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룡

구자룡 기자

동아일보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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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구자룡 기자입니다.

bonhong@donga.com

취재분야

2025-11-06~2025-12-06
남북한 관계14%
국방13%
국제일반7%
대통령3%
정치일반3%
기타60%
  • 中, 반부패 숙청 여론전도 병행

    중국 중앙기율검사위원회는 21일 루웨이(魯위) 공산당 중앙선전부 부부장(장관급)을 조사하고 있다고 밝힌 이후 홈페이지에 그의 비위 사실을 밝히는 글을 잇달아 올리고 있다. 전에는 ‘비위로 조사 중’이라고 발표한 뒤 법원 판결이 나기 전까지 일절 언급하지 않던 것과 비교해 이번 조치는 이례적이다. 앞으로 중국 사정 당국은 고위 인사의 비위 문제에서 기율위 조사나 사법 처리뿐만 아니라 사실을 적극 공개하는 여론전도 병행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또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집권 1기에 반부패 드라이브를 걸면서 고위 공직자 처벌을 정적(政敵) 견제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비판이 나왔는데 이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도 풀이된다. 기율위는 루 부부장에 대한 조사는 올해 기율위 중앙순시조가 3월 6일∼4월 6일 순시 때 적발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22일 평론에서 소개했다. 비위 내용으로는 △시진핑의 주요 지시 사항에 대한 실천이 제때 이뤄지지 않은 점 △정치적 책임감 부족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의 주요 정책에 대한 실천 부족 등이 포함됐다. 또 ‘소규모 모임’ 문제와 청렴의식 부족 등도 거론됐다. 루 부부장은 2014년 5월∼2016년 6월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 주임 겸 중앙선전부 부부장을 지내며 사이버 검열을 주도해 ‘인터넷 차르’로 불렸다. 홍콩 밍(明)보는 23일 그가 조사를 받은 데는 시 주석을 기만하고 분노케 한 것도 작용했다고 전했다. 2014년 11월 시 주석이 참가한 가운데 저장(浙江)성 우전(烏鎭)에서 열린 제1회 ‘세계인터넷대회’를 그는 “세계 각국에서 참가해 성황을 이뤘다”고 홍보했다. 하지만 시 주석은 대회 참석자들이 중국인 해외 유학생이나 중국 내 외국인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분노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10월 열린 문화행사인 ‘문예공작좌담회’에서는 그가 인터넷 작가 두 명을 추천해 시 주석이 직접 칭찬을 했다. 하지만 이후 두 사람은 실력이 떨어지고 평판도 좋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3월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정부가 운영하는 인터넷 매체 ‘우제(無界)신문’에는 ‘충성 공산당원’이라고 밝힌 인물이 시 주석의 퇴진을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가 삭제됐다. 중앙선전부는 이 소동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2017-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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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윈 “성공 기업인 되려면 미래를 낙관하라”

    “머릿속에서 부정적인 사고를 몰아내라. 기업가는 낙관적이어야 한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중국 알리바바의 마윈(馬雲·53) 회장(사진)이 최근 홍콩에서 열린 ‘2017 점프스타터 경진대회’에서 예비 창업가들에게 이같이 조언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22일 마 회장이 창립 18년 만에 알리바바를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회사로 키운 경험을 바탕으로 5가지 조언을 했다고 전했다. 마 회장은 “위대한 기업인의 특징은 미래를 낙관하는 것”이라며 “당신이 무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같은 문제를 해결해도 남보다 어떻게 더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업의 성패를 가르고, 위대한 기업인이 되는 가장 대표적인 특징 하나만을 꼽으라면 ‘미래와 상황에 대한 낙관’ 한 가지라는 점을 줄곧 역설해 왔다. 이어 “사업가는 비전을 같이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며 “단순히 직업을 구하거나 능력이 있는 사람을 ‘사냥’하기보다 꿈을 같이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개인이 아닌 팀을 훈련시켜 함께 일하면 그 팀이 다시 창업가를 훈련시킬 것이라는 조언이다. 세 번째 덕목으로 강조한 것은 ‘희생정신’이다. “내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 생각하기보다 내가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무엇을 포기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엇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알리바바를 창업할 당시 인터넷과 인터넷 상거래 환경은 한마디로 ‘차가웠다’며 “다른 사람들이 이미 ‘핫(hot)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만 집중해선 안 되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모든 것이 당신에게 준비될 때를 기다리면 안 된다. 그때는 당신에게 돌아올 기회가 없다”고 적극적인 자세를 주문했다. 정부 당국이 “이 분야에 대한 모든 (지원) 준비가 돼 있다”고 기업인들에게 말한다면 다른 분야를 찾아 봐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SCMP는 6월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알리바바 게이트웨이 2017’ 행사 기조연설과 미 언론과의 인터뷰 등에서 밝힌 ‘마윈의 성공 비결과 경험’도 함께 소개했다. 마 회장은 “회사를 경영하려면 가급적 많은 여성을 고용하라”고 했다. “여성들이 남자들보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많고, 근육의 힘을 다투던 20세기와 달리 지혜를 비교하는 21세기는 여성이 보다 강력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젊은 예비 사업가들에게 참고할 만한 ‘인생 계획’도 제시했다. 20대에는 훌륭한 기업인이 운영하는 회사에 들어가 배우고, 30대에는 직접 자신의 사업을 해 보되 40대에는 자신이 강점을 가진 분야의 사업을 찾아보라고 권했다. 50대에는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기회를 주는 기업인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밖에 △누군가에게 퇴짜 맞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당신보다 더 똑똑한 사람을 고용하라 △넷스케이프나 야후가 그렇듯 모든 것이 항상 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라고 했다. 마 회장은 “기업가에게는 오늘이 어렵지만 내일은 더욱 어렵다”며 “일정한 보상을 얻기까지는 고난을 견디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모레는 아름다운 날이 기다리고 있는데 많은 사람이 그 전날 저녁에 사망해 버린다”는 비유로 인내의 미덕을 역설했다. 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2017-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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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AI로봇 의사자격증 땄다

    중국에서 무인자동차, 시를 쓰는 로봇 등 인공지능(AI) 개발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의사 자격증 시험을 통과한 ‘AI 의사 로봇’이 나왔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21일 AI 개발업체 아이플라이테크(iFlyTek)와 칭화(淸華)대 연구팀이 공동 개발한 AI 로봇 ‘샤오이(小醫)’가 8월 치른 의사자격시험에서 600점 만점에 합격선인 360점을 넘어 456점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샤오이는 국립의학시험센터가 출제한 문제를 다른 수험생들과 같은 시간에 풀되 ‘디지털 버전’으로 바꾼 문제에 답하는 방식으로 시험을 치렀다. 샤오이는 과거에도 한 차례 시험을 치렀으나 100점을 받는 데 그쳤다. 이후 샤오이는 의학 서적 수십 권을 숙독하고, 의료 기록 200만 건을 숙지했으며, 40만 건의 논문을 통독하며 ‘내공’을 쌓아 두 번째 응시에서 합격했다. 연구팀은 샤오이가 인간보다 우월한 암기 및 검색 능력만을 활용해 합격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2013년부터 의사자격시험 문제 절반 이상이 환자의 실제 사례에 관한 것이어서 개발팀은 임상 및 진단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샤오이의 알고리즘을 끊임없이 개선했다고 SCMP는 전했다. 연구팀은 “이번 시험 통과로 샤오이는 스스로 배우고, 추론하고, 판단을 내리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줬다”면서 “다만 샤오이가 수술에 투입되거나 실제 의사로서 활약하기보다는 의사가 문제를 인식하고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6월에는 ‘AI 수학’이라는 인공지능이 중국 대입 시험 중 수학에 처음 응시해 150점 만점에 105점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일반 학생이 받은 최고점 135점보다 아주 낮은 점수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2017-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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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쿠데타 배후조종설… 짐바브웨 내부서도 솔솔

    중국 정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발생한 군부 쿠데타의 배후에 중국이 있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다. 중국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쿠데타 계획을 미리 알고도 사실상 승인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내정 불간섭’을 명분으로 독재 정권이나 군부 정권을 지지해온 중국의 외교정책이 부메랑을 맞는 사례 중 하나라는 분석도 나온다. 현지 일간 짐바브웨메일은 20일자 기사에서 군부 쿠데타 발생 나흘 전인 10일 콘스탄티노 치웽가 육군 참모총장(61)이 베이징(北京)을 방문해 창완취안(常萬全) 국방부장을 만난 것을 중국 배후설의 근거로 들었다. 이에 중국 측은 “치웽가 총장의 방중은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 간 것”이라며 “짐바브웨 사태는 내부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주재 중국대사관도 20일 “서방 언론 등에서 중국 배후설을 제기하는 것은 중국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고 중-아프리카 관계에 쐐기를 박으려는 것”이라며 “사악한 의도가 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짐바브웨메일은 “사전에 중국으로부터 구체적인 지령을 받은 치밀한 쿠데타였다”고 강조했다. 이 신문은 “중국은 짐바브웨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인 1979년부터 무가베 대통령의 게릴라전을 지원하고 독재를 묵인해왔다”며 “그러나 경제적 무능으로 짐바브웨에 투자한 중국 기업들이 손실을 보기 시작한 데다 후계 문제로 불확실성이 더욱 커지자 무가베를 버리기로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은 짐바브웨의 최대 교역국이다. 다만 중국이 유혈사태 없이 친중파인 음낭가과 전 부통령이 권력을 승계하는 조건으로 쿠데타를 승인해 짐바브웨 군부도 자신들의 행위를 쿠데타로 부르지 않고 최대한 무가베에게도 예의를 갖추고 있다고 이 신문은 덧붙였다. 무가베 대통령이 퇴진을 거부하면서 짐바브웨 의회는 무가베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절차에 돌입했다. 짐바브웨 의회 상·하원에서 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 탄핵안이 통과되면 음낭가과 전 부통령이 내년 8월 총선 전까지 과도정부를 이끌고 자연스럽게 권력을 승계할 것이라는 관측이 높다. 중국이 군부 독재 정권을 지지하다 역풍을 맞은 것은 짐바브웨가 처음이 아니다. 중국은 서방이 인권 탄압 등을 이유로 제재를 하는 것에 아랑곳 않고 미얀마 군부 정권을 지지했다. 그러나 민주화가 진행되고 군부 독재가 종식되자 ‘탈중국’ 분위기가 높아졌다. 왕이(王毅) 외교부장이 최근 미얀마의 소수민족인 ‘로힝야족 인종청소’ 논란으로 곤경에 처한 아웅산 수지 국가자문역을 만나 지지를 약속하는 등 끌어안기에 나선 것도 민주화 이후 미국으로 기울고 있는 추세를 돌리기 위한 노력으로 풀이된다. 중국은 남미의 대표적인 반미(反美) 정권이던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정권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대대적으로 투자했다. 하지만 차베스 전 대통령이 2013년 사망한 이후 국가파산에 이르자 투자금도 회수하지 못했다. 미국의 뒷마당에서 영향력 확대를 위해 ‘묻지마 독재 지원 외교’를 펼친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동남아에서는 32년 장기 집권 중인 캄보디아의 훈 센 총리와 태국의 군부 정권이 중국과 가깝다. 서방 국가와 달리 중국은 독재를 문제 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나라들에서도 민주화가 진전되면 미얀마에서처럼 중국이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작지 않다. 중국은 북한의 세습 독재 정권에 침묵하고 자국 내 탈북자들을 북송하는 데에도 내정 불간섭 원칙을 내세운다. 하지만 북한을 미국과의 세력 다툼에서 완충지대로 활용하려는 지정학적 이익 때문에 중국이 김정은 정권의 핵·미사일 개발 폭주에 소극적으로 대응해 결국 동북아에 불안정을 가져오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평가가 많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카이로=박민우 특파원}

    • 2017-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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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진핑 측근’ 허이팅 中중앙당교 부교장 방한…“양국관계 매우 중요한 시기”

    대표단을 이끌고 방한한 허이팅(何毅亭)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 상무 부교장(장관급)이 21일 주한 중국대사관에서 가진 강연에서 “중한 관계는 지금 매우 중요한 시기다. 양국이 이해 협력을 강화해 안정적인 발전을 이루길 희망한다”고 관계 개선 의지를 밝혔다. 이어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21세기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에 한국도 포함된다”며 “일대일로 추진에서 한국은 중국과 좋은 파트너 될 수 있다”고 협력 확대를 제안했다. 허 부교장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측근으로 ‘시진핑 사상’을 고안하는 데 중요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부책임자인 중앙당교는 공산당 최고위 간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시 주석이 부주석 시절 교장을 지낸 곳이다. 추궈훙(邱國洪) 주한중국대사는 “허 부교장을 파견한 것은 중국이 중한 관계를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날 중국대사관에서 열린 19차 전국대표대회(당 대회) 결과 설명회에는 정치인 학자 언론인 한중교류단체 관계자 등 100여 명 참가했다. 허 부교장은 이날 2박 3일 일정으로 입국했으며 임성남 외교부 1차관과 면담하고 국회 부의장을 예방할 예정이다. 재계와 언론계 인사들과도 만날 것으로 알려졌다. 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201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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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학자 “중국, 주저말고 한미와 北급변사태 논의해야”

    쑹타오(宋濤)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특사로 방북하기 전날 중국 명문대 교수가 서울에서 열린 한국 정부 주최 국제포럼에서 북한 체제 붕괴 등 급변사태에 대비해 한미중 3국이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에 대한 중국 학계 내부의 반발이 확산되고 있다는 사례로 주목된다. 상하이(上海) 소재 퉁지(同濟)대 정치및국제관계학원 샤리핑(夏立平·사진) 원장은 16일 서울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열린 ‘2017 동북아 협력포럼’에서 “중국은 더 이상 주저 말고 미국 한국과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한 논의에 나설 때”라고 밝혔다. 이어 3국의 ‘비상 계획 대화’를 제안하면서 △북한 체제 붕괴 때 누가 북한의 핵무기를 통제할 것인가 △북한 난민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위기 시 북한의 질서 회복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위기 후 한반도의 정치적 정돈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을 의제로 제시했다. 그는 “중국이 보다 적극적으로 제재에 참여하고 있지만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전망에는 비관론이 많다”며 “북한이 중국의 외교 노력을 무시하면서 핵과 미사일 도발을 계속하는 사태의 비중과 상황의 위험성 등을 고려할 때 이제 중국은 주저 없이 미국 한국과 진지한 대화에 나설 때”라며 이같이 주장했다. 샤 교수는 이런 주제들은 중국으로서는 매우 골치 아픈 것이지만, 미중이 이와 관련해 대화와 협상을 벌이는 것은 양국 간 전략적 교착상태를 푸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북한 붕괴를 대비하며 미중이 소통을 강화하고 관계를 호전시킬 수 있다는 것으로 북한에는 민감한 주장이다. 샤 교수는 이에 앞서 “북한이 협상 테이블로 돌아올 수 있도록 외교적, 경제적 유인책을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중국 정부가 제안한 쌍중단(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중단과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첫 번째 조치로 언급했다. 외교부와 세종연구소 등이 주최한 이날 포럼에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참석해 축사를 했다. 지역 안보, 환경, 원자력 안전, 사이버 스페이스 등의 분야가 논의된 포럼에는 조셉 윤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천하이(陳海) 중국 외교부 아주국 부국장, 나마즈 히로유키(鯰博行)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 심의관 및 러시아 호주 뉴질랜드 등의 당국자도 참가했다. 북한과 특수 관계인 중국은 불과 수년 전만 해도 북한 체제 붕괴 등 급변사태에 관한 공개적인 논의를 금기로 여겼다. 하지만 핵·미사일 개발로 국내의 대북한 여론이 점차 악화되고 북한이 중국에 ‘전략적 자산’이 아닌 ‘전략적 부채’로 인식되면서 학자들 사이에서는 점차 북한과의 관계를 바꿔야 한다는 논의가 확대되고 있다. 자칭궈(賈慶國) 베이징(北京)대 국제관계학원장은 9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은 평화적인 해결을 원하지만 제재로 인해 북한에서 경제적 동란과 권력 투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또 미국이 예방적인 공격을 가할 수도 있다”고 북한의 급변 사태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어 “(중국은) 사전에 준비해 관련국(한국과 미국)과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쑨싱제(孫興杰) 지린(吉林)대 교수도 홍콩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중 접경 지역에서 핵무기나 난민 위기 가능성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은 좋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앞서 올 4월에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 때문에 외부 군사 공격을 받더라도 중국은 방어해 줄 의무가 없다는 주장이 중국 학자들 사이에서 나오기도 했다. 북-중 양국이 1961년 7월 ‘조중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 조약’을 체결했지만 북한이 유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어기고 핵무기를 개발하면 이 조약에 따른 군사지원 의무도 없다는 논리였다. 상하이 군사 전문가 니러슝(倪樂雄)은 홍콩 언론 인터뷰에서 “미 지상군이 침공하면 지원할 필요가 있지만 북한이 NPT 조약을 어긴 것은 도와주지 않아도 될 강력한 이유”라고 말했다. 샤 교수도 이번 발표에서 “북한은 중국의 안보 이익과 지역 안정을 해치면서까지 핵 프로그램에서 손을 떼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며 이에 따른 제재 강화와 급변 사태 논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201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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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힝야족 사태 해결 팔 걷은 中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이 미얀마의 실권자 아웅산 수지 국가자문역과 만나 로힝야족 사태 해결 방안을 제시하며 적극적인 개입 의지를 나타냈다. 타국의 내정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외교 원칙으로 삼고 있는 중국이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간 뜨거운 감자인 ‘로힝야족 인종 청소’ 문제에 개입하려는 것은 이례적이다. 일대일로(一帶一路·21세기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가 잇따라 제동이 걸리고 있는 것을 외교적으로 타개하고 미국으로 기우는 미얀마를 다시 끌어들이기 위한 다목적의 노림수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1일 중국 관영통신 중국신원왕(新聞網)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에 따르면 왕 부장은 19일 미얀마 수도 네피도에서 수지 자문역을 만나 로힝야족 사태 해결을 위한 3단계 방안을 제시했다. 미얀마군과 반군이 휴전하고 질서와 안정을 되찾는 것, 미얀마와 방글라데시가 평등한 조건에서 협의해 난민 문제를 푸는 것, 국제사회가 로힝야족이 밀집한 라카인주의 개발을 돕는 것 등이다. 왕 부장은 수지 자문역에게 “중국은 라카인주의 개발에 도움을 주고 역할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수지 자문역도 “중국이 제시한 3단계 방안에 찬성한다”며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수지 자문역은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 논란과 관련해 노벨평화상을 박탈해야 한다는 비난까지 나오는 등 궁지에 몰리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은 로힝야족 해결 과정에서 수지 자문역을 도와 미얀마 민주화와 미국과의 수교 이후 미국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을 되돌리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6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얀마에 대한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결의안 채택이 시도됐으나 중국이 거부권을 행사해 막았다. 왕 부장은 미얀마 방문 하루 전인 18일에는 방글라데시를 방문해 라카인주 개발 지원 계획을 밝히며 로힝야족을 강제로 돌려보내지 않고 협의를 통해 해결할 것을 설득했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201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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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이두-알리바바-텅쉰, 中AI 선봉에

    중국 정부가 첨단 인공지능(AI) 산업 육성을 위해 3대 인터넷 기업 바이두(百度), 알리바바, 텅쉰(騰訊)을 집중 지원하기로 결정했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16일 보도했다. BAT로 불리는 이들 기업이 ‘3두 마차’ 역할을 맡아 중국의 미래 경제를 이끌게 된 것이다. 중국 정부는 이를 위해 과학기술부 국가발전개혁위원회 등 15개 부처 합동의 ‘차세대 AI 발전계획 추진 사무실’을 설치하고 전문가 27명으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를 구성키로 했다고 밝혔다. 우선 중국 최대 인터넷 포털로 무인자동차 개발에 집중하고 있는 바이두에는 구글 테슬라 등과의 무인자동차 경쟁에서 앞설 임무가 주어졌다. 바이두는 올해 7월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와 정보기술(IT) 업체 등 50개 기업과 손잡고 세계 최대 자율주행차 개발 연합인 ‘아폴로 계획’을 출범시켰다. 이 개발 연합에는 인텔 엔비디아 등 미국 IT 기업과 포드(미국), 다임러(독일), 창청(중국) 등 자동차 제조회사 그리고 보쉬 등 자동차 부품회사 등이 참여했다. 아폴로 계획은 구글의 자율주행차 개발 프로젝트인 ‘웨이모’를 따라잡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18년까지 고속도로와 시내 도로에서 기술 적용을 완료하고 2019년 자율주행차를 상용화한다는 계획이다. 세계 최대 인터넷 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는 ‘AI 스마트 도시 건설’ 개발 프로젝트를 맡았다. 이른바 ‘시티 브레인(City Brain)’ 계획이다. 알리바바가 대만계 전자업체 폭스콘과 손잡고 2016년 10월부터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에 구축한 스마트 도시는 성공적이라는 평가(국제 저명 과학잡지 뉴사이언티스트)를 받고 있다. AI로 관리되는 항저우가 범죄, 사고 및 교통 혼잡이 감소하는 등 미래형 도시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알리바바는 또한 허베이(河北)성 바오딩(保定)시 슝안(雄安)신구에 AI 등 첨단 기술이 총집약된 미래형 스마트 도시를 건설할 계획이다. 클라우드 기반 인프라와 사물 인터넷을 도시의 신경망 네트워크로 삼고 AI를 도시의 두뇌로 삼는다는 핵심 내용이다. 이 도시가 완성되면 무인 자율주행차가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고 쓰레기가 자동 분류돼 처리되며 생체인식을 통해 보안성이 강화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중국판 카카오톡인 ‘웨이신(微信)’을 운영하는 텅쉰은 ‘AI 의료영상 개발’ 임무를 맡았다. 올해 5월 바둑 세계 랭킹 1위 중국 커제(柯潔) 9단을 꺾은 뒤 은퇴를 선언한 구글의 AI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도 AI 의료영상 개발로 방향을 틀었다. 텅쉰은 8월 ‘텅쉰미잉(騰訊覓影)’이라는 AI 영상의학 시스템을 내놓았다. 6개 AI 시스템으로 구성된 텅쉰미잉은 식도암, 폐암, 당뇨병, 자궁경부암과 유선암 검사와 진단 기능을 갖추고 있다. 이 중 가장 높은 기술력을 축적한 식도암 판독 기술은 정확도가 90%에 달한다고 텐센트 측은 밝혔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201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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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진핑, 트럼프와 회담뒤 ‘대북 특사’… 美-中 물밑 조율 거친듯

    중국 공산당의 최대 행사로 5년마다 열리는 전국대표대회(당 대회)가 끝나면 중국은 주요국에 당 대회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특사나 대표단을 파견했다. 중국이 17일 쑹타오(宋濤) 대외연락부장을 북한에 파견하는 것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권한이 대폭 강화된 지난달 19차 당 대회 결과를 설명하겠다는 것이 대외적인 명분이다. 하지만 이번 방북은 여러 측면에서 전통적인 대북 ‘방문외교’의 성격이 강하다. 과거 북한이 핵·미사일 발사 도발로 사고를 치면 중국이 고위 인사를 보내 달래고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는 것을 말한다. 우선 북한이 올해 9월 15일 이후 60일 동안 도발을 멈춘 상황이고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 한국 문재인 정부가 북한과의 대화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상황에 방북이 이뤄진다. 베이징(北京)의 한 소식통은 “쑹 부장이 방북한다는 것은 이미 베이징 외교가에서 알려진 사실이지만 트럼프 대통령 방중 이후 방북이 이뤄진 것은 미중이 북핵 문제에 대해 조율을 마치고 북한과 본격 논의하려는 수순으로 볼 수 있다”고 의미를 풀이했다. 지난해 1월 6일 4차 핵실험 이후 2년 가까이 국제사회와 담을 쌓고 핵·미사일 완성에 몰두해 온 북한이 쑹 부장의 방북을 받아들인 것 자체가 중국의 참여하에 강화되고 있는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국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미국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의 핵 및 미사일 실험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면서 강 대 강의 벼랑 끝 대결로 치닫기보다는 대화를 탐색하려는 의중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북한 김정은은 올해 8월 전략폭격기 B-1B의 동해 북방한계선(NLL) 이북 비행훈련 등 미국의 강력한 대북 군사 압박에 심각한 위협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참수작전 등을 사전에 탐지하고 막는 데 중국의 힘이 불가피하다는 현실 인식을 하는 계기가 됐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중국도 지난달 당 대회를 전후로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고 있는 맥락에서 북한과의 관계도 개선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도 15일 인터넷판에서 긴급 뉴스로 전하며 “북-중 관계 변화의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고 보도했다. 국제사회의 관심은 과연 쑹 부장의 방북이 북한의 핵·미사일 폭주를 억제하고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가에 모아지고 있다. 김흥규 아주대 교수 겸 중국연구소장은 “북한이 쑹 부장의 방북을 받아들인 것만으로 핵동결 등 국제사회의 압박을 받아들였는지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면서 쑹 부장의 방북 의미를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다만 “북한도 중국이 참여하는 제재가 강화되는 가운데 미국 등에서 요구하는 대화 국면으로 전환하기 위해 탐색을 벌이는 것으로는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쑹 부장은 17, 18차 당 대회 이후 각각 북한에 특사로 보낸 류윈산(劉雲山) 당시 정치국 위원 겸 서기처 서기와 리젠궈(李建國) 당시 정치국 위원에 비해 직급이 낮은 당 중앙위 위원에 불과하다. 김 소장은 “쑹 부장의 북한 방문이 베트남 라오스 쿠바 방문 다음에 이뤄진 것도 북한에 대한 모종의 메시지”라며 “대외정책 담당인 왕후닝(王滬寧) 상무위원을 파견했다면 의미는 달랐을 것”이라고 말했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2017-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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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진핑 특사 17일 방북… 김정은 만날듯

    중국의 고위급 인사가 2년여 만에 북한을 방문해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로 경색된 양국 관계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지 주목된다. 15일 관영 신화통신은 쑹타오(宋濤·62·사진)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지난달 열린 제19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 대회)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특사 자격으로 17일 북한을 방문한다고 보도했다. 겅솽(耿爽) 외교부 대변인도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북한 측과 양국, 양당의 공동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게 된다”고 말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도 사전에 조율한 듯 관련 사실을 보도했다. 중국의 고위급 인사 방북은 지난해 1월 6일 북한의 4차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잇단 미사일 발사 시험으로 북-중 관계가 경색되고 유엔의 대북 제재가 강화된 이후 2년여 만에 처음이다. 북한이 9월 15일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발사 이후 2개월여 동안 도발을 멈춘 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시 주석과 북핵 문제를 놓고 깊은 대화를 나눈 직후 이뤄지는 것이다. 과거 전례로 볼 때 쑹 부장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을 만날 가능성이 높고 이 자리에서 시 주석과 국제사회의 우려를 전달한 뒤 6자회담 등 대화 재개를 조언할 것으로 보인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2017-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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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하이에서만 35년 공직생활… 장쩌민과 가깝지만 계파색 엷어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려면 주요 지방의 서기 혹은 성장을 최소한 두 차례 거쳐야 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하지만 한정(韓正) 신임 상무위원은 상하이(上海)를 벗어난 적이 없다. 파격적인 인사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그는 상하이 소재 대학을 졸업한 뒤 상하이의 국영 중소 창고관리업체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82년 상하이시 공청단에서 공직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35년을 상하이에서 공직자로 지냈다. 한 서기의 상무위원 진입은 제2의 도시이자 경제 중심인 상하이의 수장을 맡은 업무 능력이 바탕이 됐지만 정치력과 운도 작용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한 서기는 2003년 49세에 상하이 시장으로 취임했는데, 50년 만에 나온 최연소 상하이 시장이었다. 9년간 시장을 맡아 ‘2인자’로 근무하는 동안 천량위(陳良宇) 시진핑(習近平) 위정성(兪正聲) 등 3명의 서기를 모셨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과도 인연이 깊어 ‘상하이방’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계파 색채는 짙지 않다. 여러 계파에 걸쳐 있는 점은 상무위원에 오르는 데 밑거름이 됐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상하이 서기 중 상무위원에 진입하지 못한 인물은 비리로 낙마한 천량위밖에 없을 정도로 ‘상하이 서기’는 상무위원행 직행이 보장된 요직이다. 한 서기가 시장과 서기로 있는 동안 상하이는 2010년 세계엑스포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2012년에는 중국 첫 자유무역지대를 출범시켰다. 2016년 디즈니랜드도 개장했다. 한 서기는 ‘국내총생산(GDP) 지상주의’에서 탈피해 민생과 환경도 강조하는 질적 성장을 추구한 점도 평가받는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26일 “상하이를 세계의 금융 중심이자 첨단기술 혁신 중심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했다. 몇 번의 고비도 무난히 넘겼다. 2006년 9월 장쩌민계의 천량위 전 서기가 사회보장기금 횡령 사건으로 18년형을 선고받으며 낙마할 때 시장이었던 그도 동반 책임을 지고 물러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하이 서기 대리를 맡으며 오히려 승진했다. 2007년 3월 저장(浙江)성 서기였던 시 주석이 상하이 서기로 오면서 ‘상하이방 물갈이’ 차원에서 물러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해 10월까지 다시 시장으로 재직했고 약 8개월간 시 주석과 함께 근무하는 동안 오히려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가 이처럼 위기를 넘긴 데는 장 전 주석이나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주석과의 관계 때문이라는 설도 없지 않았다. 한정이 상하이 구정부와 시정부 등에서 공청단 간부로도 근무해 상하이방과 공청단에 ‘이중 보험’을 들었던 효과를 봤다는 얘기도 나온다. 상하이에서는 2014년 12월 31일 와이탄(外灘) 압사 사고로 36명이 사망하고 2010년 11월에는 빌딩 화재로 58명이 숨지는 등 대형 사건 사고도 잇따랐다. SCMP는 “웬만한 지방 정부 수장이라면 침몰할 수도 있는 사건들인데 한정은 머리를 수면 위로 내밀어 생존했다”고 표현했다. ‘서열 7위 상무위원’인 한정은 장가오리(張高麗) 전 상무위원이 맡았던 상무 경제부총리를 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이 ‘중진국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쉽지 않은 과제를 맡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201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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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력은 군중에게서”… 下放고난 이겨내고 대륙황제로

    2007년 10월 22일 오전 10시 36분 중국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 1층 둥다팅(東大廳). 이날 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17기 1중 전회)에서 선출된 정치국 상무위원 9명이 서열 순으로 차례로 걸어 나왔다. 10년 뒤인 25일 19기 1중 전회에서 선출된 상무위원 7명이 내외신 기자들에게 소개된 것과 장소도 상황도 같다. 2007년 당시 사람들의 눈길을 확 끌어당긴 것은 서열 6위 시진핑(習近平) 상하이(上海) 서기가 서열 7위 리커창(李克强) 랴오닝(遼寧)성 서기보다 앞서 걸어 나온 장면이었다. 당 대회 한 달 전까지도 리커창이 후계자 경쟁에서 앞설 것이라는 분석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불과 10년 전 우여곡절 끝에 리커창을 제쳤던 시 주석이 집권 2기를 맞아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사상을 당장(黨章)에 삽입하는 등 마오쩌둥(毛澤東) 반열에 올랐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그가 ‘시황제로 가는 길’에는 몇 번의 변곡점과 인생의 물줄기를 바꾸는 선택들이 있었다. 첫 번째 고비는 문화대혁명 이후 하방된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에서 탈출했다 되돌아 간 사건. 부총리 시중쉰(習仲勳)의 아들로 베이징 고위층 거주지인 중난하이(中南海)에서 나고 자란 ‘금수저’ 시진핑은 문화대혁명 시절 중학교를 졸업한 뒤 1969년 16세의 나이에 옌안 량자허(梁家河)로 보내졌다. 부친이 마오의 눈 밖에 나서 낙마한 데 따른 것이다. 농촌 노동이 힘든 데다 농민들과의 관계도 원만치 않아 시진핑은 3개월여 만에 기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도망쳐 버린다. 그때 팔로군 출신 이모부가 “군중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타일러 시진핑을 다시 량자허로 돌려보냈다. 시진핑은 1975년 칭화(淸華)대 화공과에 합격해 베이징에 돌아오면서 7년간의 하방생활을 마쳤다. 시진핑이 량자허로 되돌아가지 않았다면 출세는커녕 두고두고 일생의 걸림돌이 됐을 것이다. 부친 문제로 시진핑은 량자허 시절 10번이나 공산당 가입을 신청했으나 거부되고 11번째에 가입했다. 군중과 함께하며 인민의 공복(公僕)이 되는 길도 배우는 등 량자허 시절은 훗날 그에게 큰 정치적 자산이 됐다. 량자허는 시 주석의 하방생활을 기념하는 ‘성지’로 조성돼 있다. 두 번째 갈림길은 시 주석이 영국 유학의 유혹을 뿌리치고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의 지방관리의 길로 들어선 것. 시 주석은 대학 졸업 후 중앙군사위원회 겅뱌오(耿飇)의 비서로 일하며 정치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첫 번째 부인 커링링(柯玲玲)은 커화(柯華) 전 주영 대사의 막내딸로 시 주석에게 함께 영국 유학을 가자고 권했다. 하지만 시 주석은 지방관리를 시작으로 지도자로 가는 길을 택하며 이를 거절했다. 이후 이상 및 성격 등이 맞지 않는 커링링과 이혼하고 아홉 살 아래의 군인 국민가수 펑리위안(彭麗媛)과 재혼했다. 시진핑이 첫 번째 부인의 권유대로 외국 유학에 나섰다면 군중과 함께해야만 하는 최고위 정치 지도자는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리커창 총리도 대학 졸업 후 유학과 공산주의청년단 간부의 길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해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에 이어 공청단의 계보를 잇는 지도자가 됐다. 세 번째는 푸젠(福建)성 스캔들. 시 주석이 푸젠성 샤먼(厦門)시 부시장을 시작으로 푸젠성장을 마칠 때까지 18년간 크고 작은 비리 사건이 잇따랐다. 800억 위안 규모의 ‘샤먼 위안화(遠華) 그룹 밀수 사건’도 터졌다. 상관이나 부하들이 대거 구속되고, 캐나다로 도주한 주모자가 시 주석과의 관계설을 퍼뜨리기도 했으나 그의 정치 인생에 제동을 걸지는 못했다. 만약 당시 비리 사건에 휘말렸다면 반부패를 명분으로 집권을 강화하고 있는 현재와 같은 지도자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네 번째 고비는 리커창과의 후계자 경쟁이었다. 2007년 당 대회에서 시 주석은 리커창보다 서열이 하나 앞서 상무위원에 진입했으나 2012년 총서기에 오르는 데 우여곡절을 겪었다. 통상적으로 상무위원에 진입한 이듬해에 차기 대권을 예약하는 자리인 ‘중앙군사위 부주석’에도 올라야 했으나 2년이나 선임되지 못했다. 일부에서는 시 주석이 18차 당 대회에서 최고권력자가 되기 위한 최후의 암투를 벌였을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았다. 시진핑 당시 국가부주석이 일정 기간 공개 활동을 하지 않아 ‘잠적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상당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시 주석은 집권 1기 5년간 반부패 숙정을 통해 수많은 잠재적 경쟁자 등 정적들을 쳐냈다. 하지만 집권 2기를 시작하면서 노골적으로 권력욕을 드러내기보다 정교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했다. 정치국원이나 상무위원 나이 제한인 ‘7상8하(七上八下·당 대회 시기 67세면 유임, 68세 이상 퇴임)’ 불문율은 깨지 않고, 마오쩌둥 전 주석의 전유물이었던 ‘당 주석’ 칭호는 탐내지 않았다. 그 대신 뚜렷한 후계자를 상무위원회에 진입시키지 않아 격대지정(隔代指定·차차기 최고지도자를 미리 지명해 권력 승계를 안정화하는 것)의 관례를 깼다. 집권 후반의 권력 누수를 막고 장기 집권 가능성을 연 것이다. 이에 앞서 지난해 10월 18기 6중 전회에서 ‘시 핵심’이라는 칭호를 받아 권력 집중의 분위기를 확산시키기도 했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2017-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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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새 지도부는 ‘지한파’… 수차례씩 방한, 기업인들과도 인연

    중국 공산당의 최고 정책 결정기구인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새로 들어온 5명의 상무위원은 과거 지방 정부 수장 등을 지낼 때 한국을 방문하는 등 인연이 깊다. 이들이 최고지도부에 진입한 만큼 앞으로 한중 교류에도 보다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26일 KOTRA 베이징(北京)무역관에 따르면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최측근으로 서열 3위의 리잔수(栗戰書) 상무위원은 14년 전인 2003년 4월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시 서기 시절 하이테크산업 유치를 위해 시안경제대표단을 이끌고 서울을 찾았다. 2006년 9월 헤이룽장(黑龍江)성 부서기 시절에는 교류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충북대표단이 하얼빈(哈爾濱)을 방문했을 때 대표단과 환담하는 등 양측 간 교류 협력 강화에 적극적이었다. 2014년 7월 시 주석이 방한했을 때는 중앙서기처 서기와 중앙판공청 주임을 겸임하며 시 주석을 수행했다. 올해 7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시 주석 간 한중 정상회담 때도 수행했다. 경제통인 왕양(汪洋) 상무위원도 한국 경제 인사들과 교류 경험이 많다. 광둥(廣東)성 서기 시절인 2009년 한국 외교통상부의 초청으로 방한해 이명박 전 대통령과 오세훈 전 서울시장,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등을 만났다. 포스코 및 LG디스플레이 사장 등 기업인과도 교류했다. 국무원 부총리 시절 ‘2015 중국 관광의 해’를 맞아 그해 1월 한국을 찾아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과 구본무 LG그룹 회장을 만나고, 이듬해 3월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만나는 등 한국 기업 총수들과 두루 교류했다.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에 이어 시 주석까지 지도자 3명의 책사로 활동한 정책 브레인 왕후닝(王호寧) 상무위원은 정상회담을 수행하면서 한국을 자주 찾았다. 2008년 8월 후 전 주석 방한 시 ‘주석 특별비서’ 자격으로 청와대 정상회담에 동행했고, 2014년 7월 시 주석 방한 때도 시 주석을 수행했다. 왕 위원은 2001년 9월 장 전 주석이 북한을 방문할 때 동행해 남북을 두루 경험했다. 7월 한중 정상회담도 수행했다. 자오러지(趙樂際) 상무위원은 산시성 서기 시절 반도체 공장 설립을 추진하던 삼성과 인연이 많다. 2012년 3월 당시 김중종 삼성전자 사장과 면담했고, 같은 해 4월 ‘산시성-삼성전자 전략적 협력 체결식’에서 권오현 대표이사와 만났다. 이런 인연으로 삼성 중국 반도체 생산단지 건설 기공식에도 참석했다. 이에 앞서 2007년 주시안 총영사관 개관식에 참석했다. 한정(韓正) 상무위원은 상하이(上海)에서 오래 근무해 이곳을 중국 진출의 교두보로 삼은 한국 기업인들과 인연을 맺었다. 2012년 부산과 우호협력 업무협약을 맺었고 부산시 초청으로 부산을 방문하기도 했다. 상하이시 서기 시절 기업인으로는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재용 부회장 등을 만났다. 중국 중앙정부 지도자들은 지방 정부 수장을 거쳐 승진하는 것이 보통이다. 한중 간에는 지방 정부 간 교류가 활발해 고위 지도자들도 한국과 인연을 맺을 기회가 많다. 시도지사협의회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224개 지자체(광역·기초)가 중국 254개 지방 정부와 우호 및 자매도시 관계를 맺고 교류 중이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2017-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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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힘 빠진 2인자 리커창의 수모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제19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 대회)를 마치고 집권 2기를 맞으면서 ‘마오쩌둥(毛澤東) 반열’에 올랐다는 관측이 나오는 등 끝없이 비상하고 있다. 반면 정치국 상무위원에 유임된 리커창(李克强·사진) 총리는 앞으로 5년간 총리를 연임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주요 경제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집행’에 집중할 것이라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26일 전했다. 집단지도체제하의 중국에서 주요 경제 정책의 사령탑은 총리였으나, 시 주석의 권력 강화와 함께 리 총리의 입지는 더 좁아지고 있는 형국이다. 2007년부터 시 주석과 대권 경쟁을 벌인 이후 3번째로 수난을 당하는 ‘2인자의 비애’를 곱씹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리 총리의 첫 번째 좌절은 2007년 10월 17차 당 대회에서 상무위원에 진입하면서 시 주석보다 한 단계 낮은 7위가 된 것이다. 그는 중앙위원이나 지방 정부 서기 승진 등에서 줄곧 시 주석보다 빨라 당 대회가 열리기 한 달 전까지도 차기 대권 경쟁에서 한발 앞섰다는 관측이 많았다. 하지만 여러 원로의 지지를 얻은 시 주석에게 밀려 5년 후 국가주석 자리를 내줬다. 그가 총리가 된 이후에는 총리가 관할하던 중앙재경영도소조를 시 주석이 맡아 챙기면서 ‘총리=경제’라는 등식이 깨졌다. 리 총리는 중저속 성장과 내수형 경제로 전환 중인 중국 경제의 구조조정 방법 등에 대해 시 주석과 견해를 달리하면서 주요 정책 결정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리 총리가 속한 공산주의청년당이 반부패 집단으로 몰락하는 수모도 겪었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 시절 주룽지(朱鎔基) 총리는 국유기업 개혁과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위한 노력 등을 주도해 ‘중국의 고르바초프’라는 찬사를 들었다. 후진타오(胡錦濤) 주석과 10년 임기를 함께한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글로벌 금융위기 파고가 중국에 밀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 4조 위안(현재 환율로 약 678조 원)의 내수 진작책을 발표했다. 2010년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2위 경제대국이 된 뒤 위안화의 국제화에도 앞장섰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2017-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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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진핑 외교현장 ‘그림자 수행’… 대외전략 설계 ‘왕의 남자’

    리잔수(栗戰書) 당 중앙판공청 주임은 올해 만 67세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보다 세 살 위다.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중 최연장자로 상무위원 연령 제한 불문율인 ‘7상8하(七上八下·당 대회 열리는 해 만 67세는 유임하고 68세 이상은 퇴임)’에 의하면 턱걸이로 통과됐다. 왕치산(王起山) 중앙기율검사위 서기가 올해 69세로 물러난 것과 대비된다. 그가 이번 당 대회에서 상무위원에 진입할 것임은 일찌감치 예견됐다. 시 주석 집권 1기 5년 동안 왕후닝(王호寧) 당 중앙 정책연구실 주임과 함께 시 주석의 외교 현장에서 그림자처럼 수행해 ‘왕의 두 남자’로 불릴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 주석의 신형대국관계 구상 등 굵직한 외교 관계의 기본 틀은 두 사람 머리를 벗어난 것이 없다고 봐야 한다. 리 주임은 2015년에 이어 올해 4월에도 러시아에 특사로 파견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만나는 등 통상적인 중앙판공실 주임 역할 이상을 했다. 시 주석과의 오랜 인연은 리 주임의 정치적 자산의 뿌리로 거론된다. 리 주임은 1983년 허베이(河北)사범대 야간반을 늦깎이로 졸업한 뒤 허베이성 우지(無極)현 서기(1983∼1985년)가 됐다. 한 해 전 우지현 인근의 정딩(正定)현 서기(1982∼1985년)로 부임해 첫 지방관리 생활을 시작한 시 주석과 자주 만나 교류했다. 허베이성의 스자좡(石家庄) 청더(承德) 등에서 근무하던 리 주임이 1998년 옮겨간 산시(陝西)성은 시 주석의 부친 시중쉰(習仲勳)의 고향이자 항일전쟁 시기 활동 무대였다. 시 주석도 문화대혁명 때 하방된 곳이기도 하다. 리 주임 집안은 허베이성에서 지하당원으로 활약했던 혁명가 집안이다. 넷째 할아버지는 1927년 공산당에 입당한 핑산(平山)현 제1호 공산당원이다. ‘전쟁 통지서’라는 뜻의 ‘잔수(戰書)’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도 그런 이유라고 한다. 숙부 리정퉁(栗政通)은 국공 내전 중 산시성에서 전사했다. 그의 가족은 시 주석의 모친과도 인연이 깊은 것으로 전해졌다. 31개 성 시 자치구의 서기와 성장(자치구는 주석)만도 62명인 중국에서 최고 권력자와의 인연만으로 승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업무 능력을 인정받고 실적이 있어야 하며 큰 실책이 없어야 경쟁자보다 한발 앞서 갈 수 있다. 시 주석이 정치인으로서 리 주임을 높이 평가하게 된 계기는 리 주임이 구이저우(貴州)성 서기(2010∼2012년)로 근무할 당시 국가부주석으로 현지 시찰을 나왔을 때라고 한다. 2011년 5월 8일부터 3박 4일간 리잔수는 시진핑의 모든 일정을 동행했다. 당시 시진핑은 리잔수의 개혁사상과 실사구시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리잔수는 이듬해 7월 중앙판공청 부주임으로 중앙 무대로 전격 발탁되어 올라온 뒤 부패 혐의로 낙마한 링지화(令計劃)의 뒤를 이어 1개월여 만에 주임으로 초고속 승진한다. 총서기 비서실장으로 ‘문고리 권력’인 당 중앙판공청 부주임에서 주임으로 이처럼 빨리 승진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리 주임은 지방 정부 근무 경험도 많아 화베이(華北)와 시베이(西北) 둥베이(東北) 등을 두루 근무한 ‘싼베이(三北) 간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 최고 권력자에 대한 충성심을 발휘해 계파의 지원도 얻었다. 지난해 6월 25명의 정치국원 중에서는 처음으로 시 주석을 ‘핵심’으로 지칭하며 충성 경쟁에서 앞서 나갔다. 올해 2월에는 ‘시 주석의 포괄적 이론 체계’를 당장에 삽입할 것을 주창해 이번 당 대회에서 이뤄진 당장(黨章) 개정안에 ‘시 사상’이 들어가는 데 기여했다. 1980년대 5년가량 허베이성 공청단 서기를 지낸 이력이 있어 그의 중용은 공청단파에 대한 포용의 의미도 없지 않다. 시안시 당서기로 재직하던 2003년 투자 유치를 위해 한국에 왔을 때 “한국의 도전정신과 창의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소감을 남겼다. 취미는 무협드라마와 전통 경극 관람으로 알려졌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리잔수는1950년 8월생(67세), 허베이(河北)성 핑산(平山)현 허베이사범대 야간대 졸업, 스자좡 재정학교 물가전문학1972∼1983년 허베이성 스자좡 상업국 부주임 등 1983∼1985년 〃 우지(無極)현 서기1985∼1990년 스자좡 부서기, 허베이성 공청단 서기1990∼1998년 허베이성 청더(承德)시 부서기 1998∼2003년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시 서기 등2003∼2010년 헤이룽장(黑龍江)성 부서기, 부성장, 성장2010∼2012년 구이저우(貴州)성 서기2012∼2017년 중앙판공청 부주임, 주임, 정치국원2017년 10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 2017-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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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무위, 마오시절엔 보좌기구 전락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 시절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중국의 집단지도체제를 상징하는 제도였다. 상무위원들은 국내외 주요 현안에서 ‘n분의 1’의 투표권을 행사했다. 명실상부한 당 최고 정책결정기구였다. 25일 새로 선출된 제19기 정치국 상무위원 7명의 구성에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계열이 3, 4명을 차지해 집단지도체제의 성격이 크게 약화된 것처럼 공산당 최고 정책결정기구인 상무위원회는 그 위상과 역할이 시대에 따라 풍상을 겪었다. 당에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이 처음 설치된 것은 1927년 5월 제5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에서다. 천두슈(陳獨秀) 장궈타오(張國燾) 차이허썬(蔡和森) 3명이 전부였다. 마오쩌둥(毛澤東)도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군에 쫓겨 대장정을 하던 중이던 1935년 1월 구이저우(貴州)성 쭌이(遵議)의 제6기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중앙서기처 서기 겸 상무위원에 오르면서 최고 실력자가 됐다. 신중국 이후 마오가 ‘당 주석’으로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동안 상무위는 부주석 및 약간 명의 상무위원으로 구성된 보좌기구로 전락했다. 덩샤오핑(鄧小平)도 ‘군사위원회 주석’이라는 직함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상무위원 수는 문화대혁명 초기 11명까지 늘어나기도 했지만 후 전 주석 시절 9명으로 늘었다 시 주석 집권 후 7명으로 줄었다. 상무위원에 한족 외의 소수민족이나 여성은 진입한 적이 없는 것도 특징이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2017-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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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치산 黨서 퇴진… 국가부주석 가능성

    25일 제19차 전국대표대회(당 대회) 1차 전체회의에서 신임 정치국 상무위원 7명이 공개되기까지 최대 관심은 왕치산(王岐山·사진) 중앙기율검사위 서기의 진퇴 여부였다. 올해 69세인 왕 서기의 퇴임 여부는 2022년 69세가 되는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거취와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왕 서기는 24일 발표된 중앙위원 204명 명단에서 빠지며 퇴임이 확정됐다. 왕 서기는 시 주석 집권 1기 5년간 반부패 숙정 과정을 주도해 ‘부패 공무원의 저승사자’라는 말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가 ‘7상8하’ 불문율에 따라 물러난 것은 시 주석이 장기 집권을 시도한다는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왕 서기는 나이 제한 원칙 때문에 당 고위직에서는 물러났으나 여전히 중요한 직책을 맡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내년 3월 국가부주석에 임명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경제 전문가인 그는 2009년 시작된 ‘미중 전략경제대화’를 기획했고, 2012년까지 부총리를 맡아 외교와 대외 금융 부문에서 활동했다. 그가 앞으로도 경제 분야에서 일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한때 그가 유임되면 총리를 맡을 것이라는 전망도 성장률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그의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평가에 따라 나온 것이다. 일부에서는 그가 공직자 전체를 대상으로 사정을 총괄하기 위해 내년 3월 발족하는 ‘국가감찰위원회’의 수장을 맡을 것이라는 보도도 있다. 이럴 경우 후임 중앙기율위 서기와 함께 반부패 칼잡이 역할을 지속할 수 있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2017-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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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黨章, 문화혁명 시기엔 개인숭배 도구로

    24일 개정된 ‘중국공산당 장정(章程)’에 포함된 ‘시진핑(習近平)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의 핵심 목표 중 하나는 ‘치국이정(治國理政)’이라는 시 주석의 반부패 숙정 임무를 지속하고 불균등 발전에 따른 부작용을 줄이는 것이다. 당의 최고 규범이자 지도 사상인 당장은 당이 직면한 최고의 과제를 담고 있지만 때로는 정치권력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등 영욕(榮辱)을 겪었다. 1921년 7월 1차 전국대표대회(당 대회)에선 ‘강령’이라는 이름으로 제정됐고 ‘사유재산제 철폐와 계급 소멸’을 과제로 내걸었다. 1922년 7월 2차 당 대회 때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됐다. 이때는 옛 소련 공산당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 옛 소련의 지도에 따라 ‘철저한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가 포함됐다. 그 후 ‘민주집중제’의 조직 구성 원리 등이 추가됐다. 1969년 4월 문화대혁명 시기 9차 당 대회 때는 ‘린뱌오(林彪)를 마오쩌둥 동지의 친밀한 정우이자 후계자로 삼는다’는 규정을 넣어 개인숭배와 문혁 회오리의 도구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16차 당 대회에서 ‘3개대표론’, 17차 당 대회에서 ‘과학발전관’이 추가된 데 이어 이번에 ‘시진핑 사상’이 삽입되는 등 당장은 최고 권력자의 권위를 확인하는 문서로 활용되고 있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201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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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력 집중’ 비판 의식 집단지도체제 틀 유지

    24일 폐막한 중국 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당 대회)에서 ‘시진핑(習近平) 사상’이 당장(黨章)에 삽입됨에 따라 시 주석의 권력이 한층 더 강화됐다. 마오쩌둥(毛澤東) 및 덩샤오핑(鄧小平)에 버금가는 권위를 당의 최고 권위 규범에서 보장받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덩샤오핑이 물려준 집단지도체제는 사실상 무력화될 운명을 맞았지만 기본 틀만은 파괴하지 않아 심모원려(深謀遠慮)를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발 더 나아가 25일 19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19기 1중전회)에서 발표될 7명의 상무위원 명단에서 50대인 후춘화(胡春華·54) 광둥(廣東)성 서기와 천민얼(陳敏爾·57) 충칭(重慶)시 서기가 빠지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겠다는 뜻이라는 분석이 많다. 자오러지(趙樂際·60) 중앙조직부장과 왕후닝(王호寧·62) 당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이 포함돼도 시 주석 후임이 될 수 없을 것이란 관측이다. 이번에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을 경우 덩샤오핑 이후의 ‘격대지정(隔代指定·전전임 최고지도자가 한 세대를 건너뛰어 후임을 지정하는 것)’ 전통을 깨는 것이다. 시 주석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는 명분은 ‘앞으로 5년간 업무 실적을 보고 후계자를 정하겠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실제로는 권력 누수를 막고 자신에 대한 충성심 경쟁을 시키는 효과를 노린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反)부패 숙정 과정에서 많은 적을 만든 시 주석이 퇴임 후를 대비해 최소한 자신을 배반하지 않거나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을 인물을 고르겠다는 의도도 없지 않다. 시 주석은 6월 30일 홍콩 반환 20주년 기념 홍콩주둔군 열병식과 7월 30일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주르허(朱日和) 훈련기지 열병식에서 덩샤오핑과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등 전임자들이 사용해온 ‘수장(首長)’ 대신 ‘주석(主席)’ 호칭을 썼다. 군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음을 대내외에 과시한 것이다. 시 주석은 마오쩌둥에 버금가는 권력과 권위를 추구하면서도 너무 노골적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한 전술적인 후퇴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반부패 칼잡이’ 왕치산(王岐山) 중앙기율검사위 서기를 퇴임시켜 7상8하(七上八下·67세 이하만 상무위원 진입) 불문율을 깨지 않은 것이다. 왕 서기가 남으면 2022년에 69세가 되는 시 주석도 물러나지 않으려는 것이라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공격의 빌미가 될 수 있다. 일종의 읍참마속(泣斬馬謖)인 셈이다. ‘당 주석’ 호칭은 화궈펑(華國鋒)도 잠시 쓰다 덩샤오핑에 의해 박탈당했지만 마오쩌둥이 사망 때까지 사용해 ‘당 주석=마오’를 의미한다. ‘시 핵심’ 호칭을 얻은 이후 ‘당 주석’까지 노리는 것 아닌가 하는 관측이 있었지만 ‘노골적으로 마오와 같은 반열에 서려고 한다’는 지적도 없지 않았다. 시 주석이 2012년 11월 상무위원 수를 9명에서 7명으로 줄인 뒤 5명으로 더 줄이거나 아예 폐지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분분했다. 하지만 이는 집단지도체제를 파괴하는 것인 데다 다른 계파에 대한 안배 필요 등으로 백지화된 것으로 해석된다. 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201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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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패혐의로 제거, 의문의 비행기 추락…中 권력투쟁 잔혹사

    제19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 대회)를 3개월가량 앞두고 유력 차기 지도자로 꼽혔던 쑨정차이(孫政才) 전 충칭(重慶)시 서기가 비리 혐의 조사를 받게 되자 당 안팎에서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장기 집권을 위한 초석이 놓인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후춘화(胡春華) 광둥(廣東)성 서기는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진입이 무산됐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처럼 중국 건국 이후 권력 2인자나 최고 지도자의 잠재적 경쟁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정치적 낙마의 길을 걸었다. 시 주석 집권 5년간 적지 않은 유력 정치인들이 반부패 혐의 등으로 처벌된 것 역시 권력투쟁의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 집권 10년 동안 공안부장과 중앙정법위원회 서기 등을 지낸 저우융캉(周永康) 전 정치국 상무위원은 시 주석 집권 이후 뇌물수수 및 기밀유출 혐의로 재판을 받아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중국 2인자 숙청의 첫 사례는 1954년 8월 17일 가오강(高崗·1905∼1954) 국가계획위원회 주석 및 국가부주석의 자살이다. 항일 및 혁명 전쟁 시기 ‘동북왕’으로까지 불렸던 혁명 전사 가오강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마오 이후를 노리다 견제를 당해 ‘당 분열 및 당과 국가권력 탈취 음모 활동 등 10대 범죄행위’로 조사를 받았다. 그는 1954년 2월 자살을 시도하다 미수에 그쳤으나 ‘자살 기도는 당에 대한 항거’라는 등의 조사가 이어지자 끝내 자살했다. 시 주석의 부친 시중쉰(習仲勳) 당시 부총리가 문화대혁명 때 낙마한 것도 가오의 복권 활동에 연루됐기 때문이다. 류사오치(劉少奇·1898∼1969) 역시 정식 재판도 받지 않고 홍위병에 갖은 모욕을 당했고 문혁의 화염이 활활 타오르던 1969년 11월 허난(河南)성 카이펑(開封)에서 병과 기아 속에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비참하게 죽었다. 그는 1921년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그해 소련 모스크바에 유학한 엘리트로 마오와 같은 1세대 지도자였다. 마오가 급진적인 공업화 운동인 대약진 운동 등의 실패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1959년 국가주석에 오르는 등 ‘포스트 마오’를 노린 것이 화근이었다. 마오는 실권을 장악한 류 전 주석을 끌어내리기 위해 ‘조반유리(造反有理·공식 당 조직에 반기를 들어도 정당하다)’라는 명분으로 홍위병을 동원하며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류 전 주석은 자본주의 노선을 추구한 주자파(走資派)라는 가장 큰 죄목을 뒤집어썼다. 국공 내전에서 동북 지방의 장제스(蔣介石) 국민당군을 패퇴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린뱌오(林彪·1907∼1971)는 1971년 7월 13일 새벽 몽골에서 부인 아들 및 소수의 측근들과 함께 탄 전용기가 추락해 숨졌다. 중국 정부는 린뱌오가 후계자에서 탈락할 우려 때문에 마오 암살을 기도하다 실패하자 도주하다 사고가 났다고 발표했으나 진상을 놓고 아직도 논란이 끝나지 않고 있다. 그는 마오의 충실한 추종자로 대약진 실패 후에도 마오를 지지했으며 국가부주석, 제1부총리, 국방부장 등을 지냈다. 1969년 4월 제9기 중앙위원회 2차 전체회의에서 그의 이름이 당장(黨章)에 후계자로 직접 기입된 것은 중국 공산당사에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세 번 실각된 뒤 복귀해 ‘부도옹(不倒翁)’이라는 별명을 얻은 덩샤오핑도 ‘2인자의 위태로움’을 극복했다. 덩은 1966년 마오에 의해 류사오치와 함께 당권파와 주자파로 몰려 실각했고, 1976년 1월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사망한 뒤 마오 부인 장칭(江靑) 등 4인방에 의해 다시 낙마했다. 하지만 그해 9월 마오가 사망하자 덩은 4인방을 축출하며 돌아왔다. 장칭은 1981년 ‘사형 집행유예’(유예기간 2년)를 선고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으나 10년 후 자살했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2017-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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