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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는 분들이 종종 있는데 매번 없다고 하려니 민망하네요.” 19일 오후 서울 강북구 우이신설선의 한 전철역에서 만난 역사 관계자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급성 심정지 때 응급조치에 쓰이는 자동심장충격기(AED) 위치를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지난달 초 개통한 이곳에는 소화전 6개, 구호용품보관함 3개가 갖춰져 있다. 하지만 AED는 한 개도 없다. 우이신설선 역사에 AED를 반드시 설치해야 하는 건 아니다. 대합실 연면적 2000m² 이상, 하루 평균 이용자 1만 명 이상이라는 의무 설치 기준에 미달하기 때문이다. 우이신설선 이용자 중 30%는 만 65세 이상 고령자다. 승객 최모 씨(72)는 “사람이 규정에 맞춰서 장소를 골라 쓰러지는 건 아니지 않으냐”며 걱정했다. 우이신설경전철 관계자는 “구청이 AED를 확보했지만 비치까지는 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예술의전당 사장을 지낸 김용배 추계예술대 교수(63)가 17일 연주회 도중 갑자기 쓰러졌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사연()이 알려지면서 ‘AED’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당시 발 빠르게 심폐소생술을 해 김 교수를 살린 내과 전문의 김진용 씨(49·한국노바티스 전무)는 “흉부 압박만으로는 부족하다. AED가 있어야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수 있다. 당시 직원들이 AED 위치를 잘 알고 있어서 빠른 조치가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에게 온 기적이 우리 주위에서도 항상 일어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까. 19일 본보 취재진이 수도권의 주요 지하철역과 아파트 단지, 대형마트 등을 확인한 결과 기대가 현실이 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가장 큰 문제는 공공장소에 설치된 AED의 수가 턱없이 적다는 것이다. 서울 송파구의 한 아파트단지는 1300채가 넘어 의무 설치(500채 이상) 대상이다. 하지만 아파트 입구 주민센터에 고작 1대만 설치됐다. 단지 내 가장 구석진 동에서 정문까지 걸어서 20분이나 걸려 긴급 상황에서 사용하기 어렵다. 신분당선 강남역의 경우 AED가 지하 2층의 한 귀퉁이에 설치돼 있었다. 한 층 아래인 승강장에서 AED 설치 장소까지 뛰어가도 3분이 걸렸다. 심정지 후 4분이 지나도록 심장이 다시 뛰지 않으면 뇌 손상이 시작된다. 승강장 주변에서 사고가 생길 경우 ‘골든타임’ 4분을 지키기가 어려워 보였다. AED가 설치돼 있어도 눈에 잘 띄지 않거나 AED 위치 안내도 부실하다.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는 입구 안내 데스크 주변에 AED가 설치되어 있지만 주변에 박스가 수북이 쌓여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마트 직원들도 AED의 위치에 대해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 관리 상태가 좋지 않아 작동 여부가 불분명해 보이는 사례도 적지 않다. 지하철 2호선 교대역의 AED는 환자의 가슴에 붙이는 패드가 상자 밖으로 삐져나온 채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중앙응급의료센터 홈페이지()에서 제공되는 AED 찾기 서비스도 정확도가 낮았다. 서울 송파구 잠실동 A아파트의 경우 센터 홈페이지에서는 총 8대가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1대도 없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관리업체가 신고를 하지 않으면 업데이트가 잘 안 된다”고 말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급성 심정지로 병원에 이송된 환자는 2만9832명이다. 이 가운데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뇌 기능을 회복한 비율은 4.2%에 불과하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의 회생 비율은 7∼9%다. 황성오 연세대 교수(응급의학)는 “AED 공공장소 설치 기준을 ‘빠른 걸음으로 2분 이내’로 강화할 필요가 있다”며 “심정지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장소를 파악해 추가로 비치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 AED(Automated External Defibrillator) ::자동심장충격기 또는 자동제세동기로 불린다. 순간적인 전류충격으로 심장의 세동(細動), 즉 잔떨림을 제거하는 기계다. 심장마비는 심장이 제대로 뛰지 못하고 가늘게 떨고 있는 상태다. 이때 AED로 강한 전류를 흘려 심장을 완전히 멈추게 한 뒤 다시 정상 박동을 찾게 한다. 제세동기라는 이름이 어렵다는 의견에 따라 2015년부터 심장충격기로 많이 불린다. 최지선 aurinko@donga.com·권기범 기자}

17일 오후 8시 40분경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서울챔버오케스트라의 90회 정기연주회가 열리고 있었다. 인터미션(휴식시간) 전 마지막 곡인 멘델스존의 피아노 협주곡 1번 연주가 끝나자 700명 가까운 관객의 박수가 쏟아졌다. 앙코르 연주까지 끝난 뒤 다시 박수가 이어졌고 피아노 연주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술의전당 사장을 지낸 김용배 추계예술대 교수(63)였다. 그런데 일어서던 김 교수가 갑자기 왼쪽으로 쓰러졌다. 고목나무처럼 뻣뻣한 모습이었다. 놀란 단원 중 일부가 악기를 바닥에 놓고 달려갔다. 무대 옆에서 공연장 직원과 기획사 관계자가 뛰어왔다. 모두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라 섣불리 손을 쓰지 못했다. 그때 객석에서 누군가가 다급히 무대로 올라왔다. 공연을 보던 김진용 씨(49)였다. 내과 전문의 출신인 김 씨는 현재 다국적 제약회사인 한국노바티스 의학부의 전무로 일하며 고대안암병원 국제진료센터 교수도 맡고 있다. 그는 이날 무대에서 약 20m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김 씨는 김 교수가 쓰러지는 걸 보고 ‘위험한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앙코르 연주 때 목격한 김 교수의 안색이 좋지 않아서다. “눈떠 보세요!” 김 씨가 외쳤다. 김 교수의 의식과 호흡은 없었다. 맥박도 잡히지 않았다. 심장이 멎은 것이다. 김 씨는 주변에 “119를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동시에 김 교수를 똑바로 눕힌 뒤 허리띠와 셔츠 등을 풀었다. 그리고 심폐소생술(CPR)을 시작했다. 두 손으로 가슴을 강하게 누르며 김 씨는 예술의전당 직원에게 “입구에 자동심장충격기(AED)가 있던데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미끄러운 무대 위에서 흉부압박은 쉽지 않았다. 김 씨는 바지를 걷고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짓눌린 맨살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계속 가슴을 눌렀지만 3분 가까이 지나도 변화가 없었다. 3분 넘게 산소가 공급되지 않으면 뇌 손상 가능성이 크다. 김 씨의 어깨가 아파오면서 불안감이 커졌다. 그때 객석에서 2명이 올라왔다. 서울 양병원 외과 전문의 허창호 씨(31)와 간호사라고 밝힌 여성 1명이었다. 두 사람은 김 씨를 도와 번갈아 가며 심폐소생술을 했다. 곧이어 예술의전당 직원들이 AED를 가져왔다. 김 씨는 3분 간격으로 두 차례 작동시켰다. 그제야 김 교수의 심장이 가까스로 뛰기 시작했다. 호흡이 다시 돌아오면서 서서히 의식도 찾았다. 하지만 김 씨는 “아직 안심하면 안 된다”라며 계속 상태를 살폈다. 오후 8시 50분경 구급대원들이 도착했다. 김 씨는 상황을 설명하고 허 씨와 함께 구급차에 올랐다. 상태가 다시 나빠질까 봐 병원으로 가는 내내 김 교수에게 말을 걸었다. 다행히 중환자실에 입원했던 김 교수는 상태가 호전돼 18일 일반병실로 옮겨 회복 중이다. 김 교수는 “가슴이 좀 아프지만 이제는 멀쩡하다”고 말했다. 그는 “혼자 있을 때 심장이 멎었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며 “나를 살려준 세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김 씨와 허 씨 모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 씨는 남아시아 지진해일 현장 등 다양한 해외 재난 현장 등에서 의료봉사를 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특히 예술의전당에 있었던 AED의 효과를 강조했다. 그는 “공공기관에 AED를 설치해 봐야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고 생각했는데 이번 일을 경험하고 마음이 완전히 바뀌었다”며 “의사로서 훈련받은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허 씨도 “예술의전당 직원들이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도와준 덕분”이라며 “누구나 교육을 받으면 우리처럼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주부 박윤정 씨(39·경기 성남시)가 대형마트에 갈 때 꼭 찾는 곳이 있다. 마트 한 층에 자리한 애완동물 코너다. 특히 자녀와 함께 올 때면 빼놓지 않는다. 박 씨는 “대형마트 애견숍은 볼거리도 많고 깨끗해 아이들과 한참 둘러보다 간다”며 “일반 애견숍에 비해 안심도 돼 강아지 한 마리를 분양받을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요즘 대형마트에 빠지지 않고 들어서는 게 반려동물 전문매장이다. 대부분 유통기업이 직접 운영한다. 반려동물시장은 지난해 기준 2조2900억 원으로 성장했다. 반려동물이 성장 정체기에 빠진 유통기업의 신성장동력이라는 평도 나온다. 롯데백화점은 최근 반려동물 관련 용품이나 사료, 교육, 장례 서비스를 아우르는 ‘펫(pet) 비즈니스 프로젝트팀’을 만들었다. 롯데마트는 이미 30여 개 점포에서 ‘펫가든’을 운영 중이다. 신세계그룹도 반려동물 전문매장인 이마트의 ‘몰리스펫(molly‘s pet)’을 최근 강화하고 나섰다. 반려동물을 위한 호텔과 미용 서비스는 물론 분양도 한다. 기존 영세업소들은 비상이 걸렸다. 대기업이 반려동물까지 사고 팔 경우 ‘생산업자→경매장→반려동물숍’으로 이어지는 기존 유통체계가 고사할 수 있다는 이유다. 내년 3월 ‘반려동물 보호 및 관련 산업 육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동물생산업이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전환되는 점도 걸림돌이다. 이경구 반려동물협회 사무국장은 “새로운 법에 따라 강아지를 키우려면 축사까지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대기업까지 시장에 뛰어들면 우리는 사실상 문을 닫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려동물협회 소속 회원 60여 명은 16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아레나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현장에는 이들이 키우는 치와와 슈나우저 등 반려견도 등장했다. 협회 관계자는 “우리도 반려견을 충분히 잘 관리하고 키운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데려왔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롯데백화점 등 유통업체들은 “반려동물 관련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지만 관련 산업을 잠식할 의도는 전혀 없다”고 해명하고 있다. 소비자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반려견을 키우는 조모 씨(40)는 “공장 같은 곳에서 강아지를 생산해 상품처럼 팔아치우는 잘못된 관행이 문제였다”며 “대기업이 운영하면 유통과정이 투명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인 최모 씨(32·여)는 “동네 애견숍에서 반려동물 애호가들이 모여 관련 정보를 나누는 즐거움이 있었는데 대기업이 뛰어들면 그런 풍경이 없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박근혜 전 대통령이 16일 구속 연장에 반발해 사실상 재판을 거부하겠다고 하자 친박(친박근혜) 성향 보수단체는 이에 호응해 강도 높은 대(對)정부 투쟁을 준비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 단체들은 21일 서울 도심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예고했다. 대한애국당과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 촉구 서명운동본부’ 등 단체는 이날 오전 박 전 대통령 발언이 나오자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오후 2시에 열려던 박 전 대통령 석방 촉구 집회를 취소했다. 이들은 오후 3시 긴급 지도부 회의를 열고 앞으로 어떻게 문재인 정부와 재판부에 대응할지 논의했다. 이어 대한애국당 조원진 공동대표는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법부 마지막 양심을 존중했음에도 결과는 결국 ‘사법부 문란’이었다”며 “오늘부터 전면 투쟁을 천명한다”고 밝혔다. 이 단체들이 준비하는 21일 도심 대규모 집회에서는 ‘정권 타도’ 구호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태극기혁명국민운동본부(국본) 측은 “정권 비판 목소리가 이제는 ‘정권 타도’로 바뀌고 있다”며 “박 전 대통령 발언에 대한 응답으로 다각도 투쟁 방법을 구상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뾰족한 대정부 투쟁 방법이 많지 않다는 고민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 지지층은 ‘재판 거부’ 발언에 환호했다.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농성 중인 박근혜를사랑하는모임(박사모) 회원 김헌갑 씨(66)는 “이제야 박 전 대통령이 마음을 다잡은 것 같다. 정권 눈치만 보는 재판부를 더는 믿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죽은 아내를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다.” ‘어금니 아빠’ 이영학(35)이 딸 친구 김모 양(14)을 집으로 부른 이유다. 아내를 언급했지만 비뚤어진 성욕(性慾)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영학은 치밀하게 범행 대상을 골랐다. 원래 성인 여성을 대상으로 했으나 여의치 않자 다루기 쉬운 상대를 선택한 것이다. “○○이가 착하고 예쁘니 데려와 봐.” 이영학은 딸 이모 양(14)이 초등학교 때 집에 놀러 온 김 양을 기억했다. 무난한 표적이었다. 이 양은 집에 온 김 양에게 수면제를 먹였다. 이 양은 나중에 “아빠의 계획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영학은 희귀병을 물려받은 딸에게 참혹한 범죄자의 낙인까지 새겼다. 이영학은 13일 “아직 모든 게 꿈만 같다. 영원히 지옥에서 불타겠다”고 취재진에게 말했다. 그동안 딸에게만 미안해하던 이영학은 이날 자신의 민낯을 처음 드러내고 사죄했다. 그러면서도 “아내가 죽은 후 계속 약에 취해 있었고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약 기운을 탓하기에 이영학 부녀의 행동은 너무 치밀했다. 딸 이 양은 이영학의 지시에 따라 김 양에게 ‘졸피뎀’(수면제)을 3알이나 갈아 넣은 드링크 음료를 마시게 하고, 신경안정제 2알을 추가로 건넸다. 이영학은 잠든 김 양을 안방으로 데려간 뒤 ‘혹시라도 잠에서 깰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수면제 3알을 물에 타 김 양의 입에 흘려 넣었다. 이어 김 양의 옷을 벗기고 성추행했다. 경찰은 이영학의 음란기구 사용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압수한 기구 3점을 정밀 감정하고 있다. 잠들어 있던 김 양은 24시간이 지난 1일 낮 12시 30분경 깨어났다. 공포에 질린 김 양이 소리를 지르며 반항하자 이영학은 수건과 넥타이 등으로 목 졸라 살해했다. 경찰은 이영학의 범행 동기를 ‘비상식적으로 높은 성(性)적 각성 수준’에서 찾았다. 경찰은 “이영학은 자신의 강한 성적 욕구를 맞춰줄 사람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학의 사이코패스(반사회적 인격장애) 성향도 높게 나왔다. 경찰이 이영학을 상대로 사이코패스 체크리스트(PCL-R) 검사를 한 결과 25점(40점 만점)이 나왔다. 이 검사에서 25점 이상 받으면 사이코패스 성향으로 분류된다. 2015년 주차장에서 30대 여성을 납치 살해한 김일곤은 33점, 2003∼2004년 부녀자 등 21명을 살해한 유영철은 38점, 8명을 살해한 강호순은 27∼28점이었다. 배상훈 서울디지털대 교수(경찰학)는 이영학을 ‘경계성 사이코패스’로 진단했다. 통상적 사이코패스 범죄자와 달리 경제적인 욕구와 일부 논리적 언행 탓에 점수가 다소 낮게 나왔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숨진 김 양은 연예인을 꿈꾸는 평범한 여중생이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연예인 사진을 올리는 게 취미였다. 장례가 치러진 8일 운구 행렬은 김 양이 평소 가고 싶어 했던 서울 강남의 한 연예기획사 앞을 지나 화장장으로 향했다. 김 양 학교 관계자는 “김 양 친구들이 너무 괴로워해 집단 심리상담을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서울 중랑경찰서는 이날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이영학을 강제추행살인, 사체유기 등의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딸 이 양에게는 추행유인과 사체유기 혐의(불구속)가 적용됐다. 경찰은 이영학의 여죄를 수사할 계획이다. 이영학은 서울 강남에서 1인 마사지숍을 운영하며 성매매를 알선하고, 숨진 아내 최모 씨(32)를 성매매에 동원한 의혹을 받고 있다. 이영학이 최 씨를 폭행하고 자살을 방조한 혐의도 조사 대상이다.권기범 kaki@donga.com·구특교 기자}
‘어금니 아빠’ 이영학(35)의 여중생 살인사건을 둘러싼 경찰의 초동수사 부실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피해자 김모 양(14)이 이영학의 딸과 만난 사실을 경찰이 뒤늦게 알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범행 장소 파악이 늦어진 탓이다. 관할 경찰서장 보고 시점을 놓고도 논란이 일고 있다. 경찰이 김 양 어머니로부터 “딸이 이 양과 만났다”라는 말을 들은 건 1일 오후 9시. 하지만 경찰은 2일 오전 11시경 이 양 집을 찾았다. 집은 비어 있었다. 경찰은 주변 탐문을 벌였다. 김 양이 이 양 집을 찾았고 지난달 이 양 어머니 최모 씨(32)가 투신한 사실 등을 파악했다. 경찰은 같은 날 오후 9시 사다리차를 동원해 이영학의 집에 진입했다. 하지만 김 양은 이미 살해돼 시신이 옮겨진 뒤였다. 이때까지도 경찰은 김 양이 강력범죄의 희생자가 됐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관할 중랑경찰서장은 김 양의 실종 사실을 4일 오전에야 보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합동수사팀이 꾸려진 날이다. 예규에 따르면 실종아동 신고를 접수하면 경찰서장이 현장출동 경찰관을 지정해야 한다. 실종신고 직후 경찰의 움직임도 아쉬움이 크다는 지적이다. 지난달 30일 오후 11시 20분경 실종신고 후 경찰은 “오후 11시 30분부터 1일 오전 2시까지 망우 사거리 일대 PC방과 노래방 찜질방 등을 집중 수색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본보가 12일 0시를 전후해 망우 사거리 인근 PC방과 노래방 등 40곳을 직접 확인한 결과 “경찰이 김 양을 찾으러 방문했다”고 답한 곳은 5곳에 그쳤다. 30곳은 경찰이 찾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머지 5곳은 “모른다”고 답했다. 이영학의 집에서 400m가량 떨어진 한 편의점 직원은 “경찰이 온 적은 없지만 ‘김 양을 찾는다’는 친구들이 왔다”고 말했다. 김 양 친구들은 편의점 직원에게 “담당 수사관이 배정이 안 돼 우리가 나섰다”고 말했다. 실제 김 양을 찾아 나섰던 친구 A 양(14)은 1일 오전 10시경 이 양으로부터 “김 양을 만났다”는 말을 들었다. 경찰보다 약 11시간가량 앞선 것이다.김예윤 yeah@donga.com·권기범 기자}

‘어금니 아빠’ 이모 씨(35)에게 살해된 김모 양(14)이 실종신고 후 12시간 넘게 생존한 것으로 확인됐다. 김 양이 살아 있을 당시 경찰은 이 씨 집에서 불과 120m 떨어진 곳 주변까지 탐문했지만 이 씨의 집까지 확인하진 못했다. 경찰이 더 적극적으로 수색했다면 김 양을 살릴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찰은 김 양이 1일 오전 11시 53분에서 오후 1시 44분 사이 살해된 것으로 조사됐다고 10일 밝혔다. 당초 김 양이 살해된 시점은 지난달 30일 오후 3시 40분에서 오후 7시 46분 사이로 추정됐다. 이 씨의 딸 이모 양(14)의 진술이 근거였다. 그러나 이 씨는 추가 조사에서 “1일 오전 11시 53분 딸을 집 밖으로 내보낸 뒤 김 양을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김 양의 어머니는 지난달 30일 오후 11시 20분 “딸이 친구를 만나고 멀티방에 간다고 한 뒤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결과적으로 김 양을 구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적어도 12시간 있었던 셈이다. 경찰은 신고 접수 후 김 양 가족의 동의를 받아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했다. 하지만 김 양의 전화는 꺼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확인된 위치는 서울 중랑구 망우사거리. 경찰은 1일 새벽까지 2, 3시간가량 주변을 수색했다. 하지만 김 양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망우사거리에서 직선으로 120m 거리에 있는 이 씨의 집에 김 양이 갇혀 있었지만 확인하지 못했다. 경찰은 다음 날도 서두르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야간 근무로 밤을 새웠기 때문에 오전에 쉬고 오후 4시경부터 김 양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뒤져봤다”고 말했다. 경찰은 1일 오후 9시가 돼서야 김 양 어머니에게 연락해 “딸이 이 양 집에 갔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고도 하루가 더 지난 2일 오전 11시에야 경찰은 이 씨의 집을 찾아갔다. 인기척이 없어 다시 돌아간 경찰은 이날 오후 9시에야 집에 있던 이 씨의 형을 설득해 집 내부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때는 이 씨 부녀가 김 양의 시신을 이미 강원 영월군의 야산에 유기한 뒤였다. 김 양 가족들은 실종신고 당일인 지난달 30일 동네 곳곳에서 김 양을 찾아 헤맸다. 한 주민은 “김 양의 어머니가 ‘딸이 가출할 애가 절대 아닌데 이상하다’며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다”고 전했다. 김 양의 친구는 “너무 착하고 순한 성격이라 연락 없이 집에 안 들어올 아이가 절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양의 어머니가 실종신고 후 이 양에게 전화해 딸의 행방을 물었을 때 이 양은 “모른다. 저 위로 올라간 것 같다”며 거짓말을 했다. 이 씨는 10일 오전 서울 중랑구 자택에서 진행된 현장검증에서 김 양에게 수면제를 먹인 뒤 딸과 함께 잠든 김 양을 옮기는 모습을 태연하게 재연했다. 이 씨는 김 양의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며 장롱에서 끈 모양의 의류를 꺼내 목을 졸랐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양은 김 양이 수면제를 먹고 안방에서 잠들어 있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버지 이 씨에게 김 양의 상태를 전혀 묻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안방에서 이 씨와 김 양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기 싫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씨의 범행 동기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경찰은 “이 씨가 일부 언급한 내용이 있지만 도저히 신뢰하기 어려울 정도의 수준이어서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찰은 또 “이 씨가 자신의 온라인 대용량 저장공간에 성관계 동영상을 다수 보관하고 있는 정황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영상에는 지난달 6일 투신자살한 아내 최모 씨(32)의 성관계 모습도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씨가 인터넷에서 1인 성인 마사지숍을 운영했다는 흔적도 새로 발견됐다. 경찰은 이 씨가 최 씨를 이용해 성매매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수사 중이다.권기범 kaki@donga.com·김예윤·구특교 기자}

“제가 죽였습니다. 딸에게 미안합니다.” ‘어금니 아빠’ 이모 씨(35)가 여중생 딸의 친구인 김모 양(14)을 살해했다고 10일 자백했다. 경찰에 붙잡힌 지 5일 만이다. 이날 이 씨는 경찰의 3차 조사를 받으며 범행을 시인했다. 이 씨는 자백 내내 흐느끼며 여러 번 “딸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살해 동기를 말하진 않았다. 숨진 김 양과 유족에게도 사죄하지 않았다. 경찰은 “김 양이 목 졸려 살해된 사실을 이 씨가 시인했다”고 밝혔다. 이 씨의 딸 이모 양(14)이 알려진 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범행에 가담한 사실도 드러났다. 이 양은 김 양을 집으로 유인한 뒤 직접 수면제를 먹였다. 경찰은 “오래전부터 같은 병을 앓으며 아버지에게 크게 의지한 이 양이 이날도 시키는 대로 따른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은 사체유기 공범으로 이 양의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특히 이 씨는 김 양을 특정해 서울 중랑구 자신의 집으로 끌어들였다. 경찰 조사 결과 이 씨는 딸에게 “친하게 지내던 김 양에게 전화해 보라”고 지시했다. 경찰은 “김 양이 초등학교 시절 이 양의 옛날 집에 몇 번 놀러온 적이 있다”며 “이 씨는 과거 김 양이 자신의 아내와도 가까웠던 사이라 쉽게 유인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양을 부르기 전에 이 씨가 범행 대상을 물색한 정황도 포착됐다. 본보 취재 결과 범행 하루 전인 지난달 29일 이 양은 초등학교 6학년 동창과 중학교 같은 반 친구 등 수십 명에게 ‘만나서 놀자’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친구들은 평소 연락이 없었던 이 양의 갑작스러운 요청에 대부분 회신하지 않았다. 이후 이 양은 김 양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서 영화를 보며 놀자”고 제안했다. 이 양은 다음 날 낮 12시 17분 김 양을 집에 데려갔다. 이 양은 집에 온 김 양에게 드링크 음료를 건넸다. 이 양은 음료에 수면제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씨 지시에 따라 김 양에게 음료를 전했다. 오후 3시 40분 이 씨가 “나가서 놀다 오라”고 말하자 이 양은 혼자 외출한 뒤 다른 친구 2명과 분식집 등을 갔다. 이때 누군가와 여러 차례 통화했다고 한다. 이 양은 오후 8시 14분 데리러 온 이 씨와 함께 귀가했다. 집에 온 직후 이 씨는 “내가 김 양을 죽였다”고 딸에게 말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양은 경찰 조사에서 “김 양이 죽어 있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날 오후 11시경 김 양의 어머니가 실종신고 후 전화를 걸어 행방을 묻자 “모른다. 저 위쪽으로 올라갔다”고 말했다. 이 씨 부녀는 이튿날 김 양의 시신이 든 여행가방을 BMW 차량에 싣고 강원 영월군으로 향했다. 이 양이 다녔던 학교 관계자는 “이 양이 지난달 6일 어머니의 자살 사건을 겪은 뒤에도 학교에서 너무 담담히 지내 교사들이 놀라워했다”고 전했다. 이 양은 지난달 27∼29일 진행된 중간고사 때 첫날만 시험을 치르고, 이후 “감기에 걸렸다”며 결석했다. 이 양은 시험까지 거르며 김 양을 전화로 유인한 것이다. 경찰은 부검 결과 김 양의 혈액에서 수면제 성분이 검출됐다고 밝혔다. 성폭행 정황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 씨가 흔적을 없앴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 씨가 지난해 11월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트위터 계정에는 10대 여성에 대한 성적 관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 씨는 여성 신체를 빗댄 표현을 담아 “함께 지낼 동생을 구한다”는 글을 여러 차례 올렸다. “나이 14세부터 20세 아래까지 개인룸과 샤워실을 제공한다”며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식대와 생활비를 주고, 부분 모델을 겸한 연수를 해주겠다”고 꼬드기는 내용이었다. 이 씨는 10대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계정 60여 개를 팔로잉하며 수시로 동향을 살피기도 했다. 경찰은 이 씨가 개인적 욕구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을 집중 수사하고 있다.권기범 kaki@donga.com·김예윤 기자}

딸의 친구인 여중생 김모 양(14)을 살해해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는 ‘어금니 아빠’ 이모 씨(35)가 범행 당시 끈으로 목을 졸라 살해한 정황이 8일 확인됐다. 이 씨가 1일 딸과 함께 김 양의 시신을 강원도 영월의 야산에 유기한 뒤 서울 도봉구 한 빌라로 도피할 때 지인의 차를 얻어 탄 사실도 드러났다.○ 살인 혐의 등 불리한 질문 땐 무반응 이날 서울 중랑경찰서는 피해자 김 양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끈으로 목을 강하게 조를 때 생기는 상처가 다수 발견된 점 등을 근거로 경부압박 질식사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경찰은 또 김 양이 야산에서 나체 상태로 발견됐지만 성폭행당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날 휠체어를 타고 경찰에 출석한 이 씨는 범죄 혐의와 수법, 동기 등을 묻는 질문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씨는 개인 신상 관련 질문에 대해서만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는 식으로 답했다. 경찰 관계자는 “이 씨가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이 나오면 고개를 숙이거나 가만히 쳐다보면서 답변을 회피했다”고 전했다. 이 씨는 이날 서울북부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서도 시신 유기에 대해선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했지만 살인 혐의 관련 질문에는 의사 표시를 하지 않았다. 이 씨와 딸 이모 양(14)은 5일 서울 도봉구 은신처에서 검거될 당시 수면제를 과다 복용해 쓰러진 채 발견됐다. 경찰 관계자는 “이 씨가 범행 직후 유튜브에 ‘김 양이 약을 잘못 먹고 숨졌다’고 주장했는데 그런 상황이라면 바로 병원에 알리는 게 당연한데도 시신을 감췄다”며 살인 혐의가 의심된다고 밝혔다. 김 양이 지난달 30일 이 씨의 서울 중랑구 자택에 딸 이 양과 함께 들어가 이튿날 시신으로 나오기까지 집을 오간 사람이 이 씨뿐이었다는 사실도 폐쇄회로(CC)TV 확인 결과 드러났다. 경찰은 이날 이 씨와 이 씨의 도주를 도운 혐의로 박모 씨(35)를 모두 구속했다. 박 씨는 3일 오후 3시경 영월에 시신을 버린 뒤 서울에 도착한 이 씨 부녀를 도봉구 은신처까지 차로 태워다 준 혐의다. 박 씨는 이 씨가 자주 가던 카센터 직원이며 동갑내기 친구로 지내던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생활고’라더니…외제차 몰며 ‘이중생활’ 딸의 난치병을 치유하겠다며 모금 활동을 벌인 이 씨는 생활고에 시달린다는 말과는 다른 행적을 보였다. 이 씨는 그동안 인터넷 등을 통해 “딸을 살리려면 수술을 받아야 한다. 월세와 공과금이 밀려 걱정이다”라며 도움을 호소하는 글을 다수 올렸다. 하지만 경찰 조사 결과 이 씨는 미국 포드 토러스(신차 기준 4000만 원대) 승용차를 소유하며 직접 몰고 다녔다. 누나 명의의 현대 에쿠스 차량과 형의 지인 명의로 된 BMW 차량도 자기 것처럼 이용했다. 김 양 시신을 유기할 때는 이 BMW 차량을 썼다. 이 씨는 지난해 7월 토러스로 차를 바꾸기 전 시가 6000만 원가량인 유명 스포츠카 머스탱을 몰았다. 이 씨는 지난해 말 수백만 원대 반려동물을 분양 받았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 반려동물 직거래 사이트에 닥스훈트 강아지를 분양하고 싶다는 글을 올리며 “지난해 닥스훈트 암컷을 300만 원에 분양 받았다. 지금은 1000만 원이 넘는다”고 썼다. 경찰은 지난달 5일 서울 중랑구 5층 자택에서 투신자살한 이 씨 부인 최모 씨(32)가 평소 이 씨에게서 학대를 받은 정황이 있는지도 조사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최 씨는 팔꿈치과 무릎 아래를 제외한 전신에 문신이 있었으며 허벅지 안쪽에 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최 씨 몸에 이 씨와 비슷한 문양의 문신이 있었다”며 “문신이 반강제로 새겨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김예윤 yeah@donga.com·권기범·최지선 기자}

김모 씨(35)가 중고교에 다닐 때만 해도 명절이면 집안 잔치가 열렸다. 김 씨는 부모 형제와 함께 큰집으로 향했다. 30명이 넘는 친척이 모였다. 차례가 끝나도 집에 가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올해 김 씨 가족은 큰집에 가지 않는다. 그 대신 가족끼리만 명절을 지내기로 했다. 분위기는 10여 년 전 바뀌기 시작했다. 명절 때 모여도 차례만 지내고 자리를 뜨는 친척이 늘어났다. 남은 사람도 운전 때문에 오래 술잔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 지나니 사촌끼리도 서먹해졌다. 결혼이라도 해야 연락이 오갈 정도였다. 김 씨는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성함과 연세마저 가물가물할 지경”이라며 “명절이 돼도 전화로 안부 정도만 물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친척을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은 줄고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은 늘고 있다. 주간동아는 지난달 25∼27일 여론조사 기관인 폴리컴에 의뢰해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친척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휴대전화 설문조사를 했다. 그리고 2008년 같은 주제의 설문조사 결과와 비교했다. 1일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7년 때는 56.2%만이 친척을 ‘편안한 존재’라고 답했다. 2008년에는 88.1%였다. 31.9%포인트나 급감했다. ‘친척이 불편하다’는 응답은 2008년 9.2%에 불과했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22.9%였다. 친척의 범위는 좁아졌다. 혈족(血族)을 기준으로 ‘4촌 이내’(45.3%)만 친척으로 느껴진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8촌 이내라는 사람은 17.4%뿐이었다.배수강 주간동아 기자 bsk@donga.com / 권기범 기자}

22일 오후 10시 40분 광주 북구 번화가의 한 카페 2층. 윤모 씨(23·여)는 노트북을 켜고 일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한 남성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중년의 등산복 차림이었다. “‘○○’에서 채팅했던 사람입니다.” 남성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은(는) 주로 조건만남을 목적으로 운영되는 스마트폰 채팅 애플리케이션(앱)이다. 윤 씨는 어안이 벙벙했다. 주민등록증까지 꺼내 보이며 “사람을 잘못 봤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년 남성은 막무가내였다. 뒤이어 나타난 한 젊은 남성도 윤 씨를 향해 다가왔다. 두려워진 윤 씨는 다급히 가방을 챙겨 자리를 떴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뒤에서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왜 그러느냐”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나섰는데 중년 남성이 따라 나왔다.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윤 씨는 지인을 만났다. 남성은 사라졌다. 윤 씨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성희롱도 아니고, 단순히 물어본 것만으로는 적용할 만한 혐의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윤 씨는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가 해코지할까 봐 겁이 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주변을 살펴보면 윤 씨처럼 범죄 피해의 경계까지 몰렸다가 간신히 벗어난 경우가 많다. 범죄의 ‘빨간불’이 켜지기 직전에 가까스로 피해를 모면한 것이다. 대부분 여성이다. 일단 범죄를 피해도 상당한 후유증에 시달린다. 강력범죄 직전의 단계, 즉 ‘노란불 범죄’의 피해자인 셈이다. 그러나 이런 노란불 범죄는 가해자를 제재할 법적 수단이 없다. 서울 동작구에서 자취하는 제모 씨(23·여)는 버스에 오를 때마다 악몽이 떠오른다. 몇 달 전 밤늦게 정류장으로 향하던 제 씨의 뒤를 한 40대 남성이 말을 걸며 따라왔다. 제 씨가 도망치듯 버스에 오르자 남성도 뒤따랐다.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제 씨가 내리자 남성도 따라 내렸다. 제 씨의 문자메시지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다. 이 남성은 동작구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수상했지만 경찰도 별 도리가 없었다. 결국 경찰은 제 씨에게 “신고해 봐야 신변만 노출되니 그냥 집에 가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걸 확인하게 돼 더 무서워졌다”고 말했다. 최근 노란불 범죄가 실제 강력범죄로 이어지는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7월 서울 강남의 한 미용업소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피해자(30·여)는 인터넷방송에 노출된 뒤 “이상한 연락이나 이상한 손님이 자주 온다”며 주변에 불안감을 호소했다. 올 1월 강남의 한 빌라에서 전 여자친구를 때려 숨지게 한 남성도 사건 3시간 전 피해자의 집에서 행패를 부리다 경찰에 연행됐지만 이내 풀려난 뒤 범행했다. 29일 경찰청이 더불어민주당 소병훈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경찰이 비출동으로 분류한 112 신고 중 강력범죄로 접수된 경우가 2만340건에 달했다. 성폭력은 377건, 살인과 강도는 각각 72건, 58건이었다. 경찰이 지난해 6월 여성을 대상으로 ‘불안요소 신고’를 받은 결과 전체 3629건 중 30.2%(1097건)가 ‘특정인 또는 불특정인에 대한 불안’ 신고였다. 강력범죄의 조짐이 있어도 미리 막기가 쉽지 않다. 개인 관련 범죄 중 예비나 음모죄가 인정되는 건 강도 살인 등 일부에 그친다. 성범죄의 경우 강도강간죄를 제외하면 대부분 인정되지 않는다. 경범죄처벌법상 ‘불안감 조성’을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과태료 5만 원에 불과하다. 곽대경 동국대 교수(경찰행정학)는 “잠재적 가해자가 직접적 위해를 가하기 전에 심리적으로 위축시키고 억제할 수 있는 적절한 (공권력) 개입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권기범 kaki@donga.com·최지선 기자}
배우 송선미 씨(42)의 남편인 영화 미술감독 고모 씨(45) 살해 사건을 수사하는 검찰이 고 씨와 유산 상속 분쟁을 벌인 외조부의 장손 곽모 씨(38·구속)의 청부살인 의혹 규명에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검찰은 곽 씨가 고 씨를 살해한 조모 씨(28·구속 기소)에게 “조선족을 고용해 (고 씨를 살해)할 수 있겠느냐”고 제의한 정황을 확인한 것으로 27일 알려졌다.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부장 이진동)는 곽 씨와 조 씨의 휴대전화 6대와 노트북 컴퓨터 등에서 고 씨 살해를 모의한 정황이 담긴 음성 녹음파일과 문자메시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글 등을 다수 확보했다. 곽 씨는 조 씨에게 영화 ‘황해’에 나온 조선족 청부살해업자를 언급하며 고 씨를 살해할 방법을 알아봐 달라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조사 결과 조 씨는 실제로 흥신소에 청부살인 방법을 문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조 씨와 함께 범행 현장인 서울 서초구의 한 법무법인 사무실에 동행했던 쌍둥이 동생과 지인을 26일 소환 조사했다. 조 씨는 이들을 차에 태우고 운전해 사무실로 이동하던 중 시장에 들러 흉기를 샀다. 이를 본 동생과 지인은 조 씨에게 “왜 사왔느냐”고 물었고 조 씨는 “그냥 겁만 주려고 그런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고 씨를 만난 조 씨는 흉기로 고 씨의 목을 찔러 살해했다. 검찰 조사 결과 곽 씨가 조 씨에게 돈을 건넨 정황은 확인되지 않았다. 검찰에 따르면 곽 씨는 2012년 일본 오사카(大阪)의 한 어학원에서 조 씨를 처음 만났다. 이후 두 사람 간의 연락은 뜸했다고 한다. 그러다 올 초 곽 씨가 재일교포 재력가인 할아버지(99)의 600억 원대 부동산을 가로채려다 고 씨에게 들통이 난 뒤 5월 조 씨에게 연락해 “함께 살면서 일을 도와 달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고 씨는 증여계약서 위조 혐의로 곽 씨를 경찰에 고발했다. 하지만 7월 곽 씨의 구속영장이 증거 부족으로 기각됐다. 이후 곽 씨는 가족들에게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재산을 정리해 해외로 나가자”고 얘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당시 곽 씨가 고 씨를 살해할 마음을 먹고 조 씨를 사주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조 씨는 고 씨에게 접근해 “나는 곽 씨에게 버림받았다. 곽 씨가 당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말한 것으로 조사됐다. 조 씨가 고 씨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강경석 coolup@donga.com·권기범 기자}

서울 강남 일대 지하철 역사에서 여성들의 치마 속 영상을 몰래 찍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20대 회사원이 13일 경찰에 붙잡혔다. 본보가 7∼9월 강남의 선릉역 잠실역 등 지하철 2호선 역사 안에서 찍은 치마 속 몰래카메라(몰카), 이른바 ‘업스커트’ 영상이 외국계 SNS에 잇달아 오르고 있다고 보도한 지 이틀 만이다. 서울지방경찰청 지하철경찰대는 이날 오전 8시 10분경 선릉역의 한 출구에서 송모 씨(26)를 긴급체포했다고 14일 밝혔다. 송 씨의 휴대전화에는 7월 25일∼9월 8일 지하철 역사 계단을 오르거나 전철에 앉아있는 여성 등의 치마 속이나 엉덩이 등 신체 일부를 몰래 찍은 영상 70여 개가 저장돼 있었다. 송 씨는 이 가운데 17개 영상을 SNS에 올렸다. 송 씨는 경찰에서 “호기심에 영상을 찍었다”고 범행을 시인했다. 경찰에 따르면 송 씨는 선릉역 인근 회사에 출근하던 길에 체포됐다. 경찰은 본보 보도 이후 전담반을 투입해 촬영 장소가 확인되는 영상 속 지하철역의 폐쇄회로(CC)TV 영상을 집중 분석했다. 피해 여성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공통적으로 송 씨의 모습이 확인됐다. 경찰은 송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잠복 수사 끝에 검거에 성공했다. 경찰은 송 씨의 컴퓨터에 저장된 영상도 조사할 계획이다. 지하철경찰대 관계자는 “유동 인구가 많은 출퇴근 시간대 강남의 지하철 2호선과 9호선 역사에서 몰카 범죄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고 밝혔다.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배우 최진실 씨(2008년 사망)의 딸 최준희 양(14)에 대한 가정폭력 논란을 조사한 경찰은 외할머니 정모 씨(72)에 대해 아동학대 혐의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12일 서울 서초경찰서에 따르면 경찰은 아동보호전문기관 등의 의견을 종합해 정 씨에 대해 ‘혐의 없음’으로 수사를 마쳤다. 정 씨가 최 양에게 물리력을 행사한 것은 맞아도 정상적인 훈육 범위에 들어간다고 본 것이다. 경찰에서 최 양은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학대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정 씨는 “폭언과 폭행을 한 적이 없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경찰은 최 양의 오빠 환희 군(16)과, 최 양이 다니는 학교 관계자도 조사했다. 환희 군 등은 경찰에서 “두 사람이 성격 차이로 자주 다퉜지만 학대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진술했다. 경찰과 아동보호전문기관 등이 참석한 아동학대사례판정위원회에서도 만장일치로 “학대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앞서 4일 밤 환희 군은 “두 사람이 싸우고 있다”고 신고했고 서울 서초구 잠원동 자택에 경찰이 출동했다. 몇 시간 뒤 최 양은 페이스북에 “외할머니가 옷걸이로 때리고 나를 ‘도둑×’으로 몰았다”고 주장했다. 이 글은 아동학대 논란으로 이어졌다.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최근 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서울 지하철을 배경으로 한 몰래카메라(몰카) 영상이 잇달아 올라오고 있다. 모두 여성 뒤를 따라가며 치마 속을 찍은 것이다. 촬영은 대부분 7∼9월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모두 지하철 역사 안에서 촬영됐고, 특히 이용객이 많은 강남의 선릉역 잠실역 등 2호선 역사가 많았다. 방식이나 화질로 볼 때 동일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 10일 경찰청 등에 따르면 8일 외국계 SNS의 한 계정에 25초 분량의 영상이 게시됐다. 영상에 붙은 제목은 ‘업스’. 업스커트의 줄임말로 온라인에서 치마 속 몰카를 뜻한다. 영상에는 화려한 무늬의 치마를 입은 여성이 계단을 올라가는 뒷모습이 담겨 있다. 출퇴근 시간인 듯 오가는 사람이 많았지만 촬영자는 계속 여성의 모습을 찍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해당 계정에는 7월부터 9월 초까지 비슷한 내용의 몰카 영상이 잇달아 올라왔다. 10일 현재 확인 가능한 영상은 17개. 이달에만 2, 3일 간격으로 새로운 영상 4개가 게시됐다. 촬영자는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을 타깃으로 했다. 지하철 출구나 환승하기 위해 계단을 올라가는 순간을 노렸다. 치마를 가리는 여성을 집요하게 쫓아가는 영상도 있다. 여성들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해당 SNS를 검색하면 누구나 영상을 볼 수 있다. 영상마다 일부 누리꾼의 성희롱성 댓글이 줄지어 달렸다. 영상의 위치나 영상 상태로 볼 때 촬영자는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촬영 장소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영상도 있다. 선릉역 잠실역 등 주로 지하철 2호선 관련 표기가 많다. 촬영 시기도 오래되지 않아 보인다. 영상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여름옷을 입고 있다. 또 ‘서울교통공사’ 이름이 붙은 공사 안내 현수막도 눈에 띈다. 서울지하철 통합 운영사인 서울교통공사는 5월 31일 출범했다. 정부가 몰카 범죄에 대한 강력한 처벌 방침을 밝혔는데도 버젓이 대중교통 몰카 영상이 온라인에 나돌자 여성들은 충격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10일 선릉역에서 만난 20대 여성 A 씨는 “이런 식이면 앞으로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다니는 사람은 다 조심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며 걱정했다. 20대 여성 B 씨는 “주변에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몰카를 찍었는지 모르겠다”며 “강남으로 출퇴근하는데 이제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타야 할까 고민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해당 영상의 촬영자를 찾아내 처벌하는 건 쉽지 않다. 외국계 SNS에 올라있어 e메일 등 기본적인 정보만 요구하기 때문에 신원 확인에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 때문에 해당 SNS를 통해 음란물을 올리는 누리꾼이 많았다. 지난해 5월 경찰청이 벌인 온라인 음란물 집중 모니터링 당시 전체 적발 건수(5만6000여 건) 중 절반(2만8000여 건)이 해당 SNS였다. 경찰 관계자는 “해당 SNS에 유포되는 음란물이 너무 많은 데다 외국 회사라 (몰카범) 검거가 쉽지는 않다”며 “집중단속 기간인 만큼 다양한 수사기법을 동원하겠다”고 설명했다. 몰카 범죄를 근절하기 위한 근본 대책 마련도 시급하지만 걸림돌이 많다. 범죄에 악용될 몰카 사용을 제한해야 하지만 국가통합인증(KC)을 받으면 구입이나 사용을 제재할 방법이 없다. 경찰청이 중앙전파관리소와 함께 전국 301개 업체를 대상으로 합동 점검 및 단속을 벌였지만 적발은 7건에 그쳤다. 경찰 관계자는 “미인증 제품을 찾아내 적발하는 건 궁여지책”이라며 “위장형 카메라 인허가 관련 법 개정 등 규제 강화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권기범 kaki@donga.com·조동주 기자}

6일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 병원에 마련된 마광수 전 교수의 빈소에는 고인의 동창과 제자, 문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올해 1월 ‘마광수 시선’을 출간한 페이퍼로드 출판사의 최용범 대표는 “고인은 책이 나올 때만 해도 소설과 시를 더 쓰고 싶다며 의욕을 보였지만 점점 기운을 잃어갔다. 고인을 구속하고 강단에 서지 못하게 한 건 창작 의욕을 말살시켜 죽음에 이르게 만든 사회적 타살이다”고 비판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가 이 책에 넣을 시를 선별할 때 “외설 시비에 걸릴 수 있는 작품은 모두 빼자”며 자기 검열을 심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즐거운 사라’는 작가 인생의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였다. 운명의 시계가 다른 쪽으로 움직였다면 그의 삶은 다른 날개를 달 수 있었을까? 새삼 이 작품을 둘러싼 당시 분위기와 재판 과정에 관심이 쏠린다.○ 주홍글씨가 된 ‘즐거운 사라’ 1995년 6월 16일 대법원은 “작품이 도착적이고 퇴폐적인 성행위 장면을 노골적으로 묘사해 문학의 예술적 한계를 벗어났다”며 마 전 교수를 ‘외설 작가’로 최종 판정했다. 법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 전 교수의 편을 들지 않았다. 앞서 1, 2심 재판부는 그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1991년 7월 여대생 사라의 문란한 성생활을 다룬 장편소설 ‘즐거운 사라’가 출간됐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는 같은 해 9월 이 작품에 대해 “사라가 생면부지의 남자와 갖는 즉흥적 동침, 여자친구와 벌이는 동성애, 적나라하게 그려진 자위행위, 스승과 벌이는 부도덕한 성행위 등을 묘사한 퇴폐적 성애소설”이라며 제재 결정을 내렸다. 이 책을 처음 냈던 서울문화사는 즉각 출판을 중단하고 서점에 풀린 책을 거둬들였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92년 8월 ‘즐거운 사라’는 마 전 교수의 문단 동료인 장석주 시인(63)이 대표로 있던 청하출판사에서 다시 간행됐다. 간행물윤리위는 같은 해 9월 또다시 제재 결정을 내리고 검찰에 관련 내용을 통보했다.○ 운명의 시계, 세상의 시계 이 사건은 이른바 ‘대통령 하명(下命)’에 의한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정확하게는 확인되지 않는다. 검찰과 변호인, 감정인 등 당시 재판에 등장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즐거운 사라’를 둘러싼 사회적 관심과 논란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서울지검 3차장은 훗날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을 지낸 특별수사통 검사들의 대부(代父) 심재륜 전 고검장(73)이었다. 그는 2012년 한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즐거운 사라’에 대한 사법처리는 오롯이 나로부터 시작됐다”고 적었다. 마 전 교수가 언론 인터뷰에서 현승종 당시 국무총리가 자신에 대한 수사를 지시했다고 한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심 전 고검장은 ‘즐거운 사라’ 첫 페이지를 읽다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반인륜적, 반도덕적 소설”이라며 수사를 지시했는데, 검사들이 모두 손을 저었다. 결국 불교와 한학에 조예가 깊어 ‘도인’ 소리까지 듣던 김진태 특수2부 검사(65·전 검찰총장)에게 사건이 배당됐다. 처음에 수사 맡기를 주저하던 김 검사는 하루 만에 마 전 교수의 저서는 물론 ‘채털리 부인의 사랑’ 등 외설 논란에 휘말린 외국 서적까지 탐독한 뒤 “제가 하겠다”며 수사를 자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해 10월 29일 마 전 교수를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하더니 마 전 교수에 이어 장 시인까지 구속했다. 김 검사는 당시 법정에서 “카타르시스의 그리스어 어원을 아느냐” “카타르시스는 육체적인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인 정화로 얻어지는 것”이라며 마 전 교수와 논박했다. 김 전 총장은 6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은퇴한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겠느냐”고 했다. 마 전 교수의 변론은 검사 출신의 대표적 인권변호사로 감사원장을 지낸 한승헌 변호사(83)가 맡았다. 항소심에서는 문재인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다가 낙마한 안경환 전 서울대 법대 교수(69)가 외설 여부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감정인으로 참여했다. 당시 안 전 교수는 이 작품에 대해 “헌법이 보호하는 문학작품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단순한 ‘음란물’에 해당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반면 또 다른 감정인인 민용태 전 고려대 교수(74)와 소설가 하일지 씨(62)는 “‘즐거운 사라’는 음란하지 않다”며 마 전 교수를 옹호했다. ○ 25년 뒤 오늘… 문단과 출판계는 비통해하며 자성하는 분위기다. 고인이 구속되고 재판을 받을 때 침묵한 것을 반성한다는 문인이 많다고 한다. 이 사건을 기억하는 한 시인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창작품의 표현을 둘러싼 날선 공격과 여론을 앞세운 재판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서울 용산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배우 김수미 씨가 빈소에 술에 취한 채 찾아와 “마광수가 내 친구인데 너무 슬프다. 나도 죽어버리겠다”며 통곡하기도 했지만 지인이 아니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고인의 제자인 나희덕 시인은 “‘야하다’는 것은 단순히 관능적이고 퇴폐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문명화되면서 갖게 된 허위의식과 과잉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에 반대하는 원초적 생명력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가 떠난 이달, 새 소설집 ‘추억마저 지우랴’가 출간된다. 처음 발표하는 단편 21편이 수록됐다. 표지에는 고인이 그린 유화를 싣기로 했다. 어문학사 출판사는 고인이 중편, 장편 소설도 차례로 내자고 제안했으며 중편은 완성됐지만 아직 받지 못했다고 했다. 고인은 머리말을 대신해 ‘그래도 내게는 소중했던’이라는 제목의 서시(序詩)를 썼다. ‘시들하게 나누었던 우리의 키스/어설프게 어기적거리기만 했던 우리의 춤/시큰둥하게 주고받던 우리의 섹스//기쁘지도 않으면서 마주했던 우리의 만남/울지도 않으면서 헤어졌던 우리의 이별/죽지도 못하면서 시도했던 우리의 정사(情死)….’손효림 aryssong@donga.com·권기범·김윤수 기자}
“보호관찰요? 아이들은 무죄 받은 걸로 생각합니다.” 중부권의 한 보호관찰소에서 10년 넘게 보호관찰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A 씨. 그는 최근 부산과 강원 강릉 등지에서 또래 소녀를 집단폭행한 10대 소녀들 가운데 보호관찰 대상자가 여러 명 있었다는 사실에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A 씨가 현재 보호관찰을 맡고 있는 청소년은 90여 명에 달한다. 몇 달 전까진 130명이 넘었다고 했다. 한 명 한 명 신경을 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매주 한두 명은 연락 끊고 잠수를 타요. 부모님이건 선생님이건 전혀 두려워하질 않는 아이들이어서 규정 안 지키면 벌준다고 겁을 줘도 아무 소용이 없죠.” 그의 목소리에는 고단함과 무력감이 묻어났다. ○ 보호관찰 결정 후 7일은 ‘증발의 시간’ 최근 친구에게 잔인하게 폭력을 휘두른 10대 소녀들이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솜방망이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자 소년법을 개정해서라도 청소년 범죄자를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부산 여중생 폭행사건의 피해자 가족도 채널A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가해 학생은 다른 사건에 연루된 적이 있다고 한다”며 “그렇게 (심한 폭행을) 해도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이 문제”라며 엄한 처벌을 촉구했다. 영남 지역의 보호관찰소에서 근무하는 B 씨는 비행 청소년을 처벌하기보다 교화가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 앞에 좌절하기 일쑤다. 법원이 소년 범죄자에게 보호관찰을 선고한 뒤 일주일간은 보호관찰관들에겐 공포의 시간이다. 보호관찰은 해당 청소년이 선고 후 7일 내에 항소 포기 의사를 밝혀야 확정되는데 이 기간에 관찰 대상자가 잠적하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보호관찰관들로선 처분이 확정되기 전까진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다. B 씨는 이 기간을 “관찰 대상자가 증발해 버리는 ‘끊어진 다리’ 같은 시간”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6월 경기 의정부시에서는 보호관찰 처분을 받자마자 가출해 모텔 등을 전전하며 필로폰을 투약하고 성매매를 한 16세 소녀가 두 달 만에 다시 붙잡히는 일도 있었다. 청소년 보호관찰 대상자의 재범률은 12.3%(2016년)로 성인(5.6%)의 두 배가 넘는다.○ 학교 울타리 밖의 청소년 교화는 속수무책 “선도교육 대기 학생이 넘쳐서 2, 3주씩 징계가 미뤄지는 일도 있고요. 기다리다 지쳐 학교에서 자체 처리하기도 하고요….”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일하는 교사 C 씨는 “‘특별교육이수 처분’에는 사각지대가 너무 많다”며 아쉬워했다. 특별교육이수 처분은 학생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 열리는 선도위원회가 정할 수 있는 징계 중 하나로 외부기관에서 이뤄지는 교육을 받는 징계다. C 씨는 “교육기관을 정할 때 학생의 비행 종류와는 상관없이 연령대로 가르는 등 주먹구구식이 많다”며 “비슷한 문제를 일으킨 아이들이 학교 밖에서 만나 어울리면서 오히려 악영향을 미치기도 한다”고 말했다. 학교와 각종 센터, 교육기관은 청소년들이 경찰서와 법원을 드나들기 전 미리 이들을 챙길 수 있는 대표적 기관이다. 그러나 학교와 기관들이 청소년들의 비행을 막을 수 있을지를 두고는 현장 교사들마저 의문을 표하고 있다. 충남 지역의 한 고등학교 교사 D 씨는 “교내봉사, 사회봉사 처분으로 아이들을 단시간에 바로잡을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오히려 처벌을 받는 과정에서 수업을 빼먹고, 학급 친구들과도 점차 멀어지게 된다는 것. D 씨는 “‘교실 밖 교육’이 늘면서 오히려 자연스럽게 학교 밖으로 밀어내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 울타리 안에서 교화가 어려운 비행 청소년들은 법무부가 운영하는 ‘청소년꿈키움센터(청소년비행예방센터)’로 보내져 특별 교육을 받는다. 검찰이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거나 법원이 교육 명령을 내린 청소년들도 이곳에 온다. 2011년부터 운영된 꿈키움센터에서 교육을 받은 비행 청소년은 매년 증가해 지난해 7만5000여 명에 달했지만 전국 센터 수는 여전히 16곳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실효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승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선도 프로그램이 길어야 4, 5일 정도에 불과해 교화 효과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부모가 반대하면 교육을 받지 않아도 되고 내용도 심리상담 수준에 그쳐 범죄 예방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공정식 한국심리과학센터 소장(경기대 교수)은 “독일은 가해 청소년들이 스스로 후회와 반성의 과정을 거치도록 ‘피해자 고통 공감 훈련’을 집중 실시해 효과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권기범 kaki@donga.com·김단비·김예윤 기자}
북핵 위기 상황이 고조되면서 국내 거주 외국인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일부 외국인학교는 비상시 대책을 알리는 안내문을 급히 학부모들에게 배포했다. 외국인 강사들이 한국 내 취업을 기피하는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다. 서울외국인학교(SFS)는 최근 전체 학부모에게 안내문을 보냈다. 안내문에는 ‘최근 한반도에서 긴장 상황이 계속되는데, 학교는 긴급사태가 일어났을 때를 대비한 절차가 마련돼 있음을 알려드린다’고 적혀 있다. 또 ‘군과 대사관 등 상황을 모니터링하는 기관들과 연결 채널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학부모를 안심시켰다. 비상 상황에 대비해 ‘각자 대사관에 등록하고 협조하라’는 안내와 함께 ‘비상시 학교버스 이용이 어렵기 때문에 직접 데리러 와야 한다’는 등 구체적 행동 요령도 포함됐다. SFS는 국내 대표적인 외국인학교다. 주한 외국 대사관 직원의 자녀들이 많이 다닌다. 학교 관계자는 5일 “한반도에 긴장 상황이 오면 학부모들이 학교 측의 관련 계획을 궁금해하기 때문에 새 학기를 맞아 안내문을 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강남의 한 외국인학교는 최근 개학을 앞두고 일부 외국인 교사를 교체했다. 그러자 일부 학부모는 “방학 때 한국을 떠났던 외국인 교사들이 전쟁이 날까 무서워 돌아오지 않는 것 아니냐”며 걱정했다. 이에 학교 측은 비자 문제 탓에 교체한 것이라며 교사들의 입국 거부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신규 채용 시장에는 한반도 위기 상황이 여파를 미치는 것으로 전해졌다. A국제학교 관계자는 “올해 초부터 외국인 교사들이 ‘한국 정세가 불안하다’며 채용 제안을 거절하는 사례가 빈번하다”고 말했다.권기범 kaki@donga.com·최지선 기자}

《회사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다고? 직장인 사이에 떠돌던 이른바 ‘오피스 괴담’ 중 하나다. 직원들이 업무용 컴퓨터로 나눈 대화 내용을 회사나 상급자가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가능할까?’라며 의심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최근 서울의 한 대학에서 보안 프로그램을 이용해 직원의 대화를 엿본 전산 담당자가 적발됐다. 대기업이나 공공기관도 비슷한 프로그램을 많이 사용한다.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설치한 최신 보안 프로그램이 오히려 ‘빅 브러더’가 될 수 있다. 》 지난달 말 서울의 한 대학 교직원 A 씨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발신자는 학교 개인정보 담당직원 B 씨. 내용을 본 A 씨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B 씨를 거론하며 제3자와 주고받은 온라인 메신저(카카오톡) 대화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B 씨가 보낸 메시지에는 ‘말조심하라’는 경고가 함께 있었다. 교직원 사이에 “학교 측이 직원들의 개인적 대화를 엿본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이 학교는 약 2개월 전 새로운 보안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직원들의 e메일과 메신저 내용을 열람하고 문서 파일로 내보낼 수도 있는 프로그램이다. B 씨는 프로그램 테스트를 위해 시험 삼아 자신의 이름으로 검색해 직원들의 메신저 내용 등을 열람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을 험담하는 내용을 보자 교내 메신저를 통해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논란이 커지자 학교 측은 해당 시스템 운용을 중단했다. 학교 관계자는 “문제가 된 시스템을 완전히 정지시켰다”며 “해당 직원을 대상으로 징계위원회도 열 것”이라고 밝혔다. 이 학교가 사용한 시스템은 공공기관과 기업 800여 곳에 공급된 정보유출방지(Data Loss Prevention) 프로그램이다. 민감한 정보가 유출되는 걸 막아주는 게 목적이다. 이를 위해 직원의 컴퓨터 이용 기록 등을 수집한다. 하지만 이 기능이 너무 강력해서 개인정보뿐만 아니라 프라이버시 침해 우려를 낳고 있다. 실제 일부 프로그램은 카카오톡 등 외부 메신저 대화까지 손쉽게 수집할 수 있다. 다른 프로그램도 카카오톡으로 주고받은 파일명이나 내용을 추적해 차단할 수 있다. 한 보안업체 대표는 “메신저 대화의 전 구간을 암호화하지 않는 이상 대화 내용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직장인들은 자신의 컴퓨터에서 이뤄지는 모든 업무와 대화를 회사가 들여다보고 있다는 ‘괴담’이 현실이 됐다며 우려하고 있다. 최근까지 컨설팅업체에 다니던 이모 씨(28·여)는 스마트폰 알림을 통해 회사 컴퓨터의 온라인 메신저가 저절로 로그인된 걸 경험했다. 퇴근 후인 오후 10시였다. 30대 직장인 C 씨는 요즘 회사 내부 와이파이망을 이용하지 않는다. 보안담당자로부터 “당신의 컴퓨터에 업무와 무관한 프로그램이 깔려 있으니 삭제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서다. C 씨는 “회사가 스마트폰 사용 내용까지 엿볼까봐 겁이 났다”고 말했다. 외근이 잦은 박모 씨(33)는 아예 ‘선제적 대응’을 했다. 회사가 웹캠으로 몰래 ‘근태’를 살핀다는 소문이 돌자 노트북 카메라에 스티커를 붙였다. 박 씨는 “기술적으로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보안프로그램이 오히려 ‘공포의 대상’으로 꼽히다 보니 내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조치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회사가 보안 등의 이유로 직원의 전산 이용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대화까지 들여다보는 건 자칫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의 소지가 있다. 한 보안업계 관계자는 “기업들도 수집 정보에 대한 열람 권한을 극도로 제한하고 열람 기록도 공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권기범 kaki@donga.com·김동혁·최지선 기자}
‘일요일에는 군인들이 너무 많이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주로 밥과 된장을 먹고 지냈습니다….’ 28일 세상을 떠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하상숙 할머니(89)가 생전에 밝힌 위안부 생활이다. 1999년 할머니가 한국 국적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법무부에 제출한 ‘중국에서의 생활진술서’에 담긴 내용이다. 하 할머니의 말을 옮긴 것으로 편지지 3장 분량이다. 30일 본보가 입수한 진술서에는 고향을 떠나 머나먼 중국에서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은 할머니의 고통이 그대로 묻어났다. 진술서에 따르면 할머니는 고향을 떠나 서울 장충단 근처의 여관에 갔다. 전국 팔도에서 온 또래 여성들이 속속 도착했다. 그렇게 40여 명이 모였다. 할머니가 “공장에서 일하면 큰돈을 버는 게 진짜냐”고 묻자 “헤이타이(兵隊·군인)를 환송하는 위문단 일”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도 할머니는 의심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탄 기차는 평양, 중국 단둥(丹東), 난징(南京)을 거쳐 우한(武漢)으로 갔다. 무려 2000km가 넘는 여정이었다. 도착한 마을 입구에는 철문이 있었다. 20명가량이 2층 집에 들어갔다. 작은 방이 20개 넘게 있었다. 마을에는 비슷하게 생긴 집이 12채나 있었다. ‘집주인’이라는 사람은 “그동안 쓴 기차 요금과 식비 옷값을 갚아야 한다. 앞으로 3년간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옷과 화장품 등을 나눠줬다. 악몽의 시작이었다. 하루 10∼15명의 일본 병사가 할머니의 방을 찾았다. 가끔 군인들 연회에도 불려나갔다. 할머니는 부대 이름을 ‘사쿠라 부대’로 기억했다. 일본 패전 후 할머니는 우한에서 생활했다. 비슷한 처지의 할머니가 7명 더 있었다. 1996년 9월 김원동 씨(72)가 하 할머니를 만나러 왔다. 그는 중국에 살던 위안부 피해자들의 귀국 운동을 주도한 사람이다. 할머니의 진술서는 김 씨가 이때 받아 적은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법무부는 할머니의 국적을 한국으로 판정했다. 그러나 귀국에는 4년이 더 걸렸다. 북한 국적인 데다 그곳 할머니들의 ‘대표’였기에 더 조심스러웠다. 김 씨는 “출국할 때는 북한 여권, 입국할 때는 한국 임시여권을 쓰도록 하는 등 치밀하게 귀국을 추진했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할머니 별세 후 김 씨는 2박 3일간 빈소를 지켰다. 30일 발인 후 할머니는 충남 천안시 ‘해외 동포를 위한 국립 망향의 동산’에 묻혔다. ● 위안부 할머니 또 별세… 35명 생존 이날 또 한 분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사단법인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이날 오후 3시경 대구의 한 병원에서 이모 할머니가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향년 93세. 1924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경북 경주시의 고모 집에서 생활하다 일본군에 끌려갔다. 대만의 위안소에서 고초를 겪던 할머니는 광복 후 경주로 돌아왔고 2001년 7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됐다. 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9명 가운데 생존자는 35명으로 줄었다.권기범 kaki@donga.com / 대구=장영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