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지원

사지원 기자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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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편견을 허물 수 있는 기사를 쓰고 싶습니다.

4g1@donga.com

취재분야

2024-05-05~2024-06-04
역사20%
문학/출판20%
미술17%
문화 일반10%
인사일반10%
음악7%
사회일반7%
사건·범죄7%
검찰-법원판결2%
  • 앞으로 50년 안 된 물건도 ‘국가 예비유산’ 될 수 있다

    앞으로 성냥 제조기와 삼륜 화물차 등 만든 지 50년이 안 된 물건들도 국가 예비유산이 될 수 있다.국가유산청은 예비문화유산 제도 시행을 앞두고 열린 ‘근현대 예비문화유산 찾기 공모전’에서 361건의 근현대 문화유산이 접수됐다고 4일 밝혔다. 올 9월부터 시행될 예비문화유산 제도는 만들어진 지 50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을 발굴해 보존 및 관리하는 제도다.이번 공모전에는 국민들의 생활사와 관련된 유산들이 많이 접수됐다. 예를 들어 경북 의성의 성광 성냥공업사에서 사용하던 자동 성냥 제조기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은 근현대 성냥 제조업 관련 유산이다. 1982년 제작된 이 기기는 성냥개비에 파라핀과 화약을 찍고 건조해 성냥을 만들었다.국내에 유일하게 남은 삼륜 화물차도 접수됐다. 1967~1974년까지 생산됐다가 단종된 기아 T-2000 모델로, 과거 자영업자나 용달회사 등에서 주로 사용되던 제품이다. 또 미국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지사인 한국 브리태니커 대표를 역임한 한창기(1936~1997) 대표가 1976년 3월 창간한 월간지 ‘뿌리깊은나무’의 친필 원고도 접수됐다.국가유산청은 “당시에는 드물게 순우리말 제목에 한글만 사용해 원고를 작성했고, 인쇄본에 처음 가로쓰기를 도입하는 등 파격적 디자인을 선보였다”라며 “이번에 접수된 원고는 한 대표가 창간호부터 직접 쓴 원고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고 밝혔다. 국가유산청은 이번에 접수된 문화유산에 대한 기초 자료 조사와 소유자 동의, 전문가 검토, 문화유산위원회 심의 등을 거쳐 예비문화유산으로 최종 선정할 예정이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3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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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공화국 사건-사회변화, 1987년 민주화 만든 중요 변곡점 돼”

    “제5공화국 시기를 부정한다고 해서 없는 역사가 되진 않으니까요.” 지난달 18일 학술서 ‘제5공화국’(역사공장)을 펴낸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63·사진)는 3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책을 출간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신간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으로 유신 체제가 무너진 후부터 1988년 2월 제6공화국이 들어서기 전까지의 시기가 한국 정치사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는지를 집중 조명한다. 강 교수는 “5공화국을 거치면서 한국이 민주화를 이룬 만큼 당시 겪은 사건과 경험을 제대로 마주해야 우리 사회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신간은 ‘왜 1979년에는 이뤄지지 않았던 민주화가 1987년에는 가능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강 교수는 “1979년 10·26사태는 궁정 내부에서 벌어진 권력 내부의 파열일 뿐, 대중의 광범위한 저항으로 이뤄진 결과가 아니었다”며 “반면 5공화국 시기에 겪은 각종 사건과 사회경제적 변화는 1987년 민주화를 만든 중요 변곡점이 됐다”고 말했다. 신간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과 ‘1985년 12대 국회의원 선거’를 1987년 민주화의 결정적 원인으로 제시한다. 우선 5·18에서 권위주의 군부로부터의 민간인 희생을 겪은 뒤 대중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커졌고, 12대 총선에선 체제 저항적인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하며 변혁을 원하는 민심을 뒷받침했다는 분석이다. 신간은 “5공화국 때 성장한 중산층이 그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도 분석한다. 경제 성장을 맛보면서 정치적 자유를 갈망하게 된 중산층의 욕구가 ‘직선제 개헌’이라는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정치적 의제를 만나면서 폭발했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민주화는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성취해낸 결과”라고 말했다. 신간은 객관적 사료를 통해 5공화국 시기 주요 사건의 원인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예를 들어 유신 붕괴 이후 민주화 바람이 불었던 ‘서울의 봄’이 실패한 원인을 단순히 전두환 전 대통령 개인의 권력욕으로만 돌리지 않는다. 최규하 전 대통령의 오판, 당시 야권 지도자였던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의 낙관주의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개인에 대한 책임 전가는) 편리한 답일 수는 있지만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희석된다”며 “그 시절을 살았던 주요 정치 행위자들의 면면을 객관적으로 살피려 했다”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15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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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울리는 독립운동기 애국창가 50곡

    미국에서 활동하던 한인 독립운동단체 ‘대한인국민회’는 1942년 ‘애국가 유성기 음반’을 냈다.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곡조를 딴 옛 애국가와 안익태 선생(1906∼1965)이 작곡한 새 애국가, 무궁화를 찬양하는 노래인 ‘무궁화 삼천리가’ 등 총 3곡이 담겼다. 국내에서 애국가 음반을 마음대로 발간할 수 없었던 일제강점기에 해외 동포들에게 역사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신구 애국가가 함께 담긴 희귀 음반이다.독립기념관은 지난달 21일부터 애국가 음반 등 독립운동 시기의 문화예술 작품을 주제로 한 특별기획전 ‘독립의 노래, 저항의 무대’를 열고 있다. 전시에선 관련 자료 40여 점과 음원 50여 곡, 영상 3편을 볼 수 있다. 독립기념관 관계자는 “독립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예술 작품들은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얻었고, 독립운동을 이어가는 원동력이 됐다”고 했다.전시에선 독립운동 시기에 애국창가를 오케스트라 등 음원으로 새롭게 연주한 노래 50여 곡을 들을 수 있다. 천안시립교향악단, 인천콘서트챔버 등에서 당대 악보를 토대로 오케스트라를 연주해 녹음한 음원이다.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로 이주한 한인들이 1916년 펴낸 ‘애국창가 악보집’, 한국광복군이 1943년 발행한 ‘광복군가집’ 등 독립운동 노래를 담은 악보도 감상할 수 있다.독립운동가이자 영화배우 및 감독으로 활동한 윤봉춘(1902∼1975)이 영화계의 일상을 기록한 ‘윤봉춘 일기’도 만나볼 수 있다. 일기에는 일제강점기 영화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비롯해 제작 체계, 제작비, 흥행 실적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는 평을 받는다.한국광복군 대원 한형석(1910∼1996)이 창작해 중국에서 공연한 가극 ‘아리랑’의 포스터도 볼 수 있다.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우는 목동과 한 처녀의 사랑 이야기를 담아냈는데, 중국 현지에서 1945년 광복 전까지 20여 회 공연되는 등 반향이 컸다. 또 아리랑의 주요 연주곡인 ‘한국 행진곡’을 손으로 쓴 악보도 함께 볼 수 있다. 전시는 7월 21일까지. 무료.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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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수술로 되찾은 눈과 귀… 첫 감각은 축복이었을까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겠다. 둘째 날은 밤이 아침으로 변하는 기적을 보리라. 셋째 날은 사람들이 오가는 평범한 거리를 보고 싶다.’ 장애를 극복한 사회복지사업가 헬렌 켈러(1880∼1968)의 저서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의 일부다. 그는 “단언컨대 본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볼 때 선천적 시각장애인이 시력을 회복한 뒤 곧바로 이런 기쁨을 느낄 가능성은 크지 않다. 유아 때 자연스러운 발달을 겪지 못한 탓에 3차원 풍경을 선과 색깔들이 뒤죽박죽 섞인 정체불명의 무언가로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같은 원리로 선천적 청각장애인이 청력을 회복하면 오히려 세상을 교란하는 소음에 시달린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미국 마운트홀리요크 칼리지 생명과학과 명예교수인 저자는 외과적 수술을 통해 뒤늦게 감각을 되찾은 한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시력이 거의 없는 소년 리엄 매코이와 청각장애를 안고 태어난 소녀 조흐라 담지가 저자에게 10년에 걸쳐 풀어낸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저자도 어릴 적부터 사시로 인해 사물을 입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입체맹’이었다. 그러나 40대 중반에 치료받아 입체시를 회복하게 된다. 저자의 경우 입체시 회복 전에도 사물을 볼 수는 있었기 때문에 수술 후 적응이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난생처음 경험하는 감각 앞에 내던져진 매코이와 담지는 지독한 시행착오를 겪는다. 매코이는 생후 17개월 때 1만7000명 중 1명꼴로 걸린다는 희귀질환 ‘백색증’을 진단받는다. 매코이가 또렷하게 볼 수 있는 범위는 고작 코에서 약 7.5cm. 결국 그는 열다섯 살 때 인공 수정체를 이식하는 수술을 받아 시력을 회복한다. 매코이는 시력 회복 직후의 삶을 “날카로운 선과 모서리로 이뤄진 세상에 내던져졌다”고 표현했다. 선과 색을 선명하게 인식할 뿐 하나의 장면을 제대로 구성하지 못해 오히려 혼란에 빠진 것이다. 매코이는 보도에 선이 보이면 그것이 보도블록 사이의 경계인지, 시멘트에 금이 간 것인지, 가로등이나 전봇대의 그림자인지를 구별하기 위해 한참을 보내야 했다. 담지는 태어날 때부터 항공기 엔진이 울리는 소리에 해당하는 90dB(데시벨) 이하의 소리는 아예 듣지 못했다. 열두 살 때 인공와우를 이식받아 청력을 회복한 뒤 그는 “모든 소리가 무서웠다”고 회고한다. 우리는 목소리, 자동차 소리, 빗소리 등을 뚜렷이 구별할 수 있지만 담지에겐 그저 모든 음파가 뒤섞인 괴성일 뿐이었다. 책에는 그가 훗날 바람에 금속 방충망이 흔들리는 소리와 두툼한 빗자루로 바닥을 쓰는 소리를 좋아한다고 말하게 되기까지의 수많은 여정이 있다. 신간은 두 소년 소녀가 새로운 감각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을 담담한 필치로 그려낸다. 발달을 의식적으로 배워 나가는 과정을 꼼꼼히 묘사해 그동안 당연하게만 여겨졌던 듣고 보는 행위의 신비로움을 잘 나타낸다. 두 사람의 인간적 이야기와 함께 과학적 설명이 적절히 균형 잡혀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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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넓어지고 깊어진 ‘세계 박물관 한국실’

    가로 4m, 세로 2m 크기의 10폭 병풍에 책과 화병, 회중시계 등 각종 물건이 그려져 있다. 3단, 5칸의 책장을 10폭 병풍에 담아낸 19세기 조선 그림 ‘책가도’다. 각종 기물을 화면 가득 배치해 화려하고 풍성한 인상을 준다. 책가도는 다양한 책과 골동품을 즐기던 조선 문인들의 취향을 잘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책가도를 비롯한 유물 14건, 24점을 올 11월 확대 개편되는 미국 시카고박물관 한국실에 대여한다. 애초 27.5㎡에 불과하던 시카고박물관 한국실 면적이 90㎡로 3배 넘게 확대됨에 따라 대여 유물 수를 늘린 것. 신소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최근 해외에서 한국 미술을 주류 미술의 하나로 받아들이면서 전통미술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K팝과 K드라마·영화 등 한국 콘텐츠의 글로벌 위상이 높아지면서 세계 주요 박물관에서 한국실 규모도 커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한국실 또는 한국 전시 코너를 둔 해외 박물관 수는 1990년 9개국 32곳에서 올해 5월 22개국 70곳으로 늘었다. 정부 지원을 받는 해외 한국 전시실 수도 2009년 1개국, 1개관에서 올해 9개국, 21개관으로 확대됐다. 정부는 한국 문화유산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해외 한국 전시실에 예산을 지원하고 유물을 대여해주는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이달 재개관한 미국 휴스턴미술관 한국실은 고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이 기증한 ‘용무늬 청화백자 항아리’ 등 조선시대의 삶과 문화를 보여줄 수 있는 전시품 33건, 35점을 선보이고 있다. 기존에는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사 전반을 소개하는 전시에 그쳤지만 올해부터는 시대별로 심화된 주제의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네덜란드 국립박물관의 한국 전시 코너도 다음 달부터 확대된다. 한국 유물 진열장을 기존 2개에서 3개로 늘리고, 조선 목조관음보살좌상을 처음 전시한다. 신소연 연구관은 “현재 아시아관에서 전시 중인 중국, 일본 불상들과 대등하게 한국 불상을 소개할 기회를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보스턴미술관은 올해 3월부터 7월 28일까지 ‘한류! 코리안 웨이브(Hallyu! The Korean Wave)’ 전시를 진행한다. 의상, 소품, 사진 등 250여 점을 선보이는 전시로, 한국 대중문화를 전면에 내세운 전시가 미국 주요 미술관에서 열리는 건 처음이다. 해외 한국실 개편 과정에서 K팝 스타와의 협업도 이뤄지고 있다. 걸그룹 뉴진스가 최근 영국박물관 내 한국실 전시품을 소개하는 음성 가이드를 녹음한 게 대표적이다. 청자 꽃무늬 정병과 1300년대 고려 상감 청자, 조선 백자 달항아리 등에 대한 한국어 설명이 흘러 나온다. 지난해 10월 개편을 마친 영국박물관 한국실은 청동기시대 세형동검부터 조선시대 금속활자에 이르기까지 국내 주요 문화유산 190점을 선보이고 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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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멤버 전원 ‘생라이브’에 뻥 뚫리는 속… 돌아온 가창력의 시대

    지난달 25일 엠넷(Mnet)의 음악 프로그램 엠카운트다운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YG엔터테인먼트 소속 걸그룹 베이비몬스터의 데뷔곡 ‘쉬시(SHEESH)’ 영상은 특이했다. 최근 상당수 아이돌이 반주와 목소리가 모두 녹음된 AR(All recording)을 틀어놓은 상태에서 노래를 살짝 ‘얹는’ 것과는 달리, 멤버 7명이 핸드 마이크를 들고 밴드 연주에 맞춰 ‘생라이브’를 선보인 것. “만날 힘 빠지는 노래 억지로 듣다 고음 들으니 극락”, “마케팅은 이 정도 실력으로 해야 한다”는 댓글들이 달렸다. 베이비몬스터가 지난달 1일 발표한 쉬시는 발매 첫날엔 멜론 일간차트 141위에 그쳤다. 강렬한 비트를 가진 고음 위주의 댄스곡인데, ‘기존 YG 출신 걸그룹인 2NE1, 블랙핑크와 비슷할 뿐 개성이 없다’는 혹평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라이브 실력이 입소문을 타며 상황이 달라졌다. 상승세를 탄 쉬시는 최근 10위권을 유지하며 뒷심을 보이고 있다. 28일에는 세계 최대 음원 플랫폼 스포티파이에서 누적 스트리밍 1억 건도 돌파했다. 최근 라이브 실력을 내세워 주목받는 아이돌이 늘고 있다. 챌린지용 안무와 가벼운 멜로디를 갖춘 ‘이지 리스닝(가볍게 듣는)’ 노래가 주를 이루는 흐름 속에서 대중들이 ‘빡센 고음’과 ‘시원한 라이브’를 다시 찾고 있는 것.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한국 아이돌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최근에는 실력보다 외적인 측면이 많이 부각됐다”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중들이 가창력이 돋보이는 아이돌에게 열광하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 불거진 일부 아이돌의 가창력 논란도 ‘실력파 아이돌’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지난달 미국 최대 음악 페스티벌인 ‘코첼라 밸리 뮤직 앤드 아츠 페스티벌’(코첼라) 무대에 오른 5인조 걸그룹 르세라핌이 ‘음 이탈’ 등 불안정한 음정으로 비판의 도마에 오른 게 대표적. 5인조 걸그룹 아일릿도 엠카운트다운 등에서 1위를 차지한 뒤 선보인 앙코르 무대로 가창력 논란에 휩싸였다. 대형 엔터테인먼트사 관계자는 “팬들도 결국 ‘본업(노래와 춤)’을 잘하는 아이돌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중소 기획사 소속 아이돌에 대한 재발견이 이뤄지기도 한다. S2엔터테인먼트 소속 4인조 걸그룹 ‘키스오브라이프’(키오프)는 지난달 3일 첫 싱글앨범 ‘마이다스 터치(Midas Touch)’를 내놓은 뒤 선보인 방송 무대에서 격한 춤에도 흔들리지 않는 라이브 실력을 뽐냈다. 이에 힘입어 키오프는 지난해 데뷔 이후 처음으로 12일 멜론 일간차트 50위권에 진입했다. 말랑하고 편안한 멜로디와 거리가 있는 랩과 사이버틱한 음색이 각광 받기도 한다. 13일 공개된 SM엔터테인먼트 소속 4인조 걸그룹 에스파의 정규앨범 ‘아마겟돈(Armageddon)’ 타이틀곡 ‘슈퍼노바(Supernova)’는 멜론 등 국내 주요 음원 차트들에서 1위를 휩쓸었다. 파워풀한 가창력과 특유의 쨍한 ‘쇠맛’ 보컬이 인기를 얻고 있다는 평. 하지만 순간적인 라이브 실수가 유튜브 쇼츠 등에서 반복되며 인신공격 대상이 될 우려도 있다.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는 “가수가 라이브를 하다 보면 컨디션 난조 등으로 상대적으로 부족함을 보일 때도 있다”며 “가장 나쁜 부분만 영상으로 편집돼 반복 소비되면 자칫 ‘마녀 사냥’이 될 수 있다”고 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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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찰 “김호중 거짓말탐지기 안 해도 증거 충분”

    음주 뺑소니 혐의로 구속된 트로트 가수 김호중 씨(33)에 대해 경찰이 ‘거짓말탐지기 조사가 필요 없을 정도로 증거가 충분하다’며 혐의 입증에 자신을 보였다. 우종수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은 27일 정례 기자간담회에서 “김 씨(의 혐의)와 관련해 객관적 자료와 관련자 조사를 했기 때문에 폴리그래프(거짓말탐지기) 조사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우 본부장은 “대법원 판례에 의하면 위험운전치상(음주 영향으로 차 사고를 내 상해를 입힘)은 음주 기준치를 어느 정도 초과했는지보다는 실제 음주했는지, 정상적 운전이 곤란했는지 여부 등으로 판단한다”며 “확보한 자료 등에 따르면 위험운전치상 입증이 가능하다고 판단해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김 씨가 사고 전 음주량을 축소해서 진술하는 등 위험운전치상 혐의를 피하려 하고 있지만, 이를 입증할 근거가 이미 충분하다는 취지다. 김 씨는 9일 서울 강남구에서 음주 뺑소니 사고를 내고 달아난 혐의로 24일 구속됐다. 김 씨의 소속사 생각엔터테인먼트는 이날 입장문을 내고 “이번 사태와 관련된 임직원이 전원 퇴사하고 대표이사를 바꾸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김 씨의 사촌 형인 이광득 대표(41)가 사건 은폐를 지시한 혐의(범인도피 교사) 등으로 구속된 데 따른 것이다.손준영 기자 hand@donga.com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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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광사 ‘영산회상도-팔상도’ 국보 지정

    국가유산청은 ‘순천 송광사 영산회상도 및 팔상도’를 국보로 지정했다고 27일 밝혔다. 2003년 보물로 지정된 지 약 21년 만의 국보 승격이다. 전남 순천시 송광사에 봉안된 불화는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불법을 전하는 모습을 그린 ‘영산회상도’(사진) 1폭과 부처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 8폭 등 모두 9폭으로 구성돼 있다. 송광사 팔상도는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사바세계로 내려오는 장면, 석가모니가 룸비니 동산에서 마야 부인 옆구리로 출생하는 장면 등 석가모니 생애의 주요 사건을 8개 주제로 묘사한 그림이다. 그림에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조선 영조(재위 1724∼1776년)대인 1725년에 승려 의겸 등이 그렸다는 점을 명확히 알 수 있어 학술적 가치가 크다. 그림 각 폭이 통일된 필선과 색채를 유지하면서 사건에 따른 시공간의 전환을 자연스럽게 처리하는 등 예술적 가치도 높다는 평이다. 국가유산청 관계자는 “조선 후기 영산회상도의 다양성과 팔상도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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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 한글현판’ 반복 언급… 유인촌 장관, 교체 추진할까

    현재 경복궁 광화문에 걸린 현판은 지난한 논의 끝의 결과물이다. 1968년부터 걸려 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한글 현판이 2010년 흰색 바탕, 검정 글씨의 한자 현판으로 교체된 지 3개월 만에 갈라진 것이 문제의 시작. 이후 현판 색깔, 한글로 교체 여부 등을 놓고 관련 단체들의 갈등이 커졌다. 결국 ‘경복궁 영건 일기’를 토대로 한 지금의 한자 현판(검은색 바탕에 금색 글씨)이 지난해 10월 내걸렸다. 현판 교체 논의가 본격화된 지 무려 13년 만의 결과물이었다. 강원 양양 등에서 확보한 수령 200년이 넘는 적송으로 장인 6명이 참여해 새 현판을 만들었다. 개막 기념식도 열렸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새로 마련된 한자 현판을 다시 한글 현판으로 교체하는 논의를 하자고 공개적으로 나섰다. 현판이 교체된 지 7개월 만이다. 유 장관은 13일 ‘세종 이도 탄신 하례연’ 기념사에서 “(현판이) 당연히 한글로 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논의에) 불을 지펴 보겠다”고 했다. 당초 배포된 기념사에는 없던 내용이었다. 이어 23일 정책 브리핑에선 “세종대왕 동상이 (경복궁) 앞에 있는데 그 뒤에 한자로 쓰인 현판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한글날을 기점으로 뭔가 해보겠다”고도 했다. 광화문 현판 교체는 문체부가 아닌 국가유산청에서 결정하는 사안이다. 유 장관이 직접 공개적으로 현판 교체 주장을 꺼내고 나오자 국가유산청은 다소 당혹스럽다는 분위기다. 국가유산청 관계자는 “앞서 2012년 문화재위원회 심의에서 ‘원형 복원’을 원칙으로 한자 현판이 결정된 만큼 이런 결론을 뒤집을 만한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한글 현판으로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체부 관계자는 “(현판 교체와 관련해) 아직 행정적인 절차가 들어간 것은 없다. 일단 여론 추이를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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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찰 “김호중, 거짓말 탐지기 필요 없을 정도로 증거 충분”

    음주 뺑소니 혐의로 구속된 트로트 가수 김호중 씨(33)에 대해 경찰이 ‘거짓말 탐지기 조사가 필요 없을 정도로 증거가 충분하다’라며 혐의 입증에 자신을 보였다.우종수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은 27일 정례 기자간담회에서 “김 씨(의 혐의)와 관련해 객관적 자료와 관련자 조사를 했기 때문에 폴리그래프(거짓말 탐지기) 조사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우 본부장은 “대법원 판례에 의하면 위험운전치상은 음주 기준치를 어느 정도 초과했는지보다는 실제 음주했는지, 정상적 운전이 곤란했는지 여부 등으로 판단한다”며 “확보한 자료 등에 따르면 위험운전치상 입증이 가능하다고 판단해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김 씨가 사고 전 음주량을 축소해서 진술하는 등 위험운전치상(음주 영향으로 차 사고를 내 상해를 입힘) 혐의를 피하려 하고 있지만, 이를 입증한 근거가 이미 충분하다는 취지다.김 씨는 9일 서울 강남구에서 음주 뺑소니 사고를 내고 달아난 혐의로 24일 구속됐다. 김 씨의 소속사 생각엔터테인먼트는 이날 입장문을 내고 “이번 사태와 관련된 임직원이 전원 퇴사하고 대표이사직을 바꾸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김 씨의 사촌 형인 이광득 대표(41)가 사건 은폐를 지시한 혐의(범인도피 교사) 등으로 구속된 데 따른 것이다.손준영 기자 hand@donga.com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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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당신이 하는 ‘읽기’, 알고보면 마법 같은 일[책의 향기]

    영국 소설가 샘 마틴은 어느 날 소설을 펼친 순간 자신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설 속 글자를 볼 수는 있었지만, 읽을 수가 없었던 것. 그는 당시를 “어느 쪽 눈으로 봐도 글자가 뒤죽박죽돼 전혀 알 수 없었다”고 묘사했다. 알고 보니 마틴은 뇌출혈로 인한 신경장애로 문해력을 잃은 것이었다. 결국 그는 언어치료사와 함께 재활에 들어간 지 4개월이 지나서야 소설 한 권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문해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영국 퀸메리런던대 교수인 저자는 마틴처럼 읽기에 문제가 생긴 다양한 사람들을 조명한다. 6개 장에 걸쳐 난독증과 과독증, 실독증, 공감각, 환각, 치매 등 신경학적 문제로 인해 읽지 못하는 사례들을 소개한다. 언어처리, 해독, 이해 등 읽기의 여러 단계 중 어느 한 부분이라도 고장이 나면 문해력을 잃게 된다. 저자가 수집한 증언, 문헌, 자료 등은 ‘인간다움’을 완성하는 읽기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뇌과학과 인문학의 관점을 조합해 읽기의 의미를 낯설게 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예를 들어 1943년 제2차 세계대전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머리에 총을 맞아 문해력을 상실한 러시아 군인 레프 자세츠키는 “사람은 읽기를 통해서만 사물을 이해하고 배울 수 있으며,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읽기를 익힌다는 건 마법의 힘을 얻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난독증 독자들의 수기를 통해 이들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점이 흥미롭다. 우리는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하하기 위해 “너 난독증이냐”고 쉽게 이야기하지만, 난독증은 대부분 유전적 요인에 의한 질환이다. 난독증 환자는 책을 볼 때 종이가 픽셀화된 화면처럼 흔들리는 ‘활자 유동성’ 상태를 경험한다. 미국 작가 아일린 심프슨은 “단어가 얹힌 책 페이지가 알파벳이 뒤섞인 수프 접시로 보인다”고 말했다. 읽기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당연한 능력이 아니다. 인류의 진화사 관점에서 볼 때 비교적 최근에 발달한 능력이다. 저자는 “인간의 뇌는 읽기를 위해 설계되거나 유전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며 “읽기에는 여러 방식이 있고 표준적인 방식이 없다”고 했다. 읽기에 문제가 생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읽기의 본질을 성찰하게 된다. 저자는 다소 독특하게 읽는 이들도 조명한다. 서번트 증후군에 걸린 자폐인을 다룬 영화 ‘레인 맨’의 실제 주인공인 미국인 킴 픽은 동시에 양쪽 페이지를 읽었다. 캐나다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매클루언은 “책의 오른쪽 페이지만 읽고 나머지 정보는 뇌로 채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독증으로 제대로 읽지 못하는 이들이 ‘다시 읽기’나 ‘그저 책 붙잡고 있기’ 등을 활용해 독자로 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살펴보며 저자는 “이들에게는 ‘읽기의 차이’라는 어려움이 있을 뿐, 모두 독자”라고 강조한다. ‘심심한 사과’를 ‘지루한 사과’로, ‘사흘’을 ‘4일’로 알아듣는 젊은층이 늘고 있는 현실에서 읽기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그 의미와 가치를 되새겨 보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읽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보내는 저자의 따뜻한 격려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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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에 조선역사 오류 수정 요구… 영조의 활약상 만난다

    “지금부터 이후로 패악한 말이 소멸되고 다시 (올바른 기록이) 해외에 밝혀졌으며 도깨비들이 천하에 스스로 숨었으니 어찌 경사를 나타내지 않겠느냐.” 1771년 편찬된 ‘속광국지경록(續光國志慶錄)’에 나오는 조선 영조(재위 1724∼1776년)의 발언이다. 영조는 청나라 역사서 명기집략(明紀輯略)에 조선의 왕통이 잘못 기록된 사실(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기록)을 발견하고 사신을 보내 이를 바로잡도록 했다. 영조가 신하들에게 한 발언에서 잘못된 역사 기록을 수정한 데 따른 기쁨과 만족감이 드러난다. 조공체제로 운영되던 당시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중국의 왕위 계승 인식은 상대국에는 정권의 정당성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영조 즉위 300주년을 기념해 24일부터 여는 ‘조선의 중흥군주 영조대왕’ 온라인 전시에서는 속광국지경록이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영조가 전국 관찰사와 수령들의 민은시(民隱詩·백성이 악정에 고통을 받는 것을 읊은 시)를 취합해 1765년 편찬한 ‘양도팔도민은시(兩都八道民隱詩)’도 처음 공개된다. 총 86건의 영조 관련 자료 중에는 그의 탕평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내용도 있다. 영조가 탕평을 지지하는 신하들의 글을 엮어 1772년 편찬한 ‘영수백세록’이 대표적이다. 영조는 탕평을 반대하고 붕당을 조성했다는 이유로 영의정 김치인(1716∼1790)을 유배시킨 뒤 신하들에게 탕평을 찬미하는 글을 짓게 했다. 또 “팔순의 사업을 나에게 물으면 내심 민망하니 어떻게 답할까?”라며 스스로의 업적에 대해 질문을 던진 ‘어제문업(御製問業)’도 눈길을 끈다. 한중연은 “영조는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했던 군주”라며 “자신이 지은 글을 통해 신하와 백성들에게 주요 정책을 설득하는 군사(君師)로서의 면모와 인간적으로 교감하려는 자상한 면모를 두루 갖췄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는 장서각 온라인 전시관에서 관람할 수 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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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0만원 주겠다” 10대 꼬드겨…‘경복궁 낙서’ 주범, 5개월만에 검거

    지난해 12월 서울 종로구 경복궁 담장에 스프레이 낙서를 지시한 주범이 5개월 만에 붙잡혔다.23일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임모 군(18) 등에게 ‘300만 원을 주겠다’며 경복궁 낙서를 지시한 혐의로 30세 남성을 전날 체포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23일 이 남성에게 문화재 손상과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배포 등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경찰에 따르면 이 남성은 임 군 등에게 보안 메신저 텔레그램으로 접근해 ‘영화꽁(공)짜 윌○○티비’ 등 자신이 운영하는 특정 사이트 홍보 문구를 그리라고 요구했다. 그는 여러 불법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착취물도 유포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이트 운영 외 다른 직업은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국가유산청은 경복궁 담장 낙서를 복구하기 위한 비용을 약 1억5000만 원으로 추산하고 다음 달에 이 남성 등에게 해당 비용을 청구하는 소송을 내기로 했다. 임 군의 낙서를 모방해 경복궁에 2차 낙서를 한 설모 씨(28)는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 재판을 받고 있다. 임 군은 소년범이라는 이유로 구속영장이 기각됐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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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하늘로 떠난 민중시인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중략)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서른일곱에야 자비를 들여 벼르던 첫 시집 500권을 찍었다. 하지만 도통 팔리질 않았다. 대신 사람 만날 때마다 선물처럼 책을 건넸다. 점차 입소문이 났다. 시집을 찾는 서점도 생겼다. 그러던 2년 뒤, 1975년에 시집이 재출간된다. ‘창비시선’ 1호가 된 ‘농무(農舞)’ 얘기다. ‘농무’ ‘가난한 사랑노래’의 원로 시인 신경림(본명 신응식)이 22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평생 빈자와 노동자들의 삶을 대변했던 고인의 장례는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치러진다. ● “내 가슴속 뭔가를 얘기하고 싶었다” 1935년 충북 충주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고인은 어려서부터 문학에 두각을 나타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시 ‘목계장터’에 등장하는 목계의 풍경을 담은 일기를 써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시인’이란 별명도 얻었다. 고인은 생전 인터뷰에서 “중학교 3학년 때 김영랑 시인의 ‘언덕에 바로 누워’를 읽고 무척 감동을 받았다”며 “이 시를 읽고 나도 무언가 먼 데 있는 것, 먼 데 있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말하자면 내 가슴속에 뭔가 얘기하고 싶은 게 있다는 걸 느꼈다”고 술회했다. 문단에 이름을 알린 건 1956년 동국대 영문과 2학년 때 시 ‘낮달’ 등을 문학예술지에 실으면서다. 그러나 당시 문단의 행태에 실망해 약 10년간 절필하고 귀향해 농사, 광산 일, 공사장 노동 등에 종사했다. 이는 그가 농민의 삶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민중 시인’으로 서는 밑거름이 됐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농무’ 중) 고인의 대표작 ‘농무’에는 산업화로 황폐해진 농촌의 쓸쓸한 분위기가 담겼다.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는 버려두고 신명 나게 춤추는 이들의 공허한 심정을 그려냈다. 유자효 전 한국시인협회장은 “고인은 한국인의 정서를 시로 가장 잘 표현한 시인이었다. 쉬운 생활어로 깊은 내용을 담아낼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10년간 시골에 박혀 살면서 ‘사람은 남과 더불어 혼자 산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 고인은 사회 현실에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1975년 평론가 백낙청 등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세운 데 이어 1980년 7월에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한국 사회 ‘인정’과 ‘소통’ 필요하다 대표작 ‘가난한 사랑노래’에도 엄혹한 시대의 아픔을 담아냈다. 고인은 2013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가난한 사랑노래’에 ‘기계 굴러가는 소리’라는 대목은 원래 ‘탱크 굴러가는 소리’였다”며 “(시대 상황을 고려해) 출판사에서 수정하는 게 좋다고 해서 고쳤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한국 사회가 더욱 양극화되고 배타적으로 변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2015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은 안 바뀌면서 다른 사람만 바꾸려고 한다. 세상의 변화는 생각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인정할 건 인정하는 동시에 그 사람이 지적하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성찰하는 데서 이뤄진다고 생각한다”며 ‘인정’과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제가 한 일은 시 몇 편을 쓴 것일 뿐”이라며 “제 시가 세상의 쓰레기 하나 더하는 시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고인은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병진 씨, 병규 세스코 상무, 딸 옥진 씨, 사위 최호열 전 동아일보 여성동아팀장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발인은 25일 오전 5시 반. 02-2072-2010대장암 7년 투병에도… 말년까지 창작 의지동료들 “소탈하고 편안한 사람”“장례는 간소하게” 유언 남겨 22일 별세한 신경림 시인은 말년까지 창작 의지를 보였지만 대장암이 심해지면서 긴 투병 생활을 주로 이어갔다. 2017년부터 대장암 치료를 받았고 최근 병색이 급격히 악화됐다고 한다. 고인이 마지막 치료를 받았던 국립암센터의 서홍관 원장은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고 매일 5000보씩 걸을 정도로 정정하셨는데 한 달 전쯤 폐 부위에 암이 재발하면서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고 말했다. 이달 초 고인을 면회한 안종관 극작가는 “자꾸 잠이 들어 말씀은 못 하셨지만 건강하실 때 늘 빙긋 웃고 계시던 얼굴 그대로였다”고 전했다. 고인은 병세가 위중해진 최근에 “장례는 격식을 차리지 말고 간소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평소 고인과 교류해 온 문단 동료나 후배들은 소탈하고 편안한 사람으로 그를 기억했다. 곽효환 시인(한국문학번역원장)은 “문단의 다른 어른들한테는 꺼내기 힘든 불만이나 고충을 선생님께는 곧잘 털어놓을 수 있었다”며 “속 깊고 후배들을 잘 챙겨 주셨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고인의 충주고 1년 선배인 유종호 전 연세대 교수(문학평론가)는 “당시 국어 교사셨던 부친이 고인의 문학적 재능을 칭찬하시면서 문예지에 그의 작품이 실리도록 해준 게 기억난다”면서 “(고인은) 아주 소탈하고 어깨에 힘을 안 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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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난한 사랑 노래’ ‘농무’ 신경림 시인 별세

    시 ‘농무’와 ‘가난한 사랑 노래’ 등을 쓴 신경림 시인(본명 신응식)이 22일 별세했다. 향년 89세.193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동국대 영문과 2학년 재학 중인 1956년 시 ‘낮달’을 발표하며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낙향해 한동안 농사를 짓는 등 긴 공백기를 갖다 1965년 상경해 농촌의 정서를 듬뿍 담아낸 대표작 ‘농무’를 1973년 발표했다. 그의 생애 첫 시집으로 2년 뒤 ‘창비시선’ 1권으로 나왔다. 한창 산업화가 진행 중이던 1970년대 문단을 휩쓸던 모더니즘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농촌을 사실적으로 그려내 신선한 충격을 줬다. ‘농무’는 10만 권 넘게 팔리며 창비시선이 지속적으로 발간될 수 있는 토대가 됐다.이어 ‘새재’(1979년), ‘달 넘세’(1985년), ‘남한강’(1987년), ‘가난한 사랑노래’(1988년), ‘길’(1990년), ‘쓰러진 자의 꿈’(1993년),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년), ‘목계장터’(1999년), ‘뿔’(2002년), ‘신경림 시전집’(2004년), ‘낙타’(2008년) 등의 시집을 펴냈다. 이 중 ‘농무’와 ‘가난한 사랑 노래’, ‘목계장터’ 등이 초중고 교과서에 수록됐다. 농촌에서 삶의 현장에 기반해 농민의 고달픔과 의지를 깊이 있게 담아냈다는 평을 받았다.생전 타인과의 소통을 강조했던 고인은 한일 문학교류에도 적극 나섰다. 2015년 일본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와 6개월간 주고받은 대시를 엮어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를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출간했다.어린 시절 일화를 비롯해 절친이던 천상병, 김관식 시인과의 에피소드 등을 담은 에세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2009년)를 남겼다.고인은 1974년 제1회 만해문학상, 1981년 제8회 한국문학작가상, 1990년 제2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1991년 민족문학작가회 회장과 민족예술인총연합회 공동의장을 지냈다. 2001년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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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조 ‘화성원행도’… AR-VR로 재탄생

    조선 정조(재위 1776∼1800)의 행차 장면을 그린 ‘화성원행도’를 활용한 디지털 체험전시가 열린다. 국립고궁박물관과 한국전통문화대는 21일부터 다음 달 16일까지 화성원행도에 증강현실(AR) 기술을 적용한 ‘실감 화성, 디지털로 체험하는 8일간의 왕실 행차’ 전시를 선보인다. 화성원행도는 1795년(정조 19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8일간 수원 화성행궁에 행차한 것을 담은 그림. 과거시험 합격자 축하연과 혜경궁의 환갑 잔치, 야간 군사훈련 등을 묘사한 8폭의 병풍이다. 한국전통문화대가 화성원행도에 나타난 건축 양식, 복식, 공연 등을 고증해 입체적으로 구현했다. 전시는 화성원행도 복제품 및 메타버스로 구현한 디지털 콘텐츠 4종, 영상 2종으로 구성됐다. AR을 활용해 만든 혜경궁의 환갑잔치와 정조가 지휘하는 서장대 야간 군사훈련의 경우 관람객들이 태블릿 컴퓨터를 통해 공연과 훈련 과정을 3차원(3D) 애니메이션으로 체험할 수 있다. 신하들과의 활쏘기 행사 등도 가상현실(VR) 기기로 볼 수 있고, 배로 다리를 놓아 한강을 건너는 장면은 AR과 VR을 결합한 확장현실(XR)로 체험할 수 있게 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지금까지 평면으로만 감상한 화성원행도에 첨단 기술을 적용해 230여 년 전 왕의 행차를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고 밝혔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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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휴스턴박물관에 이건희 기증 ‘용 항아리’ 전시

    국립중앙박물관은 미국 휴스턴박물관의 캐럴라인 와이스 로 전시관 1층에 있는 한국실이 새로 단장해 재개관했다고 20일 밝혔다. 2007년부터 한국실을 운영해 온 휴스턴박물관은 소장품 7만여 점을 보유한 미국 남부 최대 규모의 박물관이다. 새로 문을 연 178.5㎡ 규모의 한국실은 조선시대 의례와 신앙, 생활을 보여주는 도자와 목가구, 불상 등 유물 33건 35점으로 채워졌다. 특히 고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이 기증한 청화백자 ‘구름과 용 무늬 항아리’(사진)가 전시된다. 항아리는 왕실을 상징하는 용 무늬로 가득해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이 외에도 조선 왕실에서 자손이 태어났을 때 탯줄과 태반을 보관하던 태항아리, 무늬 없이 순백자로 만들어진 제기 등도 전시된다.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기존 한국실은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의 개괄적인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에 그쳤다면 처음으로 조선시대 삶과 문화를 깊이 있게 보여주는 ‘주제 전시’를 선보이게 됐다”고 설명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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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부터 현대까지… 신발의 역사와 문화 한눈에

    ‘자네 늘 나더러 이르되 둘이 머리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를 두고 먼저 가시는가.’ 1998년 경북 안동시 고성 이씨 분묘에서는 머리카락과 마(麻)를 엮은 미투리(삼이나 모시 등을 가늘게 꼬아 만든 신발)와 더불어 이 같은 내용의 한글 편지가 발견됐다. 양반 신분의 이응태(1556∼1586)가 서른한 살에 병사하자, 아내가 남편을 그리워하는 편지를 써서 관에 넣은 것이다. 남편이 쾌유해 신고 다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정성스레 만든 미투리에는 애절한 부부의 사랑이 묻어난다. 국립대구박물관은 개관 30주년 기념 특별전 ‘한국의 신발, 발과 신’을 연다. 14일 시작되는 전시는 9월 22일까지 열린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우리나라 신발의 역사와 이에 담긴 문화를 다룬다. 총 7부로 구성된 전시에선 짚신과 나막신, 왕실 신발을 비롯해 관련 풍속화 등 316건 531점을 선보인다. 전시에선 신분제 사회에서 권력을 보여주는 다양한 신발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가 왕실의례 때 구장복(九章服)과 적의(翟衣)를 각각 갖춰 입은 뒤 신은 비단 신발 ‘석(舃)’이 눈길을 끈다. 고려시대 신하들이 신은 발목 높은 가죽신 ‘화(靴)’도 전시됐다. 보물로 지정된 ‘안동 태사묘 삼공신 유물’ 중 하나로 보존 처리 이후 일반에 처음 공개됐다. 조선시대 혼례 때 활옷을 입은 신부가 신던 꽃신에서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완성한 화룡점정(畵龍點睛)을 감상할 수 있다. 망자를 추모하기 위해 무덤에 묻은 신발들도 선보인다.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서 출토된 고구려 금동신발을 비롯해 백제 무령왕비 금동신발, 경주 식리총 출토 금동신발 등 삼국시대 금동신발들을 한데 모았다. 고영민 대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삼국의 금동신발을 통해 금속공예 기술과 더불어 당시 사람들의 내세관을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고봉 16좌를 등정한 엄홍길 산악인의 등산화와 한국 불교계를 이끈 고승인 성철 스님(1912∼1993)의 고무신 등 각계 유명 인사들의 신발도 선보인다.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황해봉 화혜장(전통 신발을 만드는 장인)이 만든 가죽 신 ‘혜(鞋)’가 벽면을 가득 채웠다. ‘기후를 극복한 신발’ 코너에서는 비오는 날 신은 삼국시대 나막신과 눈길에 신는 설피 등을 선보인다. 고영민 연구사는 “이번 전시를 통해 신발이 단순히 발을 보호하는 기능을 넘어 다양한 사회문화적 의미를 가진 물품이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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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독일이 소련 점령했다면 세계사는 어떤 모습일까

    과거를 곱씹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과거에 다른 행동을 했더라면 조금 다른 현재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라는 공상과 함께 말이다. 영화 ‘어벤져스’부터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처럼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바꾸는 콘텐츠에 대중이 늘 반응하는 이유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을 대할 때만큼은 좀처럼 사실과 다른 가정을 하는 행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는 말은 교과서처럼 여겨진다. 신간은 ‘가상 역사’를 통해 색다른 시도를 한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부터 소련의 공산주의 붕괴까지 굵직한 역사의 ‘평행 우주’ 버전을 들려준다. ‘미국이 독립하지 못했다면 노예제 폐지가 가능했을까?’ ‘소련에 고르바초프라는 지도자가 없었어도 공산주의가 그토록 빨리 붕괴됐을까?’와 같은 흥미로운 가정을 던진다. 일종의 픽션(fiction)이지만 책이 가볍지는 않다. 이 책은 21세기 최고의 경제사학자로 불리는 니얼 퍼거슨을 비롯한 석학 9명이 1997년 낸 것으로, 이번에 한국어 버전이 처음 출간됐다. 역사에서 다른 과거를 가정하는 행위는 결코 무용하지 않다. 당시 인물들의 발언과 에피소드, 사회상 등을 토대로 재구성한 역사를 보면서 결과론적 해석과 이로 인한 편견을 지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역사가 필연은 결코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또 만일 미국이 식민지 ‘영국령 아메리카’로 남았다면 미국이 1833년 노예제를 폐지한 영국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이에 따라 노예제를 둘러싼 남북전쟁을 겪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분석한다. 수많은 책과 영화가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이 히틀러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가정을 다루면서도 미국의 참전을 통한 연합국의 승리를 낙관했다. 그러나 저자들은 미국과 영국의 관계, 실제 역사 속 미국의 참전 계기 등을 종합할 때 이런 믿음은 후대의 ‘희망’에 가깝다고 말한다. 히틀러가 주변 조언을 토대로 1941년 겨울 이전 모스크바를 점령해 소련을 무너뜨렸다면 나치의 계획이 실현됐을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 책에선 독일이 동부전선에 대해 남긴 수많은 자료를 인용한다. 이 외에도 ‘존 F 케네디가 살았더라면?’ ‘만약 스탈린이 냉전을 피할 수 있었다면?’ 등 흥미로운 지점에서 역사를 비틀어 본다. 신간에 따르면 역사는 고정된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우연과 행운, 실수와 성급함이 복잡하게 작용한 결과에 가깝다. 사소한 변수만으로 지금과 전혀 다른 역사가 펼쳐졌을 수 있다는 상상은 우리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각 장의 저자들이 단단한 근거와 논리적인 맥락을 곁들여 상상력을 발휘하는 점이 흥미롭다. 특히 역사로 이어지기까지 여러 변수를 동시에 고려하기에 가정이 무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가령 책은 모든 역사적 사실을 상수로 놓고 한 가지 변수만 제시하는 방식을 지양한다. 스탈린의 소련이 냉전의 승리자가 됐을 가능성을 논할 때, ‘소련 정보부가 서구에 침투하지 않았을 경우’ ‘스탈린이 서구의 세력권 개념을 받아들였을 경우’ 등으로 상황을 나눠 추론한다. 30년 전 책이지만 오늘날 역사적 사실을 돌아볼 때 주는 교훈도 적지 않다. 일제강점기부터 6·25전쟁 등 굵직한 한국의 역사적 사건에 ‘만약에’ 가정법을 적용해 봐도 좋을 것이다. 역사적 결과보다 더 입체적이고 다양한 사실을 풍부히 느낄 수 있는 책이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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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재, 62년만에 ‘국가유산’으로

    17일부터 62년간 유지되던 ‘문화재’ 용어가 ‘국가유산’으로 바뀐다. 이날부터 국가유산기본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때문. 변화의 핵심 키워드는 ‘보존’→‘활용’이다.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등 기존의 문화재 보존에 치우쳤던 각종 규제가 완화되고, 관광 자원화 등 국가 유산의 활용에 탄력을 기한다는 것이 정부 방침이다. 그러나 전문가들 사이에선 당장 법이 시행되지만 문화유산 활용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이 미흡하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국가유산기본법에 따라 문화재는 국가유산으로, 주무 관청인 문화재청은 국가유산청으로 각각 명패를 바꾼다. 문화재가 재화 개념에 가까워 사람이나 자연물을 포괄하기 어려운 데다 유네스코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유산(heritage)이란 용어를 폭넓게 사용하고 있어서다. 이에 따라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민속문화재, 기념물 등으로 나눠 정부가 관리해온 분류체계도 문화유산, 자연유산, 무형유산으로 좀 더 단순하게 바뀐다.● 보존지역 500m→200m 등 규제 완화 이번 변화의 핵심은 보존을 최우선으로 했던 기존 문화재 정책 목표가 문화유산의 가치를 향유하고 활용하는 방향으로 바뀌는 데 있다. 일각에서 ‘지역 개발의 걸림돌’ 혹은 ‘재산권 침해’로 여겨진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규제 완화가 대표적이다. 기존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지정 문화재로부터 반경 500m 이내 지역에서의 건설 공사는 인허가 전 행정기관의 사전 검토를 받아야 한다. 2021년 일부 건설사가 경기 김포시 장릉 500m 이내에 고층 아파트를 지어 문화재청이 공사 중지 명령을 내리는 등 논란이 된 게 대표적이다. 이에 국가유산청은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에서 주거·공업·상업 지역에 대해선 최대 200m 이내로 현상변경 제한 범위를 완화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부산 동삼동 패총 등 일부 사적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고, 향후 완화 범위를 더 늘릴 방침이다. 또 제작된 지 50년이 넘은 ‘일반 동산문화재’의 국외 반출을 제한하는 규정도 풀기로 했다. 1946년 이후 만들어진 미술 작품은 제한 없이 해외로 나갈 수 있도록 시행령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과 맞물려 국내 미술품에 대한 해외 수요를 촉진하기 위한 취지다.● 전국 문화유산 ‘스마트폰 해설’도 국가유산의 가치를 알리고 공유하기 위한 사업도 추진된다. 딱딱한 문화관광 안내판 등에서 벗어나 스마트폰만으로 전국 문화유산의 해설을 체계적으로 들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겠다는 것. 국가유산청 관계자는 “같은 문화유산을 여러 번 봐도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며 “박물관 도슨트처럼 전국 문화유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해설 체계가 갖춰지면 관광의 패러다임이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유산기본법에 산업 육성을 명시해 추진하는 것도 주목된다. 국가유산을 매개로 하는 콘텐츠나 상품의 개발, 제작, 유통 과정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관련 산업을 키우겠다는 것. 지방 관광 진흥과 맞물려 문화유산을 활용한 산업이 활성화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문화유산 활용에 대한 청사진이 여전히 미흡해 자칫 용어나 조직 변경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비지정 문화재인 일부 고궁 전각을 숙박시설로 활용하려다가 여론의 반발로 무산된 ‘궁스테이’ 정책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치밀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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