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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돈은 물론이고 아이디어도 빼앗고,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뒤처질까봐 멈추지 못하는 곳. 한국이다. 연극 ‘목란언니’는 탈북 여성의 시각에서 본 ‘요지경’ 남한의 모습을 신선하고 경쾌하게 풀어냈다. 그러면서도 묵직한 주제 의식을 놓치지 않는다. 2012년 동아연극상 희곡상(김은성 작)을 받는 등 주요 상을 휩쓸었다. 평양예술학교에서 아코디언을 전공한 조목란(김정민)은 뜻하지 않은 일에 휘말려 한국에 왔지만 브로커에게 속아 정착금과 임대아파트 보증금을 잃는다. 부모가 있는 북한으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돈은 5000만 원. 룸살롱을 운영하며 세 남매를 키운 조대자(강지은)는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한 아들 태산(안병식)의 간병인으로 목란을 받아들인다. 경계인 목란의 눈으로 본 남한은 균열로 가득 차 있다. 철학과 교수 태강(김주완)은 학과가 폐지돼 갈 곳을 잃고, 태양(이지혜)은 무명작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반갑습니다’ ‘려성은 꽃이라네’ 등 북한 노래가 율동과 함께 나오는가 하면 탈북 남성의 과장된 간증 등 짧은 에피소드들이 휘몰아치듯 튀어나오는 가운데 목란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악스럽게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남과 북 그 어디에도 파라다이스가 없음을 서글프게 증명한다. 객석을 네 군데로 나눠 중앙과 객석 사이를 무대로 활용함으로써 극의 역동성을 높였다. 상처와 폭력으로 얼룩진 우리 근현대사와 오늘날의 현실을, 마냥 우울하지 않으면서도 예리하고 촘촘하게 빚어낸 솜씨가 일품이다. 4월 22일까지, 서울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3만 원. 02-708-5001 ★★★★(별 다섯 개 만점)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그게, 말이 되나요?” 배우 박은태(36)가 다음 달 15일 막을 올리는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남자 주인공 로버트 킨케이드 역을 더블 캐스팅 없이 단독으로 제안받자마자 튀어나온 말이었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그러나 대본을 보고 음악을 들은 후 곧바로 작품에 빠져 들었다. 여주인공 프란체스카 역은 옥주현(37)이 역시 단독으로 맡았다.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23일 박은태를 만났다. 만나자마자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며 악수를 청했다. 반듯한 이미지 그대로였다. 그는 소설, 영화로 유명한 작품을 맡은 데 대한 부담을 숨기지 않았다. “영화의 이미지를 극복하는 게 숙제이긴 해요. 다만 손짓 하나, 눈빛 하나로 절절함을 표현한 클린트 이스트우드 선생님과 메릴 스트립 선생님 같은 명연기를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먼 나라 배우들에게도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깍듯하게 붙였다. 주인공들이 어린 것 같다고 하자 그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도 좀 더 젊게 설정했다”고 말했다. 착실하고 모범적인 그가 바람 같은 킨케이드 역을 어떻게 소화할까. “킨케이드는 자유를 갈구하지만 따뜻하고 진심을 담고 있는 사람이에요. 허튼 말은 하지 않죠.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프란체스카에게 함께 떠나자고 했는데, 그런 말은 살면서 단 한 번 하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지도록 하려 애쓰고 있어요.” 영화감독 김지운이 만든 ‘매디슨…’ 뮤직비디오를 보면 박은태가 부르는 넘버는 그의 미성과 어우러져 긴 여운을 남긴다. 멜로디도 귓가에 오래 맴돈다. “힘겹게 절제하는 미세한 감정의 흐름을 객석에 전달하고 싶어요. 폭발하기보다는 밀도로 승부해야죠. 옥주현 씨와는 ‘황태자 루돌프’에서 연인으로 만났는데 편하고 말도 잘 통해요.”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온 그는 2007년 뮤지컬 ‘라이온 킹’의 앙상블로 데뷔해 ‘노트르담 드 파리’ ‘프랑켄슈타인’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지킬 앤 하이드’ ‘모차르트!’ 등 차근차근 작품을 하며 정상에 올랐다. “돌아보니 10년 동안 가장 길게 쉰 게 ‘도리안 그레이’를 하기 전 석 달이었어요. 보통 한 달을 채 쉰 적이 없었죠. ‘매디슨…’도 ‘팬텀’이 끝난 후 곧바로 한 거고요. 계속 오를 무대가 있다는 게 고맙죠.” 걸그룹 파파야 출신 배우 고은채와 2012년 결혼한 그는 딸, 아들을 둔 아빠다. 요즘 아이들의 잠자는 얼굴만 보고 나올 때가 많아 마음이 짠하단다. “아빠가 되니 내 안의 우주가 더 커진 느낌이에요.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하루하루 무사히 일상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는 걸 깨닫고 있답니다.” 그는 앞으로 10년 동안 다시 달릴 수 있는 체력과 실력을 유지하길 소망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선생님이 ‘저런 연기를 해야지’라고 생각하게 만들듯이 사람들이 제 연기를 보고 ‘명연기’라고 말할 날이 오리라 믿어요.” 4월 15일∼6월 18일.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5만∼14만 원. 1588-5212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시는 힘이 세다. 최근 막을 올린 창작 뮤지컬 ‘윤동주, 달을 쏘다’ ‘스모크’를 통해 태어난 윤동주, 이상의 시와 삶은 그 자체로 강한 자력을 뿜어내며 관객을 끌어당긴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 이상 서거 80주기가 되는 올해. 20대에 세상을 떠난 두 청년은 무대에서 다른 색깔로 그렇게 피어났다. ‘윤동주…’는 2012년 초연돼 올해 네 번째 공연되는 작품이다. 해를 거듭하며 작품의 밀도를 높이고 세련미를 강화했다. 윤동주 역에는 박영수 온주완이 더블 캐스팅됐다. 박 씨는 초연 때부터 계속 윤동주를 맡았다. 새로 합류한 온 씨는 절망의 시대에 시를 쓰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면서도 우리말을 통해 영혼을 지키려 한 청년을 애틋하게 표현했다. ‘서시’ ‘참회록’ ‘십자가’ 등 시 8편은 서정적인 영상이나 여백이 있는 장면들과 함께 독백 혹은 낭송으로 흘러나온다. 곡을 붙이지 않고 시를 있는 그대로 음미하게 만든 점이 돋보인다. 그래서 더 담백하고 더 절절하다. 장난치고, 이성에게 끌리며 여느 젊은이들처럼 해맑았던 윤동주와 송몽규(김도빈) 등이 절망의 시대에 짓눌리며 저항하다 질식하는 과정은 웅장한 합창, 화려한 군무와 어우러져 애달프게 다가온다. 무대에는 열차가 등장하는가 하면 경성 거리, 연희전문학교, 감옥 등으로 빠르게 바뀌며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윤동주’란 콘텐츠를 영리하게 녹여낸, 한 편의 서정시 같은 작품이다. 아름답고 눈물겹다. 모든 관람객에게 무료로 증정하는 윤동주 육필 원고 사본은 그의 자취를 한층 생생히 느끼게 만든다. 4월 2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4만∼8만 원. 1544-1555 ★★★ ‘윤동주…’가 시인의 삶을 사실대로 그린 작품이라면 ‘스모크’는 이상의 작품과 삶을 미스터리 스릴러 형식으로 풀어냈다. 시를 쓰는 남자 ‘초’(김재범 김경수 박은석)와 그림 그리는 소년 ‘해’(정원영 고은성 윤소호)는 바다를 보러 갈 돈을 마련하기 위해 미스코시백화점 딸 ‘홍’(정연 김여진 유주혜)을 납치한다. 홍은 몸과 마음 모두에 고통을 지닌 여인이다. 작품은 한마디로 이상의 시 같다. 이야기가 한 단계씩 전개되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는 과정은 분열된 자아를 표현한 이상의 작품 속으로 한 걸음씩 들어가는 듯하다. 잘 짜여진 퍼즐을 보는 듯 흥미롭고 신선하다. 실력 있는 배우들의 연기는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높인다. 이상의 삶과 작품에 대해 자세히 알수록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 이상이 신문에 ‘오감도’를 연재하다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로 중단해야 했고, 반일 지식인 혐의로 34일간 옥살이를 했으며 죽음의 문턱에서 멜론을 먹고 싶다고 말했던 일화 등을 녹였다. 시 ‘오감도’ ‘거울’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비롯해 소설 ‘날개’ 등의 구절이 등장한다. 극의 막바지에 이상의 시가 영상으로 벽면을 가득 채우는 장면은 찡한 여운을 남긴다. 5월 28일까지 서울 대학로 유니플렉스2관. 3만∼6만 원. 02-2638-2872 ★★☆(별 다섯 개 만점)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드라마 ‘피고인’이 자체 최고 시청률 28.3%(닐슨코리아 기준)를 올리고 21일 종영했다. 아내와 딸을 죽였다는 누명을 쓴 채 온갖 난관을 절묘하게 뚫고 나가는 검사 박정우 역을 맡은 지성과 그를 파멸로 몰아넣은 재벌 2세 차민호 역의 엄기준(사진)은 압도적인 연기력을 통해 드라마를 성공으로 이끈 쌍두마차다. 엄 씨는 냉혹한 살인마지만 사랑하는 여인에겐 눈빛이 흔들리고, 폭압적인 아버지 앞에서 벌벌 떠는 모습을 실감나게 연기했다. 엄 씨는 무대에서도 탁월한 연기를 선사하는 배우다. 뮤지컬 ‘레베카’ ‘베르테르’ ‘잭 더 리퍼’, 연극 ‘클로저’ 등에서 차가우면서도 부드럽고 애절한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했다. 공연계에서는 ‘피고인’에서 맹활약한 그에게 박수를 보내면서도 “무대에서 보기 어려워지는 것 아니냐”며 애정 어린 걱정을 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다행히 그가 주연을 맡은 뮤지컬 ‘몬테크리스토’가 전국 투어 공연을 하고 있다. 무대에서 발산하는 그의 매력을 맛보길 권한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600여 년간 서울을 둘러싸고 자리를 지켜 온 건축물인 한양도성(사진)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지 못하게 됐다. 문화재청은 “유네스코 자문 심사 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로부터 최근 한양도성의 등재 불가 판정을 통보받았다”고 21일 밝혔다. 이코모스는 14명으로 구성한 전문가 패널 심사를 통해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은 이에 따라 한양도성의 세계유산 등재 신청도 철회하기로 했다. 이코모스는 각국이 등재하려는 유산을 심사해 ‘등재 권고’ ‘보류’ ‘반려’ ‘등재 불가’ 등 네 가지 권고안 중 하나를 선택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와 해당 국가에 전달한다. 등재 불가 결정을 받으면 사실상 등재가 불가능하게 된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지난해 이코모스로부터 ‘반려’ 판정을 받은 ‘한국의 서원’에 이어 2년 연속으로 등재를 추진하던 유산을 세계유산위원회 회의 본선에 올리지 못하게 됐다. 영주 소수서원, 경주 옥산서원, 정읍 무성서원 등 9개 서원을 묶은 ‘한국의 서원’은 서원들 사이의 공통점이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았다. 1995년 주민들의 등재 반대 움직임에 부닥쳤던 ‘설악산 자연보호구역’, 2009년 ‘등재 불가’ 판정을 받은 ‘한국의 백악기 공룡 해안’을 포함하면 이번이 네 번째 자진 철회다. 문화재청 측은 “한국 고유의 사상인 성리학과 풍수를 근간으로 자연 지세를 살려 축성된 한양도성은 진정성, 완전성, 보존 관리 계획 등에서 충분한 요건을 갖췄지만 다른 나라의 세계유산 도시 성벽과 비교해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밝혔다. 문화재청 측은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각국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심사가 엄격해졌다. 앞으로 더 면밀하고 충분한 연구와 검토를 거치겠다”고 밝혔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이윤택 연출가가 이끄는 극단 연희단거리패가 운영하던 게릴라극장(서울 종로구 혜화로)이 다음 달 문을 닫는다. 2004년 서울 동숭동에서 문을 연 이 공연장은 2006년 5월 현재 위치로 옮긴 뒤 ‘하녀들’ ‘갈매기’ 등 고전을 비롯해 실험적인 작품 160여 편을 무대에 올렸다. 게릴라극장은 ‘오프 대학로의 중심’ ‘소극장 연극의 메카’로 불렸지만 경영난에 시달려 극장을 매각하게 됐다. 게릴라극장은 폐관 공연으로 연극 ‘황혼’을 30일부터 다음 달 16일까지 올린다. 알프스의 관광객에게 산짐승의 울음소리를 흉내내주며 살아가는 70대 시각장애인에게 50대 매춘부가 찾아오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투리니의 작품으로 시각장애인 노인 역에 명계남, 매춘부 역에 김소희가 출연한다. 게릴라극장 예술감독인 채윤일 씨가 연출을 맡았다. 연희단거리패는 지난해 종로구 창경궁로에 개관한 소극장 ‘30스튜디오’에서 공연을 올리며 작업을 이어갈 예정이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이 전시회가 끝나면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최근 한 미술 전시회에서 관람객에게 작품 설명을 하던 큐레이터가 여담이라며 말문을 꺼냈다. “곡선을 중시했던 작가의 가치관에 맞춰 작품들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도록 전시 공간을 구성했어요. 쉽지 않은 작업이었죠. 해외에서 온 고령의 설치 담당자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전시관 1, 2층을 오르내리며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했답니다. 느낀 바도 많았고요.” 큐레이터의 목소리에는 그가 전시회를 준비하며 겪었을 고민과 함께 애정이 담겨 있었다. 전시회가 끝난 후 그 미술관 앞을 지나게 됐다. 철거된 나무판들이 쌓여 있었다. 그 큐레이터는 마지막 관람객이 떠난 후 얼마나 울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끝난 후에야 거기에 쏟았던 노력과 감정을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인간관계든 일이든 그 무엇이든 말이다. 특히 공연은 매일 막을 내리고, 오직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휘발성을 지닌 장르이기에 ‘끝’의 의미를 늘 생각하게 만든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막공’(마지막 공연)을 본 적이 있다. 막이 내린 후 배우들이 한마디씩 소감을 얘기했다. 여주인공 알돈자 역을 맡았던 배우는 감사 인사를 한 후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여인숙에서 일하며 몸을 파는 알돈자는 거친 노새꾼들에게 잔혹하게 짓밟히지만 끝내 일어서는 캐릭터다.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공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두려워하며 떨 때, 다들 할 수 있다고 다독여 줬습니다. 막공을 해냈다는 게 믿기지 않고 고마울 뿐입니다.” 눈물범벅이 된 채 말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니 그의 마음고생, 몸 고생이 얼마나 컸을까 싶어 코끝이 찡해졌다. 배우들은 배역에 몰입하다 보면 실제 삶도 그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감당하기 힘든 삶을 살아가는 역할을 맡아 이 악물고 버텨낸 그에게 더 세게, 더 오래 박수를 보냈다. 뮤지컬계에서 스타 연출가로 불리는 왕용범 씨는 완벽주의자로 유명하다. 큰 성공을 거둔 창작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을 만들 때는 배경이 된 스위스를 다녀왔고, 생명과학 윤리를 다룬 논문을 비롯해 찾아본 자료만 2000쪽이 훌쩍 넘는다. 그는 “공연은 끝나고 나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작업 후 에너지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죄스럽다”고 말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붓는단다. 정호승 시인의 ‘침묵 속에서’란 시를 읽다 보니 이들이 떠올랐다. ‘이별의 시간이 찾아올 때까지는/사랑의 깊이를 모른다는 님의 말씀을/이제야 침묵 속에서 알아차립니다.’(시집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중) 끝이란 건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과 감정을 깨닫게 만든다. 하얀 종이를 갖다대야 투명한 용기에 담긴 액체의 색깔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돌아설 때 고마움과 환희,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이 쌓여 갈수록 스스로에게 잘살았다고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손효림 문화부 기자 aryssong@donga.com}
이윤택 연출가가 이끄는 극단 연희단거리패가 운영하던 게릴라극장(서울 종로구 혜화로)이 다음달 문을 닫는다. 2004년 동숭동에 문을 연 이 공연장은 2006년 5월 현재 위치로 옮긴 뒤 ‘하녀들’ ‘수업’ ‘갈매기’ 등 고전을 비롯해 실험적인 작품 160여 편을 무대에 올렸다. 연희단거리패 뿐 아니라 다른 극단의 작품도 공연했다. 완성도 높고 참신한 작품이 꾸준히 공연되면서 게릴라극장은 ‘오프 대학로의 중심’ ‘소극장 연극의 메카’로 불렸다. 하지만 경영난에 시달려 결국 극장을 매각하게 됐다. 앞으로 극장은 다른 용도로 전환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게릴라극장은 폐관 공연으로 연극 ‘황혼’을 30일부터 다음달 16일까지 올린다. 알프스의 관광객을 상대로 산짐승의 울음소리를 흉내내주며 살아가는 70대 시각장애인에게 50대 매춘부가 찾아오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투리니의 작품으로 시각장애인 노인 역에 명계남, 매춘부 역에 김소희가 출연한다. 게릴라극장 예술감독인 채윤일 씨가 연출을 맡았다. 지난해 11월 게릴라극장에서 국내 초연된 작품이다. 연희단거리패는 지난해 종로구 창경궁로에 개관한 소극장 ‘30스튜디오’에서 공연을 올리며 작업을 이어갈 예정이다. 75석 규모의 30스튜디오가 있는 건물에는 카페와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의 숙소도 있다. 극단 측은 “10년 넘게 매일 불을 밝히던 게릴라극장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만, 이곳을 거쳐 간 연극인들과 관객들의 열정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며 “게릴라극장을 사랑해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대선을 한 달여 앞둔 31일, 치열한 권력 다툼을 그린 연극 ‘왕위 주장자들’의 막이 오른다. 13세기 노르웨이를 배경으로 헨리크 입센이 쓴 작품으로 국내 초연이다. 연출을 맡은 김광보 서울시극단장(53)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17일 만났다. 그는 2014년 11월,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입센의 ‘사회의 기둥들’을 연출하기도 했다. “둘 다 우연의 일치예요. ‘사회…’는 공연을 2013년에 결정했고, ‘왕위…’는 2015년 서울시극단장을 맡은 후 계획했어요. 올해 대선이 있다는 걸 1%도 고려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연말과는 시간차가 나잖아요. 봄에 대선을 할 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왕위를 확신하는 호콘왕과 6년간 섭정하며 왕국이 자신의 것이라 믿는 스쿨레 백작은 맹렬하게 충돌한다. 니콜라스 주교는 스쿨레 백작의 욕망과 의심을 부추기며 갈등을 고조시킨다. 눈이 충혈된 채 수척한 얼굴을 한 김 단장은 “매일 KO되고 있다”로 토로했다.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을 할 때 브레히트의 통찰력에 함몰돼 정말 어려웠는데 이번에도 그런 느낌이에요. 입센을 담아내기엔 제 그릇이 부족하다는 걸 절감하고 있어요.” ‘줄리어스 시저’, ‘그게 아닌데’로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받는 등 주요 연극상을 휩쓸어온 스타 연출가는 고뇌하고 있었다. 그는 “스타 연출가란 말은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하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권력에 대한 인간의 집착과 심리를 깊숙한 부분까지 끄집어내는 게 만만치 않아요. 절망과 환란의 시대에 권력자들은 희망을 제시하는데, 그게 모든 이가 바라는 진정한 희망인지 의구심을 제기하고 싶고요.” 집에 가면 곧바로 쓰러져 자느라 유일한 취미인 영화도 못 보고 있다고 한다. 한 달 전, ‘왕위…’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 ‘라스트 킹’을 본 게 마지막이란다. 그는 대선 주자들이 이 작품을 꼭 보기를 희망했다. “극중 상황을 대선 주자들도 실제 겪게 되지 않을까요. 왕권을 쟁취할 자격이 있는지, 권력을 가졌을 때 어떤 방식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될 겁니다.” 그는 쉬지 않고 한 해 7, 8개의 작품을 올리는 일 중독자로 유명하다. 서울시극단장이 된 후에는 작품 수가 연간 3, 4개로 줄었다. “공공성과 재정 자립도 등 책임질 게 많아요. 작품별로 에너지가 2, 3배는 더 소모되는 것 같아요. 몸무게가 4kg 정도 빠졌어요.” 그가 부임한 후 서울시극단 작품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지고 관객들의 호응도 커졌다. ‘침체된 서울시극단에 숨결을 불어넣고 싶다’는 소망을 실현시킨 셈이다. 하지만 그는 연출가로서 진화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김광보표 연극’이라는 게 고인 물처럼 느껴질 수 있잖아요. 어떻게 변화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러시아의 유명 연출가인 레프 도딘을 보면 그 통찰력에 감탄하게 돼요. 제 ‘욕망’은 ‘김광보가 한 단계 진일보했다’는 말을 듣는 겁니다.” 유성주 김주헌 유연수 이창직 강신구 등 출연, 31일∼4월 23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2만∼5만 원. 02-399-1794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주요 작품▽ 줄리어스 시저▽ 나는 형제다▽ 여우인간 ▽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그게 아닌데 ▽ 프로즌▽ 사회의 기둥들▽ 스테디 레인 ‘동토유케’}

두산아트센터가 ‘갈등’을 주제로 2017년 두산인문극장을 운영한다. 두산인문극장은 2013년 ‘빅 히스토리: 빅뱅에서 빅 데이터까지’를 시작으로 2014년 ‘불신시대’, 2015년 ‘예외’, 2016년 ‘모험’을 주제로 관객을 만났다. 연강홀에서는 25, 26일 안은미 씨가 안무와 연출을 맡은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오후 5시·1만 원)를 공연한다. ‘단발머리’, ‘백만송이 장미’, ‘낭만에 대하여’ 등에 맞춰 막춤을 추는 할머니들을 통해 과거의 시간과 공간을 기억하는 몸짓과 삶의 에너지를 선보인다. 탈북 여성 조목란이 브로커에게 정착금과 임대아파트 보증금을 사기 당한 후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려는 이야기를 그린 연극 ‘목란언니’(28일∼4월 22일·스페이스111·3만 원)도 공연한다. 분단된 남북처럼 갈라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이다. 2012년 동아연극상 희곡상(김은성)을 받았다. 연극 ‘죽음과 소녀’(5월 2∼14일·스페이스111·3만 원)는 칠레 독재 정권을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다.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는 빠울리나가 자신을 고문한 의사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감금하면서 인권위원회 활동을 하는 변호사 남편과 벌이는 충돌을 담았다. 연극 ‘생각은 자유’(5월 23일∼6월 17일·스페이스111·3만 원)는 세계시민과 이주민, 난민의 시각으로 한국과 독일 베를린을 바라보며 예술과 사회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알리바이 연대기’로 2013년 동아연극상 작품상과 희곡상을 받은 김재엽 연출가의 신작이다. 그가 베를린에서 1년간 생활하며 쓴 일기와 창작노트, 현지 인터뷰 등을 활용해 만들었다. 두산갤러리에서 진행하는 전시 ‘또 하나의 기둥’(4월 12일∼5월 27일)은 공간의 안과 밖에서 개인으로, 혹은 대중으로 대립하고 연결되기도 하는 우리의 모습을 담았다. 연강홀에서는 영화 ‘무산일기’, ‘대답해줘’ 등을 상영한다. 갈등을 주제로 한 강연(27일∼6월 5일)도 월요일마다 10회 진행한다. 전시, 강연, 영화는 무료다. 02-708-5001, 5050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얼굴을 하얗게 분칠한 광대들이 공연장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손을 흔들며 관객을 반긴다. 막이 오르기 전부터 공연은 이미 시작된 셈이다. 연극 ‘변두리 극장’은 공연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공연 내내 기존의 질서를 뒤엎는다. 독일의 유명 희극배우이자 극작가, 영화 제작자인 카를 발렌틴(1882∼1948)의 작품으로, 민중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을 익살스럽게 비틀며 현실을 풍자했다. 막이 오르면 요즘 보기 어려운 언어유희, 몸개그가 낯설면서도 신선하게 펼쳐진다. 악보대로 연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휘자 광대(이승헌)와 악보에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제대로 연주할 수 없다는 단원 광대들은 도돌이표 같은 실랑이를 계속한다. 부부 광대는 ‘백 투 더 퓨처 투’처럼 상대방의 얼굴에 침을 더 많이 튀게 만드는 말을 찾아내며 악착같이 싸운다. 주문한 책을 다 만들었다고 전화한 제본소 직원에게 담당자가 아니라며 회사 직원들이 전화를 계속 다른 사람에게로 넘기는 장면은 관료주의의 폐해를 꼬집는다. 에피소드별로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예상할 수가 없다. 배우들은 바이올린 피아노 트럼펫 드럼 등을 직접 연주하고, 뛰고 구르며 온몸으로 에너지를 뿜어낸다. 몸 훈련이 잘된 연희단거리패 배우들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용수철처럼 온몸을 자유자재로 구부리고 펴며 극장을 휘젓는 이승헌은 광대 그 자체다. 메마른 이 시대에, 머리를 비우고 광대들과 한바탕 어울리다 보면 다소 촌스러우면서도 정겨웠던 어느 한때로 돌아간 듯하다. 윤정섭 김아라나 신명은 박현승 등 출연. 26일까지 서울 종로구 게릴라극장. 3만 원. 02-763-1268. ★★★☆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과거의 나를 불러내 숨결을 다시 불어넣은 것 같아요. 초심을 많이 찾게 됐어요.”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밑바닥에서’에 대해 말하는 왕용범 연출가(43)의 눈은 설렘으로 반짝였다. ‘프랑켄슈타인’ ‘잭 더 리퍼’ ‘삼총사’ 등 대극장 뮤지컬을 꾸준히 선보이며 뚜렷한 색깔을 구축한 그는 소극장으로 돌아와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최근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간절했는데 마음의 고향인 대학로에 와서 위안을 받고 있다”며 미소 지었다. 막심 고리키의 동명 희곡을 바탕으로 그가 다시 만든 이 작품은 2005년 초연돼 호평을 받았다. 배경은 여인숙에서 선술집으로 바뀌었다. 백작을 대신해 감옥에 갔다 출소한 페페르, 병든 동생을 돌보며 술집을 운영하는 타냐, 알코올 중독자인 전직 배우 등의 앞에 새 종업원 나타샤가 등장하면서 이들의 마음에 희망이 꿈틀댄다. 하지만 이내 더 거센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2007년 공연 후 10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 ‘밑바닥에서’는 처절함과 슬픔, 처연한 웃음이 밀도 높은 연기와 어우러진 옹골찬 작품이다. “대학(서울예대 연극과) 시절 연극으로 만들면서 완전히 사로잡힌 작품이에요. 극한 상황에서도 인생의 답을 찾아가려 몸부림치는 모습이 낭만적으로 느껴졌죠.” 어려웠던 가정사와도 겹쳐졌단다. 외환위기로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면서 그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전단 돌리기, 무대 조명 아르바이트, 우편물 접기 등 안 해본 게 없어요. 하지만 부모님은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셨고, 연극을 하고 싶어 했던 동생은 ‘돈은 내가 벌 테니 형은 연극 해’라며 길을 비켜줬어요. 너무 고맙고 지금도 가슴에 사무쳐요.”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인생은 살 만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단다. 그 마음을 고스란히 이 작품에 쏟아냈다. “가난의 밑바닥보다는 인간 내면의 밑바닥을 더 비추려 했어요. 배우들의 에너지는 물론 숨소리까지 고스란히 전하고 싶어 200석이 채 안 되는 학전블루를 택했어요.” 과거 이 작품을 하며 아내가 된 배우 서지영을 만났기에 더 각별하단다. 그는 앞으로 10년간의 일정이 꽉 짜여 있다. 8월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는 창작뮤지컬 ‘벤허’를 초연한다. “한 작품을 만드는 데 3년 정도 걸려요. 배경이 되는 나라를 다녀오고, 해당 시대에 대한 역사, 문화, 생활상 등 관련 책을 모조리 찾아봐요.” 요즘은 로마와 기독교의 역사, 여러 나라의 독립운동, 이스라엘 관련 책 등을 보고 있다. “작업하고 나서 조금이라도 에너지가 남아 있으면 죄스러워요. 끝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게 공연이니까요. 고정된 시선을 깬 작품이 좋은 반응을 얻을 때면 신선한 자극을 받아요. 아, 그런데 아무리 애써도 절대 알 수 없는 게 딱 두 가지더라고요. 여자와 관객 마음요.(웃음) 저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며 작품을 만들려고 해요.” 최우혁 김지유 서지영 이승현 등 출연. 5월 21일까지. 6만 원. 02-1544-1555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깊고 그윽한 수묵화 같다. 효(孝)가 아닌 죽음의 관점에서 심청을 새롭게 해석한 연극 ‘심청’이다.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 중인 ‘심청’은 사전 정보 없이 관람하더라도, 죽음을 관념이 아니라 실재적으로 고민한 노작가의 연륜이 담긴 작품임을 직감할 수 있다. 이강백 극작가(70)는 삶과 죽음을 마디마디 곱씹은 후 이를 묵직하게 투영했다. 맹수 같은 파도를 달래기 위해 출항할 때마다 처녀들을 제물로 바쳐온 선주(송흥진)는 겉보리 스무 가마에 팔려온 간난(정새별)을 지극정성으로 모시지만, 간난은 왜 죽어야 하느냐며 제물 되기를 거부한다. 깊은 병이 들어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 선주는 온 힘을 다해 죽음을 거부하는 간난을 보며 마음이 흔들린다. 간난이 자기 이름 석 자를 배워 써보고 기뻐하며 생의 마지막 순간을 환희로 채워가는 동안 선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린다. “내가 내게 다가오는 것”이라는 선주의 대사는 죽음의 핵심을 꿰뚫는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아버지, 선주 등 그 무엇도 아닌 자기 스스로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죽음이기에. 극은 우울하지 않다. 당돌하고 솔직한 간난과 선주 자리를 물려받기 위해 간난을 설득할 묘안을 짜내는 세 아들(이길, 신안진, 윤대홍)은 웃음을 자아낸다. 죽음이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살아 있는 이들은 또 이렇게 산다. 이수인 연출가는 여백을 둔 공간 구성과 서정적인 연주, 마임(이두성)의 정갈한 동작으로 메시지를 단아하게 증폭시킨다. 놓치지 말아야 할 공연 목록에 넣고 싶은 작품이다. ★★★★(★5개 만점). 19일까지, 3만 원. 02-742-7563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7시간.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1, 2부(각 3시간 30분)를 합친 공연 시간이다. 압도적인 스케일과 정동환 김태훈 지현준 등 쟁쟁한 배우들의 출연으로 화제가 됐다.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합격점이다. 각색도 함께한 나진환 연출가(극단 피악 대표)는 친부 살해를 소재로 인간의 탐욕과 죄의식 등을 다각도로 비추며 인간 존재와 신의 의미를 깊이 고찰한 원작의 핵심을 정연하게 추려내 안정감 있게 연출했다. 배우들의 명품 연기는 무대를 한껏 달군다. 도스토옙스키가 작품을 설명하는 극중극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도스토옙스키와 대심문관, 식객 등 1인 다역을 맡은 정동환은 시선을 사로잡는다. 1부의 하이라이트인 ‘대심문관’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와 본성, 신의 의도 등에 대한 의문과 주장을 그리스도에게 쏟아낼 때는 집중력 높은 연기로 깊은 내공을 확인시켜 줬다. 2부에서 탐욕과 파괴 본능을 상징하는 식객으로 분해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환기시키고 조롱해, 보는 이마저 마음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게 만든다. 김태훈은 방탕하지만 솔직하고 진실함을 지닌 장남 드미트리를 격정적으로 그리며 1, 2부를 꽉 채운다. 이성만을 신뢰하며 마음의 벽을 단단히 치지만 욕망과 죄의식이 터져 나오며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차남 이반 역을 온몸으로 처절하게 연기하는 지현준은 2부에서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낸다. 스메르쟈코프 역의 이기돈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악마적 본성을 드러내며 이반에게 죄의식을 교묘히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소름 끼치게 소화했다. 긴 호흡의 대사를 통해 주제를 찬찬히 음미하고 싶다면 1부를,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무대를 원한다면 2부를 추천한다. 19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3만∼6만 원. 02-765-1776 ★★★☆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정동극장이 외국인 단체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상설 전통공연에서 벗어나 국내 관객들의 눈길을 끌 만한 다양한 장르가 융합된 전통 기반 창작공연을 선보인다. 손상원 정동극장장은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정동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외국인이 언제든 정동극장에 오면 한국 전통 공연을 볼 수 있게 하고, 국내 관객도 전통 문화를 쉽고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공연을 기획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 가운데 절반 이상이 개별 관광객이기 때문에 한국 문화를 즐기는 방법이나 콘텐츠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여러 형태의 전통 공연을 만드는 ‘창작ing’ 사업을 신설했다. 판소리 ‘적벽가’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뮤지컬, 춤과 결합한 ‘적벽’(26일까지)이 이 사업을 통해 탄생했다. 지난해 ‘적벽무’란 제목으로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에서 대학생 뮤지컬 부문 우수상 등을 받은 작품을 다듬고 규모를 키웠다. ‘적벽’은 고수 1명과 소리꾼 1명이 펼치는 판소리의 기존 형식에서 벗어나 판소리 합창과 군무를 통해 웅장함을 강조했다. 11, 12월에도 창작 신작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기존 상설 공연의 일환으로, 한국 무용을 기반으로 만든 ‘련, 다시 피는 꽃’은 다음 달 6일부터 10월 29일까지 무대에 오른다. 극장 마당에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은 리모델링해 젊은 예술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창작 공간인 ‘정동마루’로 바꾼다. ‘정동마루’ 개관을 기념해 ‘춘향가’ ‘심청가’ 등을 새롭게 해석한 작품들을 다음 달 공연한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학전블루소극장 앞에는 가수 김광석(1964∼1996)이 기타를 치는 모습의 노래비가 있다. 그가 1995년 이 소극장에서 콘서트 1000회를 맞이한 것을 기념해 김광석추모사업회에서 세웠다. 얼마 전 노래비 앞에 놓인 소주 한 병을 봤다. 그와 소주 한 잔 기울이고 싶은 마음을 담아 누군가가 놓아둔 것이리라. ‘영원한 가객’이 부른 노래는 뮤지컬 ‘그날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 여름, 동물원’ 등으로 만들어졌다. 최근 막을 내린 ‘그날들’은 미스터리한 사건에 절도 있는 군무가 어우러진 작품이다. 다음 달 대구에서 무대에 오르는 ‘바람이…’는 그의 목소리를 빼닮은 배우가 통기타와 하모니카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른다. 시간이 되돌아간 듯 아련함이 밀려든다. 깊이 있는 음악으로 호평받은 ‘그 여름…’은 연말에 다시 공연될 예정이다. 푸르른 젊음 그대로 멈춘 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노래비 옆 나뭇가지는 앙상했지만 그는 추워 보이지 않았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발가벗은 세 살짜리 남자아이가 젓가락으로 냄비를 두드리고 옹알거리며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깔깔깔 웃고 난리가 났다. 운명이었을까. 아이는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에 20년간 출연하며 냄비, 도마, 프라이팬 등을 두드리고 있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난타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무대를 지키고 있는 배우 김문수(52)다. 그는 8년간 헤드 셰프 역을 맡은 후 12년째 매니저 역을 하고 있다. 서울 중구 명동난타극장에서 지난달 28일 그를 만났다. 그는 “송승환 PMC프러덕션 회장과 작품을 만들 때부터 오래갈 것이라 예감했다. 그만큼 힘과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며 빙그레 웃었다. 그가 한 행사장에서 망가진 냉장고와 청소기, 양동이 등을 두드리며 공연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송 회장이 찾아오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당시 송 회장은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던 중이었다. 김덕수 사물놀이패 단원 등도 합류해 연구한 끝에 1997년 10월 탄생한 ‘옥동자’ 난타는 55개국에서 공연됐다. 현재 서울 명동, 충정로, 홍대와 제주를 비롯해 중국 광저우, 태국 방콕까지 6곳의 전용극장에서 상설 공연 중이다. 20주년을 맞아 전용공연장(659석)과 객실 204개를 갖춘 ‘호텔난타제주’(지하 2층, 지상 5층)가 한라산 인근에 17일 문을 연다. 가히 ‘난타 왕국’이라 부를 만하다. 배우 류승룡, 김원해 등이 난타 출신이다. 그는 20년간 단 한 번도 공연을 펑크 낸 적이 없다. “연극을 할 때 선배들에게서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무대에 서야 한다’고 배웠어요. 그 신념을 지키는 건 제 자신을 지키는 일이기도 해요. 난타 배우 중 최고령이지만 수영, 걷기를 꾸준히 해서 체력은 짱짱하답니다. 하하.” 이런 그에게 송 회장은 20주년 기념행사 때 순금 칼이 도마에 세로로 박힌 기념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관객들이 웃으면 뜨거운 기운이 막 솟구쳐요. 막이 내릴 때면 매번 울컥해요.” 일주일에 많게는 14회가량 무대에 오른 적도 있지만 요즘은 4, 5회 공연한다. 사건도 많았다. 칼을 자유자재로 휘두르고 두드리는 고난도 기술을 구사하다 손이 베여 세 번이나 수술을 받았고, 칼날 조각이 오른쪽 눈썹에 튀어 꿰매기도 했다. “수프 통을 엎어 무대 전체에 수프가 좍 쏟아진 적도 있었어요. 헤드 셰프 역을 할 때였는데, 공연의 일부인 것처럼 셰프 역 배우들에게 화를 내며 닦으라고 지시해 같이 바닥을 닦은 후 공연했죠.”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벨기에로 유럽 투어를 처음 나갔을 때 하루 공연하고 이동하는 일정이 이어져 군대보다 더 힘들었단다. 하지만 잊지 못할 벅찬 감격을 맛봤다. “네덜란드에서 50대 현지 여성이 엔딩 때 머플러를 손에 쥐고 마구 흔드는 모습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어요. 온몸에 소름이 돋더라고요.” 그는 첫 공연 때 썼던 상모(농악대가 쓰는 모자)를 수선해 지금도 쓰고 있다. 상모를 볼 때마다 20년간의 기억이 떠오른다. 무대에 설 때마다 늘 새롭단다. 싱글인 그는 “난타는 내 인생의 동반자”라며 눈을 찡긋거렸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동아연극상의 새 심사위원이 위촉됐다. 동아일보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사옥에서 3일 심사위원 위촉장 전달식을 열었다. 심사위원은 윤광진 용인대 연극학과 교수(63), 허순자 서울예술대 연극과 교수(63), 박근형 한국예술종합학교 연출과 교수(54·극단 골목길 연출가), 최용훈 청운대 뮤지컬학과 교수(54·극단 작은신화 대표), 이경미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학과 겸임교수(54), 김태훈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51), 임일진 인천대 공연예술학과 교수(49) 등 7명으로 구성됐다. 심사위원장은 윤 교수가 맡았다. 윤 심사위원장은 “연극계가 갈수록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고 있다. 동아연극상의 권위에 걸맞게 우리나라 연극이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며 신선하고 역동적인 에너지와 변화 등을 놓치지 않고 수용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심사위원에 대해서는 3년 임기제를 도입했으며 연임 가능하다. 간사제도도 신설해 황승경 국제예술기획 대표(41)가 간사를 맡았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이혜영의, 이혜영에 의한, 이혜영을 위한’ 작품이었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메디아’는 이 씨의 존재감이 압도적이다. 그는 사랑을 위해 조국까지 버렸지만 남편 이아손(하동준)이 크레온 왕(박완규)의 딸과 결혼하기로 하자 광기 어린 분노에 휩싸인 메디아를 연기하며 특유의 센 에너지를 뜨겁게 분출한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암사자 같다. 고통, 절망으로 점철된 상황에서도 이아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여린 내면을 드러내는가 하면 고혹적인 자태로 유혹한다. 그럼에도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침착하려 애쓰며 처참한 복수를 계획한 후 하나씩 차례로 실행할 때는 지독할 정도로 차갑다. 두 아들을 죽이기 전 고뇌하는 모정을 절절하게 토해내는 등 극한의 감정들을 자유자재로 뿜어내며 원숙한 연기력을 입증해 보였다. 메디아의 감정을 대변하거나 때로 동정하고 비난하는 코러스는 극의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메디아와 두 아들에게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라며 오히려 역정을 내는 이아손의 행동은 “인간이 가장 사랑하는 건 자기 자신”이라는 말로 설명된다. 하지만 극은 메디아가 두 아들을 죽이며 정점을 향해 치닫는 순간 힘없이 무너지며 서둘러 끝을 맺는다. 치를 떠는 이아손을 향해 메디아가 죽기 전 외친 한마디 “속상해?”는 극을 떠받치기에는 너무 가볍다. 남명렬(아이게우스 역) 등 관록 있는 남자 배우들의 비중이 작아 이 씨에게 지나치게 기댄 구성도 아쉽다. 4월 2일까지, 2만∼5만 원, 1644-2003. ★★★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진도 씻김굿, 동해안 별신굿, 제주도 무혼굿이 녹아든 연극을 무대에서 만날 수 있다. 연희단거리패는 굿을 소재로 만든 연극인 ‘씻금’ ‘오구’ ‘초혼’을 차례로 공연하는 ‘굿과 연극’ 기획전을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 30스튜디오에서 3월 1일부터 시작한다. 대본 구성과 연출은 모두 이윤택 연출가가 맡았다. ‘씻금’(3월 1∼12일)은 ‘씻김’의 진도 사투리다. 주인공 순례의 죽음을 시작으로 그의 가족사가 펼쳐지며 진도 앞바다에 빠져 죽은 여러 넋이 등장한다. 일제강점기, 광복 이후 소용돌이, 외환위기를 거쳐 세월호 사건까지 한국 근현대사와 개인사가 연결된다. 삶과 죽음, 개인과 역사가 제의를 통해 만나고 화해한다. 육자배기, 흥그레 타령, 진도 아리랑 등 남도소리 미학을 맛볼 수 있다. 진도 씻김굿의 마지막 당골(남도 지역 세습무)인 고 채정례 선생이 음악 부분을 직접 지도했고 김미숙이 출연한다. ‘오구’(3월 16일∼4월 2일)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재산 싸움을 벌이는 자식들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죽음의 두려움과 슬픔을 해학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풍어를 기원하는 동해안 별신굿(정식 명칭은 동해안 풍어제)이 등장한다. 강부자가 팔순 노모로 출연하기도 했다. 1989년 초연 당시 20대의 나이에 노모를 연기했던 남미정이 이번 무대에 선다. 제주도민들이 근현대에 겪은 수난을 그린 ‘초혼’(4월 20일∼5월 7일)에는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의 넋을 건져내 위로하고 저승으로 보내는 제주도 무혼굿이 나온다. 3대에 걸쳐 벌어진 한 집안의 수난사를 통해 일제에 대한 해녀들의 저항 운동, 제주도4·3사건 등의 역사가 펼쳐진다. 원한을 품은 이들이 한을 풀고 용서하는 과정을 그렸다. 김소희 김미숙 윤정섭 등이 극을 이끈다. 이 연출가는 “최순실의 국정 농단 사태로 우리 문화 예술의 원형인 굿이 혹세무민의 수단으로 오해받는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시리즈를 기획했다”며 “굿이 얼마나 다양한 스타일로 동시대의 현실을 반영하는지 널리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각 3만 원. 02-766-9831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