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운

김상운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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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학술 분야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단행본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을 냈고,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을 제작했습니다.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sukim@donga.com

취재분야

2026-01-09~202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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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의암댐 물 빠지자 드러난 ‘중도식 토기’… ‘원삼국’ 역사 다시 써

    지난달 24일 이강승 충남대 교수(67)와 찾은 강원 춘천시 중도(中島). 그가 1980년 발굴해 대학 교재와 교과서에도 실린 ‘중도식(中島式) 토기’가 나온 1호 집자리(주거지 흔적)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흔한 표지판조차 없이 삭막한 아스팔트 포장도로만 유적 위를 덮고 있었다. 이 교수는 36년 전 어렴풋한 기억을 되살려 1호 집자리가 있었을 위치에서 사진촬영을 마쳤다. 집자리 근처에서 50여 m 떨어진 레고랜드 사업부지에서는 터파기 공사가 한창이었다. 2014년 사업부지 안에서 1400여 기에 이르는 청동기시대 고인돌과 주거지 등이 무더기로 발견돼 개발 논란이 일었다. “많은 게 바뀌었지만 선착장 자리는 그대로군요. 모든 이야기는 저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지난해 정년을 맞은 노교수의 눈은 이미 1977년을 향하고 있었다.○ 운명은 정해진 자의 몫 “가봐야 별 것 없을 거요. 내가 방금 가보니 토기 조각 하나 없습디다.” 1977년 5월 20일 춘천 중도 건너편 선착장. 지표조사차 중도행 배를 기다리던 이강승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안춘배 문화재관리국 전문위원(전 신라대 교수)을 우연히 만났다. 중도 조사를 마치고 빈손으로 돌아온 안춘배의 말에 그는 별 기대감 없이 배에 올랐다. 하지만 운명은 정해진 자의 몫이던가. 그는 운 좋게도 중도에 도착한 직후 강물에 의해 깎인 중도 단층에서 토기 조각을 발견했다. 의암댐 수위 조절로 만수위 때 중도를 방문한 안춘배는 물속에 단층이 잠겨 토기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이강승은 수위가 낮아질 때 들어가 이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행운이 계속 이어졌다. 3년 뒤 본격적인 발굴에 앞서 1980년 5월 중도 사전답사를 나섰을 때에도 강가 단층에서 토기를 찾아냈다. 이번에는 지표조사 때보다 더 큰 수확을 얻었다. 조각이 아닌 완형(完形)의 토기가 나온 것이다. 그는 중앙박물관 고고부로 수습한 토기를 가져왔다. 그즈음 다른 업무차 고고부를 방문한 한병삼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이 이 토기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병삼은 “야, 대단하다!”는 감탄사를 내뱉고 서둘러 최순우 중앙박물관장을 만나 “대단한 발견을 한 것 같다”고 귀띔했다. 박물관이 이후 5년간 진행한 중도 발굴의 서막이었다. 이강승은 “한 관장은 경주에서 나온 와질토기(瓦質土器·회색이며 기와처럼 무른 토기)의 고고학적 맥락을 잘 알고 있었다”며 “중도 토기를 보고 와질토기와 대응하는 유물이 한반도 중부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도식 토기, 원삼국시대를 보는 창 1970년대 후반 경주 조양동 등에서 발견된 와질토기는 고고학계에 실체를 둘러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와질토기는 원삼국시대 토기로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와 삼국시대 토기를 잇는 과도기 단계로 결론이 났다. 그런데 와질토기에 해당하는 원삼국시대 토기가 중부지방에서는 확인되지 않아 한동안 오리무중이었다. 민무늬 혹은 타날문(打捺文·실이 감긴 도구로 두드려 새긴 무늬)토기로 나뉘는 중도식 토기가 발견되면서 잃어버린 고리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학계는 중도식 토기가 원삼국시대 문화 교류의 양상을 반영하는 핵심 자료라고 평가한다. 예를 들어 중도식 타날문토기는 연나라 등 중국 전국시대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반면 중도식 민무늬토기는 우리나라 청동기 전통을 잇는 것으로, 한반도 서북지역 혹은 동북지역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강승은 “중도에서는 민무늬토기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훨씬 많았다”며 “이곳 주민들이 타날문토기 제작 기술을 나중에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노학자의 겸손 그리고 용기 누구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법이다. 용기와 겸손함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강승은 1980년 당시 1호 집자리가 ‘여(呂)자’형 구조라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사각형 주거지에 대한 편견에 갇혀 주거 공간 앞에 또 하나의 전실(前室)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앙박물관의 1980년대 발굴보고서에는 1호 집자리가 말각방형(抹角方形·모서리를 둥글게 한 사각형) 형태라고만 기술돼 있다. 1호 집자리의 여자형 구조는 2010년 중도 재발굴 때 뒤늦게 밝혀졌다. “중도는 현장 책임자로 첫 발굴이어서 미숙한 점이 많았고 부담감도 컸습니다. 돌이켜보면 시간, 예산의 제약으로 폭넓게 발굴하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앞으로 원삼국시대 무덤과 문화 전파 경로에 대한 연구가 더 이뤄져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레고랜드 개발이 불가피하다면 유적 파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신중하게 진행되길 바랍니다.”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춘천=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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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덕혜옹주’ 인기에 남양주 묘소 임시 개방

    550만 관객이 든 영화 ‘덕혜옹주’의 흥행을 계기로 그가 묻힌 묘소가 임시 개방된다. 문화재청은 “추석을 맞아 13일부터 다음 달 30일까지 경기 남양주시 홍릉(洪陵)과 유릉(裕陵) 안에 있는 덕혜옹주와 의친왕 묘소를 임시로 개방한다”고 6일 밝혔다. 홍릉은 고종황제와 명성태황후의 무덤이며 유릉에는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가 묻혀 있다. 홍릉과 유릉은 다른 조선왕릉과 달리 황제릉의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덕혜옹주를 비롯해 그의 오빠인 영친왕, 의친왕 등 가족묘 7기가 함께 들어서 있다. 덕혜옹주와 그의 이복오빠인 의친왕의 묘는 출입문을 함께 쓴다. 홍릉과 유릉은 일반에 이미 개방됐으나 덕혜옹주 무덤을 비롯한 7기의 묘는 비공개 상태였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최근 영화 ‘덕혜옹주’ 개봉 이후 묘소를 보고 싶다는 민원이 잇달아 임시 공개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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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늘어선 2만여점 신안유물… 보물창고의 회랑을 걷는 느낌

    《 올해는 신안해저선 발굴 40주년, 늑도 발굴 30주년을 맞는 해. 우리나라의 양대 해양 문화재의 진수를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가 잇따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 특별전과 국립진주박물관의 ‘국제무역항 늑도와 하루노쓰지’ 특별전이 바로 그것. 두 전시를 직접 다녀와 비교해봤다. 》 ○ 바다서 건진 유물 2만 점 한꺼번에 풀다 신안해저선 특별전을 한번 훑어보는 데 이틀이 걸렸다. 1976년부터 9년에 걸쳐 전남 신안군 앞바다에서 인양한 신안해저선 유물의 양은 2만4000여 점. 이 중 무려 2만 점을 전시장에 한꺼번에 풀어놓았다. 양에서 압도하는 전례 없는 시도다. 실제로 하이라이트인 3부 전시장에 들어서면 신안선에서 건져 올린 도기 수백 점을 유리진열장에 좌우로 늘어놓은 장관이 펼쳐진다. 3부 전시 주제처럼 ‘보물창고’의 거대한 회랑을 걷는 느낌이다. 1323년 6월(음력) 중국 원나라 경원(慶元·현 지명 닝보)에서 일본 하카타(博多·현 후쿠오카)로 향하던 신안해저선 화물의 주 고객은 일본 귀족들이었다. 색색의 화려한 유약을 바른 진귀한 도자기들이 증거다. 하얀색 유약에 포인트를 준 백탁유(白濁釉) 도기는 마치 한 폭의 포스트모더니즘 회화를 감상하는 것 같다. 무려 700년 묵은 공예품이지만 지금 특급호텔 로비에 내놓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세련된 감각이다.복숭아 모양의 청백자 잔은 또 어떠한가. 도기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복숭아 꼭지는 워낙 정교해 무릉도원에서 막 따낸 것 같다. 청자로 세밀하게 표현한 여인상의 흘겨 뜬 두 눈은 투기하는 여인을 연상시킨다. 전시 말미 신안해저선을 발굴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패널도 인상적이다. 고고학을 전공한 이영훈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선배 고고학자들에게 바치는 오마주로 읽힌다. 전시는 다음 달 4일까지.○ 늑도에서 발견된 日 야요이 토기 늑도 특별전은 단순히 1986년 경남 사천시 늑도에서 출토된 유물만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진주박물관은 일본 이키시립박물관과 손잡고 규슈 이키 섬 하루노쓰지 유적 출토품을 가져와 비교 전시했다. 기원전 2세기∼기원후 1세기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주요 거점인 늑도와 이키 섬의 교류상을 생생히 보여주려는 취지다. 25일 찾은 전시장에서는 늑도에서 출토된 야요이 토기와 하루노쓰지에서 출토된 한반도계 토기를 나란히 진열해 눈길을 끌었다. 어떤 게 일본 혹은 한반도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늑도 토기 상당수는 두 줄의 돌대문(突帶紋·돋을띠무늬)이 둘러쳐 있거나, 달항아리처럼 표면이 둥글게 흐르다 아래로 확 좁아지는 기형 등이 일본 야요이 토기와 거의 같았다. 일본 이키 섬의 한 토기도 쇠뿔을 닮은 두 개의 손잡이(파수부)나 기형, 색상 등이 한반도 토기와 진배없었다. 학계는 적재 규모가 200t에 이른 신안해저선과 달리 늑도의 선박들은 연안을 운항하는 소형 목선이 주류를 이뤘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한일 해상교역도 늑도∼김해∼쓰시마 섬∼이키 섬∼규슈로 이어지는 중계 거점무역 형태로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전시는 다음 달 16일까지.○ 신안선-늑도 닮은꼴, 그리고 미스터리 14세기 신안해저선이나 기원전 2세기 늑도는 큰 시차에도 불구하고 한중일을 잇는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실태를 보여준다. 실제로 신안해저선에는 중국 도자기뿐만 아니라 고려청자도 발견됐다. 특히 웍(중국식 조리기구)과 게다(일본 나막신), 고려식 청동숟가락이 나왔다. 약 60명이 탈 수 있던 신안선은 탑승자들의 국적도 국제적이었다. 늑도 역시 한반도, 일본뿐만 아니라 낙랑에서 만들어진 토기와 중국 동전이 대거 발견됐다. 그러나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은 부분이 적지 않다. 우선 신안해저선이 과연 한반도를 잠시 경유했는지, 경원∼하카타 직항로에서 멀리 떨어진 신안 앞바다까지 표류한 원인이 무엇인지다. 학계는 신안선이 갯바위나 암초와 충돌하면서 뱃머리 우현에 벌어진 틈으로 물이 들어와 침몰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늑도는 중계무역지로 번성하다 기원후 2세기 무렵 갑자기 쇠락한 원인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이동관 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김해지역이 철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늑도가 쇠퇴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일각에서는 이 무렵 발견된 시신에 결핵을 앓은 흔적을 들어 전염병을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진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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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조선·明은 정벌대상” 日고문헌의 침략미화

    러일전쟁과 이라크전쟁에서 일본과 미국은 공통점이 있다. 일본은 러시아의 침략에 앞서 예방 전쟁을 치렀다고 주장했으며, 미국도 9·11테러 직후 대량살상무기(WMD) 위험을 명분으로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 책은 전범국가 일본의 전쟁 논리를 임진왜란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하는 독특한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 저자는 매우 성실하다. 16∼19세기 한중일의 전쟁 관련 사서와 편지, 문학 등 문헌을 폭넓게 비교하고 서로 끼친 영향을 자세히 분석했다. 4년 동안 일본 국문학 연구 자료관에서 방대한 고문헌을 붙잡고 씨름한 결과라고 한다. 저자는 전쟁 정당화의 논리를 크게 공격과 방어의 차원으로 나눠 본다. 동양 개념의 정벌(征伐) 혹은 서양 개념의 성전(聖戰)은 도덕적 패악을 저지른 무리에 대한 정당한 심판으로 이해된다. 반면 러일전쟁은 잠재적 피해를 막기 위한 방어전의 논리다. 이것은 비단 일본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예컨대 저자는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고구려의 소(小)중화주의를 읽어낸 이성시 와세다대 교수의 연구를 인용한다. 즉, 중국 왕조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동시에 화이(華夷)사상을 언급하는 비문 내용은 결국 정벌의 논리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중화의 위치에 놓고 조선과 명은 정벌의 대상으로 봤다. 일본 영토 확장의 초기 타깃이었던 류큐(오키나와)나 에조(홋카이도, 사할린) 역시 같은 논리가 적용됐다. 임진왜란을 기술한 일본 고문헌에는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을 조작한 시도들이 포착된다. 예를 들어 1801년 간행된 ‘에혼 다이코기’는 독실한 불교도였던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 백성에게 온정을 베풀어 그가 주둔했던 울산으로 수만 명이 몰려들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 앞서 17세기 작성된 ‘다이코기’는 진주성, 울산, 행주산성, 길주에서 벌어진 전투를 실제 연대기와 다르게 배치해 일본이 최종 승리를 거둔 것처럼 호도했다. 적반하장 격의 피해의식이 강조되기도 했다. 저자는 “가토 기요마사를 다룬 문헌에서 그의 군대가 공격받았다는 피해의식이 강조된다”며 “외국이 일본을 공격한다는 식의 도치 현상은 임진왜란 문헌 외에서도 확인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知)의 교류는 왜곡된 진실을 뛰어넘는 법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113년이 지난 1705년 승려 세이키가 쓴 ‘조선군기대전’과 같은 해 바바 신이가 쓴 ‘조선태평기’는 이순신 장군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순신을 조력자로 묘사하는 데 그친 중국 문헌과 달리 임진왜란의 주인공으로 그린 류성룡의 ‘징비록’이 일본에 유입됐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일본 에도시대의 유학자 가이바라 엣켄은 ‘조선징비록’ 서문에서 “징비록의 기사는 간결하고 말이 질박하니, 과장이 많고 화려함을 다투는 세상의 다른 책들과는 다르다. 조선 정벌을 말하는 자는 이 책을 근거로 삼는 것이 좋다”고 썼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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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라지는 우토로 마을… 기록으로 고스란히

    올 6월부터 재개발을 위해 철거가 시작된 일본 우토로 마을의 모습을 담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동아대 건축학과와 라움건축은 부산 해운대구 송정역 시민갤러리에서 ‘우토로 기록전’을 다음 달 20일까지 연다. 우토로는 일본 교토(京都) 부 우지(宇治) 시에 있는 마을로 1941년 일제의 교토 비행장 건설에 동원된 조선인들이 거주하면서 조성됐다. 이곳은 전후 일본사회의 차별과 무관심 속에 방치돼 논란이 됐다. 동아대 건축학과는 재일동포들의 고난을 고스란히 간직한 우토로 51번지의 무허가 건물 100여 동에 대한 현지조사를 지난해 진행했다. 이 조사를 토대로 건물들에 대한 모형작업을 마쳤다. 전시에서는 가로 2m, 세로 4m의 모형마을과 마을의 변화상을 담은 사진 등을 선보인다. 안재철 동아대 건축학과 교수는 “일제강점기의 증거와 흔적을 남긴다는 취지에서 전시회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모형마을과 자료 등은 우토로 마을에 건립될 예정인 역사관에 기증할 계획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우토로 마을 기록화 사업을 위한 모금도 진행 중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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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 고고학 연구 갈수록 멀어져… 통일시대 대비해 협력을”

    고고학 연구에서도 남북 간 인식 차이가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고고학회는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고환경연구소 후원으로 23일 서울대에서 ‘통일고고학을 위한 연구현황과 과제진단’ 학술회의를 열었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연구자들은 북한학계의 고조선, 고구려 연구동향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향후 통일을 대비한 남북 고고학계의 협력방안을 모색했다. 양시은 충북대 교수는 ‘북한학계 고구려 고고학의 최근 연구동향’ 발표 논문에서 “북한 고고학은 남한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통일 후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를 규명하는 데 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논문에 따르면 북한의 고구려 고고학 연구는 주체사상이라는 틀에 따라 조사내용을 결론에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예컨대 북한은 기존의 고조선 요동 중심설을 버리고 1990년대 중반부터 ‘대동강 문화론’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따라 고구려의 평양 진출 시기를 무리하게 앞당기면서 고분 축조 시기에서 남한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양 교수는 “남북한의 학문적 인식 차이를 줄이려면 2000년대 남측의 고고학 자료가 북측에 소개된 것처럼 학술 교류가 꾸준히 진행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정인성 영남대 교수가 ‘북한학계 고조선 및 낙랑 고고학의 최근 연구동향’을 발표한 데 이어 정영진 연변대 교수가 ‘연변대학과 북한 사회과학원의 고대유적 공동조사 성과와 과제’를 발표했다. 박성진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만월대 조사를 통해 본 북한 고고학계와의 협력방안’을, 이기성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북한학계 선사 고고학의 최근 연구동향’을 주제로 발표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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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독립선언서-무스탕 전투기 문화재 된다

    3·1독립선언서와 국내 최초의 전투기가 문화재가 된다. 문화재청은 3·1독립선언서와 우리나라 첫 전투기인 ‘F-51D 무스탕’(사진) 두 대를 문화재로 등록 예고한다고 22일 밝혔다. 3·1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을 하면서 가로 44.9cm, 세로 20.1cm의 종이에 민족대표 33인의 이름과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 내용을 담은 것. 문화재청은 “독립운동 사상 가장 중요한 문헌 중 하나로, 전국에 만세 시위를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고 설명했다. 현재 서울 예술의전당과 개인 소유자가 1점씩 독립선언서 원본을 보유하고 있다. ‘F-51D 무스탕’은 1940년대 미국에서 제작된 전투기로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 2일 공군이 도입했다. 이와 함께 전남 고흥 소록도의 한센인 생활 유품을 문화재로 등록했다. 등록문화재 제663호로 지정된 이 유품은 1930∼1960년대 한센인들이 만든 치료용 칼, 국자, 냄비 등 생활도구 총 8종 14점(국립소록도병원 소장)이다. 한센인들의 열악한 생활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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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석산 동쪽 요서도 고조선 땅” vs “고고학 증거와 불일치”

    “츠펑(赤峰) 시 인근에서 비파형동검이 나오는 걸 보면 여기는 초기 고조선의 석성(石城)이 분명하다.”(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이 석성은 고고학계에서 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로 규명된 곳이다. 비파형동검 제작 시기보다 무려 500∼1000년이나 앞서는데, 어떻게 고조선 석성이 될 수 있는가.”(정인성 영남대 교수) 20일 오후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츠펑 시 삼좌점(三座店) 석성(石城). 댐 정상에 올라 경사면을 내려다보자 돌로 쌓은 성벽과 원형의 집터가 여럿 보였다. 절벽을 자연 방어선 삼아 조성된 초기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이었다. 인적 드문 옛 성벽과 집터의 고요함은 한국에서 답사 나온 강단 및 재야 사학자의 설전으로 한순간 깨졌다. 이날 답사는 동북아역사재단 후원으로 고조선 영역과 한군현(漢郡縣) 위치를 둘러싸고 갈등을 벌이는 강단 및 재야 사학계가 현장을 함께 고증하고 합리적인 토론을 벌이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양측이 공동 답사에 나선 것은 처음이다. 답사에선 기원전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삼좌점 석성의 축조 집단이 누구인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소장과 동행한 재야 사학자들은 석성 곳곳에 보이는 치(雉·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관찰하거나 막기 위한 시설)를 가리키며 “치는 고구려 산성의 특징으로 중국 중원(中原)문화와 다르다”며 “고조선 산성”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치는 고구려 산성의 전유물이 아니며 석성 양식은 산둥(山東) 성 등 중국의 다른 지방에서도 볼 수 있다”고 반박했다. 강단 사학자들은 석성을 만든 하가점 하층문화를 고조선 문화와 동일시하는 재야 사학계의 견해에 부정적이었다. 이들은 “하층문화보다 1000년 뒤인 것으로 보이는 하가점 상층문화는 당시 중국 동북지방의 종족인 동호(東胡)나 산융(山戎)이 주도한 것으로 보이지만 하층문화의 주체는 아직 불명확하다”고 말했다. 삼좌점 석성 관련 논란이 빚어진 것은 요서지역까지 고조선의 영역으로 보는 재야 사학계의 시각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중국 사서인 ‘태강지리지’ 등을 근거로 고조선의 서쪽 경계가 중국 허베이(河北) 성 친황다오(秦皇島) 시에 있는 갈석산 인근까지 이른다고 본다. 이 소장은 “중국 사서 ‘회남자(淮南子)’에 따르면 ‘갈석산을 지나면 고조선 땅’이라고 적혀 있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19일 랴오닝(遼寧) 성 후루다오(葫芦島) 시 갈석궁(碣石宮) 터에서도 양측은 격돌했다. 1984년 발굴된 이곳에서는 기원전 3세기 진나라 시대의 기와와 토기, 벽돌이 대거 발견돼 중국 고고학계는 진시황의 행궁으로 보고 있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제국의 동쪽 끝을 순행하면서 갈석궁에 잠시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야 사학자 한 명은 “당시 이곳은 진나라의 영토일 수 없다”며 “유적이 (중국 측에 의해)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갈석궁이 고조선의 영토인 갈석산 동쪽에 있기 때문에 진나라의 것이 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건물 터 유적에 재연된 사격자 무늬의 공심(空心) 전돌을 보여주며 “진시황 당시 함양궁 전각 터에서도 같은 양식의 전돌이 발견됐다. 오랜 시간 연구된 학술자료를 위조로 모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반박했다. 답사 내내 의견 대립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3세기 후반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 공략 이후 설치했다는 연나라 장성(연장성·燕長城)이 한반도까지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는 서로 동의했다. 앞서 중국사회과학원이 작성한 중국역사지도집에는 연장성이 청천강 부근까지 그려져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정 교수는 “요동지방의 푸신(阜新) 동쪽으로는 연나라 토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장성이 한반도 안까지 들어왔다고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츠펑·후루다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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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고분벽화로 고구려의 문화-사상을 읽다

    고구려는 한국 고대사에서 외양과 실질이 괴리된 대표적인 분야다. 한국인의 프라이드로 고구려의 북방경영이 으레 회자되지만, 정작 고구려사 연구는 삼국 중 제일 취약하다. 고구려의 핵심 강역이 북한과 중국에 속하는 데 연유하지만, 이미 중국과 수교한 지 20년이 넘은 마당이라 이마저도 궁색한 핑계일 수 있겠다. 이 책 저자는 어려운 연구 여건에서도 국내에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로 일가를 이룬 권위자다. 고분벽화는 단순한 미술품이 아니다. 이 시대의 생활사가 집약돼 있을 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도 깃들어 있다. 무덤 축조 방식이나 연대를 통해 사서에 기록돼 있지 않은 당시의 정치, 사회상마저 엿볼 수 있다. 북한 황해남도 안악군 ‘안악 3호분’ 벽화에 대한 저자의 설명도 고구려사와 얽힌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고 있다. 고분에 묻힌 주인이 중국 연나라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장군 동수(冬壽)인지, 아니면 고구려 미천왕 혹은 고국원왕인지를 둘러싼 논란과 관련해 벽화가 주는 힌트가 흥미롭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저자는 안악 3호분의 벽화구조나 양식을 검토할 때 중국식에 가깝다는 점에서 동수설을 지지한다. 예컨대 매우 풍만하게 묘사된 무덤 주인의 부인과 시녀들의 얼굴은 고구려 벽화에서 통상 길고 갸름하게 표현하는 고구려 여인의 그것과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회랑(回廊)이 들어 있는 평면구조나 천장을 회로 마감한 디테일도 벽화 제작자가 고구려인이 아닌 중국인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옛 한군현 대방군에서 고구려로 흡수된 안악 지역에 동수의 무덤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얼까. 고구려가 낙랑군의 주민을 대거 포로로 잡아간 것과 달리 대방군에 대해선 기존 사회질서를 용인했다는 데 저자는 주목한다. 다시 말해 동수와 같은 중국 망명객이 터전을 잡기에는 이민족 문화에 배타적이지 않았던 안악 지역이 안성맞춤이었다는 설명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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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백제 정지산 유적 〓 빈전’ 무령왕릉 지석으로 풀었다

    “초석(礎石·주춧돌)도 없는 건물에 연꽃무늬 기와라니….” 1996년 8월 충남 공주시 정지산 유적 발굴 현장. 그해 발굴에 착수한 지 6개월 만에 연꽃무늬 수막새를 발견한 이한상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사(49·현 대전대 교수)는 ‘대박’ 예감과 함께 깊은 고민에 빠졌다. 연꽃무늬 기와가 출토되는 삼국시대 건물터는 십중팔구 궁궐 혹은 격이 높은 사찰. 당시 무거운 기와를 버티려면 기둥 아래 초석이나 적심(積心·기둥을 올리기 위해 밑바닥에 까는 돌)을 놓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초석이나 적심이 전혀 나오지 않는 대신 바깥부터 안쪽까지 기둥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기둥이 너무 많아 사람이 거주하기 불편할 정도였다. 궁금증은 갈수록 커졌다. ‘도대체 이 건물의 기능은 무엇인가….’ 미스터리를 풀 열쇠는 인근 무령왕릉 안에 있었다. 20년 만에 정지산에 오른 그는 “발굴 한 해 전 무령왕릉 내부를 실측한 경험이 중요한 힌트가 됐다”고 회고했다.○ 무령왕릉 지석에 담긴 실마리 ‘병오년(서기 526년) 12월 백제국 왕태비(무령왕비)께서 천명대로 살다 돌아가셨다. 서쪽 땅에서 장례를 치르고 기유년(529년) 2월 12일 다시 대묘로 옮겨 장사를 지내며 기록한다(丙午年十二月 百濟國王太妃壽終 居喪在酉地 己酉年二月癸未朔十二日甲午 改葬還大墓 立志如左).’ 무령왕릉에서는 삼국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묻힌 사람의 이름과 사망일이 새겨진 지석(誌石)이 발견됐다. 여기서 나온 지석 2개 중 한 면에 무령왕비가 죽은 해와 빈전(殯殿·시신을 입관한 뒤 매장하기 전까지 안치하는 곳)의 위치, 남편 무령왕과 합장된 날짜가 기록돼 있다. 백제의 경우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2년 3개월 동안 시신을 빈전에 모시고 상례를 치른 뒤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한상은 이 중 ‘서쪽 땅에서 장례를 치렀다(居喪在酉地)’는 문장에 주목했다. 다른 지석에 방위표가 그려진 걸 감안할 때 이것은 빈전의 위치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단서임에 틀림없었다. 기준점인 왕궁 위치는 지석 다른 면에 새겨진 매지권(買地券·죽은 사람이 땅 신으로부터 묻힐 땅을 사들인 증서) 문장을 통해 공산성(公山城)으로 추정했다. 이한상은 지도에 무령왕릉과 공산성(왕궁)을 직선으로 연결한 뒤 다시 공산성을 꼭짓점으로 지석이 가리키는 방향(서쪽)으로 직선을 그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정지산에 선이 닿았다. 정지산 유적이 백제 무령왕비의 빈전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로써 초석이나 적심이 없는 연꽃무늬 기와 건물에 대한 의문도 풀렸다. 시신을 안치하는 장소이니만큼 사람이 거주하기 힘들 정도로 내부에 기둥이 빼곡해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제기(祭器)로 주로 쓰이는 ‘장고형(長鼓形) 기대(器臺)’ 조각이 여럿 출토된 것도 빈전일 가능성을 높여줬다. 이한상은 이듬해 열린 전국역사학대회에 정지산 유적을 빈전으로 해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일부 회의론도 있었지만 학계 다수는 이를 지지했고, 정지산 유적은 2006년 국가사적으로 승격됐다. 특히 오다 후지오(小田富士雄) 후쿠오카(福岡)대 교수 등 일본 학계의 관심이 뜨거웠다. 정지산 유적에서 기와건물터와 함께 발굴된 대벽(大辟)건물터가 일본의 그것과 서로 닮았기 때문이다. 대벽건물터는 사각형으로 도랑을 판 뒤 그 위에 나무기둥을 촘촘히 박아 벽을 세운 것이다. 이한상은 “정지산 유적의 대벽건물터는 시신이 안치된 기와건물터와 품(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어 다분히 기획성이 엿보인다”고 분석했다.○ 학계 “백제 3년상 고고 자료로 실증” 고고학계는 정지산 유적이 삼국시대 빈전을 확인한 유일한 자료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한다. 궁궐 안 빈전에서 5∼7일만 장례를 거행한 중국과 달리 3년상을 치른 고대 한반도의 장의 풍습을 고고 자료로 실증했다는 것이다. 3년상은 바다 건너 일본 열도에까지 전해졌다. 일본서기에는 일본 조메이(舒明) 천황이 죽은 뒤 ‘백제대빈(百濟大殯·백제의 3년상)’을 따랐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백제와 일본 왕실이 상장의례를 공유한 것은 양국 문화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라며 “정지산 유적 발굴은 대벽건물터가 일본으로 전파된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단초가 됐다”고 설명했다.  공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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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티파니, 광복절 ‘日욱일기’ 논란 “실수로 SNS 올려… 심려 끼쳐 죄송”

    소녀시대의 티파니가 광복절을 앞두고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욱일기 로고와 일장기 이모티콘을 사용한 데 대해 사과했다. 그는 15일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소중하고 뜻 깊은 날에 저의 실수로 인해 많은 분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글을 올렸다. 이에 앞서 티파니는 14일 일본 도쿄돔 공연 직후 도쿄 저팬(Tokyo Japan) 영문에 욱일기 로고가 합성된 사진을 SNS에 올려 광복절을 앞두고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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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고조선을 알면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고조선 강역을 둘러싼 해묵은 역사 논쟁이 최근 동북아 역사지도 폐기 논란으로 확대되는 가운데 강단 내 비주류를 대표하는 저자의 신간이 나왔다. 그는 고조선 국경 논쟁의 핵심인 갈석산과 패수의 위치, 여기서 연역되는 한 군현 위치에 대한 주류 사학계의 통설을 전면 부인한다. 저자는 고조선이 단순한 과거사에 그치지 않고 오늘과 내일의 우리를 알 수 있는 시금석이라고 강조한다. 외래문화에 영향을 받지 않은 한민족 고유의 원형질이 고조선에 담겨 있다는 주장이다. 서구식 민족국가(nation state) 개념이 아닌, 민족 문화의 원형을 고조선에서 찾을 수 있다는 논리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에게 고조선은 절대적인 가치에 가깝다. 고조선의 위상을 재평가하는 데 거침이 없다. 예컨대 학계 일각에서 사이비 취급을 하고 있는 북한의 단군릉에 대해서도 무조건 배척하지 말아야 한다고 썼다. 단군릉이 50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북측 주장과 기존의 고고학 증거가 배치되는 데 대해 저자는 연대 측정의 오류 가능성도 인정하지만, 고구려 때 개축 가능성과 고고 자료의 불충분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고조선 강역에 대해서는 중국 베이징 근처의 난하부터 시작해 만주와 한반도 전역을 포괄했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요동은 특정 강의 동쪽이라는 의미보다는 중국의 동쪽 변방을 지칭한 용어였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이에 따라 고대 당시 요하(遼河)를 난하로 보고 고조선의 서쪽 변경을 주류 학계보다 넓혀 보고 있다. 고대사 논쟁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평양 일대 낙랑군 유적에 대한 주류 학계의 해석 등을 찾아보기를 권한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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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익산 왕궁리 유적 부근서 7세기 백제 ‘왕경(王京) 도로’ 찾았다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 근처에서 7세기 백제시대 ‘왕경(王京) 도로’가 확인됐다. 익산에서 왕궁 외부를 잇는 왕경 도로가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백제 무왕이 사비(부여)에서 익산으로 천도(遷都)를 시도한 흔적 또는 익산을 복도(複都·수도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진 도성)로 삼았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핵심 자료로 평가된다. 9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전북문화재연구원이 올 3∼7월 익산시 왕궁리 유적 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왕경 도로 1개, 임시 도로 2개를 발견했다. 이 중 왕경 도로는 너비 4.9m, 길이 26m로 백제시대 정전(正殿)이 발견된 왕궁리 유적으로부터 남쪽으로 500m가량 떨어져 있었다. 고고학계는 이 도로가 △왕궁리 유적과 인접한 데다 남북 방향이 서로 일치하고 △도로 너비가 약 5m로 넓으며 △강돌과 자갈, 진흙으로 바닥을 다지는 이른바 ‘노체(路體) 공법’으로 만들어진 점을 들어 왕궁과 연결된 왕경 도로로 보고 있다. 너비 5m짜리 왕경 도로는 백제시대 당시 기준으로 중간급 정도로 분류된다. 앞서 부여에서는 너비가 최대 9m에 이르는 왕경 도로가 발견된 적이 있다. 노체 공법은 삼국시대에는 왕경 도로 등에서만 드물게 발견되는, 당시로서는 최신 도로 건설 기술이었다. 이 공법이 적용된 도로는 내구성이 좋아 무거운 수레도 잘 버틸 수 있다. 도로의 단면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가장 아래층에 강돌을 넓게 깐 뒤 그 위에 황갈색 점질토를 채웠다. 이어 10∼40cm 깊이로 땅을 판 뒤 내부에 모래와 암갈색 점질토를 얇게 채워 다졌다. 도로 중앙에서는 배수시설로 추정되는 폭 40cm의 판형 석재가 나왔다. 도로가 묻힌 퇴적층에서 午(오)자와 斯(사)자가 적힌 인장기와 조각도 발견됐다. 나머지 임시 도로 2개에서는 수레바퀴 자국(차륜흔)과 더불어 수레를 끌 때 생긴 것으로 보이는 소와 말의 발자국도 함께 발견됐다. 임시 도로에 새겨진 바퀴 폭은 1.2∼1.5m이며, 진행 방향은 동서로 남북 방향의 왕경 도로와 수직을 이루고 있다. 현장을 둘러본 고고학자들은 익산에 왕궁을 지을 때 필요한 건축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공사용 임시 도로를 낸 것으로 추정했다. 이와 관련해 임시 도로 주변에서 도구를 수리하거나 음식을 조리한 것으로 보이는 불을 땐 흔적도 나왔다. 발굴단 관계자는 “마차를 수리하기 위해 쇠붙이를 달구던 야철지(冶鐵址)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학계는 왕경 도로가 백제시대 익산에 수도(사비)와 버금가는 시가지 조성이 진행됐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박순발 충남대 교수(고고학)는 “당시 익산에 단순히 궁궐만 세운 게 아니라 도성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각종 인프라가 깔렸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고구려의 삼경(三京)이나 신라 오소경(五小京), 발해 오경(五京), 고려 사경(四京) 등이 수도와 더불어 복도가 운영된 사례로 꼽힌다. 정치적 지지 기반이 취약했던 무왕이 사비의 귀족세력을 견제하려고 익산 천도를 계획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일본 교토(京都)의 쇼렌인(靑蓮院) 사찰이 소장한 관세음응험기에 따르면 ‘639년 백제 무광왕(武廣王·무왕)이 수도를 지모밀(枳慕蜜·익산)로 옮겼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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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랜드캐니언은 노아의 홍수때문에 생겼다?

    “여러분은 지금 노아 홍수의 현장을 보고 있습니다.” 지난달 31일(현지 시간) 미국 애리조나 주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사우스 림). 광활한 대협곡이 눈앞에 펼쳐진 가운데 이재만 미국 창조과학선교회 선교사가 전망대 위에 화이트보드를 세워 놓고 창조과학 강연을 시작했다. 청중은 한국에서 온 일간지와 개신교계 언론사 기자들. 지질학을 전공한 이 선교사는 시종일관 “그랜드캐니언은 노아 홍수로 발생한 저탁류(底濁流·지진 등으로 인해 빠른 속도로 흐르는 퇴적물)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논리는 크게 두 단계로 나뉜다. 우선 대홍수로 전 지구가 물에 잠겼으며, 이후 융기된 콜로라도 고원에 거대한 호수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엄청난 수량(水量)을 이기지 못하고 호수의 둑이 터지면서 생긴 강력한 저탁류가 대협곡(그랜드캐니언)을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이는 주류 지질학계의 학설과 다른 얘기다. 지질학계는 협곡의 생성 원인을 저탁류가 아닌 콜로라도 강에 의한 오랜 침식 작용으로 설명한다. 지금으로부터 7000만 년 전 해안 지층이 융기해 콜로라도 고원이 형성된 이후 로키 산맥에서 발원한 콜로라도 강이 오랜 세월 거대한 퇴적지층을 깎아 협곡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때 각 지층을 구성하는 암석들의 침식 정도가 모두 달라 마치 계단식의 협곡이 나타났다는 설명이다. 이에 대해 이 선교사는 “그랜드캐니언에 숱하게 쌓여 있는 바다생물들의 화석은 일시에 엄청난 양의 저탁류가 이들을 덮친 사실을 방증한다”며 “강물의 침식 작용만으로 이 정도 규모의 대협곡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진화론을 지구와 생명의 기원을 밝히는 절대 원칙으로 삼는 것은 문제라는 점은 개신교와 창조과학계의 공통된 주장이다. 예컨대 사람과 유인원의 공통 조상이 있었다는 진화론을 뒷받침할 만한 중간단계(연결고리) 화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날 현장에서는 창조과학의 새로운 해석에 적지 않은 흥미를 보이는 동시에 “성경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은 위험할 수 있다”는 반응이 많았다. 구약성경 창세기의 모든 문장을 과학적인 사실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자의로 팩트를 왜곡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창조과학계 내부에서도 지구의 나이가 젊은지, 오래됐는지(젊은 지구론 vs 오래된 지구론) 혹은 노아 홍수와 같은 대격변이 한 번이었는지, 여러 번이었는지(단일격변론 vs 다중격변론) 등을 놓고 극명한 의견 대립이 있다. 그만큼 성경 내용에 대한 해석이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애리조나=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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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더위도 쉬어갈… 시 읽는 2박3일

    한국시인협회(회장 최동호)와 재능문화(이사장 박성훈)가 공동 주최하는 제11회 ‘재능시낭송여름학교’가 13∼15일 전북 군산시 군산청소년수련관에서 2박 3일 동안 열린다. 여름학교는 매년 일반인을 대상으로 시 창작과 낭송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으로, 시인협회 소속 시인들이 강사로 나선다. 프로그램 첫날인 13일에는 최동호 시인이 ‘유년 시절의 체험이 발효된 나의 문학과 알파고’, 곽재구 시인이 ‘시가 내게로 왔다’를 주제로 각각 강의한다. 14일에는 권희덕 성우가 ‘마음으로 읽는 시’를 주제로 강연하고, 손택수 시인은 ‘낭송과 침묵’을 강의한다. 강연이 끝난 뒤 군산 근현대사박물관 관람이 예정돼 있다. 마지막 15일에는 특별 시낭송 경연대회가 열린다. 참가비는 재능시낭송협회 회원 10만 원, 일반인 12만 원이다. 참가 신청 등 자세한 내용은 재능시낭송대회와 재능시낭송협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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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파형동검 발굴의 달인… 국내 40점중 18점을 그의 손으로

    지난달 20일 전남 여수시 적량동 GS칼텍스 정유공장. 저유탱크들 사이로 나란히 선 거대한 돌덩이 두 개가 멀리서도 눈에 보였다. 덮개돌 무게만 90t에 이르는 고인돌 2개. 하나는 고임돌 4개가 육중한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바둑판식, 다른 것은 덮개돌만 있는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이다.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화석연료 공장 내부에 있는 거석(巨石)은 선사시대로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머신처럼 느껴졌다. 이들을 직접 발굴한 이영문 목포대 교수(63)는 오랜만에 만난 자식을 대하듯 고인돌 곳곳을 살피고 어루만졌다. 그는 “반경 500m 안에서 고인돌이 300기나 나왔는데 이 2기는 다른 것들보다 5∼10배나 컸다”며 “너무 거대해서 다른 고인돌처럼 외부로 옮기지 못하고 결국 공장 안에 남겼다”고 말했다. 그는 고인돌을 바라보며 27년 전 기억을 하나씩 되살렸다.○ 온전한 형태의 비파형동검 첫 출토 “선생님, 파괴된 석실에서 동검 조각 같은 게 여럿 나왔습니다.” “동검? 자네 잘못 본 거 아닌가?” “3년 전 주암댐에서 나온 것처럼 홈이 파여 있습니다.” “뭐라고? 당장 그리로 가겠네.” 1989년 1월 18일 여수 적량동 호남정유(현 GS칼텍스) 공사 현장. 사업부지 확장 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고인돌 25기를 조사하던 도중 이영문은 제자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대어가 걸린 느낌에 그는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갔다. 붓과 꽃삽을 잡고 조심스레 유물을 노출시키자 비파형동검(銅劍)과 비파형동모(銅모·청동투겁창) 조각들이 보였다. 발굴에 들어간 지 사흘 만에 여수반도에서 동검과 동모가 처음 출토된 순간이었다. 그해 3월 5일까지 발굴이 진행된 이 유적에서는 비파형동검 7점과 비파형동모 1점, 관옥 5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비파형동검이 이처럼 많이 나온 건 전례가 없었다. 더구나 고인돌에서 쪼개지지 않고 완전한 형태의 비파형동검이 나온 것도 처음이었다. 청동기시대 고인돌에는 주술적 의미를 담아 동검을 2, 3조각으로 쪼개서 매장하는 게 보통이다. 동경(銅鏡)을 깨뜨려 무덤에 부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완형의 동검이 나온 고인돌(7호)은 보존 상태도 좋았다. 당시 덮개돌과 고임돌 6개가 온전히 남아 있었다. 덮개돌을 걷어내자 작은 돌들로 채워진 지하석실이 있었고, 돌무지 아래서 동검이 나왔다. 다음은 이영문의 회고. “경험상 석실 깊은 데에서 나오는 동검은 오히려 보존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7호 고인돌 동검은 불과 지표로부터 20cm 아래에서 출토됐는데 상태가 훌륭했습니다. 지금도 제가 발굴한 것 중 최고로 치는 유물이죠.”○ 팠다 하면 비파형동검 우수수…국내서 가장 많이 발굴 고고학계에서 이영문은 비파형동검 발굴의 1인자로 통한다. 그의 손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만 지금까지 총 18점에 이른다. 전국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40여 점)의 절반에 육박하는 숫자다. 내로라하는 고고학자들이 여수반도 고인돌에서 동검을 찾아 헤맸지만 오직 그만이 이런 성과를 거두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인돌의 메카’ 전남 화순군이 그의 고향인 것도 마치 고인돌 고고학자의 운명을 예고한 것처럼 보인다. “고향인 화순 벽송리 마을에 고인돌들이 있어요. 어릴 때 선산을 오가면서 친척들이 ‘이게 뭔데 여기 있느냐’며 궁금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는 그게 고인돌인 줄도 몰랐죠. 나중에 대학에서 수업을 듣고서야 고인돌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후 그의 인생은 확 바뀌었다. 전남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1979년 해남 북평종합고 교사로 발령받았지만, 한 달 만에 사직서를 내고 전남대 박물관에 들어갔다. 고인돌 발굴에 본격적으로 매달리기 위해 안정적인 교직까지 버린 것이다. 고고학계는 그가 발굴한 비파형동검이 중국 랴오둥(遼東) 지방에서 북한을 거쳐 남해안 일대까지 이어지는 동북아 문명교류의 양상을 보여주는 핵심 자료라고 평가한다. 특히 고인돌에서는 세형동검만 출토되는 것으로 알려진 기존 학설을 깰 수 있었다.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를 묻자 그는 “청동기시대 당시 여수 일대에서 고인돌을 쌓은 집단들의 생활유적을 찾는 것”이라고 답했다. “다양한 비파형동검들이 모두 외부에서 전래됐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이것들을 여수에서 직접 제작했던 장소가 분명 어딘가 있을 겁니다.” 여수=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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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조명 없던 16세기 중세시대 밤은 自我 침잠의 시간이었다

    초등학생 때 본 반공(反共) 만화에서 지금껏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북한 공산당의 압제에 시달리던 어린 주인공이 잠자리에 들면서 “이대로 영원히 잠만 잤으면…”이라고 혼자 뇌까리던 모습이다. 어렸을 땐 누구나 어두운 밤이 무섭고 특히 잠자리에 들기를 꺼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평생 잠만 자고 싶다니…. 주인공에게 밤은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싶은 도피처였는지 모르겠다. 이 책은 밤의 여러 문화사적 의미를 두루 파헤친 역작이다.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낮 못지않게 밤에도 나름의 풍요로운 문화를 영위했음을 보여준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서구의 생활사, 미시사 연구가 얼마나 앞서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16∼19세기 유럽과 미국인들의 일기, 편지, 시, 소설, 그림 등 방대한 자료를 총동원해 당시의 밤 생활을 영화로 보듯 생생하게 그려냈다. 예컨대 중세 유럽인들에게 밤은 방금 꾼 꿈을 다시 한 번 기억해내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이는 가스나 전기를 이용한 인공조명이 없던 관계로 두 번에 걸쳐 잠을 나눠서 잤던 습성과 관련이 깊다. 해가 떨어진 직후부터 자정까지 깊은 잠을 잔 뒤 중간에 깨어나 1시간 동안 휴식하고 다시 동이 틀 때까지 짧은 수면을 취하는 식이다. 중간의 짧은 휴식 시간에 중세인들은 부부 관계를 갖거나 혹은 자신의 꿈을 반추했다. 어떠한 조명도 소음도 없는 무(無)의 공간에서 중세인들은 자아에 푹 빠져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근대화로 18세기부터 인공조명이 보급되면서 이런 밤의 생활 패턴은 사라졌다. ‘밤의 낮화(化)’라고나 할까. 밤에도 작업이나 유흥이 지속되면서 사람들은 수면시간을 줄이는 동시에, 중간에 깨지 않는 깊은 수면을 한 번만 취하게 됐다. 자연스레 사람들은 꿈을 망각 속으로 흘려보냈고 자아에 깊이 침잠할 기회를 상실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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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의 시녀’로 전락한 문화재 행정 근본적으로 손봐야”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가변형 임시 물막이(키네틱 댐) 사업 실패를 계기로 문화재 행정이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물막이 사업 추진 과정에서 청와대와 정치권의 개입이 최근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정치의 시녀’가 된 문화재 행정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동아일보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문화재 행정의 실상과 대책을 짚어봤다.○ 영혼 없는 문화재청, 청와대 눈치만 살펴 “(문화재청 산하기관인) 한국전통문화대 총장을 수개월째 임명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한선교 새누리당 의원) “위에서 허가해야 한다.”(나선화 문화재청장) “위가 어디냐.”(한 의원) “청와대다.”(나 청장) 2014년 10월 국정감사에서 나 청장은 문화재청의 산하기관장 인사까지 청와대가 일일이 관여하고 있음을 얼떨결에 실토했다. 청장이 임명하는 문화재위원도 청와대에 미리 보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이 청와대와 정치권의 눈치만 살피다 보니 문화재 행정의 전문성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반구대 암각화의 임시 물막이 검증 실험이 황금 같은 시간과 국비만 낭비한 채 실패한 데에는 문화재청의 무소신 행정이 큰 원인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문화재청은 2013년 임시 물막이 사업 초기부터 문제점을 알고 있었지만 “청와대와 국무조정실에서 내려온 사안”이라는 이유로 전문가들의 지적을 묵살했다. 이미 지난해 12월 1차 임시 물막이 모형 검증 실험이 실패로 끝난 지 7개월이 흘렀지만 문화재청이 향후 계획조차 밝히지 않고 있는 것도 결국 여론을 살피는 눈치 보기라는 지적이 나온다. 문화재청은 21일 물막이 사업 중단 결정을 발표한 이후 수많은 비판 보도가 쏟아졌지만 묵묵부답이다. “수위조절안, 생태제방안 등을 포함한 여러 대안을 다각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문화재청의 무소신 행정은 반구대 암각화에만 그치지 않는다. 문화재청이 지난해 의욕적으로 추진하다 자진 철회한 ‘궁스테이’ 정책이 대표적이다. 먼지만 쌓여가는 고궁을 제대로 활용하자는 취지로 비지정 문화재인 창덕궁 낙선재에 한정해 숙박 프로그램을 추진했지만, 야당으로부터 ‘고가(高價) 숙박비’ 공세를 받고서 슬며시 정책을 포기했다. 전문가들은 문화재청이 외풍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일반 행정직 위주의 조직 구성을 바꾸고 전문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현장에 정통한 뚜렷한 논리를 갖추고 있어야 외부 압력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고고학·대한민국학술원 회원)는 “농촌진흥청처럼 학예직과 기술직의 비중을 높여 문화재 분야의 정책 전문성을 높이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표 얻기’ 수단으로 전락한 문화재 발굴 전문가들은 선거를 의식한 정치권의 문화재 정책 왜곡도 지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속도전으로 치달아 몸살을 앓고 있는 경주 월성 발굴현장이다. 월성은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가 출토된 신라 천년왕경 경주의 핵심 사적지다. 워낙 중요한 곳이다 보니 1970년대에 정부가 발굴을 추진하다가 “현 발굴 수준으로는 무리”라는 학계 의견을 받아들여 중단했을 정도다. 고고학계는 50년 넘게 발굴이 이어지고 있는 일본의 헤이조쿄(平城京)처럼 월성 발굴도 신중히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경주시장과 지역 국회의원들은 발굴 속도를 높일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주민들에게 가시적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는 호재인 데다 발굴 인력이 늘면 고용창출 효과를 홍보할 수 있어서다. 정수성 전 새누리당 국회의원은 나 청장을 수시로 찾아가 “발굴 기관 10곳을 한꺼번에 투입해 월성 발굴을 빨리 끝내라”고 요청했다.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은 “국회의원의 민원을 안 들어주면 국정감사 때 질문 강도가 독해지기 마련”이라며 “청장 입장에서는 의원들의 전화가 압력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문화재청과 더불어 문화재 정책을 관할하는 문화재위원회의 독립성이 최근 약화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임명권을 쥔 문화재청장의 눈치를 살피는 일부 문화재위원이 있다는 얘기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고고학)는 “정부와 정치권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된 위상을 지닌 문화재위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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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水理전문가 전원 “암각화 물막이 절대 안돼”… 문화재청 “해보자”

    “이 시점에서는 어떻게든 공기(工期)상 계약을 진행해야 하는 입장입니다.”(김종승 문화재청 반구대암각화TF팀장) “제가 30년 넘도록 ‘댐 경험’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드립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한 황당한 발상이 나왔기 때문에 이것을 동의하라고 하면 절대 못 합니다.”(윤용진 도화엔지니어링 부사장·한국수자원학회 이사) 지난해 3월 4일 울산 반구대 암각화 ‘가변형 임시 물막이(키네틱 댐)’ 기술검증평가단 최종회의. 동아일보가 25일 입수한 회의록 전문에 따르면 최종회의에서는 국비 28억 원이 투입된 임시 물막이 모형 검증 실험의 실시 여부를 놓고 장장 5시간에 이르는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14명의 검증위원 중 9명만 참석한 가운데 수리(水理) 분야 전문가 4명 모두 검증 실험이 예산만 낭비한 채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문화재청 당국자와 임시 물막이를 제안한 함인선 포스코A&C 기술고문은 실험 착수를 계속 종용했다. 평가단은 수리, 토목, 건축, 기계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민간 위원회다. 통상 자문회의에서 전문가들은 확정적인 발언을 삼가는 편이지만 이날은 달랐다. 수리 분야 전문가인 조홍제 울산대 건설환경공학부 교수는 “키네틱 댐에 대해서는 100% 아니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모의실험으로 억지로 답을 찾겠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조 교수는 이어 “누수(漏水)가 돼 물이 차 버리면 댐 기능이 없어진다. 이로 인해 암각화 쪽으로 물이 차면 그것으로 게임은 끝”이라고 강조했다. 모형 실험이 아닌 실물 실험이었다면 수천 년 된 암각화가 훼손될 뻔했던 셈이다. 누수 문제는 검증 용역을 수행한 함 기술고문도 인정했다. 그는 “조 교수 말처럼 (누수를) 못 잡는다. 다만 (누수량이) 퍼낼 수 있는 정도의 양”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문화재청 당국자는 시종일관 함 기술고문을 거들고 나섰다. 김 팀장은 “타이밍이라는 게 있다. 계약 진행에 있어 한 달이 걸리는데 기후 분석도 못 할 수 있다”라며 압박했다. 그는 수리 전문가들을 설득하기 위해 “(다른) 수리 전문가의 동의를 용역 조건으로 걸 수 있다”라고 했다. 그러나 검증 실험안이 통과되고 나서도 전문가들이 요구한 서류(동의서)는 끝내 첨부되지 않았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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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정치’가 훼손한 국보 암각화

    국보 제285호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가변형 임시 물막이(키네틱 댐) 모형 검증실험에 청와대와 정치권이 개입해 전문가들의 의견이 묵살된 사실이 확인됐다. 정치논리로 추진된 3년간의 임시 물막이 실험이 최종 실패로 끝나면서 암각화 보존 시기를 놓친 채 28억 원의 국민 혈세만 낭비하게 됐다. 임시 물막이 사업 추진 당시 문화재청장이던 변영섭 고려대 교수(고고미술사학)는 24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전문가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임시 물막이가 과학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며 “하지만 당시 국무조정실이 물막이 설치를 강하게 추진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 관계자는 “당시 국무조정실뿐 아니라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실이 암각화 대책을 막후 지휘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치권의 압박도 작용했다. 임시 물막이 기술검증평가단의 한 위원은 “모형 실험이 결정된 지난해 3월 4일 평가단 회의가 열리기 직전 울산을 지역구로 둔 여당 국회의원으로부터 실험 착수에 동의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2014년 평가단 구성 초기부터 수리(水理) 전문가들이 임시 물막이는 비현실적인 방안이라는 의견을 꾸준히 제시했지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결국 지난해 말부터 올 5월까지 진행된 세 차례의 모형 검증실험은 모두 실패로 끝났고, 이달 21일 문화재위원회는 사업 중단을 공식 선언했다. 임시 물막이 사업은 1965년 사연댐 설치 이후 암각화의 침수 훼손을 막기 위해 길이 55m, 너비 18m(암각화로부터 거리 포함), 높이 16m의 거대한 투명판을 세우려던 계획이다. 그러나 물막이 투명판의 이음매에서 물이 새는 바람에 사업이 전면 취소됐다. 3년간 허송세월을 하면서 그사이 암각화의 훼손은 더 심해졌다. 이미 7년 전 문화재청 자체 조사에서 암각화의 풍화단계는 6단계 중 5단계인 ‘흙 상태 진입 직전’까지 간 상황이다.  ▼ 평가단이 이의 제기하자… 문화재청 “총리실서 내려온 사안” ▼28억 원의 혈세만 낭비하고 3년 만에 원점으로 돌아간 반구대 암각화 보존 대책은 정부와 정치권이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에서 추진한 것으로 드러났다. 주무 기관인 문화재청과 울산시는 ‘가변형 임시 물막이(키네틱 댐)’ 설치가 불가능하다는 전문가들의 반대 의견에도 정치권의 눈치만 살핀 ‘영혼 없는 행정’으로 비판받고 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 ‘임시 물막이 기술검증평가단’의 한 위원은 24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내가 여기 왜 있나’ 싶을 정도로 학자로서 자괴감이 들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반구대 암각화 사태는 정치가 개입해 문화재를 망친 대표 사례”라고도 했다. 기술검증평가단은 수리(水理) 토목 건축 기계 분야 전문가 14명으로 구성된 민간위원회로 임시 물막이 검증실험의 모든 과정을 평가 감독했다. 평가단 위원들에 따르면 2013년 6월 국무조정실과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울산시가 ‘임시 물막이 사업 추진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기 전부터 전문가들은 임시 물막이의 기술적인 문제점을 문화재청과 울산시에 알렸다. 한 위원은 “2013년 5월 문화재청이 자체 구성한 전문가 자문단 회의에서 ‘구조물의 안전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절대 불가능한 방안’이라는 의견을 수차례 전달했다”고 밝혔다. 특히 최종 실험에서 확인된 이음매 누수(漏水) 현상은 수차례 경고된 사항이었다. 평가단 위원은 “2013년 5월 전문가 회의에서 ‘구조물의 누수가 우려된다. 어떻게 해결할 거냐’는 지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에 대해 당시 임시 물막이를 제안한 함인선 포스코A&C 기술고문이 ‘누수가 심하지 않을 것 같으니 철판 등으로 막으면 된다’고 답해 황당했던 기억이 난다”고 전했다. 함 고문의 기술제안서 자체가 허점투성이였다는 지적도 나온다. 평가단 관계자는 “제안서를 훑어보니 기초 계산조차 틀린 ‘부실 보고서’였다”며 “함 고문이 수리 전문가가 아닌 건축가 출신이다 보니 부력(浮力)의 원리도 모르는 설계가 담겨 있더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사전에 임시 물막이 실험의 문제를 충분히 인지한 문화재청과 울산시가 MOU 체결에 나선 이유는 뭘까. 평가단 위원은 “MOU 체결 후 재차 문제를 지적하자 문화재청 담당자가 ‘총리실에서 내려온 사안을 우리가 어떻게 거부하겠느냐’고 말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변영섭 전 문화재청장은 본보 인터뷰에서 “국무조정실이 물막이 설치를 강하게 추진했다”며 “결정 이후 암각화 주변에서 공룡 발자국 81개가 발견됐지만 물막이 설치를 강행하는 분위기에서 확대 발굴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앞서 MOU 체결 직전인 2013년 4월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반구대 암각화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발언한 직후 문화재청은 기존 ‘사연댐 수위 조절안’을 포기하고 임시 물막이 사업을 추진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당시 모철민 대통령교육문화수석이 암각화 대책을 꼼꼼히 챙긴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치권도 가세했다. 한 평가단 위원은 “새누리당 소속 울산 지역구 국회의원이 지난해 3월 4일 최종회의 직전 전화를 걸어와 ‘운문댐을 통한 대체 식수원을 확보할 때까지 2, 3년만 시간을 벌 수 있도록 검증실험안을 통과시켜 달라’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일부 평가단 위원이 갑자기 입장을 바꾼 것은 이런 압력이 작용한 때문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댐 구조 전문가의 자문서를 붙이는 조건으로 검증실험이 결정됐지만, 끝내 자문서는 평가단에 제출되지 않았다. 임시 물막이의 실효성을 인정하는 수리 전문가를 찾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게 평가단 위원들의 설명이다. 또 다른 평가단 위원은 “임시 물막이 기술 검증부터 입찰 심의까지 모든 과정이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진행됐다”며 “황금 같은 시간과 세금을 낭비했지만 책임지는 공무원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김도형 기자}

    • 201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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