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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축에선 일본 노래만 흘러나온다. 어린이 교육상 좋지 못하겠기에, 잘 간직해 둔 아끼는 한국 판(아리랑 고개 넘어)을 꺼내서 들려줬다.…국산 LP판 음악 소리가 나오면 다들 좋아하신다. 있을 땐 몰랐으나 떠나 보니 무엇이나 ‘한국적’인 게 좋다. 2세들은 신이 나서 큰 소리로 따라 부른다.’(1963년 1월 브라질로 가는 배에서) 큰맘 먹고 여객선에 몸을 실은 지 겨우 한 달 남짓. 벌써부터 고향 것은 모든 게 소중했다. 망망대해에 울려 퍼지던 아리랑은 대관절 뭐라서 이리도 맘을 울컥거리게 만들까. 51년 전, 대한민국의 ‘공식 이민 제1호’ 브라질 이민단은 그렇게 바다를 가르며 조국과 이별했다.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브라질 수교 55주년을 맞아 개최한 특별전 ‘브라질 속의 한국인’에는 왠지 박물관엔 어색해 보이는 전시품이 하나 있다. 튤립 꽃문양이 앙증맞지만 너무도 낡디 낡은 스프링노트 한 권이다. 푸른색 펜으로 꾹꾹 눌러 쓴 글은 1962년 12월 18일 부산항에서 출발한 이민자 103명에 끼어 있던 백옥빈 여사(91)가 쓴 일기. 평북 정주 출신인 그는 서울서 초등학교 교사를 지내다 가족 전체가 이민했다.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는 삶은 여정부터 쉽지 않았다. 장장 56일 동안 홍콩과 싱가포르를 지나 인도양을 건넌 뒤 남아프리카공화국을 거쳐 대서양을 횡단했다. 거친 풍랑도 힘들었지만 그보다 가슴 아픈 건 그들을 향한 시선이었다. 백 여사는 “한국이 싫으냐. 무엇하러 먼 데까지 가느냐며 비웃는 이들이 많았다”고 떠올렸다. ‘한국 사람으로 한국을 싫어하는 삶이 어디 있겠어요. 이 좁은 땅덩이에서 서로 헐뜯고 우물 안 개구리로 복작대는 것보다 넓은 땅에서 마음껏 배우고 실력을 발휘해보고 싶은 마음. 나아가 한국의 이름을 널리 떨치고, 제2의 한국을 브라질에 이룩할 수 있단 희망이 결심의 동기였습니다.’ 어렵사리 도착한 이국의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시 브라질 1인당 국민총소득은 230달러로 한국(110달러)의 2배. 그보다 ‘까마득하게 올려다 보이는 빌딩들이 즐비한’ 도시에 압도됐다. 백 여사는 ‘(여기가) 지상낙원도 아니며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고락이 같이 있다는 걸 알았다’며 ‘다만 자기가 노력하면 그만큼 발전할 수 있기에 우리는 여기 왔다’고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농장을 차리려던 이민자들의 꿈은 겨우 3∼4년 만에 풍비박산이 났다. 1965년까지 총 1300여 명이 농업이민을 왔지만 성공한 이가 없었다. 이 실패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민자들은 대다수 퇴역장교거나 도시 중산층 출신으로 농사를 제대로 지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최금좌 한국외국어대 교수)이다. 농토 개간 인력을 바라는 브라질과 이민 자체가 목적이던 한국 정부의 동상이몽 사이에서 이민자들만 애꿎은 고생을 한 것. 결국 동포들은 살길을 찾아 도시로 향했다. 백 여사 가족 역시 상파울루로 떠났다. 이후의 일은 일기에 자세히 소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인들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1970년대부터 의류사업에 뛰어들어 특유의 근면성실로 한인 의류상가 ‘봉헤치루(Bom Retiro)’를 현재 브라질에서 가장 유명한 패션거리로 만들었다. 백 여사 가족은 전문직의 길을 택했다. 남편은 의사, 본인은 약사의 길을 걸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염경화 학예연구관은 “일기를 보면 이민자들이 해마다 명절은 물론이고 3·1절 같은 국경일을 함께 보내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며 “동포들이 똘똘 뭉쳐 고난을 극복한 역사는 감동 이상의 큰 울림이 있다”고 말했다. 6월 15일까지 무료. 02-3703-92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19세기 조선에서 벌어진 천주교 박해를 다룬 이탈리아 희곡 ‘조선의 순교자들(The Martyrs of Corea)’의 영문 초판이 발견됐다. 조선 후기 한반도를 소재로 유럽에서 창작한 종교적 문학작품의 존재가 확인된 건 처음이다. 한국 관련 해외 서지자료를 수집하는 ‘아트뱅크’의 윤형원 대표(68)는 11일 “미국 필라델피아의 D J 갤러거 출판사가 1887년 출간한 희곡 ‘조선의 순교자들’ 1쇄본을 최근 해외 고서적 마켓에서 입수했다”고 밝혔다. 총 53쪽으로 이뤄진 이 희곡은 안토니오 이솔레리라는 작가가 썼는데, 이탈리아에서 먼저 출간한 뒤 작가가 직접 영어로 번역했다는 설명이 나온다. ‘종교와 조국(Religion and Fatherland)’이란 부제가 붙은 이 희곡은 머리말에 “1866년 3월 8일의 순교에 대해 썼다”는 대목이 있다. 이날은 프랑스 파리외방선교회 소속으로 조선교구(조선대목구) 제4대 교구장이었던 장 베르뇌(한국명 장경일·張敬一·사진) 주교가 현 서울 용산구 이촌로에 있던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한 날이다. 희곡의 순교자는 1866년 조선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 사건이었던 병인박해 때 처형된 사람들이다. 베르뇌 주교를 포함해 프랑스 사제 9명과 조선의 천주교도 8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건 발생 이후 사건의 실태를 문학의 형식을 빌려 서구사회에 전하려는 목적이었다. 병인박해는 한국사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이때 탈출한 프랑스 신부 리델이 중국 톈진(天津)에 있던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를 알렸고, 프랑스 함대가 이를 빌미로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가 벌어졌다. 윤 대표는 “작가가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기보단 당시 상황을 충실하게 전하는 데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희곡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베르뇌 주교는 프랑스 르망 교구 출신으로 1837년 사제품을 받은 인물. 베트남에서 포교를 시작해 중국 랴오둥(遼東) 지방에서 10여 년간 활동했다. 1856년 한국에 입국한 그는 충북 제천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배론신학교’를 설립했다. 흥선 대원군이 1866년 천주교 탄압 교령을 포고한 뒤 출국을 명했으나, 이를 거부하다 체포돼 군문효수(軍門梟首·목을 베어 매다는 처벌)형에 처해졌다. 1968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諡福)됐고, 1984년 방한한 교황 바오로 2세가 성인(聖人)으로 추대했다. 희곡을 쓴 작가 이솔레리에 대해선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책에 “이탈리아에 있는 산타마리아막달레나 교회의 도움을 얻어 집필했다”는 구절이 있어 종교 관계자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이런 희곡이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는 반응이다. 교구 소속 ‘한국교회사연구소’는 “구한말 조선의 기독교 역사를 다룬 유럽 희곡은 존재 여부도 알려진 적이 없다”며 “병인박해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엄청난 의미를 지니는 만큼 향후 면밀한 연구가 꼭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평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지난달 25일 미국에서 반환된 왕실 인장 9과(顆)를 만날 수 있는 특별전이 서울 종로구 효자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13일부터 열린다. 문화재청은 11일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방한하며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반환한 어보 ‘수강태황제보(壽康太皇帝寶)’와 국새 ‘황제지보(皇帝之寶)’ ‘유서지보(諭書之寶)’ ‘준명지보(濬明之寶)’, 헌종(1827∼1849)의 사인(私印) 5과를 일반 관객에게 공개한다”고 밝혔다. 수강태황제보는 1907년 순종(1874∼1926)이 고종(1852∼1919)에게 ‘수강’이란 존호를 올리며 제작한 어보다. 8각 측면에 주역의 팔괘(八卦)를 새긴 희귀한 형식이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1907년에 제작된 국새 황제지보는 훈장 서훈이나 관직 임명 때 사용했다. 유서지보는 관리 임명장에, 준명지보는 춘방(春坊·왕세자 교육 관청) 관원 교지에 썼던 국새다. 헌종이 서화를 감상하거나 시를 지을 때 쓰던 사인들은 △향천심정서화지기(香泉審定書畵之記) △우천하사(友天下士) △쌍리(雙(리,이)) △춘화(春華) △연향(硯香)이다. 문화재청은 “격동의 시기에 불행하게 불법 반출됐던 왕실 인장의 가치와 의미를 마음 깊이 새길 기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8월 3일까지. 무료. 02-3701-75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제목이 거창하지만 이 책은 시장 이야기다. 의류회사와 백화점에서 13년간 VMD(visual merchandiser)로 활동한 저자(42)가 해외 전통시장의 생존 비법을 둘러보고 정리했단다. VMD란 한마디로 “떡을 보기 좋게” 만드는 직업. 그래야 맛도 좋을 것 같아 더 많이 사게 되니까. 박사학위까지 따고 높은 연봉을 받던 전문직 여성이 외국 시장 뒷골목을 누빈 이유가 뭘까. 7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본사에서 그를 만나봤다. ―화려한 명품관에서 일하다 시장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뭔가. “2005년쯤일 거다. 집 근처 부산 좌동시장 과일가게를 보고 너무 안타까웠다. 홍시를 진열해뒀는데 전혀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초록색 비닐 하나만 깔아도 분위기가 싹 바뀔 텐데…. 붉은 과일은 보색인 녹색에 진열하면 훨씬 싱싱해 보인다. 열심히 일하는 시장 상인들이 요령이 없어 고생하는 게 안타까웠다.” ―그럴듯하지만 실제로 소득에 도움이 되나. “친구가 경북 포항시 죽도시장에서 생선가게를 한다. 매출 걱정이 많기에 조언을 좀 해줬다. 생선을 사선으로 진열하고 백열등 대신에 형광등 조명을 쓰라고. 어땠을 것 같나. 그 친구, 아직도 고마워한다. 이미 많은 백화점이나 대형마트가 VMD를 고용해 큰 효과를 본다. 정말 그런 작업이 필요한 건 전통시장 아니겠나.” ―그럼 그런 노하우를 전하면 되지, 해외엔 왜 갔나. “나름 소상공인을 위한 강연도 하고 카운슬링도 했다. 하지만 국내 재래시장은 해마다 15%씩 줄어드는데 미국은 오히려 매년 340개씩 늘었다. 도대체 왜 그럴까. 그걸 알면 더 도울 수 있을 거란 욕심이 생겼다. 남편을 설득해 함께 1년 동안 40개국 시장 150여 곳을 열심히 발품 팔았다.” ―가보니 어떻던가. “결론은 ‘기본에 충실하자’였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길모어 파머스 마켓’은 허름한 시설에도 손님이 넘쳐난다. 바로 옆에 대형마트가 즐비한데도. 이유는 품질이었다. 상인들이 스스로 철저히 관리해 최상급 제품을 팔았다. 가격이 대형마트보다 비싸도 그 신뢰감이 고객을 끌어 모았다. 한국은 재래시장 하면 저렴함을 앞세우는데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국내 시장은 현실적 제약이 많지 않나. “서울 재래시장의 가장 큰 고민이 주차장이다. 해외 시장도 대부분 주차장이 없다. 그런데 왜 잘되냐고? 독일 뮌헨 ‘빅투알리엔 마르크’는 숲 공원과 연결돼 산책과 쇼핑을 함께 한다. 폴란드 ‘크라쿠프 중앙시장’은 거기 아니면 안 파는 물건으로 손님을 유혹한다. 현실만 탓하면 무엇도 바뀌지 않는다. 물론 정부도 좀 더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 ―당장 적용할 수 있는 비법은 없나. “시장마다 특성이 있으니 그에 따른 대처가 중요하다. 일본 오사카 ‘구로몬 시장’의 한 과일가게는 꼭지를 그대로 남겨둔 딸기를 포장하지 않은 채 놓고 판다. 고객이 하나씩 직접 주워 담는다. 불편해 싫을 것 같다고? ‘직접 농장에서 따는 것 같아 재밌다’며 엄청 성황이었다. 경쟁력은 발상의 전환에서 비롯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문화재청이 7일 ‘서울 보타사(普陀寺) 마애보살좌상’(사진)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마애보살좌상은 서울 성북구 안암로 고려대와 고대 안암병원 사이에 있는 개운사(開運寺)의 암자인 보타사 뒤쪽 암벽에 조각된 상이다. 보관을 쓴 머리를 암벽 돌출한 면에 새겨 앞으로 약간 숙인 듯 보인다. 신체는 다소 비스듬하면서도 어깨가 넓어 당당한 기운을 풍기지만 얼굴은 갸름하고 이목구비가 부드럽다. 문화재청은 “보물 제1820호인 서울 서대문구 홍지문길 ‘옥천암(玉泉庵) 마애보살좌상’과 함께 입체감이 두드러지지 않고 옷 주름이 기하학적인 조선 개국 전후 보살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대전 대덕구 비래사(飛來寺)의 목조비로자나불좌상과 경기 용인시 경기도박물관에 있는 ‘분청사기 상감 정통(正統)4년 명 김명리 묘지(墓誌·죽은 이의 이력을 적어 무덤에 함께 묻는 기록물)’도 함께 보물로 지정 예고됐다. 차분하고 단정한 분위기의 비래사 비로자나불좌상은 불상 밑면에 제작 시기(1651년·효종 2년)와 조각가 이름(무염·無染)이 기록돼 17세기 불교조각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시대 평안도 성천도호부 부사를 지낸 김명리(金明理·1368∼1438)의 묘지는 종 모양의 분청사기로 희귀할 뿐 아니라 조선 초 가계 연구에도 소중한 사료다. 정통은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로, 정통4년은 1439년(세종 21년)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옥상은 야누스적이다.’ 사회학자인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저서 ‘옥상의 공간사회학’에서 옥상의 이중적인 면모를 짚었다. 옥상은 존재하면서 부재한다. 분명 존재하지만 일상생활의 눈높이에선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옥상은 사용(私用)과 공유(共有)의 공간이다. 권력과 자본이 지배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에겐 저항의 무대이고, 구조와 탈출의 관점에선 희망의 장소이지만 추락과 사고의 시각에선 절망의 공간이기도 하다. 또 버리는 공간이자 가꿈의 대상이다. 부산의 부부건축가인 오신욱(44) 노정민(42) 건축사사무소 라움 공동대표는 옥상의 밝은 면모를 발견하고 신작 ‘옥상라움’을 완공했다. 옥상라움은 지난해 말 부산의 번화가인 부산진구 부전동에 14층짜리 오피스텔을 지으면서 옥상에 마련한 라움의 설계사무실과 야외 갤러리인 ‘아트스페이스 라움’으로 구성돼 있다. “공사를 하던 어느 날 옥상이라는 공간이 눈에 들어왔어요. 도심 빌딩의 옥상은 엘리베이터와 주차타워용 옥탑만 덩그러니 놓고 버려두는 공간이죠. 잘만 활용하면 형편이 어려운 건축가나 예술가들의 작업 공간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대개는 용적률을 꽉 채워 짓지 않기 때문에 작은 사무실을 지을 면적은 남아 있거든요.” 부부 건축가는 남아 있는 법정 용적률의 한도 내에서 사무실 면적 195.47m²(약 59평)를 뽑아내 1억 원에 분양받았다. 옥상 면적(395.12m²)의 약 절반 크기다. 이 오피스텔의 평당 분양가가 850만∼880만 원임을 감안하면 매우 싼 가격이다. 건축주로서는 어차피 버릴 공간이었기 때문에 헐값에 내준 것이다. 이들은 공사비 1억 원을 들여 7명이 일하는 설계사무실을 짓고 나머지 옥상 공간은 전시 공간으로 꾸몄다. 배롱나무 연산홍 남천이 심어져 있는 화단도 있다. 옥상라움의 배치는 이곳이 원래 옥상임을 강조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에서 내리면 하늘이 열려 있는 야외 전시장을 거쳐 사무실로 들어가게 돼 있다. 사무실 건물은 옥탑과 분리돼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도 이곳이 옥상임을 일깨워 준다. 옥상라움은 주변에 2.4m 높이의 난간을 설치해 불안한 전망보다는 닫힌 안정감을 택했다. 그래서 중정형 주택에 들어와 있는 듯 조용하고 아늑하다. 사무실에 있으면 야외 전시장 쪽으로 달아놓은 접이식 유리문을 통해 바깥 공기와 볕이 들어온다. 북쪽으로 낸 커다란 창으로는 도심 전망이 내려다보인다. 옥상라움의 미덕은 옥상의 혜택을 독점하지 않는 데 있다. 야외 전시장은 설치미술을 하는 작가들이 무료로 이용한다. 오피스텔 입주자들과 외부인들도 이곳까지 올라와 작품과 조경과 도심 전망을 감상한다. 격주 토요일 오전에는 접이식 유리문을 열고 회의실과 야외 전시장을 연결해 건축과 문화 세미나도 연다. 내년에 구청의 옥상 텃밭 가꾸기 사업비 지원을 받아 사무실 옥상에 텃밭을 꾸며놓으면 공용 공간은 더욱 늘어나게 된다. “처음엔 사람들이 이곳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쓰레기를 버리고 어질러 놓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그런데 작품을 전시해 놓으니 함부로 하지 않더군요. 옥상에 문화 시설이 있고 이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의 작업실이 있다고 하니 분양에도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옥상을 활용하면 도시 가용 면적이 크게 늘어날 수 있어요. 높이가 같은 저층 건물의 경우 옥상 공간을 연결해 쓸 수도 있습니다. 옥상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옥상에 대한 상상력만 있다면.”부산=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엄마, 이게 뭐야? 샛노란 게 꼭 호박처럼 생겼어.” “응, 맞아. 이 작가 할머니가 넉넉하고 수수한 호박을 무척 좋아한대.” 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4일부터 열린 일본 현대예술의 거장 쿠사마 야요이(85)의 개인전 ‘쿠사마 야요이―A Dream that I dreamed(내가 꿈꾸는 꿈)’는 연휴 끝자락임에도 왁자지껄 북적였다. 오전에는 노부부나 젊은 커플이 많아 차분한 분위기였지만, 점심시간이 지나자 자녀를 동반한 가족 관람객이 부쩍 늘었다. 아이 옆에서 눈높이를 맞춰가며 얘기하거나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개막 사흘째인 이 전시는 연휴 동안 매일 2500명 이상 몰렸다. 쿠사마 특유의 화려한 물방울무늬 작품 앞엔 알록달록한 색감 때문인지 어린이 관객들이 많았다. 가이드북을 보며 유치원생 아들에게 작품 설명을 해 주던 박수경 씨(38)는 “이 전시는 왠지 몽환적이면서도 아이가 어려워하지 않아서 좋다”며 “누구나 마음대로 볼 수 있으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독특함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쿠사마의 작품들은 강렬한 치유의 에너지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 가장 중점을 뒀다. 어린 시절 편집적 강박증을 앓은 작가는 정신병원 신세까지 지며 힘겨운 시기를 보냈다. 그에게 예술은 삶을 달래주는 치료제이자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가는 나침반이었다. 평소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아 전시를 앞두고 한국의 세월호 참사 소식을 듣고 무척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개막 직전 축하연도 취소하고 “조심스럽지만 내가 작품 활동으로 위로받았듯 다만 몇 명이라도 아픔을 다독이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1층에서 3층까지 설치미술과 회화 조각 영상을 포함해 120여 점을 소개한 전시는 층마다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커다란 호박 3점이 함께 모인 대표작 ‘Pumpkin, Pumpkin, Great Gigantic Pumpkin’이나 관객이 가장 사진을 많이 찍는 ‘With All My Love for the Tulips, I Pray Forever’가 있는 1, 2층은 화려한 미감에 어린이와 청소년이 놀이터라도 온 듯 신나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흑백 실크스크린으로 만든 50개의 회화작품 ‘Love Forever’나 2009년부터 시작했다는 회화 시리즈 ‘My Eternal Soul Paintings’는 매우 시적이고 은은한 분위기를 풍겨 작품 앞에 머무는 30, 40대가 많았다. 관람객 고성우 씨(42)는 “실크스크린 회화 가운데 ‘1000개의 눈’이란 작품이 맘에 들었다”며 “작가의 아픈 내면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3층 ‘Obliteration Room(소멸의 방)’은 공간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물방울무늬 스티커를 붙이도록 돼 있다. 고요한 흰색 방이던 작품이 관객의 참여로 원래 모습이 소멸한다는 의미다. 팁 한 가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에 내리자마자 오른쪽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놓치지 말 것. 1966년 베니스비엔날레 야외에서 처음 선보인 설치 작품 ‘Narcissus Garden’과 함께 펼쳐진 근사한 전경을 카메라에 담는 이들이 많다. 6월 15일까지. 6000∼1만5000원. 02-580-13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종묘(宗廟)는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은 조선 왕실의 상징이다. 건축물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을 뿐 아니라 신주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종묘대제(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도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올라 있다. 대제는 조선시대엔 1년에 다섯 차례 제례를 지냈으며 1969년부터 해마다 5월 첫 일요일에 봉행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 효자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 ‘종묘’는 이런 종묘의 역사와 건축, 제례문화를 통틀어 살펴보는 자리다. 왕과 왕비가 승하한 뒤 신주를 모시는 의식 ‘부묘(부廟)’부터 선왕을 추모하는 공간인 ‘망묘루(望廟樓)’, 제향을 지내는 본무대인 ‘영녕전(永寧殿)’과 ‘정전(正殿)’까지 종묘와 관련된 다양한 문화재 330여 점을 선보인다. 부묘에선 신여(神輿)와 신좌교의(神座交椅)가 주요한 유물이다. 신여는 신주를 종묘까지 모시는 가마, 신좌교의는 신주가 모셔지는 의자를 일컫는다. 세련되면서도 장엄하고 가볍지 않은 왕실 제례의 철학이 묻어난다. 망묘루에서 영조(1694∼1776)와 정조(1752∼1800)가 직접 짓고 썼다는 글이 새겨진 현판들도 인상적이다. 선왕을 기리고 종묘사직과 백성을 생각하는 성군의 면모가 엿보인다. 제례에 쓰이는 제기도 눈여겨볼 만하다. 임금이 손 씻을 때 사용한 ‘어관세이(御관洗이) 및 반(槃)’과 제관이 손을 씻는 ‘세뢰(洗뢰)와 세(洗), 세작(洗勺)’은 문양이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넘친다. 종묘제례악에 쓰인 악기와 일무(佾舞·여러 줄로 벌여 서서 추던 춤)를 그림으로 묘사한 서적 ‘시용무보(時用舞譜)’도 전시된다. 8월 3일까지. 무료. 02-3701-75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감성(感性)이라…. 참 흔히 쓰는 말인데, 막상 정의를 내리자니 멈칫한다. 사전을 찾아보니 ‘자극이나 자극의 변화를 느끼는 성질’ 혹은 ‘이성(理性)에 대응되는 개념. 외부 대상을 감각하고 지각하여 표상을 형성하는 인간의 인식 능력’이란다. 다행히 이 책도 학술서나 철학책이 으레 벌이는 ‘개념 정의’에 진을 빼진 않겠단다. 고맙다! 호기롭게 펼쳤다가도 공자 왈 맹자 왈 수십 쪽 넘게 나와 조용히 덮은 적 많다. 연세대 국학연구원 HK(인문한국)사업단 소속 학자들이 3년 동안 함께 연구해 한 꼭지씩 논문을 맡은 이 책은 ‘비문자 언어’인 감성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존재해왔고 경험됐는지 그 실체 추적에 초점을 맞췄다. 게재된 논문 10개는 순서도 상관없고 선택도 마음대로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감성에 관심이 많다면 3장 ‘법과 감정은 어떻게 동거해왔나’와 4장 ‘살인사건을 둘러싼 조선의 감성 정치’를 읽어보면 좋다. 특히 3장은 15세기 장모인 정씨 부인과 사위 강순덕 사이에 벌어진 재산 분쟁을 통해 당시 법체계가 감정을 어떤 식으로 담아냈는지 고찰한다. 조선엔 소원(訴寃·원통함을 하소연하다)제도를 통해 백성의 억울한 감정을 처리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유교사상의 엄격한 질서를 근간으로 하되 인정(人情)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노력은 현대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쉬운 점도 있다. 중세와 근대를 소재로 삼은 글은 내용이 구체적이면서도 어렵지 않아 읽는 맛이 있다. 그런데 현대사회나 철학적 면을 다룬 장은 꽤나 난해하다. 2장 ‘도덕감정-부채의식과 죄책감의 연대’는 최근 국내 상황과도 잘 맞는 훌륭한 내용이나, 학자의 식견을 따라잡기가 벅차다. 살짝 학술용어를 줄이고 실생활을 담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사전 정의에도 나왔지만 과거 ‘반(反)이성’으로 여겨지며 홀대받던 감성은 최근 학계에서 주목받는 화두다. 특히 사회적 소통의 중요성이 커지는 이때, 감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는 건 반가운 일이다. 다만 이럴수록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진 말길. 감성사회가 또 다른 규정 틀이 되지 않길 바란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문화재청은 1일 오수동 전 주미 한국대사관 홍보공사(65·사진)를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사무총장으로 임명했다. 임기는 3년. 오 신임 사무총장은 주미 대사관 참사관, 주뉴욕 총영사관 참사관을 지냈다.}

4월 28일 오후, 숭례문은 울고 있었다. 비는 참 얄궂다. 청량한 봄비가 반가울 때도 있다. 그러나 요즘 같아선 추적추적 마음이 잦아든다. 이날도 처마 끝에 매달린 물방울에 울컥 서글퍼졌다. 고개 들어 숭례문을 바라보던 나선화 문화재청장과 문화재계 원로 배기동 국제박물관협의회 한국위원장(한양대 교수)도 입술을 굳게 다문 채 한참 말이 없었다. 4일 숭례문 복구 1년을 앞뒀지만, 흥이 날 리 만무할 터. 숭례문 복구 한 달 만에 단청 박락이 발견된 후 문화재 종사자들에겐 1년 내내 고개를 들 수 없는 시간이 이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문화재 관련 구조적 비리 척결을 천명한 뒤 대규모 감사와 경찰 수사로 확대됐고, 급기야 변영섭 전 문화재청장이 취임 8개월 만에 낙마했다. 나 청장은 “솔직히 공직자나 학자로서든 기성세대이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배 위원장은 “숙제가 잔뜩 쌓였는데 잘못만 빈다고 뭐가 달라지나”며 “염치없어도 숭례문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 청장(이하 나)=먼저, 드릴 말씀이 있다. 복구 1년을 맞지만 기념할 생각은 전혀 없다. 취임 전 일이라고 회피할 생각도 없다. 송구할 뿐이다. 다만 이런 계기로 조언도 듣고, 공개적으로 반성과 다짐을 전하고 싶다. 배 위원장(이하 배)=숭례문은 한국의 자화상이다. 우리 수준이 딱 이만큼임을 아프게 깨쳐야 한다. 우리 모두 기존 시스템에 안주해 면밀하지 못했다. 뭣보다 공직자 그리고 문화재 관리는 도덕성이 바탕이 돼야 한다. 국민은 숭례문 단청이 벗겨진 것보다 그런 가치관이 흔들렸다는 데 더 실망했다. 나=문화재청 내부에서도 실망하는 이가 많은데, 국민은 오죽하겠나. 사후약방문이긴 해도 도덕적 부분만큼은 엄격한 잣대로 보겠다. 과하다, 너무하단 소릴 듣더라도 지금은 일벌백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비리는 법적 기준에 연연하지 않고 강력 대응하겠다. 뼈를 깎는 심정으로 임하겠다. 배=자정능력을 키우려면 극약처방도 필요하다. 다만 시스템 개선이 뒤따라야 한다. 불법은 당연히 처벌해야 한다. 그런데 상당수 문화재 관련 업체가 얼마나 영세한지도 이번 기회에 함께 드러났다. 검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시스템을 살펴야 한다. 나=사태의 발단이 된 단청 문제는 현 체제의 허점이 드러난 사례다. 전통기술을 되살리려던 의도는 좋다. 하지만 능력의 한계를 솔직히 털어놓지 못했다. 이를 점검하는 방식 또한 안일했다. 단청 전통기술 복원은 문화재청과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총력을 기울이겠지만 앞으로도 최소 5년 이상 걸릴 것으로 본다. 이게 우리의 현주소다. 배=20세기 성장개발 신화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됐다. 문화재는 속도전의 대상이 돼선 안 된다. 요즘 국민의 눈높이는 선진국 수준이다. 정부가 따라가질 못하고 있다. 외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억지소리라도 듣는 귀는 열어 둬야 하는 법이다. 단청 제외하고 목재나 기와 등 숭례문 복원에 대한 다른 지적은 문화재청 입장에서 억울한 면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공직자의 업이다. 단청장이나 대목장 같은 중요무형문화재도 공직(公職) 수준에서 관리해야 한다. 나=무형문화재는 선정 과정을 모두 공개해 투명성을 으뜸으로 삼겠다. 쇼를 하자는 게 아니다. 모두가 공감하도록 선발심사를 점수로 매길 예정이다. 이 역시 서둘지 않을 생각이다. 지속적으로 공청회를 열고, 계속 고쳐가며 합의안을 내놓겠다. 배=수리자격증 불법 대여 논란도 큰 화두다. 사실 문화재계의 오랜 골칫거리였지만 해결이 안 되다 보니 관행처럼 굳어졌다. 하지만 틀린 건 틀린 거다. 어렵다고 손대지 않으면 갈수록 어려워진다. 꾸준히 고쳐나가는 의지를 보여 달라. 나=채찍과 당근을 병행하겠다. 앞으로 불법 대여는 소지자건 업체건 자격정지를 넘어 재진입 자체가 어려워질 것이다. 성실하고 공정한 이들은 사업 참여 기회가 폭넓어지는 환경을 만들겠다. 문화재는 소중한 국민의 자존심이다. 이를 대신 관리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갖도록 하겠다. 배=모든 종사자가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한 뒤 당당하게 말할 수 있도록 권위도 회복해야 한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국민의 불신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여실히 드러났다. 문화재청이 맞는 말을 해도 듣질 않더라. 그건 신뢰가 깨졌다는 증거다. 나=대책으로 수리실명제나 문화재복원 현장공개를 내놓은 것도 그런 이유다. 전시행정을 하려는 게 아니라, 보는 눈이 많아져야 더욱 신중해진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다. 숭례문이 부끄러운 국보 1호로 남지 않는 길은 이제부터 진정성을 보여드리는 수밖에 없다. 배=국민도 더욱 엄중히 지켜보고 감시해야 한다. 이 마음 아픈 사건들을 절대 잊지 말자. 치유는 망각이 아니라 극복에서 싹이 자란다. ▼ 단청-목재 등 부실논란에 관계자 자살… 사고와 비리 줄이어 ▼복구 뒤 바람 잘 날 없던 1년단청 박락에서 대규모 감사, 관계자 자살에 횡령 입건까지…. 4일 복구 1년을 맞는 숭례문은 지난해 성대한 기념식 이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복구 한 달 만에 단청 박락이 발견된 뒤 기와 부실까지 거론되며 숭례문을 둘러싼 문화재 전반은 ‘총체적 비리’의 집합체로 비난받았다. △단청=숭례문 단청을 실전된 전통기술로 복원하겠다는 시도는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일부 벗겨진 단청에 대해선 현재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책임자였던 홍창원 단청장은 2월 다른 문화재 보수공사에 불법으로 자격증을 대여해준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문화재청은 ‘제대로 된’ 단청 기술 복원에 나서겠다고 밝혔지만, 최소 몇 년은 걸릴 것으로 보인다. △목재=단청에서 촉발된 숭례문 사태는 목재에서 논란이 가장 컸다. 초기엔 기둥의 갈라짐 현상이 지적됐으나 이는 목조 건축물의 일반적 현상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러시아산 나무 사용 및 기증목 횡령 여부였다. 신응수 대목장(72)이 국민이 기증한 나무 대신 값싼 러시아산 나무를 썼다는 의혹이었다. 3월 국립산림과학원의 DNA 조사 결과 국내산인 것으로 결론이 났으나, 이 과정에서 참고인으로 경찰 조사를 받던 충북대 박모 교수(56)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경찰은 신 대목장이 숭례문이 아닌 광화문 복원 때 횡령을 저질렀다며 입건했으나 신 대목장은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기와=겨울철 동파 가능성이 제기됐다. 전통방식을 재현한다고 수제로 만든 기와는 흡수율이 높아 얼음이 어는 시기에 취약하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기와엔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일각에선 “이번 겨울이 비교적 따뜻했기 때문”이라며 안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수리자격증=오랜 병폐였던 수리기술자 자격증 불법 대여 문제도 도마에 올랐다. 경찰은 숭례문 복구 과정에선 혐의를 찾지 못했지만, 다른 여러 현장에서 자격증 소지자들이 관련업체에 자격증만 대여하고 돈을 받은 사실을 무더기로 적발했다. 이후 문화재청은 “자격정지 및 퇴출 기준을 강화하겠다”는 대책을 발표했다. △구조적 비리=박근혜 대통령이 문화재 관련 비리 척결을 천명하며 지난해 11월 감사원의 대규모 감사와 경찰청의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숭례문과 별개로 광화문 복구공사 과정에서 감리 감독을 담당한 문화재청 공무원 6명이 시공업체로부터 월 50만∼100만 원씩 돈을 받은 사실과 일부 문화재 위원이 금품을 수수한 정황도 밝혀졌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正宮)이다. 나라를 창업한 태조가 세운 첫 번째 궁이기도 한데, 임진왜란을 겪으며 소실된 뒤 한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다. 이를 고종 때인 1865∼1868년 중건했다. 그런데 이런 경복궁의 석조 장식물을 만든 장인들에게 무관 관직을 내렸음이 최근 밝혀졌다. 김민규 간송미술관 연구원은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술지 ‘문화재’에 게재한 ‘경복궁 인수(鱗獸·물고기나 용, 해치처럼 비늘이 있는 짐승)형 서수상(瑞獸像·상서로운 동물상)의 제작시기와 별간역(別看役) 연구’에서 이 같은 내용을 밝혔다. 제목의 별간역은 나라가 큰 사업을 벌일 때 이를 현장 감독하는 임시직함이다. 숙종 이후 궁궐을 짓거나 왕릉을 조성할 때 특별히 내리는 직함이었다. 공사일지인 ‘경복궁영건일기’에도 10여 명의 인물을 별간역으로 선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경복궁 중건에 참여한 대표적 별간역은 이세옥(李世玉)이란 인물이다. 1834년 창경궁 중건 때도 궁중 도화서 화원이 아니지만 실력을 인정받아 방외화사(方外畵師)로 참여했던 그는 요즘 외국인 관광객이 사진 찍는 명소 가운데 하나인 광화문 해치상 제작을 책임졌다. 당시 그가 받은 정식 직함은 당시 수도방위군인 훈련도감의 기패관(旗牌官·종9품 군관). 1997년 경회루 연못에서 찾아 화제를 모았던 청동용을 제작한 별간역 김재수(金在洙)의 정식 직함도 정3품 오위장(五衛將)이었다. 명문가 문인 집안 출신조차 이런 일을 맡길 땐 별간역을 제수했다.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증손인 강윤(姜潤)도 경복궁 중건에 별간역으로 참여한 무관직 종4품 군수 직이었다. 김 연구원은 “사농공상과 문무의 차별의식이 강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굳이 이런 구분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경복궁영건일기에 근거해 궁 조각상을 살펴보면 또 하나 재밌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궁을 복원하면서 장식물을 모두 새로 제작하진 않았다. 예를 들어 흥례문과 근정전 사이에 놓인 영제교(永濟橋)의 서수상은 윤곽이 평평하고 이목구비 구성이 조화로운 조선 전기 석조물의 특징을 고스란히 지녔다. 굳이 통일성을 고려해 새로 만들지 않고, 쓸 만한 옛 석물은 ‘재활용’했던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 왕릉 조성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발견된다. 현종(1641∼1674)과 명성왕후(1642∼1683)의 숭릉은 능침 주위 석물을 효종(1619∼1659)의 옛 영릉 터에 묻혀 있던 석물을 꺼내 사용했다. 장릉과 인릉, 예릉도 마찬가지다. 김 연구원은 “백성들이 곤궁하고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음을 감안해 왕실도 최대한 낭비를 막으려고 노력했음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베트남은 상당히 친숙한 나라다. 음식이나 의복이 유명하고 근·현대사도 꽤 알려졌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고대 청동기문화가 크게 번성했고, 당시 아시아 최고 수준의 청동 제련기술을 꽃피웠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영나)이 29일부터 개최한 올해 첫 특별전 ‘베트남 고대 문명전, 붉은 강의 새벽’은 베트남 국민이 “민족 자긍심의 원천”이라 부르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을 소개하는 자리다. 박물관이 2008년부터 베트남국립역사박물관과 공동 학술조사를 진행해 열매를 맺은 첫 번째 성과로, 선사시대 유물 380여 점을 선보였다. 여기서 ‘붉은 강’은 베트남 하면 떠오르는 남부 메콩 강이 아닌, 북부 홍 강(옛 송꼬이 강)을 일컫는다. 중국 윈난(雲南) 성에서 시작돼 베트남 통킹 만으로 흐르는 강(길이 1200여 km)은 철분이 많은 진흙 때문에 붉은색을 띠었다. 베트남 청동기문화는 바로 이 강을 낀 주변 지역에서 번성했다. 이번 전시의 핵심이자 베트남 청동기문화의 최절정기는 ‘동선문화’다. 기원전 500년경부터 서기 전후까지 이어진 동선문화는 현 베트남 민족의 원류로 여겨진다. 이 시기에 제작된 유물은 수준이 매우 높다. 특히 청동으로 만든 북과 종 같은 악기류나 칼과 항아리, 등잔을 비롯한 생활용품을 통해 당시의 고급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눈여겨봐야 할 문화재는 베트남국립역사박물관이 최고의 보물로 꼽는 ‘동선 청동 북’이다. 이번 전시에 모두 14점이 공개되는데, 얼핏 허리가 잘록한 항아리처럼 보이는 이 북들은 기하학적 무늬가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하떠이 지방에서 출토된 북의 고면(鼓面·북을 치는 면)엔 12개의 빛살을 가진 일광문(日光文·햇살무늬)을 중심으로 바둑판과 새, 빗금 무늬가 오묘하게 조화를 이뤘다. 동선문화의 또 다른 대표 유물인 ‘사람 모양 손잡이 칼’도 인상적이다. 손잡이를 당시 인물 모습 그대로 세밀하게 제작해 베트남 청동기 복식 연구에 요긴한 사료다. 남성은 샅바처럼 생긴 하의만 입고 팔찌와 귀걸이를 했으며 여성은 발뒤꿈치까지 내려오는 치마에 구슬 목걸이를 착용했다. 6월 29일까지. 무료. 02-2077-90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남한산성(사진)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사실상 확정됐다.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29일 “유네스코 유산위원회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가 남한산성을 ‘등재 권고’로 판정했다는 결과 보고서를 보내왔다”고 밝혔다. 공식 등재는 6월 15∼26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리는 제38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최종 결정되나, 이코모스가 권고 판정을 내린 문화유산이 보류된 적은 한 차례도 없다. 보고서는 남한산성이 등재 기준 가운데 ‘인류 가치의 중요한 교류 증거’와 ‘인류 역사의 주요 단계를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 2가지 항목을 충족시켰다고 밝혔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김지현 세계유산전문관은 “세계유산은 10가지 기준 중 하나만 충족해도 등재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문화재위원회 세계유산분과위원장인 이혜은 교수는 “남한산성은 병자호란과 같은 전시엔 왕이 머물며 업무를 보는 ‘비상 왕궁’ 역할을 했다”며 “이런 산성은 세계에서 유일하다는 점을 강조해 받아들여졌다”고 말했다. 조선 인조 때인 1624∼26년 축성한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晝長城) 옛 터를 활용해 지은 산성이다. 총면적이 52만 m²가 넘는 방대한 규모로 왕실과 정부가 거주할 수 있는 건축물에 군사시설까지 갖췄다. 남한산성의 등재가 공식 확정되면 한국은 모두 11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한 나라가 된다. 지금까지 △석굴암과 불국사 △종묘 △해인사 장경판전 △창덕궁 △화성 △경주 역사지구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조선왕릉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둥그런 백자호(白磁壺)를 부르는 ‘달 항아리’란 이름은 듣기만 해도 좋다. 넋을 놓고 바라보면 비루한 일상마저 품어줄 듯하다.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 서울미술관(이사장 서유진)이 개최한 ‘백자예찬: 미술, 백자를 품다’는 과거와 현대를 아우르는 백자의 아름다움을 재조명한 자리다. 백자 수집과 그리기를 즐겨 ‘달 항아리 작가’로도 불렸던 김환기(1913∼1974)와 호를 도천(陶泉·도자기의 샘)이라 지은 도상봉(1902∼1977)의 회화는 보고 또 봐도 매력적이다. 특히 김환기가 고향 전남 신안군 안좌도에서 항아리를 이고 가는 아낙들을 그린 ‘섬 스케치’는 지난해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구입해 국내엔 처음 소개된다. 21세기 들어 백자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들도 눈에 띈다. 손석 강익중 박선기 이승희 황세선 노세환 작가가 홀로그램이나 색다른 소재를 이용해 백자의 새로운 면을 조명했다. 구본창 사진작가가 4개국 16개 박물관에서 담은 조선 백자 사진도 놓치면 아쉽다. 도예가 한익환(1921∼2006)을 비롯해 조선 백자의 명맥을 이어가는 장인들의 백자 작품도 함께 전시된다. 8월 31일까지. 5000∼9000원. ‘문화가 있는 날’은 2500∼4500원. 02-395-01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한 사람이 한밤에 경찰에 붙잡혔다. 기분 나쁘다고 길가에 주차한 자동차 20대의 사이드미러를 발로 걷어차 부순 혐의. 그런데 오히려 자신이 차주들을 고발할 거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박살낼 때 발을 다쳤다. 치료비를 엄청 내놓아야 할 것”이라며. 뭐 이런 황당한 일이 있나 싶지만, 세상엔 이런 적반하장이나 후안무치한 행동을 벌이는 이들이 의외로 적지 않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세월호 사고를 보라. 승객들을 저버리고 탈출한 선장과 선원들. 기계적인 사죄뿐 거짓말로 일관하거나 오히려 큰소리다. 일부만 그러리라 믿고 싶지만, 관련 공무원이나 회사 관계자도 책임 떠넘기기 바쁘다. 원제가 ‘자기 잘못이다(Selber Schuld)’인 이 책은 바로 그런 모습이 사람과의 관계를 지치게 하고 사회를 불안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오스트리아 지크문트 프로이트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이자 신경학자인 저자는 “오늘날 인류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는 걸 힘들어한다. 눈앞의 고통이 두려워 타인에게 죄를 전가하거나 자기연민이란 손쉬운 변명의 틀에 빠진다”고 진단했다. 뭔 일이 벌어지면 모두가 자신이 피해자라고 여기는,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상황이 자주 벌어진단 것이다. 이는 단순히 거짓말로 위기만 모면하는 수준을 넘어서 지속적인 자기합리화, 더 나아가 자기기만으로 확장된다. 타인에겐 엄격하면서 자기에겐 관대한 방어기제가 작동하면서 사실이나 현상 자체를 왜곡하려는 시도가 벌어진다. ‘근대 정신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독일 정신의학자 에밀 크레펠린 박사(1856∼1926)는 이를 ‘기억 위조’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런 식의 자기기만은 ‘도덕’마저 곡해한다. 살인 행위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어 버린다). 배후에 양심에 걸리는 게 많을수록 새로운 거짓 도덕은 더 공격적이고 투쟁적이고 전체주의적이 된다.” 인간은 누구나 죄(잘못)를 짓는데, 문제는 이 죄의 몫이 항상 제대로 분배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에서 책은 출발한다. 책임을 부정하거나 타인에게 미루고, 아니면 오히려 과하게 받아들이는 행위는 오류를 바로잡고 재발을 방지하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패나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를 가져라. 그래야만 비로소 한 발 나아가 속죄하고 용서하는 치유의 단계로 접어들 수 있다고 저자는 다독인다. 이 책은 심리학 서적치곤 구성이 상당히 독특하다. ‘파우스트’ ‘레미제라블’과 같은 인간의 죄를 다룬 문학작품 9편을 뼈대로 삼은 뒤, 여기에 자신이 접하거나 공부했던 관련 상담사례 45건을 엮어 이해를 도왔다. 덕분에 전문적인 설명들도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다만 “죄를 받아들임으로써 죄에서 벗어난다”는 식으로 왠지 종교적 선문답처럼 매듭짓는 마무리는 다소 아쉽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25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미국에 있던 국새(國璽)와 어보(御寶)를 포함한 왕실인장 9과(顆)가 반환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데 이 왕실인장을 부르는 용어가 여럿이라 혼동을 일으킨다. 일단 국새와 어보는 쓰임새가 다르다. 국새는 정부 문서에 찍는 행정용 인장이다. 왕위 계승을 포함한 공식 의전에도 쓰였고, 임금이 행차할 때 맨 앞 가마에 실어 위엄을 과시했다. 국새는 국내 인사 발령이나 공무 처리에 쓰는 신보(信寶)와 외교문서에 찍는 행보(行寶)로 나뉘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서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는 “조선 후대로 가면 국새를 더 세분화해 사용했으나 실제로 크게 차이는 없다”고 말했다. 국새가 실무성이 강했다면, 어보는 상징성이 컸다. 혼례나 책봉 같은 왕실의식에서 시호나 존호를 올릴 때 제작됐는데 왕이 승하한 뒤 종묘(宗廟)에 모셔지는 제의용이었다. 왕은 물론이고 왕비와 세자, 세자빈도 어보를 받았다. 서 학예연구사는 “드물게 어보를 문서에 찍은 사례가 없진 않으나 원칙적으로는 보관용으로 보는 게 맞다”고 설명했다. 조선시대 어보는 총 360점이 제작돼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문정왕후의 금보를 포함해 현재 320여 점이 남아 있다. 국새는 40여 개 제작돼 현재는 10여 개만 남아있다. 어보와 국새를 통틀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건 보물 제1618호 황제어새(皇帝御璽·국립고궁박물관 소장)가 유일하다. 이 어새는 공식문서엔 등장하지 않는다. 학계에선 고종이 비밀 외교를 위한 친서에만 사용한 휴대용 국새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옥새(玉璽)와 어새(御璽)는 뭘까. 현대에 들어 옥새란 용어를 자주 쓰나 조선왕조실록엔 등장하지 않는다. 옥새는 중국 진시황이 처음 옥으로 제작한 뒤 황제의 인장을 통칭하는 말이 됐다. 제후국이었던 조선은 금으로 제작한 금보(金寶)를 썼고, 옥으로 제작한 국새에도 옥새란 표현을 피했다. 어새는 어보와 국새를 통칭할 때 쓴다. 이번에 반환되는 왕실인장에서 어보는 1907년 고종에게 바쳐진 ‘수강태황제보(壽康太皇帝寶)’ 1과다. ‘황제지보(皇帝之寶)’와 관리 임명장에 사용한 ‘유서지보(諭書之寶)’, 춘방(春坊·왕세자 교육 관청) 관원 교지에 쓴 ‘준명지보(濬明之寶)’ 3과가 국새에 해당한다. 황제국을 천명한 대한제국 수립 이후 옥으로 제작한 국새인 황제지보는 옥새다. 나머지 5과는 왕이 서화를 감상하거나 시를 지을 때 쓰던 사인(私印)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주위는 어둠이 내리고 곧 폭설이 내릴 기세다. 허나 청명한 달빛만은 고고하게 풍전등화의 세상을 비춘다. 나라 위한 마음이 어찌 이와 다를까. 추운 겨울이면 백성의 고충이 더욱 와 닿지만, 매화의 절개를 되새기며 뜻을 펼 때를 기다린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친필 한시 한 편이 새로 발굴됐다. 지금까지 알려진 건 난중일기에 실린 5편을 포함해 17편으로, 임진왜란 발발 전 정읍 현감 시절에 쓴 친필 한시가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전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교수)은 22일 “충무공이 45세가 되던 해 지인에게 보낸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찾았다”고 밝혔다. 제목 없이 ‘증김중군사명(贈金中軍士明·중군 김사명에게 보내다)’이라고 적혀 있는데 김사명은 절친했던 무인으로 추정된다. 경남대박물관 소장 사료에 포함돼 있던 이 시는 노 소장의 연구 끝에 충무공의 시로 확인됐다. 노 소장은 “충무공 특유의 왕희지 초서체 필법이 뚜렷하고 특히 이름과 ‘何(하)’ 같은 글자에서 충무공이 쓴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곧 폭설이 세상을 뒤덮을 날씨 속에서도 빛나는 달빛을 노래한 모습에선 전란을 예감하면서 ‘유비무환 임전무퇴’의 뜻을 가다듬는 무인의 자세가 엿보인다. 이러한 내용은 23일 출간되는 노 소장의 ‘이순신의 리더십’ 개정판에 실렸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18일 오전 전남 목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을씨년스러웠다. 갤 거라던 일기예보와 달리, 가느다란 빗줄기가 연신 흩뿌려서일까. 본관 옆에서 목공 장비를 챙기던 한 연구원은 문득 바다를 바라보다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긴 지금 누군들, 뭔들 손에 잡힐까. 2주일 전쯤 정한 취재 약속이었건만 서로가 심란하긴 마찬가지였다. “잘 왔다”며 손을 내밀던 소재구 연구소장도 몇 마디 나눌 틈도 없이 ‘진도 현장’ 상황을 체크하느라 바빴다. 연구소 소속 탐사선 ‘씨뮤즈 호’와 발굴선 ‘누리안 호’가 전날 세월호 사고 현장에 급파됐기 때문이다. 수중문화재 전용선이지만 뭐라도 도울 게 있을까 싶어서였다. 》‘마도 1호선’ 바닥 골격이 세워진 옆 마당은 곧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마도 1호선은 고려시대 조운선(漕運船·정부 곡식을 옮기는 배)으로 2010년 충남 태안군 마도 앞바다에서 일부 선체가 발굴됐다. 함께 발굴된 목간(木簡)을 통해 1208년에 침몰한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달 25일 복원사업이 시작됐는데, 야외작업이라 이날처럼 비가 오면 보통은 일을 멈춘다. 하지만 이날 연구원들은 누구도 쉴 생각을 안했다. 쓱싹쓱싹, 다들 말도 없이 대패 소리만 처연하게 퍼져나갔다. “속이야 뒤숭숭하죠. 다들 자식 키우는 아비 어미고, ‘바다 일’하는데…. 허나 험한 데서 고생하는데 우리라고 쉴 순 없지요. 게다가 이번 복원은 옛사람의 얼을 새로 찾는 일 아닙니까. 조상님들께 ‘피지도 못한 꽃들, 제발 살펴주세요’라고 빌며 못질 하나에도 정성을 쏟을랍니다.”(홍순재 학예연구사) 한반도 끝자락에서 별 주목을 못 받고 있지만, 마도 1호선 복원은 한국 선박 복원사(史)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될 사업이다. 1994년 ‘완도선’을 시작으로 연구소는 그간 배 4척을 복원했다. 하지만 추정 하나 없이 100% 수중 발굴한 유물과 문헌기록만을 바탕으로 고려 배를 다시 만드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당시 방식대로 거의 껍데기만 벗긴 지름 60∼70cm 아름드리 통나무로 배의 뼈대를 삼으며, 나무못으로 잇고 대나무 돛을 올린다. 소 소장은 “공정도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자귀나 대패, 끌과 같은 전통연장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냥 겉모습만 복원하는 게 아니라 당시 방식대로 바다에 띄워 항해할 수 있게 만드느라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복원은 준비기간만 2년 넘게 걸렸다. 마도 1호선은 부재 60여 편이 발굴됐으나, 주로 배 밑바닥 위주였다. 이 때문에 나머지 부분은 지금까지 발굴된 다른 고려 배 9척의 형태를 적용했다. 예를 들어 고물비우(船尾材·배꼬리 널판)는 ‘달리도선’과 ‘안좌도선’, 외판(外板·선체 외곽을 이루는 판)은 ‘마도 2, 3호선’을 기반으로 삼았다. 그래도 부족한 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고려도경 같은 옛 문헌을 참조했다. 최근 ‘신안 보물선의 마지막 대항해’를 출간한 김병근 학예연구사는 “대나무 돛은 고려시대 거울인 ‘황비창천명경(煌丕昌天銘鏡)’에 그려진 배의 생김새를 따왔다”고 설명했다. 마도 1호선은 길이 15.3m, 폭 6.6m의 약 43t급 배로 올해 말 완성을 목표로 한다. 탑승인원은 15∼20명, 곡식은 가마니로 500∼800섬을 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난관은 남아있다. 무엇보다 나무 구하는 게 어렵다. 고려 배는 휘어진 부분을 굽은 나무를 통째로 썼는데, 한반도 낙엽송(적송) 가운데 맞춤한 걸 찾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연구원들이 강원 산간에서 1년 가까이 발품을 팔아 80%는 구했지만, 아직 더 찾아내야 한다. “마도 1호선의 완성은 단지 고려 선박의 복원에 그치는 게 아닙니다. 이런 제작기술이 차곡차곡 쌓여 선박 복원 학자들의 마지막 꿈을 향해 달려가는 거죠. 최종 꿈이 뭐냐고요? 바로 충무공의 거북선을 복원하는 겁니다. 그날까지 연구와 시행착오는 계속될 겁니다.” (신희권 해양유물연구과장)목포=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아트선재센터에서 10주기를 맞은 박이소 작가(1957∼2004)의 ‘섬싱 포 너싱(Something for Nothing·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한 어떤 것)’과 비디오아티스트 김순기 작가(58)의 ‘달, 어디에, 시장을 넘어서, 침묵’전이 동시에 개최됐다. 2004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천재 설치미술가’로 불리는 박 작가의 개인전은 2011년 ‘개념의 여정’에 이어 두 번째다. ‘박모(Mo Bahc)’라는 이름으로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다. 2003년과 200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 참여했다. 이번 전시에선 설치와 조각 회화를 아우르는 4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하는 김 작가는 장자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바탕으로 실험적 형식 속에 시간과 언어,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담아내려 노력해왔다. 이번 전시 역시 다소 난해한 면이 없지 않으나 작가의 예술을 향한 오랜 탐구를 엿볼 수 있다. 두 전시 모두 6월 1일까지. 2000∼3000원. 02-733-8945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