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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사옥이 제 사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곳의 절반은 김수근 선생을 위해, 나머지 절반은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현대미술을 위해 사용할 겁니다.” 1세대 건축가 김수근(1931∼86)이 설계한 공간사옥의 새 주인이 된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사진). 충남 천안과 서울에서 아라리오갤러리를 운영하며 3700점의 미술품을 보유한 ‘미술계의 큰 손’에게 공간사옥은 가장 의미 있는 컬렉션이 될 듯하다. 27일 서울 종로구 원서동 공간사옥 3층 ‘김수근 작업실’에서 만난 김 회장은 “돈으로 따지면 이보다 비싼 작품도 많이 사봤지만 이건 차원이 다르다”며 공간사옥을 미술관으로 새 단장해 내년 9월 개관할 예정이라고 했다. 김수근이 설계한 검정 벽돌의 구사옥은 원형 그대로 활용하고, 공간그룹의 2대 대표인 고 장세양이 유리로 지은 신사옥은 도서관 레스토랑 기념품가게로 쓸 예정이다. 이상림 현 대표가 증개축한 한옥은 허물고 대신 미술관의 입구와 로비를 신축할 계획이다. 이 작업은 이상림 대표가 맡는다. “‘아라리오’가 들어간 미술관 이름은 입구에 조그맣게 달 거예요. 구사옥 위쪽에 흰색 한자와 영문으로 된 ‘공간’ 문패는 안 떼고 그대로 갑니다. 오늘 김수근 선생 부인과 점심을 먹으며 이 말씀을 드렸더니 좋아하시더군요.” 김 회장에게 공간사옥 매입은 ‘충동구매’였다. 그동안 공간사옥의 새 주인으로 거론돼온 이름은 현대중공업과 네이버였다. 충남 천안에서 종합터미널 백화점 멀티플렉스 등을 경영하는 중견기업인 아라리오의 이름은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 “21일 사옥 공매가 유찰됐다는 소식을 듣고 부끄러웠습니다. 한국 현대건축의 상징이 매물로 나오고, 거기다 유찰되는 일이 벌어지다니. 그때부터 ‘나라도 나서볼까’ 생각하기 시작했죠.” 주말 내내 고민한 끝에 김 회장은 제주 작업실에서 상경해 25일 오후 2시 이상림 대표를 만났다. “공매 최저가인 150억 원에 살 테니 은행 영업마감 전까지 결정해 달라고 했어요. 그때까지 결정 못하면 이 사옥은 제 인연이 아닌가보다 생각하고 내려가겠다고요. 결국 3시 반에 합의를 보고 계약금 10%를 바로 입금했습니다.” 건축가 김수근은 1977년 공간사옥을 완공하면서 “이 터는 하도 (기가) 세서 나 아니면 지키지 못할 것이다”고 했다는 말이 있다. 김 회장에게 이 말을 전했다. “이 건물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지킬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미술품을 3700번 사면서 그만큼의 경험을 쌓았습니다. 주말에 이 미술관 앞으로 죽 줄서게 할 자신 있습니다. 이곳에서 새로운 현대 미술작품은 물론이고 건축가의 꿈을 그리는 젊은이들이 나오게 할 겁니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건축물이 아닙니다. 풍경입니다.” 서울관을 설계한 민현준 엠피아트 대표(45)는 이 터에 남아 있는 건축물들을 ‘역사적 파편’으로 부르며 “이 파편들과 공존하려면 앞뒤와 질서가 있는 건물보다는 주변과 공유되는 풍경이자 공원이어야 했다”고 말했다. 주위에 문화재 하나만 있어도 건축 설계는 많은 제약을 받는다. 그런데 이 터는 경복궁, 종친부, 국군기무사령부에 매장문화재까지 고려해야 했다. 민 대표는 섬처럼 건물군으로 이뤄진 ‘군도(群島)형 건축’으로 이 난관을 해결했다. 그래서인지 서울관은 시부모 모시고 제사 챙기며 사는 종갓집 맏며느리처럼 푸근하고 겸손하다. 종친부의 기와, 기무사의 붉은 벽돌과 조화되도록 건물 외벽에도 고령토로 특수 제작한 암키와 모양의 테라코타 패널을 붙였다. 그러나 무난함은 ‘현대’ 미술관으로서는 독이 될 수 있다. “전위적인 현대 미술품들을 전시하기엔 기가 약한 디자인”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이에 민 대표는 “속으로는 기가 센 미술관”이라고 반박했다. “기존의 일률적인 관람 동선을 무시하고 관람자의 참여와 몰입을 유도하는 공간으로 구성했습니다. 일방적인 계몽보다는 관람객의 참여를 통한 자발적 이해를 유도하는 최근의 미술관 건축 경향을 반영한 것이죠.” 그는 올 2월 현대미술관에 대해 쓴 박사학위 논문에서 ‘작품으로서의 건축’과 ‘작품을 위한 건축’을 비교했다. ‘작품으로서의 건축’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이 미술관에 대해 “지역적 맥락에 조응하기보다 건물 자체를 명품화했으나 주목할 만한 작가나 작품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서울관은 ‘작품을 위한 건축’에 가까운 셈이다. “풍경 같은 미술관이란 사회적 관계를 위한 최소한의 구조체일 뿐입니다. 서울관은 수장고에서 작품을 꺼내 전시하기보다, 작가와 관람객들을 자극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산실이 됐으면 합니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한국 최고의 현대 건축물로 꼽히는 공간사옥이 아라리오갤러리를 새 주인으로 맞게 됐다. 공간그룹은 25일 아라리오갤러리에 공간사옥을 매각했다고 밝혔다. 매각 금액은 공매 최저가격인 150억 원이다. ‘김수근 작업실’을 보존하는 등 사옥을 훼손하지 않는 조건이다. 박윤석 공간그룹 경영본부장은 “아라리오 쪽에서 김수근 작업실을 포함해 공간사옥 보존을 전제 조건으로 먼저 제시했다”며 “아라리오갤러리는 공간사옥을 시민들이 자유롭게 찾을 수 있는 갤러리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고 전했다. 아라리오갤러리의 대표인 김창일 아라산업 회장(62)은 2006년 미국 미술잡지 아트뉴스가 ‘세계 200인의 미술품 컬렉터’로 선정한 사업가 겸 컬렉터로 서울 청담동과 충남 천안, 중국 베이징에 갤러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공간사옥은 1세대 건축가인 고 김수근(1931∼1986)이 설계한 검정색 벽돌의 구사옥과 공간그룹의 2대 대표인 고 장세양이 설계한 유리 신사옥, 이상림 현 대표가 증개축한 한옥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 구사옥은 등록문화재로 지정할 계획이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공간사옥은 부동산이 아닙니다. 문화입니다.” 한국 최고의 현대건축물로 꼽히는 서울 종로구 원서동 공간사옥의 21일 공개 매각을 앞두고 김수근문화재단(이사장 박기태)이 이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재단은 18일 오전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수십 년간 한국 현대건축의 자존심이자 문화 창조의 산실로 인정받아온 공간사옥이 경매 시장에 나온다. 이는 건축뿐 아니라 우리 문화예술과 정신사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재단은 민간 기업이나 개인이 공간 사옥을 사들일 경우 보존이 어렵다고 보고 △공공 재원으로 사들여 건축박물관으로 활용하자고 정부에 요청하고 △개인의 소유로 넘어가더라도 쉽게 허물지 못하도록 공간사옥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해줄 것을 문화재청에 요구했다. 공간사옥은 1세대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이 1971년부터 짓기 시작해 1977년 완공한 건물로 동아일보가 올 2월 건축전문가 100명에게 의뢰해 선정한 ‘한국 최고의 현대건축 20’에서 55명의 추천을 받아 1위를 차지한 건축물이다. 김수근은 이곳에서 경동교회(1980년) 올림픽주경기장(1986년) 같은 명작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김원 승효상 민현식 등 한국 건축계를 주도하는 건축가들을 다수 키워냈다. 이 건물의 지하 소극장은 김덕수의 사물놀이, 공옥진의 병신춤 등을 처음 선보이면서 다양한 문화 장르의 산실 역할도 했다. 그러나 건물주인 건축사사무소 공간그룹이 1월 부도가 나면서 매물로 나왔다. 이후 서울문화재단, 현대중공업, 네이버 등이 인수 의사를 밝혔으나 무산되고 21일 공개경쟁 입찰 방식으로 매각된다. 최저 매각가격은 150억 원이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청장 시절 가장 큰 고민이 100년 후 지정할 문화유산이 지금 창조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며 “공간사옥은 부동산 가치를 뛰어넘는 20세기 최고의 문화유산임을 정부와 사회가 인식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건축가 승효상은 “앞서 등록문화재로 지정해 달라고 한 차례 청원했으나 문화재청은 소유자가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보류 판정을 내렸다”며 문화재청에 거듭 문화재 지정을 요청했다. 이어 “21일 공매 후에도 국민신탁이나 소셜펀딩 등 공간사옥을 보존할 수 있는 재원 조달 방법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성명에는 김석철 김원 류춘수 민현식 유걸 최문규 등 건축가들과 안상수 서울디자인재단 이사장, 최홍규 서울박물관협회장, 이기웅 파주출판도시 이사장, 이은 영화제작가협회장 등 문화예술계 인사 116명이 참여했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해마다 연말이면 언론은 그해의 인물을 뽑는다. 올해의 인물은 누가 될까.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사상 처음으로 해산될 위기에 놓인 정당의 정신적 지주? 야구 종주국에서 가을의 전설을 쓴 괴물 투수? 올해의 인물 후보는 많지만 올해의 건축을 묻는다면 서울시 신청사가 될 것이다. 올 2월 본보는 건축전문가 100인에게 의뢰해 한국 최고와 최악의 현대건축을 선정했다. 여기서 최고작보다 더 주목받은 것이 최악의 건축으로 뽑힌 서울시 신청사였다. “역사적 무책임과 지적 태만” “복구 불가능한 파국” 같은 날선 혹평과 함께 39명이 이를 태작으로 꼽았다. 최근엔 신청사 건립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 시티:홀’이 상영되면서 설계자와 감독이 함께하는 포럼이 잇달아 열리고 있다. 하지만 수많은 포럼에도, 신청사가 주인공인 106분짜리 영화에도 건축을 의뢰한 건축주는 보이지 않는다. 7년간 3000억 원을 들여 어떤 청사를 지으려 했고, 중간에 설계가 왜 바뀌었는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는다. 신청사의 콘셉트 설계자인 건축가 유걸만이 이런저런 자리에 불려나가 몰매를 맞으면서도 성실히 답하고 있을 뿐이다. 좋은 건물은 좋은 건축주가 만든다. 건축의 창세기를 열었다는 롱샹 성당, 20세기 최고의 건축으로 꼽히는 라투레트 수도원은 마리알랭 쿠튀리에 신부라는 건축주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당시 기울어가던 가톨릭의 부흥을 위해서는 예술의 힘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건축의 목표를 실현해줄 수 있다는 이유로 ‘무신론자’인 르코르뷔지에에게 설계를 맡겼다. 그가 아니었다면 롱샹도, 라투레트도 없었다. 시청사 같은 공공건물의 건축주는 시민이고, 시민들을 대표하는 건축주가 시장이다. 김광현 서울대 교수는 “잘못된 건물의 책임은 자기가 어떤 집에 살 것인지 뚜렷하게 말하지 못한 채 명품만을 원한 건축주에 있다”고 말했다. 관심도 없다가 다 지은 뒤에야 “이게 뭐냐”며 화내는 시민,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시장, 심사일에 임박해서야 불려나가 당선작을 선정한 심사위원. 이 모든 사람이 책임을 나눠져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해외의 설계공모전을 경험해본 작가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한국 공공건축 발주제도의 문제가 무엇인지 드러난다. 새 건물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그곳의 역사적 도시적 맥락부터 주변에 있는 맨홀이나 전봇대처럼 깨알 같은 정보가 담긴 도면까지 건물이 들어설 땅에 대한 종합적인 보고서가 두툼한 책자 형태로 전달돼 현장에 가보지 않고도 설계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조성룡 성균관대 석좌교수는 “출제가 잘돼야 좋은 답이 나오는 법”이라며 “공모전의 안내서가 충실하면 이를 기준으로 설계안들이 출품되고, 이 안내서가 기준이 돼 심사도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 73세인 유걸은 미국과 한국에서 모두 건축상을 받은 실력파다. 그에게 서울시 신청사는 일흔 줄에 만난 최악의 인연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악평에 시달려도 관심 받는 건물이 좋은 건축”이라며 “내 작품이 신문의 부동산면이 아닌 문화면에서 논의되는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서울시 신청사의 실패는 ‘공공건물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가’라는 논의의 출발점이 됐다. 그래서 올해의 건축은 역설적이게도 서울시 신청사다.이진영 문화부 차장 ecolee@donga.com}

독립하려 해도 집값이 부담되는 젊은이들, 혼자 살면서 치안이 걱정되는 독신 여성, 육아 문제로 고민이 많은 젊은 부부, 혼자 살다 고독사할까 두려운 노인들. 신간 ‘셰어하우스’와 ‘컬렉티브하우스’는 이 같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면서 자원 절약도 꾀하는 새로운 주거 문화를 충실하게 소개하는 책이다. 셰어하우스란 주로 젊은이들이 한집에서 살면서 침실은 따로, 거실 주방 화장실은 공유하는 주거 방식이다. ‘셰어하우스’의 저자 구보타 히로유키 니혼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렇게 사는 일본의 젊은이 11명을 만나 ‘타인과 살면 위험하지 않은가’ ‘셰어메이트는 어떻게 찾나’ ‘생활비는 어떻게 나누어 내나’ ‘이성 친구를 데려오거나 재워도 되나’ ‘도중에 나오고 싶으면 어떻게 하나’ 같은 구체적인 질문을 던진 뒤 생생한 답을 받아 내 전한다. 컬렉티브하우스란 셰어하우스와 달리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같은 공동주택에 살면서 세탁실, 도서실, 대형 주방이나 욕실 등 공용 공간을 갖추어 놓고 사는 주거 형태를 말한다. 1980년대 북유럽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시작됐는데 신간 ‘컬렉티브하우스’는 일본의 컬렉티브하우스 4곳의 거주자들을 인터뷰해 그곳 생활의 장단점을 소개했다. 특히 취학 전 자녀를 둔 부부와 공동체 생활이 그리운 노인들의 만족도가 높다. 하지만 개인 공간을 떼어 내 공용으로 쓰면서도 임차료가 낮아지지 않는 데다, 공용 공간의 사용 빈도와 무관하게 비용을 똑같이 나누어 내는 데 따른 불만이 제기된다고 한다. 말미에 유럽과 미국, 일본에서의 컬렉티브하우스 운영 시스템을 비교해 소개했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 “우리는 건물을 만들고, 건물은 다시 우리를 만든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말처럼 건축의 힘을 믿는 건축사사무소 오퍼스의 우대성 공동대표. 그에게 부산에서 아동복지시설을 운영하는 마리아수녀회 수녀들이 찾아왔다. 중고교 여학생 100여 명이 살고 있는 시설이낡았으니 새 건물을 지어 달라며 수녀들의 퇴직금을 모아 마련한 40억 원을 내밀었다. 》일반 가정이 아닌 ‘시설’의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 주는 건물은 어떻게 지어야 할까. 우 대표는 김형종 조성기 공동대표와 지난해 1월부터 서울 부산 대구를 돌며 아동복지시설을 살피고 거주자들의 일과를 관찰했다. 커다란 원룸에는 2층 침대와 옷장이 줄줄이 놓여 있고, 주방에서 조리된 음식이 엘리베이터로 배달되면 같은 원룸의 다른 편에 놓인 커다란 식탁에 둘러앉아 먹는 구조였다. 거주자들은 불만이 많았다. “사생활이 없다” “집단생활을 하니 남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받는 것에만 익숙해 경제 개념이 없어 사회에 나가면 적응하기 어렵다” “시설이 아닌 가정에서 살아 보고 싶다”…. 시설 생활은 정신적 빈곤, 나태, 단조로운 일상, 욕설과 폭력으로 요약됐다. 공동대표 3명은 아이들이 돌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커 가는 공간에 산다면 이런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올 8월 부산 서구 암남동 언덕배기에 ‘수국마을’을 완공했다. 수국마을은 복지시설의 틀을 깼다. 커다란 콘크리트 건물 한 동을 짓는 대신 계단식 지형을 따라 붉은 벽돌집 8채가 도란도란 모여 있는 마을을 설계했다. 아이들은 ‘시설’이 아닌 박공지붕의 ‘집’에서 산다. 심어 놓은 나무에 따라 감나무집, 석류나무집, 사과나무집 이렇게 집 이름을 지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나무의 나라(樹國)’라는 뜻에서 수국마을이다. 손에 물 묻힐 일 없던 아이들은 수국마을에선 모든 일상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집마다 13∼15명의 소녀가 ‘엄마’라 불리는 수녀와 출퇴근하는 보육자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는데 월 약 300만 원의 생활비로 당번을 짜서 장 보고 밥해 먹고 가계부도 쓴다. 현관 입구엔 수도와 전기 계량기가 설치돼 있어 수도와 전기 요금도 내야 한다. 이곳 수녀들은 아이들을 젖먹이 때부터 길러 온 ‘엄마’다. 그래서 여느 엄마들처럼 “공부 잘할 수 있는 집”을 원했지만 건축가들은 “행복하고 놀기 좋은 집”을 고집했다. 실내로 들어서면 책꽂이 겸용 계단을 설치한 층고 높은 거실과 아늑한 다락방, 낙서하기 딱 좋은 대형 칠판, 밀어젖히면 옆집과 연결되는 마법의 벽, 조용한 공부방과 침실 등 10대 소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크고 작은 공간이 집집마다 다르게 배치돼 있다. 혈기왕성한 아이들의 활동량을 늘리기 위해 동선을 일부러 늘려 놓고, 마을 가운데엔 배드민턴을 치거나 피구를 할 수 있도록 길을 내 널찍한 마당을 두었다. 옥상엔 나무 덱을 깔아 놓아 오르락내리락하며 놀기 좋다. 수국마을의 수호나무 같은 존재인 팽나무는 물론 볼품없는 나무들도 건축에 방해가 되지만 뽑지 않고 살려 놓아 주변의 시선을 차단했다. 우대성 대표는 “아이들이 ‘우리 집으로 친구를 초대하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가장 기뻤다”고 했다. ‘엄마’들은 새 집이 좋으면서도 바깥출입을 통제할 수 없고 이리저리 숨을 곳이 많은 실내 공간이 걱정도 된다. 하지만 아이들은 커다란 칠판에 이런 글귀를 써 놓았다. ‘난 최고였고, 지금도 최고이며, 앞으로도 최고일 것이다.’부산=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도시는 여전히 필요한가’를 반문하며 50년간 도시를 연구해온 영국 이론가. ‘건축은 바느질’이라며 30년 넘게 설계해온 프랑스 건축가. 빌 힐리어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교수(76)와 도미니크 페로 DPA 대표(60)가 나란히 서울을 찾았다. 페로 대표는 서울시가 주최한 ‘서울 어반 디자인 2013’ 국제 학생 아이디어 공모전의 심사위원장을 맡아 방한했다. 공간의 사회학으로 해석되는 ‘스페이스 신택스(space syntax·공간구문론)’ 개념의 창시자인 힐리어 교수는 31일 페로 대표와 함께 특별 강연을 하고, 같은 시기에 열리는 스페이스 신택스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10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각각 이론가와 실무자로서 도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이 지난달 30일 저녁 서울 인사동 한옥 민가다헌에서 만나 대담을 나눴다. 힐리어 교수를 사사한 김영욱 세종대 건축공학부 교수(50·스페이스 신택스 국제학회 조직위원장·사진)가 진행을 맡았다. 페로 대표가 2008년 설계한 이화여대 캠퍼스 복합단지(ECC) 얘기부터 꺼냈다. ECC는 올해 초 동아일보가 건축전문가 100인과 함께 선정한 ‘한국 최고의 현대건축’에서 7위를 차지했다. ‘ECC가 서울에 어떤 영향을 주길 원했느냐’고 묻자 “그런 거 없다”란 답이 돌아왔다. ▽페로=난 빌딩을 짓지 않았다. 대신 환경(landscape)을 만들었다. 난 캠퍼스와 거리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 사람들이 교류하는 장소로 만들고 싶었다. 여대여서인지 캠퍼스에 감옥처럼 보호 장치가 많았다. 하지만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감옥에서 보호받기를 싫어하지 않는가. 이 건물은 (학생과 교수와 학교 밖 사람들이 만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접점이 됐다. 이제 박물관의 시대는 끝났다. 대학 캠퍼스가 도시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것이다. ―한국의 자살률은 8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다. ▽힐리어=사회가 발달할수록 사회병리학적인 문제들도 빠르게 퍼진다. 흥미롭게도 많은 서구 도시의 범죄율이 최근 감소하고 있다. 대개 실업률이 높으면 범죄율도 올라가는데 대단한 모순이다. 높은 실업률은 범죄를 양산하지만 훌륭한 공간과 건축적 유산은 이를 억제한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면 공간을 연구해야 한다. ―행복한 공간을 위한 도시 전문가와 건축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힐리어=거대 도시를 공간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을 찾는 것이다. 거대 도시는 단순히 작은 도시의 합이 아니다. 거대 도시들의 창조성과 경제적 성장을 돕는 공간적 특성을 찾아내야 한다. ▽페로=건축이란 바느질처럼 관계를 만들어내는 예술이다. 건축가는 재단사처럼 봉합을 한다. 건축은 항상 맞춤복이며 맥락이 중요하다. 건축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주변 환경을 변화시켜야 한다. ―한국에는 세계적인 스타 건축가들의 작품이 많은데 비난도 받는다. 특히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논쟁거리다. ▽페로=서로 다른 문화에서 성장한 건축가들의 작업이 한 장소에서 실현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요즘 중국이 그러하다. 중요한 것은 건물 자체보다 건물이 지닌 공간적 프로그램이다. ―한때 ‘디자인 서울’이란 모토로 서울시가 디자인 개혁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성과는 미미했다. 이상적인 도시를 위한 정치인의 역할은…. ▽힐리어=정치는 단순하고, 도시는 복잡하다. 도시를 한번에 디자인할 순 없다. 도시 속에 중요한 공간을 만들어 이를 통해 다양한 관계를 형성해갈 수 있을 뿐이다. ▽페로=정치는 짧고 도시는 길다. 건축가들의 이상이 실현되기도 쉽지 않다. 결국 해답은 도시를 살아가는 시민들에게서 찾아야 한다. ―도시 전문가나 건축가가 되고 싶어 하는 학생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힐리어=하고 싶으면 그냥 해버려라. ▽페로=레닌이 한 말을 들려주고 싶다.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라. 그걸로 충분하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제5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가 31일부터 11월 5일까지 서울 이화여대 ECC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린다. 이번 영화제는 ‘집’을 주제로 16개국 21개 작품을 선보인다. 거장 건축가 5명이 설계한 집을 소개한 핀란드 랙스 린네캉가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5편에 먼저 눈길이 간다. 스위스 출신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가 1951년 아내의 생일 선물로 45분 만에 스케치했다는 16m² 크기의 오두막, 멕시코 출신 루이스 바라간이 색과 빛의 마법을 구사한 ‘카사 스튜디오’, 일본의 안도 다다오가 패션 디자이너 고시노 히로코 가족을 위해 지은 ‘빛의 집’ 고시노 하우스, 핀란드의 거장 알바 알토의 ‘빌라 마이레아’, 러시아의 콘스탄틴 멜니코프가 모스크바 시내에 지은 ‘멜니코프 하우스’를 각각 60분 길이의 필름에 담았다. 아시아 감독들이 건축과 도시를 주제로 작업한 영화들도 있다. 중국 6세대 감독 자장커의 ‘24시티’는 2008년 칸 영화제 공식경쟁부문 진출작이다. 중국 쓰촨 성 청두에서 공장을 폐쇄하고 주상복합아파트 ‘24시티’를 세우는 과정을 담았다. 정재은 감독이 서울시 신청사 건립 과정을 촬영한 다큐 영화 ‘말하는 건축 시티:홀’과 2013 제주영화제 최우수작품상 수상작인 고형동 감독의 단편 ‘9월이 지나면’도 상영된다. www.siaff.or.kr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경기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에 최근 지어진 ‘붉은 벽돌집’은 목 위까지 단추를 꼭꼭 채운 여자 같다. 붉은 치장벽돌을 8m 높이로 촘촘히 쌓아 올리고 가운데 ‘ㅁ’자로 마당을 둔 중정형 주택인데 작은 창을 최소한으로 뚫어 놓아 밖에서는 속을 들여다볼 수 없다. “의사인 건축주는 어린 두 딸과 전업주부인 아내를 위해 사생활이 완벽하게 보장되는 안전한 집을 원했습니다.” 중정형 설계는 담을 쌓지 못하도록 규정한 판교신도시 지구단위계획 시행지침과 사생활 보호를 원하는 집주인 사이에서 정수진 건축 에스아이 대표가 내놓은 절충안이다. 그가 판교에 지은 ‘하늘집’(2011년)과 ‘노란돌집’(2012년)도 건물 외벽을 담처럼 둘러 외부의 시선을 막아 놓았다. “열린 마을 공동체를 조성하는 것이 원래 취지였겠지만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들어서면서 이 지침은 이웃 간 분쟁의 씨앗이 돼버렸어요. 여느 단독주택처럼 창을 외부로 낸 집들은 서로 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이죠.” 요즘 이곳 주택단지를 둘러보면 높은 밀도를 예상하지 못하고 크게 창을 내었다가 주변에 집들이 들어서자 번들거리는 반사유리와 블라인드로 가린 집들이 많다. 불법으로 나무 울타리를 높게 두른 집들도 있다. 새 집을 지으려 하면 옆집에서 “설계도를 보여 달라”고 할 정도로 신경이 곤두서 있다.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231.8m²(약 70평) 규모인 붉은 벽돌집은 외부의 시선과 소음은 차단하되 내부로는 활짝 열려 있다. 마당을 향해 터놓은 통유리창으로는 마당 건너 주방에서 요리하는 아내와 서재에서 책장을 뒤적이는 남편과 아이들이 서로를 볼 수 있다. 이 통유리창과 외벽에 최소한으로 낸 창을 통해 채광과 환기가 이뤄진다. 하늘을 보며 조용히 브런치를 즐길 수 있는 마당부터 박공지붕이 만들어낸 아이들을 위한 다락방, 마룻바닥에 뒹굴거리기 좋은 아버지의 서재, 간접조명과 천창이 주는 아늑함까지 붉은 벽돌집은 건축주에겐 ‘즐거운 우리 집’이다. 하지만 붉은 벽돌집의 ‘폐쇄성’은 건축계에서는 논쟁거리다. 이 논쟁은 판교 주택단지의 지침이 비현실적임을 확인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유이화 ITM유이화건축사사무소 대표는 건축전문 월간 SPACE 최근호에서 “이웃과의 어울림 따위는 귀찮고, 아파트 생활도 싫고, 남의 시선 신경 쓰지 않고 우리만의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집”이라며 “바깥세상은 일절 관심이 없는 듯 과장된 높은 담 역할을 하는 벽돌로만 고독하게 둘러싸여 있다”고 비판했다. 반면 이은석 경희대 건축학과 교수는 “붉은 벽돌집의 중정형 설계는 법규를 따르면서도 사생활 보호라는 건축주의 기본권을 찾아준 지혜로운 선택”이라며 “특히 도로가 앞쪽으로 나 있는 집의 경우 소음 피해가 심한 데다 밤이면 집 안이 더욱 잘 들여다보여 큰 문제다. 판교 주택단지를 설계한 이가 (담을 없애면 공동체가 복원된다는) 낭만적인 착각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성남=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가 30일 서울을 찾는다. 이화여대 캠퍼스 복합단지(ECC) 설계로 국내에 알려진 페로는 서울시가 주최하는 ‘서울 어반 디자인 2013’ 국제 학생 아이디어 공모전의 심사위원장을 맡아 방한한다. ‘도시의 통합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서울 제물포길 개발 계획을 요구하는 이번 공모전에는 22개국 200개 팀이 응모했다. 31일 오후 3시 서울시청 8층 다목적홀에서 당선작 시상식과 설명회가 열린다. 오후 4시부터는 페로와 도시 공간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빌 힐리어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교수의 초청 강연이 예정돼 있다. 건축 도시 분야의 국제학술행사인 제9회 스페이스 신택스 국제심포지엄도 30여 개국 300여 명의 교수와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31일부터 4일간 서울시청, 서울시립역사박물관 대강당, 세종대에서 열린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그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 8월 하순쯤이다. 변호사의 전언에 따르면 검사는 아나운서인 아내와의 뜬금없는 ‘파경설’을 듣고 지인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부부는 잘 지낸다, 헛소문이니 주변에도 널리 알려 달라고. 이런 메시지를 두 차례 보내고 나면 끝날 줄 알았다. 내가 떳떳하니까. 파경설은 사실이 아니니까. 그런데 가깝게 지내던 이들마저 소문이 사실인 양 안부를 물어왔다. 검사는 절감했다. 사람들은 사실보다 루머를 믿는다는 것을. 그래서 소문이 무서운 거다. 말이 안 되는 소리도 자꾸 듣다 보면, 믿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면 그럴듯하게 들린다. 캐스 선스타인 하버드대 교수는 이를 ‘정보의 폭포현상’이라고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틀릴 리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거짓임을 아는 이도 굳이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다. 소문을 주고받는 건 사회적인 행위다. 모든 사람이 유명인의 파경설로 신이 나 있을 때 “확인 결과 그 소문은 거짓이다”라고 하면 ‘흥을 깨는 사람’이 돼버린다. 거짓말에 속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심리적으로 불편해서라는 분석도 있다(니컬러스 디폰조의 ‘루머사회’). 결국 검사는 8월 30일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소문이 빛의 속도로 퍼져나가는 동안 수사는 거북이걸음을 했다. 카카오톡으로 소문을 유포한 사람을 잡으려면 휴대전화나 서버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필요하다. 카톡 문자를 역추적할 때마다 영장 청구-발부-집행이라는 3일간의 과정을 거쳤고 이를 5, 6회 반복한 끝에 유포자들을 찾아냈다. 이 중 1명은 검사의 파경설을 블로그에 올려 광고 수수료까지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검사는 매일 새벽 인터넷에 올라온 파경설과 연관 검색어를 찾아 해당 사이트에 삭제를 요청했다. 지우면 올라오고, 지우면 올라왔다.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던 시절 루머는 생성-확산-소멸의 생명주기를 따랐지만 디지털 세계에선 불멸의 괴물이 돼버렸다. 20년 차 검사의 루머 지우기는 11일 검찰이 모 일간지 기자와 블로거를 허위사실 유포에 따른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기까지 40일간 계속됐다. 루머에는 법적 대응이 최선이다. 검사 파경설 유포자 2명이 23일 구속기소됐고, 루머도 인터넷에서 자취를 감췄다. 장용호 서강대 교수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법적 대응이 시작되면 루머가 일정 규모 이하로 줄어드는 안정기가 늦게 찾아온다. 수사 착수로 죽어가던 루머가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임신설에 시달리는 어린 여가수도, ‘스폰’설로 경악한 한류 스타도 법적 대응을 꺼린다. 하지만 안정기는 늦게 찾아오되 유포자들의 숫자는 확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국정감사에선 검사처럼 루머의 피해자가 요청하면 포털이 문제의 글을 삭제하거나 못 보도록 막는 ‘임시조치’가 논란이 됐다. 글을 올린 이의 이의제기가 없으면 임시로 가려놓았던 글은 30일 후 삭제된다. 올 8월까지 ‘임시조치’된 글은 22만7000여 건이고, 이의제기를 통해 다시 게시된 글은 5720건이다. 최재천 민주당 의원은 임시조치 제도에 대해 “포털의 사적 검열이고 표현의 자유 침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거꾸로 해석하면 올리지 말았어야 할 글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도 된다. 22만7000여 개의 지워진 글에는 검사의 파경설도 있을 것이다. 숫자만 세기보다 무엇이 지워졌고, 다시 게시됐는지 헤아려봐야 하지 않을까. 루머 올리기를 막을 수 없다면 루머 지우기라도 허용해야 한다.이진영 문화부 차장 ecolee@donga.com}

건축가 100인이 ‘최악의 한국 현대건축물’ 1위로 뽑은 서울시 신청사. 이 신청사의 건축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는 소재의 폭발성 때문에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 연출자가 고 정기용의 건축 철학을 다룬 다큐 ‘말하는 건축가’(2012년)로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정재은 감독(44)이다. 하지만 15일 시사회에서 공개된 ‘말하는 건축, 시티:홀’(24일 개봉)은 서울시 신청사라는 뜨거운 감자를 식어버린 감자튀김으로 만들어놓았다. 3000억 원짜리 초대형 프로젝트가 버거웠던지 설계와 시공, 감리, 그리고 발주처인 서울시 공무원들의 엇갈리는 이해관계 사이에서 두리번거리다 할 말도 못하고 끝나버린 느낌이다. “사람들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비리를 폭로하고 시청사를 질타하는 고발 다큐를 기대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모든 이들을 균형 있게 다루고 편견 없이 상황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정 감독에겐 다른 속사정이 있었다. 완공되기 전부터도 말이 많았던 건물의 촬영에 관계자들이 흔쾌히 응했을 리 없다. 그는 서울시와 시공사인 삼성물산의 ‘사전 시사’를 거쳐 이들이 원치 않는 장면을 삭제하고 영화를 완성했다. 그래서인지 영화엔 ‘악역’이 안 나온다. “결국 예산과 시간의 압박이 악역이었다고 봅니다. 좋은 건축물을 갖기 위한 여유가 없었던 겁니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신청사의 콘셉트 설계 초청 공모전에서 떨어진 나머지 3개 작품을 소개하는 장면이다. 지금의 디자인이 싫다면 어떤 대안이 있었는지, 과연 우리는 어떤 시청 건물을 원했던 것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부분. 우여곡절 끝에 완공된 신청사의 개청식. 유걸 아이아크 공동대표가 식장에 마련된 의자에 앉으려 하자 시청 공무원이 “여긴 귀빈석”이라며 말린다. 유 대표는 “내가 설계자요”라고 해보지만 결국 의자를 얻지 못하고 초라한 멍석에 앉는다. 건축가를 이렇게 대접하는 우리가 “건물 디자인이 왜 이 모양이냐”고 손가락질할 권리가 있는 걸까. 정 감독은 1년간 400시간을 찍어 106분을 추려내 영화를 만들었다. 나머지 분량을 살려 인터뷰집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그리고 ‘말하는 건축주’를 마저 제작해 건축 3부작을 완성할 계획이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학교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운동장을 가운데 두고 ‘ㄱ’ 혹은 ‘ㅁ’자 모양으로 교사(校舍)를 지어놓은 뒤 똑같은 크기로 잘라 늘어놓은 교실들…. 한국의 초중고교에서 학생들이 행복해하지 않고, 창의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획일적이고 통제적인 학교 디자인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1일 개막하는 서울시립미술관의 기획전 ‘노르딕 패션(Nordic Passion): 북유럽 건축, 디자인’은 건축가들이 세심하게 설계한 디자인 선진국 북유럽 국가들의 학교 건축과 실내 디자인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서 최상위를 기록하는 핀란드의 학교 건축 7개를 비롯해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스웨덴의 대표적인 학교 건축물들을 모형과 영상으로 소개한다. 학교의 일부 공간은 현지 건축가들이 와서 실물 크기로 지어 전시한다. 북유럽 학교들의 특징은 ‘집보다 좋은 공간’이라는 점이다. 집과 학교의 구분이 뚜렷한 한국과 달리 학생들의 다양한 수요를 감안해 배치한 크고 작은 공간에는 채광 시설과 성장 중인 아이들을 고려한 인체공학적 책걸상들이 배치돼 있다. 골판지를 잘라 이리저리 구부려 붙여놓은 듯한 건물, 동화책에 나올 법한 나무집, 미니 굴을 파놓은 실내 벽 등 어린이집이나 초등학교의 경우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도록 배려한 디자인과 색감이 눈에 띈다. 교장실이 좁고 간소한 것도 한국의 학교와는 다른 점이다. 학교는 지역 문화의 중심이 되는 사회 시설이기도 하다. 그래서 학교 식당은 층고가 높고 주방과 식당 공간이 넉넉해 지역 주민들이 언제든 파티를 열 수 있다. 이번 기획전을 공동 기획한 큐레이터 안애경 쏘노안 대표는 “북유럽 국가들이 학교 디자인에 신경 쓰는 이유는 좋은 학교 건축물 자체가 학생들에겐 중요한 교육적 경험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며 “사회주의 국가답게 저소득층 자녀들도 훌륭한 공간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일반 집에서 볼 수 없는 고급 가구를 배치하는 점도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좋은 학교 건물에서 디자인 감수성을 키워온 학생들은 디자인 대학에 들어가면 소외계층을 위한 가건물을 지으며 디자인과 사회를 배운다. 이번 기획전에는 디자인으로 유명한 핀란드 알토대학과 노르웨이 베르겐 예술대학 학생들의 나무 건축물이 전시된다. 두 대학 교수들이 미술관 2, 3층에 현지에서 공수해온 나무로 전시 구조물을 설치하면 그 위에 학생들이 직접 설계하고 만든 나무 의자와 식탁, 조명기구 등을 전시한다. 이들이 소외계층을 위해 설계한 공공 건축물의 모형도 볼 수 있다. 미술관 로비와 입구 공원에는 북유럽 디자이너들이 현지에서 공수해온 나무로 구조물을 지어 설치한다. 그저 감상만 하는 작품이 아니라 구조물 위에 올라가 걷고 뛰며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헬싱키에 나무로 지은 캄피 교회와 헬싱키 시립도서관을 포함해 핀란드의 명품 나무 건축물 10작품의 모형과 사진도 전시된다. 내년 2월 16일까지.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괜찮은 건축 교양서가 나왔다. 천장환 경희대 건축학과 교수가 쓴 ‘현대 건축을 바꾼 두 거장’(시공아트)이다. 프랑스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모더니즘 건축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미국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 독일인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1886∼1969)의 삶과 건축을 소개한 책이다. 현대문화사를 쓰다시피 한 위인들인 데다 개인사가 드라마틱하고 도판 500장도 충실해 한번 잡으면 마지막 416쪽까지 단숨에 읽게 된다. 라이트는 땅에서 자라나온 듯한 ‘유기적 건축’을 지향했다. 까다로운 도면을 단숨에 막힘없이 그려내고는 “소매를 흔들어 디자인을 빼냈다”고 뻐기는 천재 건축가였다. 하지만 천재성보다 빛나는 것이 뚝심이다. 그는 주택 설계로 10년간 명성을 얻다 이후 20년 넘게 퇴물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68세에 폭포수 바위 위에 지은 ‘낙수장(fallingwater·1935년)’으로 부활해 말년에 역작 ‘구겐하임 미술관’(1956년)을 지어냈다. 라이트 편은 이렇게 끝난다. “젊다는 사실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다면… 관 속에 들어갈 때조차 불멸일 것이다.” 미스의 대표작은 유리와 철로 군더더기 없이 지어 올린 뉴욕의 ‘시그램 빌딩’(1958년)이다. 건축가 김중업이 청계천변에 지은 ‘삼일빌딩’(1969년)을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미스를 좇아 시그램을 닮은 빌딩을 세웠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가들은 그의 미니멀한 건축이 현대도시를 무미건조하게 망쳐놓았다며 ‘Less is Boring(단순한 것은 지루한 것이다)’이라고 비판했다. 미스의 명언이자 모더니즘의 표어처럼 쓰이는 ‘Less is More(단순할수록 좋다)’를 패러디한 문장이다. 미스 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지 않다. 단지 표현하고 싶을 뿐이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서울 은평구 진관동 북한산 자락에 안겨 있는 진관사. 그 맞은편에 놓인 돌다리 ‘세심교(洗心橋)’를 건너면 울창한 소나무숲과 함께 왼편으로 단정한 팔작지붕 한옥 일부가 보인다. 올해 서울시건축상 최우수상을 받은 ’진관사 템플스테이 역사관‘이다. 다리를 건너 다가가면 놀랍게도 281.16m²(약 85평) 규모의 웅장한 몸체가 드러난다. 산사(山寺)의 정적을 깨뜨릴까 조심스러워 커다란 암반 뒤에 큰 덩치를 숨기고 있는 모양새다. 진관사 템플스테이 역사관은 아홉 칸짜리 대형 한옥부터 한 칸 대청의 소박한 집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한옥 네 채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계곡을 따라 서서히 오름이 가팔라지는 지형에 크기 순으로 함월당-길상원-공덕원-효림원이 차례로 앉았다. 무질서한 증·개축으로 본래 사찰의 멋을 망치곤 하는 선례들과 달리 천혜의 자연과 단아한 사찰 경관을 흩뜨리지 않고 들어서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 건축가 조정구 구가도시건축 대표(47·사진)는 “자연 지형을 그대로 반영해 마당을 만들고 집을 앉혀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암반에 몸을 숨기고 있던 ‘달을 품은 집’ 함월당은 지하 1층, 지상 1층이다. 성인 두 명이 마주잡아야 할 굵기에 길이가 9m 되는 대들보 아홉 개를 힘차게 지른 내부 공간엔 500명까지 들어갈 수 있다. 현대식 홀인 지하 1층은 지형의 높낮이 차이로 인해 앞에서 보면 지상 1층처럼 빛이 환하게 들어온다. 함월당 옆 자그마한 길상원도 다목적 홀과 세미나실을 갖춘 공적인 공간이다. 길상원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그보다 작은 공덕원과 효림원이라는 좀더 내밀한 한옥이 나온다. 공덕원엔 10명 정도 단체 숙박이 가능하고 효림원은 가족과 함께, 혹은 홀로 머물기 알맞은 크기다. 한옥은 본디 안에서 밖을 바라볼 때 진가를 알 수 있다. 함월당 바닥에 앉으면 크기와 위치를 세심하게 잡아 뚫어놓은 창호로 시원한 소나무숲이 들어온다. 이보다 높이 있는 공덕원과 효림원 창호를 열어젖히면 숲과 돌담과 단청 두른 처마, 그리고 이 계절엔 높푸른 하늘이 조용히 펼쳐진다. 가장 작고 높은 집 효림원의 누마루에선 템플스테이 역사관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조 대표는 “종교적 공간이었던 옛 사찰과 달리 요즘 사찰은 다양한 사람이 여러 행사를 갖는 곳이다. 경내와 조화를 이루면서 갖가지 수요를 담아내는 건물을 짓는 것이 어려웠다”고 했다. 그는 현대건축가이나 한옥 호텔, 한옥 어린이집, 한옥 병원 등 한옥 작품으로 주목 받아왔다. 이달부터는 진관사 경내의 일부를 철거하고 사찰 음식관 여섯 채를 짓는다. 기존의 전통 찻집 ‘보현다실’은 원래대로 초가집으로 지을 계획이다. “많은 사람의 추억과 수많은 켜의 시간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걱정입니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한국신문협회(회장 김재호)와 한국언론진흥재단(이사장 이성준)은 30일 ‘2013 신문사랑 전국 NIE 공모전’의 5개 부문 수상자로 교사와 학생 74명과 6개 학교를 선정해 발표했다. 시상식은 10일 오후 2시 서울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펼쳐지는 ‘2013 대한민국 NIE 대회’에서 열린다. 수상자들에겐 상장과 총상금 3620만 원을 수여한다. 이번 공모전은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 전주페이퍼가 후원했다. 부문별 입상자는 다음과 같다. ▽신문 만들기 △대상: 공소현(부산 동신초4), 박하랑(제주 신성여중1) △최우수상: 류다현(수원 천일초5) 배지윤(양산 개운중3) 천진화(대구 도원고2) △우수상: 김수빈(제주북초4) 오현서(청주 서현초6) 전하민(인천 가정여중2) 김재훈(인천 산곡중3) 송은지(안양 양명여고1) 백동엽(부산 만덕고1) ▽올해의 학교신문 △초등학교: 군산 당북초등학교 ‘당북通신’ △중학교: 화성 향남중학교 ‘향남해밀무지개’ △고교: 정읍 서영여고 ‘서영소식’ ▽신문 스크랩 △대상: 김민서(남양주 양오초6) 김사빈(울산 중앙중2) 신호진(안양 신성고2) △최우수상: 이지섭(구미 옥계동부초5) 이주은(구미 옥계중1) 유나영(논산 쌘뽈여고2) △우수상: 조용하(서울 잠원초4) 조서연(인천 작전초2) 고혜린(제주 한림여중3) 이재영(대구 경운중2) 정우주(경기 용인외고1) 임가은(논산 쌘뽈여고2) ▽대학생 에세이 △대상: 박선희(중앙대 사회학과4) △최우수상: 김서영(연세대 경영학과4) 정다혜(공주대 사학과4) △우수상: 김재영(충북대 대학원 교육학과1) 송민극(한국방송통신대 미디어영상학과3) 하수정(국민대 대학원 언론정보학과1) ▽NIE 교안·아이디어 △대상: 이현주(경기 안양남초) 문지영(부산 화명중) 전성우(부산 계성여상) △최우수상: 이주원(서울 동자초) 하영경(울산 대현중) 곽우은(대구 구남보건고) △우수상: 김형욱(강원 홍천초) 전현영(경남 창원여중) 장두원(연세대) 이승재(중앙대)}
한국신문협회(회장 김재호)는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함께 신문 읽기 공모전’과 ‘패스포트 공모전’ 수상자를 25일 발표했다. 함께 신문 읽기 공모전에서 대상은 김지우(대전 원신흥초6) 백정헌(의정부 동암중2) 유시현 군(전북대사범대부설고2)이 차지했다. 단체상은 대전 원신흥초교 99명, 경기 안양여중 17명, 충남 부여여고 128명이 받았다. 신문활용교육(NIE) 워크북인 패스포트 공모전에서는 이재건(서울 금북초6) 서현영 군(광명 광문중1)이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단체상은 남양주 양오초교 학생 131명이 차지했다. 시상식과 우수 작품 전시회는 다음 달 10일 오후 2시 서울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펼쳐지는 ‘2013 대한민국 NIE 대회’에서 열린다. 다음은 수상자 명단. ▼ 함께 신문 읽기 공모전 △대상=김지우 백정헌 유시현 △최우수상=김규나(부산 중리초6) 김솔비(김포 통진중1) 홍승희(익산 전북제일고1) △우수상=박수빈(춘천교대부설초4) 박세현(부산 화정초6) 양준희(서울 창덕여중3) 송수빈(전주 아중중2) 서난영(전북 익산고2) 신정학(제주제일고1) △장려상=송예원(대전 원신흥초2) 조은빈(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6) 박예린(대전 버드내중1) 이현주(인천 신송중2) 최요림(충남 부여여고2) 이원규(경기 부천공업고3) △단체상=대전 원신흥초교 99명, 경기 안양여중 17명, 충남 부여여고 128명 ▼ 패스포트 공모전 △대상=이재건 서현영 △최우수상=김태욱(대구 영신초2) 석하엘(안산 송호고2) △우수상=이은송(안양 명학초6) 김민서(남양주 양오초6) 박주영(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11) 김성은(제주사대부설중3) △장려상=박세진(광주교대부설초2) 오정윤(울산 삼호초5) 이영선(수원 동신초5) 이동희(의정부 부용초5) 임석배(서울 금북초6) 임효정(광주교대부설초4) 정재희(대구 동산초5) 정현서(서울 행현초6) 최현주(화성 화수초3) 한서경(안양 귀인초6) 나규원(성남 수내중2) 이준형(안양 범계중2) 심민형(서울 무학중2) 김의진(대전 동방여중3) 배정희(김포 고창중1) 정한나(수원 창현고1) 배정민(김포 장기고1) 홍예빈(서울 창동고2) 조수진(안산 송호고1) 강산하(인천 신명여고2) △단체상=남양주 양오초교 131명}

건축가 정기용은 ‘기적의 도서관’으로 기억된다. 문화적인 소외 지역에 지방자치단체, 시민단체, 방송사가 협업해 도서관을 지어주는 프로젝트다. 현란한 외양으로 으스대지 않으면서도 구석구석 전문가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지는 도서관, 그 속에서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감동적인 건축 이벤트였다. 요즘은 나라 밖에서도 ‘돕는 건축’이 이뤄지고 있다. 전후 선진국들이 한국에 국립의료원(1958년) 같은 건물을 세워 도왔듯 이제는 우리가 세계 곳곳에 병원과 교육시설을 지어주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공적개발원조 건축 프로젝트만 해도 놀랄 만한 숫자다. 최근 10년간 완공된 건물 중 총사업비 200만 달러(약 21억 원)가 넘는 것만 81개다. 베트남엔 500병상 규모의 종합병원을, 아프가니스탄 카불공대엔 정보기술(IT)센터를, 팔레스타인엔 행정수반 청사를 건립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100개가 넘는 건물을 짓고 있다. 아쉬운 점은 이 프로젝트에 건축가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문화는 빠진 채 건물만 원조하는 셈이다. 그래서 때로는 생색나기는커녕 욕을 먹는 경우도 있다. 중동 지역에 학교를 지으면서 생뚱맞게 조선시대 정자를 세워놓거나, 동남아시아 국가에 대형 병원을 지은 뒤 내부 벽에 타일로 대형 태극기를 그려 넣는 식이다. 이는 디자인 역량을 따지지 않는 설계자 선정 제도 탓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래서 KOICA는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은 설계 공모를 거치기로 하고 그 첫 사례로 최근 우즈베키스탄 직업훈련센터 건축설계 공모를 했다. 하지만 참여한 건축가는 많지 않았다. 큰돈도, 버젓한 작품도 남기기 어려운 예측불허의 건축 환경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한 것일까. 원로 건축가 김인철 아르키움 대표(66)는 최근 네팔의 작은 마을에 FM라디오방송국을 지었다. 그는 재능기부를 해달라는 KOICA와 MBC의 요청을 받고 해발 2700m 히말라야 산자락에 수천 년간 축적돼온 현지의 건축 문화를 자신의 언어로 재해석한 방송국 ‘바람 품은 돌집’을 지어냈다. 1년간 크고 작은 비행기를 수차례 갈아타는 험한 여정을 6회 반복한 끝에 맺은 결실이다. 다음 달 4일엔 현지 주민들과 축제 같은 개국식을 갖는다. 그는 “병원이나 학교를 세우는 일에 건축 디자인을 보탠다면 한류는 한때의 유행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로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한국 건축계는 어렵다. 직원 월급도 못 주는 스타 건축가가 많다. 밖으로 눈을 돌려보면 어떨까. 세계적인 일본 건축가 구마 겐고는 1990년 버블 경제가 끝난 뒤 10년간의 불황기에 지방 곳곳을 돌며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했다고 한다. 그때의 경험이 지금의 건축 기반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종이 건축의 거장’ 반 시게루도 난민 수용소를 종이로 지으면서 스타덤에 오를 기회를 잡았다. 정기용은 생전 인터뷰에서 영국 디자이너 윌리엄 모리스의 자서전을 읽고 건축가가 되기로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모리스는 ‘충만감을 느낄 수 있는 노동을 할 것, 사회적 부의 분배를 도울 것, 환경의 질을 높이는 데 이바지할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건축을 통해 아름다움을 나눌 수 있다면 근사한 삶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젊은 건축가들이 시야를 넓혀 세계의 그늘진 곳에서 돕는 건축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건 고단한 삶을 살아내는 현지인들뿐만 아니라 어두운 불황의 터널 속에 갇힌 한국 건축계에도 기적의 빛을 선물해 줄 것이다.이진영 문화부 차장 ecolee@donga.com}

일본 도쿄가 2020 여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됨에 따라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63)의 주경기장 설계가 주목받고 있다. 8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매머드급 주경기장은 1964년 올림픽 주경기장으로 사용된 국립 가스미가오카 육상경기장 자리에 들어선다. 커다란 유선형 개폐식 지붕을 이고 있는 이 경기장은 하디드 특유의 유려한 곡선이 인상적이다. 2018년에 완공되면 2019년 럭비월드컵이 이곳에서 펼쳐진다. 2020 여름올림픽 때는 개·폐막식과 장애인올림픽이 이곳에서 열린다. 하디드는 1964년 도쿄 올림픽 당시 수영장으로 사용됐던 1만4000석 규모의 국립 요요기 경기장의 리모델링도 맡았다. 요요기 경기장은 1987년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일본 건축가 단게 겐조(1913∼2005)의 대표작으로 이번 리모델링을 통해 개폐식 지붕을 갖춘 핸드볼 경기장으로 거듭난다. 이라크 출신 영국 건축가인 하디드는 2004년 여성 최초로 프리츠커상을 거머쥔 스타 건축가다. 국내에선 서울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설계자로 유명하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