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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소설가 박완서(1931∼2011)의 1주기를 앞두고 나온 소설집. 생전에 문예지에 발표했지만 소설집으로 묶이지 못했던 단편 3개에 문인들이 추천한 단편 3개를 더해 ‘추모 소설집’ 형식으로 출간됐다. 유족에 따르면 고인은 일기장만을 남겼을 뿐 미발표 작품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까닭에 고인이 남기고 간 ‘마지막 소설집’이란 이름으로 출간됐다. 아쉽고도 고마운 느낌이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는 자전적 단편이다. 소설의 형식을 빌렸지만 작가가 가슴속 응어리진 한(恨)을 담담히 풀어놓은 수기와 같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농촌에서 살며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상경한 뒤 펼쳐진 서울의 낯선 생활, 무난했던 결혼생활과, 또한 무던했던 작가생활…. 하지만 깊은 시련이 찾아온다. 1988년 남편을 잃고, 다시 석 달 만에 아들을 떠나보낸 것. “그의 생명은 아무하고도 바꿔치기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우주였다는 게 보이고, 하나의 우주의 무의미한 소멸이 억울하고 통절했다.” 아들을 잃은 어미의 원초적인 절망은 짐승의 절규와도 같다. 이 작품은 2010년 현대문학 2월호에 발표됐다. 20년이 넘게 흘렀어도 작가의 아픔이 어제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드러난다. 단편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는 날카로운 세태 풍자를 통해 저절로 웃음을 짓게 만드는 작품. 한 중년 여성이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임한 능력 있는 시어머니의 재력 앞에 할 수 없이 파출부 역할을 하고, 다시 도도하고 싸가지 없는 전 며느리를 만나는 불편한 하루가 생생하게 묘사된다. 다른 단편 ‘빨갱이 바이러스’에서는 수해를 입은 한 마을에 우연히 모인 네 여성이 하룻밤을 보내며 자신들의 숨겨진 얘기들을 털어놓는다. 사람들마다 숨기고 있는 욕망이나 상처가 하나씩은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생의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작가의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통찰력은 여전히 날이 서 있다. 순박한 듯하면서도 곳곳에 일탈을 꿈꾸는 인물들의 모습은, 오남매를 키우며 바쁘게 살았던 작가 본인의 욕망을 대리하는 듯하다. 그러기에 고인이 더 친근하고 솔직하게 다가온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단편 ‘카메라와 워커’(1975년 발표), 소설가 김애란은 ‘닮은 방들’(1974년 발표)을 추천했다. 소설가 신경숙이 단편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1993년 발표)에 덧붙인 짧은 글에는 고인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어느 날 새벽에 책장을 뒤적이다가 당신이 주신 세뱃돈을 찾아냈네요. 그리고 또 어느 날인가는 아주 오래전, 십오 년도 더 전에 당신이 제게 ’신경숙 씨, 보셔요’라는 제목으로 쓰셨던 글을 발견했습니다.(…) 아주 늦어버린 답장이네요. (선생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대구에서 어린 중학생이 동급생들의 괴롭힘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아이의 유서를 읽으며, 가해자 아이들의 어두운 가학 심리와 선악에 대한 무감각에 새삼 전율을 느꼈다. 아이는 가해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맞고, 노예와 같이 부림을 당하고, 돈과 물건을 빼앗겼다. 보복이 두려웠던 아이는 이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도 못한 채 막다른 길목으로 내몰리자 자살이라는 선택을 했다. 대전에서도 한 여고생이 집단 괴롭힘을 호소했지만 도움을 받지 못한 채 고민하다가 자살을 하고, 그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다른 여고생이 자살했다고 한다. ‘왕따’나 집단 괴롭힘이 우리 학교에 퍼져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과연 이 정도로 심각한지는 몰랐다. 가해자들은 무시로 때리고 물건을 뺏고 괴롭히는 일이 장난이라고 했지만, 피해자들에겐 그것이 죽을 만큼 힘든 고통이요, 인격에 가해진 수모라는 이름의 폭력이었다. 우리는 ‘왕따’나 집단 괴롭힘에 노출된 아이가 얼마나 큰 두려움과 압박감과 치욕감에 시달렸는지를 다 알지 못한다. 그 아이들이 느꼈을 고통에, 제 행위가 왜 그릇된 일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가해자들의 모습을 겹쳐 보면서, 우리 아이들이 어쩌다가 폭력에 물든 괴물이 되었는지를 곰곰 생각해보게 되었다. 폭력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게 예사롭고, 인간을 목적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우리 사회에 퍼진 병리 현상에 자신도 모르게 감염된 어른들의 그릇된 말과 행동이 아이들에게도 옮겨져 그들을 사악한 괴물로 만든 것은 아닌지, 아울러 학교폭력과 ‘왕따’ 현상의 배경으로 좋은 대학만 들어가면 그만이라는 목적지향주의, 혹은 학벌중심주의에 매몰되어 인성교육 일체가 사라진 삭막한 교육 현장이 있는 것은 아닌지! 물론 학교에서 ‘일진’이나 ‘왕따’, 혹은 욕설, 폭력, 일체의 괴롭힘은 어떤 이유로도 용인되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관행이 되어버린 측면도 있어서 하루아침에 사라질 일은 아닌 것 같다. 여전히 괴롭히는 아이들과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이 이것들을 결코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를 해야 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더는 집단 괴롭힘으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아이들이 나와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나 타락한 방식으로 영위되는 타락한 사회가 존재하는 한 아이들은 여전히 그 타락을 답습하고 반복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명하지 않은가? 사회가 먼저 모든 형태의 폭력을 추문으로 만들고 추방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그런 사회 자정 노력 없이 아이들만 일방적으로 교화할 수는 없다. 한편으로 아이들이 죽을 만큼 힘들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고통의 회피 수단으로 자살이 선택된다는 것은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아이들은 자살이 자기를 향한 또 다른 폭력이라는 사실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학교폭력이나 ‘왕따’로 괴롭힘을 당하는 어린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꼭 해주자. 무엇보다도 괴롭힘을 당하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선 나를 괴롭히는 자들에게 단호하게 ‘안 돼!’라고 하자. 폭력의 부당함을 그대로 용인해서는 안 된다. 내 힘으로 안 된다면 주변에서 힘을 보태줄 사람을 찾아보자. 부모님도 있고, 친구도 있고, 선생님도 있을 것이다. 힘들 때는 주저하지 말고 힘들다고 말하라. 집단 괴롭힘에서 내가 도움을 받지 못한 것은 나를 도와줄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미처 모르기 때문이다. 아울러 죽음은 삶만큼 아름답지도 않을뿐더러 삶만큼 극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깨닫자. 죽음은 아무것도 없음, 텅 빔, 공허 그 자체다. 반면에 삶은 고귀한 선물이고, 아직 미래는 잠재성과 기회들로 빛나는 시간이면서 겪지 않은 야생이며 돌연한 기쁨이라는 사실 말이다. “과일의 씨앗도 햇빛을 쐬려면 부서져야만 한다.”(칼릴 지브란) 그러니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더라도 빛나는 미래라는 햇빛을 쐬기 위해서라도 꿋꿋하게 살아보자.장석주 시인}

요즘 대학생들은 흔히 ‘88만 원 세대’로 불린다. 이들에 대한 사회의 관심도 ‘반값 등록금’처럼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주는 데 집중돼 있다. 하지만 대학 시절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문화적 소양을 쌓고 크고 작은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식을 쌓는 시기다. 경제적 어려움을 헤아리는 만큼이나 이들이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동아일보는 10, 11일 남녀 대학생 281명을 상대로 문화생활 실태를 조사했다. 문화생활에 지출하는 비용과 시간, 그리고 구체적인 문화소비 실태를 물었다. 서울 소재 9개 4년제 대학(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서울교대 성균관대 숭실대 연세대 중앙대 한국외국어대)의 학생들이 설문에 참여했다. 숫자로 풀리지 않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대학생 12명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도 진행했다.○ “1만 원짜리 공연도 비싸서 못 본다”대학생들의 한 달 용돈은 평균 41만2775원. 이 가운데 4분의 1(10만2384원)을 문화생활비로 지출하고 있었다. 남학생(43만4551원)이 여학생(38만9558원)보다 용돈이 많았고, 문화생활 지출액도 10만7172원으로 여학생(9만7279원)보다 컸다. 문화생활비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항목은 ‘영화 관람’(40.6%)이었다. 이어 ‘책 구입’(22.8%), ‘공연전시 및 스포츠 관람’(14.6%) 순이었다. 영화는 카드 할인 등으로 6000∼7000원에 볼 수 있지만 공연은 싼 경우도 1만 원 선 이상이기 때문에 “비싸서 못 본다”는 응답도 있었다.임도연 씨(성균관대 영상학과 4년)는 “남자들은 여자친구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문화생활비의 차이가 많이 난다. 여자친구가 있으면 함께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고, 없으면 컴퓨터로 내려받아 본다”고 전했다. 전영준 씨(연세대 건축학과 4년)도 “연애하면 과외를 하나 더 해야 한다”고 말했다.남학생의 경우 영화(38.6%)와 책(25.5%) 말고도 게임(13.1%)에 돈을 많이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업 듣고, 과제하고 그러다가 시간 되는 애들끼리 모여서 게임 한판 한다. 싸게 할 수 있고, 같이 할 수 있으니까. 당구 이런 건 비싸다. 술 먹는 건 말할 것도 없고.”(허자경·고려대 경제학과 4년)○ “책은 한 달에 한 권, 베스트셀러 위주로” “지난 3개월간 전공서적을 제외하고 몇 권의 책을 읽었느냐”는 질문에 학생들은 “평균 3.08권을 읽었다”고 답했다.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비율도 9.6%였다. 월평균 책을 사는 데 쓰는 비용은 ‘1만 원 미만’이 38.8%, ‘1만∼3만 원 미만’이 40.9%로 집계돼 10명 중 8명은 책을 사는 데 한 달에 3만 원 못 미치는 돈을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생들의 절반 이상(54.8%)은 주로 도서관을 통해 책을 빌려보고 있었다.염동혁 씨(서울대 국사학과 4년)는 “예전엔 대학생에 대한 이미지가 ‘지식인’이었지만 지금은 학생 스스로 ‘취업준비생’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책을 잘 읽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책 말고 재미있는 게 많아져서 그렇다”(전영준)는 해석도 나왔다.설문에 응한 281명의 학생이 읽은 책으로 베스트셀러 목록을 꼽아봤다. 25명이 읽었다고 답한 김난도 서울대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1위를 차지했다. 2위가 김어준 씨의 ‘닥치고 정치’(16명), 3위가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11명)였다. 학생들은 “내가 읽고 싶은 책을 고르기보다 베스트셀러 위주로 본다”고 했다. 독서도 ‘스펙’에 도움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만 읽을 수 없다. 경제서, 인문서적 등 소위 뜨고 있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김슬기·숙명여대 경영대 4년)○ “하루 TV 82분 시청, 스마트폰은 끼고 산다” 대학생들은 하루 평균 138분을 문화생활에 쓰는데 이 중 82분을 TV 시청에 할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로 보는 프로그램으로 남(62.1%) 여(53.7%) 모두 예능 프로를 꼽았다. “TV는 수동적인 취미, 떠먹여주는 취미다. 하고 싶어서 한다기보다는 다른 능동적인 취미를 즐기지 못해서 TV를 찾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허자경)TV 시청 외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문화활동으로는 ‘컴퓨터 이용’(30.2%)과 ‘스마트폰 이용’(14.2%)을 꼽았다. 강지연 씨(서울대 영문과 4년)는 “잘 때 빼고는 거의 스마트폰을 놓지 않는 것 같다. 게임도 하고 바로바로 정보도 검색한다”고 말했다. 신하정 씨(고려대 경영학과 4년)는 “친구들끼리 만나도 서로 얼굴 안 보고 스마트폰만 보면서 얘기하는 경우가 있다”고 전했다.○ “놀아본 적이 없어 못 논다”문화생활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학생들은 ‘시간 부족’(57.8%)을 첫 번째 이유로 꼽았고, 이어 ‘돈 부족’(20.9%), ‘필요성을 못 느껴서’(11.8%), ‘정보 부족’(9.5%) 순으로 답했다. 허자경 씨는 “파티라든가 자생적인 (놀이)문화가 있으면 좋겠는데 어려서부터 입시, 사교육 등의 경쟁으로 스스로 즐기는 문화를 배우지 못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미국 대학을 졸업한 신가원 씨는 “미국에선 친구들과 만날 때 뭘 할지 미리 정하는데 한국 친구들은 ‘그냥 만나자’고만 해서 (문화생활에)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면이 있다”고 말했다.전문가들은 “문화생활에도 연습이 필요하고, 대학 시절은 그 연습을 시작하는 좋은 시기”라고 조언했다. 윤소영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대학생들은 취업을 위해 문화생활 등 모든 것을 미뤄두지만 막상 취업을 하면 시간 관리가 더 어려워진다. 문화생활에도 학습이 필요하고, 관련 경력을 쌓아야 잘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유진룡 을지대 여가디자인학과 교수는 “학생들이 쫓기는 이유가 결국 ‘스펙 쌓기’ 때문인데 스펙이 결론적으로 인생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대학 시절은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기이고 이것은 다양한 독서를 통해 가능하다고 본다”고 조언했다. 박고은 인턴기자 중앙대 불어불문학과 4년 박민주 인턴기자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4년 문혜빈 인턴기자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4년 ▼ 석달간 책 한 권 안 읽고… “시간 나면 술 마시는게 전부”라는 학생도 ▼■ 설문 맡은 본보 대학생 인턴기자 3명“도서관은 공부하는 학생들로 빼곡했던 반면에 여가를 즐기는 동아리방은 썰렁했어요. 문화생활에 대한 질문을 했더니 ‘취업 준비에 바쁜데 무슨 문화생활이냐’고 되묻는 학생이 많았죠.”(박민주·24·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4년)대학생들의 문화생활을 취재하던 동아일보 인턴기자들은 학생들의 ‘가난한’ 문화생활 실태를 목격하고 놀라워했다. “우리 또래가 문화생활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어떻게 즐길지조차 모르는 것 같다”는 것. 3명의 인턴기자는 서울 소재 9개 대학의 캠퍼스를 누비며 281명과 만나 설문조사를 하고 심층 인터뷰도 했다.“‘시간이 나면 친구들이랑 술 마시는 게 전부다’라고 말하는 학생이 많았어요. ‘문화생활에 왜 음주가 포함되지 않느냐’고 ‘항의’하는 학생도 있었습니다.”(문혜빈·23·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4년)설문지에는 ‘지난 3개월간 읽은 책 제목을 모두 쓰시오’라는 문항도 있었다. 몇몇은 스마트폰에 저장한 도서 목록을 보고 꼼꼼히 썼지만 대부분의 학생은 책 제목이 기억나지 않거나 아예 읽은 책이 없다며 난감해했다. “자기소개서에 취미와 특기 쓰는 칸을 보면 무얼 쓸지 몰라 당황하게 된다”는 학생도 있었다. “설문을 마치고 나니 씁쓸했어요. 저 또한 읽고 싶은 책도 많고 하고 싶은 문화생활도 있지만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미뤘었거든요. 앞으로는 인생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박고은·25·중앙대 불어불문학과 4년)황인찬 기자 hic@donga.com}

한 편의 역사 로맨스 소설이 새해 벽두 출판시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소설가 정은궐의 ‘해를 품은 달’(파란미디어·전 2권)이 인터넷서점 예스24의 둘째 주(5∼11일) 집계 결과 종합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지난주 14위에서 13계단 상승한 수치다. 이 소설은 한국출판인협회가 교보문고 등 전국 온·오프라인 서점 9곳의 판매부수를 종합한 결과(6∼12일)에서도 김난도 서울대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이어 종합 2위에 올랐다. 로맨스 소설이 종합베스트셀러 최상위권에 오른 것은 이례적이다. ‘해를 품은 달’은 2005년 시공사에서 처음 출간됐다. MBC가 4일부터 동명의 드라마로 내보내는 데 맞춰 지난해 10월 재출간했다. 출판사에 따르면 드라마가 방영된 후 일주일여 만에 10만 부가 판매됐으며 재출간 이후 총 30만 부가 나갔다. 이 소설은 왕세자인 ‘이훤’과 비밀에 싸인 무녀 ‘연우’의 극적인 사랑을 그린 허구의 로맨스물이다. 남녀의 애틋한 사랑이라는 기본적인 로맨스 소설의 공식을 충실히 따라가면서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다양한 주변 캐릭터와 에피소드들을 덧붙이며 읽는 재미를 더한 것이 강점으로 꼽힌다.박현주 장르문학 비평가는 “코믹과 아련한 로맨스, 가끔 농익은 진한 장면들이 적절히 조화된 작품”이라고 평했다. 조현 소설가는 “역사물 코드를 가져와 기존의 정형화된 로맨스 물의 틀을 깬 것이 독자에게 좋은 평을 받은 비결인 것 같다”고 분석했다. 정 작가의 작품들은 이미 국내에서 160만 부 이상 판매됐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2007년)은 80만 부,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2009년)은 50만 부가 나갔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일본 중국 대만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6개국에 판권이 판매됐고 ‘해를 품은 달’도 최근 일본과 출판계약을 했다. ‘정은궐표’ 로맨스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은 높아지고 있지만 정 작가는 ‘얼굴 없는 작가’다. 2004년 등단 이후 9년째 자신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알려진 사실이라고는 30대 후반의 여성이며 소설가 외에 별도의 직업을 갖고 있다는 정도다. 정 작가는 신원이 공개될 것을 염려해 언론 인터뷰도 하지 않고 해외 출판계약 등도 출판사 대표에게 모두 위임한 상태다.박대일 파란미디어 대표는 “정 작가가 사생활을 침해당할까 걱정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나도 실제로 만난 횟수는 몇 번 되지 않고 연락은 주로 문자메시지로 하며 원고는 등기로 받는다”고 전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유럽의 재정위기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고, 미국의 경기 회복 전망도 요원하다. 반면 중국과 인도는 거대한 인구와 자원을 바탕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어가고 있고, 브라질 또한 과거 경제대국의 영광을 되찾으려 한다.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이자 200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저자는 세계경제 지형이 큰 폭으로 변하고 있는 현상을 진단하며 ‘미국, 일본 등 몇몇 선진국이 세계경제를 지배하던 시대에서 중국처럼 고속 성장한 개도국들이 글로벌 경제에 입김을 세게 불어넣는 시대’로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책에선 이를 다음번 융합, 즉 ‘넥스트 컨버전스(Next Convergence)’의 시대라고 명명한다. 성장이 정체 국면을 맞은 선진국과 고도성장하는 신흥국이 한 접점으로 수렴되는 시대라는 뜻이다. 저자는 2006년부터 4년간 세계 유명 석학 20여 명과 함께 세계은행 등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성장개발위원회(CGD)에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개도국들의 지도자와 학자,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과 만나 글로벌 경제의 미래상에 대해 숙고했고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2008년 미국의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시작된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에 이어 그리스의 재정위기로 시작된 유로존의 경제 한파가 지속되면서 세계경제의 불확실성과 위기감은 높아졌다. 각국은 이 위기를 극복할 ‘규제상의 실패’를 바로잡으려 하지만 저자는 ‘이는 현명한 생각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새로운 시스템을 운영하고, 그 시험기간을 거치는 긴 시간 동안 세계 체제 또한 주기적으로, 그리고 다소 변칙적으로 불안정해질 것이므로 완벽한 규제 시스템을 마련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저자는 글로벌 금융 시스템 구축보다는 개별 국가들의 경제 회복 또는 지속적인 경제 성장 방법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이를테면 미국은 분배 문제 해결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실업급여를 ‘넉넉하게 오랜 기간’ 지급해야 한다는 것. 또한 장기적인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공공부문의 투자와 개혁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제안한다. 책에 따르면 ‘넥스트 컨버전스’ 시대 성공의 핵심 열쇠는 중국과 인도가 쥐고 있다. 각각 13억과 12억의 인구, 풍부한 자원, 그리고 기술력까지 확보하고 있는 이들 국가가 세계경제의 향방을 좌지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나라는 빈부격차 등 자국의 문제뿐 아니라 이산화탄소 배출 규제와 같은 국제 문제 해결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한국을 보는 시각은 어떨까. 저자는 반도체와 인터넷 등에서 한국이 세계 최정상에 오른 점을 언급하지만 한국의 미래 전망을 장밋빛으로 보지는 않는다. 중국과 인도의 급속한 성장이 한국의 수출 시장을 넓혀주는 반면 이들의 기술력이 한국을 추월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학교폭력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아동심리학자인 저자는 가해자를 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만으로는 근본적 해결이 힘들다고 지적한다. 아이들의 폐쇄적인 ‘또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 학교폭력이 근본적으로 또래로부터 인정받고, 우월해지고 싶은 아이들의 심리에서 발생한다는 진단이다. 학교가 의도적으로 아이들의 자리나 소속된 동아리를 바꿔주거나 새로운 친구 맺기를 유도하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제안한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문학청춘의 문 1, 2(이츠키 히로유키 지음·지식여행)=탄광촌에서 자라다 대도시로 나와 대학을 가게 된 한 소년의 성장기. 일본 근현대사를 읽을 수 있는 세밀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매력적이다. 각권 1만3900원. 밀어(김경주 지음·문학동네)=뺨, 쇄골, 입술, 목젖, 솜털, 속눈썹, 관자놀이 등 인체의 각 부분이 품고 있는 미학적인 의미들을 독특한 시각으로 해석한 산문집. 1만5000원. 어느 나무의 일기(디디에 반 코뵐라르트 지음·다산책방)=수령 300년에 달하는 배나무 ‘트리스탕’이 돌풍에 쓰러진 뒤 하나의 씨앗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렸다. 1만2000원. ○ 인문·교양미르(이혜화 지음·북바이북)=용이 비를 안 내려 준다는 이유로 임금에게 매를 맞고, 노인으로 둔갑해 사람과 바둑을 두었다? 역사와 고전문학 속 친근한 용의 모습을 그렸다. 1만3500원. 어떻게 살 것인가(사라 베이크웰 지음·책읽는수요일)=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난제를 붙들고 몽테뉴의 삶과 저서를 살펴보면 ‘나 자신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해답에 이를 수 있다. 1만8000원.예술의 역설(오타베 다네히사 지음·돌베개)=예술의 개념이 성장해 온 역사를 전한다. 예술이 근대의 소산이라고 주장하는 저자는 근대 예술을 창조, 독창성, 예술가, 예술작품, 형식 등 다섯 가지 개념으로 나눠 설명한다. 2만 원.타키투스의 역사(타키투스 지음·한길사)=고대 로마의 역사가이자 정치가인 타키투스가 쓴 ‘로마인 이야기’로 국내 최초의 완역본. 내전이 어떻게 삶을 황폐화하고 비극을 만들어 내는지 비판한다. 2만5000원.○ 학술뫼비우스의 띠(클리퍼드 픽오버 지음·사이언스북스)=수상스키의 뫼비우스 기술, 문학과 영화에 등장하는 뫼비우스 구조 등 무한 반복되는 뫼비우스의 띠를 과학과 예술 부문으로 확장했다. 1만70000원.과학의 천재들(앨런 라이트먼 지음·다산북스)=아인슈타인, 허블, 보어, 하이젠베르크, 폴링, 와인버그 등 20세기를 대표하는 과학자들의 논문을 설명하고 그들의 일상을 드라마처럼 풀어냈다. 3만3000원.희망의 경작(월드워치연구소 엮음·도요새)=아프리카의 기아와 빈곤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엇일까? 단기 원조를 중단하고 자급자족 농업을 보급해야 한다고 책은 강조한다. 2만5000원.○ 실용·기타빌 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여행기(빌 브라이슨 지음·알에이치코리아)=호주의 또 다른 얼굴, 야생의 황무지를 만날 수 있다. 호주의 사회 문화적 현안과 원주민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인 색다른 여행기. 1만3800원.좌우를 넘는 공감의 정치(장성호 지음·한국학술정보)=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등장으로 소통의 리더십이 새로운 정치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책은 유권자들이 중심이 되는 ‘공감 정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1만8000원. 단사리 마음혁명(김병완 지음·일리)=“지금은 많이 입어야 하는 시대가 아니라, 많이 벗어야 하는 시대다.” 각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비움과 나눔의 가치를 설파한다. 1만3000원. 청소년은 왜 그렇게 행동할까?(수잔 에바 포터 지음·교문사)=10대들과 소통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 10대들의 특성과 그들과 가까워지는 법,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 등을 정리했다. 1만2000원.○ 어린이 박지성처럼 꿈꿔라!(전채연 지음·주니어 김영사)=축구선수 박지성이 멘토로 변신해 들려주는 정직하고 힘 있는 성공 이야기. 익숙한 그림을 함께 실어 아이들의 이해를 돕는다. 1만1000원.왜 아껴 써야 해?(방미진 지음·스콜라)=물건 귀한 줄 모르던 기쁨이가 점차 절약의 중요함을 깨달아간다. 아이들에게 절약하는 습관을 길러주는 책. 8500원.}

“책을 수집할 때 반드시 새 책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과거에 그 책을 읽었다고 생각하면, 책을 읽는 동반자를 얻었다는 느낌이 들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재산을 나누어 가진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국내 대표적 영문학자이자 서강대 명예교수인 저자는 중고 책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전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책들을 언젠가는 대학 도서관에 기증할 것이며, 이로 인해 책들의 생명이 연장되기를 소박하게 바란다고 덧붙인다. 다수의 평론집과 수필집을 낸 원로 학자가 일상의 작은 사물과 순간, 그리고 따뜻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견한 행복들을 묶어낸 소박한 산문집이다. 미국 유학 시절 경험, 대학에서 만난 제자와 지인들, 평생 천착해온 문학과 관련된 인연과 깨달음을 잔잔히 반추한다. 제목이 안톤 슈나크의 쓸쓸한 산문을 뒤집은 것처럼 글이 주는 느낌 또한 그렇다. “앞니 빠진 어린아이의 웃는 얼굴을 봤을 때, 가을날 수탉이 초가지붕 위에서 길게 우는 소리를 낼 때, 먼동이 트는 자줏빛 새벽하늘을 보았을 때, 바닷가 여관방에서 맞은 하룻밤에 요람처럼 흔들리며 들려오는 파도소리를 들을 때….” 저자가 발견한 일상의 소중한 순간에선 포근한 삶의 체온이 느껴진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장지에는 못 갔어. 조문만 갔지. 사람 많이 왔더라고. 살아있을 때 언론에서 많이 다뤄줬으면 좋았을걸. 그 사람이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 중에서 고생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이고, 가장 큰 역할도 했고.” ‘아우’를 먼저 보낸 ‘형’의 눈동자에는 둘이 함께한 세월이 스쳐 지나는 듯했다. 신경림 시인(77)과 열두 살 아래의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두 사람은 1975년 처음 만나 김 고문이 지난해 12월 30일 타계할 때까지 40년 가까이 ‘형’ ‘아우’ 하며 지냈다. 1956년 등단한 시인은 1975년 자유실천문인협회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고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및 이사장,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등을 역임하며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시단의 원로다. 9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만난 시인은 먼저 간 아우를 ‘김근태 씨’ 혹은 ‘그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야기는 고인에 관한 회상으로 시작해 남북 관계와 선거, 사회 문제에 대한 문답으로 이어졌다. 》―김 고문을 언제 처음 만나셨나요.“1975년 (유신체제에 반대하며) 김상진 서울대 농대 학생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이 조시(弔詩)를 써달라고 찾아왔어. 조시를 내가 쓰고 조문은 황석영이가 썼지. 만약 김근태 씨가 (중앙정보부) 들어갔을 때 우리(신경림과 황석영)가 썼다고 하면 우리도 잡혀 들어가는 건데 끝내 안 불더라고. 우린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많은 사람이 한 일을 자기 혼자 책임지고서 당했지. 한 번 맞을 걸 두 번 맞은 거야.”―김 고문 생전엔 어떻게 부르셨나요.“난 ‘근태야’ 했고 김근태는 ‘형님’ 했지. 국회의원이 된 뒤에는 밖에서 만나면 ‘김 의장’이라고 불렀어. 김근태 씨도 어렸을 때부터 시나 소설에 조예가 깊었어. 형(김국태·2007년 사망)도 소설가잖아. 문인들 하고 교류도 많았지.”―마지막으로 만난 건 언제인가요.“지난해 봄에 내가 (고인과 연탄 나눔 행사를 위해) 개성 갔다 왔는데 그때만 해도 그렇게 아프다 그러지 않았거든. 그냥 몸이 굉장히 안 좋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금방 일이 생길 줄 몰랐지.”―2002년 대선 때 ‘근태가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라는 말도 하셨다는데….“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합리적인 사람이야. 남의 말을 잘 듣고 소통이 잘되는 사람이지. 상당히 강인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사실 안 그래. 정치인은 사기꾼 기질도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는 게 그 사람이 정계에서 완전히 성공하지 못한 이유일 거야.”―여러 번 북한을 다녀오셨는데요, 경색된 남북 관계를 어떻게 풀면 좋을까요.“평양 두 번, 개성 두 번, 금강산 두 번, 그러니까 꽤 많이 갔다 왔지. 북쪽 체제가 합리적이지 않고 좋지 않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야. 하지만 열어줘야 해. 퍼준다 그러지만 100만 원 갖다 주면 100만 원짜리의 무언가가 여기(남한)에도 생기는 거야.”―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해 북한이 아직 사과하지 않았습니다.“(북한) 군부의 사람들이 그랬겠지. 국가 대 국가는 응징해야지. 하지만 (북한) 주민과는 별개로 해야 해.”―2007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선 어떤 인상을 받으셨나요.“김정일이는 상당히 배포가 있었지. (당시 송별 만찬에서) 우리와 술을 먹는데 김정일이는 와인 같은 걸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면서 원샷을 막 하는 거야. 노무현이는 뭐 술 많이 먹는 사람이 아니잖아. 김정일이는 그때 막 벌컥벌컥 들이켜더라고.”―올해 총선과 대선이 있습니다.“골수 보수파는 설자리가 없을 거야. 그렇다고 나는 좌파가 득세하리라고 생각 안 해. 좌파 중에서도 ‘골 때리는’ 사람이 많거든. 헛소리를 자꾸 해. 중도적인 사람들이 득세할 거야. 안철수라는 사람도 사실 중도적인 사람이거든. 박원순을 좌파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 사람은 내가 볼 땐 중도주의자야. 개혁주의자이지. 내가 지지하는 사람은 박원순 정도지.”―요즘 한국 사회를 어떻게 보십니까.“직장 없는 사람이 참 많아. 일자리를 나눠야 된다고 생각해. 노조도 문제야. 자기들 임금이 조금이라도 삭감되면 큰일나는데 계약직에 대해서 좀 더 배려가 있어야지. 많이 받는 사람이 양보를 해야지.”―서울 광화문 등에선 시위가 자주 열립니다.“늘 꾼들이 나와서 한다고 뉴스에서 자주 그러지만 전부 꾼들이 나오는 건 아니야. 진짜 못살겠어서 나온 사람도 많아. 물론 꾼도 있지. 시위만 있으면 신바람 나게 쫓아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이 시위를 주도하진 못해. 진짜로 시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하는 시위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해.”―해결 방법은 무엇일까요.“가진 자들이 좀 양보해야지. 또 이런 얘기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사회주의 정치활동이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어. 우리나라가 그만큼 성숙해졌잖아. 그까짓 거 수용해도 오히려 숨어 있는 사람들 드러내고 좋지. 지금 빨갱이라고 찾아보면 전국에서도 아마 몇 사람밖에 없을 거야. 지금 북한 체제를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돼. 북한 체제 인정하는 사람은 ‘또라이’ 소리 듣지 정상적인 사람이야? 균형 잡힌 생각 가진 사람에게 그건 있을 수 없는 얘기지.”―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이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그들보다 ‘구체적으로 노골적인’ 사회주의 활동을 해야 한다는 거지. 무슨 파괴활동 같은 게 아니라 자본주의 문제점을 바로잡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는. 공산당선언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자본주의 예찬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꽤 있잖아. 뒤집어서 보면 공산당선언이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거지. 이런 것까지 다 나가면 잘못하면 빨갱이 소리 들을지도 모르겠네. 허허….”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박고은 인턴기자 중앙대 불어불문학과 4년 }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이 10일 열렸다. 신인 작가 8명이 가족과 심사위원, 선배 문인들의 축하를 받으며 문단에 첫발을 내딛는 날이었다. 시상식을 취재하던 기자는 행사가 끝난 뒤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영화평론 당선자인 김정(본명 김혜란) 씨가 수줍게 작은 쇼핑백을 건넨 것. 여러 차례 사양했지만 결국 회사로 들고 올 수밖에 없었다. 쇼핑백 안에는 볼펜 한 자루와 정갈하게 써내려 간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2011년 12월, 수상 소식을 전해 주시던 날의 기억을 아마도 저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진정 기자님의 일처럼 순도 높고 밀도 가득한 축하를 전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했어요. 후일, 기회가 닿는 대로 꼭 결초보은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진심 어린 편지에 고마움이 앞섰다. 문학담당 기자로서 이번 신춘문예를 시작부터 끝까지 진행했지만 이런 정성스러운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편지를 읽으면서 두 달 동안의 신춘문예 일정이 머리를 스쳤다. 올해는 2426명이 모두 7047편의 작품을 보내왔다. 28명의 심사위원이 심사하는 과정을 돕고, 당선자를 확인해 특집기사를 게재하고, 시상식을 준비하느라 기자는 한 해 중 가장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도 당선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던 순간을 생각하면 묵은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진다. 수화기를 통해 전해 오는 당선자들의 환희, 당선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환호성, “정말이에요?”를 연발하며 울먹이던 목소리…. 당선자뿐만 아니라 기자에게도 잊지 못할, 행복하고 가슴 떨리는 순간이었다. 책의 위기이고, 문학의 위기라고들 한다. 하지만 신춘문예의 열기는 여전히 식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의 사람과 삶, 문학에 대한 애정이 그렇게 절실하고 간곡한 것임도 확인했다. 문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불태우는 수많은 무명의 문청(文靑)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질 만능주의의 폐해와 인간성 상실, 끔찍한 범죄 등 숱한 문제가 있지만 이 사회가 유지되는 데는 이처럼 푸른 마음의 문청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되지 않을까. 언젠가 올해 만났던 당선자들과 그들이 쓴 새 작품으로, 새 책으로 만날 날을 기대한다. 그때는 김정 씨가 수줍게 건넨 볼펜을 들고 가서 반가운 얼굴로 그들을 다시 취재하고 싶다.황인찬 문화부 hic@donga.com}

“나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내가 당신보다 나이도 많잖아. 어떻게 나를 ‘개무시’할 수 있어? 시 오래 쓴 게 유세야? 시 10년 이상 쓴 애들은 그만 써도 된다고 생각해.” 문단의 하극상이다. 등단한 지 4년밖에 안 된 김영애 시인(57)이 20년이 넘은 김상미 시인(55)을 몰아세운다.김산옥 시인(41)은 어떤가. “요번에 상 받은 그 시인 있잖아요. 시는 개떡 같은데 색마 같은 지 지도교수에게 잘 보여서 교수 해먹는….” 여류 시인들의 살벌한 뒷담화가 이어지고, ‘그년(그 시인)은 미친년’으로 규정된다. 아! 청초한 시를 쓰던 여류 시인들의 입은 거침이 없다. 쉬쉬하던 시단의 구린 구석을 시원하게 배설한다.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어디까지나 연극이니까. 김상미 김영애 김산옥 조명(57) 천수호(47) 등 여류 시인 5명이 기성 배우들과 함께 정통 연극 무대에 선다. 제목은 ‘누가 연극을 두려워하랴’. 16∼20일 서울 대학로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에서 막을 여는 프로젝트 집단 ‘두목’의 첫 번째 작품이다. 시인이자 극작가인 최치언 씨가 작품을 쓰고 연출을 맡았다. 사연은 이렇다. 평소 친하던 김상미 시인과 최 작가가 ‘시인을 무대에 세워보자’는 데 의기투합했고, 김 시인이 연극에 도전하고 싶은 지인들을 모았다. 소식을 들은 신달자 유안진 최문자 최금녀 전서은 이화은 시인이 후원에 참여했다.매서운 칼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했던 5일 저녁. 서울 대학로의 지하 연습실을 찾았다. 지난해 9월부터 시작한 연습은 요즘엔 매일 오후 6시부터 11시까지 이어지고 있다. 만만치 않은 강행군인데도 배우들의 얼굴은 밝았다.“여태껏 몸을 반도 안 쓰고 산 것 같아요. 욕 한 번 안하고 살았는데 ×새끼, ○새끼 다 한다니까요.”(김상미) “연극하면서 온통 ‘깨졌지만’ 되레 자신감이 붙더군요. 연출 선생님은 무섭지만 정말 미다스의 손이에요. 감탄의 연속이죠.”(조명)연습을 지켜봤다. 연극인지 실제인지 헷갈렸다. 내용 자체가 연극을 준비하는 시인들의 얘기였기 때문이다. ‘신인’ 배우들의 대사는 서툴고, 자신감은 좀처럼 살아나지 않았다. 시인들과 기성 배우들은 다퉜다. 시인들은 “너희가 시를 아느냐”고 쏘아대고, 배우들은 “너희가 연극을 아느냐”고 받아쳤다. 연출가는 ‘시인’이라고 접어주지 않았다. “불안하고 눈동자 흔들리고 하면 다 보여요. 악으로 깡으로 하세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신 있게요.” 중년의 시인들은 벌 받는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1시간 반을 잠시도 쉬지 않고 연습한 시인들은 커피믹스와 ‘오예스’를 달게 먹으며 토막 휴식을 가졌다. “학예회 수준이면 안 된다는 의지가 강해요. (시인)배우들도 단단히 각오하고 있어요.”(천수호) 사서 한 고생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연극이 시고, 시가 연극이고, 그게 인생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도, 연극도 결국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의 작업이죠.”(김영애) “1990년대까지만 해도 시극(詩劇)이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어요. 시극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김상미) “개막이 코앞”이라며 불안감을 건드리자 시인들은 “가슴이 철렁한다” “카운트다운하는 것 같다” “연습만 계속하면 좋겠다”며 까르르 웃었다. 시인들은 개막 전까지 자신감을 충전할 수 있을까. ‘누가 연극을 두려워하랴’는 제목처럼. 전석 2만 원. 070-8759-0730황인찬 기자 hic@donga.com}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이 10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이날 시상식에서는 당선자 김영옥(중편소설) 김혜진(단편소설) 안미옥(시) 황외순(시조) 이진하(동화) 신비원(희곡) 전호성(시나리오) 김정(본명 김혜란·영화평론) 씨가 상패와 상금을 받았다. 문단에 첫발을 내딛는 당선자들은 수상의 기쁨과 함께 신인 작가로서의 포부를 밝혔다. 안미옥 씨는 “두렵고 설레고 걱정되기도 하고 기대도 된다. 앞으로 나의 한계를 만나고 극복하는 시간들을 통해서 내가 쓸 수 있는 언어들을 찾아 가겠다”고 말했다. 김혜진 씨는 “이런 자리에 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조금은 부담스럽고 마음이 무겁지만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열심히 쓰겠다”고 다짐했다. 희곡의 신비원 씨는 “경조사에 관심이 없어서 ‘아무도 오지 말라’고 했고, 결국 혼자 왔다. 그런데 다른 당선자들의 가족을 보니 좋아 보인다. 괜히 그런 것 같다”고 말해 좌중을 웃음 짓게 했다. 영화평론 부문 김정 씨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병중에 계셔서 여기 못 오신 어머니의 모습으로 세상 낮은 자리에서 열심히 쓰겠다”라며 말을 잇지 못해 장내를 숙연하게 했다. 서울대 조남현 교수는 격려사에서 “글 쓰는 것을 마라톤처럼 길게 생각하라. 또 직업으로 생각하지 말고 업(운명, 소명감 등)으로 여겼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최맹호 동아일보 대표이사 부사장은 축사를 통해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위로를 주는 게 문학이다. 더 좋은 작품을 쓰시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시상식에는 당선자 가족과 친지를 비롯해 심사를 맡았던 시인 장석주 장석남 김행숙 손택수, 시조시인 한분순 민병도, 소설가 오정희 구효서 성석제 편혜영 윤성희, 아동문학평론가 김경연, 문학평론가 김수이, 극작가 김명화, 영화평론가 전찬일 씨, 그리고 동아일보 문학회 회원 등 150여 명이 참석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소설가 김영하 씨(44·사진)가 문학사상이 주관하는 제36회 이상문학상 대상에 선정됐다. 수상작은 단편 ‘옥수수와 나’. 우수작으로는 김경욱 씨의 ‘스프레이’, 김숨 씨의 ‘국수’, 조해진 씨의 ‘유리’, 조현 씨의 ‘그 순간 너와 난’, 최제훈 씨의 ‘미루의 초상화’, 하성란 씨의 ‘오후, 가로지르다’, 함정임 씨의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등 7편이 뽑혔다. 상금은 대상 3500만 원, 우수작 각 300만 원. 시상식은 11월 초에 열린다.}

아이에게 흔히 하는 말. “착한 일 하면 상을 받는단다.” 그런데 아이가 이런 볼멘소리를 한다면…. “왜 착한 일을 하면 상을 받아야 돼? 벌을 받으면 안 돼?” 당황했다면 이 작품을 함께 읽고 난 뒤 얘기해보면 어떨까. ‘착한 일 하고 벌 받는’ 의외성 짙은 얘기다. 기차 안에서 뛰어다니며 소란을 피우는 세 아이. 한 아주머니가 이들을 조용하게 하려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옛날 옛날에, 착한 소녀가 있었는데 이 소녀가 성난 황소한테 쫓기자 마을 사람들이 소녀를 구해줬다’는 뻔한 얘기. 아이들은 툴툴댄다. 앞에 있던 신사가 제법 신선한 얘기를 꺼낸다. “‘공부 잘하는 상’ ‘말 잘 듣는 상’ ‘바른생활 상’으로 세 개의 메달을 받은 한 소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왕자의 공원으로 초대를 받았지. 하지만 늑대가 나타났고, 소녀는 잎이 무성한 작은 나무 사이로 숨었어. 소녀는 몸을 잘 숨겼지만 두려움에 와들와들 떨었고, 결국 목에 건 메달이 ‘쩔렁∼쩔렁∼’ 소리를 내 늑대에게 잡아먹혔지.” 소설 속 아이들은 듣고 나서 “재밌다”고 했지만 우리 아이들은 어떨까. “이게 뭐야∼”란 반응부터 “정말 끝이야?” “소녀가 진짜 죽은 거야?”란 다양한 질문이 나올 법하다. 그럼 어떤 얘기를 해줘야 할까. 메달 같은 위험한 것은 집에 놔두고 놀아야 된다고? 착해도 불행이 온다고? 이렇게 아이들과 얘기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2009년 볼로냐 국제어린이도서전 라가치 상 수상작.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이 작품은 읽기에 불편하다. 대화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행갈이도 문단 나눔도 헐겁지 않다. 촘촘하고 빼곡하다. 마치 밥공기에 꾹꾹 힘주어 눌러 담은, 단단해진 밥을 힘겹게 떠먹는 듯하다. 좀체로 속도가 나지 않는다. 내용도 불편하다. 1980년대 후반 서른 즈음이 된 남자와 스물예닐곱의 여자가 데이트를 앞두고 있다. 한 남자, 한 여자로만 칭해진 이들. 이미 서너 번 만난 사이. 설렘도 기대도 없다. 상대방에 대한 확신도 없지만 그렇다고 바로 돌아서기에는 왠지 찜찜하고 아쉬운 속내들. 여자는 ‘운명의 상대일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기대감을 버리기 어렵고, 남자는 집에서 혼자 맥주 마시며 포르노 잡지나 뒤적거리는 것보다는 그냥 여자(꼭 이 여자가 아니라도)를 만나는 것이 낫다고 여긴다. 이들의 만남은 야구장, 카페, 러브호텔, 술집 등을 거치며 불규칙적으로 반복된다. 그렇다고 이들이 단순히 섹스 대상자를 찾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진지하고 행복한 결혼을 꿈꾼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무미건조하고, 일견 반복되는 듯한 이들의 모습을 작가는 지긋지긋하게 현실적으로, 차분히 묘사한다.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니들이 꿈꾸는 백마 탄 왕자 같은 신랑감이나 미스코리아 외모 뺨치는 아내감은 없다’고. 결국 자신의 상대는 지금 자신 앞에 있는 ‘평범한 이성’일 뿐이다. 결혼식과 신혼여행은 행복하지만 짧으며, 결혼생활은 우울하고 길게 이어진다. 주말에는 같은 색 옷을 맞춰 입고 도시 외곽의 아웃렛과 가구점을 훑는다. 연립주택 반지하의 방 두 개짜리 신혼집은 점점 협소해진다. 이들은 장대한 계획을 세운다. ‘내 집 마련 5개년 계획.’ 하부 계획은 이렇다. 외식 금지, 조기 귀가, 물건 구입 금지, 불필요한 카드 해약, 절대 피임, 경조사 절제…. 하지만 줄이고 줄여도 계획했던 것만큼 돈은 불지 않는다. 미래는 불투명해진다. 생활은 늪으로 빠진다.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어쩌다 보니 결혼하게 됐고, 살다 보니 삶이 점점 팍팍해지더라는 것이 소설 속만의 얘기일까. 그러나 작품의 매력은 이런 익숙한 일생을 입이 바짝 마를 듯한 건조한 문체로, 그것도 놀랍도록 세밀하게 짚어 나가는 데 있다. 이런 까닭에 독자는 인식도 못하고 넘긴 자기 삶의 일기장을 다시 펼치는 듯한 느낌이 들지 모른다. 작품은 후반 남녀의 ‘불미스러운’ 사고와 남겨진 아들이 벨기에에 입양된 뒤 다시 한국에 찾아오는 것으로 변주를 준다. 내내 답답하고 불편했던 독자의 호흡에 숨통이 트이는 것도 이때다. 하지만 무언가 꽉 막힌 듯한 불편한 상태로 끝냈으면 어땠을까. 그것이 되레 우리의 탈출할 수 없는 현실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가가 8년 만에 펴낸 장편이다. 작가는 전북 무주에 있는 작업실에서 작품을 썼다고 했다. 황혼이 시작되기 전 빛의 축제에서, 그 빛이 어둠에 스러지기까지의 황혼 속에서 주로 집필했다고. 작품은 아름다운 황혼의 초입보다는 어스름에 가깝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웃자란 생각들을 자른다, 머리를 자른다. 지난 한 달 나는 또 어떻게 살았나. 작은 미용실 의자에 앉아 골몰히 상상한다. 나는 누구인가, 내 머리를 매만지는 저 여인은 누구인가. 이곳은 은하 미용실. 좁다란 홀 바닥이 푹 꺼지고, 거대한 블랙홀이 드러나는 곳. 잘린 머리카락이 우주의 먼지처럼 반짝이는 곳. 한 달에 한 번 나는 그녀를 만난다, 우주와 교신한다. ‘이달에 만나는 시’ 1월 추천작으로 김산 시인(36)의 ‘은하 미용실’을 선정했다. 지난해 11월 말 나온 시집 ‘키키’(민음사)에 수록된 시다. 시인 이건청 장석주 김요일 이원 손택수 씨가 추천에 참여했다. 김 시인은 어릴 적 장래 희망을 적는 난에 ‘나는 것’이라고 썼다. 선생님은 친절하게 비행기 조종사로 정정해줬다. 소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말 그대로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엉뚱했던 아이는 자라 시인이 됐고 ‘엉뚱한’ 첫 시집을 냈다. 이를테면 지구별에 떨어진 외계인이 지구인들을 관찰하고 느낀 바를 적은 감성적 보고서다. “소행성에서 온 외계인인데 어머니의 몸을 빌려서 태어난 거죠. 그 외계인이 지구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글로 기록하고, 그것을 자신의 고향(소행성)에 돌아가 얘기한다는 설정을 했어요.” 김 시인은 “어릴 때부터 가졌던 우주에 대한 동경이 결국 이번 시집으로 나왔다. 군대 시절부터 시를 썼으니까 15년 만에 결과물이 나온 셈”이라며 웃었다. 이건청 시인은 “김산은 심층심리의 세부를 파악해내는 안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는 무겁지 않다. 정신의 프리즘을 거치면서 다양한 국면으로 왜곡되고 굴절되면서 실체에 다가선다”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상상력이 발랄하다. 외계인적(우주적이라고 해야 맞을까?) 상상력과 현실을 뒤섞으며 독특한 이야기 시를 펼쳐낸다. 개인사를 우주사 속에 끼워 넣어 읽는 수법에서 독창성을 느끼게 한다. 오랜만에 시집을 정독하는 기쁨을 누렸다.” 장석주 시인의 추천사다. 김요일 시인은 그를 “순정한 몽상가”라고 평했다. “눈치 보지 않고, 머뭇대지도 않고 지상에서 우주까지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는 폭풍 상상력은 그가 오로지 ‘시’만을 위해 존재하는 천생 시인임을 증명케 한다.” 손택수 시인은 윤진화 시인의 시집 ‘우리의 야생 소녀’(문학동네)를 추천했다. “야생과 같은 시집이다. 거칠지만 익히 본 적 없는 여성성으로 충일된 생기가 뚝뚝 흐른다. 시고 달다”고 평했다. 이원 시인이 서효인 시인의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민음사)을 꼽으며 내놓은 추천평은 이렇다. “‘전 지구적 상상력’을 특유의 능청스러운 언어로 버무려 놓은 시집. 서효인의 종횡무진을 따라 세계를 백 년 동안 가로지르다 보면 끝내 맞닥뜨리게 되는 것. 그것은 바로 너와 나의 자화상. ‘인간’이라는 작고 끔찍한.”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솔직히 말씀드리면 쓰는 데 딱 나흘 걸렸어요. 제가 집중력이 짧아 나중에 가면 수습이 잘 안돼서….”200자 원고지 840장 분량을 나흘 만에 썼다니. 소설가 주원규(37·사진)가 4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기자와 만나 털어놓은 사연은 이렇다.지난해 10월 중순 집필을 위해 서울 홍익대 앞 24시간 운영하는 카페를 찾았다. 대강의 시놉시스는 마련해 둔 상황. 글이 술술 풀렸다. 문장에 탄력이 붙었다. 흐름을 깨기 싫었다. 끼니는 커피와 빵으로 때우고 잠은 아예 자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부터 목요일 오전 3시까지 미친 듯이 써내려갔다. “처음 이틀은 힘들었지만 어느 순간이 되니 카타르시스가 몰려왔죠.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더라고요. 하하.”그렇게 쓴 작품이 ‘반인간선언-증오하는 인간’(자음과모음)이다. ‘반인간’에 ‘증오하는 인간’이라. “사람들은 공동체와 선(善)을 말하지만 결국 이런 것들은 왜곡되고, 무력화되고, 짓밟히죠. 지금의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사회적 문학적으로 효용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서울 광화문에서 잘린 손이 발견되고, 도려낸 귀와 입이 현직 국회의원에게 소포로 배달되자 강력계 형사 민서는 연쇄살인사건이라는 감을 잡고 수사에 나선다. 희생자들은 하나같이 한 굴지의 대기업과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다. 희생자의 아내이자 초선 국회의원인 서희는 그 대기업이 새로 시작하는 사업에 강력한 의문을 갖게 된다. 소설은 강력한 흡입력으로 다가온다. 정유정의 ‘7년의 밤’에 비해 서사의 크기는 부족하지만 긴박한 속도감은 그에 필적한다. 시신이 7개로 토막난 채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발견되고, 퍼즐처럼 사건이 재구성되는 대목에선 눈을 떼기 힘들다. “우리의 몸을 파괴함으로써 우리가 갖고 있는 정신의 마비상태를 환기시키고 싶었다”는 게 잔혹극을 펼친 이유다. 2009년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작가는 벌써 일곱 번째 장편을 내게 됐다. 첫 스릴러 추리물이기도 하다. “더 많은 독자가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스릴러를 택했는데 쓰면서도 재미있었어요. ‘…하는 인간’이란 제목으로 두 권을 더 낼 생각이에요.”작가는 총회신학연구원을 나온 현직 목사이기도 하다. 서울 신촌에서 10여 명과 함께 신학 강론을 하는 ‘대안 교회’ 활동을 3년째 펼치고 있다. 사회비판적이고 때론 권력화된 종교 문제도 건드리는 그의 소설에 대해 교단의 반응은 어떨까. “제가 감리교 쪽인데 교단회의를 가면 항상 제 소설이 안건에 올라와 있어요. 욕 많이 먹고 있습니다. 하하.”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시인들이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육필 시집이 나왔다. 정현종 신경림 이하석 오탁번 윤후명 강은교 등 시인 43명이 자신의 대표 시를 직접 고르고 써서 펴낸 ‘시인이 시를 쓰다’(지식을 만드는 지식). 정성스레 써내려간 육필 원고에는 시인마다의 개성이 가득하다. 시어들은 한층 생기 있고 풍성해졌다. 시인들은 이번 ‘대표 시 모음집’ 외에도 각자 별도의 육필 시집을 차례로 펴낸다. 대개 컴퓨터 화면의 커서 끝에서 시어들이 탄생하는 세상이기에 이번 육필 시집은 시인들에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이하석 시인은 “육필이란 몸과 이어진, 또 다른 제 힘의 한 모습”이라고 정의했다. 나태주 시인은 “육필 시집은 한 시인에 대한 철저한 기념물이다. 아뜩한 환희요, 행운을 넘어선 그 무엇이다”라고 말했다. 오랜만에 쓰는 육필 원고에 대한 감회도 새로웠다. 이정록 시인의 감회는 한 편의 시 같다. “컴퓨터로 시를 찍다가, 오랜만에 볼펜으로 또박또박 시를 옮겨보았다. 가운데 손가락 끝, 펜 혹이 부풀어 올랐다. 작가는 펜 혹으로, 구부려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씻거늘, 그간 손가락이 물러진 것이다.” 정일근 시인은 육필 작업의 고통을 토로했다. “유리 펜도 닳고 잉크도 줄어들고 손끝을 타고 내 정신이 뭉텅뭉텅 빠져나가버린 것 같다.” 육필 예찬론자인 김형영 시인은 평소에도 아무 백지에나 가리지 않고 시를 적는다. “컴퓨터 화면에서 한 번 삭제하고 나면 삭제된 구절을 되살리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러나 백지에 쓴 것은 지워도 그 흔적이 남아 있어 언제든지 처음 쓴 구절을 다시 볼 수 있다. 지웠던 구절이 더 나아보였을 때는 잃었던 아들을 찾은 성경 속의 아버지의 마음과 비기고 싶어진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눈 내리는 날 숲에 오른 기정은 나무십자가가 있는, 애인의 묘지를 찾는다. 동박새와 황조롱이와 바다사자를 함께 보러간 애인은 배 위에서 뛰어내렸다. 눈 덮인 숲은 깨끗하고, 간결하고, 단조롭다. 눈 벽에 갇힌 듯 안온함을 느끼며 청설모와 꿩을 본다. 청설모가 모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때론 가짜라도 필요하잖아, 라는 게 모형을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꿩이 앉았던 낙엽더미 위에는 돌멩이 두 개가 있다. 돌멩이를 새끼라고 여기는 듯했다. 무섭도록 조용한 숲속에서 기정은 신께 다가가는 세 가지를 떠올리며 정말 신께 다가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숲에서 내려오자 팀장은 점심시간이 너무 긴 거 아니냐고 타박하며 완이 때문에 학원에 가봐야 한다고 한다. 완이가 빨간 가방 때문에 친구를 패 묵사발로 만들어버렸다며 몹시 우울해한다. 숲으로 가기 전에 떠 놓았던 밀랍몰드의 원형은 다음 날 뽑을 수 있어서 지오라는 구체관절인형 심재를 만든다. 주문 제작이 아니라 기정의 작품이다. ‘성재범 제작소’는 팀장의 이름 때문에 끊이지 않고 주문이 들어오는 편이었으나 주문은 극히 제한적이라 팀장과 기정은 자신의 작품을 하면서 제작소를 꾸려나갔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15층에 사는 아주머니를 만난다. 아주머니는 몽롱하고 폐쇄적이고 쿠마리처럼 초경도 하지 않은 채 늙어버린 것 같다. 거실이 따뜻해질 때를 기다리며 소파에서 커피를 마시던 기정은 보석무늬가 일정하게 박혀 있는 벽지를 보며 어머니를 떠올린다. 어머니는 일 년 전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관광차 전복 사고로 세상을 떴다. 텔레비전 위에는 구겐하임미술관 앞에서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이 모마미술관과 구겐하임미술관이다. 15층 아주머니가 인터폰으로 기정에게 줄 게 있다며 올라오라고 한다. 똑 같은 31평이지만 아주머니의 집이 훨씬 넓게 보이는 것은 벽지나 소파나 커튼이 흰색이고, 별다른 장식장이 없기 때문이다. 기정은 흰색과 너무 넓다는 게 무섭다는 걸 처음으로 느낀다. 아주머니는 오늘이 미국지사로 떠나버린 아들 결혼식인데 가지 않았다고 하면서 공군장교였던 남편이 죽은 이야기와 북해도의 눈 이야기를 한다. 북해도의 눈 속에서 세상과 단절했고, 또 세상과 화해했다고 한다. 기정은 아주머니의 지적인 말투에 속으로 놀란다. 아주머니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이 그냥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무섭다고 했다. 베란다 밖의 움직이지 않는 강이 무섭듯이. 말차와 화과자를 먹던 중 아주머니는 안방으로 가서 선물을 가지고 나온다. 오타루의 공방에서 사온 오르골이다. 풍성한 치마를 입은 여자가 뱅글뱅글 돌자 여자 속에 남자가 숨어 있는 것처럼 여자남자 혼성 이중창이 흘러나왔다. 고맙다는 말에 아주머니는 자신이 이담에 무얼 부탁하면 들어주라고 한다. 기정은 두려움을 느낀다. 택시에서 내린 기정은 성당건물과 공무원연수원 건물 앞과 석유저장소 앞을 지나 샛길로 접어든다. 샛길에서 외국남자와 통역사를 보게 된다. 외국남자는 사제복이나 군복이 어울릴 것 같다. 숲으로 올라가면서 숲 앞면 역할을 하는 커다란 바위를 대리석 묘지 쓰다듬듯 쓰다듬는다. 믿음직스러운 기운과 성스러운 감정을 느낀다. 눈 내리는 숲속은 한 가지 색뿐이라서 더 넓어 보인다. 그래도 넓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혼자 서 있는 고독감 같은 걸 느낄 필요도 없었다. 눈 밑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깨끗하고 아름다운 눈만 보면 되었다. 묘지 주위에는 멧토끼나 멧돼지 발자국이라고 할 수 없는 투박한 발자국이 거칠게 찍혀 있다. 불안해하던 기정은 하늘에 떠 있는 새를 보며 패러글라이딩을 하던 그를 떠올린다. 아홉 살이나 많은 여자와는 절대 결혼시킬 수 없다고 하던 그의 어머니가 패러글라이딩을 하던 그가 땅으로 처박혀 왼쪽 어깨를 크게 다치자 다시 기정을 찾아와 네가 누굴 구원하겠다는 거야? 라고 했다. 왜 구원이라는 말을 할까 하고 기정은 의아해했다. 결혼을 반대하는 이유가 단순히 나이뿐인 줄 아냐고 하자 기정은 그동안 돌쩌귀가 어긋나 닫히지 않던 문이 닫히는 기분을 느꼈다. 닫힌 문 앞에서 버티고 서 있을 만큼 순수하지도, 어리지도 않은 기정은 그에게서 돌아섰다. 숲을 내려오기 전에 깨끗한 눈으로 발자국을 덮어버린다. 제작소로 온 기정은 밀랍인형인 대기업 창업주 손을 채색한다. 손이 얼굴보다 밀랍인형인 게 탄로 날 확률이 높아 푸른 힘줄과 주름을 강조한다. 퇴근 후에 팀장과 술을 한 잔 하러 간다. 술집에는 중년남자가 혼자서 보드카를 마시고 있다. 칵테일로 입술을 축인 뒤 기정은 완이는 어떻게 되었냐고 묻는다. 팀장은 친구와 싸워도 빨간색 가방(도망간 엄마의 숄더백)은 여전히 들고 다닌다고 하며 일요일에 완이가 얻어다 키우는 토끼를 보러 오라고 한다. 완이 엄마는 보험회사에 다니다가 바람이 나서 떠났다. 빨간색 가방만 들고 다니면 엄마가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는 완이와 달리 팀장은 완이 엄마와 남자가 탄 에쿠스가 유조차와 정면충돌해 둘 다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생각했다. 토끼를 보러간 날, 토끼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는 완이에게서 기정은 고집과 외로움을 엿본다. 팀장은 기정에게 꽃게탕을 끓여주고, 기정의 발이 예쁘다고 한다. 발을 바라보는 팀장의 눈이 불온하게 반짝였다. 밀랍인형인 박경준을 대기업 기념관 안에 설치해주고 나오자 비가 내린다. 팀장은 후배를 만나러 가고 혼자서 미술관으로 갔지만 당분간 휴관을 한다고 한다. 갈 데가 없는 기정은 집으로 간다. 유리탁자 위에 놓인 오르골을 보자 아주머니 생각이 나 1503호로 간다. 어머니가 보고 싶고, 따뜻한 것에 파묻히고 싶어서이다. 아주머니는 죽을상이고, 베란다의 유리문은 활짝 열려 있다. 와인을 마시던 아주머니가 말한다. 내가 전혀 의식하지 못할 때 그냥 손을 뻗어 나를 밀어버리라고. 놀란 기정이 아무한테나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하자 아주머니는 아무한테나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기정은 비밀이 들킨 것만 같다. 아주머니는 아무리 노력해도 내 생활은 바뀌지 않는다, 고 쓴 유서를 보여준다. 안방에는 장롱도 없다. 일을 간단하게 하고 싶어서 없애버렸다는 말에 기정은 얼어버린다. 기정은 쫓기듯 아래층으로 내려온다. 제작소에서는 당분간 일거리가 없어 본격적으로 지오를 만들어나간다. 점심시간에 함께 꽁지공원으로 간 미스 오는 조각가인 애인이 섹스는 하지 않고 상체만 애무해서 분하다고 한다. 헤어지고 싶지만 자신이 그 유희감각을 버리지 못한다고 하자 기정은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붙잡아두라고 한다. 일요일에 아주머니는 생일 케이크에 불을 붙여 달라며 기정을 부른다. 햇빛이 내리쬐는 강을 내려다보던 아주머니는 자신은 늘 강과 바다를 항해 중인 것 같으며 가도 가도 보이는 것은 흰 햇빛과 흰 물빛뿐이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건 자유뿐인 것 같고, 벽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게 너무 넓게 느껴진다고도 말한다. 그건 기정도 마찬가지였다. 넓은 강과 넓은 공터를 오랫동안 보고 있자 갑자기 무한대로 커지는 것 같고, 전혀 공간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 기정을 조롱하는 것 같다. 해봐, 해봐, 못할 것도 없지 않아. 너 역시 이대로 나가면 저 아주머니처럼 될 거야. 네게 누가 있어. 아무도 없잖아. 너의 이십 년 후의 모습이 바로 아주머니야. 너도 누군가에게 부탁할래?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할 때 죽여 달라고. 혼자서는 죽지도 못한다고. 그냥 이십 년 후의 너를 미리 없애버린다고 생각하고 밀어버려. 한순간이야, 한순간. 찰나만 지나면 아주머니는 곧 편안해질 거야. 그러면 고독에 떨 필요도 없는 거야. 고독에 떨고 있는 것만큼 추해보이는 것도 없잖아. 아주머니, 추하잖아. 그리고 말이야,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게 혼자인 거야. 혼자인 것에서 벗어나게 해줘. 밀어, 밀어버리라니까. 기정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아주머니를 밀어버린다. 퍼뜩 정신을 차린 기정은 얼이 반쯤 빠진 아주머니를 소파에 앉혀놓은 뒤 아래층으로 도망쳐온다. 내내 아무 일도 하지 못하다가 팀장을 만나 위로를 받는다. 미스 오는 애인이 작업실에서 다른 여자와 엉켜 있는 것을 봤다며 괴로워한다. 뒤따라 나온 애인이 화난 여자가 뭐냐고 따지자 오필녀 씨, 저번의 그 작품 좋았어요, 라고 했다며 정말 오필리아처럼 웃어젖힌다. 오필리아로 불러주지 않아서 더 화가 났는지도 몰랐다. 스물다섯 살의 미남형 지오가 완성되자 기정은 저번의 일을 사죄도 하고 아주머니를 혼자 있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1503호로 가져간다. 아주머니에게 지오가 태어난 배경이라든지 성장과정이라든지 지오의 내면기록을 써보라고 한다. 박경준 뒤로는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는다. 일감이 없으면 팀장보다 기정이 더 초조해졌다. 미스 오는 아무렇지도 않게 작업실에 다시 간다고 한다. 그날 본 것은 싹 까먹은 모양이다. 아니면 외로움이라는 물건이 1g이라도 더 얹힌 쪽이 관계에서 지는 거니까 미스 오의 시소가 땅 쪽으로 기울었는지도 몰랐다. 며칠 뒤 아주머니가 기정을 부른다. 지오의 내면기록을 쓴 노트를 보여준다. 지오가 되기 전까지, 아주머니의 아들이 되기 전까지의 내면기록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그것을 읽어본 기정이 끼어들어 윤색하고, 아주머니와 타협해서 이상훈이라는 한 인물을 창작해낸다. 이상훈의 내면에는 앵무조개의 나선형무늬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그 작업이 끝났을 때 팀장에게서 전화가 온다. 완이의 토끼가 죽어버렸다고 한다. 전화를 끊고 나자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베란다의 블라인드가 딱딱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다. 어디 계세요? 하고 기정은 묻는다. 삼월인데도 눈이 내리자 기정은 숲으로 간다. 범죄스릴러물에 쓰일 전신더미 한 구는 팀장이 세밀화 작업 중이라 출근을 하지 않았다. 숲을 오르면서 기정은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느낀다. 싫고 나쁜 예감일수록 적중률 100%였다. 숲에서 기정은 멧토끼 한 마리를 본다. 그걸 잡아다 완이에게 주고 싶어진다. 완이는 야산에 토끼의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두 번쯤 토끼무덤에 갔으나 산에 가면 춥고 외롭다며 발길을 끊었다. 팀장이 미국너구리를 사다줄 거라고 했으나 생명 있는 것은 다 자기를 떠나버린다면서 다시 빨간색 가방을 들고 다녔다. 나무십자가가 있는 묘지로 간 기정은 대리석 묘지를 힘껏 끌어안으며 이제 눈은 안 와. 진달래꽃이 피면 다시 올게, 라고 말한다. 거칠고 둔탁한 발소리에 기정은 상체를 들고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본다. 언젠가 샛길에서 본 외국남자와 통역사인 청년과 석공이 올라온다. 위쪽이나 옆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 나무십자가가 있는 묘지로 온다. 그래도 기정은 묘지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통역사가 왜 이 묘지에 있냐고 묻자 기정은 여기는 제 애인 묘지라고 한다. 외국남자가 지도를 들여다보며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한다. 묘지를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닌가 하고 묻자 기정은 아니라고 소리친다. 통역사가 이 묘지는 선교사인 안토니오 공베르 신부가 잠든 곳이고, 네덜란드에서 온 선교사의 유해도 이쪽으로 옮기고 다시 단장할 거라고 한다. 석공처럼 보이는 중년사내가 불쾌하게 바라보자 기정은 돌아선다. 숲을 내려오면서 기정은 돌멩이를 새끼라고 품고 있는 꿩이 자신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일 년 전을 떠올린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 남겨진 기정은 눈 쌓인 숲속을 올랐다. 발을 헛디뎌 추락사해도 괜찮을 것 같다며 발길 닿는 대로 걷는 기정의 눈에 나무십자가가 이정표처럼, 표식처럼 시선을 끌었다. 나무십자가 아래 아직 완성이 덜 된 묘지 옆에 앉은 기정은 편안함을 느끼며 즐거운 묘지라는 말을 이해했다. 그 뒤로 숲에 올랐고, 나무십자가를 찾았고, 묘지 옆에 앉았다. 숲을 오른 지 한 달 뒤쯤 너무 조용하고 편안한 것이 두려워진 기정은 그 묘지에 그를 묻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은 견딜 수 없으니까. 다음 날 아주머니는 15층에서 뛰어내렸다. 아주머니를 실은 앰뷸런스가 떠나고 나자 기정은 15층으로 올라간다. 지오를 안고 내려온다. 상류층 할머니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는 뉴스를 들은 기정은 벌떡 일어나 소리친다. 나는 아주머니와 말을 한 적도 없다고. 기정은 지오에게로 가 텐션 줄을 끌며 묻는다. 이제 묘지에 누워 있지 말고, 나랑 살래?김영옥}

안녕하세요. 저는 광명초등학교 3학년 3반 정희성이에요. 갑자기 편지를 받아서 놀라셨죠? 왜냐면 아저씨는 저를 모르실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아저씨를 알아요. 아저씨의 시가 우리 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거든요. 읽기책 43쪽이에요. 담임선생님은 교과서에 나오는 시를 모두 외우라고 하세요. 그래서 저는 아저씨가 쓴 시도 다 외우고 있어요. 아저씨가 쓴 ‘봄의 계단’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예요. 아저씨도 어렸을 때 국어를 좋아했어요? 저는 국어가 제일 좋아요. 다른 과목은 딱딱한 공식이랑 외워야 할 것들밖엔 없는데 국어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고 제가 좋아하는 시도 있거든요. 하지만 시험 점수는 별로예요. 며칠 전에 쪽지시험을 봤는데 세 개나 틀렸어요. 이게 제가 틀린 문제인데요, 한번 보세요. 동시 ‘봄의 계단’의 분위기로 옳은 것을 고르세요.① 초라하다② 슬프다③ 애틋하다④ 불쾌하다⑤ 희망차다 저는 2번을 선택했는데요, 5번 희망차다가 답이래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왜 2번이 답이 아닌 건지 모르겠어요. 저는 이 시가 슬프다고 생각했거든요. 특히 이 부분이 무척 슬펐어요. 부지런한 새싹 땅 속에서 뽀얀 얼굴 내밀고 있네요 잠에서 갓 깨어난 아기 씨앗 기지개 켜다가 눈물이 찔끔 왜냐면 봄에 싹이 트는데 아기 씨앗은 혼자 늦게 잠에서 깨어났잖아요. 기지개를 켜는 척하면서 그러니까 몰래 울잖아요. 친구들은 다 싹이 트는데 자기만 느리니까요. 이 시의 분위기가 왜 희망차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이것뿐만이 아니에요. 다음 중 ‘봄의 계단’을 쓴 시인이 생각한 것으로 틀린 것을 고르세요.① 봄은 한 번에 오는 것이 아니라 계단을 밟고 올라가듯 천천히 오는구나!② 봄에는 많은 동물들과 식물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네.③ 추운 겨울이 지나면 곧 봄이 오니까 모두 힘내!④ 봄이 지나면 언젠가 다시 겨울이 오겠지.⑤ 개구리는 봄이 되면 신나서 폴짝 뛰나봐. 아저씨, 아저씨는 시를 쓸 때 정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썼어요? 그리고 아기씨앗은 정말로 기대에 부풀어 있는 거예요? 슬픈 게 아니고요? 선생님은 아마도 아저씨와 아주 친한 사람이거나 아저씨의 마음을 다 들여다보는 마법사인 게 분명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아저씨가 생각한 것을 선생님이 알고 이런 문제를 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선생님이 아저씨와 친한 사이일 리는 없고 마법사일 리는 더더욱 없죠! 저는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께 가서 문제가 이상하다고 말을 했어요.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희성이가 시를 많이 읽어보지 않아서 시를 해석하는 게 어려운 모양이구나.” 하시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더 머리가 아파졌어요. 시를 읽는 건 나고 그걸 느끼는 것도 나잖아요. 그런데 내가 느껴야 할 것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건 어쩐지 이상하잖아요. 집에 와서도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내 생각이 남들과 다르다고 해서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아저씨도 다르다와 틀리다의 차이는 아시죠?) 저는 선생님에게 알려주고 싶었어요. 이 시가 누군가에게는 슬플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저는 그날 밤 열두 시가 넘도록 잠을 자지 않고 책상에 앉아 아주 멋진 계획을 세웠지요. 다음 날 저는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교실에 남아 있었어요. 그리고 선생님께 가서 공책을 펼치며 물었어요. “선생님, 이 문제 알려주세요.”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하시더니 “이건 못 보던 시인데?”하셨어요. 못 본 게 당연했죠! 그건 교과서에 나오는 시가 아니었거든요. “문제집에 나와 있었어요.”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시를 읽었어요. 제목 : 가을 운동회 낙엽이 떨어지는 건 가을이 시작된다는 신호 준비! 땅! 단풍잎 손 주먹 쥐고 누가 누가 먼저 달려가나 누가 누가 먼저 고운 물이 드나 그리고 선생님은 턱을 괴고 문제도 가만히 읽었죠. 시인이 이 시를 쓴 이유로 옳은 것은?① 심심해서② 가을이 깊어가는 것을 알리려고③ 낙엽을 보고 갑자기 생각나서④ 가을 운동회가 시작되어서⑤ 여름이 지나간 것이 아쉬워서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빨간 펜으로 답을 고르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자, 이 시는 가을이 깊어가는 것을 아주 재미있게 표현했구나. 시인은 가을 낙엽을 운동장의 아이들에 빗대어 표현했어. 정확히는 가을 운동회 날 달리기 시합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거야. 아이들이 단풍잎 같은 손으로 주먹을 쥐고 달리면 마음에는 어느덧 푸른 물이 드는 거란다. 그렇게 가을은 무르익어 가고 아이들은 성장하는 거겠지? 그래서 답은 2번이 되는 거고. 이해가 되니?” 운동장? 학생? 저는 황당해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어요. 저는 선생님을 똑바로 보며 말했어요. “선생님, 틀렸어요!” 선생님이 무슨 뜻이냐는 듯이 나를 쳐다봤어요. “시인은 그런 생각은 안했어요. 그냥 낙엽이 빨리 땅에 닿는 게 달리기 경주하는 것 같다고 느낀 것뿐이에요. 그리고 시인은 가을이 오는 걸 알리려고 이런 시를 쓴 게 아니에요. 낙엽 보다가 생각이 나서 그냥 쓴 거죠!” 선생님은 한숨을 내쉬더니 웃으며 제게 말했어요. “희성아. 그게 아니야. 여기 ‘단풍잎 손 주먹 쥐고’라는 부분을 보렴. 아이들이 작은 손을 움켜쥐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니? 제목도 ‘가을 운동회’고 말이야. 시인이 아무런 의도도 없이 시를 썼겠니? 희성이는 아무래도 시를 해석하는 방법을 조금 더 공부해야겠구나.” 저는 허리에 손을 얹었어요. 그리고 선생님께 물었죠. “선생님, 이 시인이 누군지 아세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정희성이에요!” 선생님은 한참 저를 쳐다보시더니 곧 얼굴이 새빨개졌어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요. “이걸 네가 썼단 말이니?” 선생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어요. 저는 고개를 끄덕였죠. 선생님은 잠시 당황한 듯 했지만 곧 무서운 표정으로 저를 노려보았어요. “너, 지금 선생님을 놀린 거니?” 저는 너무 놀라서 울 뻔했어요. 선생님이 그렇게 화가 난 모습은 정말 처음 봤거든요. 저는 주먹을 꽉 쥐고 이렇게 외쳤어요. “선생님이 낸 문제는 엉터리예요!” 그리고 나도 모르게 엉엉 울어버렸지요. 왜 울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뭔가 서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저는 한참이나 서서 울었고 선생님은 그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어요. 얼마나 울었을까요?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어요. 나는 어쩐지 민망해서 억지로 울음소리를 내면서 콧물만 훌쩍거렸지요. 저는 선생님이 차라리 나를 때리거나 벌을 세워주었으면 했어요. 가만히 앞에 세워만 두지 말고요. 울음소리 흉내 내기도 지칠 즈음, 선생님은 제게 사탕을 하나 건네며 이제 그만 집에 가라고 했어요. 복도에 나가서 창문으로 살짝 들여다봤더니 선생님은 어두운 표정으로 계속 책상에 앉아 있었어요. 집으로 돌아와서도 저는 자꾸만 선생님이 생각났어요. 내가 너무 심한 장난을 쳐서 선생님이 단단히 화가 난 것이 분명했지요. 선생님이 이제 나를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어요. 나는 침대에 누워 월요일이 오지 않기를 빌었어요. 선생님을 다시 보는 게 두려웠거든요. 주말이 지나 학교에 갔을 때, 그러니까, 오늘 말이에요. 선생님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책상에 앉아 일기장을 검사하고 있었어요. 저는 선생님 눈치를 보면서 우물쭈물했어요. 선생님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지요. 마치 그날 일은 아주 없었던 것처럼요. 하지만 아저씨, 바뀐 것이 하나 있었어요. 오늘 본 쪽지시험 말인데요, 거기엔 글쎄 이런 문제가 있지 뭐예요! 이 시의 분위기로 옳은 것을 고르세요.① 초라하다② 슬프다③ 애틋하다④ 불쾌하다⑤ 희망차다⑥ 빈 칸에 자신의 생각을 쓰세요 ( ) 1번부터 5번까지만 있던 보기가 6번까지로 늘어났던 거예요. 제가 어떤 답을 선택했냐고요? 당연히 나만의 답을 선택했지요! 그리고 선생님은 그 문제에 파란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려주었어요. 선생님은 이제 저를 용서한 걸까요? 그러니까 동그라미를 그려주었겠지요? 저는 기분이 좋아졌어요. 그래서 또 시를 쓰고 싶어졌어요. 그런데 아저씨, 제가 쓴 시는 어때요? 이만하면 저도 시인이 될 수 있을까요? 아참, 시인은 돈을 많이 버나요? 엄마가 시인은 가난하다고 했는데. 그리고 시인이 되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해요? 답장 기다릴게요!이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