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유럽의 세계 정복, 필살기는 ‘화약 기술’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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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의 조건/필립 T 호프먼 지음·이재만 옮김/360쪽·1만8000원·책과함께

유럽의 초창기 화약 무기는 장대에 소구경 화포를 장착한 형태로 발사 도중 폭발 위험이 컸다. 그러나 이후 꾸준한 개량을 거쳐 15세기 후반 화승총(그림)에 이어 17세기 수발총이 잇달아 개발되면서 탄환의 발사 속도와 위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책과함께 제공
유럽의 초창기 화약 무기는 장대에 소구경 화포를 장착한 형태로 발사 도중 폭발 위험이 컸다. 그러나 이후 꾸준한 개량을 거쳐 15세기 후반 화승총(그림)에 이어 17세기 수발총이 잇달아 개발되면서 탄환의 발사 속도와 위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책과함께 제공
 이 책은 역사책이면서 역사책 같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책 뒤쪽 부록을 열어 보면 온갖 수식이 빼곡하다. 유럽의 독보적인 발전을 설명하는 가설에는 한계생산과 같은 경제학 개념도 여럿 들어간다. 책날개의 저자 소개를 한번 훑어봤다. 분명 역사학을 전공한 교수가 맞다. 그런데 미국 경제사학회 회장이라는 경력이 뒤에 붙어 있다. 이 책의 독특한 접근에 대한 의문이 조금 풀렸다.

 주제나 접근 방식이 매우 포괄적이기 쉬운 일반 역사책과 달리 이 책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간명한 가설을 내놓는다. 마치 경제학의 ‘총수요(AD)-총공급(AS)’ 곡선을 보는 것 같다. 요약하면 이렇다. 근대 이후 유럽이 세계를 정복한 것은 가장 앞선 화약 기술을 보유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역사를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해도 되나. 그러나 이 단순한 가설을 역사학, 인류학, 경제학 등 다양한 측면에서 고찰하는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된다.

 지금껏 유럽의 세계 지배를 놓고 재러드 다이아몬드와 이언 모리스 등 많은 학자가 지리, 생태, 경제 등 다양한 측면에서 원인을 찾았다. 그런데 저자는 유럽의 세계 진출과 식민 지배가 결국 화약 무기의 혁신에서 비롯됐음에 특히 주목한다. 마치 핵탄두와 재래식 무기처럼 아무리 많은 기병을 가져도 총탄을 당해 낼 순 없기 때문이다. 피사로가 겨우 180명의 병력으로 인구 600만 명의 잉카제국을 정복한 게 대표적이다. 저자는 이미 17세기부터 중국과 인도, 오스만, 러시아, 일본 등 유라시아 강국들의 군사력이 유럽에 역전당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유독 유럽에서만 비약적인 화약 무기 혁신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얼까. 그는 전쟁에 투입하는 고정비용과 가변비용, 기대이익 등을 함수화한 이른바 ‘토너먼트’ 모델로 설명한다. 간단히 말해 유럽은 100년전쟁이나 30년전쟁처럼 국력이 고만고만한 여러 국가가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화약 무기를 최대한 발전시킬 수밖에 없는 조건이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이와 함께 개별 군주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물자를 동원하는 데 드는 비용이 유럽에서 가장 적었던 것도 주효했다.

 반면 중국이나 러시아, 인도 등은 거대한 통일 제국을 이뤄 낸 이후로 유럽처럼 전쟁 준비에 몰두할 이유가 점차 사라지게 됐다. 한동안 주변국들이 패권국에 정면으로 도전하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도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거나 이민족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많은 전쟁을 치렀지만 화약 무기를 고도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저자는 이들의 주적이 기동성이 매우 뛰어난 유목민이어서 화포보다 궁병으로 방어하기가 더 적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유럽에서 잦은 전쟁과 더불어 전시 동원 비용이 특히 낮았던 이유는 또 무엇인가. 이때 등장하는 게 경제학 모델로 모든 걸 해명하기 어려울 때 경제학자들이 애용하는 ‘외생변수’다. 저자가 토너먼트 모델의 외생변수로 든 것은 정치사(政治史)다. 예컨대 영국 등 유럽 일부 국가의 경우 19세기 이후 정치 혁명을 겪으면서 전국에 대의(代議)기구를 수립해 세수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조세 저항을 정치 시스템으로 어느 정도 무마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높은 국가 세수는 화약 무기 개발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반면 중국 등 다른 제국들은 지역 엘리트의 반발과 부패 등으로 인해 국가 세수가 유럽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정복의 조건#필립 t 호프먼#화약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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