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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북한에선 이런 소문이 퍼졌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우리 특수부대 300명이 가서 점령당한 도시를 탈환했는데, 한 명만 전사했대. 너무 잘 싸워서 6월에 우리나라에 온 푸틴 대통령이 ‘특수작전에서 공을 세운 조선 동지들에게 감사하다’고 했대.” “비행사도 많이 갔는데, 거의 다 죽었대. 우크라이나 대공망이 너무 강해 자폭 공격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길영조의 아들 길훈이도 죽었대.” 작년 여름은 북한군이 러시아에 파병되기 전이다. 북한은 지난해 8월 28일에 김정은이 러시아 파병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그 전에 러시아로 간 소수의 특수전 병력이나 비행사들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공식 파병 이전에 북한군이 파병됐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길영조는 북한이 크게 내세우는 ‘비행사 육탄 영웅’이다. 1993년 원산 상공에서 비행기가 고장 나자 김일성 동상에 추락할까 봐 탈출을 포기하고 바다로 기수를 돌렸다고 선전한다. 그의 아들 길훈은 대를 이어 비행사가 됐고, 2014년엔 김정은과 함께 사진도 찍었다. 6·25전쟁 때 소련이 비행사를 몰래 보내 북한을 도왔고, 북한도 베트남전에 비행사부터 은밀하게 파병했음을 고려하면 비행사 파병설은 무시할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지난해 8월 이전의 특수전 병력 파병은 그냥 소문에 불과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당시 북한군과 싸웠다는 말이 없었다. 이런 소문은 왜 퍼졌을까. 북한 당국이 파병에 앞서 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미리 영웅담을 만들어 ‘군불’을 피웠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보도가 실종된 북한에선 소문의 힘이 매우 강하다. 이런 점을 역이용해 북한은 오래전부터 소문을 전문적으로 퍼뜨려 유리한 여론을 만드는 비밀 팀을 운용하고 있다. 주로 은퇴한 고위급 노동당 간부 출신들이 평범한 노인으로 위장해 역전 등 공공장소에서 지시받은 소문을 퍼뜨린다. 파병 소문이 퍼지던 시기, 즉 김정은의 공식 지시 이전에 북한에선 러시아로 파병될 군인들을 비밀리에 뽑기 시작했는데, 러시아에 농사지으러 간다고 했다. 북한군 고참 군인이었던 A 씨도 자원했지만, 탈락했다. 그는 “러시아로 보낼 군인을 뽑을 때 집안 배경이 매우 중요했다”며 “농장, 탄광, 군수공장 지역 출신 군인 위주로 뽑혔다”고 했다. 이들의 특징은 하층민들의 자녀들이며, 닫힌 지역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산골 오지에서 자라다 보니 한류 등으로 오염되지 않아 세뇌가 잘 먹힌다. 산골 하층민은 죽어도 소문이 산을 하나 넘기 어렵다. 힘없는 부모들은 불만을 터뜨릴 엄두도 못 낸다. 반대로 평양 등 대도시의 간부 자녀들은 파병군에서 제외됐다. 간부는 불만 세력이 되면 안 되는 사람들이다. 또 이들의 자녀들은 한국 드라마 등 외부 문물을 많이 접한 소위 ‘깬 세대’이기에 세뇌가 잘 먹히지 않는다. 1만2000명으로 추정되는 러시아 파병군이 특수부대라고 알려졌지만, 실은 죽어도 괜찮을 군인들을 뽑아 구성한 부대였다. 물론 전투엔 대체로 특수부대 소속 군인들부터 투입됐겠지만, 특수부대 자체가 가난한 집 자식들이나 가지, 간부 자녀들은 거의 가지 않는다. 훈련이 매우 고되고, 중간에 자식을 대학으로 빼돌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북한 매체들은 김정은이 해외 작전부대 전사자 101명에게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하며 유가족들 앞에서 눈물 흘리는 모습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전투 유공자들을 위한 축하 공연에선 대표적 영웅이라는 12명의 공훈이 소개됐는데, 대다수가 자폭한 군인이었다. 12명 소대원이 함께 자폭, 둘이 껴안고 자폭, 부상당하니 총을 머리에 쏴서 자결 등의 내용이다. 22세 군인이 자폭하려고 수류탄을 터뜨렸는데 왼팔만 잘려서, 오른팔로 다시 머리에 대고 터뜨렸다는 영웅담도 나온다. 공연을 보면 북한군은 싸우러 간 것이 아니라 자폭하려고 파병된 군대인 것 같았다. 세상을 모른 채 산골에서만 자란 청년들은 “나의 자결로 가족의 운명이 바뀐다”고 믿는다. 농장과 탄광, 군수공장 근로자의 자녀는 신분이 세습된다. 군복무를 마치면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아 산골로 돌아간다. 이들에게 자폭은 가족을 ‘천민 세습 지역’에서 해방시켜 평양 시민으로 재탄생시키는 자기희생이다. 실제로 가족은 평양 거주라는 보상을 받았다. 이처럼, 김정은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북한을 자폭 찬가가 넘치는 광신도의 땅으로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김정은도 만나시고, 북한에 ‘트럼프 월드’도 지으셔서, 제가 그곳에서 골프도 칠 수 있게 해주십시오.”“좋아요. 우린 할 수 있어요.”미국 워싱턴에서 25일(현지시간) 열린 첫 한미 정상회담에선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오갔습니다.그런데, 우연의 일치일까요. 북한의 해외판 신문이라고 할 수 있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가 26일 두 사람이 보란 듯이 북한 골프 관광을 홍보하고 나섰습니다.조선신보는 “최근 평양에서의 골프 관광이 국내외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며 “조선에서도 관광업이 발전하면서 다양한 관광 유형들이 등장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신문은 이어 평양골프장과 서산골프연습장을 거론하며 “아름다운 자연 경치와 온화한 기후조건으로 하여 골프 관광에 유리한 자연 지리적 조건을 갖췄다”고 자평했습니다.이렇게 열심히 골프 관광을 홍보하고 있긴 하지만, 문제는 북한에 경기를 할 수 있는 18홀 골프장은 딱 한 개밖에 없습니다. 골프장이 하나밖에 없는 나라가 골프 관광을 홍보하다니, 참 기이한 일이죠. 그런데 북한 골프 이야기를 해보면 기이한 일이 훨씬 많습니다.● 반동 부르주아 운동북한에서 야구와 골프는 오랫동안 혁명하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반동 부르주아 운동’으로 간주돼 왔습니다.야구의 경우 경기는 보통 주말 오후나 저녁에 시작돼 4시간 정도 열립니다. 축구처럼 프로팀들이 있고, 주말에 주로 경기가 열립니다.그런데 북한 당국이 매일 4시간씩이나 주민들이 야구에 정신이 팔리도록 놔둘 리가 없죠. 그 시간이면 일을 시키던가, 하다못해 강연회라도 해서 사상 선전을 해야죠. 그나마 축구는 90분짜리 경기라 야구보다 훨씬 짧습니다.또 축구는 공 하나와 공터가 있으면 다 할 수 있지만, 야구는 그렇지 못합니다. 야구 방망이, 야구공, 글로브 등 장비도 많이 필요합니다. 가난한 북한이 인민이 좋으라고 그런 것을 공급할 리가 없습니다.골프는 야구보다 훨씬 더 부르주아 운동입니다. 골프는 넓은 잔디밭에서 해야 하는데, 그런 잔디밭이 무려 18개나 있어야 합니다. 사람 먹을 강냉이 재배할 땅도 없는데, 한 개 작업반이 일할 수 있는 30헥타르 규모의 방대한 땅을 잔디에 양보할 순 없겠죠. 전기나 물도 없는데 양수기를 돌려 잔디를 키워야 하고, 농장 김매기에 동원될 사람들을 뽑아 잔디를 깎아주어야 합니다.경기 시간도 야구보다 더 많이 잡아먹습니다. 결정적으로 골프를 하려면 수천 달러의 장비를 각자 갖추어야 하는데, 노동당이 인민을 위해 골프 장비를 사줄 리도 만무합니다.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때 북한에서 골프 선수들이 출전한 겁니다. 선수 4명 모두 40대 후반의 아저씨들이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 이들은 모두 일본에 사는 조총련 소속 남성들이었습니다. 물론 국제대회에서의 성적은 한심하기 그지없었습니다.대다수 북한 주민이 골프장이나 골프 치는 모습을 처음 본 시기는 1992년이었습니다. 이때 김정일의 지시로 ‘민족과 운명’이란 다부작 예술영화가 제작됐는데, 영화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들과 골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그때에야 북한 주민들은 “아하, 골프라는 것이 저런 잔디밭에서 저런 채를 휘두르면서 치는 것이구나”하고 처음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드는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저 장면은 도대체 어디에서 찍었지? 우리나라에 골프장이 있단 말인가?”● 김 씨 일가의 골프 수준알고 보니 인민들 모르게 있긴 있었습니다. 1987년에 평양에서 약 30km 떨어진 남포 강서구역 태성호 주변에 골프장이 건설됐던 것입니다.이것도 북한 당국의 의지로 건설한 것이 아닙니다. 가끔 북한에 큰돈을 들고 찾아오는 조총련 기업인들이 “평양에 와보니 놀게 너무 없다. 돈은 우리가 대줄 테니 골프장 하나 지읍시다”라고 한 것입니다.돈 대준다고 하니 김정일은 태성호 주변 땅을 내주어 총면적 12만㎡, 전장 7㎢, 18홀 규모의 골프장이 건설됐습니다. 물론 인민들은 얼씬할 수도 없었죠. 평양을 방문한 조총련계 인물들과, 장성택, 김경희 등 북한의 ‘로열패밀리’ 일원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김정일은 골프를 했을까요? 북한이 “김정일이 평양골프장에서 생애 첫 라운딩을 해 11개의 홀인원을 포함해 38언더파를 기록했다”고 선전하고 있다는 말이 지금도 돌지만, 이는 호주의 이름 없는 매체가 옛날에 지어낸 말입니다.그렇지만, 김정일도 골프에 관심은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김정일의 여러 별장을 가봤던 탈북민은 “골프 연습장 수준의 잔디밭이 있는 별장들이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하지만 김정일은 골프에 별로 소질이 있었던 것 같진 않습니다. 체형 자체가 골프에 적합하지도 않았고, 또 골프를 치려면 팀을 이뤄야 하는데 ‘최고 존엄’이 아래 것들과 ‘굿샷~’ 이러며 돌아다니기도 내키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김정은은 골프를 치는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체형을 떠올리면, 절대 골프를 칠 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비운의 금강산 골프장평양골프장이 외부에 본격적으로 문을 연 시점은 2005년입니다. 그해 8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가 평양에서 총상금 1억 원을 걸고 평양오픈골프대회를 열었습니다. 당시 19세 송보배 선수가 우승했습니다.이때는 남북 관계가 매우 좋았던 시기입니다. 원하는 사람은 여행사를 통해 평양 관광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이재명 대통령도 돈을 내고 평양 관광을 다녀왔죠. 금강산 관광도 활성화됐고, 개성공단도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2004년 12월 한국 기업 아난티가 850억 원을 투자해 금강산에 골프장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금강산 골프장은 참 비운의 골프장입니다. 2008년 완공돼 일반에 오픈도 하기 전에 한국인 박왕자 씨가 피살되면서 금강산 관광이 전면 중단됐습니다. 아난티는 금강산 골프장 회원권을 2500만 원에 팔았는데, 4000명 이상이 구매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금강산을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이후 이들은 회원권 가격 반환 소송을 했지만 패소했습니다. 아난티의 잘못이 아닌 천재지변에 해당됐기 때문이죠. 아난티는 골프장 건설로 큰 수익을 얻었습니다.이후, 이 골프장은 방치돼 있다가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결렬에 분노한 김정은의 화풀이 대상이 됐습니다. 그해 10월 이곳을 찾은 김정은은 “너절한 남측 시설을 싹 들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올해 위성사진엔 금강산에 있던 ‘아난티 골프 리조트 앤 스파’의 메인 클럽하우스와 스파 건물이 완전히 철거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 돈맛을 알게 한 골프대회금강산골프장과는 달리 평양골프장은 지금까지 잘 활용되고 있습니다. 북한이 골프장 운영을 통해 돈맛을 알게 된 것입니다.2011년 4월 영국에 있는 루핀이라는 여행사가 평양에서 ‘국제 아마추어 골프대회’를 개최하겠다고 제안하자 북한은 흔쾌히 승인했습니다. 명색이 대회이지만, 상금은 없고 오히려 돈을 내고 가야 했습니다. 1회 대회에선 영국, 프랑스, 독일,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8개국의 아마추어 선수 17명이 참가했는데, 84타를 기록한 25세 핀란드 청년 올리 레토넨 씨가 우승했습니다.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은 1인당 999유로를 냈습니다. 물론 평양에서 마술쇼를 보고 묘향산과 비무장지대 등을 방문하는 관광 일정까지 포함된 비용입니다.루핀여행사가 주관한 대회는 2016년까지였습니다. 북한이 “왜 영국 여행사가 돈을 벌게 하지? 우리가 벌면 되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은 2017년 려명골프여행사를 만들어 직접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대회를 열었고, 이름도 ‘골프애호가경기’로 지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로 외국 관광객 참가가 중단됐습니다. 2023년부터 다시 받는다곤 했지만, 실제로 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가장 최근인 2025년 ‘봄철골프애호가경기’는 5월 6일부터 8일까지 열렸고, 30여 명의 골프 애호가들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역시 외국인은 없고, 나이든 북한 아저씨들이 엉성한 폼으로 골프채를 휘두르는 모습이 일부 공개됐습니다.이 대회에서 사용된 골프용품은 놀랍게도 한국의 골프용품 브랜드 ‘랭스필드’입니다. 2007년 랭스필드는 ‘2007 평양-남포 통일자전거 경기대회’에 참가해 평양골프장에 ‘LF701′과 ‘골드’ 두 종류의 골프채 30세트를 기증했습니다. 다행히 이 골프채는 ‘너절한 남측 장비’로 단죄되지 않고, 외화벌이를 위해 닳고 또 닳을 때까지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잘 친 샷~!”북한 조선중앙통신은 봄철골프애호가경기를 보도하면서 “이번 경기는 단체경기(총구획별경기, 구획별경기, 남자복식경기, 혼성복식경기)와 구획별 경기방식으로 승부를 겨루는 대항경기로 나눠 진행됐다”고 했습니다. “경기 참가자들은 다양한 치기 기술과 전술을 적극 활용하면서 인상 깊은 경기모습을 펼쳐보였다”라고도 했습니다.치기 기술과 전술이란 말은 참 생소합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골프를 치려면 기존에 알던 용어를 다 잊어야 합니다. 골프 용어는 거의 다 영어인데, 북한은 이를 다 ‘주체식’으로 바꾸었습니다. 가령 ‘파(Par)’를 ‘기준타격횟수’라고 하고, 그린을 ‘정착지’라고 하는 식입니다.평양골프장에서 안내원에게 규칙을 설명해달라고 하면 이런 식의 해설이 나옵니다.“봉사 건물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 위생실도 들려 준비하십시오. 골프장 중간에 있는 간이매대에도 위생실이 있습니다.1번 타격대에 도착하면 순서대로 공알받침을 놓고, 가장 긴 나무채로 공알을 향해 힘껏 휘두르기를 합니다. 잔디구역에 도착하면 ‘잘 친 샷’ 이렇게 소리치며 박수를 쳐줍니다.휘두르기를 한 공알이 경계선 밖으로 가면 벌타를 먹고 하나 더 치는데, 모래웅덩이나 물방해물을 잘 피해야 합니다. 그로브는 7번 쇠채로 많이 칩니다. 긴 거리나 짧은 거리가 아닌 첫 중간거리에서 빠를 잡으려면 두 번째 휘두르기로 정착지에 올라타고 커브 구멍에 바닥채를 써서 꽂어넣기나 살짝 공넣기를 하면 됩니다. 꽂아넣기 전문가들은 한번에 넣어 버디를 하기도 합니다….”북한 용어를 적다 보니, 문뜩 이런 상상이 듭니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평양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는 날이 온다면, ‘정착지에 올라 탄’ 그의 ‘구멍 꽃아넣기’를 보고 김정은이 옆에서 손뼉을 치며 이렇게 소리치겠죠.“잘 친 샷~!”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궁금하다 생각했지만 그냥 지나쳤던, 하지만 알아두면 분명 유익한 것들이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일 수도 있고 최신 트렌드일 수도 있죠. 동아일보는 과학, 인문, 예술,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오∼ 이런 게 있었어?’라고 무릎을 칠 만한 이야기들을 매 주말 연재합니다. 이번주는 법률편입니다.》솔로가 대세인 시대다. 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3월 기준 전국 1인 는 1002만1413세대였다. 사상 처음 1000만 세대를 돌파했다. 전체 세대의 41.1%로 다섯 세대 중 두 세대가 홀로 사는 것이다. 1인 세대 가운데 연령별로는 70대 이상이 198만297세대로 가장 많았다. 60∼69세가 185만1705세대로 뒤를 이었다. 특히 60대 이상에선 1인 세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1인 세대가 증가하는 주요 원인으로는 고령화와 비혼주의 확산이 꼽힌다. 지난해 한 여론조사에선 ‘나는 요즘 고독사를 할까 봐 걱정한다’는 응답이 35%나 됐다. 1인 세대가 많아지면서 ‘나 혼자 산다’ ‘나는 솔로’ ‘미운 우리 새끼’ 같은 홀로 사는 사람들을 다룬 TV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다. 사회 트렌드를 따라가는 TV 특성상 독거(獨居)족의 모습은 더 많이 시청자의 주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홀로 살다 죽으면 그 재산은 어디로? 혼자 살면서 겪는 천태만상을 다루는 TV 예능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독거노인이 점점 늘고 있는데, 이들이 세상을 떠날 경우 그 재산을 상속받을 사람이 없어 국고로 들어가는 돈이 점점 늘고 있다는 것이다. 2014년 국고에 귀속된 무연고 사망자 상속 재산은 총 1200만 원에 불과했지만 2021년부터 매년 20억∼30억 원까지 늘어났다. 한국보다 먼저 초고령 사회를 맞이한 일본 상황은 더 심각하다. 일본 최고재판소(한국 대법원 격)에 따르면 2022년 국고 귀속 무연고자 재산은 768억 엔(약 7231억 원)에 이른다. 2013년 약 336억 엔에서 10년도 채 안 돼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 같은 무연고자 상속 재산은 정해진 용처 없이 세수에 포함돼 국가 재정에 활용된다.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이 국가 부수입처럼 쓰인다면 아무리 애국심이 강하다 해도 기꺼워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배우자나 자녀 같은 법적 상속인이 있다면 별도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법에 따라 상속 절차가 진행된다. 그렇지 않다면 생전에 유언장을 확실히 남겨 본인의 뜻에 맞게 유산을 쓰게 해야 한다. 정작 유언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유언을 써서 공증을 받으면 된다는 정도는 대개 알고 있다.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들고, 유언 내용을 바꾸려면 다시 증인을 세운 뒤 공증 비용을 추가로 내야 한다. 그럼 혼자서 유언장을 써서 남기면 되지 않을까. 법적 효력이 있는 유언장을 스스로 작성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다만 민법에서 정한 형식 요건을 하나라도 빠뜨리면 무효가 된다. 먼저 유언장은 자필(손으로 쓴 글씨)로 작성해야 한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쓰면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유언장에는 날짜, 성명, 주소(아파트 동호수, 번지수까지)도 빠지지 않고 자세히 적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도장이 찍혀 있거나 자필 서명이 있어야 한다. 요즘에는 휴대전화로 유언을 녹음하거나 영상을 찍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이 경우도 법이 정하는 요건을 충족하지 않으면 무효가 되기 십상이다.● 필수가 된 유언장 작성 유언장을 쓰다 보면 막히는 대목이 있다. 바로 채무 관계다. 내가 빌린 돈이라면 갚는 것은 쉽다. “남은 유산에서 얼마를 누구에게 넘겨주라”고 적으면 된다. 하지만 받아야 할 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법에 소멸시효란 것이 있다. 법에서 정해 놓은 일정 기간 내에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그 권리가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개인 간 금전 거래에서 법이 정한 소멸시효는 10년이다. 돈을 빌려주고 난 뒤 10년 동안 채무자에게 갚으라고 독촉하지 않았다면 돈을 받을 수 없다. 유언장을 작성할 때 ‘아차’ 싶다면 소멸시효가 지났는지 확인하고, 지나지 않았다면 일단 채무자에게 빚을 갚으라고 독촉해야 한다. 이 경우 소멸시효는 다시 10년 연장된다. 다만 채무 반환을 독촉한 사실을 법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빌려준 돈이라고 다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불법적으로 쓰일 것을 알면서도 빌려준 돈은 돌받을 수 없다. 다만 빌려준 돈이 소액인 경우 이를 받기 위해 치러야 할 소송비용이 더 클 수도 있다.● 솔로 시대 ‘이혼 전술’ 1인 가구가 빠르게 늘어나는 주요 원인의 하나로 이혼율 증가가 꼽힌다. 통계청 ‘2024년 혼인·이혼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이혼 건수는 9만1151건이다. 평균 이혼 연령은 남성 50.4세, 여성 47.1세다. 한국에서 이혼 사유는 크게 재판상 이혼 사유와 협의상 이혼 사유로 나눈다. 재판상 이혼 사유(민법 제840조) 첫 번째 항목은 ‘배우자의 부정행위’다. 배우자가 간통이나 그에 준하는 부정한 행위를 저지른 경우를 의미한다. 현실에선 막장 드라마보다 더한 불륜 사례가 많다. 우리나라 기혼자 셋 중 하나는 ‘불륜을 저질러 본 적이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잘못한 자가 벌을 받게 하는 것은 ‘정의의 심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잘못한 상대를 심판대에 올려놓으려면 ‘심판의 규칙’을 알아야 한다. ‘사랑과 전쟁’에서 승자가 되겠다고 아무 방법이나 써도 되는 것은 아니다. 불륜 증거를 잡기 위해 배우자 휴대전화를 몰래 뒤져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간 역공을 당해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 법과 판례는 어디까지를 불륜, 바람, 외도라고 인정하고 있을까. 단순한 만남, 손잡기, 키스, 잠자리 등 어디서부터 불륜인지 애매하다. 불륜의 세계엔 보통사람의 일반적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일들이 많다.● 복수의 한계는 어디까지? 올해 6월 서울 강남구 두 곳에 배우자의 불륜을 폭로하는 플래카드(현수막)가 걸린 사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다. 한 아파트 앞에 걸린 플래카드에는 ‘애 둘 유부남 꼬셔서 두 집 살림 차린 OOO동 OOO호. 남의 가정 파탄 낸 술집 XXX 김OO 꽃뱀 조심!’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파트 동·호수와 이름 끝 자는 별(★) 모양으로 처리됐다. 비슷한 시기 한 빌딩 앞에 내걸린 플래카드에는 ‘애 둘 유부남이 총각 행세, XXX와 3년 동안 두 집 살림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적반하장에 반성도 없는 파렴치한’이라고 쓰였다. 이 플래카드에서 남성 이름과 직장은 모자이크 처리됐다. 이 두 플래카드에는 불륜 당사자로 추정되는 남성과 여성이 다정하게 찍은 사진도 인쇄돼 있었다. 사진 속 두 사람의 눈은 검은색 줄로 가렸다. 플래카드를 두 곳에 건 사람은 불륜남의 아내로 추정됐다. 지난해 2월에도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경축. 상간남 소송 피고 완패. 대한민국 법원이 인정한 상간남 김OO. 동네에 더러운 놈 있으니 아내·여자 친구 관리 잘하세요’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입길에 올랐다. 상대방 이름과 거주지를 불분명하게 처리한 이 플래카드들을 내건 사람은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을까. 형법 제307조 제1항에 따르면 사실 적시 명예훼손의 경우 2년 이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해당 플래카드들을 내건 행위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는 보기 어려운, 사적 복수의 영역에 포함된다. 플래카드에 등장한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해 법적 다툼으로 가는 경우, 플래카드 내용을 통해 누구를 지칭하는지 일반인이 알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만약 알게 된다고 판단되면 플래카드를 내건 사람은 처벌을 피할 수 없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누구인지 특정되지 않는다면 법원에서 원고와 피고 측은 치열한 공방을 벌여야 할 것이다. 8월 현재, 플래카드에 등장한 사람들이 소송을 걸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QR코드를 스캔하면 28일 채널A에서 방송된 브레인 아카데미 ‘건강편’을 볼 수 있습니다. ‘법률편’은 9월 4일 오후 10시 방송됩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최근 북한 김여정이 한국을 향해 연일 독설을 내뱉습니다.18일 이재명 대통령이 을지국무회의에서 “작은 실천이 조약돌처럼 쌓이면 상호 간 신뢰가 회복될 것”이라고 하자, 다음날인 19일 곧바로 등판해 “마디마디, 조항 조항이 망상이고 개꿈”이라며 “이재명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을 위인이 아니다”고 했습니다.이번이 처음은 아니고, 8월 들어 일주일에 한 번꼴로 등장해 “허황된 개꿈, 너절한 기만극, 헛된 망상” 등의 악담을 쏟아냅니다.오빠에게서 한국을 마음껏 조롱하고, 비난하라는 임무를 받은 듯합니다. 악역을 여동생에게 맡긴 김정은은 광복절 당일에 러시아 예술단 공연을 참관할 정도로, 러시아에 잘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윗동네 러시아에 붙어 살길을 찾는 와중에, 아랫동네 남쪽에서 자꾸 ‘들이대니’ 짜증이 난다는 것을 김여정을 통해 전달합니다.지난해부터 김정은은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고, 아예 마주 앉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남 메시지도 “나, 최고 존엄이 언급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려 애를 씁니다.● 대동강 문명 띄우기이렇게 남북 관계가 철저히 단절되고 있는 와중에 북한에서 눈여겨볼 만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상하게 북한 매체들이 대동강을 열심히 띄우고 있는 겁니다. 왜 그러는지 살펴보니, 기사마다 부쩍 대동강 문명이 언급됩니다. 그러니 대동강 기사는 결국 ‘대동강 문명론’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심어주기 위한 의도인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이재명 대통령을 향해 ‘역사는 이렇게 바꾸는 것이다’를 보여주려는 듯합니다.대동강 문명론은 세계에서 오직 북한만이 가르치는 역사입니다. 북한은 세계에 ‘5대 문명’이 있다고 교과서에 서술하고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그리고 황하 문명과 인더스 문명을 일컬어 세계 4대 문명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동강 문명도 당당하게 포함된다는 것입니다.한반도의 첫 고대국가인 고조선은 기원전 30세기 초에 세워졌는데, 이것이 대동강 문화의 시발점이라고 합니다. 그 근거로 북한은 대동강 유역에 집중된 고인돌 무덤과 돌판 무덤, 큰 부락터 유적, 옛 성, 집터 등이 발견됐다고 주장합니다.대동강 문명이란 말이 최근에 나온 개념은 아닙니다. 1998년 북한 역사학학회가 처음 주장한 개념인데,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 대량 아사가 발생하자, 주민에게 한반도 역사의 중심이 평양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서 급조된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대동강 문명의 창조는 1993년 단군릉 발굴 사건부터 시작합니다. 당시 김일성이 지목한 곳을 파보니, 5011년 전에 살던 남자와 젊은 여성의 깨끗한 뼈가 나왔는데, 이것이 단군과 그 부인의 유골이라는 겁니다. 북한은 이 유골의 연도를 측정하기 위해 ‘전자스핀공명법’이란 것을 사용했다고 합니다.전자스핀공명법은 오차가 1000년 이상씩 나오기 때문에 10만 년 정도의 단위를 재는 측정법인데, 북한은 정확한 연도까지 측정하는 외계 기술을 발명한 것 같습니다.아무튼 그렇게 단군과 부인의 유골이 나왔으니, 고조선 역사는 기원전 2333년부터가 아니라 기원전 30세기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북한 주장입니다.북한에서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을 위인으로 인정받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하지만, 북한도 부끄러운 줄은 아는지, 대기근이 지나간 뒤엔 대동강 문명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한 시절의 사기극인 줄 알았던 대동강 문명론이 요즘 갑자기 북한 매체에 부쩍 등장합니다.김정은이 남북을 두 국가로 규정한 뒤 이를 뒷받침할 논리를 열심히 찾다가 결국 대동강 문명을 다시 꺼내 든 것으로 보입니다. 메시지는 아주 간단명료합니다.“우리는 대한민국, 쟤들하고 역사부터 다른 나라야. 그리고 우리는 대동강 문명을 이어받은 훨씬 정통성이 있는 나라야.”북한이 대동강 문명을 강조하는 것을 보니 갑자기 “이러면 조만간 단군의 부친인 환웅과,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어 환웅과 결혼한 단군의 모친 웅녀의 유골도 튀어나오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북한의 외계인급 기술이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이상한 대동강 문명대동강 문명을 띄우려니 대동강을 자랑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대동강 관련 기사들이 나올 때마다 여기에서 얼마나 화려한 문명이 펼쳐지는지 보여주는 사진들이 등장합니다.대동강을 끼고 지어진 건축물과 함께, 대동강을 누비는 유람선도 자주 등장합니다.그런데 그걸 아십니까. 대동강에선 맥주를 마시고, 불고기는 먹을 수 있는데, 와인을 마시면 가련한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지난달 북한은 “대동강에서의 유람용 원형 보트 봉사가 이채를 띠고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사진 속에 등장한 원형 보트는 대동강의 옥류교와 대동교 사이를 오가며 매일 운영되고 있는데 6명 좌석, 12명 좌석의 두 종류입니다.원형 보트에는 불고기 식탁이 갖추어져 있어 사람들은 맥주를 마시고, 불고기를 맛보며 즐겁고 유쾌한 휴식의 한때를 보낸다는 것이죠.원형 보트를 타본 각 계층 시민들의 반응도 자주 나옵니다. “대동강의 풍치를 유람하는 것도 좋지만 출렁이는 물결 위에서의 불고기 맛은 그 어데 비길 데 없이 독특한 정서와 낭만을 안겨준다”는 식입니다.이런 자랑을 보니 2021년 북한이 ‘비사회주의 현상을 폭로한다’며 만들었던 내부 영상이 떠오릅니다. 이 영상은 북한 내부 주민들을 협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외부에선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북한 내부의 누군가가 영상을 찍어 밖으로 유출했습니다.영상에선 아나운서가 잔뜩 흥분한 높은 목소리로 비사회주의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직책, 주소까지 언급하며 준열하게 비난합니다.결혼을 앞둔 남녀가 껴안고 사진을 찍어도 반동적 현상이고, 사진관에 가서 2인용 자전거를 타고 포즈를 취하고 찍어도 퇴폐 현상이라고 규정합니다. 올림머리를 했다고, 발목이 드러나는 바지를 입었다고 마구 욕을 퍼붓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퇴폐적인 삶을 살던 사람들이 법정에서 머리를 숙이고 재판을 받는 장면도 나옵니다. 보기만 해도 무섭습니다.그런데 이 영상에 대동강에서 와인을 마시는 남녀가 등장합니다. 아나운서는 이들의 사진을 계속 보여주며 이렇게 꾸짖습니다.“여기서 우리가 스쳐 지나갈 수 없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우리의 생활 감정과는 전혀 맞지 않는 불건전하고 나태한 생활 세태들, 지어 저들 자신도 익숙 되지 못한 왜식왜풍을 남이 시키는 대로 흉내 내느라고 모질음을 쓰는 가련한 저 신랑 신부들이 하나같이 당의 품속에서 대학까지 나오고 중요한 초소에서 일하고 있는 청년들이란 것입니다.자기들을 품 들여 키워주고 내세워준 당과 조국의 믿음에 천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지는 못할망정 신통히도 당에서 하지 말라는 짓만 해대고 있으니 과연 저런 인간들이 준엄한 시련의 시기에 당과 조국의 은덕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잘생긴 신랑, 신부가 했다는 너절한 짓은 대동강의 보트에 앉아 선글라스를 끼고, 와인을 마시는 행동이었습니다.북한에선 와인을 구하기 어렵습니다. 자체로 생산하지 않는 데다, 소비층이 거의 없어 수입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물론 와인을 좋아하는 김정은을 위해선 조지아와 프랑스 등지에서 최고급 와인들이 꾸준히 들어가긴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구경하기 어렵습니다.그런 귀한 와인을 구입해 대동강 보트에 올라 마시니 높은 고위 간부의 자녀들이 분명합니다. 대학까지 나오고 중요한 초소에서 일하고 있는 청년이라고 했으니 좋은 직장에서 일하는 것도 분명합니다.그렇지만 전 국민이 보는 비판 영상에 등장해 ‘당과 조국의 은덕을 저버릴 예비 배신자’로 낙인이 됐으니 처벌도 심하게 받았을 겁니다. 평양에서 추방돼 깊은 산골 농민으로 가거나, 탄광 노동자로 가면 그나마 다행일 겁니다.비판 영상에 등장했던 신혼부부는 지금 북한 매체들이 자랑하는 원형 보트를 본다면 어떤 심정일까요.“저 사람들은 불고기도 구워 먹고, 맥주도 마시는데, 우린 대체 뭘 잘못한 걸까. 와인을 마신 죄밖에 없는데, 왜 우린 가련한 자가 되고, 저들은 행복한 평양 시민이 되는 걸까.”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올까요. 나오지 않죠.이들이 잘못한 점은 노동당에서 대동강에서 불고기를 굽고 맥주를 마시라고 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죄인 것 같은데, 그것도 아리송합니다. 왜냐하면 2021년에도 북한이 자랑하는 대동강 유람선 ‘대동강호’에서 맥주를 마시고 저녁 식사는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굳이 다른 점이라면 이들은 선글라스를 끼고, 맥주잔이 아닌 와인잔을 부딪친 죄밖에 없습니다. 이쯤 되면 지금의 대동강 문명은 참으로 까다롭기 그지없다고 봐야겠죠. 혹 평양에 관광을 간다면 정말 꼬치꼬치 캐물어야 할지 모릅니다.“선글라스를 껴도 되나요? 양주는 마셔도 되나요? 하품은 해도 되나요?”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허요셉 씨 인생은 한번도 쉽게 풀린 적이 없었다. 북한에서 태어나 보니 월남자 가족이라 평생 운명이 결정돼 있었다. 남들처럼 군대에 가긴 했지만, 수십만 톤의 쌀을 깔고 앉아 있었어도 10년 내내 배고픔에 시달렸다.탈북했지만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한에 다시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남쪽에 오긴 했지만 평생의 직업을 찾는 데 14년이나 걸렸다.그럼에도 그는 주저앉은 적이 없었다. 화려한 삶은 아니지만, 대단한 성공을 이룬 것도 아니지만, 어떻게든 살아냈다. 노력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해야 하는 것임을 보여주며 살고 있다.● 월남자 가족의 운명허 씨는 1976년 두만강 옆 함북 회령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회령 토박이였다. 하지만 해방 후 회령에서 시계수리공을 하던 작은할아버지가 공산주의 사회에서 배급받으며 살기 싫다면서 1949년 가족을 데리고 월남했다.허 씨가 한국에 와서 들은 바로는 작은할아버지 허중풍과 그의 딸 허길자는 1960년대 종로에서 금은방을 크게 했다는데 찾지 못해 만나 보진 못했다. 작은할아버지도 27년 뒤에 태어날 종손이 자신 때문에 피해를 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시내 근처 채종(採種)농장 농장원으로 있었다. 더 내려갈 것도 없는 신분이었지만,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죄로 허 씨가 초등학생 때 읍에서 70리(28km)나 떨어진 산골로 이사를 해야 했다.그 마을엔 항일투사의 조카가 살고 있었다. 위세가 당당한 그는 회령담배공장 담당 보안원(경찰)을 끼고 비리를 저질렀다. 담배뿐만 아니라 물엿도 생산하던 담배공장에서는 양곡 원료를 많이 소비했다. 어느 날 부친은 투사의 조카가 양곡을 빼돌리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나중에 비리가 발각되자, 항일투사 조카는 허 씨 아버지가 밀고했다고 생각했다. 그 조카는 자신의 힘을 이용해 허 씨네 가족을 통째로 인근 농촌으로 추방시켰다. 하지만 허 씨 부친은 밀고하지 않았다. 부친은 억울함을 풀겠다고 중앙당과 도당 등에 끊임없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편지를 썼다. 주민들이 국가기관과 공무원의 부당한 행위로 권리가 침해됐을 경우 이를 회복하기 위해 제기하는 신소(申訴) 제도를 활용한 것이다.1년 뒤 항일투사 조카는 끝내 비리가 밝혀져 감옥에 갔고, 보안원은 공장 보일러공으로 강등됐다. 허 씨 아버지가 이긴 것이다.하지만 북한 사회에선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었다. 힘 있는 자들을 잘못 건드렸으니 보복이 들어올 것이 뻔했다. 아버지는 이기고 나서도 추방된 농촌보다 더 깊은 산골로 도망갔다. 그렇지만 화 속에 복이 있고 복 속에 화가 있는 법이다. 도망간 곳이 두만강을 끼고 있는 외진 마을이었던 덕분에 나중에 쉽게 탈북할 수 있었다.● 군수창고 경비원허 씨는 월남자 가족이어서 대학에 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컸다. 설사 성분이 나쁘지 않더라도 그가 살던 산골에서 대학을 간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허 씨의 진로는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가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이 학창 시절을 보냈다.1993년 17세에 중학교를 졸업한 허 씨는 당연한 듯 군에 입대했다. 그가 간 부대는 평북 구성에 있는 군수동원총국 산하 경비부대였다. 구성은 고려거란전쟁 때 귀주대첩이 벌어진 지역이다. 이곳에서 그는 2002년 제대될 때까지 만 10년을 복무했다.공교롭게도 그가 복무한 기간은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던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다. 특히 험준한 산들로 둘러싸여 농사지을 땅이 거의 없는 구성은 북한에서도 가장 먼저 사람들이 굶어죽은 곳이다. 산이 많다 보니 이곳은 오래전부터 북한의 핵심 군수공업 기지로 활용됐다. 깊은 산골짜기들을 따라 전차공장, 탄약공장, 피복공장 같은 군수공장들이 갱도 속에 숨겨져 있었다.1994년 김일성 사망을 전후해 배급이 갑자기 중단되자 군수공장 노동자들은 발버둥칠 겨를도 없이 죽어 갔다. 일반 공장은 배급받지 못하면 출근하지 않고 장사를 다니거나 산에 올라가 화전을 개간해 농사라도 할 수 있었지만, 군율이 적용되던 군수공장은 이마저도 할 수 없었다. 북한이 늘 강조하는 ‘자력갱생’할 기회조차 받지 못한 것이다.노동자들 가족이 산에 올라 풀뿌리를 캐고 소나무 껍질도 벗겨 먹었지만, 반년쯤 지나니 껍질 벗길 나무조차 남지 않았다. 나무가 사라지는 숫자만큼 산에 무덤이 늘어났다.허 씨는 이 참혹한 현실을 수십만 톤의 식량을 깔고 앉아서 목격했다. 그가 속한 경비대대는 구성 산골짜기에 숨겨진 식량창고를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구성엔 군수동원총국이 관리하는 매우 큰 전쟁 예비 물자 저장 갱도가 많았다. 예비 물자엔 식량과 연료, 무기 부품이 들어 있었다. 탈곡하지 않은 벼를 가마니에 담아 수많은 갱도에 나눠 보관했다. 오래 보관하면 벼가 썩기 때문에 몇 년에 한 번씩 갱도의 벼를 실어 내가고, 새로 수확한 벼를 채웠다. 그때마다 화차 20개를 연결한 열차가 가마니를 잔뜩 싣고 오간다. 쉬지 않고 진행해도 교환 작업은 3~4개월씩 걸렸다.구성 갱도들에 쌀이 얼마나 저장됐는지 알 순 없었지만, 수없이 드나드는 차량들을 보면 수십만 톤은 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산마다 거대한 쌀 창고들이 있는데도, 구성 사람들은 단 한 톨의 쌀알도 받지 못하고 무리죽음을 당했다.전쟁에 쓸 연료는 바위산 하나를 통으로 파내 만든 저장탱크에 보관했는데, 이곳이 터지면 구성 시내가 날아간다고 했다.● 제대 1년 뒤 탈북굶주림은 민간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쌀 창고를 지키는 군인 속에서도 허약자들이 속출했다. 갱도 안에 쌀이 많아도 이걸 건드리면 역적이 되기 때문이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쟁 예비 물자 저장 갱도 주변은 민간인 접근 금지구역이라 산을 개간해 농사를 지어도 도둑맞을 걱정이 덜했다는 것이다. 또 식량 교환이 이뤄질 땐 화차 경비를 서기 위해 나가기도 하는데, 이때 가마니에서 새어 나온 쌀로 밥을 해 먹을 수 있었다.그렇지만 굶어 죽지 않을 정도였다는 의미일 뿐, 배불렀던 것은 아니었다. 병사들도 옥수수가 익을 때쯤부터 밭에 몰래 들어가 옥수수를 생으로 씹어 먹었다. 겨울엔 먹을 것이 소금에 절인 무밖에 없었는데, 이걸로 몇 개월 내내 반찬과 국을 만들어 먹다 보면 염독이 올랐다.배가 고프니 군기도 바닥에 떨어졌다. 경비대대 안에서 사건, 사고가 계속 터져 나왔다. 1994년엔 민가에 내려가 가축을 훔쳐 잡먹은 동료 3명이 총살되기도 했다. 구타는 비일비재했다. 1995년엔 먹는 것 때문에 구박을 받던 병사가 상관 2명을 사살하기도 했고, 보초 나갔다가 동료를 사살한 사건도 벌어졌다.굶주림 속에서도 시간은 흘러 2002년이 왔다. 10년이나 청춘을 바쳤지만, 문제의 부대 출신에 월남자 후손이기도 한 그는 노동당에 입당하지 못했다. 제대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선 농사밖에 할 일이 없었다.얼마쯤 지나서 보니 다른 길도 보였다. 젊은이 중엔 농장에 출근하지 않고 밀수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두만강을 낀 유리한 지형을 활용해 사는 것이었다.허 씨도 밀수를 시작했다. 매월 중국 돈 20위안을 내면 농장 일을 하지 않아도 눈감아 주었다. 그 돈으로 비료도 사 오고, 굶주린 노약자들도 먹고 살았다.밀수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네 살 어린 여동생이 중국으로 탈북했다. 허 씨는 2003년 6월 동생을 찾으려고 중국으로 넘어갔다. 이전에도 중국 땅을 여러 번 오갔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탈북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넓은 중국 땅에서 동생을 쉽게 찾을 순 없었다. 우선 자리부터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용정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5개월쯤 일했을 때 한국에 가서 먼저 자리를 잡은 탈북민을 알게 됐다. 그는 허 씨에게 북한의 각각 다른 지역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국경까지 데려오거나, 가족사진을 가져다 주면 그 대가로 한국에 갈 수 있는 선을 연결해 주겠다고 제안했다.중국에서 일하면서 허 씨는 북한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를 알게 됐고, 한국으로 가면 잘 살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에 허 씨는 주저 없이 다시 북한으로 넘어왔다.하지만 기차도 제대로 다니지 않는 북한에서 여러 가족을 국경까지 데려온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은 점점 꼬여갔다. 가족 한 사람은 데려왔지만, 다른 가족은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지만 가족사진은 확보했던 터라 그는 다시 두만강을 넘었다. 12월 강추위에 강으로 접근하다 국경경비대에 발각됐다. 얼음물에 뛰어들어 필사적으로 추격을 따돌렸다.사진을 전달해 주자, 심부름을 시킨 한국의 탈북민은 산동성에 있는 한 조선족 교회를 찾아가라고 했다. 그 교회에서 성경 공부를 해서 믿음이 생기면, 베이징 주재 한국영사관으로 들여보내 준다는 것이었다. 알려준 교회를 찾아간 그는 두 달 동안 열심히 성경 공부를 했다. 그동안 그와 비슷한 처지의 탈북민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실패한 한국영사관 진입2004년 2월 11일, 허 씨는 베이징 주재 한국영사관 앞에 나타났다. 그와 함께 영사관 진입을 시도할 탈북민은 모두 18명이었다.계획은 여권을 분실한 한국인인 것처럼 위장해 영사관 정문 접수실로 접근한 뒤 경비 서는 공안들을 한꺼번에 밀쳐 내고 진입하는 것이었다. 18명이 영사관 정문 앞에서 서성이면 주목을 받기 때문에 몇 명이 먼저 진입조가 돼 뛰어들기로 했다.28세 건장한 청년에 10년 군 경력을 가진 허 씨가 앞장섰다. 영사관 정문에 가서 여권 업무 때문에 왔다고 하니, 경비원은 “오늘은 쉬는 날이라 업무를 보지 않는다”고 했다.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문을 따고 들어갈까, 아니면 다른 날에 올까 머리를 굴리는 사이, 경비원이 눈치를 채고 신호를 보냈다. 영사관 주변엔 잠복한 공안들이 많았다. 공안들이 달려오자 멀찍이 떨어져 눈치를 보던 다른 탈북민들이 우르르 흩어졌다.허 씨도 지체하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맨앞에 섰던 그는 공안의 집중 표적이 됐다. 한참을 뛰다 보니 길이 막혔다. 따라오는 공안 두세 명을 때려눕혔지만, 이내 10여 명이 몰려와 덮쳤다. 전기곤봉이 몸에 닿는 순간 그는 정신을 잃었다.나중에 알고 보니 18명 중에 허 씨와 여성 2명이 잡혔고 나머지는 다 도망갔다. 그는 베이징 국제구류소에 수감됐다가 무장경찰에 호송돼 단둥으로 옮겨졌다. 2주 뒤에는 북한 보위부가 중국으로 와서, 수감돼 있던 15명가량의 탈북민을 넘겨받아 신의주로 끌고 갔다.수갑과 쇠고랑을 차고 신의주에 가서 들은 첫말은 “반역자 새끼들, 대가리 까라”는 호통이었다. 허 씨처럼 한국영사관 진입을 시도했던 탈북민은 한국행 기도자로 엄중히 처벌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이들의 체포 경위를 넘겨주지 않았는지, 신의주 보위부에선 그를 중죄인으로 분류하지 않고, 회령에서 온 보위부 호송원에게 넘겨주었다.일주일 동안 기차를 타고 회령 보위부로 이송됐다. 호송원이 수갑 하나를 자기 손과 허 씨 손에 함께 채워 도망갈 수도 없었다. 신의주 보위부 감옥에선 그래도 밥을 몇 숟가락 주었지만, 회령은 쓰레기죽을 한 국자 반만 주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살이 쭉쭉 빠졌다.한번은 보위부가 그를 끌고 그의 고향에 가서 농민을 모아 놓고 비판 모임을 열기도 했다. 그의 죄명은 터무니없게도 “남조선으로 가려다 연길 비행장에서 체포됐다”는 것이었다.‘회령 보위부는 내가 베이징 영사관에 들어가다 잡힌 것을 모르는구나….’그렇게 생각하니 희망이 보였다. 그는 베이징에서 일자리를 구하다가 체포됐다고 끝까지 주장했다. 하도 완강하게 주장하니 보위부도 단순 탈북자로 간주했는지 그를 노동단련대로 보냈다.그런데 반년 동안의 감옥 생활에 그의 몸무게는 42kg밖에 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보위부는 병보석을 허가했다. 그때가 2024년 6월 말이었다.두 달 동안 집에서 열심히 치료받았다. 하지만 살이 붙으면 다시 단련대로 끌려가야 하는 운명이었다. 주저앉아 오라를 받을 순 없었다. 어느 정도 회복된 8월 25일 밤 그는 다시 중국으로 탈출했다.● 한국 입국과 캐나다행중국에 다시 넘어왔지만, 지난번 도강과 이번 도강은 성격이 달랐다. 이번에 다시 잡히면 훨씬 더 중한 처벌을 받을 것이 뻔했다.그는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자리를 구해 일하면서 한편으론 산동성 조선족 교회에 다시 연락했다. 영사관 진입 실패로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교회에서 그에게 다시 다른 선을 알려 주었다. 덕분에 중국에 넘어간 지 3개월 뒤 다시 한국행 길에 올랐다.이번엔 흑룡강성 목단강까지 갔다가 다른 탈북민들과 함께 곤명을 거쳐 미얀마로 넘어가는 루트였다. 이번엔 사고가 없었다.2004년 12월 그는 미얀마 땅을 무사히 밟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다른 탈북민 12명과 함께 3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한 끝에 미얀마 한국대사관에 인계됐고, 다시 태국으로 보내졌다.미얀마에서 수감 생활을 할 땐 회령 보위부에서 만났던 30대 부부가 계속 생각났다. 이 부부는 미얀마까지 갔다가 북송된 사람들이었다.미얀마에선 한국대사관 연락처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운명을 갈랐다. 한국대사관 연락처를 모르고 무작정 넘어온 탈북민은 중국으로 되돌려 보냈는데, 중국 공안에 인계되는 순간 북송을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 부부는 한국행 기도자란 딱지가 붙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올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태국에서 얼마쯤 있다가 남들처럼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왔고, 조사와 하나원 생활을 마쳤다. 한국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날은 2005년 8월 18일. 서울 강서구 가양동 임대 아파트에 입주했다.다른 탈북민들처럼 좌충우돌 정착 과정이 시작됐다. 영등포의 한 기계 제작 업체에 처음 취직했다. 그곳을 6개월 다니다가 다시 간판 만드는 회사로 옮겨 갔다. 박봉은 참을 수 있었지만, 탈북자라고 외국인 노동자 취급을 당하는 것은 참기 어려웠다. 힘들 때마다 그는 자신에게 삶의 동아줄을 내밀어 주었던 교회에 나가 위안을 얻었다. 2006년엔 북한에서 쓰던 이름 대신 허요셉으로 개명도 했다. 그렇지만 교회가 그의 삶을 책임져줄 순 없는 일이었다.계속 현실을 피해 도망치고 싶었던 2007년경 탈북민 사회에서 캐나다로 이주하는 바람이 불었다. 당시 캐나다는 북에서 왔다고 하면 한국에 거주하던 탈북민도 난민으로 인정해 주었다.많은 탈북민이 캐나다로 떠났는데, 허 씨도 멋모르고 따라나섰다. 홀몸이라 비행기표를 구해 훌훌 털고 떠나는 데 어려움도 없었다.캐나다 생활은 마음에 들었다. 가자마자 임시 영주권을 받았다. 낮에는 영어 공부를 하게 했고, 오후에는 꽃집에서 일했다. 무엇보다 탈북자라고 무시하는 사람이 없어 좋았다. 6개월쯤 지나니 함께 캐나다에 온 사람들이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국에 다시 가겠다고 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캐나다에서, 그나마 의지했던 일행이 돌아간다고 하니 겁이 났다. 허 씨는 운 좋게 외국 바람 쏘인 것에 만족하고 함께 서울로 돌아가기로 했다.● 5수 끝에 간호사가 되다서울로 돌아온 허 씨는 2008년 적십자간호대학에 입학했다. 3년제 전문대였는데 졸업하면 간호사가 될 수 있었다. 허 씨가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엔 캐나다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토론토에 살 때 생선가시가 목에 걸려 병원에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생전 처음으로 남자 간호사를 보았다. 남자가 간호사를 한다는 것을 그때까진 상상도 못 했다.한국에 돌아와서 어디에 취직할지 고민하다가 직업 상담사에게 “혹시 한국도 남자 간호사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될 수 있고, 또 뜨는 직업이다”는 대답을 들었다. 간호사가 되면 전문성을 갖고 평생 직장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공부가 쉽진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기초가 달려 따라가기 어려웠다. 1년 반 뒤 대학을 그만두었다. 이때가 그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 막노동도 해 보고 공부도 해 봤지만 어느 것 하나 적응하기가 어려웠다.‘아, 나는 이 사회에선 적응이 안 되는 쓸모없는 존재란 말인가.’9층 아파트 베란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릴까 고민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주변에 그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들이 있어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는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한 번 더 도전해 보자. 이번엔 목숨을 걸고 해 보자.’2010년 백석대 간호학과에 다시 입학해 4년제 과정을 밟았다. 처음에 안 됐던 공부가 이번이라고 잘 될 리는 없었지만, 버티고 또 버텨 2015년에 마침내 졸업장을 받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여덟 과목을 치는 간호사 국가고시에서 떨어졌다. 대학 동기 63명 중 3명이 떨어졌는데, 그중 한 명이 됐다.자신과의 싸움이 다시 시작됐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원에 다니는 일과가 이어졌다. 건설, 식당, 이사 등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하지만 국가고시 합격이라는 목표는 손에 잡힐 듯 말 듯, 계속 피해 도망갔다. 2016년 과락…. 2017년 평락…. 2018년 또 평락….시험장에 들어갈 땐 또 왔냐는 시선이 부끄러워 정문을 피해 담장을 넘어 들어가기도 했다. 해가 흘러가면서 공부했던 문제집이 허리까지 쌓이는데 왜 떨어졌는지 이유도 모르겠다는 것이 더 고민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공부 방법을 몰라서 헤맸던 것 같습니다. 요령을 모르고 자기 생각만 앞세우며 고집을 부린 것이었죠. 포기할까 수없이 고민했지만, 이 나이에 포기하면 다른 일이라고 쉬울까 싶어 오기로 다시 일어섰습니다.”다섯 번째 시험을 앞두고 교수를 찾아갔다. 교수는 그에게 조언을 해 주었다.“자신 있는 과목부터 풀어라. 시험 전날은 쉬어라. 시험장에 들어갈 땐 늘 먹던 음식을 먹어라. 그래도 모르겠으면 3번을 찍어라.”그 조언이 효과가 있었는지 몰라도, 2019년 2월에 친 다섯 번째 시험에선 합격했다. 합격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간 것을 본 그 심정은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조언해 준 교수조차 “인간 승리”라고 울먹울먹할 정도였다. ● 정상에 오른 희열간호사가 되기까지 무려 11년이나 걸렸다. 이미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자격증을 받고 쉴 겨를도 없었다. 간호사 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 집에는 쌀 한 줌과 달걀 두 알만 있었다. 집세도 못 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평생 직장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시험 합격 후 여기저기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남성 간호사는 없어서 못 쓰는 게 현실이라 구직이 어렵진 않았다. 2019년 3월 그는 서울의 한 유명 병원 응급실 간호사로 취직했다. 그렇지만 그에겐 쉬운 일이 없었다. 병원과 일에 적응한다는 것은 새로운 난제였다. 환자들은 초보 간호사를 귀신같이 알아보고 항의했다. 주사는 잘 놓았는데, 상황 판단 능력은 경험과 비례했다. 20대 여성 간호사에게 “이런 것도 못 하냐. 학교에서 뭘 배웠냐”고 신랄하게 추궁당해 쩔쩔매는 43세 아저씨 간호사의 모습은 누구나 상상하는 그대로였다.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릴 때가 시험공부할 때보다 더 많았다. 첫 직장은 결국 6개월 버티다 그만두었다.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서울은 너무 빡세구나. 지방에서 배우고 오자’는 생각에 청주의 한 병원 응급실에 취직해 일했는데, 거기서 많이 배웠다. 이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간호사 수요가 많아지자 다시 서울로 올라와 직장 생활을 이어갔다.응급실은 물론이고 코로나19 전담 간호사도 해 보고, 급성기 병동에서도 일했다. 점차 경력도, 실력도 쌓여 갔다.2023년부터 영등포의 한 요양병원 중환자실에 취직해 일하고 있다. 요양병동에선 70세까지 일할 수 있다. 멀리 바라보며 살 수 있어 좋다. 6년 차 간호사가 된 그를 이제 아무도 무시하지 못한다. 후배 간호사들에게 일을 가르쳐 주는 경험 많은 간호사가 됐다.점점 일도 재미있어지고, 자신의 장점도 알게 됐다. 여기저기서 일을 해 보니 자신에겐 체력과 순간 판단이 중요한 응급실보단, 인성과 진심이 중요한 노인 환자를 상대하는 일이 맞았다.그는 돌보던 환자가 퇴원할 때 가장 기분이 좋다. 퇴원한 환자들이 보낸 편지를 받을 때 너무 행복하다. 드디어 이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기쁨으로 삶이 즐거워진다. 한국은 노력한 것만큼 돌아오는 사회라는 말의 참뜻을 이제 깨달았다.한국에 와서 정착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다른 탈북민을 보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저는 남들 척척 붙는 간호사 시험도 다섯 번 만에야 통과한 사람입니다. 포기도 하고 싶었고, 죽고도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얻으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생기지 않지만, 노력하며 흘린 땀방울의 대가는 꼭 돌아옵니다. 다른 탈북민들도 다섯 번이나 재수해 43세에 간호사가 된 저를 보면서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허요셉 씨는 끝끝내 정상에 오른 자의 희열을 깨달은 사람이다. 또 다른 삶의 고개를 맞닥뜨릴지라도 이제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올라갈 것이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비전향장기수 안학섭 씨(95)가 최근 정부에 북한 송환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8일에도 안 씨는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열린 송환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해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했습니다.안 씨의 고향은 북한이 아닙니다. 강화도에서 나서 자랐지만, 6·25전쟁 때 북한군에 입대했고, 1952년 7월 강원도로 남파돼 활동하다가 1953년 4월 체포됐습니다. 그리고 43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다가 1995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출소했습니다.그가 43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한 이유는 전향하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지금도 그는 6.25전쟁은 북침이라고 확실하게 믿고 있습니다.안 씨가 북한으로 갈 수 있다면 25년 만에 북으로 가는 비전향장기수가 될 것입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그해 9월 비전향장기수 63명이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송환됐습니다. 당시 안 씨도 북한에 갈 수 있었지만 “미군이 나갈 때까지 투쟁하겠다”며 가지 않았습니다. 이젠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북에 묻히고 싶어 송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정부는 그의 북송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했지만, 이미 63명도 보냈는데, 95세 노인의 소원을 못 들어줄 이유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북한이 그의 송환에 응해 판문점에 나온다면, 남북의 대화채널이 복원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내심 기대할지도 모릅니다.하지만, 정부가 승인해도 김정은이 안 씨를 받아들일까요. 북한은 최근 한강 하류에서 발견된 북한 주민의 시신을 찾아가라는 연락도 받지 않고 무시했습니다.북한의 대남 기관도 지금 안 씨의 송환 요구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열심히 주판을 튕기면서, 송환이 이뤄졌을 때 얻을 수 있는 효과와 부작용을 정리해 김정은에게 보고할 겁니다.만약 김정은이 승인한다면 “북에서 장례식을 치러줄 만한 충분한 선전 효과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현재의 북한은 2000년에 비전향장기수를 받을 때와 달라졌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안 씨가 감내해야 할 달라진 변화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우선 북한은 2023년 말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선언한 이후 통일이란 말을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정책의 불똥은 비전향장기수들에게도 튀었습니다.북한은 귀환한 이인모 씨를 포함한 64명의 비전향장기수를 ‘통일애국투사’라고 불렀는데, 작년부턴 ‘애국투사’로 호칭이 바뀌었습니다.안 씨가 북에 가도 통일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다고 자부할 그의 평생은 부정될 것입니다. 단순한 ‘애국투사’가 되겠죠. 북한이 안 씨를 내세워 선전하려고 해도 통일을 위해 싸웠다는 것을 부각할 순 없으니 선전 효과가 반감이 될 것입니다.둘째로 북한이 경험한 학습 효과입니다. 북한은 과거 비전향장기수들을 내세워 북한은 우월하고, 한국은 나쁜 사회라고 선전했습니다. 선전에 가장 많이 활용됐던 사람이 1993년 3월 북송된 이인모 씨였습니다.북한은 그를 ‘신념과 의지의 화신’으로 지칭하면서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하지만 이 씨를 본 북한 주민들은 딴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남조선 감옥은 어떤 곳이기에 34년이나 감옥살이를 하고 살아서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남조선은 참 괜찮은 곳인 것 같다.”북한은 감옥에서 3년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34년 옥살이는 상상도 못 하죠. 그래서인지 북한에선 이런 얘기가 퍼졌습니다.이인모가 북한의 감옥을 한번 보고 싶다고 해서, 북한에서 간부들만 수감되는 제일 좋은 사리원 감옥을 참관시켰다고 합니다. 그걸 보고 이 씨가 “나 같은 사람은 이런 곳에서 34년이 아니라 3년도 견디지 못한다”고 했답니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북한에서 이 소문은 누구나 들었습니다.그리고 북한에선 신념을 지킬 기회조차 없습니다. 만약 누가 북한에서 “나는 대한민국을 위해 지조를 지킨다”고 하면 즉각 사형이지, 절대 살려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북한에 수감됐던 북파 공작원을 단 한 명이라도 보내달라고 해보십시오. 100억 달러를 준다고 해도 보낼 수가 없을 겁니다. 살아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이인모 씨의 송환 때 느꼈던 북한 주민들의 생각은 63명이 살아오면서 더 확실해졌습니다. “이인모가 별종이 돼 살아온 줄 알았는데, 저긴 대체로 수십 년씩 감옥생활을 해도 멀쩡하구나. 그리고 적이라고 해도 죽이질 않는구나.”북한은 고작 한국 드라마를 봤다고 처형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한국이 얼마나 관용적인 사회인지는 더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 씨가 돌아가면 대한민국이 얼마나 훌륭한 사회인지를 증명하는 홍보물이 될 것입니다.“42년 넘게 감옥 생활을 하고 나왔는데도 95세까지 살아있다니 믿을 수가 없다”고 쉬쉬 말이 나오겠죠. 그러니 김정은이 안 씨를 쉽게 받을 수가 있을까요.세 번째 이유는 안 씨가 내세울 만한 대단한 업적이 없기 때문입니다.이인모 씨에겐 반일 활동 경력과 종군기자였다는 스토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 씨는 남파돼 9개월 만에 체포됐습니다. 북한 주민들을 감동시킬만한 전투 공로도 없습니다. 게다가 고향은 북한이 아닌 강화도입니다. 여기에 더해 안 씨가 한국에서 30세 연하의 여성과 결혼까지 한 것을 알면 충격을 받겠죠. 간첩 또는 반동이 젊은 아내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북한에선 상상할 수 없습니다. 안 씨는 자신을 북으로 돌려보내달라며 며칠 전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숱한 고난과 역경이 있었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얼마 안 남은 인생, 이제는 동지들 곁에서 보낼 수 있도록 북으로 보내 주세요.”아마 그는 북에 돌아간 동지들이 불과 9개월 만에 인간의 존엄성과 양심을 팔며 새빨간 거짓말을 했던 장면을 봤을 겁니다. 2001년 6월 북한은 조선중앙TV에 비전향장기수들을 출연시켜 좌담회를 했습니다.사회자인 여성 아나운서가 “장군님의 위인적 풍모는 그야말로 온 남녘땅에 장군님 흠모 열풍을 안아오지 않았습니까”라고 말을 꺼내자 귀환 장기수들은 저저마다 남한의 ‘현실’을 이렇게 전하더군요.“남조선 거리에 나가면 장군님이 입으신 잠바가 유행의 선두를 달리고 있습니다.”“남조선 청년학생들 속에서는 장군님의 영상을 가슴에 모시고 사진을 찍지 못하면 좀 시대에 떨어진 모자란 사람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대학에서는 벽보판 상단에 장군님 영상을 모시고 장군님의 혁명 경력과 빛나는 업적을 대서특필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장군님 열풍 때문에 큰 백화점 점원들은 인민군 군복을 입고 돌아다닙니다.”이것은 한국 사람들이 봐야 했을 영상입니다. 북한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를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으니 말입니다. 자기가 선택한 사상을 지키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는 사람들을 9개월 만에 사기꾼으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그중엔 머리를 숙이고 어색한 표정으로 손을 매만지던 사람도 있었습니다.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평양에 돌아간 지 1년 뒤 63명 중 한 명이 남쪽에 남은 비전향장기수들에게 몰래 비밀 편지를 보냈습니다. 물론 그게 누구인지, 어떻게 전했는지는 알려지면 안 되니 생략하겠습니다.그 편지엔 “여긴 자네들이 생각했던 곳이 아니다. 나는 실수했지만, 당신들은 제발 오지 말고 남쪽에서 여생을 보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남쪽에서 그 편지를 읽어봤을 비전향장기수들은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그래서인지 그동안 북으로 가겠다고 열심히 조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번에 안 씨가 나타났습니다. 아마 그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 내가 돌아가도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힐 일밖에 더 남은 것이 있을까”고 생각할 겁니다. 묻힐 일뿐이라면, 북한에서 그를 굳이 받을 이유는 더더욱 없을 겁니다.그러니, 우리가 그의 소원을 막을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대한민국은 사상과 이념을 떠나 95세 노인의 마지막 소원이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사회라는 것을 북한에 당당하게 보여줘도 되지 않을까요.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이재명 정부는 북한에 잘 보일 수 있는 조치들을 신속하고도 꼼꼼하게 취하고 있다.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에 이어 5일 확성기 20여 개가 하루 만에 철거됐다. 지난달 초에는 국가정보원이 50여 년간 운영한 대북 라디오 및 TV 방송 송출을 전격 중단했다. 표류해 넘어왔던 북한 주민 6명 송환도 빨리 이뤄졌고, ‘북한 주민 접촉 신고 처리 지침’도 폐기됐다.이렇게 성의를 보여도 북에서 돌아온 대답은 싸늘했다. 김여정은 “이재명 정부가 우리의 관심을 끌고 국제적 각광을 받아 보기 위해 아무리 동족 흉내를 피우며 온갖 정의로운 일을 다 하는 것처럼 수선을 떨어도 한국에 대한 우리 국가의 대적 인식에서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고 지난달 28일 선언했다. 그는 “서울에서 어떤 정책이 수립되고 어떤 제안이 나오든 흥미가 없으며 한국과 마주 앉을 일도, 논의할 문제도 없다는 공식 입장을 다시금 명백히 밝힌다”고도 했다. 이쯤 되면 한미 연합 군사훈련 일정 조정이나, 비전향 장기수 송환 카드도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정부 관계자들 머릿속이 “김정은, 그리고 이 대통령을 만족시킬 아이템이 무엇일까”로 가득 차 있는 동안, 수만 리 타향에선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했다 우크라이나군의 포로가 된 북한군 청년 두 명이 7개월 넘게 방치돼 있다. 이들은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수차례 밝혔지만, 한국에선 관심 가지는 사람이 없다.우크라이나 사정에 정통한 인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당국이 처음에는 (한국으로의) 포로 송환 대가에 대해 생각했지만, 이젠 대가를 포기하고라도 (한국이) 데려간다고 하면 그냥 보내줄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그렇지만 한국에서 이 포로들을 데려올 수 있는 관계 부처는 찍힐까 봐 말도 못 꺼내는 것 같다. 사실 이재명 대통령이 데려오라고 지시하면 즉각 이뤄질 일이다. 한국 정부 공무원이 변호사를 대동하고 가서 국제법에 의거해 송환 절차를 밟으면 얼마든지 데려올 수 있다.우크라이나에 파병된 북한군은 북한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표본이다. 국정원은 북한군 1만5000명이 파병돼 전사자 600여 명을 비롯해 사상자 4700여 명이 발생한 것으로 파악한다. 이 사상자들 가운데 포로가 단 2명 나왔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극단적으로 세뇌된 북한군은 포로가 되기보다 자폭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우크라이나 군인들은 “북한군은 부상당한 전우를 데려갈 수 없으면 사살하고 퇴각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부하가 포로가 되면 상관에게 엄격한 연대 책임을 묻기 때문이다. 인류 전쟁사에서 전투 중 다친 부하를 죽이지 못했다고 지휘관을 처벌하는 군대는 없었다. 전투기 자살 공격인 ‘가미카제(神風)’로 악명 높았던 일본군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우크라이나군은 북한군을 포로로 잡기 위한 특수부대를 운영했지만 부상한 두 명만 생포할 수 있었다. 이 포로들은 “수류탄이 있었다면 자폭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최초로 포로가 된 북한군은 부상이 심해 죽었다고 우크라이나군이 발표했지만, 실은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공개된 다른 북한군 포로의 손이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던 것은 부상 때문이 아니라 자결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이런 현실에서 두 명이 포로가 된 것도, 마음을 바꾸어 한국으로 오겠다고 한 것도 기적 같은 일이다. 그 기적을 우리는 외면하고 있다.북한 청년들이 10년 동안 한솥밥을 먹은 전우를 서슴없이 죽이는 잔혹한 군인이 된 것도, 삶을 서슴없이 포기하도록 세뇌된 것도 김정은 탓이니 우리와 상관없는 일인가.한국은 세계 난민을 위한 모금 광고가 TV에서 나오는 나라다. 그런데 불과 수십 km 북쪽에는 언제 죽을지 모를 전쟁터에서도 고작 돼지비계 한 덩이에 흐뭇하게 웃는 동포가 살고 있다. 러시아에 파병되면 죽을 땐 죽더라도 배부르고 뜨뜻하게 살 수 있다며 자원하는 청년들이 있다.우리가 북한 주민을 모두 구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옥’ 같은 전장에서 생존한 20세, 26세 청년들이 하루빨리 새 삶을 살게 손은 내밀 수 있다. 이들을 외면한다면 이재명 정부가 주장하는 남북 인도주의의 의미는 달리 해석돼야 한다. 김정은에게 잘 보이는 것만 인도주의이고 잘 보일 수 없으면 인도주의가 아니란 말인가. 두 청년은 오늘도 “우릴 언제 한국에 데려가느냐”고 묻고 있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이를 악물고 또 악물었지만, 북한이란 땅은 수렁이었다. 몸부림을 칠수록 점점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더는 숨을 쉴 수 없을 때 그는 차디찬 압록강에 뛰어들어 중국으로 향했다. 뱃속에서 3개월 된 아기가 꿈틀거렸다.“너는 꼭 훌륭한 세상에서 살게 해줄게.”두 달 뒤 그는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다. 아기와 엄마는 함께 한국 생활의 첫 발을 내디뎠다. 한국에 도착해 벌써 13년이 흘렀다. 아이는 이제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소녀가 됐다.“엄마의 고향은 북한이야. 두만강에서 100리나 떨어진 함경북도의 작은 도시였어. 정말 추운 곳이었지…. 너처럼 나도 외동딸이었어.”엄마 이연아 씨의 이야기는 42년 전부터 시작된다.● 추방자의 외동딸이 씨가 1983년에 외동딸로 태어났을 때 부친은 운수사업소 지도원이었고, 모친은 의사였다. 아버지는 추방자 신분이었다.이 씨의 할아버지는 원래 강원도에서 학교 교장을 지냈다. 어느 날 할아버지는 마을을 담당하는 유부남 안전원(경찰)이 미혼인 여교사와 불륜 관계인 것을 알게 됐다. 당시 북한에선 불륜을 매우 큰 범죄로 간주했고, 군중 비판 대상이었으며 처벌 수위도 강했다. 안전원에게 여교사의 신세를 망치지 말라고 경고했다. 교장이 껄끄러웠던 안전원은 틈만 노리다가 마침내 기회를 잡았다. 할아버지의 친구 한 명이 한국 라디오를 듣다가 체포됐는데, 할아버지도 간첩 내통자로 몰아간 것이다. 할아버지를 따라 18세였던 아버지도 함께 산골로 추방을 왔다. 사실상 유배인 셈이다.할아버지의 입바른 소리 덕분에 출신 성분이 나락으로 떨어졌음에도 아버지는 나름 북한 체제에서 영리하게 살아남았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준의사가 된 여성과 결혼에 성공했다. 북한은 의사에 대한 대우가 높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결혼한 뒤 이 씨의 부친은 러시아에 두 차례나 다녀왔다. 첫 번째는 이 씨가 4살 때 벌목공으로 파견돼 갔다가 7살 때 돌아왔다. 두 번째는 이 씨가 15살 때인 1998년에 갔는데, 이때엔 북러 합작회사의 경리로 취직해 많은 재물을 벌어왔다. 러시아에 벌목공으로 갔던 노동자들은 귀국할 때 돈 대신 북한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온다. 돈을 갖고 오면 이래저래 뺏길 가능성이 컸지만, 물품은 집에 쌓아두었다가 차츰 팔아서 식량과 바꿔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씨는 아버지가 가져온 러시아 사탕을 거의 10년 동안 먹었고, 러시아제 비누도 10년 넘게 썼다. 고난의 행군 때 아사자들이 적잖게 속출하는 가운데서도 이 씨 가족은 러시아에서 가져온 오토바이와 전축, 소파, 침대, 이불 천, 카펫 등을 팔아 굶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노동당 방송원이 되다학교 시절의 이 씨는 책을 좋아하는 문학소녀였다. 2000년에 중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기능공학교라고 불리는 2년제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 시골엔 대학 추천권이 아예 내려오지도 않았다.19세에 전문학교를 졸업했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어 1년 넘게 집에서 놀았다.그러다가 21세에 도 방송위원회 3방송 방송원(아나운서)으로 취직하게 됐다. 앞서 방송원으로 있던 여성이 결혼하는 바람에 그 자리가 공석이 됐는데, 기자 한 명이 평소에 이 씨의 화술 실력을 봐두었다가 추천한 것이다. 이 씨는 2003년 1월 도당 간부부의 비준을 받아 정식으로 방송원에 임명됐다.도 방송위원회는 각 군에 2~3명의 기자와 1명의 방송원 겸 엔지니어를 두고 있다.북한은 모든 가정과 사무실에 유선으로 연결된 스피커를 의무적으로 설치하게 한다. 이 스피커에선 아침 5시부터 밤 10시 30분까지 중단 없이 방송이 나온다. 스피커에 끄는 기능이 아예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침 5시엔 스피커 소리를 들으며 깨어나야 하고, 밤에 스피커가 꺼져야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그렇다고 스피커를 공짜로 나눠주는 것도 아니다. 이 씨가 방송원이던 시절에는 쌀 2㎏이상을 살 수 있는 북한돈 3000원에 구입하게 했다. 북한에서 살려면 내일 굶어죽어도 오늘은 스피커를 무조건 사야 했다.북한의 3방송 체계는 땅에 지선을 묻어 미세한 전류로도 방송이 전달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래서 1년 동안 전기가 오지 않아 암흑 속에서 살아도 스피커에선 이에 상관없이 체제를 찬양하는 방송이 나온다.하루 16시간 30분 방송시간의 대다수는 중앙에서 운영한다. 즉 북한 전역에서 똑같은 방송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1시간은 지방의 특색을 반영한다며 각 도 방송위원회가 자체로 제작한 프로그램을 끼워 넣게 한다. 지방 방송 한 시간 중 40분은 도에서 제작한 프로그램을, 20분은 각 군이 자체 제작 프로그램으로 채운다. 이 씨가 함께 일하는 기자 2~3명은 이 20분짜리 프로그램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씨는 이들이 써온 “군의 어느 협동농장 관리위원회가 일을 잘 해서 계획을 넘쳐 수행했다”는 형식의 원고를 읽어주는 일을 했다. ● 밀수에 뛰어든 ‘당의 목소리’북한에서 방송 아나운서는 ‘당의 목소리’라고 불렀는데, 실제로도 목소리만 존재하는 직업이었다. 어디 가서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어도, 방송원이라고 하면 다들 목소리는 귀에 익어 반가워했다. 월급이나 배급은 받을 때도 있고, 받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20대 처녀가 얻을 수 있는 직업치곤 꽤 좋은 직업이었다. 밀폐된 방송실에 붙어있는 것이 싫긴 했지만, 오후 3시면 퇴근이 가능했고, 주말도 쉴 수가 있었다. 일반 기업소에 간 다른 동창들은 시도 때도 없이 각종 동원에 끌려 다녔다.처음엔 방송원 6급으로 시작했다가 2년이 지나니 5급으로 승진도 했다. 물론 5급이 됐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월급이 몇백 원 오른 것이 전부였다. 집안 형편이 좋았다면 계속 방송원을 했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외동딸인 그가 집안 살림에 뭔가 기여를 해야 했다.2006년 그는 결혼을 핑계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당시 사귀는 사람이 있었다. 군인이었는데, 결혼식 날짜까지 다 잡아놓은 뒤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할아버지가 북한 법에 의해 처형된, 처단자 손자라는 것이었다. 6.25전쟁 때 치안대 등 국군 편에 섰던 사람들의 경우 본인은 처형되고, 가족까지 대대손손 그 누명을 쓰고 살아야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가 결혼을 극구 반대했다.“나도 출신성분이 나쁜 네 아버지에게 속아 결혼해 이 산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너까지 그렇게 살게 할 순 없다. 그리고 너만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자식들까지 평생 산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출세도 못하고 살아야 한다.”결국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둘의 결혼식은 없는 일이 되었다“돈이나 열심히 벌어야 겠다”고 결심한 이 씨는 장사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산골에서 마땅히 할 수 있는 돈벌이는 없었다.그는 밀수에 뛰어들었다. 내륙 쪽에서 차량으로 들어오는 밀수품은 단속이 심한 국경까지 접근하지 못해 이 씨가 사는 마을까지만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걸 메고 국경까지 날랐다. 구리, 니켈, 폐철, 약초 등 온갖 밀수품이 들어왔다. 100리나 되는 길을 산을 타고 다녔는데,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견딜 수 없는 일은 수시로 단속에 걸려 물품을 빼앗기는 것이었다. 보안원들과 이들이 고용한 규찰대는 가끔 산길에 매복해 물건을 빼앗았다. 빼앗은 물건은 일부는 성과를 위해 바치고, 일부는 자기들이 빼돌려 다시 팔아먹었다. 3년 동안 밀수를 열심히 했지만, 빼앗긴 것을 계산하면 얼마 벌지도 못했다. 벌어서 쌓아 놓으면 없어지는 반복의 굴레였다 .점점 체제에 환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산골을 벗어나다2008년 월 40%의 사채를 빌려 장사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동업자가 사라졌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이때 중국에서 제안이 왔다. 연길에 와서 옷을 선별해주면 매달 500위안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눈에 뵈는 게 없는 때라 선뜻 응했다.밤에 두만강을 넘어 연길에 들어가니 어느 창고로 보냈다. 그 창고는 동북 3성에서 기부를 받은 옷들이 도착하는 곳이었다. 중국 학교에선 난민구호물품이라는 핑계로 학생들에게 옷을 걷었는데, 이걸 트럭 하나당 210위안씩 주고 업자들이 몰래 빼돌려 팔아먹는 것이었다.이 씨가 하는 일은 옷을 선별해 2위안, 5위안, 10위안짜리 마대에 담는 것이었다. 새 옷이나 비싸 보이는 옷은 10위안, 낡은 옷은 2위안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그렇게 선별된 옷 마대는 북한에 밀수로 넘어갔다. 북한 장사꾼들이 그 마대를 넘겨받아 다시 전국의 장마당에 팔아 이윤을 남겼다.이 씨는 그곳에서 아침 7시부터 저녁 9시까지 14시간을 일했다. 너무 고된 일이라 하루에 네 끼씩 먹어도 배가 고팠다. 창고는 늘 먼지로 꽉 찼지만, 마스크도 없이 일을 했다.그렇게 몇 달 동안 몸을 갈아 넣는 일을 하고 번 돈을 갖고 다시 북에 돌아왔다. 그 돈으로 양강도 혜산 시내 변두리에 작은 단칸방을 하나 구입했다. 시내에 집이 없으면 부모님을 시골에서 해방시킬 수 없었다.도시에 나오니 몸을 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었다. 그는 중국제 휴대전화를 하나 사서 중국이나 한국에서 북한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는 일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북한 가족에게 돈을 보내면 중국에서 돈을 받는 사람이 10%, 북한에서 돈을 넘겨받는 사람이 10%, 가족과 연결해 돈을 전달해주는 사람이 10%를 가졌다. 신용이 축적되니 일감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체포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위험한 일이지만, 대신 한꺼번에 많은 돈을 만질 수가 있었다.● ‘처녀 연금술사’그렇게 점차 모은 돈으로 그는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앞쪽 지역에 사는 사람을 통해 금을 제련하는 방법을 알게 됐고, 집에서 금을 제련하기 시작했다.집에서 32㎞ 떨어진 곳에 금 광산이 있었다. 광산 사람들은 금 정광을 곡괭이로 파서 이를 파쇄해 몰래 팔았다. 이 씨는 이곳에 가서 20㎏짜리 정광 한 배낭을 북한돈 1만 원씩에 샀다. 그리고 전문 짐꾼으로 일하는 사람을 고용해 집에 메고 왔다. 적을 때는 100㎏, 많을 때는 200㎏을 가져왔는데 차로 싣고 오면 단속될 수가 있기 때문에 왕복 140리를 짐꾼 5~10명이 걸어서 오갔다. 집에 도착하면 미리 마련해둔 시멘트 저장탱크에 정광을 넣고 제련에 들어갔다. 공정은 쉽지 않았다. 정광을 청산가리로 녹인 뒤, 쌀알처럼 작게 부순 바나나 껍질 숯을 넣으면 금가루가 여기에 스며든다. 이걸 다시 전분 가루에 버무려 떡처럼 만들어 말리고, 자체로 만든 용광로에서 녹인다. 온도를 섭씨 3000도로 맞춰야 하기 때문에 혜산에서 제일 좋은 고열탄을 사서 써야했다. 이렇게 녹인 시꺼먼 덩어리를 찬물에 넣었다가 다시 두드려 부수고 납 성분만 남은 것을 다시 전기로에 넣어 용해시킨 뒤 질산 처리를 하면 연은 증발하고, 순도 95%의 금이 남는다. 이런 중세적인 제련 과정은 꼬박 이틀이 걸렸다.제일 중요한 것은 금을 많이 함유한 정광을 사오는 일이었는데, 이 점에선 이 씨의 눈썰미가 탁월했다. 몇 번하다 보니 정광을 고를 때 이 정도에선 금이 어느 정도 나오겠다는 것이 가늠이 됐다. 한번 금을 뽑으면 보통 본전 대비 세 배 이상이 남았고, 운이 나빠도 두 배는 뽑았다. 혜산에 이렇게 몰래 금 제련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씨는 똑같은 정광에서도 금을 많이 뽑는다고 업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다.2009년 여름은 꼬박 금 제련에 빠져들어 살았다. 그러나 독극물인 청산가리와 납을 변변한 보호 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다루다보니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기침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 그때 그는 독극물이 몸에 얼마나 나쁜지를 잘 알지 못했다. 설사 알았어도 돈을 벌기 위해 했을 것이었다. 그의 목표는 혜산 시내에 부모님과 함께 살 수 있는 번듯한 아파트를 하루빨리 장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눈뜨고 강탈당한 전 재산그해 가을 집에 분주소(파출소) 당 비서가 불쑥 문을 차고 들어왔다. 마을의 누군가가 신고를 한 것이었다. 하필 당 비서는 악독하게 돈을 빼앗아 먹기로 소문나, 사람들이 “전쟁이 나면 저 놈부터 죽인다”고 욕을 하는 독종이었다.마당에 들어온 비서는 눈이 휘둥그레 졌다. 한바탕 고함을 지르더니 이를 덮어주는 대가로 얼마를 뇌물로 줄 수 있을지 넌지시 떠보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이 씨가 모든 자본을 다 투자해 정광을 많이 사다 놓은 날이었다. 미처 대답을 못하고 있었는데, 비서는 뇌물을 줄 의향이 없다고 받아들였는지 집에 있던 짐꾼들을 모두 잡아 분주소로 데려갔다.좀 있다가 차를 6대나 끌고 보안원들을 모두 동원시켜 그의 집에 왔다. 그들은 모든 것을 뜯어갔고, 심지어 집 앞 흙까지 파갔다.당 비서는 “큰 것을 잡았다”고 기고만장했다. 북한 사람들은 “숨을 쉬는 것을 빼곤 다 불법이다”고 처지를 한탄한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장사도 다 불법인데, 그중에서도 금과 송이를 다루면 특히 엄중하게 처벌한다. 북한에서 금과 송이는 노동당만이 헐값에 사서 외국에 팔 수 있다. 개인이 이를 다루면 역적처럼 취급했다.분주소에 끌려간 이 씨는 혹독한 취조를 받았다. 다행히 빼앗긴 것이 아직 금을 빼지 않은 돌가루에 불과한 것이라 금을 판 역적까진 되지 않았다. 돌려달라고 사정하니 보안원이 “저 흙이랑 같이 분주소 앞마당에 파묻기 전에 당장 꺼지라”고 호통을 쳤다.분주소에서 석방돼 걸어오는 이 씨를 보고 온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불법적인 일을 했다고 비웃는 것이 아니라 “다 빼앗겼으니 이제 쟤는 어떻게 사냐”고 동정하는 것이었다.목숨 걸고 여름 내내 번 돈을 모두 빼앗기고 나니 살 생각이 없어졌다. 난생 처음 그는 목청껏 울었다. 집에 온 그는 아버지 어머니도 알아보지 못했다. 충격으로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다. 일주일 동안 그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다 빼앗기고 집에는 식량 10㎏만 남아있었다.탈북하기 전에 보니 이 씨가 빼앗긴 정광은 분주소 마당에 깔려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 비서는 혜산에서 금 뽑는 사람들을 몰래 수소문해 찾아가 금을 뽑아달라고 했다. 혜산에서 금을 뽑는 사람들마다 방식이 조금씩 다 달랐는데, 업자들은 “저걸로는 금을 뽑지 못 한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실은 엮이기 싫어 거부한 것이다. 비서 눈에는 분명 금흙인데, 금을 뽑지 못한다고 하니 화가 난 것일까. 결국 그 흙은 마당에 깔렸다. 금을 밟고 사는 기분이라도 내려 한 것일까.● 화폐개혁으로 또 무너지다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모든 것을 빼앗겨 하늘이 무너진 순간에 뜻밖에 큰 일거리가 들어왔다. 한국에 있는 사람이 북한 가족에게 큰 돈을 보냈고, 이 씨가 그 심부름을 하게 된 것이다. 액수가 큰 만큼 떨어지는 몫도 컸다.그 돈으로 이 씨는 새로운 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시작하자마자 다시 벼락이 떨어졌다.2009년 11월 30일 북한 당국은 기습적인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기존 북한돈 100원을 새 화폐 1원으로 바꾸되, 가구당 교환 한도를 10만 원으로 못 박았다.화폐 개혁 직전 쌀 1㎏은 2500원, 달러 환율은 3500원 정도였다. 쌀 40㎏ 정도 살 수 있는 돈만 바꿔주고, 나머지 돈은 휴지가 된 것이다.북한의 모든 도시가 그랬지만, 밀수로 먹고 사는 도시 혜산은 특히 더 큰 충격에 빠졌다. 무용지물이 된, 김일성 얼굴이 박혀 있는 지폐 뭉치에 불을 지르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분노에 찬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당국을 욕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박남기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을 희생양으로 삼아 공개 처형했지만, 화폐 개혁 같은 엄청난 일을 당 부장이 혼자서 추진했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이 씨는 장사를 하면서 돈을 인민폐로 받았다. 그런데 압수수색의 공포를 겪은 모친이 중국돈을 축적하면 또 빼앗길까봐 이 씨가 몰래 다시 북한 돈으로 다 바꾸었다. 화폐 개혁 발표 이후에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이 씨는 망연자실했다. 집 한 채를 살 돈이 또 날아간 것이다. 주저앉아 울새도 없었다. 쌓아둔 북한 돈을 몽땅 시장에 갖고 나가 콩기름 30㎏과 바꾸었다. 화폐 개혁 당일은 난리가 났다. 부자들은 기존 지폐를 헐값으로 시장에서 팔고, 10만 원도 없던 사람들은 이를 싸게 사서 교환했다.재빨리 콩기름과 바꾼 것도 천만다행이었다. 다음날이 되니 시장에서 물건이 사라졌다. 널뛰는 환율 때문에 식량조차 사라져 돈을 줘도 살 수가 없었다. 이때 이 씨는 처음으로 며칠을 굶어봤다. 다행히 쥐고 있는 것이 콩기름이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식량과 물물 교환하긴 쉬웠다.이 씨는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젊음과 몸을 갈아 넣으며 버텼는데, 당국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마음 같아선 백 번 죽고 싶었지만, 외동딸만 바라보는 부모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다시 장사에 뛰어들어 이전부터 오래 알고 지내던 밀수꾼과 동업을 하기 시작했다.하루는 그를 눈 여겨 보던 마을 아줌마가 다가왔다.“연아야. 우리 아들 좀 맡아줘.”그때 이 씨는 28세로 북한에서 노처녀 취급을 받는 나이가 됐다. 남자가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자의 여동생이 한국으로 이미 가서 돈을 보내주는 ‘한라산 줄기’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 선을 통해 언젠가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압록강에 뛰어들다어느 날 갑자기 시어머니가 사라졌다. 아들을 이 씨에게 부탁해놓고, 본인은 딸을 찾아 한국으로 간 것이다.이 씨도 더는 북한에 머물기 싫어졌다. 그는 남자를 먼저 장백으로 건네 보냈다. 그가 시어머니가 이용한 한국행 선을 찾으면 뒤따라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불행하게도 압록강을 넘은 다음날 바로 체포돼 북송됐다.보안원들이 이 씨를 잡으려 왔지만, 그는 겨우 도망쳐 숨었다. 하지만 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였을 뿐이었다. 그는 도강 브로커를 찾아갔다. 당시엔 혜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도망칠 때라 브로커 ‘사업’이 최고로 활성화됐던 때였다. 브로커는 강을 넘을 12명 팀에 그를 끼워 넣었다. 2011년 11월 이 씨는 가슴까지 오는 압록강에 뱃속에 품은 새 생명과 함께 뛰어들었다. 함께 온 다른 탈북민들과 달리, 이 씨는 장백에 찾아갈 집이 있었다.시누이와 시어머니를 한국으로 보내준 그 집을 찾아가니 한국에 도착하면 한국돈 250만 원을 달라고 했다. 그게 얼마나 큰 돈인지는 감이 오지 않지만, 그러겠다고 했다. 그렇게 이 씨는 운 좋게도 강을 넘자마자 한국행 길에 오를 수 있었고, 불과 1주일 만에 태국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태국에 도착해 한 지방 경찰서에 잠시 수감돼 있을 때였다. 트럭 한 대가 와서 막 태국에 도착한 탈북 여성들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먼저 탈북한 시어머니가 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중국까지 마중 나온 시누이와 함께 몇 달 중국에서 놀다가 태국으로 온 것이다. 이 씨도, 그를 태국에서 만난 시어머니도 동시에 얼어붙었다.“내 아들은?”아들의 체포 소식에 서먹서먹해진 두 사람은 함께 태국 감방에서 있었고, 2012년 1월에 한국에도 같이 왔고, 하나원에도 같이 들어갔다. 그 사이 이 씨의 배는 점점 불러갔다. 그의 사연을 아는 주변 사람들은 애를 지우고 한국에서 새로 시작하라고 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하나원에 가니 시어머니의 집착이 시작됐다. “뱃속의 애는 내 손자인데, 절대 지울 수 없다”고 계속 따라다녔다. 하도 심하니 하나원에서 이 씨를 먼저 산후조리원에 보내 둘을 떼어놓았다.산후조리원에서 이 씨는 계속 갈등했다. 처음엔 애를 낳고 입양을 보낼 생각을 했다. 부모님을 북에 두고 온 자신이 아무도 없는 이 땅에서 좋은 부모가 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산후조리원에 있다보니 그곳엔 외국에 입양을 갔다가 부모를 찾으러 온 사람들이 계속 왔다. 그들의 절절한 사연을 접하다보니 어느새 마음이 바뀌었다.“내 아이도 커서 엄마를 찾아다니게 할 순 없어, 이 애는 내가 키워야겠다.”이 씨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출생한 딸을 데리고 나왔다. 2012년 7월 서울 강북의 작은 임대아파트에 한국 생활을 동시에 시작하는 엄마와 딸이 보금자리를 틀었다.집을 받고 들어가니 먼지가 가득했다. 애를 눕히고 방바닥을 닦으며 이 씨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우리 함께 이 땅에서 고생을 이겨내 보자.”● 땅에 뿌리를 내리다처음엔 아무 것도 없었다. 이불도 없었고, 분유도 없었다. 돈을 벌려니 애 때문에 나갈 수가 없었다. 벼룩시장을 뒤지며 집에서 할 수 있는 별의별 부업을 다 찾았다. 밤새 악세사리를 붙이고 바느질을 했다. 이런 일감도 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때엔 한 달에 10만 원으로 살 때도 있었다. 월 100만 원쯤 벌면 북에 있는 부모에게 돈을 보냈다.경기도에 자리 잡은 시부모는 어떻게 찾아냈는지 하나원을 졸업하자마자 찾아와 “우리가 북에 있는 아들을 데려올 것이니 애도 함께 키우자”며 접근해왔다.하지만 막상 북에 연락을 하니 아들은 그가 사라진 지 얼마 안 돼 딴 여성과 살림을 차렸다. 홀로 살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북에서 새 장가를 갔지만, 그 사람을 크게 원망하진 않습니다. 어찌됐든 한라산 줄기 덕분에 제가 한국에 올 수 있는 선을 알게 됐고, 부모님도 데리고 왔으니까 덕을 본거죠. 계속 찾아오던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애한테 안 좋은 영향을 주니 강제로 못 오게 했습니다. 아들이 딴 여자와 결혼했는데도 자꾸 와서 참견하는 게 너무 지나쳤거든요.”한국에 온 탈북민의 최대 목표는 북에 남은 가족을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이 씨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애를 키우며 돈을 모으긴 쉽지 않았다.결국 이 씨는 이듬해 임대아파트를 내놓고 돌려받은 보증금으로 부모를 북한에서 데려올 수 있었다. 부모는 무사히 한국에 왔고, 부모 집에서 살게 되니 아이를 돌봐주는 부담을 크게 덜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구직활동에 열심히 뛰어들어 2015년 한 공공기관에 취직했다. 지금은 10년째 한 곳에서 일하고 있다. 2021년 이 씨는 38세에 늦깎이로 대학을 졸업했다.“제가 애를 키우면서 우울증이 심하게 왔습니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그걸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저는 해냈습니다. 살면서 주변을 돌아보니 우울증이 걸린 사람들이 많더군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우울증 걸린 사람들이 자생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되자고요. 제가 이겨낸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이겨낼 수 있게 힘을 주고 싶어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습니다.”어느새 딸은 13세가 됐다. 갓난아이라도 북에서 태어나면 장학금 등 탈북민 혜택이 있지만, 북에서 임신해 한국에서 태어나면 아무런 혜택이 없다. 그래도 든든한 직장 덕분에 애를 키울 수 있었다.엄마의 ‘한국 나이’는 딸과 같은 13세이다. 서울에서 10년차 직장인으로 살고 있는 그가 앞으로도 회사원으로 계속 살지, 아니면 우울증을 걸린 사람들을 보듬는 심리 상담사가 될지 알 순 없다. 분명한 것은 그의 뿌리는 계속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땅에 점점 더 굳세게 박혀, 흔들리지도, 넘어지지도 않는 한 그루의 거목으로 크고 있는 것이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얼마 전 종영된 22부작 북한 드라마 ‘백학벌의 새봄’이 미국 언론의 관심까지 끌었습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달 26일 ‘북한 주민들이 국가 프로파간다를 회피하자 김정은이 현란한 TV쇼를 시도하다’라는 제하의 기사를 썼습니다.이에 따르면 ‘백학벌의 새봄’이 북한 사회의 부패와 가족 갈등 등을 비교적 솔직하게 묘사하며 인기를 끈 것은 김정은 정권의 달라진 프로파간다 전략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즉 정권의 약점으로 보일 수 있는 상황들을 현실에 걸맞게 보여주고, 이를 당이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모습까지 함께 담아내 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의도라는 것이죠.월스트리트저널 이전에 한국 언론들도 이 드라마에 관심을 가지고 기사들을 썼습니다. 북한 드라마답지 않게 묘사되는 적나라한 장면이 많다는 것이죠.집안 급이 맞지 않다고 아들의 여자 친구에게 떠나라고 압박하는 엄마도 등장하고, 뇌물을 주는 장면도 나오며, 남자가 앞치마를 두르고 밥을 하는 장면도 나온다는 것이죠.그래서 이 드라마가 얼마나 파격적인가 궁금해 북한 출신인 기자가 직접 22부까지 다 봤습니다. 요즘은 북한 영화나 드라마를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다 볼 수 있는데, 이 드라마 역시 유튜브에 22부까지 다 올라와 있습니다.● ‘백학벌의 새봄’을 본 탈북기자의 소감드라마의 줄거리는 만년 꼴찌 농장으로 전락한 백학리에 새로 부임한 리당비서 형섭이 부정부패와 관료주의에 맞서 고군분투하면서 마을을 사회주의 지상낙원으로 탈바꿈시킨다는 내용입니다. 저의 눈에는 위에서 화제가 됐다는 내용들이 크게 와 닫진 않았습니다. 며느리든 사위든 마음에 들지 않아 집안에서 반대하는 장면은 이전에도 나왔던 것이고, 뇌물 주는 장면이나 남자가 밥하는 장면 등도 크게 파격적이라 보긴 어려웠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봐도 이런 것 때문에 우리 드라마가 달라졌다고 평가하진 않을 듯합니다.이 드라마에 대한 개인적인 소감을 말하면, 최대 장점은 스토리 구성이 탄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북한 드라마는 너무나 상투적이고 뻔해서 도무지 끝까지 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인간관계의 갈등과 해결 과정을 나름 타당하게 설명하고 있어 끝까지 보는 데 큰 무리가 없었습니다.또 다른 인상적인 부분은 북한 예술 작품들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지겨운 ‘장군님’ 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김정은을 의미하는 ‘총비서 동지’라는 이름은 한 개 부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합니다. 다른 드라마였다면 백 번도 넘게 들어야 했을 겁니다.그리고 이 드라마엔 먹을 것이 수없이 등장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친해지러 갈 때도, 사과하러 갈 때도, 청탁하러 갈 때도 늘 손에 뭔가 들고 다닙니다. 닭고기가 가장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10부쯤 봤을 때, 이제 저 사람은 손에 닭백숙 그릇을 들고 가겠구나 싶은 전개가 상상이 됩니다. 아마 북한 주민들이 봤을 때 제일 어처구니없는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드라마처럼 살려면 집에 닭을 100마리는 키워야 할 겁니다.또 하나 북한 주민들이 혀를 찰 대목은 백학 농장은 완전히 ‘맥가이버’ 농장이라는 것입니다. 당비서가 새로 부임한 이후 일개 농장에선 못 하는 것이 없습니다. 농촌학교 학생들이 비료를 살포하는 드론도 척척 만들고, 농민이 농기계를 업그레이드하고, 비료 공장도 세웁니다. 새로운 영농법들도 이 농장에서 완성합니다. 국가가 완성해 전국에 일반화해야 할 부분들을 개별 농장에 전가한 것입니다. 이걸 따라 배우라고 하면 북한의 수천 개 농장에서 수천 개의 농법이 나올 것 같고, 별 이상한 농기계들이 다 만들어질 것 같고, 수천 가지 드론이 나올 듯합니다.아마 주민들은 드라마를 관람하면서 “저걸 자력갱생이란 이름으로 우리보고 다 만들라고?”라며 혀를 찰 것입니다. 드라마 내용대로라면 당 일꾼만 있으면 되지 김정은은 왜 있어야 하고, 노동당 농업 부서들은 왜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마지막으로 당 간부가 너무 수다스러워 졌습니다. 기존 영화나 드라마의 당 일꾼은 무게를 딱 잡고, 한 마디 한 마디 묵직한 발언을 합니다. 하지만 이번 드라마에선 시시콜콜 지시하는 모습이 많이 나옵니다. 올해 초 김정은이 직접 지도해 만들었다는 ‘72시간’이란 영화에 등장하는 김일성도 너무 수다스럽게 모든 일에 참견하던데, 이건 김정은의 성향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단, 여기까지의 드라마 감상평은 오늘 제가 전달하려는 핵심이 아닙니다.● 지독한 여성 혐오핵심은 제가 이 드라마에서 지독한 여성 혐오를 느꼈다는 것입니다.북한 주민들은 당연한 듯이 생각하고 별로 거부감이 없이 보겠지만, 만약 이 드라마를 한국 여성들이 보면 당장 북한을 해방하고 싶은 충동이 불끈 솟구칠 겁니다.밖에 나가선 나무랄 데 없고, 농장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주인공 당 비서도 집에 들어오면 폭군이 따로 없습니다.군당 간부에서 농장 간부로 부임하게 되자, 군 병원 의사인 아내와, 좋은 학교에 다니던 아내를 강제로 농장에 데려와 좁은 단칸방에 처넣고 농장 병원 의사, 농촌학교 학생으로 만듭니다. 아내나 아들의 불만 따윈 가볍게 눌러버립니다. 나중에 아들이 평양의대에 갈 수 있었었지만, 농촌학교 교사가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며 해주사범대학에 강제로 보냅니다.아내의 불만이나 조언엔 “참견질 말고 밥이나 하라”는 핀잔을 주기 일쑤입니다. 집에서 제일 비싼 재산인 오토바이도 한마디 상의도 없이 농민들을 위한 염소 수십 마리와 바꿔옵니다. 한국에서 이렇게 살면 당장 집에서 쫓겨날 것입니다.당 비서의 상사인 군당 책임비서는 평양에서 김형직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여러 개의 외국어까지 하는 재원인 예쁜 외동딸을 강제로 농촌학교 교사로 보냅니다. 딸은 책임비서의 부속물쯤 되는 것 같습니다.드라마에 등장하는 부정적인 인물들도 알고 보면 다 여자 때문에 망하는 것으로 설정됩니다. 주인공의 형인 군당 농업부장도 아내가 국가 식량을 빼돌려 잘 살자고 부채질하는 바람에 변질돼 나중에 아내와 함께 법적 처벌을 받습니다. 농장 기사장도 자본주의에 물들어 몰래 장사를 하는 아내 때문에 기가 죽어 일을 잘 못합니다. 농장에서 제일 불평이 많은 인물도 여성입니다.드라마는 수없이 무언의 메시지를 던집니다.“남자가 당에 충성을 다하고, 큰일을 하려면 여자를 잘 만나야 한다. 여자 말을 따르면 패가망신한다”라고 말입니다. 아예 드라마에 “여자들이야 남자를 잘 만나야 되지 뭐”라는 노골적인 대사도 여러 번 나옵니다.기자는 가부장적인 북한에서 태어나 20대 중반까지 살았고, 다시 한국에서 23년 동안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서울 물이 진하게 들었지만, 몸의 어느 구석엔 가부장적인 사회의 흔적도 남아있습니다. 그런 저도 드라마를 보고 기가 막혔습니다.“20년이 지났어도 저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어쩌면 더 심해진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이 드라마는 북한이 정말 큰마음을 먹고 어쩌다 만든 드라마인지라 김정은의 수많은 ‘창작지도’를 받았을 겁니다. 그러니 유럽에서 살았던 김정은도 드라마의 진짜 문제가 뭔지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뜻이겠죠. 늘 딸 김주애를 끼고 다녀도, 김정은 역시 집에 가면 북한 ‘상남자’의 태도가 나오겠죠. 아내 이설주가 직접 밥이야 하지 않겠으니 “잔소리 말고 밥이나 하라”는 말은 듣지 않겠지만, 대신 찍소리 못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북한의 가부장적인 문화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이 드라마를 보고 새삼 느끼게 됐습니다.● 지독한 성비 불균형그런데 북한은 왜 그리 가부장적인 사회가 됐을까요.사회주의 체제가 미친 영향은 크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면 이웃 중국만 해도 사회주의 체제이지만, 여성의 목소리가 더 클 때가 대부분이죠.이에 대한 연구도 별로 본 적이 없어, 개인적으로 많은 고민을 해본 결과 제일 큰 문제는 ‘성비’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북한처럼 사회주의 체제였던 러시아나 중국을 사례로 봅시다. 러시아 남성들은 대개 여성에게 잘 대해주지 않는다고 알려졌습니다. 반면 중국은 그 반대입니다.두 나라의 성비 차이는 뚜렷하게 대조적입니다. 러시아의 성비는 남성 86 대 여성 100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성비가 불균형한 이유는 러시아 남성들이 일찍 죽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평균 수명은 남성 68.2세, 여성 78세입니다. 30세 미만에서 성비 불균형은 거의 없지만, 이후 음주나 전쟁으로 남자가 많이 죽다 보니 성비가 급격히 깨지죠.중국은 심각한 남초(男超) 국가입니다. 중국은 오랫동안 한 자녀 정책을 폈고, 남아선호사상이 높아 전체 인구에서 남성이 51.24%, 여성이 48.76%를 차지합니다. 큰 차이 같지는 않지만, 중국의 전체 인구가 14억1000만 명임을 감안하면 남성이 3500만 명 정도 많습니다.특히 1980년부터 2021년까지 출생 인구 7억9900만 명의 연간 평균 출생 성비는 114.4였는데, 2002년부터 2008년 사이엔 남아 118명당 여아 100명이 태어났습니다. 중국에서 장가를 가려면 여성에게 잘해야 할 수밖에 없고 여성의 목소리도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그럼 북한은 어떨까요. 북한은 러시아보다 더 성비가 불균형합니다.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수많은 남성이 죽은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북한도 6·25전쟁 3년 동안 많은 남성이 죽었습니다. 전후 남성이 귀해지니 몸값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죠.그런데 이젠 전쟁이 끝난 지 73년이나 지났으니 성비 불균형이 정상으로 돌아오기엔 충분한 시간이죠. 이미 한국은 2023년 기준 성비가 100.0으로, 남성과 여성 인구가 거의 동일합니다.하지만, 북한은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남성이 일찍 죽습니다. 평균 수명이 길지 않습니다. 유엔에선 북한 남성의 평균 수명을 71세, 여성은 76세로 보지만, 직접 들어가 조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믿기 어려운 통계입니다. 북한 남성은 일찍 죽습니다. 17세에 군에 가서 10년씩 복무하다 보면, 굶어 죽고, 사고로 죽고 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생계 현장이나 근로 현장에서도 안전 장비가 제대로 없어 사고로 많이 죽는데, 위험한 일들은 대개 남성이 하다가 죽습니다. 이렇게 죽는 청년들은 평균 수명 통계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일찍 죽는 북한 남성들여기에 검증할 수 있는 확실한 통계 하나가 있습니다. 2005년에 작성된 ‘평양 주민자료’가 2011년 국내 한 언론에 입수된 적이 있습니다. 북한 보위부가 평양에 거주하는 17세 이상 성인 남녀 210만8032명의 자세한 신상정보를 담아 작성한 파일이 통째로 한국에 넘어온 것이죠. 기자가 평양에 살고 있는 여러 지인의 이름을 넣고 검색한 결과 확실한 내부 문건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이 파일을 돈을 받고 판 내부자는 나중에 색출돼 처형됐다고 합니다.이 자료를 분석한 결과 평양은 ‘여초(女超)’ 도시였습니다. 평양의 성인 인구 210만여 명 중 여성은 122만여 명인 데 반해 남성은 87만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성비를 따지면 여성 100명에 남자는 71명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문건에 김 씨 일가를 포함한 약 1만 명의 고위층 정보, 평양에 근무하는 군인 신상은 담기지 않았음을 감안해도 성비가 심각하게 불균형을 이룹니다.해외에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고, 북한 내부에서도 평양과 지방은 엄격하게 격리돼 있으니 이런 불균형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도 없습니다.그러니 남쪽에서 대통령이 평양에 갔을 때 왜 길거리에 조선옷을 입은 여성들만 몰려나와 열심히 꽃을 흔들고 있는지 이해가 될 겁니다.평양은 북한 사회의 표본입니다. 남성들이 죽을 위험에 훨씬 더 노출된 지방은 평양보다 성비가 더 불균형하겠죠.즉, 결론을 말한다면 북한 남성은 일찍 죽습니다. 대신 죽기 전엔 여성들에게 큰소리를 실컷 치다가 죽습니다. 북한의 가부장적인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겁니다. 환경이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엔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참전해 젊은 남성들이 죽고 있는데, 노동당에선 젊은 남성에게 “당을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치라”고 교육을 합니다.이런 배경을 고려하면, 백학벌의 새봄에서 묘사되는 여성 혐오가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통일되면 빠르게 바뀔 문화그렇다면 북한의 가부장적인 문화는 언제 바뀔까요.저는 북한에서 김정은 체제가 붕괴되면 이런 문화는 순식간에 바뀔 것이라고 예상합니다.탈북한 사람을 잡아서 처벌하는 권위주의 체제가 없어지면, 가난한 땅에 남아있고 싶은 북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중국에서 잡아 북송해도, 고향에 가서 어차피 처벌되지 않으니 성공할 때까지 탈출을 시도하고 또 시도하겠죠. 중국에서 살기 어려우면 중국을 거쳐 잘 사는 외국에 필사적으로 나가려 하겠죠. 기마 민족의 피가 흐르고, 척박한 땅에서 억척스럽게 생존한 북한 사람들은 탈출에 필요한 내공이 상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당연히 한국에도 많이 올 겁니다.그런데 해외에선 여성의 경쟁력이 훨씬 더 높습니다. 바로 이웃 중국에만 해도 짝을 찾을 수 없는 남성이 3500만 명이나 있으니까요.2024년 말 기준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 3만4314명 중 여성은 2만4746명이고 남성은 9568명입니다. 여성 100명당 남성 38.7명으로, 입국자의 72.19%가 여성입니다.북한 여성들이 해외에 나가 자리 잡는 비율이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북한엔 남성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어쩌면 몇 년 만에 장가를 갈 수 없다고 아우성칠지 모릅니다. 그러면 북한 남성들은 러시아처럼 살다가 순식간에 중국처럼 문화가 바뀌게 되는 겁니다.그러니 북한의 가부장적인 문화에 대해 남쪽에서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통일이 되면 여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아이를 봐주고, 그것도 모자라 아내의 기분이 좋아지라고 발까지 씻어주는 북한 남성들을 만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올해 5월 20일 미국 뉴욕 유엔 고위급 회의장. 김성 주유엔 북한 대사가 격앙된 소리로 말했다.“북한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주권을 침탈하기 위해 소집된 이 회의를 강력히 규탄한다. 더 유감인 건 부모와 가족조차 내버린 쓰레기(scum) 같은 인간들을 증인으로 초청한 것이다.”김 대사의 발언은 앞서 탈북민 김은주 씨가 제79차 유엔 총회 주최 북한 인권 고위급 전체회의에서 북한 정권의 인권 침해를 증언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자기 할 말만 마치고 황급히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과 시종일관 굳은 얼굴로 서 있는 북한 참사의 모습을 보면서 은주 씨는 생각했다.‘정말 불쌍한 사람들이네. 미국에 와 있으면 북한의 실상을 너무 잘 알텐 데 저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인간들….’다음날 은주 씨는 모 언론사 기자와 함께 뉴욕에 있는 북한 유엔 대표부를 찾아갔다. 북한 대표부는 보안도 제대로 되지 않는 싸구려 아파트 13층에 있었다. 허술한 문짝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유엔 대표부’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은주 씨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문을 두드렸다. 한 남자가 문을 열었다.“안녕하세요. 저는 탈북자입니다.”말이 끊기기도 전에 남자는 문을 쾅 닫았다.은주 씨는 닫힌 문을 향해 준비해 간 편지를 읽었다.“저는 여러분들도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실을 알면서 앞으로도 북한 정부를 계속 대표한다면, 여러분은 가해자가 될 것입니다.”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다 읽은 편지를 문 앞에 두고 내려왔다.그때를 회상하며 은주 씨는 말했다.“유엔 총회에선 시간과 상황의 제약 때문에 북한 대표부와 직접 이야기하지 못해 아쉬웠어요. 기회가 된다면 북한을 대표한다는 저들에게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하고 싶었어요. 나와 내 가족을 버린 것은 북한 당국입니다. 저는 부모와 가족조차 내버린 쓰레기가 아니라, 식량난에 북한 정권에 쓰레기처럼 버려진 아버지를 잃고 나머지 가족과 함께 목숨을 걸고 탈북해 새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요.” ‘고난의 행군’을 만난 어린 운명은주 씨의 고향은 아오지탄광이 있는 함경북도 은덕군이다. 오랫동안 경흥이라 불리다 김일성 은덕을 많이 받았다는 의미로 1977년 은덕군으로 개명했다.1986년 8월 15일 ‘120(일이공)군수공장’ 노동자인 부친과 ‘613(육일삼)탄광’ 병원 직원 모친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언니는 두 살 위였다.북한엔 이름에 숫자가 붙은 공장이나 기업소가 많다. 대개 김 씨 일가가 만들 것을 지시한 날짜 또는 현지 시찰한 날짜의 달과 날을 의미한다.그의 아버지는 군 복무를 마친 뒤 ‘무리 제대’ 대상이 돼 은덕에 오게 됐다. 제대 군인들을 인력이 모자라는 지역에 수백 명씩 보내는 것을 무리 제대라고 한다. 어머니는 평양에서 만경대 인근 칠골중학교까지 졸업했지만, 평양 인구 축소 정책 때 부친(은주 씨의 외조부)이 쫓겨난 함북 청진으로 오게 됐다.은덕을 받았다는 이름과 달리 은덕군은 북한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어서 은주 씨는 어려서부터 배고픔에 시달렸다. 다행히 모친이 병원 식당에서 일했기 때문에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 초기에 굶어 죽는 운명은 피할 수 있었다.하지만 병원도 식량을 받지 못하고 마비되기 시작했다. 1996년 인민학교 3학년이던 은주 씨는 대열을 맞춰 노래 부르며 하교하다가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며 주저앉았다. 겨우 열 살이었지만 그는 삶이 여기서 끊길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꼈다.‘먹지 못해 빈혈을 느끼고 있다. 집은 가난하고 식량 사정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나는 먼저 죽은 친구들을 따라갈 수도 있다.’그때부터 1999년 2월 18일 첫 번째 탈북을 할 때까지 3년간 기억은 전부 깜깜했다. 그는 생지옥을 목격했다.산에 묘비 없는 무덤들이 즐비했다. 각목으로 세운 묘비는 며칠 뒤 사라졌다. 땔감으로 뽑아 간 것이다. 노인과 남자, 아이, 여성 순으로 죽어 갔다. 청진에 살던 외할아버지도 1997년에 굶어서 숨졌다. 공개 총살도 늘어났다. 처음으로 목격한 공개 처형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선생님 인솔 하에 7~11세밖에 안 되는 학생들이 단체로 처형장에 갔다. 총살된 사람은 옥수수 30kg를 훔치다가 사람을 죽인 남성이었다.해가 갈수록 사정은 나빠졌다. 장마당에서 구걸하다 쓰러진 앙상한 시체들이 늘어났다. 파라티푸스, 장티푸스 같은 수인성 전염병이 창궐했다. 뼈밖에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 남은 몸속 수액을 내쏟으며 죽어 갔다. 그가 살던 아파트에서도 하루가 멀게 산 사람이 시신으로 변했다. 집을 팔아도 두부 한 모와 바꿀 수 없었다. 살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소나무 껍질만 먹다 풀독이 올라 죽은 이웃도, 독버섯인 줄 알면서도 먹고 죽은 이웃도 있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을 바엔 차라리 먹고 죽자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사람 힘이 빠지니 아파트도 힘이 빠진 걸까. ‘속도전’ 날림식으로 지은 아파트 벽에 커다란 금이 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 됐지만 이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열한 살의 유서1997년 11월 아버지가 굶어 죽었다. 영양실조에 걸린 뒤 늑막염 진단을 받은 뒤부터 아버지가 이상해졌다. 너무나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남들처럼 농장 밭에서 뭐든 훔쳐 오라고 해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늑막염 진단을 받게 됐다. 아무리 먹어도 성에 차지 않아 했고, 딸들 몫으로 남긴 죽까지 먹었다.집에서 판자까지 뜯어 내 먹을 것과 바꾸기 시작했다. 딸 책가방을 들고 나가 먹을 것과 바꾼 며칠 후 아버지 눈빛이 바뀌었다. 죽음을 직감한 어머니가 겨우 죽을 만들어 떠먹였지만, 그 좋아하던 죽을 두세 숟가락밖에 삼키지 못했다. 다음날 누운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직장 동료들이 찾아와 판자로 관을 만들어 아버지를 묻었다. 그나마 공장에서 만들어 준 관에 묻힌 마지막 사람이었다. 며칠 뒤부턴 판자가 없어 그냥 가마니에 시신을 싸서 묻었다.아버지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다. 은주씨네 온 가족은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다. 은주 씨와 언니는 1997년 한 해 학교에 다니지 않고 온종일 먹을거리를 찾아 헤맸다. 토끼 배설물에 붙은 나물 쪼가리까지 골라 먹었다.어머니가 언니를 데리고 나선시로 수백 리 길을 떠났다. 중국인들이 장사하려 드나든다는 나선에 먹을 것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떠나기 전 어머니는 그에게 북한 돈 15원을 주면서 “빠르면 하루, 늦으면 사흘 안에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 돈으론 두부 한 모를 살 수 있었다.그 이튿날 은주 씨는 장마당에서 두부 한 모를 사 먹었다. 그 뒤론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올까 11세 은주는 매일 동네 어귀로 나갔다. 나흘이 지나도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떠난 뒤 엿새째 저녁 은주 씨는 집의 싸늘한 시멘트 바닥이 자신을 빨아들인다는 느낌을 받았다.‘내일은 마중 나갈 수가 없구나. 내일 내가 죽는 날이구나.’ 어머니도 없이 혼자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몹시 서러웠다. 겨우 종이 쪼가리를 찾아 한 자 한 자 적었다. ‘엄마, 곧 죽을 것 같아요. 기다리지 못해 미안해. 용서해.’ 종이를 머리맡에 놓고 죽음을 기다렸다. 의식이 점점 흐릿해졌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인기척이 들렸다. 어머니와 언니가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딸의 유서를 본 어머니는 주저앉았다. “그래. 우리 죽어도 다 같이 죽자.” 셋은 누더기 같은 이불을 함께 덮고 나란히 누웠다. ‘가족 꽃제비’아침이 되자 창가에 스며든 햇볕이 느껴졌다. 아직 죽지 않았다. 갑자기 어머니가 무엇을 발견한 양 벌떡 일어났다. 벽에서는 ‘위대한 수령’과 ‘친애하는 지도자’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초상화 액자 유리는 팔아먹었지만 초상화만은 남아 있었다. 어머니는 수령과 지도자 사진을 사정없이 뽑아 불태워 버렸다. 금박 액자틀을 들고 밖으로 나가서는 약간의 먹을 것과 바꿔서 돌아왔다. 당장의 죽음은 면했지만, 그들은 집에서 살 수 없었다. 집에 그 초상화가 없다는 것은 죽음으로 씻어야 하는 정치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의미한다.은주 씨는 학교에 다닐 때 참관했던 어느 젊은 부부의 공개 총살형 장면을 떠올렸다. 6세, 8세 자녀를 둔 부부는 굶어 죽게 되자 마을에 있는 김 씨 일가 ‘말씀비’ 동판 글씨를 뜯어 내 팔려다 잡혔다. 처형이 끝난 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남은 애들은 곧 굶어 죽겠네. 정말 불쌍해.” 은주 씨는 이 수군거림을 들으며 ‘꼭 나쁜 사람만 처형되는 것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자신이 그런 운명에 처할 줄은 몰랐다.어머니는 두 딸의 손을 잡고 집을 빠져나와 나선을 향해 떠났다. 그곳엔 바다가 있어 미역이라도 주워 먹자는 타산이었다. 살을 에는 북방의 찬바람을 견뎌내며 나선에 도착했다.세 모녀의 처절한 생존 투쟁이 시작됐다. 아파트 계단, 다리 밑, 장마당, 역 앞이 이들의 잠자리였다. 겨울엔 산에 올라 땔감을 주워 장마당에 팔았고, 봄에는 산에 올라 풀뿌리를 캤다. 여름엔 농장 밭에서 감자나 고추를 훔치다가 몰매를 맞기도 했다.나뭇짐을 지고 장마당에 나가던 어느 날, 마을 아이들이 은주 씨를 둘러싸고 “야, 여자 꽃제비가 왔다”고 놀리기 시작했다. 화가 났지만 곧 인정하고 말았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아, 나는 꽃제비구나.’은주 씨처럼 가족이 몰려다니는 꽃제비는 ‘가족제비’라고도 불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은주 씨는 늘 눈시울이 붉어진다.“1년 넘게 짐승보다 못한 그 모진 삶을 살면서도 어머니는 저와 언니를 버리지 않았어요. 엄마가 없었다면 12세, 14세인 우리 자매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얼어붙은 물을 헤치며 탈북하다1998년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시작됐다. 꽃제비에겐 가장 혹독한 계절이다. 어머니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은덕은 두만강 하구에 있어 강폭이 넓었다. 멀리 중국 땅이 바라보이긴 했지만 건널 생각은 못했다. 강을 넘다 잡히면 총살된다고 세뇌를 당해 공포가 심했다.그럼에도 꽃제비 생활 초기인 그해 3월 은주 씨 가족은 도강을 시도했다. 하지만 강 가운데가 녹아 얼음이 떠다녀서 실패했다. 어머니는 다음 겨울 얼음이 얼었을 때 다시 건너자고 했다. 강폭이 좁은 상류로 갈 수도 있었지만 여행증 없이 지역간 이동이 쉽지 않았고, 익숙한 곳을 통해 탈북하려는 생각이 강했다.1999년 2월 18일. 세 모녀는 두만강을 넘었다. 그 전날 산에 올라 경비대가 어디에 잠복 근무를 서는지 살펴봤다. 오전 5시 어머니가 일어섰다. 얼어붙은 강에 올라서자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피부 속 깊이 파고들었다. 돌아설 수는 없었다. 한참을 달리다 갑자기 얼음이 꺼지며 물에 빠졌다. 죽는가 싶었는데 발이 땅에 닿았다. 중국 쪽 실개천이었다. 물 밖으로 나오니 순식간에 옷이 꽁꽁 얼어붙었다. 달리려 해도 얼어붙은 옷 때문에 무릎을 굽힐 수 없었다. 일자 다리를 겨우 움직여 산에 올라 불을 피워 옷을 말렸다. 하룻밤을 산에서 묵었다.아침이 되자 산 아랫마을에 내려가 집 문을 두드렸다. 첫 번째 집 40대 부부는 세 사람 행색을 보곤 밥을 줄 테니 먹고 가라고 했다. 마침 음력설이 지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이밥과 계란, 태어나 처음 보는 건두부볶음을 먹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을 줄 상상도 못했다.“그때만 해도 강폭이 넓은 훈춘 쪽으로 탈북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중국 쪽 인심이 괜찮았어요. 굶어 죽어 가는 북한 사람들을 동정했고요. 그런데 2년쯤 지나선 훈춘 사람들도 더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강을 넘어온 북한 사람들이 도둑질에 강도질도 한다는 소문이 퍼져 탈북민을 경계했거든요.”중국에서 만난 천사와 악마몇 년 만에 처음으로 배불리 먹은 이들은 다시 산에 올라와 숨었다. 어둠이 내린 뒤 산에서 내려와 큰길을 따라 걸었다. 길을 따라가면 도시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다. 한참을 가는데 뒤에서 자동차 불빛이 나타났다.‘숨을까. 아니, 벌써 봤겠는데 소용없지 않을까.’잠시 망설이던 찰나 자동차가 그들 옆에 잠깐 멈춰 서더니 순식간에 언니를 낚아채 싣고 사라졌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소리 지를 새도 없었다.이들에겐 방랑하면서 얻은 ‘예상치 못하게 헤어지면 반드시 헤어진 자리에서 머문다’는 원칙이 몸에 배어 있었다. 둘은 길 밖에 주저앉았다. 언니가 다시 온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이튿날 이른 새벽 쪽잠을 자던 은주 씨는 언니를 데리고 나타난 어머니를 발견했다. 저승사자를 보고 온 듯한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주 씨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했지만 입 밖 꺼낼 순 없었다. 세 모녀는 그날의 기억을 마음에 묻었다. 20년이 지난 뒤 은주 씨는 어머니와 당시를 회상했다. 어머니는 딸이 다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때 언니는 달리는 차에서 몹쓸 짓을 당하고 길에 버려졌어요. 굶주림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꽃제비 생활을 하며 체격도 뼈밖에 남지 않았고 생리도 시작하지 않았을 때였어요. 짐승들에게 걸린 거죠. 사탕과자를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중국에 온 첫날 천국과 지옥을 다 경험했습니다.”다시 뭉친 세 모녀는 길을 따라가다 새로운 마을을 만났다. 유독 가까이 다가와 친절하게 말을 거는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은 세 모녀를 자신의 집에 데려가 소풍 갈 때도 반쪽씩 나눠 먹을 수밖에 없던 귀한 달걀을 그릇 가득히 삶아 주었다. 갈아입을 옷도 줬다. 고마워하는 어머니에게 이 여인이 설득했다.“이렇게 돌아다녀 봐야 잡혀서 북송될 수밖에 없다. 중국인과 결혼해야 보호도 받고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내가 좋은 자리를 찾아 줄 테니 밖에 나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라.”말을 들으니 옳은 소리였다. 어머니는 두 딸을 한참 쳐다보며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지나자 어머니보다 7세 많은 한족 남성이 찾아왔다. 세 모녀는 그를 따라나섰다. 자신들이 200위안에 팔렸다는 것은 1년 뒤에 알았다.북한에서 당한 쓰레기 취급이들이 도착한 곳은 두만강에서 조금 떨어진 중국 투먼시에 속하는 시골 한족 마을이었다. 마을 전체가 친인척들로 엮여 있었다. 조선족은 한 명도 살지 않는 곳에서 은주 씨 모녀는 손짓발짓 소통하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은주 씨 의붓아버지가 된 한족 남자는 농사일을 했다.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문맹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한 번 장가는 갔는데 너무 가난해 여자가 달아났다고 했다. 이 마을과 인근 마을에도 북한 여성들이 여럿 팔려 와 살고 있었다. 남자는 대를 잇는 데 집착했다. 1년쯤 지나 42세이던 어머니가 임신해 2001년 아들을 낳았다. 은주 씨에게 남동생이 생긴 것이다.궁핍한 곳에 팔려 와 사는 처지긴 했어도 잘 집이 생겼고 배를 곯지 않아도 됐고 남동생까지 생겼으니 북한에서 꽃제비 생활을 할 때보다 훨씬 나은 삶일 수 있었다. 가끔은 북한에서 온 거지라는 말을 듣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부모와 언니가 밭에 나가면 남동생 돌보는 일은 오로지 은주 씨 몫이 됐다.하지만 탈북자 신세는 벗을 수가 없었다. 국경이 가까워서인지 수시로 중국 공안 차가 마을로 들어와 수색했다. 세 모녀는 멀리서 차 불빛이 보이거나, 개만 짖어도 산으로 도망쳐야 했다. 불안에 떨며 살다 2002년 3월 31일 끝내 공안에 체포됐다. 신고를 받은 모양인지 공안 차는 라이트를 켜지 않고 곧바로 은주 씨 집에 쳐들어 왔다. 개도 짖지 않았다. 투먼 변방수용소에 압송됐고 4월 5일 북한으로 끌려갔다.북한 보위부에 들어가자마자 남녀노소 불문하고 옷을 벗고 알몸 검사를 당했다. 부끄러워하면 “쓰레기보다 못한 년들”이라며 발길질이 날아 왔다. 중국에서 3년 동안 ‘북한에서 온 거지’란 말을 들었는데 북한에선 인간쓰레기 취급을 당했다. 15~18㎡(5~6평) 남짓한 감방에 40명이 갇혀, 앉은 채로 자야 했다.보름 남짓 조사를 받은 세 모녀는 함북 청진 집결소로 이송됐다. 젖먹이를 중국에 남겨 두고 온 은주 씨 어머니는 극심한 젖앓이를 하다 쓰러졌다. 어머니는 외딴 방에 넣어졌다. 약도 주지 않고 시간만 보내는 것이 어머니가 죽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청진에 살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이미 굶어 세상을 떠난 뒤라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하지만 야만의 땅에도 인간은 있었다. 함께 수감된 여인이 몰래 숨겨 둔 북한돈 150원을 손에 쥐여 주었다. 그 돈으로 수액 한 병을 겨우 구해 놔 주었더니 사경을 헤매던 어머니가 기적적으로 의식을 찾았다.기적적인 재탈북세 모녀는 두 달 만에 풀려났다. 보위부에서 이들 신분을 조사했지만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외지를 떠돌다 굶어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아 지난 3년간 행방이 불분명하면 사망 처리를 하고 주민등록문건에서 지워버렸던 것이다. 만약 더 집결소에 있었으면 견디질 못했을 것이다. 당시엔 탈북했다 북송되면 거주지 보안서에 연락해 호송원을 불러 왔다. 하지만 호송원에게 여비도 주지 않아 누구도 며칠씩 걸리는 호송 임무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호송원이 없어 고향에 가지 못하고 집결소에서 몇 달씩 머무르다 죽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은주 씨 모녀에겐 너무나 다행스럽게 두 달 만에 은덕에서 호송원이 나타났다. 그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데리러 온 것이었지만 집결소에선 은주 씨 가족도 데려가라고 맡겨 버렸다.호송원은 원래 호송 업무를 맡는 보안원도 아니었다. 보안원들이 하기 싫으니 규찰대 등으로 써먹던 노동자를 보낸 것이다. 예상치 못하게 세 명을 더 떠맡게 된 호송원도 난처해졌다. 은덕에 가는 며칠 동안 이들을 먹여 살릴 돈이 없던 것이다.상황을 파악한 어머니가 길을 떠나면서부터 사정했다. “식량도 없지 않소. 은덕까지 꼭 갈 테니 우리를 놔 주시오.”이 노동자도 애초에 받은 임무가 아니었고 거지 같은 세 여성을 데리고 가기도 싫었던 터라 그들을 놔 주었다. 그렇게 풀려난 세 모녀는 회령에 도착했다. 장마당에서 두 달 동안 한 번도 갈아입지 못해 이가 득실득실한 속옷도 나름 중국제여서 음식으로 바꿀 수 있었다.이들은 다시 두만강으로 갔다. 하지만 먹지 못해 판단력이 흐려진 어머니가 진짜 두만강을 다른 강이라 착각하고 강둑을 걸어가다 경비대에 체포되고 말았다. 막사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이튿날 아침 보위부로 끌려가게 된 어머니가 주저앉아 군인 다리를 부둥켜안고 사정했다. 이때 병실에서 나오던 한 군관이 다가왔다. 그는 자기 방으로 세 모녀를 데리고 가더니 “두만강을 절대 넘어가면 안 된다”고 당부하며 풀어 주었다. 말과는 달리 군관의 눈빛은 ‘잡히지 말고 성공하세요’라고 말하는 듯했다.하지만 두 번째 시도에서도 또 잡혔다. 어쩌다 헤어진 서로를 당황해서 찾다가 경비대원 눈에 띈 것이다. 끌려가니 그 군관이 또 있었다. 그는 사탕과자를 집어 주며 똑같은 말을 반복한 뒤 풀어 주었다.세 번째 시도는 성공했다. 6월 3일 이들은 두만강을 넘어 걸어서 연길까지 갔다. 연길에서 어머니가 두 딸에게 물었다.“그 집에 다시 갈 거니?”업어 키운 남동생과 정이 든 은주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어머니가 결론을 내렸다. “그래. 일단 자식이 있으니 다시 가 보자.”신고당해 북송됐던 그 집에 다시 가서 산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불안이 엄습했다. 얼마 뒤 언니는 인근 도시에서 보모 자리를 얻어 집을 나갔다. 은주 씨도 왕청의 한 케이크 가게에 자리를 잡아 마을을 떴다. 나중에 어머니도 연길의 한 치매 노인을 돌보는 자리를 얻어 마을을 떠났다. 셋이 처음으로 갈라졌다.그해 추석에 일이 터졌다. 언니가 명절이라고 어머니를 찾아 마을에 다시 간 것이다. 돈을 주고 사 온 아내가 도망쳤다고 펄펄 뛰던 한족 남자는 “네 엄마가 도망갔으니 네가 내 아내가 돼야 한다”며 언니를 방에 가뒀다. 다행히 언니는 그날 밤 가까스로 도망칠 수 있었다.선발대로 한국에 오다당시 연길에서는 탈북자를 색출해 검거하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제 중국말도 잘할 수 있게 된 세 모녀는 내륙 깊이 들어가기로 했다. 2003년 대련으로 왔다. 어머니는 또 노인 요양사 일자리를 얻었고 언니는 식당에 취직했다. 은주 씨는 전단 돌리는 일을 잡았다.은주 씨는 대련에서 대형 마트를 처음 가 봤다. 여름에 마트에 들어가면 시원해서 좋았다. 돈이 없어 물 한 병 사고 나오면서 인생의 목표를 세웠다. ‘언젠가는 저들처럼 카트에 물건을 가득 사서 나올 거야.’셋은 1년 넘게 열심히 일해 돈을 모았다. 어머니는 겨울 어느 날 2000위안을 들고 투먼으로 갔다. 아무리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아들이 있으니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도착하자마자 남자는 “지금까지 번 돈을 내놓으라”며 마구 때렸다. 돈 숨긴 데를 불 때까지 안 풀어 주겠다며 한겨울에 신발도 안 신긴 채 쇠사슬로 꽁꽁 묶어 버렸다. 보다 못한 이웃들이 풀어주라고 호통을 쳐서 어머니는 풀려날 수 있었다.2004년 이들은 상해로 거처를 옮겼다. 언니가 먼저 가서 어느 한국인 아이를 봐 주는 자리를 잡은 뒤 가족을 불렀다. 상해는 대련보다 훨씬 번화한 도시였다. 월급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은주 씨는 한 탈북 여성을 알게 됐다. 어느 날 그 여성이 지인 중에 탈북자를 한국으로 보내주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은주 씨는 그동안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보면서 한국에 무척 가고 싶었지만 연줄이 없어 뜻을 이룰 수 없었는데 뜻밖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은주 씨는 어머니, 언니와 상의했다. “우리 셋이 가다 잡히면 끝장이다. 한 명이 잡히더라도 다른 가족이 살아 있어야 돈을 보내서라도 구출할 수 있으니 일단 한 사람은 남아 있자.”은주 씨와 어머니가 먼저 한국으로 떠나게 됐다. 2006년 5월 다른 일행 3명과 함께 브로커를 따라나섰다. 몽골 고비사막을 횡단하는 길이었다. 큰 사고 없이 몇 시간 만에 몽골 국경수비대에 체포돼 수용소로 갔다.수용소에는 사막을 넘다 일행을 잃은 사람도,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절단한 사람도 있었다. 운이 나쁘게 은주 씨가 간 시점에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몽골 방문이 예정돼 있어 탈북민 한국 인도가 계속 늦춰졌다. 중국에서 얻은 지병 때문에 수용소에서 죽은 탈북민도 있었다.다른 탈북민 70여 명과 함께 4개월을 몽골 수용소에서 지냈다. 수용소에서 만 20세 생일을 맞은 그는 보름 뒤인 9월 1일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조사를 마치고 사회에 나오니 그해 12월 28일이었다. 서울 강서구 한 임대주택에 짐을 풀었다. 2008년엔 언니도 무사히 도착했다. “왜 꿈이 없을까요?”은주 씨의 한국 생활은 배움으로 시작됐다. 2007년 고등학교 2학년으로 진학했다. 네댓 살 어린 학생들과 공부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자신에게 쏠리는 전교생의 관심도 부담스러웠다.“제가 다닌 고등학교에 들어온 두 번째 탈북 학생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나타나면 동물원 관람하듯 모두가 쳐다봤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탈북민에게 관심이 많은 줄 알았는데, 대학에 가니 관심 두는 사람도 없고 질문하는 사람도 없어 놀랐어요.”쏠리는 시선에 반비례해 학업을 따라가기 힘들어 눈물도 많이 흘렸다.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 기간 중학교에 다니지 못했으니 배우는 것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북한은 누구나 고등 교육을 받는 나라라고 밖에다 자랑하지만, 고난의 행군 때엔 배고픈 아이들이 학교에 가질 않으니 문맹자가 많이 생겼습니다.”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오기로 공부에 매달렸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영어였다. 교재를 무작정 외웠다. 피나는 노력으로 꼴찌로 시작했지만 마지막 기말고사에선 100점 만점에 90점을 받았다.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는 시간이 왔다. “정말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습니다. 아동심리학자, 변호사, 수의사, 디자이너 같은 온갖 미래가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여기 아이들이 꿈이 없다는 것이 저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진로를 고민할 때 담임선생님이 “남보다 중국어를 잘하니 그걸 살리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조언을 따라 그는 2009년 서강대 중국문화학과에 진학해 심리학을 복수 전공했다. 대학 시절 꿈은 아동심리학자였다. 북한과 중국에서 겪은 탈북 과정에서 상처를 입고 위축돼 방황하는 아이들을 많이 봤다. 자신도 어린 시절 받은 상처가 너무 컸다. 아동의 마음을 치료하고 희망을 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그 꿈은 아직 이루지 못했다. 대학 시절 자원봉사자로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활동하면서 북한 현실을 세계에 알려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북한 현실은 곧 그가 걸어온 길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책으로 적었다. 첫 저서 제목은 ‘열한 살의 유서’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자신도 죽음의 문턱에 갔을 때 썼던 유서는 지금도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다.이 책은 세바스티앙 팔레티 프랑스 일간 피가로 서울 특파원과 공동으로 쓰고 2012년 프랑스 출판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한국어 영어를 비롯한 8개 국어로 출간됐다.책 출판을 계기로 북한 인권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다.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학 시절 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1년을 보내고 졸업은 2014년 2월에 했다. 졸업 성적도 만족할 만큼 잘 받았다. 죽음을 넘어온 ‘작은 거인’대학을 졸업하니 28세가 됐다. 결혼 적령기가 된 것이다. 대학생 때부터 알고 지낸 탈북민 출신 남성과 2015년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은 현재 통일부 6급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아이들도 태어났다. 11세, 6세 자매의 어머니다.육아로 힘든 시기에도 대북 방송국 작가로 활동하며 270편의 원고를 썼다. 지난해엔 북한이탈주민 글로벌교육센터(FSI) 간사도 맡았다. FSI는 북한 생활이나 남한 정착 과정 같은 이야기를 영어로 나누고 싶어 하는 탈북민에게 원어민을 짝지워 주고 영어 말하기 훈련을 무료로 제공한다. 탈북민이 국제 사회와 직접 소통해 북한 인권 실태를 알리게 하는 게 목표다.은주 씨는 지난해 3월 유엔 북한인권조사위(COI) 보고서 발간 10주년을 맞아 주제네바 한국 대표부가 주최한 인권 행사에 증언자로 참가하게 됐다. 북한에서 11세에 유서를 써야 했던 소녀가 각국 대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창한 영어로 북한 인권 실태를 고발했다.“너무 과거 이야기만 하는 것 아닌지 고민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한국에 온 탈북민들을 보면 북한 인권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악화하고 있더라고요. 먼저 온 우리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북한에서 또 다른 11세 소녀들이 유서를 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용기를 냈습니다.”은주 씨는 올해 3월 통일부 북한인권증진위원에 지난해에 이어 연임됐다. 피할 수 없어 시작한 일이지만, 지금까지는 운명이 계속 그 길로 이끌고 있다.“15년 가까이 북한 인권 활동을 했습니다. 수많은 강연을 다니며 제 이야기를 했는데, 하고 나면 어두운 기억이 떠올라 정신적으로 괴로웠습니다. 북한 인권은 하루 빨리 해결돼야 할 문제이지 제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일 순 없지 않습니까. 저는 귀농해서 자급자족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농촌에서 북한 인권 활동을 하며 몸과 마음이 지쳤을 실무자들을 위한 쉼터를 가꾸고 싶습니다. 아직까지는 공무원 남편 때문에도 그렇고, 경제적 여유도 없어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있네요.”고향의 어두운 기억은 그를 힘들게 한다. 통일이 돼도 고향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에게 고향은 아버지 무덤만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뒷산에 마구 묻힌 수많은 무덤 속에서 묘비도 없이 묻힌 아버지 무덤을 찾을 자신도 없다. 그런 괴로움을 딛고 올해 5월 다시 유엔에 가서 북한 외교관들 앞에 섰다.“배신자, 쓰레기 소리는 각오했지만 막상 듣고 나니 화가 나더군요. 어떻게든 고향에서 살아남으려 애쓴 저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탈북할 수밖에 없게 만든 자들이 그런 말을 하니까요. 이 인터뷰 기사를 그 북한 외교관들이 봤으면 좋겠어요. 유엔에서 길게 얘기할 순 없었지만, 저들도 북한 주민과 수많은 탈북민이 어떤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는지 꼭 알았으면 해요. 그들은 저를 부모와 가족조차 내버린 쓰레기라고 말했지만, 저는 북한이 쓰레기로 버린 가족과 어떤 역경에도 헤어지지 않고, 기어코 함께 한국에 온 사람입니다.”그랬다. 왜소한 체구의 김은주는 지옥의 문턱을 넘어온 ‘작은 거인’이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북한 김정은에게 새로운 외빈 접대 코스가 생겼습니다. 일명 ‘요트 접대’입니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별장인 원산 별장에서 편히 쉬다가 아침에 나와 요트에 오릅니다. 건너편 원산 갈마반도 선착장까진 직선거리로 5.5㎞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여기서 손님을 태운 뒤 갈마반도를 돌아 새로 건설된 갈마해안관광지구 앞바다에 요트를 세웁니다. 아직 내부가 완성되지 않은 건물들이 즐비한, 그럼에도 외부는 그럴싸하게 완성된 해안관광지구는 요트의 멋진 병풍이 되어줍니다.저녁에 다시 해안관광지구에 돌아와 고급 호텔에서 연회를 엽니다. 연회를 마치고 다시 요트에 올라 별장으로 돌아가면 일과가 끝납니다. 붐비는 원산 도로에서 가난한 백성들과 마주칠 일은 전혀 없습니다.이달 12일 방북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이 요트 접대의 첫 귀빈이 됐습니다. 그가 탄 요트는 김정은이 보유한 4척의 요트 중 하나입니다. 김정은에겐 길이가 80m 짜리인 요트도 있고, 450만 파운드(약 84억 원)에 이르는 ‘프린세스 95MY’ 요트도 있지만, 라브로프 장관이 탄 요트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회담을 할 수 있는 원탁이 설치된 요트가 이것뿐이 아닐까 싶습니다. 80m 요트는 이중나선형 워터슬라이드와 올림픽 규격 수영장이 있는 떠다니는 수영장이고, 프린세스 95MY 요트는 길이가 길지 않아 회담에 적합하진 않습니다.러시아 대표단 환영 연회는 관광단지에서 제일 좋은 숙소인 ‘명사십리호텔’에서 열렸고, 북한 최선희 외무상과 라브로프 장관의 북-러 회담은 관광단지 내 ‘갈매기호텔’에서 진행됐습니다.수억 달러를 들여 만든 멋진 해안가 병풍, 병풍 뒤에 있는 국제 비행장, 귀빈들에게 창피하지 않을 신규 고급 호텔이 생겼으니, 김정은이 앞으로 원산에 머물 일이 많아질 것 같습니다.이렇게 김정은이 원산에 머무르면, 원산 사람들, 특히 현지 간부들의 한숨도 높아질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자꾸 눈에 보이게 되면 김정은의 잔소리가 늘어날 것인데, 자칫 기분이라도 나쁘게 했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김정은이 원산을 사랑하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1. 김정은의 고향북한은 김정은의 고향이 어디인지 아직까지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산에서 태어났거나, 원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북한 간부들이 고용희를 ‘원산댁’이라고 불렀다는 증언들이 있습니다.김정일은 고용희 이전에 성혜림, 김영숙이라는 여성들과 살았습니다. 이슬람 국가도 아닌데 한 집에서 살 순 없으니 서로 멀리 떨어져 살게 했죠. 김정일이 만수대예술단 무용수였던 고용희를 불러 몰래 밀회를 즐긴 장소는 평양 서성구역에 있는 서평양역 인근 별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고용희가 김정철을 임신하게 된 뒤엔 환경이 더 좋은 원산에 가 있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정은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엔 원산이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을 겁니다. 원산 특각에 가면 나무 한 그루, 돌 하나에도 일찍 사망한 어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지 않을까요.하지만 여름엔 바다에서 신나게 뛰어놀았겠지만, 겨울엔 놀만한 거리가 별로 없었겠죠.“왜 원산엔 겨울에 갈만한 스키장이 없지?”라는 불만은 나중에 마식령스키장으로 해결한 것 같습니다. 집권하자마자 할 일들이 태산인데, 숱한 군인들을 투입해 마식령에 스키장부터 짓게 한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합니다. 북한 사람들이 스키를 타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식령 스키장이 건설되기 이전에 스키를 실물로 봤을 북한 주민은 100명에 한두 명 정도에 불과했을 겁니다. 장비와 환경 구축에 많은 돈과 시간이 투입되는 스키는 ‘혁명국가’ 북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치스러운 운동입니다. 스키를 탈 시간이 있으면 학습해야 하고, 하다못해 동네에서 개똥을 주워 봄에 쓸 퇴비를 마련해야 하죠.② 완벽한 휴양지바닷가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은 늘 바다를 꿈꿉니다. 그런데 평양엔 바다가 없습니다. 김정은의 평양 저택이 아무리 호화롭게 지어졌다고 해도, 시내 가운데 있다 보니 협소합니다. 그곳엔 요트를 정박시킬 수가 없는 것이니까요.반면 602초대소로도 불리는 원산 특각에는 휴양지로 갖추어야 할 모든 것들이 다 있습니다. 바다도 있고, 산도 있고, 섬도 있고, 승마장이나 스키장도 있습니다. 특각 부지가 워낙 넓어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동할 때는 전동 카트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름엔 바다에 띄운 수영장 요트에서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즐길 수 있죠.요트를 타고 가까이 통천 앞바다에 가면 낚시터가 갖춰진 호화 별장이 또 있습니다. 이곳에 ‘사도’, ‘동덕도’, ‘전도’라는 이름이 붙은 아름다운 섬이 세 개가 있습니다. 섬에서 멀리 아름다운 금강산을 바라볼 수 있죠.이 섬들엔 접안시설과 별장들이 갖춰져 있는데, 2013년 김정은의 초청으로 방북한 미국 농구선수 데니스 로드먼이 이 섬을 가본 유일한 외부인입니다.로드먼은 영국 일간지인 ‘더 선(The Sun)’과의 인터뷰에서 “이 섬의 호화 별장은 7성급 최고급 호텔이며, 하와이나 스페인 휴양지 이상으로 환상적이었고, 미국의 최고 갑부들도 이런 호사는 누려보지 못했을 것”이라며 극찬했습니다.배를 타고 북쪽으로 좀 올라가면 ‘수중 특각’으로 알려진 72호 별장도 있습니다. 함남 낙원군에 있는 이 별장은 김정일이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했다지만 여긴 100년이 걸려도 따라오지 못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 규모나 시설 면에서 최고급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바닷물을 활용한 인공 폭포와 수영장, 동물원과 롤러스케이트장이 내부에 있다고 합니다. 원산에만 가면 모든 것이 다 준비돼 있는데, 김정은이 굳이 평양에 머무를 이유가 있을까요.③ 패밀리 콤플렉스(가족 단지)원산 특각이 사랑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김 씨 패밀리들을 위한 교류의 마당이 된다는 것입니다. 구글어스로 특각을 보면, 메인 건물을 중심으로 10여 채의 호화주택이 주변에 있습니다. 그리고 높은 아파트까지 있습니다. 이곳에선 누군가가 살고 있을 겁니다. 그들이 누구일까요. 1990년대 중반 원산 특각을 지키는 974부대에서 근무한 강진 씨는 자신이 근무할 때 늘 5세부터 17세로 보이는 아이 30명 정도가 특각에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아이들은 여름에는 물오토바이(수상스키)를 타고 놀았고, 토요타 또는 스즈끼 로고가 붙은 전기차를 타고 경주도 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가 본 아이 중에 김정철이나 김정은, 김여정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경비원들은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나무 한 그루 정도에 불과합니다. 참고로 강 씨는 김정일을 수십m 앞에서 볼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젊은 여성이 김정일의 팔을 잡고 다녔다고 합니다.아이들이 있으면 어른들도 있었겠죠. 김정은에게도 친인척이 많습니다. 친가 쪽으론 고모인 김경희가 있고, 김정일의 사촌 형제들도 있습니다. 외가인 고용희 쪽 친척들도 당연히 있습니다. 고용희에겐 오빠도 있었고, 자매들도 여럿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김정은에겐 이모가 되고, 그들의 자식들과는 외사촌이 됩니다.이설주의 친인척도 당연히 있습니다. 김정일은 여배우 성혜랑이 김정남을 낳았을 때, 성 씨의 모친인 김원주, 언니인 성혜랑, 성혜랑의 아들인 이한영, 딸 이남옥을 모두 자기 집에서 살면서 김정남을 돌보게 했습니다. 김주애 역시 외할아버지도, 외삼촌이나 이모가 있을 겁니다. 친척들과 교류하며 지내는 것은 김주애의 성장에서 중요합니다.하지만 평양의 김정은 관저에선 친인척이 가끔 식사 정도는 할 수 있어도 모여서 놀기엔 협소합니다. 원산 특각에선 김정철이나 김여정도 좋은 특각 하나씩 차지하고 그들의 자녀인 김주애의 사촌 형제들이 함께 뛰어놀 수 있겠죠. 김정은 남매에겐 큰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김경희도 이곳의 어느 건물에서 머무를지도 모릅니다. 마치 드라마에서 단골로 나오는 재벌집 식사 자리처럼, 고모가 부르면 김정은 3남매가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겠죠. 패밀리만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늘 따로 있는 겁니다. 가령 형제끼리 앉아서 “거, 아무개 비서가 눈빛이 불량한데 치워버려”, “최신형 벤츠 구입해 오라는데, 아무 개가 말을 듣지 않네”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죠.④ 철통 보안원산 특각은 경호 역시 뛰어납니다. 해상을 통해 이곳으로 접근하려면 갈마반도를 끼고 돌아야 하는데, 비밀리에 접근하기 쉽지 않습니다.이곳은 김정은의 친위대로 알려진 974부대 부대원 수천 명이 철통 경비를 펼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된 974부대 출신 강 씨가 근무하던 1990년대 중반에 이곳을 경호하는 부대원은 8개 중대에 2500명이나 됐습니다. 이들은 매일 5교대로 2시간씩 보초를 섰는데, 김정일이 있을 땐 25m 간격으로, 없을 땐 50m 간격으로 근무를 섰습니다.974부대는 근무지에 접근하는 사람은 무조건 사살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입대한 순간부터 대원들에게 “죽은 자만이 비밀을 지킨다”고 한 김정일의 ‘말씀’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이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974부대원은 모르고 구역을 침범하는 사람을 사살할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쏴 죽이면 어떤 처벌도 없는 대신, 전사영예훈장 1급을 주고, ‘화선입당’을 시키며, 군관학교까지 보내주기 때문입니다.974부대는 바닷가 옆 별장에서 근무하지만, 바다에서 수영할 기회는 없습니다. 강 씨 역시 원산에서 몇 년을 근무하면서도 바다에 한 번도 들어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바다에 들어갈 특권은 김 씨 일가에게만 있으니까요.구글어스로 보면 특각 앞 바다에 바지선처럼 보이는 구조물 8개가 막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해상 경계는 대남 공작원으로 양성된 1022연락소 전투원들이 맡고 있습니다. 원산항은 많은 배들이 오가는 곳입니다. 하지만 특각 4km 이내 거리엔 배가 접근할 수도 없고 사진을 찍을 수도 없습니다. 한 탈북민의 증언에 따르면 어느 군부대 소속 어선 선장이 바다에서 특각 방향으로 사진을 찍었다가 갑자기 나타난 쾌속정에 연행됐다고 합니다. 찍은 목적을 대라며 사흘 동안 초주검이 될 정도로 매를 맞았는데, 다행히 군 소속인 데다 ‘빽’이 좋아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민간인 같으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을 거라고 수군거렸다고 합니다.10여년 전까진 육지에서 특각이 맨눈으로 보이는 곳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송도원야영소 숙소 제1동과 식당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건너다볼 수 있을 만한 창문은 판자로 죄다 막아놓았다고 합니다. 판자 틈으로 보려 하면 어느새 호각을 빽빽 불어대며 경비병이 나타나는데, 맞은편에 쌍안경으로 쉬지 않고 감시하는 감시병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김정은 시대엔 야영소 재건축 공사가 진행됐다니, 이젠 창문도 다 없애버렸겠죠.김정일 시대에 수천 명이 경호했으면, 그때보다 중요도가 더 높아진 지금은 훨씬 더 많은 군인이 지키고 있을 겁니다. 평양 자택보다 경비 병력이 훨씬 많을 겁니다.이렇게 김정은이 원산을 사랑하는 이유를 분석해 봤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선 태양과 멀어지면 얼어 죽고, 너무 가까우면 타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김정은이 평양처럼 사랑하는 도시가 되다보니 원산 사람들은 늘 도시를 깨끗이 유지해야 합니다. 평양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데도 새벽에 늘 나와서 도로를 청소하는 평양 사람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혹 김정은의 질책을 받으면 숱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됩니다.좋은 점이 있다면 늘 암흑 속에서 살아야 하는 다른 도시와 달리 원산엔 전기는 잘 온다는 것입니다. 캄캄한 어둠이 싫어서인지, 김정은은 집권하자마자 도시 건물과 외향을 현대적으로 하라고 들볶았는데, 덕분에 원산의 야경은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빌딩마다 빨갛고 파란 조명 장치를 잘해놓아서 전기 공급이 잘되는 명절 때 바다에서 보면 남쪽 동해안 어느 항구보다 야경이 멋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오랜만에 원산항에 들어오던 북한 어선이 “남조선에 잘못 왔다”고 정신없이 도망간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다음에 김정은의 초청을 받아 북에 가는 외빈은 원산의 야경을 보고 감탄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젠 갈마해안에 멋진 외형의 관광단지도 만들었으니, 다음에 김정은이 원산에서 손 볼 곳이 어디일지 궁금해집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월드비전이 정신건강 문제를 사전 예방하는 차원에서 다룰 수 있는 제도적 개선과 지역 중심 실천 전략을 모색하는 전국적인 포럼을 개최한다. 첫 시작은 호남권역에서 진행됐다. 14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는 ‘아동 정신건강의 이해와 효과적인 가족지원 모델 제안’이라는 제목의 포럼이 개최됐다. 이날 포럼은 국제구호개발 비정부기구(NGO) 월드비전이 광주 북구을 전진숙 의원, 한국정신건강복지센터협회, 한국정신재활시설협회와 공동 주최했으며 아동 정신건강 증진을 위한 부모-자녀 관계 개선 모델과 지역사회 협력 전략을 주제로, 전문가 강연과 토론, 질의응답이 활발히 이어졌다. 이날 발표를 맡은 이주연 전남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양육에서의 통제와 자율 사이 균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아이의 일상을 지켜주는 것이 부모의 첫 번째 역할”이라며 정신질환의 위험 징후가 포착되는 순간의 민감한 개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했다. 하경희 아주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는 월드비전과 서울시 아동·청소년 정신건강 지원기관 ‘아이존’이 공동 개발한 3년간의 프로그램을 분석하며 부모와 자녀가 함께 참여한 활동이 아동의 정서 안정에 긍정적 변화를 이끌었다고 밝혔다. 해당 프로그램은 정서 표현, 애착, 의사소통을 주제로 부모-자녀가 함께 활동하고 실시간으로 피드백을 받는 구조로 설계되었으며, 현장 실무자와 부모 모두에게 높은 만족도를 보였다. 월드비전은 이 프로그램을 공모사업 형태로 확산할 계획이다. 패널 토론과 종합 질의응답 시간에는 광주시교육청, 복지관, 정신건강복지센터, NGO 등 다양한 기관의 패널들이 각자의 현장 경험을 공유하며 협력 방안을 모색했고, 청중으로 참여한 실무자들도 직접 질문을 던졌다. 김광무 월드비전 국내사업전략팀 팀장은 “공공-민간-지역이 함께하는 구조화된 사례 관리 체계가 절실하다”고 언급했다. 이번 포럼은 정신건강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의 복지, 통합, 미래 자원과 직결된 과제임을 환기하며, 지역 중심의 가족 개입 모델을 실질적으로 제시한 점에서 주목받았다. 전 의원은 축사에서 “아동 정신건강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복지와 연결된 과제”라며 “이번 포럼이 지역 협력 기반 조성과 실효성 있는 정책 마련으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월드비전은 호남과 영남 등 지방 중심의 정신건강포럼을 개최해 현장의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들을 예정이다. 김순이 월드비전 국내사업본부장은 포럼에서 “단순한 치료를 넘어 지역사회 안에서 회복과 성장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월드비전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단절된 남북 관계 복원은 현 정부에 매우 중요한 과제다. 그래서 국가정보원부터 통일부 출신들로 채웠다. 국정원장엔 통일부 장관 출신이, 원장 특보엔 통일부 차관 출신이 임명됐다. 통일부 장관 역시 통일부 장관을 한 차례 지낸 중량감 있는 인사가 발탁됐다. 통일부와 국정원 쌍끌이로 김정은을 대화로 끌어내라는 뜻이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김정일 시대 남북 정상회담에 관여한 ‘선수’들이 동원된다 하더라도 물밑 비선 접촉 경험이 또 통할지 미지수다. 그땐 그래도 ‘동족’ 관계였을 때다. 김정은은 남북 관계를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했다. 만천하에 “대한민국 족속들은 우리의 주적”이라고 선언하고 다시는 말을 섞지 않겠다며 돌아앉았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얼굴’의 일본말, ‘체면’이라는 뜻)가 없냐”고 소리치는 사람의 ‘가오’는 꺾기 쉽지 않다. 하물며 상대는 가오에 살고 가오에 죽는 김정은이다. 과거처럼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 같은 경제 협력 제안으론 꼼짝도 하지 않을 것이란 뜻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물밑 접촉이 먹히지 않으면 시간에 쫓겨 초조한 것은 우리뿐이다. 방법은 없는 걸까. 정 없지는 않다고 본다. 단시일에 어려우면 길게 보고, 정면 돌파가 어려우면 우회하면 된다. 남북 관계에서 우회 돌파할 틈이 마침 보인다. 올해 5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모스크바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때 발표된 공동성명에 의미심장한 구절이 있다. “동북아 지역 교통, 에너지, 무역, 투자, 디지털 경제, 농업, 관광 분야에 관한 두만강 이니셔티브 참여국 간 협력 발전에도 노력하겠다”는 대목이다. 같은 내용은 지난해 중국 베이징에서 발표된 중-러 정상 공동성명에도 들어 있다. 두만강 이니셔티브 또는 광역 두만강 개발 계획(GTI)으로 불리는 프로젝트는 한국인들 머릿속에서는 잊힌 지 오래다. 이 계획은 중국 러시아 한국 북한 몽골이 참여해 두만강 유역을 개발한다는 프로젝트다. 1990년대 초반 유엔개발기구(UNDP) 주도로 추진됐다. 중국 옌지(延吉),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북한 청진을 잇는 대삼각지구에 국제자유무역지대를 설립하는 동북아 지역 협력 프로젝트였다. 김일성은 죽기 전 이 프로젝트에 북한 발전의 명운이 걸렸다고 흥분했다. 하지만 북한은 2009년 중국과 러시아가 유엔 대북 제재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이 프로젝트에서 탈퇴했고 돌아오지 않았다. 삼각 축에서 하나가 빠졌으니 프로젝트는 유명무실해졌다. 하지만 중-러 공동성명에서 보듯 양국은 여전히 이 프로젝트에 관심이 매우 크다. 러시아 재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시베리아의 힘’ 가스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멈춰 섰다. 푸틴이 러시아의 전략적 우선순위라고 한 ‘극동 개발’은 가스를 팔아야 성공한다. 중국은 낙후된 동북 3성을 키우려면 태평양으로 가는 길을 뚫어야 한다. 상황도 달라졌다. 김정은은 이제 푸틴이 잡아 끌면 활짝 웃으며 그 품에 뛰어든다. 내년 두만강 하류엔 90년 만에 북한과 러시아를 잇는 새 대교가 완공된다. 이에 발맞춰 러시아는 북한까지 연결되는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고 얼마 전 밝혔다. GTI 최대 수혜자가 될 중국 시진핑까지 푸틴과 함께 손을 내밀면 김정은이 거절하기 어렵다. 또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으로 하여금 ‘돈 냄새’를 맡아 끼어들게 만들고 일본까지 끌고 오면 금상첨화다. 돈도 충분하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1000억 달러(약 138조 원)가 쌓여 있는데 한국 지분이 약 4%나 된다. GTI 사무총장은 내년까지 한국인이 맡는다. 한국도 GTI 수혜국이 된다. 1억 명이 사는 동북 3성이 동해와 연결되면 동해안 항구 도시들은 물론이고 일본까지 영향을 받는다. 극동 개발에 러시아가 안심하고 부를 수 있는 나라도 한국뿐이다. 방에 박혀 나오지 않겠다는 사람 불러내는 일을 꼭 내가 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친구도 부르고, 이웃도 불러야 한다. “이쪽이 불러서 어쩔 수 없이 나왔다”고 김정은이 변명할 수 있도록 해 체면을 세워 줘야 한다. 다만 우리는 “문 좀 두드려 달라”고 적극적으로 이웃에게 요청하는 자가 돼야 한다. 앞문이 막혔을 때 뒷문을 열어 보는 것은 상식이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 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바다에서 표류하다 구조된 북한 주민 6명이 9일 오전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중 4명은 5월 27일 동해 북방한계선(NLL) 이남에서 표류하다 발견됐고, 2명은 3월 7일 서해 NLL 이남에서 구조됐습니다. 각각 43일, 124일 만에 돌아간 것입니다. 정부는 동해에서 구조된 북한 주민들이 타고 왔던 선박을 수리해 NLL 인근 지역에서 북한으로 보냈는데, 이런 방식은 과거에도 종종 써왔습니다. 2019년에 동료 16명을 살해하고 도주한 북한 어민 두 명을 북한으로 강제 송환한 사건이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이후, 북한 주민의 송환은 매우 민감한 문제가 됐습니다.하지만 돌아가겠다고 강력히 희망하는 사람을 강제로 한국에 살게 할 순 없습니다. 최근 북한이 주민들의 어업 활동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바람에 남쪽까지 표류하는 사례가 거의 없을 뿐이지, 과거엔 북한으로 송환한 사례들이 너무 많아 이슈조차 되지 못했습니다.2010년부터 2022년까지 12년 동안 북한 주민들이 해상 등을 통해 남측으로 직접 넘어온 경우는 총 67회, 인원수로는 276명이었고, 이 중 194명이 47회에 걸쳐 북한으로 돌아갔습니다. 2022년 이후에 구조돼 북으로 간 사람은 올해 6명이 더 추가됐을 뿐입니다.이명박 정부 동안(2010~2012년) 해상월선 104명 중 57명을, 박근혜 정부 동안(2013년~2017년 4월) 해상 월선 98명 중 82명을, 문재인 정부 동안(2017년 5월~2022년 5월) 해상 월선 74명 중 55명을 송환했습니다. 발견 후 송환까지 소요된 기간은 2010년부터 현재까지 송환 47회 평균 5.6일이었습니다.북한 주민들은 배가 부서졌을 경우는 판문점을 통해, 배에 문제가 없다면 배에 태워 북송이 이뤄졌습니다. 3월 7일에 구조된 2명이 머물렀던 124일의 체류 기간은 유례가 없었습니다.이들은 초기 두 달 가까이 “남조선의 물로는 씻지 않겠다”며 샤워도 하지 않고 있다가 냄새가 코를 찌르자 주변을 경계하며 샤워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또 “썩어빠진 자본주의 선전물을 보지 않겠다”며 숙소에 있는 TV도 보지 않았습니다. 대신 “건강한 몸으로 조국에 돌아가기 위해서”란 자기 합리화를 내걸고 제공되는 식사와 간식은 잘 챙겨 먹었다고 합니다.이들이 송환을 강력하게 희망한 가장 큰 이유는 가족의 안전에 대한 염려였을 겁니다. 자의든 타의든 한국에 귀순하면 북한에 남겨둔 가족은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니까요. 또 하나의 이유는 북한으로 돌아가면 받을 ‘포상’을 기대했을 겁니다. 김정은은 4개월 동안 지조를 지키며 돌아온 이들을 잘 대해줄까요. 한국에 표류했다가 구조된 북한 주민들은 처음 신문을 받을 때 공통된 생각을 떠올릴 겁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 북한이 만들어둔 ‘교본’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본의 탄생“왜 여자를 들여보내지 않지? 언제 들여보내려고 뜸을 들이는 걸까.”인천에서 4개월을 지낸 북한 주민들은 이 생각만 하면서 보냈을 겁니다. 아마 돌아가면서도 “왜 우리에겐 여자를 들여보내지 않았을까”를 심각하게 고민해 볼 겁니다.네, 그렇습니다. 북한이 만든 교본엔 “한국 괴뢰들에게 체포되면, 요상하게 치장한 여자를 들여보내 귀순을 유도한다. 이때엔 단호하게 여자를 밀어버려야 한다”고돼 있습니다.그럼 이런 교본은 언제 만들어졌을까요.1994년 2월 북한 노동신문에는 남조선으로 표류했지만 당당히 싸워 돌아온 두 병사에 대한 이야기가 전면으로 실렸습니다. 노동신문에 김씨 일가가 아닌 일반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그 정도 분량으로 실리는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북한이 남쪽에 표류했다가 구조된 뒤 돌아온 사람을 선전전의 소재로 쓴 첫 사례였습니다.1994년 1월 27일 한국 해군함정은 서해 백령도 근해에서 표류하던 북한군 병사 두 명을 발견했습니다. 이들은 황해남도 용연군 오차신리(일명 장산곶) 초소에서 근무 중이던 조선인민경비대 소속 하사 김철진(23)과 전사 김경철(19)로, 목선을 타고 나왔다가 높은 파도에 휩쓸려 표류했습니다. 구조된 직후 두 군인은 서울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고, 본인들의 의사에 따라 2월 1일 판문점을 통해 송환됐습니다. 이들은 4박 5일간 한국에 머물렀습니다.노동신문은 두 병사가 한국 괴뢰들의 집요한 귀순 회유를 뿌리치고, 장군님의 품으로 돌아가겠다며 절개를 지켰다고 칭찬했습니다. 거의 한 편의 신파극을 보는 듯한 스토리였습니다. 김철진은 북한의 최고 훈장인 공화국영웅 메달과 함께 소위로 진급했고, 김경철은 ‘김일성청년영예상’을 수여받았습니다.이듬해엔 이들을 소재로 한 영화 ‘두 병사’가 나왔고, 2000년엔 영화와 내용이 별반 다르지 않은 중편소설 ‘대결’이 나왔습니다. 영화 시나리오는 당시 김정일의 신임을 받던 오극렬 노동당 작전부장의 맏딸 오혜영이 썼습니다.노동신문과 영화, 소설이 바로 북한 주민들에게 남쪽에 표류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교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두 병사란 영화나 대결이란 소설을 보면 배를 잡고 웃을 것 같습니다.영화에는 이들의 귀순을 지휘할 노련한 북한 전문가인 안기부 고형근 과장이 나옵니다. 귀순 공작은 일곱 단계로 진행됩니다.첫째는 좋게 말로 설득합니다. 당연히 거절당하겠죠.두 번째는 반라의 차림에 진한 화장을 한 여성이 이들이 있는 방에 들어가 몸을 비벼대며 온갖 유혹을 던지지만, 병사들은 사탄을 몰아내듯 단호하게 거절합니다.세 번째는 돈 공세입니다. 고 과장은 집과 차 등 50만 달러 상당의 포상을 하겠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도 실패겠죠.네 번째는 이북 사투리를 쓰는 가짜 ‘월남자’를 내세웁니다. 이때엔 탈북자란 말이 없으니 월남자로 묘사했겠지요. 이들은 쌍욕을 먹고 쫓겨납니다.다섯 번째는 심리전입니다. 상급자 병사와 닮은 대역을 내세워 그가 고문을 받다 전향에 동의한다는 영상을 만들어 하급자 병사에게 보여줍니다. “자, 상관도 돌아섰고, 이미 신문에도 너희들이 전향했다고 보도됐으니 너도 돌아서라”는 것이지만 하급자는 거부합니다.여섯 번째 단계는 여자와 함께 노래방에 데려가 애수, 비애, 고독감을 조장하는 슬픈 노래를 부르게 하는데, 북한 병사는 김정일 찬가를 부르며 이겨냅니다.일곱 번째 단계는 “너희는 전향자로 알려진 채 이름도 없이 죽을 것이다”며 사형장에 내세웁니다. 두 병사는 입고 왔던 북한 군복과 김일성 배지를 강력하게 요구하며, 군복 차림으로 사형장에 나갑니다. 이때 미군 사령부가 북한을 건드리면 큰일이 난다고 펄쩍 뛰면서 당장 보내라고 해서 두 병사는 돌아갑니다.두 병사의 모습은 마치 광야에서 악마의 온갖 유혹을 받던 예수처럼 묘사됩니다. 돌단 위의 예수는 단호한 음성과 몸짓으로 “사탄아, 물러가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고 외칩니다. 하느님 자리에 ‘장군님’을 넣으면 두 병사가 예수님 같아 보일 지경입니다. 어떤 유혹에도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시종일관 장군님입니다.소설도 영화와 줄거리는 같지만, 귀순 공작 책임자가 월남한 악질 반동의 자손이라고 나오며, 귀순 공작에 실패하니 권총으로 자살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너무나 상투적인 북한식 전개죠.● 교본의 종말영화가 나오고 이듬해 이 교본으로 무장한 병사가 등장합니다. 1996년 11월 23일 연평도에서 북한군 상등병 정광선(19)이 표류 중에 발견됐습니다. 정 씨는 구조를 위해 다가간 한국 경비정에 처음엔 도끼를 휘두르며 몇 시간이나 저항하다가 파도가 높아 목선이 뒤집어질 것 같으니 먼저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구조된 그의 첫 마디는 “배고프다. 먹을 것을 달라”였습니다.그는 땅에 도착한 뒤엔 옷과 음식을 거부하고, TV도 보지 않은 채 “장군님 품에 보내달라”고 생떼를 부렸습니다. 3박4일 뒤 그는 판문점으로 귀환했습니다. 북한 땅에 발을 딛자 그는 두 손을 번쩍 쳐들어 김정일 만세를 외쳤습니다.북한 매체들은 정광선이 “낮에는 간교한 남조선 도당의 교활한 귀순 시도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하고 밤에는 가슴에 지도자 동지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달래며 지도자 동지를 결사 옹위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또 다졌다”는 선전을 했습니다.푸짐한 포상도 있었습니다. 19세 병사는 장교로 승진했고,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함북 청진의 그의 모교는 ‘정광선고등중학교’로 개명됐습니다.이후부터 구조된 사람 중 북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밥을 줘도 거절하고, 치료도 거부하고, 구멍이 뚫린 낡은 옷을 입고 북한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하는 사례가 늘었습니다.아마 북에 돌아가 조사할 때 “우리는 적후에서도 매 순간 장군님만 그리며, 적의 회유를 단호하게 뿌리쳤고, 적의 쌀 한 알도 먹지 않고 왔다”고 주장했을 겁니다.하지만 포상은 처음에만 있지, 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김철진, 김경철, 정광선 이후 북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포상을 받았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습니다. 사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포상은 없을지라도 “적이 주는 밥도 먹고, 치료도 받았습니다”고 하면 사상이 잘못됐다고 처벌은 확실히 받을 것이니 말입니다.이런 맥락을 안다면, 인천에서 4개월 동안 머물렀던 북한 주민들이 두 달 넘게 샤워도 하지 않고, TV도 보지 않았다는 것이 이해될 겁니다. 이런 소식이 한국 매체들을 통해 전해졌으니 아마 이들은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김정은이 마음먹기에 따라 “김정은 시대의 진정한 충신”의 귀감으로 선정돼 1990년대의 운 좋은 북한군 병사들처럼 푸짐한 포상을 받을 수도 있겠죠.하지만 이들 주민들은 돌아가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겠죠. “왜 남조선 괴뢰들은 우리에게 여자를 들여보내지도 않고, 돈도 준다고 하지 않았으며, 사형을 내리지도 않았을까. 우리가 그 정도로 이용 가치가 없었던 것일까.” 그런 일은 북한이 만든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꽉 닫힌사회에서 일방적인 세뇌만 받으며 살았던 사람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그리고 이들이 모르는 일은 또 있습니다. 북한 당국이 진정한 충신의 사례로 내세운 정광선은 3년 뒤 사고를 쳤습니다.술자리에서 그만 “남조선을 암흑의 세상이라고 배웠는데, 서울에 가보니 완전히 불바다더라”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말이 김정일에게까지 전달됐는데, 김정일은 “앞으로 남조선을 암흑의 세상이라 교육하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후 북한 대남 교육은 “한강 다리 아래 거지가 득실댄다”는 레퍼토리에서 “부익부 빈익빈이 극심해 살기 힘든 사회”로 바뀌었습니다. 정 씨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 북한 매체에선 사라졌습니다.그리고 교본의 탄생을 만든 김철진 역시 장교로 승진해 잘 나가다가 한순간에 말실수로 인생이 끝났습니다.2014년 8월 14일 세계일보는 대북소식통을 인용해 “김철진 군 선전부장(대좌, 대령급)이 남한 체제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습니다. 1971년생인 김철진은 2014년이면 43세입니다. 그런데 전 국민의 귀감 사례로 영웅 칭호까지 받았으니 출세도 빨라, 선전 담당 대령급이 된 것 같습니다.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김철진은 그해 5월 울릉도 해상에서 표류하다 우리 해경에 의해 구조된 뒤 북한으로 돌아온 북한 어민을 소재로 체제 선전 교육을 하다가 말실수를 했습니다.당시 청진을 출발한 북한 어민 3명이 발견됐는데, 2명은 떠날 때부터 탈북이 목적이라 한국에 남았지만, 영문 모르고 기관을 조종했던 1명은 다시 가겠다고 해서 돌려보냈습니다. 이에 북한 당국은 군인들을 대상으로 “2명은 남측에 납치돼 구타·고문을 심하게 받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교육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교육에 당연히 김철진이 강사로 나섰겠죠.김 씨는 강연 말미에 “정말로 남조선에 가면 구타와 고문을 당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왔을 때 “교육 내용은 과장됐고 실제로는 잘 대해준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만들어준 신화를 자기 입으로 부정한 것입니다. 김철진은 즉시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고 합니다.정광선과 김철진의 사례를 보면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다는 진리가 떠오릅니다. 그들에겐 먹고, 입고 살았던 모든 것, 창밖으로 스쳐 지나갔을 풍경들이 엄청난 충격이었을 겁니다. 자신들의 경험이 완전히 왜곡되어 영화나 소설로 나오고, 이를 사실인 듯 전 국민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모습을 보고 그제야 자신들이 사는 땅이 어떤 곳인지 알게 돼 괴로웠을 겁니다. 그리고 이중적인 삶의 끝은 비극이었습니다.이번에 돌아간 주민들은 부디 통일되는 순간까지 입을 잘 꿰매고 살아있기를 바랍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5월 21일 청진조선소에서 5000톤급 구축함이 진수 도중 쓰러지고, 김정은이 격노한 뒤 두 사람의 얼굴이 공식 매체에서 사라졌습니다.한 명은 김명식 해군사령관이고, 다른 한 명은 홍길호 청진조선소 지배인입니다. 물론 이들 외에도 숙청된 인물들이 훨씬 많겠지만, 외부 세계에서 숙청 사실을 즉각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두 명 정도입니다. 두 사람은 북한 조선중앙TV에 등장할 정도의 지위에 있어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홍길호는 6월 14일 방영된 강건호 진수 기념식 영상에서 김정은의 현지시찰에 동행한 과거 사진이 편집됐습니다. 김명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그런데 김명식의 얼굴은 15일 뒤 부활했습니다. 물론 몸은 어디에 갔는지 알 수 없으나, 화면에선 다시 나타났습니다. 조선중앙TV가 지난달 29일 방영한 기록영화 ‘위민헌신의 여정, 새로운 변혁의 2024년’에 김정은을 따라다니는 김명식의 얼굴이 여러 차례 등장했습니다.이것이 북한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겐 또 화젯거리가 됐습니다. 김명식이 기록까지 말살될 정도의 처벌을 받은 줄 알았는데, 그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김정은의 격노 누그러졌냐’는 분석의 기사들도 나왔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얼굴이라도 다시 살아난 것만으로도 김정은이 크게 선심을 쓴 것처럼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북한에서 기록이 사라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고, 기록이 사라지면 북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는 특정인의 기록이 사라진 것을 북한이 방영하는 영상을 통해 확인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북한 내부에선 주민은 다 알 수밖에 없는 엄청난 북새통이 한바탕 벌어집니다.● 기록말살형의 역사기록을 말살하는 ‘형벌’은 21세기에 북한에만 존재합니다. 온 가족을 숙청하는 연좌제와 더불어 지구상에 유물처럼 존재하는 악명 높은 처벌입니다.기록말살형은 역사가 참 오래된 형벌입니다. 기록말살형을 받은 최초의 기록된 인물은 성경에 나오는 모세라고 합니다. 약 3500년 전 이집트 왕자였던 모세는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인도해 가나안으로 탈출했습니다. 그러자 모세의 아버지일 것으로 추정되는 파라오가 그의 모든 이름을 삭제하는 형을 내렸다고 합니다. 파라오가 누군지는 의견이 갈리지만, 람세스 3세라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3000년 전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름이 없어지면 존재도 사라진다고 믿었다고 합니다.영화 ‘300’에선 기원전 480년경 스파르타를 침공한 페르시아의 황제 크세르크세스 1세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네놈들의 희생에는 영광 따위는 없을 것이다. 내가 스파르타를 역사에서 한 치도 남김없이 지워버릴 것이니! 그리스의 모든 문서를 불태워 버리고, 그리스의 모든 역사가의 눈알을 뽑아버리고 입에서 혀를 잘라버릴 것이다. 누구든지, 스파르타나 레오니다스의 이름을 아주 조금이라도 언급하기만 해도 사형으로 다스릴 것이다. 세상은 너희가 존재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물론 작가가 만든 대사겠지만, 시대를 고려했을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천 년의 로마제국(기원전 753년~기원후 476년) 시대에도 최고의 형벌은 기록말살형이었다고 합니다. 이 형벌에 처하면 로마인에게는 족보라고 할 수 있는 조각상이 모두 강제 회수돼 파괴됩니다. 공문서나 각종 기록에 남겨진 이름은 지우고, 건물에 새겨진 초상이나 기록은 파괴하거나 긁어내 없애버립니다. 파괴된 조각상이나 비문은 가축이 밟고 다니는 도로에 깔아 모욕당하게 만들고 살던 집도 철거합니다. 사라진 이름을 공개적으로 언급해도 안 됩니다. 그러나 로마에서도 대역죄가 아닌 이상, 가족까지 처벌하는 연좌제는 없었습니다.우리 역사에서도 비슷한 형벌이 존재합니다. 조선시대에 ‘삭명(削名)’이란 형벌이 있었습니다. 먹으로 이름을 지우는 묵삭(墨削), 북을 치고 성토하면서 유적에서 영구히 이름을 지우는 명고영삭(鳴鼓永削), 누런 종이를 붙여서 영구히 이름을 지우는 부황영삭(付黃永削)의 세 종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고,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등의 불이익을 당하였을 뿐입니다. 그나마 이 형벌은 영조 시대 편찬된 통일 법전인 속대전(1746년)을 통해 금지됐습니다.점차 사라져가던 기록말살형을 현대 사회에서 부활시킨 이는 공산주의자들이었습니다. 1930년대 소련의 스탈린 치하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록말살을 당했습니다.대표적 인물이 ‘스탈린의 개’로 불리면서 대숙청을 주도했던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 소련 내무인민위원회의 위원장입니다. 1930년대 후반의 대숙청 기간 스탈린은 70만 명을 처형하고, 수백만 명을 반혁명분자라며 쿨라크(수용소)에 감금했으며 1000만 명을 강제 이주 및 강제노동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불만이 커지자, 예조프를 처형하고 그의 모든 기록을 말살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예조프의 고향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중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덩샤오펑, 류사오치 등 수많은 고위직이 기록말살형에 처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대다수가 복권하긴 했습니다. 지금도 중국은 1989년의 천안문 사태에 대해 기록을 삭제하고 언급을 못 하게 하고 있습니다. 공산당을 비판한 전직 유명 축구선수 하오하이둥(郝海東)의 모든 기록이 모두 삭제된 것도 최근의 일입니다. 물론 당사자는 스페인에 거주해 신변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은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축구협회는 러시아 축구클럽에서 뛰는 아나톨리 티모슈크를 반역자로 간주해 우크라이나인으로 달성한 그의 기록을 말소했습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공식 최다 출전자가 티모슈크에서 안드리 셰우첸코(셰브첸코)로 교체됐습니다.● 모든 형벌의 부활최근엔 기록말살형을 이야기할 때, 북한을 제외하면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인민들에게 공산주의 사회를 만든다고 사기를 치고 3대 세습 왕조를 부활시킨 북한은, 과거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수많은 형태의 기록말살형도 그대로 부활시켰습니다. 영상에서 얼굴이 사라지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아주 일부의 사실에 불과합니다.북한은 해당 인물에 대한 모든 기록을 지우고 철거하는 고대 로마의 형벌 방식은 물론, 조선시대의 부관참시, 묵삭, 부황영삭까지 다 되살려냈습니다. 부관참시를 당한 대표적 인물로는 1984년에 사망한 김만금 전 노동당 농업담당 비서를 꼽을 수 있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 굶어 죽는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해지자 김정일은 김만금을 간첩으로 몰아 유해를 꺼내 부셨습니다.2013년 12월 13일 사형 선고를 받은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은 모든 종류의 기록말살형에 다 해당하는 인물입니다. 모든 기록이 삭제됐을 뿐만 아니라 그가 책임지고 건설했던 멀쩡한 건축물까지 허물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수억 달러를 들여 2012년 완공했던 평양민속공원인데, 장성택 숙청 3년 뒤 몽땅 허물어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장군님의 은덕으로 인민을 위한 공원이 만들어졌다고 입이 마르도록 자랑하다가 불과 몇 년 뒤 새로 만든 공원을 흔적도 없이 부순 것입니다.어떤 인물이 기록말살형에 처해지면 대다수 북한 주민들은 TV를 통해선 그 사실을 알지 못 합니다. 지방은 늘 정전이라 TV를 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인물에 대한 묵삭, 부황영삭이 이뤄지기 때문에 모두가 알 수밖에 없습니다.특정인에 대해 기록 말살이 결정되면 이는 각 지역의 노동당 조직에 통보가 됩니다. “그 인물의 이름이나 사진이 어느 저서에 실렸으니 지우라”는 지시가 하달됩니다. 그러면 당 간부들이 모든 집을 방문해 해당 저서가 있는지 샅샅이 뒤져 지시를 수행합니다.북한 가정집들에 있는 책 대다수는 구매한 것이 아니라 당국이 주민을 세뇌하기 위해 나눠준 것들입니다. 이런 책들은 크게 두 가지 종류입니다.첫 번째 종류는 김씨 일가의 사상이나 노작(勞作)이 담긴 수백 권이 훌쩍 넘는 책들입니다. 34권짜리 ‘김일성전집’, 65권짜리 ‘김정일전집’이 대표적입니다.두 번째 종류는 김씨 일가를 찬양하는 저서입니다. 자기 입으로 자기가 위대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김씨 일가와 함께 일을 했다는 사람들이 쓴 회고담을 책으로 묶어낸 것입니다. 김일성 회상실기집 ‘인민들속에서’는 무려 112권이나 발간됐습니다. 각각의 책엔 김일성을 찬양하는 수십 명의 회고록이 담겨있습니다. “무엇을 할 때 우리가 이렇게 하려 했는데, 영명하신 수령님이 그건 아니라며 우리의 잘못된 눈을 띄워주었다”는 내용들이 꽉 차 있습니다. 김정일 회상실기집 ‘주체시대를 빛내이시며’는 82권이 출판됐습니다. 이런 책들을 보면 김씨 일가는 현장에 가서 늘 “그게 아니라, 이거다”고 얘기하는 부정형 인물인 듯싶습니다. 김정은 회상실기집은 ‘선군혁명령도를 이어가시며’라는 제목으로 출판됐습니다.문제는 이러한 김씨 일가 찬양 회고담을 쓴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중 누가 숙청될 때마다 당 간부들이 1년에 몇 번이고 전국의 가정집을 뒤져야 합니다. 흔적을 없애는 대상도 책이나 화보, 신문 등 모든 것에 해당합니다.이런 일이 반복되니 북한의 오래된 책은 성한 것이 없습니다. 가장 누더기가 된 대표적인 책은 1959년부터 1970년까지 총 12권이 출판된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입니다. 이름 그대로 김일성의 빨치산 시절을 회상한 동료들의 구술을 정리한 것인데, 3대 세습까지 내려오며 반세기 동안 가장 많이 숙청된 사람들이 빨치산 출신이기도 합니다.숙청 대상이 나오면 그가 쓴 내용 수십 페이지를 통째로 잘라갑니다. 아무리 김일성을 칭찬한 내용이라도 그의 이름과 기억을 매체에 남겨둘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회상자의 글에 숙청자의 이름이나 행적이 언급되면, 이건 자를 수 없으니 꺼먼 먹으로 그 대목을 쭉 지워버립니다. 또는 부황영삭처럼 종이띠를 붙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책은 3분에 1도 남아있지 않고, 남아있는 부분도 먹칠 부분이 가득 차 읽을 수조차 없게 됩니다.물론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처럼 오래된 책들은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휴지로 애용돼 가정마다 남아있는 것이 거의 있을까 싶긴 합니다. 하도 참기 어려웠는지 북한은 2003년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회상기만 묶어 다시 똑같은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누가 기록말살에 처해질까이런 소동이 벌어지니 북한 사람들은 고위급이 숙청되면 모를 수가 없습니다. 특히 김명식 해군사령관 같은 경우는 김정은의 각별한 신임을 받는 듯한 모습을 여러 번 연출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많이 기억할 겁니다. 그는 김정은과 모자를 바꾸어 쓴 사진이 두 번이나 북한 매체에 실렸습니다. 김정은이 모자를 바꿔 쓴 사람이 거의 없으니 이런 사진은 꽤 인상적입니다. 동시에 “이렇게 좋아하던 인물도 하루아침에 사라지는구나”는 확실히 각인시켜 줄 순 있겠죠. 영상이나 출판물에 얼굴이나 글을 남길 정도면 그나마 고위층일 것입니다. 이름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이 훨씬 많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기록말살형에 처해질까요.김정은이 누굴 숙청할 때마다 “이 자는 처형만 하고, 이 자는 가족까지 죽이고, 이 자는 기록말살까지 하라”고 지시하진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아래 간부들이 눈치껏 기록말살까지 했다가 김정은이 “내가 거기까지 하라고 했냐”며 화를 내면 처벌을 피할 수 없으니 마음대로 결정할 순 없을 겁니다.분명 내부에 어떤 기준은 있을 것이지만 외부에 알려지진 않았습니다. 다만 여러 증언을 종합하면 김정은이 사람을 어떻게 죽이라고 할 때 암시를 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숨 쉴 자격도 없는 놈”이라고 하면 처형을 하고, “묻힐 자격도 없는 놈”이라고 욕하면 차마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참혹하게 처형한 뒤 시신을 화염방사기로 태워 흔적도 없앤다고 합니다. 4신 고사총 처형도 여기에 해당하죠. 수천 명을 모아놓고 처형할 땐 아마 “지시를 거역한 것에 대한 교훈을 보여주라”고 하지 않을까요.물론 김정은의 지시로 처형되면 가족까지 연좌제로 모두 처벌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기록말살형은 어떤 인물들에 해당하는지, 이를 최종 비준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우리가 알 순 없지만 통일이 되면 많은 것들이 밝혀질 겁니다.그리고 북한이 지우려고 해도 다 지울 순 없는 것들도 꽤 많습니다. 한국에도 북한이 출판한 저서들이 꽤 들어와 있는데, 당 간부들이 한국까지 찾아와 지워버릴 순 없는 일이죠. 통일이 되면 숙청의 기록만 정리해도 수십 년을 바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북한 같은 참혹한 인권 유린의 시대를 후손들이 다시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 방대한 작업은 반드시 해야 할 것입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반동사상배격법’과 ‘청년교양보장법’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북한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규모 관광단지가 생겨났다. 북한은 1일부터 2만 명 숙박 규모의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를 개장한다고 밝혔다. 지난달 24일 관광지구를 아내, 딸과 함께 방문한 김정은은 활짝 웃고 있었다. 관광의 ‘관’자만 알아도 저렇게 웃고 있을까 싶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관광을 ‘다른 지방이나 다른 나라의 풍습 풍광 문물 등을 유람하는 산업’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원산 관광지구는 해안에 숙박 시설과 부대시설만 잔뜩 들어서 있을 뿐, 방문객이 지역 주민과는 접촉할 수 없는 가두리 양식장처럼 조성됐다. 북한이 이곳을 찾은 외국인들에게 자유로운 원산 시내 관광을 허락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곳에선 물놀이밖에 할 것이 없지만 감수해야 할 위험 부담은 매우 크다. 옷을 입어도 사회주의 양식에 맞는지 따져봐야 하고 애정 행위도 못 하며 사진을 찍을 때엔 이색적 장면인지 깊이 고민해 봐야 한다. 관광지의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음악도 체제 찬양 가요만 듣게 될 것이다. 반동사상배격법에 따르면 ‘사회주의 사상 문화와 우리 식의 생활양식에 배치되는 다른 나라 영화나 녹화물, 편집물, 도서, 노래, 그림, 사진 같은 것을 보았거나 들었거나 보관한 자 또는 유포한 자는 노동교화형, 정상(情狀)이 무거우면 5년 이하의 노동교화형에 처한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미국, 일본 같은 적대국 노래를 들으면 처벌 강도가 두 배 더 심해서 최소 5년, 정상이 무거우면 10년 형이다. 청년교양보장법에 적시돼 있는 처벌 조항은 너무 많아 꼽기도 버겁다. ‘성 불량 행위, 음탕한 행위, 도박 행위, 종교와 미신 행위, 이색적인 옷차림과 몸단장, 저속하고 몰상식한 행위, 이혼과 조혼, 이색적인 장면을 연출·촬영·편집하는 행위’ 등이 모두 처벌 대상이다. 외국인들에게는 그나마 좀 예외를 두겠지만 북한 사람들과 함께 이용하기 때문에 관광지 전체적인 분위기는 북한 규정에 따라야 할 것이다. 관광지를 운영하는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해서다. 하지만 원산 관광지구에서 어떻게 돈을 벌지 기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러시아나 중국에서 비행기와 열차, 배로 기껏 싣고 와야 하루 수천 명 규모에 지나지 않는다. 가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다는 가정하에 그렇다. 한국 대표 관광지 제주도는 지난해 1378만 명의 관광객이 찾았다. 하루 평균 3만7750명이 찾은 셈이다. 외국인은 290만 명으로 하루 평균 8000명이 되지 않는다. 성수기라고 특별히 많이 오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8월 제주 관광객은 936만 명으로 하루 평균 3만 명 정도인데 내국인이 83.7%, 외국인이 16.3%를 차지했다. 서울 면적 3배인 제주도 하루 외국인 관광객이 8000명도 되지 않는다는 점을 떠올리면 원산의 손바닥만 한 지역에 가두리처럼 만든 2만 명 수용 관광지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가늠이 될 것이다. 러시아 전상자(戰傷者) 요양 시설로 전용한다고 해도 가겠다는 러시아인 자원자가 없을 것이다. 이미 북한은 러시아군 부상병 수백 명을 원산에 받았는데, 이 부상병들의 경험담이 공유되고 있다. “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식사는 맛이 없고 고기가 부족했으며 저녁에 밖을 돌아다니거나 지역 주민과 접촉하는 것이 금지였다.” 결정적인 것은 술을 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술을 구할 수 없는 곳은 지옥이나 마찬가지다. 또 전상자들이 가득한 곳에 굳이 돈을 써서 관광을 갈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지었는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김정은은 앞으로 여러 지역에 서로 다른 유형의 유망한 대규모 관광문화지구를 건설하겠다고 공언했다. 지어 놓은 마식령스키장, 양덕온천문화휴양지, 삼지연 포태리관광지구가 파리만 날리고 있는데 또 만들겠다고 한다. 관광 상식으론 이해가 되지 않으니, 김정은과 그 가족을 위한 피난 시설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원산이나 삼지연 관광지들은 김정은이 특별히 좋아하는 별장 근처에 있다. 유사시 외국인 관광객들 속에 재빨리 숨어 폭격을 피할 수 있다. 그런 목적이라면 이런 관광지들은 김정은에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소중한 것일 수도 있다. 호텔 아래 깊이 숨겨진 벙커는 북한이 오래전부터 사랑해 온 조합이기도 하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김정일의 지시를 받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부모가 갑자기 증발했다. 중앙당 대외연락부 소속이던 차영철은 부모를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탈북을 선택했다. 20년째 찾고 찾았지만 부모 소식은 알 길이 없다.“인터뷰하면 아버지 어머니가 (기사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중국 국가안전국이 부모님을 납치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죄가 없으니 죽이진 않았을 겁니다. 숨어서 살려 했지만, 부모님 살아 계실 때 꼭 만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저를 공개하려 합니다.”부친 본명은 차세휘. 1946년생으로 2002년 3월 실종 당시 북한 보위사령부 7처 대좌(대령)였다. 해외에 파견된 가장 높은 계급 인물이었다.1992년 8월 한중 수교를 전후해 중국에선 한국 안전기획부와 북한 보위부가 치열한 첩보전을 벌였다. 부친은 1992년 12월 중국 심양에 ‘고구려구이집’라는 식당을 열었다. 해외에 문을 연 최초의 북한 식당이다. 모친이 식당 지배인이었다. 부친은 ‘차철’ 또는 ‘홍철’이란 위장명을 사용하며 밖으로 돌아다녔다. 그의 공작은 10년 뒤인 2002년 실종으로 막을 내렸다.● 김정일이 파견한 부친차영철은 1980년 1월 1일 평양시 평천구역 봉남동에서 태어났다. 6세 때 만수대동상이 걸어서 5분 거리인 모란봉구역 북새동으로 이사했다. 이곳엔 서울로 치면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와 맞먹는 명품 거리가 있다.차 씨가 태어났을 때 부친은 국가보위부 312호실에서 근무했다. 312호실은 김정일의 ‘3월 12일 방침’에 의해 만들어진 조직으로, 보위부 자금을 만드는 곳이었다. 차 씨가 어렸을 때 부친은 유럽과 남미로 계속 출장을 다녀 집에 거의 붙어 있지 않았다. 차 씨 부친이 보위부에서 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출신성분이 매우 좋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6·25전쟁 때 전사한 까닭에 ‘전사자 자녀’ 혜택을 받았다.1952년생인 모친은 평양영화연극대학을 졸업하고 김일성대 출판사를 다녔다. 외가도 출신성분이 매우 좋았다. 해외를 다니며 달러를 주무르는 부친을 만난 덕에 차 씨의 어린 시절은 매우 유복했다. 인민학교를 다닐 때엔 평양에 몇 없는 ‘콘트라 게임기’를 가지고 놀았고, 모두가 부럽게 바라보는 비싼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인민학교를 졸업한 뒤엔 명문 모란봉제1고등중학교에 입학했다. 3학년이던 13세 때인 1993년 부모와 함께 중국에 나왔다.부친이 중국에 집중적으로 출장을 다니기 시작한 것은 1991년부터였다. 중국이 한국과 수교할 움직임을 보이자 북한이 선제적으로 대응을 시작한 것이다. 부친은 심양시 민정국과 합작해 조선대양무역회사를 만들었고, 심양 북역 바로 뒤에 ‘고구려구이집’을 내고 활동 거점으로 삼았다.1993년 보위부 상좌(중령)였던 부친은 김정일이 사인한 파견장을 받고 ‘차철’이란 가명으로 중국에 눌러앉았다. 평양에 있던 가족도 심양으로 불러왔다. 중국에 나올 때 모친은 출판사를 그만두고 보위부에 입대했다.해외에 생긴 최초의 북한 식당이란 명성이 알려지면서 고구려구이집은 한국인들도 많이 찾았다. 영화배우 못지않은 미모의 지배인이 보위부 요원인 줄 그들은 알 길이 없었다. 종업원도 보위부 5과 출신 미녀였고, 요리사도 평양에서 으뜸가는 실력자를 데려왔다. 심양에서 살게 된 차 씨는 서탑조선족학교를 다녔다. 1년쯤 다녀 중국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 한족 학교인 132중학교로 옮겼다.● 자강도를 살린 식량 10만 톤차 씨는 설날 때 평양에 사는 할머니와 다른 친척을 만나기 위해 북한에 들어가는 것을 빼고는 늘 중국에서 살았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으로 많은 북한 사람들이 굶어 죽었지만 차 씨는 전혀 몰랐다. 평양에 들어갔을 때 함께 놀던 친구들 집은 다 부유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부친은 이때 죽을 고비를 넘겼다. 식당 경영을 모친에게 맡긴 부친은 태권도 5, 6단 사범 3명을 경호원으로 데리고 밖으로 나돌았다. 어느 날 부친이 북한에 들어갔을 때 당시 자강도 책임비서였던 연형묵이 찾아왔다. 부친의 진짜 신분은 북한에서도 비밀이었지만,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총리를 지낸 연형묵은 알고 있었다.연형묵은 부친을 차에 태우고 자강도로 향했다. 하루 종일 거리 곳곳에 쓰러진 죽음들, 누더기를 입고 몰려다니는 꽃제비들을 아무 말 없이 보여 주었다. 차에서 내릴 때 부친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우리나라가 이렇게 어려웠군요. 제가 돕겠습니다.”중국에 돌아온 부친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모두 동원해 식량을 마련해 북한으로 보냈다. 이렇게 보낸 식량이 3년 동안 10만t을 넘었다. 당시 중국 기업인들이 부친에게 상하이 같은 주요 도시에 몰래 땅을 사놓으면 부자가 될 수 있으니 투자하라고 많이 권했다. 하지만 부친은 가진 돈으로 식량을 모두 구입해 북한에 보냈다.어느새 자강도에서 차철이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다. 자강도 사람들을 살리겠다고 식량을 보내 준 사람 이름이 차철인지 홍철인지, 북한 국적인지 해외 재력가인지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이 소문이 김정일 귀에도 들어갔다. 김정일은 화가 났다. 북한의 모든 혜택은 김정일 이름으로 시행돼야 했다. 돈을 벌어 자신에게 바치라고 중국에 보냈더니 제 멋대로 자강도 사람들을 살리는 데 써버렸다.부모에게 소환 명령이 떨어졌다. 돌아가면 당 규율을 위반한 죄로 처벌이 불가피했다. 이때 연형묵이 나섰다. 그는 김정일을 만나 부친을 살려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자 김정일이 웃으며 “이번은 애국한 것으로 쳐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최홍희가 키운 남파간첩 사범들차 씨는 중국 학교에 다니면서도 중국어(국어) 수학 물리 등에서 늘 우등 성적을 받았다. 중국 선생들은 다른 학생들에게 “조선 학생이 너희들보다 낫다”고 말하곤 했다.1996~1997년에는 심양에 새로 생긴 ‘You too can speak English’라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영어학원도 다녔다. 학원 선생님은 미국인과 캐나다인들이었다. 차 씨는 그때 같은 반 한국 여학생을 울렸던 일이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여자애가 ‘너희 북한은 못살아. 생긴 것도 이상해’라고 하는 바람에 화가 나서 ‘이 남조선 괴뢰야. 너넨 국민들 죽이잖아. 그리고 내가 더 잘 사니, 네가 더 잘 사니. 거지는 바로 너야’라고 쏘아붙였어요. 여자애는 결국 울었습니다. 그걸 보니 ‘남자가 여자를 울리는 것은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수건을 건네주고 화해를 하긴 했는데,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미안합니다. 그 애도 이젠 40대 중반일 텐데 뭐 하고 사는지 궁금하네요.”심양엔 가끔 외삼촌 홍원희도 놀러 왔다. 홍원희는 북한의 유일한 태권도 7단 사범이었고 인민체육인이었다. 1980년대 조선태권도연맹 남자 태권도 사범팀 감독을 지냈고, 1980년대 말 평양에 광복거리가 건설된 뒤 아파트와 승용차까지 선물로 받을 정도로 김정일의 신임을 받았다. 외삼촌은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아내와 함께 파견 나간 페루에서 특공경찰 훈련 교관을 지냈다. 그는 중국을 거쳐 해외로 갈 때마다 심양의 누나를 찾아왔다.“외삼촌은 대남 공작원을 양성하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하고 남파 임무도 몇 번 수행한 사람이었습니다. 1981년 최홍희(전 국제태권도연맹 총재)가 북한에 들어와 44명으로 제1기 사범 요원 교육을 시작했을 때 김정일 지시로 대남 공작원 출신들이 교육생으로 파견돼 배웠습니다. 최홍희는 10년 이상 배워야 할 동작을 북한 교육생들이 7개월 만에 습득했다고 좋아했지만, 실은 이들 모두 최정예 요원들이었던 겁니다.”차 씨는 19세 때인 1999년 132중학교를 졸업했다. 부친은 그를 칭화대(清華大)에 보내려 했다. 하지만 6년 동안의 중국 생활이 지겨웠던 차 씨는 평양에 돌아가 친구들과 어울리며 살고 싶었다. 할 수 없이 부친은 그를 평양외국어대 중국어과로 보냈다. 나이가 많아 또래들이 다니는 2학년에 학생이 아닌 보위부 위탁생 신분으로 들어갔다. 위탁생은 졸업 후에 파견 기관으로 돌아가는 학생을 의미한다.● 평양을 주름잡은 ‘날라리’중국에서 한족 학교를 6년 다닌 그에게 평양외대 중국어과는 의미가 없었다. 부모의 통제도 없는 데다, 집에 달러도 가득하니 이때부터 본격적인 탈선이 시작됐다.아버지가 관리하는 차 중에 평양에 몇 대밖에 없는 닛산 세드릭을 몰고 고려호텔, 양각도호텔 같은 비싼 호텔에 가서 놀았다. 이 호텔들 노래방에서 중간 크기의 방을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70달러 정도에 빌렸다. 두 호텔을 비롯해 모란봉숙소, 정보센터, 보통강호텔, 평양호텔, 해방산호텔, 서산호텔, 창광호텔, 청년호텔 등 달러만 있으면 쓸 곳은 많았다. 매일 수백 달러씩 쓰면서 흥청망청 살았다.20세에 비싼 차를 몰고 다니는 차 씨를 모르는 평양 교통안전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 안전원이 차를 세우고 징글징글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건 10달러 정도 뇌물을 달라는 의미였다. 2학년 때 6개월씩 군에 가야 하는 교도생활을 돈으로 빠진 뒤 친구들과 묘향산에 자주 놀러 다녔다. 그에게 잘 보여 돈을 받으려는 영화배우들이 줄을 섰다.하마터면 김정은 집안사람이 될 뻔도 했다. 스위스에서 유학하고 들어온 김일성 가문의 여자친구가 생긴 것이다. 같은 외대 학생인 이 여성은 평양에서 유일하게 노랑머리를 하고 다녔다. 차 씨와 여자친구가 수업을 빼먹고 놀러 다녀도 이들을 통제할 사람이 없었다. 가끔 뭐라고 하는 교수가 있긴 했지만 달러를 찔러주면 입을 다물었다.놀이공원에 가면 차림새 때문에 누구도 이 두 사람을 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줄도 서지 않고 놀이기구 앞에서 “조총련 관광단인데 빨리 좀 탑시다”라고 하면 무사통과였다. 가끔 시비를 거는 단속원들에게 외삼촌이 만들어 준 영어가 잔뜩 쓰인 국제태권도연맹 2단 사범증을 내밀면 기가 죽었다. 영어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보니 해외에서 온 사범이라 생각한 것이다.그의 단골상점은 일본 상품만 전문으로 파는 보통강상점이었다. 그 상점에서는 피랍된 일본인 여성이 금목걸이와 금반지 매장에서 일했다. 승합차가 그녀를 상점에 태워다 주고 또 퇴근 때는 데려 갔다.그 일본인 여성은 단골인 차 씨를 볼 때마다 늘 뭔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2002년 9월 김정일은 일본인 13명을 납치한 것을 인정하고, 그중 5명을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보통강상점 그 여성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2005년 12월 차 씨가 중국으로 나올 때까지도 그 상점에서 일했다.● 갑자기 전해진 부모 실종 소식2002년 북한에서 최초로 10만 명이 참가하는 대집단체조 ‘아리랑’ 공연이 열렸다. 외대 학생들도 집단체조에 동원돼 아침부터 저녁까지 혹독하게 훈련했다. 차 씨는 늘 그랬듯 훈련에 참가하지 않고 놀러 다니느라 바빴다. 후방 물자를 조달하는 ‘후방조’라는 명목으로 달러를 내면 그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그해 4월 달러를 전달하기 위해 모처럼 훈련장에 나타났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반 친구들이 그에게 오더니 “별일 없냐”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네 아버지, 어머니가 남조선에 가서 기자회견 했다는 소문이 돌던데 아니겠지”라는 것이었다. 차 씨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평양외대는 고위 간부 자식들이 많이 다니고 있어 소문이 빨랐다. 차 씨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고 보니 부모가 북한에 오지 않은 지 꽤 됐다. 부모는 평양에 오면 집에 오지 않고 ‘장군님(김정일)의 배려’라며 묘향산, 정방산 특각, 문수초대소 등에서 1주일을 지내고 해외로 나갔다. 초대소에 갈 때는 신형 벤츠를 탔는데 그 뒤로 의료진과 경호원들이 탄 렉서스 승용차가 따라다녔다. 그만큼 부친은 김정일이 특별히 우대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평양에 올 때마다 아버지는 늘 겸손하게 살라고 훈계했지만 20세를 넘은 아들에겐 먹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을 자신처럼 해외에서 일하면서 가끔 북한에 출장 오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려 했다. 물론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2000년 부친은 보위부에서 군부 보위사령부 7처 소속 대좌로 부서를 옮겼다. 7처는 해외파견처로 보위사령부 안에서도 노른자위였다. 기존 국가보위부 312호실은 ‘심화조 사건’에 휘말려 실장과 정치부장 모두 처형됐다. 처형된 이들은 중국에 나올 때마다 아버지가 5성급 호텔을 잡아 주고 2만 달러씩 용돈을 주던 사람들이었다.심화조 사건은 1990년대 후반 김정일이 조작한 대규모 숙청 사건이다. 숙청된 전체 간부는 2만5000여 명으로 알려졌다. 국가보위부 숙청을 보위사령부가 담당했는데, 312호실 소속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부친을 포함해 몇 명 되지 않았다. 숙청 광풍에서도 살아남을 정도로 김정일의 확실한 신임을 받던 부친이 모친과 함께 남조선으로 갔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차 씨는 여기저기 알아봤다. “네 아버지는 그럴 사람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잘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버지 상관이자 중장인 7처장도 그에게 전화해 “아무 신경도 쓰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즉시 (나에게) 전화하라”고 했다.그래도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부모가 사라진 것은 분명해 보였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집에 있는 돈은 실컷 쓰고 죽자”는 오기가 생겼다. 그때부터 학교도 잘 나가지 않고 더욱 방탕하게 살았다.호텔에서 매일 수백, 수천 달러씩 뿌려 대자, 누군가 대학에 신고했다. 대학에선 그를 퇴학시키려 했다. 이때 7처장이 대학에 직접 찾아와 학장과 당 비서를 면담했다. 7처장은 차 씨를 불러 “아버지 어머니 소문은 허튼 소문이니 방랑하지 말라. 당만 믿고 학교 생활 잘하라”고 당부했다. 부모가 실종된 지 1년이 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차 씨 마음도 조금 진정됐다.● 신병훈련소에서 탈영하다2003년 10월 차 씨는 대학을 졸업했다. 공교롭게도 그해에 모든 대학 졸업생은 3년 동안 군 의무 복무하라는 김정일 지시가 하달됐다. 보위사령부에서 연락이 왔다. 일단 군에 입대해 신병훈련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평양 소재 대학 졸업생들은 차에 실려 평남 개천비행장에 있는 신병훈련소로 이동했다.차 씨도 이번만큼은 빠질 수가 없었다. 북한 최고 숙박시설에서 살던 차 씨에게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병실은 냄새가 너무 나서 들어갈 수 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잡곡밥에 시꺼먼 염장무국과 반찬이 나왔다.“이건 짐승이 먹는 것이지 사람이 먹는 것이 아니다.”이때부터 그는 단식에 들어갔다. 며칠 먹지 않으니 정치지도원이 찾아와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정치지도원이 차려준 두부와 된장찌개로 며칠 만에 숟가락을 뜰 수 있었다. 차 씨가 “죽어도 신병 생활을 못 하겠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자 정치지도원은 여단에 가서 자필 제대 탄원서를 써보라고 했다.다음날 차 씨는 훈련장을 이탈해 여단 사령부로 찾아가 제대 탄원서를 써서 냈다. 담당 군관이 그를 한심스럽게 쳐다보더니 조금 기다리라고 했다. 기다리다간 신병훈련소로 끌려갈 것 같다는 느낌에 무작정 큰길로 뛰쳐나와 아무 차나 잡으려 했다. 한참을 기다리니 평양 번호판을 단 승용차가 나타났다.차를 막아선 그는 달러를 줄 테니 평양까지 태워달라고 했다. 운전기사는 10달러를 불렀다. 돈이 없던 차 씨는 평양에 도착하면 30달러를 주겠다고 했다. 2시간 만에 평양으로 돌아왔다. 며칠 새 삐쩍 마른 모습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놀랐다. 집에서 저녁을 배 터지게 먹고 나니 잠이 왔다.새벽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가보니 보위사령부 7처 소속 대좌가 서 있었다. 탈영은 군법 적용 사건이다. 욕을 잔뜩 먹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대좌는 뜻밖에도 “영철아, 건강이 어때?”라고 살뜰하게 물어보더니 종이를 꺼냈다.깜짝 놀랐다. 어제 여단에 써 놓고 온 제대 탄원서였다. 보위사령부에 그가 탈영했다는 직보가 들어가자 7처장은 탄원서부터 회수해 증거를 없앤 것이다. 대좌는 “3개월 동안은 신병훈련 기간이니 집에 조용히 박혀 있으라”고 신신당부하고 떠났다.물론 차 씨는 이 당부를 지키지 않았다. 그 3개월 동안 태권도 사범 형들과 실컷 놀러 다녔다. 가끔 7처에서 전화가 와 “조용히 있으라고 했는데 어제 거길 왜 갔냐”는 추궁을 받긴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며칠 지나면 또 놀러 나갔다.3개월이 지나자 전화가 왔다. 신병 때 입은 군복차림으로 보위사령부 정문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전날까지 호텔에서 먹은 술이 깨지도 않은 채 사령부로 가니 견장에 두 줄이 박힌 새 군복을 주었다. 신병훈련을 마친 것으로 서류가 정리된 것이다. 7처장이 말했다. “3년 복무는 장군님 방침이니 빠질 수는 없다. 그러니 이제 보내 주는 곳에서 성실하게 근무하라.”그를 태운 차가 도착한 곳은 평양시 역포구역 보위사령부 당 강습소 경비부대였다. 부대원들 부모는 내로라하는 간부들이었다. 한마디로 ‘금수저’들이 편하게 근무하며 경력을 만드는 부대였다. 밥도 이밥이 나왔고 돼지고기와 오리고기도 정기적으로 나왔다. 차 씨는 그때 비로소 잘 먹는 부대가 있고, 못 먹는 부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중앙당 대외연락부에 선발되다 경비부대에서 10개월도 채 보내지 않았을 때 김정일의 새 지시가 하달됐다. 군에 보낸 대학 졸업생 중 외대와 김일성대 외국어문학부, 음악무용대학 기악부 졸업생은 제대시키라는 것이었다. 군 3년 동안 외국어나 악기 다루는 법을 잊어 버리니 예외를 적용하라는 뜻이었다. 차 씨의 군 생활은 신병까지 포함해 1년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군 복무 경력까지 얻게 됐으니 운이 매우 좋았다.2004년 10월 외대 운동장에 차 씨처럼 군에서 돌아온 졸업생들이 모였다. 몇몇 간부들이 단상에 올라 “장군님의 배려”를 운운하더니 한 명씩 불러 간부 선발 면접을 보게 했다. 며칠이 지나자 전화가 왔다.“차영철 동무는 조선노동당 대외연락부에 선발됐습니다.”대외연락부는 남한 지하당 구축을 전담하고 조총련 사업도 지도하는 부서다. 어디 가서 증명서를 꺼내 보이면 아무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끗발이 세다. 누구나 가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다. 간부 면접을 본 외대 졸업생 1000명 중에 대외연락부에 선발된 사람은 차 씨 포함 단 2명이었다.차 씨를 데리려 차가 왔다. 그가 소속된 부서는 대외연락부 116연락소였다. 116연락소는 김정일의 ‘1월 16일 방침’으로 만든 부서로 항일 빨치산 출신 이을설 원수의 사위가 소장으로 있었다.차 씨의 첫 임무는 광복거리에 있는 청년호텔에 가서 중국에서 온 기술자들을 관리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북한과 중국이 각각 2500만 달러를 투자해 평양사탕가루공장을 짓고 있었는데, 설비와 기술자들은 모두 중국에서 왔다.차 씨는 이 기술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주로 통역을 했다. 발령 받은 첫 직업이 호텔에서 생활하며 외국인들과 고급 식사를 하는 일인 셈이었다. 생활총화도 없었다. 차 씨와 함께 대외연락부에 온 친구는 “너는 생활총화를 하지 않아 너무 좋겠다”며 부러워했다.차 씨는 사회에 나오자마자 부모 행방을 수소문했다. 부모가 실종됐음에도 자신이 잡혀 가지 않고 오히려 중앙당에 발령받은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아버지와 연관된 사람에게서 큰 비밀을 알게 됐다.“너희 아버지는 몇몇 군부 간부들이 외국에 몰래 무기를 팔아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 그래서 김정일에게 이를 고발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보위사령부가 가로챘지. 보위사령관도 이에 연루가 됐는데, 아버지를 어찌 할 수가 없어 전전긍긍하던 참에 실종이 벌어진 거야.”이 말을 듣고 차 씨는 보위사령부가 왜 자신을 지금까지 보호했는지, 대학 졸업 후 당연히 갈 것이라고 생각하던 보위사령부가 아니라 중앙당으로 옮겨 오게 됐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됐다. 뒷배라고 생각했던 보위사령부는 더 이상 믿을 곳이 아니었다. 결심이 굳어졌다.“이 나라를 빨리 떠야겠다. 심양에 가서 부모를 찾고 진실도 알아야겠다.”● 중국에서 탈북을 선택하다차 씨는 해외로 파견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자신이 중국 유력 재벌들을 많이 알고 있다는 소문도 열심히 돌렸다. 실제로 심양에서 6년 동안 살면서 아버지와 거래하는 많은 기업인을 알게 됐다. 그중엔 북한과 거래하는 중국 기업인 중 최고 부자로 알려진 조교(북한 국적 재중 조선족)도 있었다.소문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어느 날 나이 많은 남성이 그를 찾아왔다. 국가과학원 소속 모 사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중국에 식당을 차리려 하는데, 여기에 투자해 줄 수 있는 인맥을 어느 정도 알고 있냐고 물었다. 차 씨가 인맥 정보를 말하자 그는 “소속을 국가과학원으로 옮겨 줄 테니 나와 함께 중국에 한 달 동안 출장을 다녀오자”고 제안했다. 차 씨는 쾌재를 불렀다.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소속이 가 본 적도 없는 국가과학원으로 변경됐고 중국 출장단에 이름이 올랐다. 보위부에서 차 씨 아파트를 찾아 ‘요해사업’을 벌였다. 해외 파견되는 사람들의 주변을 조사하는 필수 과정이었다. 다행히 차 씨 아파트 사람들은 그에 대해 모두 좋게 이야기해 주었다.2005년 12월 5일 차 씨는 한 달짜리 중국 출장을 허락받고 그 사장과 함께 신의주에 갔다. 여권에 적혀 있는 차 씨 생일도 1977년생으로 고쳐져 있었다. 신의주에서 중국으로 넘어가기 전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두 사람에게 임무를 주었다.첫 번째 임무는 투자자를 물색해 심양에 식당을 차리는 것이었고, 두 번째 임무는 탈북자들이 거쳐 간다는 연길의 모 한국인 교회 목사 연락처와 탈북 루트를 파악하라는 것이었다. 또 매주 한 번씩 신의주로 나와 경과를 보고해야 한다는 단서도 달았다. 이미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던 차 씨에겐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둘은 차를 타고 단동으로 넘어가 다른 차로 갈아타고 심양에 도착했다. 첫날은 호텔에서 묵고, 이튿날 부모가 운영했던 식당을 찾아갔다. ‘고구려구이집’ 간판은 사라지고 한족 식당으로 바뀌어 있었다.“저에겐 참 추억이 많은 식당이고 부모님의 흔적이기도 해요. 1990년대 심양에 갔던 한국 사람들이 많을 텐데, 그때 찍은 식당 사진이 있다면 꼭 찾고 싶어요.”그 다음날 차 씨는 홀로 택시를 타고 심양 기차역으로 갔다. 청도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오래 계획했던 일이 마침내 마무리된 것이다.“함께 중국으로 나왔던 사장에겐 미안하죠. 그런데 그 사장의 정체를 모르겠어요. 사장은 국가보위부 업무를 협조해 주는 대가로 보위부 요원에게만 주는 국경통행증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만 석연치 않은 게 많았죠. 국가과학원이 감히 중앙당 대외연락부 사람을 빼내 자기들 소속으로 바꿀 수 없거든요. 또 탈북 루트를 파악하는 임무도 그렇고. 어쩌면 보위부나 보위사령부에서 저를 미끼로 내걸고 사라진 부모님 행방을 찾으려 했던 것일 수도 있고요.”● 중국인으로 살다차 씨는 어렵지 않게 청도의 중국인 지인을 찾아 숨어들었다. 중국인 친구들에게 차 씨는 ‘북한 재벌의 아들’쯤으로 인식돼 있었다. 그는 지인들을 총동원해 부모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 결과 아버지와 함께 일했고 실종 직전까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을 찾아냈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사장님 부부를 체포한 것은 중국 국가안전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후 행방을 알 수가 없습니다.”차 씨는 이 외에도 여러 정보를 얻었다. 중국이 “차철은 마약사범이니 우리가 처리하겠다”고 북한에 통보한 것도 알아냈다.“맹세컨대 부모님은 마약에 절대 손대지 않았어요. 중국에서 마약사범은 공안이 다루지 안전부가 다루지 않습니다. 마약이라면 부모님과 함께 일한 사람들도 잡혀 가야 하는데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북한에 부모님을 송환하지 않을 유일한 구실이 마약사범이니 그렇게 밝힌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하지만 부친 소식은 더 이상 알 수가 없었다. 탈북한 신분으로 추적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차 씨는 중국에서 탈북자로 살 수밖에 없었다. 3년 뒤인 2008년 중국에서 진짜 신분증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북송 위험은 사라졌다. 중국어도 유창하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그를 한족으로 알았다.중국에서 체류하려면 돈도 벌어야 하니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일을 했다. 그러는 과정에 7세 아래 한족 아내도 만났다.“2010년에 어느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눈이 마주쳤어요. 거의 동시에 끌렸다고 할까. 밥을 같이 먹으면서 사귀자고 했지요.”당시 중국엔 한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아내는 그를 한국말을 잘 하는 한족 남성으로 알았다. 사귀고 열흘쯤 지나 차 씨는 그에게 고백하며 자신의 정체도 이야기했다. 그녀는 “과거는 상관없고 이제부터 우리 둘만 좋으면 된다”고 대답했다.둘은 세계 최대 규모 도매시장이 있어 ‘세계의 슈퍼마켓’이라 불리는 저장성 이우(义乌)시로 옮겨 가 가방가게를 차렸다. 장사는 잘됐다. 집도 사고 차도 사고 부부가 각각의 가게도 운영했다. 잘 나갈 때는 직원 8, 9명을 두기도 했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터져 중국이 봉쇄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장사를 접고 집에 있는 날이 길어졌다. 집에 있다 보니 갑자기 드는 생각이 있었다.“너는 왜 탈북했지? 초심을 잃었다. 부모를 찾겠다고 와서는 중국에서 돈이나 버는 것이 맞는 일인가.”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차 씨는 아내에게 말했다.“너를 만나 너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 그렇지만 이렇게 혼자만 잘 살 순 없어. 부모님을 찾아야 하지만 중국인 신분으로는 어려워. 한국에 가서 한국 국적을 따면 당당히 목소리를 내면서 부모님도 찾을 수 있을 거 같아.” 아내는 그의 결심을 적극 응원해 주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2023년 4월 5일 차 씨는 제주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중국 여권이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관광객으로 얼마든지 올 수 있었다. 밤늦게 제주공항에 내렸다. 예약해 둔 호텔에 짐만 내려놓고 인근에 있는 동부경찰서를 찾아갔다.“저 평양에서 온 사람인데 자수하러 왔습니다.”“왜 공항에서 자수하지 않고 하필 여기에 왔나요?”“공항에서 자수한다고 하면 소란이 벌어질 수도 있고 같이 왔던 중국인들이 사진을 찍으면 일이 커질까 봐 그랬습니다.”“달아날 분 같진 않으니 일단 호텔로 가서 자고 있어요. 내일 아침에 갈게요.”아침 일찍 경찰관이 찾아왔다. 공항에 가니 그를 조사하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10명도 넘게 모여 있었다. 기본적인 것들을 이야기하고 서울로 올라왔다.차 씨는 한국 정보기관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노동당 대외연락부 소속으로 중국에 파견돼 활동하는 요원으로 파악돼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부모님 신원과 하는 일, 사라진 경위까지도 다 꿰고 있었다. 새삼 한국 정보기관의 정보력에 놀랐다.초봄에 한국에 왔는데 조사를 마치고 하나원을 거쳐 사회에 나오니 어느새 가을이었다. 차 씨는 서울 마포구 임대주택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까지 살던 곳 중 가장 낡고 작은 방이지만 그럼에도 서울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중국에서 아내를 데려오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6개월 동안 온갖 마음고생 끝에 마침내 아내를 국제결혼 형식으로 한국에 데려올 수 있었다.인터넷으로 열심히 일자리를 찾아 지난해 2월 인천의 작은 무역회사에 취직했다. 중국에서 살 때는 한국 업체들과 상대했는데, 이번엔 한국에서 중국 업체들과 거래하는 일이었다. 나름 열심히 일했지만 올 5월 회사를 그만두었다. 사장이 처음에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아 신뢰가 깨진 것이다. 이제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북한에서 운이 좋게 금수저로 태어나 초년엔 잘 살았는데, 중년엔 작은 중소기업에 취직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지금 저의 가장 큰 목표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찾은 겁니다. 이제 아버님은 79세가 됐고 어머니도 73세입니다. 중국 어딘가에 있을 부모님을 찾을 수만 있다면 참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그가 부모님이 살아있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중국 당국이 북한 고위급 인물은 신분 세탁을 해 숨겨 주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다. 탈북한 사람 중에서도 대좌 이상급 인물은 북송하지 않고 북한 유사시를 대비해 관리한다는 것.“제 부친은 비록 김정일 지시로 중국에서 활동했지만, 그럼에도 굶어 죽어가는 인민을 외면할 수 없어 식량 10만 t을 사 보내 처벌까지 받을 뻔했습니다. 상해에 땅을 몰래 사 놓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유혹에도 자기 몫은 챙기지 않았습니다. 해외에 파견된 최고위급이었으니 한국에 온다면 나라에 기여할 정보도 많을 텐데, 찾을 길이 없습니다.”이제 차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모님이 우연히 이 기사를 보고 연락해 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자신을 공개하는 일밖에 없다. ‘부모 찾아 3만 리’, 20년 넘게 헤매 온 그의 소원은 이뤄질 수 있을까.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미국이 21일 이란의 포르도 지하 핵시설에 12발의 GBU‑57 벙커버스터 폭탄을 투하하자, 많은 언론이 북한을 떠올렸습니다. 김정은도 공포에 떨 수밖에 없다는 것이 대다수 언론의 분석입니다. 물론 북한은 핵무기를 이미 갖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이란처럼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도 빠질 수 없이 곁들였습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북한은 2022년 9월 ‘핵무력정책법’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은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 북한에 대한 핵무기 또는 대량살육무기 공격이 감행되었거나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 둘째, 국가지도부 등에 대한 적대세력의 핵 및 비핵공격이 감행되었거나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 셋째, 국가의 중요 전략적 대상들에 대한 치명적인 군사 공격이 감행되었거나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 넷째, 유사시 전쟁의 확대와 장기화를 막고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작전상 필요가 불가피하게 제기되는 경우. 다섯째, 기타 국가의 존립과 인민의 생명 안전에 파국적인 위기를 초래하는 사태가 발생해 핵무기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 조성되는 경우입니다.북한의 핵사용 교리는 ‘가장 공세적이고 급진적인 핵 독트린’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임박했다고 판단되거나, 전략 대상에 대한 공격이 진행되거나, 기타 불가피한 상황 등이 언급돼 있지만, 한마디로 자의적으로 판단해 쓸 수 있다는 뜻입니다. 김정은 참수 작전은 당연하게 핵 보복 대상이 됩니다. 다른 핵보유국들도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비슷한 핵 교리를 갖고 있습니다. 미국, 러시아, 중국 등 모든 나라들이 지도부가 무력화되면 핵을 사용한다는 ‘핵 독트린’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벙커버스터로 김정은을 제거하거나, 북한의 핵시설을 공격한다는 것은 핵 보복을 감내해야 하는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물론 북한도 핵무기를 사용하면 체제 궤멸까지 각오할 정도의 보복을 받아 무사하진 못하기 때문에 함부로 핵을 사용할 순 없을 겁니다. 그런데 핵 교리와는 별개로 “미국의 스텔스 폭격기가 벙커버스터를 싣고 북한을 공격하는 동시에, GBU-57보다 관통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한국의 현무-5 미사일 수백 기가 동시에 타격하면 북한의 핵 보복 능력을 선제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는 북한의 핵무기 저장 시설의 위치를 모두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 할 수 있는 상상입니다.그렇지만, 그런 가정에도 결론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북한의 지하 시설이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기 때문입니다. 이 기사에선 벙커버스터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북한에는 효율적으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살펴보기 위해 북한의 지하 시설에 대해 설명해보려 합니다.● 북한의 지하 세계이란은 벙커버스터로 타격할 수 있는 대상이 매우 명확했습니다. 포르도와 나탄즈, 이스파한 3곳만 타격해 붕괴시키면 이란의 핵능력을 불능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다릅니다. 북한의 지하 세계는 외부에서 알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합니다.전 세계를 돌아보십시오. 면적에 비해 또는 인구에 비해 가장 많은 지하 시설을 갖고 있는 나라가 어디일까요. 아마 1등은 한국이고, 2등은 북한일 겁니다. 지하 세계의 끝판왕이 한반도라는 뜻입니다.한국은 좁은 영토와 산악지형이라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땅을 팠습니다. 전국 지하철 총길이만 따져도 서울과 부산을 왕복으로 두 번 오갈 수 있는 길이에 해당하는 1450㎞인데, 상당히 많은 구간이 지하에 묻혀 있습니다. 전국의 건물에는 깊은 지하 주차장이 있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도 주차장이 지하 7층까지 있습니다. 지하 주차장의 면적을 모두 합치면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산지가 발달한 지형 때문에 전국의 터널은 모두 3000개가 넘습니다. 이 정도면 지구 공군이 모두 날아와 폭격하고, 지구상의 모든 미사일이 한국을 타격한다고 해도, 대다수 한국인은 터널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한국은 터널 파는 기술도 세계 정상급이라 자고 나면 계속 어디선가 땅을 파고 있습니다.북한은 우리와 좀 다릅니다. 북한의 건물들엔 지하 주차장이 없고, 지하철도 평양에 총연장 길이 34㎞에, 역은 17개에 불과합니다. 도로와 철도를 잇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터널을 만들었지만, 뚫는 기술은 인력에 주로 의존하다보니 그리 높은 편은 아닙니다.그러나 북한의 특징은 폭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터널들을 팠다는 것입니다. 즉 지하 시설 대부분이 군사용으로 건설했다는 것이죠. 이는 북한이 겪었던 전쟁의 경험 때문이기도 합니다. 6·25전쟁이 끝난 뒤 평양의 2층 이상 건물 중 무너지지 않은 것은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40만 명이 살던 평양에 43만 발의 폭탄이 투하됐습니다.평양뿐만 아니라 북한의 모든 도시는 초토화가 됐습니다. 한국전쟁 시기 미군은 북한 지역에 무려 63만5000톤의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이는 태평양 전쟁 시기 연합군이 태평양 전역에 투하했던 폭탄 60만 톤보다 많았고, 일본 제국 본토에 투하된 16만 톤의 무려 4배에 이르며,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유럽 전역 전체에 투하되었던 폭탄 160만 톤의 40%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폭격에 가족을 잃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는 북한엔 ‘폭격 노이로제’가 휩쓸었습니다. 그래서 전쟁 시기는 물론, 전쟁이 끝나도 파고 또 팠습니다. 깊이 더 깊이 팠습니다. 평양 지하철은 지하 100~150m 깊이에 건설됐습니다. 그러고도 한국보다 먼저 지하철을 개통했습니다. 물론 훗날에 GBU-57이나 현무-5 미사일이 나올 줄 알았으면 안심하지 못하고 더 깊이 내려갔을 겁니다.평양뿐만 아니라 각 도시와 군들마다 지하철은 없어도 방공호들은 든든하게 지어졌습니다. 벙커버스터에 당한 이란이나, 팔레스타인과는 달리 북한은 원래 산악 지형이다 보니 높은 산을 파고들어 가면 됐습니다. 결과 1970년대 후반쯤 북한은 전쟁이 나면 모든 도시가 굴속에 들어갈 수 있게 완성됐습니다. 그냥 대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벌어지면 터널 안에 들어가 일상생활도 가능하게 지었습니다. 터널 안에 들어가면 무수한 줄기가 있고, 각 기관과 직장, 학교, 유치원 공간들이 있습니다.군수공장은 애초에 폭격을 당할 것을 감안해 지하에 지었는데, 주로 산지가 가장 험준한 자강도와 평안북도에 몰려있습니다. 이 많은 터널을 무슨 수로 붕괴시킬 수 있을까요. 미군이 보유한 벙커버스터 수량은 이란 폭격 전에 약 20개로 추산됐습니다. 이중 이란에 14발을 썼으니 몇 개 남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필요하면 얼마든지 또 만들겠지만, GBU-57의 가격은 400만 달러(약 55억 원)로 추정되니 무한정 만들기엔 너무 비쌉니다. 한국의 현무-5 미사일도 1기당 100억 원 이상으로 추정되며, 연간 70여 발까지 만들 순 있지만, 가격이 비싸 한국군은 200기 정도를 보유할 계획이라고 합니다.그렇다고 해도 정말 중요한 곳들만 타격하면 효과가 있을 순 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중요한 곳은 북한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 씨 일가 전용 터널들북한의 지하 세계 중에 가장 견고한 곳은 김씨 일가의 안전을 위한 곳입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평양에는 유사시 수뇌부가 대피할 수 있는 300m 깊이의 땅굴이 부지기수로 존재한다”며 “1953~72년 사이에 착공된 지하철과는 다른 제2의 지하 세계”라고 말했습니다.땅에 숨은 북한 지도부를 제거하려면 평양 시민들이 대피한 150m 깊이의 지하철을 붕괴시키고도, 다시 150m를 더 관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는 북한 수뇌부가 땅에 들어가 한 곳에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김씨 일가를 위한 터널의 총연장 길이는 지하철보다 훨씬 더 깁니다.평양에서 26년 동안 터널만 건설했던 공병국 소좌(소령) 출신 탈북민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평양엔 김일성광장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평양 중심부의 광장이고, 다른 하나는 지하 약 200m에 있는 ‘비밀의 광장’입니다. 평양 주석궁(현 금수산태양궁전)에서 왼쪽 룡남산으로 터널로 이동하면 넓은 지하 공간이 나옵니다. 이곳의 정식 명칭은 ‘김일성광장’인데, 룡남산과 김일성대 옛 운동장 아래에 위치해 폭격에 안전합니다. 이곳을 폭격하면 교정을 폭격해 대학생들을 죽였다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하 김일성광장은 가로, 세로가 100m 이상이고 높이는 12m인데 전쟁 중이라도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소집할 수 있도록 건설됐습니다. 제가 입대한 1969년엔 이미 거의 완공돼 마무리 공사를 벌일 때였는데, 이곳에 가본 사람은 한국에선 저밖에 없을 겁니다.”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양 지하철의 유일한 환승역인 전우역에 가면 에스컬레이터로 150m 정도 지하로 내려갑니다. 수직으로 보면 지하 100m 깊이에 지하철이 있는 셈이죠. 내려가서 다시 숨겨진 비밀 입구로 가면 거기서 다시 에스컬레이터로 150m 더 내려가 김일성 전용 땅굴이 나옵니다. 땅굴 너비는 당시 김일성이 타던 포드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폭이었습니다.”김정일 측근에서 2년 동안 있었던 또 다른 탈북민은 이런 증언을 했습니다.“천천히 달리긴 했지만 차를 타고 지하로만 40분 정도 가는 별장도 있습니다. 지하차도는 1차선이고 너무 좁지도 않고 넓지도 않고 적당해요. 거긴 지하에 각종 오락실, 수영장, 침실, 식당 등이 정말 화려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인민대학습당이나 광복백화점 이런 민간 빌딩 아래 김정일의 아지트들이 있습니다. 방음 장치도 철저해서 민간인은 그 아래 그런 곳이 있을 줄 절대 상상도 못 하죠. 그렇지만 아지트에는 그 빌딩과 연결된 탈출구가 있어요. 민간 빌딩을 위에 이고 지하에 숨어버리면 폭격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도처에 그런 비밀장소가 있고 지하로 연결돼 있어서 어디에 있는지 찾기도 힘들 겁니다. 지하차도를 전담해 지키는 부대가 있는데, 그곳 군인들은 특혜를 받습니다. 제대해도 외부에 내보내지 않아 비밀을 지킵니다.”이러한 증언을 종합하면 김씨 일가가 외부와의 통신을 차단하고 지하에 들어가면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일단 김씨 일가의 터널을 공격하려면 비난을 감수하고 대학이나 병원을 무너뜨리고 다시 지하 수백m를 더 관통해야 합니다. 인민대학습당이나 유경호텔 아래 같은 곳은 매우 안전한 거처일 겁니다. 팔레스타인 하마스 지도부가 병원이나 학교 등의 지하에 지하 벙커를 만든 것을 보면 북한에서 배운 것 같기도 합니다. 북한은 지도자를 위해서라면 인민은 언제든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가르치는 곳이니 당연한 일입니다.그리고 무수한 지하터널이 또다시 얼기설기 연결돼 있기 때문에 한 곳을 폭격해도 즉각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두더지조차 살기 위해 굴을 얼기설기 복잡하게 만드는데, 가장 머리 좋은 수재들을 김씨 일가 경호에 우선적으로 발탁하는 북한은 얼마나 더 모든 경우의 수를 예상해 만들었겠습니까.지하 시설을 건설한 경험은 비단 김씨 일가를 위해서만 쓰이진 않았을 겁니다. 북한의 핵 시설이나 군수공장도 북한이 축적한 모든 경험과 노하우를 모아 만들었을 겁니다. 물론 이런 것을 만들 때는 벙커버스터나 현무-5까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먹고 때리면 몇 개는 파괴할 수 있을 겁니다.이렇게 북한의 지하 시설 건설 능력에 대해 증언에 기초해 서술하긴 했지만, 분명히 과장도 섞여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북한 처지에선 “우리의 지하 세계는 너무 깊어 타격해도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북한은 원래 있어도 없는 듯이 하는 것보단, 없는 것도 있다고 허풍을 떠는데 선수들입니다.북한이 오랫동안 경제난에 시달리다 보니 과거 만든 지하 세계 중에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될지도 의문입니다. 지하 터널을 유지하려면 지하수를 계속 퍼내야 하고, 이는 곧 전기가 많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전기가 없어 북한의 주요 탄광, 광산들도 침수를 막지 못하고 있는데, 사람이 살지 않는 터널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물론 김씨 일가를 위한 지하 시설은 전기가 우선적으로 공급되니 예외이겠지만 말입니다.평양 지하철도 1987년에 마지막 역을 만든 뒤 38년 동안 노선이 더 연장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제난 때문에 땅 밑을 팔 능력이 없어진 것입니다. 요즘 건설되는 터널들을 보면 사람들이 들어가 해머와 정으로 암반을 뚫어 발파를 진행합니다. 100년 전에나 쓰던 원시적 방법이죠. 그러니 북한이 붕괴한 뒤 지하 세계가 공개되면 한심해서 눈이 감길 것으로 생각합니다.일각에선 북한이 터널을 뚫는데 선수들이라 남침용 땅굴을 서울과 평택, 심지어 부산까지 연결했다는 주장도 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터널을 뚫는데 유능하다고 해도, 소리 없이 삽질만으로 서울까지 파들어 오고, 파낸 흙을 흔적 없이 처리하고, 대규모 양수기를 돌려 물을 계속 빼내며 관리하는 것은 북한도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북한이 1970년대 초반까지 파 내려오던 땅굴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비무장지대도 넘기 전에 다 발각됐습니다. 제일 긴 땅굴이 북한 쪽 길이까지 포함해 3.5㎞밖에 되지 않습니다. 한국 쪽으로 가장 많이 내려온 것이 1.2㎞였습니다. 물론 1990년에 4땅굴이 발견됐지만, 이것 역시 조사 결과 1970년대 뚫다가 중단한 것이었습니다.지금까지 쓴 긴 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한반도는 터널의 왕국이다. 북한엔 전쟁에 대비한 무수한 터널들이 있다. 벙커버스터가 아무리 많아도 무력화시키긴 어렵다. 김씨 일가가 유사시 땅굴에 들어가면 제거하기 어렵다. 다만 경제난 때문에 북한의 땅굴 능력은 198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고, 이미 건설된 것도 유지가 어렵다.” 그렇다면, 벙커버스터에 얻어맞은 이란을 보며 김정은은 공포를 느낄까요, 아니면 코웃음을 칠까요. 여러분들이 판단해 보십시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지난달 21일 함북 청진조선소에서 5000톤급 구축함이 사고로 넘어지자, 북한은 이를 하루 만에 공개했습니다. 이례적이고 신속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실은 이를 통해 김정은의 깊은 고민을 엿볼 수 있습니다.김정은이 이런 대형 사고를 외부에 공개하고 싶었겠습니까. 과거 같으면 ‘은둔의 왕국’답게 철저히 은폐하는 데 급급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기 어렵습니다.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청진조선소를 내려다보는 위성의 눈 때문입니다. 북한이 청진에서 신형 구축함을 곧 진수할 것이라는 사실은 사고 이전에 공개됐습니다.옆으로 드러누운 구축함 사진도 사고 직후 전 세계에 공개됐을 겁니다. 즉 김정은이 이를 숨기려 했다면 더 큰 망신을 샀겠죠. 사고 발생 직후 북한이 쓰러진 구축함에 파란 방수포부터 덮은 것 역시 위성을 의식한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김정은은 사고가 발생하자 “우리 국가의 존위와 자존심을 한순간에 추락시킨 것”이라며 펄펄 뛰었습니다. 존위는 북한에서 존엄과 위상을 의미하는 뜻으로 쓰입니다. 쓰러진 구축함을 보면서 김정은의 머릿속엔 “내일 이것이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떠올랐을 겁니다. “이왕 알려질 바엔 미리 선제적으로 공개하고, 이를 계기로 내부 기강을 잡아야겠다”라고 판단했을 겁니다.두 번째 이유는 진수식에 참가했을 수천 명의 눈 때문입니다. 북한은 제대로 된 언론이 없다 보니 과거부터 소문이 언론의 자리를 대체했습니다. 북한 내부의 소문 전파 속도는 매우 빠릅니다. 휴대전화까지 광범위하게 도입된 오늘날엔 구축함 사고 소식은 막기 어렵습니다. 소문이란 것은 퍼지다 보면 대개 더 나쁘게 변질됩니다. 구축함이 침몰했다고 와전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한 달 안에 수리가 가능한 사고라고 전달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겁니다.북한에선 망신스러운 소식을 노동신문에 실으라고 지시할 사람은 김정은밖에 없습니다. 어린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축함이 넘어지는 것을 본 김정은은 처음엔 노발대발 욕설을 퍼부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좀 진정되면서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라는 생각에 이르렀을 것이고, 또 “내일 사고 소식과 내가 분노했다는 사실을 전국에 공개하라”라는 지시를 내렸을 겁니다. 그런 지시가 없었는데 어떤 간부가 노동신문에 자의적으로 이를 공개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죠.구축함 사고를 통해 우리는 김정은이 위성을 매우 의식한다는 점, 그리고 위성에 대한 공포가 앞으로도 김정은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임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위성이 없던 김정일 시대엔 모든 사고는 무조건 은폐가 원칙이었지만, 김정은 시대엔 숨길 수 없는 사고는 선제적으로 공개하는 것으로 원칙이 새로 정해진 듯합니다.공개의 원칙은 위성에 잡히느냐 안 잡히느냐로 판단하겠죠. 북한을 지켜보는 위성은 일정한 주기로 사진을 찍습니다. 한국의 정찰위성은 2시간마다 북한을 촬영하지만, 이 사진은 민간에 공개되지 않습니다.공개가 되는 상업 위성사진은 촬영 시간 간격이 더 큽니다만, 이번처럼 하루 만에 수습할 수없는 구축함 사진이나 아파트 붕괴 등 대형 사고 현장은 얼마든지 찍을 수 있습니다. 다만 북한은 위성이 찍을 수 없는 광산 침수나 미사일 발사 실패 등은 계속 은폐의 영역에 들어갈 겁니다.그러니 앞으로 북한이 공개하는 불미스러운 사고를 접할 때 위성에 들킬 수밖에 없는 것인가, 혹은 아닌가를 우선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북한 역시 진화하는 위성의 촬영 능력을 자세히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현재 전 세계에 있는 상업 위성사진 판매 회사는 10개가 넘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을 찍은 위성사진이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은 미국 콜로라도주 웨스트민스터에 본사를 둔 미국의 우주 기술기업 맥사(Maxar)입니다. 구글어스가 맥사의 대표적 고객이죠. 맥사가 운용하는 위성은 90개 이상으로 알려져 있고, 촬영한 사진을 민간에 판매합니다. 한국이 최근 쏘아 올린 정찰위성의 해상도는 지상의 30cm 물체까지 식별할 수 있는 0.3m급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맥사가 운영하는 위성은 0.3m급은 물론 0.15m급의 사진도 찍습니다. 즉 한국의 최신 정찰위성에 비해 성능이 비슷하거나 더 나은 수준이라는 뜻입니다.우리는 비밀이라며 정찰위성에서 찍은 사진을 공개하지 않는데, 맥사의 위성사진을 보면 굳이 비밀주의를 엄격하게 지켜야 하냐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 정찰위성 발사에 막대한 예산을 썼는데, 민감하지 않은 사진은 판매해서 일부 예산은 회수하는 것이죠. 어차피 맥사가 찍은 사진이나 한국 정찰위성이 찍은 사진이나 가끔은 포커스가 다르다는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요.맥사의 위성사진은 0.3m급 해상도의 사진일 경우 1㎢당 200~500달러라고 합니다. 고해상도는 더 비싸지만, 저해상도 사진은 무료일 때도 있습니다. 서울 면적(605㎢)의 0.3m급 사진을 매일 얻어서 비교하려면 저렴하게 산다고 해도 매일 12만 달러(약 1억6500만 원)가 듭니다. 서울보다 면적이 큰 평양(829.1㎢)의 사진을 매일 얻으려면 최소 16만6000달러(약 2억2800만 원)가 들고, 1년을 보려면 8320만 달러(약 1140억 원)가 듭니다. 개인이나 기관이 부담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닙니다.그래서 북한을 위성으로 감시하는 사람들은 공짜 저해상도 사진으로 감시하다가 의심이 갈만한 곳만 좁혀서 사진을 확인하는 방법을 씁니다. 이런 식으로 구축함이 쓰러진 사진과 다시 일어난 구축함이 수리를 위해 나진항 드라이 독에 옮겨간 위성사진이 공개됐습니다. 이 사진들은 김정은도 이미 보았을 겁니다. 앞서 맥사가 찍은 대표적 위성사진 중 화제가 된 것은 2023년 2월 8일 심야에 진행된 북한의 열병식 장면인데, 열병식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화성-17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이 광장을 통과하는 장면을 북한 조선중앙TV가 공개하기 전에 먼저 공개했습니다.아마 김정은이 위성이 이렇게 자세하게 내려다본다는 것에 섬뜩함을 느꼈을 겁니다. 위성을 의식하다 보면 “내가 현지 시찰을 할 때 위성이 내려다보는 것 아닌가”는 공포도 느끼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위성은 카메라처럼 따라다니며 찍는 것이 아니라 수 시간 간격으로 찍기 때문에 지방에 간 김정은은 포착하기 어렵습니다. 워낙 사진 가격이 비싸다 보니 북한의 지방까지 샅샅이 살펴보긴 어렵습니다.하지만 특정 지역을 계속 주시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가령 원산에 있는 김정은의 별장 같은 곳은 이미 위성사진으로 북한을 감시하는 사람들에겐 주요 목표이죠. 김정은이 원산에서 물놀이하거나 승마하는 모습은 분명 어느 위성이든 찍을 겁니다. 암살의 불안에 떠는 김정은에겐 분명 달갑지 않은 일이고, 놀 때마다 께름칙한 생각이 들 겁니다.물론 상업위성으로선 김정은을 구분하긴 쉽지 않습니다. 145㎏의 체형이 북한에 또 있을까 싶긴 하지만, 뚱뚱한 체형의 인물이 찍혔다고 해서 그것이 김정은이라고 확실하게 단정할 순 없습니다.그러나 미국의 정찰위성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대당 가격이 10억 달러가 넘는 미국의 정찰위성 ‘키홀(Key Hole·KH)’은 해상도가 0.15m급이라고 알려졌지만, 최신 위성의 경우 1㎝를 구별할 수 있는 초정밀 카메라를 탑재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정찰위성은 일반적으로 600㎞의 고도에서 하루에 약 14~15바퀴 정도 지구를 돌다가 필요시엔 200~300㎞까지 고도를 낮춰 정밀한 사진을 찍습니다. 미국 국방부는 내년까지 무려 1000개의 정찰위성을 운용할 계획입니다. 이 정도면 김정은을 전담 감시하는 위성도 꽤 있을 것입니다.시간이 갈수록, 기술이 진보할수록 김정은의 불안감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김정은이 그렇게도 군사정찰위성을 갖고 싶어 집착하는 이유도, 어쩌면 그의 마음속 깊이 정찰위성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김정은이 위성사진을 두려워할 이유는 또 있습니다. 저는 국제부 기자였던 2009년 이런 기사를 쓴 적이 있습니다.“강화도 면적의 2.5배 정도에 불과한 중동의 소왕국 바레인이 위성사진을 제공하는 인터넷 사이트 구글어스 때문에 비상이 걸렸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26일 보도했다. 요즘 바레인 국민의 ‘소일거리’는 구글어스를 통해 자기 나라를 구경하는 것. 왕족이 국토의 80%를 소유한 부익부 빈익빈의 모순을 이들은 구글어스를 보며 깨닫고 있다. ‘왕족 아무개의 정원과 요트 계류장, 수영장은 정말 호화롭기 그지없다’ ‘어떤 왕궁은 인근 마을 3∼4개를 합친 것보다 더 크다. 왕궁 때문에 바다에 나가는 길이 막혔다’ 등등 불만은 끝이 없다.물론 바레인 국민이 이전에도 현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높은 담장에 막혀 직접 눈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구글어스는 왕족들의 땅이 얼마나 되고 어떻게 사는지, 그들 때문에 자신의 삶은 어떻게 영향을 받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게 한다. 국민 여론이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바레인은 1인당 국민소득이 한국과 비슷한 1만5000달러 정도지만, 왕족의 재산을 제외하면 집 없는 가난한 사람이 많다. 국민의 60% 이상은 시아파이지만 하마드 알할리파 국왕은 수니파다.각료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왕족은 언론과 정보기관, 학계를 모두 통제하며 지금까지 평온하게 국정을 운영해 왔다. 하지만 인터넷과 위성TV가 등장하면서 평온에 금이 가고, 국부의 공평한 분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여론이 악화되자 바레인 정부는 사생활 침해를 구실로 올해 초 구글어스를 차단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많은 사람이 파일로 된 지도를 e메일로 주고받기 시작했고, 어떤 사이트는 접근 차단을 해제하는 프로그램을 제공하기도 했다.”바레인이 이럴진대 북한은 어떻겠습니까. 김정은은 인민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나는 고난의 행군 시기 풋강냉이 한 이삭으로 끼니를 에울 때도 있었으며 거의 매일 줴기밥(주먹밥)과 죽으로 끼니를 에웠다. 나는 고난의 행군 전 기간 장군님(김정일)을 모시고 인민과 함께 있었고 인민들이 겪는 고생을 함께 겪었다. 훗날 역사가들이 고난의 행군 시기 김정은은 어떻게 지냈는가 하고 물으면 나는 그들에게 떳떳이 말해줄 수 있다. 고난의 행군 시기 나는 호의호식하지 않았다. 나는 인민들과 같이 어렵게 살았다.”그런데 위성사진이 공개되면 죽을 먹고 산다는 김정은의 호화별장 수십 개가 드러납니다. 김정은의 별장은 경계가 삼엄하고, 높은 나무들로 막혀 있어 인민은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위성은 김정은이 얼마나 호화롭게 사는지, 얼마나 인민들에게 거짓말을 해왔는지를 사진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이것들은 북한이 인터넷에서 제일 먼저 지우고 싶은 사진들일 겁니다.시간이 갈수록 위성 기술은 점점 진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성의 능력이 향상될수록 ‘은둔의 왕국’ 북한의 베일은 점점 벗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구축함 사고를 공개했지만, 앞으로 김정은에게 가해지는 압박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김정은과 북한을 지켜보는 ‘보이지 않는 눈’-위성의 맹활약을 기대합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정은이 했다는 수많은 말 중에 개인적으로 제일 황당하고 웃긴 말은 이것이다. “나는 ‘고난의 행군’ 시기 풋강냉이 한 이삭으로 끼니를 에울 때도 있었으며 거의 매일 줴기밥(주먹밥)과 죽으로 끼니를 에웠다. 나는 고난의 행군 전 기간 장군님(김정일)을 모시고 인민과 함께 있었고 인민들이 겪는 고생을 함께 겪었다. 훗날 역사가들이 고난의 행군 시기 김정은은 어떻게 지냈는가 하고 물으면 나는 그들에게 떳떳이 말해줄 수 있다. 고난의 행군 시기 나는 호의호식하지 않았다. 나는 인민들과 같이 어렵게 살았다.” 고난의 행군 시기는 북한에서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은 1990년대 중반을 말한다. 만약 이때 김정은이 정말로 스위스가 아닌 북한에 있었다면 지난달 21일 발생한 구축함 진수 사고의 책임을 물어 홍길호 청진조선소 지배인을 체포하기 전에 상부터 주었을 것이다. 고난의 행군 때 함경북도 청진시 청진조선소에선 많은 기술자가 굶어 죽어서 선박 생산이 중단됐다. 나중에 군수공업부 산하 일개 직장으로 겨우 배속돼 어뢰정이나 소형 잠수함을 종종 만들긴 했지만, 대형 군함 건조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김정은 지시에 청진조선소에선 5000t급 구축함을 만들어 냈다. 진수할 때 모로 넘어지긴 했지만, 껍데기라도 그럴싸하게 만들어 진수대에 올려놓은 것은 청진조선소의 실제 건조 능력으로 볼 때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돈을 들여 대형 드라이독을 만들어 준 남포조선소는 이번에 5000t급 구축함 진수에 성공했지만 청진조선소에는 드라이독이 없었다. 이 차이 때문에 남포조선소 지배인은 영웅이 됐겠지만, 청진조선소 지배인은 용납할 수 없는 범죄자가 됐다. 같은 규격 군함을 두 조선소에서 동시에 만들게 한 것은 삼척동자도 이해하기 어려운 무지의 결정이다. 초도함을 먼저 만들어 띄워 문제점을 찾고 이를 반영해 두 번째 군함을 만드는 것이 상식이다. 또, 이미 군함을 만든 곳에서 다시 만든다면 훨씬 쉽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김정은은 조급증에 사로잡혔는지 이런 상식을 뒤집고 대형 군함 건조 경험이 전혀 없는 남포와 청진 두 곳에서 동시에 구축함을 만들게 했다. 그러니 청진조선소 사고의 우선적 책임은 김정은이 져야 한다. 지배인과 공장 간부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기 전에 조선소에 기술자나 숙련공은 제대로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함경북도는 이미 고난의 행군 전인 1980년대 말부터 식량을 비롯한 각종 배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생산물도 나오지 않고 자재를 빼돌려 팔 수도 없는 조선소는 청진에서도 기피 직장이었다. 1970, 80년대 대형 선박을 건조했던 기술자와 숙련공들은 조선소를 계속 다니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직장을 버리고 뿔뿔이 자기 살길을 찾았다. 김정은이 고난의 행군 시기 청진에 와 봤다면, 그 참혹한 과거를 딛고 구축함까지 만들어 냈다는 사실 자체에 눈물부터 흘려야 마땅하다. 솔직히 청진조선소에 구축함을 만들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이번 구축함 전도(轉倒) 사고는 배급도, 월급도, 인센티브도 없는 북한 현실이 만든 대표적인 사고라 할 수 있다. 설령 구축함이 제대로 진수됐다고 해도 이후 조선소 노동자들에게 배급이라도 제대로 해 줬을지 의문이다. 조선소와 함께 국가과학원 역학연구소, 김책공업종합대학, 중앙선박설계연구소 등의 과학자 집단도 용납할 수 없는 범죄 집단이 됐다. 이들은 군함의 안전성이나 진수 계산을 담당했을 것이다. 졸지에 처벌받게 될 과학자 중에 고위 간부 자식은 당연히 없다. 사무실에 앉아 계산하고 설계도를 그리는 일은 북한에서 매우 인기 없는 직종이다. 이런 일을 해 본들 먹고살기 어렵다. 직업 특성상 연구원들은 대학을 졸업했겠지만, 정말 힘없는 집안 자식일 확률이 높다. 조선시대 양반이라 할 만한 고위 간부는 자식을 이런 곳에 보내지도 않는다. 이런 직업은 중인 신분에 불과하다. 똑똑한 사람들은 대학 졸업 후 연구소에 발령 받더라도 어떡하든 빠져나와 간부가 되거나 외화벌이 기관에 들어간다. 연구소에 남으면 ‘실패한 인생’일 뿐이다. 그러니 열심히 일할 동기도 없다. 김정은은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은 딸을 데리고 다니며 화를 버럭버럭 내기 전에 북한 현실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매일 줴기밥과 죽으로 끼니를 에워보길 바란다. 그러면 세상이 달리 보일 것이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