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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광복절 임진각에서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하는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의 베토벤 9번 합창 교향곡이 울려 퍼졌다. 이 오케스트라는 유대인 지휘자 바렌보임과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인 팔레스타인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1999년 문명 간 공존과 평화를 호소하기 위해 만든 관현악단이다. 이스라엘 출신 단원과 함께 그와 적대 관계에 있는 팔레스타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집트 이란 등 중동 국가의 단원으로 구성돼 있다. ▷지난주 북한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이 남북한 연주자들로 이뤄진 합동 교향악단의 연주회를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한 지휘자 밑에 남북한 연주자 동수로 구성된 교향악단의 구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올해 6월 미국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이자 서울에서 열리는 ‘린덴바움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인 샤를 뒤투아가 평양을 방문해 남북한 청소년 50명씩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구성에 대해 북한 측으로부터 긍정적 답변을 얻었으나 통일부의 불허로 성사되지는 못했다. ▷뒤투아에게 선수를 뺏길 뻔했던 정 예술감독의 마음이 바빴나 보다. 자크 랑 프랑스 하원의원의 도움을 얻어 북한 관계자들을 만나고 왔다. 랑 의원은 2009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특사로 방북해 조만간 문을 열 프랑스의 평양 상주사무소 개설에 물꼬를 텄다. 그는 문화부 장관 재임 시 정 감독을 국립 바스티유 오페라 감독으로 초빙했던 만큼 둘 사이는 각별하다. 두 사람의 노력으로 한국판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가 탄생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관심을 모은다. ▷웨스트이스턴 디반은 ‘서동(西東)시집’으로 번역되는 독일 문호 괴테의 작품 이름이다. 괴테가 페르시아(오늘날의 이란) 시인 하피즈의 시를 읽은 뒤 영감을 얻어 쓴 시집으로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 간 교류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디반은 평화를 위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무지에 대항하는 프로젝트”라는 바렌보임의 말에 공감한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잘한다고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같이 앉아 연습하고 연주하다 보면 상대의 감정과 생각을 더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꼭 10년 전인 2001년 9월 17일. 당시 이석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사무총장과 박원순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시민운동이 싹 튼 지 10년이 흐른 뒤였다. 한 해 전인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낙천낙선운동이 벌어졌고 이를 둘러싸고 경실련과 참여연대가 대립했다. 이석연은 “시민단체의 직접적 정치참여는 시민운동의 본질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박원순은 “(참여연대가) 정치세력과 유착됐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이석연은 낙천낙선운동에 대해서도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시민운동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반면 박원순은 “당대에 불법이었던 운동이 후대에 합법화될 수 있다”고 맞받았다.법 중시와 법 경시, 우파성과 좌파성 세상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안철수 돌풍이 박원순 변호사(55)를 들어올려 서울시장 후보 선두자리에 앉혀놓더니 이번에는 이석연 전 법제처장(57)이 대항마로서 출마 의지를 밝혔다. 10년 전 정치참여를 놓고 공방을 벌이던 두 사람이 함께 정치에 뛰어든 것이다. 둘 다 현재로선 정당 입당을 꺼리고 있지만 박원순의 민주당, 이석연의 한나라당 친화성은 누가 봐도 분명하다. 두 살 차이인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시민운동단체에 둥지를 틀었다. 이석연은 1994년 경실련에, 박원순은 1995년 참여연대에 들어갔다. 이석연은 1989년 생긴 경실련에 뒤늦게, 박원순은 사실상 참여연대 창립 회원으로 들어갔다. 경실련의 영문 이름은 Citizen's Coalition이고 참여연대는 People's Solidarity이다. 박원순은 “Citizen보다는 People로 써서 민중적 관점을 더 드러내려 했다”고 어느 책에 쓴 적이 있다. 두 사람의 맞수 관계는 이미 그때부터 시작됐다. 앞서 질풍노도의 1980년대를 이석연은 법률 분야 공직자로, 박원순은 인권변호사로 보냈다. 이석연은 전북대 법학과를 졸업한 후 1979년 행정고시, 1985년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1994년 변호사로 개업하기까지 약 15년간 법제관과 헌법연구관으로 일했다. 시위로 서울대를 중퇴한 박원순은 1979년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법원 일반직 시험을 거쳐 등기소장으로 근무하다 1980년 사시에 합격했고, 1981년 검사를 잠깐 하다가 1982년 변호사로 개업해 시국사범 변호를 많이 했다. 노무현 집권 이후 이석연과 박원순은 색깔을 분명히 했다. 박원순은 아름다운가게 등 새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른바 진보진영과의 연대에 힘썼고, 이석연은 행정수도 이전 위헌소송을 주도했고 이명박 정부 초대 법제처장을 맡았다.시민운동의 피날레 보여주는 그들 한국의 시민운동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 대 반(反)민주로 진영을 나누는 민주화운동이 호소력을 갖지 못하고, 1990년 옛 소련의 붕괴 이후 계급 중심의 민중운동이 힘을 잃은 상황에서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등장했다. 초창기 시민운동은 국민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언론도 학계도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지나면서 시민운동단체와 정권의 칸막이가 무너졌고 시민운동의 공정성과 중립성이 의심받기 시작했다. 참여연대 등 여러 시민단체들은 더 젊은 세대가 조직을 장악하면서 과격해지고 좌경화했다. 시민운동 내의 이념적 분화가 일어나고 바른사회시민회의 같은 뉴라이트(신우파) 성향의 시민운동 단체도 생겼다. 한국의 정치는 원내에서는 정당끼리, 원외에서는 시민운동단체끼리 판박이 하듯 대립한다. 어떤 시민운동단체의 책임자들은 사실상 장외(場外) 정치인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오늘날 시민운동의 현실이다. 이석연과 박원순이 인물로서야 기존 정치인보다 신선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약발은 딱 한 번이다. 이들의 정치참여는 이미 파탄 난 시민운동의 피날레와 같은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한국에서는 아르바이트를 줄여서 ‘알바’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바이토’라고 한다. 그냥 일을 뜻하는 독일어 아르바이트를 시간제 노동이란 의미로 사용한 것은 일본인들이고 그 말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왔다. 아르바이트에도 최저임금제가 적용된다. 올해 시간당 최저임금은 4320원, 일급 8시간 기준으로는 3만4560원이다. 그러나 실제 아르바이트에는 최저임금조차 잘 지켜지지 않고 임금이 체불되는 경우도 많다. ▷미국에서는 저임금의 단순 노동을 맥잡(McJob)이라 부른다. 패스트푸드점 맥도널드에서 하는 허접한 일을 뜻한다. 미국 사회학자 아미타이 에치오니는 1986년 워싱턴포스트에 “맥잡은 아이들에게 나쁘다”는 기고를 했다. 그는 기고에서 “미국 고등학생의 3분의 2가 맥도널드 같은 패스트푸드점에서 일을 하고 있다”며 “그런 일은 비가 와도 눈이 와도 해야 하는 신문배달이나 가격 흥정을 경험해보는 레모네이드 판매와는 달리 교육적으로 배우는 게 없다”고 썼다. ▷그래도 학생들은 부모에게 용돈 부담이라도 덜어주겠다고 패스트푸드점, 커피전문점, 편의점에서 일을 한다. 유명 커피전문점이 아르바이트 학생들에게 주휴수당(주6일 근무 후 하루 쉬면 나머지 하루를 보상하는 수당)을 주지 않고 일을 시켰다는 고발이 접수돼 고용노동부가 조사에 나섰다. 지난해 기준으로 커피전문점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미국산 원두 10g(한 잔 분량)의 수입 원가는 123원에 불과한데 아메리카노 한 잔의 가격은 3500∼4000원이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원가보다 30배가량 비싸게 팔면서도 주휴수당을 주지 않았다니 심하다. ▷서울시장 후보 출마를 선언한 박원순 씨가 상임이사로 있는 희망제작소가 올해 3월 무급인턴 논란에 휘말렸다. 희망제작소가 인턴에게 하루 점심값 5000원만 주고 정규 연구원에 준하는 힘든 업무를 시켰다는 것이다. 인턴은 단순히 일을 돕는 수준이 아니라 정규 업무를 책임졌고 경력을 인정받기 위해 주5일씩 5개월간 일했다. 물론 인턴경쟁률은 무급임에도 10 대 1이나 됐고 인턴활동에서 보람을 느꼈다는 반응이 많았다. 박 씨가 설립한 재단에는 자원봉사도 많지만 기왕 ‘인턴’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상징적으로라도 임금을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어제 끝난 국회의 양승태 대법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는 후보자의 이념적 성향이 쟁점이 됐다. 헌법재판도 아닌, 후보자의 과거 대법관 시절 판결을 놓고 이념적 성향을 따지는 것이 다소 무리이긴 하지만 대법원장이 전국 법관 2500여 명의 인사 및 보직권과 대법관 전원에 대한 제청권을 지닌 만큼 이념적 성향이 중요하지 않다고 보기도 어렵다. 양 후보자는 “난 보수도 진보도 아니다”고 답변했다. ▷24일 퇴임하는 이용훈 대법원장은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지명했다. 이용훈 사법부는 법원 중심의 일륜(一輪)사법부를 주장하다가 검찰과 갈등을 빚었고, 일부 판사의 비상식적 판결을 통제하지 못해 불신을 초래했다. 양 후보자는 사법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도 “사법부의 급격한 변화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보수적 견해를 밝혔다. ▷미국에서 연방대법원장 지명 때 1순위로 고려되는 것은 이념적 성향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자기 성향에 따라 지명했다고 해서 그 대법원장이 꼭 같은 성향을 따라간다는 보장은 없다. 미국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3번이나 지낸 얼 워런을 보수주의자라 믿고 대법원장으로 지명했으나 정작 그는 재임 기간 동안 역사적으로 리버럴한 판결을 이끌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나중에 그의 지명을 “일생의 최대 실수”라고 말한 바 있다. 역시 공화당의 닉슨 대통령은 은퇴한 워런 대법원장의 뒤를 이어 워런 버거 대법원장을 임명했다. 닉슨 대통령은 버거가 워런 시대의 선례를 뒤집어줄 것을 기대했으나 버거는 그 선례를 보다 확대했다. ▷양 후보자는 청와대의 인사검증 요청 당시 이를 거부하며 미국 캘리포니아의 존 뮤어 트레일로 산악도보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는 인사청문회 모두발언에서 “나는 개인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간섭을 배격하고 자유분방함을 추구한다”고 말해 자유주의자로서의 면모도 내비췄다. 이용훈 사법부에서 진보 성향의 ‘5형제’로 불린 박시환 이홍훈 김지형 김영란 전수안 대법관 가운데 남은 박시환 김지형 대법관이 11월, 전수안 대법관이 내년 7월 퇴임한다. 양 후보자가 국회 임명 동의를 통과한다면 당장 11월 대법관 제청에 관심이 쏠릴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MBC가 PD수첩 광우병 편의 3가지 허위보도 내용에 대해 자사 방송과 주요 일간지를 통해 사과했다. 대법원 확정 판결에 따른 사과이긴 하지만 문안을 자세히 보면 이전에 마지못해 하던 사과와는 달리 성의가 담겼다. PD수첩 광우병 편은 2008년 3개월 동안 서울 도심을 마비시키다시피 했던 촛불시위의 발단이 된 프로그램이다. 이제는 ‘목숨을 걸고 미국 쇠고기를 먹어야 하느냐’며 PD수첩의 허위보도를 확대 재생산했던 시민운동단체들이 사과할 차례다. 촛불시위에 앞장섰던 광우병 국민대책회의에는 1840개가 넘는 단체가 가담했다. 그중 핵심 단체는 한국진보연대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민주노총 전교조 등이다. 날조된 거짓을 사실인 것처럼 뒷받침한 전문가와 지식인들도 사과해야 한다. 우희종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는 명색이 전문가임에도 PD수첩의 오류를 지적하기는커녕 세계적으로 소멸 추세에 있는 광우병을 과장하는 데 앞장섰다. 광우병 전문가도 아닌 진중권 씨는 미국산 쇠고기가 99.9% 안전하다는 주장에 “그럼 0.1%의 위험은 있다는 이야기인데 (한국) 인구 4500만 명의 0.1%면 4만5000명”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촛불시위 때 ‘청와대로 가자’고 선동했던 박원석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천안함 조사 결과를 부인하는 서신을 유엔에 보냈다. 광우병 선동을 반성하기는커녕 또 다른 거짓을 이어가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판단력이 미성숙한 학생들을 선동해 촛불시위 참여를 독려한 교사들도 사과해야 한다. 학생들을 광우병 공포에 떨게 하고 “왜 우리가 젊어서 죽어야 하느냐” “나도 대학 가 결혼하고 애 낳고 싶어요”라고 외치게 만든 것이 그들이었다. “미친 소 대신 청산가리를 먹겠다”는 발언으로 학생들을 자극한 김민선 같은 연예인이 갑자기 김규리로 이름을 바꾼 이유도 궁금하다. 청소년들의 시위 참여를 부추긴 백낙청 씨 같은 지식인도 한마디 사과 정도는 하는 게 예의다. 촛불시위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던 국회의원들도 의회 내에서 진실을 찾기보다 거리에서 거짓의 확산을 방조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광우병 보도는 허위가 아니라고 판결한 1심 법원의 문성관 판사는 어떤 생각인지 궁금하다. 이른바 진보좌파 세력은 거짓 선동으로 사실상 정권 불복종 운동을 펼친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인터넷 괴담에 들썩이는 우리 사회의 부박성(浮薄性)은 아직도 완전히 극복됐다고 보기 어렵다.}

대가성 입증이 중요한 범죄가 있다. 뇌물수수죄가 대표적이다. 전국청원경찰협의회(청목회)로부터 쪼개기 후원금을 받은 국회의원들에게 법원이 조만간 판결을 내릴 예정인데 이들이 받은 돈이 입법로비에 대한 대가인지, 진짜 정치후원금인지가 판결의 관건이다. 지난해 ‘스폰서 검사’ 수사에서 건설업자에게 돈을 받아 그랜저 승용차를 샀으나 나중에 찻값을 돌려준 검사에게 대가성이 없었다는 이유로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성매매 사건에서도 성행위 후에 대가가 지불되지 않았다면 성매매가 성립하지 않는다. ▷선거법의 후보자 매수죄는 뇌물수수죄와 구조가 비슷하다. 대가성 입증이 중요하고 돈을 준 쪽이나 받은 쪽이 모두 처벌된다. 뇌물수수죄의 사전수뢰와 사후수뢰처럼 후보자 매수죄도 사퇴 전 매수죄와 사퇴 후 매수죄로 나뉜다. 선거법상 사퇴 전 매수죄는 ‘후보자를 사퇴하게 할 목적으로 후보자에게 금전 직위를 제공하거나 그 제공을 약속하는 것’, 사퇴 후 매수죄는 ‘후보자를 사퇴한 데 대한 대가로 후보자였던 자에게 금전 직위를 제공하거나 그 제공을 약속하는 것’이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은 지난달 28일 기자회견에서 “선거에서는 공정성을 위해 대가성 뒷거래를 불허해야 하지만 선거 이후는 또 다른 생활의 시작”이라며 선거만 끝나면 더 이상 대가성 뒷거래는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선거법의 공소시효 조항은 선거일 후 행해진 범죄에 대해서는 그 행위가 있은 날로부터 6개월이라고 규정해 선거일 후에도 선거범죄가 행해질 수 있음을 예상하고 있다. 후보 사퇴에 대한 대가가 선거 이후에 제공되면 사퇴 후 매수죄에 해당한다. 사퇴 후 매수죄는 사전 약속이 필요하지도 않다. ▷곽 교육감은 박명기 서울교대 교수에게 준 2억 원은 후보 단일화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궁박한 생활을 보다 못해 선의(善意)로 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5일 곽 교육감 소환을 앞두고 검찰은 이 돈의 대가성을 입증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검사든 판사든 곽 교육감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결국 돈이 오간 정황을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수뢰죄에서도 대가성이 있었다고 순순히 대답하는 피의자는 거의 없다. 수뢰죄에 대한 대법원 판례를 보면 대가성은 쌍방간에 특수한 사적 친분관계가 있는지 여부, 금품의 다과, 금품을 받은 경위와 시기 등 제반 사정이 그 판정 기준이 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요즘 검찰은 수사력이 약해져 잡은 고기도 놓친다는 말이 나온다. 부산저축은행 수사는 고객 예금 수조 원을 흥청망청 쓴 사건임에도 배후의 정관계 인물 하나 밝혀내지 못했다. 퇴출을 막기 위해 로비자금을 뿌린 혐의를 받고 있는 박태규 씨가 뒤늦게 입국해 수감됐지만 수사 진척 여부는 아직 미지수다. 박 씨는 로비자금 자체를 받은 적이 없다고 버티고 있는데 로비스트의 입 하나에만 매달리는 수사가 보기 안쓰럽다. 돈 받은 사람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모처럼 대검 중앙수사부가 나선 수사가 이번에도 건지는 게 없으면 검찰의 체면이 구겨질 것이다. 국회는 중수부를 없애겠다고 으르렁거렸다. 검찰총장은 그동안 중수부 해체 압력을 의식해 한화 비자금 수사처럼 중수부가 맡아야 할 수사도 지검으로 내려보냈다. 중수부장 중에는 수사를 한 건도 하지 않은 채 개점휴업으로 임기를 마친 사람이 적지 않다. 중수부 인력 60여 명은 그저 지켜만 보고, 지검들이 조직도 적고 경험도 일천한 상태에서 힘에 부친 수사를 하다 보면 서부지검의 한화 수사처럼 낭패를 보기 쉽다. 선거와 시위 범죄를 다루는 공안부, 권력층 비리를 다루는 특수부는 일선 검찰에서 가장 중요한 부서이지만 정권 교체에 따라 부침을 많이 겪었다. 공안통이나 특수통으로 기억되겠다는 검사는 드물어지고 공안부와 특수부를 경력관리용으로 1, 2년 거쳐 가는 부서로 여기는 검사가 많다. 검찰총장이 새로 임명되면 동기가 일제히 사퇴하는 낡은 관행도 검찰 간부의 연령 저하와 경험 부족을 초래하면서 수사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최근 52세의 한상대 검찰총장이 임명되자 사법연수원 동기 검사장 5명이 모두 옷을 벗었다. 검사장급이 20년 이상 검찰에 근무하면서 쌓은 수사 노하우를 한창 일할 나이에 사장(死藏)시키는 것은 수사력의 큰 손실이다. 수사 환경도 예전과 다르다. 법원이 깐깐해져 검찰은 구속영장을 발부받기도 어렵다. 공판중심주의로 법정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 재판에서 보듯이 검찰에서 돈을 줬다는 진술을 한 피의자가 법정에서는 밥 먹듯 뒤집어버린다. 법관은 ‘9명의 죄인을 놓치더라도 1명의 무고한 죄인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져야 할지 모르지만 검사는 ‘죄인은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처벌받게 해야 한다’는 신조를 관철해야 하지 않을까. 다른 말이 필요 없다. 검찰은 오로지 수사로 말해야 한다. 곽노현 사건 역시 그렇다.}

아브라함 카위퍼는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 목사였다. 그는 영혼 구원에만 관심을 갖는 교회를 비판하고 1879년 기독교 정당인 반혁명당(ARP)을 창당했다. ARP가 한 원류를 형성한 기독민주당(CDA)은 지금도 집권 정당이다. 독일 이탈리아에도 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주의 정당의 도전에 대응해 기독교 정당이 등장했다. 독일의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 연합은 현재도 독일 최대 정당이고, 이탈리아의 기독민주당(CD)은 1994년까지 최대 정당이었다. ▷한국에서 내년 총선을 앞두고 개신교 정당을 창당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개신교가 장로 출신 대통령 정권에서도 불교 천주교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는 피해의식에 한나라당이 보수정당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좌로 기울고 있다는 불만이 겹쳐 개신교 정당의 필요성이 논의되고 있다. ‘나라와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국민운동본부’(대표회장 최병두 목사)는 30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정당 발기인 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우리 헌법의 정교분리(政敎分離) 원칙이 종교 정당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내에서 종교 정당은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2002년 불교계로 자처한 호국당이 대선 후보까지 냈으나 이후 해산됐다. 통일교 평화통일가정당이 2008년 총선 때 거의 전국에서 후보를 냈지만 지지율 저조로 정당 등록이 취소됐다. 2007년 창당된 개신교의 ‘기독사랑실천당’이 현존하는 유일한 종교정당이지만 국회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불교계 창가학회가 세운 공명당(公明黨)이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과는 비교된다. ▷한국 개신교는 한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구조로 돼 있다. 불교 조계종은 총무원이 있어 종단을 대표한다. 천주교도 주교회의를 통해 교계 의사를 결집할 수 있다. 반면에 개신교는 진보와 보수가 한국교회협의회(NCCK)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으로 나뉜 데다 어느 쪽도 조계종 총무원과 천주교 주교회의에 상응하는 대표성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수쿠크법 제정 시도를 좌절시킨 데서 보듯이 개신교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개신교가 정당을 만들면 타 종교도 정당을 만든다고 나설 수 있다. 종교 간 갈등이 다시 불거질까 걱정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지난해 6·2지방선거에서 같은 좌파 진영 교육감 후보로 나섰다가 중도 사퇴한 박명기 서울교대 교수에게 “선의(善意)로 2억 원을 줬다”고 밝혔다. 검찰이 박 교수가 돈을 받고 후보직을 사퇴한 혐의에 대해 영장을 청구한 사실이 알려진 후 침묵하다가 법원이 영장을 발부하자 뒤늦게 내놓은 해명이다. 선거에서 곽 교육감을 위해 후보를 사퇴한 사람에게 거금 2억 원을 주고도 선의로 줬다니 도무지 믿기 어렵다. 지난 선거에서 곽 교육감의 득표율은 34.3%였다. 2위를 차지한 우파 성향의 이원희 후보에게 1.1%포인트 차로 이겼다. 다른 우파 성향의 김영숙 남승희 후보는 합쳐 24%를 득표했다. 우파 후보에게 표를 던진 서울시 유권자들이 전체의 과반을 넘는 57.2%를 차지했다. 우파 후보들은 분열되고 좌파 후보들이 단일화를 해서 곽 교육감이 이길 수 있었다. 직전 교육감 선거에도 출마했던 박 교수는 지명도에서 곽 교육감에게 뒤지지 않았으나 선거를 보름 앞두고 갑자기 후보를 사퇴해 배경을 놓고 의혹이 일었다. 곽 교육감은 “취임 이후 선거와 무관하게 그분의 딱한 사정을 보고 선의의 지원을 했다”고 말했다. 뇌물죄에도 사후(事後) 뇌물이라는 것이 있다. 법대 교수 출신으로 법을 잘 아는 곽 교육감이 선거가 끝난 ‘사후에’ 500만 원이나 1000만 원도 아닌 2억 원을 주었는데 누가 이것을 후보 사퇴의 대가가 아니고 순수한 선의라고 보겠는가. 후보자 매수는 민의를 왜곡하는 선거범죄다. 교육감은 미래세대의 교육을 맡고 있는 자리다. 후보자 매수 의혹을 받고 있는 교육감이 학생들에게 ‘올바르게 살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곽 교육감은 취임 후 교육비리와 부패 척결을 내세웠다. 뒷전으로 후보자를 매수하고 입으로 교육비리와 부패 근절을 외쳤다면 위선이다. 곽 교육감의 남은 임기는 약 2년 10개월이다. 그가 ‘선의’ 운운한 것은 법정투쟁을 벌여 대법원 확정 판결까지 가서 임기를 다 채우겠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곽 교육감은 즉각 사퇴한 뒤 수사를 받는 것이 올바른 도리다. 돈 준 사실을 시인하면서 검찰 수사에 대해 정치보복 운운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검찰이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영장 청구 등 공개수사를 하지 않고 기다린 것은 이해할 만하다. 검찰은 공정한 법절차와 증거에 입각한 철저 수사로 정치보복 논란을 잠재워야 할 것이다.}

‘바더-마인호프 콤플렉스’라는 독일 영화가 있다. 1970년대 독일 사회를 뒤흔든 극좌 테러조직 적군파(RAF)를 다룬 2008년 영화다. 영화는 1967년 서베를린에서 팔레비 이란 국왕 방문 항의 시위에 참가한 젊은이가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이 젊은이가 당시 26세의 베를린자유대 학생 베노 오네조르크다. 그 이름을 다시 접한 것은 이듬해인 2009년이다. 오네조르크가 죽은 지 42년이 지나 총을 쏜 서독 경찰관 카를하인츠 쿠라스가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첩자였던 사실이 슈타지 문서를 통해 확인됐다고 독일 언론이 보도했다.서독 곳곳에 침투한 동독 간첩 동독 간첩의 총 한 방은 역사의 물꼬를 바꿔놓았다. ‘우파정부의 주구(走狗)인 경찰이 죄 없는 학생을 죽였다’고 해서 젊은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중 가장 과격한 조직이 안드레아스 바더라는 청년과 울리케 마인호프라는 여기자가 만든 적군파였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은 1967년부터의 독일 역사는 다시 쓰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독 간첩이 서독 곳곳에 침투한 사실은 ‘연방 슈타지 문서보관소’가 1990년 통독후 슈타지 문서를 조사한 후에야 밝혀졌다. 슈타지는 서독에 3만여 명의 고정 간첩을 두고 국회의원 각료 정보기관원은 물론 의원보좌관과 대학생까지 포섭했다. 1973년 빌리 브란트 총리의 수행비서 귄터 기욤이 슈타지 요원으로 드러난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검찰은 그제 왕재산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왕재산 서울지역책 이모 씨는 민주당 소속의 임채정 전 국회의장 비서관을 지내며 정치권 정보를 수입해 북한에 전달한 혐의를 받고 있다. 민주노동당에도 수사대상자가 여러 명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사회에서 간첩이란 단어를 진지하게 말해본 게 언제인지 떠올려보라. 가물가물할 것이다. 간첩단 사건은 1999년 ‘주사파 대부’ 김영환이 연루된 민족민주혁명당 사건 이후 12년 만에 처음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1992년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의 총책 황인오의 동생으로 역시 간첩죄 선고를 받은 황인욱은 비슷한 해 같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녀 개인적으로 잊어버릴 수 없다. 1996년 강릉 북한 잠수함 침투 사건을 취재하러 다닐 때 만난 등명낙가사 주지 스님의 증언을 아직 잊지 못한다. 그는 “잠수함이 좌초한 지점 해안 절벽에서 한밤중 바다 쪽으로 전조등을 비춰주던 자동차를 봤다”며 “고정간첩이 한 짓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1997년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 씨가 간첩으로 추정되는 괴한에게 살해된 후 경찰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생전의 이 씨와 통화를 한 적이 한 번 있었는데 그 통화기록이 남아 경찰이 탐문수사 차원에서 전화를 해온 것이다. 창작속에 미화되고 희화화된 간첩 1999년은 영화 ‘쉬리’와 ‘간첩 리철진’이 나온 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간첩(정확히는 간첩수사)만 사라진 게 아니라 간첩의 이미지가 바뀌었다. 간첩은 ‘쉬리’의 ‘이방희’(김윤진 분)처럼 아름답거나 ‘리철진(유오성 분)’처럼 우스꽝스러워졌다. 문학에서 간첩은 우리 사회의 일원이 됐다. 2006년 김영하의 소설 ‘빛의 제국’에서 평양외국어대 영어과 출신 주인공 김기영은 1984년 남파된 이후 민족해방(NL)계 운동권 여학생과 결혼해 영화수입업자를 하며 여느 386세대와 다르지 않게 살아간다. 편안해진 간첩의 이미지는 안방까지 들어왔다. 현재 방영되는 TV 드라마 ‘스파이 명월’의 여간첩 한명월(한예슬 분)은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창작은 자유다. 그럼에도 미화되고 희화화된 간첩의 이미지는 현실의 간첩을 별것 아닌 것으로 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창작과 현실을 혼동하지 않도록 환기시키는 역할을 누군가는 해야 한다. 그런 역할을 하라고 있는 것이 국정원이고 검찰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나가수(나는 가수다)’를 모르면 요즘 화제에 끼어들기 힘들다. 자우림의 김윤아가 나가수에 나와 부른 ‘뜨거운 안녕’이 가슴을 찡하게 때리는 바람에 누가 불러도 진부하게 들렸던 그 노래가 새롭게 다가왔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김윤아는 경연에서 꼴찌를 하고 말았다. MBC 예능프로그램 ‘우리들의 일밤’의 나가수 코너 연출자 신정수 PD(41)를 만나기로 약속하고 나서 몰아치기로 나가수 전편을 훑어봤다. 임재범 같은 명가수가 대중이 환호하는 무대의 뒤편에 서 있었다는 것이 의외라는 느낌이 들었다. 신 PD는 나가수는 한마디로 ‘가수의 재발견’이라고 정의했다. 뮤지션 아티스트 같은 멋진 말로 포장된 가수가 아니라 노래만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가수 그 자체의 발견이라는 설명이다.왜 나가수 열풍인가? 본보에 ‘가인열전’을 연재 중인 대중음악평론가 강헌 씨는 “시청자들이 음악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다시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요인이 있다. 나가수는 ‘슈퍼스타 K’ ‘위대한 탄생’ 같은 신인들의 서바이벌 게임과는 달리 프로 가수들의 생존을 위한 사투다.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 나와 떨어지는 것과는 긴장감의 차원이 다르다. 가수 중에서도 노래를 잘한다는 가수들이 탈락자가 되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해 노래를 부르니 감동을 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그렇다 하더라도 음악은 스포츠와 달리 등수가 중요하지 않고 개성이 중요한데 왜 가수들이 이런 경연에 응할까. 강 씨는 “2000년 이후 대중음악이 한류다 뭐다 하면서 아이돌 가수 중심으로 흘러가면서 음반이나 콘서트 문화가 사라졌고 실력 있는 가수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다”며 “이런 위기감이 가수들을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응하게 한 배경”이라고 분석했다. 그에게 나가수 최고의 노래를 하나 꼽아달라니까 주저 없이 박정현이 부른 조용필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를 꼽으면서 “두 달이 지나갔는데도 아직도 노랫소리가 귀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나가수 제작으로 1주일에 3, 4일씩 밤을 새운다는 신 PD를 MBC 일산 드림센터의 제작현장에서 만났다.―가수를 탈락시킨다는 구상이 쉽지 않았을 텐데….“나가수의 포맷은 전임자인 김영희 PD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다. 그는 코미디 PD를 주로 했기 때문에 가요계를 잘 몰랐다. 오히려 가요계를 잘 몰랐기 때문에 가수들을 경쟁시킨다는 구상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세시봉 콘서트’를 기획한 신 PD는 음악 PD로 쭉 일했다.“음악 PD라면 가수를 탈락시키는 구상을 절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 PD가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상상력의 확장이 가능했다.” ―가수들이 섭외에 잘 응했나.“물론 쉽지 않았다. 검투사들의 실력이 출중해야 명승부가 벌어지고 관객도 흥미를 느낀다. 정말 노래를 잘하는 가수들이 나와야 나가수가 성공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한 사람을 뚫자고 결정했다. 그 사람이 이소라였다. 이소라가 나오면 다른 가수들도 나올 마음이 들 것이라고 기대했다. 많은 분이 거절했다. 노래에 대한 철학이 달랐다. YB밴드의 윤도현도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했지만 ‘어느 방송에서 록밴드가 가족들이 시청하는 시간대에 나와 연주할 수 있느냐’며 설득했다.”나가수는 올 3월 가수 7명 중 청중 평가단으로부터 가장 낮은 평가를 받은 1명을 탈락시킨다는 원칙을 깨고 김건모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줘 시청자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김 PD가 물러나고 나가수가 한 달가량 중단됐다. ―휴지기 한 달을 사이에 두고 나가수는 어떻게 달라졌나.“그 사건이 없었으면 나가수가 지금과 같이 긴장을 계속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누리꾼을 중심으로 한 시청자들의 반발이 제작진과 가수들을 긴장시켰다. 제작진은 어차피 예능 프로그램인데 규칙을 조금 바꾸면 어떨까 하고 안이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경쟁의 생명은 공정(公正)이었다.”신 PD는 “녹화 현장에 있어 보지 않으면 잘 모르겠지만”이라고 운을 뗀 뒤 “경연에서 누군가가 탈락했을 때 녹화 현장에서는 가수와 제작진과 청중 사이에 정서적으로 견디기 힘든 분위기가 흐른다”고 전했다. 강 씨는 “제작진은 김건모가 꼴찌를 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가수와의 관계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 김건모를 재도전시키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혔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가수에서 제작진의 ‘쿠데타’가 실패하고 시청자 ‘반란’이 승리하고 난 뒤 임재범이 새로 합류했고 본격적인 나가수 열풍이 시작됐다. 우리나라는 방송 포맷을 외국에서 주로 수입할 뿐 수출하는 경우가 드물다.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나가수 포맷에 대해서는 중국과 일본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신 PD의 전언이다. 정치권에서는 나가수식 경쟁을 활용해보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 공천개혁위원장인 나경원 최고위원은 “내년 19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후보 중 3분의 1은 국민 추천을 거쳐 나가수처럼 서바이벌 투표 방식으로 선발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얼마나 실현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임재범 김범수 박정현 같은 숨은 인재들이 발탁된다면 한국 정치의 미래가 밝아질 것이다.―신 PD가 와서 새로 바뀐 것은 무엇인가.“청중 평가단 500명은 본래 1인 1표를 행사했는데 1위 한 사람에게 표가 너무 많이 쏠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2위부터는 남아 있는 상대적으로 적은 표가 돌아가고 순위가 낮을수록 변별력이 떨어졌다. 그래서 나가수를 새로 시작했을 때 1인 1표를 1인 3표로 늘렸다. 새로 음악감독을 둔 것도 변화다. 이후로 음악의 사운드가 좋아졌다. 그리고 임재범이 나왔다.”―임재범은 어떻게 나오게 됐나.“임재범이야말로 나가수에 가장 적합한 출연자였다. 가수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져 있는데 일반인은 잘 몰랐다는 점에서 그랬다. 그는 먹고살기 힘들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고 부인의 암 치료로 고생했다. 성격도 강해 섭외가 쉽지 않았다. 나가수 시작 때부터 그를 접촉했으나 탈락자가 몇 명 나온 다음에 두고 보자는 얘기만 들었다. 나가수가 새로 시작됐을 때 그가 절실히 필요했고 집요하게 설득해 승낙을 얻었다.”신 PD는 1970년생에 1989학번이다. 연세대 행정학과를 다녔으나 행정학은 취미였고 가요가 사실상 전공이었다. 그는 팝송에 미친 마지막 세대이자 한국 가요에 빠져든 첫 세대에 속한다. 팝송만 듣다가 록밴드 ‘들국화’의 곡을 듣고 나서 ‘한국에도 들을 만한 노래가 있구나’라고 생각했단다. 파고다극장의 시나위 부활 등 헤비메탈 음악을 들으러 다녔다. 그때 임재범이란 사람을 알게 됐다. 이때부터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한국 음악은 뭐가 있나 살펴보기 시작하면서 송창식 등 통기타 세대의 음악을 접했다. 이 모든 것이 세시봉 콘서트를 기획하고 김건모 파동 이후 위기의 나가수를 맡아 성공시킨 밑거름이 됐다.―왜 전문가가 아니라 청중이 평가하는가.“대중가요니까 전문가의 평가보다 대중의 평가가 정확하다고 봤다. 다만 산술적 정확성은 아니고 경향적 정확성이라고 하겠다.”나가수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다는 열혈 팬이 꽤 많다. 안병균 씨(63·기업인)도 그런 사람이다. 안 씨는 “김범수는 남진의 ‘저 푸른 초원 위에’를 남진보다 더 잘 불렀고, 김윤아는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송창식보다 더 잘 부르더라”라고 평가했다. 그는 그 옛적 ‘초원의 집’을 운영하며 이주일 씨 등 코미디언과 가수를 키워 대중문화를 보는 안목이 남다른 편이다. “김건모는 실력은 있지만 성의 없이 노래해 탈락했다” “임재범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온 힘을 다해 노래해 김건모와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앞으로 송창식 같은 가수도 데려와야 한다”는 식으로 끝없이 얘기를 이어갔다.―청중 평가단은 어떻게 구성되며, 공정하다고 생각하는가.“청중 평가단은 신청자 중에서 연령대별로 고루 뽑는다. 현재도 청중 평가단이 되겠다고 40만 명이 대기하고 있다. 신청했다고 무조건 뽑는 것은 아니다. 전화 통화를 해 음악에 대한 관심도를 점검한 뒤 평가할 만한 소양이 있다 싶어야 뽑는다. 청중 평가단은 원칙적으로 한 번의 경연만 평가한다. 다만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20% 정도는 남겨두고 한 번에 80%를 교체하는 방식으로 청중 평가단을 바꾼다.”―김윤아가 혼자만 잘난 체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얘기가 인터넷에서 와글와글 하던데 노래 외적인 판단도 청중 평가에 들어갈 소지가 있나.“청중 평가단이 보는 것은 오직 노래 부르는 장면뿐이다. 대기실에서 출연자들끼리 주고받는 대화나 행동은 TV를 통해서만 방영된다. 따라서 김윤아가 대기실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청중 평가단은 알지 못한다. 다만 김윤아가 첫 번째 경연에서 ‘고래사냥’을 불러 1위를 차지했다. 이런 경우 지난번에 1등을 했으니까 ‘뜨거운 안녕’에는 좀 낮은 등수를 줘도 되지 않겠느냐는 분위기가 청중 사이에 형성될 수 있다.”― 나가수는 주로 누가 보나.“40대 이상 중장년층이 많이 본다. 나가수 출연 가수들이 지금은 TV 밖에서도 많은 공연을 한다. 중장년층의 대중음악 수요가 그만큼 많다는 증거다. 나가수가 이런 시장을 만들었다고 자부한다.”―나가수는 따지고 보면 신자유주의식 무한 경쟁이 아닌가.“경쟁이 꼭 신자유주의적인 경쟁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임재범 김범수 박정현 등 승자만이 좋은 평판을 얻고 경제적 이익을 봤다고 볼 수 없다. 나가수의 탈락자들은 루저(loser)가 아니다. 끝까지 살아남든 중도에 탈락하든 사력을 다해 열창하는 모습을 보면서 시청자는 그동안 몰랐던 그들의 진짜 실력을 알게 됐고 그들에게 보상하고 있다. 실제 김연우나 정엽 같은 가수들은 탈락했지만 그들의 콘서트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든다. 탈락 이후 이들은 음원 판매 순위에서도 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다.”나가수가 ‘모두 승자가 되는 경쟁이 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사회문화에 미친 영향이 크다고 할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이명박 대통령은 다음 달 25일 퇴임하는 이용훈 대법원장의 후임으로 양승태 전 대법관을 지명했다. 새 대법원장은 이명박 정권에서 임명되지만 임기가 6년이기 때문에 다음 대선에서 어느 정당이 집권하든 새 대통령과 4년 6개월을 함께 일한다. 차기 대법원장은 이 대법원장이 이끈 사법부 6년의 혼선을 바로잡으면서 사법부의 좌표를 바로잡을 책무를 지니고 있다. 양 대법원장 후보자가 이런 자질을 갖춘 인물이라는 평가와 함께 국회의 인준을 받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 대법원장 재임 시 사법부 판결 중에는 판사가 ‘법관의 양심에 따른 재판’을 과잉 해석해 개인적인 소신이나 편견에 따른 판결로 논란을 부른 사례가 많았다. 일부 판사가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의 국회 폭력, 전교조 교사의 ‘빨치산 교육’, MBC ‘PD수첩’의 광우병 왜곡보도에 무죄판결을 내리면서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커졌다. 이른바 진보 성향의 판사모임으로 사조직 논란을 부른 ‘우리법연구회’에 대한 이 대법원장의 미온적 대처도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켰다. 이 대법원장은 2005년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법원에 우리법연구회 같은 단체가 있어선 안 된다”고 답변해놓고 정작 취임한 뒤에는 “우리법연구회를 해체시킬 법적 근거가 없다”는 식으로 빠져나갔다. 원론적으로는 누가 대법원장이 되느냐에 따라 판사 개개인의 재판 성향이 바뀌는 것은 법치주의 정신에 맞지 않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달리 정치적 성향이 판결에 개입하는 헌법재판소가 따로 있다. 헌법이 대통령의 임기를 5년, 대법원장의 임기를 6년으로 정해 그 임기가 서로 어긋나게 해놓은 것도 대법원장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한 원로 헌법학 교수는 “헌법적 법률적 직업적 양심이 아니라 개인적 양심을 내세우는 일부 판사들에게 휘둘린 것이 이 대법원장이 이끈 사법부의 가장 큰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판결은 판사가 독립해 하는 것이므로 대법원장이 개별 사건 판결에 일일이 책임질 수는 없다. 그러나 인사권을 바탕으로 법원의 전체 분위기를 다잡아가는 것은 대법원장의 중요한 역할이다. 대법원장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어야 하고 도덕적으로도 결함이 없어야 한다. 대법원장과 사법부는 인권 보장과 헌법적 가치의 최후 보루다. 대법원장 후보자에 대해서는 사법부를 바로 세울 도덕성과 역량, 가치관을 갖추고 있는지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베레(b´eret)는 프랑스어다. 베레는 본래 프랑스와 스페인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피레네 산맥의 양치기들이 쓰던 모자였다. 산악지대의 추운 바람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해주는 실용적인 모자였다. 이 모자를 주로 쓰는 바스크족은 검은 베레를 선호한다. 지금도 유럽 도시에서 바스크 국기를 내건 식당에 들어가면 베레모를 쓰고 서빙하는 바스크족 청년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베레모는 후에 멋쟁이들의 패션 아이템이 됐다. 오늘날의 스타 못지않게 인기를 누리고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던 19세기 후반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베레모를 쓴 초상이 유명하다. 1968년 미국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원제 ‘보니 앤드 클라이드’)에서 여주인공 보니 역을 맡은 페이 더너웨이가 중간 길이 스커트에 베레모를 쓰고 나와 이른바 ‘보니룩(bonnie look)’을 유행시켰다. 붉은 별이 그려진 검은 베레모를 쓴 쿠바의 혁명운동가 체 게바라의 이미지는 1960년대 남미 혁명운동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영미권 군대에서는 ‘그린 베레(green beret)’가 특수부대의 상징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특수훈련 과정을 마친 영국군이 녹색 베레모를 착용해 ‘그린베레’로 불렸다. 영국군과 함께 작전을 벌이던 미군 특수부대원들이 영국군을 보고 부러웠던지 군 당국의 금지 규정을 어겨가며 베레모를 쓰기 시작했다. 미군의 베레모 착용은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뒤늦게 추인을 받았다. 우리나라 특전사는 ‘검은 베레’, 유엔평화유지군은 ‘블루 베레’를 착용한다. ▷육군 전체 52만 명이 올해 국군의 날(10월 1일)부터 전투모 대신 베레모를 쓸 예정이었으나 모자 생산이 따라가지 못해 차질을 빚고 있다. 주먹구구식 납품 계약 때문에 40만 개 이상 베레모의 납기를 맞추지 못할 상황이다. 군 당국의 일처리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육군은 지난해 말 “강인한 이미지를 주고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야구모자 모양의 기존 전투모 대신 베레모를 도입하기로 했다. 특전사의 검은 베레와 구별하기 위해 색깔은 흑록색으로 정해졌다. 모자만 바뀔 것이 아니라 육군 전체의 전투력이 특전사 수준으로 올라갔으면 좋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미국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1917∼1963)는 숱한 명연설을 남겼다. 그의 연설은 쉽고 편하게 들을 수 있으면서도 감동적이었다. “이제 횃불은 젊은 세대에 넘어왔습니다. 국민 여러분,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미국 역대 대통령 연설 중 최고로 꼽히는 케네디의 1961년 대통령 취임 연설문의 한 대목이다. ▷미국 언론인이자 변호사인 리처드 토펠은 케네디 연설에 대한 치밀한 취재와 분석 끝에 “취임 연설문 51개 문장 가운데 케네디가 직접 작성한 것은 9개 문장뿐”이라고 주장했다. 케네디 연설문의 많은 부분은 그의 특별보좌관이던 시어도어 소런슨(작년 10월 사망)이 썼다. ‘조국이 당신을 위해…’ 부분은 케네디의 학창 시절 교장 선생이 자주 말했던 “학교가 너희를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지 묻지 말고 너희가 학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라”를 흉내 낸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소런슨이 썼건, 교장 훈화를 패러디했건 그 명연설은 케네디의 것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그제 이명박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사 가운데 ‘공생발전’이라는 새 화두는 박형준 대통령사회특보가 주로 개발한 개념임을 청와대 측과 박 특보 본인이 여러 경로를 통해 밝혔다. 국민은 대통령 연설을 듣자마자 그것이 참모의 아이디어임을 알게 된 것이다. 박 특보는 언론을 통해 “생태계(ecosystem)란 개념에 발전(development)을 접목했다”며 공생발전의 개념과 어원을 복잡하게 설명했다. 이 대통령과 박 특보가 졸업한 대학의 어느 원로 교수는 이번 연설문에 대해 “논문도 아니고, 대통령 연설로는 곰삭지 않았다”고 쓴소리를 했다. ▷대통령의 연설은 연설 그 자체로 완결성을 보여야지, 비서들이 나와서 긴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이라면 잘된 연설이라고 할 수 없다. 대통령 연설문 기안자는 대필작가(ghostwriter)와 같다. 대통령의 연설문을 대통령이 직접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을 국민도 잘 안다. 그러나 연설문 작성자는 유령(ghost)처럼 뒤에 있어야 한다. 대통령 연설이 끝나자마자 연설문 작성자가 등장하니 대통령도, 참모도 가벼워 보인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광복절인 어제 서울광장과 광화문 일대에는 온종일 좌우의 깃발이 나부끼고 함성이 울렸다. 아침 일찍부터 광화문으로 향하는 도로 주변에는 노동단체들의 이름이 쓰인 차량이 즐비했다. 민주노총 소속 등 노동자 3000여 명은 오전 11시 ‘광복 66년 한반도 자주 평화 통일을 위한 8·15 범국민대회’를 열고 ‘대북(對北) 적대정책 폐기’를 외쳤다. 민노당 이정희, 진보신당 조승수, 국민참여당 유시민 대표도 참석했다. 태평로 왕복 12차로를 점거하고 거리행진에 나선 시위대를 경찰은 차벽을 설치하고 막았다. 시청과 광화문 일대 교통이 한때 마비돼 모처럼 휴일 도심 나들이에 나선 시민들이 불편을 겪었다. 을지로 무교로 소공로 일대에는 전국 각지에서 고엽제전우회 회원을 태운 차량이 모여들었다. 오후 2시부터 서울광장에서는 ‘종북세력 척결 및 교육 바로세우기 8·15 국민대회’가 열렸다. ‘6·25 국가유공자회’ ‘전몰군경유족회’ ‘학도의용군회’의 깃발이 나부끼고 참가자들은 “종북세력 박살내자”고 외쳤다. 오후 4시가 되자 꽹과리와 북소리에 맞춰 대학생들이 청계광장 주변으로 모였다. 전국등록금네트워크와 한국대학생연합이 주도한 ‘8·15 등록금 해방 결의대회’가 열렸다. 광복과 등록금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학생들은 ‘반값 등록금’ 실현을 촉구하는 대회의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청계천, 광화문 광장, 경복궁을 찾은 시민과 이쪽저쪽 시위대가 뒤섞여 광화문 일대는 종일 북새통을 이뤘다. 영문 모르는 외국인 관광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독도는 한국땅’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검도 시범을 보이는 청년들도 있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동상을 세우자’는 취지의 서명운동을 벌이는 일행도 있었다. 그들은 광복과 건국의 의미를 시민에게 전하려고 애썼으나 인파에 묻혀버렸다. 이명박 대통령은 어제 오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공생발전’을 강조했지만 식장 밖 풍경은 공생과 거리가 있었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집권을 전후해 시작된 이른바 진보 보수 간의 광복절 거리집회 대결 양상은 정권이 바뀌어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 두 세력 사이에 충돌이 없었으니 다행이라고 자위하고 말 것인가. 66년 전 오늘 우리나라는 일제의 강점에서 벗어나고, 3년 뒤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해 진정한 독립국가를 세웠다. 이것이 오늘의 자유와 번영을 이룬 바탕임을 되새기고 온 국민이 경축해야 할 날이 바로 광복절이다.}
이명박(MB) 대통령이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공정사회를 집권 후반기 화두로 내세운 지 1년이 됐다. 동아일보가 전문가들에게 의뢰해 공정사회 추진 80대 과제의 이행도를 점검한 결과 그 점수는 평균 C학점이었다. 이들은 “공정이란 문제의식을 갖고 사회를 바라보게 된 것은 달라진 풍경이지만 국민의 공감대 형성에는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이 대통령이 ‘공정사회’를 천명한 직후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와 이재훈 지식경제부 장관 후보자가 각각 위장전입과 부동산 투기 논란으로 물러났다.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딸 특채사건이 불거져 사퇴하고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가 전관예우 논란으로 낙마했다. 일각에서 공정사회가 인사의 도덕적 잣대를 높였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이 대통령의 인사를 지켜보면 꼭 그렇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위장전입과 부동산 투기 의혹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후보자도 많고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인사도 계속됐다. 정부는 전관예우 금지를 강화한 공직자윤리법 개정 같은 성과를 이뤘다고 자평한다. 그러나 공정사회가 추진되는 한가운데서도 공직 비리는 끊이지 않았다. 국토해양부 직원의 연찬회 향응 파문에 이어 지식경제부 공무원이 산하기관으로부터 ‘룸살롱 업무보고’를 받은 사실이 적발됐다. 빈부격차 해소, 학력 차별 개선 등 더욱 실감할 수 있는 분야에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더 공정해졌는지 의문이 든다. 공정사회는 좋은 말이지만 너무 거창한 구호다. 명백하게 불공정한 것은 굳이 공정사회를 거론하지 않아도 걸러진다. 현실에는 무엇이 공정한지 애매한 게 많다. 단지 공정이란 말로는 기회의 공정을 말하는지, 결과의 공정까지 포함하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현대사회에는 정부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정부가 공정사회를 밀어붙여도 기업이나 시민사회가 앞장서야만 효과가 날 수 있는 분야가 많다. 정부는 얼마나 기업과 시민사회의 공감을 끌어냈는지 반성해봐야 한다. 공정사회가 이 정부의 국정철학을 일관성 있게 꿰는 화두인지 애초부터 회의가 있었다. 이 대통령 취임 초 친(親)기업을 외치다가 공정사회 깃발을 들면서 여당에서도 대기업 때리기가 시작됐다. 대기업에 중소기업과의 동반성장을 강요하기보다는 협력을 끌어내야 한다. 공정사회 구호가 혼탁한 세상사를 다 집어넣고 돌려 깨끗하게 빨아낼 수 있는 드럼세탁기는 아니다. 구체적 정책과 실적으로 승부하는 정부가 돼야 한다.}

지금은 첨단 유행의 거리로 통하는 영국 런던 노팅힐은 1950년대 자메이카 등 카리브 해 국가에서 온 흑인 이주민이 최초로 정착한 곳이다. 영국 현대사에서 최초의 인종 폭동도 1958년 노팅힐에서 일어났다. ‘테디 보이스(Teddy Boys)’로 불리는 당시 신세대 백인 청년들과 흑인 이주민 청년들이 충돌했다. 그 이듬해부터 시작된 노팅힐 카니발은 이런 인종 충돌을 문화적으로 승화시킨 노력의 결과로 1999년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영화 ‘노팅힐’의 배경이 됐다. ▷인종 폭동은 노팅힐 이후 남(南)런던의 브릭스턴 등으로 옮겨가 1981년, 1985년, 1995년에 일어났다. 브릭스턴 역시 카리브 해 출신 흑인들이 정착한 곳이다. 세 차례 모두 백인 경찰의 범죄 혐의자 추적에서 발생한 인명 피해가 원인이 됐다. 이번 런던 폭동은 1995년 폭동 이후 가장 규모가 크다. 폭동이 시작된 북(北)런던의 토트넘 역시 흑인이 많이 산다. 범죄 혐의를 받던 흑인 청년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게 원인이라는 점도 비슷하다. ▷‘톨레랑스(관용)의 나라’ 프랑스의 이미지를 구긴 2005년 파리 교외 폭동 역시 북아프리카계 소년이 경찰 추격을 받다가 사망한 사건이 원인이 됐다. 영국과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이후 1970년대 오일쇼크 때까지 ‘영광의 30년’이라는 경제호황기에 과거 식민 지배를 했던 나라들로부터 이주민을 적극 받아들였다. 독일도 ‘손님노동자(Gastarbeiter)’라고 해서 터키 등으로부터 이주민을 받아들였다. 경제적 여유가 없어진 세 나라는 지금 이주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런던 폭동은 버밍엄 맨체스터 리버풀 등 다른 대도시로 옮겨가는 양상이다. 아시아(주로 파키스탄 지칭)계 이주민도 가담하고 있다. 영국 백인 극우세력은 흑인과 힘으로 맞설 만큼 완력도 세다. 노팅힐 폭동처럼 인종 충돌로 비화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온다. 한국도 경기 안산시 원곡동,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관악구 봉천동, 광진구 동일로 등에 이주민 근로자의 거리가 형성돼 있다. 노팅힐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배려와 지혜에 따라 폭동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고 카니발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음을 염두에 둬야 하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구로우파란 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구로구 주민에게 양해부터 구해야겠다. 사실 이 말은 실제 서울 구로구에 사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강남좌파의 대칭개념으로, 중산층 내에서 상대적으로 하위권 소득그룹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은평우파도, 관악우파도, 금천우파도, 강서우파도 구로우파와 비슷하다.민주당의 꼼수를 심판할 구로우파 구로구는 더 이상 예전의 구로구가 아니다. 구로의 이미지를 만든 구로공단은 정보기술(IT)기업이 상주하는 구로디지털단지로 변했다. 신도림역과 구로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섰다. 당연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면면도 바뀌었다. 강남좌파들처럼 유학 가거나 고시에 붙지는 못했지만 회사원으로 혹은 자영업 창업자로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구로우파의 생활이 이제는 넉넉해졌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40대 가장이 한 달에 세금 제하고 400만∼500만 원을 벌어도 저축을 하기 어려운 시대다. 그런 가정의 주부가 주민투표일을 정확히 기억했다가 어디 있는지 찾기도 힘든 주민투표장까지 찾아가 한 달에 5만∼6만 원짜리 공짜 급식을 거부하는 데 표를 던지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구로우파가 전면 무상급식에 반대표를 던진다면 그건 작은 기적이고 한국의 미래는 희망이 있다. 구로우파는 왜 자신에게 당장 이익이 될 수 있는 무상급식에 반대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민주당이 지난해 지방선거용으로 들고 나와 재미를 본 전면 무상급식 공약이 정치적 ‘꼼수’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3+1 복지공약’ 중 무상보육 무상의료 반값등록금과 달리 무상급식은 복지의 족보에도 없다. 유럽 복지국가의 전형인 프랑스 독일 영국에도 없고 복지 남발로 나라가 휘청거리는 ‘돼지들(PIGS)’ 국가, 즉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에도 없다. 전면 무상급식은 처음 도입한 곽노현 교육감만 생색을 낼 수 있고, 이후의 교육감에게는 그가 진보든 보수든 부담으로만 남는다. 해가 지나고 관심이 시들해지면 무상급식은 예산 증가가 식자재비 증가를 따라잡지 못해 반드시 음식의 질 저하가 일어난다. 아이들은 건강권을 빼앗길 것이다. 강남좌파처럼 이 구실 저 구실 만들어 병역을 면제받은 적도 없고, 강남우파처럼 부동산 투기를 위해 위장전입을 해본 적도 없는 구로우파야말로 이런 꼼수를 심판해야 할 세력이다. 전면 무상급식은 의무교육의 일부가 아니다. 의무교육을 가장 먼저 실시한 프랑스 독일 영국에서 지금까지 전면 무상급식을 실시해본 적이 없다. 영국이 보어전쟁 때 영양 상태가 부실한 신병(新兵)이 많은 것을 보고 1906년 무상급식을 도입했지만 의무교육 차원에서 그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면 무상급식을 한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고 영양부족이 우려되는 아이들에게만 제공하면 충분한 것으로 여겼다. 의무교육의 역사도 살펴보지 않고 ‘무상급식은 의무교육’이라는 거짓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것이 이 나라 지식사회의 수준이라면 선진국이 되기도 어렵다.아이들 점심 값 세금으로 청구될뿐 스웨덴 등 일부 북유럽 국가에서 전면 급식이란 게 있기는 하다. 스웨덴은 사회민주당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버리고 개량주의로 전환해 1930년대부터 집권했지만 집산주의 이념을 많이 간직한 나라다. 여성의 취업률을 획기적으로 높여 일하게 하는 대신 아이들의 급식은 나라가 책임지는, 공산주의와 유사한 노동복지정책을 쓴 것은 그런 연유다. 스웨덴의 전면 급식은 주부들이 일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지, 주부의 도시락 싸주는 수고만 덜어주려는 게 아니다. 세계에서 세율이 가장 높은 나라 중의 하나인 스웨덴에서 급식비는 세금에서 충당되니까 정확히는 무상도 아니다. 급식은 전면적이 되는 순간 더는 무상일 수 없다. 고지서가 모든 사람에게 세금으로 청구될 뿐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남성 성기 사진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던 박경신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심의위원(고려대 교수)이 이번에는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가 여성 성기를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 ‘세상의 근원’을 올리고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고 있다. 박 위원이 비판받는 것은 방통심의위원 9명 가운데 박 위원을 제외한 8명이 음란물 판정을 내리고 삭제 조치를 취한 사진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행동 탓이다. 그는 표현의 자유에 관련된 문제인 것처럼 교묘히 논점을 흐리고 있다. ▷‘레드 헤링(red herring)’이란 말에는 ‘훈제 청어’란 뜻 외에 ‘사람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훈제 청어는 냄새가 독하다. 사냥감을 쫓던 개가 그 냄새를 맡으면 혼란을 일으켜 사냥감을 놓치기 쉬워 도망자들이 갖고 다니던 생선이었다. 이런 특성 때문에 레드 헤링은 논리학에서 엉뚱한 데로 사람의 관심을 돌려 논점을 흐리는 것을 지칭한다. ▷레드 헤링에는 다양한 수법이 있다. 인신공격이 그중 하나다. 가령 기독교 교리가 논점인데 갑자기 목사의 비윤리적 행동을 거론하며 기독교 교리를 부정하는 경우다. 박 위원은 병역 기피를 위해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고 스스로 밝힌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민주당이 방통심의위원에 추천한 것에 대해 말이 많다. 그렇다고 성기 사진 논란을 놓고 그의 이런 경력을 꺼내 비판한다면 그것은 인신공격성 레드 헤링에 해당한다. 미국 국적자가 한국의 민감한 이슈에 대해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할 권리가 있는지는 별론(別論)에 속한다. ▷너무 광범위해 논의해봐야 쉽게 결론이 나기 힘든 논점으로 바꿔치기하는 ‘허수아비(straw man) 공격의 오류’도 레드 헤링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맥주에 대한 법을 자유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중독성 물질에 대한 무제한적 접근을 허용하는 사회는 망한다’고 반박하는 식이다. 박 위원 문제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위원회에서 자신이 반대했던 사안이라도 다수 결정이 내려지면 승복해야 한다는 원칙을 위반한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그보다 훨씬 광범위한 문제다. 방통심의위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생각하면 일단 위원직부터 그만두고 내려와 논쟁을 시작하는 게 순서일 듯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나흘 만에 비가 그친 어제 전국 각지의 수해 현장에서 복구의 삽질이 분주했다. 서울 서초구 우면산 산사태 현장에는 군, 경찰, 소방관, 시구청 공무원 등 1만8000여 명이 구슬땀을 흘리며 복구 작업을 벌였다. 자원봉사자 3000여 명도 빵과 물을 들고 달려왔다. 다음 주초 다시 많은 비가 온다는 예보다. 지금은 만사 제쳐놓고 수해 복구와 재발 방지에 총력을 기울일 때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수해 책임을 둘러싼 정치공세를 펴느라 바쁘다. 민주당은 이번 수해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대권 욕심에 사로잡혀 전시(展示) 행정에 치중한 결과 빚어진 인재(人災)라고 비판했다. 전시 행정의 사례로 무상급식 주민투표도 거론했다.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쓰이는 돈보다는 전면 무상급식 지원에 드는 돈이 훨씬 많다. 최소한 토목 사업 예산을 깎아 복지 예산을 마련하자고 주장한 민주당이 할 소리는 아닌 듯하다. 민주당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자료를 근거로 오 시장이 수해방지 예산을 10분의 1 수준으로 줄여 화를 자초했다는 주장을 폈으나 서울시 수해방지 예산은 오히려 매년 증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해 채소값 폭등의 원인이 4대강 사업으로 인한 경작지 감소라고 주장했다가 4대강 주변 채소밭 면적이 미미하다는 자료가 나와 창피를 당한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다. 이번 수해는 100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에 따른 천재지변과 산사태 위험 간과 등 인재의 요소가 결합돼 있다. 그러나 원인과 책임 소재를 과학적 객관적으로 밝히는 일은 복구 후에 해도 늦지 않다. 오히려 숙려(熟慮) 기간을 가져야 좋은 대책이 나온다. 서울지하철이 과거 침수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지하철역 입구 계단을 50cm 높이고 ‘침수 피해 매뉴얼’을 만들어 반복 연습한 결과 이번 폭우에는 큰 침수 피해가 없었다. 산사태로 16명이 숨진 서울 서초구 주민이 진익철 구청장을 보는 눈이 곱지 않다. 진 구청장이 임기 내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우면산 생태공원 정비를 서두르면서 지난해 비 피해의 복구공사는 늑장을 부렸다는 것이다. 오 시장에 대해서도 재난안전을 위한 투자보다는 ‘디자인 서울’ ‘한강 르네상스’ 같은 도시의 외모 바꾸기에 치중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전시성 성과에 매달리느라 도시기능 정비를 소홀히 한 점이 없는지 되돌아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