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운

김상운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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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학술 분야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단행본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을 냈고,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을 제작했습니다.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sukim@donga.com

취재분야

2026-01-09~2026-02-08
칼럼51%
문학/출판17%
역사10%
미국/북미7%
국제일반3%
중동3%
국제정세3%
문화 일반3%
대통령3%
  • [책의 향기]마르틴 루터는 혁명을 꿈꾸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예수와 유대 열심당원을 문득 떠올렸다. 유대 열심당원은 로마 식민지로 전락한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기 위해 조직된 일종의 민족주의 단체다. 예수가 공생애를 막 끝내고 복음을 전파하던 초기에 이들은 예수를 민족의 해방자로 여기고 추종했다. 그러나 예수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설교에서 자신은 선민주의로 가득 찬 유대인들만을 구원하기 위해 온 게 아니며, 온 세상을 구원하려고 온 메시아임을 선포했다. 이 책 저자가 본 루터와 독일 민족의 관계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그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붙이는 순간, 루터의 종교와 사상, 신조는 이미 새로운 해석의 과정을 거치게 됐다는 것이다. 마치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95개조 반박문에 든 정신은 빠르게 독일의 그것으로 체화되기 시작했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이 이런 때 쓰일 수 있을까. 마르크 블로크와 더불어 1930년대 아날학파를 주도한 역사학자답게 저자는 당시 루터를 둘러싸고 있던 독일의 정치, 사회구조에 주목한다. 15, 16세기 독일은 인문주의로 무장한 이탈리아나 절대왕정의 영국과 달리 황제와 제후, 도시들로 분열돼 대립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런 연유로 로마교황에게 세금과 경제적 이익을 갈취당하면서도 제지할 수 없던 무기력함에 독일인들은 깊은 좌절에 빠졌다. 이때 교황과 제후들이 탐욕에 눈이 멀어 면벌부(면죄부) 판매에 나서자 결연히 비판한 루터의 행동은 독일인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재밌는 것은 정작 루터 자신은 교황이나 제후들에게 대적하려는 의도가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95개조 반박문이 루터 자신의 치열한 신앙적 번민과 성찰의 결과물이었을 뿐이었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1524년 교회와 제후들에게 맞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농민전쟁’ 당시 루터는 “농민들의 유혈 반란은 반드시 진압돼야 한다”며 철저히 제후들 편에 선다. 이를 두고 루터가 변절했다는 해석이 나왔지만 저자는 “당연한 귀결이자 오해”라고 말한다. 95개조 반박문을 내고 농민전쟁을 반대한 루터의 일관된 신조는 ‘내적 구원’이었지 ‘민중 해방’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예수를 유대 민족의 해방자로 오인한 열심당원이 오버랩되는 건 무리일까. 루터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비교적 중립적이다. 종교개혁의 영웅 혹은 민중의 변절자로 낙인찍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입체적으로 루터의 삶과 사상을 추적하고 있다. 특히 남은 기록이 많지 않은 1517년 이전 루터의 성장기를 조명하는 데 각별한 공을 들였다. 95개조 반박문은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감상적 격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세속 학문을 공부하던 청년 루터가 중병을 앓고 영혼의 안식을 얻으려 수도사가 됐지만 오히려 율법주의에 갇혀 괴로워한 모습을 의미 있게 포착했다. 이런 경험은 결국 95개조 반박문을 쓰게 된 중요한 바탕이 됐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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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수세식 공중화장실-화려한 정원… 절터 아래 펼쳐진 백제 왕궁

     9일 찾은 전북 익산시 ‘왕궁리 유적’은 이름에 걸맞은 위용을 자랑했다. 축구장 20배 크기(21만 m²)의 부지에 홀로 우뚝 솟은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이 멀리서도 보였다. 석탑 주변엔 1400년 전 궁궐터와 절터 흔적을 보여주는 초석과 적심(積心·기둥을 올리기 위해 밑바닥에 까는 돌)이 숱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곳을 발굴한 최맹식 국립문화재연구소장(60),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54), 전용호 학예연구사(43)와 함께 석탑과 금당, 강당을 거쳐 후원(後苑)으로 들어갔다. 사찰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옛 백제의 화려한 왕궁 정원이 펼쳐졌다. 얕은 구릉의 정원 터에서는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괴석(怪石)들이 눈길을 끌었다. 물길을 따라가자 직사각형 모양의 석축 수조가 나온다. 졸졸 흐르는 물이 괴석을 지나 수조에 넘쳐흐르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운치를 더했다. 최맹식은 “1992년 3월 왕궁리 유적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만 해도 왕궁 정원은 상상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백제시대 ‘수세식 공중화장실’ 발견 “곡식이 썩었더라도 이 정돈 아닐 텐데… 희한하게 구린 냄새가 참 심합니다.” 2003년 여름 발굴팀은 왕궁리 유적 북서쪽에서 길이 10.8m, 폭 1.8m, 깊이 3.4m의 기다란 구덩이를 발견했다. 구덩이 밑 유기물 층에서 나무막대와 씨앗, 방망이 등이 출토됐는데 유독 냄새가 심했다. 발굴팀은 곡식이나 과일을 저장한 구덩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자문위원으로 현장을 찾은 이홍종 고려대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유구 양상이 일본 고대 화장실 터와 비슷하다”며 유기물 층에서 흙을 채취해 생물학 분석을 의뢰했다. 조사 결과 다량의 기생충 알이 확인됐다. 삼국시대 공중화장실 유구가 국내에서 최초로 발굴된 것이다. 조사 결과 발을 올릴 수 있도록 구덩이에 나무기둥을 박고, 내부 벽을 점토로 발라 오물이 새지 않도록 했다는 게 확인됐다. 특히 왕궁리 화장실은 첨단(?) 수세식이었던 걸로 드러났다. 화장실 서쪽 벽에 수로를 뚫어 경사를 이용해 오물을 석축 배수로로 빠지도록 한 것. 이와 관련해 ‘자’로 추정된 나무막대기가 실은 대변을 본 뒤 뒤처리용이라는 사실이 이주헌에 의해 밝혀졌다. 이른바 ‘측주((치,칙)籌)’라고 불리는 나무막대기로 고대 중국과 일본에서도 사용된 도구였다. 왕궁리 화장실 터는 백제인들의 식생활을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다. 육식성 기생충인 조충이 검출되지 않은 반면, 채식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주로 감염되는 회충이나 편충이 집중적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2004∼2007년 발굴된 정원도 왕궁리 유적 중 백미로 꼽힌다. 특히 2006년 11월 발견된 어린석(魚鱗石) 2점은 이름처럼 물고기 비늘을 닮아 신비한 느낌마저 주는 조경석으로 유명하다. 어린석을 발굴한 전용호는 “무르고 연해서 처음에는 흙을 뭉친 걸로 착각했다”며 “각력암 계통인데 워낙 희귀해 백제 왕실이 중국에서 수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사찰 들어서기 전 백제 왕궁 있었다 왕궁리는 1989년부터 현재까지 28년 동안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우리나라 최장 발굴 유적이다. 그만큼 규모가 큰 데다 백제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도 지대하다. 오랫동안 발굴된 곳답게 유적에 대한 해석은 시대에 따라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발굴 초기엔 유일하게 남은 지상건조물인 오층석탑의 영향으로 사찰을 중심으로 조사가 진행됐다. 왕궁리가 백제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遷都)를 단행한 증거라는 시각도 있었지만 소수설에 불과했다. 오히려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익산에 세운 보덕국 터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왕궁리에 사찰이 들어서기 전 백제 왕궁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결정적인 계기는 1993년 8월 최맹식의 목탑 터 발견이었다. 그는 당시 오층석탑 동쪽, 지표로부터 1m 깊이에서 목탑을 올리기 위해 목봉(木棒)으로 땅을 다진 흔적을 찾아냈다. 이어 목탑 터 아래서 백제시대 왕궁 건물 터를 추가로 발견했다. 왕궁을 지은 뒤 어느 순간 이를 폐기하고 목탑을 올렸다가 또다시 이를 허물고 석탑을 지었다는 얘기였다. 최맹식은 “왕궁 건물 터를 파괴하고 중심부에 목탑과 금당이 들어선 걸 감안하면 통일신라 이후 사찰이 조성된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왕궁리에서 궁장(宮墻·궁궐을 둘러싼 담장)과 더불어 2000년대 이후 대형 정전(正殿) 터와 정원, 공방, 수세식 화장실 등이 잇달아 발굴됨에 따라 백제 왕궁이 조성된 사실은 확실히 굳어지게 됐다. 익산=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국의 인디아나 존스들  }

    • 2017-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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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집트 보물전’ 개막 3주만에 5만명 찾아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집트 보물전-이집트 미라 한국에 오다’가 8일 개막 3주 만에 관람객 5만 명을 넘어섰다. 중앙박물관은 “오늘 오전 5만 번째 관람객이 입장해 이날 정오까지 총 5만1886명이 이집트전을 찾았다”고 8일 밝혔다. 특히 새해 첫 주말인 7일 하루에만 개막 이후 최대인 6000여 명이 이 전시회를 관람했다. 세계 4대 문명인 이집트 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은 데다 방학을 맞은 학생들의 발길이 빠르게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5만 번째로 입장해 경품을 받은 박동철 씨(41)는 광주에서 KTX를 타고 아내, 세 자녀와 함께 박물관을 찾았다가 행운을 안았다. 박 씨는 “그동안 언론과 책으로만 접한 이집트 미라를 눈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어 아이들뿐만 아니라 저도 만족스러웠다”며 “특히 미라를 감싼 천에 내세에도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주문을 적은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박물관은 10만 번째 관람객에게도 경품을 전달할 예정이다. 관람료는 성인 1만3000원, 초등학생 8000원. 4월 9일까지. 1688-9891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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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세포부터 초원의 들소까지… 그들의 생존 법칙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극(極)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격언이 떠올랐다. 분자생물학자이자 타고난 이야기꾼인 저자는 미시적 세포 단위와 거대한 세렝게티 초원 생태를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다. ‘단순한 게 아름답다(Simple is beautiful)’고 했던가. 분자생물학에 혁명을 가져온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의 DNA 이중나선구조 논문이 한 장(128줄)짜리에 불과했듯, 저자도 이 분야 구루답게 복잡한 생물학 이론을 아주 간명하게 설명해냈다. 그래서 과학을 잘 모르는 일반인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왜 사람은 질병에 걸리는가’ 혹은 ‘왜 초원의 코끼리나 들소는 일정한 숫자가 유지되나’라는 질문에서 비롯됐다. 놀랍게도 이 두 가지 질문의 해답은 별개가 아닌 하나다. 바로 ‘항상성(homeostasis)’ 유지의 메커니즘이다. 예컨대 세포 단위에서는 각종 효소 분비를 통한 체내 온도, 산도, 혈당수치 등의 유지를 의미하고, 거시적 생태 단위로 확대하면 먹이사슬을 통한 개체수 유지가 된다. 놀라운 자연의 항상성 유지 메커니즘은 생명과 생태계의 지속가능한 생존을 가능케 한다. 이를 저자는 체내 생리법칙과 거시적 생태법칙을 아우르는 공통의 ‘생명 논리’로 설명한다. 자연적 조절 과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우릴 기다리는 건 비극뿐이다. 예를 들어 인슐린을 분비하는 췌장이 조절 기능을 잃으면 당뇨병이 오며 세포가 적정 수준 이상으로 분열을 거듭하면 암 덩어리가 된다.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해양에서 극심한 녹조현상이나 개체수가 급격히 불어난 야생동물의 습격은 인간의 개입으로 생태계 균형이 붕괴됐을 때 발생하는 현상들이다. 이와 관련해 생명 논리를 파악해 인류에 기여한 생물학자들의 에피소드가 행간 곳곳에 적절히 녹아들어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항상성 유지 메커니즘을 발견한 월터 캐넌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마흔다섯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의대 교수로 승승장구하던 캐넌은 쇼크사로 숨지는 병사들의 사망률을 낮춰 달라는 정부 요청을 받고 유럽 최전선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수많은 부상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인체 항상성 유지의 중요한 힌트를 발견하게 된다. 쇼크사를 초래하는 핵심 요인 중 하나가 체내 산도(pH)임을 알아낸 것. 그는 산도가 높아지면 쇼크가 온다는 데 착안해 부상병들에게 베이킹소다(탄산수소나트륨)를 주입함으로써 사망률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었다. 목숨을 건 모험이었지만 상아탑 안에 안주했다면 거둘 수 없었을 업적이었던 셈이다. 이 책의 결론도 이론 소개에만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현실 참여를 지향하고 있다. 저자는 1000년 동안이나 아프리카를 괴롭힌 천연두가 1975년 세계 보건전문가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지구상에서 종식된 사례를 자세히 소개한다. 백척간두에 이른 환경위기도 천연두 퇴치 사례처럼 각국이 연대해 치밀히 대응한다면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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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것이 세계문화유산 백제의 진면목”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백제의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열렸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1주년을 기념해 ‘세계유산 백제’ 특별전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백제의 웅진, 사비 천도 이후 시기의 유물 1720점을 모아 도성, 사찰, 능묘로 구분해 소개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목록인 공주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을 비롯해 △부여 관북리 유적, 부소산성, 나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 △익산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등에서 출토된 각종 문화재를 망라했다. 특히 공산성에서 발견된 ‘정관(貞觀) 19년’ 옻칠 갑옷과 익산 쌍릉에서 발견된 토기 등 최신 연구 성과도 충실히 소개하고 있다. 문화재계는 1999년 중앙박물관의 백제 특별전 이후 가장 주목할 만한 전시라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도성 코너에 전시된 공산성의 정관 19년(645년) 옻칠 갑옷은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이달 30일까지. 02-2077-9457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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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세기 신라, 법치주의 뿌리내려

     법을 무시한 국정 농단 사태가 벌어진 가운데 1500년 전 삼국시대에 법치주의가 지방까지 뿌리내렸음을 보여주는 목간(木簡)이 발견됐다. 6세기 중엽 신라가 대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세운 함안 성산산성에서 율령의 존재와 중앙 관등명이 적시된 목간이 처음 확인됐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 발굴조사에서 중앙 관등인 대사(大舍)가 적힌 사면(四面) 목간 1점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대부분의 목간은 한두 면에 문자를 새기는 게 보통인데 네 면에 걸쳐 글자를 넣는 사면목간은 극히 이례적이다. 이 목간은 길이 34.4cm, 두께 1.0∼1.8cm의 긴 소나무 막대기에 56개의 한문이 적혀 있다. 내용은 지방 촌주(村主)가 왕경 관직의 상급자에게 율령(律令)에 정해진 공역(公役)을 완수하지 못한 데 대해 사죄하는 것. 고대국가의 법률인 율령이 지방까지 전파돼 지켜진 사실이 고고자료로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법흥왕이 520년 율령을 반포했다고 나와 있지만, 구체적인 실상이 유물로 파악된 적은 없다. 특히 목간 내용 중 지방 촌주의 ‘반성문’이 눈길을 끈다. 이 내용은 “3월에 진내멸(眞乃滅) 촌주(村主)가 두려워하며 삼가 아룁니다. 이타리(伊他罹·이름으로 추정) 급벌척(及伐尺·지방관직 추정)이 법에 따라 30대(代)라고 보고해 30일을 먹고 가버렸습니다. 앞선 때 60일을 대법(代法)으로 했는데 제가 어리석었음을 아룁니다. 성(城)에 계신 미즉이지(미卽이智·이름) 대사(大舍)와 하지(下智·이름) 앞에 나아가 아룁니다”로 풀이된다. 목간의 핵심인 대법에 대해 발굴단은 율령에 규정된 축성 공역으로 보고 있다. 즉, 율령에 따르면 공사에 지방관(급벌척)과 지방민이 60일 동안 동원돼야 하는데, 급벌척이 절반인 30일만 이행하고 떠난 데 대해 사죄하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율령의 엄정한 집행과 더불어 신라 중앙의 지방지배 단면이 드러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목간에서 전(前)과 백(白)을 사용해 “∼에게 아룁니다”는 공손한 어투를 구사한 것도 지방 촌주와 대사의 상하관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한일 고대사 권위자인 이성시 일본 와세다대 교수는 “전백(前白) 목간은 일본 고대 목간에서도 많이 나온다”며 “신라의 문서행정 체계가 일본으로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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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수장고서 잠자던 조선회화, 고국의 손길로 깨어나

     “보존 처리를 마친 그림을 봤는데 전체적으로 톤이 밝아지고 예뻐진 느낌입니다. 비단 장황(裝潢)도 조선시대 고증을 충실히 따랐더군요. 이젠 미국 관람객들에게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선보일 수 있게 됐네요.” 지난해 12월 20일 국립고궁박물관의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보존 처리 특별전’. 우현수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큐레이터가 환한 표정으로 1년여 만에 해후한 그림을 본 소감을 말했다. 곽분양행락도는 당나라의 명장 곽자의(697∼781)가 분양왕에 봉해진 뒤 부귀영화를 누리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다. 조선 후기 왕실에서 만복을 기원하는 길상화로 그려져 혼례용 축하 병풍 등에 사용됐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미국 캔자스대 스펜서미술관과 필라델피아미술관이 각각 소장한 곽분양행락도 2점을 최근 국내로 들여와 보존 처리를 마쳤다. 이들 그림은 고궁박물관 전시가 끝나는 대로 미국으로 돌아가 현지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필라델피아미술관 소장 곽분양행락도는 2000년 기증 이후 16년 동안 전시되지 못하고 수장고 안에만 있었다. 기증 당시부터 그림 일부가 살짝 찢어진 데다 채색도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보존 처리가 시급했지만 한국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지원 순위에서 밀리기 일쑤였다. 미술관 내 유일한 한국인 큐레이터로 조선회화사를 전공한 우 씨는 재단에 지원을 요청해 보존 처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이 그림은 1955∼1958년 주한미군으로 근무한 고(故) 스티븐 매코믹 대령이 국내에서 구입했다. 건축학도였던 그는 보스턴미술관에서 한국 미술품을 접하고 반해 한국 체류 기간 기와와 도자기, 그림 등 한국 미술품 100여 점을 수집했다. 2003년 타계한 고인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뜻깊을 것”이라며 모든 수집품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스펜서미술관이 소장한 또 다른 곽분양행락도가 100년 만에 빛을 보게 된 것도 한 큐레이터의 노력 덕분이었다. 크리스 어첨스 스펜서미술관 큐레이터는 “지난해 4월 수장고를 정리하면서 8폭의 병풍 그림을 우연히 발견했다”며 “소장품으로 등록돼 있지 않아 기록보관소를 찾아 헤맨 끝에 소장 경위와 기증자를 파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림에는 ‘자손이 조상을 기리는 축제를 그린 것으로 한국에서 결혼 선물로 주어진다’는 영문 메모가 붙어 있었다. 관련 기록을 조사한 결과 백화점 소유주였던 샐리 케이시 테이어 여사가 시카고에서 구입해 1917년 미술관에 기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골동품상이 한국 고미술품을 해외로 유통시키는 과정에서 미국까지 흘러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어첨스 큐레이터는 “조선시대 정통 궁중회화를 미국인들에게 소개할 수 있게 돼 더없이 기쁘다”고 덧붙였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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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好통/김상운]전문기관도 못한 증도가자 진위 검증 일반에 맡기겠다니…

     “국가문화재 지정을 인기투표로 하자는 건가요? 어이가 없습니다.” 고려시대 최고(最古) 금속활자 여부를 놓고 8년째 진위 논란을 빚고 있는 가칭 ‘증도가자(證道歌字)’에 대해 지난해 12월 30일 문화재청이 ‘공개 검증’을 발표하자 한 문화재계 인사는 코웃음을 쳤다. 서지학, 금속공학, 원자력공학, 화학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1년 6개월 동안 재조사를 벌이고도 실패한 증도가자 검증을 일반에 맡기겠다는 발상 자체가 어처구니없다는 지적이었다. 이 전문가는 “국가문화재 지정조사에 공개 검증을 시도한 전례가 없다”며 “이럴 거면 도대체 문화재청이 왜 필요한 거냐”고 반문했다. 이날 문화재청은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증도가자 재조사 결과를 인터넷에 공개하면서 보도자료를 통해 “1월 13일까지 15일간 전문가뿐만 아니라 국민 누구나 증도가자 분석 결과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며 “공개 검증을 통해 의견을 폭넓게 수렴한 뒤 이를 반영해 (국가문화재) 지정 심의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고려금속활자 지정조사단’이 1년 6개월이나 걸린 증도가자 검증을 전문지식도 없는 일반 국민들에게 15일 동안 맡긴들 과연 실효성이 있겠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더구나 문화재청이 홈페이지에 공개한 재검증 결과는 더 황당하다. 동아일보가 지난해 12월 8일 단독 보도한 대로 증도가자가 진품인지 가짜인지 판단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결과만 늘어놓았을 뿐이다. 검증 결과 보고서에서 국과수는 “금속활자(증도가자)와 목판 번각본(증도가)의 서체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가짜일 가능성에 무게를 둔 것이다. 반면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접합된 흔적이나 균열이 관찰되지 않아 한 몸체로 주조된 것으로 보인다”며 인위적인 조작 가능성을 부인했다. 하지만 활자 제조 시기가 고려시대라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문화재청은 경북대 산학협력단에 연구용역을 맡긴 1차 검증(2014년 증도가자 기초학술조사연구 R&D)까지 포함해 2년에 걸쳐 수억 원의 국민 혈세를 증도가자 검증에 투입했다. 하지만 사회적 논란만 키운 채 제대로 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국가 예산과 시간만 허비한 꼴이 됐다. 그러나 검증 실패에 대한 사과는 한마디도 없으며, 공개 검증이라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책임을 모면하려 하고 있다. 앞서 2013년 2월 문화재위원회는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며 증도가자에 대한 국가문화재 지정 추진을 보류했다. 그러나 나선화 문화재청장 부임 이후인 2015년 2월 증도가자 지정 조사가 확정돼 그해 6월 지정조사단이 일사천리로 구성됐다. 나 청장은 주무 부처 수장으로서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사과라도 하는 게 도리일 것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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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순신 장군, 명량서 왜군 대파… 고종, 대한제국 선포

     “지금 신(臣)에게는 아직도 전선(戰船)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1597년 정유(丁酉)년 7월 14일 칠천량 전투 패전 직후 이순신은 선조에게 비장한 내용의 장계를 올렸다.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이 왜군에게 궤멸되자 선조는 수군을 아예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라도 해역에서 육군과 합류해 한양으로 진격하려던 왜군의 전략을 간파한 이순신은 바다에서 결사항전을 내걸었다. 두 달여 뒤 정유년 9월 16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나중에 한 척을 더해 고작 13척을 확보한 조선 수군은 명량(鳴梁)에서 왜선 300여 척과 맞닥뜨렸다. 이순신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빠른 울돌목 조류를 이용해 적선을 유인한 뒤 함포공격과 당파전술(선체를 충돌시켜 적선을 파괴하는 것)을 적절히 구사해 수적 열세를 만회했다. 단 한 척의 아군 배도 잃지 않고 적선 30여 척을 수장시켰다. 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정유재란에서 거둔 우리의 가장 결정적인 승리였다. 육로에서 남원과 전주를 잇달아 함락하고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한 왜군은 명량해전 패전 직후 예봉이 꺾여 남해안으로 물러나게 됐다. 내년은 쌈닭(투계·鬪鷄)을 연상시키는 ‘붉은 닭’의 해, 정유년이다. 쌈닭은 오직 주인만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사나운 데다 죽을 때까지 싸우는 용맹함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래선지 역사 속 정유년은 명량해전처럼 절망을 기어코 이겨내려는 투쟁과 응전의 세월이 적지 않았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지 180년이 흐른 1777년 정유년도 녹록지 않은 현실의 장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치열한 당파싸움으로 아버지(사도세자)를 잃은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노록 벽파의 암살 위험에 처한 것. 그해 7월 28일 왕의 신변경호를 담당한 호위군관 강용휘 등이 침소에 들어가 정조를 살해하려고 시도했으나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앞서 노론은 영조가 말년에 정조의 대리청정을 명하자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는 흉언(凶言)을 유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는 편 가르기가 아닌 ‘통 큰’ 정치로 노론의 힘을 자연스레 뺐다. 즉위 직후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한다고 천명하고 조정 신료를 고루 등용했다. 이로서 소론과 남인의 인재들도 대거 정국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조선후기 르네상스를 열 수 있었다. 이로부터 다시 120년이 흐른 1897년 정유년은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조선왕조가 마지막 몸부림을 친 시기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했던 고종은 정유년에 경운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대한제국 건국을 선포한다. 자신의 아내이자 국모였던 명성왕후가 일본 외교관이 지휘한 암살단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직후였다. 고종은 정유년 11월 명성황후의 국장을 대대적으로 치른 뒤 사대(事大) 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을 허물고 독립문을 지었다. 성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군제를 개혁하고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19세기 말 정유년은 이순신이 명량대첩에서 승리하고 정조가 활약했던 과거 정유년과 달리 거대한 역사의 파고를 결국 넘지 못했다. 대한제국은 단 13년을 버티다가 1910년 8월 29일(경술국치)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교수신문에 따르면 대학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군주민수(君舟民水·임금은 배고 백성은 물이다)’를 꼽았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기도 한다. 병신년에 최순실 게이트로 큰 시련을 겪었지만, 내년 정유년에는 쌈닭의 기세처럼 부정(不正)에 맞서 분투하는 한 해가 되지 않을까.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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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자의 書… 내세에서 영원불멸을 꿈꾸다

     얼핏 보면 회흑색 타원형 돌처럼 보이는 ‘심장 스카라브’는 알고 보면 재밌는 고대 이집트 유물이다. 전시된 스카라브를 자세히 살펴보면 영락없는 딱정벌레 무늬다. 이집트인들은 딱정벌레를 부활을 상징하는 영물로 숭배했다. 스카라브는 항상 미라의 심장 위에 올려놓았는데,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사자(死者)가 오시리스의 최후 심판대 앞에 설 때 심장이 자신의 생전 죄를 자복할까 두려워 만든 부적이기 때문이다. 이집트인들은 다른 장기와 달리 심장만은 독자적인 생각과 감정을 지닌 기관으로 믿었다. 실제로 반사거울로 스카라브 뒷면을 들여다보면 “죄를 자백하지 말라”는 내용의 주문을 빼곡히 적은 상형문자들이 보인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사후심판은 죽은 이의 증언만 믿고 통과시켜 줄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사후세계를 그린 ‘사자의 서(書)’ 파피루스(대영박물관 소장)를 재연한 전시 동영상은 심판 과정을 생생히 보여준다. 오시리스는 죽은 이의 심장과 깃털을 양팔 저울에 나란히 달아 본다. 죄를 지어 무거워진 심장이 아래로 기울면 괴물 아무트가 심장을 먹어치운다. 이렇게 되면 사자의 영혼은 영원히 소멸돼 내세에서 안락을 누릴 수 없게 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최근 개최한 ‘이집트 보물전’은 단순히 이집트 미라를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을 선보이고 있다. 중앙박물관은 미국 브루클린박물관에서 고대 이집트의 사람과 동물 미라를 비롯해 목관, 석관 뚜껑, 조각품, 장신구 등 총 229점의 유물을 들여왔다. 이 가운데 부자부터 가난한 사람까지 여러 계층이 나름의 생활형편에서 어떻게 장례를 치렀는지 비교할 수 있는 코너가 눈길을 끈다. 기원전 700년 무렵 만들어진 토티르데스의 미라와 목관은 사후 세계에 대한 바람을 목관 위에 화려한 그림으로 표현했다. 관 뚜껑에는 죽은 이(토티르데스)가 심장 무게를 재는 심판을 무사히 통과한 장면과 오시리스의 부인이자 최고 여신인 이시스가 죽은 이를 애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목관을 가득 채운 화려한 채색은 당시 부유층이 장례에 들인 노력을 잘 보여준다. 이보다 더 부유한 유력층은 석관까지 동원했다. 이번에 전시된 프톨레마이오스 시대(기원전 305년∼기원전 30년) 석관 덮개는 길이가 2m, 무게는 544kg에 달한다. 거대한 석관의 주인공은 왕실 서기이자 제사장이던 파디인푸였다. 반면 서민들은 화려한 목관이나 석관을 쓰지 못하고 질이 낮은 나무나 흙으로 만든 관을 사용했다. 일부는 오랜 무덤을 도굴해 부장품을 재사용하기도 했다. 실제로 전시된 제18왕조 시대(기원전 1539년∼기원전 1292년)의 ‘봉헌의식 새김돌’은 기존 문구와 다른 문장이 나중에 새겨진 흔적이 보인다. 전시 후반부에 비치된 ‘동물 미라’도 눈여겨볼 만하다. 고양이와 따오기, 쥐, 딱정벌레 등 다양한 동물로 만든 미라와 관들이 전시돼 있다. 신과 사람을 이어주는 메신저로서 동물을 신성시한 이집트인들의 사상이 고스란히 담겼다. 관람료 성인 1만3000원, 초등학생 8000원. 내년 4월 9일까지. 02-2077-9271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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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도세자 누나 화협옹주 묘 남양주서 확인

     영조의 딸이자 사도세자 누나인 화협옹주(和協翁主·1733∼1752) 무덤이 경기 남양주시에서 확인됐다. 고려문화재연구원은 “영조와 후궁 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화협옹주의 이장 전 무덤을 발굴 조사해 각종 유물을 수습했다”고 28일 밝혔다. 정조의 고모이기도 한 그는 20세에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영의정 신만의 아들 신광수와 결혼했으나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 무덤에서는 화협옹주의 장지임을 증명하는 묘지(墓誌), 지석(誌石·죽은 사람의 인적사항 등을 기록한 판석)을 비롯해 청화백자합 10점, 분채(粉彩) 1점, 나무 합 3점, 청동거울, 거울집, 목제 빗, 직물류 등이 출토됐다. 묘지는 정사각형 모양의 회를 만들고 글자 안에 먹을 채운 것으로, ‘유명조선화협옹주인좌(有名朝鮮和協翁主寅坐)’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석판으로 된 지석 앞뒷면과 옆면에는 총 394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특히 오른쪽 옆면에는 아버지 영조가 젊은 나이에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등진 딸에 대한 슬픔을 적은 글이 적혀 있다. 청화백자합과 분채 안에는 화장품으로 추정되는 내용물이 들어 있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화장도구 등 조선시대 왕실 여인들의 실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대거 출토됐다”고 평가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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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경주 경마장 부지에서 신라 숯-토기가마 무더기로 쏟아져

     23일 경북 경주시 손곡동 유적. 경작 행위를 금지한다는 마사회 표지판 너머로 대나무와 억새가 수북이 자란 구릉이 보였다. 마치 거대한 가마처럼 완만한 경사였다. 주변은 온통 황량한 겨울 벌판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답사에 나선 이상준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장(56)이 손가락으로 구릉을 가리켰다. “저기서 신라시대 숯가마와 토기가마가 무더기로 나왔습니다.”  당초 경마장 용지였던 이곳은 우리나라 발굴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가마터(요지·窯址)가 발견돼 2001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됐다. 이로써 1992년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던 경주 경마장 건설 계획은 취소됐고 유적은 보존됐다. ○ 미묘한 ‘흙색 변화’ 놓치지 않아 1997년 8월 초 손곡동 발굴 현장. 경주 토박이로 현장 책임자였던 이상준이 꽃삽과 대칼을 잡았다. 지표로부터 30cm 아래서 노랗게 변색된 흙이 동그란 형태로 발견된 것. 그는 순간 굴뚝임을 직감했다. 통상 가마 내부 벽체는 불에 닿은 정도에 따라 회흑색→노란색→빨간색 순으로 색깔이 바뀐다. 발화가 일어나는 가마입구(화구·火口)는 회흑색이 나타나는 반면에 연기가 나가는 연도(煙道)나 굴뚝은 불에 직접 닿지 않아 노랗거나 붉게 변색되기 마련이다. 지하식 가마는 굴뚝과 화구의 위치를 정확히 잡아내는 게 관건이다. 자칫하면 굴뚝과 화구를 잇는 중간 몸체(요체·窯體)를 발굴 과정에서 훼손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는 굴뚝 크기와 형태를 감안해 2주에 걸쳐 주변 흙을 조심스레 파낸 끝에 검게 그을린 화구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화구와 굴뚝을 중심으로 요체까지 신라 토기가마 1기의 전모를 드러내는 데 한 달이 걸렸다. 이 가마(47호 토기가마)는 손곡동에서 발견된 47기의 토기가마 중 유일하게 땅 밑에 만들어졌다. 나머지는 반(半)지하식 가마들이다. 이상준은 “47호는 이례적으로 가마 지붕이 붕괴되지 않은 채 발굴돼 내부 구조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며 최고의 유구로 꼽았다. 이 가마가 제공한 정보는 다양했다. 우선 가마 내부 온도가 높아도 바닥이 굳지 않고 무른 이유를 알게 됐다. 가마에 들어간 토기들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 뿌린 모래가 화염이 바닥에 닿는 걸 차단한 것. 또 토기들이 가마 안에서 서로 엉겨 붙는 걸 방지하기 위해 토기 받침을 넣은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가마 변천사 종합전시장 경주 손곡동 유적은 숯가마(탄요·炭窯)를 규명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발굴 당시 전국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숯가마는 울산 검단리와 경주 천군동 등에서 발견된 4기뿐이었다. 이들은 토기가마와 달리 평평한 데다 내부에서 토기가 발견되지 않아 숯가마로 추정됐을 뿐 결정적 증거가 없었다. 그런데 손곡동 숯가마 안에서 숯이 발견된 것이다. 학계는 신라시대 손곡동에서 생산된 숯이 인근 경주 황성동 제철유적에 공급됐을 걸로 본다. 손곡동에서 발견된 숯은 백탄(白炭)으로, 흑탄(黑炭)에 비해 화력이 떨어지지만 연소 시간이 길어 제철작업에 주로 쓰이기 때문이다. 손곡동에서는 숯가마와 토기가마뿐만 아니라 채토장, 공방, 토기 폐기장, 건조장, 도공 주거지 등이 한꺼번에 확인돼 고대 생산기술사 복원에 핵심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폐기장에서 출토된 100여 점의 토우(土偶)가 눈길을 끈다. 두 손이 뒤로 묶인 죄수 토우는 눈물을 흘리는 모습까지 표현돼 있다. 또 같은 얼굴에 동작만 다른 10여 점의 토우는 춤추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경주 노서동 고분에서 출토된 국보 제195호 ‘토우장식항아리(장경호)’에 달린 토우와 비슷한 것들이 손곡동에서 발견된 것도 주목된다. 이상준은 “토우장식항아리는 손곡동 가마에서 생산됐을 가능성이 높다”며 “격이 높은 기와건물터가 발견된 걸 봐도 이곳은 국가가 관리한 대규모 가마터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곡동 토기가마는 5∼7세기에 운영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약 200년에 걸친 시대별 토기가마 양식의 변천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일본 나가노 현에서 손곡동의 7세기 중반 토기가마와 유사한 게 발견됐다. 이상준은 “신라 장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토기 제작 기술을 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 2016-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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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따로 또 같이’… 21세기형 가족의 탄생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미국 드라마 ‘프렌즈’가 생각났다. 전통적인 가족을 대체한 21세기형 공동체를 소개하는 책 내용이 드라마의 구성과 일맥상통한 때문이다. 1994∼2004년 10년간 방영된 프렌즈는 마지막 방송이 미국 전역에서 야외 전광판으로 생방송될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뉴욕에 사는 젊은 남녀 주인공 6명은 한 아파트에 나란히 사는데, 노크도 없이 불쑥 다른 친구의 방에 들어가는 게 어색하지 않다(물론 샤워실은 예외다). 휴일 아침 식사를 거실에서 늘 함께하고 근처 단골 커피숍에서 매일같이 수다를 떤다. 사실상 가족 같은 친구들인 것이다. 세기말부터 금세기 초까지 이 드라마를 지켜본 시청자들은 가족 관계의 불가피한 의무나 ‘구질구질’함이 아닌 새로운 공동체에서 자유와 ‘쿨’함을 매력적으로 느낀 것 같다. 사회심리학자인 저자는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현대 미국인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구체적인 사례로 보여준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땅콩집처럼 하나의 부지에 여러 채의 독립된 생활공간을 짓는 ‘듀플렉스’ 공동체나 인터넷을 통해 만나서 공동 육아를 실현한 싱글맘 공동체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프라이버시를 보호할 수 있도록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동시에 가족을 대체할 수 있는 소통을 추구한다. 저자는 “이젠 나만의 공간과 가족을 스스로 설계하는 시대가 왔다”고 말한다. 가족 공동체의 양상도 바뀌고 있다. 장성한 아들이나 딸이 부모와 함께 사는 이른바 ‘캥거루’ 가족이 최근 미국에서도 늘고 있는 추세다. 저자는 자녀들이 경제위기로 인해 부모에게 기댄다는 식의 부정적인 의미로 보지 않는다. 물론 주거비 절약 같은 경제적 유인을 무시할 수 없지만, 이보다 부모와 자식 간 세대 갈등이 과거에 비해 약해졌다는 데 주목한다. 히피로 대표되는 저항과 ‘이유 없는 반항’ 아이콘이 유행하던 1960, 70년대와 달리 지금은 세대 간의 정서나 공감대가 큰 충돌을 빚고 있지 않다는 거다. 공동체 삶의 핵심 트렌드 중 하나는 역시 ‘프라이버시’다. 공동 생산, 공동 분배의 엄격한 삶을 추구하던 100년 전통의 이스라엘 키부츠도 최근 사유재산과 사생활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분위기다. 이런 흐름이 가족공동체의 공간 점유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난 사례가 ‘따로 함께 살아가는 커플’(LAT·Living Apart Together)일 것이다. 책에는 주말부부도 아니면서 별도 집에서 각자 생활하는 부부들이 소개된다. 이들은 서로 사랑하지만 자신의 독립된 공간과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길 강력히 원한다. 혹자는 이기심 혹은 미성숙한 사랑이라고 비난하겠지만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파트너의 삶 그 자체를 인정해주는 게 성격 차이 운운하며 이혼 도장을 찍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오랜 추억이 담긴 자신만의 집을 포기할 수 없어 LAT를 선택한 노년 커플들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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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진에 흔들린 천년고도 ‘아찔’

     “지진에 암각화 보존 대책 실패, 불법 공사로 인한 문화재 파괴까지…. 올해는 한마디로 문화재 수난의 해였다.” 21일 한 문화재계 인사가 2016년을 짧게 요약한 말이다. 문화재 보존과 계승에 바람 잘 날 없었지만, 올해는 유독 자연재해와 인재가 겹쳐 문화재 파괴가 심각했다. 학계는 고대사에 이어 대한민국 건국 시기 논란에 휩쓸렸다. 9월 12일 발생한 규모 5.8의 경북 경주 강진은 신라 고도(古都)의 빛나는 문화유산을 한순간에 위기로 내몰았다. 수많은 고택의 기와와 담장이 무너졌고, 다보탑은 일제강점기에 수리한 난간석이 내려앉는 피해를 입었다. 특히 첨성대의 중심축이 20년 치에 해당하는 20mm나 기울었다. 지진 전부터 첨성대는 북쪽 지반이 침하되면서 중심축이 매년 평균 1mm씩 북쪽으로 기울고 있다. 꼭대기에 놓인 정자석(井字石)도 9월 12일 50mm에 이어 19일 여진으로 다시 38mm 이동했다. 이로 인해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원들이 한밤에 첨성대로 급파되는 비상 상황이 연출됐다. 다행히 “첨성대는 당장 붕괴될 수준은 아니다”라는 진단 결과가 발표됐지만 첨성대의 구조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해체 수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돼 논란을 일으켰다. 결국 해체는 첨성대의 원형을 훼손시킬 것이라는 지적에 따라 해체 수리 방안은 유야무야됐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 보존 대책이 3년간 28억 원의 국가 예산만 낭비한 채 실패로 끝난 것도 큰 문제였다. 특히 가변형 임시 물막이(키네틱 댐) 모형 검증 실험에 청와대와 정치권이 개입해 “실현 불가능한 방안”이라는 전문가 의견이 묵살된 사실이 동아일보 단독 보도로 알려졌다.  불법 공사로 중요한 유적들이 파괴되는 사건도 잇달았다. 올 4월 국가 사적 제6호인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에서 불법 공사로 인해 8세기 통일신라시대 건물과 도로, 수로 유적이 한꺼번에 파괴된 사실이 본보 보도로 드러났다. 이어 충남 부여군 세도면에서 발견된 기원전 2세기 토광묘(土壙墓·수직으로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매장하는 무덤)가 불법 공사로 90%나 파괴된 사실도 7월 알려졌다. 광화문 현판의 원래 색깔이 지금과 달리 검은 바탕에 흰색이나 금색 글씨였음을 보여주는 사진이 새로 발견되기도 했다. 문화재청은 4월 현판 색상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기로 했지만, 예산 문제로 색상 검증 실험은 내년에 진행키로 했다.  학술 분야에서는 강단-재야, 주류-비주류 사학자 사이에 한군현 위치 등 고대사 논쟁이 뜨거웠다. 지난해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의 동북아역사지도 비판을 계기로 불붙은 이 논쟁은 올해 양측이 전열을 정비하며 한층 달아올랐다. 재야 사학계는 6월 ‘미래로 가는 바른 역사 협의회’를 구성했고, 주류 사학계는 계간지 ‘역사비평’ 2016년 봄, 여름, 겨울호에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이라는 연속 기획을 게재해 반격에 나섰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도학적 미비’를 이유로 8년간 제작된 동북아역사지도를 6월 ‘출판 불가’ 결정하고 다시 만들기로 했다. 대한민국 건국 시기 논란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1948. 8. 15)”고 표현한 국정 한국사 교과서 현장 검토본 공개로 가열됐다. 1919년 시작돼 1948년 완결된 일련의 건국 과정을 드러냈다는 의견과 임시정부 역사를 부정하는 서술이라는 견해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김상운 sukim@donga.com·조종엽기자  }

    • 2016-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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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색찬란’ 한국의 색을 찾아라

     한국 전통색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보고 싶다면 지금 국립민속박물관에 가면 된다.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천진기)은 ‘때時깔色, 우리 삶에 스민 색깔’ 특별전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인의 삶에 투영된 다채로운 색의 상징과 색감을 두루 경험할 수 있는 전시다. 박물관은 흥선대원군 초상(보물 제1499호)과 일월오봉도, 색동두루마기, 백자 달항아리 등 350여 점의 그림과 영상물을 소개한다. 박물관 관계자는 “전통 유물을 통해 우리 색의 생성과 변화를 보여주려 했다”고 설명했다. 전시 1부 ‘단색(單色)’은 한국의 정서와 가치관이 담긴 다섯 가지 색상을 테마로 했다. 예컨대 백(白) 세션에서는 우리 민족이 예부터 흰옷을 즐겨 입었음을 알려주는 외국 기록과 더불어 흰색 두루마기, 백자 등을 전시한다. 흑(黑)은 조선시대 검은색 관모(冠帽)와 관복(官服)을, 적(赤)은 동짓날의 붉은 팥죽과 고사 시루떡을, 청(靑)은 청자와 청바지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2부 ‘배색(配色)’에서는 음양오행의 조화를 색상으로 표현한 유물을 선보인다. 음양의 균형을 추구하면 복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으로 청홍(靑紅)이나 적흑(赤黑) 흑백(黑白)의 배색을 적용한 각종 전통 생활용품을 전시한다. 내년 2월 26일까지. 02-3704-3153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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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숭례문 단청복원 쓰일 희귀광물 ‘뇌록’ 공사장 나뒹굴어

     조선시대 천연 안료(물감)용 광물로 남한 내 유일한 산지(産地)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뇌록(磊綠)’이 경북 포항시 블루밸리 국가산업단지 공사 현장에서 대량으로 발견됐다. 2013년 숭례문 부실 복원으로 단청이 떨어져 나간 이후 재시공에 필요한 핵심 재료를 확보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도로 공사로 인해 뇌록 암반이 지속적으로 훼손되고 있는데도 문화재청이 예산 부족을 이유로 7개월 넘게 정밀 조사 요청을 외면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0일 문화재청과 포항시에 따르면 경북대 암석광물학 연구실이 포항시 장기면과 구룡포읍 일대에서 뇌록 노두(露頭·지하에 매장된 광맥이 지표에 노출된 것) 4곳 등 총 6곳의 뇌록 산지를 발견했다. 이 가운데 포항 블루밸리 국가산업단지 공사 현장이 있는 구룡포읍 광정산 동남부 계곡에 가장 많은 양의 뇌록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2013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포항 뇌성산 뇌록 산지’에서 2km가량 떨어져 있다. 뇌록은 운모류 광물로 조선시대 궁궐과 사찰의 단청, 그림에 녹색 안료로 사용됐다. 뇌록은 귀해서 예부터 국가가 나서 생산을 통제했다. 실제 영건도감의궤(營建都監儀軌)에 따르면 1805년 2월 창덕궁 인정전을 중수하면서 경상도 관찰사에게 “장기현(현 포항시 장기면)에서 나는 뇌록 20두(斗)를 조달하라”는 왕명이 떨어졌다. 실제로 뇌성산 산지에는 약 15m 깊이의 조선시대 갱도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뇌록이 중요한 것은 2018년 숭례문 단청 복원에 필요한 천연 안료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2013년에 단청이 떨어져 나간 건 화학 안료와 접착제(아크릴 에멀전)가 목재를 부식시켰기 때문으로 분석한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은 2018년까지 40억 원을 투입해 천연 안료와 아교를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로드맵에 따르면 올해 말까지 천연 안료 제조법과 시공법 연구가 마무리돼야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전통 천연 안료의 맥이 끊어져 계획에 차질을 빚고 있다. 경북대 연구팀은 올 초 현지 조사에 착수해 3월 연구용역 보고서를 문화재청과 포항시에 제출했다. 이어 연구팀은 5월 최종 보고회에서 문화재청과 문화재위원회 관계자들에게 “시추 등 정밀 조사를 통해 뇌록 매장량과 분포 지역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경제성이 떨어진다”라며 지금껏 정밀 조사에 나서지 않고 있다. 그 사이 도로를 내기 위한 암반 굴착이 진행되면서 파괴된 뇌록 암석들이 공사 현장 곳곳에 굴러다니고 있다. 실제 8일 찾은 포항 블루밸리 국가산업단지 공사 현장에서는 도로를 내기 위한 암반 폭파 작업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공사장 곳곳에 어른 팔뚝만 한 것부터 손가락만 한 것까지 다양한 크기의 뇌록 원석들이 특유의 초록빛을 띤 채 널려 있었다.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 공사장에서 뇌록 원석 1t을 천연 안료 연구 목적으로 수거해 갔다. 경북대 연구팀은 3월 보고서에서 “광정산 일대 뇌록 산지는 산업단지 조성 공사에 따라 상당한 훼손이 진행되고 있으므로 보존 조치가 시급하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정확한 뇌록 매장 보존 구역 설정을 위해 지표 조사는 물론이고 시추와 지구물리탐사, 지표투과레이더(GPR) 등 정밀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 관계자는 “새로 발견된 뇌록 산지는 기존 산지와 같은 역사성이 없어 보존 가치가 떨어진다는 의견이 문화재위에서 제기됐다”라며 “단순히 단청 보수를 위해 뇌록을 수집할 거라면 굳이 정밀 조사가 필요하냐는 의견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블루밸리 산업단지 시행사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뇌록이 많이 나오는 구간에 한해 성토 작업을 하지 말고 관람 덱(deck)을 설치하라는 문화재위원회 권고만 전달받은 상태”라고 밝혔다.포항=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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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화가였던 사임당이 ‘현모양처’가 된 까닭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인가, 율곡의 어머니이자 현모양처의 사표(師表)인가. 남존여비의 조선시대에 신사임당(1504∼1551년)만큼 끊임없이 재조명된 여성은 없을 거다. 나라마다 현금 최고액 지폐에 대표 인물을 선정하는데, 우리나라 5만 원권 지폐에 사임당이 들어간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예술과 모성은 어떻게 보면 양립하기 힘든 가치인지 모른다. 물론 멕시코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처럼 모성에 대한 갈망이 예술 혼으로 승화하기도 한다(그는 교통사고 휴유증 등으로 임신에 실패했다). 그러나 자기를 내려놓고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모성상은 나를 중심에 놓아야 하는 예술의 속성과 상충할 여지도 있다. 고연희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 등 다섯 명의 각 분야 학자들이 쓴 ‘신사임당, 그녀를 위한 변명’은 16세기부터 현재까지 500년간 이어진 사임당 해석의 변천사를 추적했다. 미술사, 한국사, 동양철학 등 다양한 관점에서 시대상에 꿰맞춰지고 왜곡된 사임당의 이미지를 분석했다. 예를 들어 율곡 사후 그를 추숭하는 과정에서 초기에는 사임당보다 율곡의 부인 노씨가 부각됐다. 율곡의 수제자 김장생(1548∼1631)은 스승의 행장(行狀·죽은 이의 일대기를 기록한 것)을 쓰면서 사임당 이상으로 노씨의 시집살이와 임진왜란 때의 의로운 죽음을 크게 다뤘다. 저자는 예학(禮學)을 주창한 김장생이 가족 내 ‘종법(宗法) 질서’를 강조하면서 오랜 기간 시댁에 헌신한 노씨를 일부러 부각시켰다고 본다. 사임당의 경우 38세에 서울 시댁으로 상경하기 전까지 강릉 친정에서 약 20년 동안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임진왜란 이후 부계 중심의 종법 질서를 강조한 예학자들이 보기는 부자연스러웠다는 것이다.  사임당의 예술 행위도 주자성리학 이념에 따라 재단되기 일쑤였다. 율곡을 조선성리학의 완성자로 추앙한 우암 송시열(1607∼1689)의 평가가 대표적이다. 그는 율곡의 후손이 사임당이 그린 산수화에 발문(跋文·작품에 대한 감상평)을 요청하자, 진짜인지 의심스럽다는 요지로 글을 썼다. 자랑스러운 조상의 작품에 명사(名士)의 발문을 첨부해 공덕을 선양하려던 후손들은 아마 패닉이 됐을 것이다. 우암의 위작 운운은 예술적 안목에 기인한 판단이 아니었다. 사임당의 그림에 그려진 스님과 오래전 발문에 오른 한시가 성리학 이념에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우암을 비롯해 17, 18세기 이후 성리학자들은 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를 높게 평가했다. 이들은 풀과 벌레와 같은 미물에도 관심을 쏟은 사임당의 이미지를 통해 자애로운 어머니상을 추출하려고 했다. 우암이나 김장생의 사임당 해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무너진 조선의 가치관을 율곡을 정점으로 한 조선성리학을 통해 재구축하려 한 시도였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반면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는 신간 ‘사임당전’에서 또 하나의 편견으로 작용할 수 있는 현대적 해석에서 탈피해 인간 신사임당의 민낯을 보려고 시도한다. 그는 사임당이 친정의 경제력에 기대 취미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며 단순히 자식 덕을 본 어머니도 아니라고 말한다. 사임당은 경제력이 없는 남편 대신 자수로 생활비를 홀로 감당하면서도 높은 예술적 성취를 이뤘다는 점을 평가할 만하다는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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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열쇠구멍 닮은 ‘장고분’… 고대 韓日교류 비밀의 문 열까

     9일 광주 광산구 월계동 ‘장고분’. 사진기자가 띄운 드론이 1호분 위로 날아오르자 열쇠구멍 모양의 봉분이 모니터에 잡혔다.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난 봉토가 연결된 일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과 닮았다. 무덤 길이가 45m에 이르다 보니 지상에서는 모양을 가늠하기 힘들다. 장고분은 5세기 말∼6세기 초 축조된 무덤으로 추정된다. 장고분을 발굴한 임영진 전남대 교수(61)는 “20여 년 전 처음 왔을 때 이곳은 농가와 논밭으로 둘러싸여 주민들도 무덤의 실체를 잘 몰랐다”고 회고했다. ○ 장구마을의 비밀 광주 첨단과학산업단지 개발이 진행되던 1992년 12월. 지표조사에서 무덤 석실이 발견된 ‘장구촌(杖鼓村)’으로 임영진과 제자들이 현장조사를 나갔다. 전통악기 장구처럼 생긴 언덕이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도 장구촌이었고, 임영진도 고분 이름을 한자 발음대로 ‘장고분’으로 지었다. 그가 목격한 장고분의 파괴 상태는 심각했다. “봉분은 이미 절반쯤 사라졌고 그 자리에 민가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다행히 석실은 남아 있었는데 오른쪽 벽 일부가 뚫려 있더군요.” 석실 내부에는 집주인이 가져다 놓은 감자 등이 저장돼 있었다. 여름에 석실 안이 시원해 농산물 창고로 주로 활용했던 것. 당시 집주인은 “이미 일제강점기 때 도굴이 돼 내가 살기 시작했을 때 석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미 도굴된 폐고분이었지만 학술적 가치는 높았다. 당시 한반도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임영진은 발굴보다 보존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산업단지 시행자인 당시 한국토지공사 부사장이 이전 복원을 요구했지만 그는 “1600년 전 조성된 장고분의 역사적 가치를 지키려면 현지 보존이 원칙”이라며 버텼다. 결국 보존으로 결정돼 이듬해 5월 3일부터 발굴이 시작됐다.○ 저습지에서 건진 보물 보존구역을 설정하려면 정확한 유구 범위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발굴팀은 봉분부터 파지 않고 주변에 트렌치(시굴갱)부터 팠다. 그런데 이것이 의외의 ‘대박’으로 이어졌다. 봉분으로부터 7∼15m 떨어진 외곽에서 무덤 주위를 둘러싼 구덩이가 발견된 것. 고대 무덤에서 종종 보이는 주구(周溝·고분 주위를 두르는 도랑)였다. 주구 주변은 개흙투성이여서 발굴이 쉽지 않았는데 이것이 오히려 축복이었다. 개흙이 외부 공기를 차단해주는 역할을 해 나무 같은 유기물질이 썩지 않았던 것. 1.5m 깊이의 주구에서 다양한 목기(木器)들이 발견됐다. 발굴팀은 토기와 목기의 형태, 색, 무늬 모두 독특해 또 한번 놀랐다. 특히 바닥이 뚫린 원통형 토기는 당시 출토 사례가 극히 드물었다. 일본 전방후원분에서 출토된 하니와(埴輪·봉분 주변을 장식하는 토기)와 거의 같았다. “이 토기와 목기들은 일본 하니와를 한반도에서 재현한 겁니다. 장고분의 독특한 구조와 더불어 무덤 주인이 왜인(倭人)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죠.”○ 장고분 주인은 한민족인가 왜인인가 학계는 장고분 주인을 놓고 왜와 교류한 토착세력, 왜에서 파견된 유력층, 백제에 파견된 왜인 관료 등 다양한 학설을 제기했다. 임영진은 일본 내 정치 변동으로 인해 한반도로 망명한 왜인으로 본다. 그는 장고분을 비롯한 한반도 전방후원형 고분의 입지와 구조를 주목하고 있다. 5∼6세기 당시 영산강 유역의 중심은 나주 반남 고분 일대인데, 왜계 전방후원형 고분은 이곳에서 떨어진 외곽에 여기저기 흩어진 단독분 형태로 존재한다. 입지나 규모로 봤을 때 이 지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지배층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 고분은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어 교역 목적으로 일본에서 파견한 왜인으로 보기도 부자연스럽다. 임영진은 이 무렵 일본에서 야마토(大和) 정권과 이와이(磐井) 세력이 각축을 벌이던 과정에서 북규슈 일대를 장악하던 세력이 떠밀려 한반도로 망명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월계동 고분 등이 북규슈 무덤의 석실 구조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영산강 유역을 차지한 마한은 북규슈 세력과 오랜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망명을 받아들였을 것”이라며 “다만 왜인들의 세력화를 막기 위해 각지로 분산시킨 것 같다”고 분석했다.  광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 201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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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개인이 희생해야 경제발전” 독재를 위한 속임수였다

     최근 국정 역사교과서 파동의 핵심 이슈 중 하나는 박정희 정권의 공과(功過) 평가였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수십 년 동안 독재정치와 경제성장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였다. 이것은 소위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잣대로도 기능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대한민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세계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 단계에서 정치 리더십의 역할은 늘 논란의 대상이 됐다. 과연 저발전 상태에서 경제성장 속도를 높이려면 효율적인 자원 배분 차원에서 독재정치를 감수해야 하는가. 세계은행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제학과 교수로 있는 저자는 ‘권위주의 발전’은 허상이라고 단언한다. 경제발전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잠시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는 애초부터 독재자의 속임수에 불과하며, 실제로 통계를 분석해도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개도국들의 저성장은 대부분 독재자들의 집권기에 나타나며, 특히 독재 기간과 성장률을 정밀 분석하면 호황은 이미 독재자들의 임기 전부터 시작된다는 주장이다. 가령 한국의 경우 박정희와 전두환, 그리고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의 노태우가 독재자들이지만, 한국의 성장률 자료는 이 세 사람의 집권기 자료들이 거의 전부다. 따라서 어느 한 사람의 정책보다는 한국의 조건과 사건이 더 중요했을 공산이 크다. 그는 권위주의 발전의 뿌리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근대화’를 내세운 서구 제국주의에서 찾는다. 제국주의 논리가 현재에 이르러 개도국 독재자들과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발전기구로 계승됐다는 얘기다. 오히려 진정한 경제발전은 개인들이 각자의 권리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게 이 책의 골자다. 자유로운 개인이 모여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시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해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도국의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려면 인권과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 시스템부터 갖춰야 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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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끝내 풀지 못한 ‘증도가자’ 미스터리… 1년 반 동안 헛심만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금속활자로 추정된 ‘증도가자(證道歌字)’를 놓고 문화재청이 1년 6개월 동안 재조사를 벌였지만 진위를 밝히는 데 결국 실패한 것으로 확인됐다. 검증 핵심인 제조연대와 출처를 규명하지 못한 채 국가 예산과 시간만 허비한 것이다. 이에 따라 증도가자에 대한 국가문화재 지정은 일단 보류될 가능성이 커졌다.》  문화재청 등에 따르면 6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증도가자 최종 검증결과 보고회가 비공개로 열렸다. 이 자리에서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연구원들이 문화재청 ‘고려금속활자 지정조사단’ 12명과 문화재위원 3명에게 검증결과를 보고했다. 증도가자 진위 논란이 불거진 직후인 지난해 6월 지정조사단이 구성된 이후 1년 6개월 만에 이뤄진 최종 보고였다. 문화재위원회는 이 결과를 토대로 국가문화재 지정 여부를 조만간 결정하게 된다. 이날 보고회에 참석한 문화재위원회 관계자는 “문화재연구소나 국과수 모두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며 “증도가자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앞서 지난달 28, 29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전통문화교육원 ‘동산문화재 관리 과정’ 강연에서 황권순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장이 “증도가자를 진짜라고 할 수도 없고 가짜라고 할 수도 없다”며 “검증 결과를 발표하기가 참 애매하다”고 발언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검증의 핵심은 금속활자의 제조연대와 출처. 6일 결과보고에서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다보성고미술이 소장한 101개 금속활자에 대해 3차원(3D) 컴퓨터단층촬영(CT) 등을 실시한 결과 인위적인 성분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제조연대를 확정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청주 고인쇄박물관 소장 증도가자 7개에서 인위적인 조작 흔적이 발견됐다”는 국과수의 지난해 발표를 부정하면서도 ‘고려시대’ 활자라는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국과수는 이날 발표에서 금속활자와 증도가 목판 번각본(금속활자로 찍은 책을 목판 위에 놓고 똑같이 다시 새긴 것)의 서체 비교 결과를 제시했다. 국과수는 “특수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비교한 결과 금속활자와 증도가의 서체가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증도가자가 가짜일 가능성에 무게를 둔 것이다. 그러나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오류 지적에 대해서는 따로 반박하지 않았다. 증도가자 출처도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문화재청은 “일본에서 활자가 넘어왔다”는 다보성고미술 측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추가로 확보했지만, 중간에 활자를 보유했다는 소장자가 사망해 입증에 한계가 있는 상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출토지가 분명하지 않은 데다 명문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출처를 명확히 규명하기는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이에 따라 6년 전부터 “출처가 불확실하다”는 학계 지적에 따라 국가문화재 지정이 이미 보류된 바 있는 증도가자에 대해 나선화 문화재청장이 2013년 부임 직후 무리하게 지정을 추진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한 문화재계 인사는 “수년간 많은 인원과 예산을 동원해 국가문화재 지정을 무리하게 추진한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국가지정문화재 결정의 열쇠를 쥐고 있는 문화재위원회는 8일 동산문화재분과 회의에서 검증결과를 보고받을 예정이다. 문화재위원회 관계자는 “확실한 검증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면 이전 위원회처럼 지정을 보류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6-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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