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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간(木簡·글씨를 쓴 나뭇조각)이 나오면 대박이죠. 요즘 고고학 하는 사람들 저습지(低濕地) 팔 때 기대하는 게 뻔하지요.” 최근 경주 월성 내 해자(垓字) 발굴 현장에서 만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조사원이 기자에게 건넨 얘기다. 해자나 연못, 우물터 같은 저습지 유적은 물에 젖은 진흙이 외부 공기를 차단해 나무 등 유기물이 썩지 않고 보존된다. 따라서 저습지 안에서 나온 목간은 글자를 알아볼 수 있다. 고고학자들뿐만 아니라 고대사를 전공하는 문헌사학자들도 새로 출토되는 목간 자료에 열광한다. 삼국시대 이전의 동시대 사람들이 직접 기록한 사서(史書)가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시대를 다룬 사서 중 학계가 어느 정도 신뢰하는 것은 고려시대에 찬술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전부다. 역사기록 부족의 갈증을 해소할 수단이 현재로선 비문과 목간 외에는 없는 셈이다. 더구나 목간은 당대 사람들이 남긴 1차 사료여서 후세에 의한 역사 왜곡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지금까지 발견된 고대 목간은 약 600점으로,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게 1호 목간이다. 1990년대 도입된 적외선 촬영기법 덕분에 육안으로 관찰하기 힘든 목간 글씨(묵서)를 해독할 수 있게 됐다. 개별 목간으로는 단편적인 정보밖에 얻을 수 없지만, 발굴 현장에서 새로운 목간 자료가 지속적으로 축적되면서 구체적인 사실을 파악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해 최근 윤선태 동국대 교수가 ‘목간 연구와 신라사 복원’ 논문에서 다룬 신라 목간의 이두(吏讀) 기록이 눈길을 끈다. 이두는 한자의 음과 뜻(훈)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것으로, 우리말과 중국어의 어순이나 문법이 다른 데서 연유한다. 예컨대 고구려는 이미 5세기부터 한문을 우리말 어순으로 재배치하거나, ‘之(지)’자를 문장 종결어미로 사용했다. 그런데 이두가 삼국에서 공히 사용됐음에도 유독 신라에서만 발전한 데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해 왔다. 윤 교수는 “고구려와 백제에서 6세기 말 이후 차자표기법(이두)이 정체 또는 퇴조한 것과 달리 신라에서는 6세기 말에서 7세기로 접어들면서 (이두 표기가) 더욱 발전했다”고 썼다. 이에 대해 국어학계 일각에서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한자를 100여 년 늦게 도입한 신라는 상대적으로 한문 이해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자국어 표기(이두)를 발전시킨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실제로 삼국사기에는 태종무열왕 즉위 초 중국 당나라가 보낸 외교문서를 오직 신라시대 유학자이자 문장가였던 강수(?∼692)만 해석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7세기 중반까지 신라에서 고급 한문을 해석하는 데 능숙한 지식인이 드물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역사학을 전공한 윤 교수는 다른 해석을 제시했다. 오랫동안 구두 전달 위주로 행정명령을 내린 신라의 특수성이 한자 도입 이후 문서에도 반영돼 구어체를 살릴 수 있는 이두 개발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신라 초기에 작성된 각종 목간이 주장의 근거로 제시됐다. 예컨대 월성 해자 2호 목간에서 중국어에 없는 종결어미로 之를 쓰거나, 者(자)를 주격조사 ‘은(는)’으로 사용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6∼7세기 월성 해자 목간이나 영일냉수리비에 쓰인 어휘와 내용이 일상의 구두 전달 체계를 자세히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자격증을 많이 땄는데도 생산기술직 서류전형에서 4번이나 떨어졌습니다. 고교 내신이 안 좋으면 역시 힘들까요?” “고등학교 때 방황해서 내신이 좋지 않다면 자기소개서나 면접 때 사유를 솔직하게 얘기하면 됩니다. 진정성 있는 자기만의 스토리를 전달하는 것도 방법이에요.” 3일 오후 경북 포항시 만인당 ‘취업 및 창업 박람회’. 3000여 명의 취업준비생과 예비창업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채용부스 옆에 개설된 ‘청년드림캠프 포스코 채용설명회 및 취업 멘토링’에 교복을 입은 고교생과 대학을 졸업한 20대 후반 청년들이 몰렸다. 내년 3월 채용 예정인 포스코의 생산기술직 구직자들을 위한 설명회였다. 간단한 프레젠테이션이 끝난 직후 구직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는데, 고교 내신성적과 자격증에 대한 질문이 가장 많았다. 박준우 포스코 인사담당 매니저는 “올해 최종 합격자 가운데 내신등급이 평균 이하인 사람도 있다”며 “내신이 낮다면 자격증 취득이나 자기소개서 등에 주력하라”고 조언했다. 포스코 생산기술직은 금속, 기계, 전기 분야로 관련 자격증이 있다면 비전공자도 지원할 수 있다. 채용 방식은 서류전형→인·적성검사(PAT)→1·2차 면접 순으로 진행된다. 서류전형과 면접에서 직무 적합성을 중점적으로 보기 때문에 자격증과 대회 입상 경력이 중요하다는 팁이 제시됐다. 포스코의 PAT는 한국사와 수학, 일반상식, 인성검사로 구성된다. 박 매니저는 “포스코는 역사가 오래된 회사인 만큼 한국사를 중시한다”며 “한국사 자격증을 따면 가점을 부여한다”고 소개했다. 현장에서는 자기소개서 작성 요령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남들과 차별화된, 그리고 자신을 매력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소개서가 최상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박 매니저는 “포스코 포항제철소 견학이 인상적이라 지원했다는 식의 천편일률적인 내용으로는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며 “팩트를 확인할 수 없는 정보를 쓰지 말고 구체적인 수치를 적어 주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청년드림센터 취업 멘토링에 참가한 구직자들은 인터넷으로 접할 수 없는 생생한 취업 정보를 얻을 수 있어 만족스럽다는 반응이었다. 박봉조 씨(24)는 “포스코에 지원하려고 전기기능사와 중장비 자격증을 땄다”며 “자기소개서 작성이나 면접에 대비할 수 있는 구체적인 팁을 들을 수 있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포항시의 이번 취업 및 창업 박람회에는 포스코를 비롯해 지역 중소기업 등 총 89개 업체가 참여했으며, 많은 구직자와 예비창업자들이 몰렸다. 청년뿐만 아니라 여성이나 고령 취업자를 위한 채용부스도 설치됐다. 신미라 포스코 행정섭외그룹 수석은 “제철소 견학을 지원하는 철강해설사에 출산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이 상당수 지원했다”고 했다. 이강덕 포항시장은 “경기침체로 지역경제가 어렵지만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해 일자리를 많이 늘릴 것”이라며 “취업 및 창업 박람회와 청년드림센터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포항=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마치 마야문명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종적을 감춘 선사문화가 한반도에 있었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중·후기를 대표하는 송국리문화는 이른바 원형덧띠토기(원형점토대토기·圓形粘土帶土器)문화가 한반도에 들어온 직후인 기원전 4세기 무렵 사라졌다. 반면 일본에서는 송국리문화가 전파돼 오랜 기간 존속한 사실이 확인된다. 정작 송국리문화가 발현한 한반도에선 특정 시점을 경계로 맥이 끊겨버린 것이다. 문명이 쇠락해도 다음 세대에 일정한 자취를 남기는 게 일반적인 걸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4∼6일 한국고고학회가 서울 숭실대에서 개최한 제40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에서는 ‘송국리문화 미스터리’가 화두에 올랐다. 이창희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한국 원사고고학의 기원론과 계통론’ 논문에서 “안정적이고 세력이 강했던 송국리문화가 어떻게 원형덧띠토기인들에게 주도권을 내줬는지가 문제”라고 밝혔다. 그는 “송국리문화가 사라지고 초기철기시대가 끝날 때까지 원형덧띠토기인들은 왜 대규모 취락을 형성하지 못하고 고지대에 살았으며 안정적인 벼농사를 영위하지 못했는지를 반드시 구명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쉽게 말해 원형덧띠토기문화보다 인구가 많고 문명 수준도 상대적으로 높았던 송국리문화가 왜 갑자기 소멸했는지에 대해 학자들이 아직까지 답을 찾지 못했다는 얘기다. 1975년 충남 부여군 송국리 발굴조사에서 처음 존재가 드러난 송국리문화는 원형 주거지와 특유의 민무늬토기(송국리형 토기)를 핵심적인 특징으로 갖고 있다. 송국리형 주거지는 안쪽 중앙에 2개의 기둥구멍이 나 있는 타원형 구덩이가 있는데, 광주 송암동, 충남 서산시 휴암리, 전남 영암군 장천리 등 남부지방 일대에서 대거 발견됐다. 원형덧띠토기문화는 둥그런 단면의 덧띠를 아가리에 말아 붙인 토기를 사용하는 문화로 경기 남양주시 수석동, 대전 괴정동, 충남 아산시 남성리 등에서 발견됐다. 학계 다수는 원형덧띠토기문화가 중국 랴오닝(遼寧) 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곳 이주민들에 의해 한반도 남부까지 전파된 것으로 추정한다. 박순발 충남대 교수(고고학)는 1990년대 발표한 논문에서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공을 계기로 랴오닝 지역 이주민이 서해안을 따라 남하함에 따라 한반도에 원형덧띠토기가 출현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원형덧띠토기문화가 이미 한반도에 자리 잡고 있던 송국리문화를 소멸시킨 것으로 본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셈이다. 평지에 제법 큰 규모의 주거지를 지은 송국리문화와 달리, 방어에 유리한 구릉지대에 정착한 원형덧띠토기문화의 행태가 특히 눈길을 끈다. 이주민들이 평지에 있던 원주민과 동화되지 못하고 갈등을 벌인 게 아니냐는 얘기다. 그러나 최근 송국리식 주거지에서도 원형덧띠토기가 출토된 사례가 발견되고 있어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의 경우 원형덧띠토기가 평지에 있는 야요이문화 주거지에서 주로 발견된다는 점이다. 일본 열도로 이주한 원형덧띠토기인들은 점점 야요이문화에 동화, 흡수돼 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평지로 나아가지 못하고 구릉지대에 점점이 모여 살던 한반도의 원형덧띠토기문화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창희 교수는 “대규모 취락을 형성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한 송국리문화인들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에 대해 인구 감소 가능성이 논의되지만 여전히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이 책은 역사책이면서 역사책 같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책 뒤쪽 부록을 열어 보면 온갖 수식이 빼곡하다. 유럽의 독보적인 발전을 설명하는 가설에는 한계생산과 같은 경제학 개념도 여럿 들어간다. 책날개의 저자 소개를 한번 훑어봤다. 분명 역사학을 전공한 교수가 맞다. 그런데 미국 경제사학회 회장이라는 경력이 뒤에 붙어 있다. 이 책의 독특한 접근에 대한 의문이 조금 풀렸다. 주제나 접근 방식이 매우 포괄적이기 쉬운 일반 역사책과 달리 이 책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간명한 가설을 내놓는다. 마치 경제학의 ‘총수요(AD)-총공급(AS)’ 곡선을 보는 것 같다. 요약하면 이렇다. 근대 이후 유럽이 세계를 정복한 것은 가장 앞선 화약 기술을 보유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역사를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해도 되나. 그러나 이 단순한 가설을 역사학, 인류학, 경제학 등 다양한 측면에서 고찰하는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된다. 지금껏 유럽의 세계 지배를 놓고 재러드 다이아몬드와 이언 모리스 등 많은 학자가 지리, 생태, 경제 등 다양한 측면에서 원인을 찾았다. 그런데 저자는 유럽의 세계 진출과 식민 지배가 결국 화약 무기의 혁신에서 비롯됐음에 특히 주목한다. 마치 핵탄두와 재래식 무기처럼 아무리 많은 기병을 가져도 총탄을 당해 낼 순 없기 때문이다. 피사로가 겨우 180명의 병력으로 인구 600만 명의 잉카제국을 정복한 게 대표적이다. 저자는 이미 17세기부터 중국과 인도, 오스만, 러시아, 일본 등 유라시아 강국들의 군사력이 유럽에 역전당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유독 유럽에서만 비약적인 화약 무기 혁신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얼까. 그는 전쟁에 투입하는 고정비용과 가변비용, 기대이익 등을 함수화한 이른바 ‘토너먼트’ 모델로 설명한다. 간단히 말해 유럽은 100년전쟁이나 30년전쟁처럼 국력이 고만고만한 여러 국가가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화약 무기를 최대한 발전시킬 수밖에 없는 조건이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이와 함께 개별 군주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물자를 동원하는 데 드는 비용이 유럽에서 가장 적었던 것도 주효했다. 반면 중국이나 러시아, 인도 등은 거대한 통일 제국을 이뤄 낸 이후로 유럽처럼 전쟁 준비에 몰두할 이유가 점차 사라지게 됐다. 한동안 주변국들이 패권국에 정면으로 도전하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도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거나 이민족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많은 전쟁을 치렀지만 화약 무기를 고도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저자는 이들의 주적이 기동성이 매우 뛰어난 유목민이어서 화포보다 궁병으로 방어하기가 더 적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유럽에서 잦은 전쟁과 더불어 전시 동원 비용이 특히 낮았던 이유는 또 무엇인가. 이때 등장하는 게 경제학 모델로 모든 걸 해명하기 어려울 때 경제학자들이 애용하는 ‘외생변수’다. 저자가 토너먼트 모델의 외생변수로 든 것은 정치사(政治史)다. 예컨대 영국 등 유럽 일부 국가의 경우 19세기 이후 정치 혁명을 겪으면서 전국에 대의(代議)기구를 수립해 세수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조세 저항을 정치 시스템으로 어느 정도 무마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높은 국가 세수는 화약 무기 개발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반면 중국 등 다른 제국들은 지역 엘리트의 반발과 부패 등으로 인해 국가 세수가 유럽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김구가 아뢰기를 “양전(量田·논밭을 측량하는 것)을 이미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거행토록 명하셨는데, 새로 경상 감사에 제수된 유집일(兪集一)이 평소 방전(方田)의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법을 써서 시행토록 하는 게 마땅합니다.’(숙종실록 34권) 1700년(숙종 26년) 8월 5일 농지 측량조사를 놓고 조정 대신들 사이에 오간 대화 중 한 토막이다. 관료 유집일(1653∼1724)의 방전법(方田法) 시행이 비중 있게 논의됐음을 알 수 있다. 방전법이란 은결(隱結·부정한 방법으로 조세 부과 대상에서 누락시킨 토지)을 방지하기 위해 토지를 일정한 크기의 사각형으로 구획하는 방안이다. 방전 논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한제국 시기 유진억은 ‘방전도설(方田圖說)’에서 지주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개혁안으로 방전법을 주장한다. 이처럼 토지제도는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토지 관련 용어가 까다롭다보니 일반인들이 사서를 읽는 데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연세대 국학연구원은 최근 학계 최초로 ‘한국토지용어사전’을 최근 발간했다. 연구에서부터 집필까지 총 5년이 걸린 역작으로 최윤오 연세대 사학과 교수를 비롯한 총 60여 명의 사학자와 경제학자가 참여했다. 연구팀은 삼국시대부터 광복 직후를 아우르는 기간에 사용된 토지용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토지제도를 비롯해 토지문서, 재정, 농서, 농법, 농구, 지리서, 인물 등에 걸쳐 표제어 1500여 개를 빼곡히 수록했다. 특히 표제어 설명을 사서 원전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한 점이 눈길을 끈다. 예컨대 표제어 ‘미(米)-도정’의 경우 태종실록의 용례(1412년 태종이 녹봉을 갱미 대신 조미로 지급하게 했다)를 들어 ‘갱미는 조미보다 도정이 더 정밀하게 된 쌀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는 식이다. 연구팀을 이끈 최윤오 교수는 “한국 역사학계의 토지 관련 사회경제사 연구 성과를 대중이 알기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며 “사전에 각종 삽화나 표를 충분히 수록해 이해를 도왔다”고 강조했다. 연구팀은 향후 이 사전의 영문판 출간과 온라인 서비스를 추진할 계획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지난달 26일 울산 검단리 유적. 10분 정도 올라갔을까, 구릉 위로 평탄한 잔디밭이 넓게 펼쳐졌다. 인위적으로 흙을 파내고 땅을 고른 흔적이 역력했다. 안재호 동국대 교수(62·고고학)는 “지금 우린 청동기시대 마을 위에 서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릉 서쪽에는 강이 흐르고 북쪽과 동쪽은 산으로 막혀 취수(取水)와 방어에 유리한 곳이었다. 바로 이 잔디밭 아래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에 조성된 청동기시대 환호(環濠)가 묻혀 있다. 1990년 안재호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굴한 환호다. 환호란 선사시대 마을 경계를 구분하거나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외곽을 둘러싼 도랑을 말한다. 청동기시대 후기가 되면 잉여 생산물을 놓고 집단 간 갈등이 벌어지는데, 환호는 이때 방어수단으로 만들어졌다. 고고학자들은 환호가 계급 발생이나 초기 국가 형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본다.○ 일본 청동기문화 한반도 전래 입증 “이쯤에서 끝나야 하는데 거참 이상타….” 1990년 3월 초순. 안재호는 조사원 동진숙(현 부산시청 연구관), 이현주(정관박물관장)와 함께 청동기 주거지를 발굴하면서 의구심이 생겼다. 주거지라면 일정 범위에서 끝이 보여야 하는데 흙을 걷어낼수록 유구의 범위가 오히려 넓어지는 양상이었다. 발굴 경험이 많은 그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래쪽 유구도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그때 ‘혹시 두 지점을 연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쳤어요.” 그의 직관은 적중했다. 유구를 이어보니 휘돌아나가는 너른 구덩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전형적인 환호였다. 수많은 환호가 발견된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그때까지 한반도에서는 환호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본 학계는 자신들의 청동기문화가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중국에서 바로 넘어왔다는 주장을 폈다. 일본의 고대 철기문화도 삼한이 아닌 낙랑에서 넘어왔다고 설명하는 등 가급적 한반도 도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 학계의 태도가 반영된 시각이었다. 그러나 울산 검단리를 계기로 전국에서 30여 기의 환호가 잇따라 발굴되면서 일본 학계는 한반도의 영향을 부인하기 힘들게 됐다. 환호 발굴 직후 국내 학계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환호 안팎에서 수습된 청동기나 석기의 수량이 적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유구 간 맥락을 통해 사회상을 유추하기보다 유물을 분석하는 데 집중하는 분위기였다. 반면 일본학계의 관심은 뜨거웠다. 하루나리 히데지(春成秀爾)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교수 등 일본 학자들이 검단리 발굴 현장을 직접 찾아와 환호의 형태부터 주거지 개수까지 세부적인 내용을 파악했다. 2년 뒤 검단리 발굴 성과는 주요 학술지인 ‘일본 고고학 연구’에 다양한 컬러 사진과 함께 비중 있게 게재됐다.○ 한일 환호의 차이점은 검단리 환호는 주변 유구의 양상을 감안할 때 존속 기간이 불과 한 세대(약 30년)에 불과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수백 년에 걸쳐 환호가 2중, 3중으로 계속 확대되는 일본 환호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또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환호 내부의 주거지 수가 적어 쉽게 폐기될 수 있었던 점도 특이하다. 현장을 방문한 하루나리 교수도 검단리 환호 내 주거지가 21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한국과 일본 환호 유적의 차이는 무얼 말해주는가. 안재호는 “환호를 통한 차별화 내지 계층화보다 공동체를 하나로 인식하려는 한반도 선사문화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검단리에서의 환호 발굴은 유적층 위에 쌓인 퇴적층을 굴착기로 걷어내 전체 유구의 양상을 파악하는 데 집중한 것이 주효했다. 당시 발굴 현장에 중장비를 동원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안재호는 “일일이 수작업으로 흙을 걷어냈다면 둘레 300m, 면적 6000m²에 이르는 환호를 온전하게 파악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돌아보면 아쉬움은 남는 법. 검단리 발굴에서 후회되는 게 있는지 물었다. “당시 환호 안에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버린 각종 쓰레기들이 쌓였을 겁니다. 음식물부터 꽃가루까지 다양한 식생 자료가 포함됐을 거예요. 환호 바닥 흙에 대한 자연과학 분석을 시도했다면 마을의 성격을 규명할 만한 다양한 자료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울산=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우리 전통 민속놀이 ‘씨름’이 문화재가 된다. 문화재청은 씨름을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 예고한다고 31일 밝혔다. 문화재청은 “씨름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깊고 오늘날까지 대표적인 세시풍속 놀이로서 활발히 전승된 점을 높게 평가했다”고 설명했다. 또 삼국시대부터 근대까지 각종 문헌과 그림에서 역사성이 확인되고, 씨름판의 구성과 기술 방식에서 한국의 고유성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화재청은 씨름이 전국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게 폭넓게 계승됐다는 이유로 아리랑이나 제다(製茶)처럼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를 인정하지 않을 방침이다. 문화재청은 30일의 지정예고 기간이 지나면 무형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지정을 최종 확정할 예정이다. 한편 북한은 2014년 씨름을 남북 공동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하자고 요청한 바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제주도 해녀’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될 것으로 전망된다. 문화재청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한 ‘제주 해녀 문화’가 무형유산위원회 평가기구로부터 등재 권고 판정을 받았다”고 31일 밝혔다. 이로써 제주 해녀 문화는 한국의 19번째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무형유산위원회 평가기구의 등재 권고는 대부분 수용된다. 제주 해녀 문화의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여부는 이달 26일부터 12월 2일까지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리는 제11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최종 결정된다. 우리나라는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을 비롯해 판소리, 강릉 단오제, 강강술래, 택견, 줄타기, 아리랑, 김장 문화, 농악, 줄다리기 등 18건의 인류무형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순실의 시대’라는 요즘 이 책 제목과 홍보문구를 보고 문득 아득한 느낌에 빠졌다. ‘독일 국민의 존경을 받은 전 총리 고(故) 헬무트 슈미트가 전하는 마지막 인생훈.’ 그는 총리에서 물러나고 무려 23년이 흐른 2005년, 독일 국민들의 선호도 조사에서 96%의 지지로 최고의 인물에 선정됐다. 1970년대 극심한 이데올로기 갈등을 이겨내고 독일 통일과 유럽 통합의 초석을 다진 공을 인정받았다. 2016년 대한민국에서 존경받는 정치인이 누굴까 한참 고민해 봤다. 답이 잘 떠오르지 않아 이 책을 먼저 넘겨 보기로 했다. 이 책은 흔히 유명인사의 자서전류에서 볼 수 있는 나열식 자기 자랑이 아니다. 물론 저자 본인의 얘기가 등장하지만, 포인트는 정치 인생에서 도움을 얻은 위인과 예술작품, 동료 정치인을 구체적으로 기술한 내용이다. 예를 들어 그의 핵심 정치 철학인 ‘심리적 냉철함’과 ‘의무 이행에 대한 의지’는 15세 때 읽고 큰 감명을 받아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때에도 품에 지녔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서 비롯됐다. 재밌는 것은 아우렐리우스가 실상 노예 고문을 부활시키고 제국주의 전쟁에 몰입한 잔혹한 군주였다는 평가다. 이 지점에서 사람을 입체적으로 보는 정치 대가의 가치관이 드러난다. 그는 “누군가의 모범이 되기 위해 꼭 성자가 될 필요는 없다”고 썼다. “공공의 복지가 최상의 법”이라는 로마 정치인 키케로의 격언도 그의 정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이해관계가 충돌하지만 보편적 복지에 유익하다고 판단한 결정에 대해 내가 책임질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몇몇 비선 실세들의 사적 이익에 국가 정책이 좌우된 작금의 우리 현실에서 되짚어 볼 대목이 적지 않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올해 황룡사지(皇龍寺址)와 신안해저선 발굴 40주년을 맞아 고고학계의 재조명이 활발하다. 광복 이후 육상과 해상에서 각각 이뤄진 대표적인 발굴은 신라와 고려사 연구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국가 예산과 장비, 인력이 투입된 1970년대 대형 국책 발굴사업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그동안 많은 학자가 관련 논문을 쏟아냈지만 40년이 흐른 지금도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를 알아봤다.○ 궁궐 짓다가 말고 사찰 세운 까닭은? 황룡사는 신라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왕실 사찰로, 발굴 당시 높이가 1.8m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치미(치尾·용마루 양 끝에 올리는 장식 기와)가 출토됐다. 9층 목탑과 장륙존상(丈六尊像), 천사옥대(天賜玉帶)의 신라 3대 보물 중 두 개가 황룡사에 있었던 걸 봐도 높은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황룡사가 어떤 배경과 이유로 건립됐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14년(553년) 봄 2월, 임금의 명에 의해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했는데 누런 용이 그곳에 나타났다. 임금이 기이하다 여기고 절로 고쳐 지은 뒤 황룡(皇龍)이라는 이름을 내렸다”는 사실과 설화가 뒤섞인 간단한 내용만 적혀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주보돈 경북대 교수는 최근 발표한 ‘황룡사 창건과 신라 중고기 황룡사의 위상’ 논문에서 흥미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그는 신라가 6부 체제에서 국왕 중심으로 권력구조가 바뀌면서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차원에서 황룡사 건립이 추진됐다고 봤다. 선대 법흥왕의 무덤을 6부 체제의 잔재인 대릉원 밖으로 옮기는 동시에 자신이 살던 왕궁을 신축하는 등 대대적인 왕경 정비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친정을 시작한 551년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정한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그렇다면 왜 궁궐을 짓다가 절을 세우는 걸로 방향을 틀었을까. 주 교수는 황룡사 창건 설화로 황제를 상징하는 황룡을 등장시킨 것과 더불어 진흥왕이 신라로 망명한 고구려 승려 혜량을 국통(國統·왕이 임명하는 승단의 최고 지도자)에 임명한 데 주목한다. 그는 “혜량은 왕즉불(王卽佛·왕이 곧 부처) 사상과 전륜성왕을 구현하는 방책으로 궁궐 대신 황룡사를 창건하도록 진흥왕에게 건의한 것 같다”고 주장했다. 황룡사가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사실상 왕궁 기능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황룡사를 지은 진흥왕이 말년에 출가해 황룡사에 머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침몰한 신안해저선 고려에 들렀을까? 1323년 6월 중국 원나라 경원(慶元·현 저장 성 닝보)에서 출항한 뒤 침몰한 신안해저선에서는 무려 2만40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워낙 수량이 많아 1976년부터 9년에 걸쳐 수중 발굴이 이뤄졌다. 한중일 학자들이 연구를 거듭했지만 정확한 항로와 구체적인 침몰 원인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특히 신안선이 침몰하기 전 고려를 경유했는지가 불확실하다. 발굴보고서나 다수설은 고려 유물이 10여 점에 불과하다는 점을 들어 한반도를 들르지 않고 일본 하카타(博多·현 후쿠오카)로 향하다 가라앉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최근 다른 의견이 제기됐다. 김병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27일 발표한 ‘신안선의 항로와 침몰 원인’ 논문에서 “신안선은 고려 개경에 들러 상품 하역과 선적을 마친 뒤 최종 기착지인 일본으로 가던 도중 침몰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핵심 논거는 신안선 발견 장소가 경원∼하카타 직항로에서 너무 멀리 있고, 음력 6∼8월 한반도 해류는 남서풍이나 남동풍의 영향으로 일본으로 항행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고려 유물이 극소수라는 지적에 대해 김 연구관은 “고려 특산품인 모시나 삼베는 유기물이라 바닷속에서 부식돼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백제와 고구려의 군사시설이던 ‘안성 도기동 산성’이 국가사적으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경기 안성시 도기동 산성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36호로 지정한다”고 25일 밝혔다. 이 산성은 안성천과 맞닿은 구릉에 축조된 산성으로, 4∼6세기 백제가 방어시설로 사용하다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뒤에는 고구려군이 점령했다. 창고 건설공사에 앞서 유적 보호를 위해 실시한 발굴에서 삼국시대 목책(木柵·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나무기둥을 박아놓은 것)이 확인돼 지난해 말 중요문화재 가지정이 이뤄졌다. 도기동 산성은 경기 남부지역에서 확인된 유일한 고구려 목책성이다. 학계는 이곳이 충북 진천군 대모산성, 세종시 부강리 남성골산성 등 기존 고구려 산성과 연계해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지역으로의 영역 확장과 남진 경로를 추적하는 데 핵심 자료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이례적으로 목책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는 상태라 고대 성곽 구조 규명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발굴조사 결과 목책을 비롯해 세발토기(삼족기), 굽다리접시(고배), 시루 등 한성백제시대의 유물이 수습됐다. 뚜껑, 손잡이 달린 항아리(파수부호), 짧은 목 항아리(단경호), 사발(완) 등 고구려 토기와 컵 모양의 가야 토기도 출토됐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강원 삼척시 흥전리사지에서 '대장경(大藏經)' 명문이 새겨진 통일신라시대 탑비 조각이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삼척 흥전리사지 발굴현장에서 대장경이 새겨진 13번째 명문 조각과 더불어 사각형 모양의 아궁이를 갖춘 건물터를 확인했다"고 24일 밝혔다. 흥전리사지는 산지에 들어선 약 3만3000㎡ 규모의 대규모 절터로, 통일신라 때 조성됐다. 이곳에서는 올 6월 완형의 국보급 청동정병(靑銅淨甁)이 출토돼 화제가 됐다. 명문이 새겨진 13개의 탑비 조각을 종합해보면 이곳에 주석한 승려는 신라왕경의 명문가 출신으로 김씨 성을 갖고 있었으며 국통(國統·신라시대 불교계를 대표한 승려)을 지냈다. 그는 당나라에 유학한 지식인으로 대장경을 신라로 들여오는데 기여한 것으로 추정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역사 이래 이런 칼은 없었다(先世以來夫有此刀).’ 일본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된 백제 칠지도(七支刀)는 표면에 새겨진 명문처럼 생김새부터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보물이다.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자료로, 1874년 재발견 이래 100년 넘게 양국에서 집중적인 연구 대상이 됐다. 그러나 제작 시기와 목적, 양국 간 역학관계까지 많은 부분이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21일 열린 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회의 ‘칠지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 국제학술회의에서는 한일 간의 시각차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일 고대사 연구 권위자인 김현구 고려대 명예교수는 학술회의에서 “칠지도 연구에서는 백제가 일본에 대해 우위를 점하느냐가 핵심 쟁점 중 하나”라고 말했다. 간단히 말해 백제 왕세자가 칠지도를 왜왕에게 하사했느냐 아니면 진상했느냐는 논란이다. 이는 양국의 민족주의 감정과 결부돼 자국 중심 논리로 전개돼 왔다. 같은 명문을 놓고 한일 학자들의 해석이 엇갈리는 이유 중 하나다. 예컨대 칠지도의 제작연도를 밝힌 ‘태○4년 ○월 16일 병오(泰○四年○月十六日丙午·동그라미는 훼손으로 알아보기 힘든 부분)’ 명문을 놓고 일본 학계는 일본서기의 칠지도 진상 기록(신공기 52년)에 맞춰 ‘泰○’을 중국 동진의 연호(太和)로 간주한다. 백제가 독자 연호를 쓰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태화(太和) 4년은 근초고왕 재위 기간인 369년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369년으로 보면 명문 뒤쪽의 일간지(日干支)와 들어맞지 않게 된다. 그해 달력에서 16일 병오 간지의 일자가 없다는 얘기다. 일본 학자들도 이 점을 인지하고 여러 고서들을 뒤진 끝에 이른바 ‘길상구(吉祥句)설’을 들고 나왔다. 중국 한나라 왕충의 논형(論衡) 등에서 길한 날을 강조하려고 병오 간지가 아닌 날짜에도 병오로 표기한 사례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날 주제발표에 나선 기무라 마코토 일본 슈토대 명예교수는 “명문 날짜는 단순히 칠지도의 제작 날짜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몇 월 며칠까지 구체적으로 적시한 명문 형식을 볼 때 일간지를 맞추지 않은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따라 4∼6세기 연대 중 16일이 병오 간지인 날짜를 찾아보면 칠지도 제작 시기는 369년이 아닌 전지왕 4년(408년)이 유력하다는 설이 한국 학계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 견해는 ‘泰○’을 백제의 독자 연호로 본다. 홍성화 건국대 교수는 “진서에 따르면 백제가 동진에 처음 사신을 보낸 시기는 372년 정월”이라며 “국교가 수립되기도 전에 백제왕이 칠지도에 동진 연호를 새겼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무령왕릉 지석 등 지금껏 발견된 백제 금석문에서 독자 연호가 보이지 않는 것은 한계라는 지적도 나온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기자가 되기 전 대중교통으로 왕복 4시간 걸리는 회사를 출퇴근한 적이 있다. 마을버스로 시작해 지하철을 거쳐 시외버스를 갈아타면서 책이며 주요 신문들을 읽을 수 있어 교양에는 살짝 도움이 됐다. 그러나 만원 지하철과 시외버스에서 사람들에게 부대낄 땐 철학자들이 말하는 ‘자본주의의 인간 소외’가 뭔지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새 출퇴근은 내게 먹고 살기 위해 견뎌야 할 생활고 비슷한 게 돼 버렸다. 그런데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전혀 몰랐다. 통근은 단순한 기회비용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 함의가 깊이 깔린 역사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이 책을 제목만 보고 출퇴근의 연혁 등을 정리한 가벼운 읽을거리로 치부하면 오산이다. 법학을 전공한 직장인이 쓴 책답지 않게 미시생활사 관점에서 출퇴근의 연원을 깊이 있게 파헤쳤다. 저자에 따르면 출퇴근은 직장과 주거지를 공간적, 심리적으로 분리하는 행위로 산업혁명이 촉발한 근대화의 산물이다. 농경으로 먹고 살던 전근대 사람들은 집과 일터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출퇴근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산업혁명으로 발생한 극심한 도심 공해는 중산층의 교외 이주를 부추겼고, 특히 1830년 시작된 영국의 철도 건설은 짧은 시간에 도심 직장으로 출근을 가능케 했다. 이 과정에서 출퇴근은 표준시간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전위병 역할을 했다. 기차의 부정확한 정차시간은 지각출근에 그치지 않고 열차 충돌로 인한 대규모 인명 피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19세기 초반까지 다른 시간대에 교회종이 각각 울리던 영국 마을들은 기차시간표의 기준이 된 그리니치 표준시를 일제히 채택하기에 이른다. 출퇴근의 등장은 사람들의 주거패턴과 문화까지 확 바꿔놓았다. 이른바 ‘직주 근접’에 따라 기차역 주변으로 중산층과 서민층의 주거지가 대거 들어서면서 영국의 부동산 시장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이미 1838년 런던-사우스웨스턴 철도회사가 새로 지은 철도역 근처에 ‘킹스턴어폰레일웨이(Kingston upon railway)’라는 신흥도시가 생길 정도였다. 문화면에서는 역사 내 매점이 영국의 로맨스, 모험소설의 인기를 촉발시키고 문맹률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 재밌는 건 통근의 달콤한 혜택이 역사적으로 계급 차별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수익 올리기에 급급한 영국의 초기 철도회사들이 기차비를 높게 책정하면서 노동자들에게 통근은 그림의 떡이었다. 1844년 영국 의회가 노동자 전용열차 운행을 의무화했지만, 철도회사들은 전용열차의 운행횟수를 최소화하는 데 급급했다. 이에 따라 영국 노동자들은 1854∼1866년 런던의 콜레라 대유행과 1858년 대악취(great stink) 사건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도심 주거지에 한동안 머물 수밖에 없었다. 서민들의 통근은 런던 지방의회의 교통 공영화 조치로 가능해졌다. 공공운송을 시장에만 맡겨놓을 수 없다는 여론이 팽배해지면서 1895년 전차 운영업체에 대한 인수와 1896년 노스 메트로폴리탄 철도회사 인수 등이 잇달아 이뤄졌다. 공영화에 따른 교통비 인하를 계기로 통근은 모든 계층이 누릴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 될 수 있었다. 이로써 교외의 한적한 주거지에 노동자들의 주택이 생기기 시작했다. 출퇴근을 거추장스러운 비용으로만 치부하는 현대인들이 다시 한번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옛 도시의 삶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림의 가장 오른쪽, 자연에 둘러싸인 교외의 한적한 일상은 어느덧 성문을 지나면서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다. 각종 화물을 실은 배들 사이로 부지런히 물건을 내리는 인부들의 활기찬 모습, 온갖 상품을 진열한 점포 상인들, 재밌는 연극을 서서 감상하는 군중의 모습 등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어찌나 필치가 세밀한지 수천 명의 표정과 움직임이 모두 제각각이다. 도시의 삼라만상을 비단 두루마리 하나에 담았다면 과장일까. 16세기 중국 화가 구영(仇英)이 그린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를 감상하려면 목과 허리의 통증을 각오해야 한다. 너비만 9.8m에 이를 정도로 작품의 스케일이 방대하고 볼거리가 풍성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예부터 물산이 풍부해 부자 도시로 유명한 중국 쑤저우(蘇州)를 모티브로 상상력을 가미해 이상적인 도시상을 그려냈다. 생동감 넘치는 상업도시의 이상향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을 강조한 조선 실학자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줬다. 연암 박지원은 7개의 청명상하도 아류작을 보고 “구영이 그린 진본이 아니다”라고 감정할 정도로 이 그림에 푹 빠져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5일부터 개최한 ‘미술 속 도시, 도시 속 미술’ 특별전에 가면 우리나라 국보급에 해당하는 중국 1급 문화재인 구영의 청명상하도와 서양(徐揚)의 고소번화도(姑蘇繁華圖)를 감상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인 18세기부터 1930년대까지 도시문화의 맥락에서 동아시아 3국의 미술을 조명한 이번 전시에는 총 204건, 373점의 작품이 소개됐다. 고소번화도는 청명상하도처럼 쑤저우를 담은 도시 풍경화로, 4800여 명의 인물과 2100여 개의 건물이 등장한다. 상상을 가미한 청명상하도와 달리 쑤저우의 실제 풍경을 담았다. 청명상하도와 고소번화도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다만 이달 23일까지만 진본을 전시하고 이후에는 복제본이 전시되니 관람을 서두르는 게 좋다. 조선 후기 도시의 생생한 풍속을 엿볼 수 있는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과 혜원 신윤복의 ‘혜원전신첩’도 선보인다. 성인 5000원, 청소년과 어린이 4000원. 다음 달 23일까지.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저 논바닥 보이죠? 이곳이 8000년 전에는 바다였습니다.” 14일 경남 창녕군 비봉리 유적 전시관 앞. 임학종 국립김해박물관장이 11년 전 발굴 현장을 내려다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석기시대 나무배를 비롯해 첫 ‘똥 화석(분석·糞石)’, 멧돼지가 그려진 토기 등이 출토된 대표적인 선사 유적지다. 특히 여기서 출토된 나무배(비봉리 1호)는 기원전 600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 조몬 시대 목선에 비해 2000년 이상 앞선다. 발굴의 ‘구루’들에게는 상서로운 꿈자리가 따르는 걸까. 백제 금동대향로 발굴 직전 아내가 용꿈을 꾼 신광섭 울산박물관장(본 시리즈 2회)처럼 2005년 발굴 당시 김해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던 임학종 역시 기묘한 꿈을 꿨다.○ 우리나라 최고(最古) 나무배 “발굴을 위해 십자형으로 둑처럼 쌓은 곳에 돼지꼬리 모양의 끈이 달려 있는 꿈을 꿨어요. 느낌이 심상치 않으니까 뭔가 납작한 판이 나오면 발굴을 즉각 중단하고 내게 보고해 주시오.” 2005년 6월 초순 임학종은 김해박물관 조사원들에게 느닷없이 꿈 얘기를 꺼냈다. 그는 꿈에서 본 끈을 배를 접안시킬 때 사용하는 밧줄로 해석했다. 주변에서 온갖 물고기 뼈와 조개, 대형 어망추 등이 출토된 정황으로 미뤄볼 때 이곳은 수천 년 전 바닷가였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배도 나올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때까지 일본에서는 조몬 시대 나무배가 130척이나 출토됐지만 국내에서는 신석기시대 배가 나온 적이 없었다. 조사원들은 ‘더위를 드셨나…’ 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달 24일 오후 3시 유적 북쪽 끝 개흙. 지표로부터 6m, 땅속의 가장 아래 패각층까지 드러난 지점에서 굴착기 기사가 “그만 파자”고 했지만, 임학종은 “혹시 모르니 한 번만 더 긁어 보자”고 채근했다. 삽날로 지면을 살짝 긁는 순간, 노란 선이 그의 눈에 확 들어왔다. 윤곽선의 형태가 예사롭지 않아 작업을 중단시키고 뛰어 내려갔다. 가까이에서 보니 나무판이 분명했다. “처음에는 활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개흙 속으로 손가락을 깊숙이 쑤셔 넣고 쭉 훑어봤는데 한참 미끄러져 내려가는 거야. 이 정도 크기의 나무판이라면 100% 배가 맞다고 확신했습니다. 순간 몸에서 전율이 일어납디다.” 발굴단이 1시간에 걸쳐 개흙에서 파낸 나무배는 길이 310cm, 너비 62cm 크기였다. 발굴단은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유적 위에 천막을 치고 나무배 전체에 중성지를 덮었다. 변조와 부식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나무 특성상 현장에서의 보존이 관건이었다. 배에서 조그만 조각을 떼어냈다. 이 조각을 박성진 경북대 교수(임학)에게 자문한 결과 수령이 약 200년 된 소나무로 판명이 났다. 발굴단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급파된 목재 보존 전문가 2명과 함께 주변 개흙과 한꺼번에 퍼낸 나무배를 특수 제작된 나무상자 안에 넣고 무진동 특수차량에 실어 중앙박물관으로 옮겼다. 이 배는 올해로 12년째 보존 처리가 진행 중이다.○ 첫 ‘똥 화석’ 찾아내려 지극정성 온전한 형태의 ‘도토리 저장 구덩이’ 87개를 무더기로 발굴해 낸 것도 큰 성과다. 이전에 발굴된 것들은 수도 적고 형태도 온전치 않아 정확한 기능을 규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임학종은 이른바 ‘어깨선’(유적 조성 당시의 지층)을 찾는 데 성공해 저장 구덩이의 본래 크기를 밝힐 수 있었다. 신석기인들은 채집한 도토리의 떫은맛(타닌 성분)을 없애기 위해 소금기가 있는 바닷물에 일정 기간 보관한 뒤 먹었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해안가에 구덩이를 판 이유다. 따라서 도토리 저장 구덩이의 개별 위치를 파악하면 신석기시대 당시의 해안선을 그릴 수 있다. 비봉리 일대 내륙이 신석기시대 바다였다는 사실은 자연과학 연구로도 입증됐다. 바다에서만 서식하는 규조(硅藻)류가 비봉리 토층에서 검출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토된 똥 화석도 의미가 작지 않다. 이른바 ‘화장실 고고학’이 발전한 일본에서는 똥 화석을 선사인의 영양 상태와 당시 식생을 파악하는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임학종은 “우리나라는 왜 일본처럼 똥 화석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궁금증이 늘 있었다”며 “비봉리 발굴 현장에서 퍼낸 모든 흙을 삼중(三重) 채로 일일이 걸러 똥 화석을 찾아냈다”고 말했다.창녕=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1. 중국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건륭제는 칠순에 이르러 황금으로 치장한 건물 ‘찰십륜포(札什倫布)’를 열하에 짓는다. 이 화려한 건물의 주인은 황제가 아니었다. 티베트 라마교의 2인자인 판첸라마의 거처였다. 판첸라마는 1780년 건륭제의 70세 생일 축하연 때 가마를 탄 채 황제의 침전(寢殿)까지 들어간 유일한 외국인이다. 판첸라마는 조선을 비롯한 조공사절과 달리 황제에게 절하지 않았고, 그와 옷깃이 스칠 정도로 가까운 곳에 나란히 앉았다고 한다. 청나라가 외국에 베푼 가장 파격적인 예우였다.#2. 지난해 9월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중국 전승절 기념식. 30여 개국 정상 중 유일하게 배석자 없이 정상끼리 나란히 만나는 ‘특별 오찬’이 마련됐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조차 초대받지 못한 오찬이었다. 톈안먼 망루에서 열병식을 참관할 땐 시진핑 주석, 푸틴 대통령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미국의 불참 압력에도 방중을 결단한 박 대통령에게 중국이 특별 예우로 화답한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두 사건은 200여 년의 시차를 보이고 있지만 곱씹을 만큼 닮은 점이 있다. 동아시아 패권국으로 부상한 현재의 중국과 조공 질서의 정점에 있던 청나라가 상대적으로 약소국인 한국과 티베트에 파격적인 환대를 행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이것이 냉엄한 국제정치에서 고도의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박 대통령에 대한 환대가 G2로 부상한 중국의 미국 견제와 맞닿아 있다면, 18세기 청나라의 그것도 서쪽 변방의 안보를 확보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1780년 축하연에 외교 사절로 파견된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황제는 법사(판첸라마)를 모셔 티베트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함으로써 이들의 세력을 분산시켰다. 이것이 청나라가 주변 나라를 제어하는 책략”이라고 썼다. 변방의 강력한 세력이던 몽골과 차별 대우를 함으로써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효과를 노렸다는 얘기다. 이 책은 조선 사신들이 남긴 사행록(使行錄·외교 활동 기록)을 국제정치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독특한 시도를 하고 있다. 주로 유럽과 미국을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는 기존 외교사 서적들과 비교하면 신선한 내용이다. 특히 동아시아사를 다룰 때 중국을 중심부로 놓고 조선, 일본, 몽골, 티베트 등을 주변부로 놓는 데 반해 이 책은 조선의 관점에서 중국과 주변국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건륭제 축하연과 관련해 황제가 조선 사신들에게 판첸라마 접견을 강요한 사건을 다룬 내용이 특히 인상적이다. 주자성리학을 신봉한 조선 사신에게 티베트 불교의 승려를 찾아가 절하라는 황제의 요구는 지금으로 치면 거센 외교적 도전이었다. 고뇌를 거듭한 사신들은 황제의 계속된 압박에 마지못해 판첸라마를 찾아가지만, 끝내 절을 올리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외교부 격인 청나라의 예부(禮部)가 황제에게 “조선 사신들이 절을 했다”는 거짓 보고를 올려 조선 측과 논란을 벌이기도 한다. 국제정치학 분야의 석학인 저자(하영선 서울대 명예교수)는 “건륭제는 티베트를 적극적으로 회유하기 위해 조선 사신에게 예방을 명한 것”이라며 “조선과 티베트 사신의 만남은 18세기 청대 복합 천하질서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장면”이라고 썼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첫 부부 국립 박물관장이 탄생했다. 문화재청은 13일 신임 국립고궁박물관장(국장급)에 김연수 국제협력과장(52)을 승진 발령했다고 밝혔다. 김 신임 관장은 현 이영훈 국립중앙박물관장(60)의 대학(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6년 후배이자 부인이다. 부부가 국립 박물관장에 나란히 오른 것은 처음이다. 앞서 초대 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고(故) 김재원 관장에 이어 그의 딸인 김영나 서울대 명예교수가 2011년 중앙박물관장으로 부임해 ‘부녀 박물관장’ 탄생이 화제가 된 바 있다. 미술사(금속공예)를 전공한 김 관장은 1986년 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입사해 18년 동안 근무하다 2005년 문화재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술사를 제대로 공부한 학예직 공무원이 필요하다는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가 문화재청에서 맡은 첫 보직은 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 김 관장은 본보와의 통화에서 “2005년에 고궁박물관 개관 준비 업무를 맡았는데 오랜만에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부부 관장이 된 감흥보다 10년의 기나긴 주말부부 생활을 끝낼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이 관장이 중앙박물관장에 부임하기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약 10년간 재직하면서 대전에 있는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문화재청에서 근무한 김 관장과 떨어져 지낸 것. 이번에 김 관장이 서울의 고궁박물관으로 부임하면서 살림을 합칠 수 있게 됐다. 고궁박물관장 인사를 놓고 문화재청 안팎에서는 “최선의 적임자가 됐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김 관장은 성실하고 깔끔한 업무 처리 능력을 인정받아 학예연구직으로는 드물게 고시 출신이 주로 맡아 온 국제협력과장에 지난해 발탁됐다. 향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 김 관장은 “초심으로 돌아가서 고궁박물관 개관 준비 때 품었던 포부와 구상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귀를 의심했다.” 13일 스웨덴 한림원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가수 밥 딜런을 호명하자 출판계가 깜짝 놀랐다. 한 출판계 관계자는 “직원들과 함께 처음에 스웨덴어로 하는 발표를 듣다가 ‘밥 딜런’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잘못 들은 줄 알고 영어 발표가 나올 때까지 귀 기울여 들었다”고 말했다. 문학동네 해외팀 관계자는 “이탈리아 소설가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혹은 돈 들릴로가 받지 않을까 했다”며 “밥 딜런이 영국 도박사이트 래드브룩스에 수상 가능 후보 8위에 올랐지만 ‘설마…’라고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외국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돈 들릴로에게 주목했고 일본 아사히신문은 자국의 무라카미 하루키를 예상했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인 ‘더 뉴리퍼블릭’은 최근 래드브룩스의 노벨 문학상 후보 순위 매기기를 비판하는 기사에서 ‘밥 딜런이 아닌 것은 확실’이라는 부제목을 달기도 했다. 밥 딜런의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2010년)을 출간한 문학세계사 관계자는 “자서전 출간 당시에도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됐지만 매번 확률이 낮아 꿈이라고만 생각했다”며 “밥 딜런 저작권사로부터 그의 신간 출판을 제안받았는데 노벨상을 받았으니 원고도 안 보고 출간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출판사는 ‘바람만이…’도 새로 찍을 준비에 들어갔다. 한편 국내 대중음악계는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에 한껏 고무된 분위기다. 특히 대중음악을 바라보는 인식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도 나오고 있다. 이대화 대중음악평론가는 “대중음악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노랫말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가슴이 벅찰 정도로 놀라운 일대 사건”이라고 기뻐했다. 김상운 sukim@donga.com·조종엽 기자}

국립청주박물관이 ‘삶과 예술 속 청동이야기’ 전시를 오늘 개최한다. 인류 최초의 합금인 청동으로 만든 세형동검과 동경(銅鏡), 청동 불상, 청동 종 등은 우리나라의 중요 문화유산을 구성하고 있다. 박물관은 전시 1부에서 청동의 탄생 배경과 다양한 구리합금의 종류를 소개한다. 2부에서는 도가니와 거푸집을 활용한 고대의 청동기 제작 과정을 살펴본다. 실제 출토된 거푸집과 청동 검, 청동 꺾창 등이 전시된다. 이 중 국보 제231호로 지정된 ‘전(傳) 영암 출토 거푸집’(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을 눈여겨볼 만하다. 청동으로 도끼와 칼, 자귀, 끌 등의 도구를 만들기 위한 활석(滑石) 재질의 거푸집이며 총 13점이다. 거푸집 모형에 들어 있는 세형동검의 양식 등을 고려할 때 청동기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한반도에 각종 청동 도구를 만드는 제작 기술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중요 유물이다. 청동 종의 제작 과정을 추정해 복원한 동영상과 함께 ‘청주 운천동 출토 종’(보물 제1178호)도 선보인다. 생활 및 종교용품, 장식품 등 청동으로 만든 각종 도구의 쓰임새도 보여준다. 내년 1월 30일까지. 043-229-6402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