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훈

전승훈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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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라는 정글에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합니다. 도시를 산책하고 탐사하는 즐거움을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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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5-11-06~2025-12-06
여행54%
경제일반23%
문화 일반10%
사회일반7%
국제교류3%
종교3%
  • 한 여름 해운대…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여름 부산 해운대하면 해수욕을 떠올린다.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속에 들어가는 것도 좋지만 햇살은 너무 뜨겁기만 하다. 그래서 새벽과 한밤 중에 나만의 해운대를 즐기는 방법도 좋다. 그리고 곳곳에 숨겨져 있는 숲과 카페, 양조장을 돌며 즐기는 프라이빗한 여행은 어떨까. ● 해운대의 새벽과 광안대교 야경서울역에서 KTX청룡 열차를 탔다. 주둥이가 날렵한 모습이 푸른 용 한 마리가 금방이라도 불을 뿜으며 달려가다 승천할 것같은 기세다. 지난해 5월부터 운행을 시작한 KTX청룡은 2시간15분 정도면 서울~부산을 주파한다. 일반 KTX가 2시간반~3시간 가량 걸리는 것에 비하면 현재 가장 빠른 부산행 열차다. KTX청룡의 우등실엔 비행기처럼 좌석 뒷면에 화면이 설치돼 뉴스, 드라마, 음악, 유튜브도 감상할 수 있다.KTX청룡을 타고 코레일관광개발에서 새롭게 개발한 2박3일 부산 ‘명작 여행’ 프로그램에 참여해 부산여행에 나섰다. 매월 2차례 여행과 체험을 즐기는 ‘액티브 시니어(Active Senior)’와 외국인 개별자유여행(FIT) 관광객들을 겨냥한 프리미엄 부산 해운대여행 프로그램이다. 한여름 해운대는 새벽부터 분주하다. 오전 5시인데도 훤하게 밝아오는 해변에는 산책과 조깅을 하러 나온 사람들로 활기를 띤다. 선캡을 쓴 여성부터 상의를 벗은 외국인 남성까지. 최신 여행 트랜드인 ‘런트립(Run+Trip)’ 현장이다. 해운대 미포 해변으로 나가니 달맞이고개에서 떠오른 태양이 초고층 마천루 엘시티에 가려 동백섬까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엘시티 그림자를 따라 해변을 달리다 보니 백사장에 검은색 지프자와 군용 위장막같은 것이 보였다. 해변에 웬 군사시설? 자세히 보니 채널A 예능프로그램인 ‘강철부대 해운대 챌린지’ 체험시설이다. 8월31일까지 최영재 교관 등 강철부대 출연자 10명이 상주하며 타이어 뒤집기와 그물 넘기, 밧줄타고 오르기 등 16개 유격훈련 코스에 관광객들도 도전해볼 수 있는 여름휴가 특별 이벤트다. 해운대의 아침을 만끽하며 달리다보니 동백섬에 도착했다. 웨스틴조선호텔을 지나 비탈길을 오르니 서울 남산순환도로처럼 동백섬을 한바퀴 돌 수 있는 포장도로를 발견! 아침의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달리다보니 APEC누리마루하우스 전망대에 도착했다. 저멀리 광안대교가 보이는 수려한 풍경이 펼쳐진다. 옆에 계신 할아버지는 달맞이 고개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드리고 있다. 오늘도 새로운 하루가 주어짐에 감사를! 동백섬에 있는 해운대 등대 아래쪽 바위에는 9세기 신라말의 대학자였던 고운 최치원(857~908)의 ‘해운대(海雲臺)’ 글씨가 새겨져 있다. 최치원이 가야산으로 입산하러 가다가 바람과 구름, 달과 산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곳이라고 해서 대를 쌓고, 글씨를 새겨넣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다. 한시간 만에 해운대 미포에서 동백섬까지 한바퀴 돌고 오니 왕복 5.8km가 찍혔다. 해운대 여름 바다를 즐기는 또다른 방법은 야경이다. 붉은색 노을이 질 때면 동백섬 옆 ‘더베이 101’의 야외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사람들은 마린시티 마천루 아파트의 불빛이 들어오는 장면을 넋놓고 바라본다. 그룹 코나(KONA)의 레전드 시티팝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라는 노래가 생각나는 장면이다. ‘불멍’ ‘물멍’도 아니고 해변 아파트 조명을 멍하게 바라보는 사람들. 도시의 불빛도 스펙터클한 풍경이 된다는 사실을 이곳에 오면 깨닫게 된다. 해운대에서 더 멋진 야경을 보는 방법은 광안대교 앞을 한바퀴 돌고 오는 요트투어다. 대부분 요트는 부산 수영만에서 출발하지만, 동백섬 ‘더베이 101’에서 출발하는 요트도 있다. 오후 7시 반쯤 출발하는 선셋 요트를 타면 해질녘 노을과 야경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요트가 파도에 출렁거리며 출항하자 마린시티의 야경이 뉴욕 맨해튼이나 홍콩에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황홀하다. 보랏빛 조명으로 빛나는 광안대교 아래로 모여든 요트에선 불꽃을 쏘아댄다. 바닷물 위에서 ‘불꽃멍’을 하는 시간이다. 광안리 해변을 장식하는 수많은 불꽃은 여름밤의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되어 흩어져간다. ● 대나무 숲에서 만난 멕시코 소녀들부산 기장군 철마면의 아홉산숲은 여름에, 그것도 비올 때 찾기 좋은 숲이다. 대나무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시원하기 때문이다. 남평 문씨 문중이 400년간 가꿔온 아홉산숲은 금강소나무 군락과 맹종죽 숲이 잘 보존돼 있어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의 배경으로 등장했다. 대숲을 스쳐지나가는 바람 소리, 새들의 지저귐 소리, 청량한 숲의 향기, 푸른하늘과 초록색 댓잎…. ‘또다른 세상’을 만나는 시간이다. 휴대폰은 잠시 꺼두셔도 좋다. 이안 감독의 영화 ‘와호장룡(臥虎藏龍)’에서 주윤발과 장쯔이가 춤을 추듯 날아다니며 결투를 벌이던 대숲도 생각나는 시간이다. 대나무숲을 구경하다보면 굿터에 도착한다. 대나무는 뿌리가 잘 번지기 때문에 영역이 계속해서 넓어지는데, 숲 가운데 이상하게 대나무가 자라지 않는 곳이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렇게 대숲 안쪽에 둥근 마당이 생긴 곳에 아홉산 산신령의 영험이 있다고 믿었고, 궂은 일이 있을 때마다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굿터 가운데에는 돌로 된 당간지주가 서 있다. 당간지주의 양쪽 높이가 서로 달라 더욱 신기해보인다. 이 당간지주는 드라마 ‘더 킹 : 영원의 군주’에서 평행 세계로 넘나들던 차원의 문의 역할을 했다. 맹종대숲 평지대밭 굿터의 당간지주는 요즘엔 최고의 포토존이 됐다. 까르르 웃으며 포즈를 취하던 외국인 소녀들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멕시코에서 온 친척 자매들인데 드라마 ‘더 킹’의 주인공 이민호를 좋아하는 한류팬이란다. 그래서 ‘꽃보다 남자’ ‘상속자들’ ‘파친코’ 등 이민호가 나온 드라마의 촬영장소를 찾아다니며 여행 중이라는 대답. 한류의 파워는 지구 반대편에서 부산 기장의 대숲까지 찾아오게 만들 정도로 대단하다. 이처럼 해운대는 서울 못지 않게 외국인 관광객들이 넘쳐나는 곳이다. 미포에서 블루라인파크 모노레일 열차를 타면 갈 수 있는 청사포 철길 건널목도 빼놓을 수 없는 포인트다. 햇살에 비친 은빛 윤슬이 반짝거리는 바다와 열차, 그리고 횡단보도…. 동해남부선 폐선을 활용한 블루라인 열차가 지나갈 즈음이면 청사포 철길 건널목 횡단보도에는 순식간에 휴대폰을 든 사람들로 꽉 찬다. 199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슬램덩크’에서 강백호가 서 있던 바닷가 철길 건널목과 비슷하다는 입소문이 돌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슬램덩크에서 이 장면은 일본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에 있는 가마쿠라코코마에역(鎌倉高校前駅) 앞 철길이 모델이다. 도쿄 교외에 후지산 뷰가 보이는 해변 철도역을 찾는 사람들 못지 않게, 부산 청사포에서도 바다와 열차가 어우러진 풍경을 보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부산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먹거리다. 해운대 지역 특산주를 만드는 ‘양조장 기다림’에서는 유럽의 와이너리처럼 다양한 수제 막걸리를 시음하고, 막걸리 칵테일과 캔막걸리를 만들어보는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양조가 조태영 씨는 직접 마이크를 끼고 한국의 전통주인 ‘삼양주(三釀酒)’를 만드는 과정을 설명한다. 쌀과 누룩, 정제수를 넣어서 밑술을 담고, 그 위에 또다시 쌀과 누룩을 넣어 ‘덧술’을 만들고, 그 위에 또다시 쌀과 누룩을 넣어 ‘추가 덧술’(3차 담금)을 만드는 과정이다. 그래서 총 240시간 발효, 100일간의 저온 숙성을 거쳐 탄생한 수제막걸리는 쌀 본연의 고소하고 깊은 풍미와 과일과 꽃향기까지 느낄 수 있다. 특히 막걸리에 우유, 연유, 얼음을 넣고 쉐이크에 흔들어 크림이 생긴 막걸리에 시나몬과 땅콩가루를 얹어 마시는 칵테일 만들기 체험도 흥미롭다. ●맛집=횟집으로 유명한 해운대에서도 한우 맛집 경쟁이 치열하다. 해운대 쇠고기 집의 원조는 ‘해운대 소문난 암소갈비’다. 1964년 창업했으니 50년이 넘은 집이다. 그런데 인근에 ‘거대갈비’가 신흥강자로 등장했다. 쇠고기의 원재료 질도 중요하지만 직원이 1대1로 직접 대면해서 숯불에 구워주는 솜씨도 프로급이다. 숯불로 굽되, 육즙은 안에 가두는 것이 핵심노하우. 부산 기장군 일광읍의 칠암앞바다에 위치한 ‘칠암만장(七岩鰻匠)’은 장어구이 전문점. 인근에 대숲으로 유명한 아홉산숲이 있어서, 장어를 대나무 숯불로 굽는다. 초벌구이를 한 장어에는 10년 숙성된 씨간장에 한약재를 넣고 열시간 이상 끓여서 만든 갈색소스가 발라진다. 장어구이와 함께 곤드레솥밥, 가지솥밥, 소고기 솥밥, 가리비가 들어간 해산물솥밥을 골라서 먹을 수 있다. 부산=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5-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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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여름 해운대,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여름 부산 해운대’ 하면 해수욕을 떠올린다.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속에 들어가는 것도 좋지만 햇살은 너무 뜨겁기만 하다. 그래서 새벽과 한밤 중에 나만의 해운대를 즐기는 방법도 좋다. 그리고 곳곳에 숨겨져 있는 숲과 카페, 양조장을 돌며 즐기는 프라이빗한 여행은 어떨까. ● 해운대의 새벽과 광안대교 야경 서울역에서 KTX청룡 열차를 탔다. 주둥이가 날렵한 모습이 푸른 용 한 마리가 금방이라도 불을 뿜으며 달려가다 승천할 것같은 기세다. 지난해 5월부터 운행을 시작한 KTX청룡은 2시간15분 정도면 서울∼부산을 주파한다. 현재 가장 빠른 부산행 열차다. 일반 KTX는 2시간 반∼3시간가량 걸린다. KTX청룡의 우등실엔 비행기처럼 좌석 뒷면에 화면이 설치돼 뉴스, 드라마, 음악, 유튜브도 감상할 수 있다. KTX청룡을 타고 코레일관광개발에서 새롭게 개발한 2박3일 부산 ‘명작 여행’ 프로그램에 참여해 부산여행에 나섰다. 매월 2차례 여행과 체험을 즐기는 ‘액티브 시니어(Active Senior)’와 외국인 개별자유여행(FIT) 관광객들을 겨냥한 프리미엄 부산 해운대여행 프로그램이다. 한여름 해운대는 새벽부터 분주하다. 오전 5시인데도 훤하게 밝아오는 해변에는 산책과 조깅을 하러 나온 사람들로 활기를 띤다. 선캡을 쓴 여성부터 상의를 벗은 외국인 남성까지. 최신 여행 트랜드인 ‘런트립(Run+Trip)’ 현장이다. 해운대 미포 해변으로 나가니 달맞이고개에서 떠오른 태양이 초고층 마천루 엘시티에 가려 동백섬까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엘시티 그림자를 따라 해변을 달리다 보니 백사장에 검은색 지프자와 군용 위장막같은 것이 보였다. 해변에 웬 군사시설? 자세히 보니 채널A 예능프로그램인 ‘강철부대 해운대 챌린지’ 체험시설이다. 8월31일까지 최영재 교관 등 강철부대 출연자 10명이 상주하며 타이어 뒤집기와 그물 넘기, 밧줄타고 오르기 등 16개 유격훈련 코스에 관광객들도 도전해볼 수 있는 여름휴가 특별 이벤트다. 해운대의 아침을 만끽하며 달리다보니 동백섬에 도착했다. 웨스틴조선호텔을 지나 비탈길을 오르니 서울 남산순환도로처럼 동백섬을 한바퀴 돌 수 있는 포장도로를 발견! 아침의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달리다보니 APEC누리마루하우스 전망대에 도착했다. 저멀리 광안대교가 보이는 수려한 풍경이 펼쳐진다. 옆에 계신 할아버지는 달맞이 고개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드리고 있다. 오늘도 새로운 하루가 주어짐에 감사를! 동백섬에 있는 해운대 등대 아래쪽 바위에는 9세기 신라말의 대학자였던 고운 최치원(857∼908)의 ‘해운대(海雲臺)’ 글씨가 새겨져 있다. 최치원이 가야산으로 입산하러 가다가 바람과 구름, 달과 산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곳이라고 해서 대를 쌓고, 글씨를 새겨넣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다. 한시간 만에 해운대 미포에서 동백섬까지 한바퀴 돌고 오니 왕복 5.8km가 찍혔다. 해운대 여름 바다를 즐기는 또다른 방법은 야경이다. 붉은색 노을이 질 때면 동백섬 옆 ‘더베이 101’의 야외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사람들은 마린시티 마천루 아파트의 불빛이 들어오는 장면을 넋놓고 바라본다. 그룹 코나(KONA)의 레전드 시티팝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라는 노래가 생각나는 장면이다. ‘불멍’ ‘물멍’도 아니고 해변 아파트 조명을 멍하게 바라보는 사람들. 도시의 불빛도 스펙터클한 풍경이 된다는 사실을 이곳에 오면 깨닫게 된다. 해운대에서 더 멋진 야경을 보는 방법은 광안대교 앞을 한바퀴 돌고 오는 요트투어다. 대부분 요트는 부산 수영만에서 출발하지만, 동백섬 ‘더베이 101’에서 출발하는 요트도 있다. 오후 7시 반쯤 출발하는 선셋 요트를 타면 해질녘 노을과 야경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요트가 파도에 출렁거리며 출항하자 마린시티의 야경이 뉴욕 맨해튼이나 홍콩에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황홀하다. 보랏빛 조명으로 빛나는 광안대교 아래로 모여든 요트에선 불꽃을 쏘아댄다. 바닷물 위에서 ‘불꽃멍’을 하는 시간이다. 광안리 해변을 장식하는 수많은 불꽃은 여름밤의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되어 흩어져간다. ● 대나무 숲에서 만난 멕시코 소녀들부산 기장군 철마면의 아홉산숲은 여름에, 그것도 비올 때 찾기 좋은 숲이다. 대나무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시원하기 때문이다. 남평 문씨 문중이 400년간 가꿔온 아홉산숲은 금강소나무 군락과 맹종죽 숲이 잘 보존돼 있어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의 배경으로 등장했다. 대숲을 스쳐지나가는 바람 소리, 새들의 지저귐 소리, 청량한 숲의 향기, 푸른하늘과 초록색 댓잎…. ‘또다른 세상’을 만나는 시간이다. 휴대폰은 잠시 꺼두셔도 좋다. 이안 감독의 영화 ‘와호장룡(臥虎藏龍)’에서 주윤발과 장쯔이가 춤을 추듯 날아다니며 결투를 벌이던 대숲도 생각나는 시간이다. 대나무숲을 구경하다보면 굿터에 도착한다. 대나무는 뿌리가 잘 번지기 때문에 영역이 계속해서 넓어지는데, 숲 가운데 이상하게 대나무가 자라지 않는 곳이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렇게 대숲 안쪽에 둥근 마당이 생긴 곳에 아홉산 산신령의 영험이 있다고 믿었고, 궂은 일이 있을 때마다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굿터 가운데에는 돌로 된 당간지주가 서 있다. 당간지주의 양쪽 높이가 서로 달라 더욱 신기해보인다. 이 당간지주는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에서 평행 세계로 넘나들던 차원의 문의 역할을 했다. 맹종대숲 평지대밭 굿터의 당간지주는 요즘엔 최고의 포토존이 됐다. 까르르 웃으며 포즈를 취하던 외국인 소녀들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멕시코에서 온 친척 자매들인데 드라마 ‘더 킹’의 주인공 이민호를 좋아하는 한류팬이란다. 그래서 ‘꽃보다 남자’ ‘상속자들’ ‘파친코’ 등 이민호가 나온 드라마의 촬영장소를 찾아다니며 여행 중이라는 대답. 한류의 파워는 지구 반대편에서 부산 기장의 대숲까지 찾아오게 만들 정도로 대단하다. 이처럼 해운대는 서울 못지 않게 외국인 관광객들이 넘쳐나는 곳이다. 미포에서 블루라인파크 모노레일 열차를 타면 갈 수 있는 청사포 철길 건널목도 빼놓을 수 없는 포인트다. 햇살에 비친 은빛 윤슬이 반짝거리는 바다와 열차, 그리고 횡단보도…. 동해남부선 폐선을 활용한 블루라인 열차가 지나갈 즈음이면 청사포 철길 건널목 횡단보도에는 순식간에 휴대폰을 든 사람들로 꽉 찬다. 199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슬램덩크’에서 강백호가 서 있던 바닷가 철길 건널목과 비슷하다는 입소문이 돌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슬램덩크에서 이 장면은 일본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에 있는 가마쿠라코코마에역(鎌倉高校前駅) 앞 철길이 모델이다. 도쿄 교외에 후지산 뷰가 보이는 해변 철도역을 찾는 사람들 못지 않게, 부산 청사포에서도 바다와 열차가 어우러진 풍경을 보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부산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먹거리다. 해운대 지역 특산주를 만드는 ‘양조장 기다림’에서는 유럽의 와이너리처럼 다양한 수제 막걸리를 시음하고, 막걸리 칵테일과 캔막걸리를 만들어보는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양조가 조태영 씨는 직접 마이크를 끼고 한국의 전통주인 ‘삼양주(三釀酒)’를 만드는 과정을 설명한다. 쌀과 누룩, 정제수를 넣어서 밑술을 담고, 그 위에 또다시 쌀과 누룩을 넣어 ‘덧술’을 만들고, 그 위에 또다시 쌀과 누룩을 넣어 ‘추가 덧술’(3차 담금)을 만드는 과정이다. 그래서 총 240시간 발효, 100일간의 저온 숙성을 거쳐 탄생한 수제막걸리는 쌀 본연의 고소하고 깊은 풍미와 과일과 꽃향기까지 느낄 수 있다. 특히 막걸리에 우유, 연유, 얼음을 넣고 쉐이크에 흔들어 크림이 생긴 막걸리에 시나몬과 땅콩가루를 얹어 마시는 칵테일 만들기 체험도 흥미롭다. 맛집횟집으로 유명한 해운대에서도 한우 맛집 경쟁이 치열하다. 해운대 쇠고기 집의 원조는 ‘해운대 소문난 암소갈비’다. 1964년 창업했으니 50년이 넘은 집이다. 그런데 인근에 ‘거대갈비’가 신흥강자로 등장했다. 쇠고기의 원재료 질도 중요하지만 직원이 1대1로 직접 대면해서 숯불에 구워주는 솜씨도 프로급이다. 숯불로 굽되, 육즙은 안에 가두는 것이 핵심노하우.부산 기장군 일광읍의 칠암앞바다에 위치한 ‘칠암만장(七岩鰻匠)’은 장어구이 전문점. 인근에 대숲으로 유명한 아홉산숲이 있어서, 장어를 대나무 숯불로 굽는다. 초벌구이를 한 장어에는 10년 숙성된 씨간장에 한약재를 넣고 열시간 이상 끓여서 만든 갈색소스가 발라진다. 장어구이와 함께 곤드레솥밥, 가지솥밥, 소고기솥밥, 가리비가 들어간 해산물솥밥을 골라서 먹을 수 있다.글·사진 부산=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5-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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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양도성과 오간수문 아래 피어난 한복의 물결[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벽면이 알루미늄 패널로 돼 있습니다. 낮에 햇빛이 비쳐 반사되는 모습도 멋있지만, 밤에 은은하게 조명이 들어오는 모습도 꽤 시크합니다. 그런데 이 알루미늄 패널에 빛을 비춰 조명쇼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바로 ‘서울라이트 DDP’입니다. 서울라이트 DDP는 세계 3대 디자인어워드(iF, Red Dot, IDEA)에서 잇단 수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외국인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로 DDP가 꼽히기도 하죠. ‘서울라이트 DDP ‘는 봄과 가을에 주로 열렸는데, 올해 처음으로 ’여름‘ 시즌이 개막했습니다. 7월 31일 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2025 서울라이트 DDP 여름’ 개막 행사가 열렸는데요. 한복패션쇼가 진행된 개막식을 포함해 이날 하루 행사장을 찾은 관람객이 6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네요. 8월10일까지 매일 저녁 8~10시까지 DDP 곳곳에서 펼쳐지는 조명쇼를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습니다. ‘서울라이트 DDP’는 그동안 도로에서 바라보이는 222m에 이르는 DDP 비정형 외벽 중심으로 미디어파사드 형식으로 진행됐는데요. 이번에는 처음으로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청계천 오간수문과 한양도성 성벽에서도 조명쇼가 시도됐습니다. 한양도성 앞 잔디반에 물방울 조형물이 놓여 있고, 성벽에 폭포가 흘러내리는 미디어아트가 펼쳐지고, 그 앞을 한복을 입은 모델들이 패션쇼를 하는 그림같은 장면이 개막식에서 펼쳐졌습니다. 올여름 미디어아트 주제는 ‘TIMESCAPE: 빛의 결’입니다. 미디어파사드 예술은 DDP 건물 뿐 아니라 뒷편 공원과 서울성곽, 오간수문까지 확장했습니다.외계에서 내려온 우주생명체를 닮은 DDP는 조선의 숨결이 흐르던 하천 주변에 미래 도시의 곡선이 내려앉아 있는 형태입니다. 동대문 주변에는 한양도성 성벽이 있었고, 청계천 물길은 성벽 아래 ‘오간수문(五間水門)’을 통해 중랑천으로 흘러갑니다. 조선 태종 5년(1405년)에 건설된 오간수문은 한양 도성 바깥으로 청계천 물이 빠져나가도록 만든 배수문입니다. 청계천 물이 다섯 개의 아치형 홍예문을 따라 흘러나가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5개의 아치형 수문은 성벽 아래의 공간을 안정적으로 지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오간수문은 단순한 물길을 넘어, 하천과 성곽, 도시를 유기적으로 연결했던 조선의 수리기술의 정수라고 할 수 있지요. 해방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청계천 복개로 함께 묻혀버렸던 이 수문은, 청계천 복원사업을 통해 2009년 발굴되며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오간수문 위에 2014년 개관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는 서울의 랜드마크 중 하나죠. 이라크에서 태어난 영국의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 1950~2016)가 설계한 곡선형 우주선 같은 건물입니다. DDP의 매끈하게 흐르는 외벽은 낙산에서부터 흘러내려온 한양도성의 곡선미를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조선의 한복과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흔적이 담겨 있는 곡선미이기도 합니다. DDP 내부는 미래적인 전시와 문화예술이 융합되는 공간인데요. 그리고 그 지하에는 아직도 오간수문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DDP에서는 역사와 미래, 석재와 알루미늄, 물길과 빛의 흐름이 하나의 장소에서 겹쳐집니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축적해온 시간의 밀도가, 동대문이라는 장소에서 겹쳐서 한꺼번에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주변에 있는 낙산 한양도성은 최근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K팝 데몬 헌터스’에서 두 주인공이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면서 묘한 감정을 느끼던 낭만적인 길입니다. 7월31일 밤, 오간수문 윗쪽 한양도성 앞마당에서는 특별한 개막식 퍼포먼스가 열렸습니다. 초승달이 수줍게 떠 있는 하늘 아래 한복 패션쇼가 펼쳐진 것입니다. 청계천 물길 옆에 심어진 버드나무 아래로 한복을 입은 모델들이 런웨이를 펼치며 등장합니다. 굿모닝시티, 두산타워 등 동대문 의류시장의 간판과 빌딩 조명, DDP의 유려한 곡선과 한양도성은 묘하게 어울립니다. 성벽에서는 ‘플루이드 메모리(Fluid Memory)’와 ‘라이트 드롭스(Light Drops)’ 미디어파사드가 펼쳐졌습니다. 총 180개의 미디어 물방울 조형물이 성곽 물길을 따라 흐릅니다. 푸른 빛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꽃이 피자 나비가 날아오르며, 거대한 DDP 외벽 전체를 감싸는 미디어아트도 펼쳐집니다. 이날 한복 패션쇼는 ‘금단제’와 ‘오우르’가 디자인한 의상을 선보였습니다. ‘금단제’는 왕과 왕비의 옷을 비롯해 한국 전통의 한복을 선보였고, ‘오우르’는 전통문양에서 영감을 받은 패턴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유니크한 디자인의 한복을 보여주었습니다. 오우르는 그동안 블랙핑크, 수지, 김태리, 뉴진스, 휴 잭맨, 라이언 레이놀즈, 잼리퍼블릭 등 국내외 아티스트의 의상을 디자인하고, 제네시스, LX하우시스, 조선호텔 등 다양한 기업과의 협업을 통해 현대적인 한국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있는 한복디자이너입니다. 특히 패션쇼의 시작과 대미를 장식한 무용수들이 입고 나와 역동적인 춤을 춘 한복은 인상적이었는데요.‘K팝 데몬헌터스’에서 K팝 걸그룹의 시작을 노래와 춤으로 악귀를 쫓는 고대 무속에서 찾았듯이, 마지막 한복은 무녀의 옷이었는데요. 요즘엔 ‘사자보이스’의 검은색 옷과 장군복, 무녀들의 한복처럼 활동적이면서도 파격적인 의상이 한복에서도 시크하게 다가가는 듯합니다. 구경 온 시민들이 바라보는 모습도 멀리서 보니 예술 설치 작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크사베리 컴퓨터리의 ‘Flux’라는 작품인데요. 폭포수 같은 조형물은 온라인 소통 속 알고리즘을 시각화한 몰입형 미디어설치 작품이라고 하네요. 리듬 인 포그(Rhythm in Fog)는 DDP 주변의 물이 흐르는 것을 상징화한 작품으로 물과 빛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이날 한복을 입고 등장한 오세훈 서울시장은 “케데헌(케이팝 데몬 헌터스) 열풍으로 K-팝이 글로벌 음악차트를 석권하고 한국 관광이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DDP에서 전통미와 첨단 기술이 어우러진 행사가 열려 감회가 더욱 새롭다”며 “소프트웨어 강국, 문화 수도 ‘서울’ 시민으로서 자부심을 느끼실 수 있도록 문화․예술 콘텐츠를 접할 기회의 폭을 넓혀 나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5-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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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글 창제의 원리를 담은 ‘나랏말글씨’[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한글은 하늘(天)과 땅(地), 그리고 사람(人)이 조화를 이루고, 만물의 생명체인 ‘씨알’이 자라나는 자연의 순환 원리에 입각해서 세종대왕이 창제한 것입니다.”서울 종로구 인사동 무우수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장천(章川) 김성태 작가의 ‘나랏말글씨’ 전시회에 가보면 한알의 씨앗에서 꿈틀거리며 한글이 탄생하고 자라난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김 작가는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세종대왕의 밝힌 한글 창제의 철학과 원리를 자연도감에서 식물이 탄생하고 자라는 그림을 보는 듯한 작품으로 표현해냈습니다. 그래서 한글은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고 했나봅니다. 정통 서예가 출신으로 국내 1세대 캘리그라피 작가인 김 작가는 영화 ‘서울의 봄’을 비롯해 KBS ‘태종 이방원’, ‘전설의 고향’, ‘한국인의 밥상’, ‘명견만리’, ‘진품명품’ 등 수많은 드라마, 영화, 교양 프로그램의 타이틀을 써온 작가입니다. 한글과 한문을 넘나들며 기운생동하는 서체 예술을 선보였던 김 작가의 이번 전시회는 그야말로 파격적입니다.‘문장의 시냇물(글내)’이라는 뜻의 ‘장천(章川)’이라는 호처럼 아름다운 글귀를 써온 그의 작품에서 문장이 사라졌습니다. 대신 글씨 하나하나가 문자조형 예술작품이 됐습니다. 글씨인지, 그림인지 알 수 없는 작품이지만,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는 서체의 힘에 한없이 빨려들어가게 됩니다. 장천 김성태 작가가 훈민정음해례본을 깊이 연구한 끝에 ‘문자조형 예술작품’으로 표현한 한글의 탄생과정을 그의 해설과 함께 따라가보았습니다. 태초에 한알의 씨앗이 있었습니다. 만물의 씨알(Seed Core)은 남녀, 암수, 즉 ‘음양(陰陽)의 조화’ 속에 탄생합니다. 씨알을 자세히 살펴보니 왼쪽, 오른쪽 두 번의 둥근 획으로 돼 있습니다. 음양을 표현했네요. 문자로 만들어지기전, 태초의 씨알이 꿈틀거리고 있는 형상입니다. 씨알에서 수많은 점들이 알처럼 깨어나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씨알에서 태어난 생명체는 만물이 됩니다. 우리나라 한글에는 ‘씨’라는 말이 참 많습니다. 말씨, 글씨, 마음씨, 솜씨, 맵씨, 새아씨… 말씨에서는 말이 자라고, 글씨에서는 글이 자랍니다. 마음씨에서는 예쁜 마음이 자라고, 솜씨에서는 손재주가 자라납니다.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모두 작은 씨알에서 시작하는 것이죠. 수없이 태어난 씨알들은 서서히 공간이 확장되면서 천지인으로 구분이 됩니다. 천(天)은 하늘이면서 양(陽)이고, 지(地)는 땅이면서 음(陰)이고, 인(人)은 하늘과 땅의 사이에 있는 사람이자, 만물입니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은 이러한 ‘천지인(·, ㅡ, ㅣ)’의 원리에 따라 모음(母音)을 만들었습니다. ‘·’는 하늘(天)의 둥근 모양을 상징하고, ‘ㅡ’는 땅(地)의 평평한 모양을 상징하고, ‘ㅣ’는 꼿꼿이 서 있는 사람(人)의 모양을 상징한 것이죠. 이러한 천지인 원리는 삼성 갤럭시 휴대폰의 글자입력 시스템으로도 오늘날까지 활용되고 있습니다. “천지자연의 소리(聲)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문채(文)가 있는 법이니, 옛사람이 소리를 따라 글자를 만들어서 그것으로 만물의 뜻을 통하며 그것으로 천지인 삼재(三才)의 이치를 실었다.(…) 간단하고도 요령이 있으며, 정밀하고도 잘 통한다. 그러므로 슬기 있는 이는 아침을 마치기 전에 깨칠 것이요,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넉넉히 배울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이제 씨알이 땅 속에서 비집고 올라와 가지가 돋아납니다. 씨앗이 땅 위로 가지가 되어 올라와 세로획이 되고, 땅 속에서 옆으로 뻗어나가며 가로획이 됩니다. 씨알에서 시작된 한글은 가로획과 세로획이 생겨나면서 모음의 형태를 갖추려하고 있습니다. 나뭇가지가 옆으로 위로 성장하면서 다양한 모음과 자음의 형태로 자라날 것입니다. 나뭇가지 위로는 하늘도 펼쳐집니다. 천지인의 원리는 ‘초성(하늘)’, ‘중성(사람)’, ‘종성(땅)’으로도 확장됩니다. 땅과 하늘이 함께 어우러져 순환을 하고 있습니다. 세종대왕 때 만들어진 천체관측 기구인 ‘혼천의(渾天儀)’를 닮았습니다. 혼천의도 음양오행, 천지인의 원리를 통해서 만들어졌지요. 하늘(·)과 아래 땅(ㅡ)이 만나서 땅 위에 하늘이 있으니 양(陽)이고 음은 ‘오’가 됩니다. 위에 땅(ㅡ)과 아래에 선천(先天) 하늘(·)이 만나서 땅 아래에 하늘이 있으니 음(陰)이고 음은 ‘우’가 됩니다. 발음을 해보면 ‘오’는 밝은 느낌이 나고 ‘우’는 어두운 느낌이 납니다.문자가 탄생하는 과정을 기호처럼 그린 작품입니다. 가운데 있는 둥그런 호는 씨알입니다. 아랫쪽에 있는 두껍고 짙은 획은 땅이고, 위에 있는 얇고 밝은 획은 하늘입니다. 씨알을 중심으로 사람(人)과 만물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모양입니다. 하늘과 땅, 사람이 순환하면서 자음들이 하나둘씩 태어나고 있습니다. 드디어 ‘아!’하는 소리와 함께 모음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글자는 사람의 입을 통해 터져나오는 말씨에서 시작됐습니다. 이를 기록하는 글씨에서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장천 김성태 작가와 깊은 교류를 맺고 있는 배일동 명창(중요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이수자)의 깊은 울림통에서 터져나오는 ‘아~’ 소리를 듣는 듯하네요. 왼쪽에 사람(l)과 오른쪽에 하늘(·)이 만나니 오른쪽에 하늘이 있어 양(陽)이고 음은 ‘아’가 됩니다. ‘어~!’하는 소리도 들립니다. 왼쪽에 하늘(·)과 오른쪽에 사람(l)이 만나니 왼쪽에 하늘이 있어 음(陰)이고 음은 ‘어’가 됩니다. 발음을 해보면 ‘아’는 밝은 느낌이 나고 ‘어’는 어두운 느낌이 납니다. 이처럼 음양의 철학적 이치와 모음 발음 소리의 음양이 똑같습니다.​“글씨를 쓸 때 붓글씨와 볼펜글씨가 다릅니다. 볼펜 글씨는 일차적인 선묘만 긋고 가지만, 붓글씨는는 3차원의 공간미를 드러냅니다. 그러니까 붓글씨 서예가 어려운 것입니다. 판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인 가요와 민요는 일차원적인 선형적인 말씨라고 한다면, 판소리는 ‘아~~~~’하는 소리의 강약과 깊이가 엄청나게 변화무쌍해 공간미가 있습니다. 판소리에서는 성음 놀음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붓글씨하고 판소리는 한글의 말씨와 글씨를 표현하는 미학에 있어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이죠.” (배일동 명창)​ㅏ, ㅓ 모음은 ㅑ, ㅕ 등의 형태를 갖추면서 더욱 발전합니다. 이처럼 천지인이 가로와 세로로 만나고, 모음 속에서 자음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을 하면서 계속해서 언어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세개의 자음(ᅙ,ᅀ,ᅌ)이 자연스럽게 떨어져나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한글 자음 창제의 원리를 한 눈에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인데요. ‘훈민정음 해례본’에 의하면 한글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습니다. 세로획은 천지인의 사람입니다. 목청소리 글자인 ‘ㅇ’은 목구멍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목구멍 쪽에서 ‘ㅇ’이 써 있죠. 어금닛소리 글자인 ‘ㄱ’은 혀의 안쪽이 목구멍을 닫는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고, 혓소리 글자인 ‘ㄴ’은 혀끝이 윗잇몸에 붙는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고, 잇소리 글자인 ‘ㅅ’은 이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고, 입술소리 글자인 ‘ㅁ’은 입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습니다.‘ㄱ’에서 ‘ㅋ’이 나오고, ‘ㄴ’에서 ‘ㅌ’이 생성되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한글 자음의 기본형인 ㄱㄴㅁㅅㅇ의 형태는 ‘천지인 원(O)·방(□)·각(△)’의 형태에서 나왔습니다. ㄱㄴㅁ은 방(□)에서, ㅅ은 각(△)에서, ㅇ은 원(O)에서 온 형태입니다. ㄱ에서 ㅋ, ㄲ이 나왔고 ㄴ에서 ㄷ과 ㄹ, ㄸ이 나오고 ㅁ에서 ㅂ, ㅍ, ㅃ,이 나오고 ㅅ에서 ㅈ과 ㅊ, ㅉ이 나오고 ㅇ에서 ㅎ이 나와서 모든 자음이 원방각 천지인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그런데 원방각의 ‘O △ □’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 않습니까? 동그라미, 세모, 네모….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경비병들의 얼굴 가면 위에 쓰여진 표시입니다. ‘오징어 게임’에서 한글의 창제원리 중 하나인 ‘천지인 원방각’의 표시가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네요. ‘옴’과 ‘움’은 천지인 원방각과 음양오행(陰陽五行)이라는 한글 창제원리가 가장 잘 보여지는 글자입니다. 장천 김성태 작가는 “움은 씨를 감싸고 있는 자궁을 형상화한 글자”라고 말했습니다. 땅의 아래로 음(陰)의 세상에 있는 네모난 상자는 씨앗을 감싸고 있는 자궁입니다. 하늘은 둥글고(ㅇ), 땅은 모가(ㅁ) 났습니다. 하늘의 기운을 잔뜩 머금고 땅(ㅁ)으로 내려오는 형상을 모음 ‘ㅜ’자가 양팔을 벌려 ‘ㅁ’자를 품에 안은 듯한 글의 형상이 ‘움’입니다. 반면 ‘옴’은 땅(ㅡ)의 생명들이 마치 움을 틔우고 하늘을 향해 양팔을 활짝 펴는 형상입니다. 옴은 ‘피어나오다’는 뜻으로 양(陽)의 기운이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움의 ‘이응’자는 검게 닫혀 있고, 옴의 ‘이응’ 자는 가운데가 열려 있습니다. 김 작가는 “표음문자로 알려진 한글이 사실은 한자처럼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습니다. 한글은 어떤 문자보다도 건축학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글씨입니다. 김 작가가 쓴 ‘여유’라는 글씨는 넓은 탁자 위에 동그라미와 가로획, 세로획만으로 안정적인 건물을 세워놓은 듯한 느낌이네요. ‘나랏말글씨’ 전시회에서 또하나의 감상할 만한 부분은 바로 먹색입니다. 탁한 먹색이 없습니다. ‘먹=검정색’이라고 알고 있는 고정관념을 깹니다. 맑은 담묵(淡墨), 짙은 농묵(濃墨), 갈아서 하룻밤을 묵힌 ‘숙묵(宿墨)’까지…. 다양한 발묵(潑墨)을 보여줍니다. 김 작가는 “진정한 검정은 검정 속에 있는 하얀색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먹은 검정이라는 단색으로 생각하는데, 저는 검정색이 스펙트럼을 넓혀 최대한 담백한 먹색을 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필력이 제대로 살아났을 때, 진한 검정새보다 맑은 검정색이 훨씬 강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맑은 검정색이야말로 가슴에 빨리 스며드는 찐 검정이라 생각합니다.”한글로 된 서예작품은 글로벌 미술시장으로의 진출에 언어적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장에 담긴 내용까지 이해해야 비로소 완전한 작품 감상이 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나랏말글씨’에서 전시된 작품은 서예작품이라기 보다는 문자를 소재로 한 조형예술작품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씨알과 새싹, 나무와 태양, 하늘과 땅과 같은 자연과 우주의 원리를 담은 철학적, 추상적 현대미술로 받아들여집니다. 이연숙 무우수갤러리 관장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창제원리가 밝혀진 한글에 담긴 심오한 철학과 아름다움을 표현해낸 작품”이라며 “한글을 세계에 알릴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득음을 위해 한글 서예를 연구해 온 소리꾼 배일동 명창“우리의 소리는 형체가 없이 흩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글씨는 잡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기하학적 공간이 있습니다. 말씨가 가지고 있는 음운을 그대로 기호로 보여주기 때문이죠. 장천 작가의 붓글씨가 아름다운 것은 기하학적 공간미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데 있지 않을까요.”4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무우수갤러리에서 열린 장천 김성태 작가의 ‘나랏말글씨’ 전시회에서는 배일동 명창(중요무형문화제 제5호 판소리 이수자)의 축하공연으로 판소리 ‘춘향가’의 한 대목을 불렀습니다. 배 명창은 저서인 ‘득음’에서 우리 소리의 원리와 이치에 대해 깊이 연구했는데요. 그는 “어릴적부터 붓글씨에 태생적인 끌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판소리의 원리를 깨닫기 위해서 한글 서예의 아름다움을 평생 공부해왔다”고 합니다. “말을 길게 하는 것이 소리인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엄마 자궁과 같은 움에서 극성이 다른 음양 두 씨가 만나서 합을 이루어야만 새 씨가 탄생합니다. 한 음절의 말씨와 글씨가 만들어지려면 극성이 다른 초성(初聲)과 종성(終聲)의 두 자음씨가 엄마 자궁과 같은 모음에서 만나 합을 이루어야 한 음절에 말씨와 글씨가 생겨납니다. 이렇게 상하, 좌우, 강유, 경중의 씨를 품은 ‘하늘소리’ 초성과 ‘땅의 소리’ 종성이 중성(中聲) 모음에서 합을 이루어 한 글씨가 생겨나게 되지요.”배 명창은 “말씨를 어떻게 펼쳐내고, 갈막음하고, 열매를 맺느냐하는 것이 소리와 붓글씨 예술의 핵심”이라며 “판소리와 붓글씨의 미학은 정확히 일치하는 한가지 맛(一味)”이라고 말합니다. “종이에 쓰는 글씨는 평면상의 단순한 선면같지만, 거기에는 재량할 수 없는 다방 다면의 입체적인 기하학적 시공이 무수히 펼쳐집니다. 이를 표현해내기 위해서는 붓 봉에 딸란 수만 개의 붓털을 단호하게 장악하는 용필과 필력이 필요한데요. 장천 작가의 기운생동(氣韻生動)하는 필세는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맛이 있어요. 오랫동안 정통 서예가로서 공력을 쌓아오신 분이라 한 획을 그어도 달라요. 오랫동안 수련한 득음의 소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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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물이 합쳐져 바다가 되는 곳… 산신각에 오르니 열수가 펼쳐졌다[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바다 같은 풍경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의 몸을 섞고 휘돌아가는 곳. 두물머리(양수리). 초록빛 나무들은 섬처럼 떠 있고, 대교가 큰 강을 가로지른다. 남양주에서 태어난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전남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한강을 잊지 못했다. 다산초당 천일각에서 섬이 둥둥 떠 있는 남해를 바라보면서 한강과 비슷한 풍경이라며 고향을 그리워했다. ● ‘열수(洌水)’로 돌아오다경기 남양주 운길산 중턱에 자리 잡은 수종사(水鍾寺)는 밀려오는 한강물을 바라볼 수 있는 최고의 장소다. 수종사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산신각이 뷰포인트다. 산신각에 서면 대웅전 너머로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시원하게 탁 트인 풍경에 수종사는 수도권 사찰 중 유일하게 대한민국 명승(名勝·제109호)으로 지정됐다. 수종사는 다산이 어릴 적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놀러 오기도 하고, 형제들과 함께 책을 지게에 지고 올라와 과거시험 공부를 하기도 했던 곳. 과거에서 세 번 낙방 후 네 번째에 급제하자 수종사에서 잔치를 벌이기도 했던 인연이 있다. “강진의 유배지에서 바라본 바다가 남양주의 한강 풍경과 비슷하다고 친구인 초의선사에게 늘 말했다고 해요. 18년 만에 해배돼 고향에 돌아오는 길에 초의선사(1786∼1866)가 해남에서 죽로차(竹露茶)를 가지고 함께 올라와 수종사에 머물렀습니다.” 동산(東山) 주지스님은 “수종사가 ‘선다(禪茶)의 도량’이 된 것은 다산과 초의선사와의 깊은 인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덕분에 수종사에는 ‘삼정헌(三鼎軒)’이란 경내 다실이 있다. 전망 좋은 방에서 무료로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마재마을은 나주 정씨의 집성촌이었다. 다산 유적지는 유배지였던 전남 강진이 유명하지만, 정약용이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내고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팔당 호숫가의 마재는 정약용의 인간적 면모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엔 다산문화관, 다산기념관, 실학박물관, 다산생태공원, 다산정원 등 ‘정약용 유적지’가 조성돼 있다. 정약용 생가의 사랑채에는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가 걸려 있다. 1800년 (정조 24)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다산은 고향 마재로 돌아와 형제들과 경전을 공부하며 걸었던 편액이다. 이곳의 툇마루에 앉아보니 한옥의 처마가 깊은 그늘을 만들어 시원하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하다. 그러나 ‘여유당’은 ‘여유로운 집’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노자도덕경 15장에 나오는 “조심하는 것이 겨울에 얼어 있는 개천을 건너는 듯이 하고(與), 경계하는 것이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하라(猶)”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당시 살얼음판 같은 정치 상황 속에서 조심하고,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는 경계의 말이다. 서학(西學)을 받아들여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에 온 집안 사람들이 참수당하고, 유배당했던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는 당호다. 여유당 뒷동산에는 정약용의 무덤이 있다. 다산의 무덤에서도 한강의 풍경이 넓게 펼쳐진다. 그가 직접 쓴 ‘자찬묘비명(自撰墓碑銘)’에는 “여기는 열수(洌水) 정약용의 묘다”라고 시작한다. 정약용은 말년에 자신의 호를 ‘열수(한강의 옛 이름)’라고 지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는 한양으로 들어오는 지방 물산의 집산지였다. 다산은 “우리나라에는 수레가 없고 망아지가 달리는 풍속이 없다. 모든 일용 백물을 운반하는 방법이 배 아니면 이고 나르는 두 가지뿐이니, 배의 쓰임이 매우 긴요하다”고 했다. 그는 정조가 화성을 찾을 때 한강을 건너는 ‘배다리’의 설계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평생 한강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이용할 줄 알았던 선각자였다. 정약용 유적지에 있는 실학박물관은 가장 큰 회의실 이름을 ‘열수홀’로 지어 정약용을 기리고 있다. 실학박물관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성가정(聖家庭) 마재성지’는 한국 천주교의 요람 중 하나다. 정약용의 형제들은 18세기 후반부터 집안에 보관돼 있던 한역서학서를 읽고 있었는데, 그 중 정약전은 1779년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에 참석해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고 신앙으로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한국 천주교가 불교의 사찰에서 처음 태동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마재성지에는 벽돌로 지어진 크고 웅장한 건물 대신 나무로 지은 소박한 성당이 있다. 앞마당에는 한복을 입은 성모상이, 성전 안에는 한복을 입은 십자가 예수상이 있다. 천주교가 조선에 처음 전해졌을 때 한옥에서 예배를 보았다는 걸 떠올리면 한옥 성전과 한복 입은 예수님이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마재성지는 천주교를 받아들인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 4형제와 함께 대를 이어 순교한 정약종 가족을 기리는 성지다. 정약용 형제들과 천주교의 인연은 너무 깊었다. 초기 천주교회사의 주요 인물들과 가족관계로 이어진다. 맏형인 정약현의 처남은 한국천주교회의 성조로 불리는 이벽이고, 사위는 ‘백서’로 유명한 황사영이었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인 이승훈은 정약용의 누이와 결혼했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사촌이다. 특히 정약용의 셋째 형 정약종은 본인과 부인(유선임), 아들(정하상), 딸(정정혜)이 모두 참수돼 순교했다. 마재성지의 지정태 주임신부는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은 정식 서품을 받은 신부가 없던 시절 ‘가성직 제도’로 임명된 숨겨진 열 명의 신부 중 한 명이었다”고 소개했다. ● 실학박물관에서 만난 추사정약용 생가 인근에 있는 실학박물관에는 정약용을 비롯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학문적 업적과 생애가 총망라돼 있다. 서울에 있는 어떤 고궁이나 박물관보다 현재에 더욱 절실히 다가오는 실용적 학문의 가르침을 얻어갈 수 있는 전시가 많다. 현재는 특별전시회로 조선시대 서체의 혁신을 이뤘던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글씨를 현대 작가들이 재해석한 ‘추사, 다시’ 전시회(10월26일까지)가 열리고 있다. ‘화요’ ‘참이슬’ 등을 쓴 한글 서예가인 강병인은 추사의 세한도에 담긴 사유를 바탕으로 한글 ‘솔’ 자를 세종의 한글 창제 원리에 맞춰 구조를 해석한 작품을 선보였다. 일민미술관의 ‘히스테리아’ 전시회에 참가했던 레터링 디자이너 김현진은 추사의 ‘유희삼매(遊戱三昧)’와 ‘괴(怪)’를 재해석한 설치작품을 만들었다. 추사 글씨의 독창성과 개성을 뜻하는 ‘괴’와 ‘졸(拙)’의 미학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은 작품이다. 디자인 스튜디오 ‘DDBBMM’은 고무도장 낙관을 이용해 전각에도 조예가 깊었던 추사를 기린다. 김정희의 여러 작품에서 필획을 추출해 고무도장으로 제작해 시, 글씨, 그림, 도장이 어우러지는 작품을 만들었다. 북디자이너 함지은은 추사의 작품 ‘사야(史野)’를 한 권의 책으로 디자인해 엮어냈고, 디자이너 양장점은 추사의 ‘서화동원(書畵同源)’ 정신을 ‘자형동원(字形同源)’으로 재해석한다. 현대의 활자 디자인이 단순하게 평면에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건축이나 조형물처럼 입체적으로 지어지는 구조물이라는 생각이다. 실학박물관 앞에는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물을 바라보며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다산생태공원이 있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이곳에서 ‘물멍’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는 사람도 많다. 김필국 실학박물관 관장은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실학자였지만 불교와 천주교와의 인연도 깊다”며 “남양주 마재 여행은 다산의 다양한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북해도의 시크릿가든을 찾아서한진관광이 동아일보 김선미 기자와 함께 하는 ‘힐링 가드닝 북해도(홋카이도) 여행’을 선보였다. 8월8일부터 12일까지 4박 5일간 단 한 차례 진행된다. 동아일보에 ‘시크릿가든’을 연재 중인 김 기자가 동행해 정원 해설을 제공한다.북해도 최대 규모의 숲 ‘토카치 천년의 숲’을 시작으로 아름다운 영국식 정원 ‘시치쿠 가든’, 다양한 주제로 정원이 가꿔진 ‘우에노 팜’. 여러 빛깔 장미가 만발한 ‘로이즈 로즈 가든’, 2만여 종의 꽃이 사계절 피어나는 ‘카제노 가든’ 등 북해도를 대표하는 정원들을 만난다. ‘롯카노모리’, ‘토카치힐즈’ 등 북방 자연환경을 살린 초지 정원들도 방문한다.북해도의 사진 명소인 ‘팜 도미타’에서 라벤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후라노의 잼 공방과 치즈 공방을 들러 시식과 체험을 하는 일정은 지쳤던 일상에 동화적 감성을 불어 넣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닝구르 테라스’에서는 자작나무 숲속 통나무집 공방에서 수공예품을 감상하며 산책할 수 있다. ‘신후라노 프린스 호텔’, ‘토카치카와 온천 호텔’, ‘오모7 아사히카와’ 등 온천과 자연이 어우러진 특급 숙소들이 여행의 품격을 높인다.이번 여행에서는 ‘정원의 위로’(민음사) 저자인 김 기자의 정원 인문학 강의도 마련돼 있다. 한진관광 측은 “정원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찾는 분들이 식물의 생명력과 정원을 가꾼 사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깊이 있는 여행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이 여행은 대한항공 전세기로 인천공항에서 출발하며 선착순 모집이다. 한진관광 홈페이지와 고객센터(1566-1155)를 통해 문의 및 예약할 수 있다.글·사진 남양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5-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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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해도도 좋은데 가든 전문가와 함께 하는 정원 여행이라니”

    한진관광이 동아일보 김선미 기자와 함께 하는 ‘힐링 가드닝 북해도(홋카이도) 여행’을 선보인다. 8월 8일부터 12일까지 4박 5일간 단 한 차례 진행되는 이번 여행에는 ‘정원의 위로’ 저자인 김 기자가 동행해 정원과 식물의 세계로 이끈다. 북해도 최대 규모의 숲 ‘토카치 천년의 숲’을 시작으로 침엽수로 구성된 ‘마나베 정원’, 2만여 종의 꽃들이 사계절 피어나는 ‘카제노 가든’, 12개의 주제가 있는 영국식 정원 ‘우에노팜’, 다양한 빛깔의 장미가 만발한 ‘로이스 로즈 가든’ 등 정원 애호가들이 사랑하는 명소들을 여행한다. 롯카노 모리, 시치쿠 가든, 토카치힐즈 등 개성 넘치는 장소들도 방문한다. 뿐만 아니라 후라노의 잼 공방과 치즈 체험, 라벤더로 유명한 팜 도미타, 닝구르 테라스 등 자연 체험도 제공된다. ‘신후라노 프린스 호텔’, ‘토카치카와 온천 호텔’, ‘오모7 아사히카와’ 등 온천과 자연이 어우러진 고급 숙소들이 여행의 품격을 높인다. 모든 일정에는 김 기자의 전문 해설이 동반되며 정원의 철학과 조경 의미에 대한 현장 강의도 마련돼 있다. 한진관광 측은 “정원과 자연을 통해 마음의 여유를 찾고자 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 만큼 식물의 생명력과 조경 디자인에 담긴 이야기를 느끼는 깊이 있는 여행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이번 여행은 대한항공 전세기로 인천공항에서 출발하며 선착순 모집이다. 한진관광 홈페이지와 예약센터를 통해 문의 및 예약할 수 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5-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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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 요한 찬가 라틴어 가사에서 따온 ‘도레미파솔라시’[브레인 아카데미 플러스]

    ‘도는 하얀 도화지 / 레는 둥근 레코드 / 미는 파란 미나리 / 파는 예쁜 파랑새 / 솔은 작은 솔방울 / 라는 라디오고요 / 시는 졸졸 시냇물 / 다 함께 부르자∼!’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1965)에서 주인공 마리아가 폰 트랩 대령 7남매에게 ‘도레미송’을 가르쳐 준다. 서양 음악 기초인 7음계를 재미있는 비유로 알려 주는 이 노래는 세계적으로 히트했고 우리나라에서도 한글로 개사돼 널리 불렸다. 초등학교 음악시간에 처음 배우는 것도 ‘도 레 미 파 솔 라 시’라는 계이름이다. 이 계이름은 각각 어떻게 지어졌을까.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음악을 배우려면 선생님이 불러 주는 멜로디를 하나하나 다 외워야 했다. 한 곡을 완전히 외우는 데 몇 년이 걸리기도 했고, 사람마다 음을 다르게 기억해서 멜로디가 바뀌는 일도 많았다. 유럽 중세 시대 들어 점과 선 같은 기호를 사용해 음의 높낮이를 기록하는 네우마(neuma)가 쓰이기 시작했다. 네우마란 그리스어로 제스처라는 뜻이다. 멜로디 흐름을 가르치던 지휘자 손짓을 종이에 옮겨 놓은 것이다. 중세 그레고리오 성가는 한 사람이 부르는 단선율 음악이다. 네우마로 표기하면 앞 음보다 뒷 음이 조금 더 올라간다거나 내려간다는 정도만 알 수 있다. 여전히 정확한 음을 표기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 점차 여러 성부로 된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다양한 목소리가 어우러지면서 화음도 생기고 구성도 훨씬 복잡해졌다. 무반주로 부르는 다성음악 성가가 아카펠라(acapella)다. 예배당을 뜻한 단어 카펠라(capella) 앞에 ‘a’를 붙여 예배당풍 노래를 뜻한다. 11세기 초 이탈리아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사 귀도 다레초(992∼1050)는 수도원에서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부르는 성가를 더 쉽게 가르치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다 악보에 그은 선에 네우마를 정리해서 멜로디 높낮이까지 시각적으로 표현하기로 했다. 그는 4개의 선을 그은 4선 악보(이후 5선 악보로 발전)를 만들고 계이름을 창시했다. 그는 일곱 줄로 된 ‘성 요한 찬미가’ 라틴어 가사 가운데 여섯 번째 줄까지 각 줄 첫 음절이 한 음씩 차례대로 올라가는 음계의 여섯 음과 대응한다는 것에 착안해, 이 여섯 음절을 따서 계이름을 ‘ut, re, mi, fa, sol, la’로 정했다. 우트(ut)는 나중에 라틴어로 하느님을 뜻하는 도미누스(Dominus)의 ‘도(do)’를 따와서 바꿨다. ‘시(si)’는 나중에 가사 일곱 번째 줄에서 응용해 만들어졌다. 서양에서도 언어마다 계이름이 조금씩 다르다. 프랑스에서는 도 대신에 ‘위트(ut)’도 사용하며 영어에서는 시 대신 ‘티(ti)’라고도 한다. 오늘날 7음계 5선 악보로 발전한 귀도의 기보법은 10년 걸리던 성가 공부를 1년 안에 끝낼 수 있을 정도로 획기적이었다고 한다.QR코드를 스캔하면 26일 채널A에서 방송된 브레인 아카데미 ‘역사편’ 관련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음악편’은 7월 3일 오후 10시 방송됩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5-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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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장 대화재의 나비효과? ‘연극+발레’로 탄생한 뮤지컬[브레인 아카데미 플러스]

    《궁금하다 생각했지만 그냥 지나쳤던, 하지만 알아두면 분명 유익한 것들이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일 수도 있고 최신 트렌드일 수도 있죠. 동아일보는 과학, 인문, 예술,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오∼ 이런 게 있었어?’라고 무릎을 칠 만한 이야기들을 매 주말 연재합니다. 이 스토리들은 다음주 목요일 채널A의 지식퀴즈쇼 ‘브레인 아카데미’에서 보다 재미있고 흥미롭게 만날 수 있습니다. 기사를 미리 읽은 분이라면 방송 중 퀴즈가 나올 때마다 자신있게 “정답”을 외쳐보세요.》“한국은 미국 엔터테인먼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4대 상을 모두 석권했다.” 서울 대학로 소극장에서 시작된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8일 토니상 6개 부문을 휩쓸자 영국 BBC 방송은 이렇게 ‘K컬쳐의 파워’에 대해 다시 한번 놀라움을 표시했다. 미국 4대 엔터테인먼트상으로 불리는 그래미상(1993년 소프라노 조수미) 오스카상(2020년 ‘기생충’) 에미상(2022년 ‘오징어 게임’)에 이어 K뮤지컬이 미 브로드웨이까지 제패한 것이다. ‘공연계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토니상은 미 뮤지컬 및 연극계 최고 권위 상이다. 뮤지컬 장르 자체가 미국적인 것이어서 영어권이 아닌 독일, 프랑스 작품이 토니상을 받은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한국 창작 뮤지컬이 작품상, 연출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음악상, 무대디자인상까지 6개 상을 거머쥐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국 뮤지컬 시장은 미국 영국 일본에 이어 세계 4위 매출 규모(2024년 기준 연 4651억 원)로 성장해 뉴욕 브로드웨이도 무시 못하는 시장이 됐다. 공연통합전산망(KOPIS)에 따르면 2023년부터 공연 시장 매출 규모는 영화 시장을 넘어섰다. 지난해 공연 시장 매출액은 영화보다 2500억 원이 더 많았는데, 전 세계가 열광하는 K팝 콘서트 다음으로 매출액이 큰 뮤지컬의 약진 덕분이다. 한국 창작 뮤지컬은 각각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명성황후’ ‘난타’의 해외 진출을 시작으로 ‘위대한 개츠비’와 ‘마리 퀴리’가 브로드웨이와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장기 공연에 성공했다. ‘팬레터’ ‘레드북’ ‘유앤잇’ ‘인사이드 윌리엄’ 같은 작품도 해외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탄생은 우연? 필연? 전 세계 뮤지컬 중심지 브로드웨이에는 42개 대형 극장이 있다. 오프브로드웨이까지 합치면 400개 넘는 공연장이 몰려 있다. 극장에서 펼쳐지는 뮤지컬은 눈을 즐겁게 하는 스펙터클한 춤과 마술 같은 무대, 귀에 쏙쏙 박히는 뮤지컬 넘버(노래), 그리고 가슴을 울리고 웃기는 스토리로 대중을 열광시킨다. 브로드웨이에서 연기와 음악, 춤이라는 세 요소를 갖춘 최초의 뮤지컬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국내 대표적인 뮤지컬 음악감독 겸 지휘자 김문정 감독은 “최초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우연히 태어났다”고 설명한다. 시대를 풍미하는 명작이나 예술 장르는 실수에서 탄생하기도 하는 법이다.1866년 여름. 브로드웨이 3000석 규모 공연장 니블로스 가든에서는 연극 작품 초연이 준비되고 있었다. 작가 찰스 M 바라스가 쓴 판타지 멜로드라마 ‘더 블랙 크룩’이었다. 흑마법사를 주인공으로 미녀와 영웅이 등장해 악마와의 계약 같은 어두우면서도 환상적인 스토리를 담은 작품이었다. 그때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생기기 전까지 뉴욕 최고 오페라하우스로 명성을 떨치던 극장 아카데미 오브 뮤직에서 큰불이 났다. 이곳에서는 당시 프랑스 발레단이 개막을 불과 며칠 앞두고 화려한 쇼를 준비하고 있었다. 극장이 전소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다행히 발레단 무용수가 다치거나 죽지는 않았지만 의상과 장비 일부가 탔다. 미 순회공연을 계획하고 있던 프랑스 발레단은 공연장을 잃고 해산 위기에 처했다. ‘더 블랙 크룩’ 공연에 넣을 만한 볼거리가 더 없을까 고민하던 극장장 겸 제작자 윌리엄 휘틀리는 이 소식을 듣고 기상천외한 결단을 내린다. 연극이 진행되는 도중에 발레단 공연을 넣자는 결정이었다. 1866년 9월12일 니블로스 가든에서 초연된 ‘더 블랙 크룩’에는 중간중간 요정, 마법, 지옥, 궁전 같은 장면을 상징하는 발레 공연이 들어갔다.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은 100명 넘는 무용수들의 춤은 환상적이고 화려했다. 관객들은 발레와 음악, 연극, 마술이 한꺼번에 나오는 쇼에 열광했다. 그러나 일부 언론과 종교인들은 내용이 엉성하고 의상과 노래는 선정적이라며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미국 소설 거장 마크 트웨인은 “이것이 바로 아라비안나이트(천일야화)의 경이로움이 실현된 것”이라고 호평했지만, 영국 소설 대가 찰스 디킨스는 “연극과 발레의 조화가 터무니없다”고 비판했다. 미 일간 뉴욕헤럴드는 맨다리가 드러나는 의상과 외설적인 춤에 대해 “소돔과 고모라에 있었을 법한 볼거리가 브로드웨이에 등장했다”고 악평을 퍼부었다. 이런 논란은 대중이 더 관심을 갖게 만드는 광고 효과로 이어져 ‘더 블랙 크룩’은 엄청난 흥행을 거뒀다. ‘더 블랙 크룩’은 1866년 초연 후 474회나 공연되며 매진 사례를 이어갔다. 이후 수십 년간 지방 투어와 재공연을 했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뮤지컬 넘버 ‘You Naughty, Naughty Man(당신은 장난꾸러기, 나쁜 남자야)’는 20세기 들어서까지 불려졌다. 미 공연·극장 역사가 제럴드 보드먼은 “‘더 블랙 크룩’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 극장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평했다. 동서양에서 노래하면서 이야기(연극)를 풀어가는 공연 장르는 판소리, 오페라, 경극 등 다양하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등장한 뮤지컬이 단번에 사람들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수십 명에서 100명 가까운 댄서들의 스펙터클한 안무다. 차이콥스키 발레 ‘백조의 호수’ 실질적인 주인공이 무대를 꽉 채운 호숫가 백조들의 춤인 것처럼, ‘브로드웨이 42번가’에서 잘 드러나듯 반짝이 의상을 입은 코러스들의 화려한 춤이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트레이드마크다. ● 뮤지컬이 코미디인 이유 미국에서 뮤지컬은 ‘뮤지컬 코미디’로 불린다. 왜 코미디가 붙을까? 뮤지컬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귀족 오페라에 대한 반발로 유럽에서 태동한, 유머와 위트와 풍자 가득한 희가극(喜歌劇)이 있기 때문이다. 오페라는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귀족 문화와 성악 중심 서사극이다. 반면 1728년 런던 리처드 스틸 극장에서 초연된 희가극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는 유행하던 이탈리아식 고전 오페라를 조롱하고 패러디한 대중문화의 반란이었다. 주인공은 귀족이나 영웅이 아니라 도둑, 창녀, 사기꾼, 부패한 정치인, 하층민이었고 고급스런 성악 대신 대중에게 친숙한 민요, 유행가, 댄스곡 선율을 사용했다. 주인공인 도적 두목 매키스는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며 체포와 탈출을 반복한다. 18세기 영국 정치계와 법조계의 부패와 위선, 계급 불평등을 한껏 풍자한 장면에 관객은 깔깔대고 웃었다. 초연 당시 62회 연속 공연된 이 작품은 엘리트 예술 오페라를 ‘대중을 위한 오페라’로 변신시켰다. 이 작품은 200년 뒤인 1928년 독일 베를린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Die Dreigroschenoper·The Treepenny Opera)’로 부활했다. 주인공이던 매키스는 ‘칼잡이 맥’으로 바뀌었다. 작곡가 쿠르트 바일은 재즈, 왈츠, 탱고 같은 당시 현대음악을 활용해 노래를 만들었다. 결국 유럽에서 오페레타, 발라드 오페라, 징슈필(Singspiel·연극 중간에 노래와 춤, 기악곡이 삽입되는 독일 대중 음악극) 등으로 불리던 희가극이 미국에 들어와 현대적이고 상업적인 뮤지컬 장르로 확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박천휴(극본)와 윌 애런슨(작곡) 콤비의 ‘어쩌면 해피엔딩’도 미래에 버려진 로봇들이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풍자하지만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반딧불이를 보러 제주의 숲을 찾아가는 주인공 로봇들의 아련하고 따뜻한 감성이 세계인 가슴에 닿은 듯하다. 어쩌면, 해피엔딩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이 담긴.QR코드를 스캔하면 26일 채널A에서 방송된 브레인 아카데미 ‘역사편’ 관련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음악편’은 7월 3일 오후 10시 방송됩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5-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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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회 가톨릭 포럼 ‘다시 쓰는 민주주의’

    천주교 서울대교구 매스컴위원회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회홍보위원회와 공동으로 ‘제25회 가톨릭포럼’을 개최한다. 이번 포럼은 가톨릭커뮤니케이션협회의 주관으로 25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린다.올해 포럼의 주제는 ‘다시 쓰는 민주주의’다. 지난해 계엄 사태와 대통령 탄핵 등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드러난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성찰하고, 새 정부 출범 이후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의 새로운 방향과 청사진을 모색하는 자리가 될 예정이다.발제자로는 김선택 명예교수(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김누리 교수(중앙대학교 유럽문화학부 독일어문학전공)가 나선다. 김선택 교수는 ‘헌법은 민주주의의 나침반이 될 수 있는가?’를 주제로, 김누리 교수는 ‘후기 파시즘 사회를 넘어, 대한민국 대전환’을 주제로 발표한다. 이어지는 토론 시간에는 발제자 외에도 박동호 신부(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정회옥 교수(명지대학교 공공인재학부 정치외교학전공), 김창숙 박사(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가 패널로 참여해 다양한 시각에서 논의를 이어간다. 사회는 이재후 KBS 아나운서가 맡는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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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생공락’… 공예와 지역, 일상을 잇다

    “직접 한지 부채를 만들어 보니 장인들의 손길이 얼마나 정교한지 새삼 느꼈어요.”‘2025 공예주간’이 열린 전북 전주 한옥마을을 찾은 관람객 김상은 씨(34)는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행사장을 찾은 가족 단위 방문객들도 “아이와 함께 공예를 배우며 특별한 추억을 쌓았다”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5월의 전주 한옥마을은 공예와 사람, 그리고 이야기가 어우러진 살아있는 축제의 장이었다.국내 최대 공예 축제인 ‘2025 공예주간(Korea Craft Week)’이 5월 16∼25일 열흘간의 여정을 마치고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8회를 맞은 ‘공예주간’은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가 주최하고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하 공진원·원장 장동광)이 주관하고 있다. 올해 행사 주제는 ‘공생공락(共生工樂)’. 서울부터 제주까지 전국의 공방과 갤러리, 문화예술단체 등이 총 135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한 결과 약 17만 명의 참관객이 참여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공예주간 거점도시 3곳인 강원 고성, 전북 부안, 전주를 중심으로 다양한 지역주민이 중심이 되는 축제를 만들었다. 청정 자연환경의 도시 고성은 달홀문화센터를 중심으로 해양 생태와 공예를 연결한 친환경 전시 ‘당신과 함께 그린 고성’과 지역의 관광자원을 활용한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상감청자의 중심지 부안은 지역의 공예문화유산인 상감청자를 활용해 부안만의 특색 있는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사기장과 함께 기물 성형에서부터 상감 기법까지 경험해 볼 수 있는 ‘상감 클래스’를 운영했다. 특히 부안의 유명 베이커리 카페와 협업해 청자 공예품을 전시하고 특별 메뉴를 개발해 판매한 ‘부안 미술(美術)랭’, ‘사금파리 발굴체험’은 어린이, 가족들의 참여와 호응이 높았다. 전통문화의 도시 전주는 지역의 대표 명소인 한옥마을을 중심으로 전시, 체험, 마켓, 투어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전개했다. 전주공예품 전시관 마당에서의 개막 공연을 시작으로 전주 대표 공예인 한지와 지우산을 주제로 한 공예특별전 ‘공예유람스팟’을 비롯해, 전주의 장인 공방을 방문하고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공방투어도 운영했다. 공진원은 3개 거점도시 외에도 2월 공모에서 최종 선정된 21개 프로그램을 전국 곳곳에서 진행했다. 특히 서해 5도 주민들을 위해 찾아가는 공예 체험 프로그램 ‘피스 아일랜드 크래프트 페스타’를 운영해 공예문화 향유의 사각지대에 있는 지역주민을 대상으로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올해 공예주간의 또 다른 특징은 마켓프로그램의 활성화. 제주 서귀포시 카페베케에서 진행된 ‘일상이 공예-파치마켓‘(귤림공방)을 비롯해 19개 마켓 프로그램이 전국 각지에서 펼쳐져 지역의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이 소개, 판매됐다. 공진원은 올해 4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페스티벌시티몰에 문을 연 ‘KOREA 360’ 내 한국 공예 홍보관에서는 12인의 작가가 출품한 도자기, 나전칠기, 유리컵, 한지부채, 오브제 등 35종의 공예품을 선보였고, 중동지역 소비자를 위한 공진원의 온라인 유통 대행사이트(Pinkoi, NOTAG SHOP)에서도 44종의 공예품을 선보이는 등 한국 공예의 지속적인 국내외 홍보를 위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한국 공예 해외유통망 개척을 위해 13개 갤러리와 사업체를 선정해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 열리는 컬렉트, 메종오브제, 런던크래프트위크 등에 참가해 한국 공예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확대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공예트렌드페어’를 개최해 생산자와 소비자의 교류과 국내외 판로 확장을 도모하고 있다. 올해 20주년을 맞은 공예트렌드페어의 참여 작가와 참가사는 7월 10일까지 공모를 진행 중이다. 장동광 공진원장은 “올해 공예주간은 공생공락(共生工樂)이라는 주제 아래 공예가 사람과 사람, 지역과 일상을 잇는 소통의 매개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며 “앞으로도 더 많은 국민이 일상 속에서 공예를 편하게 접하고 즐길 수 있도록 공예문화 활성화에 지속적으로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5-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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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생공락(共生工樂)’…공예와 지역, 일상을 잇다[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직접 한지 부채를 만들어보니 장인들의 손길이 얼마나 정교한지 새삼 느꼈어요.”‘2025 공예주간’이 열린 전주 한옥마을을 찾은 관람객 김상은 씨(34)는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행사장을 찾은 가족 단위 방문객들도 “아이와 함께 공예를 배우며 특별한 추억을 쌓았다”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5월의 전주 한옥마을은 공예와 사람, 그리고 이야기가 어우러진 살아있는 축제의 장이었다.국내 최대 공예 축제인 ‘2025 공예주간(Korea Craft Week)’이 지난 5월 16일~25일 열흘간의 여정을 마치고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8회를 맞은 ‘공예주간’은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가 주최하고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원장 장동광)이 주관하고 있다. 올해 행사 주제는 ‘공생공락(共生工樂)’. 공예가 지닌 일상적 가치와 문화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공예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자리라는 의미다. 서울부터 제주까지 전국의 공방과 갤러리, 문화예술단체 등이 총 135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한 결과 약 17만 명의 참관객이 참여한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공예주간 거점도시 3곳인 고성, 부안, 전주를 중심으로 지역 특색이 반영된 공예문화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지역주민이 중심이 되는 축제를 만들었다. 청정한 자연환경의 도시 고성은 달홀문화센터를 중심으로 해양 생태와 공예를 연결한 친환경 전시 ‘당신과 함께 그린 고성’과 지역의 관광자원을 활용한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특히 4월 말부터 공예 워크숍을 진행해 지역주민이 자신의 개성을 담은 공예품을 처음부터 기획하고 전시할 수 있도록 참여 기회를 넓혔다. 또한 서로재에서는 공예를 중심으로 차(茶) 문화, 공연이 함께 어우러진 ‘공예로 연결’을 선보였고, 해쉼터에서는 고성, 속초, 양양, 강릉 등 영동권 작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영동 하나로공예 마트’가 열렸다. 공예주간 동안 1만2066 명이 고성을 찾았다. 상감청자의 중심지 전북 부안은 지역의 공예문화유산인 상감청자를 활용해 부안만의 특색있는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소원을 적어 가마에 넣는 전통 방식의 가마소성 체험과 청자 제작에 사용되는 흙을 밟아보는 질밟기 체험, 사기장과 함께 기물 성형에서부터 상감 기법까지 경험해 볼 수 있는 ‘상감 클래스’를 운영했다. 특히 부안의 유명 베이커리 카페와 협업하여 청자공예품을 전시하고 특별 메뉴를 개발하여 판매한 ‘부안 미술(美術)랭’은 시각과 미각의 공감각적 체험으로 인기를 끌었다. 특별히 조성된 발굴 체험장에서 직접 사금파리를 발굴하여 도판을 완성하는 어린이 체험인 ‘사금파리 발굴체험’은 어린이, 가족들의 참여와 호응이 높았다. 공예주간 동안 2만6273명이 부안을 찾았다. 전통문화의 도시 전주는 지역의 대표 명소인 한옥마을을 중심으로 전시, 체험, 마켓, 투어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전개했다. 전주공예품 전시관 마당에서 개막 공연을 시작으로 전주 대표 공예인 한지와 지우산을 주제로 한 공예특별전 ‘공예유람스팟’을 비롯해, 전주의 장인 공방을 방문하고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공방투어인 ‘공예유람단: 사흘간의 동행’도 운영했다. 전주 공예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공예유람마켓’은 개막하자마자 성황을 이뤘다. 지역의 개성을 담은 공예품을 두루 감상할 수 있는 기회와 함께 포토 플레이스, 체험 등 즐길거리가 풍부해 방문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전주에는 5만2187명이 공예주간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공진원은 3개 거점도시 외에도 지난 2월 공모에서 최종 선정된 21개의 프로그램을 전국 곳곳에서 진행했다. 서울 KCDF갤러리에서는 ‘미래공예’ 전시가 열렸으며, 남산골한옥마을에서는 현대와 전통공예가 어우러진 전시 ‘남산골 HOME’를 선보였다. 특히 평소 문화예술 경험이 제한된 서해 5도 주민들을 위해 찾아가는 공예 체험프로그램 ‘피스 아일랜드 크래프트 페스타’를 운영해 공예문화 향유의 사각지대에 있는 섬주민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강원도의 복(福) 기원과 액막이 문화를 알 수 있는 강릉시의 ‘복(福)으로 치유하는 길상전(展) 및 액막이 공예테라피’, 광주광역시의 청년 작가들과 함께하는 체험과 마켓 ‘2025 빛의 향연, 광주에서 잇다’, 함창명주의 전통과 현재,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경북 상주시의 ‘천년지사: 천년의 실, 함창명주’ 등도 관람객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었다. 특히 부여의 공예마을 규암에서는 ‘크래프트 커먼즈; 머무르고 탐구하고 연결하는 공예공동체’ 투어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전국에서 모집한 30여명의 방문객이 2박3일 동안 규암마을에 머물며 공방에서 작가들과 직접 소통하기도 했다. 경기(여주), 아산, 청주, 전남(나주), 전북(정읍), 진주, 김해의 7개 공예창작지원센터에서도 공예주간을 맞아 ‘소문만복래’, ‘손맛시장’ 등의 전시와 마켓 외 41개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공예의 즐거움을 함께 나눴다. 올해 공예주간의 또 다른 특징은 마켓프로그램의 활성화다. 15개 마켓프로그램이 전국 각지에서 펼쳐졌다. 서귀포시 카페베케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진행된 ‘일상이 공예-파치마켓‘(귤림공방)을 비롯해 19개 마켓 프로그램은 제주를 비롯한 경상·전라권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이 소개·판매됐다. 경남지역에서 열린 ‘크래프트 브릿지’에서는 일상공예품을 비롯해 터프팅 거울, 종이로 만든 대형 조명등처럼 개인의 취향을 반영하는 독특한 공예품을 원하는 지역소비자들의 수요를 만족시켰다. 공진원은 한국 공예품의 홍보와 소비를 위해 다양한 국내외 공예유통망 확대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올해 4월, 두바이 페스티벌시티몰에 문을 연 ‘KOREA 360’내 한국공예 홍보관에서는 12인의 작가가 출품한 도자기, 나전칠기, 유리컵, 한지부채, 오브제 등 35종의 공예품을 선보이고 있고, 중동지역 소비자를 위한 공진원의 온라인 유통 대행사이트(Pinkoi, NOTAG SHOP)에서도 44종의 공예품을 선보이는 등 한국공예의 지속적인 홍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해외시장 진출을 위한 ‘한국공예 해외유통망 개척’ 사업에서는 13개 갤러리와 사업체를 선정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 개최되는 콜렉트, 메종오브제, 런던크래프트위크 등 주요 행사에 참여해 한국공예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확대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공예유통 프로모션 사업’을 통해 상품개발부터 판매, 홍보까지 시장에서 공예품이 활발히 유통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한다. 또한 전시·판매·유통 종합행사인 ‘공예트렌드페어’ 개최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교류 기회를 제공하고 국·내외 판로 확장을 도모하고 있다. 올해 20주년을 맞은 공예트렌드페어의 참여작가와 참가사는 7월 10일까지 공모 진행 중이다. 공진원은 매년 공예주간과 함께 국내외 유통망사업을 통해 한국공예의 국내 소비와 글로벌 마케팅을 강화하고 있다.장동광 공진원장은 “올해 공예주간은 ‘공생공락(共生工樂)’이라는 주제 아래, 공예가 사람과 사람, 지역과 일상을 잇는 소통의 매개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며 “앞으로도 더 많은 국민이 일상 속에서 공예를 편하게 접하고 즐길 수 있도록 공예문화 활성화에 지속적으로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5-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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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골마을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미슐랭 스타’길[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프랑스 타이어 회사 미슐랭(Michelin·미쉐린)이 펴내는 관광 안내서는 두 가지 색깔이 있다. 미슐랭 레드북(Red Guide)은 우리가 잘 아는 맛집과 호텔을 추천하는 책이다. 미슐랭 그린북(Green Guide)은 관광 명소나 드라이브 코스를 소개하는 여행 안내서다. 미슐랭 그린 가이드가 유일하게 한국 아름다운 도로에 별(★)을 붙여 준 곳이 있다. 바로 경북 안동 도산서원에서 봉화를 거쳐 강원 태백 초입까지 이어지는 국도 35호선, 약 75km 구간이다.● 봉화 미슐랭 스타 길경북 봉화 35번 국도는 청량산을 끼고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을 따라 이어진다. ‘산(山)태극 수(水)태극’. 산과 물이 서로 어우러지며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봉화군 명호면 범바위전망대에 서면 낙동강이 굽이쳐 물도리를 이루는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35번 국도는 드라이브도 좋지만 걷기에도 좋다. 퇴계 이황이 청량산으로 가던 낙동강변 4~5km 구간 ‘예던길’은 대표적인 산책로. 선유교와 학소대, 농암종택, 고산정 풍경은 퇴계가 ‘나 먼저 그림 속(畵圖中)으로 들어가네’라고 표현했을 정도다.첩첩산중 봉화는 산이 깊고 골도 많다. 선비들은 경치가 좋은 곳에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지었다. 선비의 고장 봉화에는 누정(樓亭)이 103곳이나 남아 있다. 봉화 ‘정자문화생활관’에 가보면 보물 ‘청암정’을 비롯해 수많은 누각과 정자가 소개돼 있다.그중에서 ‘춘향전’ 이몽룡의 실제 모델이 된 인물이 지었다는 ‘계서당(溪西堂)’이 흥미로워 찾아가 봤다. 봉화군 물야면에 있는 계서당 종택 안마당에는 판소리 춘향전 암행어사 출두 장면에서 이몽룡이 읊었던 한시가 걸려 있다.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황금 술잔의 맛있는 술은 천 사람의 피요)’로 시작되는 이 유명한 시가 왜 경북 종갓집에 걸려 있는 것일까?1613년 이 시를 쓴 주인공은 조선 중기 문신이던 계서 성이성(溪西 成以性·1595~1664)이었다. 설성경 연세대 국문학과 명예교수는 ‘춘향전의 비밀’이란 책에서 춘향과의 러브스토리주인공인 이몽룡의 실제 모델이 성이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실제로 성이성의 아버지 성안의는 1606년(선조 40년)에서 1611년까지 남원부사(府使)를 지냈다. 성이성은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 와서 12세부터 16세까지 살았다. 성이성은 인조 5년(1627년) 문과에 급제한 후 4번이나 호남과 호서 지역 암행어사로 등용되었고, 담양부사 진주부사를 비롯해 6개 고을 수령을 지냈다. 한시 금준미주천인혈은 성이성의 ‘호남암행록(湖南暗行錄)’과 일기 등을 정리해서 펴낸 ‘교와문고 3권’에 수록돼 있다. 그는 52세 때인 1647년 남원 광한루에 들러 “소년 시절 일을 생각하고는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소감을 적었다. 여기서 ‘소년 시절 일’이란 춘향이와의 이루지 못한 로맨스라는 것이 설 교수의 해석이다. 암행어사 성이성이 호남을 두루 암행했지만 실제로 남원에 출두했다는 기록은 없다. 판소리에서와 달리 현실 속에서 이몽룡과 성춘향은 서로 빗나간 채 생전에 다시 만나지 못했다.한양으로 아버지를 따라 떠난 성이성은 곧 고향 봉화로 내려갔고, 18세 되는 1613년에 이웃 닭실마을 부유한 집안 여인과 결혼했다. 그해에 혼수로 받은 유산으로 계서당을 지었다. 계서당 뒷편에 있는 소나무 한 그루는 5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서 있다. 서남쪽 남원 방향으로 굽은 이 소나무는 ‘이몽룡 소나무’로 불린다. 계서당 대청마루에는 지난해 전남 담양군민이 ‘전 담양부사 성이성’에게 준 ‘군민의 상’ 특별상이 걸려 있다. 성이성이 담양부사 재직 시절 영산강 범람과 수해를 막기 위해 제방인 ‘관방제림’을 만든 공을 400여 년 만에 기리기 위한 것이다. 담양군민이 봉화의 옛 선비에게 특별상을 준 것은 무척 흥미롭다. 봉화군은 10월 ‘제1회 전국 이몽룡 선발대회’를 연다고 한다. 남원 ‘춘향 선발대회’는 올해로 95회째를 맞는다. 영호남 화합 차원에서 남원 춘향이와 봉화 이몽룡이 만나는 TV 연예 프로그램도 한번 만들어 보면 어떨까.● 붉은 여우는 죄가 없다봉화에 정자문화생활관이 있다면 영주에는 소수서원과 선비촌, 선비세상 같은 유교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런데 영주 여행에서 뜻밖의 감동을 얻은 곳은 순흥면에 있는 ‘소백산 여우생태관찰원’이었다. 멸종위기 1급 야생동물인 토종 붉은 여우 복원 사업을 위한 시설이다. 붉은 여우는 줄임말로 불여우, 경상도 사투리로 불여시로 불린다. 아마도 가장 오해를 많이 받아 온 동물이 아닐까.동서양 전설, 설화, 동화 속에서 여우는 교활하고 속임수와 권모술수, 변신의 상징으로 나온다. 때로는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다. 특히 과거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서 9개 꼬리를 가진 1000년 묵은 여우 구미호(九尾狐)가 여인으로 변신해 유혹한 남성의 간을 빼먹는 장면은 공포 그 자체였다.여우는 주둥이가 개보다 길고 뾰족하다. 털이 풍성한 꼬리도 몸통만큼 길다. 털은 황갈색이지만, 햇빛 비치는 곳에 나가면 붉은색으로 보인다고 하여 붉은 여우다. 여우는 하드웨어는 개를 닮았지만, 습성은 고양이를 닮았다. 민가 주변 야산에 살면서 쥐를 잡아먹고 산다. 고양이처럼 경계심이 가득해 사람을 보면 겁내고 피한다. 사람을 공격하는 구미호는 전설일 뿐이다. 여우는 자연에서 단독 생활, 단독 사냥을 하기 때문에 경쟁종인 삵이나 오소리, 담비, 멧돼지를 당해낼 수가 없다. 무리지어 덤벼드는 들개하고도 싸움이 안 된다. 한반도에서 여우가 멸종된 이유는 1960년대 대대적으로 진행한 ‘쥐잡기 운동’ 여파가 크다. 사람이 뿌려 놓은 쥐약 먹은 쥐를 여우가 먹고 2차 중독으로 대량 멸종됐다. 또한 부유층 패션 아이템이던 ‘여우 목도리’를 위해 마구잡이로 포획돼 털가죽이 벗겨졌다. 여우가 멸종 위기에 처한 것은 여우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한몫했다. 그러나 여우생태관찰원 해설사는 “여우는 우리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라고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 농민들의 골칫거리는 농작물에 큰 피해를 끼치는 고라니와 멧돼지다. 세계적으로 멸종위기 종인 고라니의 90%가 우리나라에 살고 있다. 최상위 포식자가 없기 때문이다. “여우가 좋아하는 먹이 중에 새끼 고라니와 새끼 멧돼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우가 야생 고라니와 멧돼지 숫자를 적절히 조절해 왔죠. 그런데 여우가 멸종되자 그 역할을 해주는 존재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10년 이상 소백산에서 토종 붉은여우 복원 사업을 벌인 결과 지금까지 약 100마리가 야생 적응 훈련을 거쳐 자연으로 돌아갔다. 방사된 여우는 현재 소백산권(圈)을 넘어 강원 원주, 충남 부여, 부산 달맞이고개 등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농가에서는 지금도 고라니와 멧돼지를 잡기 위해 올가미와 덫을 놓고 있다. 그런데 그 덫에 복원 사업을 하고 있는 여우가 잡혀 죽고 있다. 복원팀 직원들은 위치 추적기로 여우의 움직임을 탐사한다. 비정상적인 발신음이 들려올 경우 끝까지 추적해 찾아가 보면 대부분 로드킬을 당하거나, 덫에 걸려 죽거나 다리가 잘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소백산 여우생태관찰원에서 보호하고 있는 여우들은 야생으로 보냈다가 다치거나 병들어서 돌아온 것들이다. 이곳을 방문한 한 학생은 한쪽 다리가 잘린 채 걷는 여우를 보고 “너무 불쌍하다. 여우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자연환경을 잘 보존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맛집=경북 봉화군 물야면 백두대간수목원 가는 길에 있는 ‘봉화객주화덕피자’는 깊은 산골에서 이탈리아 정통 화덕 피자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옛날 보부상들이 목을 축이던 오전약수터에서 떠온 약숫물로 직접 반죽한 수제 도우(dough)에 임실치즈와 루꼴라, 새우, 방울토마토 등을 올려 참나무숯 화덕에서 구워 낸다. 영주 순흥면 소수서원 가는 길에 있는 ‘순흥전통묵집’은 도토리묵이 아니라 메밀묵으로 묵밥을 만든다. 채를 친 메밀묵에 다진 신김치와 무생채를 고명으로 올리고 김과 잘게 썬 파, 참기름, 깨소금 등이 올라간다. 메밀묵은 저칼로리 다이어트 식품이다. 묵으로 부족한 사람은 남은 육수에 공기밥을 말아먹으면 한끼 식사로 든든하다. 봉화, 영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5-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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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골마을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미슐랭 스타’길[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프랑스 타이어 회사 미슐랭(Michelin·미쉐린)이 펴내는 관광 안내서는 두 가지 색깔이 있다. 미슐랭 레드북(Red Guide)은 우리가 잘 아는 맛집과 호텔을 추천하는 책이다. 미슐랭 그린북(Green Guide)은 관광 명소나 드라이브 코스를 소개하는 여행 안내서다. 미슐랭 그린 가이드가 유일하게 한국 아름다운 도로에 별(★)을 붙여 준 곳이 있다. 바로 경북 안동 도산서원에서 봉화를 거쳐 강원 태백 초입까지 이어지는 국도 35호선, 약 75km 구간이다.● 봉화 미슐랭 스타 길경북 봉화 35번 국도는 청량산을 끼고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을 따라 이어진다. ‘산(山)태극 수(水)태극’. 산과 물이 서로 어우러지며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봉화군 명호면 범바위전망대에 서면 낙동강이 굽이쳐 물도리를 이루는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35번 국도는 드라이브도 좋지만 걷기에도 좋다. 퇴계 이황이 청량산으로 가던 낙동강변 4∼5km 구간 ‘예던길’은 대표적인 산책로. 선유교와 학소대, 농암종택, 고산정 풍경은 퇴계가 ‘나 먼저 그림 속(畵圖中)으로 들어가네’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첩첩산중 봉화는 산이 깊고 골도 많다. 선비들은 경치가 좋은 곳에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지었다. 선비의 고장 봉화에는 누정(樓亭)이 103곳이나 남아 있다. 봉화 ‘정자문화생활관’에 가보면 보물 ‘청암정’을 비롯해 수많은 누각과 정자가 소개돼 있다.그중에서 ‘춘향전’ 이몽룡의 실제 모델이 된 인물이 지었다는 ‘계서당(溪西堂)’이 흥미로워 찾아가 봤다. 봉화군 물야면에 있는 계서당 종택 안마당에는 판소리 춘향전 암행어사 출두 장면에서 이몽룡이 읊었던 한시가 걸려 있다.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황금 술잔의 맛있는 술은 천 사람의 피요)’로 시작되는 이 유명한 시가 왜 경북 종갓집에 걸려 있는 것일까?1613년 이 시를 쓴 주인공은 조선 중기 문신이던 계서 성이성(溪西 成以性·1595∼1664)이었다. 설성경 연세대 국문학과 명예교수는 ‘춘향전의 비밀’이란 책에서 춘향과의 러브스토리 주인공인 이몽룡의 실제 모델이 성이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실제로 성이성의 아버지 성안의는 1606년(선조 40년)에서 1611년까지 남원부사(府使)를 지냈다. 성이성은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 와서 12세부터 16세까지 살았다. 성이성은 인조 5년(1627년) 문과에 급제한 후 4번이나 호남과 호서 지역 암행어사로 등용되었고, 담양부사 진주부사를 비롯해 6개 고을 수령을 지냈다. 한시 금준미주천인혈은 성이성의 ‘호남암행록(湖南暗行錄)’과 일기 등을 정리해서 펴낸 ‘교와문고 3권’에 수록돼 있다. 그는 52세 때인 1647년 남원 광한루에 들러 “소년 시절 일을 생각하고는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소감을 적었다. 여기서 ‘소년 시절 일’이란 춘향이와의 이루지 못한 로맨스라는 것이 설 교수의 해석이다. 암행어사 성이성이 호남을 두루 암행했지만 실제로 남원에 출두했다는 기록은 없다. 판소리에서와 달리 현실 속에서 이몽룡과 성춘향은 서로 빗나간 채 생전에 다시 만나지 못했다. 한양으로 아버지를 따라 떠난 성이성은 곧 고향 봉화로 내려갔고, 18세 되는 1613년에 이웃 닭실마을 부유한 집안 여인과 결혼했다. 그해에 혼수로 받은 유산으로 계서당을 지었다. 계서당 뒷편에 있는 소나무 한 그루는 5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서 있다. 서남쪽 남원 방향으로 굽은 이 소나무는 ‘이몽룡 소나무’로 불린다. 계서당 대청마루에는 지난해 전남 담양군민이 ‘전 담양부사 성이성’에게 준 ‘군민의 상’ 특별상이 걸려 있다. 성이성이 담양부사 재직 시절 영산강 범람과 수해를 막기 위해 제방인 ‘관방제림’을 만든 공을 400여 년 만에 기리기 위한 것이다. 담양군민이 봉화의 옛 선비에게 특별상을 준 것은 무척 흥미롭다. 봉화군은 10월 ‘제1회 전국 이몽룡 선발대회’를 연다고 한다. 남원 ‘춘향 선발대회’는 올해로 95회째를 맞는다. 영호남 화합 차원에서 남원 춘향이와 봉화 이몽룡이 만나는 TV 연예 프로그램도 한번 만들어 보면 어떨까.● 붉은 여우는 죄가 없다 봉화에 정자문화생활관이 있다면 영주에는 소수서원과 선비촌, 선비세상 같은 유교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런데 영주 여행에서 뜻밖의 감동을 얻은 곳은 순흥면에 있는 ‘소백산 여우생태관찰원’이었다. 멸종위기 1급 야생동물인 토종 붉은 여우 복원 사업을 위한 시설이다. 붉은 여우는 줄임말로 불여우, 경상도 사투리로 불여시로 불린다. 아마도 가장 오해를 많이 받아 온 동물이 아닐까. 동서양 전설, 설화, 동화 속에서 여우는 교활하고 속임수와 권모술수, 변신의 상징으로 나온다. 때로는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다. 특히 과거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서 9개 꼬리를 가진 1000년 묵은 여우 구미호(九尾狐)가 여인으로 변신해 유혹한 남성의 간을 빼먹는 장면은 공포 그 자체였다. 여우는 주둥이가 개보다 길고 뾰족하다. 털이 풍성한 꼬리도 몸통만큼 길다. 털은 황갈색이지만, 햇빛 비치는 곳에 나가면 붉은색으로 보인다고 하여 붉은 여우다. 여우는 하드웨어는 개를 닮았지만, 습성은 고양이를 닮았다. 민가 주변 야산에 살면서 쥐를 잡아먹고 산다. 고양이처럼 경계심이 가득해 사람을 보면 겁내고 피한다. 사람을 공격하는 구미호는 전설일 뿐이다. 여우는 자연에서 단독 생활, 단독 사냥을 하기 때문에 경쟁종인 삵이나 오소리, 담비, 멧돼지를 당해낼 수가 없다. 무리지어 덤벼드는 들개하고도 싸움이 안 된다. 한반도에서 여우가 멸종된 이유는 1960년대 대대적으로 진행한 ‘쥐잡기 운동’ 여파가 크다. 사람이 뿌려 놓은 쥐약 먹은 쥐를 여우가 먹고 2차 중독으로 대량 멸종됐다. 또한 부유층 패션 아이템이던 ‘여우 목도리’를 위해 마구잡이로 포획돼 털가죽이 벗겨졌다. 여우가 멸종 위기에 처한 것은 여우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한몫했다. 그러나 여우생태관찰원 해설사는 “여우는 우리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라고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 농민들의 골칫거리는 농작물에 큰 피해를 끼치는 고라니와 멧돼지다. 세계적으로 멸종위기 종인 고라니의 90%가 우리나라에 살고 있다. 최상위 포식자가 없기 때문이다. “여우가 좋아하는 먹이 중에 새끼 고라니와 새끼 멧돼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우가 야생 고라니와 멧돼지 숫자를 적절히 조절해 왔죠. 그런데 여우가 멸종되자 그 역할을 해주는 존재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10년 이상 소백산에서 토종 붉은여우 복원 사업을 벌인 결과 지금까지 약 100마리가 야생 적응 훈련을 거쳐 자연으로 돌아갔다. 방사된 여우는 현재 소백산권(圈)을 넘어 강원 원주, 충남 부여, 부산 달맞이고개 등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농가에서는 지금도 고라니와 멧돼지를 잡기 위해 올가미와 덫을 놓고 있다. 그런데 그 덫에 복원 사업을 하고 있는 여우가 잡혀 죽고 있다. 복원팀 직원들은 위치 추적기로 여우의 움직임을 탐사한다. 비정상적인 발신음이 들려올 경우 끝까지 추적해 찾아가 보면 대부분 로드킬을 당하거나, 덫에 걸려 죽거나 다리가 잘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백산 여우생태관찰원에서 보호하고 있는 여우들은 야생으로 보냈다가 다치거나 병들어서 돌아온 것들이다. 이곳을 방문한 한 학생은 한쪽 다리가 잘린 채 걷는 여우를 보고 “너무 불쌍하다. 여우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자연환경을 잘 보존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글·사진 봉화·영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5-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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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여우는 죄가 없다”[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저,저,저~ 백여시!” “여우같은 놈!” 여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많은 설화, 동화, 전설 속에 등장하는 동물입니다. 여우는 대체로 부정적으로 그려집니다. 교활하고, 영리하고, 속임수와 권모술수, 변신의 대가입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 되기도 하죠. 동양에서는 초자연적 존재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천년을 살면 9개의 꼬리를 가지는 여우인 ‘구미호(九尾狐)’ 설화는 한중일에 모두 공통으로 나타나는데요. 구미호는 주로 여자로 변신해 사람을 유혹해 간을 빼먹는 악령으로 묘사됩니다. 일부 설화에서는 구미호가 인간이 되고자 선행을 쌓는 모습도 있지요. 이렇듯 여우는 부정적인 묘사도 있지만, 때론 인간을 돕기도 하는 양면적인 존재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일본 민담에서는 여우 아내 설화(狐の嫁入り)처럼 정을 나누는 대상으로도 나타나지요. ​ 서양에서도 여우는 꾀가 많은 동물로 그려집니다. 이솝우화의 ‘여우와 포도’에서 여우는 포도를 따먹으려 수없이 점프하지만 결국 못따먹자 “저건 신포도 일꺼야”라고 자기 위로를 합니다. 라퐁텐 우화의 ‘여우와 황새’에서 여우는 집에 찾아 온 황새에게 접시에 담긴 스프를 주었다가, 황새가 주둥이가 긴 병에 담긴 음식을 주어서 복수를 당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여우는 ‘전설의 고향’ 등의 TV드라마나 영화, 소설 등에서 부정적인 동물로 그려져 왔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토종 여우는 1급 멸종 위기 야생동물이기 때문에 실물로 여우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1960년대까지 한반도 전역에 살고 있던 그 많던 여우는 왜 사라졌을까요? 경북 영주시 순흥면 태장리에 있는 ‘소백산 여우생태관찰원’에서 처음으로 여우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2016년 11월 5일 개관한 여우생태관찰원은 우리나라 토종인 ‘붉은여우’를 복원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는 시설인데요. ‘붉은 여우’의 줄임말은 ‘불여우’입니다. 경상도 사투리로는 ‘불여시’라고 하죠. ‘불여시같은 XX’라고 할 때 바로 그 붉은여우입니다. 그런데 이 곳에서 만난 여우는 착하고 귀여운 모습이었습니다. 불쌍하기도 했구요. 여우생태관찰원에 있는 여우는 주로 덫에 걸려 다리가 잘리거나, 로드킬 사고를 당하거나, 병이 든 여우들이었는데요. 여우생태관찰원에서는 이러한 여우를 보호하고 회복시켜 자연으로 돌려 보내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몸집은 개, 행동은 고양이를 닮은 여우 ‘여우생태관찰원’에 들어가면 먼저 죽은 여우를 살아 있던 모습 그대로 박제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우는 개과 동물입니다. 하드웨어 몸집은 중간 크기의 개를 닮았습니다. 여우의 생김새를 보면 우선 주둥이가 개보다는 좀더 길고 뾰족합니다. 꼬리도 일반적인 개와 달리 몸통만큼 길고 풍성한 털이 있습니다. 붉은여우라고 하지만 털색깔은 완전 붉은색은 아닙니다. 황토흙을 섞은 것처럼 황갈색 느낌이네요. 그런데 자연으로 나갔을 때 햇빛이 비치면 붉은색으로 보인다고 해서 붉은여우가 됐다고 합니다. 여우는 태어난지 1년이면 완전히 성체처럼 크는데요. 갓태어난 여우 새끼는 털이 검습니다. 그런데 태어난지 한두달 지나면 점차 황갈색으로 변한다고 하네요. 그런데 귀 뒷부분과 앞발, 꼬리 끝부분은 계속해서 검은색인 것이 특징입니다. 여우의 눈동자는 위아래로 길쭉해서 고양이를 닮은 느낌이 납니다. 보통 개는 눈동자가 동그란 것과 다르죠. 이렇듯 여우는 하드웨어(몸집)는 개를 닮았지만, 하는 행동(소프트웨어)는 고양을 닮았다고 합니다. 여름에 털이 빠진 여우를 보면 골격이 매우 가늘고 약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양이처럼 경계심이 많고 사람을 피합니다. 여우는 사람을 보면 공격을 하지 않고, 겁내고 피하죠. 구미호는 전설일 뿐입니다. 여우는 자연에서 단독생활, 단독사냥을 하기 때문에 경쟁종인 삵이나 오소리, 멧돼지에게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귀여운 얼굴의 족제비과 동물인 ‘담비’는 최소한 2~3마리가 무리지어 다니면서 사냥을 하기 때문에 호랑이 없는 한반도에서 최상위 포식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여우는 담비에게도 밀리고, 무리지어 다니는 들개한테도 싸우면 지기 때문에 피해다녀야 하죠. 불여우는 왜 사라졌을까우리나라에 있는 토종 붉은여우는 동북아시아에 널리 퍼져 살고 있었습니다. 일본도 여우가 많고, 중국에도 여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만 사라졌습니다. 왜일까요?한반도에서 여우가 멸종된 이유에 대해서는 환경오염과 서식지 파괴 등이 1차 원인입니다. 또다른 이유는 1960년대 전국적으로 벌였던 ‘쥐잡기 운동’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여우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는 설치류 동물입니다. 고양이의 행동양식을 가진 여우는 그 중에서도 쥐를 많이 잡아 먹었습니다. 그런데 쥐잡기 운동으로 뿌린 쥐약이 여우까지 잡아버렸습니다. 쥐약을 먹은 쥐를 여우가 먹고 2차 중독으로 대량으로 죽게 된 것이죠. 또한 ‘여우 목도리’의 인기도 여우의 멸종의 한 원인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여우목도리는 여우 한마리의 털가죽을 통째로 벗겨서 만드는데요. 몸통부터 꼬리까지 그대로 있고, 주둥이로 꼬리털을 물고 있는 형태로 목에 둘르고 다니곤 했습니다. 30여년 전에도 여우목도리는 50만원 이상을 호가할 정도로 명품대접을 받았죠. 웬만한 직장인의 한달치 월급에 해당됐으니, 부유층 사모님을 상징하는 아이템이었죠. 한반도의 여우들은 수없이 포획돼 털가죽이 벗겨져 목도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여우를 마구잡이로 사냥하고, 덫으로 잡아 털을 벗겨 죽였던 데에는 여우에 대한 ‘부정적 인식’ 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백산 여우생태관찰원의 해설사는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여우는 최상위 포식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데요. 지금은 “여우가 사라져 생태계가 건강하지 못하게 됐다”고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 농민들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는 고라니와 멧돼지입니다. 농작물에 큰 피해를 끼치기 때문이죠. 고라니는 세계적으로 멸종위기 종인데, 전세계 고라니의 90%가 우리나라에 서식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10% 정도가 중국에 있죠. 그런데 고라니가 우리나라에 왜 많이 있을까요? 상위 포식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우가 좋아하는 먹이 중에는 새끼 고라니와 새끼 멧돼지가 포함돼 있습니다. 그래서 여우가 야생에서 고라니와 멧돼지의 숫자를 적절히 조절해왔는데, 여우가 멸종되자 그 역할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농가에서는 지금도 고라니와 멧돼지를 잡기 위해 올가미 덫을 놓는데, 그 덫에 복원사업을 하고 있는 여우가 또 다시 잡혀 죽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우가 가장 좋아하는 터전은 원래 민가주변의 야트막한 야산입니다. 수컷은 덤불 속에서 살기도 하고, 암컷은 새끼를 낳고 기를 때는 굴을 파고 살기도 합니다. 여우는 민가 주변 야산에서 쥐를 잡아먹기도 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그런데 민가주변 야산은 사람이 죽으면 묘자리로도 많이 이용되지요. 원래 여우가 먼저 살고 있던 공간에 무덤이 생긴 것인데요. 그런데 사람들은 부모나 조상님이 묻힌 곳에 여우가 나타나면 기분 나쁘게 봅니다. 폭우에 산소가 무너져도 여우가 굴을 팠다고 생각하죠. 그렇게 해서 여우에 대한 오해가 쌓인 것입니다. 또한 여우는 지혜롭다고 알려졌는데 실제 조사한 논문에 따르면 반달가슴곰의 아이큐가 80정도, 여우는 27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네요. 한반도 불여우를 복원하다한반도의 붉은여우는 2015년부터 복원사업이 진행돼 10년이 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리산에서는 반달가슴곰을 복원하는 사업이 벌어지고 있고, 소백산에 여우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지요. 초창기에는 한반도 토종 붉은여우를 번식시켜 숫자를 늘리는 사업에 집중했다고 합니다. 이후 건강한 여우를 골라 야생 적응훈련을 시키면서 자연으로 돌려보냈는데요. 목에는 위치추적 발신기를 달아서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약 100마리 이상을 방사했는데요. 대부분 소백산권(영주, 예천 등)에 살고 있고, 강원도 원주, 충남 부여, 부산 달맞이 고개 등에서도 발견되고 있다고 합니다. 복원팀 직원들은 발신기의 전파를 잡는 안테나같은 장비를 갖고 다니면서 내보낸 모든 개체의 여우를 관리하고 있는데요. 이 안테나는 평지기준으로 10km 이내의 여우의 위치추적 발신음을 탐지해낸다고 합니다. 정상적으로 다니는 여우가 보내는 ‘뚜뚜뚜’ 발신음은 규칙적으로 들리는데요. 멀리 있으면 작게, 가까이에 있으면 크게 들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완전히 다른 비정상적인 수신음이 들려올 때도 있는데요. 그럴 때는 직원들이 출동해 끝까지 위치를 추적해 찾아가 어떤 상황인지 확인한다고 합니다. 가보면 대부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로드킬을 당하거나, 덫에 걸려 다리가 잘리거나, 부상을 입은 상태입니다. 소백산 여우생태원에서 관찰할 수 있는 여우들은 대부분 이렇게 야생으로 보냈다가 다치거나 병들어서 다시 들어온 친구들입니다. 덫에 걸려 다리가 잘리거나, 꼬리가 잘리거나, 야생성이 떨어져서 다시 데려온 여우들을 치료하고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도록 해주는 시설입니다. 이 곳에 있는 여우들은 야트막한 언덕에 굴처럼 생긴 시설물과 원두막 등을 오가며 야생여우가 아닌 시설 여우로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곳을 방문한 어린 학생들은 다리가 잘린 여우들을 보고 “우리가 잘 돌봐줘야 겠다. 여우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환경을 깨끗하게 보존하겠다”고 소감을 말한다고 합니다. 야생에서 살아가는 여우의 수명은 약 3~6년이라고 합니다. 생태적으로도 약하고, 단독생활, 단독사냥하며 살아가는 습성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하는 것이죠. 반면 시설에서 관리를 잘 받고 사는 여우는 15년까지 살기도 한다고 합니다. 여우는 개과 동물이나 개의 전염병도 많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우를 방사하기 전에는 개들이 맞는 예방주사도 놔준다고 하네요. 경계심이 많은 여우는 사람들이 방문해서 쳐다보고 있으면 굴 속이나 나무 탁자 밑 등에 숨어서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려오자 마음 편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니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여우가 생각보다 귀여운 동물처럼 생각되는 하루였습니다. 영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5-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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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은하수를 닮은 달항아리[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넘실거리는 바다의 푸른 물결. 하늘엔 한지 구름이 떠 있고, 바닥엔 하얀 모래가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달항아리가 우주의 행성처럼 흘러갑니다. 푸른빛 달항아리에는 은하수 별빛처럼 반짝이는 점들이 빛나고 있네요. 그렇습니다. 하늘, 바다와 땅이 어우러진 공간에 떠 있는 달항아에는 물레에서 빚어질 때의 원심력이 손자국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은하계 우주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행성이 됐습니다. 천자문의 첫 구절인 ‘천지현황(天地玄黃) 우주홍황(宇宙洪荒)’의 세계가 전시장에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른 빛이고, 시공간으로 이루어진 우주는 넓고 광대하다는 것이죠.서울 종로구 인사동 KCDF갤러리에서 8일까지 열리고 있는 도예가 윤상현의 ‘기형도감(器形圖鑑)’ 전시회에서 달항아리를 보면서 문득 깨달았습니다. 달항아리는 하얀 달을 형상한 것이라고만 생각해왔는데, 결국은 우주 행성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을요.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소원을 들어주는 작은 별~. 우주에서 무주로 날아온~ 밤하늘의 별들이 반딧불이 돼 버렸지~”황가람이 부른 ‘나는 반딧불’의 가사처럼 우리의 전통 도자기는 우주에서 내려온 별입니다. 하늘과 땅, 바다, 우주에서 온 물질로 만들어지지요. 흙과 물, 유약과 불이 만나서 탄생합니다. 거기에는 물레 위에서 빚어내는 사람의 손길이 필수입니다. 그야말로 천지인(天地人)의 기운이 합해져서 우주의 행성인 별이 탄생하는 과정을 재현하는 셈이죠. 30년 동안 물레 위에서 독창적인 조형을 탐구해온 윤상현 작가는 ‘도예가들의 물레 선생’으로 불립니다. 도예가들이 그의 섬세한 물레 작업을 배우러 찾아갈 만큼 물레의 고수라는 의미죠. 서울 용산구 해방촌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학 강단도 그만두고 매일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작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물레틀 앞 좁은 공간이 그의 직장 사무실이자 예술가의 우주인 셈이죠. 그가 만들어낸 달항아리는 특이하게 푸른색이 감돌고 그 위에 작은 하얀색 점들이 꽃처럼, 별처럼 피어나 있습니다. 조선백자 달항아리는 순백의 도자기라는 상식을 깨뜨립니다. 윤상현의 달항아리는 언젠가 강원도 평창의 깊은 산골에서 만난 밤하늘 은하수 야경사진처럼 신비스런 우주가 담겨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푸른 밤하늘 위로 내리는 눈처럼 빛나는 별들은 어떻게 만들어낸 것일까?윤 작가에게 물어봤습니다. 혹시 굽기 전에 뭘 그려넣은 것 아니냐고. 그랬더니 “별처럼 빛나는 하얀 점은 뭔가를 뿌린 것이 아니라, 유약이 가마 속 열과 반응해서 자연적인 현상으로 피어나는 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초벌구이를 한 뒤 유약을 바르기 전 달항아리 표면 일부분에 염화코발트를 뿌립니다. 톤을 조절해가면서요. 코발트는 가마 안에서 고온으로 구워지면 푸른색을 내게 되는데요. 염화코발트는 물에 잘 녹기 때문에 스프레이로 뿌릴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흙속 깊숙하게 코발트가 흡수된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달항아리에 ‘결정유약’을 바르게 됩니다. 결정유약은 일반적인 유약에 쓰이는 장석, 규석 외에 아연과 티탄(지당)의 비율을 잘 배합해 윤작가가 직접 만드는데요. 고온의 불가마 속에 들어가면 결정을 맺는 특징이 있는 유약입니다. 결정은 화상(花狀, 꽃모양), 성상(星狀, 별모양), 침상(針狀, 바늘처럼 뾰족한 모양) 등 유약에 따라 다양하게 맺히게 됩니다. 그런데 유약을 바르는 두께나 온도에 무척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실제로 구워진 후 나오는 결정의 모양은 매번 다르다고 하네요. 고온의 가마 속에서 염화코발트는 푸른빛이 되고, 그 위에 결정유약이 하나둘씩 꽃처럼, 별처럼 피어나게 됩니다. 도자기 위에 피어난 결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늘에서 내리는 눈의 결정을 닮았습니다. “가마 속에서 구워질 때 달항아리의 윗부분과 아랫부분 온도가 조금씩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데요. 유약은 온도에 따라서, 발라진 두께에 따라서 흘러내린 문양과 색깔이 크게 차이가 나게 마련이지요. 이렇게 가마 속에서 색깔과 문양이 변화하는 것을 ‘요변(窯變)’이라고 합니다. 변화는 일정한 것이 아니라 가마를 땔 때마다 달라져요. 그러한 자연의 반응에서 실패도 많지만, 반대로 명작이 탄생할 수도 있는 거지요.”그의 달항아리는 대부분 백색과 연한 푸른색이 어우러진 바탕에 은하수 별이 떠 있는데요. 그런데 일부 작품에는 연한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기도 합니다. 초록색으로 물든 달항아리를 보니 마치 ‘초록별 지구’를 보는 듯해서 신비로웠습니다. 그건 염화코발트 대신 염화동으로 물들였기 때문인데요. 도자기를 가마 안에 구울 때 ‘동(銅)’ 성분이 있으면 초록색이 되고, ‘철(鐵)’ 성분으로 물들인 곳은 붉은색이 된다고 합니다. “결정유약이 어떤 때는 꽃이 너무 크게 피다가 터져 달표면의 분화구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어요. 유약 너무 두껍게 발라지면 흘러내려 바닥에 굽이 붙어버리기도 하죠. 그만큼 결정유약은 온도와 농도에 엄청나게 예민하게 반응을 하죠. 때로는 어떤 작품이 좋다고 해서 똑같이 만들어달라고 하시는 분도 계신데,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이 아닙니다.”윤 작가는 예전부터 다양한 그릇에 결정유약을 발라 굽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는 “결정유약을 달항아리에 발라보면 어떨까. 푸른 빛의 달항아리는 만드는 사람은 없으니까 도전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는 “여러 작가들이 만든 달항아리를 한데 모아 놓으면 어느 작가의 작품인지는 잘 알아볼 수 없는데, 제 작품은 쉽게 알아본다”고 말했습니다. 전시장 한켠에서는 그가 만든 다양한 그릇도 있습니다. 그가 만든 가볍고 얇은 그릇은 울릉도 코스모스리조트, 인천공항 대한항공(KAL) 1등석 라운지, 모수 홍콩(Mosu Hong Kong) 등 수많은 호텔과 레스토랑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은 실용성보다는 예술적 오브제 작품에 가깝습니다. 이 그릇들을 보니 전시의 제목이 왜 ‘기형도감(器形圖鑑)’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전통 도자기의 대표적인 형식인 사발(碗), 병(甁), 항아리(壺)를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합니다. 그래서 ‘정형’과 ‘비정형’의 경계를 오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가 만든 병을 보면 몸통과 주둥이, 굽 부분의 형태가 모두 다릅니다. 게다가 몸통은 눌려서 타원으로 돼 있습니다. 이것은 각 부분을 모두 따로 물레를 돌려 만든 다음 붙인 것입니다. 그가 왜 ‘도예가들의 물레 선생’으로 불리는지 그 섬세한 솜씨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네요. 물레를 따로 돌려 붙이게 되면 굽는 과정에서 금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는 옹기의 타렴질처럼 수없이 많은 두드림으로 그릇을 완성합니다. 그의 백자 중에는 면을 깎아내는 일명 ‘면치기’ 기법으로 장식한 병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둥이 부분이 빙글빙글 살짝 돌아가 있습니다. 이걸 일부러 돌려서 깎은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흙을 물레 위에 올려놓고 돌리게 되면 원심력에 의해 흙이 말려들게 됩니다. 그런데 불가마 속에서 구워지면서 흙은 원래 형태로 돌아가려고 하는 복원력을 갖게 되죠. 그래서 굽는 과정에서 길쭉한 병주둥이 부분이 살짝 돌아가게 됩니다. 물레의 원심력은 가마 속에 들어가서도 남아 있어 힘을 발휘하는 것이죠.”그는 전통 도자기의 기형이 갖는 모든 형태를 해체한 뒤 결합해서 새로운 형태를 창조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릇은 입체파(큐비즘)의 면 결합처럼 입체적이고 다층적인 구조체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윤상현은 물레 위에서 만들어진 형태와 선을 토대로, 비틀고, 두드리고, 깎아내어, 정제하고 또 정제한 새로운 형태와 비례를 결합하여 그만의 기형을 창조해 가고 있습니다. 이 미묘한 비례와 곡선미, 그리고 평면과 곡면의 무/작위적 결합은 그의 작품을 정형과 비정형 사이의 생경한 그 어딘가에 놓이게 하고 있습니다.” (강재영 2025청주공예비엔날레 예술감독)집 안에 공간이 충분하지 않는 상황에서 입체적인 도자기는 아무래도 놓고 감상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평면적으로 벽으로 걸어놓고서라도 도자기의 형태미를 감상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은데요. 강익중 화가의 ‘달항아리’ 그림처럼 도자기 그림이나 사진을 벽에 걸어놓는 경우도 많습니다. 윤 작가의 전시장에도 도자기 사진이 걸려 있는데요. 그가 만든 도자기 사진을 한지로 프린트한 점이 눈길이 갑니다. 한지에 출력된 도자기 사진은 좀더 부드럽고, 오묘한 한국적인 감성이 담겨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전시장 구석에 있는 백자 ‘소반탑’에 대해서 말할 차례입니다. 아래부터 윗층으로 소반을 차곡차곡 쌓아올렸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사찰에 있는 석탑처럼 보이네요. 실제로 경기 남양주에 있는 수종사에서 본 석탑과 거의 비슷한 형태입니다. 도자기로 만든 ‘소반탑’은 그 자체로도 완성된 조형물인데요. 소반을 하나하나 떼어내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것은 소반(小盤)이 아니라 ‘소반합(小盤盒)’입니다. ‘합(盒)’이란 뚜껑이 있는 그릇을 말하는데요. 소반의 받침대와 뚜껑이 분리되는 구조입니다. 뚜껑을 열어 안에 물건을 담는 용도로 쓸 수도 있고, 뚜껑을 닫으면 음식을 올려놓고 먹을 수 있는 소반으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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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도네시아의 ‘숨겨진 보석’…빈탄의 밀림 속으로[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싱가포르에서 배로 1시간 거리(약 40km). 인도네시아 북부 리아우 제도에 있는 빈탄섬은 인도네시아 1만8000여개의 섬 중에서 ‘숨겨진 보석’으로 불린다. 한때 신혼여행객들을 위한 허니문 휴양지로 인기를 끌었던 빈탄섬은 천혜의 맹그로브숲과 사파리, 소금사막 등 원시적 자연과 함께 21개의 고급 호텔과 워터파크, 골프장을 두루 갖춘 ‘빈탄 리조트(Bintan Resorts)’와 다채로운 매력을 갖춘 섬 여행지로 떠올랐다. ● 시원한 해변 맹그로브숲 투어 싱가포르 창이공항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타나메라(Tanah Merah) 페리 터미널. 빈탄행 쾌속선에 올라타니 싱가포르 항구의 전경이 보인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말라카 해협에 자리잡고 있는 항구답게 수많은 화물선들이 바다 위에 정박해 있다. 배는 1시간 만에 인도네시아 빈탄섬에 도착했다. 1996년부터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간의 협력으로 반얀트리와 클럽메드, 니르바나, 빈탄 라군 등 리조트가 개발됐던 천혜의 휴양지다. 한국에서 가려면 6시간의 비행시간이 걸리지만, 싱가포르인들에겐 주말에 훌쩍 떠날 수 있는 파라다이스같은 섬이다. 빈탄섬의 해변과 강가에는 인도네시아 전통 수상가옥인 ‘켈롱(Kellong)’이 떠 있다. 어부 가족들이 살고 있기도 하고, 해산물 레스토랑이나 바로 이용되는 경우도 많다. 지난해 10월 빈탄 라고이 해변에 들어선 ‘호텔 인디고 빈탄 라고이 비치(Hotel Indigo Bintan Lagoi Beach)’는 수상가옥 켈롱을 모티브로 지어졌다.아침에 일어나 썰물로 물이 빠진 라고이 해변을 달렸다. 수정처럼 빛나는 모래해변에 푸른 하늘이 비쳐 데칼코마니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해변의 모든 리조트가 그야말로 물 위에 떠 있는 켈롱과 같은 느낌이다. 빈탄은 리조트 안에만 머물기 아쉽다. 인도네시아 뿐 아니라 인근의 말레시아, 식민지배를 했던 네덜란드, 이웃의 싱가포르까지 다양한 문화가 섞인 섬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샌듄 블루 레이크(Blue Lake)’는 남미 볼리비아에 있는 소금사막을 연상케한다고 해서 ‘빈탄의 우유니’로 불리는 곳이다.티모시 샬라메 주연의 영화 ‘듄’에 나오는 것처럼 모래바람이 끊임없이 불어대는 사막은 아니지만, 외계의 행성에 와 있는 듯한 낯선 풍경이 인상적이다. 소금사막은 때로는 경주의 고분군처럼 부드러운 곡선으로 울퉁불퉁이어지기도 하고, 불꽃처럼 뾰족뾰족 세워져 있기도 한다. 바람이 부는 모래 언덕 위에 하늘하늘 펼쳐지는 흰색 스카프만 하고 서 있으면 누구나 모델이 된다. 압권은 모래 언덕 사이사이에 형성된 푸른빛 호수다. 호수의 물은 민물과 바닷물이 섞여 오묘한 터키쉬 블루 색감을 낸다. 터키석을 갈아넣은 듯 하늘빛과 옥빛의 중간쯤 돼 보이는 물 색깔에 넋을 잃게 된다. 호수 건너편 모래언덕 위의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서 왕자가 살았던 소행성 B612를 닮은 모습이다. ●시원한 맹그로브 숲 탐험 인도네시아는 해안가에 맹그로브 숲이 잘 발달돼 있다. 빈탄 리조트 내에도 보트를 타고 맹그로브 숲 속 깊숙한 곳까지 돌아보는 투어가 있다. 구명조끼를 입고 승선한 보트는 시원하게 바람을 가르며 강 위로 달려간다. 양쪽으로는 키가 30m가 훌쩍 넘는 맹그로브 숲이 우거져 있다. 보트는 큰 강변을 달리다가 좁은 숲 속 수로로 들어간다. 5~6m에 불과한 수로 위로 맹그로브 나뭇가지들이 낮게 드리워져 통과할 때마다 고개를 숙여야 한다. 앞서 가던 보트에서 가이드가 배를 멈추더니 손가락으로 나무 위를 가리킨다. 가지 위에 왕도마뱀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맹그로브 왕도마뱀은 크기가 1.5m까지 자라며, 헤엄도 치고, 나무에 기어오를 수도 있다고 한다. 가이드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가니 또다른 나무엔 검은색과 노란색 줄무늬가 선명한 맹그로브 스네이크(뱀)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 해가 진 후 어둑어둑할 때 진행하는 야간투어를 이용하면 매혹적인 빛을 발산하는 반딧불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짠 바닷물에서도 잘 자라는 맹그로브는 나무뿌리가 거꾸로 치솟아 물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숨을 쉬기 위해 물 밖으로 나온 뿌리라 ‘호흡근(根)’이라고 불린다. 뿌리 틈 사이는 물고기와 새우, 가재, 게, 조개 등 각종 해양생물들에게 중요한 은신처와 서식지가 된다. 강변 숲 속에는 예전에 맹그로브 나무를 베어 숯을 만들었던 가마도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참나무로 숯을 굽는다면, 열대 해변에서는 맹그로브 나무를 베어서 숯을 만들어 숲이 파괴돼왔다고 한다. 맹그로브는 탄수흡수 능력이 탁월해 ‘탄소 스펀지’로 불린다. 또한 산호초처럼 파도에서 토양의 침식을 막는 역할을 한다. 2004년 남아시아 대지진이 피해가 컸던 이유가 리조트 개발로 맹그로브 숲을 다 파괴해서라는 분석도 있다. 투어를 마친 후 맹그로브 숲 가이드와 인사를 하던 중 그녀의 노란색 티셔츠에 그려진 그림에 눈길이 갔다. 맹그로브 나무의 초록색 나뭇잎 아래 뿌리가 높게 솟아 올라 있었다. 물결이 찰랑찰랑하는 뿌리 사이에는 붉은색 게 두마리가 놀고 있는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빈탄 리조트 맹그로브숲 인근에는 ‘사파리 라고이(Safari Lagoi)’가 있다. 밀림지대에서 구조된 멸종위기 동물을 보호하다가 국립공원으로 돌려보내는 보호시설이다. 붉은색 털이 아름다운 덩치 큰 오랑우탄, 루왁 커피를 만들어내는 사향고향이 등 진귀한 동물을 만날 수 있다. 아기 원숭이를 품에 안고 우유를 주는 등 동물과 친근하게 교감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있다. ​● 타이타닉호를 닮은 호텔1912년 4월10일 타이타닉호는 영국의 사우샘프턴을 떠나 미국 뉴욕으로 향하는 첫 항해를 시작했다. 그런데 4월14일 오후 11시40분 빙산과 충돌했고, 2시간 40분 만에 완전히 침몰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14년 운행을 시작한 배가 있었다. 미국의 선박이었던 둘로스(Doulos)호였다. 타이타닉호와 동일한 증기엔진을 사용했고, 크기는 작지만 매우 유사한 내부구조를 가진 배였다. 둘로스호는 1914년부터 2009년 12월 퇴역할 때까지 가장 오랜 시간 운항한 원양 여객선으로 기네스북 공식인증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배는 2010년 인도의 한 조선소에서 조각조각 잘려 고철로 팔릴 위기에 처했다. 당시 중국계 싱가포르인 기업가인 에릭 쏘가 이 배를 사들였다. 그는 배를 개조해 호텔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후 그는 세심한 복원과 개조를 거쳐 2019년 고급 선박호텔인 ‘둘로스 포스 더 쉽 호텔(Doulos Phos The Ship Hotel)로 재탄생시켰다. 이 배는 현재 빈탄섬의 페리터미널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앵커(닻) 모양의 섬 위에 올려져 있다. 대서양에 수장된 타이타닉호는 실물로 볼 수가 없지만, 유사한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는 ‘둘로스 포스 더 쉽 호텔’에 묵으면 마치 타이타닉에 투숙하는 듯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다. 총 104개의 객실은 현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럭셔리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증기기관으로 운행되던 엔진실도 들어가보는 투어도 진행된다. 호텔 갑판에는 영화 ‘타이타닉’에서 두 주인공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던 것과 똑같이 생긴 뱃머리에서 사진도 찍을 수 있다. 압둘 와합 빈탄리조트그룹(BRC)의 최고운영책임자(COO)는 “빈탄섬 여행은 도시인 싱가포르와 천혜의 자연을 보존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섬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두가지 여행 경험이 매력“이라고 말했다. 빈탄섬 리조트의 명물은 길이 1.6km에 이르는 트레저 베이(Treasure Bay)다. 동남아시아 최대의 인공으로 만든 (海水) 석호다.크리스탈처럼 투명한 라군이 조성돼 있는 트레저 베이에서는 수영 뿐 아니라 웨이크보드와 카약 등 다양한 수상 스포츠까지 즐길 수 있다. 트레저베이 주변에 있는 나트라 빈탄(Natra Bintan) 리조트에는 100여개의 독채 글램핑 숙소가 있어 크리스탈 라군을 바라보며 캠핑하는 이색 체험을 할 수 있다. 빈탄(인도네시아)=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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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리스탈 라군과 맹그로브 숲… 빈탄의 아침을 달리다[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싱가포르에서 배로 1시간 거리(약 40km). 인도네시아 북부 리아우 제도에 있는 빈탄섬은 인도네시아 1만8000여개의 섬 중에서 ‘숨겨진 보석’으로 불린다. 한때 신혼여행객들을 위한 허니문 휴양지로 인기를 끌었던 빈탄섬은 천혜의 맹그로브숲과 사파리, 소금사막 등 원시적 자연과 함께 21개의 고급 호텔과 워터파크, 골프장을 두루 갖춘 ‘빈탄 리조트(Bintan Resorts)’와 다채로운 매력을 갖춘 섬 여행지로 떠올랐다. ● 시원한 해변 맹그로브숲 투어 싱가포르 창이공항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타나메라(Tanah Merah) 페리 터미널. 빈탄행 쾌속선에 올라타니 싱가포르 항구의 전경이 보인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말라카 해협에 자리 잡고 있는 항구답게 수많은 화물선이 바다 위에 정박해 있다. 배는 1시간 만에 인도네시아 빈탄섬에 도착했다. 1996년부터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간의 협력으로 반얀트리와 클럽메드, 니르바나, 빈탄 라군 등 리조트가 개발됐던 천혜의 휴양지다. 한국에서 가려면 비행에만 6시간이 걸리지만, 싱가포르인들에겐 주말에 훌쩍 떠날 수 있는 파라다이스 같은 섬이다. 빈탄섬의 해변과 강가에는 인도네시아 전통 수상가옥인 ‘켈롱(Kellong)’이 떠 있다. 어부 가족들이 살고 있기도 하고, 해산물 레스토랑이나 바로 이용되는 경우도 많다. 지난해 10월 빈탄 라고이 해변에 들어선 ‘호텔 인디고 빈탄 라고이 비치(Hotel Indigo Bintan Lagoi Beach)’는 수상가옥 켈롱을 모티브로 지어졌다. 아침에 일어나 썰물로 물이 빠진 라고이 해변을 달렸다. 수정처럼 빛나는 모래 해변에 푸른 하늘이 비쳐 데칼코마니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해변의 모든 리조트가 그야말로 물 위에 떠 있는 켈롱과 같은 느낌이다. 빈탄섬 리조트의 명물은 길이 1.6km에 이르는 트레저 베이(Treasure Bay)다. 동남아시아 최대의 인공으로 만든 (海水) 석호다. 크리스탈처럼 투명한 라군이 조성돼 있는 트레저 베이에서는 수영뿐 아니라 웨이크보드와 카약 등 다양한 수상 스포츠까지 즐길 수 있다. 트레저베이 주변에 있는 나트라 빈탄(Natra Bintan) 리조트에는 100여 개의 독채 글램핑 숙소가 있어 크리스탈 라군을 바라보며 캠핑하는 이색 체험을 할 수 있다. 빈탄은 리조트 안에만 머물기 아쉽다.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인근의 말레이시아, 식민 지배를 했던 네덜란드, 이웃의 싱가포르까지 다양한 문화가 섞인 섬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샌듄 블루 레이크(Blue Lake)’는 남미 볼리비아에 있는 소금사막을 연상케 한다고 해서 ‘빈탄의 우유니’로 불리는 곳이다. 티모시 샬라메 주연의 영화 ‘듄’에 나오는 것처럼 모래바람이 끊임없이 불어대는 사막은 아니지만, 외계의 행성에 와 있는 듯한 낯선 풍경이 인상적이다. 소금사막은 때로는 경주의 고분군처럼 부드러운 곡선으로 울퉁불퉁 이어지기도 하고, 불꽃처럼 뾰족뾰족 세워져 있기도 한다. 바람이 부는 모래 언덕 위에 하늘하늘 펼쳐지는 흰색 스카프만 하고 서 있으면 누구나 모델이 된다. 압권은 모래 언덕 사이사이에 형성된 푸른빛 호수다. 호수의 물은 민물과 바닷물이 섞여 오묘한 터키쉬 블루 색감을 낸다. 터키석을 갈아 넣은 듯 하늘빛과 옥빛의 중간쯤 돼 보이는 물 색깔에 넋을 잃게 된다. 호수 건너편 모래언덕 위의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서 왕자가 살았던 소행성 B612를 닮은 모습이다. ● 시원한 맹그로브 숲 탐험인도네시아는 해안가에 맹그로브 숲이 잘 발달해 있다. 빈탄 리조트 내에도 보트를 타고 맹그로브 숲 속 깊숙한 곳까지 돌아보는 투어가 있다. 구명조끼를 입고 승선한 보트는 시원하게 바람을 가르며 강 위로 달려간다. 양쪽으로는 키가 30m가 훌쩍 넘는 맹그로브 숲이 우거져 있다. 보트는 큰 강변을 달리다가 좁은 숲속 수로로 들어간다. 5∼6m에 불과한 수로 위로 맹그로브 나뭇가지들이 낮게 드리워져 통과할 때마다 고개를 숙여야 한다. 앞서 가던 보트에서 가이드가 배를 멈추더니 손가락으로 나무 위를 가리킨다. 가지 위에 왕도마뱀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맹그로브 왕도마뱀은 크기가 1.5m까지 자라며, 헤엄도 치고, 나무에 기어오를 수도 있다고 한다. 가이드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가니 또 다른 나무엔 검은색과 노란색 줄무늬가 선명한 맹그로브 스네이크(뱀)가 똬리를 틀고 있다. 해가 진 후 어둑어둑할 때 진행하는 야간투어를 이용하면 매혹적인 빛을 발산하는 반딧불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짠 바닷물에서도 잘 자라는 맹그로브는 나무뿌리가 거꾸로 치솟아 물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숨을 쉬기 위해 물 밖으로 나온 뿌리라 ‘호흡근(根)’이라고 불린다. 뿌리 틈 사이는 물고기와 새우, 가재, 게, 조개 등 각종 해양생물에게 중요한 은신처와 서식지가 된다. 강변 숲속에는 예전에 맹그로브 나무를 베어 숯을 만들었던 가마도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참나무로 숯을 굽는다면, 열대 해변에서는 맹그로브 나무를 베어서 숯을 만들어 숲이 파괴돼 왔다고 한다. 맹그로브는 탄수 흡수 능력이 탁월해 ‘탄소 스펀지’로 불린다. 또한 산호초처럼 파도에서 토양의 침식을 막는 역할을 한다. 2004년 남아시아 대지진이 피해가 컸던 이유가 리조트 개발로 맹그로브 숲을 다 파괴해서라는 분석도 있다. 투어를 마친 후 맹그로브 숲 가이드와 인사를 하던 중 그녀의 노란색 티셔츠에 그려진 그림에 눈길이 갔다. 맹그로브 나무의 초록색 나뭇잎 아래 뿌리가 높게 솟아올라 있었다. 물결이 찰랑찰랑하는 뿌리 사이에는 붉은색 게 두 마리가 놀고 있는 아름다운 그림이었다.빈탄 리조트 맹그로브숲 인근에는 ‘사파리 라고이(Safari Lagoi)’가 있다. 밀림 지대에서 구조된 멸종위기 동물을 보호하다가 국립공원으로 돌려보내는 보호시설이다. 붉은색 털이 아름다운 덩치 큰 오랑우탄, 루왁 커피를 만들어내는 사향고양이 등 진귀한 동물을 만날 수 있다. 아기 원숭이를 품에 안고 우유를 주는 등 동물과 친근하게 교감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있다. ● 타이타닉호를 닮은 호텔 1912년 4월 10일 타이타닉호는 영국의 사우샘프턴을 떠나 미국 뉴욕으로 향하는 첫 항해를 시작했다. 그런데 4월 14일 오후 11시 40분 빙산과 충돌했고, 2시간 40분 만에 완전히 침몰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14년 운행을 시작한 배가 있었다. 미국의 선박이었던 둘로스호였다. 타이타닉호와 동일한 증기엔진을 사용했고, 크기는 작지만 매우 유사한 내부구조를 가진 배였다. 둘로스호는 1914년부터 2009년 12월 퇴역할 때까지 가장 오랜 시간 운항한 원양 여객선으로 기네스북 공식 인증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배는 2010년 인도의 한 조선소에서 조각조각 잘려 고철로 팔릴 위기에 처했다. 당시 중국계 싱가포르인 기업가인 에릭 쏘가 이 배를 사들였다. 그는 배를 개조해 호텔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후 그는 세심한 복원과 개조를 거쳐 2019년 고급 선박 호텔인 ‘둘로스 포스 더 쉽 호텔(Doulos Phos The Ship Hotel)’로 재탄생시켰다. 이 배는 현재 빈탄섬의 페리 터미널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앵커(닻) 모양의 섬 위에 올려져 있다. 대서양에 수장된 타이타닉호는 실물로 볼 수가 없지만, 유사한 내부 구조로 되어 있는 ‘둘로스 포스 더 쉽 호텔’에 묵으면 마치 타이타닉에 투숙하는 듯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다. 총 104개의 객실은 현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럭셔리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증기기관으로 운행되던 엔진실도 들어가 보는 투어도 진행된다. 호텔 갑판에는 영화 ‘타이타닉’에서 두 주인공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던 것과 똑같이 생긴 뱃머리에서 사진도 찍을 수 있다. 압둘 와합 빈탄리조트그룹(BRC)의 최고운영책임자(COO)는 “빈탄섬 여행은 도시인 싱가포르와 천혜의 자연을 보존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섬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두 가지 여행 경험이 매력”이라고 말했다.글·사진 빈탄(인도네시아)=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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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도네시아의 ‘숨겨진 보석’ 빈탄 리조트

    인도네시아 북부 리아우(Riau)제도에 있는 빈탄섬은 인도네시아 1만8000여개의 섬 중에서 ‘숨겨진 보석’으로 불린다. 싱가포르에서 배로 1시간 거리(약 40km)에 있는 빈탄섬은 북부 해변에 21개의 호텔과 리조트, 풀빌라, 골프장 등 럭셔리 시설이 몰려 있는 ‘빈탄 국제통합관광 리조트(Bintan integrated Beach Resorts)’가 있다. 13개의 리조트와 4개의 골프장, 워터파크, 사파리까지 다양한 시설이 어우러진 관광지다. 빈탄섬은 1990년대부터 반얀트리와 클럽메드, 니르바나, 빈탄 라군 등 해변가에 수많은 리조트가 세워지면서 휴양지로 본격 개발됐다. 그 중에서 동남아시아 최고의 인공해수 석호인 트레저 베이 주변에 있는 나트라 빈탄(Natra Bintan, A Tribute Portfolio Resort)은 빈탄섬을 대표하는 시그니처 리조트다. 트레저베이는 총 면적이 6.2헥타르, 길이 1.6km, 최대 수심 6m의 인공 물놀이 시설이다. 물은 바닷물을 끌어와 짠 해수다. 크리스탈 라군이 조성된 트레저 베이에서 웨이크보드와 카약 등 다양한 수상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나트라빈탄은 트레저베이의 크리스탈 라군을 조망하는 약 100개의 독채 글램핑 텐트 숙소에서 잘 수 있다. 텐트에는 자체 정원과 야외 테라스를 갖추고 있으며 야외 월풀 욕조를 갖추고 있다. 또한 투숙객은 호텔에서 진행하는 맹그로브 투어, 수상 스포츠, 다이빙, 카누, 하이킹 등 다양한 액티비티도 즐길 수 있다. 지난해 10월 빈탄 라고이 해변에 새롭게 지어진 ‘호텔 인디고 빈탄 라고이 비치(Hotel Indigo Bintan Lagoi Beach)’는 인도네시아 전통 수상가옥인 ‘켈롱(Kellong)’을 모티브로 지어졌다. 호텔 입구와 로비에 서면 건물 주변에 연못이 있어 목조구조로 지어진 호텔이 그야말로 물 위에 떠 있는 켈롱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인디고 호텔의 120개의 객실과 스위트룸은 모두 바다를 전망하고 있다. 객실내에는 인도네시아 전통 낚시 그물에서 영감을 받은 소파등 리아우 섬의 전통과 문화에서 차용해온 소품들이 많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야외 발코니에 놓인 월풀 욕조. 시원하게 뚫린 남중국해의 풍경을 바라보며 야외 욕조에 몸을 담그는 기분은 남다르다. 해변 레스토랑과 바인 슈거비츠(SugarBeats)에서는 잔잔한 음악도 연주된다. 수영장 주변에서 휴식을 취하며, 해산물, 열대 칵테일, 풍미 있는 사테 요리를 즐길 수도 있다. 스틱스 사테 바(Stix Satay Bar)는 동남아시아 미식을 즐길 수 있으며 꼬치(사태)와 직화구이를 포함한 인도네시아, 태국, 중국 그리고 말레이시아 요리를 한곳에서 골고루 맛볼 수 있다.빈탄섬의 페리터미널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앵커(닻) 모양의 섬 위에는 선박호텔인 ‘둘로스 포스 더 쉽 호텔(Doulos Phos The Ship Hotel)이 있다. 타이타닉호와 비슷한 시기에 운항을 시작한 선박을 개조한 이 호텔에 투숙하는 듯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총 104개의 객실은 20세기초 원본 선박의 내부를 최대한 살리면서도 현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럭셔리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인피니티풀장과 피아노 라운지에서는 가벼운 칵테일과 식사를 즐길 수 있으며, 고급 레스토랑에서 맛보는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요리 위주의 파인 다이닝도 제공된다. 빈탄(인도네시아)=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5-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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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취항 20주년 맞은 에미레이트 항공

    인천과 두바이를 비롯한 전 세계를 연결해 온 에미레이트 항공이 한국 취항 20주년을 맞았다. 2005년 3월 7일 한국에 첫 취항한 에미레이트 항공은 현재까지 인천과 두바이 간 1만4630편 이상의 항공편을 운항하며 500만 명 이상의 승객을 수송했다. 두바이를 경유하는 인천 출발 승객들에게 6대륙 110여 개 도시를 연결하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제공해왔다. 인천은 에미레이트 항공의 동아시아 지역 내 핵심 관문으로, 두바이를 통해 다양한 국가로의 연결성을 제공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발 승객들이 두바이를 경유해 가장 많이 방문한 도시는 바르셀로나, 카이로, 로마, 프라하, 이스탄불, 리스본, 취리히, 베네치아, 상파울루, 담맘, 나이로비, 말레 등이었다. 에미레이트 항공은 2009년 12월 14일 인천 노선에 A380 기종을 도입했다. 이는 에미레이트 항공의 노선 중 북동 아시아 지역 최초로 A380 을 운항한 사례로 기록됐다. 이후 팬데믹으로 인해 일시 중단되었던 A380 운항은 2022년 6월 1일 재개됐다. 지난해 2월 19일부터는 주 3회 항공편을 추가해 주간 운항 횟수를 10회로 늘렸으며, 현재 인천-두바이 노선에는 편도 기준 주당 총 4603석이 공급되고 있다. 또한 2025년 4월 14일부터는 인천-두바이 노선에 새롭게 개조된 보잉 777-300ER 기종을 투입했다. 이 항공기는 프리미엄 이코노미를 포함해 총 4개 클래스 좌석으로 구성됐으며, 비즈니스 클래스는 1-2-1 배열로 모든 좌석에서 직접 통로 접근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프라이버시와 안락함을 한층 강화했다. 인천은 이 개조된 보잉 777을 동아시아 내 두 번째 도입한 도시로 자리 잡았다.현재 한국인 조종사 12명과 객실 승무원 531명이 에미레이트 항공에서 근무하고 있다. 에미레이트 항공은 화물 운송에서도 큰 역할을 해왔다. 에미레이트 스카이카고는 지난 2년간 한국에서 1만2690톤 이상의 화물을 수송해 국제무역과 산업분야 발전에 기여해왔다. 에미레이트 항공 장준모 한국 지사장은 “한국발 여행객들을 전 세계 6대륙의 주요 도시와 연결할 수 있다는 점은 큰 자부심 중 하나”라며 “에미레이트 항공은 여객 수송에 그치지 않고, 지역 무역 지원, 비즈니스 촉진, 고용 창출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 시장에 대한 관심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5-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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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억의 낭만열차 타고 사과꽃 수선화꽃 피어나는 충남으로 떠나요~”[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삶은 계란~”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에 열차여행을 하다가 홍익회 카트를 끌고 가던 아저씨가 “삶은 계란~”하고 외치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삶이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둥글둥글한 달걀 같은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계란은 부활의 상징으로 무한한 가능성과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다. 또한 단단해보이지만 함부로 굴리다가는 깨져버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인생을 닮았다. 이렇게 2004년 4월 KTX고속철도가 다니기 전 열차안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기타를 치고 노래하고, 홍익회 카트에서 맥주에 오징어 땅콩 안주를 사서 먹다보면 목적지에 도착하곤 했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느린 기차 안의 풍경. 무궁화호를 타고 장항선을 달리는 ‘충남 레트로 낭만열차’를 타고 시간여행을 떠났다. ●충남으로 떠나는 ‘레트로 낭만열차’ 서울역 오전 7시. 103년 역사를 지닌 장항선으로 떠나는 무궁화호 열차가 출발했다. 열차가 서울을 벗어날 즈음 통기타를 맨 가수가 등장했다. 조용필의 ‘여행의 떠나요’, 김수철의 ‘젊은 그대’ 노래를 부르자 열차 안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교련복을 입은 스태프들이 홍익회 카트를 밀고 다니며 삶은 달걀과 바나나맛 우유, 공주알밤 등 충남의 특산품을 간식으로 나눠주고 뽑기게임을 통해 선물을 나눠준다.알프스 소녀 하이디 복장을 한 가수가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요를레히디~”하며 요들송을 부른다. 열차칸 풍경은 삽시간에 스위스 산골마을을 지나가는 알프스 산악열차로 바뀐다.눈깜짝할 사이 열차는 목적지인 예산역에 도착했다. 역시 여행의 즐거움은 출발이 절반을 차지한다. ‘충남으로 떠나는 레트로 낭만열차’ 승객들은 보령, 아산, 서산, 서천, 예산, 태안, 홍성 등 충남의 7개 대표적인 지역명소 중에 선택해 여행을 시작했다. 예산 여행의 출발점은 1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 수덕사(修德寺). 우리나라 7대총림(叢林) 중 덕숭총림(德崇叢林)이자 조계종 제7 교구본사인 수덕사는 충남 일대에 말사 약 50여 개를 두고 있는 중요한 사찰이다. 또한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은 국내 목조건물 중 건축시기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기도 하다. 배흘림기둥에 주심포와 맞배지붕이 얹혀져 있는 모습은 힘찬기상과 균형잡힌 정제된 아름다움이 빛나는 고려시대 목조건축의 전형을 보여준다. 또한 경허와 만공 혜암 스님 등 근현대 불교사에 중요한 선지식들이 도도한 선풍을 이어온 사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반인들에게 수덕사는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대중가요로 더 알려져 있다. 또한 일엽스님과 화가 나혜석, 고암 이응노 화백 등 근대의 유명한 신여성과 예술인의 인연이 얽히고 설킨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수덕사 대웅전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수덕여관이다. 일주문 옆에 있는 수덕여관은 조선의 첫 여성 서양화가였던 나혜석이 머물렀다. 수덕여관 주변에는 이응노 화백이 동백림 사건의 옥고를 치른 후 이곳에 머물면서 손으로 직접 새긴 문자 추상 암각화가 남아 있다. 수덕여관 옆에 있는 ‘선(禪)미술관’에서는 이응노 화백이 수덕여관에서 그렸던 수덕사 풍경 그림이 전시되고 있다. 국내 최대의 저수지인 예당호(禮唐湖)는 최근 떠오른 예산군의 대표관광지. 2019년 개통된 402m 길이의 예당호 출렁다리와 분수 덕분이다. 하늘로 곧게 솟은 64m 주탑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펼쳐진 케이블이 거대한 황새가 길고 흰 날개를 펼친 듯한 풍경이다.예당호 주변에는 황새알 모양의 조형물도 있다. 이것은 황새가 예산을 상징하는 새이기 때문. 삽교천, 무한천을 끼고 넓은 농경지와 범람원 습지가 발달돼 있는 예산은 최적의 황새 서식지로 평가받고 있다. 인근에 있는 예산황새공원에는 황새문화관, 생태습지, 사육장까지 갖추고 있어 황새를 보호하고 자연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예산에 왔으니 사과 맛을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예산에서 사과농사가 시작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3년부터. 지금도 수령 100년이 된 예산 황토사과 나무가 자라고 있다. 고덕면 은성농원에서는 ‘추사(秋史)’라는 이름의 사과와인을 만드는 양조장이 있다. 예산 출신의 조선 후기의 역사학자이자 서예가인 김정희(1786~1856)의 호를 딴 이름의 술이다.캐나다에서 양조기술을 배운 정제민 대표는 100년 사과인 예산 황토사과로 시드르(사과주)를 만들고, 증류해 프렌치 오크통에 숙성시켜 브랜디(칼바도스)를 만든다. 양조장 투어를 하면 식객 허영만의 사인이 있는 오크통을 볼 수 있다. 애플파이를 직접 만들어 사과주와 함께 시음하고, 9~11월에는 사과 따기 수확체험과 음악회, 사과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유럽식 양조장 문화를 체험할 수 있어 연간 3만명 이상의 방문객들이 찾아오는 명소다. ● 해미읍성의 교황빵과 수선화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 앞에는 ‘교황빵’을 파는 가게가 있다. 최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해미읍성 성지를 방문했을 때 드셨던 간식으로 선정됐던 빵이다. ‘키스링(Kiss Ring)‘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동그란 이 빵은 서산육쪽마늘로 만드는 마늘빵이다.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한국을 찾아 서산 해미읍성과 당진시 솔뫼성지 등을 찾아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교황이 해미읍성을 방문했던 이유는 천주교 박해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1866∼1872년 천주교 박해 때 무려 1000명이 넘는 충청도 지역의 신자가 해미읍성으로 끌려와 갖은 고문 끝에 순교했다. 교황빵을 먹고 걸어서 5분거리에 있는 해미읍성으로 향했다. 해미읍성의 정문은 진남문(鎭南門)이다. 이순신 장군도 10개월간 근무를 했던 해미읍성은 남쪽의 왜구의 도발을 꺾고 진압하겠다는 의지가 현판에 담겨 있다. 진남문을 통과하자 오른쪽으로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솟아오른 300살 넘은 회화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충청도 사투리로 ‘호야나무’로 불렸던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은 가지에 천주교 신자들이 머리채가 매달린 채 고문당하고 죽어갔다고 한다. 회화 나무 앞에는 죄수들이 갇혀 있던 옥사와 형틀도 복원돼 있다.해미읍성의 옥사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가 순교한 곳이다. 다산 정약용도 1971년 신해박해 때 천주교 신자란 죄명으로 해미읍성으로 유배를 왔다. 갖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던 신도들은 해미읍성 서문 밖의 자리개돌에서 잔인한 태질을 당하며 죽어갔다. 그래서 박해시대의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시신이 오가던 해미읍성의 서문을 ’천국으로 가는 문‘으로 불렀다고 한다. 교황청은 무명 순교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2021년 해미순교성지를 국제성지로 선포했다.다음 행선지는 서산의 봄풍경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운산면의 유기방가옥. 유기방은 충남민속문화유산인 고택에서 거주하며 관리를 하고 계신 어르신의 이름이다. 유기방 어르신은 가옥 뒤 울창하게 자란 대나무 대신 수선화를 심기 시작해 지금은 2만 평이 넘는 가옥주변의 꽃밭을 관리하고 있다. 수선화는 원래 물가에서 주로 자라는데, 이 곳에서는 집 뒷편 동산 울창한 솔밭 그늘에서 수선화가 피어난다.소나무 숲 사이로 내려오는 햇살에 초록색 잎과 노란색 꽃이 바다처럼 펼쳐지는 풍경은 이국적이면서도 평화로운 모습이다. 추사 김정희도 제주 유배시절에 돌담 밑에 피어난 수선화를 좋아했다. 추사는 제주 사람들이 수선화의 가치를 몰라보는 것에 유배당한 자신의 쓸쓸한 처지를 느끼며 시를 쓰기도 했다. 올해 ’충남 방문의 해‘를 맞아 진행되는 ’충남으로 떠나는 레트로 낭만열차‘는 올해 11월까지 모두 8차례 운행한다. 상반기에는 5월 17일, 30일, 6월 14일 등 모두 4차례 운행된다. 충남문화관광재단 이기진 관광사업본부장은 “1960~80년대 기차여행의 감성을 장항선에서 그대로 재현한 충남 레트로낭만열차는 중장년뿐만 아니라 MZ세대들로부터도 큰 인기”라고 말했다. ●맛집=예산 수덕사 가는 길에 있는 덕산면 가야수라간은 격조있는 궁중음식과 제철 나물로 만든 농가음식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식당이다. 100년된 소나무 숲 아래에 있는 밭에서 키운 더덕, 곰취, 표고버섯 등 다양한 식재료로 음식을 만든다. 궁중음식문화재단(이사장 한복려)에서 전수받은 ‘두부선’ ‘월과채’ 등의 궁중음식과 배로 만든 깍두기, 표고 새우찜 등의 농가음식은 충남의 로컬푸드 맛집 평가기관인 ‘미더유’로부터 별 5개를 받기도 했다. 예산, 서산=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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