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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금리는 경제를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위기만 키웠다.”영국의 금융사(史) 전문가인 에드워드 챈슬러(61)가 최근 세계 경제계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최근 저서인 ‘금리의 역습(The Price of Time)’에서 “각국 중앙은행의 제로금리 등 경기부양책이 자산 버블과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면서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 등의 통화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금리가 너무 낮으면 무분별한 투기 열풍이 불어 금융시장이 취약해지고, 좀비 기업이 창궐하면서 결국 건실한 경제 성장을 방해한다는 주장이다.챈슬러는 케임브리지대, 옥스퍼드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투자회사 라자드브러더스와 GMO에서 일한 금융인 출신이다. 정통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금융 투기의 역사’ 등 많은 저서가 화제가 되고 파이낸셜타임스(FT)와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경제 칼럼을 쓰면서 ‘스타 저술가’로 인정받았다. 미 경제지 포천은 “생존한 최고의 금융사가 중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14일 그를 줌 화면을 통해 만났다.》―새 책 ‘금리의 역습’에서 저금리의 부작용을 경고했다. “역사적으로 금리가 지나치게 낮거나 갑자기 떨어졌을 때는 항상 투기성 버블이 있었다. 이자율이 낮으면 투자자들은 더 많은 위험을 짊어지면서 보상을 받고자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어떤 사례가 있나. “그 유명한 ‘튤립 버블’(17세기 네덜란드에서 발생한 튤립 과열 투기 현상)은 네덜란드의 통화 정책이 느슨했을 때 발생했다. 1700년대 ‘미시시피 버블’ 때도 이자율이 내리자 주가가 폭등했다. 현대에 와서는 미국, 일본 등의 금리가 낮을 때 신흥국이 싼값에 달러화나 엔화를 차입했다가 나중에 부채 규모가 늘어나 통화가치가 폭락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미시시피 버블’은 스코틀랜드 출신 존 로가 일으킨 투기 광풍을 말한다. 로는 프랑스에서 은행을 설립한 뒤 돈을 마구 찍어내 금리를 낮추고,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지역에 대한 독점거래권을 가진 ‘미시시피 회사’를 인수했다. 그러자 이 회사에 대한 투기가 시작돼 주가가 무려 20배 폭등했지만 이내 주식시장의 붕괴로 이어졌다. ―저금리의 폐해를 더 설명해 달라. “금리는 자본이 어디로 배분되는지를 결정한다. 금리에 따라 사람들이 투자처를 정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나치게 낮은 금리는 자본의 올바른 배분을 어렵게 하고 나쁜 투자를 일으킨다. 그다지 수익을 내지 못하는 좀비 기업에 자금이 흘러가게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비효율이 생긴다. 새로운 투자가 일어나지 않고 새로운 기업들이 줄어들게 된다. 이는 저성장, 저생산성의 원인이 된다. 금리는 저축에 대한 보상이다. 금리가 없다면 가치평가를 할 수 없고 자본을 배분하거나 투자할 수도 없다. 어느 체제이든, 특히 자본주의는 금리 없이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고금리가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지 않나. “물론 엄청난 고금리도 경제 성장을 저해한다. 만일 금리가 10%에 달한다면 건실한 기업들도 망해 나갈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고금리의 폐해는 모두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저금리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려 한 것이다.” ―중앙은행들의 대응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나. “지금까지 중앙은행들은 버블 붕괴나 금융위기를 금리 인하 및 돈 풀기로 서둘러 진정시키려고만 했다. 1998년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러시아 국채에 투자했다가 파산한 미 헤지펀드) 사태나 그 이후 닷컴버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문제 해결을 자꾸 뒤로 미루면서 단기 대응에 급급하다 보니 그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지기만 했다. 어떤 이들은 양적완화(QE)를 ‘수익을 미래에서 당겨오고, 위험은 미래로 보내는 행위’라고 표현한다.” ―그래도 금융위기 같은 큰 위기가 오면 금리를 내리고 시장을 진정시키는 게 우선 아닌가. “금리를 제로로 낮춘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해서 그랬다지만 그들은 이 시스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에겐 아이슬란드라는 대안이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아이슬란드는 부채 위기가 너무나 심각했지만 외국에서 달러화 지원을 받지도 않았고 은행을 억지로 구제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에 고통스러운 긴축을 받아들이고 저축을 늘렸다. 그런 기간을 보내고 난 뒤 아이슬란드는 위기를 극복하고 한때 금융에 과잉 의존하던 나라에서 기술과 관광산업으로 발전하는 나라로 변모했다. 또 부채는 줄었고 생산성은 늘었다. 문제는 정치적으로 그런 결단을 쉽게 할 수 있느냐다.” ―지금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원인은 무엇인가. “2008년 금융위기 때 연준은 채권을 매입하면서 유동성 공급을 하려 했지만 이 돈은 시중에 풀리지 않고 금융 시스템 안에서 계속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최근 팬데믹으로 양적완화가 다시 시작됐을 때 그 돈은 과거와 달리 실업급여나 재난지원금으로 시중에 풀리며 소비가 실제로 늘었다. 물론 동시에 공급망이 붕괴되며 공급 쪽에 충격이 생긴 것도 인플레이션에 일조했다.” ―중앙은행들이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빠르게 올리고 있는데 잘하고 있는 건가. “중앙은행은 지금 선택의 여지가 없고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쉽게 말해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다. 중앙은행은 너무 많은 돈을 뿌려 왔고 인플레이션이 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그래도 어찌 됐든 물가를 잡으려면 금리를 올려야 하는 것 아닌가.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긴 했다. 하지만 장기간의 저금리는 경제에 엄청난 취약성을 키웠다. 이럴 때 긴축을 하면 주식시장, 채권시장이 위험해지고 기업들도 위기가 찾아온다. 자본이 잘못 배분되면 이들은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작년에 이미 그런 현상을 우린 경험했다. 최근 들어 인플레이션이 조금 둔화하면서 연착륙에 대한 기대도 커지긴 했지만, 금융 시스템과 경제가 초저금리에 너무 익숙해져서 정상 수준의 금리를 받아들이기엔 힘이 들 것이다. 영어에 ‘weaning’(아이가 엄마 젖을 떼는 것)이라는 단어가 있다. 우리는 저금리 시기에서 젖을 떼야 한다. 자본주의의 생존을 위해 그것이 필요하다. 어렵지만 반드시 해야 한다. (금리 인상으로 인한 충격은) 이제 초기 단계일 뿐이다.” ―당신이 중앙은행장이라면 뭘 할 것인가. “(한숨) 정말 어렵다. 이게 나한테 닥친 일이 아니라 정말 다행이다. 그래도 금융시장 리스크가 있으니 지금은 비둘기파(통화완화 선호)를 택하겠다. 인플레이션을 당장 꺾으려 하다 보면 금융 시스템이 망가질 수 있다. 고물가를 당분간은 받아들이는 쪽으로 (통화정책을) 해야 하지 않을까. 만일 금리를 올린다면 이자 부담이 늘어나는 주택담보대출자를 위해 세제 혜택을 주는 식으로 ‘쿠션’을 줘야 한다.” ―금리 인상이 계속된다면 좀비 기업들의 파산이 이어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좋은 일이다. 그들이 점유하고 있는 노동력, 자본, 토지를 (더 생산적인 쪽으로) 재배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좀비 기업은 혁신을 억누르고 있다. 기업들의 파산은 물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창조적 파괴를 하는 것은 우리 시스템의 본질이다.” ―금리가 오르면서 정부 부채는 어떤 영향을 받나. “저금리와 양적완화 시기에 정부는 싼 금리에 돈을 조달할 수 있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각국 정부 부채가 상당히 늘어 미국 유럽, 영국 등에서는 국가부채 비율이 국내총생산(GDP)의 100% 이상까지 올라왔다. 그런데 지금 금리가 오르면서 정부 재정도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다.” ―인플레이션은 언제 사라지나. “인플레이션은 적어도 향후 10년간은 계속 우리 곁에 머물 것이다. 물가가 올랐다가 다시 잠잠해지고, 그래서 또 돈을 풀면 다시 물가가 뛰는 현상이 마치 1970년대처럼 반복될 것이다. 지금의 에너지 위기는 화석연료 전환기가 겹쳐서 그때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 같은 상황이 다시 올 것이라고 보나. “그건 아니다. 서브프라임 사태는 미 부동산 버블과 규제되지 않은 파생상품 등에서 비롯됐다. 각각의 위기는 저마다 성격이 다르다고 본다. 그보다는 인플레이션으로 사람들이 궁핍해지는 것, 중국 경제의 고성장이 끝나가는 것이 우려된다.” ―어쩌다 경제사에 관심을 가졌나. “내 타고난 성향이다. 금융의 역사를 잘 알면 현재 벌어지는 일들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좋은 투자자는 역사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다.” ―저자로서 다음 목표는 무엇인가. “인플레이션의 역사에 대한 책을 쓸 것이다. 매우 복잡하지만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물가 현상을 잘 이해하도록 도울 것이다.” 에드워드 챈슬러△ 1962년 영국 출생△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 칼리지 졸업△ 옥스퍼드대 석사(근대사 전공)△ 투자기업 라자드브러더스, GMO 근무△ 1999년 ‘금융 투기의 역사(Devil Take the Hindmost)’ 발간△ 2005년 ‘신용 크런치 타임(Crunch Time for Credit?)’ 발간△ 2008년 미국 언론상 ‘조지 포크상’ 수상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얼마 전에 한 시중은행 임원을 지내고 퇴임한 A 씨를 만났다. 30년 직장 생활을 찬찬히 회고하던 그는 대뜸 자녀 얘기를 꺼냈다. 아버지를 따라 은행원의 길을 걸을지 아니면 법학전문대학원에 들어가 법조인에 도전할지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다고 했다. 그러자 A 씨는 자신처럼 은행에 들어갔으면 높은 연봉 받으면서 비교적 평탄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아이가 굳이 고생스러운 길을 골랐다며 내심 아쉬워했다고 한다.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직업이 가장 좋은 직업”이라는 말이 있다는데 그의 얘길 듣고 보니 여기에 은행도 포함되는구나 싶었다. 예전엔 공기업이나 대학 교직원이 ‘신의 직장’ 계열의 선두 주자였지만 지금은 지방 이전과 임금 정체 때문에 인기가 이전 같지 못하다. 그 자리를 치고 들어온 게 은행이다. 외환위기 기억이 생생한 지금 40, 50대 이상 세대는 당시 정리해고 칼바람을 맞은 은행원을 화이트칼라의 눈물과 애환이 농축된 이미지로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들을 보는 세상의 눈이 다시 달라진 것 같다. 은행이 소위 ‘만고땡’ 직장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물론 직원들은 쉽게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주변에 은행 다니는 친구들도 이런 지적을 하면 거품을 문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은행들이 창출하는 부가가치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수익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남들이 하지 못하거나 가치 있는 결과물을 내는 쪽이 높은 보상을 받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우리 은행들이 내놓는 상품이나 서비스는 다들 고만고만하고 차별성이 없다. 억대 평균 연봉과 낮은 생산성, 뒤처진 경쟁력과 높은 수익이 기이하게 공존한다. 우리나라 은행들은 지난해 줄줄이 역대 최대 실적을 경신했다. 글로벌 경기침체로 반도체 등 다른 주력 산업이 죄다 죽 쑤는 와중에도 유독 국제 경쟁력이 떨어지는 은행만 역대급 이익을 얻는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은행들은 엄청난 혁신으로 금융업의 신기원을 열거나 치열한 글로벌 경쟁을 뚫고 해외에서 달러를 벌어온 게 아니다. 정부가 설정한 높은 진입장벽 안에서 금리 상승의 과실을 나눠 먹으며 안전한 독과점 이익을 챙겼을 뿐이다. 은행들은 그것도 ‘성과’라면서 기본급의 300∼400%에 이르는 성과급 파티를 벌이고 어차피 은퇴가 몇 년 안 남은 직원들에게 1인당 6억∼7억 원의 퇴직금을 뿌렸다.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평생 모아도 마련하기 힘든 액수를 한 번에 받은 임원도 여럿이다. 대통령이 요즘 연일 은행 때리기에 나서고 있지만 사실 ‘열심히 민생을 챙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행보 이상으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정부가 할 일은 은행의 팔을 비틀어 대출금리 인하나 기부금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혁신과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 즉 시스템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은행들이 자발적으로 시대착오적인 급여 시스템을 바꾸고 경영 효율화에 나서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라. “공적자금 받아놓고 염치가 없다”며 도덕성을 훈계하거나 사회공헌 액수로 순위를 매기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모건스탠리의 제임스 고먼, 뱅크오브아메리카(BofA)의 브라이언 모이니핸은 미국 월가를 호령하는 트로이카(삼두마차)다. 모두 60대 중반의 나이에 수천만 달러의 고연봉을 받으며 직원 10만∼20만 명의 글로벌 금융회사를 이끌고 있다. 이들에게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최고의 자리에서 벌써 15년 안팎 장기 집권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간 후계자로 거론되는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유력 후보들은 자기 차례를 기다리지 못해 다른 회사로 떠났거나 너무 나이가 들며 탈락했다. 이들의 임기는 요즘도 언론의 큰 관심사다. 고먼은 최근 다보스포럼에서 이에 대한 질문에 “(언젠가는) 물러날 것이다. 죽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진 않겠다”고 말했다. 물론 그 ‘언젠가’가 언제가 될지는 아직 기약이 없다. 당연히 논란과 뒷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매년 천문학적 연봉과 보너스를 챙겨간다는 대중의 비판과 함께, 막강한 금융 권력으로 시장은 물론이고 워싱턴 정가에까지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최고경영자(CEO)에 이사회 의장까지 겸직하는 이들은 회사 내부에서도 존재감이 너무 커져 마땅히 견제할 세력이 보이지 않는다. 한국 같았으면 당장에 금융당국이 뛰어들어 이들을 몇 번이고 자리에서 끌어내렸겠지만 미국에선 그런 종류의 인사 개입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월가의 인사 관행은 애초에 우리나라와 수평 비교하긴 어려운 측면이 많다. 미국은 철저히 성과와 실적을 바탕으로 이사회가 CEO의 진퇴를 결정하고 회사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한 사람에게 10년, 20년을 맡긴다 한들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이먼과 고먼, 모이니핸은 모두 CEO 취임 이후 탄탄한 실적 상승을 발판으로 회사 주가를 2, 3배 이상 높였다. 선제적 인수합병과 구조조정으로 금융위기 같은 거대한 위협을 기회로 바꿔낸 것도 이들의 몫이었다. 한국은 다르다. 당국이 만들어낸 규제와 독과점의 울타리 안에서 안전한 이자 장사로 수익을 내는 우리 금융사들의 경우 이사회나 주주는 허수아비에 가깝고 사실상 당국이 인사 실권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에선 금융당국이 금융지주 회장들의 연임을 저지하고 낙하산을 내려보내려 한다는 의혹으로 또다시 관치 논란이 불붙고 있다. 은행 간판만 바꿔서 거의 매년 반복되는 이런 인사 구태는 우리 금융계의 고질적인 병폐를 치유하는 게 얼마나 요원한지를 일깨워 준다. ‘땅 짚고 헤엄치기’식 실적 쌓기를 내세워 주인 없는 회사에서 장기 집권을 하려는 개인의 욕심과 그 자리를 놓고 서로를 물고 뜯는 파벌 싸움, 막강한 규제 권한을 무기로 입맛에 맞는 인사를 내리꽂으려는 당국 및 정치권이 합작한 이 저질 드라마는 시대가 변해도 도무지 막을 내릴 줄을 모른다. 지금처럼 본연의 실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지 않고 극한의 권력 투쟁과 자리다툼만 일삼는다면 우리 금융은 혁신은커녕 앞으로 한 발짝도 더 나가지 못할 것이다. 제아무리 ‘월가의 황제’라 불리는 다이먼이라도 만약 이런 한국에서 금융업을 했다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었을까 하는 상상을 가끔 해본다.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올해 한국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경제학자 A 씨는 그 근거로 대뜸 한국은행의 최근 통계 지표 하나를 내밀었다. 현재 주택담보대출을 받고 있는 집은 전체 소득의 평균 60%를 빚 원리금을 갚는 데 쓴다는 내용이었다. A 씨는 이 가구들이 대출 상환을 하고 나면 거의 최저생계비만 남는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는데, 경제의 한 축인 민간소비가 어떤 충격을 받을지 상상해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최악의 경우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야기했던 서브프라임 사태에 준하는 현상이 한국에도 불어닥칠 수 있다고 했다. 평소 워낙 비관적인 전망으로 유명한 사람이지만 이번엔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집값과 금리, 소비의 함수 관계가 명확한 우리 경제에서 거의 모든 시그널이 침체를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전문가의 90% 이상은 새해에도 집값이 추가 하락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시중 금리가 오르는 상황에서 자산 가격의 하락은 가계의 소비 여력에 큰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누구나 집을 사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고금리, 저성장 시대에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우리 경제가 올해 기록적인 침체에 빠질 것이라는 전망은 이미 경제계에 기정사실처럼 여겨지고 있다. 민간 연구기관들은 물론이고, 항상 ‘희망이 듬뿍 섞인’ 전망을 내놓는 정부마저 1.6%라는 비교적 ‘담백한’ 수치를 제시했다. 한국 경제 역사상 성장률이 2%에 미치지 못한 적은 외환위기, 오일쇼크, 코로나 등 심각한 경제 위기가 찾아왔을 때 말고는 없었다. 해외에서 바라보는 상황은 더 심각하다. 외국계 투자은행들은 0%대, 심지어 마이너스 성장을 경고하고 있다. 별다른 외부 충격이 없었는데도 성장률이 제로에 가깝다는 것은 우리 경제의 기본 실력이 이제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의미다. 사실 이런 성적표는 우리에게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2019년에도 연간 성장률은 원래 1%대가 유력했다. 통계를 유난히 중시했던 당시 정부가 막판에 재정을 쏟아부으면서 겨우 2.0%를 맞췄다. 그해 정부의 성장 기여도가 1.5%포인트로 4분의 3을 차지했다. 가만히 놔뒀으면 사실상 성장의 맥이 끊겼을 것을 세금을 퍼부으면서 숫자를 억지로 끌어올린 것이다. 이런 일들이 수시로 생기는 것만 봐도 우리에겐 잠깐의 성장 쇼크가 아닌 일본식 상시 불황이 이미 도래한 것인지 모른다. 이대로는 20여 년 뒤 경제 규모가 나이지리아에 추월당한다는 골드만삭스의 경고도 그다지 허튼소리가 아니다. 집권 2년 차를 맞은 정부는 올해 대규모 ‘빅배스’(부실 털어내기)를 할 모양이다. 고금리 기조 속에 “빚내서 경기부양은 안 한다”고 일찌감치 선언했고, 전기·가스요금의 정상화, 더 내고 덜 받는 식의 연금개혁도 추진한다. 모두가 당장에 필요하고 해묵은 과제이긴 하지만 그에 비해 성장을 촉진하고 기업가의 야성을 깨우는 노력은 미진하다는 평가가 많다. 상처가 나면 환부를 깨끗이 닦아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새살이 돋아나도록 몸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게 무엇보다 우선이다. 1%대 성장률의 의미를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이달 초 KB금융이 출간한 보고서에는 ‘역시 부자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라는 깨달음을 절로 들게 하는 부분이 나온다. 금융자산만 10억 원이 넘는 자산가들의 특징을 분석해 봤더니 이들은 코로나 사태 때 새로운 자산에 적극 투자하기보다는 빚을 먼저 줄이는 전략을 썼다고 한다. 흔히들 빚을 지렛대 삼아 자산을 불려 나가는 것을 ‘투자의 정석’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와 반대로 부자들은 60% 이상이 ‘부채는 자산이 아니다’라면서 빚내는 것에 거리를 뒀다. 심층면접에 응한 자산가들은 “꼭 필요하면 대출을 받더라도 현금이 생기면 빚을 우선적으로 갚는 데 주력했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같은 시기 청년, 서민들의 대응은 부자들의 이런 태도와 많이 달랐다. 코로나 이후 저금리가 길어지고 유동성으로 자산가격이 폭등하자 20, 30대 투자자들은 자기 돈, 남의 돈을 가리지 않고 끌어모아 주식과 부동산을 사들였다. 외환위기 때 20%를 넘나드는 고금리를 경험한 장·노년층과 달리 대출의 무서움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과감한 투자에 나선 것이다. 무모한 ‘빚투’의 청구서는 지금 10%에 육박하는 대출 이자로 돌아오고 있다. 올겨울이 이들에게 유난히 춥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 상황만 보면 마치 고금리 시대가 어느 날 도둑처럼 갑자기 찾아왔고, 이를 예견한 부자들이 빚을 미리 줄여 나갔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금리가 빠르게 오를 것이라는 경고는 꽤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에서는 이미 작년 봄부터 인플레이션을 차단하기 위해 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아마존 테슬라 등 빅테크 기업 주가와 가상화폐 가격이 폭등하면서 각국 투자자들이 ‘유동성 파티’를 벌일 때였다. 그즈음 한국에서도 물가가 들썩이는 신호가 여러 곳에서 감지됐다. 한국은행 총재 역시 일찌감치 투자자들의 ‘빚투’ 열풍에 우려의 메시지를 냈다. 지금 ‘영끌족’의 고통은 이런 경제 흐름을 읽지 못하고 분에 넘치는 위험을 짊어진 대가라는 지적도 무리가 아니다. 빚의 복수극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내년부터 더 본격화된다. 연준이 금리를 올릴 만큼 올린 것 같지만 아직도 최소 1%포인트는 추가로 올릴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다. 연 5%에 이르는 금리 수준이 미국에서 한동안 이어지면 전 세계에 충격파가 확산될 수밖에 없다. 코로나 기간 민간부문 부채 증가폭이 주요국 중 최상위권이었던 한국은 더 심각하다. 올해 사상 최대 이익을 냈다는 시중은행들은 내년엔 대규모 대출 부실에 대비해 상당한 충당금을 쌓아놨다고 한다. 이자 폭탄을 더는 못 버티고 쓰러지는 가계, 기업이 마구 쏟아질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정부도 영끌족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기업의 흑자도산을 막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경제의 패러다임이 바뀔 때는 ‘누가 대신 해주겠거니’ 바라면서 팔짱만 끼고 있으면 안 된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제로금리와 저성장에 적응하려 노력해 왔듯이 각자가 고금리·고인플레 시대에 맞는 생존법을 익혀야 한다. 시대가 어떻게 바뀌든 항상 분명한 것은 ‘변해야 살아남는다’는 점이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우리나라의 시중은행들은 ‘금융회사’일까, ‘금융기관’일까. 금융권을 취재해 본 기자라면 누구나 가끔은 고민해 봤을 문제다. 경영 성과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사기업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금융회사’, 금융 시스템 안정이나 소비자 보호 같은 은행의 공공성을 중시한다면 ‘금융기관’이 더 맞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아직도 마땅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두 용어를 혼용한다. 은행들을 오래 취재해 왔지만 이렇게 성격이 묘하고 뭐라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조직은 찾지 못했다. 겉모습만 보면 은행도 멀쩡한 민간기업이다. 다른 기업과 마찬가지로 영업 활동을 통한 수익 창출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증시에 상장돼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주주에게 배당도 한다. 가장 다른 점은 정부가 신규 사업자의 진입을 엄격히 제한하는 과점(寡占) 회사라는 점이다. 덕분에 소수의 은행들은 국내외 시장에서 피 말리는 경쟁을 하는 다른 기업들과 달리 안정적인 이자 마진을 나눠 가지면서 생존을 보장받고 있다. 정부는 은행들이 망하지 않게, 그렇다고 과도한 폭리를 취하지도 않게 밀착 관리한다. 정부는 은행들에 이런 특혜를 주는 대가로 각종 규제를 가한다. 말이 규제지 실제로는 은행들의 모든 영업행위를 조종, 통제한다. 예대마진이나 각종 수수료에 대한 간섭이 대표적이다. 은행들은 국정과제나 정책 목적을 위해서도 수시로 동원된다. 금융당국은 최근 주요 은행장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자금시장 안정을 위한 90조 원의 채권 매입을 지시했다. 은행은 자영업자나 취약계층의 채무를 탕감하고 이자를 감면하는 일에도 자주 호출된다. 손실이 뻔하지만 군말 없이 따라야 한다. 은행은 인사도 당국의 눈치를 봐야 한다. 얼마 전 금융감독원장은 라임 사태로 중징계를 받은 우리금융 회장에게 “현명한 판단”을 언급하며 사실상 사임을 압박하는 듯한 말을 했다. 경영진 선임을 담당하는 이사회가 뻔히 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최고경영자(CEO) 인사에 간여한 것으로 해석됐다. 우리은행 안팎에서는 벌써부터 누가 권력의 ‘점지’를 받아 차기 회장이 될지 뒷말이 무성하다. 정상적인 민간기업이라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당연하다는 듯이 진행된다. 금융당국의 관치(官治)는 은행의 공공성을 감안했을 때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은행이 부실에 빠졌을 때 경제 전체에 어떤 충격이 생기는지도 우리는 뼈저리게 경험했다. 하지만 당국의 숨 막히는 간섭 속에서 우리 은행의 경쟁력이 수십 년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다. 따뜻한 보호막 안에서 망할 걱정 안 하고 편하게 돈을 버는 동안, 은행은 대단한 경영 혁신도 없이 임직원들이 국내 최상위 수준의 연봉을 받는 꿈의 직장이 됐다. 그 피해는 오롯이 소비자에게 돌아온다. 은행이 혁신을 못하는 데는 스스로의 책임도 크다. 은행들이 겉으로는 “규제 완화”를 외치면서도 실상은 당국의 뒤에 숨어서 더 세밀한 지침을 요구하는 사례를 지금까지 많이 봤다. 정부가 은행을 말 잘 듣는 하청업체쯤으로 길들이려 하고, 은행도 자신들의 편안한 생존을 위해 기꺼이 길들여지기를 바라는 규제 환경이 바뀌지 않고서는 진정한 금융 혁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얼마 전 뉴욕타임스(NYT)가 한국의 야간 골프 열풍을 기사로 다뤘다. NYT는 “한국인들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 심지어 오전 1시까지도 골프를 친다”면서 대낮처럼 환하게 불빛을 켜고 즐긴다는 뜻으로 ‘백야(白夜) 골프’라고 이름 지었다. 미국에서도 ‘트와일라잇 티타임’이라고 해서 오후 늦게부터 해 질 녘까지 칠 수 있는 옵션이 있지만 한국처럼 달빛 아래에서 라운딩을 이어 나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우리나라의 명물로 자리 잡은 밤 골프 문화에 최근 정부 고위 당국자들이 잇달아 한마디씩 쓴소리를 했다. 에너지 절약이 절실한 시점에 적절치 않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야간 골프 자제령은 공공기관 온도 조절, 난방시간 단축 등과 함께 에너지 부족에 시달릴 때마다 정부가 꺼내 드는 ‘단골 카드’다. 정부는 “지금은 오일쇼크에 준하는 비상 상황”이라며 에너지 사용량 10% 감축을 목표로 대대적인 캠페인에 나서기로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유가 급등으로 에너지 공급이 꽉 막힌 요즘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전시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다. 전기를 아끼기 위해 에펠탑 점등 시간을 줄인 프랑스에서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셔츠 대신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대중 앞에 나타났다. 올겨울 에너지 대란에 대비하려면 국민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준 것이다. 지금 세계 각국에 에너지 절약이 중요하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특히 6개월째 무역적자와 고물가, 고환율 악재가 겹쳐 있는 우리는 더욱 절실하다. 원자재 가격 급등과 환율 상승으로 수입 비용은 훨씬 늘었는데 가계나 기업의 에너지 소비량은 그다지 변한 게 없다. 공공기관이 아무리 앞장서서 노력해도 민간 부문이 움직이지 않으니 만성 적자 구조는 더욱 고착화되고 있다. 마냥 에너지를 아끼자는 구호를 외치고 야간 골프의 자제를 읍소하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에너지 위기를 키운 것은 역설적이게도 정부의 에너지 대책이었다. 대표적인 게 전기료 인상 억제와 유류세 인하다. 에너지 수입 가격이 오르며 전기 생산·구매 비용도 폭증했지만 지지율 관리에 급급했던 역대 정권은 전기료를 낮은 수준에 계속 묶어뒀다. 국제유가가 치솟으면서 기름값이 오를 기미를 보이자 이번엔 휘발유에 붙는 세금을 줄여 가격 상승을 막았다. 에너지 값이 오르면 그에 맞춰 소비를 줄이는 노력으로 극복해야 정상인데, 정부는 국민 부담을 줄여주겠다며 오히려 무리한 가격 통제를 남발했다. 이는 올해 한전의 30조 원 적자와 정부의 세수 감소라는 부작용을 낳았고 국민들의 위기의식만 둔감하게 만들었다. 지금 같은 고물가 고환율 고유가 시대에 에너지 과소비는 불에 기름을 안고 뛰어드는 꼴이다. 또 막대한 무역적자를 키우고 미래 세대에게 짐을 떠넘기는 행위이기도 하다. 에너지 위기에 직면한 유럽 국가들은 대국민 절약 캠페인에 그치지 않고 전기료와 난방비 인상도 병행해 자연스러운 수요 감축을 유도하고 있다. 달콤한 포퓰리즘 정책을 내세우는 대신 고통을 감내하며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가자고 국민들을 설득할 용기 있는 지도자가 우리에겐 있을까. 노동개혁, 연금개혁 못지않게 시급한 개혁이 여기 또 있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지금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술자리에서 보여주는 묘기 한 가지가 있었다. 목젖을 열고 한 번의 목 넘김도 없이 맥주를 입안으로 ‘들이붓는’ 것이다. 맥주가 가득했던 컵이 불과 1∼2초 안에 빈 잔이 돼 버리는 광경에 사람들은 신기해서 말문이 막힌다. 그가 가끔씩 선보인 ‘맥주가 사라지는 마술’의 임팩트는 꽤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요즘 언론에 나오는 발언들을 보면 목 넘김이나 주저함이 없는 그의 성격은 지금도 여전한 것 같다. 이 총재는 올해 5월 임기 첫 기자회견에서 “제가 말이 빠르고 워낙 직접적으로 말하는 스타일이다. 시장은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미리 경고했다. 그는 “인기가 없어도 금리는 올리겠다”, “성장보다 물가가 우선” 같은 꽤나 직설적인 메시지를 시장에 내놨고, 심지어 “금리를 0.25%포인트씩 올릴 것” 같은 구체적인 수치도 주저 없이 제시했다. 이전 총재들이 “경제와 물가 상황을 고려해 적절한 통화 정책을 하겠다”는 식의 이도 저도 아닌 말들만 반복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거침없는 화법이다. 지금까지 거쳐 온 이력도 좌고우면하지 않는 그의 ‘직진 스타일’을 보여준다.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서울대 강단에 선 이 총재는 안정적인 교수직을 박차고 나와 금융위원회 초대 부위원장, 아시아개발은행(ADB) 수석이코노미스트, 국제통화기금(IMF) 아·태국장 등을 지냈다. 일찌감치 ‘천재 경제학자’로 명성을 쌓고 인지도도 높였지만 이에 들뜬 행동을 하거나 뚜렷한 정치적 색채를 보인 적도 없다. 전 정부가 임기 말 임명했지만 현 정부가 딱히 반대할 명분을 찾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성격도 이력도 막힘이 없던 이 총재 앞에는 유례없는 가시밭길이 놓여 있다. 글로벌 강달러로 환율이 1400원 선을 노크하며 고물가를 자극하는 가운데 수출 둔화와 에너지 대란으로 무역적자 행진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 긴축과 공급망 위기, 전쟁 등 해외발 악재의 불똥을 사방에서 맞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은은 금리를 많이 올려 물가를 잡자니 경기침체와 가계부채가 걱정이고, 그렇다고 적게 올리자니 고환율을 악화시킬 수 있어 근심이 깊다. 물론 역대 총재들이 모두 해온 고민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그 강도가 심상치 않다. 지난주 세계은행은 “아주 작은 충격에도 세계 경제가 침체의 나락으로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 상태다. 이 총재는 지금까지 “물가안정 중시”라는 명확한 목소리를 시장에 전달해 왔다. 그러나 고물가·고환율의 충격 못지않게 고금리의 폐해와 부작용이 부각되기 시작한다면 그의 직진 행보에는 황색 신호등이 깜빡일 수밖에 없다. 그때가 되면 이 총재는 “고통을 감내하더라도 우리가 갈 길은 여기”라며 국민과 정치인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아니면 유연성과 융통성을 발휘해 복합위기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제시할 것인가. 이번 위기는 적어도 내년 초까지는 이어질 것으로 관측된다. 당분간은 고물가가 단숨에 사라지거나 시장이 급격히 진정되는 마술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겐 그때까지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잘 버티는 길밖에 없다. 위기 극복을 위한 이 총재의 어깨가 무겁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얼마 전 뉴욕 특파원 임기가 끝날 무렵, 그동안 신세 졌던 지인들에게 맨해튼에서 점심을 샀다. 세 명이서 파스타 하나씩과 조금씩 덜어 먹을 간단한 요리 하나, 커피 정도 시켰을 뿐인데 음식값이 240달러(약 31만 원)나 찍혀 나왔다. 그런 비싼 도시에서 살다 온 탓인지, 서울에 돌아온 후 며칠간은 모든 물건값이 너무 싸게 느껴졌다. 하지만 착시에서 벗어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비록 뉴욕 수준의 ‘살인 물가’나 남미 같은 ‘초(超)인플레’는 아니지만 우리나라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생활 물가가 많이 올라 있었다. 특히 1만 원에 근접하는 계란 한 판 가격은 뉴욕 여느 부촌의 마트 못지않았다. 물가지수가 외환위기 이후 처음 두 달 연속 6% 이상 오른 가운데, 체감물가 상승률도 8%에 육박하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지금의 경제 상황을 ‘복합 위기’라고 부른다. ‘복합’이라는 단어에서 보듯,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위험 요인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글로벌 인플레이션과 미국의 강한 긴축 움직임, 우크라이나 전쟁과 에너지 가격 급등,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봉쇄, 공급망 위기, 대만을 둘러싼 미중 간 지정학적 위기 등이 전 세계를 짓누르고 있다. 지금의 복합 위기는 이 중 어느 한두 가지가 잠잠해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각기 다른 요인들이 중첩, 증폭되면서 장기간 계속될 여지가 크다. 그런 양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게 최근 물가 흐름이다. 지금의 인플레이션은 장기 저금리에 따른 유동성 확대, 생산·물류 차질, 수요 증가, 에너지값·인건비 상승 같은 요인들이 한데 뒤섞여 발생했다. 물론 최근 들어 국제유가가 내리고 일부 물가지표가 둔화되면서 인플레이션도 곧 고비를 넘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기고 있다. 하지만 낙관하기엔 이르다. 유럽발 에너지 대란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라 유가 등 연료비는 얼마든지 고공비행으로 방향을 틀 수 있다. 또 근로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가 거세지고 있는 데다 각국의 공급망 차질도 여전하다. 앞으로 상당 기간은 예전의 저물가 시대로 복귀하는 게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살인적 인플레이션이 이번 복합 위기의 ‘전반전’이라면 후반에는 더 큰 괴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각국이 고통스러운 긴축으로 힘겹게 고물가와 싸우다 보면, 자칫 물가는 못 잡은 채 경기만 고꾸라지는 스태그플레이션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크다. 미국은 이미 2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 유럽 역시 우크라이나 전쟁의 직격탄을 맞았다. 2분기 성장률이 0.4%로 곤두박질친 중국도 올해 성장 목표치를 포기한 지 오래다. 신흥국들은 국가부도 도미노가 우려되고 있다. 세계 어디에도 멀쩡한 곳이 없다. 효율과 분업, 자유무역을 근간으로 성장하던 세계 경제가 봉쇄와 규제, 안보 위기로 멍들어 가면서 한국도 그간의 경제 발전 공식을 새로 써야 하는 처지가 됐다. 지금 모든 위기의 근간이 된 탈세계화(deglobalization) 추세는 미국의 긴축이나 코로나 사태가 끝나더라도 계속될 공산이 크다. 이 새로운 판에 적응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세계 각국에서 반중 여론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인 10명 중 8명이 중국에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으며 특히 젊은층의 반중 정서가 상당하다고 미국 여론조사회사 퓨리서치센터가 지난달 29일 분석했다. 중국의 인권 탄압, 이웃 나라에 대한 군사 위협,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등이 주원인으로 꼽힌다. 퓨리서치센터가 2월부터 지난달 초까지 미국 한국 일본 독일 등 전 세계 19개국 국민 2만4525명을 상대로 중국에 대한 이미지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반중 여론은 80%로 2002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2002년에는 반중 여론이 31%에 불과했지만 2010년 56%, 2017년 61%, 2020년 75%로 꾸준히 상승했다. 2017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대한 중국의 경제보복, 코로나19 확산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인은 중국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자국 정치에 대한 중국의 간섭’(54%)을 가장 많이 거론했다. 이어 △중국의 군사력(46%) △중국의 인권 정책(42%) △중국과의 경제 경쟁(37%) 등이 꼽혔다. 퓨리서치센터는 한국이 이번 조사 대상 19개국 중 젊은층이 장·노년층보다 중국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유일한 나라라고 진단했다. 서구 주요국의 반중 여론 또한 상당했다. 19개국 중 반중 여론이 가장 높은 나라는 일본(87%)이었다. 최근 중국과 격한 갈등을 벌이고 있는 호주(86%)를 포함해 스웨덴(83%), 미국(82%) 등도 모두 80%대를 넘었다. 퓨리서치센터는 한국과 미국은 물론 캐나다 네덜란드 독일 스페인 등 주요국의 올해 반중 여론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분석했다. 19개국 전체로 보면 응답자들은 ‘중국의 인권 정책’(79%)을 가장 많이 문제 삼았다. ‘중국의 군사력’(72%), ‘중국과의 경제 경쟁’(66%) 등이 뒤를 이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미국의 통신정책을 관장하는 미 연방통신위원회(FCC)의 브렌던 카 위원은 최근 애플과 구글의 앱스토어에서 중국의 동영상 공유 애플리케이션 ‘틱톡’을 삭제해야 한다는 서한을 두 회사에 보냈다. 틱톡이 각국의 사용자 정보를 중국 정부에 유출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
미국 경제 성장 속도가 기존 전망보다 더 빠르게 둔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 상무부는 지난달 29일 올 1분기(1∼3월)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연율 ―1.6%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5월 발표된 잠정치 ―1.5%보다 0.1%포인트 하향 조정된 것이다. 미 경제 역성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팬데믹) 사태 초기인 2020년 2분기(4∼6월) 이후 처음이다. 직전 분기인 지난해 4분기 때 6.9% 성장세를 보인 것에 비하면 경기가 확연히 둔화된 것으로 풀이된다. 미 경제 성장 속도가 빠르게 둔화하고 있지만 미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여전히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빨리 올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사진)은 포르투갈에서 열리는 유럽중앙은행(ECB) 포럼에서 저물가 시대가 끝났다며 이에 따라 통화정책이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너무 나가서(기준금리를 올려서) 위험하다? 물론 위험은 있다”면서 “하지만 더 큰 실수는 물가 안정 회복에 실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파월 의장은 인플레이션 고착화라는 더 큰 위험을 피하기 위해 경기침체 위험이 증가하더라도 기준금리를 빠르게 인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팬데믹 이후 완전히 다른 요인들로 경제가 돌아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면서 코로나19 시대 이전과 같은 저물가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다고 밝혔다. 파월 의장은 또 “우리가 물가상승률 2%에, 강한 노동시장을 유지할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면서 이른바 경제 ‘연착륙’을 자신하지 못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도 “우크라이나 전쟁이 에너지와 식량 가격 상승의 형태로 유럽을 다른 지역보다 심하게 강타하고 있다. 우리가 낮은 인플레이션 환경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면서 파월 의장에게 동감을 표했다. 연준이 주로 참고하는 물가지표는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CNBC방송에 따르면 미 상무부는 5월 개인소비지출(PCE) 가격지수가 전년 동월보다 6.3%, 전월보다 0.6% 각각 상승했다고 지난달 30일 밝혔다. 전년 동월 대비 상승률은 4월과 동일했으나, 전월 대비 상승률은 4월 0.2%에서 3배로 높아졌다.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
세계 각국에서 반중 여론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인 10명 중 8명이 중국에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으며 특히 젊은층의 반중 정서가 상당하다고 미국 여론조사회사 퓨리서치센터가 지난달 29일 분석했다. 중국의 인권 탄압, 이웃나라에 대한 군사 위협,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등이 주 원인으로 꼽힌다. 퓨리서치센터가 2월부터 지난달 초까지 미국 한국 일본 독일 등 전 세계 19개국 국민 2만4525명을 상대로 중국에 대한 이미지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반중 여론은 80%로 2002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2002년에는 반중 여론이 31%에 불과했지만 2010년(56%), 2017년(61%), 2020년(75%)로 꾸준히 상승했고 80%대를 넘어섰다. 2017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대한 중국의 경제보복, 코로나19 확산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인은 중국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자국 정치에 대한 중국의 간섭’(54%)을 가장 많이 거론했다. 이어 △중국의 군사력(46%) △중국의 인권 정책(42%) △중국과의 경제 경쟁(37%) 등이 꼽혔다. 퓨리서치센터는 한국이 이번 조사 대상 19개국 중 젊은층이 장노년층보다 중국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유일한 나라라고 진단했다. 서구 주요국의 반중 여론 또한 상당했다. 19개국 중 반중 여론이 가장 높은 나라는 일본(87%)이었다. 최근 중국과 격한 갈등을 벌이고 있는 호주(86%)를 포함해 스웨덴(83%), 미국(82%) 등도 모두 80%대를 넘었다. 퓨리서치센터는 한국과 미국은 물론 캐나다 네덜란드 독일 스페인 등 주요국의 올해 반중 여론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분석했다. 19개국 전체로 보면 응답자들은 ‘중국의 인권 정책’(79%)을 가장 많이 문제 삼았다. ‘중국의 군사력’(72%), ‘중국과의 경제 경쟁’(66%) 등이 뒤를 이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미국의 통신정책을 관장하는 미 연방통신위원회(FCC)의 브렌던 카 위원은 최근 애플과 구글의 앱스토어에서 중국의 동영상 공유 애플리케이션 ‘틱톡’을 삭제해야 한다는 서한을 두 회사에 보냈다. 틱톡이 각국의 사용자 정보를 중국 정부에 유출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
28일 미국 뉴욕 맨해튼 유엔본부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회의실. 뒷면 대형 스크린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트레이드마크인 올리브색 셔츠 차림으로 나타났다. 전날 러시아군이 1000여 명의 민간인이 있던 중부 크레멘추크의 쇼핑몰에 미사일을 발사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난 것을 규탄하던 그는 화상 연설 마지막에 “전쟁으로 숨진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추모하자”며 1분간의 묵념을 제안했다. 화면 속 젤렌스키 대통령이 의자에서 일어난 후 뒤로 물러서서 묵념 자세를 취하자 회의에 참석했던 각국 대표단들도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립한 사람 중에는 러시아 대표인 드미트리 폴리안스키 주유엔 러시아 차석대사도 있었다. 이들은 20초간 묵념을 한 뒤 자리에 앉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각국 대표들을 향해 “매우 감사하다”고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를 ‘테러 국가’로 지정해야 한다”며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공격한 러시아의 행위는 유엔이 속히 ‘테러 국가’의 정의를 명기하고 그런 국가를 처벌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규탄했다. 또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혹은 유엔 특별 대표를 참사가 발생한 크레멘추크로 보내 러시아의 만행을 직접 확인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리처드 밀스 주유엔 미국 차석대사 역시 “러시아 군대는 우크라이나에서 전쟁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증거가 넘쳐난다”며 러시아군이 병원과 학교를 포격하고 달아나는 민간인을 겨냥했다고 비판했다. 로즈마리 디칼로 유엔 정무·평화구축 담당 사무차장 역시 러시아의 침공 후 우크라이나에서 사망자 4731명을 포함해 1만600명이 넘는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폴리안스키 대사는 희생자를 위한 묵념에는 동참했지만 쇼핑몰 공격이 민간인을 노린 것이 아니라 인근 무기고를 겨냥했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는 또 “유엔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로부터 무기를 더 받아내기 위한 선전 장소로 둔갑해서는 안 된다”며 우크라이나와 나토 회원국을 비판했다. 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
40년 만의 최악의 인플레이션으로 미국이 복합적인 경제 위기를 맞고 있는 가운데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고위 인사가 여전히 경기침체 가능성을 부인하는 견해를 밝혔다. 존 윌리엄스 뉴욕연방은행 총재는 28일(현지 시간) CNBC방송 인터뷰에서 “경기침체는 지금 내 ‘베이스 케이스’(기본 시나리오)가 아니다”며 이 같이 말했다. 윌리엄스 총재는 다만 “경제는 강력한데, 금융 여건은 더욱 빡빡해졌다”면서 “올해 성장률이 작년과 비교해서 꽤 둔화될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미국 경제 성장률이 1~1.5%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윌리엄스 총재는 그러나 “이것은 경기침체가 아니다”며 “물가상승 압력을 줄이기 위해 필요한 경기둔화일 뿐”이라고 풀이했다. 윌리엄스 총재는 올해 연말 기준금리가 3~3.5% 수준에 이를 수 있다고 전망하면서 “우린 아직도 (금리 인상을 위해) 한참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이는 연준이 다음달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또 다시 큰 폭의 금리 인상을 고려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연준은 이달 FOMC에서 1994년 이후 처음으로 기준금리를 한꺼번에 0.75%포인트 인상한 바 있다. 하지만 경기침체 가능성을 부인하는 연준의 주장과는 반대로 시장에서는 경기 비관론이 확산되고 있다. 미국의 유명 투자자 캐시 우드 아크인베스트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CNBC방송에 출연해 “우리는 이미 경기침체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돈 나무 언니’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우드 CEO는 “재고 문제가 크다고 생각한다”면서 “내 45년 경력에서 이렇게 재고가 많이 증가한 것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우드 CEO는 “우리도 인플레이션이 이렇게 장기화될 줄은 몰랐다”면서 공급망 차질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도 내다보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인플레이션 가능성을 작년부터 경고한 래리 서머스 전 재무장관도 경기침체가 고착화될 가능성을 경고했다. 서머스 전 장관은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자와 만나 “우리가 일종의 구조적 장기침체(secular stagnation)로 돌아갈 가능성이 60대 40”이라고 예측했다. 이날 경제조사기관 콘퍼런스보드 발표에 따르면 6월 소비자신뢰지수는 98.7로 전달(103.2)보다 하락했고 월가 예상치(100)도 밑돌았다. 이는 연준의 금리인상 움직임에 따라 경기 침체에 대한 공포가 커진 결과로 해석된다.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
물가 급등세가 이어지는 미국에서 ‘인플레이션 수당(inflation relief)’이라 불리는 현금 지원을 하는 주(州)가 늘고 있다. 현금 지원이나 세금 환급 조치는 당장의 물가 고통을 완화할 수는 있어도 인플레이션을 더 부채질할 것이라는 우려도 높다. 캘리포니아주는 물가 상승에 대처하기 위해 가구당 최대 1050달러(약 135만 원)를 나눠주기로 했다. 27일 미 언론에 따르면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주 의회는 이런 내용의 인플레이션 수당 패키지에 합의했다. 총 170억 달러 규모의 경기부양안에는 인플레이션 수당을 비롯해 경유세 유예, 임차료와 전기료 지원 등이 포함됐다. 캘리포니아는 현재 평균 휘발유값이 갤런당 6.32달러로 전국 평균보다 30% 가까이 높다. 주지사실은 “글로벌 물가 상승에 시달리는 주민에게 현금을 돌려주기 위해 즉각적인 행동을 취한 예산”이라고 설명했다. 인플레이션 수당은 세금 환급 형태로 신청자 계좌에 직접 입금되며 소득이 적을수록 더 많이 받는 구조다. 이런 현금 지원을 하는 주는 점점 늘고 있다. 북동부 메인주도 이달 초 주민 약 85만8000명에게 1인당 850달러(약 109만 원)의 인플레이션 수당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재닛 밀스 메인 주지사는 “성실한 메인 주민들 상황이 인플레이션 때문에 벼랑으로 내몰렸다”며 “물가 상승에 대응해 주민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려 한다”고 밝혔다.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도 지난달 주정부 재정 여유분을 활용해 12억 달러 규모의 감세안을 만들었다. 서부 아이다호주도 주민에게 75달러씩 세금을 환급하기 시작했고 인디애나 켄터키 같은 주도 비슷한 방안을 추진 중이다. 40여 년 만에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미국인 10명 중 6명은 월급을 생활비로 다 소진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 개인 간(P2P) 금융 대출회사 렌딩클럽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8%는 ‘하루 벌어 하루 산다(paycheck to paycheck)’고 답했다. 특히 연봉 25만 달러가 넘는 고소득자의 30%도 이같이 생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컨설팅 업체 윌리스타워왓슨 설문조사에서도 연봉 10만 달러(약 1억3000만 원) 이상인 응답자의 36%가 “하루 벌어 하루 산다”고 밝혔다. 근로자 임금이 빠르게 상승하는 추세임에도 더 빠르게 상승하는 물가를 따라잡기 어려운 실상은 신용카드 결제액 증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지난달 뉴욕 연방준비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올 1분기(1∼3월) 미국인 신용카드 결제액은 총 8410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크게 증가했다.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
미국의 물가 급등세가 장기화되면서 ‘인플레이션 수당’(inflation relief)라고 불리는 현금 지원을 하는 주(州)들이 늘고 있다. 이 같은 현금 지원이나 세금 환급 조치는 당장의 물가 고통을 완화할 수는 있어도 결국 인플레이션을 더 부채질할 것이라는 우려도 높다. 캘리포니아주는 물가 상승에 대처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가구당 최대 1050달러(135만 원)의 현금을 나눠주는 인플레이션 수당을 주기로 했다. 27일 미 언론에 따르면 개빈 뉴섬 주지사와 주의회는 이런 내용의 인플레이션 수당 패키지에 합의했다. 전체 170억 달러 규모의 경기부양안에는 인플레이션 수당을 비롯해 경유에 대한 세금 유예, 임차료와 전기료 지원 등이 포함됐다. 캘리포니아는 현재 평균 휘발유값이 갤런당 6.32달러로 전국 평균에 비해서도 30% 가까이 높은 수준이다. 주지사실은 “이번 예산은 글로벌 물가상승에 시달리는 주민들에게 현금을 돌려주기 위해 즉각적인 행동을 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수당은 세금 환급 형태로 신청자의 계좌에 직접 입금되며, 소득이 적을수록 더 많이 받는 구조로 짜여졌다. 가령 연간 소득이 15만 달러(약 1억9300만 원) 미만인 부부가 자녀가 두 명 있을 경우 이들은 모두 1050달러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부부 소득이 그보다 많을 경우 수령액이 점점 줄어들고 50만 달러 이상이면 수급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런 현금 지원을 하는 주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미 북동부 메인주도 이달 초 약 85만8000명의 주민들에게 1인당 850달러(약 109만 원)씩의 인플레이션 수당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재닛 밀스 메인 주지사는 “성실한 메인 주민들의 상황이 인플레이션 때문에 벼랑으로 내몰렸다”며 “물가 상승에 대응해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려 한다”고 밝혔다. 이밖에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도 지난달 주정부 재정 여유분을 활용해 12억 달러 규모의 감세안을 만들었다. 서부 아이다호주도 주민들에게 75달러씩의 세금을 환급하기 시작했고 인디애나 켄터키 등의 주들도 비슷한 내용의 방안을 추진 중이다. 미국이 이처럼 40년 만에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겪는 가운데 미국인 10명 중의 6명은 월급을 생활비로 다 소진하는 힘겨운 생활을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 P2P(개인 간 금융) 대출회사 렌딩클럽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58%는 ‘하루 벌어 하루 산다’(paycheck to paycheck)고 답했다. 특히 연봉 25만 달러가 넘는 고소득자들 중에서도 30%는 이 같은 생활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서방의 제재 폭탄을 맞은 러시아가 결국 104년 만에 채무불이행(디폴트) 상태에 빠졌다. 26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러시아는 이날 외화 표시 국채 이자 약 1억 달러(약 1300억 원)를 투자자들에게 지급하지 못했다. 이 국채 이자의 지급일은 원래 지난달 27일이었지만 이후 30일간의 유예 기간을 거쳐 이날 디폴트 상태가 됐다. 러시아가 외화 표시 채권에 디폴트를 맞은 것은 1918년 볼셰비키 혁명 당시 채무 변제를 거부한 후 104년 만이다. 현대에 와서는 1998년 루블화 국채의 모라토리엄(지불 유예)을 선언하며 세계 금융시장에 충격을 준 적이 있다.○ 러, 서방 제재로 이자 못 갚아러시아의 이번 디폴트는 서방의 제재에 따른 사실상의 ‘강제 디폴트’라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사례들과 다르다. 미국은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러시아 재무부, 중앙은행과의 금융 거래를 금지하는 한편 러시아가 해외에 보유한 달러화 자산을 동결하는 제재에 나섰다. 그러면서 채권자들이 러시아로부터 원리금을 받을 수 있도록 5월 말까지 한시적으로 러시아의 외화 자산을 채무 상환용으로 쓸 수 있게 허용했다. 그러나 이 유예 기간이 끝나면서 러시아는 국채 이자를 지급할 방법이 사라졌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국채 이자를 지급할 외화가 충분한데도 제재 때문에 인위적인 디폴트를 맞게 됐다”고 서방을 맹비난해 왔다. 외화가 바닥나고 국가신용등급이 추락하면서 생기는 일반적인 디폴트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러시아가 이날 이자 지급에 실패했지만 공식적인 디폴트 선언은 당분간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관례상 신용평가회사가 디폴트 여부를 판정해야 하지만 서방의 제재로 러시아 국채의 신용도를 판단하는 데 한계가 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27일 “이 상황을 디폴트라고 부를 근거가 없다. 디폴트 관련 주장은 완전히 잘못됐다”며 “우리 문제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5월 만기 채권 이자를 국제예탁결제회사에 지급했는데 서방의 제재로 개별 투자자에게 이자가 입금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美 “러 경제 내년 8∼15% 감소”이번 디폴트는 국제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러시아가 이미 제재로 인해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철저히 고립돼 있는 데다, 러시아의 외화 자산이 해외 각지에 동결돼 있을 뿐 제재만 풀리면 이자 상환이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러시아의 외화 부채는 400억 달러다. 이 중 외국인이 갖고 있는 채권은 절반인 200억 달러 안팎이다. 러시아의 외환보유액은 이보다 훨씬 많은 6400억 달러다. AP통신은 “시장 전문가들은 이번 디폴트가 1998년 모라토리엄 당시의 충격을 몰고 오진 않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당시 러시아의 디폴트는 미국 유명 헤지펀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의 파산으로 이어지며 미국 정부가 구제금융에 나서는 등 글로벌 금융시장에 큰 충격을 줬다. 물론 러시아의 이번 디폴트는 미국 주도의 제재가 러시아를 고립으로 몰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다. 서방의 제재로 어려움에 처한 러시아 경제를 더욱 위기로 내몰 것으로도 전망된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이날 CNN 방송에서 “우리는 러시아의 경제 규모가 내년에 8∼15% 감소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며 “러시아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인위적으로 루블화 가치를 떠받치고 있다”고 말했다.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
요즘 미국 뉴욕 맨해튼 유엔본부 인근 44번가에서는 도로명(名)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한창이다. 이곳 주(駐)유엔 북한 대표부 앞을 ‘오토 웜비어 길’로 만들자는 것이다. 21세 대학생이던 웜비어는 북한 여행을 갔다가 정치 선전물을 훔쳤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을 받고 2017년 숨졌다. 미국 정계는 원래 북한 인권 문제에 상당히 비판적인 분위기인 데다, 며칠 전 뉴욕시장도 도로명 변경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잔인무도한 정권을 상징하는 그 이름을 앞으로 뉴욕의 북한 외교관들은 명함에 새기고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웜비어는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고교 졸업식에서 대표 연설을 한 그는 명문 주립대에 입학했고 월가 취업도 사실상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호기심에 위험을 무릅쓴 대가는 혹독했다. 1년 반 동안 북한에 억류됐다가 겨우 부모 품으로 빠져나온 웜비어의 몸은 거의 시체가 된 상태였다. 웜비어를 마주한 아버지 프레드 씨는 “아들은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다가 몸을 격렬하게 떨더니 짐승 같은 소리를 질렀다. 아랫니는 누군가가 펜치로 재배열한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아들을 엿새 만에 떠나보낸 웜비어의 부모는 가해자에 대한 처절한 응징을 시작했다. 고문, 살해 혐의로 북한 정권을 제소한 부부는 워싱턴 법원에서 5억 달러가 넘는 배상 판결을 받아냈다. 판결 효력을 비웃는 북한에 대응해 이들은 손수 전 세계에 숨겨져 있는 북한 자산 추적에 나서 그 일부를 받아냈다. 또 김정은의 악행을 국제사회에 알리면서 대북제재 필요성을 호소했다. 웜비어의 어머니 신디 씨는 “북한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그들이 무너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면서 김정은을 향해 “지옥에서 보자”고 일갈했다. 국가도 함께 나섰다. 연방정부는 웜비어가 사망한 2017년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다시 지정했고 매년 추모 성명을 내며 그를 기억했다. 의회도 북한을 국제금융시스템에서 퇴출시키는 내용의 ‘오토 웜비어 법안’을 통과시켰고, 최근에는 북한 주민에 대한 정보 통제 가담자를 제재하는 법안도 웜비어 이름을 붙여 처리했다. 물론 이 사건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북-미 관계나 정치 논리에 종종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도 자국민이 북한에 잔혹하게 희생됐다는 사실, 또 이를 끝까지 기억하고 처벌해야 한다는 대원칙에는 모두가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2년 전 북한군에 총살당한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대준 씨 사건에 대응하는 우리 모습은 웜비어의 경우와 달랐다. 정부는 이 씨 상황을 알고도 구조 노력에 소홀했고, 그가 사망한 뒤에도 유족의 진실 규명 요구를 묵살했다. 또 가해자를 응징하기보다는 오히려 희생자의 안타까운 개인사를 들춰 가면서 ‘월북 프레임’으로 사건의 본질을 흐렸다. 원만한 대북 관계를 중시하던 당시 정부 여당에선 “북한 사과를 받았으니 됐다” “소송은 의미가 없다”면서 사건을 서둘러 봉합하려는 시도가 나왔다. 김정은을 지옥까지 쫓아가겠다는 웜비어 부모, 또 이들에게 적극 힘을 실어주는 미국의 행정 입법 사법 시스템과는 차이가 컸다. 웜비어는 국제사회에서 북한 정권의 잔혹함과 인권 유린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그의 죽음에 분노한 미국 전체가 똘똘 뭉쳐 가해자에게 끝까지 책임을 물은 결과다. 뒤늦은 면이 크지만 한국도 이런 모습을 보고 배웠으면 한다. 그래서 우리 국민의 생명을 부당하게 앗아갔을 때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북한 정권이 뼈저리게 깨닫게 되길 희망한다. 유재동 뉴욕 특파원 jarrett@donga.com}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서방의 제재 폭탄을 맞은 러시아가 결국 104년 만에 채무불이행(디폴트) 상태에 빠졌다. 26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러시아는 이날 외화표시 국채 이자 약 1억 달러(약 1300억 원)를 투자자들에게 지급하지 못 했다. 이 국채 이자의 지급일은 원래 지난달 27일이었지만 그 후 30일의 유예 기간이 있어서 이날 디폴트가 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이날 오후까지 러시아가 국채 이자 지급에 실패했다고 전했다. 러시아가 외화 표시 채권에 디폴트를 맞은 것은 1918년 볼셰비키 혁명 당시 채무 변제를 거부한 이후 104년 만에 처음이다. 현대에 와서는 1998년 루블화 국채의 모라토리엄(지불 유예)을 선언하며 세계 금융시장에 충격을 준 적이 있다. 이번 러시아의 디폴트는 서방의 제재에 따른 사실상의 ‘강제 디폴트’라는 점에서 지금까지 사례들과 다르다. 올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미국은 러시아 재무부, 중앙은행과 금융 거래를 금지하는 한편 러시아가 해외에 보유한 달러화 자산을 동결하는 제재에 나섰다. 다만 그러면서 채권자들이 러시아로부터 원리금을 받을 수 있도록 5월 말까지 한시적으로 러시아의 외화 자산을 채무 상환용으로 쓸 수 있게 허용했다. 그러나 이 유예 기간이 끝나면서 러시아는 국채 이자를 지급할 방법이 사라진 것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국채 이자를 지급할 외화가 충분한 데도 제재 때문에 인위적인 디폴트를 맞게 됐다”고 서방을 맹비난해 왔다. 외화가 바닥나고 국가신용등급이 추락하면서 생기는 일반적인 디폴트와는 성격이 크게 다른 것이다. 러시아가 이날 이자 지급에 실패했지만 공식적인 디폴트 선언은 당분간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관례상 신용평가회사가 디폴트 여부를 판정해야 하지만 서방의 제재로 러시아 국채의 신용도를 판단하는 데 한계가 있다. 또 러시아 국채를 들고 있는 투자자의 25% 이상이 디폴트 선언을 하고 법원에 이자 지급 소송을 내는 시나리오도 있다. 이 경우 채권자가 러시아 정부와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 역시 서방의 제재로 불가능하다. 결국 투자자들은 디폴트 선언 없이 당분간은 이렇다할 ‘액션’을 취하지 않고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가능성이 크다. 블룸버그통신은 “투자자들은 당장 어떤 행동을 취할 필요가 없다”면서 “전쟁 상황을 주시하면서 제재가 완화되기를 바라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디폴트는 국제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러시아가 이미 제재로 인해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철저히 고립돼 있는 데다, 러시아의 외화 자산이 해외 각지에 동결돼 있다 뿐이지 제재만 풀리면 이자 상환에 충분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현재 러시아가 지고 있는 외화 부채는 400억 달러로 이중 외국인이 들고 있는 채권은 절반인 200억 달러 안팎이다. 러시아의 외환보유고는 이보다 훨씬 많은 6400억 달러다. AP통신은 “시장 전문가들은 이번 디폴트가 1998년 모라토리엄 당시의 충격을 몰고 오진 않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당시 러시아의 디폴트는 미국 유명 헤지펀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의 파산으로 이어지며 미국 정부가 구제금융에 나서는 등 글로벌 금융시장에 큰 충격을 줬다. 물론 러시아의 디폴트는 서방의 제재로 상당한 어려움에 처한 러시아 경제를 더 위기에 내몰 것으로 전망된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이날 CNN방송에 출연해 “우리는 러시아 경제 규모가 내년에 8~15% 감소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며 “루블화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인위적으로 떠받쳐지고 있다”고 평가했다.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
미국이 내년 회계연도(2022년 10월∼2023년 9월) 국방예산 내역을 담은 국방수권법안(NDAA)에 주한미군 규모를 현 수준으로 유지한다고 명시했다. 또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 후속 조치로 국방장관으로 하여금 내년 3월까지 한국에 대한 방위태세 강화 방안을 보고하도록 했다. 23일(현지 시간) 미 의회에 따르면 하원 군사위원회는 2023년 NDAA 법안을 찬성 57표, 반대 1표로 통과시켰다. 앞서 16일 상원 군사위원회도 같은 법안의 심사를 마무리해 이 법안은 본회의 통과를 앞두게 됐다. 하원은 이 법안에 “주한미군의 존재는 북한의 침략에 대한 강력한 억지력을 발휘한다. 한국에 배치된 2만8500명의 미군 병력은 한반도를 안정시킬 뿐 아니라 이 지역 내 모든 동맹국에 안도감을 주고 있다”면서 주한미군 규모를 명시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한국의 강력한 기존 군대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NDAA 법안에는 한미 상호방위조약 강화 및 미국의 확장 억제 실행 방안을 구체화하는 항목이 추가됐다. 법안에는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은 5월 21일 공동성명에서 핵과 재래식 무기, 미사일 등 미국의 모든 방어 역량을 동원한 확장 억제 약속을 확인했다”면서 “두 정상은 빠른 시일 내에 고위급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를 재개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하원은 관련 조치로 “국방장관은 내년 3월 1일까지 한반도 주변 군사 훈련 범위와 규모, 북한의 불안정 행위 추가 저지 방안, 중국과 러시아 위협에 대응한 노력 등을 포함해 한국에 대한 방위를 장기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보고하라”고 명시했다. 이 법안은 본회의 표결과 상·하원의 조정 과정을 거쳐 바이든 대통령에게 전달되며, 올 연말 공포될 것으로 전망된다.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