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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수성에 있다. 나는 갓난아이의 모습이다. 뜨거운 해가 떠오르고 진다. 나는 자란다. 금성을 지나 지구에 다다르자 소년이 되었다. 한 소녀를 만난다. 달빛 아래.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다. 겨울, 그녀가 떠났다. 나도 떠난다. 타오르는 듯한 화성, 태풍이 부는 광활한 목성, 그리고 신비한 고리가 있는 토성. 어느덧 중년이 넘은 나의 여정은 태양계 끝 행성들로 이어진다. 태양과 멀어질수록 더 춥고 혹독하다. 별이 태어나고 지듯, 나도 져가는 것일까. 이것은 마지막일까. 아니면 새로운 시작일까. 태양계를 돌아다닌 어떤 존재의 일생을 그린 책. 끓어오르는, 때론 얼어붙은 행성들을 표현한 감각적인 그림들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별의 일생과 인간의 일생이 놀랍도록 닮았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이 책은 외계의 한 존재가 태양계 행성들의 표면에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새겨 넣은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기묘한 설정이 몰입감을 배가시킨다. 마지막 여운도 짙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스마트폰에 혼을 뺏긴 듯 눈도 깜빡이지 않는 아이를 둔 부모라면 눈여겨볼 책이다. ‘디지털 세계는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병들게 하는가’라는 부제를 단 신간은 디지털 기기가 1996년 이후 태어난 Z세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파헤친다. 미국 퓨연구센터가 2022년 발표한 보고서에서 10대의 46%는 ‘거의 항상’ 온라인에 접속해 있다고 응답했다. Z세대 중 연령이 가장 높은 층은 2009년 무렵부터 사춘기가 시작됐는데, 이때는 마침 정보기술(IT)의 생활화가 본격화된 때다. 2007년 아이폰이 출시된 데 이어 2010년 스마트폰에 전면 카메라 기능이 추가됐다. 2012년 페이스북이 인스타그램을 인수한 이후 개인 계정에 자신의 사진을 게시하는 이들이 크게 늘었다. 흥미진진하고 중독성이 강한 ‘알라딘의 램프’를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면서 사춘기를 보낸 역사상 첫 세대가 된 것. 미국 사회심리학자인 저자는 Z세대가 처한 새로운 성장 방식을 ‘아동기 대재편(Great rewiring of childhood)’이라고 일컫는다. 놀이 등 소규모 공동체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라온 기성세대와 달리 IT 기기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는 것. 동물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놀이는 어린 포유류의 뇌 회로를 연결하고 완성하는 작업으로, 어른이 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핵심 수단이다. 이런 기능을 수행하는 놀이를 잃으면 사회적, 인지적, 정서적 손상이 불가피하다. 실제로 성장 과정에서 놀이 대신 IT 기기를 택한 Z세대는 지나치게 예민하고, 만성적으로 불안하며, 무기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안세대’가 됐다. 청소년 우울증이나 자해, 자살, 온라인 성착취, 사이버 집단 따돌림 등도 늘고 있다. 영국에서 2000년에 태어난 아동 1만9000명을 추적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평일에 소셜미디어에 5시간 이상을 쓴다고 답한 여자아이는 소셜미디어에 시간을 전혀 쓰지 않는다고 답한 여자아이보다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3배나 높았다. 저자는 아동기 대재편을 초래한 원인이 IT뿐 아니라 자녀에 대한 과잉보호에도 있다고 말한다. 특히 미국, 영국, 캐나다에서 어린이를 부모 감시 없이 밖에 돌아다니게 하면 범죄자의 표적이 되기 쉽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 놀게 하는 대신 스마트폰을 쥐여준 부모의 선택이 ‘불안세대’를 부추겼다는 얘기다. IT 기기로 촉발된 아이들의 정신 불안을 막으려면 가정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고 정부, 회사, 학교, 부모가 함께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교 이전 스마트폰 사용 금지 △16세 이전 소셜미디어 사용 금지 △학교에서 휴대전화 사용 금지 △어른의 감독을 받지 않는 놀이와 독립적 행동 확대라는 네 가지 핵심 지침을 제시한다. 현실적으로 이런 것들을 모두 실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IT 기기 사용 시간을 확 줄이는 ‘담대한 결정’이 필요한 때인 것만은 분명하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영화나 소설을 볼 때 내 마음에 든 신인이 활동하는 걸 보면서 마음속 응원을 보낸 적이 있나요? 문화예술계의 미래는 작가, 미술가, 연출가, 배우 등 다양한 분야의 젊은 예술가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을 겁니다. 한국 문화계를 이끌 MZ세대 크리에이터들을 조명합니다.》“제 안에 아저씨가 좀 있는 것 같아요.” 2일 동아일보와 만난 성해나 작가(30)는 “제 소설을 읽은 분들이 ‘당신은 아저씨나 할머니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며 씩 웃었다. 50대 베이비부머 남자 교사부터 문신으로 상처를 덮는 위안부 할머니, 유튜브 영상을 편집하는 시골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 속 인물들에는 장년이나 노년층이 적지 않다. 그는 “할머니 손에 자라서 그런지 어른들한테 좀 더 애틋한 시선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온라인 서점 예스24가 최근 선정한 ‘한국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1위에 올랐다. 앞서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오즈’로 등단할 당시 ‘정형화된 인물을 탈피해 개성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구효서·은희경 소설가)는 호평을 받았다. 번아웃이 온 30년 경력의 스타 무당 등 작품마다 다양한 나이와 직업의 인물들이 등장해 독자들의 눈길을 끈다. 그는 “다른 몸이 돼 보는 것, 그런 전이의 체험이 정말 재밌다”고 했다. 같은 2030세대 여성 작가들이 주목하지 않는 인물을 등장시키는 건 ‘세대 간 이해’라는 주제의식의 영향이 크다. 왼팔을 잃은 아버지와 왼다리를 잃은 아들이 함께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하근찬의 ‘수난이대’와 같은 이야기에 어릴 적부터 마음이 끌렸다고. 그는 “한 인간을 보려 하지 않고 세대, 젠더 식으로 묶어버리니까 갈라치기나 갈등, 혐오가 더 심해지는 것 같다”며 “제 소설 안에서라도 서로 불신이 쌓이지 않게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개성이 넘치는 다양한 캐릭터들은 어떻게 세상에 나올까. 그는 단편소설 한 편을 쓸 때 구상과 취재에만 두 달을, 집필에 한 달을 쓴다고 한다. 등장인물의 리얼리티를 높이기 위해 그가 사는 건물의 평면도까지 그려 놓고 글을 쓴다. ‘구의 집’ 작업 당시 그린 주인공 집 평면도에는 화장실과 출입구 위치 등이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빼곡히 표시돼 있었다. ‘벽면 마감: 고급 흡음 벽지, 유공 합판 위에 비닐페인트로 칠함’ 같은 깨알 메모는 건축가의 도면을 방불케 했다. 젊은 작가답게 몸으로 부닥치는 ‘체험형 취재’에도 종종 나선다. 청년들이 농촌 어른들에게 유튜브 편집을 가르치는 내용의 단편소설 ‘당춘’을 쓸 땐 충남 홍성군 홍동면의 농장을 찾아가 감자를 캐고 보리를 밟았다. 당시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때라 농촌 분위기가 울적할 거라고 지레짐작했는데, 농작물의 인터넷 판매가 늘면서 실제는 반대였다. 그 덕분에 처음 구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작품을 쓰게 됐다. 그는 “역시 뭐든 직접 겪어봐야 안다”며 “현장 르포는 디테일하게 쓰려고 가는 면도 있지만 제 편견을 바꾸러 가는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신인 작가들이 대개 그렇듯 등단 직후 그도 힘든 시기를 보냈다. 3년 반 동안 원고 청탁이 한두 건에 불과해도 ‘뭐라도 쓰자’는 각오로 매일 일정한 분량의 글을 썼다. 낮에는 공공기관 아르바이트, 글쓰기 강의 등의 부업을 하면서 주로 밤에 글을 썼다. 이 시기 독자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됐다고. 그의 휴대전화에는 ‘나를 살게 해주는 것’이라는 제목의 폴더가 있다. 캡처한 독자 리뷰를 폴더에 보관해 놓고 두고 두고 꺼내 읽는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와 유튜브 등 영상 콘텐츠가 범람하고, 책 읽는 이가 줄어드는 시대에도 그는 “글의 힘을 믿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 생에선 글을 쓰며 살게 될 것 같습니다. 쓰다 보면 힘들 때도 있겠지만 초연하게 해나가려고요.”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유감이다. 지구 바깥에 제2의 정착지를 만들겠다는 인류의 야심 찬 시나리오는 현실 가능성이 없다는 게 책의 주된 내용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물리적 한계를 피할 순 없다는 것. 스페이스X 최고경영자(CEO)인 일론 머스크가 흔드는 화성행 탑승권이 잘해야 ‘편도’ 탑승권이라는 얘기가 실망스럽긴 하지만 한번쯤 이런 의견도 눈여겨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적어도 지구라는 요람을 돌아볼 기회는 될 테니 말이다. 이탈리아의 천체물리학자로 로마 토르 베르가타대 물리학과 교수인 저자는 우주 식민지 건설이라는 오랜 꿈과 이로 인해 직면할 현실적인 한계를 과학적인 관점에서 들여다봤다.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는 게 가능한지, 기술적·생물학적·윤리적 문제는 없는지, 더 나아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지난해 과학 출판물에 주는 이탈리아 최고 권위 상인 갈릴레오상 대상에 선정된 책이다. 스페이스X 등 민간 우주기업들은 이번 세기 안에 화성에 도시를 세울 수 있다고 공언한다. 머스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화성에 인구 100만 명 규모의 자급자족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승객 1명당 화성 여행 비용을 20만 달러(약 2억7000만 원)로 낮추기 위해 기술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스페이스X의 스타십 프로젝트에는 사람을 화성으로 보내는 방법만 있을 뿐, 장기간의 우주비행에 따른 방사선 노출이나 무중력 상태를 해결할 실질적인 안전장치가 빠져 있다. 숱한 어려움을 뚫고 화성에 도착했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이 문제다. 화성의 극지 얼음을 녹이려면 수천 개의 고출력 핵탄두를 며칠에 걸쳐 폭발시켜야 하는데, 이때 오늘날 전 세계에 비축된 것보다 더 많은 핵무기가 필요하다. 폭발로 인해 방출된 막대한 양의 핵 먼지가 태양 빛을 가려 화성을 지금보다 더 냉각시킬 수도 있다. 결국 화성 기후를 지구처럼 만들겠다는 ‘테라포밍(Terraforming)’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만약 화성을 테라포밍할 기술이 있다면 지구 온난화를 먼저 해결하는 게 훨씬 쉽지 않겠느냐”는 저자의 지적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이유다. 그렇다고 저자가 우주 탐사 전체를 회의적으로 보는 건 아니다. 꾸준한 관심과 투자는 이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다만 몇몇 사업가가 우주 진출에 대한 사람들의 낭만적인 꿈을 이용해 경제적 이윤 추구에 몰두하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우주 탐사에 장기적으로 독이 된다는 것. 그러면서 한때 전 세계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달 탐사에 매달렸다가 1972년 이후로는 아무도 달을 방문하지 않고 우주 개발 역시 기약 없이 중단된 역사를 되짚는다. 무엇보다 저자의 주장은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푸른 지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68년 달 표면 촬영 임무를 띠고 우주로 갔다가 인류 최초로 지구 밖에서 지구 사진을 찍은 아폴로 8호 우주인들의 말에는 울림이 있다. “곧, 달은 지루해졌다. 마치 더러운 모래밭 같았다. 그러다 불현듯 지구를 봤다. 그곳은 우주에서 유일하게 색이 있는 곳이었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엄마, 엄마는 여름 방학 때 뭐 했어?” “글쎄, 엄마는 뭐 했나 찾아볼까.”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집에서 보내던 아이의 여름 방학. 엄마의 어릴 적 일기장을 찾았다. 1995년 8월 일기를 열어 보자 엄마는 추억 여행을, 아이는 엄마가 어릴 때로 같이 들어간 듯하다. 엄마와 이모가 단둘이 찾아간 외갓집에서 보낸 사흘. 사촌들과 다락방을 아지트 삼아 놀고, 저녁을 먹은 뒤 담력 훈련을 한다고 텅 빈 초등학교를 찾는다. 별것도 없는 그곳이 왜 그렇게 무서웠는지. 큰 모기장 안에서 자는 손주 네 명을 할아버지, 할머니는 지극하게 살피신다. 할머니는 손주를 씻기며 말씀하신다. “이제 쑥쑥 커서 중학생 되고 고등학생 되고 대학생 되고 어른 되면 할머니가 이렇게 씻겨 준 거 다 잊어버리겠지?” 잊고 살았던 ‘나의 여름 방학’을 아련하게 떠올리게 만드는 책. 아이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옛 방학 모습을 신기해할 것 같다. 수채화로 그린 정겨운 그림들은 우리를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가게 만든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인생의 난제가 풀리지 않을 때면 달아나는 것도 한 방법이죠.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일 겁니다.”(뉴스레터 서비스 ‘롱블랙’의 7월 22일 레터 중) “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들과 맞서기도 해야겠지만, 가끔은 달아나는 것도 필요하다.”(김영하 작가가 2019년 출간한 ‘여행의 이유’ 중) 김영하 작가(사진)가 본인이 쓴 책의 문구와 롱블랙의 최근 레터 문구의 유사성 문제를 제기하자 롱블랙 측이 “명예훼손”이라고 반박하며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김 작가는 지난달 31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롱블랙의 문구를) 보는 순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어떤 책의,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 바로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롱블랙 측에 문의를 하니 우연이라고 합니다. 전혀 잘못이 없어 사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답해왔습니다”고 적었다. 논란이 일자 롱블랙 측은 같은 날 SNS에 “(해당)소개글을 작성한 콘텐츠팀 리드와 에디터는 모두 해당 책을 읽지 않았다”면서 “글을 작성한 에디터와 리드가 정말로 ‘여행의 이유’를 읽고, 소개글에 작가님의 글을 활용하고자 했다면 출처를 밝히고 인용했을 것”이라고 했다. 온라인에서는 무단 도용 가능성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는 반면 문구에 사용된 단어들이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쓰이는 만큼 표절 가능성이 낮다는 시각도 있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부커상의 파급력을 알기에 더 신중하게 심사에 임할 겁니다.” 최근 세계적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심사위원으로 지명된 안톤 허(허정범·43) 번역가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2022년 정보라의 ‘저주토끼’,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후보에 올린 실력 있는 번역가다. 한국인으로 부커상 심사위원을 맡은 건 그가 처음이다. 그는 어렸을 때 부친을 따라 9년간 미국 등 해외에서 살면서 영어와 친숙해졌다고 한다. 26일 그를 만나 부커상 심사 과정과 한국 문학의 경쟁력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시상식은 내년 5월 20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다. 이보다 앞서 내년 2월 25일 1차 후보작(12, 13권), 4월 8일 최종 후보작(6권)이 각각 발표된다. 후보작 접수는 이미 이달 10일 시작됐다. 작가의 국적과 상관없이 영어로 번역돼 영국 및 아일랜드에서 출판된 작품이 대상이다. 노벨 문학상,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부커상의 인터내셔널 부문에는 지금까지 페르시아어, 베트남어, 아르메니아어 등 63개 언어로 원작이 쓰인 작품들이 심사 대상이 됐다. 부커상이 ‘문학계 올림픽’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후보작 접수가 시작되자 심사위원들에 대해 함구령이 내려졌다. 내년도 후보작이 되는 올 5월 1일부터 내년 4월 30일 사이에 출간되는 번역서에 대해 어떤 논평도 할 수 없는 것.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언급하는 것도 금지이고, 추천사도 쓸 수 없다. 허 번역가는 “지금도 추천사 제안 메일이 계속 들어오는데 ‘죄송하지만 할 수가 없다’고 답장하는 게 일”이라며 웃었다. 이번 심사위원단은 그를 비롯해 소설가, 시인, 편집자, 작곡가 겸 가수 등 총 5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매달 20∼30권씩 같은 책을 읽고 토론한 뒤 합의제로 후보작을 정한다. 지난번 수상작을 정했던 심사위원단은 모두 149권을 읽었는데, 매년 대상 작품 수가 늘고 있다고 한다. 허 번역가는 2021년 전미번역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250권의 출품작을 읽었다. 책이 좋아서 한다지만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보수를 묻자 그는 “적당히 주는 수준”이라며 말을 아꼈다. 최근 몇 년 새 부커상과 한국 문학은 ‘궁합’이 좋다. 2016년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수상한 이후 2018년 한강의 또 다른 소설 ‘흰’, 2022년 정보라의 소설집 ‘저주토끼’, 2023년 천명관의 장편 ‘고래’, 그리고 올해 황석영의 장편 ‘철도원 삼대’가 최종 후보에 올랐다. 그는 이런 한국 문학의 부상에는 번역 스타일의 변화가 큰 몫을 차지했다고 설명했다. 영국인 데버라 스미스의 ‘채식주의자’ 번역을 계기로 영미 독자들에게 읽히는 ‘의역’이 본격화됐다는 것. 이전에는 영문학자들 위주로 딱딱한 직역이 이뤄져 영미 등 시장에서 외면을 받았다는 얘기다. 부커상 후보에만 올라도 판매량이 크게 늘어 외신에선 ‘부커 바운스(Booker bounce)’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2007년 출간 후 10년간 국내에서 2만 부가 팔렸는데, 2016년 부커상 수상 직후 2주 만에 50만 부 넘게 판매됐다. 현재 ‘채식주의자’는 타밀어, 네팔어, 우르두어 등 40개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 허 번역가는 더 많은 한국 작품이 해외에서 주목받기 위해선 번역에 대한 지원 확대가 중요하다고 했다. 영문으로 번역되는 한국 작품이 1년에 10∼20권에 불과하다는 것. 그는 “한국 문학 작품을 해외에서 팔려면 번역가가 그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커상영국에서 출판된 영어 소설을 대상으로 매해 최고 소설을 가려내는 문학상이다. 노벨 문학상,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부커상의 파급력을 알기에 더 신중하게 심사에 임할 겁니다.” 최근 세계적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심사위원으로 지명된 안톤 허(허정범·43) 번역가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2022년 정보라의 ‘저주토끼’(정보라),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후보에 올린 실력파 번역가다. 한국인으로 부커상 심사위원을 맡은 건 그가 처음. 그는 어렸을 때 부친을 따라 9년간 미국 등 해외에서 살면서 영어와 친숙해졌다고 한다. 26일 그를 만나 부커상 심사 과정과 한국문학의 경쟁력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시상식은 내년 5월 20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다. 이보다 앞서 내년 2월 25일 1차 후보작(12~13권), 4월 8일 최종 후보작(6권)이 각각 발표된다. 후보작 접수는 이미 지난 10일 시작됐다. 작가의 국적과 상관없이 영어로 번역돼 영국 및 아일랜드에서 출판된 작품이 대상이다. 노벨문학상,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부커상의 인터내셔널 부문에는 지금까지 페르시아어, 베트남어, 아르메니아어 등 63개 국어로 원작이 쓰인 작품들이 심사 대상이 됐다. 부커상이 ‘문화계 올림픽’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후보작 접수가 시작되자 심사위원들에 대해 함구령이 내려졌다. 내년도 후보작이 되는 올 5월 1일부터 내년 4월 30일 사이에 출간된 번역서에 대해 어떤 논평도 할 수 없는 것.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언급하는 것도 금지이고, 추천사도 쓸 수 없다. 허 번역가는 “지금도 추천사 제안 메일이 계속 들어오는데 ‘죄송하지만 할 수가 없다’고 답장하는 게 일”이라며 웃었다. 이번 심사위원단은 그를 비롯해 소설가, 시인, 편집자, 작곡가 등 총 5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매달 20~30권씩 같은 책을 읽고 토론한 뒤 합의제로 후보작을 정한다. 지난번 수상작을 정했던 심사위원단은 모두 149권을 읽었는데, 매년 대상 작품 수가 늘고 있다고 한다. 허 번역가는 2021년 전미번역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250권의 출품작을 읽었다. 책이 좋아서 한다지만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보수를 묻자 그는 “적당히 주는 수준”이라며 말을 아꼈다. 최근 몇 년 새 부커상과 한국 문학은 ‘궁합’이 좋다. 2016년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수상한 이후 2018년 한강의 또 다른 소설 ‘흰’, 2022년 정보라의 소설집 ‘저주토끼’, 2023년 천명관의 장편 ‘고래’, 그리고 올해 황석영의 장편 ‘철도원 삼대’가 최종 후보에 올랐다. 그는 이런 한국 문학의 부상에는 번역 스타일의 변화가 큰 몫을 차지했다고 설명했다. 영국인 데버라 스미스의 ‘채식주의자’ 번역을 계기로 영미 독자들에게 읽히는 ‘의역’이 본격화됐다는 것. 이전에는 영문학자들 위주로 딱딱한 직역이 이뤄져 영미 등 시장에서 외면을 받았다는 얘기다. 그는 “한국 문학이 갑자기 대단해진 게 아니다. 한국 문학은 항상 대단했다. 다만 어떻게 번역해야 영미권에서도 통할지 이제 스타일이 각인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부커상 후보에만 올라도 판매량이 크게 늘어 외신에선 ‘부커 바운스(Booker bounce)’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2007년 출간 후 10년간 국내에서 2만 부가 팔렸는데, 2016년 부커상 수상 직후 2주 만에 50만 부 넘게 판매됐다. 현재 ‘채식주의자’는 타밀어, 네팔어, 우르두어 등 40개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허 번역가는 더 많은 한국 작품이 해외에서 주목받기 위해선 번역에 대한 지원 확대가 중요하다고 했다. 영문으로 번역되는 한국 작품이 1년에 10~20권에 불과하다는 것. 2021년 전미번역상 심사위원 당시 읽은 250권의 번역서 중 한국 작품은 5권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 문학 작품을 해외에서 팔려면 번역가가 그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허 번역가는 황석영의 ‘수인’, 강경애의 ‘지하촌’, 백세희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방탄소년단(BTS) 회고록 ‘비욘드 더 스토리’ 등을 영어로 번역했다. 직접 쓴 영문 소설 ‘투워드 이터니티’(Toward Eternity)는 미국에서 지난 9일 출간됐다. 그는 BTS의 리더 RM(본명 김남준)을 언급하며 “RM 씨를 한번 만나게 된다면 큰절하고 싶다. RM이 추천한 책은 해외에 있는 독자들도 일단 한 번 더 본다. 한국 문학을 위해 가장 큰 공을 세운 분이 아닐까 싶다”며 치켜세웠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그만해!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왜 왔어? 왜 왔냐고! 여기서 다 잘살고 있는데, 도대체 왜 와서 다 망가트리는데?” 이달 중순 찾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한 희곡 전문서점 ‘인스크립트’. 저녁 시간 희곡 낭독회가 한창이었다. 물론 전문 연기자들은 아니다. 그냥 ‘희곡이 좋아서’ 일반인들이 역할을 나눠, 대본 들고 낭독에 몰두하고 있는 것. 이날 낭독 작품은 황정은 작가의 SF 희곡 ‘노스체’. 지난해 연극 ‘노스체’에서 ‘현’ 역을 맡았던 배우 윤정로가 참석해 중간중간 ‘낭독 지도’를 했다. “대본 읽을 때 서로 눈을 쳐다봐 주세요. 희곡은 상대가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소개 땐 수줍어하던 참가자도 낭독이 무르익자 몰입도가 높아졌다. 본인도 모르게 판소리처럼 손짓을 추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날은 20∼40대 8명이 참가했는데, 2시간 동안 160쪽짜리 대본 한 권의 리딩을 마쳤다. 황선영 씨(46)는 “다양한 목소리로 들으니 희곡이 훨씬 입체적으로 읽힌다”고 했다. 희곡은 눈으로 읽을 때보다 말로 읽을 때, 더 나아가 여러 사람이 역할을 나눠 읽으면 재미가 배가 된다. 읽는 사람에 따라 전혀 색다른 매력이 분출되기도 한다. 이렇기에 최근 ‘희곡 낭독회’도 열리고 있는 것이다. 희곡에 대한 관심은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의 출시로 이어지기도 한다. 알라딘의 콘텐츠 창작 플랫폼 ‘투비컨티뉴드’는 안톤 체호프의 4대 희곡 중 세 작품인 ‘벚꽃동산’ ‘갈매기’ ‘바냐 아저씨’를 지난달부터 무료 연재 중이다. 웹소설 형식을 빌려온 게 특징. 올해 타계 120주년을 맞은 체호프가 웹소설 작가로 환생해 매일 1막씩 푸는 설정이다. 이름이 길고 복잡한 러시아 희곡 특성상 등장 인물마다 글자색을 달리해 가독성도 높였다. 셰익스피어 작품은 오디오북을 통해 ‘듣는’ 희곡으로 재탄생했다. 대사로 전개되는 희곡은 특히 오디오북과 상성이 좋다. 파가니니 음원 등을 삽입해 실제 연극을 감상하는 듯한 몰입감을 주는 것도 특징이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여덟 살 ‘누누’는 사실 비밀이 있어요. 바로 엄마가 인어, 자신도 인어랍니다. 물에 들어가면 다리가 꼬리지느러미로 바뀌어요. 하지만 학교 친구들도, 선생님도 이 사실을 모른답니다. 물 밖에서 ‘누누’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평범한 아이거든요. 그런데 위기가 찾아왔어요. 체육 시간에 수영장에 가게 됐거든요. ‘누누’는 친구들과 함께 물속에서 놀고 싶었지만 물 밖에서 꾹 참았어요. 그런데 하윤이가 물속에 빠진 게 보인 거예요. ‘누누’는 자기도 모르게 물속으로 들어가 하윤이를 구해냈어요. 그런데 아차! 다리가 꼬리지느러미로 변해 있었네요. 이것을 친구들도, 선생님도 봐 버린 거죠. ‘누누’는 어떻게 될까요. ‘인어공주가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독특한 상상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흥미롭다. 책을 읽고 난 뒤, 친구의 모습이 나와 다르다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이와 함께 얘기해보면 좋겠다. 우리 주변에 ‘인어공주’들은 생각보다 많을 수 있으니까.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연극용 물감과 BB탄으로 만든 자작극.”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암살 미수사건 직후 미 소셜미디어에선 이런 음모론이 확산됐다. 근거 없는 주장이 사실처럼 퍼지는 데는 수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뉴스피드를 통해 내가 신뢰하는 인플루언서의 의견만 보는 세상에서 음모론과 가짜뉴스는 활개를 치기 쉽다.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사회에서 진실을 가려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리학자이자 과학 커뮤니케이터인 저자는 신간에서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비논리의 흑역사를 보여주며, 어떤 논리적 오류가 있었는지를 분석한다. 이를 통해 인간이 비합리적으로 사고하는 패턴을 설명하고 비판적 사고력을 기르는 방안을 제시한다. 897년 교황으로 선출된 스테파노 6세는 전임 교황 포르모소의 부패를 맹렬히 비난했다. “죄 없는 자만이 자신을 변호할 수 있다. 포르모소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 따라서 포르모소는 유죄”라는 게 그의 논리였다. 스테파노 6세는 포르모소가 다시는 축복을 내릴 수 없게 오른쪽 손가락 세 개를 잘라버렸다. 황당하게도 포르모소는 재판이 시작되기 8개월 전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이미 시체가 됐는데 변론할 수 없다는 이유로 유죄로 몬 것. “죄 없는 자만이 자신을 변호할 수 있다(전제 1), 포르모소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전제 2), 따라서 포르모소는 유죄다(결론).”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는 삼단논법에 사람들은 속았다. 문제는 이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선동적인 미사여구 속에 숨어 진실을 판별하기 어려운 주장이 많다는 사실이다. 특히 인간의 기억은 타인의 의견에 의해 곧잘 왜곡된다. 2003년 스웨덴 외교부 장관 안나 린드 살인사건 당시 목격자들은 증언 전 차례를 기다리며 한방에 모여 있었다. 각자 목격한 사건을 두고 이야기를 나눴고, 서로의 기억에 과도한 선입견을 심어줬다. 목격자들의 진술은 일치했지만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해자인 미야일로 미야일로비치가 마침내 체포됐을 때 그의 모습은 목격자들의 증언과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몇 번의 클릭만으로 지식의 보고에 곧장 접속할 수 있는 지금은 논리적 함정에 더 취약하다. 이런 환경이 허위 사실을 어느 때보다 더 널리, 더 빠르게 퍼뜨리는 역설을 낳고 있다. 2014년 사이언스에 따르면 사람들은 TV나 신문으로 볼 때보다 온라인에서 부도덕한 사건을 접할 때 더욱 분노한다. 콘텐츠 크리에이터와 플랫폼이 이윤을 얻기 위해 뉴스를 자극적으로 소비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과학의 기본 태도인 비판적 사고 방식을 인류의 자산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계에서는 설령 고교생이 학계를 대표하는 과학자의 주장에 반기를 들어도 증거만 충실하다면, 과학자는 자신의 주장을 포기할 수 있다는 것. 과학으로 소통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편견 때문인 경우가 많다. 개인의 정치 성향과 편견이 기후변화, 원자력, 총기 규제, 예방접종 등 첨예한 사안을 판단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 이에 따라 거짓과 정치 선동, 사기꾼들의 속임수에 당하지 않기 위해선 분석적 사고 훈련을 통해 통념을 깨부숴야 한다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적어도 “다른 방법으로 확인할 때까지 특정한 주장의 수용을 유보하는 방법만 배워도 매우 유익한 습관이 된다”는 조언은 새겨들을 만하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희디흰 뺨에 검댕을 묻힌 아이가 눈을 뜬다. 눈엔 분홍빛 선율이 어려 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볼레로 선율. 아이는 춤을 추며 사마귀, 물고기, 나비와 만나고 이 모두와 친구가 된다. 그러다 쾅. 느닷없이 전쟁이 터진다. 익숙한 풍경이 속수무책으로 바스러진다. 아이는 살아남지만 상흔이 남았다. 그림책이 아니라 짧은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본 것 같다. 이수지 그림책 작가(50)의 신작 ‘춤을 추었어’(안그라픽스) 얘기다. 24일 서울 광진구의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건축된 지 30년 가까이 된 아파트 상가 건물 4층에 있는 공간에는 그림책 등이 빼곡했다. 신간의 착상은 어떻게 나왔을까. 지난해 10월 평소처럼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던 작가는 눈이 번뜩 뜨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시작된 날이었다. 전날 서울 여의도에선 불꽃축제가 열렸다. 어떤 오류에선지 인터넷 기사의 사진에 불꽃축제가 들어갔는데 아래 사진설명 제목엔 ‘이스라엘 하마스 대대적 포격 시작’이 달렸다. 이 작가는 “아이언돔이 밤하늘에 그리는 궤적이 불꽃놀이와 기가 막히게 흡사하다”며 “한 곳에선 사람이 죽어가는데 다른 곳에선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구나 싶었다”고 했다. 전쟁과 축제의 공존이라는 모순적 현실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 전작 ‘여름이 온다’에서 비발디의 음악을 입힌 그는 이번엔 모리스 라벨의 춤곡 ‘볼레로’를 갖고 왔다. 드럼 소리가 거의 들리지도 않게 시작해 점점 고조되다가 마지막에 ‘쾅’ 하는 대목에서 폭죽이 터지고 잔해가 떨어지는 듯한 시각적 환상을 느꼈다고. QR코드로 음악을 들으며 책장을 넘기면 마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부산행’ 등을 맡은 장영규 음악감독이 편곡을 맡았다. 여기에 1분 내외의 애니메이션 18개를 대체불가능토큰(NFT)으로 제작해 그림책의 외연을 넓혔다. 배경음악에 맞춰 폭죽이 터지고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등 그림책에 생동감을 부여했다. 이 작가는 “손에 쥐는 아날로그 매체인 그림책을 디지털화한다는 아이디어가 새로웠다”며 “지금도 서로 다른 장르가 만날 때 걱정보다 ‘재밌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고 말했다. 이 작가는 해외에서 K그림책에 대한 호응을 체감하고 있다고도 했다. 최근 해외출판 관계자가 농담처럼 ‘혹시 파주라는 곳에 그림책 학교가 있냐?’고 물었다고. 한국 그림책들의 서지정보에 들어간 ‘Paju’라는 단어를 보고, 출판사들이 모여 있는 파주출판도시에 관심을 보였다는 것. 이 작가는 “그림책 선진국들은 이미 정점을 찍고 유지되는 분위기라면, 한국은 막 뻗어 나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날것’의 좋은 기운이 있다”며 “처음 보는 그림책들이 많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했다. 2022년 아동문학계 노벨 문학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작가는 그림책, 음악, NFT를 아우르는 새로운 작업을 통해 이번 신간을 냈다. 새 책이 방금 나왔지만 그는 벌써 차기작 구상이 한창이었다. 어린이 그림책을 주로 그려 왔는데 이제는 청소년 얘기를 하고 싶다는 것. “딸이 중학교 3학년인데 농구부 주장이기도 해요. 딸이 농구 하는 모습을 봤는데 굉장히 역동적이었죠. 다음엔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가수 김민기가 운영하다 폐관한 대학로 소극장 ‘학전’은 17일 어린이·청소년 공연장 ‘아르코꿈밭극장’(사진)으로 이름을 바꿔 재개관했다. 고인은 세상을 떴지만 그의 뜻을 이어받는 공간은 새로 마련된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는 올 3월 15일 폐관한 학전 건물을 임차해 리모델링한 뒤 ‘아르코꿈밭극장’으로 문을 열었다. 새 이름에는 어린이들의 꿈이 움트고 자라는 공간이란 의미를 담았다.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 ‘슈퍼맨처럼!’ 등 어린이 공연과 ‘모스키토’ ‘굿모닝 학교’ ‘복서와 소년’ 등 청소년 공연을 선보인 학전의 토대 위에 어린이극 중심 공연장으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기존 극단 사무실이 있던 2층은 관객을 위한 임시 라운지로, 3층 연습실은 관객과 창작진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으로 바뀌었다. 다만, 4층 고인의 생전 집무실 공간은 아직 활용 방안이 정해지지 않았다. 김민기의 조카딸인 김성민 학전 총무팀장은 22일 기자간담회에서 “그 공간만큼은 비워둔 상태인데 어떻게 할지에 대해선 아직 정해진 게 없다”며 “공간을 관리할 수 있는 게 학전 사람들 말고는 없는 것 같다. 일단은 그대로 남겨 두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대중음악과 공연 역사에 큰 획을 그은 학전인 만큼 그동안 펼친 공연들을 아카이브로 남기는 작업도 추진된다. 김 팀장은 “눈에 보이는 자료들은 아르코예술기록원이 가져가 2∼3년 뒤 소장 자료로 확인하게 될 것”이라며 “학전은 김민기의 공연과 대중음악, 작품 대본집 모두를 아우르는 아카이브를 학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할 예정”이라고 했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천재 시인 이상(1910∼1937)이 남긴 마지막 소설 ‘동해’(1937년)에서 주요 모티브로 등장하는 영화 ‘만춘’의 원본 영상이 확인됐다. 그동안 작품 속 허구의 영화로 치부된 ‘만춘’의 실제 영상이 확보된 것으로, 이상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 이상 연구에 천착해 온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국문학)는 동아일보 1936년 신문에 게재된 영화 ‘만춘’ 광고를 통해 영화가 실제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22일 밝혔다. 권 명예교수는 “이상을 연구하며 수십 년간 이 영화를 찾아다녔는데 결국 호주의 한 영화사에서 보유 중인 영상 파일을 받을 수 있었다”며 “이상은 자신이 경험한 일이나 관람한 영화 등을 얽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메타픽션’ 방식을 잘 활용했는데, 그 사실을 그대로 입증해주는 영화가 발견된 것”이라고 말했다. 동해는 이상의 3대 소설(‘동해’, ‘날개’, ‘종생기’) 중 하나로 ‘임(姙)’이라는 여성을 둘러싸고 주인공과 친구의 삼각관계를 그렸다. 작품에서 어느 날 ‘임’이 ‘나’에게 불쑥 찾아온다. 나의 친구 ‘윤’과 헤어졌다며, 혼자 사는 집에 옷가방까지 싸 들고 찾아온 것. 다음 날 나는 임이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헤어졌다던 남편에게 다가서는 모습을 보고 질린다. 두 사람 사이에 내가 어정쩡하게 끼어들게 된 것. 이때 주인공이 친구 T 군과 보는 영화가 ‘만춘’이다. 권 명예교수에 따르면 ‘만춘’은 1936년 6월 23일부터 일주일 동안 서울 종로구의 단성사에서 상영됐다. 원제는 ‘The Flame Within’(정염·情炎)이다. 미국 MGM사가 1935년 제작하고, 에드먼드 골딩이 감독을 맡았다. 소설 ‘동해’처럼 남녀 간 삼각관계를 그린 영화 ‘만춘’은 정신과 의사 메리가 여성 환자 린다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린다는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약혼자 잭 때문에 실의에 빠져 자살까지 시도한다. 메리의 적극적인 치료 덕에 잭은 8개월 만에 건강해지고, 린다와 잭은 결혼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내 잭은 자신을 치료해준 메리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메리는 혼란에 빠진다. 영화는 메리가 잭에게 린다와의 결혼에 책임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끝난다. 권 명예교수는 이상이 시 ‘오감도’를 발표한 지 90주년이 되는 24일 서울 종로구 ‘유심’ 사무실에서 영화 상영회를 열 예정이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선장님! 방금 타이타닉호로부터 긴급 구조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배가 빙산과 충돌해서 즉시 도움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타이타닉호 사고 지역 인근에서 운항하던 여객선 카르파티아호의 선장인 아서 로스트론은 이런 보고를 받자마자 배를 돌려 구조에 나서라고 전격 지시한다. 타이타닉호와 107km 떨어져 있어 가는 데만 최소 4시간은 걸리지만 ‘희망’을 놓지 않기로 한 것. 최대한 빨리 가기 위해 난방을 중단하면서 속력을 올렸다. 너무 늦었을까. 사고 해역에 타이타닉호는 흔적조차 없이 가라앉은 것. 하지만 구명 보트가 보였다. 한 척, 두 척…. 모두 18척의 구명보트에서 생존자들을 구조했다. 카르파티아호가 구조한 인원만 706명. “가봐야 늦을 것”이라며 구조를 포기했다면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타이타닉호와 카르파티아호의 상황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당시 사고와 구조 상황을 생생히 전한다. 해상 사고의 위험성, 타인을 위한 숭고한 희생 등을 배울 수 있는 책이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여름 휴가철이 돌아왔습니다. 더위를 피해 산으로, 바다로 떠난 휴가지에 좋은 책이 함께라면 금상첨화겠죠. 이번 휴가엔 인근 책방을 찾으면 어떨까요. 고즈넉한 서가 사이로 내 마음에 쉼을 줄 소중한 책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요. 주요 휴가지 인근의 서점 6곳과 이곳 주인장으로부터 추천받은 책, 독서 명소 등을 정리해 소개합니다. 그럼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 떠나볼까요.동아일보 문화부 출판학술팀》① 경주 ‘어서어서’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마쓰이에 마사시 지음·김춘미 옮김/431쪽·1만6800원·비채경북 경주시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양상규 씨가 요즘 핫플레이스로 각광받는 황리단길에 2017년 세운 책방이다. ‘어디에나 있는 서점, 어디에도 없는 서점’이란 의미를 담았다. 이곳에서 책을 사면 약 봉투에 책을 담아준다. 마음의 병을 책으로 치유한다는 의미란다. 약국처럼 봉투에 손님의 이름을 적어 준다. 최근에는 경주 성건동에 지역민을 위한 2호점 ‘이어서’도 만들었다. 작가 북토크, 게릴라 사인회, 독서 모임을 정기적으로 연다. 특히 잡지 편집장 출신의 작가를 초청해 한 편의 에세이를 함께 완성하는 ‘글쓰기 원데이 클래스’도 진행한다. 그가 추천하는 책은 마쓰이에 마사시가 쓴 장편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비채)다. 1980년대 일본을 배경으로 노 건축가와, 그의 건축 철학을 존경하는 청년의 여름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그는 “읽는 내내 소설 배경이 된 시골 마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여름 향기가 물씬 풍기는 느낌을 공유해 보고 싶다”고 했다. 책 읽기 좋은 근처 명소로는 황리단길 건너편 ‘노서리 고분군’을 추천했다. “푸른 잔디가 깔린 고분들 사이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서 책을 읽으면 최고의 피서가 될 겁니다. 단, 고분 위로 막 올라가시면 안 됩니다.” 서점 주소=경북 경주시 포석로 1083 ② 속초 ‘동아서점’가장 짧은 낮◇츠쯔젠 지음·김태성 옮김/568쪽·2만3000원·글항아리할아버지가 1956년 문을 열었고 이젠 손자인 김영건 씨가 3대째 운영 중인 서점. 어릴 때부터 서점에서 자란 그는 책에 진심이다. 수만 권에 이르는 책들을 아내와 함께 직접 선별해 서가를 꾸민다.주인장의 취향이 담긴 컬렉션이 입소문을 타면서 서울에서 단골로 찾아오는 손님도 있다. 대형 프랜차이즈 서점이 주지 못하는 독특한 분위기와 감성에 반한 이도 많다. 서울 등 대도시에 독립서점들이 많지만, 이곳처럼 330㎡가 넘는 널찍한 규모를 갖춘 곳은 드물다.주인장의 추천도서는 츠쯔젠의 단편소설 16편을 모은 ‘가장 짧은 낮’(글항아리). 중국 북방을 배경으로 거친 자연에 적응해 살아가는 이들을 그렸다.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점이 오히려 장점이다. 그는 “멀리서 풍경을 바라보는 것처럼 이야기가 전개돼 읽으면서도 피로감이 별로 없다. 휴가지에서 읽기 좋은 책”이라고 했다.추천 독서 명소는 서점에서 차로 17분 거리의 정자 ‘학무정’이다. 설악산 자락에 있어 선선해 책 읽기에 그만이다. 조선 후기 학자들이 공부하던 교육 장소였다고.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세속에서 벗어난 기분도 들고, 당시 공부에 정진하던 선비들의 마음가짐도 상상해 볼 수 있을 거예요.”서점 주소=강원 속초시 수복로 108③ 제주 ‘소리소문’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조승리 지음/240쪽·1만6800원·달‘작은 마을의 작은 글(小里小文)’이란 뜻을 가진 서점이다. 정도선, 박진희 부부가 오손도손 함께 운영하고 있다. 매달 관심 작가를 한 명씩 선정해 그의 책들과 이해를 도울 수 있는 관련 도서를 비치한다. 손님들이 작가를 깊숙이 이해하고, 교감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취지다. 이달에는 이수연 작가의 ‘어쩌다 보니 가구를 팝니다’를 소개한다. 책을 필사할 수 있는 별도 공간을 마련해 작품을 깊이 있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이곳에선 책 제목과 작가, 출판사명, 표지를 모두 가린 ‘블라인드 북’을 만날 수 있다. 대신 ‘#위로가 필요할 때’, ‘#연인에게 주고 싶은 책’ 같은 키워드만 포장지에 적혀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책인지 모른 채 자신의 느낌에 따라 책을 골라 보는 재미가 있다.주인장이 추천하는 책은 조승리 작가의 에세이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달)다. 2023년 샘터 에세이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시각장애인 저자의 첫 번째 단행본이다. 장애인이자 마사지사로 살면서 느낀 이야기를 써 내려간 에세이로, 영화 ‘여인의 향기’를 보고 탱고를 배우게 된 일화 등이 담겼다. 정 씨는 “점점 잃어가는 시력에 마음이 무너지기보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아쉬움에 닥치는 대로 책을 펼쳐 보는,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삶의 태도를 가진 작가”라며 “장애에 굴하지 않고 즐거운 삶을 꾸려 나가는 유쾌한 분투기”라고 했다. 책은 출간 석 달 만에 6쇄에 들어갔다.추천 독서 명소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이국적인 풍차가 어우러진 월령해변이다. 지도에도 잘 나오지 않는 제주도민들의 숨겨진 물놀이 스폿이라고. ‘월령포구’라고 검색하면 월령해변 인근으로 검색된다. “주변 협재해변이나 금능해변이 관광객으로 밀릴 때 조용히 책을 읽으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서점 주소=제주 제주시 한경면 저지동길 8-31④ 제주 ‘북타임’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정지아 지음/320쪽·1만7000원·마이디어북스“기존 서점 스타일을 따르지 않겠다”는 포부로 임기수 씨가 2015년에 문을 열었다. 본래 서귀포시 중심가에 있었지만, 주인장이 나고 자란 위미리 본가를 개조해 2019년 다시 오픈했다. 소를 키우던 바깥채, 안채, 밀감 창고를 이용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이다. 임 씨는 “공간이 나뉘어 있어 책을 볼 때 주인장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다”며 “떠들어도 좋고, 사진 촬영도 환영”이라고 말했다. 저녁이 되면 동네 주민들이 먹거리를 들고 옹기종기 모여 곡주를 나누는 ‘북살롱’으로 변신한다. 꼭 차만 마시며 책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술 한 잔을 놓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북살롱은 낮과는 또 다른 매력을 자랑한다.임 씨는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마이디어북스)’를 추천했다. 1990년 ‘빨치산의 딸’로 등단한 정지아 작가의 술에 대한 에세이다. 애주가로 유명한 저자가 그동안 만났던 술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정성 있게 풀어냈다. 즐거운 휴가, 어찌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 아니겠는가. 임 씨는 “머리 아픈 벽돌책은 걷어차고 깔깔거릴 수 있는 책을 권하고 싶다”며 “술과 함께한 저자의 진한 인생 이야기는 애주가뿐 아 니라 모든 이들이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추천하는 독서 명소는 서점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의 푸른 바다가 빛나는 위미항. 책 한 권을 들고 방파제를 한 바퀴 돌고 난 뒤 마음에 드는 카페에서 한적하게 독서를 즐길 수 있다. 특히 인근 갤러리 카페 ‘어리석은 물고기’에서는 베트남풍의 커피와 호떡을 맛볼 수 있다. 실로 팔찌를 만드는 공방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 ‘나만의 팔찌’를 만들 수도 있다.서점 주소=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중앙로 160⑤ 통영 ‘봄날의책방’숲의 언어◇남영화 지음/252쪽·1만8000원·남해의봄날출판사 남해의봄날이 2014년 문을 연 서점으로 일부 회원들에 한해 북스테이 서비스를 제공한다. 처음에는 13㎡ 규모의 방 한 곳에서만 책방을 운영했지만, 차츰 손님이 늘면서 2017년부터 내부 공간을 서점으로 전면 개조했다. 통영의 다채로운 문화예술 감성을 담은 책들과, 이웃과 함께 나누고 싶은 책까지 다양한 책을 골라 서가를 채웠다.회원으로 가입하면 2층의 비밀스러운 독서 공간 ‘책 읽은 다락방’을 예약해 이용할 수 있다. 자개상 등 통영 장인들의 예술품이 가득한 고즈넉한 방에서 차를 마시며 독서를 즐길 수 있다. 회원 마일리지를 활용해 숙박도 가능하다. 통영 전통 누비로 만든 포근한 이불이 지친 몸을 감싸준다.주인장 정은영 씨는 ‘숲의 언어(남해의봄날)’를 추천했다. 16년째 숲해설가로 일하고 있는 남영화 작가가 쓴 자연 에세이다. 짙은 녹음과 비에 촉촉히 젖은 흙내음이 진하게 풍기는 여름에 읽기 좋다. 숲이 낯설고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지만 친구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는 책이라고. 그는 “나무와 열매, 잎과 꽃이 교감하는 이야기가 담겨 저자와 함께 숲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 생생하다”며 “휴가지에서 숲의 사랑과 위로를 듬뿍 충전한 뒤 일상으로 돌아가시길 바란다”고 했다.추천하는 독서 명소는 카페 ‘내성적싸롱 호심’. 책방과 100m 거리로, 일러스트레이터 ‘밥장’이 오래된 주택을 고쳐 운영하는 카페다. 주인장이 직접 굽는 르뱅쿠키가 명물이라고. 감성 사진관 ‘모노드라마’에서 사진을 찍는 것도 좋다. 촬영 후 원하는 문구를 캘리그라피로 장식할 수 있어 여행의 추억을 담아가기 좋다. 책방 바로 옆 전혁림미술관에서는 전혁림 화백과 아들 전영근 화백이 그린 시원하고 푸르른 통영 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서점 주소=경남 통영시 봉수1길 6-1⑥ 단양 ‘새한서점’설화탐정AR 단양◇주렁주렁스튜디오 지음/191쪽·2만4000원·주렁주렁스튜디오운무가 가득한 산속에 틀어박혀 독서에 매진하고 싶다면 충북 단양군의 헌책방 ‘새한서점’을 가볼 만하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꼬불거리는 시골길을 운전하면 새한서점 입간판을 만날 수 있다. 차를 세운 뒤 좁은 길을 걸어 내려가면 오래된 목조 건물이 등장한다. 푸르른 녹음과 시냇물 소리가 청명하게 들리는 곳에 오래된 헌책방이 있다. 영화 ‘내부자들’(2015년)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영화 속 우장훈 검사(조승우)의 아버지 집으로 촬영된 곳이라 눈에 익을 터다.서점엔 약 13만 권의 헌책이 가득하다. 곳곳엔 헌책방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난다. 바닥도 흙바닥이라 걸을 때마다 흙먼지가 피어 오른다.주인장 이금석 씨는 1978년 서울 고려대 앞에서 20년 이상 헌책방을 운영했다. 2000년대 들어 온라인 서점이 등장하자 택배로 헌책을 판매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 2002년 고향인 제천시와 가까운 단양군으로 서점을 옮겼다. 처음엔 폐교된 초등학교에서 서점을 운영하다 2010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스스로 모든 건물을 지었는데 나무 널빤지로 된 건물의 면적은 900㎡에 달한다. 현재는 아들 승준 씨가 아버지를 도와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승준 씨는 ‘설화탐정AR 단양’(주렁주렁스튜디오)을 추천했다. ‘온달산성’, ‘도담삼봉’, ‘사인암’ 같은 단양 명소에 대한 설명과, 이에 얽힌 설화를 담아 지역을 여행하며 읽기에 좋은 책이라고. 승준 씨는 “‘온달과 평강공주’ 같은 이야깃거리가 책에 풍성히 담겨 단양을 이해하기 좋다”고 했다.독서 명소로는 월악산 제비봉 전망대 코앞에 있는 ‘구담카페’, 노출 콘크리트로 건축돼 청풍호 전망을 가득 담은 ‘콘크리트월’을 추천했다.서점 주소=충북 단양군 적성면 현곡본길 46-106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사지원 기자 4g1@donga.com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광장’을 쓴 최인훈 작가의 6주기(23일)를 앞두고 18일 오후 2시 반 토론회가 열린다. 서울 마포구 서강대 가브리엘관에서 열리는 ‘20세기의 기억과 21세기의 화두’가 그것. 이 자리에서는 작가의 추모 다큐멘터리 ‘시대의 서기, 최인훈’이 처음 상영될 예정이다. 최 작가의 아들 윤구 씨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작가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면모를 한발 앞서 전한다. 최인훈 작가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특히 ‘플랜더스의 개’를 애청했다. 1980년대 TV에서 방영되던 이 애니메이션의 최종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는 서울예대 강의를 마치자마자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왔다고 한다. 중년의 작가는 당시 중학생이던 아들과 TV 앞에 나란히 앉았다. 남자 주인공 네로가 안타깝게 죽을 때 작가의 눈가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고 한다. 말년의 작가는 대장암으로 투병한다. 그 와중에도 ‘광장’을 다시 손보는 것을 고민했다고 한다. 기력이 떨어져 눈빛 교환이나 짧은 말 정도만 가능했지만 ‘광장’의 완성도를 마지막까지 높이고 싶었던 것. 주인공 이명준이 친구 태식을 고문하는 장면이 ‘꿈’으로 돼 있는데 이를 ‘현실’로 고칠지 고민했다고. 그러나 한참 고심하던 작가는 고치지 않기로 했단다. 그는 집필할 때는 자고 먹는 것을 잊을 정도로 집중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운동하듯 글을 쓰기보다는 계속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가 ‘쓸 때가 됐다’ 싶으면 펜을 들고 몰아서 쓰는 스타일이었다. 그렇기에 ‘광장’과 더불어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화두’를 쓸 때는 1년 가까이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인훈은 일반 독자들의 소감을 궁금해했다. 인터넷 서점이 생긴 뒤에는 아들에게 부탁해 독자 리뷰를 프린트해 꼼꼼히 읽고는 했단다. 작가는 ‘광장’이 6·25전쟁을 다룬 옛날 소설로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젊은 독자들에게 일종의 성장소설로 재해석돼 읽힌다는 소식을 들을 때 특히 반가워했다고. 18일 토론회에서 공개되는 다큐멘터리에는 최 작가의 ‘광장’ 집필 계기와 ‘새벽’지 발표 당시 상황 및 뒷이야기 등이 담겼다. 우찬제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사회로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연남경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등이 강연 및 토론에 나선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광장’을 쓴 최인훈 작가의 6주기(23일)를 앞두고 18일 오후 2시 반 토론회가 열린다. 서울 마포구 서강대 가브리엘관에서 열리는 ‘20세기의 기억과 21세기의 화두’가 그것. 이 자리에서는 작가의 추모 다큐멘터리 ‘시대의 서기, 최인훈’이 처음 상영될 예정이다. 최 작가의 아들 윤구 씨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작가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면모를 한발 앞서 전한다.최인훈 작가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특히 ‘플랜더스의 개’를 애청했다. 1980년대 TV에서 방영되던 이 애니메이션의 최종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는 서울예대 강의를 마치자마자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왔다고 한다. 중년의 작가는 당시 중학생이던 아들과 TV 앞에 나란히 앉았다. 남자 주인공 네로가 안타깝게 죽을 때 작가의 눈가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고 한다.대장암으로 투병하던 작가는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까지도 ‘광장’을 다시 손 보는 것을 고민했다고 한다. 기력이 떨어져 눈빛 교환이나 짧은 말 정도만 가능했지만 ‘광장’의 완성도를 마지막까지 높이고 싶었던 것. 주인공 이명준이 친구 태식을 고문하는 장면이 ‘꿈’으로 돼 있는데 이를 ‘현실’로 고칠지 고민했다고. 아들에게 두 가지 판본을 가져와 읽게 한 다음에야 고치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에게 이명준은 단순한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니라 평생 친구였다. 새벽에 물 마시러 일어난 아들에게 ‘그때 내가 이명준을 죽이는 게 맞았을까?’라고 문득 물어볼 정도였다.집필할 때는 자고 먹는 것을 잊을 정도로 집중했다고 한다. 매일 같은 시간에 운동하듯 글을 쓰기보다는 계속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가 ‘쓸 때가 됐다’ 싶으면 펜을 들고 몰아서 쓰는 스타일이었다. 그렇기에 ‘광장’과 더불어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화두’를 쓸 때는 1년 가까이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최인훈은 일반 독자들의 소감을 궁금해했다. 인터넷 서점이 생긴 뒤 아들에게 부탁해 독자 리뷰를 프린트해 읽고선 무척 기뻐하고 신기해했단다. 그는 ‘광장’이 6.25 전쟁을 다룬 옛날 소설로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젊은 독자들에게 일종의 성장소설로 재해석돼 읽힌다는 소식을 들을 때 특히 반가워했다. 영원한 20대 청년 이명준과 평생지기였던 그는 “젊은이의 마음은 항상 궁금하다”고 했다.18일 토론회에서 공개되는 다큐멘터리에는 최 작가의 ‘광장’ 집필 계기와 ‘새벽’지 발표 당시 뒷이야기 등이 담겼다. 우찬제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사회로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연남경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등이 강연 및 토론에 나선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24세에 서울로 올라와 첫 음반을 냈지만 시원치 않았다. 데뷔 5년 만에 짐 싸서 고향 부산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음악을 외면할 순 없었다. 이후로도 무명 생활은 길었다. 하지만 그는 견뎠다. “노래는 숙성이 돼야 한다. 아무리 급해도 돌아간다.” 그의 신조였다. ‘손대면 톡 하고…’로 시작하는 ‘봉선화 연정’으로 1989년 ‘KBS 가요대상’ 대상을 받으며 가요계 정상에 섰을 때, 그의 나이 47세였다. 대기만성형 가수였다. “60세가 넘어 신곡을 검토할 때도 ‘이 곡은 한 5, 6년 후에 내자’고 할 정도였다. 다들 빨리빨리를 얘기할 때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작곡가 정원수 씨) 특유의 구성진 꺾기 창법과 부드러운 보이스로 1980, 90년대 가요계를 풍미했던 가수 현철(본명 강상수)이 15일 밤 서울 광진구의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2세. 고인은 4년 전 디스크 수술을 받을 때 신경이 손상돼 건강이 악화됐고, 최근 폐렴까지 겹쳐 두 달간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었다고 한다. 아끼던 손주를 비롯해 가족들이 모인 마지막 배웅 길에 가족은 고인이 가장 아끼던 곡인 ‘내 마음 별과 같이’를 틀어서 귀 가까이에 대고 들려줬다고 한다. ‘내 마음 별과 같이/저 하늘 별이 되어 영원히 빛나리.’ 현철의 첫 히트곡은 데뷔 14년 만에 나왔다. 셋방살이를 전전하던 그가 고생하던 아내를 떠올리며 만든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1982년)으로 이름을 알린 것. 그의 나이 40세 때였다. 이어 ‘사랑은 나비인가 봐’, ‘내 마음 별과 같이’에 이어 1988년 발표한 ‘봉선화 연정’으로 그는 ‘국민 트로트 가수’ 반열에 오른다. 송대관 설운도 태진아와 함께 ‘4대 천왕’으로 불리며 트로트 전성기를 이끌었다. 유명인이 된 후에도 그는 소탈했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후배들 술 사주고, 밥 사주는 큰형이었다. 동네에서 장사하는 이웃들과 스스럼없이 안부를 묻고, 전철 등 대중교통도 자주 이용했다. 가수 태진아 씨는 “현철 선배는 무엇보다도 정이 많았다. 내가 상을 타면 내 손 잡고 울어줬고 나도 그렇게 했다”며 “대한민국 트로트계 최고의 가수인데 가요계의 큰 별이 지셔서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고인은 선행 연예인으로 국무총리 표창,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특별공로상(대통령 표창), 옥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로 배우자 송애경 씨, 아들 복동 씨, 딸 정숙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은 18일 오전 8시 40분.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사지원 기자 4g1@donga.com}
“내 마음 별과 같이 저 하늘 별이 되어 영원히 빛나리!”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살던 사람, 가수 현철이 15일 별세했다. 향년 82세. 고인이 서울 광진구의 한 병원에서 마지막 눈을 감을 때 본인의 노래 ‘내 마음 별과 같이’를 들었다고 한다. 아끼던 손자 등 가족들이 함께한 자리였다. 고인은 수년 전 경추 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 신경 손상으로 건강이 악화됐고, 최근 폐렴으로 입원해 치료를 받던 중이었다. 1942년 부산에서 태어난 현철은 1966년 ‘태현철’이라는 이름으로 첫 음반을 내며 가요계에 데뷔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무명 시절엔 아내와 함께 셋방살이를 전전했다고 한다. 고민 끝에 가요계를 떠나려고 마지막 곡으로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만든 것이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1982년)이었다. 이 노래가 출세 곡이 됐다. 40세 때다. 이후 ‘사랑은 나비인가봐’, ‘내 마음 별과 같이’를 연이어 히트시켰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은 현철의 전성기였다. 구수한 목소리, 사투리가 짙게 묻어나는 입담, 독특한 꺾기 창법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이후 1988년 발표한 ‘봉선화 연정’의 폭발적 인기로 날개를 단다. 이 곡으로 KBS가요대상을 수상할 당시 10여 년 무명 시절을 떠올린 듯 눈물을 펑펑 쏟아내 시청자들까지 울렸다. 당시 현철은 송대관·설운도·태진아와 함께 ‘4대 천왕’으로 불리며 트로트 시장을 호령했다. 마지막 방송은 2020년 9월 KBS 가요무대다. 현철을 아는 사람은 그가 대기만성의 인물이라고 입을 모은다. 전 매니저이자 작곡가인 정원수 씨는 “고생을 너무 오래 해본 사람이라 견디는 데는 도가 텄다. 60세가 넘어서 신곡을 발표해야 하는데도 밑에 깔아놓고 ‘5, 6년 있다 보내자. 노래는 숙성이 돼야 한다’고 하더라. 다른 사람 같으면 ‘빨리빨리’할 텐데 아무리 급해도 돌아간다는 자세였다”며 “그래서 늦게 떴고, 그래서 늦게까지 활동한 것 같다. 대단한 양반이셨다”고 회상했다. 가요계 동료 후배들의 애도도 이어졌다. 현철과 같이 공연을 하고 활동했던 가수 태진아 씨는 “현철 선배는 무엇보다도 정이 많았다. 그분이 상을 타면 내 손 잡고 울어줬고 나도 그렇게 했다”며 “대한민국 트로트계 최고의 가수인데 가요계의 큰 별이 지셔서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고인은 동네에서도 장사하는 이웃들과 친하게 지내고 전철을 타고 다니며 한결같은 모습으로 생활했다고 한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 16일 오후부터 조문을 받고, 18일 발인한다. 02-3010-2000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