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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남부에서 발굴한 일본식 무덤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광주 광산구의 월계동 고분군 등지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은 한반도 전통 고분 양식과는 사뭇 다르다. 이름 그대로 앞쪽은 사다리꼴, 뒤쪽은 원형으로 만들어진 열쇠 모양의 무덤. 일본 ‘고훈(古墳)’ 시대(3∼7세기) 무덤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그간 한반도에 존재하는 왜계(倭系) 고분들의 주인이 5세기 일본에서 백제로 건너온 ‘왜인 용병’일 가능성이 최근 제기됐다. 박천수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가 최근 발표한 논문 ‘왜계 고분으로 본 백제와 왜’를 통해서다. 박 교수는 “출토 유물과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 각종 문헌 분석 결과 무덤 주인은 일본 지배층이 아닌 중하급 전사로 보는 게 타당하다”며 “일부 일본 학계가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은 설득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문헌에 따르면 일본 전사들이 한반도로 넘어온 최초의 기록은 405년경이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일본에 머물던 백제 태자 전지왕이 아버지 아신왕이 죽자 왜병 100인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후 일본 호위무사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하나 광개토대왕릉비에 “왜가 배로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들이 백제·고구려 전쟁에 참가했을 개연성이 크다. 박 교수는 “5세기 전반의 전남 고흥군 안동고분과 야막고분은 분구(墳丘) 표면에 돌을 깔아 마무리하는 즙석(葺石) 시설이고 일본식 대도와 갑옷 등의 유물이 나와 무덤 주인이 일본인임을 드러냈다”며 “해양 군사 요충지에 위치했고, 왕실에서 하사한 것으로 보이는 금동관이 출토돼 백제 용병으로 활약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479년 백제 동성왕 역시 전지왕과 비슷하게 일본 군사 500인을 대동하고 삼근왕 서거 이후 귀국했다. 이들 500명이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6세기 전반 무덤은 주로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다. 일본 규슈지역 횡혈묘(橫穴墓)와 닮았다. 출토 유물은 백제 왕실용품인 금박유리 등이 함께 나왔다. 일본의 몇몇 학자는 이 고분들을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박 교수는 “무덤 형태가 일정한 계통 없이 5∼6세기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며 “왜계 고분의 주인들이 한반도에서 지배적 세력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활동한 전사 계급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밝혔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피아니스트 서형민(28·사진)이 9일(현지 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제8회 인터내셔널 저먼 피아노 어워드’ 결선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 콩쿠르는 재능 있는 젊은 피아노 연주자를 발굴하기 위해 2008년 창립한 ‘인터내셔널 피아노 포럼’이 2011년부터 해마다 열고 있다. 지난해 미국 밴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선우예권이 이 대회 제5회 우승자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결혼 1년차 새댁의 넋두리결혼 1년 차 새색시입니다. 저와 동갑인 남편에겐 다섯 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어요. 남편과 오래 연애를 해 데이트 때 아가씨를 여러 번 만났어요. 결혼 전엔 이름을 부르고 반말을 했는데, 결혼하니 아가씨란 호칭이 영 입에 붙지 않네요. 저도 모르게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다가 어른들에게 한 소리 들었어요. 명절이 오면 더욱 ‘대략 난감’입니다. 남편의 사촌동생 중엔 중학생도 있어요. 그들에게 “도련님, 식사하세요”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하고 말할 때마다 ‘몸종 언년이’가 된 기분이에요. 대학생인 남편의 사촌동생은 저에게 “형수!”라며 ‘님’ 자를 빼고 부르더군요. 저도 ‘도련!’이라고 부르고 싶은 걸 꾹 참아요. 남편의 동생이 결혼하면 도련님이 아니라 ‘서방님’이라고 불러야 한다죠? 심지어 시누이의 남편도 서방님이라고 부르는 게 맞대요. 정말 이상하지 않아요? 멀쩡한 내 서방을 두고 왜 애먼 사람에게 서방님이라고 하는지…. 말 나온 김에 시댁(媤宅)과 처가(妻家)는 또 어떻고요. 시댁은 높여 부르면서 처가는 왜 ‘처댁’이라고 안 하죠? 처갓집은 ‘양념치킨’ 앞에나 붙였으면 좋겠어요. ■ 시대에 뒤처진 호칭 예법신혼부부에게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호칭’이다. 연상연하 부부들은 ‘호칭 갈등’이 더 크다. 이윤화(가명·39·여) 씨는 “남편이 나보다 여섯 살 어려 남편의 누나도 나보다 어리다”며 “그런데도 ‘형님’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존댓말을 써야 하니 솔직히 불편하다”고 말했다. 그는 “애초 부를 일을 만들지 않는 게 최상”이라며 “꼭 해야 할 얘기가 있다면 호칭을 생략하거나 말끝을 흐린다”고 했다. “형님, 이번 어머니 생신 때 음식 해가면 되…나?” 하는 식이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의아해하는 건 시댁 쪽 사람에겐 ‘님’ 자를 붙이면서 왜 처가 쪽엔 그렇게 하지 않느냐다. 예컨대 남편의 누나는 형님, 남편의 형은 아주버님, 남편의 여동생은 아무리 어려도 아가씨다. 남편의 남동생은 미혼일 땐 도련님, 결혼 후엔 서방님이라고 부르는 게 국립국어원이 규정한 예법에 맞는 표현이다. 하지만 처가 쪽은 다르다. 아내의 남동생은 처남, 아내의 여동생은 처제, 아내의 언니는 처형이다. 최서연 씨(38·여)는 “친오빠가 남편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데, 시부모님이 ‘형님이라고 부르는 건 전통이 아니다. 그냥 처남으로 불러라’고 해 불쾌했다”며 “전 저보다 열 살 이상 어린 남편의 사촌 여동생들에게까지 ‘아가씨’라고 하는데, 마음이 상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했다. 동갑과 결혼해도 특별히 나을 게 없다. 강민영 씨(35·여)는 “남편과 동갑이고 결혼 전에 서로 이름을 불렀는데 결혼하고 난 뒤 시댁에서 눈치를 줘 ‘신랑’ ‘○○아빠’라고 부르고 있다”고 말했다. 남편은 예전처럼 여전히 강 씨의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시댁이나 처가에서 문제 삼지 않는다. 강 씨는 “심지어 내가 2개월 누나다”라며 억울해했다. 국어원이 지난해 4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국어원이 2011년 규정한 ‘표준 호칭’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온다. 원래 남편 여동생의 남편은 ‘서방님’이라고 부르는 게 표준 호칭이지만 설문 응답자의 62.7%는 ‘고모부’라고 부른다. 만약 아이가 없다면 고모부라고 부르는 것도 어색하다. 마땅한 호칭이 없어 가족이면서도 가족 같지 않은 서먹한 관계로 남을 수밖에 없는 셈이다. 여성민우회는 2005년 우리나라의 성차별적인 호칭에 문제가 있다며 새로운 대안 명칭을 찾는 캠페인을 벌였다. 하지만 현재까지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했다. 여성민우회 최원진 성평등복지팀 활동가는 “당시만 해도 한국 사회의 개인은 가족제도 안에서 존재하다 보니 대안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이름을 부르자”는 의견이 많아지고 있다. 지난해 국어원 조사에서 ‘도련님이나 아가씨라는 호칭 대신에 다른 말을 쓴다면 무엇이 좋겠느냐’는 질문에 ‘이름을 부르자’는 의견이 33.8%로 가장 많았다. 아내의 동생을 부를 때도 36.3%는 이름을 부르자고 답했다. 공손하게 서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편하게 이름을 부르기보다 ‘○○ 씨’라고 존칭을 붙이자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시댁과 처가라는 말도 시대 흐름에 맞춰 바꿀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서로의 집안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여성은 ‘남편 본가’(10.6%)를 선호했고, 남성은 ‘처댁’(19.1%)을 대안으로 꼽는 응답이 많았다. 국어원은 “이번 조사를 바탕으로 올해 대안 호칭을 만들어 보겠다”고 밝혔다.○ 당신이 제안하는 이 시대의 ‘신예기’는 무엇인가요. 으로 여러분이 느낀 불합리한 예법을 제보해 주세요.노지현 isityou@donga.com·이미지·유원모 기자}

고요한 지하철에서 갑자기 “아가가갸”라는 괴성이 터져 나온다.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간다. 몸은 조금씩 옆으로 비켜간다. 싸늘한 시선을 받아내야 하는 건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의 몫이다. 길거리, 대형마트 등 일상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저자는 “차가운 시선이 칼이 되지만, 담담한 시선은 숨통이 된다. 시선을 거두는 것만으로도 발달장애 아이들이 세상에 나와 함께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기자 생활을 하던 저자는 결혼 3년 만에 인공수정으로 쌍둥이를 얻었다. 동생으로 태어난 아들은 출산과정에서 생긴 뇌손상 후유증으로 평생 발달장애를 안게 됐다. 직장 생활을 포기한 채 장애 아이의 엄마로 견뎌낸 10년간의 시행착오와 ‘동네 바보 형’으로 대표되는 한국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유쾌하면서도 날카롭게 분석했다. 무엇보다 장애인 아이를 키우기 힘들게 만드는 것은 우리나라의 부족한 장애인 복지제도다. 장애등급 평가 기준의 모호함 때문에 복지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장애 아이 치료기관은 경쟁률이 수백 대 1에 이를 정도로 부족하다. 성인 발달 장애인의 82.5%는 실업자로 지낸다. 저자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장애 컨설턴트 도입과 발달장애인이 자력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돕는 주거복지 등은 정책 담당자가 주목할 만하다. 장애 아이 부모가 쓴 감동 수기도, 한계를 극복한 인간 승리 드라마도 아니다. 오히려 고통에 가까운 장애인 부모의 일상을 솔직하게 그려내는 모습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최근 외국인이 울릉도를 왕래하여 멋대로 점유하였다. 송죽도와 우산도는 울릉도의 옆에 있다. 서로 간의 거리가 얼마나 되며 무엇이 있는지 아직 상세히 알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그대가 가게 된 것은 특별히 임명한 것이니 각별히 조사하라.”(‘고종실록’ 중에서) 1882년 4월 7일 고종은 신임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에게 이 같은 특명을 내린다. 울릉도 근처에 있는 가장 큰 부속 섬인 송죽도(죽도)와 우산도(독도)의 존재를 반드시 규명하라는 것. 그러나 이규원은 고종의 의견에 반박한다. “우산도가 바로 울릉도이며 우산은 옛 도읍의 명칭입니다. 송죽도는 하나의 작은 섬인데 울릉도와 30리 떨어져 있습니다.” 고종 역시 확신에 찬 근거로 다시 명령을 내린다. “송도와 죽도라고도 칭하여 우산도와 함께 이 3개 섬을 울릉도라고 통칭하고 있다. 이는 모두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 있다. 그 형세를 모두 검찰하도록 하여라.” 한 번도 울릉도를 찾아가 보지 않았던 고종. 하지만 고종은 이처럼 독도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었다. 고종이 근거로 내세운 것은 ‘여지승람’이라는 문헌이다. 최근 고종이 독도의 위치 등 독도에 대한 인식을 명확히 하고 있음을 밝혀낸 연구가 나왔다.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장이 수선사학회의 학술지 ‘사림’에 실은 ‘고종과 이규원의 울릉도와 독도 위치와 명칭에 관한 인식 과정’ 논문을 통해서다. 김 소장은 “여러 사료 분석 결과 고종이 언급한 여지승람이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국문헌비고’라는 것을 확인했다”며 “이규원의 검찰사 활동이 단지 울릉도 개척이 아니라 독도를 발견하려는 지시였다는 것이 명백해졌다”고 밝혔다. 실제로 1531년(중종 26년)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우산도, 울릉도, 무릉이라고도 하고, 우릉이라고도 한다. 2개 섬이 울진현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며 울릉도와 우산도(독도) 두 섬의 존재를 확실히 구분해 놓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송죽도(죽도)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를 보완해 주는 것이 동국문헌비고(1770년)다. 이 책에는 “대개 이 섬은 대가 나는 까닭에 죽도라 이른다. … 왜인은 우산도를 송도라 일컫는다”고 명시해 놨다. 고종은 이 같은 문헌을 토대로 이규원에게 두 눈으로 독도를 확인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이규원은 4월부터 5월까지 2개월간 진행된 탐사 기간 동안 궂은 날씨로 인해 결국 독도를 발견하진 못했다. 실제로 동북아역사재단에서 2008년 7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울릉도에서 독도를 관측한 결과 55일만 독도가 발견됐다. 봄과 초여름에는 거의 보이지 않고, 맑은 날씨가 지속되는 9∼11월에 주로 실측이 가능했다. 일본 학계에선 이규원의 이 같은 답사 결과를 독도가 조선의 관심 밖이었다는 근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 소장은 “이규원의 답사는 일본의 주장과 정반대로 고종과 조선의 조정에서 독도의 존재를 확신하고, 독도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한 행동이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고종은 이규원의 답사 후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통해 울릉도·죽도·독도를 울릉군으로 격상시켜 우리의 영토임을 확실히 하고 실효 지배를 위한 정책에 나섰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화려했던 러시아 황족과 귀족들의 문화를 한자리에서 보니 당시 러시아로 여행한 듯한 기분이 드네요.”(이정화) “아름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시대 민중이 겪었던 아픔이 전해졌습니다.”(강필석)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예르미타시 박물관전, 겨울궁전에서 온 프랑스 미술’ 특별전을 3일 관람한 뮤지컬 배우 이정화와 강필석은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국내 초연 후 6년 만에 돌아온 뮤지컬 ‘닥터 지바고’에서 극단적인 혁명가 파샤(강필석 역)와 지바고의 부인 토냐(이정화 역)로 출연 중이다.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이 작품은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을 배경으로 의사이자 시인이었던 유리 지바고와 주변 인물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렸다. 두 배우가 이번 전시회를 찾은 건 ‘러시아 문화’의 정수를 체험하기 위해서다. 러시아 예르미타시 박물관은 300만여 점에 이르는 소장품을 자랑하는 세계 3대 박물관 가운데 하나다. 1762년 완공돼 1917년 러시아혁명 이전까지 황제의 거처로 사용되며 ‘겨울궁전’으로 불렸다. 특히 프랑스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프랑스 미술을 보유하고 있다. 혁명가와 몰락한 부르주아 가문의 여성 역을 각각 맡은 두 배우는 작품을 보는 관점 역시 달랐다. 이정화는 이번 전시회의 대표작인 ‘안나 오볼렌스카야’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부르주아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이 몰락해 불우한 환경에서 살아야 했던 토냐와 안나의 삶이 너무나 비슷하다”며 “섬세한 붓 터치가 주는 특유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강필석은 “화려한 작품이 대부분인 가운데 서민을 주인공으로 그린 한두 작품이 눈에 띄었다”며 “미술 작품을 수집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는데 이를 위해 세금을 낸 평범한 시민들의 아픔이 떠올랐다”고 밝혔다. 혁명가 역을 맡은 배우다운 소감이었다. 전시회에서는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1729∼1796)가 수집한 회화부터 20세기 초 러시아 기업가들이 구입한 인상주의 작품까지 모두 89점의 프랑스 회화, 조각, 소묘 등을 만날 수 있다. 김승익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러시아 귀족의 취향과 문화적 분위기, 흔적들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4월 15일까지. 성인 6000원, 대학생·중고교생 5500원, 초등학생 5000원. 02-1688-0361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강원 영월군의 흥녕선원지 건물터에서 금동반가사유상(사진)이 출토됐다. 영월군과 강원문화재연구소는 발굴조사 중인 영월의 흥녕선원지 절터(강원도 기념물 제6호)에서 지난달 말 높이 15cm, 폭 5cm 크기의 금동반가사유상을 발견했다고 3일 밝혔다. 강원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국내에서 금동반가사유상의 출처가 분명한 첫 사례”라며 “양식으로 볼 때 7∼8세기 유물로 보이지만, 출토된 건물지가 9∼10세기 유적이어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금동반가사유상은 삼면이 돌출된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고, 얼굴은 잔잔한 미소를 띠며 상의는 걸치지 않았다. 삼국시대 불상 중 걸작으로 평가되는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은 1920년대 경북 경주에서 발견됐다고 알려졌지만 출토지가 정확하지 않고,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도 출토지가 명확하지 않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강원 영월군의 흥녕선원지 건물터에서 금동반가사유상이 출토됐다. 강원 영월군과 강원문화재연구소는 발굴조사 중인 영월의 흥녕선원지 절터(강원도 기념물 제6호)에서 지난달 말 높이 15cm, 폭 5cm 크기의 금동반가사유상을 발견했다고 3일 밝혔다. 강원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국내에서 금동반가사유상의 출처가 분명한 첫 사례”라며 “불상의 제작 시기는 양식으로 볼 때 7~8세기 유물로 보이지만, 출토된 건물지가 9~10세기 유적이어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금동반가사유상은 삼면이 돌출된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고, 얼굴은 잔잔한 미소를 띠며 상의는 걸치지 않았다. 크기로 볼 때 사찰에 봉안된 게 아니라 휴대한 것으로 추정된다. 금동반가사유상은 청동 표면에 도금한 반가사유상을 뜻한다. 반가사유상은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겨 있는 자세를 취하는 불상이다. 인도 간다라 지방에서 처음 출현했지만 고대 한국과 일본에서 널리 유행했다. 삼국시대 불상 중 걸작으로 평가되는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은 1920년대 경북 경주에서 발견됐다고 알려졌지만 출토지가 정확하지 않고,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도 출토지가 명확하지 않다. 자장율사(590~658)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흥녕선원지는 선종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사자산문파의 본거지다. 통일 신라시대의 징효대사(826~900)가 크게 발전시켰다. 흥녕선원지 인근에 재건된 법흥사에 보물 제612호로 지정된 징효대사 탑비와 승탑이 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부처의 탄생을 기념하는 우리나라 불교 전통행사인 연등회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한다. 문화재청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22호인 ‘연등회(燃燈會)’를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하기 위한 신청서를 유네스코 본부에 제출했다고 2일 밝혔다. 연등회는 석가모니의 탄생을 축하하고, 진리의 빛으로 세상을 비춰 차별 없고 풍요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매년 음력 4월 8일 부처님오신날에 열린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경문왕 6년(866년)과 진성여왕 4년(890년)에 ‘황룡사에 가서 연등을 보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고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임을 알 수 있다. 연등회는 2012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됐고, 이후 연등회 보존위원회가 전통 등 제작 강습회와 국제학술대회 등을 열며 보존에 힘써 왔다. 연등회는 유네스코 사무국 검토와 평가기구 심사를 거쳐 2020년 11월 열리는 제15차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에서 등재 여부를 결정한다. 우리나라는 2001년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을 시작으로 2016년 등재한 ‘제주 해녀문화’까지 인류무형문화유산 19건을 보유하고 있다. 연등회가 등재되면 한국의 20번째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된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일제가 1913년 동경제국대학(현 도쿄대)으로 강제로 가져갔다가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 때 소실됐다고 알려졌던 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 한 책이 100여 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지난해 11월 국내 한 문화재 관련 사업자가 일본 경매에서 낙찰받은 ‘효종실록’ 1책(권20·사진)을 지난달 15일 다시 국내 경매를 통해 구입했다고 2일 밝혔다. 이 실록은 국보 151-3호로 지정된 ‘오대산사고본’의 일부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있는 ‘정족산사고본’(국보 제151-1호), 부산 국가기록원(국보 151-2호)이 소장한 책과 동일한 판본이다. 편찬 시기는 1661년(현종 2년)이다. 강원 평창군 오대산 사고에 보관돼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788책이었으나, 간토 대지진 이후 74책만 전해지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2일부터 6월 24일까지 상설전시실에서 ‘효종실록’을 공개한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2009년 11월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교도소에서 37세의 젊은 변호사였던 세르게이 마그니츠키가 사망한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독방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한 직후였다. 모스크바 최고의 조세 전문 변호사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러시아 내무부가 불법으로 진행한 세금 환급 프로젝트를 국제사회에 폭로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헛된 죽음은 아니었다. 마그니츠키의 변호사와 함께 일했던 자산운용사 허미티지 캐피털의 최고경영자(CEO)인 저자는 동료가 죽게 된 과정과 러시아 정부의 비리를 담은 동영상 ‘러시아 언터처블’을 유튜브에 올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전 세계의 여론이 러시아에 등을 돌렸다. 결국 2012년 12월 미국 상원은 ‘마그니츠키 법안’을 통과시켰다. 마그니츠키의 죽음에 연관된 러시아인들의 미국 비자 발급을 거부하고 이들의 미국 내 자산 동결 등이 담긴 법안이다. 책은 한때 러시아의 최대 외국인 투자자에서 러시아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운동가로 변신한 저자의 20여 년간의 기록이다.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러시아의 각종 부정부패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1인 독재체제 이후 벌어진 의문의 암살 사건들을 담아낸 논픽션이다. 저자는 1990년대 초반 미국 월가의 한 투자은행(IB)에서 우연히 동유럽 투자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며 러시아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다. 그가 러시아에서 찾아낸 투자 묘수는 ‘반(反) 올리가르히(신흥재벌)’ 전략이었다. 러시아 최대 에너지 기업인 가스프롬의 지분을 매입한 뒤 이 회사 경영진의 비리를 폭로했다. 단기적으로는 손해지만 장기적으로는 투명하고, 정상적인 기업 운영을 가능케 했다. 그는 가스프롬에서만 1000%가 넘는 수익을 올리며 수조 원을 소유한 자산가로 거듭났다. 푸틴 대통령도 그의 든든한 조력자였다. 2000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러시아를 거머쥔 푸틴은 권력 장악을 위해 자신에게 걸림돌이었던 올리가르히를 제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의 밀월은 오래가지 못했다. 러시아의 정치와 경제 권력을 확실히 장악한 푸틴에게 저자의 폭로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러시아 정부는 2005년 저자의 비자를 강제로 빼앗고, 다시는 러시아 땅을 밟지 못하게 한다. 저자가 러시아에 세웠던 사업체들은 줄줄이 정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와 함께 일했던 러시아인들은 의문의 죽음을 맞거나 고향을 떠나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최근 영국 런던에서 반러시아 인사들의 의문스러운 죽음이 잇따르고 있다. 영국 정부는 러시아 정부의 비밀공작이라며 외교관 2명을 추방하는 등 국제사회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러시아는 한반도와 뗄 수 없는 국가라는 점에서 그들의 시스템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한 지침서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1948년 4월 3일. 14세 소녀 김인근에게 가혹한 시련이 찾아왔다. 완장을 찬 청년들이 논두렁에서 어머니와 올케, 친언니를 총으로 쏴 버렸다. 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동네 저수지에서 돌아가셨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을까. 당시 저수지 물이 붉게 변해 버렸다. 김인근 할머니는 60년이 지난 2008년에야 미술치료사에게 이 같은 기억을 털어놨다.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 입구에는 김 할머니가 미술치료 과정에서 그린 그림과 글이 전시돼 있다. 할머니의 서툰 그림을 보고 있으면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오롯이 전해진다. 올해 70주년을 맞는 ‘제주도4·3사건’을 기리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특별전 ‘제주 4·3 이젠 우리의 역사’가 30일부터 열린다. 4·3사건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지난해 8월 행정안전부 자료에 따르면 1만890명이 목숨을 잃었고, 행방불명자도 4046명이나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 현대사에서 희생자 수가 6·25전쟁 다음으로 많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서명이 들어간 계엄선포 문건 원본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당시엔 계엄령이 군대가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으로 여겨지면서 애꿎은 민간인의 목숨을 수없이 앗아갔다. 계엄 문건을 포함해 마산형무소 수용자 신분장 등 국가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4·3사건 관련 기록물 9건 원본도 처음으로 선보인다. 주진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은 “4·3사건은 여전히 제주도민의 오랜 상처와 아픔으로 남아 있지만, 조금이나마 화해와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전시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한 나라의 공주가 성추문에 휩싸인다. 실체는 없고, 소문만 있을 뿐이다. 하루아침에 정조를 지키지 못한 여인으로 낙인찍힌 공주는 궁에서 쫓겨난다. 헛소문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여성이 기댄 것은 한 남성. 결국 그와 결혼했지만 알고 보니 모두 남편이 악의적으로 꾸며낸 짓이라면? 한국 최초의 4구체 향가로 평가받는 ‘서동요’의 내용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전이지만 내용만 보면 주인공인 서동(薯童·백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신라 선화 공주에게 가한 성폭력적 서사가 담겨 있다. 이처럼 여성을 억압하는 고전 작품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열풍이 일고 있는 요즘, 한국 사회는 성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학계에서는 성불평등 소재를 다루고 있는 고전 문학작품들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해 새로운 가치관에 맞게 다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지하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최근 한국문학교육학회와 반교어문학회의 공동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가부장적 고전 텍스트에 대한 문학교육현장의 고민’ 논문은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교수는 “대다수 교과서에 수록된 대표적인 고전 작품들을 현재의 기준에서 살펴보면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맞지 않는 것들이 많다”며 “고전이라는 것이 단지 오래됐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대를 가로지르는 가치를 지닌 작품이라는 점에서 재검토할 만한 고전들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여성 영웅 작품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박씨전’을 보자. 주인공 박 씨는 비범한 능력으로 병자호란 중에 적장을 무찌른 호국 영웅이다. 그러나 정작 포상을 받는 이는 남편과 시댁이고, 박 씨는 외모의 변화에 의해 평가가 달라지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 교수는 “여성의 외모를 중시하는 분위기와 능력이 뛰어남에도 인정받지 못하는 ‘유리천장’ 등 현재 우리 사회에도 함의하는 바가 큰 작품”이라며 “고전이라고 무조건 가르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이들 작품이 안고 있는 한계 등을 함께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이 논란 끝에 4월 11일로 수정될 가능성이 커졌다. 현재 정부는 임정 수립일을 4월 13일로 기념하고 있지만 학계에선 “임정의 진짜 수립일은 4월 11일”이라며 정부에 날짜 변경을 강력히 요구해 왔다. 26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기념일 언제인가’라는 주제로 열린 학술 심포지엄에 참가한 심덕섭 보훈처 차장은 “우리 헌법에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지만 정작 임정의 수립일 논란은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며 “학계의 전문적인 의견을 들어 임정의 생일을 확정해 논란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 심포지엄은 국가보훈처가 주최하고, 독립기념관이 주관했다. 이날 심 차장은 본보와 만난 자리에서 “내년도 임정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학계의 수립일 변경 요구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며 “4월 11일이 이견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면 행정안전부 등과 협의해 날짜 변경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심포지엄에선 임정 수립일이 4월 11일임을 알려주는 사료가 추가로 공개됐다. 임정이 1922년 만든 달력인 ‘대한민국4년역서(大韓民國4年曆書)’를 보면 3월 1일 ‘독립선언일’, 10월 3일 ‘건국기원절’(개천절)과 함께 4월 11일이 ‘헌법발포일’이라는 이름으로 국경일로 표시돼 있다. 실제로 그해 개최된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김인준 등이 “헌법을 발포한 4월 11일을 국경일로 정하자”는 제의안을 제출했었다. 당시에는 이미 4월 11일이 기념일로 지정돼 있어 국경일로 지정하는 안은 부결됐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이 달력은 4월 11일이 국경일로 승격될 것을 예상하고 미리 인쇄한 것으로 보인다”며 “국경일이든 기념일이든 성격에 관계없이 4월 11일이 임정 수립 날짜라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고 있다”고 말했다. 광복 이후 국내로 귀환한 임정 요원들이 1946년과 1947년 4월 11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입헌기념식’ 행사를 진행한 후 찍은 기념사진도 공개됐다. 입헌기념식은 임정의 헌법을 제정·공포한 것을 기념한 행사였다. 당시 창덕궁은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비상국민회의’ 본부가 있던 곳이다. 그동안 정부는 ‘조선민족운동연감’ 자료를 근거로 임정 수립을 4월 13일로 정해오고 있다. 하지만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서 작성한 ‘조선민족운동연감’은 임정의 ‘한일관계사 자료집’에서 잘못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라며 “4월 13일은 착오에 착오가 거듭돼 나온 설로, 아무런 사료적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문화재청은 27일 조선시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왕과 왕비의 명복을 빌던 원당(願堂)사찰 역할을 한 강원 속초시 ‘신흥사 극락보전(極樂寶殿·사진)’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신흥사는 1644년(조선 인조 22년)에 재건된 사찰이다.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多包式·지붕 하중을 받치는 구조물인 공포가 여러 개) 팔작지붕 건물이다. 기단에는 모란과 사자 문양이 있고, 계단 난간에는 원을 3개로 나눈 삼태극과 귀면(鬼面), 용두 문양 조각이 있다. 사찰과 불법을 수호하는 귀면이나 궁궐과 종묘 등에 쓰이는 삼태극을 사찰 전각 계단에 장식으로 사용한 경우는 매우 희귀하다. 극락보전은 세부 장식과 공포 형식이 우수하고 보존상태 또한 뛰어나 역사적·건축적·예술적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화재청은 30일간의 예고 기간에 의견을 수렴한 뒤 심의를 거쳐 보물로 지정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조선의 13대 왕 명종(1534∼1567)의 태실이 보물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충남유형문화재인 ‘서산 명종대왕 태실 및 비’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976호로 지정했다고 26일 밝혔다. 태실(胎室)은 조선 왕실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태를 항아리에 봉안한 뒤 조성한 시설이다. 조선 태실 유적 중에는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이 사적 제444호로 지정됐지만 보물로 지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538년(조선 중종 33년) 건립 당시 태실과 함께 ‘대군춘령아기씨태실비(大君椿齡阿只氏胎室碑)’ 1기가 세워졌다. 이후 명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1546년 ‘주상전하태실비(主上殿下胎室碑)’ 1기가 만들어졌고, 1711년 같은 이름의 비석 1기가 추가로 제작되면서 현재까지 이어오는 태실 1기와 비석 3기가 완성됐다. 태실은 팔각형의 난간석 중앙에 놓여 있다. 태실에 봉안돼 있던 태항아리와 망자의 인적 사항을 적은 지석(誌石)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경 경기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조사를 통해 수습돼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명종대왕 태실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상세하게 남아 있고 주변 환경도 비교적 잘 보존돼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밝혔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영국 작가 조지 버나드 쇼(1856∼1950)와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의 묘비에는 이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두 서양 작가의 묘비명은 20세기에 쓰였지만 동양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묘비명을 스스로 짓는 전통이 있었다. 한문학자인 저자를 따라 우리 선조들의 자찬묘비(自撰墓碑) 58편을 안내한다. 고려시대의 조촐한 비석에서 퇴계 이황(1501∼1570) 등 조선의 대학자가 쓴 묘비를 거쳐 구한말 이국땅에 묻힌 지식인의 묘지까지. 이들의 묘비명을 통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태어나 크게 어리석었고 자라서는 병치레가 많았다. 배움은 추구할수록 아득해지고 벼슬은 사양할수록 얽어 들었다.” 퇴계가 죽기 며칠 전 쓴 자명(自銘)이란 글의 일부다. ‘조선의 지성’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학문적 성취를 이룬 그였지만 객관적 시선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엄정한 선비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너는 말하지, 나는 아노라 사서와 육경을. 하지만 행한 바를 살펴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삶의 반성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오랜 유배 기간 등 주변의 조건을 원망하는 대신 내면의 성찰을 강조한 대학자의 깨달음을 느낄 수 있다. 개성 넘치는 선비의 삶을 살펴볼 수도 있다. 상고당 김광수(1696∼?)는 자신의 묘비명에 “옛 그릇과 글씨와 그림, 붓과 연적과 먹에 대해서는 진위를 감별해 작은 착오도 없었다”고 적었다. 실제로 그는 명문가 출신임에도 벼슬을 버리고, 18세기 조선의 대표 컬렉터로 이름을 날리다 궁핍하게 생을 마감했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신라 지배계층 무덤인 대구 수성구 가천동 고분에서 전쟁 전리품으로 얻은 적장의 머리를 함께 묻는 장례문화가 행해졌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그동안 순장(殉葬) 풍습을 보여주는 무덤은 다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머리를 함께 묻는 독특한 풍습은 지금까지 알려진 적이 없다. 신석원 전 삼한문화재연구원 연구원은 최근 한국상고학보에 실은 논문 ‘대구 가천동 유적 출토 인골의 재검토’에서 가천동 고분군 50호 돌덧널무덤(석곽묘)에 대한 새로운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가천동 유적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5, 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곽묘 260기와 돌방무덤(석실묘) 7기가 발견됐다. 출(出)자형 금동관을 비롯해 귀걸이, 반지 등 장신구와 토기·철기류 등 유물 3000여 점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상당수 무덤에서 피장자(被葬者) 인골이 함께 출토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추가 발굴 조사 과정에서 뒤늦게 수습된 인골이 이전에 발굴된 것과 섞이면서 인골 주인을 재확인하는 작업을 최근 진행했다. 눈에 띄는 결과는 1명이 묻힌 것으로 알려졌던 50호 고분에서 무덤 주인이 묻힌 주곽(主槨)과 부장품을 묻는 부곽(副槨)에서 나온 인골이 다른 인물이란 점이 확인됐다. 1998년 현장 발굴에서 수습한 인골은 두개골편(머리뼈)과 하악골편(턱뼈) 및 치아, 우측 대퇴골편 등이었다. 하지만 정밀 분석한 결과 두개골편은 주곽이 아닌 부곽에서 발견돼 무덤 주인과는 다른 인물의 뼈였다. 이 뼈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답은 부곽의 크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길이 65cm, 너비 약 85cm, 깊이 30∼40cm로 시신이 들어가기엔 턱없이 작은 규모다. 신 전 연구원은 “시신을 구겨 넣었다 하더라도 두개골편이 부곽의 중앙부 근처에서 발견된 점을 볼 때 시신을 매장한 순장으로 보긴 힘들다”고 밝혔다. 또 두개골편 형질 분석 결과 남성으로 밝혀졌고 주곽에서 26.5cm짜리 소도(小刀)도 나왔다. 신 전 연구원은 “부곽 머리뼈가 남성인 점으로 미뤄볼 때 전쟁 전리품 성격인 적장 머리를 함께 묻은 독특한 장례문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며 “비슷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유사 사례를 추가 발굴해 인신공희(人身供犧) 같은 고대 장례문화를 활발히 연구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신라 지배계층 무덤인 대구 수성구 가천동 고분에서 전쟁 전리품으로 얻은 적장 머리를 함께 묻는 장례 문화가 행해졌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그동안 순장(殉葬) 풍습을 보여주는 무덤은 다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머리를 함께 묻는 독특한 풍습은 지금까지 알려진 적이 없다. 신석원 전 삼한문화재연구원 연구원은 최근 한국상고학보에 실은 논문 ‘대구 가천동 유적 출토 인골의 재검토’에서 가천동 고분군 50호 돌덧널무덤(석곽묘)에 대한 새로운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가천동 유적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3차례에 걸쳐 대규모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5~6세기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곽묘 260기와 돌방무덤(석실묘) 7기가 발견됐다. 출(出)자형 금동관을 비롯해 귀걸이, 반지 등 장신구와 토기·철기 류 등 유물 3000여 점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상당수 무덤에서 피장자(被葬者) 인골이 함께 출토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추가 발굴 조사과정에서 뒤늦게 수습된 인골이 이전에 발굴된 것과 섞이면서 인골 주인을 재확인하는 작업을 최근 진행했다. 눈에 띄는 결과는, 1명이 묻힌 것으로 알려졌던 50호 고분에서 무덤 주인이 묻힌 주곽(主槨)과 부장품을 묻는 부곽(副槨)에서 나온 인골이 다른 인물이란 점이 확인됐다. 1998년 현장 발굴에서 수습한 인골은 두개골편(머리뼈)과 하악골편(턱뼈) 및 치아, 우측 대퇴골편 등이었다. 하지만 정밀 분석했더니 두개골편은 주곽이 아닌 부곽에서 발견돼 무덤 주인과는 다른 인물의 뼈였다. 이 뼈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답은 부곽의 크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길이 65㎝, 너비 약 85㎝ 깊이 30~40㎝로 시체가 들어가기엔 턱없이 작은 규모다. 신 전 연구원은 “시체를 구겨 넣었다 하더라도 두개골편이 부곽의 중앙부 근처에서 발견된 점을 볼 때 시체를 매장한 순장으로 보긴 힘들다”고 밝혔다. 또 두개골편 형질 분석 결과 남성으로 밝혀졌고, 주곽에서 26.5㎝짜리 소도(小刀)도 나왔다. 신 전 연구원은 “부곽 머리뼈가 남성인 점을 미뤄볼 때, 전쟁 전리품 성격인 적장 머리를 함께 묻은 독특한 장례문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며 “비슷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유사 사례를 추가 발굴해 인신공희(人身供犧)와 같은 고대 장례문화를 활발히 연구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백범 김구를 암살하라!” 일제강점기 백범 김구(1876~1949)를 암살하기 위해 일제 당국이 벌인 비밀 공작을 담은 문서가 발견됐다.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한 일제 경찰 히토스키 도헤이(一杉藤平) 사무관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게 보낸 ‘대김구특종공작(對金九特種工作)’ 보고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일제는 1935년부터 1938년까지 3차례에 걸쳐 백범 암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최근 이 문건을 일본 야마구치현 문서관에서 확인한 윤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이를 분석한 논문 ‘일제의 김구 암살 공작과 밀정’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학술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에 게재할 예정이다. ○ 밀정 활용해 공작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 의거 이후 일제는 백범을 체포하는 데 혈안이었다. 일본 외무성과 조선총독부, 상하이주둔군 사령부 등 3곳의 합작으로 당시 독립운동가 중 가장 높은 현상금인 60만 원을 내걸며 그야말로 총력전을 펼쳤다. 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밀정이었다. 1933년 상하이 파견 경찰 나카노 가즈치(中野勝次)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공산주의자 오대근을 포섭한다. 오대근은 1920년대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28년 상하이로 건너갔다. 하지만 중국 현지의 공산주의 세력이 궤멸하며 일제의 첩자로 변절했다. 당시 백범은 난징으로 이동해 장제스와 회담한 후 중앙육군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독립운동 세력 기반을 확대하고 있었다. 1935년 1월 이 소식을 입수한 일제는 오대근을 난징에 급파해 백범을 암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행히 백범 측에서 이 정보를 입수했고, 오대근 등 일제의 행동원들은 중국 관헌에게 붙잡혀 처형됐다. 이후 나카노는 조선으로 돌아와 충청북도 경무부장을 지냈다. 조선총독부는 나카노의 후임으로 히토스키 사무관을 파견한다. 히토스키는 1923년 고등고시 사법과와 행정과에 동시 합격한 후 판사를 거쳐 1931년부터 경찰이 된 인물로, 당시 조선총독부의 최고 엘리트 관료였다. 히토스키의 전략은 치밀했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 밀정 위혜림(본명 위수덕)을 통해 백범과 갈등을 빚고 있던 무정부주의 세력을 이간질해 암살시킨다는 계획이었다. 1935년 8월 이들이 택한 무정부주의자는 정화암과 김오연이었다. 히토스키는 보고서에서 “김오연을 체포한 후 백범의 측근인 안공근이 꾸민 짓으로 부추긴다. 이를 정화암에게 알려 반감을 이용해 백범에게 격발한다”는 계획을 총독부에 보고했다. 하지만 정화암이 이 계략을 눈치 챘다. 정화암은 오히려 허위 정보를 흘리고, 1936년 10월 활동비 300원을 일제에게서 뜯어내는 등 히토스키의 계획을 보기 좋게 틀어지게 만들었다. ○ 일제 계략으로 백범 중상 1938년 5월 7일 한국국민당의 백범, 한국독립당의 조소앙, 조선혁명당의 이청천 등이 3당 합당을 논의하기 위해 중국 창사의 조선혁명당 당사인 난무팅(남목청)에 모였다. 이날 조선혁명당원 이운환이 회의장으로 들이닥쳐 권총을 난사했다. 총격으로 백범은 중상을 입었고, 이청천 역시 부상을 입는 등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남목청 사건’은 합당 운동에 반대한 조선혁명당원이 일으킨 독립운동 세력 간 파벌 다툼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당시 공범으로 지목된 박창세가 바로 일제의 밀정이었다. 히토스키는 “박창세는 백범의 특무대장이 되어 백범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적당한 인물이다. 그의 아들이 조선에 돌아가기를 희망하고 있으므로 총영사관과 협력해 귀국의 편의를 주고, 회유의 방법으로 삼으려 한다”고 보고서에 기록했다. 1936년 불행히도 그의 계획이 모두 실현돼 박창세의 아들은 조선으로 귀국했고, 박창세가 이운환 등을 꾀어내 백범 암살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하지만 백범은 암살 위협을 이겨내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될 때까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윤 연구교수는 “일제의 백범 암살 공작은 모두 실패로 끝났지만 중국 관내 독립운동 세력의 내부 분열과 이를 획책했던 일제의 비열한 공작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며 “밀정 연구의 특성상 아직 밝혀지지 않은 자료가 많기 때문에 앞으로도 다양한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