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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자란 기린 수컷은 키가 5m 정도 된다. 평균 목 길이는 약 2m, 무게는 130∼180kg인데 머리만 약 30kg이라고 한다. 수컷끼리는 이 긴 목을 서로 엇갈려 세게 부딪히는 네킹(necking)을 통해 우열을 가린다. 이 책은 ‘(기린의) 몸속은 틀림없이 재미있는 수수께끼로 가득할 거야’라고 믿은 일본 도쿄(東京)대 1학년 여학생이 기린의 ‘여덟 번째 목뼈(경추·頸椎)’를 찾아내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았다. 1989년생인 ‘기린 박사’ 저자는 18세 때 ‘평생 즐거운 일, 힘들어도 계속 즐기며 좋아할 수 있는 것’을 기린에게서 찾았다. 동물원에서 그 동물을 몇 시간이고 볼 수 있었던 어렸을 적 자신을 떠올린 것이다. 기린을 연구하고 싶다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 그에게 운명같이 길이 열렸다. 기린 연구의 권위자인 스승은 ‘당연히 연구할 수 있다’며 방향을 제시해줬고, 전국의 여러 동물원에서는 기린 사체를 해부할 기회를 잇달아 제공했다. 크리스마스도 설날도 상관없이 죽은 기린이 왔다고 하면 어김없이 학교 종합연구박물관 작업실이나 인근 박물관으로 달려가 해부용 검은 운동복을 입고 메스를 들었다. 첫 해부 때 ‘근막을 보고 당황해 제대로 해부도 못 하고 침울해’하던 저자는 해부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기린이 좋아지고 연구 주제도 잡게 된다. 기린이 목을 움직일 때 7개의 경추뿐만 아니라 제1흉추(胸椎·등뼈)도 움직인다는 것을 발견한 그의 논문은 2016년 2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과학학회인 영국왕립협회 학술지에 발표된다. 연구가 결실을 맺을 때까지 저자가 분명히 겪었을 난관들은 투박하고 무구한 글 속으로 살그머니 녹아든다. ‘그저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것을 추구하고 싶다는 마음의 하나’로 연구의 길로 들어섰다는 그의 ‘아이 같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다 읽고 나면 담백한 오차즈케를 한 그릇 먹은 느낌이 든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생명공학이 맞춤아기를 탄생시키고, 빈부격차를 유례없는 수준으로 벌릴 때 인간 사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저서 ‘호모데우스’(2017년)에서 정보공학과 생명공학이 융합해 발생하는 이런 질문들에 세계 어느 종교도 답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공자의 ‘논어(論語)’를 슬쩍 포함시켰다. 종교의 경지인 논어도 앞으로 펼쳐질 세상을 전망하고 해석할 수 없다는 얘기다. 다시 말하면 ‘한물갔다’는 것. 그러나 깊어가는 가을, 국내에서는 다양한 독자층을 겨냥한 논어 5종이 잇달아 나왔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한 때도 있었지만 논어는 동양 고전 가운데 압도적으로 많이 팔리는 스테디셀러다. 김형찬 고려대 철학과 교수(57)는 20여 년 전 냈던 역주본 논어의 개정판을 최근 현암사에서 출간했다. 논어를 100번 넘게 읽었다는 김 교수는 개정판을 위해 다시 찬찬히 읽으면서 “내 생각인 줄 알고 있던 많은 것들이 공자의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만큼 우리 삶에 논어가 익숙하고, 당연하게 흡수돼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중국철학자 기무라 에이이치(1906∼1981)의 ‘공자와 논어’도 에코리브르에서 번역돼 나왔다. 이 책은 논어 내용뿐만 아니라 춘추시대 말인 기원전 6세기경 태어난 공자가 청·장년기를 거쳐 노(魯)나라를 떠나 천하를 주유하다가 만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제자를 양성하기까지 그의 삶을 치밀하게 재구성했다. ‘우리말 속뜻 논어’는 논어에 처음 입문하는 독자를 위해 가급적 쉬운 우리말로 옮겼다는 특징이 있다. 논어 원문도 실었지만 우리말 부분만 읽어도 독자 스스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논어 20편 498장을 대화와 진술, 그리고 지시문으로 엮어 한 편의 드라마 대본처럼 읽히도록 구성했다. 어린이나 청소년이 논어를 더 친숙하게 접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의 ‘만화로 즐기는 논어’(스타북스)도 출간됐다. ‘Smart 論語 (中)―영어로 공부하는 논어’(㈜스마트논어)는 영어 번역을 덧붙였다. 정보통신기술(ICT) 산업 초창기인 1990년대 말 하나로텔레콤 회장을 지낸 신윤식 전 체신부 차관(84)이 펴냈다. 신 전 차관은 “4차 산업혁명 시대 핵심은 인공지능(AI)이다. AI의 ‘인성’이 제대로 갖춰지려면 미래 세대의 인성 혁명이 필요한데, 가장 좋은 교재는 논어”라고 출간 이유를 밝혔다. 왜 이처럼 논어는 계속 읽히는 것일까. 김 교수는 “공자 사상의 핵심은 사람(人=인)이 둘(二)이라는 ‘인(仁)’인데 이는 ‘배려’라고 할 수 있다”며 “둘 이상이 같이 살아갈 때 어떻게 하면 서로 배려하고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논어는 일깨워 준다”고 말했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간을 이식받지 못하면 목숨이 위험한 어머니에게 아들이 자신의 간 일부를 떼어드린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정말 ‘당연한’ 일인지 생각해 보자는 책이 있다. ‘나는 생존기증자의 아내입니다’(생각생각). 지은이 이경은 씨(33·사진)의 남편은 지난해 이맘때 간경변이 심한 어머니를 위해 자기 간의 70%를 떼어냈다. 그러나 수술 시간 직전까지 이 씨는 남편이 수술동의서에 서명하는 게 맞는지 고민했다. ‘과연 남편은 안전할까.’ ‘수술 후 남편 삶의 질은 전과 같을까.’ “남편은 (기증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당연하지’ 하는 분위기가 주변에 짙게 깔리면 기증 후보자는 아무 말도 못 해요. 정말 수술하고 싶은지 물어봐주는 사람은 병원에도 없고, 가족 안에는 더 없죠.” 그의 남편을 수술한 병원에서는 “안전하다”는 말 말고는 시스템 차원에서 기증자의 안전과 사후 건강에 대한 책임 있는 설명이 없었다. 관심은 온통 수혜자에게 쏠려 기증자는 소외되는 듯했다. 정말 안전한지 근거를 보여 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이 씨에게 병원 측은 ‘용기와 희생’을 말했다. 책은 이렇게 썼다. ‘현재 장기이식 시스템은 완벽한 이타심을 발휘하거나 철저한 이기심을 드러내는 두 갈래 길만을 제안한다.’ 19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이 씨는 “책을 쓰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일반화하는 건 아닌가, 그래서 이 책이 소용없어지는 건 아닌가’ 두려웠다”고 했다. 그러나 근거 없는 불안도, 그만의 유별남도 아니었다. “기증자 커뮤니티나, 아주 드물지만 기증자 연구에 따르면 절반가량의 기증자가 불안감, 우울감, 알코올의존증 같은 정신적 어려움을 겪었다고 해요. 면역력 저하, 피로감, 통증 등 육체적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고요.” 많은 기증자는 수술 이후 삶에 대한 불확실한 전망보다 가족에 대한 죄책감을 더 크게 느낀다. 그렇게 내린 결정이 기증자의 진정한 자율적 선택이었는지는 병원과 언론이 그려내는 ‘미담’에 묻힌다. “모든 기증자의 자발성을 의심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여전히 ‘정신적 타격이 올 수 있고, 회복이 완전히 안 될 수도 있으며 면역력이 떨어질 수 있다’와 같은 정보를 제공하고 ‘수술 못 받겠다고 해도 괜찮으니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라’고 독려하는 시스템은 필요합니다.” 수술을 못 받겠다고 해도 비난받지 않는 분위기를 조성해 기증자의 자율성이 충분히 발현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얘기다. 미국 일본 등에서는 병원과는 독립적인 기구가 이식 관련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 자율적 선택을 시스템으로 뒷받침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한국에서 생체 이식은 모두 2868건 이뤄졌어요. 매년 늘고 있어서 (장기 이식이) 남의 일이라는 보장은 없어요. 제 책을 읽고 ‘별문제 없다는데’ 하는 방관자적 태도가 아닌, 기증자의 자발적 결정을 보장하라는 목소리에 힘을 보태주셨으면 좋겠어요.”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세제가 필요 없이 세탁기에 넣기만 하면 빨래가 된다는 ‘세탁볼’은 시중에서 몇만 원 한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의류는 세제 없이 따듯한 물에 담그기만 해도 어느 정도 세탁되며 기름 성분의 때가 없는 먼지, 흙, 땀 등은 물에 씻겨 나간다. … (세탁볼 대신) 차라리 골프공을 이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한다. 헛소리라는 얘기다. ‘만들어진 신’의 리처드 도킨스와 같이 유사과학, 미신, 창조론 등에 과학으로 맞서는 미국의 과학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스스로 회의주의자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회의주의는 무조건적인 의심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라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열린 마음과 너무 쉽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을 잃을 정도로 열린 마음이 되는 것” 사이의 균형이다. 이 책은 그가 150년 넘는 역사를 지닌 미국 대표 과학 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2001년부터 6년 3개월간 쓴 75편의 에세이를 과학, 회의주의, 유사과학과 헛소리, 초자연적 현상, 인간의 본성 등 10개 주제로 나눠 엮었다. 최첨단 과학기술의 산물인 새 미디어가 음모론과 유언비어를 퍼 나르는 역설적인 세상에서 떼로 뭉쳐 집단지성을 우롱하며 이성을 조롱하는 일이 ‘힙’한 것인 양 퍼지는 요즘, 이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잡아봄 직하다. ‘집단이 지혜롭기 위해서는 자율적이고, 분산적이며, 생각이 다양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곱씹을수록 깨달음이 온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9세기 초 일본 주류 씨족의 약 26%가 한국계였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삼국시대를 전후해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른바 도래인(渡來人)의 후예 상당수가 천황제 국가 지배체제의 한 축을 이룰 정도로 융합된 존재였다는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최근 펴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역주본(譯註本)’(사진)에 따르면 당시 사실상 일본 왕권 및 지배계층을 구성한 씨족 1182씨(氏) 가운데 313씨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전쟁, 권력투쟁, 자연재해 등에 따라 신천지를 찾아 이동했거나, 대(對)일본 외교 및 정치적 목적으로 파견돼 정주하게 된 한국계의 후손이 대부분이다. 신찬성씨록은 헤이안(平安)시대를 연 간무(桓武·재위 781∼806) 천황이 799년 편찬을 명령해 815년 완성된 계보서다. 옮긴 수도인 헤이안쿄(교토·京都)와 기내(畿內·왕궁 중심의 특별구역으로 지금의 수도권)에 거주하는 씨족 1182씨의 계보를 기록했다. 8세기 말 나라(奈良)시대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헤이안 천도를 단행한 간무천황이 주요 씨족의 계보를 장악해 왕권과 지배질서를 강화하고, 사회 안정을 꾀하기 위해 편찬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간무천황은 2001년 당시 일본 아키히토(明仁) 천황이 “간무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고 말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이 책은 천황가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씨족(황별·皇別), 일본 신화의 신들이 원조라고 주장하는 씨족(신별·神別), 외국계 씨족의 후손인 제번(諸蕃)으로 구성돼 있다. 제번에서 한국계 씨족은 백제 104씨, 고구려 41씨, 신라 9씨, 임나 9씨 등 163씨이고 중국계 씨족은 한(漢) 163씨다. 그동안 한국계 씨족은 이 163씨로만 알려졌다. 그러나 연민수 전 동북아역사재단 역사연구실장(63)을 책임자로 하는 연구팀(김은숙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서보경 한성대 인문과학연구원 특임교수, 박재용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연구실장)이 2014년부터 7년간 신찬씨성록과 ‘일본서기’를 비롯한 이전의 사서 등 옛 자료를 대조, 검증한 결과 중국계 163씨 가운데 150씨가 한국계였음이 밝혀졌다. 한국계 씨족들이 한나라나 진(秦)나라 계통의 후손이라고 참칭한 것이었다. 연 전 연구실장은 “당시 일본 조정은 한국계 등 재능 있는 도래인의 후손을 중용해 이른바 다국적 관료군을 형성했다”며 “이 책은 고대 일본의 한국계 씨족사 연구는 물론 한국 고대사의 외연을 넓히는 데도 유용하다”고 말했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니체(1844∼1900)가 ‘신은 죽었다’며 인간이 곧 세계의 중심이라는 인본주의를 선언했다면, 인간 무의식의 세계를 자연과학의 법칙으로 풀어낸 지크문트 프로이트(1856∼1939)는 인본주의를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 열린책들이 1996년 프로이트 전집을 한국에서 처음 펴냈을 때 홍지웅 대표는 인본주의를 품을 수 있는 출판계의 문화적 역량과 문화의식을 보여주고 싶었을 터다. 그로부터 24년 뒤 프로이트 전집(전 15권) 개정 신판을 낸 그의 딸 홍유진 열린책들 기획이사(36·사진)는 한발 더 나아가 프로이트가 더 널리 읽혔으면 한다. 10일 서울 종로구 카페 이마에서 만난 홍 이사는 “프로이트를 읽는 분은 대부분 50, 60대인데 젊은 층에게 읽게 하고 싶었다. 쉽게 읽을 수 있게 해보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003년 첫 개정판이 나온 뒤 17년이 흘러 번역에 손을 봐야 할 것이 꽤 됐다. 영어판 중역(重譯)이던 6권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와 7권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는 새로 번역했다. 제목이 쉽게 와 닿지 않던 10권 ‘정신병리학의 문제들’은 ‘불안과 억압’으로, 15권 ‘정신분석학 개요’는 ‘과학과 정신분석학’으로 바꿨다. 가독성을 높일 다양한 방법도 생각했다. 특히 고낙범 작가가 모노크롬으로 프로이트 얼굴을 다양하게 그린 표지를 살릴지 고민이 컸다. “프로이트를 잘 모르는 20, 30대를 위해 만화로 그려보기도 하고, 안무가가 책의 내용을 표현한 춤사위를 표지로 해보자고도 했어요. 하지만 무의식을 표현한 듯한 단색화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이걸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더라고요.” 어떻게 독자들에게 알릴지도 갖은 아이디어를 짜냈다. 한 라이브 커머스 방송에서 소개하는 책장에 전집을 진열해보자, 프로이트의 명문장 가운데 현 시대를 관통하는 문장을 색상별로 새긴 후드티를 팔아보자…. 하지만 이뤄지지는 않았다. “라이브 커머스 방송이나 패션업체에서 하나같이 ‘우리 소비자층이랑 맞지 않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럼 도대체 프로이트는 누구랑 맞는 걸까 하는 생각에 답답하기도 했어요.” 당초 프로이트 80주기인 지난해 내려고 했지만 올가을에야 나온 것도 이 같은 고심의 결과다. 그동안 전집은 각권을 모두 합쳐 32만 부를 발행했다. 그러나 대부분 ‘꿈의 해석’ ‘정신분석 강의’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늑대 인간’ 등만 나갔다. 아직 초판을 해소하지 못한 것도 있을 정도다. 전집을 통째로 사는 독자도 이제는 보기 어렵다. “프로이트는 그를 추종하든, 비판적으로 계승하든, 완고하게 반대하든 지적(知的) 업적의 큰 봉우리잖아요. 지식에 대한 허영심에서라도 갖춰 읽어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올 한 해, 코로나19 확산에 관해 ‘교회발’이라는 단어가 지속적으로 등장하면서 ‘교회는 과연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9월 지앤컴리서치의 ‘코로나19의 종교 영향도 및 일반 국민의 기독교(개신교) 인식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신뢰도가 “더 나빠졌다”는 응답률이 63.3%로 나타났다. 신뢰도 하락이 코로나19 확산 이후 나타난 것을 감안하면 방역 지침을 무시한 일부 교회의 독선과 무례가 이를 형성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통계 결과를 통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자부하는 교회는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고찰해야 한다.코로나 시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상고하다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두잇서베이에서 실시한 ‘종교에 대한 인식 조사’ 에 따르면 사회가 종교인들에게 원하는 이미지는 ‘성숙한 인격’ ‘높은 도덕성’ ‘높은 사회 봉사율’ 등이었다. 사회는 대표적 종교 단체인 교회가 ‘성숙한 인격과 정직, 청렴한 모습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이타적인 존재’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런 사회의 바람에 과연 교회는 제대로 부응하고 있을까? 많은 개교회가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을 것이다. ‘우리 교회’가 하지 않은 일로 한국 교회 전체가 비난 받는다고, 피해를 준 교회는 극히 일부라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2장에 따르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연결된 유기적 공동체다. 몸에서 팔과 다리를 따로 떼어내 온전한 하나의 몸으로 규정할 수 없다. 교회는 서로 연결돼 있다. 그러니 일부 교회를 떼어내 문제로 삼기보다 함께 끌어안아야 한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상고하며 현 상황을 개혁과 변화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코로나 시대 속 교회, 조용하고 강하게 책임을 행하다 한 가지 위안은 이미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고민하며 행동해온 교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2월부터 현재까지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조용히 찾아가 제 역할을 감당한 모습 또한 교회였다. 필자가 시무하는 만나교회에서도 코로나19가 가져온 과제에 대해 고민하고 행동하고자 노력했다. ‘교회가 이 땅의 소망입니다’라는 표어가 부끄럽지 않도록 지역 사회로 눈을 돌려 소외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찾아갔다. 교회 재정의 대략 60%를 구제와 선교 명목으로 긴급한 지원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며 지역 사회와 국민을 위해 할 일을 찾아 나가고 있다. 지난 몇 달간 만나교회의 행보를 정리하며 조용히 자신의 역할을 감당해온 교회의 모습을 전하고자 한다. 첫째, 예배는 ‘올라인(ALL-LINE)’으로. 코로나19 방역에 있어 만나교회는 ‘국민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정부 지침을 충실히 따른다’는 원칙을 세웠다. 모든 교인은 교인인 동시에 사회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정부의 지침에 따라 예배와 기타 행사들을 실시간으로 조율했다. 예배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의 핵심이다. 최근 지침을 실시간 반영하여 온라인(ONLINE)과 오프라인(OFFLINE)을 합친 ‘올라인(ALL-LINE)’ 예배를 구축했다. 올라인 예배는 만나교회뿐 아니라 대다수 교회에 나타난 변화다. 둘째, 사회적 책임은 ‘따로 또 같이’. 팬데믹 선포 후,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자 만나교회는 성남 지역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교회를 수소문했다. 지역 내 13개 교회가 모여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 결과 각 교회가 코로나19 방역 지침에 모범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연합해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장을 만들었다(성남사랑 부활절 연합기도회). 또 뜻을 모아 ‘성남 연대 희망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캠페인을 통해 지역 사회 내 취약 계층과 시장 소상공인, 확진자 방문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업소 등에 생계비를 지원하였고 성남시청과 연계하여 성남시 지원 사업을 진행하였다. 교회 산하 국제구호개발 NGO 월드휴먼브리지, 한국교회봉사단과 함께 코로나19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회를 대상으로 월세, 온라인 예배 시설 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셋째, 다가오는 시대, 교회가 다시 소망이 되다. 코로나 사태 이후 교회를 향한 외부의 시선은 이제까지 놓치고 있던 우리의 책임을 깨우쳐주었다. 교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지금, 이후 교회의 행보에 따라 다가오는 시대가 바라볼 교회의 모습이 정해질 것이다. 교회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있는 교회, 과연 이대로 괜찮은가?’ 교회가 다시 이 땅의 소망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본질을 지키는 한편,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 책임이 코로나19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다음 세대에 다가올 많은 문제와 재난 앞에서 교회는 겸허히 자신의 몫을 통감하고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를 ‘거리를 두고 싶은’ 공동체라 말하는 사회를 향해 교회가 다시 한번 소망이 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는 단순히 건물로서의 교회,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소위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곧 하나의 교회임을 알고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 흩어진 자리, 모인 자리에서 교회로서의 책임을 다할 때 비로소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교회는 다시 이 땅의 소망이 될 것이다. 김병삼 목사 만나교회▼ 성남지역 교회연합, 8억원 모아 지역주민-모란시장상인 등 지원 ▼ “남편의 허리디스크, 저의 공황장애, 폐쇄공포증 등 많은 질병이 찾아 왔습니다…전 재산 350만 원으로 막막한 가운데 다시 소형 개인제과점을 오픈할 수 있게 됐습니다.” “교회재정 때문에 고민하던 그때에 만나교회로부터 월세지원 프로젝트라는 감사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 만나교회로부터 후원을 받은 주부와 목회자의 사연이다. 만나교회를 비롯한 성남 지역 15개 교회는 코로나 19가 발생하자 그 어느 지역보다 발 빠르게 움직였다. 성남지역 교회 연합은 8억 원 이상을 모아 나눔 사역활동에 사용했다. 지역 주민돕기와 모란 5일장 상인 지원, 대구 지역 한부모 가정 돕기가 대표적이다. 이처럼 만나교회의 나눔과 지원 활동이 활발한 것은 2009년 설립된 월드휴먼브리지를 통해 얻어진 노하우 덕분이다. 이 단체는 국내외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한 국제구호개발 NGO다. 특히 긴급구호사업도 펼쳐 홍수와 지진, 태풍 등 자연재해나 전쟁과 분쟁 등으로 위급한 환경에 처해 있는 지구촌 이웃들을 지원해 왔다. 평상시 작은 교회를 위한 만나교회의 선교활동은 국내와 해외로 구분된다. 국내는 MMP프로그램(Manna Mission Plan)을 통해 작은 교회와 이주민교회의 성장을 돕고 있다. 2년 동안 매월 100만 원을 지원하며 목회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각 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다. 국내에 거주하는 이주민(외국인 근로자, 유학생)을 위해 한글학교, 미용봉사, 바리스타 교육과 건강검진을 실시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학교, 볼리비아에 직업훈련학교, 몽골에 병원 등을 건축했다.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이런 사역을 진행하기가 어려워졌다. 국가간 이동의 제한 등 비대면 상황이 작은 교회들의 경제적 고통을 더욱 악화시켰다. 만나교회는 코로나 기간 특별 헌금을 통해 147개 교회의 월세 1억1000만 원을 긴급 지원하고, MMP교회가 비대면 온라인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시설지원에 나섰다. 케냐와 남아공 등 아프리카 지역에 식량지원을 했고, 한국 기업들의 후원 물품을 태국 등에 전달했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올해 초, 예레미야의 말씀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포로기(期)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렘29:5∼7) 새해를 여는 말씀치고는 너무 어둡습니다. 희망의 비전을 제시하고 새로운 사역을 소개해도 시간이 모자랄 때에 포로기에 대한 말씀이라니…. 이 본문은 제가 선택한 본문이었다기보다는 ‘제게 온’ 본문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저는 결국 이 말씀을 올해 두 번째 맞는 주일에 소망교회 성도들과 나눴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빌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한 것이다. 내가 너희를 포로로 잡혀가게 한 것이다.” 그러니 거기서 집을 짓고 살라고 하십니다. 텃밭을 가꾸어 열매를 먹고, 아내를 맞이하고 자녀를 낳으라고 하십니다. 하루 속히 포로 상태에서 구출되기를 바라지만 말고 때가 이를 때까지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지 말고, 도리어 현실을 직시하고 그 성읍의 평안을 빌라고도 하셨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장기화하면서 이 말씀이 제게, 또 저희 공동체에 온 이유를 깨닫습니다. 분명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속히 이 시기가 지나가기를 바라고 우리 사회가 다시 평범한 일상을 되찾기를 기대하지만, 언제 끝날지 모를 코로나19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이 험악한 시절을 직면하는 용기와 오늘을 살아내는 지혜, 그리고 신앙이 아닐까 합니다. 포로기의 영성 바빌론 포로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워 버리고 싶은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유가 없어 낙심했고 평범한 일상을 잃어버려 절망했으며 시온의 영광을 보지 못해 슬퍼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만 보내지 않았습니다. 남들 위에 군림할 수도 없고, 더 많이 차지하고자 욕심낼 수 없었으니, 그들은 그 시절을 자신을 성찰하고 정돈하는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앞에 선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죄악과 불의를 폭로하는 말씀을 쉼 없이 쏟아내며 포로기 백성의 회개를 견인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경배도 회복했습니다. 그들은 끌려간 땅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깊이 묵상했습니다. 바빌론의 어떤 신들과도 비견할 수 없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예배했고, 이집트 노예로 살던 자신들의 조상을 출애굽 시킨 구원자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심을 생각하며 그분의 일하심을 고대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간은 포로들에게 그들의 근본을 다시 생각하고 그들이 누구를 예배해야 하는가를 깨달은 묵직한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간은 우리 자신에게도 사건이 일어나는 특별한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먼저 ‘거룩한 거리 두기’를 제안합니다. 전염병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필요한 것처럼,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정돈하기 위해서 거룩한 거리 두기가 필요합니다. 거리 두기가 필요한 것은 바이러스를 매개하는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가항력적으로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이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을 살고 있는지 자문하며, 정작 거리를 두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짚어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짓고 있는 죄악, 나도 모르게 참여하는 악한 계략들, 낡고 구태의연한 가치관, 탐욕과 욕망, 타인을 향한 완고함 등 우리가 거리를 두어야 할 것을 꼼꼼하게 하나하나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둘째, 사람들과의 만남의 빈도가 준 대신에 우리는 거리를 두지 않아도 되는 분 앞으로 더 많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입니다. 공동체에서 감사한 소식이 계속 들려옵니다. 올해가 두 달이나 남았는데 벌써 성경을 함께 일독(一讀)한 공동체가 있습니다. 예배당에 나올 수 없었지만 집 안에 기도방을 만든 성도님 소식도 들립니다. 우리 교회 한 부목사님은 금요일 밤에 골방 기도회를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새벽기도에 참여하는 성도들도 점점 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 하는 시간이라면 이 시간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을수록 우리는 그분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가를 알게 됩니다. 전염병에 걸려 가쁘게 호흡을 내뱉고 있는 환자들이 보이고, ‘코로나 블루(우울감)’를 앓고 있는 이웃도 보입니다.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이들, 열악한 근로환경에서 배나 더 일하고 있는 이들도 보입니다. 외식 한번 하지 못하는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도 있고, 서울 한복판에도 고독한 노인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이제야 보입니다. 포로들의 희망 바빌론 강변에서 시온의 노래를 부르며 울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희망을 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포로로 가게 하셨지만 때가 되면 시온으로 돌아가게 하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거리를 두며 자신을 성찰하고 다시 하나님을 가까이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시야가 열려 다른 이들이 보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구현되는 새 시대를 꿈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월터 브루그만은 이 시대 교회의 임무를 두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신실하신 결심에 뿌리를 내리고 희망을 품는 일이고, 둘째는 전염병 중에서도 하나님의 영속적인 헤세드(hessed·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증언하는 일입니다. 포로기에도 교회는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정돈하며, 선하신 하나님 곁에 서서 소망을 키우는 희망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아파하는 우리 이웃들, 이 피조(被造)세계의 탄식을 더 귀담아 듣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헤세드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일상과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는 회고적 공동체가 아니라, 포로로 끌려온 땅에서 희망을 창조하며 이 땅의 평안을 부지런히 비는 카이로스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당분간 우리는 그렇게 지낼 것입니다. 김경진 목사 소망교회▼ 대구-경북지역 코로나 퇴치 위해 헌금 기부 ▼ 소망교회는 2월 정부가 감염병 위기 경보단계를 격상하자 교회 내 모든 모임을 중단하고 주일 예배를 비롯한 모든 예배를 비대면 온라인 예배로 전환했다. 이후 사회적 거리 두기 완화로 가능해진 대면예배는 교회 방역매뉴얼에 따라 방역 규칙을 철저히 준수하면서 진행되고 있다. 이 교회는 출입 시스템을 만들고 모든 등록 교인들에게 교인 출입증을 발급했고, 정부 지침에 맞춰 예배 인원을 조정하고, 예배 시간을 전후로 예배당을 소독하고 매일 정기적으로 건물 방역을 실시한다. 소망교회는 온라인 예배로 전환한 첫 주일 예배가 진행된 3월 1일 헌금 전액을 대구와 경북 지역의 코로나19 치료를 위해 기부했다. 부활절 온라인 예배 헌금도 사회적 약자와 작은 교회를 위해서 전액 사용했으며 이후에도 국내 전역의 작은 교회 및 지역사회를 위한 지원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대구 지역 긴급구호사업, 경북도 내 취약 영세상인 후원, 작은 교회의 월세와 임대료 지원(113곳), 온라인 시스템이 미비된 교회에 온라인 장비 지원(426곳), 작은 교회 시설 보수 및 장비 교체(12곳), 긴급지원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 39명 후원이 대표적이다. 코로나19 확산 초기 대구와 경북 지역에 집중됐던 지원 활동은 지역사회와 전국으로 확대됐다. 지역사회 방역담당기관 위로방문 및 선물 전달, 워킹스루 도서대출, 온라인 교육이 힘든 작은 교회를 위한 가정학습자료 제작 및 발송(대구경북지역 및 해외 한인교회 1804가정), 노숙인과 홀몸노인, 한부모 가정을 돕기 위한 ‘소망선물상자 캠페인’이 이뤄졌다. 최근 교계의 공통 과제는 코로나19의 글로벌 확산으로 위기를 맞은 해외 선교사들을 위한 지원이다. 이 교회는 여러 어려움에도 세계 34개국 64가정의 선교사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활동을 현행대로 유지하고 있다. 해외에서 귀국한 선교사들에게 자가격리 숙소와 선교하우스를 제공하고 있고, 20개국 선교사 가정 24곳에 특별 후원금을 지급했다. 코로나19로 어려움을 당한 해외 한인교회 9곳을 후원했고, 미국 서류 미비자 등 해외 거주 한인을 돕는 프로그램도 진행 중이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라는 절규는 인간의 가치가 출생으로 결정돼서는 안 된다는 믿음에서 나왔다. 누구의 자녀이냐가 특권을 보장할 수 없다는 얘기다. 산업혁명과 부르주아혁명을 거치며 귀족제도가 무너지고 노력과 재능에 따라 보상받는다는 능력주의(meritocracy)의 도래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 저자는 능력주의가 미국 사회 불평등과 새로운 카스트 창출의 주범이라고 주장한다. ‘엘리트 계층과 나머지 계층을 분리하고, 엘리트 계층이 세대를 거쳐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소득을 점유하는 소수의 중심부(1%)와 그 주변부(5∼10%)로 구성되는 미국 엘리트 계층은 탁월한 교육과 윤택한 일자리의 독과점을 통해 능력주의의 높은 성(城)을 구축하고 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금융부문 전문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1500 기업 부사장, 엘리트 경영 컨설턴트, 일류 법무법인 파트너 변호사, 전문의 등 상위 근로자인 엘리트 계층은 자녀에게 명문 유치원서부터 명문 대학(로스쿨, MBA)까지 최상위 교육의 특권을 대물림한다. 하버드대와 예일대에는 소득수준 상위 1% 가구 출신이 하위 50% 출신보다 더 많다. 이런 ‘능력 상속’은 자녀에게 약 1000만 달러를 양도하는 것에 상응한다. 이 학생들은 번지르르한 직업을 가질 확률이 더 높다. 미국 동·서부 해안 명문대(아이비리그, 스탠퍼드대)는 월스트리트(금융 법률)와 실리콘밸리(정보기술·IT)를 장악한다. ‘좋은 교육과 좋은 직업이라는 특권이 서로를 뒷받침하고 같이 성장한다.’ 각 분야에서 이들은 혁신을 통해 자신 같은 초고숙련 근로자에게 유리한 신기술을 고안해 중간 숙련 근로자에게서 할 일을 빼앗는다. 이는 중산층의 쇠퇴를 가져오며 중산층 자녀는 ‘부모에게 허용되지 않은 직업을 얻는 데 필요한 교육을 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엘리트 계층이 귀족처럼 안락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 고급 변호사, 금융전문가, 전문의 등은 주당 90시간 노동한다. 노력은 유행병처럼 퍼져 ‘요람에서 무덤까지 상위 직업을 위한 노력으로 점철된다’. 스스로를 착취해 고소득을 얻는 능력주의의 병폐다. 따라서 능력주의 시대의 불평등은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주장한 것처럼 노동에서 자본으로 소득이 이전해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상위 1%와 최상위 0.1%는 소득의 3분의 2∼4분의 3을 자본(토지 기계 금융)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기량, 인적 자본을 통해 얻는다. 노동과 자본의 갈등이 아니라 상위 근로자와 중산층 간의 갈등이다.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은 위기에 몰린 중산층 백인의 중년 사망률과 기대수명이 하락한 것에서도 단초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던 엘리트 계층은 트럼프 지지자들을 ‘한심한 패거리(deplorables)’라 불렀다. 능력주의라는 ‘자기기만에 사로잡힌 부유층’은 중산층의 고충과 분노를 알지 못했지만 트럼프는 능력주의의 위선과 불만을 알렸다는 것이다. 저자는 능력주의 해소를 위해 명문대의 입학 정원을 지금보다 두 배로 늘리고, 그중 절반을 소득수준 하위 3분의 2 가구의 학생으로 뽑지 않으면 대학의 면세 혜택을 없애자고 제안한다. 예일대 수학과, 런던정경대 경제학 석사, 옥스퍼드대 철학박사인 저자는 능력주의의 최대 수혜자다. 저자도 스스로를 “능력주의의 덫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의사 정상훈 씨(49·사진)의 책 ‘동네 의사와 기본소득’(루아크)은 제목처럼 기본소득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사람에게 일정한 액수의 돈을 매월 조건 없이 지급하는 기본소득은 재난기본소득 덕분에 우리에게 낯설지만은 않다. 하지만 실현과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문 등으로 실행하고 있는 나라는 없다. 그럼에도 그의 책 속 글들은 ‘기 승 전 기본소득’이다. “한 10년 전에 기본소득이란 걸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황당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올 초 돌아가신 어머니가 몇 년 전 편찮으시면서부터 당신의 삶에 다른 가능성은 없었을까 생각해봤다. 기본소득이 있었다면 어머니의 삶이 확 달라졌을까….” 27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그는 어렸을 적 라디오 트랜지스터 수천 개를 조립하는 부업으로 생계비를 보태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구박하던 가부장적 아버지, 그리고 끊이지 않던 부부싸움을 떠올렸다. 흥 많고 노래 잘하던 어머니는 끝내 가정이라는 ‘감옥’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기본소득 논의가 걱정되고 아쉬운 것은 이론가의 철학적 설명 아니면 정치가의 정책적 주장뿐이라는 점이다. 보통사람들의 삶과 연결지어 이야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콩팥이 손상됐어도 가족에게 연락도 못하는 찜질방 청소부 할머니, 열이 펄펄 끓는 발달장애인 아들을 뒀지만 일을 쉴 수 없는 직장여성, 공사장에서 다쳤지만 원청업체 눈치에 산재보험 청구가 어려운 청년 등 진료하면서 만난 이웃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단초가 기본소득이라고 그는 믿는다. “다양한 처지의 사람들 이야기를 담으려다 보니 기본소득이 만병통치약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기본소득 받아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건 없다. 기본소득은 여성 노동자 환경 청소년 장애인 등 다양한 운동과 손잡고 사회를 바꾸려 노력할 때만 의미가 있다.” 정 씨는 서울대 의대를 다닐 때부터 의료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일을 해왔다. ‘국경없는의사회’ 소속이었을 때는 에볼라 바이러스가 휩쓸던 아프리카에 진료하러 간 첫 한국인이기도 했다. 병원에 소속된 적도, 병원을 차린 적도 없다. 가끔 개인병원 의사가 휴가를 갈 때 대신 진료한다. 최근 그를 만난 한 출판 관계자는 “가톨릭 사제 같다”고 했다. 좌파도 기본소득을 반대한다. 노동계는 “노조 힘을 빼앗긴다”며, 사회복지주의자들은 “복지서비스도 취약한데 무슨…”이라며. 민주노총도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재원 마련을 위해 증세가 필수인데 조세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일에 매여 바쁘고, 먹고살기도 힘들고, 가족끼리 대화도 못 하는데 이웃의 처지에 신경 쓸 겨를은 없다. 기본소득이 있어서 자기 삶이 조금은 여유로워져야 조금 더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세계 보편 기본소득을 원한다.” 그 같은 이상주의자도 필요하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몇 년 전 미국 월스트리트의 로펌에서 일하는 대학 동기를 만났다. 그는 “월스트리트의 20, 30대는 ‘더 데일리 쇼’를 통해 뉴스를 접하는 것 같다”고 했다. 뉴욕타임스도, CNN도 아니고 케이블TV의 시사 코미디 뉴스쇼라고? 얼마 뒤 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그 쇼의 새 진행자가 들어섰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이라고? 그가 이 책을 쓴 트레버 노아다. 이 책은 최악의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분리시켜 증오하다’로 풀이된다)가 횡행하던 1984년 남아공에서 태어나 세계적인 코미디언이 된 그가 쓴 자신의 성장기이자 엄마에게 바치는 헌사다. 노아는 어렸을 때 엄마랑 손을 잡고 길을 걷다 경찰이 나타나면 서로 손을 놓고는 모르는 사람처럼 떨어져야 했다는 코미디 레퍼토리가 있다. 유튜브로 볼 때는 마냥 웃었지만 이 책을 보니 아파르트헤이트 아래서 흑인 여성과 백인 남성이 성관계를 하면 둘 다 징역형에 처할 수 있었다. 노아의 엄마는 흑인, 아빠는 독일계 스위스인이다. 유색인으로 분류된 노아 같은 혼혈은 백인도 흑인도 아니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난 늘 어느 그룹에 속해야 할지 탐색하고 내가 누구인지 설명해야 했다.” 그를 구원한 건 엄마의 지시와 교육으로 능숙하게 된 영어, 아프리칸스어 및 9개 종족의 언어였다. “피부색이 아닌 언어가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보여준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카멜레온이 됐다.” 운전사의 살해 위협을 피해 불법 미니버스에서 모자가 뛰어내리는 등 폭력과 무법을 이웃하며 살아온 이야기지만 “우리는 그냥 닭을 먹지 않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우리 가족은 고고학자에게는 악몽이었다. 뼈 한 조각도 남기지 않았으니까” 같은 유머가 곳곳에 잠복해 있다. ‘흑인 생명도 중요하다’ 운동이 거셌던 올해, 인종차별에 관한 여러 책이 나왔지만 이 책만큼 흥겹고 강렬하고 명확하게 짚은 책은 없다. 번역도 훌륭하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올 8월 양장본 ‘김일성 1912∼1945’(유순호 지음·전 3권·서울셀렉션)가 출간됐을 때 출판계는 갸우뚱했다. 김일성 평전이 나올 시점인가 하는 의문과 정가 15만 원인 이 책이 팔릴까 하는 것이었다. 28일 서울 종로구 카페 이마에서 만난 김형근 서울셀렉션 대표(58)는 “저자가 1980년대부터 18년간 만주의 항일유적지를 누비며 목격자(생존자) 200여 명을 직접 취재하고 각종 기밀 자료를 분석해 김일성을 검증한 책”이라며 “(김일성이) 좋든 나쁘든 사실적 진실을 캔 책이 국내에서 출판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조선족인 저자 유순호 씨(61)는 옌볜에서 스무 살 무렵부터 글 잘 쓰는 작가로 통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가짜’라는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김일성의 실체 찾기에 나서 저자의 20, 30대를 바친 결과가 이 책이라는 것. 2002년 미국으로 망명해 뉴욕에서 식료품점을 하고 있다는 유 작가는 4년 전부터 원고를 들고 국내 100여 개 출판사를 직접 찾거나 e메일로 출간을 제안했지만 허사였다. 지난 정부 때는 ‘국가보안법에 저촉될 수 있다’, 현 정부 들어서는 ‘김정은이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고 저자는 머리말에서 말한다. 김 대표는 “이 책은 ‘김일성이 항일 무장투쟁을 한 것은 맞다’는 사실 말고는 대부분 뻥튀기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저자에 따르면 북한에서 나온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의 왜곡, 과장, 오류가 100곳이 넘는다. 예를 들면 1937년 6월 보천보 전투에 김일성은 참여하지도 않았고, 1940년 김일성이 소련으로 간 것은 혁명적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만주에서 배겨내지 못하고 도망간 것이라는 사실 등이다. “그동안 김일성을 다룬 책은 ‘김일성은 가짜’라는 것 아니면 와다 하루키나 서대숙류의 ‘위대한 김일성 장군’을 인정하는 시각을 다룬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그 중간에 있지 않겠습니까.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이 책에서는 보입니다.” 저자는 이 책을 ‘1930년대 만주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항일 독립투사들에게’ 헌정한다. 김 대표는 “당시 만주에는 한반도 전역에서 온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이 레지스탕스처럼 싸웠다”며 “1945년 이전의 만주 항일투쟁사는 한민족이 공유한 역사이고, 이에 대한 역사적 조명의 책임은 한국인에게 있다”고 말했다. 1000질이 팔려야 출간의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있다는 이 책은 1930년대 만주 무장투쟁 세력의 음모, 계략, 뒷이야기도 풍성해 “삼국지만큼 재미있다”고 김 대표는 말했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사충서원(四忠書院) 가을 제향이 24일 사단법인 사충서원(이사장 이상혁 변호사) 주관으로 열렸다(사진). 사충서원은 조선 경종 때 그의 동생인 영인군(영조)을 왕세제로 추대해 대리청정을 주장하다 소론이 일으킨 신임사화(辛壬士禍)로 1722년 사사(賜死)된 ‘노론 4대신’을 기린다. 4대신은 당시 영의정 김창집, 각각 좌의정과 우의정을 지냈던 이이명, 조태채, 좌의정 이건명이다. 서원은 영조가 1726년 사액(賜額)했으며 6·25전쟁으로 파괴됐다가 1968년 경기 하남시에 복원됐다. 이날 제향에는 김상호 하남시장이 초헌관으로 참례했다. 제향은 사충서원이 지난달 한글로 첫 제작한 홀기(笏記·제례나 집회의 식순을 적은 문서)에 따라 진행됐다. 이 이사장은 “2000년대 초반부터 한문 홀기로 하는 제향에 참석자들이 급속히 줄어 올해부터 한글 홀기로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하남=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글 두 편이었다. 2017년 가을 번역가 김명남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옮겨놓은 미국 작가 캐럴라인 냅(1959∼2002)의 ‘혼자 있는 시간’과 ‘내 인생을 바꾼 두갈래근’. 혼자 사는 여성의 고독과 고립의 글, 혐오하던 몸이 해방의 몸이라는 깨달음의 글에 나희영 바다출판사 팀장(41·사진)은 출간을 결심했다. 3년여 만인 지난달 ‘명랑한 은둔자’(캐럴라인 냅 지음·김명남 옮김)가 나왔다. “편집하다가 우는 일이 드물고 그런 원고를 만나는 경우도 많지 않은데, 자신의 괴로움을 토로하는 부분에서 눈물이 났어요. 내가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어쩜 이렇게…. 진짜 저 같은 거예요.” 책은 1990년대 혼자 살던 냅의 가족, 일, 우정, 반려견과의 사랑, 고독, 고립, 자기혐오, 삶의 슬픔, 자기수용, 자기이해를 망라한다. 독자를 품는 스펙트럼이 넉넉하다. 21일 서울 종로구 카페 이마에서 만난 나 팀장은 “독자들이 ‘이게 90년대 글이라고?’ 하며 놀란다. 이물감이나 시간적 거리감을 못 느낀다”고 했다. ‘술, 전쟁 같은 사랑의 기록’ ‘남자보다 개가 좋아’ ‘세상은 왜 날씬한 여자를 원하는가’ 같은 냅의 책은 2000년대 중반 국내에 출간됐다. 하지만 당시 유행하던 칙릿(chick-lit·젊은 여성을 겨냥한 소설) 부류로 간주됐다. 반면 ‘명랑한 은둔자’는 30, 40대 여성을 흡인한다. “30대는 물론이고 X세대가 지금 40대잖아요. 1인 가구가 늘고, 결혼 안 한 직업여성이 많고. 그동안 고독이라는 주제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거의 남성의 전유물이었다면 이제는 여성의 고독이 조명을 받아요. 혼자 사는 여성의 일, 삶 같은 코드가 독자에게 닿는 거죠.” 한 달여 만에 5쇄를 찍은 이 책에 대한 독자 반응은 “나를 표현한 것 같다” “내 친구 같다” “거의 다 밑줄을 쳤다” 등 공감으로 수렴한다. 가벼운 위로, 산뜻한 이야기 위주의 요즘 에세이에 지친 독자도 이 책을 집어 든다. “가볍지 않다는 게 차별 지점이지 않나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려는데 화장실에 가서 숨겨놓은 술을 마실 만큼 심한 알코올 중독이나 거식증 이야기 등 질릴 정도로 솔직한 고백은 읽는 사람 몸을 지치게 하는 느낌도 있어요. 그럼에도 다정함, 따스함이 그걸 상쇄하죠.” 냅의 글은 삶의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상향 곡선을 그린다. 자신을 ‘명랑한 은둔자’라고 정의한 것처럼 삶을 잘 살아내고자 한 의지가 번뜩인다. 나 팀장은 “삶의 격랑을 거쳐 온 시간과 경험이 생의 선물이며 거기서 승리감을 맛본다는 것이죠”라고 풀이했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몸이 편찮으신 어머니가 기르던 18세 된 개를 올해 6월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냅의 원고를 읽으면서 정리가 된 거 같아요. 그냥 데려오고 닥칠 일들은 다 받아들여 보자는 생각.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는데, 지금 잘 지내고 있어요. 좋아요.”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영화 ‘대부’(1972년)에서 뉴욕의 마피아 두목 마이클 코를레오네는 모 그린에게 그의 라스베이거스 호텔을 내놓으라고 한다. 화가 난 모는 “빌어먹을 기니 놈(guineas)”이라며 언성을 높인다. 기니는 노예무역으로 악명 높던 서아프리카 해안 지역. 왜 앵글로색슨계 모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마이클에게 기니 놈이라고 욕을 했을까. 해답은 이 책에 나온다. 18세기 ‘기니’는 백인이 흑인을 경멸조로 칭하는 말이었다. 19세기 후반 미국에 온 이탈리아 이민자도 기니인이라고 불렸다. 지금이야 백인이지만 당시에는 흑인 취급을 받은 것이다. 이 일화는 미국에서 백인이라는 범주가 가변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도 그렇다. 태초에 인종이라는 것은 없었으며 근대 들어 정치, 사회,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인종주의가 인종을 낳았다는 얘기다. 어렸을 적 미국으로 이민 가 현재 그곳의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저자는 먼저 미국에서 백인 흑인 황인종 한국인 히스패닉이라는 인종의 범주와 한계가 정해진 과정을 역사적으로 살핀다. 이는 아메리카에 도착한 순서, 그리고 사회 경제적 위치와 연결돼 있다. 19세기 후반의 이탈리아 그리스 폴란드 러시아 이민자와 유대인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야 ‘정규 백인’에 합류할 수 있었다. 책은 역사학 인류학 사회학 연구 결과를 토대로 고대나 중세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던 인종 개념의 출현은 16세기 ‘항해의 시대’에 서구가 원주민과 맞닥뜨린 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논증한다. 토착민, 즉 비(非)서구인의 억압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인종주의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영국이 미 버지니아에 식민지를 만들고 담배농장을 넓혀 나가던 17세기 중반까지 흑인과 백인 노동자 사이에 인종적 차별은 없었다. 그러나 1676년 흑인과 백인이 연합한 노동자 반란이 일어났다. 농장주들은 백인 노동자에게 물질적 혜택과 사회적 특권을 제공하며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인종이 노동계급의 연합을 방지하는 장치로 창안된 순간이다. 이후 인종주의 심화에 기독교와 과학 그리고 법이 ‘부역’한 사례도 소개한다. 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저자의 거친 감정이 군데군데 드러난 점은 아쉽지만 읽기 쉽게 정리됐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린 진인(塵人) 조은산의 ‘시무(時務) 7조’, 부동산 정책의 문제점을 짚은 삼호어묵의 ‘정부가 집값을 안 잡는 이유’, 10만 부 넘게 나간 김수현 작가의 에세이집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그리고 김봄 작가의 이낙연 전 국무총리 홍보 서적…. 접점을 찾기 힘든 이들 글에는 공통점이 있다. 글의 구성 형식이 흡사하다는 것. 조은산, 삼호어묵의 글은 폐부를 찌르는 내용으로 공감을 샀다. 여기에 글 형식이 최근 유행하는 에세이 형태와 닮았다. 요즘 독자에게 더 쉽게 다가가는 방식으로 공감을 높이는 효과를 얻은 셈이다. 이 글들의 형식은 문단의 왼쪽 정렬, 잦은 행갈이, 열 줄 안팎의 한 문단, 문단과 문단 사이의 여백이 특징이다.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익숙한 30, 40대 여성 독자에게 특화된 양식(樣式)이다.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놀)의 임소연 책임편집자는 “5, 6년 전부터 블로그나 SNS에 단락, 단락 짧게 쓴 글이 유행했다. 책의 주 소비층인 30대 여성이 편하게 느끼는 형식”이라고 말했다. 한 줄에 글자 수가 많은 것을 선호하지 않는 요즘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문장의 길이는 큰 변수가 아니다. 긴 문장이더라도 독자의 호흡을 고려해 중간중간 끊어 읽도록 행갈이를 한다. 한 문장을 두세 번 행을 바꾸는 일이 흔하다. 단문의 효과가 난다. 시처럼 운율감과 리듬감이 느껴지면서 읽는 맛이 생긴다. 조은산의 글이 시조나 고려가사 같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일본의 광고인이자 저술가인 히키타 요시아키는 최근 저서 ‘짧은 글을 씁니다’(가나)에서 “글은 내용이 아니라 리듬으로 읽게 해야 한다”고 했다. 문단과 문단을 멀찌감치 띄우는 것은 ‘함께 읽는다’는 독서 트렌드와도 맞물린다. 문단 사이든, 행간이든 공간이 많으면 좋은 문장을 사진 찍어 바로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편하다. 신동해 웅진지식하우스 단행본사업본부장은 “최근의 책 읽기는 취향 독서로 ‘나는 이런 책을 읽는 사람이야’라는 것을 주위에 알리며 사실상 같이 책을 읽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책의 한 페이지가 SNS의 한 화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에세이는 1960∼80년대 김형석 이시형, 칼릴 지브란 등 삶에 대한 성찰을 다룬 글들이 인기를 끌다가 이후 위축됐다. 그러다 최근 자기 감성에 집중하며 일상을 말랑말랑하게 써내려간 에세이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이 같은 형식을 끌어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런 흐름은 정치인의 책에도 영향을 미친다. 최근 나온 ‘스스로에게 엄중한 남자 이낙연’(비타베아타)은 올 4월 총선 기간 김봄 작가가 이 전 총리를 동행 취재한 포토에세이다.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이 자신을 알리기 위해 내는 여타 책과는 형식이 판이하다. 배소라 비타베아타 콘텐츠실장은 “에세이집 ‘좌파 고양이를 부탁해’의 김 작가가 총선 때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더 짧은 글을 요즘 에세이처럼 써보자고 기획했다”고 말했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지난달 나온 ‘인간의 내밀한 역사’(시어도어 젤딘 지음·김태우 옮김·어크로스)는 다른 출판사에서 1999년 초판, 2005년 개정판을 내고 절판된 책을 다시 낸 것이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젤딘의 ‘인생의 발견’(2016년)과 ‘대화에 대하여’(2019년)를 냈던 어크로스가 “‘인간의 내밀한 역사’를 대신 내줄 수 없겠느냐”는 저자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책은 출판사 글항아리도 복간을 망설였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은 지난달 펴낸 저서 ‘읽는 직업’에서 ‘무명의 인간들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주면서 미학적이기 그지없는 문장들을 얽어 나간’ 이 책을 복간하고 싶었지만 주저했다고 털어놓는다. 판매 면에서 ‘위험하다’는 주변의 만류가 컸다. 절판의 기준은 1년에 1000부나 하루 1부 또는 한 달에 10부 미만 판매 등 출판사마다 다르다. 권당 하루 10∼20원의 보관료도 부담이다. 한번 독자가 외면한 책을 다시 내는 것은 모험이다. 그럼에도 복간된 책은 어떤 행운을 타고난 것일까. 이은혜 편집장은 “상업적으로 확실한 것”이라고 못 박는다. 독자가 다시 찾으리라 장담할 만한 뒷배가 필요하다. 올해 문학동네가 복간한 김은성 작가의 만화 ‘내 어머니 이야기’는 김영하 소설가가 지난해 한 TV 프로그램에서 “정말 좋은 책”이라고 소개했다. 유명인의 공개적 찬사는 복간의 든든한 담보가 된다. 비슷한 것으로 ‘셀럽의 사적 추천’이 있다. 이진희 은행나무 총괄이사는 “정유정 작가가 ‘좋은 책인데 절판됐더라’고 한 책을 다시 펴냈다”고 했다. 2007년 국내 한 출판사가 냈지만 빛을 못 본 영국 작가 W E 보먼의 소설 ‘럼두들 등반기’(2014년)다. ‘7년의 밤’ ‘종의 기원’의 정 작가가 추천사를 쓴 이 책은 1만 부 넘게 팔렸다. 책 띠지에 ‘정유정 강력 추천’이라고 적힌 것은 물론이다. 상업성을 뒤로 돌릴 때도 있다. 김형보 어크로스 대표는 “저자의 생각, 사유, 철학의 흐름에서 빠지면 안 되는 책은 손해를 무릅쓰고 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인간의 내밀한 역사’도 그런 경우다. 다만 전작 ‘인생의 발견’이 약 3만 부 나간 것도 영향을 미쳤을 터다. 중고 책 시장의 독자 반응도 따져 봐야 한다. 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2005년·마음산책)은 소설가 김연수가 ‘스밀라는 현대 소설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라고 한 책이다. 그러나 1996년 한 출판사에서 나온 뒤 절판됐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이 책을 낸다고 헌책방 사이트에 알렸더니 ‘감사하다’ ‘이번엔 분권하지 말아 달라’ 같은 댓글이 수백 건 올랐다. 이들만 사줘도 200부는 팔리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 책은 지금까지 10만 부 넘게 나갔다. 책도 시운(時運)이 따라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사랑받아 마땅한 책이 시대를 못 만나 묻혔다는 것이다. 저자의 요청으로 글항아리가 2018년 초 복간한 ‘법으로 읽는 유럽사’(한동일 지음)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8000부나 팔렸다. 그 전해 저자의 다른 책 ‘라틴어 수업’(흐름출판)이 베스트셀러가 된 덕을 본 것이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토착왜구’라는 억지소리가 채 가시지 않은 지금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4∼1901)의 ‘문명론 개략’(소명출판)을 펴내는 것은 모험일 수 있다. 게다가 역자는 책의 해제(解題)에서 후쿠자와의 문명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하다고 역설한다. ‘이 사람이 쓰는 법’에서 옮긴이를 소개하기는 처음이다. 그러나 그의 해제는 시대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읽어볼 만하다. 번역자 성희엽 박사(57·사진)를 6일 만났다. “일본 근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을 한 권 꼽자면 후쿠자와가 1875년에 쓴 이 책입니다. 인터넷에는 후쿠자와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가 있는데, 이 책도 제대로 못 봤으면서 어떻게 그를 비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메이지유신을 이룬 1868년부터 약 10년간 일본은 혼란스러웠다. 혁명의 성공에 심취해 어떤 국가를 만들지 어렴풋했다. 후쿠자와는 개인의 자유와 공화(共和)의 가치를 바탕으로 권력의 전제(專制)를 견제하는 문명화에서 길을 찾았다. “봉건사회와 근대사회의 가장 큰 차이가 뭔지 고민하던 후쿠자와는 자유를 새로운 사회의 운영원리로 정착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공화와 결합해 권력의 전제를 견제해야 사회가 바르게 유지된다는 거였죠. 자유주의를 동양사회에서 처음 소화한 겁니다.” 서울대 화학과 82학번인 성 박사는 그 시대 운동권이 그랬듯 일본어를 공부해 한국에 없던 마르크스 레닌의 저작을 읽었다. 대학 도서관에서 찾은 일본판 마오쩌둥 선집의 ‘모순론’ ‘실천론’을 며칠간 밤새 번역해 뿌리기도 했다. 하지만 1990, 91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유럽을 현장에서 본 뒤 사회주의를 포기했다. “정치권에 들어가 정부에서 일하던 40대 후반, 인생 후반전을 어떻게 살까 고민했죠. 어떤 국가를 만들어야 할지 알려면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국가를 이룬 일본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부경대에서 일본 근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메이지유신의 역사를 다룬 ‘조용한 혁명’(2016년)을 냈다. 그리고 4년여 작업 끝에 이 책을 내놨다. “한국 지도층은 대부분 자유주의 시대를 모르고, 자유라는 가치를 고민하지 않았어요. 산케이신문 칼럼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이나 이른바 ‘코로나 독재’, (유력 정치인의) 성폭력 등을 보세요. 전체주의적 습성과 파시즘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죠.” 해제는 이렇게 맺는다. ‘… 19세기 동아시아의 역사는 개인의 자유와 공화주의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국가 체제의 본질은 전제에 지나지 않으며, 개인과 사회는 물론이고 그 국가마저도 독립 자존할 수 없게 만듦을 생생하게 증거해 준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이은혜 편집장은 책에 미쳤어요.”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58·사진)는 최근 펴낸 책 ‘읽는 직업’의 저자를 두고 몇 번이고 말했다. 정 대표가 다른 출판사(글항아리) 편집장의 책을 낸 건 ‘이은혜표 문체’라고 부를 만큼 글이 좋아서였다. 하지만 편집 경력 35년 차인 그가 이제 15년 차 후배 편집자에게서 20년 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았을 리 없다. “제가 15년 차에 그랬거든요. 그때 마음산책을 차렸어요. 왜 그랬겠어요? 내고 싶은 책이 너무 많은데 (출판사에) 소속된 데서 오는 한계가 있잖아요. 미친 듯이 책을 내보고 싶었어요. 그 마음을 알겠더라고요. 15년은 열정으로는 정말 책에 미치는데 자기가 부족함을 느끼기도 하는 연차죠.”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카페 이마에서 페퍼민트 차를 마시며 후배 편집자 얘기를 하는 그의 얼굴은 내내 밝았다. ‘읽는 직업’은 책을 낳는 저자 편집자 독자의 트라이앵글에서 늘 드러나지 않게 일하는 편집자가 책 만드는 일이란 어떤 것인지 들려준다. 읽다 보면 편집이라는 일이 저자를 ‘읽고’ 독자를 ‘읽고’ 세상을 ‘읽으며’ 존재하는 매력적인 직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책을 제안했을 때 “편집자가 어떻게 저자가 되나요. 글 쓸 힘이 있으면 원고를 더 열심히 보고 다듬는 데 쓰겠다”고 했던 저자는 나중에 다시 조르니까 “저자에게, 독자에게 할 말이 생겼다”며 쓰겠다고 했단다. “편집자라는 존재는 오탈자가 난다든지, 책이 잘못될 때만 드러나잖아요. 편집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태반이 모르기도 하고요. 저자에게는 편집자의 바람과 어떻게 일하고 싶은지를 말하고 싶고, 독자에게는 결과물로서의 책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하고 싶었대요.” 오전 네다섯 시에 일어나 출근 전까지 참고자료용 책들로 가득한 책장들에 둘러싸인 책상에서 교정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이것은 책으로 될 것인가, 책이 아닌가, 이 책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을 머릿속에 꽉 채운 채 인생의 80%를 책 아니면 책 이야기로 구성한 것 같은 후배를 보며 그는 자신의 초심을 돌이켜봤을까. “책을 만드는 즐거움, 편집자로 산다는 것의 자부심은 35년 전에서 ‘1도’ 안 변했어요. 다만 당시에는 책이 다른 어떤 매체보다 우선하는 가치가 있었고 ‘내가 사회에 중요한 지식을 전달하는 책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강했다면, 교보문고에서 ‘문구를 살까, 책을 살까’ 하는 선택지의 하나가 돼버린 요즘에는 편집자로서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는 건지 의구심이나 걱정이 들어요.” 유능한 편집자라면 ‘꼭 내야 할 책’과 ‘팔리는 책’ 사이의 균형감각을 갖춰야 한다. 정 대표는 이를 ‘관리형 품목’과 ‘효율형 품목’으로 불렀다. 그럼 이 책은? “100퍼센트 효율형이에요. 개인의 고민과 그 결과물 사이의 간극을 다루고 있어 직업인이라면 누구나 흥미로워할 거예요. 정말 많이 팔려야 해요. 하하.”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세계는 약 100년과 75년 전에 끝난 두 차례 세계대전의 그늘에서 벗어나 있는가. 국제정치사가인 저자의 두 책은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미국과 중국이 벌이고 있는 전략적 경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패권국과 신흥국의 경쟁을 떠올린다. 새로운 합종연횡의 가능성은 20세기 초반 세계와 흡사하다. 1918년 세계를 휩쓴 스페인독감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과 겹친다. 제2차 세계대전은 어떤가. ‘토착왜구’라는 신조어를 낳은 현 정부의 대(對)일본 정책과 맞물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가 부른 비극이다. 족쇄처럼 우리를 구속하는 남북관계는 2차대전 이후를 겨냥한 강대국의 세계전략이 낳은 한반도 분단의 결과다. 각각 1963년과 1974년에 쓰인 두 책은 각 전쟁의 원인에 대한 기존 연구와는 궤를 달리하는 시각을 보여준다. 1차대전의 원인으로 꼽히는 팽창정책, 세력경쟁, 동맹 실패 대신 저자는 ‘철도 시간표 이론’을 꺼내든다. 1914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저격으로 빚어진 위기에서 각 나라가 외교적 술책으로 한 선전포고와 동원이 철도를 통해 실제 행동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또 2차대전은 세계 정복이라는 히틀러의 야심에서 촉발됐다는 기존 연구와는 달리 히틀러가 무력 사용 위협과 소규모 전쟁을 통해 독일의 힘과 지위를 키워나가려 했다고 주장한다. 양차 대전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저자는 1차대전은 대중의 전쟁이었지만 전선은 집에서 멀었던 반면 2차대전은 모든 사람이 전쟁에 휘말렸고 전방과 후방의 구분은 사라졌다고 분석한다. 전례 없는 국가적 단결이 요구돼 1차대전 때 각광받던 장군들은 뒤안길로 들어서고 히틀러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이 비길 데 없이 강한 힘을 가졌다고 파악한다. 두 책에는 전쟁의 참상과 이모저모를 기록한 470장의 사진이 있다. 전차의 변모를 통해 양차 대전 사이 군사기술 발전상을 알 수 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