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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올 3월 박근혜 대통령의 중동 순방 직후인 3월 말∼4월 초 쿠웨이트 정부 초청으로 5박 6일간 쿠웨이트시티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현지인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호감을 보였다. 현지에서 본 쿠웨이트 시장의 가능성을 키워드로 정리한다.○ 와스타(Wasta) 의류업체를 운영하는 교민 강동진 씨(44)는 “중동에서 비즈니스를 하려면 와스타를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아랍어로 ‘인맥’을 뜻하는 와스타는 단순한 인맥 차원을 넘어 영향력, 수수료, 때로는 뇌물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개념이다. “운전면허증을 발급받더라도 담당 공무원과 잘 아는 쿠웨이트 친구를 대동하고 가야 면허증이 나온다. 엄연히 법규에 정해진 대로 하면 되는데 매번 현지인을 통해야 하니 비효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싫든 좋든 와스타는 중동인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개념이다. 문화적 다양성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시작해야 한다.”○ 디와니야(Diwaniya) 낮에는 금식해야 하는 라마단 기간에 늦은 밤 가정집 1층 넓은 홀에서 열리는 모임이다. 새벽까지 각종 다과와 차를 들며 이야기를 나눈다. 남자라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옛날 부족장이 부족민들의 여론을 수렴하던 전통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현지 알와탄 방송의 기자 마이 셰하베딘 씨는 “얼마 전 타계한 알사바 전 국왕이 왕세자 시절 장기간 입원한 후 퇴원하자마자 제일 먼저 참가한 모임도 디와니야였다”며 “누구든지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민심 파악 장소로 최적”이라고 했다.○ 할랄(Halal) 국내에도 잘 알려진 ‘할랄’은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따라 생산 도축 처리 유통 포장된 식품 의약품 화장품 등을 총칭한다. 할랄의 원래 의미는 아랍어로 ‘신이 허용한 것’이란 뜻이다. 돼지고기와 알코올 성분이 들어가면 안 되고 육류는 반드시 성인 무슬림이 ‘신의 이름으로’라는 주문을 외운 뒤 날카로운 칼로 정맥을 끊어 도살한 것만 먹어야 한다. 독이 없고,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지 않아야 하며, 사람의 건강을 해치면 안 된다는 ‘3무(無) 기준’도 충족시켜야 한다. 교민 이병옥 씨(67)는 “동물 피를 다 제거하지 않는 일반 도축과 달리 할랄식 도축은 피를 완전히 제거하기 때문에 신선도가 오래 유지되고 육질도 부드럽다”며 “참살이(웰빙) 바람을 타고 세계 곳곳에 할랄 전문 식당이 늘어나고 있는 만큼 한국에도 더 많은 전문점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의료 관광 아랍인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 대신 단 음식과 음료를 즐기고 더위를 피해 오후 9∼10시에 식사를 하다 보니 이와 위(胃)가 안 좋다. 이삼식 KOTRA 쿠웨이트 무역관장은 “한국의 우수한 의료 서비스를 받길 원하는 중동 사람이 많다”며 “중동 특수를 ‘아웃바운드(outbound·한국에서 중동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인바운드(inbound·중동에서 한국으로)’까지 넓혀야 한다. 대표적으로 경쟁력 있는 산업이 의료관광”이라고 했다. ○ 청년보다 30, 40대가 취업 유리 교민 조성환 씨(60)는 “30대 후반∼40대 후반 한국인들이 현지 취업에 유리하다”고 조언했다. “많은 중동 회사가 오너는 아랍인, 중간관리자는 고학력 인도인 이집트인 시리아인, 일반 근로자는 저학력 인도인 파키스탄인 네팔인 식의 인력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들 중간관리자의 경우 부정부패 및 ‘갑질’이 심해 근면성실하고 투명하게 일처리를 하는 한국인들이 인기다. 한국 엔지니어들을 잘 쓰지 않던 아랍에미리트(UAE)와 사우디아라비아 정유회사들도 지난해 직접 한국으로 가서 엔지니어를 공채하기도 했다. 한국인들이 가장 취약한 ‘영어’만 극복하면 수요가 많기 때문에 유리하다. 급여 수준도 높다.” 쿠웨이트시티=하정민 기자 dew@donga.com}
기자는 3월 박근혜 대통령 순방 다음달인 4월 쿠웨이트 정부 초청으로 5박6일간 쿠웨이트시티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현지인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호감을 표시했다. 현지 취재를 통해 본 쿠웨이트 시장의 가능성을 키워드로 정리한다. ●와스타(wasta) 의류업을 운영하는 교민 강동진 씨(44)는 “중동에서 비즈니스를 하려면 와스타를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아랍어로 ‘인맥’을 뜻하는 와스타는 단순한 인맥차원을 넘어 영향력, 수수료 때로 뇌물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개념이다. 그의 말이다. “운전면허증을 발급받더라도 담당 공무원과 잘 아는 쿠웨이트 친구를 대동하고 가야 면허증이 나온다. 엄연히 법규에 정해진 대로 하면 되는데 매번 현지인을 통해야 하니 비효율이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싫든 좋든 와스타는 중동 국민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개념이다. 문화적 다양성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시작해야 한다.” ●디와니야(Diwaniya) 낮에는 금식해야하는 라마단 기간 동안 늦은 밤 가정집 1층 넓은 홀에서 열리는 모임이다. 새벽까지 각종 다과와 차를 나누며 이야기를 나눈다. 남자라면 누구나 참석이 가능하다. 옛날 부족장이 부족민들의 여론을 수렴하던 전통에서 기원했다고한다. 현지 알와탄 방송의 기자 마이 쉐하베딘 씨는 “얼마 전 타계한 알사바 전 국왕도 왕세자 시절 장기간 입원 후 퇴원하자마자 제일 먼저 참가한 모임도 디와니야였다”며 “누구든지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민심파악 장소로 최적”이라고 했다. ●할랄 국내에도 잘 알려진 ‘할랄’은 이슬람 음식을 통칭한다. 아랍어로 ‘신이 허용한 것’이란 뜻이다.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따라 생산 도축 처리 유통 포장된 식품, 의약품, 화장품 등을 총칭한다. 돼지고기와 알코올 성분이 들어가면 안 되고 육류는 반드시 성인 무슬림이 ‘신의 이름으로’라는 주문을 외운 뒤 날카로운 칼로 정맥을 끊어 도살한 것만 먹어야 한다. 독이 없고,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지 않아야 하며, 사람의 건강을 해치면 안 된다는 ‘3무(無) 기준’도 충족시켜야 한다. 교민 이병옥 씨(67)는 “동물 피를 다 제거하지 않는 일반 도축과 달리 할랄식 도축은 피를 완전히 제거하기 때문에 신선도가 오래 유지되고 육질도 부드럽다”며 “웰빙 바람을 타고 세계 곳곳에 할랄 전문 식당이 늘어나고 있는 만큼 한국에도 더 많은 전문점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의료 관광 아랍인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 대신 단 음식과 음료를 즐기고 더위를 피해 저녁 9~10시에 식사를 하다보니 이빨과 위(胃)가 안 좋다. 이삼식 코트라 쿠웨이트 무역관장은 “한국의 우수한 의료 서비스를 받기를 원하는 중동사람들이 많다”며 “중동 특수를 ‘아웃바운드(outbound·한국에서 중동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인바운드(inbound·중동에서 한국으로)’까지 넓혀야 한다”며 “대표적으로 경쟁력있는 산업이 의료관광”이라고 했다. ●청년보다 30, 40대가 취업 유리 교민 조성환 씨(60)는 “30대 후반~40대 후반 한국인들이 현지 취업에 유리하다”고 조언했다. “많은 중동 회사들이 오너는 아랍인, 중간관리자는 고학력 인도인 이집트인 시리아인, 일반 근로자는 저학력 인도인 파키스탄인 네팔인 식의 인력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들 중간관리자들의 경우 부정부패 및 ‘갑질’이 심해 근면성실하고 투명한 일처리를 하는 한국인들이 인기다. 한국 엔지니어들을 잘 쓰지 않던 아랍에미리트(UAE)와 사우디아라비아 정유회사들도 지난해 직접 한국으로 가서 엔지니어를 공채하기도 했었다. 한국인들이 가장 취약한 ‘영어’만 극복되면 수요가 많기 때문에 유리하다. 급여수준도 높다.”쿠웨이트시티=하정민 기자 dew@donga.com}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7일 집권 15주년을 맞았다. BBC 가디언 텔레그래프 등 외신들이 그의 15년 집권이 낳은 러시아의 변화를 집중 분석하는 기사를 쏟아 냈다. 그의 집권 15년을 키워드로 정리해 본다. ▽경제=푸틴 집권 1기(2000년 5월∼2008년 5월) 러시아 경제는 연평균 7%씩 성장했다. 2000년대 초 20달러대를 맴돌던 국제 유가가 한때 100달러까지 치솟으면서 러시아 수출의 약 67%를 차지하는 석유 및 천연가스 산업이 유례없는 호황을 누린 덕이 컸지만 1998년 국가 디폴트(채무불이행) 사태를 경험했던 국민은 이를 푸틴의 덕으로 기억하고 있다. 같은 기간 러시아 국민의 가처분소득(미 달러화 환산 기준)은 8배 증가했다. 하지만 막대한 오일달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경제 다변화나 산업 현대화에 성공하지 못했고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치자 고속 성장세는 멈췄다. 여기에 최근 저유가 직격탄을 맞고 있다. 러시아 경제는 2014년 0.6% 성장에 그쳤고 올해는 마이너스(―) 성장까지 예측되고 있다. ▽인구=소련이 해체된 1991년 1억5000만 명 정도이던 인구는 출산 기피, 남성들의 조기 사망 등으로 매년 거의 100만 명씩 줄었다. 그러다 2010년 다시 성장하기 시작해 2008년 1억4000만 명이던 인구는 현재 1억4600만 명을 웃돌고 있다.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으로 220만 명이 늘기도 했지만 경제성장에 따른 긍정적 현상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경제 전망은 다시 불투명해졌고 올해 1월 출산율은 4% 감소했다. ▽아시아 중시=푸틴은 최근 몇 년간 러시아의 에너지를 원하면서 인권 문제에는 덜 비판적인 아시아 국가들과의 군사 경제 협력에 힘써 왔다. 반면 지난해 3월 크림 반도 합병 후 서방과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서방의 경제제재에 반발해 지난해 말 흑해 해저와 서유럽을 연결하는 천연가스 운송 프로젝트 ‘사우스 스트림’ 계획을 폐기했다. 영국 가디언은 “푸틴 전임자인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은 나토와 ‘떨떠름한 협력 관계’를 유지했지만 푸틴은 완연한 반(反)나토 기조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독재와 탄압=푸틴은 3선 금지 헌법 때문에 2008년 3월 대선에 출마하지 못하자 대학 후배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총리로 물러난 뒤 대통령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늘리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2012년 다시 집권한 후 네 번째 대선 출마 가능성을 언급해 왔다. 2018년 대선에서 승리하면 2024년까지 집권이 가능하다. 1922년부터 31년간 집권한 이오시프 스탈린 전 소련 서기장을 제외하고 가장 오랫동안 러시아를 통치한 지도자가 되는 셈이다. ▽부패=푸틴의 은닉 재산은 최대 700억 달러(약 78조48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의 부패 전문 독립 언론 OCCRP는 푸틴을 ‘2014년 올해의 부패 인물’로 선정했다. 2014년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러시아의 국가 청렴도 지수는 174개국 중 136위에 그쳤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3D 프린팅 기술이 한 시각장애 임산부에게 뱃속 아이의 모습을 선물해 화제다. 미 정보기술(IT) 전문매체 씨넷은 브라질 임산부 타티아나 구에라 씨(30)가 유아용품 전문기업 하기스 브라질 지사의 도움을 얻어 뱃속 아이와 교감했다고 6일 보도했다. 17세에 시력을 잃은 구에라 씨는 현재 임신 20주차로 남자 아기를 배고 있다. 하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탓에 그간 태아의 심장 박동소리로만 자신의 아이를 느껴왔다. 평범한 임산부들이 3D 초음파로 아기의 얼굴을 미리 보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 것. 구에라 씨의 딱한 사연을 들은 하기스 측은 산부인과 의사로부터 전송 받은 초음파 이미지를 토대로 3D 프린터를 사용해 태아의 얼굴을 인쇄해 선물했다. 아이의 얼굴 위에는 ‘나는 엄마의 아들이에요’라는 글도 점자로 새겨져 있었다. 이를 건네받은 구에라 씨가 아이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도 뭉클한 감동을 선사했다. 하기스 측은 이 모든 과정을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공개했다. 동영상 속의 구에라 씨가 태아 초음파를 촬영하는 의사에게 “아기가 누구를 닮았나요?”라고 묻자 의사는 “코가 엄마를 닮았다”고 답한다. 이에 그는 “아마 아이의 코가 감자를 닮았을 것 같다”는 농담을 하며 기쁨과 설렘을 감추지 못한다. 구에라 씨에게 축복을 선사한 이번 기술은 고도의 신기술은 아니라고 씨넷은 전했다. 이미 3D 베이비즈라는 IT 업체가 예비 부모들에게 태아 얼굴을 3D 프린터로 인쇄해주는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온몸에 총알 3발을 맞고도 두 자녀를 난사범의 무차별 총격에서 구출한 한 용감한 미국 엄마의 위대한 모성애가 화제다. CNN 등 미 언론은 북부 위스콘신 주 매나샤의 32세 주부 에린 스토펠 씨가 3일 남편 조너선 스토펠 씨(33)와 세 아이들을 데리고 한 다리 위를 건너다 생각지도 못한 총격을 당했다고 5일 보도했다. 군인 출신인 히스패닉계 청년 세르히오 발렌시아 델토로(27)가 약혼녀에게 파혼 당하자 홧김에 길에서 무차별 총격을 퍼부은 것. 이번 총격으로 그의 남편 조너선 씨, 딸 올리비아 양(11), 행인 애덤 벤달 씨(31) 등 3명이 숨졌다. 에린 씨도 복부, 오른쪽 넓적다리, 왼손 등 세 군데에 총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는 이 와중에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아들 이즈라 군(7)과 딸 셀라 양(5)에게 달려갔다. 그는 두 아이를 감싸 안은 뒤 사건 현장인 다리 바깥으로 밀어내며 빨리 달려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소리쳤다. 이날 참극은 델토로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막을 내렸다. 에린 씨는 응급차량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아직 위독한 상태로 알려졌다. 미 사회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두 아이를 구해낸 에린 씨의 모성애에 찬사를 보냈다. 팀 스티카 매나샤 경찰서장은 “수차례 총에 맞았음에도 아이들을 살려낸 에린 씨의 행동은 경이로울 정도”라며 “그의 빠른 대응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현재 온라인 모금 사이트인 ‘고펀드미닷컴’(www.gofundme.com)에서는 에린 씨 가족을 돕기 위한 성금 모금이 진행되고 있다. 5일 현재 약 11만5000달러(약 1억2400만 원)가 모였다고 CNN은 전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온 몸에 총알 3발을 맞고도 두 자녀를 난사범의 무차별 총격에서 구출한 한 용감한 미국 엄마의 위대한 모성애가 화제다. CNN 등 미 언론은 북부 위스컨신 주 매너샤의 32세 주부 에린 스토펠 씨가 3일 남편 조너선 스토펠 씨(33)와 세 아이들을 데리고 한 다리 위를 건너다 생각지도 못한 총격을 당했다고 5일 보도했다. 군인 출신인 20대 히스패닉계 청년 세르히오 발렌시아 델토로 씨(27)가 약혼녀에게 파혼당하자 홧김에 길에서 무차별 총격을 퍼부은 것. 이번 총격으로 그의 남편 조너선 씨, 큰 딸 올리비아(11), 행인 애덤 벤트달 씨(31) 등 총 3명이 숨졌다. 에린도 복부, 오른쪽 넓적다리, 왼손 등 세 군데에 총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는 이 와중에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무차별 난사되는 총알을 뚫고 아들 에르자(7)와 딸 셀라(5)에게 달려갔다. 그는 두 아이를 감싸 안은 뒤 사건 현장인 다리 바깥으로 밀어내며 빨리 달려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소리쳤다. 이날 참극은 델토로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막을 내렸다. 에린은 응급차량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고 아직 위독한 상태로 알려졌다. 미 사회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두 아이를 구해낸 에린의 모성애에 찬사를 보냈다. 팀 스티카 매너샤 경찰서장은 “수차례 총에 맞았음에도 아이들을 살려낸 에린의 행동은 경이로울 정도”라며 “그의 빠른 대응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렸다”고 칭찬했다. 현재 온라인 모금 사이트인 ‘고펀드미닷컴(www.gofundme.com)’에서는 에린의 가족을 돕기 위한 성금 모금이 진행되고 있다. 5일 현재 약 11만5000달러(약 1억2400만 원)가 모였다고 CNN은 전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23세 때 탈옥한 미국 도망자가 경찰의 끈질긴 추격 끝에 56년 만에 붙잡혔다. 미 언론은 법무부 산하 연방보안관실(USMS)의 오하이오 주 지부가 1959년 9월 교정 시설을 탈출해 약 56년간 도망자로 살던 79세 노인 프랭크 프레시워터스 씨를 4일 미 남부 플로리다 주 멜버른에서 체포했다고 5일 보도했다. 1936년 오하이오 주 애크런에서 태어난 그는 1957년 7월 건널목을 건너던 24세 행인 에드워드 플린트 씨를 자신의 차로 들이받아 숨지게 했다.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된 그는 20년 형을 선고받았고 집행유예 기간 중 또 운전을 하다 발각돼 1959년 2월 악명 높은 오하이오 주립 소년원에 수감됐다. 이 곳은 팀 로빈스와 모건 프리먼이 주연한 영화 ‘쇼생크 탈출’의 배경으로 더 유명하다. 몇 달 후 경비가 덜 삼엄한 주내 다른 교도소로 옮겨진 그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1959년 9월 30일 탈옥했다. 이 때부터 윌리엄 해럴드 콕스라는 가명을 쓰며 미국 곳곳을 전전한 그는 1975년 웨스트버니지아 주에서 다시 경찰에 붙잡혔다. 그러나 아치 무어 당시 웨스트버지니아 주지사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를 오하이오 주로 돌려보내는 것을 거부하고 그를 풀어줬다. 무어 전 주지사는 올해 1월 숨져 그가 왜 프레시워터스 씨를 풀어줬는지, 당시 웨스트버지니아 경찰이 그를 어떻게 붙잡았는지 알 길이 없다고 미 언론은 전했다. 이후 트럭 운전사 등으로 일하며 40년간 은둔해 온 그가 붙잡힌 것은 올해 초 출범한 USMS 오하이오 지부의 끈질긴 노력 덕분이다. 이들은 총 1950~1970년대에 달아난 15명의 탈주범 중 한 번 경찰에 체포된 경력이 있는 프레시워터스 씨가 가장 찾기 쉬울 것으로 보고 집요하게 그의 뒤를 쫓았다. USMS 오하이오 지부는 세월이 많이 흐른 탓에 용의자 식별 사진만으로 그를 검거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USMS 플로리다 지부를 통해 몰래 그의 지문을 채취했다. 이를 그의 고향 애크런에서 수집한 과거 지문과 대조해 동일인임을 확인하고 곧바로 그를 체포했다. 프레시워터스 씨는 검거 당시 경찰이 자신의 20대 시절 사진을 내밀자 처음에는 “이 친구를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고 발뺌했다. 하지만 거듭된 추궁에 “당신들이 나를 붙잡았다”며 순순히 체포에 응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플로리다 주 브리버드 카운티 보안관 구치소에 수감 중인 그는 곧 고향인 오하이오 주 교도소로 이감될 예정이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북한이 최근 불법 입북 혐의로 억류 중이라고 밝힌 미국 거주 한국계 대학생이 한국 국적자로 확인돼 남북 간 해빙 기류에 파장을 미칠지 주목된다. 외교부는 북한이 최근 불법 입북 혐의로 조사하고 있다고 밝힌 주원문 씨(21)가 대한민국 국적자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3일 밝혔다. 주 씨가 재학 중인 뉴욕대의 존 베크먼 대변인은 뉴욕타임스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주 씨가 뉴욕대 경영학과인 ‘스턴(Stern)비즈니스스쿨’ 3학년에 재학 중”이라고 밝히고 “(그가) 이번 학기에는 강의를 듣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2일 “(주 씨가) 4월 22일 중국 단둥에서 압록강을 건너 비법(불법) 입국하다가 단속됐다”며 “해당 기관에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북한에 억류 중인 우리 국민은 주 씨를 포함해 4명으로 늘었다. 북한에는 2013년 10월에 붙잡힌 김정욱 선교사, 올해 3월 남한 ‘간첩’이라며 북한이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한 김국기, 최춘길 씨 등 4명이 억류돼 있다. 정부는 주 씨의 입북 경위 등을 파악한 뒤 대응 방안을 결정할 것으로 알려졌지만 북한에 공개적으로 석방을 요구하거나 대북 통지문을 보내는 것 외에 해법이 없는 상태다. 북한이 향후 이들을 지렛대로 삼아 한국 정부를 압박하면 남북 간 해빙 기류에도 부정적 영향이 미칠 것으로 보인다.김정안 jkim@donga.com·하정민 기자}
여성의 사회 참여를 독려한 베스트셀러 ‘린 인’의 저자로 유명한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46)의 남편인 데이비드 골드버그 서베이몽키 최고경영자(CEO·48)가 1일 급사했다고 미 언론이 3일 보도했다. 고인의 형 로버트 골드버그는 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나의 동생이자 샌드버그의 사랑받는 남편이며 멋진 두 아이의 아버지인 데이비드 골드버그가 지난 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가 어디서 어떻게 숨졌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미 언론은 골드버그가 부인 샌드버그 및 가족들과 함께 해외여행을 하던 중 숨졌으며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골드버그가 우울증을 앓아왔으며 그가 자살했다는 추측도 내놓고 있다. 샌드버그는 2일 급거 귀국했다. 1996년 샌드버그와 만나 2004년 결혼한 그는 부인의 사회활동을 적극 지원한 ‘외조의 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샌드버그는 저서 ‘린 인’에서 ‘나의 커리어와 결혼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히 엮여 있다. 2008년 1월 페이스북 합류 당시 6개월짜리 갓난아기가 있었음에도 남편이 나의 페이스북 합류를 적극 지지해줬다. 그가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의 커리어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는 나의 진정한 파트너’라고 밝히기도 했다. 1967년 미 중부 미니애폴리스에서 태어난 골드버그는 부인 샌드버그와 유대계, 하버드대 출신, IT 사업가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컨설팅회사 베인, 음반회사 캐피털 레코드와 론치 미디어, 야후의 음악 부문 부사장 등으로 일했으며 2009년 온라인 설문조사업체 서베이몽키에 합류했다.하정민기자 dew@donga.com}
프랑스의 중년 남성 배우 겸 극작가가 한국계 여성 장관 앞에서 알몸 시위를 벌였다고 프랑스 언론들이 28일 보도했다. 배우 겸 극작가 세바스티앙 티에리 씨(45)는 27일 파리 베르제르 극장에서 열린 연극상 시상식 ‘몰리에르의 밤’ 행사에서 사회자의 호명 직후 알몸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는 청중 속에 있던 플뢰르 펠르랭 문화장관(42)에게 “배우와 의상팀 등 연극 스태프는 실업 급여를 받을 수 있는데 왜 극작가는 받을 수 없느냐”고 따졌다. 심지어 그는 객석으로 내려와 장관 앞에 선 채 “극작가들의 몸이 흉하기 때문에 실업 급여를 주지 않느냐”며 “이는 공평하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티에리 씨의 돌발 행동에 펠르랭 장관은 잠시 당황했지만 시종일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은 채 4분 넘게 소신 발언을 이어갔고 펠르랭 장관 등 청중의 큰 박수를 받으면서 퇴장했다. 그의 알몸 시위는 프랑스 전역에 고스란히 TV로 중계됐다. 프랑스 연극계 종사자들의 알몸 시위는 새삼스럽지 않다. 2014년 6월에도 몇몇 배우와 연극 스태프들이 당시 문화장관이자 역시 여성인 오렐리 필리페티(42) 앞에서 알몸 시위를 벌인 바 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26일 오후 1시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 리히터 규모 6.7의 여진이 일어나자 한 임시 막사에서 아이들이 울면서 뛰어나왔다. 대부분이 이번 지진으로 부모를 잃고 구조된 아이들인데 이들은 하루에 한 번 다른 나라 긴급 구호팀이 트럭에서 던져주는 빵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 10세 안팎의 아이들은 하루아침에 소년소녀가장이 돼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있다. 물을 구하지 못한 아이들은 이틀째 손도 씻지 못하고 지진이 일어난 집 근처의 오염된 지하수를 먹고 있다. 유엔아동기금(UNICEF·유니세프)은 이날 “지진으로 인해 최소 94만 명의 네팔 아동이 인도주의적인 도움의 손길을 긴급히 요청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힘내라 네팔’ 세계 최빈국의 참사를 목격한 국제사회는 ‘힘내라 네팔’ 캠페인을 자발적으로 벌이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각국 유명인사와 일반인들의 격려가 줄을 잇고 있다. 이들은 ‘네팔을 위해 기도하자(#Pray for Nepal)’라는 해시태그(특정 내용을 편리하게 검색할 수 있는 기능)로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필리핀의 복싱 영웅 매니 파키아오는 27일 ‘네팔의 안전을 기원한다’는 글을 올렸다. 유명 팝가수 샤키라도 트위터에 기부를 해 달라고 호소했다. 국내 누리꾼들도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이제 더는 희생자가 없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힘내세요 네팔!’이라고 기원했다. 대한불교조계종은 27일 긴급재난구호봉사대를 네팔 현지에 보내기로 했다. 종정 진제 스님은 “우리 불자와 국민이 한시라도 빨리 도와야 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지진 피해 지역 주민들이 하루빨리 깊은 상처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은행 계좌가 없어도 휴대전화로 구호단체에 곧바로 기부할 수 있는 ‘캐시태그(cashtag)’도 나왔다. 미 온라인 결제업체 페이팔은 유니세프 등에 바로 기부가 가능한 ‘cash.me/$unicef’ 사이트를 만들고 송금 수수료를 면제해 주기로 했다. 비정부기구(NGO)의 대응은 민첩했다. 아동구호단체 세이브더칠드런은 지진으로 접근로가 끊기자 지진 현장 부근에 대형 창고 3곳을 마련해 잠자리 등 기본적 구호물품을 배분하고 있다. 국경 없는 의사회(MSF)도 3000개의 의료 세트를 보냈으며 아메리케어스, 핸디캡 인터내셔널(HI) 등 구호 단체도 네팔 지원에 팔을 걷고 나섰다.○ ‘네팔을 돕자’ 이번 재난 구조에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반목하던 미국과 러시아도 한뜻으로 동참했다. 참가국 간의 대립과 분쟁도 일시에 멈췄다. 미국은 26일 버지니아 주에 있는 긴급 재난구호팀 등 70명과 45t의 원조물자를 실은 군용기를 보냈다. 러시아도 26일 지진 구조 활동 경험이 풍부한 90명의 구조대원과 구조 장비 등을 태운 수송기 2대를 우선 보내기로 했다.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UAE)도 구조대를 보냈다. 중국도 26일 오전 구조대원 등 62명을 구조 현장에 보내 지진 발생 24시간 이내에 구조작업에 들어갔다. 중국을 견제해 왔던 인도도 26일 공군 비행기에 구호물품 43t과 구조대원 200명을 긴급 파견했다. 유럽위원회는 300만 유로를 긴급 구호 자금으로 내놓겠다고 밝혔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긴급 구호자금 5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주교회의 산하 해외원조기구인 한국 카리타스도 특별 모금에 나서기로 했다. 개신교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도 모금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유엔에 따르면 26일 현재 15개의 국제 구조 및 수색팀과 14개 의료 지원팀이 네팔로 향하고 있다.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 하정민 기자}
“구조 헬기가 빨리 도착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이 에베레스트 산에서 죽을 겁니다. 부상자가 많고 부상 정도도 매우 심각합니다.” 26일 루마니아 산악인 알렉산드루 거반 씨는 네팔 지진 여파로 히말라야 등정로 일대도 아수라장으로 변했다며 다급한 목소리로 구조를 요청했다. 세계 각국 탐험가들이 찾는 최고봉 에베레스트 산에서는 베이스캠프 인근에서 25일부터 대규모 눈사태가 일어나 최소 17명이 숨지고 61명이 다친 것으로 파악됐다. 또 수백 명이 고립됐다고 로이터통신 등 주요 외신이 보도했다. 이는 지난해 4월 눈사태로 네팔인 가이드 16명이 죽은 것을 뛰어넘는 최악의 참사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는 탐험가들이 등반 계획과 몸 상태를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고봉 등정의 첫 번째 관문이다. 네팔 정부는 25일 지진 당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인근에만 등반객과 현지인 안내원(셰르파) 등이 최소 1000명 있었고 이 중 400여 명이 외국인이었다고 밝혔다. 특히 이번 지진은 히말라야 등반 시즌이 시작되는 시점에 발생해 관광객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현지에 있던 네덜란드 산악인 에릭 아르놀트 씨는 “갑작스러운 굉음에 놀라 텐트 문을 열었더니 어마어마한 크기의 눈이 세 갈래로 무너져 내려와 죽기 살기로 도망쳤다”고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중국 신징보도 26일 지진 당시 히말라야 남쪽을 통해 등반 중이던 여성 등반대가 눈사태로 고립됐으며 다수가 부상했다고 보도했다. 한 여성 대원은 40여 명이 고립돼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며 부상한 대원이 누워 있는 사진을 보내기도 했다. 숨진 외국인들은 눈사태 직후 산꼭대기에서 쏟아진 바위와 얼음 조각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긴급 의료 지원을 받지 못했다고 현지인들은 전했다. 히말라야에서 숨진 사람 중에는 구글의 고위 임원인 댄 프레딘버그 씨(33)도 포함됐다. 여동생 메건 씨는 26일 “오빠가 구글 직원 3명과 함께 약 20일간 에베레스트를 트레킹 중이었으며 이번 산사태로 머리를 크게 다쳐 숨졌다”고 밝혔다. 다른 직원들은 무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레딘버그 씨는 2007년 구글에 입사해 무인 자동차와 구글 글라스 등을 개발하는 혁신 연구소인 ‘구글X’의 개인정보 담당 이사를 지냈다. 그는 ‘구글의 길 찾기 서비스인 구글 스트리트뷰를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와 같은 오지로도 확대하겠다’는 꿈을 안고 사내 벤처인 구글 어드벤처를 공동 창립하기도 했다. 지구 온난화를 경고하는 ‘세이브 디 아이스’ 운동 출범에도 관여했다. 그는 또 ‘시카고 PD’ ‘원 트리 힐’ 등 미 인기 드라마의 여주인공으로 활약한 인기 여배우 소피아 부시(33)의 전 남자친구로도 유명하다. 2013년 1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약 1년간 그와 교제한 부시는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한 직후 자신의 트위터에 ‘지금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고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은 슬픔만 느낀다’라고 추모했다. 구글은 프레딘버그 씨의 사망 사실을 공식 확인하고 구호 성금으로 100만 달러(약 10억9000만 원)를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지진이 일어난 에베레스트 산기슭은 눈보라 때문에 헬기 이착륙도 쉽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기상 상태 악화와 의료 자원 부족에다 사상자 파악도 난항을 겪고 있어 사망자가 몇 명인지, 고립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를 정확히 알기 힘든 상태다. 설상가상으로 26일 오후 1시경엔 규모 6.7의 강력한 여진이 카트만두 동북쪽에서 발생해 에베레스트 산 주변에서도 다시 눈사태가 일어났다고 산악인들이 전했다. 인도 산악인인 아르준 바이파이 씨는 에베레스트 인근 마칼루 베이스캠프에서 통화하던 도중 “오 제길, 또 다른 눈사태가 발생했다”고 소리를 질렀고 전화기 너머로 비명소리와 눈사태가 밀려드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현지 전문가들은 히말라야에서 숨진 사람도 갈수록 늘어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도 카트만두에 더 큰 지진 피해가 발생한 까닭에 네팔 당국이 히말라야 피해자까지 구조할 여력이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히말라야에서 숨진 사람들의 시신을 실어 나르기 위한 첫 헬리콥터도 26일 아침에야 간신히 출발했다. 히말라야 중부의 안나푸르나 봉을 오르던 한국 등반팀 등 한국인 전문 산악인 20여 명도 눈사태를 만나 급하게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대한산악연맹 관계자는 26일 “눈사태 이후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있던 산악대원 한 명에게서 ‘모두 무사하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전했다. 연맹에 따르면 현재 히말라야에서 고봉 등정을 준비하는 국내 원정대는 장헌무 대장이 이끄는 구미산악연맹 등 모두 3개 팀이다. 한편 네팔 대지진과 비슷한 시기에 중국 시짱(西藏·티베트), 대만, 칠레 등 세계 각국에서 강도 높은 지진이 일어나 대지진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25일 오후 5시경 시짱 르카쩌(日喀則) 지역에서 리히터 규모 5.9의 지진이, 26일 오전 4시경에는 대만 동부 화롄 현 앞바다에서 규모 5.6의 지진이 발생했다. 이에 앞서 22일에는 칠레 남부 칼부코 화산이 1972년 이후 43년 만에 폭발해 인근 주민 1500명이 긴급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세계 최고 수준인 서울의 대중교통 시스템에 반했습니다. 차가 없어도 불편하지 않을 것 같네요.” 2월 초에 부임한 에릭 월시 신임 주한 캐나다 대사(43)가 14일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주한 캐나다 대사관저에서 동아일보와 첫 언론 인터뷰를 가졌다. 월시 대사는 주로 고급 외제차를 관용차로 타는 많은 다른 나라 대사들과 달리 국산 중형차인 2000cc 쏘나타를 택했다. 그는 “세계 곳곳에서 살아봤지만 서울처럼 대중교통 시스템이 완벽한 곳은 없다”며 “직접 운전할 일도 많지 않아 굳이 큰 차가 필요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는 캐나다 최대 도시 토론토 출신으로 명문 맥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1995년 캐나다 외교통상부에 들어가 동아시아국 과장, 독일 부대사 등을 지냈다. 월시 대사는 “부임한 지 한 달 만에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 사건이 발생하고 북핵 문제도 상존해 캐나다에 계신 부모님이 다소 걱정을 하셨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전혀 불안감을 느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영연방 국가인 캐나다의 국가원수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다. 월시 대사는 “한국과 캐나다는 여성 국가수반이라는 공통점 외에 겨울스포츠 강국, 겨울올림픽 개최국 등 비슷한 점이 많다”며 “대사 임명장을 받기 위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과 겨울올림픽에 관해 많은 얘기를 나눴다”고 밝혔다. 그는 평창 겨울올림픽 개최를 비용이나 효율성 측면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투자의 개념으로 접근했으면 한다고 조심스레 조언했다. 이어 “이미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의 강자인 한국이 더 많은 겨울스포츠 종목에서 우수한 선수를 키워낼 수 있는 기회가 아니겠느냐”며 “‘제2의 김연아’를 발굴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월시 대사는 외교통상부 동아시아국 과장으로 재직하던 2008년 1월 북한을 며칠간 방문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수많은 고층빌딩 등 평양의 겉모습은 생각보다 화려했지만 사람들의 표정이 무척 경직되고 어두워 보여 안타까웠다”며 “한국 대사로 재직하는 동안 다시 북한을 다시 방문해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모국어인 영어와 프랑스어 외에 독일어 헝가리어 루마니아어 폴란드어 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그는 최근 한글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 대학생 때 한국인 친구로부터 김치를 접한 후 김치 맛에 매료됐다는 월시 대사는 “토론토에도 많은 한국인이 살아 한국문화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와서 살아 보니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다”며 “사람들이 서울을 떠올릴 때 흔히 연상하는 케이팝이나 화려한 밤 문화보다 고궁, 성곽길 등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더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세계 최고 수준인 서울의 대중교통 시스템에 반했습니다. 차가 없어도 불편하지 않을 것 같네요.” 2월 초 부임한 에릭 월시 신임 주한 캐나다 대사(43)가 13일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주한 캐나다 대사관저에서 동아일보와 첫 언론 인터뷰를 가졌다. 월시 대사는 주로 고급 외제차를 관용차로 타는 많은 다른 나라 대사들과 달리 국산 중형차인 2000cc 소나타를 택했다. 그는 “세계 곳곳에서 살아봤지만 서울처럼 대중교통 시스템이 완벽한 곳이 없다”며 “직접 운전할 일도 많지 않아 굳이 큰 차가 필요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는 캐나다 최대 도시 토론토 출신으로 명문 맥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1995년 캐나다 외교통상부에 들어가 동아시아국 과장, 독일 부대사 등을 지냈다. 월시 대사는 “부임한 지 한 달 만에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 사건이 발생하고 북핵 문제도 상존해 캐나다에 계신 부모님이 다소 걱정을 하셨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전혀 불안감을 느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영연방 국가인 캐나다의 국가원수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다. 월시 대사는 “한국과 캐나다는 여성 국가수반이라는 공통점 외에 동계스포츠 강국, 동계올림픽 개최국 등 비슷한 점이 많다”며 “대사 임명장을 받기 위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과 동계올림픽에 관해 많은 얘기를 나눴다”고 밝혔다. 그는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를 비용이나 효율성 측면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투자의 개념으로 접근했으면 한다고 조심스레 조언했다. 이어 “이미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의 강자인 한국이 더 많은 동계스포츠 종목에서 우수한 선수를 키워낼 수 있는 기회가 아니겠느냐”며 “‘제 2의 김연아’를 발굴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월시 대사는 외교통상부 동아시아국 과장으로 재직하던 2008년 1월 북한을 며칠 간 방문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수많은 고층 빌딩 등 평양의 겉모습은 생각보다 화려했지만 사람들의 표정이 무척 경직되고 어두워 보여 안타까웠다”며 “한국 대사로 재직하는 동안 다시 북한을 다시 방문해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모국어인 영어와 프랑스어 외에 독일어, 헝가리어, 루마니아어, 폴란드어 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그는 최근 한글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 대학생 때 한국인 친구로부터 김치를 접한 후 김치 맛에 매료됐다는 월시 대사는 “토론토에도 많은 한국인이 살아 한국 문화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와서 살아보니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다”며 “사람들이 서울을 떠올릴 때 흔히 연상하는 K-POP이나 화려한 밤 문화보다 고궁, 성곽길 등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더 매력적”이라고 말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지난달 초 박근혜 대통령의 중동 방문 후 “대한민국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한번 해보세요. 다 어디 갔느냐고, 다 중동 갔다고”라고까지 말하며 ‘제2의 중동 붐’을 말하자 오히려 청년들은 ‘니(네)가 가라, 중동’이란 말을 유행시키며 냉소했다. 그렇지 않아도 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주택 구입을 포기한 소위 ‘5포 세대’에게 뜬금없는 청년고용정책을 내놓아 화를 돋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중동은 기회의 땅일까. 마침 기자는 최근 시리아 난민 지원 국제회의가 있었던 쿠웨이트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대통령의 첫 순방지였던 쿠웨이트를 찾은 김에 1970년대 중동 특수를 경험하고 지금도 현지에 살고 있는 분으로부터 ‘중동의 현재’를 알아보고 싶었다. 》 물어물어 만난 사람은 중동에 약 30년간 거주하며 본인 스스로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호텔 아파트 공장 등을 지었다는 이병옥 전 한양 사우디아라비아 지사장(67). 그는 쿠웨이트(1978∼1981년)를 필두로 사우디아라비아(1981∼1986년), 나이지리아 보츠와나 남아프리카공화국(1987∼1989년), 한국(1990∼1995년), 다시 쿠웨이트(1996년∼현재) 등 세계 곳곳의 건설 현장을 누빈 중동 붐의 주역이자 한국 건설업계의 산증인이다.중동에서 바친 건설인생 40년 2일 쿠웨이트시티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반갑게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엔 한양이 1978년 10월 완공한 쿠웨이트시티의 5성급 셰러턴(쉐라톤)호텔 앞에 선 37년 전의 그가 있었다. 그는 사진 속 호텔을 가리키며 “섭씨 55도를 넘나드는 혹서(酷暑)보다 가난이 더 무서워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며 지은 자식 같은 호텔”이라고 말했다. 1973년 한양주택개발로 출발한 한양은 1976년 해외 건설사업에 뛰어들었다. 같은 해 홍익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젊은 건축학도 이 전 지사장도 한양에 입사했다. 중동 건설 붐에 힘입어 한양은 곧 국내 10위권 건설사로 성장했고 그의 건설 인생 40년도 시작됐다. ―왜 하필 중동이었나. “내가 영화 ‘국제시장’ 세대다. 경남 함안이 고향인데 1949년 천연두와 콜레라가 유행했다. 동네 아이 12명 중 나만 빼고 다 죽었다. 바로 1년 뒤에 6·25가 터졌다. 영화가 묘사한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시절이었다. 내 초봉이 10만 원이었다. 중동에 가면 20만 원을 준다길래 아내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냉큼 지원했다. 첫 발령지가 쿠웨이트였는데 어디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다. 그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의 소감은…. “1978년 4월이었는데 비행기 트랩을 내려올 때 느낀 열기와 습기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수도 쿠웨이트시티는 1년 평균 기온이 섭씨 46도로 세계에서 가장 더운 도시다. 4월부터 10월까지는 낮에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다. 6∼8월에는 섭씨 50도가 기본이다. 요즘이야 에어컨이 있어서 건물 안에 들어가 있으면 더위도 잘 못 느끼지만 그때만 해도 잠시 세워둔 차 시동을 걸려다 뜨거운 운전대에 화상을 입을 정도였다. 한낮을 피해 오전 4시부터 오후 1시까지만 일하고 남은 일은 밤에 다시 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열기를 식힌다고 사방에 분무기를 틀어 습도가 말도 못했다. 도착한 지 며칠 만에 온몸이 땀띠로 뒤덮였다. 변변한 약도 없는데 땀띠는 갈수록 심해지고 가렵다고 긁으면 피딱지가 앉고….” 그가 목이 마른 듯 냉수 한 잔을 들이켰다.50도 폭염속 12시간씩 땀 흘려 ―더위 외에 힘든 점은 없었나. “내가 구조역학(구조물에 외부의 힘이 작용할 때 내부가 어떻게 변형되는지 연구하는 학문) 전문가다. 내가 배운 모든 지식은 일본공업규격(JIS) 기준이었다. 쿠웨이트가 영국 식민지였던 탓에 여기 오니 무조건 영국공업규격(BS)에 맞춰야 했다. 일본식에 익숙한 내게 영국식은 외계어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자재, 자재의 규격과 강도, 공정 방식, 인건비 계산법이 완전히 달랐다. 기존 지식으로는 공사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하니 힘들었다. 할 수 없이 밤이고 낮이고 BS 규정집을 끼고 살았다. 영국 단기 연수까지 다녀왔다. 당시 영국서 만난 아일랜드인이 한 말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코리아에서 왔다고?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인가? 그런데 얼굴은 흑인이 아니네.’” 그의 말이 이어졌다. “현장에서 만난 한국인 근로자들끼리의 마찰도 견디기 힘들었다. 소위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대립이 심했다. 갓 서른이던 내가 감독을 하며 간섭을 하니 어느 날은 오십 줄에 들어선 건장한 체격의 십장(什長)이 대형 쇠망치를 들고 덤비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건방지게 굴어? 너 이 자식 죽여 버린다’며 씩씩거리더라.” ―그 거친 현장을 어떻게 제압했나.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허가가 나지 않으니 인부들도 나중엔 별 수 없었다. 규정을 달달 외우고 있으니 나만 한 전문가가 없었다. 점차 시간이 지나자 나를 ‘박사’라고 부르면서 ‘이 박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아무 탈이 없어서 좋다’고 했다. 어떤 의미에선 그만큼 순수한 사람들이었다.” ―한국에는 자주 다녀갔나. “요즘 건설 회사들은 해외 근무자의 경우 4개월마다 한 번씩 2주간 휴가를 준다. 우리 때는 2년에 한 번씩 들어와 1주일 있다 간 게 고작이었다. 37세, 35세, 30세 된 딸 셋이 있는데 아버지 노릇을 전혀 못했다. 태어날 때에도 곁에 있어주지 못하고 같이 놀아준 적도 없다. 맏이와 둘째가 제일 심했는데 오죽하면 집에 올 때마다 둘이서 나를 보고 ‘아저씨 누구세요?’라고 물었겠나. 한번은 오랜만에 집에 와서 아내와 함께 잠들었는데 아이 울음소리에 깼다. 첫째와 둘째가 안방 문 앞에서 펑펑 울고 있는 게 아닌가. 항상 저희 둘이서 엄마와 잤는데 갑자기 이상한 아저씨가 들이닥쳐 엄마를 뺏어가니 무섭고 화가 났던 거였다(웃음). 지금이야 이렇게 웃으면서 말하지만 당시에 내 가슴은 미어졌다.” 뛰어난 의료-교육-교통 인프라 그는 더이상 가족과 떨어져 살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걸프전이 발발한 1990년 귀국한다. 하지만 5년 만에 쿠웨이트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와 재벌 회장 집을 여러 채 지었다. 돈도 제법 벌었는데 재미가 없었다. 쿠웨이트가 그리워졌다.” 그가 회상에 잠긴 듯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국의 건설업은 접대나 뇌물 없이는 일이 안 됐다. 쿠웨이트 사람들은 ‘인샬라(신의 뜻대로)’를 입에 달고 살고 행동도 느려 터졌지만 그런 걸로 괴롭히지는 않았다. 한국에서는 ‘일’만으로는 승부가 나지 않았다. 여자 나오는 술집에서 흥청망청 노는 것도 한두 번이지 몇 번 되풀이되자 진절머리가 났다. 결국 가족을 설득해 모두 데리고 쿠웨이트로 돌아와 현지 건설업체에 취직했다.” 이 대목에서 그에게 “아무리 쿠웨이트가 산유 부국이라 해도 의료, 교육, 교통 같은 사회 인프라가 한국만 못하지 않은가”라고 묻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여기 기름값이 1L에 200원이다. 농수산물 가격도 싸다. 한국에서는 1만 원으로 장을 보면 사과 한 개, 감자 몇 알로 끝이지만 여기선 각종 채소와 과일을 수북하게 담을 수 있다. 의료 서비스도 좋다. 나와 아내의 보험료가 1년에 100디나르(약 37만5000원) 정도인데 이 돈만 내면 사실상 무상의료다. 몇 년 전 아내가 유방암과 담석증 수술을 받았는데 추가 비용이 전혀 없었고 경과도 훌륭하다. 술과 유흥을 엄격히 금지하는 아랍문화의 특성상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특히 열한 살 때 이곳으로 데려온 막내에게 첫째와 둘째에게 해주지 못한 아버지 노릇을 실컷 할 수 있었다. 막내가 이탈리아 로마대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수업 중 ‘가장 존경하는 건축가’를 말하라고 해서 ‘한국과 쿠웨이트를 발전시킨 아버지’라고 답했다는 말을 듣고 그만하면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한국인 대부분 감독-행정업무 ―대통령이 방문하고 돌아간 뒤 청년들에게 ‘중동행’을 권했다. 정말 중동은 기회의 땅인가. “물론이다. 중동은 내가 처음 온 1970년대에도 지금도 변함없는 기회의 땅이다. 당장 쿠웨이트만 봐도 최근 몇 년간 신도시, 정유공장, 철도, 지하철 건설 등 대형 공사가 속속 발주되었고, 앞으로도 발주될 예정이다. 공사 규모도 기본 10억 달러(약 1조1000억 원) 이상이다. 게다가 이곳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한국인과 한국 건설업체에 대한 인식이 매우 좋다. ‘불타는 한여름에 움직이는 건 한국인과 도마뱀 뿐’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나 같은 건설업계 관계자들만이 아니다. 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를 지낸 고 김정기 전 대사가 누님 시동생이다. 사돈이기 전에 부산고 선배여서 사돈이 되기 전부터 각별하게 지냈다. 이분이 2000년 초 예멘에 출장을 갔다가 바이러스에 감염돼 1년 넘게 투병하다 2001년 6월 뇌척수막염으로 돌아가셨다. 생전의 김 전 대사가 ‘한국이 지금보다 더 잘사는 나라가 되려면 더 많은 사람이 중동에 와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게 잊히지 않는다.” ―젊은 세대들은 힘든 중동에 우리가 왜 가야 하느냐고 말한다. “요즘 한국인들은 대부분 감독이나 행정 일을 한다. 업무 여건이 내가 일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좋아졌다. 우리와 선배 세대가 만들어놓은 거지만 한국에 대한 인식도 매우 좋다. 코리안이라고 하면 모두 환대한다. 남의 말만 듣고 지레 안 된다고 생각하거나 겁먹지 말고 일단 한번 나와서 직접 판단해 보라고 조언하고 싶다. 나를 ‘꼰대’라 불러도 할 수 없지만 이제 자식 세대들로부터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저희가 중동의 발전을 이어가겠습니다’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듣고 싶다.”쿠웨이트시티=하정민 기자 dew@donga.com}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냉대, 존 F 케네디는 단교(斷交), 빌 클린턴은 악수…. 11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역대 미국 대통령과 쿠바 정상의 인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번 회담 전에 미-쿠바 정상이 마지막으로 회담을 가진 것은 59년 전인 1956년 7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쿠바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 대통령 간 회담이었다. 당시 회담 장소 역시 이번과 마찬가지로 파나마였으며 회담 계기 또한 이번과 똑같은 미주기구(OAS) 정상회의 참석이었다. 1948년 창설된 OAS에는 현재 북미와 남미 대륙의 35개 국가가 가입해 있다. 쿠바는 미국과의 단교로 1962년부터 2008년까지 OAS 회원국 자격을 박탈당했다가 2009년 이를 회복했다. 이후 쿠바 정상이 OAS에 참석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활약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아이젠하워는 1959년 1월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3개월 후 미국을 방문해 경제 지원을 요청하자 그를 아예 만나려 하지도 않았다. 카스트로 방미 기간에 남부 조지아 주로 골프를 치러 가면서 리처드 닉슨 당시 부통령을 대신 내보낸 것. 이에 발끈한 카스트로 전 의장은 쿠바로 귀국하자마자 미국 기업들이 보유한 쿠바 내 토지를 전부 몰수했다. 이에 맞서 미국도 쿠바산 설탕 수입을 대폭 축소하면서 양국 관계는 악화 일로로 치닫기 시작한다. 카스트로 전 의장이 1960년 9월 미 뉴욕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격하게 포옹하고 장시간 대화를 나눈 것도 미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아이젠하워의 후임자였던 케네디 전 대통령은 1961년 1월 쿠바와 아예 국교를 단절했다. 케네디는 3개월 후 카스트로 정권의 전복까지 시도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이 훈련시킨 쿠바 망명자 1500여 명을 쿠바에 침투시킨 것. 하지만 사흘 만에 100여 명의 사상자가 났고 나머지 사람들은 포로로 붙잡혔다. 미 정부는 같은 해 12월 몸값으로만 5300만 달러(약 578억 원)를 지불한 끝에 이들을 돌려받았다. 미국 역사에 치욕으로 남은 ‘피그스 만(Bay of Pigs) 침공 사건’이었다. 분노한 케네디는 1962년 1월 쿠바에 대한 전면 금수조치를 단행했다. 이후 40년 가까이 닫혔던 두 나라의 관계가 잠시나마 훈풍 기미가 보였던 때는 2000년 9월. 퇴임을 앞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유엔 회의 참석차 뉴욕을 방문한 카스트로 전 의장과 잠시 대화를 갖고 악수를 나눈 것이다. 이어 2008년 2월 형 피델로부터 정권을 물려받은 라울 카스트로 현 의장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 직후인 2009년 초 “미국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말해 관계 개선을 예고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2013년 12월 두 정상은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추모식장에서 처음 만나 악수를 나눴다. 한편 2011년 3월에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쿠바 수도 아바나를 방문해 라울 및 피델 카스트로 형제와 만나기도 했다. 그는 당시 간첩 혐의로 쿠바 감옥에 갇혀 있던 미국인 앨런 그로스 씨의 석방을 촉구했고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쿠바와의 관계 정상화를 선언한 뒤 그로스 씨는 석방됐다. 그로부터 4개월 후 양국 정상은 역사적 만남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12일(현지 시간) 리비아 트리폴리 주재 한국대사관에 가해진 무장괴한들의 공격은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소행으로 추정된다. 전방위로 펼쳐지는 IS의 테러에서 한국 해외 공관들도 안전하지 못함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낳고 있다. 5년째 내전 중인 리비아의 혼란스러운 정세를 고려할 때 다른 무장조직의 소행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IS가 리비아에서 최근 벌어진 주요 외국 공관 공격의 배후를 자처했다는 점에서 이번 공격도 일단 IS가 벌였을 공산이 가장 크다. 범인들은 현재까지 ‘IS 리비아 지부’ 소속으로 추정된다. 리비아는 올 들어 IS가 본거지인 이라크와 시리아를 벗어나 본격적인 세력 확산을 처음 시도한 곳이다. 12일 미국 언론들은 ‘IS 리비아 지부’가 처음 등장한 것이 지난해 10월경이라고 보도했다.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무려 1700여 무장 조직들이 난립하는 장기 내전상태로 빠져든 혼란을 틈타 IS의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리비아 내 무장조직 몇 곳이 세력을 규합해 지난해 10월 5일 동부 데르나 시내를 행진하면서 자신들을 ‘IS 리비아 지부’라고 주장한 것이 시초라는 것이다. AP통신에 따르면 현재 리비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IS 대원들은 1000∼3000명에 달한다. 이들이 IS를 추종하게 된 것은 지난해 초 시리아의 IS 핵심 인사가 리비아를 방문해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포섭한 뒤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IS 리비아 지부는 동부(바르까 지역) 남부(페잔 지역) 남서부(트리폴리 지역) 지부 등 크게 3개로 나뉜다. 초기에는 동부 지부가 우세했지만 최근엔 트리폴리 지부가 부쩍 세력을 넓히고 있다. 실제 IS 트리폴리 지부는 지난해 11월 트리폴리 주재 이집트와 아랍에미리트(UAE) 대사관을 잇달아 공격했다. 1월에는 트리폴리 5성급 호텔에서 자살폭탄 테러를 벌여 외국인 10명을 죽이기도 했다. 미군은 아직 초기 단계이지만 동부 IS 훈련소에서 200여 명이 군사훈련을 받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번에 한국대사관을 공격한 주체는 트리폴리 지부로 추정된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큰 의문점은 왜 이들이 한국대사관을 공격했느냐 하는 점이다. 우선 이번 공격은 기존 외국 공관 공격과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지난해 11월 이집트와 UAE 대사관이나 2월 말 이란대사관 테러는 차량 폭탄 공격 또는 급조폭발물(IED)을 공관 옆에 심어 폭발시키는 방식이었다. 건물 자체를 붕괴시켜 대형 인명 피해를 노린 셈이다. 그러나 이번 한국대사관에 대한 공격은 무장 괴한들이 차를 타고 가면서 40여 발의 총알을 난사하는 방식이었다. 건물보다는 사람을 겨냥해 조준 사격하는 방식에 가까워 외벽을 제외한 대사관 내부 피해가 없었다. 우리 외교관 2명과 행정원 1명도 별채에 머물고 있어 피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총격을 가한 시점이 현지 시간으로 오전 1시 20분경으로 한밤중이었다는 점도 특이하다. 이는 한국 외교관들을 겨냥했다기보다 대사관 경비 담당 경찰관들을 표적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을 가능케 한다. IS는 그동안 경찰이나 군인 등 공권력을 공격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번 공격이 한국을 겨냥한 것이냐는 질문에 “예단하기는 힘들지만 리비아 경찰을 대상으로 공격한 것일 수도 있다. 트위터 글에서 한국에 대한 적개심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면서 “총격 시점에 길거리에 나와 있는 경비들이 한국대사관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며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다른 대사관 공격을 주장한 트위터 글과 이번 한국대사관 공격을 주장한 글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IS는 UAE, 이란 대사관을 폭탄테러 한 뒤에는 트위터에 “칼리파(이슬람 최고지도자를 일컫는 호칭)의 전사가 대사관을 공격했다”고 해 공격 목표가 한 국가를 대표하는 대사관임을 명시했다. 그러나 이번엔 “칼리파의 병사가 한국대사관의 경비대원 2명을 제거했다”라고 밝혀 이들의 목표가 한국대사관이었는지 경비 담당 경찰관들이었는지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한국은 UAE 이집트 이란과 달리 IS 격퇴작전에 참가한 나라는 아니지만 1월 시리아에서 벌어진 일본인 고토 겐지 씨 참수 사건 때처럼 중동에서 보기 드문 동양권 국가나 국민을 공격함으로써 홍보 효과를 극대화시키겠다는 IS의 전략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골드만삭스가 미국 정치의 중심으로 복귀했다.”(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 2016년 미국 대선이 다가오면서 주요국 언론들이 수익과 영향력 면에서 세계 최고 투자은행으로 꼽히는 골드만삭스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이 회사의 위력은 일반인의 예상보다 크지만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대선 주자들은 이 회사의 영향력을 알고 있다. 공화당 주요 대선 주자인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는 지난달 초 뉴욕에서 지지를 호소할 때 골드만 자선재단을 정치행사 주관 단체로 택했다. 그의 대항마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민주) 등을 견제하려는 포석이라는 말이 나왔다. 클린턴 전 장관은 골드만삭스 출신의 사위를 두고 있다. 다른 대권 경쟁자인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아내가,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는 형이 이 회사 출신이다. 미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힐러리 전 장관과 부시 전 주지사가 대선 후보로 뽑히려면 당내 경선이 아닌 골드만삭스 경선부터 통과해야 한다”고 짚기도 했다. 골드만삭스가 어떤 후보를 지원할지가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라는 것이다. 이 회사의 전현직 고위 임원들은 ‘거번먼트 삭스(government sachs·골드만삭스 정부)’란 신조어를 낳을 정도로 미 정재계 요직을 차지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일개 민간 금융사에 왜 ‘정부’란 별칭이 붙었는지 논란이 일 법도 하지만 이 회사를 거친 인물 면면을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회사는 헨리 폴슨, 로버트 루빈, 헨리 파울러 등 미 재무장관만 3명을 배출했다. 현 유럽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와 마크 카니 영국중앙은행 총재도 이 회사 출신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골드만삭스 인맥이 존재한다’는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의 평가가 과장이 아니다. 리먼브러더스, 베어스턴스, 씨티그룹 등 세계 금융위기 당시 직격탄을 맞은 다른 금융사들이 사라지거나 쇠퇴했지만 골드만삭스는 오히려 매년 사상 최고 순익을 경신하고 있다. 골드만삭스의 2014년 순이익은 84억8000만 달러(약 9조3280억 원). 골드만보다 자산 규모가 2배 이상 많은 미 2위 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BoA)가 같은 기간 절반 수준인 48억3000만 달러의 이익을 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다. 골드만삭스의 전설 존 화이트헤드 창업자 마커스 골드만은 독일계 유대인이다. 1848년 미국으로 건너온 그는 1869년 뉴욕 맨해튼에 ‘마커스 골드만’이란 작은 간판을 걸고 유대인을 상대로 어음 장사를 했다. 사업이 제법 번창하자 사위 새뮤얼 삭스까지 불러 동업을 했다. 당시 골드만삭스의 모습에서 오늘날 금융제국(帝國)을 떠올리긴 힘들다. JP모건, 뱅크오브 뉴욕멜런 등 앵글로색슨 백인 신교도(WASP)계 대형 금융사가 넘쳐나는 월가에서 영어도 서툴고 꾀죄죄한 행색의 골드만 사람들은 주목받지 못했다. 골드만삭스는 설립 70여 년이 지난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도 전 직원이 300명 미만의 소형 회사였고 수익 모델도 주식과 채권 거래 등이 고작이었다. 이런 골드만삭스의 변신을 주도한 사람이 존 화이트헤드 전 회장(1922∼2015)이었다. 골드만삭스는 그가 입사한 1947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회사로 탈바꿈했다는 평을 얻는다. 그는 1984년 퇴직할 때까지 37년간 근무하며 기업 인수합병(M&A) 중개 및 기업공개(IPO) 주관이라는 지금의 골드만삭스 수익 모델을 만들어 냈다. 2014년 말 기준 직원 3만3000여 명, 자산 1조270억 달러(약 1129조7000억 원)의 금융 공룡으로 부상할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화이트헤드의 퇴직 후 모습도 모범적이었다. 1985∼1989년 로널드 레이건 정권에서 국무차관을 지낸 그는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 등 동유럽 지도자와 자주 만나며 물밑에서 동유럽의 개혁 개방을 도왔다. 2001년 9·11테러 직후에는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진 지역에 프리덤타워 등을 짓는 일을 주도한 로어맨해튼개발공사(LMDC) 회장을 지냈다. 당시 이미 80대인 그가 200회가 넘는 복구 계획 수립을 위한 청문회를 진행하고, 유가족 관료 지역주민 기부자 등과 수시로 만나 복구 작업을 지휘하자 미국 곳곳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올해 2월 그가 타계하자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 등 미국 지도층이 “국가를 위한 그의 업적과 헌신에 깊은 공경을 표한다”며 애도했다.골드만 인맥의 대부 로버트 루빈 골드만삭스 임원이 퇴직 후 행정부 고위인사로 변신하는 것을 ‘골드만-워싱턴 셔틀(The Goldman to Washington Shuttle)’이라 부른다. 이 변신의 성공 방식을 굳힌 인물은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77)이다. 골드만삭스 회장 출신인 그는 1995∼1999년 미 경제 사령탑으로 활동하며 빌 클린턴 정권 8년간의 유례없는 경제 호황을 주도해 ‘역대 최고의 재상(宰相)’이란 찬사를 들었다. 그가 주도한 강한 달러와 재정적자 축소 정책은 골디락스(goldilocks·높은 경제 성장과 물가 안정이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 경제로 이어졌다. 당시만 해도 성장률과 물가는 비례한다는 것이 정설이었기에 ‘고성장-저물가’의 조합에 세계적 경제학자들도 크게 놀랐다. 당시 미 정부의 경제정책을 대통령이 아닌 그의 이름을 딴 ‘루비노믹스(Rubinomics)’로 부르는 것만 봐도 루빈의 위상과 입지를 알 수 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을 포함한 미 최고 권력자들에게 ‘골드만 출신들은 똑똑하고 일도 끝내주게 잘하니 반드시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인상을 남긴 것은 누가 뭐래도 루빈의 공이 크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클린턴 정권의 게리 젠슬러 재무차관 등 똑똑한 골드만 후배들을 직접 워싱턴으로 데려와 골드만 커넥션의 기틀을 완성했다. 버락 오바마 정권의 초대 재무장관 티머시 가이트너는 골드만삭스 근무 경험이 없는데도 골드만 인맥으로 분류된다. 이 역시 루빈과 깊은 관련이 있다. 루빈은 1995년 재무장관이 되자마자 34세의 초짜 관료 가이트너를 재무차관보로 전격 발탁했다. 하버드대 출신인 가이트너의 후원자를 자처한 래리 서머스 전 하버드대 총장의 천거가 있었지만 인재를 알아보고 과감히 기용하는 루빈의 안목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깜짝 인사였다. 루빈 밑에서 차근차근 실무를 익힌 가이트너는 이후 승승장구하며 재무장관에 올랐다. 이로 인해 오바마 정권의 경제정책 또한 루비노믹스를 충실히 계승했다는 평을 듣는다. 골드만삭스를 향한 백악관의 구애는 공화당 정권에서도 뜨거웠다. 헨리 폴슨 재무장관, 조슈아 볼턴 백악관 비서실장, 로버트 졸릭 국무차관 겸 세계은행 총재, 스티븐 프리드먼 국가경제위원회(NEC) 의장, 존 코자인 뉴저지 주지사, 루번 제프리 국무차관, 로버트 스틸 재무차관보 등 조지 W 부시 정권의 핵심 관료가 모두 골드만 출신이다. 팀워크·인맥·부(富)가 성공 비결 골드만삭스 출신이 각계각층의 요직을 휩쓰는 요인으로는 월가의 극심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우수한 능력과 폭넓은 국제금융 지식, 끈끈한 인맥과 팀워크를 중시하는 조직문화, 최고 수준의 연봉이 꼽힌다. 골드만삭스는 설립 후 130년이 지난 1999년에야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했다.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소수의 파트너(지분을 보유한 고위 임원)들이 집단 지도체제 형식으로 회사를 이끌어왔다. 이런 과정에서 팀워크와 합의를 중시하고 유명세를 좇지 않으며 혼자 튀는 스타플레이어를 배격하는 기업문화가 깊이 뿌리내렸다. 이런 풍토는 골드만 출신들이 다양한 이해관계자와의 의견 조율 및 타협이 필수인 관료로 쉽게 변신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코자인 전 뉴저지 주지사는 “골드만삭스는 일반 기업보다 훨씬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설득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평했다.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분위기도 강하다. 프리드먼 전 NEC 의장을 백악관에 불러들인 인물은 볼턴 전 비서실장이며 루빈 전 장관을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소개한 인물은 케네스 브로디 전 수출입은행장이다. 골드만삭스 웹사이트에는 일반 대학과 마찬가지로 동문(Alumni) 코너가 있다. 이 코너를 통해 전현직 골드만 멤버들은 서로를 소개받고 자신의 현 직책과 사업을 홍보하며 ‘한 번 골드만 맨은 영원한 골드만 맨’임을 느낀다. 회사를 떠난 뒤에도 끈끈한 인맥이 이어지도록 한 것이다. 여생을 아무런 걱정 없이 보낼 정도의 부를 일찌감치 쌓는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골드만삭스 직원의 평균 연봉은 37만3265달러(약 4억1059만 원)로 미 최대은행 JP모건체이스의 12만4959달러보다 3배 많다. 로이드 블랭크파인 최고경영자(CEO)의 연봉도 2400만 달러(약 264억 원)로 월가 금융사 CEO 중 최다였다. 부와 자신감을 겸비한 엘리트들이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 골드만이라는 둥지를 벗어나도 다른 곳에서 능력을 펼칠 바탕이 마련된 셈. ‘골드만삭스에서 퇴직한 뒤 할 일은 정치와 골프뿐’이란 말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골드만삭스가 대선 후보를 지원하면 당선은 떼놓은 당상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2008년 대선에서 골드만은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를 지원해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2012년 대선에서는 밋 롬니 공화당 후보를 지원했다가 롬니가 고배를 마시는 것도 목격했다. 내년 미국 대선에서는 골드만이 과연 누구를 밀어줄까. 월가 역사학의 권위자인 찰스 가이스트 맨해튼칼리지 교수는 “골드만이 2016년 11월 대선 직전까지 민주와 공화 양쪽을 모두 지원하는 척하다가 막판에 가서 유력한 지지 후보를 결정할 것”으로 내다봤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연이은 밤샘, 끊임없이 돌아간 커피 기계, 양측 협상단이 잠정 합의 사항을 써 놓을 때 애용한 낡은 화이트보드, 세 차례 짐을 싼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 지난달 26일부터 이달 2일까지 7박 8일간 치러진 이란 핵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기까지 스위스 로잔의 초호화 호텔 보 리바주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들이다. 뉴욕타임스(NYT)는 4일자 신문 톱기사로 협상 뒷이야기를 자세히 전하며 “매일 아침식사 장소에 나타난 대표단들이 20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들처럼 늘 지친 몰골이었다”고 보도했다.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은 협상 타결 전날인 1일 ‘얼마나 잤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두 시간”이라고 말하며 “매우 운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케리 미 국무장관도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취재진도 힘들겠지만 우리는 더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스타는 협상단을 ‘황금으로 된 우리에 갇힌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협상장이었던 보 리바주 호텔도 화제에 올랐다. 이 호텔은 1861년 세워진 유서 깊은 곳으로 스위트룸의 하루 사용료가 1500달러(약 164만 원)에 이른다. 대문호 빅토르 위고, 디자이너 코코 샤넬, 은막 스타 메릴린 먼로 등이 애용했다. 1996년 이 호텔에서 약 넉 달간 머무른 모부투 세세 세코 전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 대통령은 숙박을 포함한 각종 경비로 무려 100만 달러(약 11억 원)를 썼다. 협상에서 중요 기능을 한 소품으로는 ‘화이트보드’가 관심을 모았다. 양측 대표단은 화이트보드에 주요 합의내용 및 숫자를 영어와 페르시아어로 적었다고 한다. 일부는 화이트보드 전용 펜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잘 지워지지 않는 일반 펜으로 기밀사항을 적었다가 이를 지우느라고 진땀을 흘렸다는 후문이다. 미국 대표인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도 어디를 가든 항상 이 화이트보드를 들고 다녔다고 NYT는 전했다. 당초 예정됐던 협상 마감시한인 지난달 31일이 다가오면서 양측의 긴장은 극에 달했다. 특히 시한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이란 대표단과 달리 속히 미 의회에 성과를 보여줘야 하는 케리 장관의 부담이 심했다. 협상 중 세 차례나 짐을 싼 뒤 “이럴 거면 바로 귀국하겠다”며 이란 측을 압박했다고 한다. 그의 참모는 “케리 장관은 언론이나 반대파로부터 ‘몇 달 동안 그렇게 난리치더니 겨우 이 정도야? 더 잘할 순 없어?’라는 비판에 시달릴까봐 늘 초조했다”고 전했다. 미국 언론들은 이번 협상으로 한때 ‘퇴물’ 취급을 받았던 케리 장관이 급부상했다고 평가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수전 라이스 미 국가안보보좌관, 토니 블링컨 미 국무부 부장관 등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젊은 측근에게 밀린 케리 장관이 유령 취급을 받으며 교체설에 시달렸지만 이번에 강한 인상을 남겨 정치적 입지를 회복했다고 전했다. 한 외교 소식통은 “오바마 대통령은 전 민주당 대선후보이자 당 원로인 케리 장관에 대해 평소 존경심을 갖고 있다. 이것이 그가 국무장관 직을 유지하며 이번 협상을 주도할 수 있었던 원인”이라고도 전했다. 케리 장관은 협상 타결 직후 “이란 문제를 전쟁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는 사람도 있지만 외교로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줘 기쁘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한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 간의 물밑 ‘편지 외교’도 협상 타결에 큰 역할을 했다고 2일 전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제네바에서 협상이 시작될 무렵 하메네이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협상 타결을 촉구했으며 하메네이도 바로 답신을 보내는 등 두 사람이 물밑 교감을 이어왔다고 덧붙였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정말 안타까운데, 도와줄 방법도 바닥을 드러냈다.” 5년째 이어지고 있는 시리아 내전을 지켜보는 국제구호단체 회원들은 이렇게 속이 타들어간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다른 사람 도움 없인 먹고 살기 힘든 시리아인들이 1200만 명이 넘는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싶어도 접근로가 막혀 이들을 도와줄 방법이 없다는 보고서도 잇따르고 있다. 세이브더칠드런을 비롯한 세계 21개 구호단체들이 발표한 ‘무너지는 시리아’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시리아 주민 중 230만 명이 구호 사각지대에서 지냈다. 구호단체들은 “시리아 주민을 지원하기 위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이 3건이나 채택됐지만 주민들의 고통을 줄이는 데는 실패했다”며 “상당수 주민들이 방치돼 있다”고 지적했다. 일부 구호단체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시리아 국경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국경 통과소 34곳 중 20곳이 폐쇄돼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치안이 나빠지고 의료시스템이 무너진 탓에 시리아의 의료 구호는 마비 상태”라고 밝혔다. 의사들도 대거 시리아를 떠났거나 납치 및 살해됐다. 이런 가운데 인도적 지원금은 갈수록 줄고 있다. 2013년에는 시리아 주민과 난민을 돕는 데 필요한 자금 중 71%를 마련할 수 있었지만 지난해에는 그 비율이 51%로 뚝 떨어졌다. 이에 따라 국제사회가 또다시 머리를 맞댔다. 유엔과 쿠웨이트 정부는 지난달 31일 쿠웨이트 수도 쿠웨이트시티에서 ‘제3차 시리아 인도적 지원 공여국 국제회의’를 열었다. 회의를 주재한 반기문 총장은 “가난, 물자 부족, 비참함에 빠져 있는 시리아인에게 필요한 건 동정이 아니라 도움”이라며 협조를 호소했다. 유럽연합(EU)이 가장 많은 15억 달러의 기부 서약을 했다. 이어 일본(5억900만 달러), 미국(5억700만 달러), 쿠웨이트(5억 달러) 등이 뒤를 이었다. 한국 대표인 신동익 외교부 다자외교조정관은 지난해 745만 달러보다 34.2% 증가한 1000만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한국을 포함한 세계 78개국은 시리아 난민을 위해 총 38억 달러(약 4조1800억 원)를 지원하기로 했다. 지난해 24억 달러에 비해 58.3% 증가한 규모이지만 유엔이 올해 목표로 삼은 84억 달러에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구호단체들은 “시리아 주민과 난민 구호에 더이상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쿠웨이트시티=하정민 기자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