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에 베이고 잘리고… 가로수 사라지는 회색도시 [횡설수설/김재영]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5일 21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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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간 시민들을 품어온 울창한 가로수길이 단 이틀 만에 사라졌다. 경부고속도로 판교 나들목에서 경기 성남시 분당구로 이어지는 500여 m는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무성한 일대의 명소였다. 하지만 지난해 3월 아름드리나무 70여 그루가 한꺼번에 베어지며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새로 짓는 호텔의 진출입로와 교통 흐름에 지장을 준다는 게 이유였다. ‘가로수 학살’이 도시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재개발·재건축, 도로 확장 등 각종 개발 사업에 수난을 당하는 것이다.

▷도심의 가로수는 도시인들이 가장 가까이 접하는 숲이다. 삭막한 도시가 그래도 철마다 색색의 옷을 갈아입는 것도 가로수 덕택이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으로 도시에선 점점 가로수가 사라지며 회색빛이 짙어지고 있다. 산림청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서울의 가로수는 29만5852그루로, 2021년보다 8087그루나 줄었다. 2019년 이후 계속 감소 추세다. 가뜩이나 서울은 숲이 부족한 도시여서 더 안타깝다. 가로수를 포함해 도로변 녹지, 근린공원 등 ‘생활권 도시숲’ 면적은 1인당 4.97㎡로, 세계보건기구(WHO) 권고 기준인 9㎡의 절반을 겨우 넘는다.

▷살아남았다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수시로 난도질 수준의 가지치기를 당한다. 간판을 가린다, 열매 냄새가 난다 등 이유는 수십 가지다. 풍성한 나뭇잎과 가지를 모두 잃은 채 기둥만 앙상하게 남아 ‘닭발’ 가로수가 된다. 관리하기 편하다고 남발하는 가지치기는 가로수엔 치명적이다. 가지를 자른 절단면이 병해충에 노출돼 썩기 쉽고 수명도 단축된다. 무분별한 가지치기로 말라죽는 가로수가 매년 1만6000그루에 이른다고 한다. 미국·홍콩 등은 나뭇잎이 자라는 부위의 25% 이상은 제거하지 못하도록 규제한다.

▷이렇게 시달리는데도 가로수는 인간에게 아낌없이 퍼준다. 사람들이 배출한 탄소를 흡수하고 맑고 시원한 공기를 뿜어낸다. 미세먼지도 걸러낸다. 산림청에 따르면 도시에 조성된 숲은 나무 한 그루당 연간 미세먼지 35.7g을 흡수한다. 나무 47그루는 경유차 한 대가 1년간 배출하는 미세먼지를 흡수할 수 있다. 한여름엔 그늘막보다 열을 저감하는 효과가 25% 더 좋고, 도시 소음도 줄여준다.

▷식목일을 이틀 앞둔 3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선 ‘나무의 권리’를 선언하는 한 환경단체의 행사가 열렸다. 나무에겐 마음껏 뿌리 내리고, 햇볕을 쬐고, 함부로 뽑히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거다. 나무가 사라진 도시에선 인간도 살 수 없다. 나무를 심는 것만큼이나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식목일에 나무는 심지 못했더라도 ‘나무의 권리’는 한 번쯤 되새겨볼 만하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가로수#회색도시#재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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