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석산 동쪽 요서도 고조선 땅” vs “고고학 증거와 불일치”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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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요서 갈등의 고대사 현장… 강단-재야 사학자 공동답사

정인성 영남대 교수(왼쪽에서 세 번째 손을 뻗은 사람)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왼쪽에서 다섯 번째 손을 모은 사람)이 20일 중국 네이멍구 자치구 츠펑 시 삼좌점 석성 유적에서 논쟁을 벌이고 있다(위쪽 사진). 이 유적은 초기 청동기 취락으로 성벽과 원형 집터들로 구성돼 있다. 츠펑=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정인성 영남대 교수(왼쪽에서 세 번째 손을 뻗은 사람)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왼쪽에서 다섯 번째 손을 모은 사람)이 20일 중국 네이멍구 자치구 츠펑 시 삼좌점 석성 유적에서 논쟁을 벌이고 있다(위쪽 사진). 이 유적은 초기 청동기 취락으로 성벽과 원형 집터들로 구성돼 있다. 츠펑=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츠펑(赤峰) 시 인근에서 비파형동검이 나오는 걸 보면 여기는 초기 고조선의 석성(石城)이 분명하다.”(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이 석성은 고고학계에서 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로 규명된 곳이다. 비파형동검 제작 시기보다 무려 500∼1000년이나 앞서는데, 어떻게 고조선 석성이 될 수 있는가.”(정인성 영남대 교수)

20일 오후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츠펑 시 삼좌점(三座店) 석성(石城). 댐 정상에 올라 경사면을 내려다보자 돌로 쌓은 성벽과 원형의 집터가 여럿 보였다. 절벽을 자연 방어선 삼아 조성된 초기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이었다.

인적 드문 옛 성벽과 집터의 고요함은 한국에서 답사 나온 강단 및 재야 사학자의 설전으로 한순간 깨졌다. 이날 답사는 동북아역사재단 후원으로 고조선 영역과 한군현(漢郡縣) 위치를 둘러싸고 갈등을 벌이는 강단 및 재야 사학계가 현장을 함께 고증하고 합리적인 토론을 벌이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양측이 공동 답사에 나선 것은 처음이다.

답사에선 기원전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삼좌점 석성의 축조 집단이 누구인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소장과 동행한 재야 사학자들은 석성 곳곳에 보이는 치(雉·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관찰하거나 막기 위한 시설)를 가리키며 “치는 고구려 산성의 특징으로 중국 중원(中原)문화와 다르다”며 “고조선 산성”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치는 고구려 산성의 전유물이 아니며 석성 양식은 산둥(山東) 성 등 중국의 다른 지방에서도 볼 수 있다”고 반박했다.

강단 사학자들은 석성을 만든 하가점 하층문화를 고조선 문화와 동일시하는 재야 사학계의 견해에 부정적이었다. 이들은 “하층문화보다 1000년 뒤인 것으로 보이는 하가점 상층문화는 당시 중국 동북지방의 종족인 동호(東胡)나 산융(山戎)이 주도한 것으로 보이지만 하층문화의 주체는 아직 불명확하다”고 말했다.

삼좌점 석성 관련 논란이 빚어진 것은 요서지역까지 고조선의 영역으로 보는 재야 사학계의 시각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중국 사서인 ‘태강지리지’ 등을 근거로 고조선의 서쪽 경계가 중국 허베이(河北) 성 친황다오(秦皇島) 시에 있는 갈석산 인근까지 이른다고 본다. 이 소장은 “중국 사서 ‘회남자(淮南子)’에 따르면 ‘갈석산을 지나면 고조선 땅’이라고 적혀 있다”고 강조했다.

19일 중국 랴오닝성 후루다오시 갈석궁 터에서 답사단 일원이 진나라 시대의 ‘공심 전돌’ 계단(재연품) 앞에 서 있다. 아래 사진은 근처 
자료관에 전시된 ‘공심 전돌’. 후루다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9일 중국 랴오닝성 후루다오시 갈석궁 터에서 답사단 일원이 진나라 시대의 ‘공심 전돌’ 계단(재연품) 앞에 서 있다. 아래 사진은 근처 자료관에 전시된 ‘공심 전돌’. 후루다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이와 관련해 19일 랴오닝(遼寧) 성 후루다오(葫芦島) 시 갈석궁(碣石宮) 터에서도 양측은 격돌했다. 1984년 발굴된 이곳에서는 기원전 3세기 진나라 시대의 기와와 토기, 벽돌이 대거 발견돼 중국 고고학계는 진시황의 행궁으로 보고 있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제국의 동쪽 끝을 순행하면서 갈석궁에 잠시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야 사학자 한 명은 “당시 이곳은 진나라의 영토일 수 없다”며 “유적이 (중국 측에 의해)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갈석궁이 고조선의 영토인 갈석산 동쪽에 있기 때문에 진나라의 것이 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건물 터 유적에 재연된 사격자 무늬의 공심(空心) 전돌을 보여주며 “진시황 당시 함양궁 전각 터에서도 같은 양식의 전돌이 발견됐다. 오랜 시간 연구된 학술자료를 위조로 모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반박했다.

답사 내내 의견 대립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3세기 후반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 공략 이후 설치했다는 연나라 장성(연장성·燕長城)이 한반도까지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는 서로 동의했다. 앞서 중국사회과학원이 작성한 중국역사지도집에는 연장성이 청천강 부근까지 그려져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정 교수는 “요동지방의 푸신(阜新) 동쪽으로는 연나라 토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장성이 한반도 안까지 들어왔다고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츠펑·후루다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정인성 영남대 교수#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삼좌점 석성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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