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20대 중반에 고향 경북 군위를 떠나 대구와 경북 칠곡 등에서 생활했어요. 30대 초반에 결혼한 뒤 30대 중반부터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했습니다. 2009년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당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은 것입니다. 처음엔 술로 달랬지만 사춘기 아이들을 보면서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 때 저를 지켜준 게 바로 보디빌딩입니다.”지난해 12월 18일 경기도 수원메쎄에서 열린 2021 미스터&미즈코리아 마스터스 남자 60세 이상부에서 정상에 오른 신일동 경북 군위군보디빌딩협회 회장(61)은 근육을 키우며 아내 잃은 슬픔을 극복했다.평소 다양한 운동을 좋아했던 신 회장은 20대 후반부터 보디빌딩을 시작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몸을 만들어 보디빌딩 대회에도 출전했었다. 하지만 객지를 떠돌면서는 사는 데 바빠 체계적이기 보다는 건강 유지 정도로만 운동했다. 아내를 보낸 뒤엔 웨이트트레이닝을 운동이라기보다는 몸을 학대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술도 많이 마셨지만 가학적으로 운동해 몸이 피곤해야 그나마 잊을 수 있었다”고 했다.방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1남 2녀 아이들을 위해 아빠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고 당시 첫째 딸이 고등학교 2학년. 막내가 초등학교 6학년으로 민감한 시기였다. 그래서 운동을 체계적으로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2012년 군위군보디빌딩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또 다른 변화의 기회를 맞았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 트레이너들에게 대회 출전 경험을 주려고 하는데 협회가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해서 만들었다. 보디빌딩 관계자들이 당시 운동을 열심히 했던 내게 회장을 제안해 하게 됐다”고 했다. 선수들 뒷바라지 하면서 대회에 따라 다니다보니 젊었을 때 대회에 출전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다시 대회에 출전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2013년 6월 미스터&미즈코리아 경북선발대회에 출전해 중년부에서 3위를 했습니다. 이게 첫 대회였습니다. 목표를 설정하고 운동에 집중한 뒤 대회에 출전하는 과정을 반복하다보니 과거 아픔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직장에 다니면서도 하루 2~3시간 씩 훈련했다. 큰 대회는 아직 엄두를 못내 각종 생활체육 보디빌딩 대회 60세 이하부에 출전했다. 꾸준히 성적을 냈다. 2015~2016년 준우승만 4번을 했다. 2017년 8월 문화체육관광부 전국 생활체육보디빌딩대회 60세 이하부에서 처음 정상에 올랐다. 한 달 뒤 대한체육회장배 전국 생활체육보디빌딩대회 60세 이하부에서도 우승했다.“대회에 출전하니 아이들이 좋아했습니다. 특히 큰 딸과 막내딸은 대회 때마다 경기장을 찾아 ‘프로탄(피부색 바꿔주는 물질)’을 발라주며 응원했죠. 경북 지역에서는 저보다 우리 딸들이 더 유명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나도 덩달아 즐거웠죠. 각종 대회 우승으로 아빠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보디빌딩은 신 회장 삶도 크게 바꿨다. 평소 막걸리 마시는 것을 좋아했는데 근육을 키우려면 술을 줄여야 했다. 자연스럽게 절주가 됐다. 단백질 위주의 간편한 식단은 주로 혼자 살아가는 그에게 여러 가지 챙겨 먹어야하는 수고를 덜어줬다.2020년부터 목표를 상향 조정했다. 국내 메이저대회인 YMCA와 미스터코리아 대회에서 우승하겠다는 각오로 훈련에 임했다. 하루 2회로 나눠 5~6시간 씩 훈련했다. 2020년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이 터졌지만 훈련을 멈추진 않았다.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군위문화체육센터가 코로나19 정부지침에 따라 몇 개월씩 문을 닫았지만 대구와 칠곡 등 문을 연 헬스클럽을 찾아다니며 ‘원정 훈련’을 했다. 그리고 2020년 10월 2020년 미스터&미즈코리아 마스터스 남자 60세 이상부에서 3위를 했고, 한 달 뒤 열린 YMCA 대회에선 정상에 올랐다. 지난해 12월 5일 열린 YMCA 대회에서 60세 이상부 2연패를 달성했고 미스터&미즈코리아에서 대회 첫 정상에 오른 것이다.“뿌듯했습니다. 특히 지난해 12월 12일 결혼한 큰 딸이 너무 좋아했습니다. 메이저 두 대회에 참가하느라 17kg이나 뺀 몰골로 혼주석에 앉아 미안했는데…. 엄마를 일찍 보내면서 가정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어느 정도 털어낼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은 성적을 낼 땐 성취감도 느낍니다. 그런 나를 아이들이 자랑스러워합니다.”신 회장은 보디빌딩에서 운동도 중요하지만 음식조절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12월 18일 대회를 마친 뒤 10여일 가량 일반식을 먹은 그의 체중은 10kg이나 증가했다.“대회 때 65kg이었는데 지금은 75kg입니다. 대회를 준비하지 않는 비 시즌 때 최대 82kg 나가니 체중 변화가 얼마니 심한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느냐면 식단조절이 체중조절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고 싶어서입니다.”신 회장은 “운동도 중요하지만 몸에 미치는 영향은 운동이 20~30%, 식단 조절이 70~80%”라고 강조했다. 아직까지 신 회장은 대회를 준비하며 언제든 몸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균형잡힌 몸매를 유지하려면 먹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얘기다.“이런 것입니다. 단백질 위주의 식단이라면 단백질을 하루 체중 1kg당 2g을 먹어야 합니다. 제 지금 체중으로 계산하면 150g이상을 먹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단백질은 소고기나 닭 가슴살 150g이 아니라 순수 단백질 150g입니다. 일반적으로 닭고기나 소고기 150g으로 생각하니 보디빌딩 식단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절대 어렵지 않습니다.”소고기의 경우 우둔살은 100g당 순수 단백질이 21g 들어있다. 체중 60kg인 사람은 하루 120g의 단백질이 필요하니 하루에 우둔살 600g 이상을 먹어야 한다. 여기에 탄수화물과 야채나 과일까지 먹어야 하니 하루 기준으로 따지면 적은 양이 아니다. 닭 가슴살은 100g당 28g의 순수 단백질을 함유하고 있다. 신 회장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순수 단백질이 아닌 고기 자체의 무게로 계산을 하다보니 보디빌딩은 식단 때문에 어렵다고 생각한다. 절대 아니다”고 말했다.“과거엔 탄수화물을 전혀 먹지 않는 무탄 다이어트를 했습니다. 요즘은 그게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는 연구결과가 나와서 무탄이 아니라 고탄, 저탄 조절하면서 식단을 만들고 있습니다. 저의 경우엔 평상시엔 일반식을 하다 대회를 앞두고는 단백질 위주로 바꾸면서 고구마를 하루에 6번 나눠서 먹는 식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야채와 과일도 많이 먹는 식단입니다. 이렇게 해도 근육을 키우고 선명도를 높이는데 큰 문제없습니다.”근육을 키우면서 건강은 자연스럽게 유지되고 있다. 그는 “내 또래 중 내가 가장 젊어 보이고 건강하다. 어떤 옷을 입어도 속칭 자세가 나온다. 모두 웨이트트레이닝 덕분이다”고 말했다.“솔직히 매일 근육운동을 하는 게 쉽지는 않아요. 다소 고통이 따르기는 합니다. 하지만 땀을 흘리는 자체가 어느 순간 즐겁습니다. 그리고 몸의 각이 잡히는 것이 보이면 희열을 느낍니다. 몸은 운동하면 할수록 아름답게 바뀝니다.”신 회장은 지금은 직장을 다니며 개인적으로 운동을 하고 있어 아직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조만간 지도자 자격증을 획득해 100세 시대를 맞는 어르신들에게 도움을 줄 계획이다.“과거엔 메이저 보디빌딩 대회에서 우승하면 지도자 자격증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젠 자격증 시험을 봐야 합니다. 은퇴를 앞두고 있으니 지도자 자격증을 따 건강하게 살고 싶은 분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신 회장은 또 다른 목표도 세웠다. 올 10월 국내에서 열릴 예정인 세계 보디빌딩&보디피트니스 대회 마스터스 부문에서 우승하는 것이다. 신 회장에게 이제 보디빌딩은 삶의 유일한 낙이자 희망이다. 그는 “아이들도 건강하게 보디빌딩에 집중하고 있는 아빠를 응원하며 걱정을 덜고 있다. 죽을 때까지 운동을 멈출 수 없는 이유”라며 웃었다.군위=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불의의 사고로 떠나보낸 아내의 빈자리를 지키기 위해 보디빌딩에 집중해 대한민국 마스터스 최고가 됐다. 18일 열린 2021 미스터&미즈코리아 마스터스 남자 60세 이상부에서 정상에 오른 신일동 경북 군위군보디빌딩협회 회장(61)은 근육을 키우며 아내 잃은 슬픔을 극복했다. “20대 중반에 고향을 떠나 대구와 경북 칠곡 등에서 생활했다. 결혼한 뒤 30대 중반에 고향 경북 군위로 돌아와 정착했다. 2009년 청천벽력 같은 일을 당했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아내를 잃은 것이다. 처음엔 술로 달랬지만 사춘기 아이들을 보면서 정신을 차렸다.” 평소 다양한 운동을 좋아했던 신 회장은 20대 후반부터 보디빌딩을 시작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몸을 만들어 보디빌딩 대회에도 출전했었다. 하지만 객지를 떠돌면서는 사는 데 바빠 체계적이기보다는 건강 유지 정도로만 운동했다. 아내를 보낸 뒤엔 웨이트트레이닝을 운동이라기보다는 몸을 학대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가학적으로 운동해야 그나마 잊을 수 있었다”고 했다. 방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1남 2녀 아이들을 위해 아빠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운동을 체계적으로 다시 시작했다. 2012년 군위군보디빌딩협회 회장을 맡았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 트레이너들에게 대회 출전 경험을 주려고 하는데 협회가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해서 만들었다. 보디빌딩 관계자들이 당시 운동을 열심히 했던 내게 회장직을 제안해 하게 됐다”고 했다. 선수들 뒷바라지하면서 대회에 따라다니다 보니 젊었을 때 대회에 출전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다시 대회에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2013년 6월 미스터&미즈코리아 경북선발대회에 출전해 중년부에서 3위를 했다. 목표를 설정하고 운동에 집중한 뒤 대회에 출전하다 보니 과거 아픔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하루 2, 3시간씩 훈련했다. 큰 대회는 아직 엄두를 못 내 각종 생활체육 보디빌딩 대회 60세 이하부에 출전했다. 꾸준히 성적을 냈다. 2015, 2016년 준우승만 4번을 했다. 2017년 8월 문화체육관광부 전국 생활체육보디빌딩대회 60세 이하부에서 처음 정상에 올랐다. 한 달 뒤 대한체육회장배 전국 생활체육보디빌딩대회 60세 이하부에서도 우승했다. “대회에 출전하니 아이들이 좋아했다. 큰딸과 막내딸은 대회 때마다 경기장을 찾아 ‘프로탄’(피부색을 바꿔주는 물질)을 발라주며 응원했다. 경북 지역에서는 나보다 우리 딸들이 더 유명할 정도였다. 그러니 나도 덩달아 즐거웠다. 각종 대회 우승으로 아빠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난해부터 목표를 상향 조정했다. 국내 메이저 대회인 YMCA와 미스터코리아 대회에서 우승하겠다는 각오로 훈련에 임했다. 하루 2회로 나눠 5, 6시간씩 훈련했다. 지난해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터졌지만 훈련을 멈추진 않았다.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군위문화체육센터가 코로나19 정부 지침에 따라 몇 개월씩 문을 닫았지만 대구와 칠곡 등 문을 연 헬스클럽을 찾아다니며 ‘원정 훈련’을 했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2020년 미스터&미즈코리아 마스터스 남자 60세 이상부에서 3위를 했고, 한 달 뒤 열린 YMCA 대회에선 정상에 올랐다. 올 12월 5일 열린 YMCA 대회에서 60세 이상부 2연패를 달성했고 미스터&미즈코리아에서 대회 첫 정상에 오른 것이다. “뿌듯했다. 이달 12일 결혼한 큰딸이 너무 좋아했다. 메이저 두 대회에 참가하느라 17kg이나 뺀 몰골로 혼주석에 앉아 미안했는데…. 엄마를 일찍 보내면서 가정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어느 정도 털어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좋은 성적을 낼 땐 성취감도 느낀다. 그런 나를 아이들이 자랑스러워한다.” 신 회장은 또 다른 목표도 세웠다. 내년 10월 국내에서 열릴 예정인 세계 보디빌딩&보디피트니스 대회 마스터스 부문에서 우승하는 것이다. 신 회장에게 이제 보디빌딩은 삶의 유일한 낙이자 희망이다. 그는 “아이들도 건강하게 보디빌딩에 집중하고 있는 아빠를 응원하며 걱정을 덜고 있다. 죽을 때까지 운동을 멈출 수 없는 이유”라며 웃었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초등학교 4학년부터 엘리트 육상선수를 시작했다. 부산체고를 졸업하고 바로 실업팀 포항시청에 입단했다. 100m 허들과 세단뛰기를 병행했다. 173cm의 늘씬한 몸매를 과시하며 트랙과 필드를 누비다 은퇴를 했다. 주위에서 보디빌딩을 해보라는 말에 근육운동을 시작해 마흔을 넘어서도 국내 최고를 넘어 아시아 최고가 됐다. 위암까지 이겨낸 그는 이제 세계 최고를 꿈꾼다. 12월 17, 18일 경기도 수원 메쎄에서 열린 제73회 미스터& 제16회 미즈코리아 선발대회(미스터코리아)에서 미즈 코리아에 등극한 최서영 씨(41·경남 S-휘트니스) 얘기다. “25세 쯤 은퇴를 하고 선수시절 입학한 동국대 사회체육과에서 공부를 하면서 헬스클럽을 다녔습니다. 주위에서 보디빌딩을 하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죠. 제 몸이 예쁘다고 했어요. 그런데 운동도 운동이지만 식단 조절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말에 안한다고 했어요. 육상선수 할 때도 체중 조절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었는데 또 그렇게 힘들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육상선수 시절에도 웨이트트레이닝은 많이 했다. 단거리의 파워를 키우기 위해서 무게를 최대한 높이고 순간적으로 힘을 내는 훈련을 해 와서 웨이트트레이닝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계속 헬스클럽을 다니며 운동을 한 이유다. 다만 본격 대회 출전을 하진 않았다. “사이클도 많이 탔어요. 사이클을 타다보니 지방이 빠지고 몸매 라인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프로필 사진이나 찍어 볼까 하면서 운동을 좀 열심히 하다 얼떨결에 부산의 작은 피트니스대회에 출전했습니다.” 2014년 5월 이었다. 첫 출전에 2등을 했다. 최 씨는 “무대에 서니까. 너무 좋았다. 육상과는 다른 희열감을 느꼈다. 조명이 환하게 비추는 가운데 나를 바라봐 주는 관객을 향해서 연기를 펼치는 느낌…. 다른 세계에 온 듯했다. 그때부터 근육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경남 양산으로 이사를 하면서 당시 양산시보디빌딩협회 회장이 운영하는 피트니스센터에 등록하면서 그해 11월부터 체계적으로 운동하게 됐다. “육상과 보디빌딩이 비슷했어요. 모두 혼자서 해야 하는 운동이죠. 보디빌딩도 혼자서 훈련한 뒤 심사위원과 관객들에게 평가를 받아요. 다만 보디빌딩은 식단이 힘들었어요. 탄수화물을 배제해야 하고 대회에 임박해서는 수분까지 조절해야 합니다.” 2015년 7월 미스터코리아 대회 보디피트니스 여자부 +168cm에서 우승하고 청천벽력 같은 일을 당했다. “우승해 취해 있다 한 달 뒤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어요. 음식을 절제하다 막 먹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위암 3기라고. 바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죠. 중간에 한번 쓰러졌었는데 작은 병원에서 물을 잘못 먹었다며 소염진통제 처방으로 돌려보냈었죠. 참 나.” 혈변를 누고 피를 토했던 최 씨는 의사를 4번 찾아갔다. 절개가 아닌 복강경으로 수술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는 “전 꼭 보디빌딩 국가대표가 되고 싶었다. 당시 35세라 한창 나이인데 배를 다 갈라놓으면 보기 흉하지 않나. 결국 의사 선생님이 ‘그럼 수술 중 절개할 상황이면 절개해도 좋다’는 각서를 쓰고 수술 했다”고 했다. 위 70%를 잘라냈다. “1년간 8차례 항암 치료를 받는 게 지옥이었어요. TV 등을 보면 암에 걸리면 산에 들어가서 살았다는 사람들을 봐서 산으로 들어갈까도 고민했죠. 그랬더니 관장님이 ‘뭔 소리냐, 잘 먹으면서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해서 항암 2차 치료를 받은 뒤 운동을 시작했습니다.”항암 치료에 몸무게가 57kg까지 빠졌다. 비 시즌 때 운동 안하면 72kg까지 나갔었다. 키가 커 뚱뚱해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57kg이 되자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다른 사람들은 살 빠진 저 보러 그냥 날씬해졌다고 했는데 제가 볼 땐 근육이 다 빠져 너무 앙상해 보였죠. 제 모습이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운동을 해서 다시 자신감을 찾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운동하면 볼륨감이 살아날 것이라 생각했죠. 몸은 기억하니까. 그런데 항암치료 할 땐 몸이 기억 못하더라고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수술 전 10kg 아령을 들었다면 1kg부터 다시 시작했다. 암컬을 10kg으로 15개씩 3~5세트 하던 것을 1kg으로 100개씩 하는 식이다. 근육이 없어 많은 무게를 못 들었다. 스쾃도 맨몸으로 했다. 그런데 운동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하루 2시간 운동하고 오면 22시간을 잤어요. 피곤해서 다른 것은 전혀 할 수 없었죠. 그런데 그 2시간 운동이 너무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8개월을 운동했다. 항암 치료 끝나고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의사가 깜짝 놀랐단다. 보통 항암치료를 받으면 골다공증이 오는데 모든 골밀도 수치에서 20대로 나온 것이다. 항암치료하면서 저항운동(웨이트트레이닝)을 계속해서 그렇다는 평가를 받았다. “먹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계란 반쪽부터 시작해 늘려갔는데…. 단백질은 섭취해야 하는데 그만큼 소화를 시키지 못했죠. 그래서 보충제 등도 많이 먹었어요.” 2016년 말 수술한 부위 장중첩으로 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운동하지 말라고 했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2017년 초 아시아선수권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갔지만 떨어졌다. 회복이 덜된 상태였다. 그해 8월 제주도에서 얼린 미스터코리아 대회에선 미즈 코리아(여자부) 대상을 차지했다. “전 매 대회에서 복근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수술을 받다보니 그 부분 감각이 떨어져 운동을 해도 잘 근육이 잡히질 않았어요.” 2017년 맹활약한 결과 국가대표가 돼 2018년 몽골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에 출전해 4등을 했다. 그리고 2019년 우여곡절 끝에 아시아선수권에서 정상에 올랐다. “부족한 부분을 보강해 1년 체계적으로 운동했어요. 그래서 그해 4월 1, 2차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했는데 2차 다음날 다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어요. 또 장중첩으로 수술 받았죠.” 중국에서 열리는 아시아선수권이 한 달 남은 시점. 수술부위 실밥이 터졌다고 했다. 다시 수술했지만 아시아선수권을 포기할 순 없었다. “그런 게 있죠. 1년 죽어라 연습하며 모든 것을 쏟아 부었는데…. 포기가 쉽지 않았어요.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대한보디빌딩협회에 얘기 안하고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163cm급에서 우승한 뒤 관계자들에게 얘기했더니 엄청 놀랐죠. 그 대회에서 그랑프리까지 3관왕을 차지했습니다. 너무 기뻐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2019년 9월 다시 장중첩으로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2개월 뒤 세계피트니스선수권대회에 출전해 5위를 했다. “안타까웠지만 세계무대가 어떤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바비인형에 근육만 입혀놓은 듯한 멋진 선수들이 즐비했습니다. 내년 10월에 한국에서 세계피트니스대회가 열리는데 꼭 상위권에 오르고 싶습니다.” 지난해와 올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 탓에 세계피트니스선수권에 가지 못했다. “올해 미즈코리아는 2017년 이후 4년 만에 우승입니다. 제가 세계무대에서도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평가가 좋았습니다. 70%는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내년엔 꼭 세계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내겠습니다.”암수술 이후 보디빌딩은 그의 삶이자 목표가 됐다. “위암을 겪고 나서 많이 바뀌었습니다. 과거 운동은 직업적으로 먹고살기 위해 했습니다. 이젠 살기 위해 운동합니다. 건강하려면 근육에 힘이 있어야 합니다. 운동을 해야 하죠. 하루 이틀 안하면 금방 몸이 반응을 합니다. 또 목표를 정하고 그것에 투자하고 결과를 내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도 제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대전지방법원 판사시절이던 1969년 어느 날 당시 법원장이었던 고 이일규 전 대법원장께서 지리산에 가자고 했어요. 뭐 가끔 뒷산 정도 오르는 수준이라 힘들 것 같았지만 상사가 가자고 하니 따라 나섰죠. 천왕봉까지 올랐습니다. 힘들 줄 알았는데 그다지 힘들지 않았어요. 해냈다는 성취감도 느꼈죠. 그 때 산의 매력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그 이후 산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이재후 엄홍길휴먼재단 이사장(81)은 “산에서 많이 배웠고 행복했다”고 말한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등산으로 건강하고 즐거운 노년을 만들어가고 있다. 첫 지리산 산행 때의 에피소드가 재밌다. “당시 경남 진주로 해서 지리산에 올랐어요. 그 때 허우천이란 분이 안내를 했죠. 그는 가족을 버리고 지리산 중턱에 막을 치고 혼자 살고 있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 사람들이 허우천 씨를 산신령이라고 부르더군요. 1960년대에 수백 번 지리산을 오르내리며 등산로를 정비하고 안내판을 설치해서 사람들이 그리 부른다더군요. 몇 년 뒤 가보니 그 분이 사라졌는데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대요.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진짜 산신령이 됐다는 얘기가 떠돌았죠.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는데 산을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면서 놀랐지요.” 이 이사장이 바로 등산 마니아가 된 것은 아니다. 1970년 서울로 올라온 이 이사장은 가끔 산행을 하긴 했지만 마니아 수준은 아니었다. 주로 테니스를 치며 건강을 다졌다. 그는 “당시 법조계에선 테니스가 유행이었다. 재미도 있고 건강관리에도 좋았다”고 회상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산을 타게 된 것은 서울고 동문 산악회에 가입한 1970년대 후반부터. 판사 생활을 접고 김앤장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를 맡으면서 서울고 산악회, 서울법대 동기들과 전국의 명산들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네팔 히말라야 등 해외 트레킹도 다녀왔다. “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줍니다. 산에 가면 좋은 공기를 마실 수 있죠. 또 경관이 얼마나 좋습니다. 나무, 꽃, 바위, 개울, 그리고 정상에서 보는 황홀함…. 산을 타면 건강에도 좋죠. 힘들게 정상에 오른 뒤 느끼는 성취감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함께 하는 친구들과 이런저런 사는 얘기하고, 막걸리도 한잔하고…. 이렇게 좋은 운동이 어디 있나요. 대한민국은 산이 70%라 맘만 먹으면 언제든 오를 수 있습니다.” 이 변호사는 20세 무렵부터 60년 넘게 북한산 자락인 서울 정릉에 살고 있어 산과는 친하게 지냈다. 본격 등산은 아니지만 틈나는 대로 산책을 했고 나중에 등산 마니아가 된 것이다. 지금은 법조계의 ‘등산 고수’로 통한다. 서울대 법대를 수석 입학한 그는 해병대 법무관으로 군 생활을 했고 1965년 대전지법에서 판사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지법 판사, 서울고법 판사, 대법원 재판연구관도 지냈다. 판사 생활 중에 미국소송법을 연구하기 위해 미국 조지타운 법대에서 1년 공부하기도 했다. 2008년 히말라야 16좌를 오른 엄홍길 대장(61)을 만나면서 새로운 길도 함께 개척하고 있다. 엄 대장이 “이제 산에서 내려와 인생의 16좌를 오르겠다”며 휴먼재단을 만들겠다고 이 이사장을 찾은 것이다. 엄 대장은 평소 산을 좋아하고 히말라야도 여러 차례 다녀온 그에게 이사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엄 대장은 어려운 이웃에게 희망과 사랑을 나눠주자는 취지로 휴먼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의 중점 사업이 네팔의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지어주는 사업이다. 이사장도 취지가 너무 좋아 흔쾌히 동의했다. 그는 “엄 대장이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난 옆에서 보좌하는 역할”이라고 했다. 엄 대장은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땐 늘 이사장님이 잘 판단해주신다”고 했다. 지난해와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 탓에 못 갔지만 이 이사장도 매년 네팔에서 열리는 학교 착공식과 준공식에 참여했다. 히말라야 4000m 고지까지 4박5일 올라야 하는 힘겨운 일정이지만 이 이사장은 매번 엄 대장과 함께 했다. 엄 대장은 “한국 나이 80세인 2019년에도 히말라야를 거뜬히 오르셨다”고 했다. 당시 네팔 랑탕에서 엄 대장 등 대원들이 이 이사장에게 ‘팔순 생일잔치’를 벌여주기도 했다. 이 이사장은 “네팔 4000m 고지에 학교를 세워줬을 때 아이들이 너무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했다. 엄 대장이 참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이 이사장과 엄 대장은 14년 째 찰떡궁합을 과시하며 재단을 이끌고 있다. 당초 재단은 16개의 학교를 지을 계획이었지만 벌써 19번째 학교 후원까지 약속 받아 놓은 상태다. 이 이사장은 지금도 매달 진행하는 휴먼재단 정기산행 때 북한산 백운대까지 다녀오는 4~5시간 일정의 산행도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다. 이런 강철 체력의 원동력이 걷기다. 그는 특별한 일 아니면 걸어서 다닌다. 아직도 매일 법률사무소로 출근하는 그는 헬스클럽까지 왕복 2km도 걸어 다닌다. 헬스클럽에서도 걷고 웨이트트레이닝으로 근육도 키우고 있다. 정기 산행은 재단 혹은 지인들과 한 달에 1,2 차례 한다. 집 근처 북한산을 가장 많이 가고, 수락산 청계산 천마산 등 수도권 산을 자주 오른다. “세계적으로 대도시 주변에 이렇게 아름다운 산이 많은 나라가 없다. 북한산은 수천 번 올랐다. 북한산은 오를 수 있는 루트가 수없이 많아 언제 가도 새로움을 느낀다. 정말 명산이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산에서 정직을 배웠다. 그는 “산은 보이는 곳에 항상 있다. 아무리 꾀를 써도 자신의 힘으로만 올라야 한다. 산은 정직하다. 법조인 최고의 덕목도 정직이다. 있는 그대로 보고 따라야 한다. 산은 정복하는 게 아니라 순응하는 것이다. 산에 오르면서 겸손을 배운다”고 말했다. “요즘 일부에서 법을 자기들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 못된 겁니다. 법 취지가 제대로 반영돼야 합니다. 법을 자의적으로 운영하면 절대 안 됩니다. 법치주의가 잘 돼야 국가와 국민이 편안합니다.” 이 이사장은 대한민국 산의 색다른 아름다움을 얘기했다. “한국의 산은 계절 따라 다른 아름다움을 줍니다. 따뜻한 나라의 산은 늘 녹색이지만 우리 산은 그렇지 않아요. 봄에 녹색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해 여름까지 웅장한 녹색의 맛을 보여줍니다. 가을엔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지요. 금수강산이란 말이 딱 어울립니다. 겨울엔 또 다른 맛을 느끼죠. 봄 여름 가을엔 정상을 오르기 전엔 바로 앞의 아름다움만 볼 수 있지만 낙엽이 진 뒤에는 나뭇가지 사이로 속이 다 보입니다. 멀리 봉우리까지 볼 수 있습니다. 산세가 투명하고 정직하게 다 보입니다. 그리고 눈으로 덮인 산이 주는 아름다움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이 이사장은 겨울산은 제주도 한라산을 최고로 꼽는다. “겨울에 한라산을 올라가면서 보는 눈꽃은 눈이 부십니다. 또 다른 산과 달리 봉긋 솟아 있어 어느 순간부터는 완전히 눈에 덮인 산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신선이 된 기분이요. 지리산 설악산도 좋은 산이지만 너무 방대해 겨울에 이런 맛은 한라산에서만 느낄 수 있어요.” 이 이사장은 100세 시대 노인들의 건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고통은 죽음 이상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나이 들어 아프고 걷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요. 전 다행이 아직 걸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관리한다기보다는 걸어 다니고 산에도 가니 건강이 유지됩니다.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산에 갈 것입니다.”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

이렇다 할 운동을 하지 않던 1969년 상사의 권유로 본격적으로 산을 올랐다. 그 이후 산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등산으로 건강하고 즐거운 노년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재후 엄홍길휴먼재단 이사장(81)은 “산에서 많이 배웠고 행복했다”고 말한다. “대전지방법원 판사 시절에 당시 법원장이었던 고 이일규 전 대법원장께서 지리산에 가자고 했다. 뭐 가끔 뒷산 정도 오르는 수준이었는데 상사가 가자고 하니 따라 나섰다. 천왕봉까지 올랐다. 힘들 줄 알았는데 전혀 힘들지 않았다. 해냈다는 성취감도 느꼈다. 그때 산의 매력을 처음 알았다.” 이듬해 서울로 올라온 이 이사장은 가끔 산행을 하긴 했지만 마니아 수준은 아니었다. 주로 테니스를 치며 건강을 다졌다. 그가 본격적으로 산을 타게 된 것은 서울고 동문 산악회에 가입한 1970년대 후반부터. 판사 생활을 접고 김앤장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를 맡으면서 서울고 산악회, 서울법대 동기들과 전국의 명산들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네팔 히말라야 등 해외 트레킹도 다녀왔다. “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 우선 공기와 경관이 좋다. 산을 타면 건강에도 좋고 힘들게 정상에 오른 뒤 느끼는 성취감도 있다. 무엇보다 함께하는 친구들과 이런저런 사는 얘기 하고, 막걸리도 한잔하고…. 이렇게 좋은 운동이 어디 있나. 대한민국은 산이 70%라 맘만 먹으면 언제든 오를 수 있다.” 이 이사장은 20세 무렵부터 60년 넘게 북한산 자락인 서울 정릉에 살고 있어 틈만 나면 산을 올랐다. 법조계에선 ‘등산 고수’로 통한다. 2008년 히말라야 16좌를 오른 엄홍길 대장(61)을 만나면서 새로운 길도 함께 개척하고 있다. 엄 대장이 “이제 산에서 내려와 인생의 16좌를 오르겠다”며 휴먼재단을 만들겠다고 이 이사장을 찾은 것이다. 엄 대장은 평소 산을 좋아하고 히말라야도 여러 차례 다녀온 그에게 이사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엄 대장은 어려운 이웃에게 희망과 사랑을 나눠주자는 취지로 휴먼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의 중점 사업이 네팔의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지어주는 사업이다. 이사장도 취지가 너무 좋아 흔쾌히 동의했다. 그는 “엄 대장이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난 옆에서 보좌하는 역할”이라고 했다. 지난해와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탓으로 못 갔지만 이 이사장도 매년 네팔에서 열리는 학교 착공식과 준공식에 참여했다. 히말라야 4000m 고지까지 4박 5일 올라야 하는 힘겨운 일정이지만 이 이사장은 매번 엄 대장과 함께했다. 엄 대장은 “한국 나이 80세인 2019년에도 히말라야를 거뜬히 오르셨다”고 했다. 이 이사장은 “네팔 4000m 고지에 학교를 세워줬을 때 아이들이 너무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했다. 엄 대장이 참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이 이사장과 엄 대장은 14년째 찰떡궁합을 과시하며 재단을 이끌고 있다. 이 이사장은 지금도 매달 진행하는 휴먼재단 정기산행 때 북한산 백운대까지 다녀오는 4∼5시간 일정의 산행도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다. 이런 강철 체력의 원동력이 걷기다. 그는 특별한 일 아니면 걸어서 다닌다. 아직도 매일 법률사무소로 출근하는 그는 헬스클럽까지 왕복 2km도 걸어 다닌다. 헬스클럽에서도 걷고 웨이트트레이닝으로 근육도 키우고 있다. 정기 산행은 재단 혹은 지인들과 한 달에 1, 2차례 한다. 집 근처 북한산을 가장 많이 가고, 수락산 청계산 천마산 등 수도권 산을 자주 오른다. 이 이사장은 산에서 정직을 배웠다. 그는 “산은 보이는 곳에 항상 있다. 아무리 꾀를 써도 자신의 힘으로만 올라야 한다. 산은 정직하다. 법조인 최고의 덕목도 정직이다. 있는 그대로 보고 따라야 한다. 산은 정복하는 게 아니라 순응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100세 시대 노인들의 건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고통은 죽음 이상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나이 들어 아프고 걷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난 다행히 아직 걸을 수 있다. 특별히 관리한다기보다는 걸어 다니고 산에도 가니 건강이 유지된다.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산에 갈 것이다.” 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어려서부터 태권도를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태권도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결혼해 아이를 낳은 뒤에는 달리기에 심취해 있다. 평생 운동을 생활화하고 있는 신기해 씨(33)는 스스로를 ‘애주가(愛走家)’라고 부른다. 가장 쉽게 할 수 있으며 운동효과도 좋은 달리기가 너무 좋다. “어릴 때부터 달리는 게 좋았습니다. 태권도를 하긴 했지만 친구들과 뛰어 노는 것도 즐겼죠. 각종 릴레이 대회에도 나갔고, 단축마라톤대회에 출전해서 입상하기도 했어요. 고등학교 1학년부터 태권도 선수생활을 하면서 달리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제 몸 속엔 그 유전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는 기본으로 하는 것이라 했지만 선수생활을 할 생각은 없었다. 중학교 졸업할 무렵 ‘어차피 할 것이라면 선수하는 게 좋겠다’는 주위의 권유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유도 태권도 명문 용인대에 들어가서 선수생활을 접었다. “대학에 가서도 전국대회에서 메달도 획득해 국가대표까지 되려는 생각을 했죠. 하지만 뭐 그런 것 있잖아요. 엘리트선수가 되니 다른 것은 모두 포기해야 하고 운동만 해야 하는…. 태권도에만 매몰돼 살아가는 게 싫었어요. 대학 1학년 때 인턴으로 미국에 가서 태권도를 지도할 기회가 있었죠. 그 때부터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2007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갔다. 태권도장 3군데를 돌아다니며 지도했다. 돌아와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서 2009년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펜실베이니아 쪽 대학에서 어학연수를 하며 태권도를 지도했다. 시카고까지 가서 태권도 마스터로 활약한 뒤 2010년 귀국했다. 그는 태권도 5단, 유도 1단, 공인 6단이다. “이렇게 미국에 오고 가다보니 대학교 생활에 집중하지 못했어요. 방황한 것은 아니고 계속 새로운 것을 찾았지요. 그래서 아직도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는 육아에 집중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이 터지기 전까진 요가를 했다. “근질거리는 몸을 바로잡기 위해 다소 거칠다는 아쉬탕가요가를 시작했어요. 재미가 붙으려고 하는데 코로나19가 터진 겁니다. 실내 활동에 제약을 받기 시작하면서 학원을 못 가게 돼 아쉬웠어요. 그 때 시작한 게 달리기입니다.” 지난해 11월이었다. 대부분 실내 스포츠를 할 수 없게 되면서 혼자 즐길 수 있는 스포츠를 찾았다. 그 때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달리기를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집이 서울 도림천 근처에요. 시간만 있으면 바로 나가서 달릴 수 있었죠. 그래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달리니까 너무 좋았습니다. 스트레스를 날리는 것은 물론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죠.” 거친 숨을 몰아쉬며 10km를 달리고 나면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계속 운동을 해 와서인지 제법 잘 달렸다. 주위에서 ‘엄지 척’을 하며 응원해줬다. “달리기, 마라톤은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하잖아요. 전 태권도를 했는데, 태권도에서는 상대를 눌러야 합니다. 마라톤은 순위도 있지만 제 자신만의 목표를 정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개인 최고기록 경신이 있죠. 굳이 남을 이기지 않아도 저 자신과 경쟁할 수 있어 좋아요. 일종의 원윈(Win-Win) 스포츠조. 전 혼자 달리는 것도 좋고, 남들과 같이 달리는 것도 좋아합니다. 달리기는 뭐든 가능합니다.” 신 씨는 속칭 ‘혼뛰족(혼자 뛰는 사람)’이다. 육아하느라 동호회에 가입해 특정 시간에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즐겁다. “전 한번 달릴 때 12km를 달립니다. 체조를 한 뒤 첫 1km는 워밍업으로 달리고, 10km를 제대로 달리고, 다시 마지막 1km는 웜다운으로 달립니다. 많이 달릴 땐 1주에 4~5회, 한 달에 총 280km까지 달린 적도 있어요. 주로 아침에 아이 유치원에 보낸 뒤 달렸는데 요즘엔 코로나19로 유치원에 보내지 않아 제가 돌봐야 해 남편이 퇴근하고 오면 바통터치하고 달립니다.” 달리면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이 없을까 인터넷 서핑을 했다. “시각장애마라토너와 함께 달리는 마라톤 동반주자(가이드러너)가 눈에 들어왔어요. 오래전부터 시각장애인들을 도와주고 있는 김영아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클럽 감독님을 알게 됐죠. 그래서 저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이드러너가 되기로 했습니다. 김 감독님께 배운 것은 아니지만 여기저기 찾다 빛나눔동반주자단이란 곳을 알게 됐습니다. 김 감독님을 롤 모델 삼아 저도 가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나은행 직원인 김영아 씨(48)는 2000년대 초반부터 달린 마스터스마라톤계의 유명 스타다. 2007년부터 시각장애마라토너와 함께 뛰는 마라톤 동반주자 활동을 시작했고, 2016년부터는 훈련 코치로 활약했다. 매년 시각장애마라톤체험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빛나눔동반주자단도 시각장애인들에게 다양한 운동 기회를 주고 있다. “코로나19로 활동을 못하다 지난달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매월 셋째 주 토요일 서울 잠실올림픽주경기장 보조경기장에서 시각장애인들을 돕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어요.” 신 씨는 남편도 달리기에 입문시켰다. “제 남편은 결혼 전 사이클 마니아였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뒤 10kg이 넘게 체중이 불었어요. 남편 운동을 시킨다는 것보다는 그냥 한마디 했죠. 제가 좀 더 잘 달리려고 연구하다보니 여자들의 경우 남자 페이스메이커가 있으면 기록 단축이 빠르더라고요. 올 봄쯤 그런 얘기를 남편에게 했더니 ‘조금만 기다려’라며 혼자 달리더라고요.” 남편이 3개월 새 9kg이나 뺐다. 5km를 1km당 3분40초 페이스로 달릴 수 있게 됐다. 남편이 생일 선물로 뭐가 필요하냐고 했을 때 ‘나랑 달려주면 된다’고 했고 9월 생일날 남편과 함께 21.0975km 하프코스를 달렸다. “1km를 4분50초대 페이스로 달렸습니다. 하프를 1시간 43분 정도에 완주했습니다. 그 정도면 제 페이스메이커로 합격점이었죠. 역시 운동을 좋아해서인자 잘 달리더라고요. 좀 더 빨리 달리면 제 기록 단축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남편에게 다른 선물은 필요 없다고 했어요. 앞으로 틈날 때 저랑 달려주면 된다고 했죠. 이젠 평생 함께 달려야죠.” 신 씨는 11월 13일 울산에서 열린 제18회 태화강국제마라톤대회에 출전해 10km 여자부에서 40분 43초로 2위를 했다. 코로나19 탓에 대회가 열리지 않아 처음 참가한 공식대회였다. “달리기 동호회에서 만든 이벤트 대회에 경험삼아 출전하기는 했지만 공식대회 출전은 처음이었어요. 첫 대회에서 좋은 기록과 성적을 내서 기쁩니다.” 신 씨는 마라톤 42.195km 풀코스 첫 대회에서 마스터스마라토너 꿈의 기록인 ‘서브스리(3시간 미만 기록)’를 하는 게 목표다. “지금은 5km와 10km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엘리트 선수들도 이 기록이 좋아야 결국 풀코스 기록도 좋다고 합니다. 이 기록을 바짝 당겨놓고 거리를 늘려 3년 안에, 늦어도 마흔이 되기 전에 서브스리 달성하는 게 목표입니다.” 집에 트레드밀도 있어 틈나는 대로 걷고 달린다. 생활 속에서 맨몸 스¤, 팔굽혀펴기 등 근육운동도 한다. 기록이 절대 기준은 아니지만 목표를 세우고 조금씩 달성해가는 재미도 있다. 달리면서 체력도 탄탄해졌다. “건강해야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체력이 있어야 어떤 힘든 일도 버틸 수 있죠. 또 진부하지만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도 있잖아요. 달리면 머리가 맑아져요.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평생 달릴 겁니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최근 미국프로골프(PGA)투어 히어로 월드챌린지에서 1위를 달리다 공동 5위를 하는 바람에 남자 골프 세계랭킹 1위 등극을 놓친 콜린 모리카와(24·미국)는 공부 잘하는 운동선수로 명성이 자자하다. 미국의 명문 비즈니스스쿨인 UC버클리의 하스경영대학을 졸업한 수재다. 일본계 아버지와 중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모리카와는 어릴 때 9홀 대중골프장을 자주 찾는 부모 밑에서 자연스럽게 골프를 접했다. 여덟 살 때 골프에 눈을 떠 선수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모든 학생이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학업과 운동을 병행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 있어 모리카와는 골프와 공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다. 모리카와는 ‘골프 천재’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46)같이 장타자는 아니지만 정교한 아이언샷과 치밀한 코스 공략으로 올해 메이저대회인 디 오픈에서 우승하는 등 벌써 6승을 거뒀다. UC버클리에 입학한 모리카와는 미국 대학의 우수 선수들을 이르는 ‘올 아메리칸’에 4년 내내 선발됐다. 미국 아마추어 1위, 세계 아마추어 1위도 차지했다. 이렇게 선수로 활약하면서도 2학년 가을 하스경영대학에 진학했다. 골프 선수로도 잘나가는데 왜 굳이 공부까지 열심히 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는 “나는 골퍼로서 나만의 브랜드가 있다. PGA투어에서 벌어지는 비즈니스에 대해서도 알고 싶고 직접 개입하고 싶다”고 했다. 선수로서 골프 비즈니스에도 관심이 많아 공부하고 있다는 얘기다. 모리카와 얘기를 꺼낸 이유는 최근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운동선수 학습권 논란 때문이다. 얼마 전 교육부는 학생선수의 대회 및 훈련 참가 허용일수 축소를 예고했고 이에 현장에서는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교육부는 현재 초등학교(10일), 중학교(15일), 고등학교(30일) 선수들의 결석일수를 내년에는 각각 0일, 10일, 20일로 축소할 계획이라고 공지했다. 2023학년도에는 초등(0일), 중등(0일), 고등(10일) 선수들의 결석일수가 또다시 축소될 예정이다. 교육부가 내세운 명분은 운동선수의 학습권 보장이다. 대한체육회를 포함한 일부 체육계는 공부할 권리로서 학습권만 강조하는 경직된 교육관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운동선수들의 ‘운동권’도 포괄적 학습권에 포함돼야 한다며 결석일수 축소를 폐지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교육부의 취지는 모리카와 같은 공부하는 운동선수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운동선수를 공부시킨다고 모리카와같이 명문대에 갈 수 있을까. 미국은 운동선수라도 고등학교까지 학업 성적만으로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 대학 입시 땐 미국대학체육협회(NCAA)에서 학업 성적 하한선을 마련하면 각 대학이 그 기준에 맞춰 운동 능력을 보고 선수를 선발한다. 물론 공부를 잘하는 선수는 대학을 선택해서 간다. 한국 운동선수는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아도 대학에 갈 수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시스템을 고치지 않고 학습권 보장을 이유로 공부하라고 한들 선수들이 제대로 따를 리 없다. 학생과 운동선수를 따로 구분하는 현 교육 시스템으론 답을 찾을 수 없다. 운동선수도 학생일 뿐이다. 특기를 살리는 교육도 가치 있으니 미국처럼 공부를 병행하며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초중고교 학생 534만여 명 중 1.5%인 8만2000여 명의 운동선수를 특별 대우할 이유가 전혀 없다. 입시 탓에 사실상 운동 기회를 박탈당한 대다수 학생에게도 운동할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 교육 시스템이 바뀌어야 가능한 일이다.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평생 즐길 수 있는 스포츠가 하나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건강도 챙기면서 좋은 친구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나이 80세인 김두환 장호테니스재단 이사장은 평생 테니스를 치며 즐겁고 행복한 노년을 만들어가고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테니스를 시작해 국가대표로까지 활약했고 이후에도 라켓을 놓지 않고 체력을 다지며 테니스 발전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서울 양재 스포타임 테니스코트. 김 이사장은 회원들끼리 치른 혼합복식 경기에서 자로 잰 듯한 발리와 스매싱, 구석을 찌르는 좌우 스트로크에 강력한 서비스까지 선보였다. 선수 출신이라지만 평생 관리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플레이였다. 그는 “이렇게 테니스 치고 나면 날아갈 것 같다. 재밌고 건강도 챙기고,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최고의 스포츠”라며 웃었다. “축구선수를 한 아버지와 형의 피를 받아서인지 어릴 때부터 운동에 소질이 있었어요. 축구와 농구 등 하는 것마다 잘했죠. 부산 동래중학교에서 연식정구를 시작했습니다. 축구선수도 같이 했습니다. 축구 명문 동래고에 가서도 축구와 연식정구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대학에 가면서는 축구를 그만 두고 테니스에 집중했죠. 주변에서 단체 종목보다는 개인종목을 하는 게 더 유망하다고 조언해줬어요.” 김 이사장의 형은 고 김두식 전 청구고(대구) 감독이다. 변병주(전 대구 FC 감독) 박경훈(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 등을 키우며 청구고를 축구 명문으로 만든 인물이다. 김 이사장이 테니스와 인연을 맺은 이유가 재밌다. 동래고 2학년 때 ‘서울 구경’을 이유로 연식정구에서 테니스로 바꾼 것이다. “중학교 2학년부터 연식정구를 시작했습니다. 고교 2학년 때인 1958년 전국체전 부산 예선에서 3학년 형들에게 져서 탈락했습니다. 당시 서울은 외국만큼 가고 싶은 곳이었죠. 그해 서울에서 전국체전이 열렸어요. 한 지도자 선배가 ‘그럼 테니스로 바꿔라. 팀이 별로 없기 때문에 등록만하면 나갈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전국체전을 한 달 남기고 테니스로 바꿨습니다.” 전국체전에서 메달을 획득하지 못했지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8강 이상을 살펴보니 다 3학년 형들이고 2학년은 없었다. 다음해엔 우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해 겨울부터 테니스에 집중했고 다음해 종별선수권과 전국체전 등 거의 모든 대회에서 우승했다. 1962년 테니스 시작 3년 만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한국테니스선수권(1962년, 1969년 우승)을 제패하는 등 강호로 군림하며 데이비스컵(남가 국가대항전) 대표로 활약했다. 당시 여자 최강 양정순 장호테니스재단 이사(74)와 파트너로 1969년 전일본선수권대회 혼합복식에 출전해 대한민국 사상 첫 테니스 국제대회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기도 했다. 양 이사는 1974년 테헤란, 1978년 방콕 아시아경기 금메달리스트다. 1971년 한일은행에서 선수생활을 마친 김 이사장은 은행직원, 사업가, 스포츠 행정가 등을 거치면서도 테니스 라켓을 놓지 않았다. 그는 “테니스는 할수록 매력적인 스포츠다. 건강을 지켜주는 데다 테니스로 만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이어갈 수도 있었다”고 했다. “은행 다니고 있는데 부산에서 사업하는 고교 4년 선배가 테니스공을 만든다고 도와달라고 했어요. 주말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가 만든 공을 직접 쳐보면서 무게, 탄성 등을 평가해줬어요. 레오파드란 테니스공을 만들었죠. 선배가 테니스공 판매할 사람이 없다고 저에게 총판을 맡겼죠. 그래서 은행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김두환’ 이름 석자로 사업을 했죠. 당시 테니스는 사회적으로 저명한 사람들이 많이 쳤습니다. 저를 아는 분들이 참 많이 도와줬습니다.” 신발 및 스포츠웨어로 사업을 확장하다 다양한 업체가 나타나 경쟁이 심해지면서 접었다. 사업을 그만 둔 뒤에는 대한테니스협회 전무와 부회장, 그리고 회장(1993~2001년)까지 역임하며 테니스 발전을 위해 뛰었다. 당초 기업 출신이 협회 수장을 맡아야하는데 여의치 않자 김 이사장이 회장직을 일부기간 대신하다 결국 8년간 이끌게 된 것이다. 당시 협회 운영비가 없어 테니스인들을 주축으로 자립기금 모금 운동을 펼쳤고, 이런 노력에 정부 지원금도 받게 됐다. “협회 예산이 3200만 원밖에 없었어요. 전국대회 한번 치르면 2500만 원이나 들었죠. 어쩔 수 없이 자립기금을 모아야 했죠. 이런 우리의 노력이 언론을 타면서 정부에서 관심을 가지게 됐고 두둑한 지원금을 받게 됐습니다.” 8년간 22억 원의 테니스 발전 기금을 적립하고 물러났다. 그는 한국시니어테니스연맹 회장(2004~2009년, 2012~2015년)으로 노인테니스 발전에도 힘을 보탰다. 김 이사장은 현재 고 장호 홍종문 선생이 만든 장호테니스재단을 4년째 이끌며 유소년테니스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장호테니스재단은 ‘장호홍종문배주니어테니스대회’를 매년 개최하고 유망주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유소년테니스 발전을 주도하고 있다. 여든에도 이렇게 왕성하게 활약하고 있는 원동력에 테니스가 있다. 김 이사장은 2006년 2월 간암으로 수술을 받았지만 그해 가을 시니어국제테니스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빨리 극복했다. 그는 “테니스로 다져진 체력 덕분에 수술도 잘 견뎠고 회복도 빨랐다. 테니스는 내 생명의 버팀목”이라며 웃었다. “테니스나 탁구, 배드민턴 등 개인 종목은 선수생활을 한 뒤에도 계속 운동하면서 건강관리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야구나 축구 등 단체 종목은 선수생활을 그만두고 그 종목을 계속 하는 경우가 드물어요. 사람들이 모여야 하니까요. 테니스가 가지고 있는 장점입니다.” 김 이사장은 주 1~2회 지인들과 테니스를 친다. 한번에 2시간에서 3시간. 요즘도 50대 60대와 ‘맞짱’을 뜬다. 20세 이상 차이가 나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아마추어테니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기 위해 대부분 복식이나 혼합복식 게임을 한다. 이렇다보니 자연스럽게 ‘테니스 친구들’과 좋은 인연으로 이어진다. “테니스가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누구나 칠 수 있어요. 6개월만 투자하면 됩니다. 다만 나이 들어선 과유불급입니다. 적당히 쳐야 좋아요. 건강 지키려다 오히려 망칠 수 있죠. 제가 아는 분은 101살까지 테니스 치다 돌아가셨습니다. 테니스는 최고의 실버스포츠입니다”고 조언했다. 김 이사장은 골프도 주 1회 친다. 겨울엔 스키도 탔지만 이젠 위험해 그만뒀다. 이렇게 테니스와 골프를 즐기기 위해 매일 집 근처 서울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언덕길을 걸으며 체력도 키운다. 그는 “그래도 테니스가 가장 좋다. 힘닿는 데까지 치다 테니스코트에서 죽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 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

축구선수를 한 아버지와 형의 피를 받아서인지 어릴 때부터 운동에 소질이 있었다. 중학교 때 연식정구를 시작해 고등학교 때 테니스로 바꿔 국가대표로도 활약했다. 은퇴한 뒤에도 평생 테니스를 쳤다. 테니스는 삶의 활력소이자 건강 지킴이였다. 테니스 덕에 간암도 거뜬하게 이겨냈다. 한국 나이 80세인 김두환 장호테니스재단 이사장은 요즘도 50, 60대와 ‘맞짱’을 뜬다. 20세 이상 차이가 나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지난달 29일 서울 양재 스포타임 테니스코트. 김 이사장은 회원들끼리 치른 혼합복식 경기에서 자로 잰 듯한 발리와 스매싱, 구석을 찌르는 좌우 스트로크에 강력한 서비스까지 선보였다. 선수 출신이라지만 평생 관리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플레이였다. 그는 “이렇게 테니스 치고 나면 날아갈 것 같다. 재밌고 건강도 챙기고,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최고의 스포츠”라며 웃었다. 김 이사장은 부산 동래고 시절 ‘서울 구경’을 이유로 테니스와 인연을 맺었다. “중학교 2학년부터 연식정구를 했다. 고교 2학년 때인 1958년 전국체전 부산 예선에서 3학년 형들에게 졌다. 당시 서울은 외국만큼 가고 싶은 곳이었다. 그해 서울에서 전국체전이 열렸다. 한 지도자 선배가 ‘그럼 테니스로 바꿔라. 팀이 별로 없기 때문에 등록만 하면 나갈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전국체전을 한 달 남기고 테니스로 바꿨다.” 전국체전에서 메달은 획득하지 못했지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8강 이상을 살펴보니 다 3학년 형들이고 2학년은 없었다. 다음 해엔 우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해 겨울부터 테니스에 집중했고 다음 해 종별선수권과 전국체전 등 거의 모든 대회에서 우승했다. 1962년 테니스 시작 3년 만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전국을 휘어잡으며 데이비스컵(남자 국가대항전) 대표로 활약했다. 1969년 전일본선수권대회 혼합복식에서 대한민국 사상 첫 테니스 국제대회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기도 했다. 1971년 한일은행에서 선수생활을 마친 김 이사장은 은행 직원, 사업가, 스포츠 행정가 등을 거치면서도 테니스 라켓을 놓지 않았다. 그는 “테니스는 할수록 매력적인 스포츠다. 건강을 지켜주는 데다 테니스로 만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이어갈 수도 있었다”고 했다. 사업을 그만둔 뒤에는 대한테니스협회 전무와 부회장, 그리고 회장(1993∼2001년)까지 역임하며 테니스 발전을 위해 뛰었다. 당초 기업 출신이 협회 수장을 맡아야 하는데 여의치 않자 김 이사장이 회장직을 일부 기간 대신하다 결국 8년간 이끌게 된 것이다. 당시 협회 운영비가 없어 테니스인들을 주축으로 자립기금 모금 운동을 펼쳤고, 이런 노력에 정부 지원금도 받게 됐다. 8년간 22억 원의 테니스 발전 기금을 적립하고 물러났다. 그는 한국시니어테니스연맹 회장(2004∼2009년, 2012∼2015년)으로 노인테니스 발전에도 힘을 보탰다. 김 이사장은 현재 고 장호 홍종문 선생이 만든 장호테니스재단을 4년째 이끌며 유소년테니스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그가 왕성하게 활약하고 있는 원동력에 테니스가 있다. 김 이사장은 2006년 2월 간암으로 수술을 받았지만 그해 가을 시니어국제테니스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빨리 극복했다. 그는 “테니스로 다져진 체력 덕분에 수술도 잘 견뎠고 회복도 빨랐다. 테니스는 내 생명의 버팀목”이라며 웃었다. 김 이사장은 주 1, 2회 지인들과 테니스를 친다. 한 번에 2시간에서 3시간. 아마추어테니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기 위해 대부분 복식이나 혼합복식 게임을 한다.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테니스 친구들’과 좋은 인연이 이어진다. 그는 “테니스가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누구나 칠 수 있다. 6개월만 투자하면 된다. 다만 나이 들어선 과유불급이다. 적당히 쳐야 좋다. 건강 지키려다 오히려 망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골프도 주 1회 친다. 겨울엔 스키도 탔지만 이젠 위험해 그만뒀다. 이렇게 테니스와 골프를 즐기기 위해 매일 집 근처 서울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언덕길을 걸으며 체력도 키운다. 그는 “그래도 테니스가 가장 좋다. 힘닿는 데까지 치다 테니스코트에서 죽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허리 부상으로 군 생활을 접었다. 훈련을 안 하다보니 체중이 불었다. 이러다 안 되겠다 싶어 달렸다. 달리는 게 좋았다. 건강도 챙기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줬다. 어느 순간 ‘철인’이 됐다. 트라이애슬론(철인3종)에 빠져 사는 박세흠 씨(43)는 고민이 생기거나 일이 안 풀리면 운동을 한다.“ROTC 소위로 임관해 3군단 703특공연대에 있었습니다. 적지종심 작전부대(유사시 북한에 침투하는 부대)라 30kg 완전군장으로 행군하는 훈련이 많았는데 어느 날 디스크가 터졌습니다. 훈련을 못하게 됐습니다. 헬기도 못타고 훈련에 계속 빠지다보니 군 생활을 접어야 했죠. 계속 군에 있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2002년 중위로 전역했습니다.” 특수부대라 군에서는 오후 3시에 일과를 끝내고 체력단련을 했었다. 전역하면서 사실상 운동을 접은 데다 담배까지 끊었더니 20kg 가까이 체중이 불었다. 다이어트에 가장 좋다는 달리기를 시작한 이유다. “살도 쪘지만 몸도 여기저기가 아팠습니다. 의사는 디스크 수술을 권했는데 당시 수술하면 더 악화시킬 수 있다고 해서 안 하고 운동에 집중했습니다. 처음엔 아팠죠. 하지만 운동하면서 허리 주변 근육이 강화되자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달리면 세상만사 모든 고민이 사라졌다. 해결되지 않던 문제에 대한 답도 나왔다. 그래서 일이 안 풀리거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으면 달렸다. 그는 “몸이 건강해야 정신도 건강해진다는 것을 달리면서 알았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도 달리면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힘들 땐 달린다”고 했다. 전역 후 제약회사 다닐 때는 밤에 헬스클럽에서 달리고 주말에 탄천을 뛰었다. 각종 마라톤대회 10km와 하프코스에도 출전했다. “달리면서 건강을 되찾다보니 철인3종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수영은 어렸을 때 배웠고 자전거도 탈 수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 것입니다.” 2008년부터 철인3종에 빠져 들었다. 그해 여름 올림픽코스(수영 1.5km, 사이클 40km, 마라톤 10km)를 2시간 20분대에 완주했다. 달리면 기분이 좋아지는 ‘러너스 하이’가 있듯이 수영을 하거나 사이클을 타도 머리가 맑아지고 좋았다. 새벽에 수영을 하고 낮이나 저녁 땐 달리거나 사이클을 탔다. “회사를 그만 두고 서울 동대문에서 신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결혼 후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회사생활만으론 생활이 어려웠어요. 중국을 오가며 브랜드 여러 개를 확장하며 사업이 잘 됐습니다. 오후 8시에 문을 열어 새벽 5시에 닫는 생활로 밤낮이 바뀌어 힘들었지만 운동이 있어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온라인쇼핑으로 트렌드가 바뀌면서 사업이 힘들어진 데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이 터져 매출이 거의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사업을 접어야 했죠.” 정신적 신체적으로 힘들었지만 철인3종을 하면서 쌓은 체력으로 버틸 수 있었다. 그는 “철인3종은 극한 상황에서도 참고 이겨내야 한다. 올림픽코스도 힘들지만 철인코스(수영 3.9km, 사이클 180km, 마라톤 42.195km)는 정말 체력과 정신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완주하기 힘들다. 어느 순간 철인3종은 내 삶의 버팀목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2011년 처음 철인코스(킹코스, 아이언맨코스)를 15시간 15분에 완주했다. 그리고 2018년 13시간 45분에 완주했다. 지금까지 철인코스 2회, 올림픽코스 14회, 하프코스 6회를 완주했다. 마라톤 풀코스는 9회 완주했다. 마라톤 풀코스 최고기록은 3시간 59분대. 박 씨의 하루는 운동으로 시작한다. 매일 새벽 수영을 1시간 한다. 2015년 경기 성남 분당 집 근처에 피자집을 열면서 오전엔 시간이 여유가 있어 운동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주 1,2회 사이클 50km에 달리기 5~10km를 한다. 철인3종은 근전환 훈련이라고 해서 자전거를 타다가 바로 달리기를 해준다. 그렇지 않으면 실전에 근육 경련이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주말엔 사이클 80~100km, 마라톤 20km를 한다. 보강훈련으로 주 3회 요가 및 근육운동도 한다. 철인코스 완주를 앞두고는 운동량을 거의 두 배로 올린다. “2017년 분당철인클럽과 성남시철인3종협회에 가입해서 운동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혼자 운동했습니다. 혼자 시간 날 때 운동을 하는 게 편했어요. 그런데 운동을 자유롭게 즐길 수는 있지만 기록 향상은 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분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동호회에 가입했습니다.” 여럿이 함께 하니 서로 끌어주고 밀어줘 도움이 됐다. 피곤해 운동을 하기 싫을 때가 있어도 회원들과의 약속이 있어 꾸준히 훈련할 수 있어 좋았다. “솔직히 제 기록이 뛰어나지는 않아요. 미국 하와이 코나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 출전권을 따고 싶은데 철인코스를 9시간 30분에는 완주해야 합니다. 전 이제 13시간 45분이라…. 하지만 나이 들어 언젠가는 하와이에 나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운동하고 있습니다. 10~20년 뒤에는 그 나이에 맞는 기준 기록을 맞출 수 있지 않을까요?” 철인3종을 하면서 겸손을 배웠다고 했다. “대회에 나가보면 저보도 못할 것 같은 분들이 저보다 앞서 나가는 것을 많이 봅니다. 자존심이 상해 제가 더 빨리 가려다보면 오버페이스를 하죠. 그분들은 저보다 훨씬 많은 훈련을 했다고 봐야 합니다. 처음엔 따라 잡히면 기분이 나빴는데 이젠 존경을 하게 됩니다. 철인3종은 시간투자와 노력이 뒷받침 돼야 즐겁게 완주할 수 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 탓에 2년간 대회 출전을 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대회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 씨는 내년 9월 전남 구례에서 열리는 대회 철인코스 완주를 위해 준비에 들어갔다. “철인3종 철인코스는 준비를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1년 전에 대회 출전 신청을 받습니다. 아직 코로나19로 여럿이 참여하는 대회를 열지는 못하지만 내년부터는 대회가 열릴 것으로 예상하고 훈련에 들어갔습니다. 완주와 기록단축이란 목표도 있지만 완주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도 즐겁습니다. 이렇게 땀을 흘리며 운동하면서 사는 삶이 정말 좋습니다.”성남=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돌고 돌아 결국 몸 쓰는 일로 돌아왔다. 황혜민 다부짐휘트니스 매니저(40·경기도 용인 수지)는 유망한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였다. 부모의 반대에도 스케이팅을 포기하고 미술대학에 들어갔다. 스케이팅은 타지 않았지만 운동을 멈추진 않았다. 대학 때부터 웨이트트레이닝 트레이너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회에 출전해 우승하면서 미술을 접고 전문 선수로 나섰다. 지금은 ‘보디 디자이너’로 건강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몸을 만들어주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각종 대회 기록을 갈아 치우던 제가 중학교 때 스피드스케이팅을 그만 둔다고 하자 어머니 반대가 심했어요. 운동을 계속 하는 게 더 유망한데 갑자기 비전도 보이지 않는 미술을 한다고 했으니. 돌이켜보면 왜 그랬는지…. 결국 몸 쓰는 일로 돌아왔죠.” 스피드스케이팅이 싫었던 게 아니었다. 새벽에 일어나 추운 곳에서 운동하는 게 싫었다. 평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 서양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운동 본능을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었다. 운동은 언제나 그의 옆에 있었다. 미술을 했지만 시간 날 때 공원을 달리고, 헬스클럽을 찾아 운동은 계속했다. “몸을 쓰지 않으면 더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루라도 운동을 안 하면 몸이 근질근질 했다”고 했다. 혹시 몰라 미술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체육대학 입시도 병행했다. 결국 미대에 진학했지만 1학년부터 웨이트트레이닝 생활체육지도자 자격증을 따 시간제 트레이너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업을 마쳤다. 대학원 때 미술학원을 차린 뒤에도 시간을 내 헬스 트레이너로 ‘투잡’을 뛰었다. “2013년 헬스클럽 관장이 ‘살을 빼서 보디빌딩 대회에 출전해보라’고 권유했어요. 보디빌딩을 10년 넘게 했지만 많이 먹으면서 운동해 체중이 74kg까지 나갔었죠. 살만 빼면 근육이 돋보일 것이라고 했어요.” 그해 7월 1일부터 3개월 운동과 다이어트를 병행해 20kg 넘게 감량했다. 다소 극단적인 다이어트였다. 그는 “2개월 간 하루 닭가슴살 400g, 현미 300g 먹다가 마지막 한 달은 탄수화물을 끊었다”고 했다. 하지만 황 매니저는 “다이어트를 할 때 절대 탄수화물을 끊으면 안 된다. 적당히 먹고 많이 운동해서 빼야 요요현상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살을 뺀 뒤 10월 2일 경기도 성남시 보디빌딩대회 여자부 52kg 이하급에서 1위를 하고 그랑프리까지 차지했다. 이 때부터 미술을 접고 본격적으로 보디빌딩에 매달렸다. 무대에서 잘 만든 몸을 과시하며 좋은 평가를 받는 게 멋졌다. 오전 오후 4시간씩 하루 8시간 근육을 만들었다. 2013머슬마니아 코리아 대회에 출전해서도 머슬 1위, 피규어 3위를 차지하는 등 각종 대회에서 우승했다. 어렸을 때 스피드스케이팅으로 다져진 하체와 10년 넘게 만들어진 상체 근육이 돋보였다. 2015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머슬마니아 세계대회에 출전해 2관왕을 차지했고 2018년까지 4회 연속 출전해 2016년(2위)을 제외하고 모두 우승했다. “솔직히 보기에 예쁜 몸을 만들고 싶었는데 전 근육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두드러졌어요. 몸매도 좀 서구적으로 생겼고…. 보디빌딩대회가 분화하면서 국내 각종 대회에서는 근육보다는 전체적인 아름다움을 보는 경우가 많았죠. 그 때 사진기자 한 분이 ‘혜민 씨는 외국에 가야 먹힌다’고 했는데 실제로 국제대회에서 더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미술을 공부했던 게 피트니스 트레이너인 그에게 큰 도움이 됐다. “인물을 그릴 때 밸런스와 대칭 등 알맞은 비율에 맞게 그려야 한다. 운동하면서 인체해부학을 공부하다보니 미술과의 연관성이 깊었다. 요즘은 내 몸은 물론 지도하는 회원들의 몸도 멋지게 디자인하는 즐거움에 빠졌다”고 했다. 그는 최근 근육운동을 하는 여성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에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열심히 운동해 보디프로필을 찍어 과시하는 문화는 동기부여가 돼 좋다. 하지만 몸 건강을 위하기보다는 반짝 스포트라이트만 받으려는 의도는 좋지 않다”고했다. 황 매니저는 “한두 달 운동하고 대회에 출전해 마치 꾸준히 운동한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운동을 진짜 좋아하는 사람들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운동한다. 속성 운동은 트레이너에게 부탁해 사실상 강압에 의해 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많다. 부상도 잦다”고 말했다. “웨이트트레이닝을 주목 받는 도구로 사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요. 뭐 ‘나 이런 것도 해’라고 과시하는 것이죠. 연예인이나 파워 유튜버, 또 속칭 인플루언서들…. 하지만 근육운동의 기본은 건강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전 운동을 즐기다 자연스럽게 무대에 섰고 인정 받다보니 더 열심히 운동하게 됐습니다. 모든 운동이 마찬가지지만 특히 근육운동은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누구나 도전할 수 있지만 아무나는 못합니다. 한계를 뛰어 넘는 힘겨운 과정을 이겨내야 합니다.” 황 매니저는 웨이트트레이닝 기구를 사용하기 전에 맨몸 운동을 많이 시킨다. “근육을 잘 쓰게 하려면 쓸 줄 알아야 합니다. 무턱대고 기구 운동을 하면 부상당할 수도 있고요. 전 스쿼트, 런지, 팔굽혀펴기, 사이드스텝, 버피테스트 등 맨몸으로 하는 운동으로 기초 체력을 잡아준 뒤 기구 운동에 들어갑니다. 전 20회 PT를 하면 10회 이상 기초를 잡기 위해 투자합니다. 맨몸을 잘 쓰면 두려움도 없어져요. 운동효과도 기구운동과 차이가 없습니다. 또 준비운동을 20분 이상해야 PT를 해줍니다. PT가 1시간이라면 미리 와서 준비운동 안하면 20분 손해 보는 겁니다. 제 PT 회원들은 수업 전에 와서 충분히 준비운동을 합니다.” 그는 회원들에게 줌바, 스피닝 등 GX(그룹 운동)도 참여를 권유한다. 음악을 들으며 춤추듯 하는 운동을 하면 재밌기 때문이다. 그는 “재미없으면 피트니스센터에 안 나올 가능성이 높다. 흥미를 유발시키는 게 중요하다. 정 안 되면 센터에 나와서 샤워만이라도 하고 가라고 한다. 자주 나와야 꾸준히 운동할 가능성이 높다. 오는 연습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황 매니저에게는 ‘보디빌딩 선수’를 하고 싶은 회원들이 많이 찾는다. 그만큼 몸을 잘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가 디자인해준 선수들이 각종 대회에서 상위권에 올랐다. 2018년엔 육군 부사관학교에서 예비군인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황 매니저는 국내에선 선수보다는 머슬마니아 대회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코로나19로 라스베이거스에 못가 안타깝습니다. 올해도 조만간 라스베이거스가 머슬마니아 세계대회로 달아오를 겁니다. 내년부턴 다시 출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개인 PT를 하면서도 매일 3시간 이상 운동할 시간은 확보한다. 그는 “돈보다 중요한 게 나에 대한 투자”라고 강조했다. 근육운동과 함께 유산소운동을 꼭 한다. “지방을 빼는 데는 유산소운동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라고. 스피닝강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다. 주말에는 10km를 달린다. 코로나19가 없을 땐 회원들과 함께 주요 마라톤대회 10km와 하프코스를 완주했다. 심폐지구력을 향상시키는 유산소운동이 주는 즐거움도 크다. 취미로 주 1회 락킹 댄스도 배우고 있다. 새로운 것으로 삶의 활력소를 찾는다. 황 매니저는 외관상 다소 강한 이미지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몸에 문신도 했다. 왼팔엔 Blossom, 오른팔엔 운동하기 전 자기모습, 등엔 양귀비꽃을 그렸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어렸을 때 잘나가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였다. 그런데 새벽에 일어나 추운 곳에서 운동하는 게 싫었다. 부모의 반대에도 스피드스케이팅을 그만두고 평소 좋아했던 그림 그리기에 집중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대학원까지 마쳤다. 하지만 운동 본능을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었다. 운동은 언제나 그의 옆에 있었고 지금은 피트니스 트레이너로 활약하며 매일 근육을 키우고 있다. 황혜민 다부짐휘트니스 매니저(40·경기 용인시 수지구)는 몸 잘 만드는 ‘보디 디자이너’다. “초등학교 시절 각종 대회 기록을 갈아 치우던 제가 중학교 때 스피드스케이팅을 그만둔다고 하자 어머니 반대가 심했어요. 운동을 계속하는 게 더 유망한데 갑자기 비전도 보이지 않는 미술을 한다고 했으니. 돌이켜보면 왜 그랬는지…. 결국 몸 쓰는 일로 돌아왔죠.” 미술을 했지만 시간 날 때 공원을 달리고, 헬스클럽을 찾아 운동은 계속했다. “몸을 쓰지 않으면 더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루라도 운동을 안 하면 몸이 근질근질 했다”고 했다. 혹시 몰라 미술대 입시를 준비하며 체육대 입시도 병행했다. 결국 미술대에 진학했지만 1학년부터 웨이트트레이닝 생활체육지도자 자격증을 따 시간제 트레이너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업을 마쳤다. 대학원 때 미술학원을 차린 뒤에도 시간을 내 헬스 트레이너로 ‘투잡’을 뛰었다. “2013년 헬스클럽 관장이 ‘살을 빼서 보디빌딩 대회에 출전해보라’고 권유했어요. 보디빌딩을 10년 넘게 했지만 많이 먹으면서 운동해 체중이 74kg까지 나갔었죠. 살만 빼면 근육이 돋보일 것이라고 했어요.” 그해 7월 1일부터 3개월간 운동과 다이어트를 병행해 20kg 넘게 감량했다. 10월 2일 경기 성남시 보디빌딩대회 여자부 52kg 이하급에서 1위를 하고 그랑프리까지 차지했다. 이때부터 미술을 접고 본격적으로 보디빌딩에 매달렸다. 무대에서 잘 만든 몸을 과시하며 좋은 평가를 받는 게 멋졌다. 오전 오후 4시간씩 하루 8시간 근육을 만들었다. 2013 머슬마니아 코리아 대회에 출전해서도 머슬 1위, 피규어 3위를 차지하는 등 각종 대회에서 우승했다. 어렸을 때 스피드스케이팅으로 다져진 하체와 10년 넘게 만들어진 상체 근육이 돋보였다. 2015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머슬마니아 세계대회에 출전해 2관왕을 차지했고 2018년까지 4회 연속 출전해 2016년(2위)을 제외하고 모두 우승했다. “솔직히 보기에 예쁜 몸을 만들고 싶었는데 전 근육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두드러졌어요. 몸매도 좀 서구적으로 생겼고…. 보디빌딩 대회가 분화하면서 국내 각종 대회에서는 근육보다는 전체적인 아름다움을 보는 경우가 많았죠. 그때 사진기자 한 분이 ‘혜민 씨는 외국에 가야 먹힌다’고 했는데 실제로 국제대회에서 더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미술을 공부했던 게 피트니스 트레이너인 그에게 큰 도움이 됐다. “인물을 그릴 때 밸런스와 대칭 등 알맞은 비율에 맞게 그려야 한다. 운동하면서 인체해부학을 공부하다 보니 미술과의 연관성이 깊었다. 요즘은 내 몸은 물론이고 지도하는 회원들의 몸도 멋지게 디자인하는 즐거움에 빠졌다”고 했다. 그는 최근 근육운동을 하는 여성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에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열심히 운동해 보디프로필을 찍어 과시하는 문화는 동기 부여가 돼 좋다. 하지만 몸 건강을 위하기보다는 반짝 스포트라이트만 받으려는 의도는 좋지 않다”고 했다. 황 매니저는 “한두 달 운동하고 대회에 출전해 마치 꾸준히 운동한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운동을 진짜 좋아하는 사람들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운동한다. 속성 운동은 트레이너에게 부탁해 사실상 강압에 의해 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많다. 부상도 잦다”고 말했다. 그는 “난 운동을 즐기다 자연스럽게 무대에 섰고 인정받다 보니 더 열심히 운동하게 됐다. 모든 운동이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근육운동은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누구나 도전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지는 못한다. 한계를 뛰어넘는 힘겨운 과정을 이겨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개인 PT를 하면서도 매일 3시간 이상 운동할 시간은 확보한다. 그는 “돈보다 중요한 게 나에 대한 투자”라고 강조했다. 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2000년 8월 전선 가설 작업을 하다 2만2000V 고압선에 감전이 됐다. 깨어보니 양팔이 없었다. 당시 의사는 “생명을 건진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했다. 사실상 자포자기 상태로 지내다보니 체중이 늘기만 했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마라톤이었다. 직장 상사의 권유로 2003년 2월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다. 사고 나던 해 3월 서울국제마라톤대회 겸 동아마라톤에서 하프코스를 달린 뒤 “마라톤은 사람이 할 운동이 아니다”라며 그만뒀던 그였다. 하지만 다시 달려보니 세상이 열렸다. 이젠 마라톤 풀코스를 넘어, 태권도와 철인3종까지 섭렵하며 새로운 꿈을 키우고 있다. 마라톤 42.195km 풀코스를 70회 넘게 완주했고, 개인 최고기록이 2시간 55분 18초인 김황태 씨(44)는 운동을 통해 꾸준히 인생을 개척하고 있다. 양팔이 없는 1급 장애를 훌쩍 뛰어 넘어 태권도와 철인3종(트라이애슬론)으로 장애인올림픽(페럴림픽) 메달 획득을 목표로 연일 땀을 흘리고 있다. 김 씨는 5일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열린 세계 트라이애슬론선수권대회 시리즈 장애인 스프린트코스(수영 750m, 사이클 20km, 마라톤 5km)에 출전해 1시간 17분 10초를 기록해 PTS3(중대한 근육 손상 및 절단) 남자 부문에서 5위에 올랐다. 그는 수영 20분 27초로 상위 5위중 가장 기록이 늦었다. 사이클(32분 59초), 마라톤(20분 43초)에선 크게 밀리지 않았지만 양 팔이 없어 수영에서 기록 차가 컸다. 수영은 팔 젓기가 속도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모든 것을 발로만 해야 해 수영이 가장 힘들어요. 숨쉬기가 어려워요. 숨을 쉴 때는 발을 더 힘차게 차면서 머리를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물에 떠서 간다는 게 중요하죠. 실내수영장에선 17분대인데 오픈워터는 파도가 있어서 더 힘드네요.” 사이클은 의수를 차고 운전을 한다. PTS3부문은 의수 의족 등 보조 기구를 제작해 달아도 되기 때문이다. 의수가 없다면 사이클엔 아예 나가지도 못한다. “전기 사고 나기 전에 자전거도 타고 오토바이도 탔는데 의수를 하고 타려고 하다보니 무서웠습니다. 처음엔 중심도 제대로 잡지 못했어요. 엄청 넘어졌어요. 이젠 적응해 잘 탑니다.” 김 씨는 당초 장애인스포츠 쪽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장애의 아픔을 딛고 건강을 되찾기 위해 마라톤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양 팔이 없는 상태에서도 마스터스마라토너들의 꿈의 기록인 풀코스 서브스리(3시간 이내 기록)를 기록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자 장애인스포츠 쪽에서 ‘러브콜’이 이어졌다. 먼저 국내에서 열린 2018평창겨울올림픽 이후 열린 평창겨울패럴림픽에 출전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2015년이었다. 노르딕스키로 출전하려고 했는데 2016년 말 왼쪽 무릎 후방 십자인대가 파열 돼 수술을 받는 바람에 출전이 무산됐다. “재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2020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여름 페럴림픽 태권도에서 제 장애 분야가 추가된다고 출전 의향을 물어왔습니다. 당연히 간다고 했죠.” 2018년 아시아장애인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K41부문 61kg이하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2019년 세계장애인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했지만 정작 1년 연기돼 치른 2020도쿄 페럴림픽엔 출전하지 못했다. 김 씨 장애분야 종목이 추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씨는 2019년 3월 장애인 철인3종 스프린트 종목이 도쿄 페럴림픽에 추가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철인3종 훈련도 시작했다. 그 때부터 수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그냥 동네에서 심심풀이로 하던 수영이었는데 집 근처에 인천장애인국민체력센터가 개장 됐고, 그해 6월 아시아장애인철인3종대회가 있다고 해서 본격적으로 훈련했다”고 했다. 사이클도 개조해서 사고 이후 처음 타기 시작했다. 이번 아부다비 대회까지 8차례 장애인 철인3종 스프린트 대회에 출전했다. 이번 대회 기록이 개인 최고기록이다. “철인3종도 결국 제 장애 분야 종목이 추가되지 않아서 올림픽 출전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2024년 파리 페럴림픽 땐 정식 종목이 될 것으로 믿고 열심히 훈련하고 있습니다.” 현재 김 씨는 장애인 태권도 및 철인3종 국가대표로 활약하고 있다. 이제 스포츠는 그의 삶, 그 자체가 됐다. “솔직히 처음 달릴 때도 팔이 없어 균형을 잡지 못해 힘들었어요. 새로운 스포츠를 시작할 땐 팔이 없어 더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하지만 하면 되더라고요. 이를 악물고 훈련했습니다. 이제 제 삶에서 마라톤과 수영, 사이클, 태권도가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스포츠를 통해서 팔 없는 저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제 가족에게도 자랑스러운 가장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김 씨는 아내 김진희 씨(44)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옷 입는 것부터 식사하는 것까지 도움을 받아야 한다. 아내는 고교시절 만났고 장애를 입은 상태에서도 집안의 반대를 무릎 쓰고 결혼해 김 씨의 도전을 옆에서 돕고 있다. 아내 김 씨는 “장애에도 굴하지 않고 마라톤은 물론 다양한 스포츠를 통해 새로운 도전을 하는 남편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김 씨는 “장애인은 물론 비장애인도 밖으로 나와 스포츠 즐기기”를 권했다. “저도 운동을 안했을 땐 무기력하게 자포자기한 상태로 보냈습니다. 이젠 운동은 제 삶의 활력소이자 제 삶의 가장 중요한 일부가 됐습니다. 꿈도 꾸게 됐습니다. 장애는 장애일 뿐입니다.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는 “남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저도 처음 달릴 때 남들이 저를 어떻게 볼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달리니 많은 사람들이 응원해줬습니다. 그것에 더 용기를 내게 됐죠. 남의 시선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많은 장애인 여러분들이 용기를 내길 바랍니다. 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스포츠가 많습니다. 전 운동을 하면서 살아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씨는 오전엔 집에서 고정식 자전거를 탄다. 점심 때 수영장에서 수영을 한다. 저녁 때 마라톤클럽에 가서 동호인들과 함께 달린다. 철인3종 대회가 있을 땐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집중훈련을 한다. 태권도 대회가 있으면 태권도에 집중한다. 김 씨는 다음달 터키에서 열리는 장애인태권도선수권대회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올림픽 출전 꿈을 꾸며 이렇게 운동에 빠져 살며보니 매일이 즐겁고 행복하다”며 웃었다. 김 씨는 “11월 28일 서울 잠실YMCA에서 장애인 실내철인3종경기(파라 트라이애슬론)가 열린다. 참가할 수 있는 장애인들은 참가하고, 관심 있는 분들은 응원을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애인 실내철인3종경기는 수영은 수영장에서 하고, 사이클과 달리기는 고정식사이클과 러닝머신에서 달린다. 거리는 장애인철인3종경기 스프린트코스(수영 750m, 사이클 20km, 마라톤 5km)와 같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1996년 1월이었다. 동시통역을 공부하다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 스트레스 풀 방법을 찾았다. ‘술을 마실까?’ ‘아니다. 운동을 하자.’ 그래도 건전하게 푸는 게 좋을 것 같아 헬스클럽으로 달려갔다. 국제회의통역사 조재범 한국외대 EICC학과 외래교수(49)는 공부 스트레스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기 위해 일찌감치 시작한 근육운동 덕분에 최근 갑자기 찾아온 우울증까지 떨치고 건강하고 활기찬 삶을 살고 있다. “전 순수 국내파로 동시통역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해외에서 공부한 학생들과 경쟁하다보니 늘 모든 게 부족하게 느껴졌죠. ‘저 친구는 왜 저렇게 잘하지?’ ‘왜 난 이렇게 못하는 거야?’ 스트레스 없는 공부가 없겠지만 저는 너무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어요. 통역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면 어떨까하는 우려감에 경쟁자들에게서 느끼는 열등감까지….” 조 교수는 최근 20년 넘게 이어온 근육운동 덕에 우울증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다. “2019년 봄부터 크고 작은 안 좋은 일이 이어졌습니다. 사람관계에서 오는 상실감도 있었고…. 믿고 의지하던 분까지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누굴 믿고 살아야 하나…. 우울한 나날 이어졌죠. 웨이트트레이닝 덕분에 거뜬히 버틸 수 있었습니다.” 일도 잘 안 풀리는 데다 늘 의지하던 분까지 떠나니 모든 게 공허했다. 그런데 습관이라는 게 무서웠다. 그는 “우울할 때마다 피트니스센터로 달려갔다. 자칫 깨질 수 있었던 삶이 일정한 패턴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 근육운동이 있었다. 웨이트트레이닝으로 한껏 땀을 흘리다보면 우울한 세상을 잊을 수 있었다. 우울증을 완전히 떨쳐내는 데 2년이란 시간이 걸렸지만 근육운동이 없었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조 교수의 운동을 통한 우울증 탈출은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흔한 일이다. 선진국에서는 일찌감치 우울증 치료를 위해 운동처방을 해줄 정도로 운동이 우울증 완화에 효과가 있다. 김병준 인하대 교수(스포츠심리학)는 “운동은 정신건강을 지키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우울증을 낮춘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운동 기간이 길수록 우울증을 낮추는 효과가 높아진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지난해 코로나19가 확산돼 한 때 3주간 헬스클럽 운영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덤벨 등을 구입해 홈트레이닝을 하며 슬기롭게 버텨냈다. 조 교수는 “사실 26년 전 스트레스를 술로 풀까도 고민했다. 술도 제법 잘 마셨었다. 그런데 운동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잘 한 결정이었다. 술로 풀었으면 몸이 완전히 망가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고 회상했다. 운동을 하니 삶이 달라졌다. 처음엔 그저 헬스클럽에 도장 찍으러 주 2,3회 나갔지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가는 횟수가 늘었다. 땀을 쫙 빼고 나면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는 “솔직히 근육운동이 단순해 재미는 없지만 몸이 조금씩 변하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꼈다. 원래 체력이 약했는데 강해지다 보니 정신력도 좋아졌다”고 했다. 부정기적으로 헬스클럽을 찾던 그가 거의 매일 운동을 하기 시작 것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으로 취업 시장이 얼어붙은 1998년부터다. “한 3년 운동하니 근육도 좀 잡히고 재미도 좀 붙었죠. 경제난으로 취업 길이 막히다보니 그 스트레스를 풀려고 운동에 더 집착했던 것 같아요. 동시통역까지 공부하고 졸업했는데 갈 데가 없었습니다. 월급 100만 원도 안 되는 인턴사원 자리만 나올 때였죠. 거의 매일 헬스클럽으로 향했습니다.” 다음해 취업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해 LG전자에 입사했고 삼성SDS, SK텔레콤 등 회사를 다니던 그는 2003년부터 다시 본격 통역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SK텔레콤 다닐 때 저랑 통역대학원에서 공부하던 분이 통역을 왔다. 그 때 ‘아, 나도 저 일 하려고 공부했는데…’라는 생각이 밀려와 다시 동시통역대학원에 들어갔다. 스페인어(한국외대) 과정을 이미 마친 그는 영어(서울외대) 통역대학원까지 섭렵했다. 한국외대에서 영어 통역번역학 박사학위까지 받은 그는 근육운동을 계속 하긴 했지만 ‘저 친구 헬스 좀 했네’라는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그가 제대로 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2010년 무렵이다. ”운동한지 10년이 넘었는데 속칭 ‘각(근육)’이 제대로 안 나왔어요. 건강해 보이긴 했지만 어디 가서 운동했다는 말은 못하겠더라고요. 제 불찰도 있었지만 좀 억울했습니다. 10년 넘게 했는데…. 그래서 체계적으로 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상체, 하체, 코어 3분할로 나눠 몸을 만들었다. 근육운동도 피로회복을 위해 부위별로 나눠서 해야 효과적이다. 매일 새벽 6시 30분 헬스클럽으로 달려갔다. 헬스클럽은 서울 광화문과 명동 2군데에 등록했다. 한국외대와 경희대 학부 통번역학 강의를 나가기 때문에 시내에 있는 시간이 많을 땐 명동에서, 집(독립문)에 있을 땐 광화문에서 운동을 한다. 매일 2시간 운동하는데 끝날 때쯤엔 꼭 유산소 운동을 한다. 근육운동을 한 뒤 트레드밀을 달리거나 고정식자전거를 타는 유산소 운동을 하면 에너지소비량이 더 높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지방이 빨리 끼는 몸이라 근육운동 뒤에는 꼭 유산소운동을 했다. 그런데 결국 중요한 것은 음식조절이다. 운동 열심히 하고 과식하면 효과가 없다“고 했다. 조 교수는 지난해 10월 아마추어 보디빌딩대회에 출전해 40대 이상부 1위를 했다. 그는 ”코로나19 탓에 혼자 출전해 1위를 하다보니 좀 멋쩍었다. 그래서 11월 20일 서울보디빌딩협회에서 주최하는 ‘미스터 서울’ 마스터스부문에 출전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려면 더 훈련에 집중해야 해 운동의 질이 달라진다. 또 목표가 있어야 운동 효율도 좋다. 대회 출전을 앞두고는 아침저녁 3시간 이상 몸을 만들고 있다. 조 교수는 운동을 일상생활을 매끄럽게 하는데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통역을 하는 날에는 준비할 게 많기 때문에 운동을 통역이 끝난 뒤에 한다. 그는 ”어떤 통역을 하든지 자료 준비가 중요하기 때문에 새벽 시간도 뺄 여력이 없다. 대신 통역을 마친 뒤 스트레스 해소를 하기 위해 꼭 운동을 한다“고 했다. 강의나 번역을 할 땐 사전에 운동을 한다. 운동을 하면 집중도가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26년째 근육운동을 하며 긍정의 선순환을 체감하고 있다. 그는 ”근육운동은 스트레스로 날려줬고 공부 집중력도 높여줬다. 삶도 활기차졌다“고 했다. 다음날 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음주량도 자연스럽게 줄었다. 그는 ”운동을 하다보면 가사에 등한시할 수 있지만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집에 가면 아내와 아이들도 반겨준다. 또 미안한 마음에 더 가정에 봉사한다. 이런 게 선순환 아니겠나“라며 활짝 웃었다. 운동을 안 하면 숙제를 안 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는 ”100세 시대, 건강이 중요해졌다. 돌이켜보면 운동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해온 게 지금 삶에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주위에서 나이에 비해 젊고 건강해 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그게 자극이 돼 더 운동에 매진하는 선순환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11월 27, 28일 서울 세종문화관에서 열리는 제13기 시민연극교실 연극무대에도 선다. 서울시극단이 서울시민들을 대상으로 연극 경험을 주는 무대다. 우울증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6월 신청했고 합격해 7월부터 매주 2일씩 연습을 했다. 대학 강의와 번역 및 통역, 그리고 헬스에 연극까지. 1인4역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도 매일이 즐겁다. ”아직 바쁜 게 좋습니다. 딴 생각도 나지 않고…. 이렇게 살 수 있는 밑바탕에 근육운동이 있습니다. 평생 몸 만들며 건강하고 즐겁게 살겠습니다.“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

2년 전 사람관계에서 오는 상실감으로 고민이 많았다. 믿고 의지하던 사람까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누굴 믿고 살아야 하나…. 우울한 나날이 이어졌다. 그래도 1996년 초부터 시작한 웨이트트레이닝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 국제회의 통역사 조재범 한국외대 EICC학과 외래교수(49)는 공부 스트레스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기 위해 시작한 근육운동 덕분에 갑자기 찾아온 우울증을 떨치고 건강하고 활기찬 삶을 살고 있다. “2019년부터 크고 작은 안 좋은 일이 이어졌다. 일도 잘 안 풀리는 데다 늘 의지하던 분까지 떠나니 모든 게 공허했다. 그런데 습관이라는 게 무서웠다. 우울할 때마다 피트니스센터로 달려갔다. 자칫 깨질 수 있었던 삶이 일정한 패턴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 근육운동이 있었다. 웨이트트레이닝으로 한껏 땀을 흘리다 보면 우울한 세상을 잊을 수 있었다. 우울증을 완전히 떨쳐내는 데 2년이란 시간이 걸렸지만 근육운동이 없었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 교수는 동시통역을 공부하던 때 스트레스가 많았다. 순수 국내파로 해외에서 공부한 학생들과 경쟁하다 보니 늘 모든 게 부족하게 느껴졌다. ‘저 친구는 왜 저렇게 잘하지?’ ‘왜 난 이렇게 못하는 거야?’ 스트레스 없는 공부가 없겠지만 그가 느끼기에 동시통역은 유독 심했다. 통역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면 어떨까 하는 우려감에 경쟁자들에게서 느끼는 열등감까지…. 운동을 하니 달라졌다. 처음엔 그저 헬스클럽에 도장 찍으러 주 2, 3회 나갔지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가는 횟수가 늘었다. 땀을 쫙 빼고 나면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부정기적으로 헬스클럽을 찾던 그가 거의 매일 운동을 하기 시작 것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으로 취업 시장이 얼어붙은 1998년부터. 조 교수는 “한 3년 운동하니 재미도 좀 붙었는데 취업 길이 막히다 보니 그 스트레스를 풀려고 운동에 더 집착했던 것 같다”고 했다. 다음 해 LG전자에 입사했고 삼성SDS, SK텔레콤 등 회사를 다니던 그는 2003년부터 다시 본격적인 통역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SK텔레콤 다닐 때 저랑 통역대학원 다니던 분이 통역을 왔다. 그때 ‘아, 나도 저 일 하려고 공부했는데…’라는 생각이 밀려와 다시 동시통역대학원에 들어갔다. 스페인어에서 영어로 바꿨다”고 했다. 통역번역학 박사학위까지 받은 그는 운동을 계속하긴 했지만 ‘저 친구 헬스 좀 했네’라는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제대로 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2010년 무렵이다. 조 교수는 “운동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속칭 ‘각(근육)’이 제대로 안 나왔다. 내 불찰도 있었지만 좀 억울했다. 그래서 체계적으로 운동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상체, 하체, 코어 3분할로 나눠 몸을 만들었다. 근육운동도 피로 해소를 위해 부위별로 나눠서 해야 효과적이다. 매일 오전 6시 30분 헬스클럽으로 달려갔다. 헬스클럽은 서울 광화문과 명동 등 2군데에 등록했다. 한국외대와 경희대 학부 통번역학 강의를 나가기 때문에 시내에 있는 시간이 많을 땐 명동에서, 집(독립문)에 있을 땐 광화문에서 운동을 한다. 매일 2시간 운동하는데 끝날 때쯤엔 꼭 유산소운동을 한다. 근육운동을 한 뒤 트레드밀을 달리거나 고정식자전거를 타는 유산소운동을 하면 에너지 소비량이 더 높다. 조 교수는 지난해 10월 아마추어 보디빌딩 대회에 출전해 40대 이상부 1위를 했다. 그는 “코로나19 탓에 혼자 출전해 1위를 하다 보니 좀 멋쩍었다. 그래서 20일 서울보디빌딩협회에서 주최하는 ‘미스터 서울’ 마스터스부문에 출전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려면 더 훈련에 집중해야 한다. 목표가 있어야 운동 효율도 좋다. 대회 출전을 앞두고는 아침저녁 3시간 이상 몸을 만들고 있다. 조 교수는 26년째 근육운동을 하며 긍정의 선순환을 체감하고 있다. 그는 “근육운동은 스트레스로 날려줬고 공부 집중력도 높여줬다. 삶도 활기차졌다”고 했다. 다음 날 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음주량도 자연스럽게 줄었다. 그는 “운동을 하다 보면 가사에 등한시할 수 있지만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집에 가면 아내와 아이들도 반겨준다. 또 미안한 마음에 더 가정에 봉사한다. 이런 게 선순환 아니겠나”라며 활짝 웃었다.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한국 여자마라톤 최고기록을 20년 넘게 보유했다. 은퇴를 앞둔 선수시절부터 마스터스마라토너들을 지도했다. 한 때 스포츠브랜드 아식스 마케팅팀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좋아하는 것을 해야 행복하다. ‘한국 여자마라톤의 전설’ 권은주 프리랜서 마라톤 감독(44)이 인천 청라호수공원에서 마라톤 교실 ‘Run With Judy’를 운영하고 있다. 월 수 금 오후 8시에 시작한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 달리기 좋은 계절이다. 권 감독을 통해 ‘잘 달리는 법’을 알아봤다. “2017년 이었습니다. 제가 여자마라톤 한국 최고기록을 세운지 20주년을 맞아 춘천마라톤에서 마스터스 마라토너 20명을 모아 함께 달리는 행사를 마련했습니다. 그 때 제 영어 이름인 Judy를 내세워 ‘Run With Judy’란 행사를 가졌습니다. 선수 땐 혼자 달렸지만 함께 달리니 좋았습니다. 그래서 같이 달려준다는 의미를 담아 마스터스 마라토너들에게 제대로 달릴 수 있는 방법을 전해드리고 싶어 시작했습니다.” 권 감독은 1997년 춘천마라톤에서 2시간 26분 12초의 한국 여자마라톤 최고기록을 세우며 말 그대로 혜성같이 나타났다. 이 기록은 2018년 서울국제마라톤 겸 동아마라톤에서 김도연이 2시간 25분 41초의 새로운 한국 최고기록을 세울 때까지 20년 넘게 난공불락이었다. 권 감독은 마라톤 명문 코오롱을 시작으로 삼성전자, 제주도청, 인천시청, 함안군청에서 선수생활을 하며 2011년 은퇴할 때까지 다시 마라톤 한국 최고기록에 도전했다. 하지만 한국 최고기록을 세운 뒤 ‘1998 보스턴 마라톤’ ‘1998방콕 아시아경기’ 등을 준비하느라 무리하는 바람에 족저근막염에 걸려 수술 받은 뒤부터는 제 실력을 발휘하진 못했다. 그는 “시골서 올라와 더 잘 뛰고 싶다는 욕심에 쉬지 않고 달린 게 화근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때문에 권 감독은 마스터스 마라토너들을 지도할 때 가장 강조하는 말이 “쉬면서 천천히 해도 된다”는 것이다. “제 선수시절을 돌아보니 성적에 급급해 예민했어요. 억지로, 타의에 의해 훈련한 측면도 있었고. 마스터스 마라토너들은 자기들이 좋아서 하는 것이잖아요. 취미로 즐기면서. 그런데 취미로 하면서도 열심히 하는 열정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너무 무리하는 분들도 많아요. 그래서 제 선수시절 얘기하면서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합니다. 스트레스 풀려고 달리는데 무리해서 다치면 더 스트레스를 받거든요.” 권 감독은 제주도청 선수시절이었던 2000년대 중반부터 이벤트성으로 마스터스 마라토너들을 지도했다. 마라톤 전문 브랜드 아식스와 함께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2015년엔 아식스 정식 직원으로 마케팅 담당을 하면서 ARC(아식스 러닝 클럽)을 이끌기도 했다. 올 6월까지 ARC를 이끌던 그는 아식스가 오프라인 행사를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게 돼 7월부터 인천 청라호수공원에서 마라톤교실을 시작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A형 간염에 걸려 3개월간 고생하는 바람에 10월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경기도육상경기연맹 회장님의 도움으로 3개월 무료로 한 뒤 유료화하려고 했는데 제가 아픈 바람에 10월만 무료로 하고 11월부터 유료화 합니다. 달리기를 돈 주고 배우려는 분들이 별로 없지만 조금이라도 돈을 내야 더 참여도가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또 제대로 배워야 부상 없이 오래 달릴 수 있습니다.” 권 감독은 달리기가 운동화와 운동복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누구나 쉽게 달릴 수 있지만 잘못된 동작은 몸에 악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바른 주법을 배워야 하고 적당한 근육운동, 그리고 잘 쉬어야 잘 달릴 수 있습니다.” 권 감독은 ‘배에 힘을 주고 똑바로 서서 팔을 앞뒤로 자연스럽게 흔들고 발을 11자로 달려야 한다’는 기본자세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신체구조에 맞는 방법으로 달리는 것을 권유한다. “처음엔 기본자세를 알려주지만 계속 달리다보면 자신만의 자세가 나오게 됩니다. 그럼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 없이 효율적으로 달리는 법도 알게 되지요. 똑바로 서서 달리는 사람, 약간 앞으로 몸을 숙이고 달리는 사람, 고개를 뒤로 젖히고 달리는 사람 등 다 스타일이 다릅니다. 기본자세를 강조하지만 개인 스타일에 맞추는 것도 중요합니다.” 권 감독은 땅에 발을 착지하는 방법까지 고민해 지도한다. 권 감독은 “그동안 뒤꿈치부터 닿은 뒤 중간, 앞으로 밀어주는 게 좋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최근엔 발 중간(미드풋·mid foot)으로 디딘 뒤 바로 다음 발로 넘어가는 게 더 효율적이란 연구 결과가 많다. 땅에 지지하는 시간을 줄이고 발목과 무릎에 받는 충격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요즘 조깅 및 마라톤 화도 미드풋으로 착지하도록 설계돼 나오고 있다고 한다. 권 감독은 바른 주법, 코어 근육운동 방법, 적당한 휴식 등 가장 효과적으로 달릴 수 있게 지도하고 있다. 플랭크, 스쾃, 런지, 푸시업, 윗몸일으키기 등 달리는데 필요한 바디웨이트(프리 웨이트·몸으로 할 수 있는 근육운동) 방법은 물론 다양한 보강훈련 법도 전수한다. 권 감독의 강점은 함께 달리며 지도한다는 점이다. 함께 달리기 때문에 바로 옆에서 잘못 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권 감독은 레슨 때 5~10km를 함께 달리고 주말에 지인들과 산을 달리는 트레일러닝 20km를 하며 몸을 관리하고 있다. 홈트레이닝으로 코어 및 전신 근력운동도 계속 하고 있다. 일반인들에게 가장 좋은 달리기 방법은 무엇일까? “거의 매일 운동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2일에 한번씩 달리고 그 중간에 근력운동을 끼워 넣는 게 좋습니다. 우리 몸은 같은 근육을 계속 사용하면 피로도가 높아져 쉽게 지치고 부상 위험도 높습니다. 시간을 쪼개서 운동하는 사람이라면 주 3~4회를 권합니다. 이 땐 달리는 것과 근육운동을 같이 하는 게 좋습니다. 달리기 반, 근육운동 반.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은 근육운동을 꼭 해야 합니다.” 체중이 많이 나가는 사람은 걸어야 한다. “과체중인 분들은 달리면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걸어야 하는데 평지보다 약간 높은 야산을 걷는 게 좋습니다. 오르막 내리막이 연결돼 일종의 인터벌트레이닝 형식을 갖출 때 살이 잘 빠집니다. 다리 근육 발달에도 좋습니다.” 다이어트에는 인터벌트레이닝(Interval Training)이 효과적이다. 운동생리학적으로 등산은 오르막 내리막을 계속 반복하기 때문에 자연 속에서 하는 인터벌트레이닝으로 불린다. 인터벌트레이닝은 일정 강도의 운동과 그 운동 사이에 불완전한 휴식을 주는 훈련 방법으로 주로 엘리트 선수들의 심폐지구력을 강화할 때 쓰인다. 에너지 소비량도 더 높다. 최근 달리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좋은 현상입니다. 젊은이들은 일명 크루라고 무리지어 달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함께 달리고 SNS에 올리며 자신들의 에너지를 과시합니다. 코로나19로 주춤했지만 그에 맞게 2,3명 3,4명 씩 달리는 문화도 생겼습니다. 함께 달리며 서로 응원하고 잘못된 자세를 바로잡아주는 문화가 아주 좋다고 생각합니다.” 권 감독은 혼자 달리는 것보다는 여럿이 함께 달리는 것을 권유한다. 달리기가 혼자 할 수 있는 스포츠이긴 하지만 함께 달리면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받쳐주며 더 쉽게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 달림이들도 늘었다. “사실 모든 스포츠에서 남녀의 장벽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달리기 걷기 등산 등 유산소 운동이 몸에 좋다는 것을 다 알고 있어요. 하느냐 안 하느냐는 개인의 선택이죠. 과거엔 여자 운동선수하면 거칠게 봤는데 이젠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건강한 아름다움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어요. SNS에 여성 인플루언서들이 많아진 것만 봐도 느낄 수 있습니다. 달리면 에너지 넘치고 활기차 보입니다. 예쁘고 건강한 이미지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따라서 합니다. 이제 여성들이 달리고 근육 만드는 게 전혀 이상한 게 아닙니다.” 권 감독은 운동이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있는 측면을 강조했다. “지도하다보면 본인들이 이렇게 잘 달릴지 모르고 있다가 직접 느낀 뒤 자신감을 얻는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달리면서 자신감이 붙어 열정적으로 살아가죠. 너무 과해서 부상 등 역효과에 고생하는 분들도 있지만 달린 뒤 더 활기차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많은 사람들이 달렸으면 좋겠습니다.” 권 감독은 일단 인천에서 시작하고 조만간 서울에서도 달리기 교실을 열 계획이다. 기회가 된다면 엘리트선수들도 지도하고 싶단다. 엘리트를 지도하더라도 마스터스 마라톤교실은 계속 운영한다. “제가 좋아서 함께 달리는 겁니다. 달리기는 제 스스로를 관리하는 수단이기도 하고요. 100세 할머니가 돼서도 달리고 있을 겁니다.”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

이런 ‘인생역전’이 따로 없다. 사회생활하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너무 공부에만 매진하다 과로로 쓰러졌다. 건강의 중요성을 인식한 뒤 평생 운동을 생활화하고 있다. 교육학을 전공했는데 체육과 출신보다 더 열심히 체력단련에 집중한다. 수업과 강의, 방송에서 운동의 중요성을 알리는데도 열성적이다. 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58) 얘기다. “1991년 미국 플로리다주립대 박사과정시절이었습니다. 짧은 영어로 따라가다 보니 잠을 줄여가며 공부에 매진해야 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과로로 쓰러졌습니다. 그때 체득했습니다. 뇌력을 발휘하려면 체력이 먼저 돼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생존 차원에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바로 체육관으로 달려갔다. 스포츠 왕국 미국 대학은 체육시설이 좋았다. 유 교수는 웨이트트레이닝으로 근육도 키우고 걷고 달리는 유산소 운동을 병행했다. 몸이 건강해지자 공부도 더 잘 됐다. 유 교수의 경험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됐다. 운동을 하면 뇌신경 성장 인자인 BDNF(Brain-Derived Neurotrophic Factor)가 생성돼 두뇌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결과물들이 많다. 운동은 우울증과 치매도 예방한다. 유 교수는 “몸은 나의 중심이다. 근간을 이루는 몸이 무너지면 모든 감성과 지성, 그리고 영성이 무너진다. 몸이 바로 서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건강의 중요성을 인식한 뒤부터 유 교수의 하루는 운동으로 시작된다. 올 1년은 연구년이라 좀 여유 있게 시작하지만 평소엔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피트니스센터로 달려간다. 1시간에서 1시간 30분 땀을 흘린 뒤 학교로 넘어간다. 무산소 근력운동과 유산소 달리기 걷기를 혼합해서 운동한다. 하루를 웨이트트레이닝에 중점을 둔다면 다음 날은 달리고 걷기에 집중하는 식이다. 유 교수도 처음엔 뇌력이 먼저 인줄 알았다. 수도공고를 졸업한 그는 취업해 2년 사회상활 하다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고시에 합격한 체험수기를 본 뒤 인생 역전이라는 게 이런 것을 느끼며 법대에 진학하려고 했다. 그런데 교육공학과에 들어가게 됐다”고 했다. 석사와 박사과정을 하며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다 쓰러진 뒤에야 신체건강의 중요성을 체득한 것이다. “정신 나간 사람은 정신력으로 극복하려고 하고, 제 정신인 사람은 체력으로 극복합니다. 극한 상황에서 머리는 절대 몸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정신력이 아닌 체력이 더 중요한 이유입니다.” 유 교수는 2015년 해발 5895m 킬리만자로에 오를 때 다시 체력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산을 오를수록 기온이 떨어지고 체력도 떨어져 더 이상 못 움직일 것 같은 극한 상황이 왔다. 머리로는 가자고 하는데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난 체력이 있어 극복할 수 있었다. 체력이 바닥난 사람은 포기해야 했다. 체력이 없으면 몸은 머리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고 말했다. “선진국 미국은 체덕지(體德智)를 강조합니다. 지덕체(智德體)를 앞세우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어요. 우리가 살아갈 가장 중요한 기본인 몸을 안 움직이며 머리로만 공부해선 창의적인 인재가 될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 세계적인 리더와 창의적 인재가 많이 나오는 배경에 체덕지가 있습니다.” 유 교수는 모든 학생을 ‘공부 선수’로 만드는 대한민국 교육시스템에 비판적이다. 그는 “무엇을 하려면 실행을 해야 한다. 몸이 부실하면 실행력이 떨어진다. 실력은 실행력의 줄임말이다. 결국 체력이 실력이 된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생활화해야 실행력이 좋아진다”고 강조했다. 유 교수는 2018년 체인지(體仁智)란 책을 썼다. 체덕지와 비슷한 개념으로 직접 체험하고 공감하며 실천하는 게 진짜 지성이라는 뜻이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어야(Change) 한다는 뜻도 담고 있다. 그는 “운동하면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움직인 만큼 세상을 보는 프레임이 바뀐다”고 했다. “운동하는 사람은 정신 건강도 좋아요. 머리는 거짓말 하지만 몸과 감정은 거짓말 하지 않아요. 몸을 움직이면 그 느낌이 가슴을 거쳐 머리로 올라갑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뇌만 때리고 있습니다. 몸으로 느끼고 가슴에 온 게 없으니 손발을 안 움직입니다. 실천이 없는 교육이라고 할 수 있죠. 대한민국 교육시스템을 체덕지 위주로 완전히 바꿔야 합니다.” 유 교수는 “성공한 사람이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했다. “오늘 사용한 동사가 얼마나 다양하느냐가 행복을 결정합니다. 매일 ‘오늘도 수학 영어 공부했다. 회사에 갔다, 친구를 만났다’ 등 틀어박힌 동사를 사용하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아요. 일상을 바꾸는 것은 자신의 움직임을 바꾸는 것입니다. 어제 안했던 운동을 해보고 산에도 오르고, 자전거도 타고 등 어제와 다른 행동을 해야 합니다. 오늘 얼마나 많은 감탄사를 연발했으냐가 행복의 기준입니다. 신체를 움직이면 그게 곧 행복입니다.” 실행력을 키우는 교육을 강조하는 배경엔 유 교수의 지식생태학적 철학이 담겨 있다. 그는 지식생태학자를 자처한다. “평범한 대학교수보다 개인의 정체성을 알리는 퍼스널 브랜딩 차원에서 자칭한 것입니다. 지식생태학자는 생명체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경쟁과 협조를 통해 어떻게 거대한 생태계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는지를 관찰합니다. 그리고 통찰을 통해 사람의 생각과 조직을 변화시키는 원리를 연구합니다. 예들 들면 지식생태학자는 화초와 잡초를 비교해서 비닐하우스가 날아가면 죽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화초형 인재보다 모진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으면서 야생에서 자생력을 기르는 잡초형 인재를 육성하자는 주장합니다.” 유 교수는 지식생태학에 대해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지식생태학자는 갓 잡은 명태를 지칭하는 생태(生太)를 연구하지 않고, 생물이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과 그들 간의 관계를 지칭하는 생태(生態)를 연구합니다. 물론 명태의 싱싱한 생태도 연구하고 겨울에 얼린 동태도 연구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생태는 명태의 다른 이름인 생태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 양태를 지칭하는 생태(生態)입니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지식생태학은 자연 생태가 아니라 다양한 사회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관계맺음이 일어나는 사회생태입니다. 기존 학습관과 지식관을 비판적으로 분석, 대안적인 관점과 접근논리를 제시하려는 근원적인 생태학적 대안입니다. 지식생태학은 자연 그대로의 생태가 아닌 인간의 의도성과 목적성이 담긴 지식생태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지식과 생태라는 익숙한 개념이 만나 지식생태라는 낯선 생태가 탄생한 것이죠. 지식생태학의 탐구여정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나 공동체를 지식생태계로 조성하는 과정, 우리 모두가 꿈꾸는 행복한 지식생태계를 다 함께 디자인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묻고 대답하며 깨달아가는 집단적 성찰의 과정입니다.” 유 교수는 운동하고, 책 읽고, 책 쓰는 것을 밥 먹듯이 하고 있다. 그가 지금까지 쓴 책만 번역서를 포함해 90권이 넘는다. 연구 논문도 다른 교수들에 비해 10배는 많다. 체력이 뒷받침 됐기에 가능했다. 올 초에는 ‘부자의 1원칙, 몸에 투자하라’를 썼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건강을 잃으면 소용이 없다며 운동을 강조한 책이다. 그는 “돈도 체력이 있어야 번다. 재테크는 실패할 수 있지만 근(筋)테크는 절대 실패할 수 없다. 돈 번 뒤 병원에 누워 있으면 무슨 소용인가”라고 했다. 유 교수는 다양한 도전도 이어가고 있다. 2012년 7일간 250km를 달리는 사하라사막마라톤에도 도전했다. 사하라 등 세계 사막마라톤 그랜드슬램을 국내 최초로 달성한 ‘오지레이서’ 유지성 OSK 대표(50)와 함께 참가했다. 비록 120km지점에서 포기했지만 유 대표와 ‘울고 싶을 땐 사하라로 떠나라’란 책도 썼다. 마라톤 42.195km 풀코스도 5번 완주했다. 마라톤 계속 하다보니 무릎에 무리가 가는 것 같아 이젠 달리지 않고 속보로 걷고 있다. “운동효과는 달리기보다 속보가 더 효과적이다”고 했다. 올 6월부터는 자전거로 전국 일주도 시작했다. “10월 13일부터 17일까지 인천에서 부산까지 자전거를 타고 국토 종주를 다녀왔어요. 자전거 타기는 또 다른 매력을 주더군요. 먼저 오르막 내리막을 달리기 때문에 유산소 무산소 운동이 함께 되는 효율적인 스포츠입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잘 갖춰진 자전거길이 너무 아름다워요. 자전거 타기는 움직이는 인생학교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나가는 순간 모든 사물이 제게 말을 걸어옵니다. 바람도 하늘도 강도 나무도…. 자전거 타기는 자연의 협주곡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한편의 시라고 할까요? 제가 자전거 타는 시인이 된 기분입니다.” 유 교수는 자전거 인문학이란 책도 준비하고 있다. 4대강 1857km, 동해안해안도로, 제주 둘레길 등 국토완주을 하면서 느낀 점을 책에 담을 계획이다. 운동 습관은 어떻게 들여야 할까? “우리가 밥은 매일 먹죠. 안 먹으면 죽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습관이 된 거죠. 어떻게 보면 운동은 안 해도 죽진 않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등한시하죠. 하지만 운동을 해야 삶의 질이 좋아집니다. 삶을 보는 프레임도 바뀝니다. 밥 먹듯 매일 운동해야 합니다.” 유 교수는 운동은 새벽에 해야 효과적이며 알람이 울리자마자 1초안에 일어나 나가야 실천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운동을 점심, 저녁 때하면 변수가 너무 많아집니다. 갑자기 없던 약속이 생기도 하고, 회의가 잡히기도 하고. 새벽에 하면 그런 변수가 사라지죠. 그리고 알람 3개를 맞춰놓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바로 일어나지 않으면 바로 ‘운동을 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머리를 맴돕니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 오래 생각하면 행동은 미뤄지는 법입니다.” 유 교수는 “100세 시대의 화두는 건강과 행복이다. 과거 50대에 정년이었다. 이젠 50년을 더 살아야 한다. 신체성, 즉 건강이 확보돼야 100세까지 즐겁게 살 수 있다. 운동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재차 강조했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1991년 미국 플로리다주립대 박사과정 시절이었다. 짧은 영어로 따라가려다 보니 잠을 줄여 가며 공부에 매진해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과로로 쓰러졌다. 그때 체득했다. 뇌력을 발휘하려면 체력이 먼저 돼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생존 차원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58)는 미국 유학 시절 건강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낀 뒤 운동을 평생 생활화하고 있다. 수업 및 각종 강연, 방송에서 운동 전도사 역할도 하고 있다. 언뜻 보면 체육과 교수로 보일 정도다. 스포츠 왕국 미국의 대학은 체육시설이 좋았다. 유 교수는 웨이트트레이닝으로 근육도 키우고 걷고 달리는 유산소 운동을 병행했다. 몸이 건강해지자 공부도 더 잘됐다. 유 교수는 “몸은 나의 중심이다. 근간을 이루는 몸이 무너지면 모든 감성과 지성, 그리고 영성이 무너진다. 몸이 바로 서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건강의 중요성을 안 뒤부터 유 교수의 하루는 운동으로 시작된다. 올 1년은 연구년이라 좀 여유 있게 시작하지만 평소엔 오전 5시 30분에 일어나 피트니스센터로 달려간다. 1시간에서 1시간 30분 땀을 흘린 뒤 학교로 넘어간다. 무산소 근력운동과 유산소 달리기 걷기를 혼합해서 운동한다. 하루를 웨이트트레이닝에 중점을 둔다면 다음 날은 달리고 걷기에 집중하는 식이다. 그는 2012년 7일간 250km를 달리는 사하라사막 마라톤에도 도전했다. 마라톤 42.195km 풀코스도 5번 완주했다. 올해부터 자전거로 전국 일주도 시작했다. 유 교수도 처음엔 뇌력이 먼저인 줄 알았다. 그는 수도공고를 졸업하고 취업했다 뒤늦게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고시에 합격한 체험수기를 본 뒤 ‘인생 역전이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느끼며 법대에 진학하려고 했다. 그런데 교육공학과에 들어가게 됐다”고 했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다 쓰러진 뒤 신체 건강의 중요성을 체득한 것이다. “극한 상황에서 머리는 절대 몸을 통제하지 못한다. 정신력이 아닌 체력이 더 중요하다.” 유 교수는 2015년 해발 5895m 킬리만자로에 오를 때 다시 체력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산을 오를수록 기온이 떨어지고 체력도 떨어져 더 이상 못 움직일 것 같은 극한 상황이 왔다. 머리로는 가자고 하는데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체력이 있어 극복할 수 있었다. 체력이 없으면 몸은 머리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고 말했다. “선진국 미국은 체덕지(體德智)를 강조한다. 지덕체(智德體)를 앞세우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갈 가장 중요한 기본인 몸을 안 움직이며 머리로만 공부해선 창의적인 인재가 될 수 없다.” 유 교수는 모든 학생을 ‘공부 선수’로 만드는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에 비판적이다. 그는 “무엇을 하려면 실행을 해야 한다. 몸이 부실하면 실행력이 떨어진다. 실력은 실행력의 줄임말이다. 결국 체력이 실력이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생활화해야 실행력이 좋아진다”고 강조했다. 유 교수는 2018년 체인지(體仁智)란 책을 썼다. 체덕지와 비슷한 개념으로 직접 체험하고 공감하며 실천하는 게 진짜 지성이라는 뜻이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어야(Change) 한다는 뜻도 담고 있다. 그는 “운동하면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움직인 만큼 세상을 보는 틀이 바뀐다”고 했다. 유 교수는 매일 운동하고, 책 읽고, 책 쓰는 것을 밥 먹듯이 하고 있다. 그가 지금까지 쓴 책만 번역서를 포함해 90권이 넘는다. 연구 논문도 다른 교수들에 비해 10배는 많다. 체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올 초에는 ‘부자의 1원칙, 몸에 투자하라’를 썼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건강을 잃으면 소용이 없으니 운동을 강조한 책이다. 그는 “돈도 체력이 있어야 번다. 재테크는 실패할 수 있지만 근(筋)테크는 절대 실패할 수 없다. 돈 번 뒤 병원에 누워 있으면 무슨 소용인가”라고 했다. 유 교수는 “100세 시대의 화두는 건강과 행복이다. 과거엔 50대가 정년이었다. 이젠 50년을 더 살아야 한다. 신체성, 즉 건강이 확보돼야 100세까지 즐겁게 살 수 있다. 운동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재차 강조했다. 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어떤 상황에서도 쫄지 않는다.”2020 도쿄 올림픽에서 한국 수영의 스타로 떠오른 황선우(18·서울체고)를 지켜본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타고난 강심장이란 평가다. 서울체중 2학년 때부터 5년째 그를 지켜본 이병호 서울체고 감독(52)은 “자신은 긴장을 한다고 하는데 지켜보는 사람들 입장에선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지나치게 긴장하면 오히려 경기력에 악영향을 주는데 황선우는 늘 기대 이상의 성적과 기록을 내는 것으로 봐 적당히 긴장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황선우는 이런 특유의 배짱을 앞세워 도쿄 올림픽에서 한국 수영에 새 꿈을 심어 줬다. 2008 베이징 올림픽 자유형 400m 금메달리스트 박태환(32)이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부정출발로 실격당한 반면 황선우는 첫 무대부터 당당하게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쟁했다. 황선우는 자유형 200m 결선에서 100m까지 49초78로 주파해 세계기록(50초12)보다 앞섰다. 결국 1분45초26으로 7위에 그쳤지만 150m까지 1위로 달려 세계를 놀라게 했다. 100m 준결선에서는 47초56으로 아시아 기록(종전 중국 닝쩌타오 47초65)을 7년 만에 갈아 치웠다. 1956 멜버른 올림픽 다니 아쓰시(일본) 이후 65년 만에 올림픽 자유형 100m 결선에 오른 아시아 선수가 됐다. 100m 결선에서는 47초82로 5위를 했지만 금메달을 딴 케일럽 드레슬(25·미국)로부터 “18세 때의 나보다 빠른 선수”라는 극찬을 받았다. 14일 막을 내린 제102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수영 5관왕으로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된 황선우를 경북 김천과 구미에서 만났다. 그의 마음은 벌써 3년 뒤의 2024 파리 올림픽에 가 있었다. “파리의 에펠탑을 빨리 보고 싶다”고 했다.성장 중… 근력 키우면 세계 정상 황선우는 “올림픽 자유형 100m 준결선에서 출발한 뒤 15m 만에 드레슬에게 허리 이상 뒤졌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다시 영법으로 따라잡았는데 50m에서 턴한 뒤 다시 밀렸다. 결국 출발 및 턴 이후 돌핀킥을 보완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황선우는 성장 중이라 웨이트트레이닝을 체계적으로 시키지 않았다. 당연히 파워 넘치는 선수들에게 돌핀킥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세계적인 자유형 100m 선수들은 모두 근육질 체형이다. 자유형은 출발한 뒤 15m 정도를 물속에서 돌핀킥을 하는데 파워가 부족하면 치고 나가기 힘들다. 흐름상 바로 물 위로 나와 팔 스트로크를 하면 오히려 더 뒤처진다. 황선우가 웨이트트레이닝으로 파워를 보완해야 하는 이유다. 이 감독은 “100m에서 드레슬에게 스타트와 턴에서 뒤졌지만 영법으로 다시 따라잡는 것을 보고 충분히 세계기록 경신도 가능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현 남자 자유형 100m 세계기록은 2009년 브라질의 세자르 시엘루 필류가 기록한 46초91이다. 황선우의 기록(47초56)과 불과 0.65초 차다. 황선우는 “제가 세계기록을 깬다고 장담하기엔 솔직히 부담스럽다. 하지만 도쿄 올림픽에서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했고 잘 보완하면 제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은 얻었다”고 말했다.물에선 따라올 자 없는 ‘신동’ 황선우는 수영에 특화된 천재다. 요즘 한 TV 프로그램에서 ‘축구 선수’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박태환은 전형적인 만능 스포츠인이다. 다른 운동을 했더라도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다. 하지만 황선우는 다르다. 전동현 서울체고 코치(46)는 “선우는 수영 외에 잘하는 운동이 거의 없다”고 했다. 서울체고는 여름철과 겨울철에 심폐기능 향상을 위해 오래달리기 훈련을 시킨다. 남자 선수들은 400m 육상 트랙 10바퀴를 바퀴당 2분 페이스로 달려야 한다. 황선우는 단 한 번도 제 시간에 들어온 적이 없다. 심지어 2분30초 페이스로 달리는 여자 선수들에게도 뒤진다. 최근 국가대표 상비군 훈련에서 오래달리기 훈련을 하다 5바퀴 돌고 과호흡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하지만 물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기량을 뽐낸다. 황선우는 수영을 진심으로 좋아한다. 훈련도 즐기고 다른 선수들의 영상을 보는 것도 좋아한다. 세계적인 선수들의 동영상을 보면서 분석하고 어떻게 자신의 영법에 적용할지를 고민하는 게 취미다. 황선우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엇박자 영법’도 이런 과정에서 나왔다. 황선우는 오른쪽으로 숨을 쉰 다음 오른팔을 앞으로 더 길게 밀어 넣어 물을 세게 당겨 추진력을 얻는 엇박자 영법의 리듬을 유지하며 팔 젓기를 빠르게 한다. 리듬이 깨지지 않고 팔 스트로크를 빠르게 하는 황선우만의 기술이다. 리듬 없이 무작정 팔만 빨리 회전시킬 경우 오히려 추진력을 잃을 수 있다. 황선우가 지도자들과 협의해 계속 새로운 시도를 했고 기록이 단축되다 보니 자신만의 영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황선우는 “수영에만 전념하기 위해서 실업팀에 가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내년 9월 열리는 항저우 아시아경기, 그리고 2024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기 위해서다. 그는 “국제대회에 자주 출전해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쟁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게 대학에 진학해 학업을 병행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란 판단을 했다”고 했다. 부모님들의 반대는 없었을까. 황선우는 “부모님들은 제 선택을 언제나 믿고 따라 주신다”고 했다. 지금까지 수영 선수를 하면서 중요한 판단을 할 때 부모님은 언제나 황선우의 선택을 지지했다. 수영을 즐기는 부모님을 여섯 살 때부터 따라다니며 수영을 배운 황선우는 수원 매현중 2학년 때 서울체중으로 전학했다. 국제규격인 50m 수영장이 있는 곳에서 체계적으로 수영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결국 한국 대표 수영 선수로 성장했다.‘미완의 천재’ 수영계가 키워야 황선우는 이번 전국체육대회에서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늘 웃는 게 트레이드마크가 돼 ‘미스터 스마일’로 불렸다. 지도자 동료 선수들과 대화할 때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해도 늘 활짝 웃으며 다 찍어 줬다. 매사에 긍정적이다. 늘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지도자들은 황선우가 큰 무대에서 자신감을 잃지 않는 강심장인 이유도 이런 긍정적인 성격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한다. 지도자들은 황선우를 미완의 천재로 보고 있다.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얘기다. 이 감독은 “황선우는 어떤 지도자를 만나도 잘할 선수다. 다만 지나치게 성적과 기록에 집착하면서 훈련시키다 보면 황선우의 천재성을 망칠 수 있다. 천재성을 드러낼 수 있게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선우에게 맞춤형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얘기다. 황선우를 한국 수영계가 잘 키워야 한다는 지적이다. 황선우는 21일부터 카타르 도하에서 열리는 국제수영연맹(FINA) 쇼트코스 경영월드컵에 출전한다. 황선우의 세계 정상 도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황선우△ 생년월일=2003년 5월 21일 생△ 신체조건=186cm, 72kg△ 소속=서울체고(매니지먼트 올댓스포츠)△ 한국기록자유형 100m=47초56(※아시아 기록)자유형 200m=1분44초62개인혼영 200m=1분58초04혼계영 400m=3분35초26계영 800m=7분11초45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헤어디자이너 임경아 씨(41)는 요즘 달리는 재미로 산다. 도로와 공원은 물론 산까지. “2년여 전 2019년 6월이었습니다. 한강변을 달리고 걷고 있는데 함께 달리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크루라고 달리는 사람들 모임이 있었는데 앞에서 끌어주고 같이 응원하면서 달리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여럿이 함께 달리면 재밌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게 맞는 크루를 찾아 나섰죠.” 사실 임 씨는 10여 년 전부터 다양한 스포츠를 즐겼다. 댄스스포츠, 발레, 수영, 헬스, 걷고 달리기…. “헤어샵에서 일할 때 주 1일 쉬면서 일했어요. 운동을 자유롭게 하긴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허리에 통증이 와 2일 정도 걷지도 못한 적이 있었어요. 그 때부터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댄스스포츠를 먼저 시작했다. 춤을 추며 건강도 다질 수 있어 좋았다. 동작이 크고 활동적이여 운동 효과가 좋았다. 나이가 들수록 몸이 굳어지는데 몸을 잘 안 풀어주면 미세한 부상이 오기도 했다. 그래서 유연성도 키우고 상하체 미세한 근육도 잡아주기 위해 발레를 시작했다. 발레는 기본적으로 바와 플로어에서 하는 몸을 풀어주는 스트레칭 동작이 많다. 상대적으로 하체를 많이 쓰지만 상체도 우아한 포즈를 만들기 위해선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수영은 운동량이 많고 부상 위험이 없어 시작했다. 헬스와 걷고, 달리는 것은 늘 하던 루틴이었다. 하지만 2년여 전부턴 정말 열성적으로 달리고 있다. 달리는 게 너무 좋았다. “요즘은 크루 등 동호회 정보를 인스타그램 등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서 찾아요. 저도 그렇게 해서 찾아 가입해 달렸습니다.” 서울 집(논현동) 근처 한강 공원을 주로 달렸다. 주 4일 이상은 달렸다. 한 번 달릴 때 10~15km는 달린다. “달리기 시작한 뒤 그해 가을부터 각종 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달리기에서 10km, 춘천마라톤에서 하프코스를 처음 달렸죠. 그리고 몇 개 마라톤대회에 더 출전했어요. 2020년 3월 서울국제마라톤 겸 동아마라톤에서 풀코스에 도전하려고 했는데 코로나19가 터지는 바람에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임 씨는 ‘달리기 초보’였지만 금방 두각을 나타냈다. 2019년에 춘천마라톤 하프코스 여자 30대 1위, 손기정마라톤 하프코스 여자 30대 1위, 코리아마스터스마라톤 하프코스 여자 30대 1위를 차지했다. 2020년 월드런마라톤 하프코스에선 여자 종합 4위를 차지했다. 10km는 45분대, 하프코스는 1시간 41분대가 개인 최고기록이다. “얼마 하지 않았는데 각종 대회에서 상위권에 오르자 욕심을 좀 부렸습니다. 지난해 대회는 없었지만 좀 많이 달렸어요. 혼자 달릴 때 30km까지 소화했죠. 그러다보니 올해 초 왼쪽 발에 장경인대염이 걸려 한 달간 운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부턴 무리해서 달리진 않습니다. 10~15km만 달립니다.” 임 씨는 제대로 자세를 배워 달리려고 2019년 말 아식스러닝클럽(ARC)에도 가입해 달렸다. 지금은 갱런 6기로 활동하고 있다. 갱런은 달리기로 인생갱생에 성공한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이다. 가입신청을 하면 일정 정도 훈련을 시켜 테스트를 한 뒤 최종 가입을 승인하는 달리기 모임이다. 임 씨는 이렇게 6기로 가입했다. 올 봄엔 산을 달리는 트레일러닝도 시작했다. “공원 도로만 달리다보니 심심했어요. 코로나19로 뭉쳐서 달릴 수도 없고…. 그래서 산에 올라서 달려봤는데 색다른 맛이 있었어요. 도로나 공원은 사람들이 많아 노래를 들으면서 달렸는데 사람들이 드문 산에선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달릴 수 있어 좋았어요. 고개를 넘고 바위, 개울 등이 있어 힘들고 부상 위험도 있지만 꽃과 나무 등 자연과 함께 되는 느낌이 너무 좋았습니다.” 임 씨는 17일 강원도 정선에서 열리는 하이원스카이러닝 트레일러닝대회 12km에 출전한다. 첫 대회 출전이다. 11월 초에는 트랜스제주 트레일러닝대회 50km에 출전할 계획이다. “수도권과 지방의 산들을 달리기는 했지만 대회 출전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떨립니다. 잘 해낼 수 있을지….” 임 씨는 본격적으로 달리면서 삶의 여유를 즐기고 있다. “헤어샵에 얽매여 있을 땐 느끼지 못한 즐거움입니다. 제가 5년 전 프리랜서로 전향했거든요. 이젠 틈만 나면 달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집과 헤어샵 근처인 서울 강남에서만 맴돌았다면 본격적으로 달리면서부터는 수도권은 물론 지방 명소까지 가서 달리고 있습니다.” 아차산, 검단산, 청계산, 대모산, 북한산은 등 수도권 산은 다 달렸다. 조만간 불수사도북(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도 달릴 계획이다. 최근엔 제주 한라산을 달리고 왔다. 도로와 공원은 주로 밤에 달렸는데 산은 새벽에 달리고 있다. “달리기는 할 때마다 새로워요. 장소가 바뀌잖아요. 그리고 몸 컨디션이 안 좋은데 더 잘 달리기도 하고 몸 컨디션이 좋은데 잘 못 달리기도 하고…. 지루하지가 않아요. 물론 건강에도 좋고요.” 임 씨는 맘에 맞는 달리기 친구들과 ‘런 트립’이란 크루를 만들었다. 소수정예로 전국 명소를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고 달리는 달리기모임이다. 이미 헤어샵 입사 15년 지기와 경기 강화, 제주도 등을 달리고 왔다. 코로나19가 가고 일상이 찾아오면 내년 3월엔 동아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할 계획이다. 지난해 3시간 40분을 목표로 연습했다. 올 겨울에도 첫 풀코스 3시간 40분 완주를 목표로 도로와 공원, 산을 달릴 계획이다. “제 모토가 오늘이 나의 리즈(전성기·황금기)이게 살자입니다. 게을러지려 할 때마다 생각하는 모토입니다. 운동은 매일 밥을 먹듯 일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운동을 안 하면 하루가 안 지나가요. 건강을 지키는 것도 있지만 달리면 삶에 활력이 생겨요. 달리기는 제 삶의 활력소입니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