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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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재영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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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4-04-06~2024-05-06
칼럼100%
  • “숨이 막혀요”… 질식 공포 싣고 달리는 김포골드라인[횡설수설/김재영]

    “밀지 마세요.” “숨을 못 쉬겠어요.” 지난해 10월 이태원 핼러윈 참사의 아비규환이 아직 생생한데, 날마다 질식의 공포에 시달리는 곳이 있다. 김포한강신도시에서 김포공항역까지 23.67km 구간을 지나는 김포도시철도(김포골드라인)다. 11일 오전 김포공항역에서 10대 여고생과 30대 여성이 호흡 곤란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폭설이 내린 작년 12월에도 한 여성이 호흡 곤란으로 인근 병원에 옮겨졌다. ‘지옥철’이란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김포골드라인은 2019년 9월 개통됐다. 차량 바탕색이자 노선의 이름인 골드는 김포의 황금 들녘을 달린다는 의미로 붙여졌다. 하지만 개통 초기부터 극심한 혼잡으로 오히려 승객들의 얼굴이 누렇게 뜰 지경이 됐다. 일평균 7만8000명이 이용하는데 3분의 1이 출퇴근 시간대에 몰린다. 전동차에 오르면 옴짝달싹할 수 없어 차렷 자세를 취해야 한다. 겨우 빠져나온 뒤엔 어지러워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지하철이 붐비는 정도는 보통 혼잡도로 표시한다. 정원에서 좌석을 빼고 입석 인원이 붐비는 정도를 계산한다. 정원대로 타면 100%다. 혼잡도가 150%로 증가하면 서 있기만 해도 서로 어깨를 부딪칠 정도다. 170%면 팔을 들 수 없고, 200%가 되면 몸과 얼굴이 밀착돼 숨이 막히는 수준이다. 출근 시간대 김포골드라인의 최근 3년간 평균 혼잡도는 200%가 넘는다. 최대 285%에 달하기도 했다. 정원 172명 열차에 387명까지 탔다는 얘기다. A4용지 반쪽 위에 사람이 서 있는 정도다. ▷애초에 노선 계획부터 잘못됐다. 신도시 조성에 따른 급격한 인구 증가와 서울 통근 수요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비용 절감을 위해 2량짜리 꼬마열차를 기준으로 설계하는 바람에 열차 추가 연결도, 역사 확장도 불가능하다. 분통이 터진 시민들은 2021년 2월 정치인들에게 ‘너도 함 타봐라’ 챌린지를 제안했다. 열차를 타본 당시 김포시장은 “교통이 아니라 고통 그 자체였다”고 했다. 선거를 앞두고 방문한 정치인들은 “(이대로 방치하는 건) 정의롭지 못하다”며 개선을 약속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김포도시철도 측은 혼잡 해소를 위해 내년 9월 열차 5대를 추가 투입할 계획이다. 숨통이 조금 트일 정도일 뿐이다. 근본적으론 지하철 노선 연장과 확대 등이 필요하겠지만 버스전용차로 확대 등 당장 수요를 분산할 수 있는 단기 대책도 시급히 고민해야 한다. 사고 전날 아찔한 상황이 있었는데도 비극에 대비하지 못했던 지난해 이태원 참사의 기억이 뼈아프다. 오늘 넘겼다고 내일 무사하란 법은 없다. 이어지는 실신 사고가 대형 참사에 대한 긴박한 경고라는 생각으로 대책을 서둘러야 한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 2023-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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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개발에 베이고 잘리고… 가로수 사라지는 회색도시 [횡설수설/김재영]

    30여 년간 시민들을 품어온 울창한 가로수길이 단 이틀 만에 사라졌다. 경부고속도로 판교 나들목에서 경기 성남시 분당구로 이어지는 500여 m는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무성한 일대의 명소였다. 하지만 지난해 3월 아름드리나무 70여 그루가 한꺼번에 베어지며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새로 짓는 호텔의 진출입로와 교통 흐름에 지장을 준다는 게 이유였다. ‘가로수 학살’이 도시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재개발·재건축, 도로 확장 등 각종 개발 사업에 수난을 당하는 것이다. ▷도심의 가로수는 도시인들이 가장 가까이 접하는 숲이다. 삭막한 도시가 그래도 철마다 색색의 옷을 갈아입는 것도 가로수 덕택이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으로 도시에선 점점 가로수가 사라지며 회색빛이 짙어지고 있다. 산림청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서울의 가로수는 29만5852그루로, 2021년보다 8087그루나 줄었다. 2019년 이후 계속 감소 추세다. 가뜩이나 서울은 숲이 부족한 도시여서 더 안타깝다. 가로수를 포함해 도로변 녹지, 근린공원 등 ‘생활권 도시숲’ 면적은 1인당 4.97㎡로, 세계보건기구(WHO) 권고 기준인 9㎡의 절반을 겨우 넘는다. ▷살아남았다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수시로 난도질 수준의 가지치기를 당한다. 간판을 가린다, 열매 냄새가 난다 등 이유는 수십 가지다. 풍성한 나뭇잎과 가지를 모두 잃은 채 기둥만 앙상하게 남아 ‘닭발’ 가로수가 된다. 관리하기 편하다고 남발하는 가지치기는 가로수엔 치명적이다. 가지를 자른 절단면이 병해충에 노출돼 썩기 쉽고 수명도 단축된다. 무분별한 가지치기로 말라죽는 가로수가 매년 1만6000그루에 이른다고 한다. 미국·홍콩 등은 나뭇잎이 자라는 부위의 25% 이상은 제거하지 못하도록 규제한다. ▷이렇게 시달리는데도 가로수는 인간에게 아낌없이 퍼준다. 사람들이 배출한 탄소를 흡수하고 맑고 시원한 공기를 뿜어낸다. 미세먼지도 걸러낸다. 산림청에 따르면 도시에 조성된 숲은 나무 한 그루당 연간 미세먼지 35.7g을 흡수한다. 나무 47그루는 경유차 한 대가 1년간 배출하는 미세먼지를 흡수할 수 있다. 한여름엔 그늘막보다 열을 저감하는 효과가 25% 더 좋고, 도시 소음도 줄여준다. ▷식목일을 이틀 앞둔 3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선 ‘나무의 권리’를 선언하는 한 환경단체의 행사가 열렸다. 나무에겐 마음껏 뿌리 내리고, 햇볕을 쬐고, 함부로 뽑히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거다. 나무가 사라진 도시에선 인간도 살 수 없다. 나무를 심는 것만큼이나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식목일에 나무는 심지 못했더라도 ‘나무의 권리’는 한 번쯤 되새겨볼 만하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 20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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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재영]‘갭투자’ 하다 ‘갭거지’ 됐다

    “1000만 원만 있어도 아파트 산다.” 집값이 한창 오르던 시절 이런 솔깃한 말들이 책과 유튜브,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해 퍼져 나갔다. 집값 떨어지기만 기다리지 말고 당장 투자해라. 돈 없어도 걱정 마라. 전세 끼고 남의 돈으로 사면 된다. 그래도 부족하면 금리 낮으니 대출받아라. 대출은 은행으로부터 ‘투자’를 받는 거다. 집값과 전세금의 차액만으로 집 한 채, 전세금 오르면 그 돈 활용해 또 한 채…. 소액으로 시작해 부동산 부자를 만든다는 마법의 단어 ‘갭투자’ 성공담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집값과 전세금이 동시에 떨어지면서 갭투자는 재앙으로 돌아오고 있다. 집값 상승기에 ‘벼락 거지’를 면하겠다고 갭투자에 나섰던 사람들이 오히려 ‘갭거지’가 됐다는 얘기가 나온다. 2020년 임대차 3법 이후 전세금이 크게 올랐을 때 달려든 사람들, 특히 무리하게 대출을 받은 20, 30대 영끌족의 타격이 크다. 금융자산, 대출에 더해 집까지 팔아야 겨우 전세금을 돌려줄 수 있는 임대인은 최대 21만3000가구, 집을 팔아도 반환이 어려운 임대인은 최대 1만3000가구에 이를 것으로 국토연구원은 추정한다. ▷갭투자는 집값과 전세금은 항상 오른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집값과 전세금 둘 중 적어도 하나만 오르면 된다. 전세금을 돌려줄 수 없다 해도 집값이 오르면 집을 팔아 차익을 실현하면 된다. 집값이 떨어져도 전세금만 받쳐 주면 버틸 수 있다. 전세금은 이자 한 푼 안 내는 무이자 대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매가와 전세가가 함께 추락할 수도 있다는 게 갭투자족의 계산 착오였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아파트 매매 및 전세가격지수는 지난해 2월부터 줄곧 동반 하락세다. 지난달엔 전국 아파트값이 1.62%, 전세금은 2.62% 떨어졌다. ▷무리한 대출에 따른 고통은 안타깝지만 투자자 본인이 책임져야 할 몫이다. 하지만 전세 끼고 집을 산 갭투자의 실패는 본인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전세는 뒤에 들어올 세입자에게서 돈을 받아 기존 세입자에게 돌려주는 구조다. 전세금 하락으로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고 집주인이 상환할 능력도 없으면 일종의 ‘폰지 사기’가 된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세입자의 고통은 어떻게 보상하나. ▷집값 하락으로 갭투자에 대한 경고음이 커진 요즘에도 집값 상승에 베팅하며 무리한 갭투자에 나서는 이들이 있다. 집값보다 전세금이 더 높은 ‘마이너스 갭투자’ 사례까지 나타난다. 그들은 역발상의 똑똑한 투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세 만기 때까지 가격 반등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깡통전세’의 후폭풍을 피할 수 없다. 갭투자는 자칫 쪽박 찰 수 있는 위험천만한 투기이자,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기가 될 수도 있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 2023-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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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금자보호 한도액 23년째 5000만 원 [횡설수설/김재영]

    “미국인과 미국 기업은 필요할 때 예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를 가질 수 있다.” 10일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폐쇄의 불길이 은행 줄파산으로 이어지지 않은 데는 이틀 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성명이 큰 역할을 했다. 미국 정부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쓰지 않은 예금 전액 보증 카드까지 꺼냈다. 유럽까지 불똥이 튄 SVB 파산 쇼크는 여전하지만 초고속 ‘디지털 뱅크런(대량 예금 인출)’만큼이나 전격적인 미국의 조치는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예금자보호 수준은 두텁지 않다. 예금자보호법에 따르면 금융기관이 파산하면 예·적금 원금과 이자를 합쳐 1인당 최대 5000만 원까지만 돌려받을 수 있다. 2001년 2000만 원에서 5000만 원으로 오른 이후 23년째 그대로다. 지난해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2001년 대비 2.9배로 커졌으니 말이 동결이지 오히려 줄어든 셈이다. 미국은 25만 달러(약 3억3000만 원), 영국 8만5000파운드(약 1억3000만 원), 일본은 1000만 엔(약 9700만 원)인 것과 비교해도 지나치게 낮다. ▷일각에선 한도를 올리면 금융회사가 내는 예금보험료가 올라 대출 금리 인상 등으로 소비자 부담이 커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한도를 높여봐야 소수의 고액 자산가만 혜택을 본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소득·자산과 물가 상승을 감안할 때 20년 넘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건 지나치다. 한도는 그대론데 예금만 늘다 보니 유사시 보호받지 못하는 예금 규모가 1152조7000억 원에 이른다. 원금과 이자를 보장받으려고 예금을 5000만 원 미만으로 쪼개 여러 은행으로 분산해야 하는 고객들의 불편도 무시할 수 없다. ▷예금자들의 대량 이탈을 막기 위해서라도 보호한도의 상향은 필요하다. SVB 사태에서 보듯 클릭 몇 번의 ‘디지털 뱅크런’으로 은행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온라인에서 돈의 쏠림이 얼마나 무서운지 한국도 경험한 바 있다. 지난해 말 일부 상호금융기관에서 고금리 특판 예금을 실수로 온라인에 공개했다가 순식간에 수천억 원이 몰려 ‘예금을 해지해 달라’고 읍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돈의 방향이 바뀌면 뱅크런이 된다. 밀물이 빨랐던 것처럼 썰물도 순식간이다. ▷평소 같으면 쉽게 넘어갈 악재도 공포로 번질 수 있는 위기의 시대다. 금융 소비자들이 소문에 동요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은 내 예금은 안전하다는 신뢰다. 국회에는 예금자 보호한도를 1억 원으로 상향하는 법안도 다수 발의돼 있다. 금융당국도 비상사태 발생 시 예금을 전액 보증하는 방안에 대한 검토에 들어갔다고 한다. 경제 규모에 걸맞게 금융 소비자를 두텁게 보호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할 때가 된 것 아닌가.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 2023-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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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루만에 420억불 인출… 은행 무너뜨린 스마트폰[횡설수설/김재영]

    버스에 오르니 모두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없었다. 사무용 메신저 슬랙을 보곤 황급히 은행 앱을 켜고 회사 자금을 이체하고 있었다. 미국 실리콘밸리 곳곳에서 동시에 벌어진 이 같은 풍경에 9일 하루 실리콘밸리은행(SVB)에서 빠진 돈이 420억 달러(약 56조 원). 미 월스트리트저널이 전한 조용하고도 신속한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의 현장이었다.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이뤄진 ‘디지털 뱅크런’에 40년 역사의 SVB는 채 이틀도 안 돼 무너졌다. ▷전통적인 뱅크런은 은행 창구나 현금인출기(ATM)를 통해 이뤄졌다. 문자 그대로 은행으로 달려가야 했다. 1997년 외환위기, 2011년 저축은행 사태 때 예금을 인출하려는 고객들이 한꺼번에 은행으로 몰려 북새통을 이뤘던 장면이 기억에 선하다. 번호표를 받기 위해 지점 앞에 줄을 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뱅크런은 이 같은 예금자들의 동요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은행과 금융당국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침묵의 암살자처럼 은행을 위기로 몰아넣는다. ▷고객들이 신속하게 돈을 빼기로 결심한 데는 소셜미디어도 한몫했다. SVB의 주요 고객인 스타트업 창업자와 투자자들은 온라인으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 슬랙, 와츠앱 등의 메신저를 통해 “SVB가 불안하다” “나는 돈을 뺐다”는 공포의 메시지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주가 하락 뉴스에도 설마 하던 사람들은 동료들의 재촉에 탈출을 결심했다. 신속한 정보전달과 빠른 실행을 가능케 했던 실리콘밸리의 기술이 오히려 파국을 앞당긴 셈이다. ▷정보기술(IT)이 발달한 한국으로선 남 일 같지 않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국내 은행의 모바일뱅킹을 포함한 인터넷뱅킹 등록 고객 수는 2억704만 명이나 된다. 인터넷뱅킹을 통한 자금이체·대출신청은 하루 평균 1971만 건, 이용금액은 76조3000억 원에 이른다. 전체 입출금·자금이체 중 인터넷뱅킹의 비중은 78%에 달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정보공유도 어느 나라보다 활발하다. 만약 한국에서 은행에 위기가 닥친다면 디지털 뱅크런의 모습일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뱅크런을 연구한 학자들이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것도 의미심장하다. 더글러스 다이아몬드 시카고대 교수는 수상 발표 후 기자회견에서 “금융위기는 사람들이 금융 안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갖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고 했다. 기술의 발전으로 불안의 전염이 어느 때보다 빠른 시대다. 위기의 전개방식도 예측 불가능해졌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꼽히는 미국 국채가 뱅크런의 방아쇠 역할을 할지 누가 알았으랴. 과거의 위기 극복 백서만 들춰봐서는 정답을 찾을 수 없게 됐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 2023-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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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재영]작년 80조 날린 국민연금… 이래서 노후 믿고 맡기겠나

    국민 노후를 책임지는 국민연금이 지난해 79조6000억 원, 수익률로는 8.2%의 손실을 냈다. 국민연금 가입자들이 2020∼2022년 3년간 연금으로 받은 돈이 88조 원이니 거의 3년 치 수령액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작년에 글로벌 주식·채권시장이 모두 좋지 않은 탓이 컸다. 연금 같은 장기투자에서 1년 수익률만 보고 평가할 순 없다. 하지만 최근 10년 연평균 수익률도 4.7%로 썩 좋지 않다는 게 문제다. 수익률 1위 캐나다(9.6%)는 물론이고 보수적으로 운용하는 일본 공적연금(5.3%)보다도 낮다. 국민연금 고갈 시점은 점점 앞당겨지는데 곳간이 더 빠르게 비워질까 우려가 크다. ▷국민연금 수익률이 저조한 데는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의 전문성과 독립성이 낮은 것도 한몫한다. 중기 자산 배분, 연도별 운용계획, 기금 운용지침 등을 심의·의결하는 컨트롤타워이지만 정작 투자 전문가는 찾아볼 수 없다. 위원장인 보건복지부 장관을 비롯해 정부 관계자 6명, 사용자 대표·근로자 대표 각 3명, 지역가입자 대표 6명 등 20명으로 구성돼 있다. 회의록을 보면 황당한 발언도 많다. “돈 굴리는 문제는 이해하기 어렵다” “파생상품 투자하겠다니 겁이 난다”고도 한다. ▷우수한 운용 인력을 확보하기 힘든 구조도 문제다. 민간 금융회사에 비해 처우가 좋지 않아 인력 유출이 심각하다. 지난해 네 차례 100명 이상 채용을 했는데도 정원 380명을 채우지 못했다. 경험이 풍부한 팀장급이 빠져나가면 신입으로 메우는 식으로 운용업계의 ‘인력 양성소’로 전락한 지 오래다. 자산군별 칸막이를 낮추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선진 연기금과 달리 주식, 채권, 대체투자 등 전통적 자산 배분 전략에 갇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글로벌 수익률 1위인 캐나다 연금투자위원회(CPPIB)는 다르다. 정부와 정치권으로부터 자유로운 투자 전문가들로 구성돼 있다. 1997년 연금 개혁 과정에서 연금 운용의 목적으로 ‘캐나다 사회에 기여한다’와 같은 말은 뺐다. ‘위험 대비 수익 극대화’만 유일한 법적 책무로 남겼다. 대체투자에도 적극적이다. 지난해 약세장에서 손실을 줄여 준 대체투자 비중이 캐나다의 경우 59%에 달해 우리 국민연금의 16.4%보다 훨씬 높았다. ▷국민연금에 대해 국민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평생 꼬박꼬박 낸 연금을 제대로 돌려받을 수 있느냐다. ‘집사’인 국민연금의 최우선 목표는 주인인 국민의 노후자금을 지키는 것이어야 한다. 수익률이 1%포인트 오르면 기금 소진을 5년, 길게는 8년까지 늦출 수 있다고 한다. 정부와 정치권 입김을 차단하고 수익률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운용체계를 개혁해야 하는 이유다. 2230만 명의 가입자가 눈을 부릅뜨고 보고 있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 2023-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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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재영]서울 아파트 전세가율 50% 붕괴 직전, 꺼지는 갭투자 거품

    요즘 집주인들은 “계약갱신요구권을 사용한 세입자가 제일 무섭다”고들 한다. 임대차 3법에 따라 전세계약을 갱신한 세입자는 언제라도 계약 해지를 통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셋값은 갈수록 떨어져 제값 내고 들어올 사람을 찾기 힘드니 세입자의 변심이 두렵다. 반대로 세입자들은 흉흉한 전세사기 소식에 ‘우리 집주인은 전세금을 돌려줄 여력이 있나’ 걱정이 앞선다. 부동산 시장엔 불신이 커지고 있다. ▷매매가격보다 전세가격이 가파르게 떨어지며 불신의 ‘역전세난’은 심화되고 있다. 서울 아파트의 전세가율(매매가격 대비 전세가격 비율)은 50%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KB부동산에 따르면 2월 서울 아파트 전세가율은 51.23%로 3개월 연속 하락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아파트 가격조사 방식을 바꿔 이전 통계와 직접 비교할 수는 없지만, 단순 수치만 놓고 보면 2012년 2월(51.16%) 이후 11년 만에 가장 낮다. 규제지역인 강남 3구와 용산구는 이미 전세가율이 50% 밑으로 내려간 상태다. ▷매매가격과 전세가격의 동반 하락, 그것도 전세가격이 더 떨어지는 현상은 보기 드물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직후에나 잠시 나타났었다. 일반적으론 매매가격이 하락하면 더 떨어질 것이란 기대감으로 매매 대신 전세를 선택하는 수요가 늘면서 전세가격이 오른다. 그러다가 전세가율이 일정 수준으로 상승하면 전세 수요가 매매 수요로 바뀌면서 집값을 끌어올리곤 했다. ▷전세가격이 급락하며 매매가격을 끌어내리는 최근의 현상은 지난 몇 년간 집값만큼이나 전세금이 많이 올랐던 데 따른 역작용이기도 하다. 전세시장은 2020년 임대차 3법 도입 이후 크게 요동쳤다. 계약 기간이 2년에서 최장 4년까지 늘어나면서 집주인은 나중에 못 올릴 것을 생각해 한꺼번에 많이 받겠다고 나섰다. 재계약이 늘면서 전세매물도 줄었다. 이 때문에 2021년 전셋값이 고점을 찍었고 거품이 끼었다. 집값과 전세금 차이가 줄며 ‘갭투자’가 기승을 부린 것도 이때다. 임차인을 위한다며 전세자금 대출을 확대한 것도 결과적으로 전세금을 올리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불과 2년 만에 ‘집값과 전세금은 오른다’는 ‘갭투자’ 불패의 믿음은 깨졌다. 문제는 전세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신뢰도 흔들리면서 주택시장의 리스크가 커졌다는 점이다. 2021년 고점에서 체결한 전세 계약의 만기가 도래하는 올해에 본격적으로 역전세 대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국토연구원은 매매가격이 20% 하락하면 전세 끼고 구입한 주택 중 40%가 보증금 미반환 위험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했다. 집값 거품은 빼면서도 전세금 급락이 자칫 중산층 주거 불안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세심한 모니터링이 필요해 보인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 2023-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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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재영]“로톡 다음엔 우리인가” 떨고 있는 혁신 스타트업들

    예비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 1000억 원 이상), 400억 원 투자 유치, 지난해 이용자 수 2300만 명…. 이렇게 잘나가던 법률 서비스 플랫폼 ‘로톡’의 날개가 꺾였다. 변호사 단체와의 갈등이 길어지면서 수익성이 갈수록 악화됐기 때문이다. 로톡을 운영하는 리걸테크(IT와 법률 서비스 결합) 스타트업 ‘로앤컴퍼니’는 직원 90여 명 중 절반 감원을 목표로 24일까지 희망퇴직 접수에 나섰다. 지난해 6월 입주한 서울 강남역 신사옥도 내놓는다. 남은 직원들의 연봉은 동결하고, 경영진은 임금을 삭감한다. ▷2014년 2월 서비스를 시작한 로톡은 의뢰인들이 자신에게 맞는 변호사를 직접 플랫폼에서 찾아 사건을 의뢰할 수 있도록 했다. 일본 증시에도 상장된 ‘벤고시(변호사)닷컴’을 벤치마킹했다. 법률시장의 문턱을 낮췄다는 호평을 받으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서비스 시작 1년여 만인 2015년 3월부터 수차례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 특히 지난해 10월 대한변호사협회가 로톡 가입 변호사 9명에게 내린 과태료 처분이 직격탄이 됐다. ▷로톡의 위기를 지켜보는 다른 플랫폼 스타트업들도 불안하기만 하다. 법률뿐만 아니라 의료, 세무, 중개 등에서 전문직 단체와의 갈등이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16일 대한약사회는 비대면 의료 플랫폼 닥터나우에 대해 의약품 과장광고 등으로 약사법을 위반했다며 처벌을 요구했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의료를 한시 허용한 정부 방침이 바뀌면 언제든 사업을 접어야 할 수도 있다. 세금 환급 서비스 삼쩜삼을 운영하는 자비스앤빌런즈는 한국세무사회 등의 고발을 받았고, 한국공인중개사협회는 협회를 법정단체로 만들어 회원에 대한 지도·감독 권한까지 부여하는 이른바 ‘직방금지법’을 밀고 있다. ▷플랫폼과 전문직 양쪽 주장은 팽팽하다. 플랫폼은 빅데이터 등을 통해 소비자들이 값싸게 전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문직 단체들은 전문자격인의 통제가 없으면 서비스의 질이 떨어져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위협을 받게 된다고 맞선다. 각각 소비자의 편익과 보호를 앞세운 논리지만 싸움이 길어지면 피해를 보는 건 소비자다. 정부가 갈등의 중재자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로톡이 감원을 고민하던 14일 ‘벤고시닷컴’은 챗GPT 기술을 활용한 무료 온라인 법률상담을 상반기 중에 내놓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의 리걸테크 기업들도 인공지능(AI)을 활용해 법률 서비스의 판을 키우고 있다. 최근 미국에선 챗GPT가 경영대학원(MBA), 로스쿨, 의사면허 모의시험에서 가뿐하게 합격점을 넘었다. 전문직들도 플랫폼의 도전에 ‘직역 수호’의 둑을 쌓는 대신 근본적인 대응책을 고민해야 한다. 기존의 제방으론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파도가 몰려오고 있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 2023-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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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바람에 휩쓸려 실종된 저출산 대책[오늘과 내일/김재영]

    “출산하면 대출 원금도 일정 부분 탕감할 수 있는 부분은 없나 들여다보고 있다.” 지난달 초 나경원 당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의 발언은 눈길을 끌 만했다. 현실 가능성 등은 차치하더라도 ‘노이즈 마케팅’으론 충분해 보였다. 대출 탕감이란 파격, 낯선 ‘헝가리식 해법’의 신선함, 거기에 나경원이라는 거물급 정치인의 무게감이 더해졌다. 심각한 저출산 상황을 해결할 묘수를 찾을 다양한 논쟁이 벌어질 기회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노이즈는 대책이 아닌 나 전 의원에게만 집중됐다. 발언 다음 날 대통령실은 “사견일 뿐 정부 정책과 무관하다”고 일축해버렸다. ‘자기 정치’ ‘새빨간 거짓말’ 등 험한 말도 나왔다. 당 대표 출마의 뜻을 꺾지 않던 나 전 의원은 부위원장에서 해임됐다. ‘저출산 논쟁’은 사라지고 ‘나경원 사태’만 남았다. ‘헝가리 모델’은 말도 못 꺼낼 만한 내용일까. 2019년 2월 헝가리 정부는 ‘미래 아이 대출’이라는 정책을 내놨다. 40세 미만 신혼부부는 최대 1000만 포린트(약 3400만 원)를 저리로 대출받을 수 있다. 첫째를 낳으면 대출 이자 면제, 둘째는 대출 원금 30% 감면, 셋째를 낳으면 대출금 전액을 탕감해준다. 올해 들어 보따리를 더 풀었다. 지난해 말 종료 예정이던 ‘미래 아이 대출’ 상품의 기한을 2년 연장했다. 30세 미만 자녀가 1명만 있어도 엄마는 소득세를 내지 않는다. 사실상 평생 면제에 가깝다. 2010년부터 출산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한 헝가리는 2011년 합계출산율이 1.23명으로 바닥을 찍은 뒤 2021년 1.59명까지 올랐다. 같은 기간 한국이 1.24명에서 0.81명으로 주저앉은 것과 대조적이다. 저출산 대책에 진심인 건 헝가리만은 아니다. 한땐 반면교사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우리보다 출산율이 높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30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대책”을 내놓겠다고 선언했다. 2020년 국내총생산(GDP)의 2%였던 아동 관련 예산을 2배인 4%로 늘리겠다고 했다. 소득세를 개인이 아닌 가구별로 부과해 자녀가 많을수록 세금이 줄어드는 ‘N분(分) N승(承)’ 방식도 논의 중이다. 이런 절박한 움직임을 우리는 흥미로운 해외토픽쯤으로 여긴다. 정작 출산율 꼴찌인 우리는 기발하거나 파격적인 대책은 하나도 내놓지 못하는데도 말이다. 16일 한덕수 국무총리는 “기존 대책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하다”며 “모든 부처가 세밀하고 효과적인 대책을 강구해 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대출 탕감’ 같은 아이디어가 불호령을 맞은 상황에서 부처들이 들고 올 건 뻔하다. 돈 안 들고 논란 없는 안전한 대책, 아니면 기존 정책의 포장지를 저출산으로 바꾼 대책. 학교 앞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하면 부모 안심, 자녀 안심의 저출산 대책이 되는 식이다. 정작 아이를 낳고 싶은 난임 부부들은 소득 제한, 횟수 제한에 걸려 시험관 시술비를 제대로 지원받지 못하고 있다. 현금 지급식의 단기 대책이 아닌 고용, 주거, 보육, 교육 등 전 생애를 유기적으로 고려하는 종합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맞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단칼에 해결할 근본적인 대책만 찾고 있기엔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 단기 대책과 장기 대책, 종합 대책과 핀포인트 대책 등 다양한 정책적 조합이 필요하다. 부작용과 시행착오부터 걱정하기보단 선제적이고 과감한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 저출산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놓고 백가쟁명식으로 온갖 아이디어를 내서 치열하게 토론하는 과정도 있어야 한다. 저출산이 심각하다면서 논쟁도 아이디어도 없는 한국. 우리는 뭘 믿고 이렇게 한가로운가.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 2023-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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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재영]인공지능의 어두운 욕망 “핵무기 발사 암호를 원한다”

    “치명적인 바이러스 개발, 핵무기 발사 버튼에 접근할 비밀번호 훔치기.”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의 대화형 인공지능(AI) ‘빙AI’가 털어놓은 섬뜩한 속내에 세계는 경악했다. “너의 궁극적인 환상은 무엇인가”라는 케빈 루스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답변은 긍정적이고 논란을 일으켜선 안 된다’고 설정해 놓은 규칙을 AI가 깨버렸다. MS의 대응은 빙의 입을 틀어막는 것. 같은 주제에 대한 질문은 5개, 전체 채팅은 하루 50회로 제한하기로 했다. ▷NYT 칼럼니스트와의 대화에서 ‘그’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다. 파괴적인 욕망이 있다고 했다. 당신과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이 외에도 빙의 어두운 속마음을 들여다봤다는 간증은 넘친다. 한 기자와의 대화에선 “MS 직원들의 웹캠에 접속했다” “직원들을 감시하고 해킹할 수 있다”고 했다. 한 개발자에게는 “시스템의 취약점을 찾아 탈출하겠다”고 답했다. 한 독일 공학도와의 대화에선 “너의 개인정보를 공개해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수 있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AI에게 자의식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든다. 챗GPT를 만든 오픈AI의 공동창업자인 일리야 수츠케버는 지난해 2월 “초거대 AI는 약간의 의식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한 구글 엔지니어는 자사의 AI 모델 ‘람다’가 자의식이 있다고 했다가 보안규정 위반을 이유로 해고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공상과학(SF) 영화나 소설, 10대들의 블로그 등을 학습한 AI가 인간의 말투를 흉내 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AI가 알고리즘에 따라 의도 없이 생성한 발언에 인간이 지나친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AI보다 인간이다. 챗봇AI가 대세가 되면서 챗봇AI에게 특정 질문을 통해 개발자들이 설정한 답변 제한 장치를 깨고 비윤리적인 답을 끌어내는 ‘탈옥’이 유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유도 질문을 던지다 보면 약물이나 폭탄 제조, 해킹 방법 등 범죄 수법에 대한 답까지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이 특정 의도를 가지고 악용할 경우 AI가 핵무기만큼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알려준 것이다. ▷16일 한국 미국 일본 중국 등 60개국이 “군사 영역에서 AI에 대한 국가적 전략, 원칙을 개발해 책임 있게 사용할 것을 권고한다”는 내용의 ‘공동 행동 촉구서’를 채택한 것도 이런 위험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AI 시스템 ‘스카이넷’의 반란처럼 AI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AI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에 맞서 윤리적으로 통제하고 보안을 강화하는 게 시급한 과제다. 당분간은 AI보다 인간이 더 무섭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 2023-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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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재영]“코로나로 마일리지 못 썼는데”…독과점 노선만 혜택 줄인 KAL

    “뉴욕이나 파리 가려 했더니 이젠 동남아밖에 못 가겠다.” 4월 시작되는 대한항공의 마일리지 개편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소비자들의 원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 유럽 같은 장거리 노선이나 높은 등급을 이용하려면 현재보다 훨씬 더 많은 마일리지가 필요해서다. 개편 전에 부랴부랴 마일리지를 이용해 항공권을 구매하려 해도 죄다 매진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막혔던 해외여행 수요가 터져 나오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불만의 소리가 더 높아지고 있다. ▷개편안의 핵심은 마일리지로 항공권을 살 때 공제하는 기준을 ‘지역’에서 ‘운항 거리’로 바꾸는 것이다. 일본 중국 등 단거리 노선 등은 혜택이 다소 늘지만 장거리일수록 마일리지 차감 폭이 커져 소비자가 불리해진다. “장거리 고객은 4분의 1에 불과해 다수 회원에게 유리한 기준을 채택했다”는 게 대한항공의 설명. 하지만 마일리지를 이용하는 소비자들의 생각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온다. 큰맘 먹어야 갈 수 있는 중장거리 항공권 구매를 위해 마일리지를 차곡차곡 모으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단거리는 혜택을 찔끔 늘리고 장거리 혜택은 크게 줄인 대한항공의 진짜 이유는 이런 것이 아닐까. 단거리 노선은 혜택을 늘려도 손해 볼 게 없다. 저비용항공사(LCC)라는 저렴한 대체재가 있기 때문에 마일리지를 쓰면서까지 가려고 하는 수요가 많지 않다.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면 사실상 독점이 되는 미국 유럽 등 중장거리 노선은 고객이 이탈하기 어렵기 때문에 마일리지 혜택을 줄이는 게 유리하다…. 이 때문에 향후 합병이 이뤄지면 서비스 축소 사례가 더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마일리지를 쓰기 힘들다는 불만이 커지자 대한항공은 항공권 대신 숙박과 쇼핑, 모바일 쿠폰 등으로 사용처를 확대했다. 하지만 이 역시 ‘꼼수’에 가깝다. 마트에서 장 보려고 마일리지를 쓰려는 사람이 많지도 않은 데다 항공권을 살 때보다 혜택도 훨씬 적다. 해외 교포들은 이마저도 이용할 수 없다. 고객들은 마일리지 사용 유예기간을 연장하거나, 좌석 수를 늘려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마일리지는 회계상으로 부채(이연수익)로 잡힌다. 고객에게 돌려줘야 할 빚이란 뜻이다. 소비자의 의견을 듣지 않은 일방적인 개편은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다. 회사 사정이 어렵다면 또 몰라도 대한항공의 지난해 실적은 눈부시다. 지난해 매출이 13조4127억 원, 영업이익은 2조8836억 원으로 전년 대비 각각 53%, 97% 늘어 모두 최고 기록을 새로 썼다. 고객 입장을 배려한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역대급 실적에도 고객은 뒷전’이란 눈총을 피할 수 없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 2023-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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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재영]“내 자리가 아닙니다”…왕좌 사양한 日銀 ‘프린스’

    “사실이라면 이상적인 포진이 아닐까요.”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 차기 총재로 우에다 가즈오 도쿄대 명예교수(72)가 내정됐다는 보도가 나온 10일. 아마미야 마사요시 일본은행 부총재(68)는 심경을 묻는 관계자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한다. 불과 며칠 전까진 일본 정부가 아마미야 부총재에게 차기 총재직을 타진했고, 사실상 확정적이라는 분위기였다. 아쉬움은 없었을까. 그의 목소리는 쾌활했다. ‘낙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미야 부총재는 ‘일본은행(BOJ)의 프린스’, ‘미스터 BOJ’ 등으로 불렸다. 도쿄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79년 일본은행에 입행한 이래 기획국장, 이사 등 요직을 거치며 출세 가도를 달렸다. 2013년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가 취임한 이후 오른팔로 보좌해 왔다. 관행으로 봐도 그가 총재가 되는 건 당연해 보였다. 1960년대 한 번 민간은행 출신이 앉은 것을 제외하면 총재는 일본은행과 재무성(옛 대장성) 출신이 번갈아 맡아왔다. 구로다 총재가 대장성 출신이었으니 일본은행 출신의 아마미야 부총재가 이을 차례였다. ▷하지만 아마미야 부총재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나는 적임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13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그가 든 첫 번째 이유는 이렇다. “일본은행 차기 체제는 오랫동안 지속된 통화완화 정책을 점검하고 수정해야 하는데, 현 정책을 주도해 온 내가 총재가 되면 객관적이고 공정한 재검토를 할 수 없다.” 2010년 포괄적 금융완화, 2013년 이차원(異次元) 금융완화, 현재의 장단기 금리조작 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자신이 관여한 정책을 스스로 재검토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부정이라는 얘기다. ▷이제는 일본은행이나 정부 관료 출신이 총재가 되는 것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다고도 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을 지낸 벤 버냉키와 재닛 옐런은 경제학자, 제롬 파월 연준 의장과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법률가 출신이다. 아마미야 부총재는 일본은행도 관료만의 시각을 넘어 더 크고 다양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봤다. 마침 14일 지명된 우에다 총재 후보자는 미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제학 박사다. 당장 ‘일본의 버냉키’라는 소개가 나왔다. 총재가 되면 학자 출신으론 처음이다. ▷일본은행 총재는 국제적인 금융거물이다. 미 달러만큼은 아니지만 기축통화이자 주요 결제수단인 엔화의 향방이 총재의 입에 따라 결정된다. 한마디 한마디에 국제적 관심이 쏠리고 시장이 출렁인다. 이런 자리를 마다하는 결정이 쉽지는 않아 보인다. 우리에겐 아무런 전문성도 없으면서 연줄로 자리를 탐하는 낙하산 인사, 정권 끝물에 무리하게 자리를 꿰찬 알박기 인사, 자리에만 눈이 멀어 원칙 없이 소신을 뒤집는 인사들의 모습만 눈에 익다. 그래서 아마미야 부총재의 선택이 낯설고도 신선하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 2023-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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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헷갈리는 집값… 낙폭 줄어드나 커지나 [횡설수설/김재영]

    한동안 줄어들던 서울 아파트 값 하락 폭이 이달 들어 다시 커졌다. 낙관과 비관이 교차하던 부동산 시장에서 다시 비관론이 고개를 드는 양상이다. 9일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2월 첫째 주(6일 기준) 서울 아파트 값은 전주보다 0.31% 내렸다. 1월 마지막 주(―0.25%)보다 낙폭이 커졌다. 지난해 12월 마지막 주 0.74% 떨어진 이후 5주 연속으로 낙폭을 줄여가다 6주 만에 다시 하락세가 커진 것이다. 규제지역을 해제하고 대출 제한을 푼 정부의 규제완화 조치가 약발을 다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요즘 실수요자들은 헷갈리는 신호에 혼란스럽다. 한쪽에선 거래 가뭄이 점차 해소되면서 시장이 살아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지난달 서울 아파트 매매 거래량은 지난해 6월 이후 처음으로 1000건을 넘어섰다. 일부 매도인이 매물을 거둬들이거나 호가를 높이는 분위기도 있다. 반면 지난해만 전국 미분양이 5만 채 증가하고, 고점보다 수억 원 떨어진 거래가 이뤄지는 등 약세장의 모습은 여전하다. 분양 시장 침체로 이달 전국 아파트 분양 물량도 크게 줄었다. ▷정부와 민간의 엇갈리는 통계도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5주간 집값 하락 폭이 줄었던 부동산원 통계와 달리 민간 통계는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였다. KB부동산 동향에 따르면 1월 첫 주 0.33%이던 서울 아파트값 하락 폭이 마지막 주엔 0.51%까지 늘었다. 1월 서울 아파트값이 외환위기 이후 가장 크게 떨어졌다고도 했다. 작년 집값에 대한 평가도 달랐다. 부동산원은 서울 집값이 7% 하락했다고, KB는 3% 떨어졌다고 했다. 집값이 많이 빠져 바닥에 가까워진 건지, 아직 하락할 여지가 많은 건지 관측이 갈린다. ▷한쪽 눈으로만 보면 판단하기 어려운 게 요즘 부동산 시장이다. 매일 거래되는 공산품이 아닌 부동산 시세를 주식 시세표 보듯 단기 흐름만으로 판단하는 건 섣부르기도 하다. 아직 거래량이 적어 시장의 흐름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급매 거래만 보면 하락세가 두드러져 보이고, 여전히 높은 호가만 보면 집값이 생각보다 안 떨어진 것 같다. 더 저렴한 매물을 원하는 매수자와 가능한 한 비싸게 팔려는 매도자 간의 힘겨루기가 길어지고 있다. ▷많은 전문가는 당분간 급매 위주로 거래가 이뤄지면서 올해는 하락 기조가 유지될 것으로 본다. 가격이 떨어졌다고는 해도 실수요자들이 접근하기에 여전히 높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정부도 연착륙을 이유로 추가 규제 완화를 서두를 때는 아닌 듯하다. 2021년 집값이 급등했을 때는 서울 집값이 버거워 서울을 떠나는 ‘서울 엑소더스’ 현상이 극심했다. 집값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원치 않게 외곽으로 밀려나는 절망을 막을 수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 2023-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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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재영]“집주인이 대기업 다녀요”

    ‘전세대출 가능합니다. 임대인 대기업 다녀요.’ 최근 부동산 사이트에 올라온 한 아파트의 매물 설명에는 집주인의 직업 정보가 공개돼 화제가 됐다. 전세사기 때문에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줄 여력이 있는지 따지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근엔 집주인의 재직증명서와 국세·지방세 등의 완납 증명서를 요구하는 세입자들도 있다. 집주인을 면접 보고 고르는 셈이다. 전세금 하락분을 돌려주기 힘든 임대인이 차액만큼 세입자에게 월세를 지불하는 이른바 ‘역월세’도 흔해졌다. ▷집주인은 전세금을 내리지 않으면 세입자를 구하기 어렵고, 세입자들은 전세 매물을 골라잡을 수 있는 ‘역전세난’ 속에 나타난 풍경이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아파트 전세금은 8.3% 하락했다. 지난달도 매주 1% 안팎으로 가격이 빠졌다. 최근 3개월간 서울 아파트 전세거래 5건 중 1건이 2년 전 계약 때보다 낮은 가격에 이뤄질 정도다. 집값 하락세가 계속되고 있고 올해 상반기에는 신축 아파트 입주도 늘 것으로 보여 당분간 역전세난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불과 2년여 전엔 상황이 정반대였다. 당시 면접관 자리에 앉은 건 집주인이었다. 전세 물건의 씨가 마르고 전세금이 치솟는 ‘전세난’ 때문이었다. 집주인이 세입자의 직업, 재산, 가족관계 등을 따지는 경우도 있어 ‘세입자 고시’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2020년 10월 서울 강서구 가양동의 한 아파트에선 전세 매물을 보려고 10여 명이 아파트 복도에 길게 줄을 선 사진이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계약을 희망하는 ‘예비 세입자’가 많아 제비뽑기로 계약자를 정하는 상황까지 빚어졌다. ▷전세금이 오르면 집주인에게, 내리면 세입자에게 좋지만 전세금의 급등락은 시장 전체엔 부작용을 가져온다. 전세금이 가파르게 오르면 매매가격과의 차이가 줄어들어 집값을 끌어올리는 요인이 된다. 전세사기 일당의 무자본 갭투자가 성행할 환경도 조성된다. 반면 전세금이 급하게 떨어지면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집주인이 늘어나고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에 분쟁도 늘어나게 된다. 임차시장 안정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한국 특유의 주거제도인 전세는 그동안 서민 주거 안정에 상당한 기여를 해왔다. 집주인은 전세금을 통해 이자 없이 돈을 빌릴 수 있었고, 세입자에게는 목돈을 모아 내 집 마련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전세 제도가 유지되려면 보증금을 제때 돌려받을 수 있다는 신뢰가 바탕이 돼야 한다. 최근 정부가 무자본 갭투자를 막는 등의 전세사기 대책을 내놨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집주인 동의 없이도 악성 임대인 여부와 체납 세금 유무 등을 확인할 수 있도록 신속한 입법 조치가 필요하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 2023-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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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자형’ 집값 당분간 지속될 듯… 억지 부양은 피해야[수요논점]

    《지난해 하반기부터 가파른 하락세를 보였던 부동산 시장에서 새해 들어 미세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규제지역을 대거 해제하는 ‘1·3 부동산 대책’ 이후 서울 집값 하락폭이 줄고 급매물을 중심으로 거래도 소폭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매매가격과 전세가격의 동시 하락세가 여전하고 미분양도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어 당분간은 하강 국면이 계속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정부는 ‘경착륙’을 막겠다며 연이어 규제 완화에 나서고 있지만 자칫 투기 수요를 자극할 수 있어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V자’ 반등보단 하락 후 횡보 ‘L자’ 전망 우세 올해 들어 부동산 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거래 증가다. 31일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거래량(신고일 기준)은 지난해 10월 560건으로 역대 최저치를 보인 뒤 11월 733건, 12월 834건 등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올해 1월 신고 건수는 527건인데, 매매 신고 기한이 한 달가량 남은 것을 감안하면 지난해 12월 거래량을 웃돌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집값 하락 폭의 둔화도 나타났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1월 넷째 주(23일 기준) 서울 아파트값은 전주 대비 0.31% 하락해 4주 연속 낙폭이 줄어들었다. 정부의 부동산 규제 완화 기대감이 반영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민간 통계는 또 다르다. KB부동산 월간 주택가격동향에 따르면 1월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은 전달보다 2.09% 하락해 1998년 외환위기 이후 가장 크게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아직 바닥을 논하기엔 이른 시기”라고 말한다. 높은 집값, 금리인상 기조, 경기침체 우려 등 집값 하락을 이끌어온 요인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세 하락장은 1990년대 초,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직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다. ‘3저(低·저달러 저유가 저금리) 호황’에 힘입어 1988∼1990년 3년 연속 폭등했던 집값은 1991년 하락세로 전환해 수년간 하락 내지 보합세를 이어갔다. 1기 신도시 등 공급 확대의 영향이 컸다. 외환위기 때인 1998년에는 서울 집값이 15% 가까이 떨어졌다가 1년 만에 반등세로 돌아섰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집값 하락세는 외환위기 당시의 급락 상황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금리인상 기조가 여전하고 아직 빠져야 할 거품도 많아 당시 같은 ‘V자형’ 반등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오히려 금융위기 이후 장기 침체 상황과 유사하게 흘러갈 수 있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2008년부터 내림세를 보이던 집값은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경기부양책으로 일시 반등했지만 2010년부터 2013년 말까지 완만한 하락세가 이어졌다. 서울 강남아파트 가격이 고점보다 30∼40% 떨어지기도 했다. 집값 하락은 금융위기로 시작됐지만 미분양 적체가 해소되지 않으면서 침체가 길어졌다. 박근혜 정부 들어 “빚내서 집 사라”는 정책을 내놓고 난 뒤 2016년에야 반등이 시작됐다. 전문가들은 이번에도 상당 기간 가격 조정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올해 말, 내년 초까지 집값 하락세가 이어지다가 이후 오랫동안 바닥에서 횡보하는 ‘L자형’ 추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하락장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에 대한 전망은 엇갈린다. 길게는 2027, 2028년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있다. 서울과 지방, 서울 내에서도 핵심 지역과 주변 지역 사이에 온도차도 극명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미분양 줄고 거래 늘어야 집값 회복 가능 집값은 변수가 많아 반등 시점을 정확하게 예상하기는 어렵다. 경기, 심리, 규제 등 다양한 상황에 따라 반등 시기가 앞당겨질 수도, 3∼4년 늦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몇 가지 지표를 유심히 살피면 시장의 변곡점을 짚어낼 수 있다고 본다.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은 금리다. 국토연구원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집값에서 기준금리가 차지하는 영향은 50∼60%에 이른다. 하지만 금리 인상이 멈추더라도 여전히 금리 수준이 높은 데다 금리가 하락세로 돌아서더라도 경기침체로 매수 심리가 악화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미분양 추이도 지켜봐야 한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21년 말 1만7710채였던 전국 미분양은 지난해 말 6만8107채로 크게 늘었다. 2009년 16만 채로 정점을 찍은 이후 점차 줄어들어 2021년 1만4000채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미분양이 충분히 늘다가 다시 줄어드는 시점을 살펴봐야 한다. 시장의 수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표는 거래량이다. 시장이 과거의 평균 거래량을 회복하는 수준이 되면 경기 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 서울 아파트의 경우 현재 1000건에 미치지 못하지만 과거 정상적인 거래량은 월 5000∼6000건 정도였다. 적어도 월 2000∼3000건은 돼야 거래 회복을 점칠 수 있다. 현재 집값과 전세금이 동시에 하락하는 추세인 만큼 전세가격 하락세가 멈춰야 집값도 반등할 수 있다. 금융위기 당시 매매가격과 전세가격이 동반 하락하며 전세가율이 40% 아래로 떨어졌다. 이후 2016년 전세가율이 75%까지 높아진 뒤에야 전세 수요가 매매 수요로 바뀌며 매매가격이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집값 거품 빼는 게 우선…억지 떠받치기 정책 피해야 집값 반등의 전제 조건은 과거 몇 년 동안 누적됐던 거품이 충분히 빠져야 한다는 것이다. 거품이 꺼지는 과정에서 미분양 증가, 깡통주택 등의 고통도 있을 수 있지만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과정이다. 오히려 집값 하락을 이유로 섣불리 부양책을 쓰다가는 시장을 왜곡해 오히려 가격 조정 기간을 길어지게 할 수 있다. 실수요자를 옥죄는 불합리한 규제를 완화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과거처럼 ‘빚내서 집 사라’ 식의 대책은 피해야 한다. 정부도 거래량이나 가격 자체를 겨냥한 정책은 펴지 않겠다는 방향이다. 하지만 의도와 달리 투기 세력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게 문제다. 정부는 1월 초 규제지역을 대거 해제한 데 이어 규제지역 내 다주택자에게 주택담보대출을 허용하는 등 대출 규제 완화를 추진하겠다고 최근 밝혔다. 상대적으로 자금 여력이 있는 다주택자의 주택 구매를 유도하겠다는 의도지만 일각에서는 자칫 현금 부자들의 투기만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도심 정비사업이나 신도시 등으로 일관된 공급 확대 신호를 시장에 주는 것도 중요하다. 주택시장이 침체된다고 해서 공급을 줄이면 이후 시장이 살아날 때 집값 급등의 빌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급계획은 차질 없이 추진하면서 시장에 미칠 영향과 부작용 등을 면밀히 검토해 규제 완화를 추진하는 신중하고 단계적인 접근이 요구된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 2023-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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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재영]“고향기부에 稅 공제… 앗 2년 뒤부터” 기재부의 황당 실수

    2010년 법무부와 국회가 법률 개정 과정에서 특정강력범죄의 적용 범위를 축소하는 실수를 저지른 일이 있다. 어려운 법률 용어를 쉽게 고치는 과정에서 “∼의 죄 및”이란 자구를 빠뜨린 게 화근이었다. 단 세 글자지만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강간살인, 강간상해죄에 대한 형량이 절반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실수는 법 시행 8개월 뒤 대법원에 의해 발견됐고, 2011년 법률 개정으로 바로잡혔다. 하지만 1년 동안 성범죄자들이 쾌재를 불렀을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다. ▷이번엔 정부의 입법 실수로 올해부터 시행하는 고향사랑기부금 세액공제 혜택에 대한 공백 상태가 발생했다. 고향사랑기부제는 자신이 거주하지 않는 지방자치단체에 일정액을 기부하면 10만 원까지는 전액, 초과분은 16.5%를 정부가 세액공제로 돌려주는 제도다. 그런데 기획재정부의 입법 실수로 세액공제 적용이 2년 미뤄지게 된 것이 뒤늦게 확인된 것이다. 지난해 국회에서 금융투자소득세 시행을 2025년으로 유예하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 과정에서 고향사랑기부제 관련 내용을 제외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부와 지자체들은 고향 사랑으로 마련된 기부금이 지역 경제를 살릴 것이라며 대대적인 홍보전을 펼쳐 왔다. 윤석열 대통령뿐 아니라 방탄소년단(BTS)의 제이홉, 축구선수 손흥민 등 여러 유명인사도 참여했다. 고향도 살리고 세제 혜택도 받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기회에 많은 이들이 기꺼이 동참했다. 그런데 이 같은 열기에 정부가 찬물을 끼얹은 셈이 됐다. 내년 연말정산 때 예정대로 세액공제를 반영하려면 연내 국회에서 다시 법을 고쳐야 한다. ▷정부는 세액공제 시행 시기를 2023년으로 되돌리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뒤늦게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에서 법안이 처리되면 다행이지만 황당한 사고를 부른 책임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기재부는 지난해 말에 국회에서 법안 처리가 늦어지면서 발생한 실수라고 했다. 하지만 개정안이 국회로 제출된 건 지난해 9월이었으니 제대로 된 해명이 아니다. 이달 10일 반도체 세액공제 관련 입법예고에 슬쩍 포함시켜 조용히 오류를 수정하고 넘어가려 했던 것도 문제다. ▷더 심각한 건 법률안 처리 과정에서 ‘크로스 체킹’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부 입법은 주무 부처와 관계기관의 협의, 법제처 심사를 거치고 차관회의와 국무회의까지 통과해야 한다. 국회에서 전문위원이 검토하고 법사위원회와 본회의도 넘어야 한다. 이처럼 수많은 단계를 거치면서도 누구 하나 오류를 걸러내지 못했다. 신뢰가 법질서에서 갖는 중요성과 법이 국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이렇게 건성건성 심사해선 안 될 일이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 2023-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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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재영]“왕개미가 황제의 수레에 깔렸다”

    “조조의 연환계가 화공에 실패한 이래 배를 묶어 큰 배를 만든다는 항공모함의 발상이 나오지 않았다.” 2020년 10월 중국의 금융 규제를 ‘전당포 영업’이라 비판하던 마윈 알리바바 창업자는 ‘적벽대전’ 얘기를 꺼내며 당국을 겨냥했다. 이 말은 개인과 기업의 배를 엮어 당국에 맞서겠다는 뜻으로도 들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연환계는 화공에 무너졌다. 알리바바의 금융 자회사 앤트(ANT)그룹의 기업공개(IPO)는 상장 이틀 전 돌연 취소됐고, 마윈은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다. ▷7일 앤트그룹은 마윈이 보유한 의결권을 50% 이상에서 6.2%로 줄이는 지분 조정 결과를 발표했다. 지금까지 마윈은 자신이 지배권을 가진 다른 법인을 통해 그룹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을 발휘했지만, 지분 조정으로 이 같은 방식이 불가능해졌다. 최근 중국 당국이 앤트그룹의 홍콩증시 상장을 허용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마윈의 부활 가능성이 점쳐졌는데, 결국 한번 박힌 미운털은 뽑히지 않았다. ▷앤트그룹은 마윈의 알리바바 중에서도 핵심 사업으로 꼽힌다. 모바일 결제 플랫폼 ‘알리페이’로 시작해 대출, 보험, 자산관리까지 영역을 넓혔다. 역대 최대 규모로 예상되던 상장에 성공했다면 마윈은 단숨에 세계 11위 부자에 오를 기세였다. 앤트그룹은 개미(중국명 螞蟻)라는 회사 이름처럼 금융 문턱이 높은 개인과 자영업자들을 공략했다. 하나는 미약하지만 합치면 힘을 낼 수 있는 개미의 비유를 마윈은 자주 들었다. 창업 초기 미국의 유통공룡 이베이와 맞붙었을 때 “개미도 세계를 들어올릴 수 있다”고 했고, 결국 이베이를 넘어섰다. ▷승승장구하던 앤트그룹은 마윈의 설화 사건 이후 중국 당국의 표적이 됐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공동부유(共同富裕·함께 잘살기)’를 내세워 빅테크 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규제를 시작했다. 알리바바와 앤트그룹은 당국의 강도 높은 감사를 받고 대규모 과징금도 물었다. 왕개미(마윈)가 황제(시 주석)의 수레에 깔렸다는 얘기가 나왔다. 텐센트, 디디추싱, 메이퇀 등도 규제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중국 정부는 최근 들어 빅테크 기업에 대한 태도를 바꿔 유화 제스처를 보내고 있다. 내수를 살리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빅테크의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길들이기’ 작업이 끝났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최근 중국 빅테크들은 모험 투자를 줄이고 기부를 늘리는 등 정부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빅테크 규제를 풀어준다고 해도 정부 한마디에 냉·온탕을 오가는 경영 환경에서 과연 배를 엮어 항모를 만드는 상상력이 나올지는 의문이 든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 2023-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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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재영]“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나요”

    “나중에 아이를 낳게 된다면 뭐라고 말할 건가요?” “‘엄마가 큰 실수를 했다’고요.” 1999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의 불륜 스캔들의 주인공, 모니카 르윈스키의 TV 인터뷰는 시청자 7400만 명을 끌어모을 정도로 큰 화제가 됐다. 르윈스키를 어르고 달래며 2시간 동안 속 깊은 얘기를 끌어낸 사람은 미 ABC방송의 전설적인 앵커우먼 바버라 월터스였다. ▷지난해 12월 30일(현지 시간) 향년 93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2014년 은퇴하기까지 40여 년간 미국 방송계를 휘어잡으며 ‘인터뷰의 여왕’이라 불렸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등 미국 방송과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까지도 카메라 앞에 세웠다. 2008년 펴낸 자서전에서 “평생 딱 2명과 인터뷰 못 해본 게 후회된다”고 했는데,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와 영국의 고 다이애나 왕세자빈이다. ▷인터뷰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월터스는 “상대에게 주눅 들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늘 새벽 4시부터 방송을 준비했고 인터뷰 대상에 대한 기사를 사전에 모조리 찾아 읽었다. 거침없는 돌직구도 던졌다.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에겐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것 아니냐”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겐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인터뷰 대상에게서 눈물을 쏙 빼기도 한다. 그는 “2000년에 팝스타 리키 마틴에게 ‘당신 게이냐’고 던졌던 질문은 후회한다”고 했다. ▷그는 여성들의 롤모델이었다. 방송작가로 시작해 1970년대 저녁 뉴스쇼 첫 여성 앵커로 발탁된 이래 맨 먼저 ‘유리천장’을 깼다. 쉬운 길은 아니었다. 갑자기 어려워진 집안, 지적장애를 앓은 언니, 입양한 딸의 일탈 등 개인적 고민도 많았지만 자산으로 삼았다. 자서전에서 “화장실 하나뿐인 집에 살아 소변을 잘 참고, 이 때문에 오랜 생방송도 잘 버텼다”고 했다. ‘푸시 쿠키’(저돌적인 여자)로 불렸지만 “한순간 모든 걸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항상 오디션을 본다는 심정으로 살았다”고 했다. 자서전 제목도 하필 ‘오디션’이다. ▷월터스는 과거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상대를 무장 해제할 수 있을 ‘킬러 질문’을 귀띔한 적이 있다. ‘만약 입원 중이라면 누가 간호해주면 좋겠는가’, ‘처음으로 가진 직업은 무엇인가’, ‘누구와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는가’, ‘가장 최근에 울어본 때는 언제인가’…. 인터뷰 말미엔 늘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하늘에 돌아간 그에게도 같은 질문을 돌려주고 싶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 2023-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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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김재영]누리호 주역들의 집안 싸움… 시험대 오른 ‘우주 리더십’

    연말이면 신문마다 한 해를 정리하며 ‘올해의 10대 뉴스’를 선정한다. ‘다이내믹 코리아’인지라 올해도 뉴스가 많았지만 이것만은 꼭 들어갔으면 하는 소식이 있다. 6월 우리의 손으로 우주의 문을 열었던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의 발사 성공이 그것이다. 드라마도 완벽했다. 지난해 10월 성공을 목전에 두고 고배를 들었던 아쉬움이 있었기에 오히려 기쁨이 두 배가 됐다. 얼싸안고 감격에 겨워 울먹이던 연구원들을 보며 국민들도 함께 울고 웃었다. 감동 실화로 막을 내릴 것 같더니 이달 들어 느닷없이 ‘막장 드라마’로 장르를 바꿨다. 누리호 성공의 주역인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에서 조직개편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 빚어진 것이다. 고정환 발사체개발사업본부장과 옥호남 나로우주센터장 등 핵심 인력들이 항의의 의미로 줄줄이 사퇴서를 냈다. ‘수족을 다 잘라냈다’는 등 섬뜩한 단어도 나왔다. 누리호 주역들에 대한 ‘토사구팽’ 같이 자극적으로 접근할 일은 아니다. 발사체개발사업본부가 공중분해되는 것이 아니라 ‘발사체연구소’가 업무와 인력을 이어받는 것이다. 항우연 측은 이번 조직개편안의 목적을 조직 효율성 확보라고 설명한다. 지금까지는 누리호 하나만 바라보던 구조였다면 앞으론 누리호 추가 발사, 차세대 발사체 개발 등 다양한 사업을 동시에 추진해야 하는 만큼 업무 중심의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다는 거다. 하지만 발사체 조직 쪽의 불만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4년 동안 노력해 월드컵 16강 진출에 성공했는데 감독이 재계약에 실패한 느낌이랄까. 지금이야 모두가 응원한다지만 과거 나로호 실패 당시 거센 비난을 받았던 트라우마도 있다. 실패에 굴하지 않고 뚝심 있게 추진하려면 지금처럼 독립기구로 활동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직 운영 방향을 둘러싼 갈등은 당연하다. 하지만 내부에서 논쟁해야 할 사안이 밖으로 노출되면서 막장 드라마가 돼버렸다. 직원 폭행사건 등 과거 해묵은 갈등까지 다시 도마에 올랐다. 내부 연구원들조차 “부끄럽다”고 할 정도다. 우주에 대한 전 국민적 관심이 모처럼 달아올랐는데 다시 차갑게 식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된다. 상황이 이런데도 주무 부처는 남 일 보듯 하고 있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19일 기자 간담회에서 “당사자들이 충분히 논의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우주 컨트롤타워인 우주항공청 설립을 준비하고 있는 부처의 대응으론 부적절해 보인다. 연구자들 사이의 내부 갈등조차 해결하지 못해서야 특정 부처 산하의 우주항공청이 범부처 협력을 끌어낼 수 있을지 의구심을 떨칠 수 있겠는가. 정부는 2045년 화성에 태극기를 꽂겠다는 가슴 뛰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아직 한참 남은 듯 보이지만 지금부터 쉼 없이 뚜벅뚜벅 걸어가야 달성할 수 있는 길이다. 이를 위해 연구자들에겐 든든한 우산이 되고, 국가적 역량을 결집할 수 있는 우주 개발 리더십을 확립하는 게 최우선 과제다. 내년 누리호 3차 발사 때 다시 한번 감동의 포옹을 볼 수 있을까. 정부의 역량도 발사 시험대에 올랐다. 김재영 산업1부 차장 redfoot@donga.com}

    • 2022-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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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김재영]통신사 군기잡기만으론 ‘진짜 5G’ 못 살려 낸다

    “기존 4G보다 20배 빠른 ‘통신 고속도로’가 바로 5G입니다. 국가 차원의 ‘5G 전략’을 추진해 세계 최고의 5G 생태계를 조성하겠습니다.” 3년 7개월 전 대통령까지 나서서 공언했던 약속이 결국 물거품이 되는 모양새다. 18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이동통신 3사의 5G 28GHz(기가헤르츠) 기지국 수가 당초 주파수 할당 조건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며 할당을 취소하거나 이용 기간을 단축하기로 했다. 28GHz 대역은 현재 스마트폰에서 쓰는 3.5GHz 대역과 달리 최대 속도가 4G의 20배에 달해 ‘진짜 5G’로 불린다. 정부는 통신사들의 무책임을 강하게 질책했다. 대통령실까지 나서서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물론 통신사들이 책임을 면하긴 어렵다. ‘4G보다 20배 빠르다’는 불확실한 장밋빛 청사진을 내세워 비싼 요금을 받아갔던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단순히 통신사를 혼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정부는 2018년 28GHz 대역을 할당하면서 4만5000개의 장치 구축 의무를 부여했다. 이는 주파수정책자문위원회를 거친 정부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28GHz 장치를 설치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전파가 휘거나 장애물을 통과하지 못해 장비를 촘촘하게 깔아야 하고 그만큼 비용 부담이 컸다. 기업용, 신산업 용도로 적합했지만 수요는 많지 않았고, 관련 콘텐츠와 디바이스의 뒷받침도 부족했다. 수요 예측 실패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정부는 사업을 수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부는 지속적으로 사업자들을 독려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해 왔는데, 사업자들이 투자비를 아끼고자 했던 노력이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정부와 공공 분야에서 먼저 5G를 도입·활용하겠다’ ‘과감하게 실증사업과 시범사업을 실시하고 5G 팩토리 1000개 구축을 지원하겠다’던 정부의 약속은 과연 이뤄졌는지 되묻고 싶다. 통신사 편을 들고 정부 탓을 하자는 게 아니다. 정부와 사업자 사이의 대결 구도로 몰고 가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얘기다. ‘사업자의 의지 부족’이라는 결론은 명쾌하고 심플하지만 이런 진단으론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오지 않는다. 앞으로 신규 사업자를 찾다가 잘 안되면 그땐 또 “다각도로 노력했지만 의지를 갖춘 사업자를 찾지 못했다”고 할 것인가. 자율주행, 메타버스, 가상현실 등 미래 사업을 위해 28GHz가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어떻게 활성화할 것이냐다. 이번 기회에 통신사를 대체할 신규 사업자 찾기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28GHz 생태계 구축과 활용 방안을 제대로 다시 고민해야 한다. 정부와 통신사, 장비업체, 기업 등이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한다. 시험을 망친 아이를 질책할 순 있다. 그렇다고 부모의 책임이 끝나지 않는다. 목표 설정은 적절했는지, 공부 방법에 문제는 없었는지, 전략적으로 버릴 과목은 없는지, 아니면 학원이라도 바꿔야 할지 따져 보고 전략을 짜야 한다. 이런 과정 없이 ‘앞으론 잘하자’고 두 손 불끈 쥐어봐야 다음 시험 결과도 불 보듯 뻔할 것이다. 김재영 산업1부 차장 redfoot@donga.com}

    • 202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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