륨·우라늄 같은 방사성 원소가 포함돼 있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걸 정제하는 과정에서 방사성 폐기물이 대량 발생할 수 있습니다. 희토류 1t을 추출하는 데 1t이 넘는 방사성 폐기물이 발생한다는 과거 연구 결과가 있을 정도이죠.바로 그게 미국에서 채굴된 희토류 광석이 정제를 위해 중국으로 보내졌던 이유입니다. 정제 과정이 더럽고 복잡한데, 그렇다고 희토류가 금이나 은처럼 그렇게 비싼 금속도 아니니까 돈도 별로 되지가 않잖아요. 그러니 이를 중국에 떠넘겨 버렸던 겁니다.중국은 환경규제가 느슨한 데다, 저렴한 전기와 노동력 덕분에 비용도 최소화하니까 저렴한 희토류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고요. 그 결과 이제 전 세계 희토류 정제의 85%를 중국이 맡고 있습니다.그래서 몇 년 전만 해도 미국엔 아예 이런 처리시설이 없습니다. 미국 국방부는 뒤늦게서야 군사적으로 중요한 희토류의 국내 생산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고요. 2023년 MP머티리얼스가 국방부 지원을 받아 희토류 정제시설을 구축했는데요. 아직 처리 용량이 턱없이 부족해, 여전히 상당량 광석을 중국으로 보내서 처리해야 합니다.미국 전략국제연구소 그레이스 바스카란 소장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게 전략적 취약점이란 걸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희토류 중간처리 과정을 구축하는 데는 자본이 너무 많이 필요했습니다.”또 중국은 정제·제련된 희토류를 이용한 영구자석 생산에서도 90%의 세계시장 점유율을 차지하죠. 원석 채굴→분리·정제→금속 제련 →최종재(자석) 생산까지. 완전한 생태계를 구축한 건데요.이에 비해 미국은 희토류 자석을 상업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이 아직 없습니다. MP머티리얼스가 올해 안에 텍사스에서 희토류 자석의 상업 생산을 시작한단 계획이긴 한데요. 뉴욕타임스는 이 공장이 “최대 속도로 가동되더라도 연간 생산량은 중국 하루 생산량에 해당할 뿐”이라고 전합니다.희토류의 무기화“중동에는 석유가 있고 중국에는 희토류가 있다.”1992년 덩샤오핑 중국 주석이 한 이 말은 한때 중국인들을 흥분시켰습니다. 산유국들이 석유를 파내 부자나라가 됐듯이, 중국도 이제 희토류를 캐내서 부유해질 거란 기대감 때문이었죠. 시골 주민들이 앞다퉈 희토류 광산 개발에 뛰어들어 땅을 팠고요. 중국 엔지니어들은 수십 년 동안 매달려 희토류 정제를 위한 용매 추출 기술을 완성했습니다.그래서 중국의 희토류 산업이 번창한 덕분에 다들 부자가 됐을까요? 아니요. 대신 희토류 값이 그야말로 흙값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공급과잉으로 중국 수출업체 간 가격경쟁이 과열됐기 때문이죠. 동시에 불법 채굴로 인한 환경문제도 심각했습니다.이렇게 헐값에 희토류를 수출하면 수입국만 좋은 일 시키는 셈이었습니다. 이 무질서를 손보겠다며 중국 정부가 칼을 빼든 게 2010년. 갑자기 희토류 수출 할당량을 40%나 감축해 세계 시장을 흔들었고요. 일본이 영토분쟁 수역에서 중국어선 선장을 억류하자, 희토류 일본 수출을 일시 중단해 버렸습니다. 당시 일본 제조업체는 패닉에 빠졌고요. 일본은 중국인 선장을 2주 만에 석방하며 굴복합니다. ‘중국의 희토류 없이는 일본의 첨단기술도 소용없게 되는구나’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일깨워준 사건이었는데요.사실 이 당시 수출통제는 경제적으론 그리 큰 효과를 발휘하진 못했습니다. 밀수가 워낙 많다 보니 통제가 다 뚫렸기 때문이었죠. 반짝 올랐던 희토류 값은 곧 다시 곤두박질칩니다.하지만 중국 정부는 2010년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희토류 산업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나섭니다. 비록 희토류가 중국을 부자 나라로 만들어주진 못했지만, 그래도 OPEC(석유수출국기구)처럼 ‘자원 무기화’에 나설 칼자루를 쥐여준 건 확인했으니까요.중국은 우선 난립한 희토류 민영 광산들을 통합해 국유화합니다. 처음에는 6개의 대형 국유기업으로, 최근엔 4개의 국유기업으로 통합했죠. 2023년엔 희토류 가공과 자석 제조 기술의 수출을 금지해 버립니다. 지난해엔 ‘희토류 자원 국유화’를 선언했고요(민간 진출 금지). 모든 희토류 제품 흐름이 추적되는 시스템도 갖춥니다. 누구도 정부의 감시망을 피해 갈 수 없게 한 거죠. 이젠 중국 정부가 원하는 대로 희토류 수출을 쥐락펴락할 수 있게 됐습니다.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폭탄을 날리자, 중국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 비장의 카드를 내밀었죠. 미국으로서는 제대로 한 방 얻어맞은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그린란드부터 심해까지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 희토류에 대한 미국의 의존도를 모르지 않습니다. 아니, 너무 잘 알고 있죠. 트럼프 대통령이 그린란드를 매입하겠다, 우크라이나와 광물 협정을 맺겠다, 이런 얘기 했던 거 기억하시죠. 처음엔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인가 싶었는데요. 이게 다 두 지역에 묻혀있는 희토류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그린란드는 네오디뮴, 디스프로슘 같은 희토류 매장량(150만t)이 미국 본토에 버금가고요. 우크라이나 역시 구체적 정보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희토류 매장지가 있거든요.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제 또 다른 희토류의 보고로 눈을 돌렸습니다. 태평양 바닷속이죠. 파이낸셜타임스 최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태평양 해저에서 발견되는 망간단괴를 비축할 수 있도록 하는 행정명령 초안을 마련 중이라는데요. 바다 밑바닥에 감자처럼 콕콕 박혀있는 망간단괴는 구리·니켈·코발트와 함께 희토류가 함유된 ‘바다의 노다지’이죠. 이걸 캐내서 쌓아두겠단 겁니다.그것도 광물자원 확보에 좋은 방법이겠다고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의 배타적 경제수역 안이면 모를까, 그 밖의 지역은 국제해저기구(ISA) 관할입니다. 거기서 심해채굴을 하려면 엄연히 국제법에 따라 ISA의 승인을 받아야 하죠. 트럼프 행정부는 국제법 따윈 무시하고, ISA 승인도 없이 심해 채굴을 하려는 걸까요?만약 그렇다면 이건 우리에게도 큰일입니다. 왜? 그동안 한국을 포함한 ISA 회원국은 수십 년 동안 상당한 돈과 노력을 태평양 바닷속 자원 탐사에 들여왔고요. ISA가 상업적 심해채굴을 승인해 주길 정말 오랫동안 기다려왔거든요(참고).그런데 ISA 회원국도 아닌 미국이 룰을 싹 무시하고 새치기할 기세인 겁니다. 아니,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니잖아요. 이 무역 전쟁의 유탄이 엉뚱한 데까지 튀고 있습니다. 이 혼란은 과연 언제 어떻게 진정될까요. By.딥다이브돈은 안 되지만 무기는 되는 희토류. 15년 만에 또다시 중국 희토류가 국제 이슈의 중심이 됐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폭탄에 중국이 희토류 수출 통제로 맞대응했습니다. 미국은 ‘중희토류’의 97%를 중국에 의존하는 상황. 만약 중국이 수출을 진짜 막는다면 미국 제조업과 군수산업 모두 치명타를 입을 수 있습니다. -1980년대만 해도 미국은 희토류 시장을 지배했습니다. 지금도 중국에 이어 2위 생산국이고요. 하지만 돈 안 되고 환경오염이 심한 희토류 분리, 정제 산업은 중국에 의존하고 있죠. 뒤늦게 이를 되살리려 하지만, 단기간엔 어렵습니다. -그린란드를 사겠다, 우크라이나 자원을 개발하겠다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 이런 주장의 배경엔 희토류가 있습니다. 최근엔 태평양 바다 밑 망간단괴까지 채굴하려 한다는데요. 이 무역전쟁이 일단락된다 해도 미국의 희토류 확장은 계속될 듯합니다.*이 기사는 4월 1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미국발 관세 폭탄으로 전 세계에 보호무역 물결이 일고 있는 요즘. 세계적 흐름과 정반대로 가는 나라가 있습니다. 관세를 대폭 내리고 무역장벽을 없애며 자유무역으로 귀환 중인 나라. 바로 아르헨티나입니다. 지난해 공공지출을 싹둑 도려내 재정적자 사슬을 끊어내는 데 성공한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이제 그의 전기톱이 관세와 무역규제를 향하고 있는데요. 아르헨티나는 100년 가까이 이어진 ‘관세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알려주고 싶은 아르헨티나 무역 자유화 정책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티토의 위기BYD 돌핀, GM 쉐보레 스파크 EUV, 립모터 C10, 피아트 600 하이브리드….조만간 아르헨티나 시장에 선보일 수입 신차들입니다. 지난달 자동차 수입업체와 제조사들은 앞다퉈 소형 전기차·하이브리드차를 수입해 들여오겠다고 정부에 신청했죠.아르헨티나에 갑자기 전기차 붐이 일어난 이유는 간단합니다. 올해 초 정부가 수입 전기차·하이브리드차에 부과하던 35% 관세를 폐지했기 때문이죠. 단, FOB(본선 인도 가격) 기준 1만6000달러(2284만원) 미만인 저가 전기차에 한해, 연간 5만대까지만 관세가 면제됩니다. 그래도 고율 관세의 대명사로 통했던 아르헨티나로서는 파격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는데요.아르헨티나에도 국산 전기차가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기업 코라디르(Coradir)가 2022년 출시한 ‘티토(Tito)’이죠. 작고 귀여운 ‘도시형 전기차’ 티토는 성능도 참 소박합니다. 최고 속도가 시속 65㎞밖에 되지 않고요. 배터리를 100% 충전하면 고작 100㎞를 달릴 수 있습니다. 티토의 최소 판매가격은 1763만 페소(약 2346만원)인데요.수입 전기차 관세 폐지로 티토가 직격탄을 맞게 되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하죠. 코라디르 CEO 후안 마누엘 바레토는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전기차 산업엔 인센티브가 필요해요. 완전히 개방된 시장에선 아르헨티나산 자동차 산업이 사라지고 수입산만 남을 겁니다.”하지만 소비자들은 냉정합니다. 티토를 운전한다는 한 소비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르헨티나 제조업엔 여전히 개선의 여지가 있어요. 가격 경쟁력을 갖춘 수입차가 출시된다면 차를 바꾸는 걸 고려할 수 있죠.”세금 깎고 수입문 활짝이 정부 들어 관세가 내려간 건 전기차만이 아닙니다. 지난해 10월 아르헨티나 정부는 89개 품목에 대한 관세를 일제히 인하했습니다. 오토바이·타이어·커피·소형가전·가스통 등 생필품 관세가 대폭 낮아졌고요. 주요 산업용 원자재는 최대 35%이던 관세율이 최저 2%까지 뚝 떨어졌죠.올 3월엔 수입 의류 관련 관세도 내렸습니다. 의류·신발은 35%→25%, 직물은 26%→18%로 관세율이 낮아졌죠.이 나라엔 관세는 아닌데 수입할 때 반드시 내야 하는 특이한 세금이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포용적이고 연대적인 아르헨티나를 위한 세금’, 줄여서 ‘PAIS 세금’이라고 부르는 건데요. 수입 대금 결제를 위해 외화(미국 달러)를 살 때 무조건 7.5%를 세금으로 매겼습니다. 그런데 2019년부터 부과됐던 이 세금, 밀레이 정부가 지난해 12월 아예 철폐해 버렸죠.아르헨티나는 수입만이 아니라 수출할 때도 관세를 내는 나라입니다. 특히 농산물 수출 관세가 높기로 유명한데요. 1월 말 이 수출세를 일부 인하하는 행정명령을 내렸죠. 대두 수출세는 33%에서 31%, 옥수수·밀은 12%에서 9.5%가 됐습니다.세금만 깎아준 게 아닙니다. 너무 까다로워서 사실상 수입을 어렵게 만들었던 세관의 번잡한 신고·승인 절차를 대폭 없앴고요. 또 아르헨티나 국민이 해외에서 개인 용도로 주문할 수 있는 연간 한도를 세 배로(1000달러→3000달러) 높입니다. 이 중 첫 400달러까진 관세 면제 혜택도 주고요.한마디로 아르헨티나의 높았던 관세와 비관세 장벽이 하나둘씩 무너지고 있습니다. 자유시장경제 신봉자,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의 경제개혁인데요.2023년 12월 취임한 밀레이 대통령이 공공지출을 무지막지하게 잘라내는 ‘전기톱 개혁’을 진행 중이란 소식을 전해드린 적 있죠(). 이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여전히 극심하지만, 덕분에 아르헨티나는 16년 만에 재정 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전 세계가 아르헨티나 경제가 달라졌다며 경탄했고요.그동안 이 나라는 감히 관세를 낮출 엄두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재정적자가 워낙 큰일이었기 때문이죠.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국가 재정에 난 구멍만 커질까 봐 손대지 못한 겁니다. 국가 재정은 관세에 중독된 듯했습니다. PAIS 세금은 아르헨티나 총세수의 약 6%, 수출 관세는 약 11%를 차지했죠.그런데 지난해 재정 흑자 달성에 성공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진 겁니다. 밀레이 정부가 무역 자유화로 한발짝 나아갈 수 있게 된 거죠. PAIS 세금 폐지, 각종 수입 관세 인하 정책을 펼쳤고요. 수출 관세는 당장 다 없애진 못하지만, 먼저 산업재(수출세 5%)부터 조만간 폐지한다는 계획입니다. 루이스 카푸토 경제부 장관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이 정부는 세금을 낮추기 위해 왔습니다.”페론주의와 보호무역사실 적절한 관세는 나라 경제에 도움이 됩니다.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무역 불균형 해소에도 일부 기여하니까요. 그래서 어느 정도의 관세 또는 비관세 장벽이야 대부분 나라에 있기 마련인데요.하지만 아르헨티나 경우엔 그 정도가 너무 심했고, 기간도 너무 길었다는 게 문제입니다. 아르헨티나는 보호무역주의 역사는 1930년 미국 ‘스무트-홀리법’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됐는데요(참고). 100년 가까운 그 역사에서 특히 눈에 띄는 두 전직 대통령이 있습니다. 후안 페론(1946~1955년, 1973~1974년 재임)과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2007~2015년 재임).후안 페론은 페론주의 창시자이죠. 흔히 페론주의라고 하면 ‘복지 포퓰리즘’을 떠올리지만, 산업적으로는 자급자족을 추구하는 ‘수입 대체 산업화’ 전략이 핵심입니다.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매기면→그걸 대체할 국내 제조업이 커질 거고→그럼 일자리가 늘어나서→국민들이 잘 먹고 잘살게 된다. 이런 이론입니다.이게 통했냐고요? 처음엔 반짝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요. 이내 한계에 부딪혔죠. 경쟁이 사라지자, 국내 산업에선 혁신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조잡한 구식 국산 제품은 쓸데없이 가격만 비싸졌고요. 수출시장에서 아르헨티나산 제품이 경쟁력을 잃으면서 무역적자가 불어납니다. 정부가 보조금을 쏟아부으며 산업을 떠받쳤지만, 이는 재정적자만 키웠고요. 아르헨티나 경제는 점점 수렁에 빠집니다.아르헨티나 보호무역주의는 페론주의 계승자인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 시절 또다시 극에 달합니다. 관세만 높인 게 아니라 ‘수입 허가제’를 도입해 문을 걸어 잠갔죠. 특히 전자기기는 국내에서 제조돼야 한다며 사실상 수입을 불허했는데요. 이로 인해 애플 아이폰은 무려 8년 동안 아르헨티나 매장에서 사라졌고요.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암시장에서 미국 판매가의 3배를 주고 아이폰을 구해야 했습니다.당시엔 외국기업이 아르헨티나에 수출한 만큼 아르헨티나 제품을 수입해야 한다는 규정도 있었습니다. 수입차 업체는 이 나라에서 계속 영업하기 위해 와인·올리브(포르셰), 쌀(BMW), 땅콩(미쓰비시·현대차), 닭 사료(스바루) 재판매 사업에 뛰어들었고요. 그 사업 비용으로 인해 수입차 값은 거의 두 배로 치솟았고, 자동차 시장은 침체에 빠졌죠. 고립적인 보호무역주의의 당연한 결말입니다.변화와 비판현 대통령인 하비에르 밀레이는 자유무역을 지향합니다. 관세와 무역장벽이 아르헨티나 경제에 독이 됐다고 보기 때문이죠. “보호무역주의는 거짓말”이고 “수입품을 국내 생산으로 대체하는 건 재앙적”이라고 그는 비판하는데요. 지난달 의회에선 이렇게 말합니다.“수십 년 동안 소수의 일자리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수백만 아르헨티나 국민의 생계비가 상승했습니다. 품질이 의심스러운 상품을 완전히 왜곡된 가격에 구매하도록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원하는 누구와든 거래할 자유를 돌려줘야 합니다.”소비자들은 이제 변화를 체감합니다. 수입 규제가 풀리면서 많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미국 아마존에서 물건을 주문하기 시작했고요. 슈퍼마켓 진열대엔 이탈리아산 토마토소스, 스페인산 과자, 폴란드산 보드카 같은 이전엔 볼 수 없던 수입 제품이 빼곡합니다. 이 나라 수입업자 수십 명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에서 열리는 대규모 박람회를 돌아볼 계획이라고 하죠.하지만 오랫동안 국가의 보호 아래 있었던 기업들은 불안합니다. 지난달 밀레이 정부가 의류 관세를 내리자, 의류협회는 “관세 인하로 수천 개 일자리와 국내 기업이 파괴될 것”이란 강경한 성명을 발표했죠. 높은 세금, 경직된 노동시장 같은 다른 문제를 그대로 두고 관세만 내린다면 “산업적 자살이 될 것”이란 반발입니다. 현 정부 비판에 앞장서는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은 밀레이의 자유무역 정책을 향해 “우리를 다시 원자재만 착취당하는 식민지로 전락시키려 한다”고 쓴소리했고요.하지만 ‘시장 근본주의자’ 밀레이 대통령이 이런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죠. 그는 이렇게 받아칩니다. “경쟁력 부족으로 일부 기업이 파산하더라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소비자 가격이 하락할 테니까요. 일자리가 줄어들어도 일시적 현상일 뿐입니다. 다른 기업이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불안한 인플레이션그럼 밀레이 정부의 자유무역을 향한 전진은 조만간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게 될까요? 국민은 전보다 먹고살기 좋아졌다며 결국 이를 지지하게 될까요. 글쎄요. 아직은 좀 더 두고 봐야 합니다.일단 아르헨티나 인플레이션이 여전히 심상찮습니다. 3월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이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월 3.7%(연간으로는 55.9%)를 기록한 건데요. 정부의 보조금 축소로 전기·가스 같은 공공요금이 일제히 오르는 추세이죠. 생각만큼 관세 인하 효과가 눈에 띄지 않게 될지 모릅니다.더 큰 문제는 환율입니다. 밀레이 정부는 4월 14일을 기해 외환 통제 대부분을 없앴습니다. IMF로부터 200억 달러 대출을 승인받기 위한 조건인데요. 이로써 한 달에 200달러밖에 살 수 없었던 개인은 이제 제한 없이 마음대로 달러를 살 수 있게 됐습니다. 정부가 억지로 낮게 유지했던 환율도 이날부턴 일정 범위(1달러당 1000~1400페소)에서 시장 수급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게 됐고요. 즉, 환율의 고삐가 6년 만에 풀렸습니다.그런데 만약 아르헨티나 경제를 신뢰하지 못하는 국민들이 가진 돈을 앞다퉈 미국 달러로 바꾸려 몰려든다면? 자칫 환율이 상한선까지 치솟을 위험, 당연히 있습니다. 그렇다면 관세 인하 노력이 무색하게도 수입품 가격이 뛸 거고요.외환시장 자유화는 아르헨티나 경제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정책이죠. 그래야 외국 자본이 ‘내 돈을 빼 나가지 못할 일은 없겠구나’라고 안심하고 투자하러 올 테니까요. 다만 그게 ‘물가 안정’이란 또 다른 중요한 목표를 위협할 수 있습니다. 밀레이 정부가 처한 딜레마인데요.하긴, 병증이 깊었던 아르헨티나 경제를 치료하는 일이 쉬울 리 없습니다. 개혁이란 원래 어려운 일이죠.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폭탄까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 밀레이 대통령의 전기톱은 이 개혁을 끝마칠 때까지 배터리가 방전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By.딥다이브밀레이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남다른 친분을 과시해 한층 유명해졌죠. 얼마 전 트럼프 대통령은 아르헨티나에 10% 상호관세를 매겼는데요. 밀레이 대통령 측은 “가장 낮은 관세”라며 위안했지만 국민들은 ‘친구라더니 이게 뭐냐’는 차가운 반응입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공공지출 톱질로 재정 흑자를 달성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아르헨티나 밀레이 대통령. 이제 그가 관세와 무역장벽 톱질에 나섰습니다. 각종 관세가 대폭 인하되고 수입을 막던 세관 절차가 사라집니다. 이제 다시 수입이 시작됩니다. -페론주의의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으로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가장 무역장벽이 높은 나라 중 하나가 됐습니다. 고립적인 무역정책은 국내 산업을 키우긴커녕 경제를 망쳤죠. 관세에 중독된 국가 재정과 국내 산업이 무역 자유화로 나아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밀레이의 관세 철폐 정책의 성공은 결국 물가 안정에 달려있습니다. 하지만 잠잠해지는 듯했던 인플레이션은 다시 들썩이고, 환율마저 걱정입니다. 아르헨티나는 지치지 않고 계속 개혁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이 기사는 1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90일간의 상호관세 유예. 관세전쟁의 잠시 쉬어가는 타임입니다. 한숨 돌리게 된 건 정말 다행이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끼고 있는 듯 여전히 불안한데요.쏟아지는 뉴스는 잠시 접어두고, 대신 역사를 들여다보며 마음을 가라앉힐까 합니다. 관세가 어떻게 세계 경제를 망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약 100년 전 사례, 미국의 ‘스무트-홀리 관세법’이죠. 지금 상황과 겹치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좀 소름 돋을 수 있음에 주의하세요. 역사가 알려주는 관세전쟁의 결말을 들여다보겠습니다. (큰 줄기는 미국 다트머스대 더글러스 어윈 교수의 책 ‘보호무역주의의 확산: 스무트-홀리법과 대공황’을 참조했습니다.)*이 기사는 4월 1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호황, 대선, 그리고 관세“그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경제적 어리석음이었다(incredible economic folly).”하버드대 경제학 교수 섬너 슬리히터는 미국 관세정책을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지금이 아니라 무려 93년 전에요. 트럼프 대통령의 상호관세 발표 전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무역정책으로 꼽혔던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두고 한 말인데요.미국 수입품의 약 3분의 1에 대한 평균 관세율을 59.1%까지, 무지막지하게 끌어올렸던 이 법(나머지는 면세. 전체 수입품 평균 관세는 20%로 높아짐).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그 시작은 1928년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광란의 1920년대(Roaring Twenties), 미국 경제는 대호황이었고요. 주식시장은 영원히 상승할 것만 같았습니다. 대공황 따윈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호시절이었죠.당시 세계 최강으로 올라선 미국 경제에도 그림자는 있었으니. 바로 농촌이었습니다. 자동차·재봉틀 같은 제조업이 성장할수록 농부들은 암울했습니다. 뒤처지고 잊혀진다는 느낌이었죠. 부유한 사업가 출신인 공화당 대선 후보 허버트 후버는 이들을 관세로 공략했습니다. “수입 농산물에 대한 관세를 높여, 농촌의 생활 수준을 높이겠다”고 약속한 거죠. 후버는 1928년 11월 압도적 지지율로 당선됩니다.최악의 타이밍그럼, 관세를 어떻게 높일까. 1929년 초부터 의회가 토론을 시작합니다. 이 관세 위원회를 이끈 게 윌리스 홀리(오리건주 하원의원)와 리드 스무트(유타주 상원의원)였죠. 이 법이 ‘스무트-홀리법’으로 불리는 이유인데요.전국 각지에서 각종 생산자 이익단체가 워싱턴DC로 몰려듭니다. 너도나도 자기네 생산품에 대한 관세를 높여달라고 위원회에 요구했죠. 설탕·양모처럼 수입품과의 경쟁이 치열한 농산품은 물론이고요. 정어리 통조림, 금붕어, 포장지, 메밀, 빨래집게, 기름통, 각종 화학 소재 등. 그야말로 온갖 상품에 대한 요구가 넘쳐납니다.중간재와 최종소비재 생산자 간 의견 충돌은 빈번했습니다. 목장주는 가죽에 대한 관세를 높이라고 요구하고, 신발 제조업자는 가죽은 면세여야 한다는 식이었죠. 결국 양측 모두에 관세를 높이는 식으로 해결됐고요.상원에선 줄다리기가 벌어집니다. 의원들은 자기 지역구 챙기기에 바빴습니다. “우리 주 생산품에 대한 관세 인상에 반대한다면, 그 의원 주가 생산하는 제품 관세 인상에 반대하겠다”며 서로 으름장을 놨죠.길고도 떠들썩한 논쟁이었습니다. 토론을 거듭할수록 관세 대상 품목 수는 점점 늘어났고요. 결국 887개 품목에 대한 관세를 인상하는 세부안이 확정된 건 해를 넘긴 1930년 6월. 상원에서 불과 두 표 차이(44대 42)로 법안이 통과됩니다.하지만 이미 호시절이 끝나고 1929년 10월 ‘월가 대폭락’으로 뉴욕 증시는 붕괴된 뒤였고요. 미국 경제가 대공황의 늪에 빠져버린 바로 그 시점이었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최악의 타이밍이었죠.비극적이면서 희극적 결말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되자 전 세계가 경악합니다. 공은 백악관으로 넘어왔죠. 허버트 후버 대통령에겐 편지·전보가 쇄도했고, 백악관 앞엔 시위대가 진을 쳤습니다. 이 법을 지지한다는 농민단체, 반대한다는 해운·백화점·자동차 업계, 그리고 어떤 산업이냐에 따라 입장이 극과 극인 노조까지. 모두가 들고 일어났는데요.가장 똘똘 뭉친 건 경제학자들이었습니다. 1028명의 경제학자가 후버 대통령에 ‘거부권을 행사하라’고 요구하는 편지에 서명했죠. 그들은 관세 인상은 소비자 가격을 끌어올릴 뿐 아니라, 국내 수출업체에 타격을 입히고, 상대국의 보복까지 불러올 거라고 정확히 예언합니다.기업인들도 나섰습니다. 지금의 일론 머스크보다 몇 배 더 인기를 끌었던 스타 기업인, 헨리 포드(포드자동차 창업자)도 그중 하나였죠. 포드는 후버 대통령과 저녁 식사를 하며 “이 경제적 어리석음(an economic stupidity)”을 멈춰달라고 했습니다. JP모건의 토마스 라몬트 회장은 “후버에게 이 어처구니없는 관세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해달라고 간청하기 위해 무릎을 꿇을 뻔했다”고 훗날 회상했죠.1930년 6월 15일 일요일, 후버 대통령이 관세법안에 서명했다고 발표합니다. 다음날 다우지수와 원자재 가격이 고꾸라졌고, 월가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죠. 이코노미스트지는 당시 이렇게 썼습니다. “세계 관세 역사상 가장 놀라운 챕터의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결말(tragi-comic finale).”보복의 악순환설탕 77%, 담배 63%, 실크 58%, 양모 57%, 유리 제품 53%…. 원래도 높은 편이었던 미국의 관세가 무섭게 치솟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렇게까지 큰일은 아니었습니다. 진짜 재앙은 그 이후에 벌어졌죠. 분노한 무역상대국들이 즉각적인 보복에 나선 겁니다.가장 먼저 나선 건 그때도 캐나다였습니다. ‘눈에는 눈’ 전략으로 감자·버터·계란·밀 등, 각종 미국산 제품에 고율 관세를 매기며 반격했죠. 그로 인해 미국 농가가 받은 역풍은 상당했는데요. 미국산 계란의 캐나다 수출량이 92만 다스(12개 묶음)에서 1만4000다스로 급감합니다.유럽도 격분합니다. 1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경제를 재건 중이던 유럽엔 무역흑자가 절실히 필요했던 상황인데요. 미국 관세 때문에 자국 산업이 붕괴할 위기에 놓였으니, 분노로 여론이 들끓습니다.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은 대부분 미국산이었던 수입차 관세를 대폭 높였고요. 재봉틀, 면도날, 라디오 같은 미국의 주요 수출품에 대한 관세도 줄줄이 인상합니다. 영국은 보건을 이유로 미국산 사과 수입을 금지했고요. 이탈리아는 밀 수입처를 미국에서 러시아로 바꿔버렸죠.살길을 찾기 위해 일부 국가는 경제블록 구축에 나섰습니다. 1932년 영국·캐나다·호주·인도·뉴질랜드·남아프리카공화국은 뭉쳐 ‘제국 특혜’를 도입했죠. 자기들끼리만 서로 낮은 관세를 부과하기로 뭉친 건데요. 이런 관세 차별은 특히 미국 수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힙니다.이런 식으로 스무트-홀리법 제정 직후 관세를 올리거나 수입 금지·할당에 나선 나라만 50개국이 넘었습니다.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 평균 관세까지 20%를 훌쩍 뛰어넘게 치솟았죠. 미국 대공황은 갈수록 태산인데, 초고율 관세 시대마저 열렸으니. 세계 무역이 어떻게 됐을까요. 전 세계 수입이 1929년부터 1932년까지 불과 3년 만에 25%나 쪼그라들게 됩니다. 특히 미국 수출은 이 기간 49%나 급감하며 경제를 끌어내립니다.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미국 대공황을 초래한 건 아닙니다. 대공황의 직접적인 원인은 1929년 미국 중앙은행의 섣부른 통화 긴축이라는 게 정설이죠. 하지만 하필 그 타이밍에 보호무역주의가 득세하면서 미국 경제를 더 깊은 구렁텅이에 빠뜨리게 됐는데요. 비유하자면 이미 대공황으로 꼬르륵 가라앉고 있던 익사 직전의 미국 경제를 관세라는 벽돌로 내리친 것과 같았습니다.유권자의 심판, 그리고 트럼프불황이 깊어지면서 스무트-홀리법의 악명은 높아졌습니다. 스무트와 홀리, 두 사람은 1932년 선거에서 의석을 잃었죠. 스무트는 민주당 후보에 졌고, 홀리는 공화당 예비선거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같은 해 대선에서 후버 대통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에 압도적인 표차로 패배하고 정권을 넘겨줍니다.하지만 관세인상을 주도한 리드 스무트 의원은 죽을 때까지 잘못된 정책이었다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930년에 관세를 올리지 않았다면 불황은 훨씬 더 심각했을 것”이란 주장을 펼쳤는데요.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 지금도 최소 한명은 있습니다. 바로 트럼프 대통령이죠. 그는 “관세 정책을 고수했다면 대공황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스무트-홀리법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들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관세를 부활시키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미국 대통령이 마음대로 관세를 주무를 수 있게 된 건 스무트-홀리법의 유산입니다. 스무트-홀리법 제정 과정에서 혼란과 비효율을 깨달은 의회는 1930년 6월 관세법을 개정했죠. 대통령이 의회 승인 없이도 관세를 부과할 수 있게 길을 터준 건데요. 이익단체 로비에 취약한 의회보단 대통령이 더 나은 선택을 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이후 점점 더 관세에 대한 권한은 의회가 아닌 대통령과 행정부로 넘어갔고요. 그리고 95년이 흘러,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핵전쟁으로 이어지고 맙니다. 이젠 오히려 의회가 대통령의 관세 권한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죠.트럼프 대통령은 ‘일단 멈춤’을 누르긴 했습니다. 2025년 관세 이야기의 결말은 대공황과는 다를 수 있고, 부디 다르길 바라죠. 하지만 스페인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의 유명한 글귀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네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것을 반복할 운명에 처한다.’ By.딥다이브스무트-홀리법의 가장 큰 업적은 ‘보호무역주의=경제에 나쁜 것’이란 인식을 미국에 심어줬다는 거였죠. 그런데 100년 가까이 지나면서 그 기억이 흐릿해지더니, 결국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는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억만장자 출신 대통령 후보가 낙오한 지역 유권자를 보호하겠다며 관세 인상을 공약하고 당선됩니다. 1928년 미국 대선에서 벌어진 일이죠. 이후 온갖 품목의 관세를 올려달라는 요구가 의회에 쏟아졌고, 수입품의 3분의 1에 평균 59% 관세를 부과하는 ‘스무트-홀리법’이 1930년 제정됩니다. -미국 경제가 이미 대공황 수렁에 빠진 뒤였습니다. 수많은 경제학자와 기업인들이 반대했지만 막을 수 없었죠. 분노한 상대국이 즉각적인 보복에 나서면서 재앙이 시작됩니다. 3년 만에 미국 수출이 반토막 납니다. -대공황에 빠진 미국 경제에 치명타를 입힌 관세 전쟁. 하지만 관세인상의 주역은 죽을 때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젠 미국 대통령이 그 어리석음을 반복 중이죠. 자꾸 100년 전 역사를 되돌아보게 되는 이유입니다. *이 기사는 4월 1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주식시장의 롤러코스터가 어지럽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핵폭탄이 세계 금융시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는데요. 도대체 이 관세전쟁은 어디로 가는 걸까요. 출구는 있을까요. 우린 뭘 해야 하죠? 전례 없는 상황이라 갈피를 잡기가 어려운데요. 우리보다 조금 먼저 이 상황을 겪은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트럼프 관세를 가장 일찍 얻어맞은 캐나다이죠. 지난 2월 미국의 갑작스러운 25% 관세 부과 발표로 휘청거렸던 캐나다. 이후 두 달 동안 놀라운 애국주의 물결과 함께 해답을 조금씩 찾아 나가고 있는데요. 캐나다의 트럼프 관세 대응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팔꿈치를 위로 올려라“엘보우즈 업(Elbows Up)!”최근 캐나다 시위대가 가장 많이 외치는 구호입니다. 캐나다 소셜미디어에도, 정치인 연설에서도, 코미디프로그램 ‘SNL’에서도 이 구호가 등장했죠. ‘팔꿈치를 위로!’라는 뜻인데요.팔꿈치를 치켜드는 건 전설적인 캐나다 아이스하키 선수 고디 하우(1928~2016년)가 즐겨 쓴 방어법이었죠. 상대편이 몰려오면 팔을 높이 들어 올려 막은 뒤, 기회를 봐서 뒤통수(때론 얼굴)을 팔꿈치로 내려찍었습니다. 즉 ‘엘보우즈 업’엔 이런 뜻이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공격하진 않아. 하지만 건드리면 날려버리겠어.’친절하기로 유명한 캐나다인치곤 과격한 구호입니다. 누구를 향한 경고인지는 아시겠죠. 바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입니다. 가장 가까운 동맹국에 25% 관세 폭탄을 날리고 “미국의 51번째 주가 돼라”며 캐나다를 조롱하는 이웃 나라 대통령이요.지난 2월 1일 트럼프 대통령은 캐나다를 멕시코·중국과 함께 첫 번째 관세 부과 대상국으로 콕 찍었죠. 이후 유예기간을 거쳐,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을 준수하지 않은 캐나다산 제품과 알루미늄·철강·자동차에 대해 25% 관세를 부과하는데요.이에 캐나다가 보인 첫 반응은 무엇보다 배신감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 믿었던 나라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았으니까요. 당시 캐나다 정부는 즉시 보복 관세를 발표했고요. 동시에 국민에게 호소합니다. ‘캐나다산을 사라(Buy Canadian)’고요.대대적인 애국 소비 물결이 일어납니다. 마트 선반에서 미국산 위스키·와인이 사라지고요(버드와이저 맥주는 캐나다 제조라서 살아남음). 진짜 캐나다산 제품 정보를 공유하는 페이스북 그룹, 제품 사진을 올리면 얼마만큼이 캐나다산인지를 확인하는 모바일앱까지 여러 개 생겨납니다. 캐나다인들은 미국 여행을 취소하고, 넷플릭스·아마존 구독을 끊고, 콜라 대신 아이스티를 마시기 시작했죠.이런 추세가 오래 갈 수 있을까요. 사실 캐나다 내에서도 다소 회의적이었습니다. 캐나다산이 대체로 더 비싸니까요. 그런데 애국 소비 열풍이 두 달 넘게 이어지는 중입니다. 그로 인한 변화도 조금씩 감지되는데요.최근 로이터는 캐나다 유통업체와 거래가 뚝 끊긴 미국 기저귀 제조업체 소식을 전했죠. 해당 기업 CEO는 “예상치 못한 역풍”이라며 당황합니다. 대신 유일한 캐나다산 기저귀 브랜드 어빙퍼스널케어는 주간 배송량이 4배로 급증했다죠. 캘리포니아의 감귤류 수출업체, 콤부차 브랜드도 캐나다 유통업체 주문이 대거 취소되고 있다며 울상입니다.특히 미국으로 여행 오는 캐나다인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캐나다 통계국에 따르면 2월 한 달간 자동차로 미국을 방문한 캐나다인 수(120만명)는 1년 전보다 23%나 감소했는데요. 미국여행협회는 캐나다 관광객이 10%만 줄어도 미국의 연간 관광 수입 21억 달러, 일자리 1만4000개가 사라진다고 경고한 바 있죠.오랜 관계는 끝났다캐나다인들은 배신감에 분노하고, 애국심으로 단결하고,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글로브앤메일 칼럼니스트는 이렇게 썼습니다. “땡큐, 트럼프 대통령: 당신은 캐나다를 통합했습니다”.하지만 이런 민족주의적 각성만으론 부족합니다. 미국 경제에 비해 캐나다는 너무 작습니다. 맞서 싸운다 한들 어차피 대단한 타격을 입힐 순 없고요. 무엇보다 수렁에 빠지기 시작한 캐나다 경제부터 구해야 합니다.수치상으로 캐나다는 맞은 만큼 돌려주고 있습니다. 미국산 제품 총 298억 달러어치에 25% 보복관세를 부과했으니까요. 하지만 두 나라는 덩치 차이가 워낙 크죠(미국 GDP는 캐나다의 13배). 똑같이 펀치를 한 대씩 주고받으면 캐나다가 훨씬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최근 발표된 캐나다 고용 지표는 이런 충격을 고스란히 드러냈는데요. 3월 한 달 동안 3만3000개의 일자리를 잃었다고 합니다. 2022년 이후 최악의 기록이죠. 트럼프 관세 위협으로 인해 불확실성이 고조되면서 기업들이 고용을 피하고 있단 분석인데요. CIBC 이코노미스트 앤드류 그랜텀은 “캐나다 노동시장의 바퀴가 빠지기 시작했을지 모른다”고 우려합니다. 캐나다 은행의 티프 맥클럼 총재 역시 미국 관세가 “불확실성만으로도 이미 피해를 주고 있다”고 말하고요.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은 3월에도 신규 채용이 22만8000명이나 늘어나는 ‘고용 서프라이즈’를 기록했죠.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라도 트럼프 대통령에 좀 더 매달려서 배려를 얻어내려 안간힘 써야 할까요. 물론 캐나다도 미국과의 소통(양국 정상 간의 통화 등)을 이어가곤 있는데요. 지난 두 달 동안 위기를 겪으면서 캐나다가 깨달은 건 이겁니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현실에 적응해 나가야 한다는 거죠. 트럼프 대통령에겐 관세가 한낱 협상 수단이 아니라, 관세 자체가 목적이니까요.그래서 지난달 말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경제통합을 심화시키고 긴밀한 안보와 군사협력을 기반으로 한 미국과의 오랜 관계는 끝났습니다. 우리는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극적으로 줄여야 합니다.”캐나다를 다시 위대하게미국은 캐나다 수출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절대적인 고객입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캐나다 경제는 세계 최대 경제국과의 긴밀한 관계 덕분에 안온함을 누려왔죠. 캐나다의 풍부한 석유·천연가스는 파이프라인을 타고 남쪽으로 흘러갔고요. 자동차 산업은 거의 한 몸처럼 통합돼 있었습니다. 자동차 한 대를 만들려면 부품들이 두 나라 국경을 7~8번씩 오가야 할 정도였죠.미국과 같은 혁신이 없다, 투자가 부족하다, 인재가 빠져나간다, 규제가 심하다…. 캐나다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고 있단 경고는 수년 전부터 이어졌는데요. 그래도 이민 덕분에 꾸준히 GDP는 성장했습니다. 미국보다 뛰어난 복지와 상대적으로 평등한 경제구조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고요. 무엇보다도 세계 최강국을 옆에 뒀으니 먹고살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았죠.그런데 너무 안이했던 걸까요. 어느덧 캐나다는 미국 없이 자립하기 어려운 경제구조가 되고 말았습니다. 캐나다 출신인 블랙베리 전 CEO 짐 발실리는 블룸버그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캐나다) 경제 구조가 러시아와 너무 비슷하지 않나요? 우린 그보다 훨씬 큰 잠재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가가치 낮은 산유국이 되어 다른 자원 몇 개와 농산물이나 팔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지난 2월 트럼프가 요란하게 관세 알람을 울렸고, 졸고 있던 캐나다 경제는 깨어났습니다. 이미 관세라는 불은 붙었고, 경제엔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상황. 캐나다 정치권 움직임이 갑자기 급박해졌는데요.그래서 캐나다는 분노하는 것 말고 또 무엇을 했느냐. 우선, 경제적 숙원사업 해결에 나섭니다. 바로 내부 무역장벽이죠.캐나다는 10개 주와 3개 준주로 구성된 연방국가입니다. 지역 간 제각각인 규제가 경제 효율성을 엄청나게 잡아먹는 구조였는데요. 예를 들어 퀘벡의 수제 양조장은 오타와 근처 레스토랑엔 맥주를 팔 수 없고요. 브리티시컬럼비아에서 트럭 운전사는 특정 트럭을 밤에만 운전할 수 있지만, 앨버타에선 낮에만 운전해야 하는 식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이런 내부 무역장벽이 평균 관세 21%에 해당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을 정도였죠.주 정부가 각각 자기 지역 산업 보호에 급급하다 보니 생긴 일인데요. 이걸 고치자는 얘기는 많았지만, 지역 간 합의는 요원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트럼프 관세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고, 그 어렵던 합의가 이제 이뤄지기 시작합니다. 지난달 마크 카니 총리가 “7월 1일까지 캐나다 내 자유무역을 위한 법안을 통과시키기로 각 지역 정부와 약속했다”고 밝힌 건데요. 그는 “이렇게 내부 무역장벽만 없애도 미국 관세 영향을 충분히 상쇄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니, 이 좋은 걸 왜 진작에 하지 않은 거죠?)외교적으로 캐나다는 미국 대신 유럽과 한층 가까워지기로 합니다. 마크 카니 총리가 취임하자마자 첫 해외 순방지로 택한 건 프랑스와 영국이었죠. 그는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캐나다는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과의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면서 은근히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공격합니다. 아울러 “캐나다는 비유럽 국가 중 가장 유럽적인 국가”라는 발언까지. 가뜩이나 ‘캐나다가 유럽연합(EU)에 가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투자를 촉진하는 데 방해되는 각종 세금은 없애고 있습니다. 신규주택 구매자에게 부과하던 세금을 폐지했고요.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자본이득세 인상안(50%→66.7%)도 취소합니다. “지금은 캐나다 경제를 건설할 때”라는 게 카니 총리가 밝힌 이유죠. 기업가, 투자자가 높은 세금을 피해 달아나지 않게 붙잡으려는 겁니다.각성의 물결은 죽은 줄 알았던 프로젝트도 다시 되살릴 기세입니다. 캐나다 동서를 가로지르는 석유 파이프라인 ‘에너지 이스트’ 건설 프로젝트가 그것인데요. 2017년 환경단체, 특히 퀘벡주 반대로 취소됐던 이 사업을 되살리자는 여론이 커집니다. 이젠 퀘벡에서조차 찬성 여론이 60%나 된다는데요. 현재 캐나다산 원유는 해안 항구로 가는 파이프라인이 매우 부족해서, 대부분이 미국에 싼값에 수출되거든요. 이 파이프라인이 건설되면 미국으로의 송유관은 잠그고, 대신 원유를 유조선에 싣고 대서양 너머로 수출할 수 있게 되는 거죠.성장과 자립이란 키워드가 4월 28일 조기 총선을 앞둔 캐나다를 뒤덮고 있습니다. 올해 초만 해도 여당 자유당이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위협 덕분에 다시 바람을 제대로 탔는데요. 누가 차기 총리가 되든 이제 캐나다 경제의 화두는 ‘관세 피하기’가 아니라 ‘관세 극복하기’가 될 겁니다. 애국적인 캐나다인들은 그 어려운 미션을 끝까지 달성할 수 있을까요. By.딥다이브아이스하키와 메이플시럽 말고는 하나로 묶는 것이 없던 나라. 캐나다 언론이 자조적으로 썼던 표현입니다. 그만큼 애국심이나 단결과는 거리가 먼 나라였단 뜻인데요. 트럼프 대통령이 이걸 완전히 바꿔놨죠. 관세 폭탄이 몰고 온 의외의 결과 아닌가 싶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캐나다인들이 팔꿈치를 높이 들어올리고 있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폭탄이 캐나다의 민족주의를 부활시켰죠. 미국산 제품을 사지 않고 미국으로 여행 가지 않는 보이콧 움직임이 두 달 넘게 이어집니다. -트럼프 관세는 이미 캐나다 경제를 침식시키고 있습니다. 일자리는 줄어들고 기업은 남쪽 나라로 빠져나가려 하죠. 이런 위기를 극복할 방법은 하나뿐. 미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를 극적으로 줄이는 겁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요.-비효율적인 캐나다 내부 무역장벽을 없애고, 투자를 가로막는 세금 인상도 취소했습니다. 논란 끝에 폐기됐던 석유 파이프라인 건설 프로젝트를 되살리자는 움직임도 나타나죠. 절박함이 캐나다를 다시 깨운 겁니다. *이 기사는 4월 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미국은 해방, 자유무역은 종말인가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해방의 날(liberation day)’이라고 부른 상호관세 부과의 날이 열렸고요. 그 충격은 상상 초월입니다. 관세율이 매우 높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계산방법이 말도 안 되게 엉터리이기도 하죠. 상호관세가 애초에 합리성을 상실한 정책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요.결국 트럼프 관세가 주는 메시지는 이겁니다. ‘미국 무역정책은 결국 트럼프 대통령 마음대로이다. 그 앞에 무릎을 꿇어라.’ 미국의 상호관세 충격파를 들여다봅니다.*이 기사는 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이 계산법 뭐죠?“그가 방금 세계 무역시스템에 핵폭탄을 투여했습니다.”2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발표 직후, 켄 로고프 전 IMF 수석경제학자는 이렇게 평했습니다. 이 상호관세 폭탄은 파괴적이기만 한 게 아닙니다. 황당하기까지 하죠. 계산 방식이 조잡하고 아무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도대체 대미 실질 관세율이 0%에 가까운 한국은 25%라는 말도 안 되게 높은 관세율을 부과받아야 할까요.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이 미국에 대해 무려 50%의 ‘관세율+비관세 장벽’을 매기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표를 들어 보였죠. 상대국이 미국에 부과하고 있는 관세율+비관세 장벽의 절반만 상대국에 부과하는 거라고 주장하는데요.50%의 정체를 알아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죠. 미국의 상품수지 적자와 수입액의 비율이었습니다. 2024년 미국이 한국에 대해 상품 수출입에서 본 적자(662억 달러)가 미국이 한국으로부터 수입한 금액(1330억 달러) 중 얼마를 차지하느냐를 계산한 겁니다. 그 비율은 49.8%, 반올림하면 딱 50%였습니다. 미국 경제분석국이 3월 6일 발표한 2024년 상품 수출입 통계 자료를 내려받아 아주 간단한 엑셀 작업만 하면 이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요. 이를 둘러싼 논란이 커지자, USTR이 뒤늦게 이 계산법이 맞다고 인정하는 자료를 냈죠.즉, 트럼프 대통령이 주장하는 50%는 한국이 미국에 부과한 ‘관세+비관세 장벽’과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고요. 표로 보여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이 비율에 따라 베트남은 대미 관세율이 90%라며, 46% 관세를 얻어맞았고요. 일본은 한국보다 조금 낮은 24%의 관세율이 책정됐습니다. 대신 미국의 상품수지가 2024년에 흑자를 기록한 나라들(즉 적자가 없는 국가들)-영국·호주·브라질·튀르키예 등엔 가장 낮은 10%를 부과했죠.눈에 띄는 건 서비스 수지는 계산에서 제외했단 겁니다. 미국이 지난해 한국에 대해 거둔 서비스 수지 흑자가 무려 107억 달러(약 15조7000억원)에 달하거든요(미국 경제분석국 통계 기준). 그런데 이건 쏙 빼놨습니다.경제적 근거? 당연히 없습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뉴스레터에서 “이 모든 것은 주니어 직원이 한두시간 동안 던져 넣어 만든 것 같다”고 한탄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죠. “그런데 그보다도 더 나쁠 수도 있어요. 트럼프 공식은 챗GPT나 다른 AI 모델에 관세 정책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하면 나오는 결과인 것 같습니다.” 이 추측이 맞다면 참으로 창의적인 AI 챗봇 활용법입니다.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수십 년 동안 외국의 “사기꾼”과 “청소부”들이 미국을 “약탈”, “강간”해 왔다고 연설했는데요. 미국이 한국에 수출한 것보다 한국이 미국에 많이 수출했으면 그게 약탈·강간인가요? 그만큼 미국 경제엔 한국산 제품(예-반도체)이 절실히 필요했다는 뜻 아닐까요? 미국이 필요하지만 제대로 생산해 내지 못하는 상품을 수출한 게 왜 약탈이죠?그나마 한국에 위안이 되는 건 이겁니다. 사전에 아무리 미국 정부와 긴밀히 소통했어도 25% 관세를 얻어맞는 건 피할 수 없었을 거란 점이죠.의도된 불확실성그럼 관세 전쟁의 이 엉터리 계산법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이 얻으려는 건 뭘까요. 파이낸셜타임스는 칼럼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해방의 날’의 즉각적인 효과는 혼란과 불확실성이고, 트럼프에게 이는 의도적인 것입니다. 혼란이 클수록 그가 통제력을 갖고 있다는 느낌이 커집니다.”관세율 기준이 주먹구구라는 건 다시 말하자면 제대로 된 기준이 없으니, 앞으로 얼마든지 숫자가 바뀔 수 있단 뜻입니다. 미국 정부의 호의만 얻는다면 말이죠.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은 이날 인터뷰에서 상대국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보복하려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보복하지 않는 한, 이번 발표는 (관세 인상의) 상한선입니다.”즉, 상황은 대단히 유동적입니다. 진짜 25% 관세를 부과할지, 깎아줄지, 아예 철회할지. 모든 게 트럼프 대통령이 결정하기에 달렸죠. 상대국을 떨게 만드는 지독한 불확실성과 트럼프 대통령의 완전한 통제력. 이번 관세 폭탄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얻어낸 것입니다.상대국이 협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건 이제부터인 셈인데요. 과연 우리는 무엇을 주고 낮은 관세율을 얻어낼 수 있을까요. 대기업의 미국 제조업에 대한 투자, 알래스카 LNG 개발 프로젝트 참여, 미국산 LNG 수입 확대 등등. 트럼프 정부가 ‘승리’라고 주장할 만한 뭔가를 내줘야 할 텐데. 정치적 혼란이 극에 달하고 리더십이 실종된 한국 정치가 그걸 할 수 있을까요.레이건의 경고당장은 어떻게 이 25% 관세율이란 발등의 불을 끌 수 있을지가 최대 관심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궁금합니다. 이 불길이 완전히 잡힐 수 있을까요. 혹시 더 번지면 어쩌죠. 세계 무역은 이전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요.트럼프 관세의 가장 치명적인 점은 자유무역 시대에 사실상 사망선고를 내리다시피 했단 점입니다. 자유무역을 통해 전 세계가 공동으로 번영할 수 있고, 미국이 이를 주도하는 나라라는 수십 년 된 믿음이 산산조각났죠. 세계 최대 경제대국이 자유무역 깃발을 내팽개쳤는데, 그 대열이 어떻게 유지될까요. 자유무역협정(FTA) 따위는 헌신짝처럼 언제든 버릴 수 있는데, 누가 믿을까요. 이코노미스트지는 “트럼프 대통령의 ‘해방의 날’은 미국이 세계 무역 질서를 완전히 포기하고 보호무역주의를 받아들인다는 예고”라며 “파멸의 날(Ruination Day)”이라 칭합니다.월스트리트저널은 “각 국가가 스스로를 위해 행동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봅니다. 무역의 각자도생 시대가 열리는 거죠. 어쩌면 각국 지도자들도 미국에 반격하라는 정치적 압력을 받을지 모릅니다. 만약 무역 상대국이 보복과 무역전쟁에 나선다면 그건 진짜 재앙이 될 겁니다. 1930년대 미국이‘스무트-홀리법’으로 관세를 대폭 인상한 뒤 일어났던 파괴적 결말이 재연되는 거죠.바로 이런 위험성을 43년 전인 1982년 지적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인데요. 그의 연설문 중 일부를 좀 길지만 인용하겠습니다.“시장을 지키기 위해 미국 국기를 게양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시 보호무역주의를 받아들이고 우리 시장을 세계 경쟁으로부터 보호한다고 합니다. 글쎄요. 미국이 마지막으로 그렇게 시도했을 때, 세계는 엄청난 경제적 곤경에 처했습니다. 세계 무역은 60%나 감소했고, 젊은 미국인들은 곧 미국 국기를 따라 2차 세계대전에 나갔습니다.저는 나이가 많고, 바라건대 그 불행한 시절의 교훈을 잊지 않을 만큼 현명합니다. 세상은 다시는 그런 악몽을 겪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무역 파트너와 같은 배를 타고 있습니다. 한 파트너가 배에 구멍을 뚫으면 다른 파트너가 배에 또 구멍을 뚫는 것이 합리적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고 말하며 강경책을 취하자고 합니다. 저는 그것을 멍청하다고 부릅니다. 우리는 구멍을 뚫어서는 안 됩니다. 우린 구멍을 막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 시장과 공정 무역이라는 배를 강화하여 세계를 경제 회복과 더 큰 정치적 안정으로 이끌어야 합니다.”레이건 전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롤모델’이자 공화당의 황금 시절을 상징하는 인물이죠. 그래서 지금 상황이 더 아이러니합니다. 자유무역 가치를 그토록 소중히 지켜온 미국의 보수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나요.관세 도박과 정치적 리스크물론 이제 와서 자유무역의 가치를 외쳐봤자 소용없을 듯하고요. 트럼프 대통령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결국 미국 내 여론입니다. 그의 보호무역 정책이 미국 유권자의 지지를 받느냐, 아니면 반발을 불러오느냐가 지금으로선 중요한 변수인데요.지난해 11월 1971년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이 펼쳤던 ‘10% 보편관세’ 정책을 소개해 드린 적 있죠( 참고). 당시엔 닉슨 행정부는 미국 달러화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협상 카드로 관세를 휘둘렸는데요. 겨우(?) 10% 관세율에도 무역 상대국들이 뒤집어졌고요. 헨리 키신저 국가 안보 보좌관도 닉슨 대통령을 말리며 정책 철회를 요구했죠. 그런데도 닉슨 대통령이 관세를 끝까지 밀어붙이게 만든 건 국민 여론이었습니다. 당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71%는 닉슨의 관세 정책을 지지했거든요. 닉슨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죠. “(관세는) 국내에서 인기가 너무 높아서, 무언가를 얻기 전엔 끝낼 수 없어요. 국민이 이 관세를 지지하고 있어요. 맙소사, 그냥 포기할 순 없죠.”아마 트럼프 대통령도 이런 반응을 기대했을 겁니다. 그의 사고방식은 여전히 1970년대 어딘가 머물러 있으니까요. 그러니 백악관 로즈가든에 전미자동차노조 조합원, 중장비 기술자, 트럭 운전사 등을 초청해 마치 축하파티 같은 발표회를 열었겠죠.그런데 분위기는 트럼프 대통령이 기대한 것과는 좀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실시한 CBS 여론조사에 따르면 1971년과 달리 2025년의 미국인들은 관세가 추가되는 걸 상당히 싫어합니다. 응답자의 72%는 단기적으로 새로운 관세가 소비자 가격을 끌어올릴 거라고 답했죠(5%는 가격이 내릴 것이다, 22%는 잘 모르겠다고 응답).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관세는 수출국이 낸다)과 달리, 미국 소비자들은 관세가 결국 소비자에 전가될 거라 우려하는 겁니다. 이제 미국 소비자들은 물가를 잡아야 할 대통령이 너무 관세에만 열을 올린다고 투덜대기 시작했습니다.아직 이 정도로는 트럼프 대통령의 신념이 흔들릴 것 같진 않습니다. ‘관세 인상→제조업 부활→다시 위대한 미국’이란 검증되지 않은 공식에 확신을 갖고 있으니까요. 얼마 전 그는 관세로 수입차 값이 급등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한 적 있죠. 폴 크루그먼은 이를 두고 ‘더닝 트루거 효과(=무식하면 용감하다)’라고 칭합니다.하지만 실제 관세 충격으로 미국 물가가 뛰고, 지지 기반인 블루칼라 서민층이 충격을 실감하게 된다면 그땐 어떨까요. 예일대 예산연구소는 올해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일련의 관세 조치가 미국 소비자물가를 2.3% 끌어올릴 거라고 예측하는데요. 가구당 연간 평균 3800달러(551만원)의 구매력이 깎이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타격은 저소득층일수록 클 거고요. 정치적으로 볼 땐 트럼프에게 이 관세는 도박에 가깝지 않은가 싶은데요.트럼프 대통령 말대로 관세 부과의 날은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로 오랫동안 기억될 겁니다. 2026년 중간선거, 2028년 대선에서도 이날을 되새김질하게 될 거고요. 트럼프 대통령이 역사에 한 획을 긋긴 그었습니다. By.딥다이브나스닥 -6%. 3일 미국 증시가 트럼프 관세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죠. 앞으로 트럼프 지지율은 어떻게 될지. 미국 내 여론의 향방이 궁금해집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트럼프 대통령이 기어이 관세 폭탄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관세율이 말도 안 되게 높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아무 근거가 없는 이상한 계산법을 써서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죠. 그냥 마음대로 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대로 자유무역 시대의 종말이 다가오는 걸까요. 만약 다른 무역 상대국이 보복 조치에 나서기라도 한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될지 모릅니다. 43년 전 레이건 전 대통령이 경고한 대로이죠.-잘못된 신념에 가득 찬 트럼프 대통령을 막아 세울 건 미국 내 여론뿐일지 모릅니다. 이번 상호관세가 트럼프엔 정치적 도박이 될 수 있단 분석도 나오죠. 원래 인플레이션을 잡지 못한 정권은 심판받는 법이니까요.*이 기사는 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스마트폰, 로봇청소기, 공기청정기, 밥솥…. 샤오미(小米)는 이런 걸 만드는 중국 기업입니다. 그리고 지난해 샤오미는 애플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죠. 전기자동차를 생산한 겁니다.그 후 1년. 샤오미의 질주는 놀랍습니다. 첫 전기차 ‘SU7’은 여전히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여전히 인기를 끌고요. 주가는 1년 만에 200% 치솟았습니다. ‘애플 짝퉁’이라 놀림 받았던 시절을 지우고 ‘테슬라 킬러’로 불리기 시작한 기업, 샤오미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시작이 좋다, 올해는 35만대“역사상 가장 강력한 연간 보고서”3월 18일 2024년 연간 실적을 소개하며 샤오미 창업자 레이쥔 회장이 쓴 표현이죠. 지난해 샤오미 그룹 매출과 순이익은 각각 35%나 증가했습니다. 세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13.8%로 3위였고요(애플 18.5%, 삼성 18.2%). 에어컨(50%), 세탁기(45%), 냉장고(30%) 같은 주요 가전제품 출하량도 지난해 급증했죠.실적의 하이라이트는 전기차. 1년 전인 지난해 3월 샤오미는 첫 전기세단 SU7을 출시했는데요. 2024년 인도량이 13만6854대. 당초 목표치였던 10만대를 훌쩍 넘어섰습니다. 이제 전기차가 샤오미 그룹 매출의 9%를 차지합니다. 공장을 24시간 가동하는데도 여전히 주문 뒤 차를 받기까지 최소 8개월이 걸릴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죠. 샤오미는 30만대였던 올해 전기차 판매 목표를 35만대로 높여 잡았습니다.물론 수익성을 따지면 전기차 사업은 아직 적자입니다. 지난해 연간으로 62억 위안(1조2500억원)의 손실을 기록했는데요. 초기 투자 비용 때문에 당분간 적자는 피할 수 없긴 합니다.샤오미는 전기차 사업 확장을 위해 최근 55억 달러(약 8조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발표했습니다. 전기차 사업의 성장 속도를 더 끌어올리겠단 건데요. 대규모 유상증자 소식에 치솟던 주가가 내리막으로 돌아섰고요. 7개월 만에 280%나 됐던 주가 상승률을 일부 반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씨티은행은 유상증자로 단기적으로 샤오미 주가가 압박받겠지만 장기적으론 회사 발전을 지원할 거라며 ‘매수’ 의견과 목표가격 73.5홍콩달러를 유지했죠.돈과 인력, 그리고 여유가 있었다전기차 시장에 진입하자마자 성공적으로 안착한 샤오미. 그러나 4년 전 샤오미가 전기차 산업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만 해도 모두가 의문을 가졌습니다. 도대체 왜?전기차 제조라는 게 초기 투자 비용만 수조 원 드는 사업이니 그만큼 리스크가 크고요. 무엇보다 ‘스마트폰 제조사가 무슨 전기차를 만들어?’라는 의문이 컸죠. 그런데도 왜 샤오미는 전기차에 뛰어들었냐. 살아남기 위해서였습니다.2021년 1월 15일 아침 출근길, 레이쥔 샤오미 회장은 전화를 받습니다. 미국 정부가 샤오미를 블랙리스트 기업 명단에 올렸다는 소식이었죠. 미국산 부품 수입이 금지된다면 스마트폰을 생산하지도 못하게 될 판이었습니다. 이사회가 긴급 소집됐고, 한 이사가 물었죠. “핸드폰을 더 이상 만들 수 없게 된다면 3만~4만명 직원을 어떻게 할 건가요?” 다른 이사는 이런 제안을 내놓습니다. “자동차 제조를 진지하게 고려해 볼까요?” 같은 해 3월 30일 기자회견을 연 레이쥔 회장은 전기차 사업 진출과 함께 10년간 100억 달러(약 14조7000억원) 투자를 선언합니다. 이를 결정한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죠. “우리에게 뭐가 있죠? 돈이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우리가 뛰어난 연구개발 인력과 최고의 스마트 생태계를 갖추고 있다는 겁니다. 또한 우리는 돈을 잃을 여유가 있습니다.”레이쥔은 이날 “이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주요 기업가적 프로젝트가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후 샤오미는 맹렬히 달렸습니다. 2021년 5월 미국의 블랙리스트에서 제외됐는데도 말이죠. 자동차 공장 설계에 반년, 건설에 15개월이 걸렸고요. 이후 승인·표준테스트·품질관리를 거쳐 마침내 2024년 3월 첫 전기 세단 SU7을 출시합니다. 맨땅에서 ‘요이땅’한 지 딱 3년 만에 전기차 양산에 성공한 겁니다. 가히 ‘차이나 스피드’라 할 만한 속도였죠. 애플이 못한 걸 하다샤오미의 첫 전기차 SU7은 테슬라 ‘모델3’의 대항마를 자처한 모델입니다. 제로백(시속 100㎞ 가속시간) 2.78초의 성능과 함께 휴대폰 화면을 터치스크린에 미러링하는 IT 기능이 눈에 띄죠. 전 BMW 디자이너 소여 리가 디자인한 외관은 포르셰 타이칸을 연상시킨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판매가는 21만5900~29만9900위안(4370만~6080만원). 완충 시 주행거리는 모델3보다 더 길지만 가격은 10% 정도 저렴합니다.SU7은 사전 주문을 시작한 지 단 4분 만에 1만대, 27분 만에 5만대 주문량을 기록하며 침체에 빠졌던 중국 순수전기차 시장에 돌풍을 일으킵니다. 그동안 샤오미가 쌓아왔던 공고한 팬덤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기록이었는데요.더 인상적인 건 실제 차량을 보거나 타본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처음엔 샤오미의 전기차 도전을 걱정스럽게 여겼다는 왕촨푸 BYD 회장은 지난해 4월 베이징모터쇼 샤오미 부스에서 레이쥔 회장을 만나 이렇게 말했죠. “쉽지 않아요, 쉽지 않아. 감탄했어, 감탄했어.”미국 포드의 짐 팔리 CEO 역시 높은 평가를 내렸습니다. 그는 한 팟캐스트에서 샤오미 SU7을 운전하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죠. “저는 경쟁사에 대해 얘기하길 좋아하지 않지만, 샤오미를 운전합니다. 저는 지금 6개월 동안 운전해 왔고, 이 차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예상을 뛰어넘은 샤오미의 선전을 두고, 많은 이들이 애플과 비교했습니다. 지난해 2월 애플은 10년 동안 100억 달러를 투자한 전기차 개발 프로젝트에서 철수했죠. 최근 뉴욕타임스 기사는 이렇게 분석합니다. “애플이 할 수 없었던 지점에서 샤오미가 성공할 수 있는 건 중국이 전기차 공급망을 얼마나 철저히 지배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중국은 전기차 제조를 마스터했습니다.”고객과 친구 되기애플과 비교되는 건 샤오미엔 익숙한 일입니다. 2011년 샤오미가 처음 출시한 스마트폰 ‘M1’은 아이폰을 모방했다는 평가를 받았죠. 스티브 잡스를 존경한다는 레이쥔 창업자는 첫 출시행사에서 청바지에 검은색 셔츠를 입고 등장했고요.강력한 팬덤의 미팬(米紛, 샤오미팬)이 있다는 점도 애플과 비슷한 점인데요. 다만 접근 방법은 애플과 다릅니다. 애플은 제품에 대한 완벽함을 추구함으로써 고객이 브랜드를 추종하게 만드는데요. 레이쥔 회장은 처음부터 사업의 목표를 ‘사용자와 친구가 되는 것’으로 잡았죠. 고객과 소통하고, 피드백을 제품 개선에 반영하고, 제품 개발에도 고객을 참여시키는 일에 진심인데요. ‘내가 키운 브랜드’라는 감정을 고객에 심어주는 것. 그게 곧 마케팅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팬이 많은 만큼 실수를 했을 땐 엄청난 비난과 조롱을 감수해야 하죠. 2015년 레이쥔 회장을 유명인사로 만든 ‘Are You OK’ 영상이 그런 사례라 할 수 있는데요. 그의 어눌한 영어 발음을 놀리는 영상이 비리비리(중국판 유튜브)에서 조회수가 폭발했고요. 이후 밈 콘텐츠가 쏟아지며 온라인을 휩씁니다.이럴 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레이쥔은 “모두가 행복하면 괜찮다”며 쿨하게 넘겼습니다. 샤오미는 아예 ‘Are You OK’라고 적힌 티셔츠를 공식사이트에서 판매하는 마케팅까지 벌였죠. 레이쥔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용자와 상호작용하는 채널이 많을수록 좋죠. 명백한 악의가 없는 한, 편하게 사용자들과 놀면 됩니다. 그들이 놀리는 건 사실 사랑입니다.”(레이쥔 저서 ‘샤오미 창립사고’ 인용)샤오미의 ‘사용자와 친구 되기’ 전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 레이쥔 회장 본인의 웨이보·더우인(중국 소셜미디어) 계정입니다. 본인이 직접 SNS를 관리한다는데요. 소소한 일상과 생각, 샤오미 관련 정보까지, 하루에도 게시물을 몇 개씩 올립니다. 그다지 화려하지도, 재미있지도 않은 평범한 게시물인데요. 사람들은 이에 열광합니다. 성실함과 솔직함이 매력이라는군요.지난해 SU7 출시 이후엔 특히 더우인(중국판 틱톡)에 SU7 관련 영상을 열심히 올렸는데요. 그 영상들이 엄청난 화제가 되면서, 이제 레이쥔은 웬만한 슈퍼스타 못잖은 인기를 끄는 CEO로 통합니다. 물론 이는 샤오미 전기차의 성공에도 영향을 미쳤고요.가성비가 곧 신뢰다샤오미는 처음부터 가성비로 승부한 기업입니다. 단순히 싼 게 아니라 ‘성능은 같은데 가격은 더 저렴한’ 또는 ‘같은 가격이면 성능이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하는데요. 많은 전략 중에 왜 하필 가성비였을까요. 더 많이 팔려고? 비싸게 팔 자신이 없어서? 레이쥔 회장 본인이 설명하는 이유는 좀 다른데요. 그가 샤오미식 사고방식을 설명하며 소개한 일화가 있습니다.중국 스마트폰 시장의 극심한 경쟁으로 샤오미가 위기에 처했던 2015년. 레이쥔 회장은 지인이 추천한 마케팅 전문가를 채용하려고 만났습니다. 자신의 화려한 성과를 늘어놓던 그 마케터는 자랑스럽게 말했죠. “저는 짚을 금괴로 팔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그 말에 판매 부진으로 고민하던 레이쥔 회장이 혹했을까요. 그 반대였습니다. 샤오미엔 필요 없는 사람이라며 채용하지 않았죠. “친구가 금값으로 짚을 팔았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를 친구라고 할 수 있나요? 나는 지푸라기를 금괴로 판매하는 마케터는 원하지 않습니다. 농부처럼 매일 밭에서 일하고, 수고와 땀으로 합당한 이익을 얻는 사람을 원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진정한 친구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레이쥔 저서 ‘샤오미 창립사고’ 인용)‘친구에게 제품을 판다’고 생각한다면 함부로 가격을 부풀리거나 품질을 속일 수가 없겠죠. 그래서 결국 답은 “감동적이고 가격도 적당한” 제품입니다. 가성비는 신뢰와 직결되는 법이죠. 고객이 가격을 보지 않고도 바로 살 수 있을 정도로 가격과 품질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는 것. 그게 바로 성공한 사업이라고 보는 겁니다. 가성비 전략은 대부분의 시장에서 통하는 법입니다. 억대 고급 전기차 시장에서도 말이죠. 지난달 샤오미는 고성능 전기차 ‘SU7 울트라’을 새롭게 출시했는데요. 제로백 1.98초, 최고속도 시속 350㎞로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4도어 양산차’라고 주장하는 모델입니다. 특히 인상적인 건 가격. 사전 판매 당시 공개했던 판매가는 81만4900위안(약 1억6500만원)이나 돼서 ‘샤오미가 변했다’는 네티즌 불만이 쏟아졌는데요.정작 2월 27일 열린 출시 행사에선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시작 가격이 52만9900위안(약 1억700만원)이었거든요. 좀더 저렴한 표준형 버전이 따로 있었던 거죠. 그 결과 1억원이 넘는 고가인데도 고객들이 “싸다”고 환호하며 단 2시간 만에 1만대가 주문됩니다. 연간 판매 목표치를 단숨에 채워버렸죠.1억원 넘는 차를 팔면서도 싸다는 소리를 듣다니, 놀라운 마케팅의 승리라는 평가가 나왔는데요. 어쨌거나 가성비 전략은 이번에도 통했습니다. 브랜드에 대한 신뢰가 밑바탕이 됐기에 가능한 일이죠.샤오미의 다음 목표는 전기 SUV 시장. 테슬라의 베스트셀링 모델인 ‘모델 Y’와 겨룰 신차 ‘YU7’를 올해 6~7월에 판매한단 계획인데요. 얼마 전 레이쥔 회장이 웨이보에 실제 차 사진을 올리면서 이미 중국 소비자들은 들썩거리고 있습니다. 점점 더 거세질 것만 같은 샤오미 전기차의 공세. 아직은 중국 내수시장 얘기라서 흥미롭기만 합니다. By.딥다이브가뜩이나 치열한 중국 전기차 시장의 싸움에 샤오미까지 가세하면서 점입가경이죠. 결국 상위 5개 업체만 살아남게 될 거란 전망도 나오는데요. 주가를 보면 이미 많은 이들이 샤오미는 승리자 대열에 설 거라고 보는 듯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중국 기업 샤오미가 역대 최고의 실적을 발표했습니다. 하이라이트는 전기차 사업. 지난해 3월 말 첫 차 출시 후, 13만7000대의 판매를 기록합니다. 올해는 35만대로 목표치를 상향했죠. -샤오미는 미국 제재를 피해 살아남기 위해 전기차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놀랍게도 불과 3년 만에 공장을 세우고 양산에 성공했죠. 전기세단 SU7과 고성능 전기차 SU7 울트라 모두 나오자마자 돌풍을 일으킵니다. -‘사용자와 친구 되기’를 추구하는 샤오미. 가성비는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전략입니다. 전기차 시장에서도 가성비 전략은 들어맞고 있는데요. 3년 동안은 해외가 아닌 중국 전기차 시장에만 집중한다고 했으니, 앞으로의 행보를 일단 지켜봐야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미국과 중국, 두 고래 싸움에 홍콩 고래 등이 터지려나요? 파나마 운하의 항구 운영권을 미국에 넘기기로 한 홍콩의 전설적 기업인 리카싱(李嘉誠) 전 CK허치슨 회장 얘기입니다. 예상치 못한 계약으로 허를 찔린 중국 측이 리카싱을 두고 ‘배신자’라며 분노하고 있기 때문인데요.리카싱은 자산을 사고파는 데 있어 완벽한 타이밍을 구사하며 세계적인 거부가 된 인물이죠. 그런 그가 민첩하게 움직였다는 건 지금이 바로 발을 빼야 할 타이밍이란 뜻일 텐데요. 97세 홍콩 부호 리카싱, 그가 펼쳐온 사업의 기술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3월 2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미국에 아첨한 배신자라고?“국가 이익을 무시하고 모든 중국인을 배신하고 팔아먹는 행위”.지난 13일 친중국 홍콩 매체 타쿵파오가 CK허치슨의 해외 항만 사업 매각을 두고 내놓은 논평입니다. 홍콩기업 CK허치슨이 파나마를 포함한 23개국 항구 지분을 미국 블랙록 컨소시엄에 팔기로 3월 4일 체결한 계약을 맹비난한 건데요.중국 공산당에서 홍콩 정책을 담당하는 기관(홍콩·마카오공작판공실)은 이 기사를 공식 홈페이지에 게시했습니다. 비공식적이지만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한 거죠. 이번 거래에 대해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분노했고, 중국 당국이 이 거래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는 외신 보도도 이어집니다. 중국 네티즌들은 ‘인민이 적’이라며 CK허치슨 창업자 리카싱 전 회장(2018년 은퇴, 현재는 수석고문)을 향해 분노를 쏟아붓고 있고요.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파나마 운하는 미·중 갈등의 상징으로 떠올랐고요. 그중에서도 CK허치슨이 파나마에서 운영 중인 2개의 항구가 핵심이었거든요(). 아마도 시진핑 주석은 이 항구 운영권을 미국과의 협상의 카드로 사용하려고 했을 텐데요. 리카싱 전 회장은 중국 정부에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를 미국 투자자에 쏙 넘겨버렸습니다. 이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운하를 탈환했다”며 환호했고요. 중국 당국은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습니다.물론 CK허치슨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이 아닌 상업적 거래라고 주장합니다. 기존 평가 가치의 두배 넘는 228억 달러(약 33조4400억원)에 팔게 됐으니, 성공적인 거래이기도 하죠.리카싱이 계약체결 전에 중국 정부에 물어보지 않은 이유는 뻔합니다. 물어봤으면 당연히 안 된다고 했을 테니까요. 만약 사전 승인을 구한다면, 그것도 사실 좀 이상했을 겁니다. ‘중국 공산당이 파나마 운하 항구 운영을 좌지우지한다’는 미국 측 주장을 인정하는 셈이 될 테니까요.이 계약의 완료일은 4월 2일. 중국 네티즌들은 ‘리카싱은 국익을 위해 거래를 포기하라’고 열을 올리는데요. 아마 뒤집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랬다간 트럼프 정부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요.결말은 두고 봐야겠지만, 파나마 운하를 둘러싼 미·중의 힘겨루기를 단박에 정리해 버리고 막대한 이익을 챙길 기회를 잡은 리카싱 전 회장. 그는 이전부터 절묘한 타이밍에 자산을 사고팔았습니다. 공장 견습공에서 세계적 거부로결핵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지켜봐야 했던 가난한 12살 소년.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건너간 리카싱은 생계를 위해 공장 견습생이 됩니다. 22살이던 1950년, 전 재산을 털어 플라스틱 꽃을 만드는 기업 ‘청쿵(광둥어로 양쯔강)’을 세웠죠. 사업은 성공적이었고요. 그렇게 공장을 확장해 나가던 리카싱은 깨닫게 됩니다. 홍콩에선 플라스틱을 만드는 것보단 땅을 사는 게 더 돈이 된다는 걸요.기회는 곧 찾아옵니다. 좌파 세력이 중국 본토 문화대혁명에 자극받은 홍콩 내 좌파세력이 폭동을 일으킨 건데요. 중국이 홍콩을 침략할 거라며 공포에 질린 투자자들이 홍콩에서 달아났고요. 이로 인해 홍콩 부동산 가격이 50%나 폭락합니다. 이걸 싹 사들인 게 바로 리카싱의 청쿵이었죠. 홍콩은 다시 평온을 찾았고 부동산 가치는 2년 만에 이전 수준을 회복합니다.그는 그 땅에 고층 아파트를 짓습니다. 문화대혁명을 피해 홍콩으로 흘러온 중국 본토인들이 살 집이 필요하다고 본 거죠. 특히 아파트를 선분양해서 개발비용 부담을 줄이는, 당시로선 혁신적인 방식을 택했는데요. 전략은 맞아떨어졌고 1972년 청쿵은 홍콩증권거래소에 상장한 대기업으로 성장합니다.사업의 가장 큰 전환점은 1979년, 그가 HSBC은행이 보유한 영국의 유서 깊은 무역회사 허치슨 왐포아 지분을 사들인 겁니다. 그것도 장부가치 절반 수준에 말이죠. 1841년 홍콩이 영국 식민지가 된 이래 처음으로 중국인이 영국 대기업을 소유하게 된 역사적인 거래였습니다. 리카싱의 명성은 홍콩을 뛰어넘어 세계로 퍼져나갔죠.당시 HSBC는 왜 허치슨 왐포아를 리카싱에게 팔았을까요. 여기서 리카싱의 정치적 수완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당시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 덩샤오핑은 중국 경제 개방을 모색하던 상황이었습니다. 1996년 앤서니 찬 미국 워싱턴대 교수가 쓴 전기 ‘리카싱, 홍콩의 억만장자’는 이렇게 전하죠. “은행의 최종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건 리카싱이 중국에서 한 특별한 접촉이었다.”덩샤오핑과 통한 리카싱리카싱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에 가장 먼저 호응한 홍콩 기업인이었습니다. 1980년대 상하이 컨테이너 터미널, 광저우-주하이 고속도로 등 인프라 건설을 맡았고요. 덩샤오핑은 1986년 리카싱을 만나 “조국에 대한 확고한 기여”를 칭찬하기도 했죠. 그 뒤를 이은 장쩌민 전 주석 역시 홍콩을 방문할 때마다 리카싱 소유 호텔에서 묵으면서 함께 아침 식사를 할 정도로 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중국 정치권과의 이런 관계 덕분에 그는 빠르게 성장하는 중국 경제에 올라탈 수 있었고요. 베이징의 거대한 상업지구 오리엔탈플라자를 포함한 주요 대도시 개발프로젝트에 청쿵그룹 로고가 붙습니다. 1990년대 리카싱은 유럽과 북미 지역의 에너지·통신 자산을 잇달아 인수하며 청쿵을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으로 키웠는데요. 여기서도 놀라운 사업적 감각을 발휘합니다. 과거 인터뷰(2018년 중국 매체 차이신)에서 그가 가장 큰 성공이었다고 자평한 래빗(Rabbit) 사례를 소개할게요.‘이제 이동통신 시대가 온다’고 본 리카싱은 1992년 영국 이동통신회사 래빗을 인수합니다. 하지만 기지국은 너무 적고 통신은 자꾸 끊겼고 사업은 내내 적자투성이였죠. 2년 만에 그는 래빗에서 철수하기로 했고, 마침 인수제안이 들어옵니다. 그가 매수자와 만나 ‘거래가 마무리될 때까지는 비공개로 하자’고 약속하고 헤어진 지 5분 뒤. 영국에 있는 래빗 대표가 그에게 전화로 알려옵니다. 방금 매수자 측에서 마치 승전국이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래빗 대표에 전화해서 “우리가 귀사를 인수할 테니 협조하세요”라고 통보해 왔다고요.리카싱은 이 거래가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곰곰이 생각했죠. ‘우리가 래빗을 계속 보유하면, 손실을 이익으로 바꿀 수 있을까? 그럴 만한 충분한 현금이 있을까?’ 10분 동안 계산한 끝에 그는 래빗을 팔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래빗은 오렌지(Orange)라는 새롭고 성공적인 이동통신사로 재탄생했고요. 닷컴버블이 절정이던 1999년 오렌지 매각으로 청쿵그룹이 거둔 이익은 무려 1180억 홍콩달러(약 22조원)에 달했습니다.슈퍼맨의 탈중국투자에 대한 안목과 통찰력으로 그에겐 ‘슈퍼맨’, ‘재신(財神)’이란 별명이 따라붙었습니다. 그는 2007년 중국 주식시장 붕괴와 2009년 초 홍콩 부동산가격 상승 등을 정확히 예측하기도 했죠.그는 중화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클 뿐 아니라, 가장 존경받는 부자로 꼽혔습니다. 특히 검소함으로 유명하죠. 수십 년 동안 50달러 세이코 시계를 착용했던 그가 10여년 전 바꾼 게 500달러짜리 시티즌 시계이고요. 회장 시절 받은 월급은 5000홍콩달러(약 94만원)로, 경비원보다 적었습니다. 또 1980년 설립한 리카싱 재단에 전 재산의 3분의 1을 쏟아붓고 있죠.하지만 이런 명성이 유독 중국에선 흔들리기 시작했는데요. 시진핑 국가주석이 취임한 2013년 이후의 일입니다.리카싱은 시진핑의 중국에서 발을 빼기 시작합니다. 중국 내 부동산 자산을 잇달아 팔아 치웠고요. 무엇보다 2015년 청쿵홀딩스와 허치슨왐포아를 합병하면서 새 지주회사 CK허치슨 등록지를 홍콩이 아닌 케이맨 제도로 이전합니다.리카싱의 애국심은 의심받았고 중국 내 여론이 돌아섭니다. 신화통신 산하 싱크탱크는 리카싱이 중국 정부의 지원을 무시하고 도망친다면서 “도덕적 반항 행위”라고 맹비난했죠. 물론 리카싱은 포트폴리오 재조정일 뿐이라고 주장했데요. 돌아온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당시 중국 인민일보가 그를 겨냥해 쓴 기사는 지금까지 회자됩니다. “그들을 붙잡아두는 것보다, 그들이 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낫다. 시간이 지나면 본토는 사업가 한두 명만 놓쳤을 뿐이라는 사실이 입증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잃게 될 것은 중국과 함께 성장한 시대 전체다.”하지만 그는 이후에도 꾸준히 중국과 홍콩 자산을 계속 줄여갔습니다. 2017년 역대 최고가격(402억 홍콩달러, 약 7조5700억원)에 팔린 홍콩의 73층 마천루 ‘더 센터(The Center)’가 상징적인 사례이죠. 참고로 매각 이후 홍콩 부동산 시장은 고꾸라졌고, 이제 그 건물은 반값에도 안 팔린다고 합니다.리카싱에 대한 중국 본토 여론이 한층 악화한 계기는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 리카싱은 당시 일방적으로 시위대를 비판하며 중국 정부 편을 들었던 다른 기업인들과는 달랐습니다. ‘홍콩의 한 시민 리카싱’ 명의로 주요 신문 1면에 의견광고를 냈죠. 내용은 폭력 반대. 그런데 누구의 폭력인지가 모호했습니다. 시위대인지, 아니면 진압 경찰 또는 중국 정부인지.아울러 그는 당국을 향해 젊은 시위자들에게 “관대함”을 보여달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는데요. 이런 애매한 태도가 중국 측의 화를 돋웠습니다. 중국 공산당 정법위원회는 “범죄를 조장한다”고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고요. 친중 세력은 그를 ‘바퀴벌레 왕’이라고 칭하는 밈까지 만들었죠.CK허치슨은 지난 10년간 꾸준히 ‘탈 중국’을 해왔고요. 9년 전 26%였던 홍콩·중국 매출 비중은 지난해 11%로 뚝 떨어졌습니다. 이제 대부분 사업이 중국 바깥에서 이뤄지죠. 사업적으로만 보면 리카싱이 파나마 항구에 미련을 둘 이유가 크진 않습니다.하지만 중국 정부는 압박과 공격을 쉽게 멈추지 않을 겁니다. 다른 기업들에도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는 게 필요하니까요. 기업인으로 75년을 보낸 리카싱도 이런 지정학적 갈등을 처음 겪어보지 않을까 싶은데요.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그의 베팅은 통할 수 있을까요. By.딥다이브아시아의 부자, 홍콩 기업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 리카싱. 97세라는 노령에도 여전히 뉴스의 중심에 있다는 게 대단한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리카싱 전 CK허치슨 회장을 향한 중국 내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파나마 운하에서 운영 중인 항구를 미국 블랙록 컨소시엄에 팔기로 한 계약 때문이죠. ‘국가 이익을 위해 거래를 중단하라’는 압박이 커집니다. -플라스틱 꽃 제조업체에서 홍콩의 부동산 재벌로, 다시 무역과 통신을 아우르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CK허치슨. 그 눈부신 성장을 이끈 건 사고파는 타이밍을 잡는 리카싱의 놀라운 사업 수완이었습니다. -덩샤오핑 시절엔 개혁개방정책의 지원군 역할도 했는데요. 하지만 시진핑 주석 취임 이후엔 빠르게 중국과 홍콩 자산 비중을 줄여가고 있습니다. 그의 탈중국 행보에 대한 중국의 시선이 곱지 않은 가운데, 이번 파나마 항구 거래가 이슈가 됐죠. 리카싱은 이런 압박을 견디고 거래를 성사시킬 수 있을까요. *이 기사는 3월 2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신흥국에서 정치 혼란이 경제를 망치는 건 한순간입니다. 외국인 투자자를 도망치게 만들어, 통화가치와 주가지수를 끌어내리기 때문이죠. 최근 이를 잘 보여준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튀르키예(터키)이죠.한동안 분위기 좋았던 튀르키예 금융시장이 지난주 야당 정치인 체포 소식에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이 나라 경제와 민주주의, 둘 다 상당한 후퇴가 아닐 수 없는데요. 오늘은 정치가 흔드는 튀르키예 경제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2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누가 체포됐길래-16.57%. 지난주(3월 17~21일) 튀르키예 증시의 BIST 100지수는 폭락했습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17년 만에 최악의 기록이었죠. 이스탄불 증권거래소 상장사의 총 시가총액 중 약 666억 달러(98조원)가 증발했습니다.튀르키예 리라화 가치는 급락했습니다. 19일 아침 환율은 달러당 36.50리라에서 단숨에 41.64리라까지 치솟았는데요(통화가치는 하락). 달러/리라 환율이 40리라를 넘은 게 역사상 처음이었다고 하죠. 환율 방어를 위해 튀르키예 중앙은행은 보유한 달러를 대거 팔아치웠고요. 이렇게 사흘 동안 소진된 외화보유액이 무려 230억~250억 달러(33.7조~36.7조원)에 달할 걸로 추정됩니다.무슨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튀르키예 금융시장을 쑥대밭으로 만든 사건은 무엇일까요. 19일 이른 아침 나온 에크렘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의 체포 소식이었습니다. 검찰은 그에게 부패와 테러 조직과의 연계 혐의를 씌웠는데요. 이마모을루가 누구냐. 튀르키예를 22년 동안 통치 중(앞의 11년은 총리, 뒤의 11년은 대통령)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최대 정적입니다.법무부가 “사법부는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는다”며 대통령과의 연관성을 부인했지만 그걸 믿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이마모을루는 차기 대선에서 에르도안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적수로 꼽혔습니다. 지난해 봄, 여당에 충격적인 패배를 안기며 재선에 성공한 이마모을루는 놀라운 상승세를 타고 있었습니다. 곧 야당의 차기 대선 주자로 선출될 예정이었죠. 그런데 그 며칠 전 검찰이 갑자기 이마모을루를 체포한 겁니다.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오면서 튀르키예 전역에서 전례 없는 시위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정부가 부랴부랴 이스탄불 지역의 집회와 여행을 금지했지만, 소용없죠. 야당 공화인민당(CHP)은 이마모을루 체포에도 불구하고, 예정된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투표를 23일 강행했는데요. 당원이 아닌 사람들까지 연대를 표시하러 투표에 나서면서 무려 1485만 표가 몰렸죠(당원 165만명, 비당원 1320만명). 이거 분위기가 심상찮습니다.온탕 냉탕 오가는 튀르키예 경제다시 금융시장으로 돌아가, 왜 투자자들은 이 정치적 뉴스에 깜짝 놀라 튀르키예 주식을 내던진 걸까요. 투자자들이 특별히 야당을 지지해선 아니고요. 단순히 사회가 혼란해져서만도 아닙니다. 잠시 잊고 있었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이 정부가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경제는 얼마든지 내팽개칠 수 있단 사실 말이죠.물론 정치가 경제를 뒤흔드는 거야, 어느 나라에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튀르키예는 그 정도가 유독 극심한 나라이죠.불과 2년, 전 튀르키예 경제는 통제 불능으로 치달았습니다. 경기 과열로 물가가 급등하는데,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급격히 떨어뜨리며(19→8.5%) 되레 인플레이션을 부채질했죠. 모든 전문가가 “위기를 악화시킨다”고 한목소리로 외쳤지만, 대선을 앞둔 에르도안 대통령은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선거 승리를 위해 경제에 저렴한 돈을 쏟아부으려 중앙은행을 동원한 거죠. 그는 “물가 상승은 고금리 탓”이란 상식에 어긋나는 주장까지 펼쳤는데요.이런 이단적인 통화정책 때문에 리라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습니다. 외환시장 개입으로 인해 외화보유고는 빠르게 비어갔고요. 전 세계가 튀르키예 경제가 저러다 곧 망하겠다며 손가락질했죠.2023년 5월, 에르도안 대통령은 극적으로 재선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메릴린치 이코노미스트 출신인 메흐메트 심셰크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했죠. 그의 지휘 아래 튀르키예 경제는 완전한 U턴을 시작합니다. 줄곧 가속페달만 밟아 과열됐던 튀르키예 경제가 브레이크를 밟으며 속도 조절에 나선 거죠. 긴축을 위해 기준금리는 숨 가쁘게 인상됐고요. 8.5%였던 기준금리가 2024년 3월엔 50%가 됩니다.인플레이션과 싸우기 위한 고금리 정책엔 상당한 고통이 따르는 법입니다. 특히 빚으로 버텨가던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은 치솟는 이자를 감당할 길 없어 절망했죠. 고삐 풀린 물가가 쉽사리 잡히지 않으면서, 2024년 5월엔 물가상승률이 연 75%를 찍었고요. 못 살겠다는 한탄이 절로 터져 나왔는데요.그 험난한 고비를 넘기고 이제, 뼈를 깎는 긴축이 서서히 효과를 발휘하는 중입니다. 우선 40% 넘는 높은 이자율이 채권시장으로 투자자들을 다시 끌어들였고요. 리라화 가치 안정에 베팅한 투자자들이 저렴해진 튀르키예 주식 매수에 나섭니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다시 튀르키예 자산이 인기를 끌게 됐죠. 외국인 투자자들은 2023년 이후 튀르키예 주식과 채권을 약 300억 달러어치 사들였습니다. 국내에서도 달러만 찾던 예금자들이 높은 이자율로 인해 리라화 저축으로 관심을 다시 돌리게 됩니다. 무엇보다 튀르키예 경제가 다시 정상화로 가고 있다는 믿음이 국내외 투자자들 사이에 퍼져나갔죠.특히 다행인 건 물가가 조금씩 잡히는 추세라는 점입니다. 2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연 39%. 20개월 만에 처음으로 40% 미만으로 떨어졌죠. 이대로 간다면 연말이면 소비자물가상승률 20%대도 기대할 만합니다.때마침 운 좋게도 국제 정세는 튀르키예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일단 에르도안 대통령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소울메이트’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이고요. 이웃 나라 시리아에선 튀르키예가 지원한 반군 집단이 새 정부를 이끌게 됐습니다. 또 유럽 나라들은 나토(NATO)에서 두 번째로 큰 군대를 가진 튀르키예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죠. 높아진 지정학적 위상은 경제에도 긍정적입니다.희망적 사인은 여럿 나왔습니다. 중앙은행은 지난해 12월부터 세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인하했고요(50→42.5%). 외화보유액은 2023년 중반 약 570억 달러에서 거의 1000억 달러로 불어났습니다. 무엇보다 다음 대선은 2028년으로, 아직 한참 남아있죠. 올해는 정치 걱정은 잠시 접어줘도 되겠구나, 투자자들은 그렇게 얼마 전까진 안심하고 있었습니다.초조한 정부의 급발진하지만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이었습니다. 방심했던 투자자들이 이번 이마모을루 사태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았는데요.71세인 에르도안 대통령은 헌법에 따라 대통령 3연임이 막혀있습니다. 이 제한을 피하는 방법은 두 가지. 헌법을 바꾸거나, 조기 대선을 치르는 거죠. 5년 임기를 다 채우지 않은 채 선거를 하면, 에르도안 대통령이 다시 출마할 수 있다는군요. 즉, 그의 장기 집권을 위해선 2026~2027년으로 대선을 당길 수 있는 상황입니다.그런데 국민들이 오랜 인플레이션에 지치면서 정부 지지율이 고꾸라졌습니다. 원래 에르도안은 청년·엘리트층엔 별로 인기가 없고, 이슬람주의적인 보수층과 저소득층 지지가 탄탄했는데요. 치솟는 물가로 저소득층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고요. 또 정부가 지난 2년여 동안 시리아 난민 수백만 명을 받아들이면서 민족주의적 반감도 커졌습니다.특히 지난해 지방선거 결과는 충격적이었죠. 정부가 온갖 수단을 동원했는데도 여당은 참패했고요. 큰 표차로 이스탄불 시장 재선에 성공한 이마모을루가 단숨에 에르도안의 대항마로 떠올랐습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당장 대선을 치르는 경우 에르도안은 야당 경쟁자에 패할 게 뻔한 상황입니다.에르도안 대통령은 이 상황을 오래 참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초조했단 뜻이겠죠. 대통령이 장악한 사법부가 기민하게 움직였습니다. 이마모을루에 씌워진 혐의는 뇌물 수수 등 부패와 테러 조직 지원. 유죄 판결이 나면 당연히 대선 출마는 불가능합니다. 또 검찰 체포 하루 전인 18일 이스탄불대학은 갑자기 이마모을루의 학위를 박탈했죠. 튀르키예에서 대선에 출마하려면 대학 학위가 있어야 하거든요.이런 기습에 전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튀르키예는 권위주의적 정부이긴 하지만, 그래도 멀쩡한 야당이 있고 선거다운 선거를 치르는 나라였거든요. 그런데 야당 대선후보 될 사람을 이런 식으로 제거해서 선거를 있으나 마나 한 쇼로 만든다? 이건 선을 분명히 넘은 겁니다. 미국 외교 매거진 포린어페어스(Foreign Affairs)는 이를 두고 “튀르키예는 이제 완전한 독재국가가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에르도안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길을 따르고 있단 거죠.에르도안은 푸틴이 되려나“다시 정치가 경제보다 우선시됐습니다.” 튀르키예 베이코즈대학교 에브렌 볼귄 교수는 이렇게 한탄합니다. 정치가 물을 흐리면서 ‘튀르키예 경제는 인플레이션과 싸움에서 점진적인 성과를 낼 것’이란 투자자 믿음이 와장창 깨졌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튀르키예에선 환율이 10% 상승하면 연말 인플레이션이 약 5%포인트 추가됩니다. 환율이 오르면서 인플레이션에 맞서는 프로그램이 의미를 잃고 있습니다.”2년간 인플레이션과의 힘겨운 싸움 끝에 얻어낸 성과가 정치의 물결에 휩쓸려 버렸습니다. 외국인 투자자가 떠난다면 리라화 통화가치는 급락하고(환율은 상승), 그럼 수입 물가가 뛰면서 물가상승률이 다시 치솟기 마련이죠. 이마모을루 체포 직후, 미국 투자은행 JP모건은 튀르키예의 올해 말 물가상승률 예측치를 27.2%에서 29.5%로 높였습니다. 애써 채워놓은 외화보유고 곳간도 환율 방어하느라 비어갑니다. 그동안의 노력이 허무하기까지 한데요. 물론 심셰크 재무장관은 “우리가 시행하는 경제 프로그램은 의지를 가지고 계속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조기대선이 현실화한다면 국내에선 그다지 인기 없는 고금리 정책은 언제 팽당할지 모릅니다.그럼 궁금합니다. 비록 경제는 대혼돈이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대로 경쟁자를 물리치고 장기 집권에 성공하며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길을 걷게 될까요?글쎄요. 에르도안 대통령 본인의 과거를 돌아보면 꼭 그렇진 않을지 모릅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1997년 이스탄불 시장 재직 중 종교적인 시를 낭송했다가 ‘종교적 증오를 선동했다’는 혐의로 감옥에 갇혔는데요. 이로 인해 시장직에선 쫓겨났지만, 인지도는 급상승했고요. 이후 한층 큰 정치인으로 성장해 총리까지 됐습니다. 그때의 에로도안처럼 이마모을루 역시 지금의 탄압을 딛고 다시 일어서게 되는 건 아닐까요.그리고 무엇보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명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튀르키예는 러시아가 아니란 점이죠. 풍부한 자원이 받쳐주는 러시아 경제와 달리, 튀르키예 경제엔 외국인 투자가 중요합니다. 독재체제로 외국인 투자자가 도망가도 러시아 경제는 살아남지만, 튀르키예는 그렇지 못하죠. 금융시장에서 나타나는 지금의 혼돈이 증폭된다면, 결국 그의 권력까지 뒤흔드는 지진이 될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는 기어이 이 길로 가야 할까요. By.딥다이브올해 연말이면 튀르키예가 아르헨티나를 제치고 OECD 인플레이션 1위 국가가 될 거라고 하죠. 외국인 투자자를 더 끌어들이고 통화가치를 높여서, 물가를 끌어내리는 일에 온 힘을 쏟아도 모자랄 판인데. 정작 국가 지도자는 장기 집권 플랜 짜기 바빠 경제는 뒷전이니. 남의 나라이지만 걱정스럽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지난주 튀르키예 금융시장이 폭격을 맞았습니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적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이 전격 체포된 여파입니다. 리라화 환율은 한때 달러당 40리라 선까지 넘어섰고, 중앙은행은 200억 달러 넘는 외화보유액을 환율 방어에 쏟아부었습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미 비상식적인 통화정책으로 경제를 망친 전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2년은 다시 경제가 정상화하며 서서히 살아나는 듯했는데요. 이제 좀 투자할 만하다고 안심했던 투자자들이 이번 사태로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튀르키예는 이대로 완전한 독재국가가 되는 걸까요. 이 나라 민주주의와 경제, 모두의 큰 전환점입니다. *이 기사는 2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우리가 5분 동안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요. 노래 한 곡 듣기, 책 2~3쪽 읽기, 라면 끓이기. 그리고 어쩌면 전기차 충전하기?중국 전기차 기업 BYD(비야디)가 ‘5분 충전으로 400㎞ 주행’이 가능한 초고속 충전기술을 공개했죠. 전기차 충전이 주유만큼 빨라졌다는 소식에 전 세계가 깜짝 놀랐는데요. 이거 도대체 어떻게 한 걸까요. 만약 이게 사실이면 업계 판도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갑자기 현실로 다가온 미래 기술 ‘5분 충전’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2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메가와트가 왜 나와?‘1초에 2㎞’, ‘5분에 400㎞’. 믿기지 않는 수치가 중국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했습니다. BYD가 17일 저녁 깜짝 공개한 ‘슈퍼 e플랫폼 기술’의 놀라운 충전 속도를 보여주는 수치입니다. 이 자리에서 왕촨푸 BYD 회장은 이렇게 말했죠. “전기차 충전 불안을 완전히 해결하는 궁극적인 답은 전기차의 충전 시간을 휘발유 차 주유 시간 수준으로 짧게 만드는 것, 즉 에너지 보충 속도 면에서 ‘연료와 전기가 같은 속도’를 실현하는 것입니다.”이런 초고속 충전을 가능하게 만드는 건 3고-고전압, 고전류, 고전력-입니다. 잠시 물리학 얘기를 하자면 ‘전력=전압X전류’이죠. 그리고 출력 전력이 높을수록 충전 시간은 줄어듭니다. 즉, 전압 또는 전류를 높이면 그만큼 충전 시간을 줄일 수 있단 뜻인데요.현대자동차의 초급속 충전 시스템은 ‘전압 800V, 최대 전력 350㎾’이죠. 5분 충전으로 100㎞ 주행이 가능하고, 배터리를 10%→70%로 충전하는 데는 18분 걸립니다. 테슬라의 최신 V4 슈퍼차저는 ‘400~1000V, 최대 325㎾’를 지원하고요. 향후 최대 전력을 500㎾로 높인다는 계획입니다.그런데 BYD는? ‘최대 출력 전압 1000V, 전류 1000A, 전력 1000㎾’을 달성했다고 주장합니다. 1000㎾=1㎿여서, BYD는 이를 ‘메가와트 플래시 충전’이라고 부르죠.뭐? 1㎿? 모두의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수치인데요. 놀라움과 함께 이런 말이 바로 튀어나오죠. 그게 가능해?배터리 수명 괜찮습니까전압을 높이고 전류를 강하게 투입하면 충전이 빨리 되는 거야 당연하죠. 그럼, 왜 이전까진 그걸 못했느냐. 크게 두 가지 이유입니다.①전류를 아주 빨리 강하게 투입해도, 지금 상용화된 소재로는 배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이 그 속도를 미처 따라가질 못합니다. 전류를 다 받아들일 수 없으니, 충전이 그만큼 빨리 되질 않죠.(소재의 한계)②이렇게 전류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저항이 생기고, 그럼 배터리가 과열됩니다. 배터리 수명이 단축될 뿐 아니라, 자칫 열폭주 같은 큰 사고로 이어지죠.(수명과 안전성 문제)먹는 것에 비유하자면, 한꺼번에 많은 음식을 입에 쑤셔 넣는 것과 비슷하달까요. 아무리 많이 집어넣어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뱉어내거나, 소화를 시키지 못하고 배탈이 나게 됩니다. 그러니 할 수가 없었던 거죠.그런데 BYD는 이걸 했다고 합니다. 당장 다음 달에 1000㎾ 충전이 가능한 신차 2개 모델을 출시한다며 사전 판매에 돌입했죠. 차량을 테스트해 본 결과 5분 충전에 실제로 407㎞ 주행거리가 나왔다며 영상도 공개했고요. 이런 BYD 발표를 믿는다면, 그게 의미하는 바는 이겁니다. 기존 소재의 한계를 뛰어넘은 한층 업그레이드된 전기차 배터리가 등장했습니다.BYD는 배터리부터 완성차까지 모두 직접 만드는 회사이죠. 이날 신차에 들어갈 새로운 초고속 충전용 배터리에 대한 내용도 살짝 공개했는데요. 일단 리튬이온이 초고속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새롭게 설계한 전해액과 분리막, 전극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화학반응 속도가 빨라지면서 내부저항을 50% 줄였다는 주장이죠. 또 자가치유 SEI 필름을 이용해 고온에서의 배터리 수명을 35% 증가시켰다고도 합니다. 원래 배터리 수명이 줄고, 화재로까지 이어지는 건 전극 표면에 쌓인 SEI 막이 고온에 손상되는 탓이 큰데요. 이 손상을 최소화했단 뜻이죠.전기차 대중화의 퍼즐이 맞춰진다물론 전기차 제조사가 공식적으로 밝히는 충전 속도는 약간 과장된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충전했을 때도 그 정도 속도가 나오는지는 솔직히 두고 봐야 하죠.또 ‘5분 충전’ 적용 모델은 아직 BYD가 중국에서 판매할 2개 모델(한L, 탕L)뿐이고요. 그나마 BYD가 앞으로 중국 전역에 설치할 충전소 4000곳에서만 이 정도 속도가 가능합니다. 참고로 중국의 전체 전기차 충전소는 320만 개에 달하죠.BYD가 진짜 초고속 충전소를 4000개나 지을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도 제기됩니다. 돈 때문은 아니고요(BYD는 이달 초 유상증자로 약 8조원을 조달했습니다). 기존 전력망에 상당한 무리를 줄 수 있어서입니다. 메가와트급으로 충전하는 전기차가 한꺼번에 몰리기라도 하면 도시 전력망이 과부하가 걸릴 판이죠. BYD가 초고속 충전소에 에너지저장장치(ESS)를 설치하려는 이유입니다.하지만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잠시 접어두고 생각해 보면 ‘5분 충전’이 전기차의 미래임은 분명합니다. 내연기관차는 5분만 주유하면 600㎞를 가잖아요. 전기차 충전 속도가 이와 별 차이 없게 된다면 전기차를 사야 할 이유는 훨씬 늘어납니다. 유지비는 원래부터 전기차가 더 저렴하고, 차값은 아직 비싸지만 꾸준히 떨어지는 추세니까요. 전기차가 내연기관차와 본격적으로 경쟁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중국의 자동차 분석가 레이 싱은 블룸버그에 “BYD가 게임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고 말하죠.게임체인저는 누가 될까‘주행거리 염려증’은 전기차 대중화 시대를 열기 위해 꼭 해결해야 할 문제이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크게 세 갈래로 진행돼 왔는데요.①완전 충전으로 한 번에 갈 수 있는 주행거리 늘리기=배터리 성능 개선 & 차세대 배터리 개발(예-전고체 배터리)②초고속 충전=더 빠른 급속 충전 기술 개발+충전망 확대③배터리 교환 네트워크=배터리를 빠르게 갈아 끼우는 배터리 교환 시스템 확장그동안엔 1번, 즉 더 한번 충전으로 멀리 가는 성능 좋은 배터리를 만드는 데 전기차와 배터리 업계가 가장 열을 올렸는데요. BYD ‘5분 충전’의 등장은 1번 못지않게 2번이 게임체인저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물론 그 둘이 병행해 나가겠지만, 더 빠른 초고속 충전을 위한 전기차 업계의 경쟁이 한층 치열해지겠죠. 그동안은 현대차의 ‘18분 충전’이 가장 빠른 축에 속했는데, 이젠 10분도 아니고 5분 충전이 도달해야 할 목표점으로 설정되었으니까요.그럼 3번은 어떨까요. 배터리 교환은 글로벌 전기차 업계의 대세는 아니지만, 중국을 중심으로 시장이 커져 왔습니다. 특히 중국 전기차 스타트업 니오(NIO)는 3172개의 배터리 교환소를 설치하고 시장을 개척했는데요. 이 교환소에 차량이 진입하면 운전자가 건드릴 필요 없이 자동으로 로봇팔이 나와서 3분 만에 배터리를 뚝딱 교체해주죠. 이용료(월 14만원)가 들지만, 지금으로선 가장 빠른 에너지 보충 방법입니다. 전기차용 배터리 세계 1위 기업인 중국 CATL 역시 배터리 교환 사업 투자를 늘려왔습니다. CATL은 매우 다양한 자동차 브랜드에 납품하는 배터리 전문기업인데요. 만약 그 많은 CALT 배터리 규격이 통일을 이룰 수 있다면, 즉 차종 상관없이 CATL 배터리는 모두 CATL의 배터리 교환소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면 엄청난 사업이 되겠죠. CATL은 100초 만에 배터리를 갈아 끼울 수 있는 교환소를 중국 전역에 3만개 깔겠다는 계획입니다.그리고 지난 17일엔 이 두 기업이 손을 잡았습니다. CATL이 니오와 전략적 협업을 맺고 약 5000억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한 건데요. 이 파격적인 제휴 소식에 시장이 환호하면서 홍콩에 상장된 니오 주가가 한때 16% 상승했죠. 그런데 잠시 뒤, 같은 날 저녁 나온 BYD 초고속 충전 기술 발표가 김을 빠지게 만들었습니다.교환소에서 3분 이내에 배터리 갈아 끼우기 VS. 충전기에서 5분 만에 초고속 충전하기. 과연 전기차 운전자들은 무엇을 선택할까요. 두 진영의 선두에 있는 중국 배터리 강자들(CATL과 BYD)의 싸움이 흥미진진한데요. 물론 본격적인 경쟁은 이제 막 시작됐으니, 결과는 한참 더 두고 봐야 합니다. 판을 뒤집는 게임체인저로 올라서기 위한 이 치열한 다툼에서 한국 자동차 기업과 2차전지 기업들이 선전하길 응원해봅니다. By.딥다이브BYD의 신기술도 놀랍지만, BYD 발표 하나에 전 세계가 들썩이는 이 영향력도 놀랍습니다. 몇년 전과 비교하면 BYD 위상이 확연히 달라졌음을 실감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전기차 충전은 얼마나 더 빨라질 수 있을까요. BYD는 1초에 2㎞, 5분에 400㎞ 주행거리를 충전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선보였습니다. 고전압, 고전류, 고전력으로 이전엔 없던 메가와트 충전 시대를 열었습니다. -리튬이온배터리는 소재 한계로 인해 충전속도를 끌어올리기 어려웠습니다. BYD는 전해액, 분리막, 전극 등 모든 배터리 소재를 개선해 5분 초고속 충전을 가능케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휘발유차 주유 시간과 전기차 충전 시간이 같아지면, 게임은 또 다른 차원이 되지 않을까요. 전기차 대중화로 가는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선두에 서기 위한 업계의 경쟁은 더 치열해질 겁니다.*배터리 기술 관련해선 김상옥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이 도움말을 주셨습니다.*이 기사는 2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5㎏당 4077엔(3만9800원). 17일 일본 농림수산성이 발표한 3월 첫째 주 평균 쌀값입니다. 한국과 비교하면 2.5배가 넘는 수준이죠. 1년 전보다 무려 99.3% 뛴 쌀값으로 요즘 일본이 난리입니다. 급기야 일본 정부는 사상 처음으로 쌀 부족을 이유로 대규모 비축미를 방출에 나섰는데요. 일본은 왜 이리 쌀이 부족해졌을까요. 이상 고온 탓이다, 외국인 관광객이 몰려들어서다, 투기세력이 쌀을 빼돌렸다 등등. 그동안 다양한 요인이 제기되지만, 점점 결론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쌀 생산능력 자체가 쪼그라든 게 문제라는 거죠. ‘쌀은 남아도는 게 문제’라는 기존 상식을 깨는 일본의 쌀 부족 현상을 들여다봅니다.*이 기사는 1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쌀값이 미쳤다주식인 쌀을 살 수 없게 된다는 건 어떤 일일까요. 지난해 여름 일본 소비자들은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렸습니다. 슈퍼마켓 매대에서 쌀을 찾기 어렵게 되고, 있더라도 ‘1가족 1봉지로 구매를 제한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던 거죠. 지난해 1~6월 5㎏에 2000~2200엔 수준에 머물던 일본 쌀 소매가격은 8월엔 단숨에 2600엔을 돌파합니다.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 건 2023년의 폭염. 특히 인기 품종인 고시히카리가 유독 더위에 약한 탓에 수확량이 급감했습니다. 여론이 들끓었지만, 당시 일본 농림수산성은 이렇게 장담했죠. “햅쌀이 나오면 품절 현상에서 회복될 겁니다.”그런데 웬걸. 햅쌀이 나온 2024년 가을에도 쌀값은 점점 더 오르기만 합니다. 5㎏ 평균가격은 지난해 9월 3000엔을 넘더니 올 1월엔 3600엔을 돌파했고요. 이젠 처음으로 4000엔 선마저 돌파했는데요. 슈퍼마켓에선 5㎏ 한봉지에 5000엔 넘는 가격표도 보입니다. 미친 쌀값이란 말이 절로 나오죠. 일본 언론은 이 쌀값 폭등 사태를 ‘레이와(令和, 일본의 연호)의 쌀소동’이라 칭하는데요. 1918년 쌀값이 300% 넘게 폭등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났던 역사적인 ‘쌀소동’ 사건에 비유한 겁니다.쌀값 상승은 외식·식품 물가를 줄줄이 끌어올립니다. 스키야(덮밥)와 하마스시(초밥) 같은 외식 체인이 지난해 말 줄줄이 메뉴 가격을 올렸고요. 밥 양을 줄이거나, 공짜로 주던 밥을 유료화하는 식당도 늘었죠. 세븐일레븐 편의점은 주먹밥과 도시락 가격을 인상했고요. 쌀로 만드는 쌀과자·미림·사케 가격도 덩달아 오릅니다.일본 시장조사업체 제국데이터뱅크가 최근 발표한 ‘2025년 1월 카레라이스 물가’는 396엔(약 3850원). 카레라이스 1인분을 만드는 데 필요한 원재료(쌀, 쇠고기, 당근, 양파 등)와 에너지 가격을 계산한 결과인데요. 1년 전보다 79엔이나 늘어, 또다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죠.사라진 쌀 미스터리지금의 쌀값 폭등은 좀 이상합니다. 일본 농림수산성에 따르면 2024년 쌀 수확량(679만t)은 전년보다 18만t 늘었어요. 그런데 일본 농협 같은 주요 집하업자가 매입한 쌀(1월 말 기준, 221만t)은 전년보다 오히려 23만t이나 감소했죠. 어찌 된 일인지 쌀이 늘었는데(생산), 쌀이 줄었습니다(매입). 있었는데 없어졌어요.에토 타쿠 농림수산성 장관은 지난달 초 기자회견에서 “어딘가에 쌓인 채 숨겨진 양이 있어서 부족이 발생했다”고 말합니다. 이게 다 가격 상승을 노리고 쌀을 빼돌린 투기세력 탓이라는 주장인데요. ‘사라진 쌀의 행방은?’이라는 소설 제목 같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죠.조직적으로 농촌을 돌아다니며 대규모로 쌀을 사들이는 세력이라도 있는 걸까요? 사실 농산물 값이 뛸 때 중개인들이 창고에 일부러 비축해두는 거야 흔한 일이긴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양은 기껏해야 1만~2만t 정도일 거라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죠. 쌀 1만t을 보관하는 데 드는 비용이 연간 1억엔이나 되기 때문입니다.만약 농림수산성 발표대로 수확량이 18만t 늘었는데도 매입량이 23만t 줄어든 게 진짜 맞다면, 무려 41만t의 쌀이 어딘가 숨어있단 건데요. 그게 가능할까요? 참고로 41만t이면 30㎏짜리 쌀 포대를 도쿄돔 부지에 깔았을 때 11m 높이로 쌓입니다.투기세력이 숨긴 게 아니라면 뭘까요. 설득력 있는 주장은 애당초 18만t 증산 자체가 없었단 겁니다. 지난해 일본의 여름은 기록적으로 더웠고, 많은 농부들이 쌀 수확량이 줄었다고 말하고 있거든요. “정부는 ‘2024년 수확량이 늘었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농업인들 사이에선 ‘농림수산성 통계가 정확하지 않았다’는 말이 나옵니다.”(대규모 쌀 농장인 ‘오시마 농장’ 대표 오시마 야스시)“사라진 쌀을 찾아도 절대로 발견되지 않습니다. 쌀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쌀이 없기 때문에, 경쟁이 심해지면서 농협의 집하량이 줄어든 겁니다.”(농업 전문가인 야마시타 카즈히토 캐논글로벌전략연구소 연구주간)쌀은 많은데 중개업자가 쌀을 대량 빼돌렸을 거란 정부 주장과 지난해 쌀 수확량이 실제론 감소했을 거란 일부 농민과 전문가 주장. 둘 중 뭐가 팩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현재로선 쌀값이 크게 하락할 조짐은 없다는 거죠. 정부의 대대적인 비축미 방출 계획에도 말이죠.일본 정부는 3월 10일부터 비축미 입찰을 실시했습니다. 이달 안에 총 21만t 비축미를 풀 거라고 하죠. 일본 정부가 재난이 아니라 쌀이 부족해서 비축미를 방출한 건 사상 처음이고요. 그 물량도 엄청납니다. 그동안 비축미 방출은 동일본 대지진 때 4만t, 구마모토 지진 당시엔 고작 90t에 불과했거든요.만약 투기세력이 쌀을 잔뜩 쌓아뒀다면, 비축미 방출 계획에 깜짝 놀라 물량을 쏟아내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아직까진 어디서도 그런 신호는 없습니다. 비축미가 쌀값의 가파른 상승세를 멈추게 할진 몰라도, 극적인 가격 하락은 어려울 거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입니다.쌀 감산 성공, 그러나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이상기후, 전체의 1%에 불과한 외국인 관광객 수요, 실체가 모호한 투기세력. 쌀값 이상급등 원인으로 지목되는 이런 요인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이제 전문가들은 경제학의 기본 원리로 눈을 돌립니다. 쌀값이 이렇게까지 계속 오르는 건 단순히 수요보다 공급이 부족하다는 뜻 아닐까요.일본은 1971년부터 50년 넘게 쌀 감산 정책을 시행 중입니다. ‘감반(減反)정책’이라고 부르는데요. 예컨대 정부가 지역별로 감축 목표량을 할당한 뒤, 보조금을 줬고요. 수확량을 높이는 벼 품종개량도 금지했습니다. 2018년 일본 정부는 감반정책 폐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했지만 말뿐이었죠. 지금도 주식(밥)용 쌀 대신 전략작물(밀, 대두, 사료용 쌀)을 재배하는 농가엔 보조금을 지급합니다. 연간 투입 예산만 3000억엔(약 2조9000억원)이 넘죠.감반정책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1969년 317만㏊였던 벼 재배면적은 꾸준히 줄어 2023년엔 124만㏊가 됐죠. 쌀 생산량도 1967년 약 1309만t에서 절반 수준으로 줄었고요. 쌀이 남아돌아 골치인 한국도 일본의 성공방식을 따라하고 있습니다. 올해 시행한 ‘벼 재배면적 조정제’가 그런 사례인데요.그런데 일본 감반정책엔 허점이 있습니다. 쌀 생산의 낙후한 구조를 바꾸는 데는 실패했단 거죠. 왜 그럴까요. 정부가 쌀 생산량을 억지로 줄이면서 쌀값을 높게 떠받쳐왔기 때문입니다.벼농사는 기계화돼 밭농사보다 품이 훨씬 적게 들어요. 농사짓기 편하죠. 그런데 쌀값이 높게 유지되면 영세농가, 특히 다른 소득이 있는 겸업 농가는 어떻게 할까요. ‘쌀 사먹으려면 비싸니까 농사 짓는 게 낫겠네’라는 생각에 부업 삼아 계속 벼농사에 남습니다. 비료·살충제 가격 빼면 거의 남는 게 없더라도 말이죠. 그 결과 일본 쌀농가 중 재배면적이 1㏊가 안 되는 영세소농 비중이 여전히 52%입니다. 대규모화·법인화·효율화와는 거리가 멀죠.그리고 농촌에 지역구를 둔 정치인들에겐 이게 오히려 더 좋습니다. 농장이 대형화되는 것보단 영세농가가 많은 게 유권자 머릿수를 늘리고 정치력 키우는 데 효과적이니까요. 농협 역시 영세농가가 많아야 유리합니다. 이들이 모두 비료를 사주고 예금을 해주는 고객이니까요. 이렇게 기득권 세력끼리 쿵짝이 맞으니, 막대한 보조금이 투입되는 쌀 감산 정책은 계속됩니다. 왜 굳이 정책 방향을 바꾸겠어요. 쌀 생산을 늘려서 쌀값이 급락하면 자기네 지지기반이 흔들릴 게 뻔한데.발상의 전환문제는 이제 벼농사의 생산력이 밑바닥부터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단 점입니다. 일본 벼 재배농가의 평균 연령은 71세로 고령화가 특히 심각한데요. 늙어서 벼농사에서 손 놓는 은퇴 농부들이 급증하는데, 후계자는 없습니다. 누가 이 영세한 산업을 이어 받으려고 하겠어요. 일본 최대의 사케업체 아사히슈초의 히로시 사쿠라이 회장은 블룸버그에 이렇게 말합니다. “일본, 특히 농림수산성은 벼농사에 대한 희망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소규모 농업은 실행 가능하지 않아요. 대규모 농업으로 나아가야죠.”결국 근본적인 해법은 쌀 정책의 대전환입니다. 50년 넘게 이어진 쌀 감축 정책은 끝내야하고요. 쌀 생산을 늘려서 가격을 낮추고 대신 기업화를 유도하는 거죠. 그러다 쌀이 남아돌면 어쩌냐고요? 다른 나라로의 수출을 뚫어야죠. 쌀이 남을 땐 수출하다가, 작황이 나쁠 땐 수출 물량을 내수로 돌려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겁니다. 보관비용이 많이 드는 비축보다 수출이 훨씬 효율적입니다.너무 진취적인 발상인가요. 사실 이건 농림수산성 출신인 카즈히토 캐논글로벌전략연구소 연구주간의 주장인데요. 그는 사고의 전환을 촉구합니다. “농업도 경제의 일부입니다. 약자라든지, 특별하다고 여기는 발상에선 농업이 발전하지 않아요. 네덜란드가 왜 세계 2위 농산물 수출국으로 발전했느냐. 농업성을 폐지하고 경제성에 통합했기 때문입니다. 높은 기술이 세계 최고로 만든 거죠.”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한국 농업에 대입해도 다를 게 없습니다. 아직 우리에겐 쌀 부족, 쌀값 급등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을 뿐이죠. 일본을 뒤흔든 쌀의 역습은 혹시 한국의 미래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요. By.딥다이브아무리 일본에 다시 인플레이션이 찾아왔다지만, 쌀값이 1년 만에 두배로 뛰다니. 보통 일이 아닌데요.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아서, 남의 나라 얘기 같지만은 않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일본 쌀값 폭등이 놀랍습니다. 1년 전보다 99.3% 뛰며 관련 물가를 밀어올리고 있습니다. 지난해 8월 시작된 쌀값 폭등이 가을 이후 잠잠해지긴커녕 더 심각해졌습니다.-일본 농림수산성 지난해 쌀 수확이 늘었는데도 투기세력 탓에 유통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정부의 대대적인 비축미 방출에도 쌀값이 진정되지 않습니다. 정부 주장을 못 믿겠다, 쌀이 사라진 게 아니라 원래 없었다는 말이 나옵니다.-50년 넘게 이어진 쌀 감산 정책이 쌀 부족을 일으킨 근본 원인으로 꼽힙니다. 벼 재배면적 축소엔 성공했지만, 쌀 생산을 선진화하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이죠. 농촌의 고령화로 쌀농사 짓는 영세 농가의 은퇴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대전환이 필요하지만, 쌀값 급락을 원치 않는 이해관계자들 때문에 쉽진 않을 겁니다.*이 기사는 1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혹시 레고(LEGO) 좋아하시나요? ‘조립블록’이란 단어보단 레고라는 상표명이 더 익숙할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난감 브랜드인데요. 93년 된 덴마크 장난감 기업 레고가 특별한 건 그 창의적인 제품 디자인 때문만은 아닙니다. 주기적으로 닥쳐오는 위기를 극복해 내는 그 경영 비법이 더 주목할 만한데요. 마침 레고가 2024년 또다시 사상 최대 매출을 기록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레고가 전 세계 장난감 기업 1위인 이유를 들여다봤습니다.*이 기사는 1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압도적 1위 기업덴마크 장난감 기업 레고그룹이 11일 2024년 실적을 발표하자 모두가 경탄했습니다. 전 세계 장난감 시장 성장세가 마이너스(-1%)로 돌아서고, 경쟁사인 미국 마텔(Mattel)과 해즈브로(Hasbro)가 매출 감소에 시달리는 가운데도 레고는 환상적인 실적을 발표했기 때문이죠. 지난해 매출은 13% 증가한 743억 크로네(약 15조7400억원), 영업이익은 10% 증가한 187억 크로네(3조9600억원)에 달했습니다. 닐슨 크리스티안센 CEO는 이렇게 말했죠. “2024년은 레고그룹에 있어 예외적인 한해였고, 우리는 강력한 성과에 매우 만족합니다.”그래서 레고그룹 주가가 치솟았을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레고는 비상장기업이거든요. 1932년 설립 이래 증시에 상장된 적이 한 번도 없죠. 창업자인 올레 키르크 크리스티안센(1891~1958년) 자손들이 레고 경영권을 사실상 100% 지배합니다(75%는 창업주 일가가 직접, 25%는 레고재단이 소유).비상장이라는 건 초기부터 돈을 잘 벌어서 굳이 외부 투자금을 끌어올 필요가 없었단 뜻이죠. 작은 나무 장난감 회사로 출발한 레고는 1949년 플라스틱 블록을 처음 내놨는데요. 이후 1958년 모든 블록이 서로 호환되도록 규격을 통일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참고로 같은 색깔의 2X4 레고 블록 6개를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은 무려 9억1510만개에 달한다는데요. 창의성과 품질이란 핵심 가치가 지금의 레고를 있게 하죠.망할 뻔했다하지만 아무리 장인정신으로 무장한 기업이라도 시대가 변하면 위기가 닥치기 마련이죠. 레고의 첫 번째 위기는 1990년대 시작됐습니다. 디지털 시대가 열리면서 전에 없던 새로운 경쟁자, 비디오게임이 등장했기 때문인데요. 1998년 레고는 설립 이후 처음으로 연간 적자를 기록합니다.컨설턴트들이 레고의 덴마크 빌룬드 본사로 달려왔습니다. 그들이 제시한 답은 다각화. 바비·피셔프라이스·핫휠 등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가진 미국 경쟁사 마텔을 따라하라는 조언이었습니다. 나온 지 50년 된 플라스틱 블록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란 거죠.조언대로 레고는 자체 비디오게임 회사를 만들고, 테마파크를 열고, 여자아이들을 위한 액세서리와 의류를 만들었습니다. 또 복잡한 조립이 필요 없는 미니피규어 잭 스톤, 액션 피규어 갈리도르 같은 신제품 출시와 마케팅에 공을 들였죠.그래서 어떻게 됐을까요? 회사가 거의 망할 뻔했습니다. 2003년 매출은 전년 대비 30% 급감했고, 역대 최대인 15억 크로네(약 3100억원) 적자를 기록했죠. 현금이 고갈돼 레고가 6개월 안에 파산할 거란 관측마저 나왔습니다.2004년 창업자 손자(3대 회장) 크옐 키르크 크리스티안센은 CEO직을 내려놓았습니다. 그가 후임으로 지명한 새 CEO는 맥킨지 출신의 36살 젊은 임원 예르겐 비그 크누스토르프. 임원회의에서 “우리는 불타는 플랫폼에 있습니다. 현금이 바닥나고 있습니다”라고 쓴소리하던 그를 눈여겨본 오너가 발탁한 거죠.빼기의 힘“어떤 면에선 그가 스티브 잡스보다 더 나은 혁신모델입니다.” 2014년 레고의 경영혁신에 대한 책(‘브릭 바이 브릭’)을 낸 데이비드 로버트슨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 교수는 크누스토르프 CEO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도대체 크누스토르프가 무슨 대단한 일을 했기에 그럴까요. 그가 레고를 구하기 위해 한 건 더하기가 아니었습니다. 과감한 빼기였죠.그가 CEO에 올랐던 당시, 레고는 새로운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벌여놨지만 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신상품 피규어는 사출 금형 값이 너무 비싸서 수익성이 전혀 없었고요. 레고 부품 수가 1만3000개로 급격히 불어나면서 공급망은 엉망진창이 됐습니다. 테마파크 운영은 막대한 현금을 잡아먹고 있었죠.크누스토르프는 마구 뻗어있던 가지들을 대거 쳐냅니다. 우선 생산하는 다양한 조각 수를 1만3000개에서 6500개로 확 줄입니다. 부품을 단순화하자 공급망은 가벼워졌죠. 전문성이 없었던 테마파크 레고랜드 사업은 사모펀드에 매각했고요. 수익성 없던 내부 컴퓨터 게임 부서도 없앱니다.대신 레고의 본질인 ‘블록 놀이’에 집중했습니다. ‘소비자와의 캠핑’이라는 고객 연구 프로그램을 도입해 아이들이 어떻게 노는지를 관찰했죠. 이를 통해 6살 남자아이들이 닌자에 열광한다는 걸 파악해 ‘닌자고’ 라인을 만들었고요. 사실성을 중시하는 여자아이들 특성에 맞춰 개발한 ‘레고 프렌즈’ 라인을 출시합니다. 다시 히트작이 터지기 시작했죠.레고를 열광적으로 수집하는 성인팬에 집중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고객이 직접 신상품 아이디어를 내고, 팬투표를 통해 제품화를 결정하는 ‘레고 아이디어(Lego Ideas)’ 사이트를 운영한 건데요. 팬을 공동창작에까지 끌어들인 드문 사례입니다.두번째 위기와 리셋과도한 다각화 함정에서 벗어나 다시 단순화하고 본질에 집중하라. 이것이 레고의 극적인 턴어라운드가 주는 교훈입니다. 2005년부터 레고의 매출과 이익은 다시 성장세를 탔고요. 2010년대에 접어들자 전 세계가 레고의 부활에 찬사를 보냈습니다.하지만 온라인과의 경쟁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죠. 2010년대 중반이 되자 스마트폰이 빠르게 확산됐고요. 모바일 게임과 유튜브, 넷플릭스가 아이들의 주의력을 빼앗아 갑니다. 2017년 레고 매출은 8%, 영업이익은 17%나 감소합니다. 1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죠. “미국과 유럽 시장이 이제 포화상태에 도달했다”는 분석이 내부에서 나왔습니다. 창고엔 재고가 쌓여만 갔고요.레고가 당장 망할 것 같진 않았지만 성장은 가로막혔고, 내리막이 다가오는 게 보였습니다. 회사가 뭘 대단히 잘못해서라기보단, 세상이 워낙 빠르게 변한 탓이었죠. 다시 위기가 찾아왔고, 이번엔 레고 창업주의 증손자(4대 회장) 토마스 키르크 크리스티안센 회장이 재설정 버튼을 눌렀습니다. 반전을 위해 새로 투입된 CEO는 닐슨 크리스티안센. 맥킨지 출신으로 덴마크 산업기업 댄포스의 디지털화를 성공적으로 이끈 스타 CEO였죠. 2017년 10월 레고 CEO에 오른 그가 취임 첫날 해야 한 일은 직원 1400명 해고였습니다.변화가 절실했습니다. 크리스티안센 CEO 역시 시작은 ‘빼기’였습니다. 그는 취임 뒤 첫 타운홀미팅에서 이렇게 말했죠. “우린 너무 많은 회의를 합니다. 그 모든 회의에 참석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꼭 참석할 필요성이 오히려 없습니다.” 창의성을 방해하고 조직을 느리게 만들던 많은 내부 회의들이 사라집니다. 회의 참석자 수도 최소한으로 줄였고요.동시에 KPI(핵심성과지표) 가짓수도 대폭 줄입니다. 리더십 모델별 제각각이었던 레고의 KPI 지표 수를 모두 합치면 수천개나 됐는데요. 그중 대부분을 없애고 공통적인 몇 가지만 남겼습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몇 가지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죠.그는 왜 일하는 방식부터 손봤을까요. 일의 속도를 높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것저것 분석하느라 허송세월하는 대기업 문화가 문제라고 봤습니다. “모든 걸 100% 미리 생각하려는 것보다는 일단 시작한 뒤 방향을 바꾸는 게 낫다”는 게 그의 철학인데요. 그는 이를 기차에 비유해 설명합니다.“새로운 전략을 도입할 때 직원의 80%가 그게 실제 구현된다고 믿는다면, 그 일은 실현될 겁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기차를 실제로 보여주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기차에 올라타서 더 빨리 올라타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그게 제가 일을 처리하는 근본적인 방식입니다.”레고의 의사결정은 한층 빨라졌고, 그 결과 과감한 베팅이 시작됩니다. 온라인 시대에 맞지 않다는 일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 매장을 대대적으로 확장했죠. 레고 자체 매장은 이제 고객이 직접 만지고 체험할 수 있는 매력적인 쇼핑공간이 됐습니다. 생산능력도 빠르게 확장 중입니다. 멕시코·헝가리 등 기존 공장 생산량을 늘리는 것과 동시에 베트남과 미국에도 새 공장을 짓고 있죠. 판매하는 레고 제품 수는 점점 늘어 지난해엔 사상 최대인 840개가 됐는데요. 이 중 절반 가까운 46%가 지난해 새로 출시한 제품입니다.특히 신제품 중에서도 성인용 고급 제품이 매출 성장의 주역입니다. 2020년엔 18세 이상을 위한 아키텍처 세트, 2021년엔 꽃 테마 세트가 출시됐는데요. 열혈 키덜트 고객들이 수십만 원짜리 고급 세트 수집에 나서면서 객단가를 높였고요. 레고 꽃을 조립하는 동영상이 틱톡에서 인기를 끌면서 여성 성인 고객까지 끌어들이는 데 성공합니다.디지털로의 확장도 속도를 냅니다. 2023년 말 레고는 에픽게임즈와 협업해 ‘레고 포트나이트’ 게임을 내놨는데요. 이게 큰 인기를 끌어 지금까지 전 세계 8700만명이 이 가상 레고 블록을 조립하며 놀았습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레고는 자체 비디오 게임 개발에도 다시 뛰어들었죠.본질에 집중하라결국 지난 몇 년간 레고의 혁신은 빠르고 과감한 확장의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나요. 과거 2003년엔 지나친 확장이 경영악화의 원인으로 지목됐는데요. 이젠 오히려 확장이 성장 비결이라니. 모순되는 것 아닐까요?하지만 크리스티안센 CEO가 밝힌 경영 원칙에 대입하면 바로 이해가 됩니다. “회사가 어떻게 가치를 창출하는지 그 본질을 알아보세요. 기업의 가치 창출에 도움이 되는 복잡성은 키우고 효과적으로 관리해야 합니다. 대신 이를 지연시키는 복잡성은 최소화하세요.”레고라는 기업의 본질은 ‘블록 놀이가 주는 즐거움’에 있죠. 하지만 과거 확장 시기엔 블록과 상관없는 다른 것(피규어, 의류 등)을 기웃거리느라 본질과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 결과 막대한 투자에도 경쟁력을 잃고 추락했죠. 지금은 그 반대입니다. 블록 놀이의 즐거움을 더 많은 매장과 고객으로, 가상 세계로 확장하고 있으니까요. 본질을 계속 붙잡고 있는 겁니다.장난감 시장의 역성장 추세를 거스르는 레고의 성장세는 계속될 수 있을까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점점 닫혀가는 소비자 지갑(레고는 상당히 비싸니까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부과 으름장(레고의 미국 공장은 2027년에나 문을 엽니다) 등. 2025년엔 여러 난관이 도사리고 있는데요. 하지만 크리스티안센 CEO는 “이런 변동은 처음 있는 게 아니고, 우리는 과잉 반응하지 않도록 관리해 왔다”고 말합니다. 93년 된 세계시장 점유율 1위 기업 CEO다운 반응인데요. 오래된 브랜드의 혁신이란 어떠해야 할지, 레고가 그 길을 계속 보여주길 기대합니다. By.딥다이브레고의 놀라운 점 중 하나는 수많은 모방자들이 생겨났는데도 그 경쟁력을 전혀 잃지 않았단 점이죠. 압도적으로 강력한 브랜드와 종교적인 고객의 충성도. 그저 부럽기만 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레고가 발표한 2024년 연간 실적이 대단합니다. 전 세계 장난감 시장이 역성장한 지난해에도 매출은 13%, 영업이익은 10%나 증가했습니다. 단가 높은 성인용 제품의 판매가 늘면서 미국, 유럽, 중동 시장이 강력한 성장세를 보였습니다. -레고는 2003년엔 거의 망할 뻔했습니다. 다각화를 시도하면서 집중력을 상실했기 때문이죠. 2004년 구원투수로 등판한 크누스토르프 CEO는 곁가지를 처내고, 다시 블럭 놀이에 집중하게 만들어 위기 극복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시대는 빠르게 변했고 2017년엔 또다시 성장이 가로막히며 다시 위기가 찾아옵니다. 크리스티안센 현 CEO는 의사결정을 단순화하고 일의 속도를 끌어올리는 전략을 썼죠. 레고는 다시 과감한 투자로 성큼성큼 나아가게 됩니다. 본질에 집중하면 어디로 갈지가 보이는 법이니까요. *이 기사는 1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2024년 경제성장률이 4.1%나 되고, 실업률은 2.4%에 불과합니다. 임금이 뛰고 소비가 늘어나 경제가 호황이다 못해 과열 양상이죠. 어느 나라 얘기일까요. 바로 러시아입니다.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전쟁을 벌인 지 만 3년여. 러시아 경제는 침체 위기를 가볍게 뛰어넘어 진군 중입니다. 겉보기 수치로는 서방의 제재에도 끄떡없는데요. 러시아 경제는 왜 호황을 누리고 있고, 이 호황은 얼마나 더 이어질까요. 오늘은 러시아가 보여주는 전쟁 경제학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예측 깬 경제호황러시아 주가지수인 RTSI. 한 달 만에 15%, 석 달 전과 비교하면 39%나 뛰었습니다. 특히 미국과 러시아가 리야드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을 한다는 소식이 알려진 13일 하루에만 지수가 10% 급등했죠. 전쟁으로 외국인이 러시아 증시에 투자하기 매우 어려워진 상황에서도(미국의 투자금지 조치) 이 정도 급등세라니 놀라운데요. 홍콩 증시에 상장돼 거래가 자유로운 러시아 알루미늄 제련 기업 루살(Rusal) 주가는 한 달 만에 52%나 뛰었습니다. 미국이 곧 러시아 제재를 해제할 거란 기대감이 반영된 거죠. 러시아 루블화 가치 역시 올해 들어 달러 대비로 25% 넘게 올랐습니다.침략국 러시아 자산으로 금융시장 투자자들이 몰리는 현실이 왠지 씁쓸하기도 한데요. 본래 투자의 세계란 냉정한 법이죠.그리고 알아두셔야 할 게, 3년 넘게 계속되는 전쟁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경제는 상당히 잘나가고 있단 점입니다. 물론 처음 전쟁이 막 발발했을 땐 절벽으로 떨어졌죠. 러시아는 대대적인 경제 제재 융단폭격을 맞았고요. 주식시장은 한동안 문을 닫았고, 루블화는 폭락했고, 국가신용등급은 급락하고, 예금자들은 달러를 얻기 위해 은행에 줄을 섰고, 외국 기업은 줄줄이 빠져나갔습니다. 당시 IMF(국제통화기금)가 2022년 러시아 GDP의 8.5% 감소를 전망했을 정도였죠.하지만 실제로는? 러시아 경제는 2022년에 1.2% 소폭 하락에 그쳤고요. 2023년엔 3.6%, 2024년엔 4.1%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모두의 예측이 빗나갔죠.군사지출이 만든 성장그럼, 러시아 경제는 어떻게 금세 다시 성장 궤도를 타게 됐을까요. 한마디로 ‘군사적 케인스주의’ 효과입니다.케인스주의란 정부가 공공지출을 늘려서 소비를 촉진하는 방식으로 경기를 부양하는 거죠. 군사적 케인스주의는 군사 지출을 늘려서 성장을 촉진하는 걸 의미하는데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게 나치 독일입니다. 나치 독일은 1933~1937년 약 55% 실질 GDP 성장을 누리며 경제적 번영을 이뤘는데요. 나치 정부가 대대적인 군사력 확장에 나선 게 그 원동력이었습니다.전쟁이 길어지면서 러시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GDP의 약 3%를 차지했던 국방비는 이제 거의 7%로 불어났습니다. 국방비를 대대적으로 쏟아붓고 있단 뜻이죠. 전쟁 물자 생산을 위해 방산기업은 24시간 3교대로 쉴 새 없이 돌아갑니다. 전쟁으로 일할 사람 구하기 어려워진 무기 공장들이 월급 인상을 주도하면서 전반적인 급여 수준이 크게 올랐고요. 지난해 12월 기준 러시아 근로자의 급여 상승률은 1년 전과 비교해 21.9%나 됐습니다. 16년 만에 가장 높은 증가율이었죠.근로자뿐 아니라, 전선으로 나가는 군인들도 거액을 받습니다. 러시아 남서부 사마라주는 올해 초 지원병 계약 일시금을 80% 인상한 360만 루블(약 5800만원)로 책정했는데요. 러시아 평균 연봉(약 106만 루블)의 3배 넘는 금액입니다. 푸틴 정권에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각 주 정부가 경쟁적으로 계약금을 높인 결과이죠.임금이 이렇게 빠르게 오르다 보니 소비자들의 낙관론은 커집니다. 여론조사 기관 레바다센터에 따르면 소비자 신뢰지수는 사상 최고 수준에 근접했고요. 러시아의 가계소비는 1년 전보다 6% 늘었습니다. 전쟁이 만들어낸 독특한 소득 주도 성장인 셈입니다.코카콜라 대신 도브리콜라러시아 성장률을 끌어올린 또 다른 요인은 외국기업 대탈출로 인한 ‘국산화’ 효과입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1200개 넘는 다국적 기업이 러시아를 떠나거나 운영을 중단했죠. 현대차를 비롯한 자동차 제조업이 썰물처럼 빠져나갔고요. 골드만삭스·ING·비자·마스터카드 같은 금융회사, 스타벅스·맥도날드·코카콜라·자라·애플 같은 소비자 관련 기업도 줄줄이 철수했습니다.그런데 이런 대량 이탈이 역설적으로 러시아 기업엔 기회가 됐습니다. 외국기업의 빈자리를 채우면서 러시아 기업의 이익은 크게 늘어났고요. 다국적 기업이라면 해외로 상당 부분 빠져나갔을 배당금과 세금이 러시아 내에 남는 결과로 이어진 거죠.무엇보다 러시아 기업의 ‘투자 붐’이 일고 있습니다. 지난해 상반기 러시아 기업의 투자는 14조4000억 루블(238조원). 전년 동기보다 10% 늘어났고, 1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는데요. 제재로 인해 주요 은행들이 부유한 러시아인들과의 거래를 끊으면서 예전처럼 해외 자산에 투자하기가 어려워졌거든요. 그래서 예전 같으면 해외로 빠져나갔을 돈이 국내에 재투자되는 겁니다. 이 역시 서방 제재가 가져온 예상 밖의 결과이죠.노동력이 고갈되다전쟁으로 우크라이나 곳곳은 폐허가 되고, 지금도 사람들이 죽고 있는데. 침략국인 러시아에선 근로자도, 기업도 모두 돈을 더 잘 벌게 됐다니. 씁쓸하다 못해 허탈하다고요? 그런데 아직 결말은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 러시아 경제를 떠받쳐온 군사적 케인스주의가 이제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입니다.케인스주의는 경제에 여유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정책인데요. 러시아의 가용 자원이 동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재정 여력은 아직까진 좀 남아있긴 한데요. 그보다 먼저 바닥난 건 인적자원입니다.러시아는 전쟁 이전에도 인구가 자연 감소하는 나라였습니다. 부족한 노동력을 이민자들로 메워왔는데요. 2022년 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에선 대탈출이 벌어졌습니다. 이민자들은 물론 러시아인 중 IT나 금융 분야 고숙련 인재들까지, 무려 75만명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거죠. 또 매달 1만~3만명의 청년이 군에 입대하고 있습니다. 일손이 부족해 학생과 은퇴자까지 채용될 정도로 노동시장은 완전고용 상태(실업률 2.4%)이죠. 러시아 중앙은행 분석대로 러시아 전역에서 “전문가와 저숙련 노동자 모두 심각하게 부족”한 상황입니다. 한 에너지 기업 전직 임원은 FT에 이렇게 말하죠. “용접공들이 엄청난 급여를 받으며 무기 공장으로 가버립니다. 고용할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돈을 버나요?”한동안 푸틴 대통령은 “실업률이 역대 최저”라며 자랑스러워했는데요. 인력난과 인건비 상승이 너무 장기간 이어지면서 이젠 물가가 심상찮습니다. 2024년 12월 러시아 소비자 물가지수 상승률은 9.5%. 특히 지난해 식료품 가격이 급등해서 감자는 92%, 양파 48%, 오이 28.5%, 버터는 36%나 뛰었습니다. 오죽하면 지난해 11월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에선 복면을 쓴 강도가 가게에서 버터 20㎏를 훔쳐 달아나는 사건까지 발생했죠. 지난해 12월이 되자 푸틴 대통령도 인플레이션을 “우려해야 할 시그널”로 지목했습니다.물가를 잡기 위한 방법으론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군사 지출을 줄이는 것. 기록적으로 늘어난 국방 지출(2025년 13조5000억 루피)이 이미 러시아 경제 용량을 한참 초과한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이건 지금으로선 푸틴 대통령이 선택할 리 없고요. 대신 러시아 중앙은행이 움직였습니다. 지난해 10월 기준금리를 19%에서 21%로 높였죠. 2003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중앙은행의 이런 움직임이 효과를 발휘할까요. 글쎄요. 이후에도 물가상승률은 점점 더 높아지기만 하는데요(1월 9.9%). 이러다 물가는 못 잡고 괜히 기업 이자 부담만 불어나서 경제에 타격을 입하는 건 아닐까요. 경제를 과열시킨 건 군사 부문인데, 높은 이자 부담에 시달리는 건 민간 기업인 상황입니다.그래서 러시아에선 요즘 스태그플레이션(물가급등+경기침체)이 경제계의 큰 화두입니다. 러시아 싱크탱크 CMASF가 중기적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이 우려된다고 경고했고요, 이게 맞냐 아니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는데요. 일단 러시아 정부는 올해 1~2% 사이의 완만한 경제성장, 즉 연착륙을 예상합니다. 그래서 전쟁 끝나면?전쟁으로 이룬 경제성장은 원래 오래갈 수가 없는 법입니다. 국가의 미래를 저당 잡기 때문이죠. 전쟁으로 인해 장기적인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교육과 과학기술, 건강에 대한 투자는 대폭 줄어들었고요. 대신 탱크와 총알을 만들고, 군인을 먹이고 수송하는 생산성 낮은 분야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두뇌 유출과 인구 감소까지. 국가의 성장곡선이 궤도를 심각하게 이탈한 상황입니다. 러시아 경제학자 블라디슬라프 이노젬체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러시아는 현대화로 가는 모든 길을 완전히 차단했습니다. 안정은 있지만 발전은 없습니다.”즉, 지난 3년은 러시아 경제가 꽤 잘 버텼지만, 이대로 계속 갈 순 없습니다. 아마도 크렘린도 이를 느끼고 있었을 거고요. 바로 그 타이밍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종전 협상이라는 동아줄을 내려준 셈이죠.그럼 만약에 이 전쟁이 끝난다면, 그땐 러시아 경제가 어떤 국면을 맞이하게 될까요? 일단 단기적으로는 오히려 종전이 경기침체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전쟁 특수가 끝나면서 무기 공장의 일자리는 줄어들 거고, 실업률도 치솟을 테니까요.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이 불가피합니다. 과열됐던 경제가 정상화하려면 냉각이 필요한 법이니까요.대신 러시아 경제는 제재에서 드디어 벗어나 한발짝 나아갈 겁니다. 더 많은 석유 달러를 벌어들이고, 진짜 필요한 서방 첨단기술을 사들일 수 있게 되겠죠. 러시아 증시가 들썩거리는 이유일 텐데요. 그런데 러시아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책임은 도대체 어떻게 될는지. 여전히 많은 물음표가 따라붙습니다. By.딥다이브스타벅스 대신 스타스 커피를 마시고, 자라 대신 MAAG에서 옷을 사는 러시아인들. 전쟁과 제재라는 악조건에도 금세 적응해버린 러시아 경제가 놀라운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종전 기대감이 커지면서 투자자들이 다시 러시아 자산으로 눈을 돌립니다. 전쟁 기간 러시아 경제는 예측을 깨고 호황을 누렸죠. 지난해 GDP 성장률은 4.1%에 달합니다. -‘군사적 케인스주의’ 효과입니다. GDP의 7%로 늘어난 국방지출, 24시간 3교대로 돌아가는 무기 공장이 임금 인상과 소비 증가를 가져왔죠. 1년 만에 임금이 20% 넘게 뛰면서 소비자들의 낙관론은 커집니다. -하지만 이제 그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노동력이 바닥나면서 인플레이션이 심상찮죠.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21%로 높였지만, 되레 스태그플레이션을 초래할 수 있단 분석도 나옵니다. 전쟁이 만든 거품이 꺼질 때가 됐습니다.*이 기사는 1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수렁, 쇠락, 침몰. 한동안 독일 경제엔 이런 단어가 따라붙었죠. 2년 연속 경기침체에 빠진 데다, 다시 성장 궤도를 타기 위한 구조 개혁도 지지부진했기 때문인데요. ‘유럽의 병자’로 불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독일이 갑자기 깨어났습니다. 16년 만에 헌법을 개정해 대대적인 국방·인프라 투자에 나서겠다며 정치권이 팔을 걷어붙였죠. 이게 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나비효과인데요. 트럼프 대통령이 촉발한 독일의 각성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안보를 위해선 무엇이든 한다“전후 독일 역사에서 가장 역사적인 패러다임 전환 중 하나다.”(도이체방크 수석 이코노미스트 로빈 윙클러)“완전한 게임체인저.”(뒤셀도르프대학 옌스 쥐데쿰 교수)“독일이 성장의 물꼬를 트고 있다.”(JP모건애셋매니지먼트 카렌 워드 전략가)독일의 차기 총리인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민주당 대표가 4일 발표한 헌법(기본법) 개정 합의안에 대한 평가입니다. 합의안 골자는 정부의 차입 한도를 규정한 ‘부채 브레이크’에서 국방비를 예외로 하는 것. 즉 재정 규칙에 구애받지 않고 국방비를 무제한 확장할 수 있게 길을 터주는 겁니다. 이와 함께 5000억 유로(778조원)의 인프라 투자기금 설립, 주정부에 대한 부채 규칙 완화도 담겼죠. 한마디로 독일이 천문학적인 국방·인프라 투자로 나아가기 위한 문을 활짝 열기로 한 겁니다. 주식시장은 환호했고요(독일 DAX지수 5일 3.3% 상승). 채권시장에선 독일 정부가 국채 발행에 뛰어들 거란 기대감으로 독일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이 1997년 이후 가장 많이(0.31%포인트) 급등했습니다.그동안 독일은 헌법이 정한 ‘국내총생산(GDP)의 0.35%’의 재정적자 한도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이 엄격한 제한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메르켈 총리 시절인 2009년 처음 생겨났는데요. 재정 건전성을 지키자는 취지였지만, 실제론 독일 경제를 옥죄는 족쇄로 작용했습니다. 정부부채 비율이 대단히 낮은 선진국인데도(GDP의 63%), 스스로 만든 룰에 묶여 제대로 투자할 수 없었던 거죠.부채 브레이크를 이제 좀 풀자는 논의는 예전부터 나왔습니다. 하지만 독일의 다당제 정치 지형에선 어떤 개혁도 불가능해 보였죠. 헌법 개정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를 얻기 위한 설득과 합의 과정이 너무나 험난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함정이랄까요. 사실 메르츠 차기 총리 역시 2월 23일 연방 선거 전엔 부채 브레이크 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요.그런데 이렇게 180도 입장을 바꿔서 갑자기 역사적인 합의에 이를 줄이야. 전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의석수 3분의 2 이상 찬성에 이르려면 녹색당까지 추가로 끌어들여야 하지만, 아마도 가능할 거란 관측이 나오죠.결정이 느리기로 유명한 독일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움직였을까요. 이게 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덕분입니다. 유럽 외교관계위원회의 수석 정책 펠로우인 야나 푸글리에린은 FT에 이렇게 말했죠. “메르츠 차기 총리는 독일과 유럽에 대한 절대적인 비상 상황을 실제로 봤기 때문에 그렇게 빠르고 단호하게 행동합니다. 최근 몇 주 동안 트럼프 행정부의 행동이 없었다면 이건 불가능했을 거예요.”2월 28일 트럼프-젤렌스키 정상회담은 완전히 달라진 유럽 안보의 현실을 드러내 줬습니다. 미국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중단은 독일엔 충격이 아닐 수 없죠. 어쩌면 러시아의 다음 표적이 나토(NATO) 회원국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더 이상 동맹국 미국에 안보를 의지할 수 없다니. 정신이 번쩍 든 겁니다.메르츠 차기 총리는 이번 합의안을 발표하면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우리 대륙의 자유와 평화에 대한 위협을 고려할 때, 이제 우리의 방어 규칙은 ‘무엇이든지’가 되어야 합니다.”그 많던 전차는 어디로?평화배당금. 냉전이 끝나고 국방비를 줄여 생긴 여유 예산을 마치 배당금처럼 쓰는 걸 뜻합니다. 독일은 역시 지난 수십 년 동안 국방비 지출을 크게 줄여왔고요. 이로 인해 생겨난 평화 배당금은 거대한 복지국가 건설에 쓰였습니다.그 결과 유럽 최대이자 세계 3위 경제대국인 독일의 군사력은 수십 년에 걸쳐 쪼그라들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게 주요 무기 현황이죠. 냉전 직후인 1992년 이후 독일군이 보유한 주요 무기 수는 아래 그래프처럼 급속히 줄었습니다. 그래프에선 생략했지만 전투기(1992년 553→2021년 226대), 단거리 방공시스템(680→12개)도 급감했죠.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고, 독일은 무기 지원에 나섭니다. 이때부턴 독일도 태세를 바꿔 다시 국방비를 늘리고, 무기고를 다시 채워나가기 시작했는데요. 문제는 독일의 재무장 속도가 너무 느리고, 규모도 형편없이 작았다는 겁니다. 지난해 키엘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쟁 뒤 독일은 연평균 14대 전투기, 49.2대 전차, 8.8대의 곡사포를 주문했다는데요. 이런 속도이면 독일이 2004년 수준의 전차 역량을 되찾는 데 40년, 곡사포 분야는 100년(!)이 걸릴 거라는 분석이죠. 너무 한가하게 굴고 있는 겁니다. 러시아는 한 해에 1500대의 전차를 생산할 수 있다는데 말이죠. 보고서 저자인 군트람 볼프 연구원은 “러시아의 침략에 직면한 상황에서 평소와 다름없는 접근 방식을 쓰는 건 태만하고 무책임하다”고 일갈했습니다. 물론 독일 국방비 지출은 2024년 GDP의 2.1% 수준까지 늘어났습니다. 이전 30년 넘게 줄곧 1%대였고, 상당 기간 1%대 초반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변화죠. 헌법이 정한 엄격한 재정적자 제한 때문에 이 정도 하기도 쉽진 않았는데요. 하지만 미국은 물론 다른 유럽 선진국과 비교하면 아직 높다고 할 수 없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나토 회원국에 ‘GDP 5% 방위비’ 지출을 요구하는 상황에선 더욱 그렇고요.그럼 앞으론 어떨까요. 베를린 장벽 붕괴(1989년) 이전 냉전 시대, 독일은 GDP의 3~3.5%가량을 국방비로 썼습니다. 그동안 뒤처진 군사력을 재정비하려면 다시 냉전 수준 지출이 필요할 판인데요. 골드만삭스는 2027년까지 독일 국방비가 GDP의 최대 3.5%로 불어날 거라고 예상합니다.이런 분위기 덕분에 지금 유럽 방산주 주가는 치솟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레오나르도, 프랑스 탈레스, 영국 BAE시스템스, 독일 헨솔트와 티센크루프 등이 모두 올해 들어 주가가 급등했고요. 특히 독일 최대 방위사업체로 대포·장갑차·탄약 제조에 특화된 라인메탈(Rheinmetall) 주가상승이 눈에 띄는데요. 올해 들어 주가 상승률 99%. 지난해 11월 트럼프 당선 이후로는 150%나 올랐습니다. 참고로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전과 비교하면 무려 1250% 상승.라인메탈 CEO 아민 파퍼거는 지난달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기대합니다. “트럼프는 미국이 유럽 안보를 다룰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회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성장해야 한다는 뜻이죠. 우리는 (다른 방산기업을) 인수하고, 막대한 투자를 할 것입니다.”다음은 징병제 부활?여기까지 정리하자면, 독일이 달라졌습니다. 재정 건전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이제 빚을 왕창 내서라도 무기를 사서 채워넣기로 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까지 버릴 수 있단 두려움이 분열된 정치권을 하나로 통합시킨 덕분이죠. 자, 그럼 혹시 이것도 가능할까요? 징병제 부활.독일은 2011년 군대 징집을 중단했죠. 더 이상 대규모 군대가 필요 없는 시대가 됐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블록 간 대립은 끝났고, 다시 재현될 조짐도 없다고 본 거죠. 이미 서방에선 징병제가 옛 유물이 되어가던 시점이었습니다. 미국은 1973년 일찌감치 모병제로 전환했고 대부분 나토 국가도 1990년대엔 징병제를 없앴으니까요.현재 독일군은 약 18만명. 냉전 시기 정점(약 49.5만명)과 비교하면 절반에도 한참 못 미칩니다. 독일 연방방위군 사령관 카르스텐 브로이어는 현재 독일군 인력이 최소 10만명 부족하고, 제대로 된 군대가 되려면 46만명이 돼야 한다고 말하죠.징병제 재도입은 독일 정치권의 뜨거운 논쟁거리입니다. 현 국방장관 보리스 피스토리우스는 지난해 11월 스웨덴식 징병제 도입을 주장하기도 했죠. 2017년 징병제를 부활한 스웨덴은 만 18세 남녀 모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검사를 실시합니다. 그리고 그중 가장 건강하고 체력 좋고 똑똑한 일부 인원(약 30%)을 징집하죠.하지만 독일의 징병제 부활을 두고는 “청소년 자유에 대한 심각한 침해”라는 반대론(중도우파 ‘자유민주당’)부터 ‘2년 의무복무’ 주장(극우 성향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까지,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립니다. 재정 규칙보다 오히려 합의에 이르기가 더 어려운 문제일지도 모르죠.어쨌든 잊혀졌던 징병제까지 이토록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됐다는 건 그만큼 국방이 독일의 중요한 실존적 문제로 떠올랐다는 뜻입니다. 평화배당금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걸 실감하게 되는데요. 그동안 복지국가를 떠받쳐놨던 평화배당금이 이렇게 사라지면 독일을 포함한 유럽은 어디로 향해 갈까요. FT 칼럼니스트 자난 가네쉬의 답은 간단합니다. “유럽은 복지국가(welfare state)를 축소하고 전쟁국가(warfare state)를 건설해야 한다”는 거죠. 그동안 개혁이 필요한 걸 알면서도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했던 사회지출에 대한 삭감이 본격화될 겁니다. 그렇게 독일은 깨어날 거고, 어쩌면 그 산업적인 힘과 GDP 성장, 강력한 군대가 다시 돌아올지 모르죠. 그리고 이 변화를 촉발한 주인공이 바로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점이 역사의 아이러니로 남을지도. By.딥다이브유럽의 병자인 줄 알았던 독일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달릴 준비를 합니다. 과연 다시 한창때처럼 그렇게 뛸 수 있을까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독일이 국방비의 무제한 차입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합니다. 독일의 재정 확장을 가로막던 ‘부채 브레이크’를 풀겠다는 겁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일으킨 안보 불안이 느리기로 유명한 독일 정치권을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금융시장은 환호합니다. -냉전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독일 군사력은 쪼그라들었습니다. 모든 무기가 부족한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무기고가 빠르게 비어가고 있습니다. 이를 다시 메우려면 국방 지출을 대거 늘려야 합니다. 라인메탈을 비롯한 유럽 방위산업 기업엔 큰 호재입니다. -독일은 14년 전 중단한 징병제도 부활시킬까요. 이를 둘러싼 논의는 점점 활발해집니다. 평화배당금 시대는 끝났고, 복지지출 삭감은 불가피합니다. 더 적은 복지와 더 많은 국방비의 새로운 시대가 찾아옵니다. 역사적인 전환점이죠. 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초부유층이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럭셔리 신상품 출시가 예고됐습니다. 가격은 단돈 500만 달러(약 72억원). 바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도입을 예고한 새로운 ‘골든 비자(Golden Visa)’입니다.거액을 내면 영주권 또는 시민권을 준다는 발상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누가, 왜 그 돈을 기꺼이 지불할까요. 생각보다 훨씬 거대한 글로벌 산업, 골든 비자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2월 2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신상 ‘골드 카드’는 무엇?먼저 개념부터 정리할게요. 영주권과 시민권, 둘은 다르죠.-영주권(또는 거주권)=외국인이지만(국적 안 바뀜) 그 나라에서 거주와 취업을 제한 없이 할 수 있는 권리(기간이 정해져 있으면 거주권, 계속 갱신할 수 있으면 영주권)-시민권=그 나라 국적을 획득함을 의미영주권자는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시민권자보다는 제한됩니다. 선거권이나 피선거권에 제약이 있고요. 특히 눈에 띄는 차이는 여권을 주냐 안 주냐이죠. 영주권자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그 나라 여권을 받을 수 없습니다.미국에선 영주권을 ‘그린 카드(Green Card)’라고 부르는데요. 얼마 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 영주권을 500만 달러에 판매하겠단 구상을 밝혔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골드 카드(Gold Card)를 판매할 겁니다. 우린 그 카드에 약 500만 달러 가격을 책정할 거고, 그것은 시민권으로 가는 길이 될 겁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이걸 사서 우리나라에 들어오겠죠.” 더불어 그는 골드 카드가 100만 장쯤 팔릴 수 있을 거라고 말합니다. “미친 듯이 팔릴 것 같아요. 시장이에요(It’s a market).”하워드 루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이 골드 카드가 35년간 시행돼 온 투자 이민제도 EB-5 프로그램을 대체한다고 설명했습니다. EB-5 비자는 최소 80만 달러를 미국 기업에 투자해서 최소 10개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조건으로 영주권을 내주는 제도인데요. 이건 없앤다는 겁니다. EB-5는 일자리 창출이란 목적이 뚜렷한 데다, 연간 발행 한도도 1만개로 정해져 있어서 대놓고 장사하는 느낌까진 아니었는데요.이와 달리 트럼프 대통령의 골드 카드는 아마도 500만 달러를 정부에 수수료로 직접 지불하는 식이 될 거라고 합니다. 루트닉 장관은 “우리는 그 돈을 사용하여 (재정) 적자를 줄일 수 있다”고 말하죠. 적자 감축을 위해 정부가 고액 영주권 판매에 나선다는 점을 당당하게 밝힌 셈인데요. 혹시 러시아 재벌들에게도 그걸 팔 생각이 있느냐는 기자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이렇게 답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아주 좋은 사람인 러시아 재벌들을 알고 있어요.”요즘 핫한 골든 비자는 이것경제적 기여를 하면, 즉 돈을 내면 신속하게 영주권(또는 거주권)을 내주는 이런 제도. 흔히 ‘골든 비자(Golden Visa)’라고 부르죠. 이 분야 전문가인 크리스틴 수락 런던정경대(LSE) 교수에 따르면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 약 60개국이 골든 비자 프로그램을 운영 중입니다. 또 돈으로 아예 시민권(국적)까지 살 수 있는 ‘골든 패스포트(Golden Passport)’ 제도가 있는 나라도 10여 개국이 있는데요. 주로 몰타·도미니카 같은 작은 나라이지만, 오스트리아도 이에 해당됩니다(단, 오스트리아는 금액이 최소 950만 달러로 매우 비쌈).언제부터 영주권 또는 시민권이 돈으로 사고파는 상품이 됐을까요. 이런 골든 비자 또는 골든 패스포트가 처음 생겨난 건 1980년대. 1983년 몇천달러에 여권을 판매한 남태평양 작은 섬나라 통가가 이 분야 선구자였습니다. 그리고 1986년 캐나다가 골든 비자를 도입하면서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렸죠. 당시 홍콩의 중국 반환을 앞두고 불안해하던 홍콩인들이 캐나다의 주요 고객이 됐고요. 이어 1990년 미국이 일자리 창출과 외국인 투자 유치를 이유로 EB-5를 도입합니다.판이 본격적으로 커진 건 2010년 전후. 2008년 영국을 시작으로 아일랜드·포르투갈(2012년), 스페인·그리스·헝가리(2013년) 등 재정 사정이 어렵던 유럽 국가가 줄줄이 골든 비자를 도입합니다. 주로 현지 부동산에 수십만 유로를 투자하면 5~10년 거주권을 내주는 식이었는데요. 이런 골든 비자를 얻으면 유럽 29개국이 체결한 ‘솅겐 조약’에 따라 다른 EU 국가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죠. 또 몇 년 지나면 EU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는 통로도 되고요. 덕분에 골든 비자가 큰 인기를 끌면서 남유럽 국가 재정엔 쏠쏠한 도움이 됐습니다.골든 비자가 대히트를 친 나라로는 말레이시아가 있습니다. 2002년 시작된 ‘마이 세컨드 홈(MM2H)’ 프로그램은 중국인을 중심으로 한 외국인을 연간 수천 명씩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죠. 최근 이 시장의 절대 강자는 아랍에미리트(UAE)입니다. 최소 200만 디르함(약 7억8000만원)을 투자하면 5~10년 거주 허가를 내주는 골든 비자 프로그램을 2019년 도입했는데요. 2023년 한 해 동안 발급된 게 무려 15만8000건. 이제 전 세계 골든 비자 발급 건수의 80% 이상을 UAE가 차지할 정도입니다. UAE엔 개인소득세가 없다는 점이 특히 유럽 부호들에게 어필했죠.한국에도 골든 비자에 해당하는 제도가 있는 건 아시죠? 2010년 제주도부터 도입된 ‘관광·휴양시설 투자이민제’인데요. 특정 지역 부동산이나 공익사업에 10억원 이상 투자하면 거주 비자(F-2)를 내주고, 5년간 자격을 유지하면 영주권(F-5)을 줍니다. 다만 이 프로그램으로 국내 체류하는 외국인은 2255명으로 그리 많진 않은데요(이 중 94%는 중국인). 참고로 일본과 중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골든 비자 프로그램을 운영하지 않습니다. 자금세탁 우려+집값 급등수억 원 투자금을 턱턱 내놓는 부유한 이민자. 나라 경제가 어려울 땐 반가운 존재일 수밖에 없겠죠. 실제 그리스·포르투갈에선 한때 골든 비자가 외국인 직접 투자(FDI)의 10~15%를 차지할 정도로 기여도가 컸습니다. 국가 부도로 무너졌던 그리스 부동산 시장을 회복시킨 것도 골든 비자 구매자들이었고요.그럼 골든 비자나 골든 패스포트 구매자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일까요. 크리스틴 수락 LSE 교수 연구에 따르면 중국인이 역시 가장 많고요. 이어 중동과 러시아가 큰 수요처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지난 30년 동안의 엄청난 부의 축적과 권위주의 통치, 지정학적 불안 또는 전쟁이 결합된 곳에서 자신의 선택권을 극대화하려는 사람들”이라는 설명이죠. 즉, 그 나라가 좋아서 오는 것도 있겠지만, 모국에 대한 불안·불만이 골든 비자·패스포트 구매의 더 큰 동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그럼 혹시 그 중엔 사기꾼이나 범죄자, 스파이도 섞여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OECD와 EU 집행위원회가 골든 비자·패스포트 제도에 우려를 표하는 이유입니다. 자금세탁 단속을 어렵게 만들고 탈세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거죠. 공무원의 부패나 리베이트 관행, 편법이 결합되면 위험은 더 커질 수 있습니다.바로 이런 이유로 영국과 아일랜드는 2023년 골든 비자를 폐지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안보 불안감이 커지던 시점이었죠. 호주는 역시 스파이와 범죄자가 유입될 수 있고 경제에 별 도움이 안 된단 이유로 2024년 1월 이를 없앴습니다.스페인은 오는 4월 골든 비자 제도를 종료하는데요. 이는 안보보다는 부동산 시장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골든 비자 자금 대부분이 부동산에 투자되면서, 집값 급등의 주범이란 지탄을 받았기 때문이죠. 역시 부동산 문제로 골치 아팠던 포르투갈은 2023년 골든 비자의 투자 목록에서 부동산을 제외했습니다. 즉, 이제 집을 사는 걸로는 안 되고 각종 펀드에 투자해야 골든 비자가 나오죠.이만한 돈벌이가 없다그래서 골든 비자 확대의 유행이 이제 저물고 있다는 분석이 한동안 나왔는데요. 하지만 지난 십수 년 동안 흥행성과 수익성이 이미 검증된 시장이잖아요. 정부 입장에선 이렇게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는 시장이 많지 않죠. 그래서 빠져나가는 국가 못지않게 새로 뛰어드는 국가가 상당합니다. 지정학적 불안정성이 갈수록 커지는 데다, 코인·주식으로 떼돈을 번 초부유층이 빠르게 증가하는 상황에서 수요는 여전히 건재하니까요.일단 홍콩이 지난해 3월 골든 비자를 8년 만에 부활시켰습니다. 중국 정부 입김이 세지면서 홍콩에서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자, 이를 메우기 위해 나선 건데요. 홍콩 골든 비자를 취득하기 위해 채워야 할 순자산 요건은 3000만 홍콩달러(약 55억원). 금액 기준이 상당히 높은 데도 지난해 말까지 800건이나 신청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덕분에 가라앉던 홍콩 고급 부동산 시장에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죠.EU 가입국 중에선 헝가리가 가세했습니다. EU 집행위원회가 반대하는 거 뻔히 알면서도, 외국인 투자를 늘리겠다며 지난해 7월 골든 비자 프로그램을 다시 시행했죠. 부패 의혹으로 2017년 폐지한 지 7년 만의 부활입니다. 최소 25만 유로를 기금에 투자하면 20년(10년 뒤 1회 갱신)의 거주권을 받을 수 있다고 하죠. 경기 침체에 빠진 뉴질랜드도 골든 비자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뉴질랜드는 골든 비자 프로그램이 있긴 했지만, 2022년 기준을 너무 높여버린 바람에 찾는 이가 없었는데요. 올해 4월부터는 500만 뉴질랜드 달러(약 41억원)로 최소 투자금 기준을 대폭 낮추기로 했습니다. 또 영어 능력 제한을 없애고, 의무 체류 기간도 21일로 확 줄였죠. “투자자들이 목적지로 뉴질랜드를 선택하게 하기 위해 투자 비자를 더 간단하고 유연하게 만들었다”는 게 에리카 스탠퍼드 이민부 장관 설명. 영어 못하고 뉴질랜드에 거의 안 와도 돈만 내면 오케이라니. 절박함이 느껴집니다.그리고 급기야 미국까지 뛰어들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정책을 생각하면 놀라운 반전이 아닐 수 없는데요. 골든 비자를 이민자 유치보다는 돈벌이 수단으로 본다는 의미이겠죠.트럼프 대통령 말대로 미국 새 골든 비자 수수료는 500만 달러로 책정될까요? 아직 구체적인 방안이 나온 건 아니라 두고 봐야 하는데요. 솔직히 500만 달러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 너무 비싸긴 합니다. 다른 나라는 펀드나 부동산 자산에 투자하는 금액이 몇억~몇십억원인 거니까, 원금 회수 가능성 있긴 한데요. 이건 한번 내면 사라져 버리는 수수료니까요.물론 세상엔 초부유층이 많고요. 아무리 비싸도 꼭 미국으로 오길 원하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투자이민 컨설팅업체 헨리앤드파트너스의 개인 고객 책임자 도미닉 볼렉은 FT에 이렇게 말하죠. “(미국은) 아직도 부의 창출과 부의 보존에 있어서 놀라운 나라입니다. 중국과 인도는 부의 창출 기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부를 보존하는 게 어려워지죠.” 미국 영주권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보험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보험료로 그 정도 지불할 부유층은 분명히 있겠죠.지난해 미국 재무부가 발표한 연방정부 재정적자는 1조8330억 달러(약 2510조원)인데요. 단순 계산으론 100만개까지도 필요 없고 골든 비자를 36만6600개만(?) 팔면 재정적자는 바로 해소되는 셈입니다. 금전적으로는 밑질 것 없는 장사이니 해볼 만은 하겠네요. 어쩌면 영주권은 미국이 내다 팔 수 있는 가장 귀중한, 돈이 되는 자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By.딥다이브영주권과 시민권이 ‘사치품’이 되어버렸습니다. “부유층이 자유를 사는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데요. 수요와 공급이 맞아떨어지니까 시장이 형성된 거겠지만, 왠지 놀이공원 우선탑승권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00만 달러짜리 골드 카드를 팔겠다는 구상을 밝혔습니다. 500만 달러를 미국 정부에 내면 신속하게 미국 영주권을 주겠다는 거죠. 그 돈은 재정적자 감축에 쓰겠다고 합니다. -돈으로 영주권을 사는 ‘골든 비자’는 전 세계 약 60개국이 운영 중입니다. 1980년대 처음 등장해, 남유럽 국가가 재정위기를 겪은 2010년쯤부터 시장이 커졌죠. 하지만 자금세탁, 세금회피, 집값 급등 같은 부작용은 꾸준히 지적됩니다. -한동안 골든 비자를 없애는 국가가 이어졌지만, 최근엔 부활시키는 나라도 늘어갑니다. 다 돈 때문이죠. 홍콩·헝가리·뉴질랜드가 골든 비자 제도를 되살리거나 문턱을 대폭 낮춰 부유층에 어필 중입니다. 그리고 이제 미국까지. 가장 돈이 되고 귀한 자산을 내다 팔려는 나라들이 점점 많아지는 걸까요. *이 기사는 2월 2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아프리카 보츠와나 광산부터 뉴욕 5번가 보석점까지. 연간 100조원 규모로 반짝이던 산업이 빛을 잃어갑니다. 바로 다이아몬드 이야기이죠. 다이아몬드 가격이 급락하면서 업계 최강자 드비어스가 매물로 나오고, 인도 공장이 줄줄이 문 닫고, 보츠와나 정권이 58년 만에 교체되기까지 했는데요.수백 년 동안 불황의 파고를 넘겨온 다이아몬드. 하지만 실험실 다이아몬드라는 쌍둥이로 인해 전례 없는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영원하다는 약속이 무색해진 다이아몬드 산업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2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대량 실직에 정권 교체까지화학적으로는 100% 탄소, 상업적으로는 100% 마케팅. 다이아몬드의 진짜 정체를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이거죠. 20세기 초반까지 초부유층이나 끼는 호화사치품이던 다이아몬드 반지를 진정한 사랑의 상징으로 둔갑시킨 건 드비어스의 이 유명한 광고문구였습니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히(A Diamond is Forever)”.1947년 미국 광고대행사가 만든 이 문구를 내세운 대대적인 마케팅 공세는 적중했죠. ‘결혼반지는 다이아몬드’라는 인식을 대중에 심어주는 데 성공했고요. 이때부터 청혼할 땐 루비나 사파이어가 아닌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미는 게 공식처럼 자리 잡습니다. 미국 매체 애드에이지(AdAge)는 1999년 ‘다이아몬드는 영원히’를 20세기 최고의 슬로건으로 꼽았죠.그런데 이 천재적인 마케팅의 주인공이자, 세계 최대(금액 기준) 다이아몬드 생산업체인 드비어스(De Beers). 얼마 전 지난해 실적을 공개했는데 많이 어렵습니다. 매출(33억 달러)이 23%나 줄었고요. 재고물량만 20억 달러어치가 쌓여, 2008년 금융위기 수준입니다. 막대한 재고를 털기 위해 콧대 높은 드비어스가 지난해 12월 이례적으로 원석 가격을 10~15%나 깎았는데요. 블룸버그에 따르면 그런데도 고객들은 비싸다며 거래를 거부했다죠.모회사 앵글로 아메리칸(Anglo American)은 지난해부터 드비어스에서 발을 빼기 위해 매각을 모색 중인데요. 최근의 손실을 반영해 드비어스 장부가치를 지난해 76억 달러에서 40억 달러로 대폭 낮췄습니다. 하지만 시장에선 여전히 너무 비싸다는 반응이죠. 사겠다는 곳이 없으면 앵글로 아메리칸은 드비어스 IPO를 추진할 수도 있습니다.이 산업이 얼마나 빠르게 추락 중인지는 다이아몬드 가격이 잘 보여줍니다. 1캐럿 다이아몬드 가격이 블룸버그 표준 가격 기준으로는 3420달러(약 488만원). 직전 고점인 2022년 5월(6720달러, 960만원)과 비교하면 거의 절반 수준입니다. 반등할 기세 없이 꾸준히 하락 중이죠. 좀처럼 바닥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다이아몬드 절단·연마의 세계적인 중심지로 통하는 인도 수라트시. 2023년 말 전 세계 최대 규모 사무빌딩으로 기록된 다이아몬드 거래소를 개장하기도 한 ‘다이아몬드 시티’인데요. 지금은 다이아몬드 공장이 줄줄이 문을 닫으면서 실업자가 넘쳐나는 절망의 도시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지난 18개월 동안 자살한 실직 다이아몬드 노동자만 71명에 달한다는 마음 아픈 뉴스가 이어집니다.추락하는 다이아몬드는 정권도 갈아치웁니다. 지난해 10월 실시된 보츠와나 총선에선 집권당이 참패해 4위로 주저앉았죠. 1966년 독립 이후 58년간 집권해 온 여당의 굴욕적인 패배이자, 놀라운 정치적 전환점이었는데요. 막대한 다이아몬드 매장량 덕분에 그동안 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살고 안정적인 나라로 꼽히던 보츠와나. 하지만 다이아몬드 시장의 침체로 실업률이 27%로 치솟았고 정권은 심판받았습니다.중국 시장은 사망2021년부터 2022년 초, 다이아몬드 시장은 대활황이었습니다. 팬데믹 직후 ‘보복소비’ 열풍이 분 데다, 미뤘던 결혼식이 한꺼번에 열렸기 때문인데요. 돌이켜보면 마지막 불꽃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파티는 끝났고, 남은 건 혼란스러운 잔해들뿐입니다. 사실상 죽어버린 중국 시장, 그리고 천연 다이아몬드의 10분의 1 헐값이 된 실험실 다이아몬드가 그것이죠.중국 다이아몬드 시장의 붕괴는 놀라운 수준입니다. 다이아몬드 시장 분석가 폴 짐니스키는 중국 수요가 지난해 최대 50%나 줄었을 거라고 분석했죠. 중국은 이전 10년 동안 유지했던 세계 2위 다이아몬드 구매국 지위(1위는 미국)를 지난해 인도에 뺏겼습니다. “중국 시장은 죽었다. 앞으로 몇 년 동안 회복이 보이지 않는다”(루카라다이아몬드 CEO인 윌리엄 램)는 한탄이 업계에서 나오는데요.중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경기 부진과 소비 침체, 그리고 결혼 감소 때문이란 각종 분석이 쏟아집니다. 중국인들이 지갑이 얇아지면서 실속을 챙기게 됐고요. 결혼 건수가 45년 만에 최저(610만6000건)로 떨어진 영향이 컸습니다. 동시에 중국 공산당의 ‘돈자랑 콘텐츠’ 단속도 한몫합니다. 지난해 중국 당국 지시에 따라 소셜미디어 기업들은 ‘부를 과시하고 돈을 숭배하는’ 콘텐츠를 내리고 계정을 폐쇄했죠. 가뜩이나 식어버린 소비심리에 찬물을 끼얹은 겁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건 중국 소비자들이 지난 몇 년 동안 다이아몬드값이 떨어지는 걸 봐버렸다는 겁니다. 마치 가격이 급락한 중국 부동산 시장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듯이, 다이아몬드 구매도 피하고 있죠. 전형적으로 버블이 꺼지는 모습인데요. 대신 중국 젊은이들은 이제 가치저장소로서 투자가치가 있는 금을 사는 데 열중한다고 합니다.가짜 아닌 진짜 합성 다이아몬드호황과 불황의 주기는 다이아몬드 시장엔 익숙한 일입니다. 가깝게는 2020년 팬데믹과 2008년 금융위기를 견뎌냈고요. 역사적으론 남아프리카에서 처음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된 1867년 직후, 대공황과 전쟁이 이어진 1930년대의 암울한 시절도 겪었죠. 다이아몬드 가격은 주기적으로 추락했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상승곡선을 그리곤 했습니다. 침체기가 지나고 나면 새로운 부자가 다시 생겨났고,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는 그들에게 매력을 뿜어냈으니까요.그런 점에서 중국 시장의 붕괴는 명백한 위험이지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떠오르는 다른 나라, 예컨대 인도나 아랍에미리트가 그 자리를 메워갈 겁니다. 정작 업계를 짓누르는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죠.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합성(Lab Grown) 다이아몬드의 공습입니다. 이에 대해 뉴욕의 다이아몬드 도매상 마니시 샤는 블룸버그에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 없는 일입니다. 산업 전체가 혼란에 빠졌습니다.”스웨덴 한 실험실에서 다이아몬드를 세계 최초로 합성한 게 1953년. 그 뒤로 수십 년 동안 산업용으로만 쓰였던 실험실 다이아몬드가 기술 발전으로 보석 자리까지 차지하게 된 지는 이제 10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건 전문가도 눈으로는 뭐가 천연이고 뭐가 합성인지 구별할 수 없죠. 채굴한 원석과 화학성분이나 물리적 특성이 완전히 동일하기 때문에 ‘가짜’ 다이아몬드가 아닙니다. 단지 자연에선 10억년 이상인 제조기간이 실험실에선 2-3주에 불과하다는 차이이죠.품질은 같은데 더 싼 다이아몬드. 이 게임체인저에 많은 귀금속 브랜드가 열광했습니다. 심지어 드비어스조차도 이 시장에 뛰어들었을 정도였죠. 여전히 천연 다이아몬드만 고집하는 롤렉스 같은 브랜드도 있지만, 브라이틀링 같은 명품시계 브랜드는 이미 합성 다이아몬드로 100% 전환했습니다. 전체 다이아몬드 주얼리 시장에서 합성품의 비중은 2015년만 해도 제로였지만, 이젠 20% 정도로 불어났을 걸로 추정됩니다.물론 다이아몬드가 천연인지 합성인지를 몇초 만에 구분해 내는 장비는 이미 나와 있습니다. 또 아무리 똑같아 보여도 엄연히 다른 제품이긴 하죠. 드비어스의 알 쿡 CEO는 최근 블룸버그TV에 출연해 이렇게 말합니다. “모나리자 포스터를 미술관에 걸어놓고 사람들에게 진짜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진짜가 아니잖아요.”다이아몬드의 운명은?하지만 아무리 천연 돌과 구분된다 해도, 가격 차이가 한 10배쯤 난다면 소비자엔 매력적인 선택지 아닐까요. 이게 바로 최근 벌어지는 일입니다. 2015년 처음 합성 다이아몬드가 주얼리 시장에 선보였을 땐 천연 제품 가격의 90% 수준이었는데요. 지난 몇 년간 기술 발전과 공급 급증(주로 중국에서)으로 값이 뚝뚝 떨어져 도매가격은 이미 천연다이아몬드의 5~10%로 떨어졌습니다. 다만 소매가격은 그 정도까진 아니고 천연산의 4분의 1 정도에 머뭅니다. 소매상이 합성다이아몬드에서 마진을 엄청나게 챙기고 있단 뜻이죠.그럼, 이 저렴한 합성 다이아몬드의 공습은 어떤 지각변동을 일으킬까요. 컨설팅기업 매켄지는 지난해 보고서에서 두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습니다.①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이어진다면?합성 다이아몬드가 결국 대세가 될 겁니다. 같은 품질이면 더 싼, 또는 같은 값이면 더 큰 합성 다이아몬드를 대부분이 선택하겠죠. 대신 틈새 고급품 시장은 따로 갈 겁니다. 천연 다이아몬드는 마치 클래식 자동차나 고급 빈티지 아이템 수집 같은 지위가 되는 셈입니다. 드비어스 같은 업체 입장에선 시장이 쪼그라든다는 뜻이니, 상당한 암울한 얘기인데요. 만약 천연 다이아몬드 반지를 이미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되레 흐뭇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걸 잘 간직해두면 대대로 물려줄 가보가 될지도 모르니까요.②합성 다이아몬드 가격이 훨씬 더 무지막지하게 떨어진다면?다이아몬드 업계 유력인사인 라파포트 그룹의 마틴 라파포트 회장은 이코노미스트에 이렇게 말합니다. “실험실 다이아몬드가 캐럿당 10~15달러인 시대가 곧 올 겁니다.” 만약 실험실 다이아몬드가 ‘가짜 다이아몬드’로 불리는 큐빅 지르코니아 가격 수준이 된다면. 이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결혼반지에 다이아몬드를 박는 건 다이아몬드가 비싼 보석으로 보여서잖아요. 그런데 몇만원짜리 싸구려 돌과 누가 봐도 똑같아서 구분이 잘 안 된다면? 아무리 천연산이라고 해도 누가 굳이 비싸게 사서 끼려고 할까요. 매켄지는 이런 시나리오에서는 “(합성이든 천연이든) 모든 다이아몬드는 단순히 유행이 지나고, 매력을 잃고, 더 이상 결혼반지 필수품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봅니다. 루비, 사파이어, 아니면 24K 금이 훨씬 나은 선택이 되겠죠. 다이아몬드의 완전한 몰락일 겁니다.어느 시나리오가 더 그럴듯해 보이시나요? 최근 이코노미스트 칼럼은 두 번째 시나리오를 지지하며 이렇게 조언합니다. “다이아몬드로 청혼하지 마세요.” 역시 영원한 건 없는 걸까요. By.딥다이브아무리 천재적인 세기의 마케팅도 파괴적 혁신 앞에선 무용지물인 걸까요. 그 혁신이 기존 제품뿐만 아니라 아예 시장 자체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니, 흥미롭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다이아몬드 가격이 3년 전의 절반 수준으로 급락하면서 업계가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적자에 시달리는 드비어스가 팔리게 생겼고, 인도 다이아몬드 공장 노동자들은 직장을 잃었고, 보츠와나는 58년 단일정당 통치가 무너졌습니다. -직접적인 원인은 중국시장의 붕괴입니다. 2010년 이후 성장을 떠받쳐온 중국 수요가 반토막 났습니다. 소비부진과 결혼감소, 공산당의 기강 단속이 영향을 미쳤죠. 중국에서 버블이 터진 셈입니다.-호황과 불황의 주기는 늘 있어왔습니다. 더 큰 문제는 합성 다이아몬드의 등장으로 업계가 전환점을 맞이했다는 거죠. 육안으로 구분할 수 없는 실험실 다이아몬드는 이제 천연산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에 팔립니다. 이대로 합성 다이아몬드가 대세로 자리잡고 천연 제품은 골동품 같은 대접을 받게 될까요. 아니면 합성이든 천연이든 모든 다이아몬드가 시시해질까요. 업계는 생존을 위해 마케팅 묘수를 짜내지만 도전은 만만찮습니다.*이 기사는 2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요즘 전 세계적으로 포퓰리스트이면서 ‘스트롱맨’ 스타일인 지도자가 대세이죠. 이 중에서도 떠오르는 샛별이라 할 만한 인물이 있는데요. 바로 지난해 10월 취임한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입니다.프라보워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요. 한쪽으론 인기영합적인 정책에 재정을 퍼부으면서, 다른 한편에선 각 부처 예산을 대폭 삭감하는 가혹한 긴축 정책을 병행합니다. 복지 확대와 재정 건전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단 거죠. 대중은 이에 열광하며 경이로운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전 세계 투자자들은 영 못 믿겠다는 반응입니다. 과연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한 인도네시아의 포퓰리즘 실험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무상 급식과 무료 검진80.9%. 지난달 집권 100일 차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프라보워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지지율입니다. 엄청나죠. 전임자 조코 위도도 전 대통령도 높은 인기로 유명했는데(지지율 65~75%), 이를 한참 뛰어넘는 수준입니다.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인도네시아 주식시장은 반대로 고꾸라지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서 인도네시아 종합주가지수 상승률은 -6.59%. 한국(코스피 +7.65%)이나 홍콩(항셍 +11.17%)보다 낮은 건 물론이고, 요즘 증시 부진에 시달리는 인도(센섹스 -3%)나 말레이시아(-3%)보다도 저조한 성적입니다. 프라보워 대통령 취임 뒤 줄곧 증시는 내리막이죠. 해외 투자자들이 인도네시아에서 발을 빼고 있기 때문인데요.왜 국민은 프라보워 대통령에 열광하는데, 투자자들은 고개를 흔들며 빠져나갈까요. 국내에서 인기 끄는 분배 정책이 자칫 경제성장엔 오히려 마이너스일 수 있다고 여겨서죠.그럼, 프라보워 대통령은 취임 뒤 뭘 했을까요. 눈에 띄는 몇 가지 정책을 뽑자면 이런 겁니다.①학생 무상급식=프라보워 대통령 공약 중 가장 핵심이면서도 논란이 많았던 정책이죠. 전 세계 최대 규모의 학생 무상급식 계획. 1월 6일 드디어 공식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첫날 학교에서 점심을 제공받은 학생은 57만명이었고요. 이를 점차 확대해 2029년엔 8290만명 학생에 매일 점심 급식을 제공한다는 게 계획이죠. 1인당 식사에 드는 비용은 1만 루피아(887원). 전액 정부 예산으로 지원됩니다. 무상급식에 대한 학생 반응은 다양한데요(맛있어요, 두부는 싫어요, 같이 먹어서 좋아요 등). 적어도 배를 곯는 학생은 없게 된다는 건 긍정적이죠. 또 급식 식재료나 식사를 납품하는 산업을 키우는 효과도 기대됩니다. 다만, 전면 시행 시 연간 약 40조원의 예산이 들어갑니다.②전 국민 무료 건강검진=인도네시아의 2억8000만명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무료 건강검진이 도입됩니다. 2월 10일 처음 시행됐는데요. 모든 국민에 건강검진 바우처(약 17만원의 가치)를 지급하고, 생일 한 달 안에 보건소에서 검사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거죠. 검진 바우처가 일종의 정부가 주는 생일선물인 셈입니다. 인도네시아는 결핵 발병률이 특히 높은 나라(10%)이죠. 이런 전염병 예방에 무료 검진이 효과적일 거란 게 의학계 의견인데요. 다만 공공보건소가 그 많은 인원을 다 수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③최저임금 6.5% 인상=지난해 말 프라보워 대통령은 2025년 최저임금 6.5% 인상을 발표했습니다. 정부 규정에서 공식으로 정한 것(물가상승률, 경제성장률 등 반영)의 거의 두배 수준이죠. 6.5%라는 수치가 발표되자 노동계는 환영했지만, 상공회의소 측은 “6.5% 수치가 어느 공식에서 나왔느냐”며 당황했는데요. 프라보워 대통령은 “우리는 근로자 복지 개선을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고 강조했습니다.부가세 인상은 없던 일로왜 프라보워 대통령이 인기를 끄는지 좀 감이 오시나요? 그는 국민이 좋아하는 정책을 하는 것 못지않게 싫어할 만한 정책을 하지 않는 데도 적극적입니다. 최근엔 이런 행보를 보였죠.①부가세 인상 취소=1월 1일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렇게 발표했습니다. “대통령이 계획됐던 부가가치세 인상을 취소하고 현재의 11%로 유지하는 특별한 선물을 주었습니다.” 2025년 1월 1일 부가가치세를 11%에서 12%로 올린다는 계획은 한참 전인 2021년 제정한 세법에서 이미 정해놨던 내용인데요. 프라보워 대통령이 시행 막판에 이걸 뒤집은 겁니다. 그 결과 부가세 인상은 일부 사치품에만 적용되죠. 개인용 제트기, 요트, 고가 주택이 대상입니다. 당연히 국민은 이를 대환영했습니다.②LPG 보조금 개혁 철회=한동안 인도네시아는 주로 가정에서 조리용으로 쓰는 3㎏짜리 둥근 초록색 LPG 가스통(‘멜론 가스’라고 불림) 때문에 시끄러웠습니다. 정부 에너지부가 2월 1일부터 소규모 소매점의 LPG 판매를 금지했기 때문인데요. 막대한 LPG 보조금이 엉뚱한 데로 새 나가는 걸(소매점의 부당한 가격 인상) 막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멀리 떨어진 공식 대리점까지 가서 긴 줄을 서야만 하자, 소비자 불만이 폭발했고요. 급기야 한 노인이 1시간 동안 줄을 서다가 사망하는 사건까지 벌어졌죠. SNS에서 반대운동이 불붙자(해시태그는 #lpg3kg) 결국 프라보워 대통령이 나섰고요. LPG 소매점 판매 금지 정책은 바로 철회됩니다.사실 부가세 인상이나 에너지 보조금 개혁 정책은 새로 도입되는 복지정책(무상 급식, 무료 건강검진 등)에 드는 막대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국민이 싫어한다고 이를 다 철회해 버렸으니. 그 많은 돈을 이제 어디서 마련해야 할까요.그래서 프라보워 대통령이 꺼낸 카드가 있습니다. 바로 1월 22일 발표한 ‘예산 지출 효율화 대통령령’이죠. 한마디로 말해, 올해 정부 예산 중 약 8.4%에 해당하는 27조원가량을 삭감해 버렸습니다. 예산이 지난해 다 짜여서 집행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싹둑, 잘려 나가버린 거죠.예산 가위질로 대혼란예산이 모자란다며 정부가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는 경우는 많이 봤지만, 대통령이 나서서 집행 중인 예산을 삭감하는 건 우리에겐 낯선 일인데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법으로 재정적자가 GDP의 3%를 넘지 못하게 상한선이 정해져 있어요. 상당히 엄격한 규제인데요. 이 3% 상한선을 넘기면 법 위반이라 큰일 나는 일로 다들 여기기 때문에, 대통령이라고 해도 이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그런데 무상급식 도입하면 재정적자가 지난해 GDP의 2.29%에서 올해는 3.1%로 확 불어날 거란 분석이 이미 나왔거든요. 3% 상한선은 절대 넘길 수 없고, 그렇다고 세금을 올려서 재정적자를 메울 수도 없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입니다. 정부 지출 중 다른 부분을 팍팍 쳐내야죠.그래서 예산이 대폭 깎인 정부 부처와 국가기관은 지금 난리입니다. 중앙부처는 사무실 전등을 끄고, 엘리베이터 운행을 중단하고, 문구류 구매를 90% 줄이고, 주 2일 재택 근무를 실시했고요. 출장 경비가 반토막 나서 이제 장관도 이코노미석을 타야 할 판입니다. 한동안 공무원 보너스가 폐지될 거란 흉흉한 소문이 돌았죠(이후 대통령실은 보도를 부인). 국립도서관은 일요일 휴관을 발표했다가, 반대 여론에 못 이겨 이를 취소하기도 했습니다.현재 각 부처는 어느 예산항목을 얼마나 줄일지 구체적인 계획을 짜고 있는데요. 아마도 의약품 조달(보건부), 대학 지원(교육부), 연구개발(과학기술부) 같은 사업이 크게 영향을 받을 겁니다. 특히 공공사업부는 예산이 70%나 깎였기 때문에, 도로·교량 같은 인프라 건설사업은 대거 중단될 가능성이 큽니다.여기서 놀라운 건 정작 막대한 예산이 배정된 국방부와 경찰청 같은 기관은 한 푼도 깎이지 않았다는 점인데요. 프라보워 대통령은 4성 장군이자 국방부 장관 출신으로, 방위력 강화를 매우 강조하는 인물입니다.인도네시아 경제정책의 대전환이런 급격한 예산 재분배에 대한 반발이 당연히 터져 나옵니다. 하지만 프라보워 대통령은 반대 세력을 이렇게 비판하며 밀어붙이고 있죠. “관료조직엔 마치 작은 왕이 된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돈을 절약하고 싶습니다. 그 돈은 국민을 위한 겁니다.”프라보워 대통령의 이런 행보는 인도네시아 경제 정책의 대전환을 의미합니다. 전임 위도도 대통령은 인프라 투자 중심의 정책으로 인도네시아 경제의 부흥을 가져왔죠. 특히 외국 기업 투자를 유치하는 데 열을 올렸는데요. 이런 투자 위주의 성장 정책은 단기간에 고용과 GDP를 끌어올리는 데 효과적입니다. 기업 친화적이라 주식시장에서도 환영하고요.대신 그 과정에서 경제 불균형이 커지기 마련이라는 게 문제인데요. 프라보워식 정책엔 인프라 투자보다는 이제 내수 소비 진작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의미가 담겨있죠.방향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순 없습니다. 최저임금 인상은 소비 촉진에 효과 있는 건 맞죠. 또 애들 밥 잘 먹이고 건강검진 잘해서 인적자원의 질을 향상시키는 건 국가경제에 중요하고요.다만 이런 효과가 눈으로 보이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수 있습니다. 해외 투자자 입장에선 이러다 괜히 재정적자만 왕창 늘어나고 별 효과도 없는 건 아닌가 불안할 수밖에요. 루피아 통화가치가 뚝뚝 떨어지고 인도네시아 주가지수가 하락하는 이유입니다. PT뱅크센트럴아시아의 바라 쿠쿠 마미아 연구원은 블룸버그에 이렇게 말합니다. “성장 전망에 있어 걱정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자원 재분배가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기 전에 단기적인 성장 골짜기에 빠질 수 있죠.”하지만 80% 넘는 높은 지지율은 당분간 프라보워 대통령에 계속 힘을 실어줄 겁니다. 이 정도 지지율이면 기득권층(투자자·기업·관료 등)의 불만 따위는 무시할 수 있죠. 이런 허니문 기간이 얼마나 이어질까요. 인도네시아대학교의 정치학 강사 아디티아 페르나다는 프라보워 대통령의 높은 인기를 두고 “그가 사회적 지원을 분배하는 산타클로스로 여겨진다”고 설명하는데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건 단기적으로 매우 유용하지만 5년 동안 그렇게 할 순 없을 겁니다.” By.딥다이브‘효율성’을 내세워 정부 예산 삭감에 열 올리는 지도자들이 요즘 눈에 띕니다. 프라보워(인도네시아), 밀레이(아르헨티나), 그리고 트럼프(미국) 대통령이죠. 각각 이를 통해 이루려는 목표는 다르지만, 공공부문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명분은 상당한 호응을 끌어내기도 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취임한 지 4개월. 프라보워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무려 80.9%라는 경이적인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생 무상급식, 전 국민 무료 건강검진 등. 공약했던 복지정책을 빠르게 시행 중이죠. 부가세 인상 철회라는 선물까지 안겼습니다. -문제는 돈이죠. 무작정 국가 빚을 늘릴 수 없기 때문에 프라보워 대통령은 기존에 배정된 예산의 대폭 삭감을 명령했습니다. 연구개발비, 대학지원금, 인프라 건설비를 확 깎아서 아이들 밥 먹일 재원을 마련할 겁니다. -인도네시아 경제성장 정책의 대전환입니다. 그동안은 인프라 투자와 외국기업 유치가 인도네시아 경제를 이끄는 원동력이었는데요. 이제 내수 소비로 방향을 튼다는 신호이죠. 이런 변화가 성공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일단 해외 투자자들은 불안해서 발을 빼는 중입니다. *이 기사는 1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혁신을 탄생시키는 조직은 뭐가 다를까요. 혁신의 조직을 만들어낸 공통의 레서피는 존재할까요. 전 세계를 쇼크에 빠뜨린 중국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딥시크를 보며 이런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딥시크 창업자 량원펑이 전하는 스토리가 어디서 많이 본 듯했거든요. 딥시크의 일하는 방식은 애플, 구글, 넷플릭스 같은 미국 IT 기업 창업자나 연구자들이 했던 얘기와 매우 닮아있었죠. 거기서 찾은 핵심은 이겁니다. 극도로 높은 인재 밀도와 극단적으로 적은 통제의 결합.요즘 한국에서도 딥시크 때문에 AI 기술 육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오늘은 혁신 기업의 레서피를 들여다봤습니다.*이 기사는 1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중요한 건 인재의 규모보다 밀도“판즈정은 2023년 여름 엔비디아 인턴 중 한명이었습니다. 나중에 그에게 정규직을 제안하려 했을 때, 그는 주저 없이 딥시크에 합류했습니다. 당시 딥시크 멀티모달팀은 단 세명이었죠.”딥시크의 추론모델 ‘R1’으로 세상이 떠들썩했던 1월 말. 엔비디아의 수석 엔지니어 위즈딩이 예전 인턴을 축하하며 X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딥시크는 초기부터 엔비디아도 잡고 싶어할 만한 뛰어난 인재를 끌어들인 기업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인데요.량원펑 딥시크 창업자는 이젠 유명해진 지난해 36kr과의 인터뷰에서 “(딥시크에) 신비한 천재는 없다”면서 “명문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들”이라고 말한 적 있죠. 하지만 딥시크의 채용면접을 본 지원자들 얘기는 좀 다릅니다. 그들은 딥시크 채용 방식을 두고 “중국 기업 99%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 천재 1%만 채용한다”는 식이라고 설명하죠. 딥시크가 신입 직원을 채용할 때 특히 중요하게 보는 건 학력과 함께 경시대회 입상 경력이라는데요. 업계에선 “딥시크는 금메달 아래는 원하지 않는다”고 얘기합니다. 경시대회 1등들만 모아놨단 뜻이죠.(이게 천재가 아니면 뭐죠?)이런 인재 영입을 위해선 과감한 투자는 필수입니다. 딥시크 연봉은 중국 IT업계에서도 급여가 세기로 유명한 바이트댄스(틱톡 모기업)를 앞선다고 하죠. 내부자에 따르면 “바이트댄스가 제안하는 연봉을 근거로 해서, 그보다 더 높여준다”고 합니다.그럼, 왜 딥시크처럼 혁신을 추구하는 기업은 연봉을 더 주더라도 이렇게 최고의 인재만 골라 영입해야 할까요. 당연한 것 아니냐고요?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한 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고 얘기하지 않았느냐고요?그런데 딥시크가 보여주는 건 단순히 인재 수가 많아야 한다는 이야기와는 좀 다릅니다. 딥시크 직원 수는 고작 약 150명. S급 연구개발 인재의 수로 따지자면 바이두나 텐센트 같은 대기업의 10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데요.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이겁니다. ‘인재 밀도’의 중요성.예컨대 최고의 인재 80명과 평범한 직원 40명으로 구성된 기업과 단지 뛰어난 인재 80명만으로 구성된 기업. 둘 중 더 성과를 낼 수 있는 건 어디일까요? 후자였다고 합니다. 이건 넷플릭스 창업자 리드 헤이팅스트가 직접 겪고, 자신의 책 ‘규칙 없음(No Rules Rules)’에 소개한 이야기인데요.2001년 닷컴버블이 꺼지면서 위기에 처한 넷플릭스는 전체 직원 120명 중 40명이나 해고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는데 회사 분위기가 가라앉기는커녕, 이상할 정도로 너무 좋은 거죠. 왜 그런가 봤더니, 재능 있고 창의적인 인재들끼리만 모이자 서로에게 배우고 의욕을 불어넣으면서 능률이 솟구쳐 오른 겁니다. 이후 헤이스팅스는 ‘인재 밀도’를 넷플릭스 운영의 최우선에 둡니다. 최고의 인재는 업계 최고 연봉을 주면서 뽑되, 평범한 직원은 바로 해고해 버리죠(대신 퇴직금은 넉넉히 줍니다). 그는 “빠르고 혁신적인 직장은 소위 말하는 ‘비범한 동료들’로 구성된다”고 말하는데요. 회사를 ‘스포츠팀’처럼 운영해야 한다는 겁니다.인재 밀도의 중요성은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학교의 연구 결과에서도 확인됩니다(2006년, ‘나쁜 사과가 통을 망치는 방법, 시기, 이유’). 연구팀은 대학생들을 여러 팀으로 나눠 45분간 과제를 수행하게 하는 실험을 수십 차례 했는데요. 일부 팀엔 특정 역할을 맡은 배우를 1명 끼워 넣었습니다. 삐딱하게 앉아 핸드폰만 보는 ‘게으름뱅이’, 빈정거리는 ‘삐딱이’, 책상에 얼굴을 파묻은 ‘우울한 비관주의자’ 식으로요. 실험 결과, 이 단 한 명의 문제 행동은 전염력이 엄청났습니다. 다른 팀원들이 모두 그 행동을 흉내 내면서 과제 성과는 엉망이 됐죠(평균 30~40% 하락).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능력자가 많아도 평범하거나 비뚤어진 직원이 끼어있으면 이는 금세 전염돼 성과를 망치죠.혁신은 복도 대화에서 탄생한다 또 인재 밀도가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뭉치면 스파크가 터지면서 진짜 천재적인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가 아닌 팀일 때 놀라운 혁신이 터져 나올 수 있는 건데요.현대 인공지능(AI) 세계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혁신으로 꼽히는 구글의 ‘트랜스포머(Transformer)’ 기술 개발도 그랬죠. 2017년 구글 연구진 8명이 논문(‘Attention is all you need’)으로 발표한 이 기술 덕분에 AI가 드디어 문장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됐고요. 이후 챗GPT부터 딥시크까지 모든 생성형 AI가 이 트랜스포머 기반인데요.트랜스포머 개발 스토리에서 눈에 띄는 건 같은 회사 울타리 안에 있던 인재들끼리의 우연한 만남과 엿들음이 모여서 놀라운 혁신으로 이어졌단 겁니다. 구글 AI 연구자 야콥 우스코라이트는 어느 날 같이 구글 카페에서 다른 팀 엔지니어 일리아 폴로수킨과 점심을 먹었고요. 이 자리에서 폴로수킨이 구글검색 답변 속도에 대해 불평하는 걸 듣고 자신이 갖고 있던 기본 아이디어를 공유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팀에 속한 몇몇이 자발적으로 뭉쳤고요. 그들이 신기술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일 때, 우연히 구글의 베테랑 과학자 노암 샤지어가 그 앞 복도를 지나갑니다.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된 샤지어는 ‘와,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고 감탄하며 프로젝트에 합류해 직접 코드 작성을 맡았고요. 그렇게 몇 달 만에 AI 세계를 완전히 뒤바꿔놓을 역사적인 논문이 탄생합니다. 연구팀조차 이 과정을 “마법”이라 부를 정도로 놀라운 창의력과 집중력이 발휘되었죠.딥시크도 비슷했습니다. 딥시크는 2017년 구글이 소개한 뒤 일반화된 MHA(멀티헤드주의) 대신 MLA(멀티헤드잠재주의) 아키텍처를 적용해 메모리 사용량을 대폭 줄이는 데 성공했는데요. 이를 사진에 비유하자면 찍은 사진 파일을 그대로 저장하는 게 아니라, 작은 섬네일로 압축해 저장해놓는 식의 기술을 활용한 셈이죠.이 MLA에 대한 기본 아이디어를 맨 처음 떠올린 건 딥시크의 한 젊은 연구자였다고 합니다. 바로 이 새 아이디어를 구현해 내기 위한 팀이 꾸려졌고요. 몇 달에 걸쳐 작업이 이뤄졌다고 하죠. 량원펑은 “탐사 과정에서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모든 연구원은 다른 사람을 초대해 논의한다”고 딥시크의 일하는 방식을 설명합니다.기술 세계에서 혁신은 혼자 굴을 파고 들어가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아이디어와 아이디어가 부딪히면서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게 일반적이죠. 그래서 애플 창업자 고 스티브 잡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혁신은 사람들이 복도에서 만나거나 밤 10시 30분에 서로에게 전화를 걸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데서 옵니다. 그들이 기존 사고방식에 구멍을 뚫는 무언가를 깨달았기 때문에 발생하죠.”또 잡스는 이런 인터뷰도 남겼습니다. “제 사업 모델은 비틀스입니다. 그들은 서로의 부정적인 경향을 견제하는 네 사람이었죠. 그들은 서로를 균형 있게 조절했고,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더 컸습니다. 사업에서 위대한 일은 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팀이 하는 겁니다. 비틀스는 함께 있을 때 정말 훌륭하고 혁신적인 작업을 했습니다. 그들이 헤어졌을 때, 좋은 작업을 했지만 결코 똑같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업도 그렇게 봅니다. 항상 팀입니다.”통제를 없애면 혁신은 저절로 온다요약하자면 최고의 인재를 밀도 있게 모아서 아이디어가 흐르게 만드는 것이 혁신 탄생을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간단하죠? 그런데 두 번째 조건은 훨씬 더 까다롭습니다. 바로 개입과 통제를 최소화할 것.량원펑 딥시크 창업자는 혁신적인 조직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제 결론은 혁신엔 가능한 한 적은 개입과 관리가 필요하고,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활동할 여지와 시행착오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겁니다. 혁신은 종종 저절로 발생합니다. 의도적으로 준비되거나 가르쳐진 게 아닙니다.”일단 뛰어난 인재를 뽑았다면, 그냥 이들이 알아서 하게 두는 게 최선이란 뜻인데요. 그래서 딥시크엔 없는 게 많습니다. 우선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목표나 업무 할당이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할지 자기가 정해서 자발적으로 분업하는 거죠. 철저한 바텀업(상향식) 의사결정이 이뤄집니다. 딥시크엔 직급도, 부서도 없습니다. 모두 평등한 관계여서, 누구든 ‘이거 같이 연구해요’라고 다른 사람을 부를 수 있죠. 컴퓨팅 파워에 대한 권한도 제한이 없다네요. 누구나 승인 없이도 언제든 훈련 클러스터를 이용할 수 있는 겁니다.이게 기업에서 가능한가 싶기도 한데요. 그래서 중국 매체 36kr은 이런 딥시크를 두고 ‘기술적 이상주의의 극단적 이야기’라고 평하죠. 사실 이런 이상주의는 무엇보다 직원들이 능력과 열정을 모두 갖춘 인재라는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또 역으로 이런 극단의 자율성 부여는 최고의 인재를 끌어모으는 매력적인 조건으로 작용합니다.딥시크만큼은 아니지만 개입과 통제가 없기로 유명한 기업으로는 넷플릭스가 있죠. 예컨대 휴가기간, 법인카드 이용, 출장비 지출에 대한 명시적인 통제가 없고요. 무엇보다 상사의 ‘승인 권한’이란 게 없습니다. 일을 할 때 직원은 승인받을 필요 없고, 상사에게 진척 상황을 보고만 하면 되죠. 즉, 무슨 일을 할지 말지는 직원 개개인이 정하고 실행하는 겁니다.인재 밀도가 높은 기업엔 이런 거추장스러운 통제가 필요 없다는 게 리드 헤이스팅스의 철학인데요. 그 직원이 진짜 능력자라면, 설사 실패하더라도 배우는 게 있을 테니 믿고 맡기란 겁니다. 헤이스팅스는 이런 식으로 표현하죠. 혁신을 하려면 “교향악단을 조직하지 말고, 즉흥 연구를 할 재즈 밴드를 결성해야 합니다.”구글이 보여주는 혁신기업 딜레마앞서 설명한 구글 트랜스포머 연구가 진행된 환경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사실 구글 고위층은 이 작업을 그저 흥미로운 AI프로젝트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별 간섭 없이 그냥 8명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뒀죠. 연구 참가자들에 따르면 상사 중 누구도 프로젝트 진행과정을 체크하기 위해 부른 적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구에 참여한 니키 파머는 “구글은 우리가 탐구하고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고 평가하죠.더 놀라운 건 그 이후 얘기입니다. 2017년 트랜스포머가 발표되고 나서, 이를 가지고 가장 먼저 대규모 언어모델을 출시한 건 구글이 아니라 오픈AI였죠(2018년 GPT-1이 시작). 이후에도 구글은 트랜스포머 기술을 적용한 서비스를 내놓는 데 매우 소심한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급기야 2022년 오픈AI가 챗GPT 출시로 먼저 확 치고 나오면서, 구글은 뒤처지게 되는데요.그사이 실망한 트랜스포머 논문 저자 8명은 결국 모두 구글을 떠났습니다(지난해 구글은 이 중 노암 샤지어를 3년 만에 다시 거액을 들여 영입). 구글이 혁신 중심의 놀이터가 아닌 수익 중심의 관료조직이 되어버린 결과였죠. 그렇게 크고 돈 잘 버는 거대 대기업이 오히려 수익과 성과에 연연하며 실수를 두려워하다가 스타트업에 선두를 뺏기다니. 기술 세계의 아이러니인데요. 클레이턴 크리스턴슨 하버드대 교수의 1997년 저서 ‘혁신기업 딜레마’에서 전 설명한 대로 “혁신에서는 규모가 작고 독립적인 기업이 확실한 우위를 얻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습니다.스티브 잡스의 유명한 인터뷰 발언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잡스가 애플로 돌아와서 혁신적인 컴퓨터 아이맥(iMac) G3로 애플의 부활을 알렸던 1998년 했던 인터뷰입니다. “혁신은 얼마나 많은 연구개발비를 가졌는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애플이 맥을 내놓았을 때, IBM은 R&D에 적어도 100배 더 많은 비용을 지출했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죠.(It‘s not about money. It’s about the people you have.) 당신이 어디로 이끌려가고, 얼마나 많은 것을 얻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By.딥다이브그동안 전 세계 많은 언론은 딥시크가 유학파가 아닌 중국 현지 대학 출신을 주로 채용한다는 점을 비중있게 보도했는데요. 그보다는 ‘996(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주 6일 근무)’으로 대표되는 가혹한 실적 압박의 후진적인 근로문화로 유명한 중국 IT 업계에서 이런 실리콘밸리 스타일의 스타트업이 나왔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중국 AI 기업 딥시크는 극도로 높은 ‘인재 밀도’가 특징입니다. 혁신 기업 인재에 중요한 건 규모보다 밀도이죠. 부정적인 조직원의 태도는 금세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가장 좋은 복지는 언제나 ‘뛰어난 동료’인 법입니다. -최고의 인재가 모여있으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혁신의 스파크가 일어납니다. AI계 가장 큰 혁신이라 할 구글 트랜스포머도 점심식사 중의 스몰토크, 복도에서 우연히 엿들은 대화를 계기로 탄생했죠. 위대한 일은 팀이 합니다. -일단 뛰어난 인재를 뽑았다면 그냥 두면 됩니다. 개입과 통제가 필요 없죠. 딥시크에 부서와 직급, 할당된 목표나 업무가 없는 이유입니다. 무슨 일을 할지 자기가 정하면 승인 없이 뭐든 할 수 있는 자율. 그게 혁신으로 이어집니다.-하지만 기업이 커진 뒤엔 관료화되고 느려지면서 혁신과 거리가 멀어지곤 합니다. 더 많은 연구개발비, 더 많은 인력이 혁신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는 걸 이미 많은 대기업들이 보여주고 있죠. 우리 기업들은 과연 어느 길로 갈까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