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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기’를 봤다. 영화는 독감 바이러스의 공포를 섬뜩하게 그리며 관객을 빨아들였다. 그런데 영화는 중반부터 강한 정치성을 띠기 시작했다. 분당신도시에서 치사율 100%의 독감 바이러스가 발병하자 정부는 분당을 봉쇄한다. 미국과 미국의 하수인 같은 한국 국무총리는 통제선을 벗어나려 하는 분당시민들을 향해 발포명령을 내린다. 바이러스가 확산되면 전 세계에 재앙을 몰고 온다는 이유에서다. 정의로운 한국 대통령이 발포에 반대하지만 “작전권이 미군에 있다”는 한마디에 대통령은 속수무책이다. 군중을 향해 무차별 사격이 가해지고, 미국 관리는 한국 대통령 면전에서 미 공군 전폭기를 대거 출동시켜 분당시민 폭격을 명령한다. “작전권을 뺏기니 저런 일이 벌어질 수 있구나.” 극장을 나서면서 젊은이들이 나누는 대화가 들린다. 양문석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차관급)은 페이스북에 “전시작전권을 둘러싸고 논란 중인 이때 전시작전권이 한국 국민들의 생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아주 현실감 있게 보여준 영화”라고 썼다. 일부 언론도 “전작권 논란에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고 논평했다. 영화가 반미든 친미든 필자는 개의치 않는다. 완성도 높고 재미만 있으면 좋다는 게 개인적 영화관이다. 하지만 영화처럼 대중을 상대로 한 예술장르가 터무니없이 왜곡된 사실관계를 바탕에 깔고 이뤄져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전쟁 발발 시 미군 장성인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작전권이 주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 작전권은 미국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연합사령관은 그 어떤 경우에도 양국 합참의장으로 구성된 군사위원회(MC), 그리고 그 위로 양국 대통령이 대표하는 ‘국가통수 및 군사지휘기구(NCMA)’의 지휘를 받게 된다. 이 두 단계의 상위 지휘단계에서 어느 한쪽의 반대가 있으면 연합사령관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MC와 NCMA는 양국 간 합의제로 운영된다. 작전 전개도 양국이 미리 합의해 작성해 놓은 작전계획에 따라야 하며 항상 양국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전시가 된다고 해서 모든 한국군의 작전권이 무조건 넘어가는 것도 아니다. 한미 간에는 데프콘(DEFCON·방어준비태세)의 각 단계에 따라 연합사로 배속되는 부대를 규정한 ‘포스 리스트(Force List)’가 있다. 이 리스트엔 ‘자동배속(automatic)’과 ‘요구에 따라(requested)’의 두 항목으로 각각의 부대들이 구분돼 있다. ‘요구에 따라’로 규정된 부대는 연합사령관의 배속 요청을 한국 측이 수용해야 배속된다. 데프콘 격상은 한미 양국의 합의로 정하므로 한국이 원치 않으면 작전권은 연합사령관에게 넘어갈 수 없다. 전작권 전환 논란이 한창일 당시 상당수 해외 군사전문가들은 “주권국가가 전작권을 단독 행사하는 게 이상적이지만, 거대한 군사력을 지닌 적에 맞서 연합전력 구성이 불가피하다면 전시에는 단일 지휘체계가 효율적”이라고 충고했었다. 서유럽 국가들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참여해 나토 사령관에게 지휘권을 맡기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나토는 각 회원국이 작전권을 넘길지를 결정하는 단계를 거치는 시스템이다. 양문석 상임위원은 “왜 한국의 일부 정치세력과 언론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자국의 국민을 배반하는 데 혈안인지 영화가 끝난 후 생각의 여운을 길게 끌어준다”고 썼다. 전작권 전환 시기를 2015년 말에서 더 연기하는 방안을 놓고 논쟁이 이는 것을 언급한 것 같다. 그런 논쟁에 개입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런 정도의 코멘트는 해주고 싶다. 전작권에 대해 ‘한국의 누군가’가 ‘감기’ 제작자나 양 위원과 다른 의견을 말하고 있다면,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자국 국민을 배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게 자국의 국민과 자국의 이익을 위한 길이라고 판단해서일 수도 있음을 명심하라고.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현행범으로 체포한다." 7월 25일 오후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보기 드문 상황이 벌어졌다. 시위참가자들이 경찰관을 향해 체포하겠다고 외친뒤 팔을 꺾고 목덜미를 붙잡은채 20m 가량 끌고간 것이다. 체포된 사람은 남대문경찰서 경비과장이고, 그를 체포한 이들은 민변(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 4명과 노조원 1명 등 5명이었다. 변호사가 경찰을 체포하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시민에게 정복을 입고 근무중인 경찰을 체포할 권한이 있을까? 민변 변호사들은 경비과장이 집회를 방해했기 때문에 현행범으로 체포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형사소송법 212조와 214조에는 '(벌금 50만원 이상에 해당하는 죄를 저지른) 현행범인은 누구든지 영장없이 체포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또 집시법에 따르면 '폭행, 협박, 그 밖의 방법으로 평화적인 집회 또는 시위를 방해'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경찰관은 5년 이하)이나 3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즉 법조항만으로만 보면 '①민간인도 중한 범죄의 범인을 체포할 수 있는데 ②집회방해는 그런 범죄에 해당하므로 ③집회를 방해한 경찰을 체포할 수 있다'는 논리전개가 가능해진다. 물론 이런 논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경비과장이 집회를 진짜 방해했는지를 먼저 규명해야한다. 민변은 당시 경찰이 폴리스라인을 허가받은 집회구역 경계선의 안쪽으로 걸쳐서 설치하는 등 집회를 방해했다고 주장한다. 경비과장이 현행범에 해당하는지도 논란거리다. 형사소송법상 현행범은 △범인으로 불리며 추적되고 있거나 △범죄 도구를 지니고 있거나 △신체나 옷에 현저한 증거가 있거나 △누군지 묻자 도망하려할 때 등의 4가지 요건 가운데 하나 이상에 해당해야한다. 필자는 민변의 주장이 모두 맞다고 가정하고, 법조계 인사들의 반응을 들어봤다. 한결같은 반응은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경찰 체포의 합법 불법 여부를 떠나, "민변이 어쩌다 그렇게까지 됐는지…그렇게까지 하는게 민변에게 바람직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았다. 소총 싸움에서는 이길지 몰라도 전쟁에서는 지는 일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민변은 현대차 희망버스 사건 직후인 7월 22일 발표한 '현대차와 보수 언론은 희망버스 시민들과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을 즉각 중단하라'는 제목의 성명서에서 폭력사태가 빚어진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참가자들은 불법파견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현대차 정몽구 회장을 면담하기를 요청했다. 그런데 면담 요청에 대한 답변으로, 현대차는 용역들과 직원들을 동원하여 희망버스 참가자들에게 소화기와 소화전을 마치 최루탄마냥 퍼부어대고, 곤봉과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당시 폭력사태의 시발점은 시위대가 철제 담장을 밧줄로 끌어내리며 공장 진입을 시도한 것이었다. 민변은 이를 '면담요청'이라는 점잖은 표현으로 뭉뚱그린 것이다. 앞서 4월 민변은 탈북자 간첩사건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원이 가혹행위를 통해 사건을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이에대해 국정원 수사관 3명이 명예훼손이라며 민변 변호사 3명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내자 민변은 "국정원이 변호인들의 변호권을 짓누르고 협박한다"며 유엔에 진정을 냈다. 하지만 헌법이 보장한 변호권은 피고인이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뜻하는 것이지 변호사가 법정 밖에서 아무 주장이나 발설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상대방의 명예는 마구 공격하면서 자신들이 법적으로 반격당하면 "경제적 심리적 고통(distress)을 당했다"(민변 발표 영문 논평 문구)고 국제사회에 진정하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까. 민변 같은 개혁적 성향의 법률가 단체는 우리사회에 반드시 필요하다. 제도와 법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므로 그 틈새에서 숱한 모순과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변의 뿌리에는 좌우파를 가릴 것없이 깊은 존경을 받는 고 조영래 변호사가 있다. 조 변호사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1970, 80년대야야말로 공권력의 폭력과 악법에 맞서기 위한 저항수단으로서의 정당한 폭력과 법위반 행위가 일정부분 불가피했던 시대였다. 그런 시절이었던 1971년 조 변호사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종찬 씨는 동아일보에 이렇게 회상했다. "어느 날 수사관들이 날 보고 '거물이 하나 들어왔다'고 하더군. 누구냐니까 조영래라는 거야. '그 사람이 왜 거물이냐' 하니까 '이놈은 때릴 필요가 없다' 이거야. 잡혀온 주제에 수사관들한테 조서를 그렇게 작성하지 말고 이렇게 작성하라고 지도를 한다는 거야. 다른 사람한테 죄를 뒤집어씌우지 않고 자기가 했다고 하면서 말이지. 수사관들이 감복을 한 거지. 인격적으로 조영래가 이겼다면서 말이야." 민변이 자신의 허물에는 관대한채, 상대방에 대해서는 온갖 논리를 이리저리 연결시켜 공격하는데 골몰한다면, 공허한 논리싸움에서는 이길지 몰라도 시민의 지지와 격려를 얻고 개혁의 토대를 두텁게 만드는 더 큰 전투에는 오히려 악영향만 끼칠 것이다. 자기가 내뱉은 고성(高聲)이 자신이 딛고 있는 발판을 갉아먹는다는걸 왜 모를까.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요즘 광화문 청계광장 주변에선 국정원 댓글 사건 규탄집회가 연일 열린다. 좌파 진영 일각에선 2008년 광우병 괴담 파동때 벌어졌던 촛불집회가 재현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 2007년 대선패배후 침잠했던 좌파진영이 광우병 공포를 무기삼아 전열을 가다듬었듯이, 이번에는 국정원 규탄이라는 깃발아래 재결집하려는 기세다. 근 반년넘게 속으로만 삭혔을 대선패배의 울분, 보수정권에 대한 반감을 폭발시킬 창구를 찾은 것이다. 비교해보면 2008년 촛불집회에 비해 이번에는 더 명분이 있다. 2008년 촛불의 심지가 광우병 괴담이라는 모래사장에 꽂혀 있었던데 비해 이번에는 국정원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라는 실체가 있다. 그런데 2008년 주부, 청소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것과 달리 요즘 시민들은 대부분 무심한 표정이다. 호응이 약한데는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좌파진영은 국정원 사건에는 '입으로 들어가는 광우병 공포'처럼 감정을 자극할만한 격발고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자체 분석을 하며 대책을 강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분석도 일리가 있는 대목이 있지만 보다 근본적 이유는 다른데 있다고 본다. 2008년과 달리 이번엔 국민들이 사안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다. 2008년 촛불집회 초기엔 난무하는 광우병 괴담과 좌파언론의 선동으로 국민들이 진실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이번엔 검찰 수사를 통해 사건의 실체를 봤다. 국민들은 문제가 심각한 정도, 위법행위의 경중을 나름대로 판단했을 것이다. "국정원장이 말씀자료를 통해 종북세력이 다시 집권하면 안된다고 강조했고, 이를 선거개입 지시로 받아들인 대북 심리전단 직원들이 야권 대선 후보들을 비방하는 댓글을 올렸으며, 그런 댓글이 73개 확인됐다"는게 검찰 수사결과 요지다. 여기서 좌파 운동권과 중도성향 국민들의 반응 방식이 갈린다. 좌파는 '①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했다 ②따라서 대선은 부정선거였다 ③따라서 박근혜 정권은 정통성이 없다'는 논법을 주장한다. 그런 논리에 따라 '박근혜 퇴진' '당선무효' '국정원이 만든 대통령'등의 구호를 내세운다. 하지만 중도성향의 국민들은 ①국정원의 선거법 위반은 민주주의에서 용납해서는 안되는 범죄다 ②하지만 위반 내용은 선거에 영향을 미칠 정도가 아니었다 ③따라서 부정선거 운운하거나 대정부 투쟁으로 몰아갈 사안은 아니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관측된다. 즉 '국정원 선거개입'이라는 자극적 '카피'에만 휩쓸리지 않고, 내용을 입체적으로 같이 보는 것이다. 촛불집회장 인근을 지나던 대학생은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마음먹고 선거에 개입하려했다면 수개월동안 70명이 올린 야당 후보 비방 댓글이 수십개에 불과했겠느냐"고 말했다. 사실 73개의 댓글은 혼자서 1시간이면 올릴 수 있는 수준이다. 물론 검찰이 찾아내지 못한 것도 있겠지만, 그렇다해도 수십만, 수백만 건의 댓글이 숨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검찰이 밝혀낸게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야권이 진심으로 의심한다면 국정조사가 아니라 특검을 요구했어야 한다. 은폐의심을 받는건 검찰로선 억울한 일일 것이다. 필자는 검찰 특별수사팀이 '정치적 고려'를 많이 했다고 본다. 여기서 얘기하는 정치적 고려는 과거 횡행했던 권력 눈치보기와는 다른 개념이다. 즉 △검란 등으로 땅에 떨어진 검찰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한다는 절박함 △국정원의 정치개입은 반드시 근절시켜야한다는 소명감 등이 수사팀의 수사태도와 법리 판단에 영향을 미친 정황이 있다. 축소수사는 커녕 의욕 과잉, 시대정신 과잉이라고 지적해도 무방할 만큼 적극적인 의지가 수사과정과 법리판단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댓글 숫자가 적다고 해서 국정원의 잘못이 가벼운 것은 결코 아니다. 국정원 직원들이 정치적 댓글을 달았다는 것은 엄벌에 처해야할 사안이다. 정치적 중립 의무와 본분을 망각한 행위다. 권력하수인이라는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는 국정원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은 대오각성했다던 상습 성폭행 전과자가 성추행을 저지른 것과 마찬가지다. 비록 추행의 내용이 손 한 번 만진 것이라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국민들은 국정원의 위법행위로 우리 민주주의의 토대가 흔들렸다고, 대선이 부정선거였다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경중을 따지고 사안을 다층적이고 입체적으로 판단하는 국민의 수준과 단선적 비약논법에 매몰돼 있는 좌파 운동권의 수준 차이가 여기서 빚어지는 것이다. 필자는 국정원 사건을 보면서 대도(大盜) 조세형을 떠올렸다. 지난 4월 서초동 빌라에 침입한 그는 한밤중에 온동네 다 들리게 유리창을 깨는 바람에 붙잡혔다. 정치개입이라는 고질병을 치유하지 못한채, 허접한 수준의 댓글을 달다 망신당한 아마추어 정보기관의 모습에서 "그게 프로가 할짓이냐"며 자신을 꾸짖던 대도의 자탄이 들려온다. 사안의 경중과 전후맥락을 무시한채 '3·15 버금가는 부정선거'라고 외치는 좌파 운동권에게서도 고질병의 집요함을 본다.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CJ가 저렇게 당하는 건 보호막이 되어줄 우군이 없어서다.” CJ그룹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된 뒤, 세상 돌아가는 속사정을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그들의 해설을 요약하면 대충 이렇다. “CJ는 메이저 언론과 불편한 관계다. 케이블 TV 업계의 공룡인 CJ는 종합편성 채널을 갖고 있는 메이저 신문은 물론이고 지상파 방송사들과도 이해관계가 대립한다. 검찰로선 새 정부 첫 대규모 사정(司正)의 사냥감으로 CJ만큼 적당한 상대가 없었을 것이다.” 동아일보 사회부원들로서는 수긍키 어려운 해석이다. 필자를 포함해 부원 누구도 CJ와 그 어떤 이해관계나 호오의 감정이 있을 게 없다. 동아일보 종편채널인 채널A와 CJ 간에 어떤 이해관계가 있는지 필자에게 귀띔조차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동아일보 법조팀이 CJ 비리 의혹을 취재해 온 것은 종편 출범 훨씬 이전부터였다. 검찰이 이런저런 여건을 감안해 CJ를 타깃으로 정했다는 해석도 사실과 다르다. CJ 수사는 새 정부 들어 기획으로 준비했다기보다는, 칼집의 봉인이 이제야 풀렸다고 보는 게 맞다. CJ 수사는 2007년 5월 CJ 전 재무팀장의 청부폭력 사건으로 거슬러 간다. 경찰이 수사 과정에서 USB를 확보했고, 검찰이 2008년 복원한 USB 파일 속에는 이재현 회장의 차명 재산과 재산 도피 의혹을 뒷받침하는 편지 등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본격 수사가 시작되기까지는 근 5년이 걸렸다. 지난해에도 대검 중수부가 수사를 준비했지만 흐지부지됐다. 법대 출신인 이 회장의 동문 검찰 고위 간부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소문까지 돌았었다. 현재 검찰이 풀어내는 보따리 속 내용물의 상당수가 이미 과거 내사 때 확보된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검찰은 준비돼 있는 상태였다. 이번 CJ 사건은 한국 재벌비리사의 낡은 페이지를 마감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총수가 사적 이익을 위해 회사에 피해를 입히거나, 파렴치한 경제범죄를 저질러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을 경우 대주주로서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등의 제도적 입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잠시 감옥에 갔다 나오면 다시 ‘나라님’(임금·CJ 전 재무팀장이 이 회장을 호칭한 표현)처럼 거대 그룹을 호령하는 관행은 끝내야 한다. 과거에 기업에 대해 사정의 칼날이 몰아치면 재계와 정치권 등에서 기업 활동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곤 했지만 이번엔 그런 역풍이 거의 불지 않는다. CJ가 힘센 집단에 우군이 없어서일까? 채널A 기자의 가슴 찡한 특종기에서 해답을 찾아볼 수 있을 듯싶다. 사회부 최석호 기자는 검찰 압수수색 직후 장충동 이 회장의 집을 찾아갔다. 이 회장 집 옆 빌라의 70대 초반 경비원 A 씨에게 아침 상황 CCTV를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A 씨는 거절했지만 세 번이나 찾아와서 공손하게 부탁하는 최 기자에게 결국 CCTV 화면을 보여줬다. 화면 속에는 압수수색 수시간 전에 CJ경영연구소 직원들이 증거 인멸을 위해 자료를 빼내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최 기자는 이 장면을 휴대전화에 담았고 채널A 뉴스에 특종 보도됐다. 며칠 후 A 씨가 사직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최 기자는 가슴이 찢기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A 씨를 찾아갔다.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최 기자에게 A 씨는 “동네 빵집까지 다 뺏어간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화면을 보여줬다. 내가 도의상 사직한 거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최 기자를 껴안아주며 “나는 괜찮다. 너는 돈 먹지 말고 기자생활해라”며 등을 두드려줬다. 필자는 그 경비원이 우리 사회의 평범한 시민인 동시에 ‘작은 거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은 아무리 장사에 능한 기업이라도 세상의 인심을 잃으면 장기적인 번성과 발전은 기약하기 힘듦을 경종처럼 알려준다. CJ가 저렇게 난타당하는 건 언론이나 검찰에 우군이 없어서가 아니라, 골목민심이라는 천심을 잃어서가 아닐까.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임을 위한 행진곡’을 퇴출시키려는 공무원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국가보훈처는 ‘3·1절 8·15경축식 등 정부 기념행사마다 공식 기념노래가 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에도 별도로 공식 주제곡을 만들겠다’는 이유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좌파단체, 특히 종북세력이 애창하는 노래를 정부 주관 행사에서 부르는 건 모양이 안 좋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둘째, 이명박 정부도 이 노래를 못마땅해했는데 박근혜 대통령은 더 불편해하지 않을까 우려했을 것이다. 이 노래가 2004년 봄 386 출신 의원 당선자들이 노무현 청와대에서 합창한 것을 계기로 보수층의 심기를 거슬려온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판단은 옳지 않다. 옳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박근혜정부 탄생의 의미를 훼손시키는 자해행위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종북 좌파들의 노래가 아니다. 노래가 상징하는 5·18민주화운동은 종북 좌파들의 투쟁이 아니었다. 이 노래는 1980년 5월 전남도청에서 산화한 시민군 윤상원 씨를 추모하는 노래극을 준비하면서 만들어졌다. 고 윤상원 씨는 전남대를 나와 은행원으로 일하다 사직하고 1978년 근로자 생활을 하면서 ‘들불야학’을 했다. 당시 들불야학에 다녔던 근로자들의 증언록을 보면 윤 씨 등이 꿈꿨던 것은 노동3권과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주의였다. 그 후 80년대 대학가에서 이 노래를 부른 학생들도 대부분 종북과는 무관했다. 1986년을 기점으로 주체사상파가 학생운동 지도부의 주도권을 쥔 것은 사실이지만, 대다수 학생, 특히 6월 민주항쟁 때 거리를 메운 학생과 시민은 종북이나 사회주의와는 무관한 순수한 민주주의를 염원했다. 6월 항쟁 당시 학생들이 도로에 주저앉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때 서울 하늘에는 매일같이 하얀 눈이 내렸다. 초여름의 기상이변이 아니었다. 빌딩의 열린 창문마다에서 시위대에게 최루탄 가루와 눈물을 닦으라고 던져주는 티슈들이 함박눈처럼 날렸던 것이다. 그 시민들은 지금 40대, 5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 되었고 그들 중엔 박근혜 후보에게 표를 던진 이들도 숱하게 있을 것이다. 5·18, 더 거슬러 4·19혁명에서부터 기원해 6월 항쟁으로 꽃핀 민주화 투쟁은 좌파들만의 성취물이 아니다.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현 야당만의 전리품도 아니다. 박근혜정부 탄생을 지지한 과반수의 국민들 가운데에도 이 노래에 ‘저작권’이 있는, ‘민주화 주주(株主)’들이 무수히 있는 것이다. 종북세력의 애창곡이므로 퇴출시키자는 생각은 독사가 마시는 샘물은 다 폐쇄시키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권이 민주화를 이룬 국민의 대열에서 스스로를 이탈시켜 이념적 토지 지분을 협소하게 만드는 행위다.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되지만 젖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는데 왜 갈증을 자초하는가. 현 여권엔 전두환 독재 시절의 인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재야와 학생운동에 몸담았던 인사들도 많다. 산업화 세력이 이 노래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도 과잉반응이다. 민주화는 60, 70년대 기적적인 경제발전으로 중산층이 비약적으로 성장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닌가. 박근혜정부는 국민 모두가 함께했던 민주화 과정의 유산이며 상징물 중 하나인 노래를 좌파에 헌납하려 하는가. 박근혜정부가 출범할 때 지식인들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그건 정확하지 못한 표현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박근혜정부를 탄생시킨 힘 속에도 민주화 세력은 포함돼 있으며, 민주화 투쟁 정통성의 한 줄기가 흐르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제 그걸 행동으로 보여주길 바란다. 임을 위한 행진곡 퇴출 같은 낡은 발상을 퇴출시키고 5·18 기념식에 직접 참가하는 게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세상만사가 사필귀정이라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어떤 일이든 도모하는 사람의 마음에 사(邪)가 끼면 결국은 일이 어그러지고 혹독한 대가가 돌아오는 것 같다. 지난 수개월간 검찰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의 인과관계를 따져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Ⅰ막. 푸들을 원하다 지난해 말 성검사 파문 등의 수습과정에서 검찰총장과 중수부장이 정면충돌하면서 한상대 총장이 물러났다. 정권교체기에 새 총장을 정해야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새 총장은 만신창이가 된 검찰조직을 추스릴 수 있도록 내부 신망이 두텁고 검찰독립을 지킬 수 있는 인물이어야한다는 여론 속에 채동욱 고검장, 김진태 대검차장 등이 물망에 올랐다. 그런데 의외의 이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먼저 안창호 헌재재판관이 유력하게 부상했다. 그는 대통령직 인수위 고위인사와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탁월한 검사였다는 사실과 별개로 재판관이 된지 4개월 밖에 안된 사람을 총장으로 민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이 사실이 동아일보 보도로 공개되면서 비난이 쏟아졌고 안창호 카드는 일단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어 급부상한 이름이 김학의 고검장이었다. 박근혜 당선인과의 친분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는데도 새 정권 실세들이 밀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는 정계에 두터운 인맥을 쌓아왔다. 위기에 처한 검찰조직을 추스릴 총장감으로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김학의 총장론'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특수수사로 잔뼈가 굵은, 무골 기질이 강한 김진태, 채동욱 대신 권력실세들에 부담이 되지 않을 '순치된 총장감'을 찾는다는 말이 파다하게 돌던 때였다. Ⅱ막. 위대한 반란 2월 7일 검찰총장 후보 추천위가 사상 처음으로 열렸다. 3명 이상을 추천하면 법무부장관이 대통령에게 제청하는 제도다. 다들 안창호 김학의가 당연히 포함될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회의 벽두에 민간위원들이 무기명 비밀투표를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추천위를 거수기로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위원들의 단호한 요구를 법무부로서도 무시할 수 없었다. 비밀투표 결과 1차 투표에서 김진태 채동욱이 5표 이상을 얻었고 2차 투표에서는 소병철 고검장과 길태기 법무차관이 기준을 통과했는데 박빙의 승부 끝에 소 고검장이 선택됐다. 김학의 안창호 두 사람 모두 빠진 상태로 후보 3명이 확정된 것이다. 훗날 누군가 한국 검찰사를 쓴다면 이날 회의를 검찰 독립을 향한 위대한 혁명으로 기록할 것이라 필자는 믿는다. 정권 출범기의 검찰총장을 대통령이 낙점하지 못한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총장 추천위 제도를 도입할때만해도 여야 어느쪽이든 자신들이 집권하면 추천위는 대충 콘트롤 할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제도의 힘은 무서웠고 추천위원들의 사명감은 대단했다. Ⅲ막. 미련을 못버린 '보이지 않는 손'…난파 추천위의 반란이후 법무부가 총장 임명제청을 하려해도 청와대는 묵묵부답이었다. 새로 출범할 정부의 공직자 인사 라인 일부 인사들은 추천위를 다시 소집하는 방안까지 검토했지만 동아일보에 이 사실이 보도됨으로써 더 이상은 '반혁명'을 꿈꾸지 못하게 됐다. 그러다 다시 이변이 발생했다. 3월 14일 김학의 고검장이 법무차관에 임명된 것이다. 아무도 예상못한 이례적 인사였다. '김학의 카드'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얼마나 깊은가를 보여준 인사라는 평판이 나왔다. 차기 법무장관 임명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이게 비극적 사태를 몰고 온 사단이었다. 동아일보 취재팀과 사정당국은 이미 별장 동영상 의혹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학의 차관 임명이 없었다면 이 의혹은 그냥 묻혀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만해도 이 의혹은 고위공직자들과 건설업자가 구조적으로 유착한 권력형 비리 사건이라기 보다는 섹스스캔들 차원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관 인사로 동영상 의혹은 다시 엄청난 폭발력을 지니게 되었고, 결국은 청와대 민정라인과 검찰 모두에 씻기 힘든 상처를 준 사건으로 폭발했다. 김 전 차관 역시 억울한 피해자가 된 측면이 있다. 그가 만약 총장이 됐다해도 푸들역할만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단지 그런 기대를 품은 '보이지 않는 손'의 욕심이 화를 자초한 것이다. 요즘 청와대 민정라인은 경찰이 차관인사전에 동영상 의혹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며 화를 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경찰이 사전에 보고했든 아니든 그건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집요하게 '푸들 총장'을 욕심낸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다. 박 대통령은 인사팀의 눈을 흐리게 만들어 새 정권에 상처를 입힌 그 음험한 손이 누구인지, 찾아내서 내쳐야 한다. 박 대통령이야말로 검찰이 칼을 겨눠도 당당할 수 있는 삶을 살아온, 푸들 총장에 연연할 필요가 전혀 없는 정치인 아닌가.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1980년대 중반에 해군사관학교를 다닌 한 지인에게서 들은 일화다. 한 4학년 생도가 퇴교 위기를 맞았다. 3학년 여름휴가 때 바닷가에서 아가씨를 만나 짧은 사랑을 나눈 게 발단이었다. 두 사람은 그 후 헤어졌는데 1년 뒤 이 여성이 다른 남자와 약혼을 하면서 해변에서 있었던 일을 고백한 것이다. 약혼남은 해사에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렸다. 당시는 사관생도가 휴가를 나가 여성과 육체관계를 갖는 걸 금기시하던 시절이었다. 해사 훈육관은 생도를 불러 “네가 안 잤다고만 하면 없던 일로 하겠다”고 했다. 우수한 생도의 장래가 안타까워 덮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생도는 “잠을 잔 건 사실”이라고 인정하고 자퇴했다고 한다.깨끗이 물러난 大人 김용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려운 선택 앞에 선 남자의 처신’에 대해 곰곰 생각해 봤다. 지난 2개월여간 공직후보자 인사검증 취재보도를 담당한 에디터로서 공직후보자들의 여러 유형의 반응을 봐 왔다. 최고위 자리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흠결이 드러나자 뻔뻔하게 부인하는 사람이 많았다. 개중 일부는 음모론을 제기하며 취재팀에 대한 험담을 퍼뜨리기도 했다. 사생활 신상털기를 한다느니, 동아일보가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다느니 하는 저열한 수준의 역공세였다. 동아일보-채널A 인사검증 공동취재팀은 정치나 이념과는 무관한 사회부 기자들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애써 그런 식으로 몰아가는 건지…. 간혹 “새 정부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느냐”는 항의성 질문을 받으면 “문재인 후보가 승리했더라도 똑같은 강도의 검증취재가 이뤄졌을 것”이라고 간단히 답하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반면 깨끗이 잘못을 시인하는 후보자들도 있었다. 특히 김용준 총리후보의 선택은 인상적이었다. 사실 그에 대해 제기된 의혹과 문제점은 그 시절, 그 지위를 거쳐 온 법조인이라면 대부분이 자유롭지 못할 그런 내용들이었다. 그럼에도 새 정부에 누가 될까 봐, 그리고 평생 쌓아온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표연히 물러나는 모습에서 ‘대인(大人)’의 풍모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흠결을 안고 있던 일부 후보들은 끝내 버텼다. 김병관 국방장관 후보자도 머잖아 장관직 임명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김 후보자로서는 억울한 대목이 많을 것이다. ‘역대 국방장관 후보자 가운데 가장 흠결이 많이 제기된 후보’라는 비난을 받고 있지만, 같은 시절 군생활을 했던 지인들은 ‘당시의 잣대로 보면 평균보다 훨씬 높은 도덕성을 지킨 군인이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시대적 변수를 감안한다 해도 그를 둘러싼 의혹과 흠결은 국방장관이라는 자리의 막중함에 비춰 결코 사소한 게 아니다. 12일 느닷없이 국방부 브리핑룸을 찾아가 “헌신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한 것도 부적절했다. 그는 육사 수석 출신이다. 사관학교는 중간·기말고사 때 시험감독이 없다. 생도들 스스로 감시해서 커닝이 적발되면 생도들로 구성된 명예위원회에 넘긴다. 이렇게 군인은 명예를 먹고사는 직업이다.명예에 살고, 죽는게 군인 아닌가 물론 과거에도 숱한 흠결이 드러난 후보자가 대통령의 신임이라는 동아줄만을 움켜쥐고 버틴 끝에 장관직에 입성한 경우가 적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세상은 추문을 잊어줬고, 장관이라는 막강한 현실 권력이 된 그들 앞에서 염량세태에 물든 세상은 고개를 숙였다. 결국 승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라면 우리 아이들에겐 무엇을 가르쳐야 한다는 건가. 손해 보는 선택은 하지 말라. 명예? 자존심? 그런 추상적인 건 다 헛되다. 그렇게 가르쳐야 하는 건가. 김용준은 바보 같은 선택을 한 것인가. 거짓말을 할 수 없어 장교의 꿈을 포기한 해사 생도는 어리석은 청년이었던 건가. 박근혜 대통령은 청소년들에게 ‘어떡하든 살아남으면 결국은 승자가 된다’는 정글의 가치관을 심어줄 것인가.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삼성언론재단은 22일 제17회 삼성언론상 취재보도 부문에 동아일보 ‘경찰, 수원 20대 여성 피살사건 축소 은폐’(하종대 부장, 송진흡 남경현 차장, 이성호 신광영 박성민 기자) 등 4편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시상식은 3월 19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수상자에게는 상금 3000만 원과 메달이 수여된다. 다음은 부문별 수상자 명단. △어젠다: 조선일보 ‘술에 너그러운 문화, 범죄 키우는 한국’ 시리즈 △논평·비평: 중앙일보 이철호 논설위원 △사진영상편집: KBS 시사기획 ‘창-빅데이터 세상을 바꾸다’}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는 끝까지 버티기로 마음을 굳힌 듯 하다. 김용준 국무총리 후보자가 의혹이 제기되자 표연히 물러난 것과 대조적이다. 사실 제기된 의혹과 흠결의 경중을 비교해보면 저울이 필요없을 정도로 김 후보자 쪽이 경미했다. '남자의 처신'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 후보자가 버티기로 한 것은 어떻하든 결과적 승자가 되어 명예회복을 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일 것이다. 인수위와 청와대 사이의 책임 떠넘기기 핑퐁게임을 보며 어부지리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톨게이트까지 운전후 차 넘겨줘” 박근혜 당선인이 '이동흡 카드'를 철회하지 못하는건 두가지 우려 때문으로 보인다. 첫째, 지명 철회가 정치적 상처가 될 것이라는 우려다. 그야말로 기우(杞憂)다. 선진국에서도 장관 후보들이 낙마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2009년 미국 버락 오바마 정부 출범때도 그랬다. 하지만 오바마가 원했던 인물이 낙마한다고 해서 오바마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자신이 꼭 필요로 했던 인물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차원에서 대통령이 어려움을 겪게 됐다는 분석이 나올뿐이다. 박 당선인이 진짜 정치적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은 국회 표결까지 가서 부결되는 경우다. 보안의 필요성과 인재풀의 협소함을 감안할 때 피지명자의 예상치 못했던 흠결이 드러나는 것은 병가지상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알고서도 철회하지 않았다면 이는 고집불통이라는 나쁜 이미지를 줄 수 있다. 둘째, 박 당선인 측은 '이동흡 카드' 철회가 헌법재판이라는 보수주의의 보루에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우려를 했을 수 있다. 이 역시 착각이다. 이 후보자에게 제기된 의혹이나 문제점은 23가지 가량된다. 이중 본인이 인정한게 대략 6가지다. 그중에서 위장전입처럼 과거 시대의 관행이었던 것은 거론하지 않고 싶다. 하지만 해외출장에 부인 동반, 홀짝제 관용차 요구, 헌법연구관들과 공저한 저서를 단독 저자로 표기하는 것 같은 행태들은 그가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아니었음을 웅변해준다. 보수가 아니라 지위의 사유화이며, 군림이며, 봉건적 권위주의다. 보수주의는 공동체 가족 국익 미래 전통 원칙에 가치를 두는 이념이다. 개인의 자유, 당장의 복지, 평화를 중시하는 진보에 비해 더 장기적 호흡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보수주의의 리더가 되려면 솔선수범, 신독, 자기관리, 겸손, 배려가 필수적이다. 그런 덕목이 부족한 사람을 포기한다고 해서 보수의 패배로 여길 국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사이비 보수와의 차별화로 여길 것이다. 이동흡 논란을 종결짓기에 앞서 국회가 반드시 진위를 확인해야 할 대목이 하나 있다. "당신은 왕처럼 생활하였지만 토요일에는 반드시 귀경하는 주말부부였습니다. 당신은 직원에게 승용차를 운전하게 하여, 고속도로 톨게이트 옆에서 차를 넘겨받았습니다. 그후 운전원은 30분 가까이 위험한 도로를 걸어서 돌아와야 합니다. 그곳은 택시를 타기도 여의치않고, 유성까지 가서 버스를 타야하기 때문입니다." 지난달 14일 나주등기소 6급 직원 김대열 씨가 법원 인터넷에 실명으로 올린 글의 일부다. 필자는 그 글을 읽고 '설마'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실명 글이어서 묵과할 순 없었다. 전국 취재망을 가동해 진위확인에 나섰다. 김 씨는 본보 기자에게 "대전에서 근무할때 당사자들이 직접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이 후보자가 1998~2000년초 대전고법 부장판사로 재직할 때의 비화를 나중에 회식자리에서 들었다는 설명이다. 취재팀은 해당 운전기사를 찾아냈다. 현재 모 지방법원에 근무하는 A 씨다. 그는 지난달 본보 기자가 찾아가자 "그런 일 없었다"고 부인했다. 지난주에는 "왜 기자가 나를 찾느냐"며 화를 냈다. "이동흡 씨 문제로 왔다"고 하자 "누구요?" "이동흡이 누군지 몰라요"라며 본보 기자를 사무실 밖으로 밀어내다시피 했다.국회서 진위 확인 나서야 A 씨가 부인하므로 김 씨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대목이 있다. 50대 연령대의 기능직 공무원인 A 씨에게 함구령이 내려졌을 것이라는 법원 노조 관계자들의 말도 개운치 않다. 본보 취재팀이 확인할 수 있는 한계는 여기까지였다. 이제 국회가 당시 이 후보자와 함께 근무했던 사람들을 불러 진위를 확인해주기 바란다. 위증죄의 엄중함을 아는 법원 직원들이 국회에서 위증하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 이 의혹이 터무니없는 거짓으로 확인되면 이 후보자를 겨냥해 법조계 안팎에서 제기됐던 공세의 배후에 좌파 이념세력이 있었을 가능성을 의심해볼 수도 있다. 김 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여기에 말을 덧붙이는건 사족(蛇足)이 될 것 같다.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정홍원 국무총리 후보자의 장남 정모 검사(35)는 8일 동아일보-채널A 공동취재팀과의 통화에서 병역면제 경위를 상세하게 밝혔다. 그는 2001년 수핵탈출증(허리디스크)으로 5급 면제 판정을 받았다. 정 검사는 지난해 9월 경남 통영 여자 초등생을 살해한 김점덕 사건을 수사하며 사형을 구형했다. ―원래 디스크가 있었나. “자세가 안 좋아 가끔 허리가 아플 때는 있었지만 학부시절에는 이상이 없었다. 대학원생 시절 고등학교 친구들과 서울에서 강릉으로 여행을 가면서 6시간 동안 쉬지 않고 운전을 했더니 급성으로 허리 통증이 생겼다.” ―어떤 치료를 받았나. “통증이 심해 한 신경외과에서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을 했더니 요추와 천추가 신경을 압박해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해 수술 대신 다른 대학병원과 척추 전문 한의원에서 2년 정도 물리치료를 받았다. 부산까지 찾아가 치료한 적도 있다.” ―재검을 받았나. “2001년쯤 재검을 신청해 신경전문외과 MRI 자료를 제출했다. 병무청에서 그 자료는 안 된다고 해 서울성모병원에서 진단서를 끊고 다시 MRI를 촬영해 제출했다. 병무청에서도 컴퓨터단층촬영(CT)을 했다. 최종적으로 면제 판정을 받았다.” ―지금 몸 상태는 어떤가. “지금은 일상생활하는 데 큰 문제는 없다. 평소에 조심한다. 따로 치료를 받지도 않고 있다.”통영=고정현 채널A 기자 sangamdongking@donga.com}
경기 의정부시의 대표 먹거리 명소인 부대찌개 골목. 이곳에서 A 씨(81)는 1968년부터 ‘오뎅 식당’이라는 상호로 부대찌개를 팔아 왔다. 개업 당시 미군 부대에서 유통된 햄 소시지가 단속 대상이 되자 부대찌개와는 무관한 ‘오뎅 식당’이란 이름을 택한 것. 주위에선 ‘촌스러운 이름’이라고 했지만 A 씨는 친근한 이미지라며 이를 고집했다. 그러다 나중에 ‘A 할머니 원조 오뎅 식당’으로 이름을 일부 변경했다. 이 식당은 허영만의 만화 ‘식객’에 등장했을 정도로 부대찌개 원조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지난해 3월 A 씨 가게에서 70m 떨어진 곳에 B 씨가 ‘○○○ 원조 오뎅 의정부부대찌개’라는 식당 문을 열었다. 간판 글씨까지 비슷하게 치장했다. A 씨는 “상도덕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B 씨는 2008년 이미 ‘○○○ 원조 오뎅 의정부부대찌개’를 서비스표로 출원한 상태였다. A 씨는 지난해 7월 B 씨를 상대로 그 이름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취지의 ‘상호사용 금지 가처분’ 신청을 의정부지방법원에 냈다. B 씨도 지난해 9월 “내가 먼저 특허 등록을 냈다”며 ‘서비스표 침해 금지 가처분 신청’으로 맞섰다. 법원은 최근 두 소송을 함께 심리했고 B 씨가 낸 가처분 신청을 기각한 뒤 A 씨의 손을 들어줬다. 의정부=조영달 기자 dalsarang@donga.com}
세명대(총장 김유성)는 17일 국회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개최한 대선 개표과정 시연회에서 복도에 드러눕는 행위를 벌인 이 대학 이경목 교수(전자상거래학)에 대해 교수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징계위원회에 회부하기로 했다고 18일 밝혔다. 이 교수는 선관위가 야권 일각에서 제기한 대선 개표부정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마련한 이날 행사에서 개표부정을 주장하는 일부 시민과 국회 방호원 사이의 몸싸움 와중에 팔과 다리를 다쳤다며 행사장 밖 복도에 드러누워 “119를 불러 달라”고 소리치다 119에 실려 갔다.}

"박 대표께서는 만약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현재 어떤 위치에 계실거라 생각하십니까?" 2007년 2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전 대표가 마련한 간담회. 여러 기자들과 저녁식사를함께 하며 대화를 나누는 화기애애한 자리였다. 그런데 필자가 위에 소개한 질문을 하자 박 전 대표는 약간 표정이 굳었고 "글쎄요"라면서 화제를 돌렸다. 사실 필자는 가볍고 재치있는 대답을 예상했고, 그러면 바로 진짜 묻고 싶었던 질문으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박 전 대표가 차가운 반응을 보임에 따라 일단 거기서 멈췄다. 6년이 지난 지금 박 전 대표는 대통령 당선인으로서 첫 조각을 구상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첫 조각이 생각난다. 2008년 2월초 이명박 당선인이 국무위원 후보로 내정한 인물들은 우수수 낙마했다. 필자는 당시 인선의 진짜 문제는 단지 '고소영'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리더로서의 능력과 품성을 검증받은 바 없는 인물들을 장관직에 바로 앉히려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장관 후보 4명, 청와대 수석 1명이 낙마했는데 그중 3명이 평교수에서 바로 발탁된 케이스였다. 평교수가 장관이 되는 것 자체를 문제삼자는게 아니다. 평교수 출신이 성공적으로 장관직을 수행한 사례도 있다. 하지만 조직관리 경험, 리더로서 검증된 경력이 전무하다시피한 인물들을 바로 기관장에 앉히는 것은 위험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법조인, 언론인, 국회의원 등도 마찬가지다. 임명前 엄격한 평판조회 필요 물론 선진국에도 뛰어난 업무능력을 발휘한 교수출신 장관이 여럿 있다. 그런 사례로 흔히 꼽히는 인물이 스탠포드대 교수 출신으로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낸 콘돌리자 라이스다. 하지만 라이스는 평범한 교수에서 바로 장관이 된게 아니다. 1981년 조교수가 된 라이스는 소련 전문가로 명성을 떨치다 1988년 국가안보회의(NSC) 사무국의 소련 전문가로 영입됐다. 2년뒤 대학에 돌아온 라이스는 1993년 재무 및 학사담당 부총장이 된다. 최초의 여성, 첫 소수인종 출신, 최연소 부총장이었다. 당시 스탠포드대는 2000만 달러의 구조적인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라이스는 2년만에 대학재정을 1450만 달러 흑자로 바꿔 놓았다. 전문성에 더해 뛰어난 경영능력, 리더십 성적표가 있었기에 2001년 국가안보보좌관에 등용된 것이다. 미국의 학자들은 행정부에 들어가는 것을 '퍼블릭 서비스'라고 부른다. 자신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일정한 기간 공익을 위해 봉사한다는 개념이다. 그런데 유명한 교수여도 조직관리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빼앗기는 장차관 등 기관장 보다는 실제로 전문성을 살려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실무 국장이나 부차관보 등의 직책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진국에서 공직자 임용시 또하나 중시하는 대목은 품성에 대한 평가다. 필자는 워싱턴 주재원 시절, 어느날 아침 낯선 남자의 방문을 받았다. 정부기관 신분증을 내민 그는 앞집에 사는 남자를 공직에 영입할 계획이라고 설명한뒤 그의 평소 행동에 대한 평가를 상세히 듣고 기록했다. 그리곤 또 옆집으로 향했다. 요즘 이동흡 헌법재판소 소장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을 보면서 특히 주목되는 대목은 공직자로서 처신과 품성에 대한 평판들이다. 위장전입, 재산증식 등 도덕성 관련 의혹들은 사실여부가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예단하지 않고 싶다. 하지만 그의 처신, 행태와 관련해 쏟아지는 주장들은 만약 그중에 하나만이라도 사실이라면 굳이 청문회를 열 필요가 있을까 싶은 수준이다. 물론 평판은 주관적이며, 누군가 의도적으로 나쁜 소문을 퍼뜨릴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 후보자 검증취재를 해보면 긍정, 부정 의견이 반반 정도로 나오는게 대부분인데, 이번처럼 압도적으로 부정적 의견이 나오는건 처음"이라는게 본보 취재팀의 전언이다. 청와대는 헌법가치 수호기관의 최고책임자를 내정하면서 해당자에 대한 평판을 들어보는 절차를 전혀 거치지 않은 걸까?이동흡 품성 검증 전혀 안했나 이동흡 후보자는 뛰어난 판사, 공부하는 법관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유능한 법관, 전문성이 뛰어난 교수, 글 잘 쓰고 말 잘하는 언론인이라는 경력이 훌륭한 리더임을 보장해주는 스펙은 결코 될 수 없다. 필자가 6년전 박근혜 전 대표에게 진짜 하고 싶었던 질문은 이것이었다. "대통령의 딸이 아니라 개인 박근혜로서 지금까지 이룬 리더로서의 가장 뛰어난 성취는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이제 박 당선인은 영입하려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물어야한다. "당신이 지금까지 리더로서 이룬 성취는 무엇이있느냐"고.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주변의 품평을 다층적으로 들어야 한다. 이명박 당선인이 6년전 저질렀고, 임기말까지 되풀이하고 있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소설가 공지영 씨가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튿날 트위터에 “아침에 한술 뜨다가 비로소 울었다…나치 치하의 독일 지식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절망은 독재자에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열광하는 이웃에게서 온다”라고 썼다.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그 소식을 전했는데, 다들 실소(失笑)하며 한 귀로 흘려버리는 반응이었다. ‘노이즈 마케팅’이라고 일축하는 사람도 있었다.일부 지식인들 진영논리로 진실 외면 하지만 필자는 한동안 여러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필자가 공 씨의 글에 주목한 이유는 그 글이 오랜 기간 세상의 한쪽 단면만을 들여다볼 경우 사람이 얼마나 균형감각을 잃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례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이념적 지향성과 다른 정권을 나치 같은 절대악과 동일시하는 단선적·독선적 사고방식이 우리 사회 일각에 여전히 남아있음을 드러내준 사례여서만도 아니었다. 필자가 공 씨 글에 주목한 진짜 이유는 ‘나치 지식인’이라는 단어가 이 시대에도 유효한 중요한 ‘화두’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나치 시대의 지식인을 떠올릴 때면 “당신이 지금 외면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은 무엇인가”라는 준엄한 물음이 생각난다. 1942∼45년 유대인 600만 명이 나치 제국의 수용소에서 처형됐다. 상상만 해도 가슴이 아득해지는 숫자다. 하지만 그 시대 독일의 지식인들은 침묵하거나 진실을 외면했다. 150만 명이 학살된 트레블링카 수용소 인근에 살던 주민들은 수용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확실히는 몰랐다고들 한다. 노벨상 수상작가 존 쿠체는 그들이 ‘자의적 무지’로 인해 인간성을 상실했다고 지적했다. 우리 시대에도 많은 이들이 일부러 외면하는 불편한 진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한 사례가 북한의 처참한 인권 상황이다. 무려 200만 명이 굶주려 죽어갔고 지금도 처형과 고문이 난무하는 수용소에 숱한 사람들이 갇혀 있다. 이를 외면하는 이들은 2차대전 후 지식인들이 그랬듯 훗날 “당시엔 사실이라고 확신할 정확한 정보가 없었다”고 변명할 것이다. 나치 시절의 총칼 대신 지금은 진영논리와 이념의 덫에 눌려 많은 이들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인들이 진영으로 나뉘어 양면의 진실, 명암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쪽만을 본다. 예를 들어 기업 구조조정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이들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공룡의 비늘처럼 떨어져 나간 해고자들의 절절한 아픔을 외면한다. 반대 진영에 선 이들은 기업이 처한 무한경쟁의 현실을 도외시한다. 나치 지식인을 떠올릴 때 생각나는 또 하나의 주제는 ‘선전선동술’의 파괴력이다. 히틀러가 집권하고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는 숱한 선전선동 기술자들의 기여가 있었다. 독일 국민이 집단 최면에 걸린 듯 이성과 합리적 판단을 버리고 히틀러의 선동에 휩쓸려 갔듯이 교활하고 유능한 선전선동가가 대중을 현혹할 위험은 어느 시대에나 상존한다. 우리 사회도 전두환 시절의 땡전뉴스, 정연주 KBS의 탄핵방송, 광우병 PD수첩팀의 ‘편집의 묘술’ 등 자신이 따르는 권력이나 이념을 위해 다양한 형태의 선전선동 기술을 창안해내는 행태를 목격해왔다. 곧 새로운 권력이 출범하면 기꺼이 21세기의 괴벨스가 되겠다는 지식인이 줄을 이을 것이며, 좌파진영에선 새 정권을 공략할 온갖 선전선동술을 고안해낼 것이다. 북한의 처참한 인권상황은 ‘모르쇠’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후보에게 투표한 국민을 ‘독재자에 열광하는 우민’으로 여기는 그런 시각을 가진 이는 좌우 어느 쪽이든 극소수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수준의 발언들이 일부 계층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 취약한 토양과 소외된 영역이 많음을 방증한다. 작가는 세상의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하는데 공 씨도 어쩌면 그런 역할을 한 것 같다.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2일 오후 2시 충남 태안군 소원면 모항리 만리포해수욕장 M슈퍼. 갈매기들을 자식처럼 돌봐 ‘갈매기 할머니’라고 불리는 주인 김복자 할머니(70)는 기자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숨부터 내쉬며 말했다. “어디 손님이 있어야지. 기름 유출 전에 주말이면 150만 원어치 정도 팔았는데 요즘에는 30만 원어치도 팔기 어려워….” 2007년 태안 기름 유출 사고 5주년(7일)을 앞두고 동아일보 취재팀이 방문한 태안의 걱정은 지역경제뿐이 아니다. 그물에 걸리는 어종의 변화로 바닷속 생태계가 교란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 지 오래다.○ 주민 건강 불안감 확산 3일 소원면 주민 A 씨에게 “그 동네에서 기름 사고 이후 암 발생이 많았다는데 요즘은 어떠냐”라고 물었더니 그는 입을 떼지 못하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기름 유출 사고 이후 이 동네 주민 630여 명(330여 가구) 가운데 15명가량이 암에 걸렸다는 주장은 2010년 초에 제기됐다. 태안군 환경보건센터도 역학조사에 나섰다. A 씨는 “주민 건강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려고 암 발생 사실을 알렸다가 ‘태안 관광을 망치려느냐’라는 항의에 시달렸다”라며 “하지만 주민들이 의료기관의 전수 조사를 바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군환경보건센터가 주민 1만 명을 대상으로 중장기 건강영향조사를 실시한 결과 방제작업 참여 일수가 많을수록, 사고지역과 거주지가 가까울수록 호흡기 질환과 알레르기 고혈압 당뇨 우울 스트레스 정도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점 때문에 주민들의 불안감이 커지는 것. 4월 건강검진을 받은 소원면 의항리 주민들은 위와 대장 등에서 용종이 많이 발견돼 긴장하기도 했다. 주민 지재돈 씨는 “같이 검진을 받으러 간 15명 가운데 6명에게서 용종이 발견돼 모두 놀랐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군환경보건센터 엄귀흠 역학팀장은 “환경과 질병의 관계는 장기간의 추적을 통해 규명할 수 있다”라며 기름 유출과 용종 발생의 직접 연관성을 부인했다. 태안의 해안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지만 구름포, 모항항, 신두리 등지의 갯벌이나 바위 틈, 자갈밭 아래에서는 지금도 기름막과 작은 타르 찌꺼기가 발견된다. 어민들은 상대적으로 청정해역에서 자라는 굴이 줄고 바지락이 많이 번식한다며 생태계 변화를 걱정한다. 이에 대해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남해연구소 임운혁 박사는 “어종 변화는 유류 오염보다는 전체적으로 기후변화에 따른 해양 생태계 변화 탓이 큰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지역경제 바닥 태안의 관광객은 5년 전에 비해 3분의 2가 줄었다. 안면도국제꽃박람회와 태안 살리기 운동에 힘입어 2009년과 2010년 다소 회복되는 듯했지만 행사가 끝나자 다시 주저앉았다. 같은 기간 어획량을 말해 주는 수산물 위판 실적은 1만4146t에서 7354t으로 반 토막 났다. 주력 산업의 곤두박질로 태안의 지역 경제는 바닥이다. 남면 신장리 몽산포해수욕장에서 M횟집을 운영하는 문승일 씨(46)는 12월 예약일이 13일 하루뿐인 달력을 가리키며 “장사가 하도 안 된다니 종친회에서 이날 하루 팔아 주겠다고 한다”라며 웃었다. 2007년 12월에는 하루에도 여러 건의 예약이 밀려 종업원 13명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지금은 2, 3명인 종업원으로도 한가하다. 문 씨는 당시 낚시꾼이 끊기자 18년 동안 운영했던 7.3t짜리 낚싯배를 팔아넘기고 6개월분의 손해배상금 5000만 원을 국제유류오염보상기금(IOPC 펀드)에 신청했다. 하지만 최근 그에게는 9만4000여 원을 주겠다는 통지가 날아들었을 뿐이다. 국토해양부에 따르면 주민들은 IOPC 펀드에 총 2조7753억 원의 보상을 청구했지만 올해 9월 말까지 받은 금액은 청구액의 6.5%에 불과한 1801억 원이다. 여수 씨프린스호 사고 때는 청구액의 47.4%를 받았다. 주민들은 해양연구원 등의 연구를 토대로 최소 5000억 원의 기금 출연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만리포에서 모텔을 운영하다 기름 사고로 손님이 끊겨 경매에 넘긴 뒤 막일을 한다는 최남우 씨(53)는 “사고 후 태안 주민 4명이 자살했지만 남아있는 사람 중에서도 유서 쓴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라며 “카지노든 공장이든 뭐든 들어와 지역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서해안 유류피해민 총연합회 회원 4500여 명(경찰 추산)은 3일 오전 11시경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성 본관 앞에서 피해 보상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대부분 어민인 집회 참가자들은 기름 유출 사고로 피해를 본 태안 지역 주민들에 대한 책임 있는 피해 보상을 촉구했다. 집회는 별다른 충돌 없이 오후 5시경 끝났다. 2007년 당시 유조선 허베이스피리트호와 삼성중공업 예인선이 충돌하면서 기름이 유출됐고 법원은 삼성의 손해배상책임을 56억 원으로 제한했다. 이에 따라 어민 보상에 어려움이 예상되자 삼성은 이외 1800억 원의 기금을 출연해 피해 어민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어민들은 최소 5000억 원의 기금과 함께 삼성 측의 추가 ‘지역 공헌’을 요구하고 있다.태안=지명훈 기자·이성호·하정민 기자 mhjee@donga.com}

엽기적 사건이 꼬리를 문다. 여아를 이불째 납치해 성폭행하는 것 같은 강력범죄만 그런 게 아니다. 검사가 여성 피의자와 검사실에서 성관계를 갖는다는 게 상상이나 가능한 일일까. 엽기는 검사의 행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엽기 2탄은 피해여성의 사진이라며 인터넷과 SNS에 정체불명의 사진들이 유포되는 세태다. 사건과 무관한 사진 속 여성은 어떤 심정일까. 만약 떠도는 사진들 중에 실제 피해여성이 있다면 그 여성과 가족의 고통은 어느 정도일까. 반드시 유출자를 찾아내 엄벌해야 할 중대 범죄다.사진 유출은 엄벌해야할 중대범죄 엽기 3탄은 인터넷 등 일각에 떠도는 ‘검사 동정론’이다. 43세라고 보기 힘든 늘씬한 젊은 여성의 사진을 본 일부 남성들은 “검사가 꽃뱀의 미모에 넘어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사진 속 여성은 사건과 무관한 엉뚱한 사람이다. 또다른 검증되지 않은 사진에는 중년 여성이 등장하는데 이를 본 남자들은 “여자가 작정하고 유혹했을 것”이라며 역시 여자 탓을 한다. 성범죄의 원인과 책임의 일단을 피해여성에게 돌리려는 이런 시각의 근저엔 뿌리 깊은 편견이 자리 잡고 있다. 올여름 성폭행 사건이 빈발하자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다니니 그렇지”라는 반응이 나온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여성의 노출과 성폭행은 직접적 상관관계가 없으며, 대부분의 성범죄자는 야한 차림의 여성을 보고 순간적인 욕정에서 범행하는 게 아니라, 작정하고 계획적으로 대상을 물색한다는 범죄 통계에도 불구하고 이런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떻게 하든 뇌물 사건으로 몰고 가려는 검찰의 고집도 어이가 없다. 뇌물죄로 검사를 처벌한다는 것은 피해여성이 자신의 성을 뇌물로 바쳤음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문제의 여성은 검찰에 출석할 때 남편과 동행했다. 지척에 남편을 기다리게 해놓고 검사에게 성상납을 한다는 게 가능할까. 설사 자발적 관계라고 볼 소지가 일부 있다 해도 검찰이 강제성이 없다고 단정 짓는 것은 다른 사건 처리와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의 진술이 우선적 가치를 지니는데 이번 사건 피해여성은 당시 성관계가 강제적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법조계에선 검찰이 뇌물죄에 집착하는 것은 부주의한 검사가 ‘꽃뱀 피의자’와 벌인 개인적 일탈행위로 축소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강간치상이나 폭행·가혹행위죄 등을 적용할 경우 개인비리가 아닌 검찰의 인권침해 사건으로 규정돼 조직이 받을 타격이 더 커지므로 이를 차단하려 한다는 분석이다. 검찰이 진상을 파헤쳐 엄벌하겠다고 나섰지만 속내는 조직보호라는 이기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사건의 본질은 최소한의 인격적 도덕적 자질조차 검증되지 않은 사회초년생들에게 판검사라는 권력을 주는 현행 사법제도의 문제다. 검사가 되려면 최소한 5년 이상 검사를 보좌하게 한 뒤 엄선해야 한다. 로스쿨 출신이든, 사법연수원 출신이든 마찬가지다. 기소권과 수사지휘권을 무려 1878명(11월 기준 검사 수)이 갖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검찰 특권 이번엔 뿌리 뽑아야 더 근본적으로는 검사가 피의자의 생살여탈권을 쥔 절대 신의 위치에 군림하게 해주는 견제받지 않는 특권에 사건의 뿌리가 닿는다. 문제의 검사실에서 폐쇄회로(CC)TV 없이 피의자를 심문하는 게 가능했다면 이는 시대착오적 인권 사각지대가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올 초 경남 밀양에서 검사의 경찰관 모욕 사건이 터진 뒤 경찰이 CCTV를 보여달라고 요구하자 검찰은 “CCTV가 꺼져 있어서 보여줄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이는 검사가 임의로 CCTV를 켜고 끌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경찰관이 CCTV 없는 밀실에서 피의자를 조사하거나 CCTV를 마음대로 껐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날 서울동부지검 별관 3층에서 벌어진 일은 우리 사회에 음습하게 온존해 있는 구시대의 잔재들을 총체적으로 드러내줬다.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진보적 청년대표를 자처하는 김광진이라는 31세 국회의원의 막말 파동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그가 곤경에 처한 게 안쓰러운 게 아니라, 군사독재 시절 진보라는 가치를 위해 스러져 간 청년들의 순수한 열정이 21세기 사이비 좌파에게 모독당한 것 같아 속상한 것이다.소외계층 외면하는 ‘사이비 좌파’ 두 종류의 좌파에 대해 생각해 본다. ① 꽉 막힌 고속도로, 차 한 대가 갓길을 달리며 새치기한다. 다들 분통이 터지지만 참는다. 그때 누군가 차를 막아서서 얌체 운전자의 뺨을 때린다. ② 겨울 새벽, 청년은 부르튼 손으로 쓰레기를 치우는 환경미화원의 움츠린 어깨를 보고 발길을 떼지 못한다. 1번은 불의, 불공평을 유달리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세상을 내 뜻대로 도모해 보겠다는 권력 의지가 강하다. 2번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는 따뜻한 마음에서 기득권을 버리고 혁명을 꿈꾸는 경우다. 1, 2번의 공통점은 정의감이다. 하지만 1번은 인간애가 결여돼 있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기 십상이다. “여자친구 생기면 엄마가 시내에 아파트를 사준대요. 아파트 얻을 때까지만 누가 여자친구 안 해줄래요?”… 김 의원의 트위터 글에서 그가 소외계층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그들에 비해 나은 자신의 물질적 환경을 송구스러워했다는 흔적은 찾기 힘들다. 이런 유의 좌파 가운데는 특정한 사관(史觀)이나 이념의 잣대로 역사를 재단해 버리는 책 몇 권, 연설 몇 번 듣고 난 뒤 ‘거꾸로 된 역사를 통찰하게 됐다’는 착각에 빠진 부류가 많다. 김 의원만이 아니다. ‘좌파 셀러브리티(유명인사)’의 반열에 오른 교수 작가 연예인 중 상당수는 모순과 기만으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다. 입만 열면 기득권 시스템을 비난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기득권 구조의 단물을 향유하며 사는 데 조금의 민망함도 느끼지 않는 모습이다. 그런 이들이 암울했던 시절 이 땅에 진보의 씨앗을 뿌린 사람들의 열정과 겸손을 알기는 할까.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하겠다며 기득권을 모두 버린 채 헌신했고, 그 대가로 어떤 권력이나 명예, 보상도 바라지 않았던…. 2번의 경우는 대부분 그런 길을 걸었다. 사이비가 우글대는 건 우파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에서 진보파는 당장 약자에게 도움이 될 방안을 우선시하는 데 비해, 보수는 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공동체에 도움이 될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 때문에 보수주의자에겐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비전과 신념, 장기전을 치러낼 신독과 절제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요즘 여당 후보 주변에는 그저 기득권층에 불과한 이들이 여럿 보인다. ‘경제민주화’ 등의 그럴듯한 말을 내뱉지만 실상은 독재 시절부터 권력과 재력을 탐해 온 낡은 얼굴들이다. 대선을 앞두고 “셋 중 누가 되어도 괜찮은 거 아냐?”라는 말이 많이 들린다. 사실 사람만 놓고 보면 주요 세 후보 모두 모범적인 삶을 거쳐 왔고, 균형감각을 중시하고 있다.기득권 비난하며 자신은 단물 향유 하지만 대선은 대통령 한 명만을 뽑는 게 아니다. 공직이라는 거대한 논에 어떤 물(인물)을 댈지를 정하는, 거대한 수문(水門)을 여는 일이다. DJ(김대중 전 대통령)는 중도 온건을 강조하며 집권했고 실제로 시장과 한미동맹을 중시했다. 하지만 DJ 정권에서 공직의 수문은 이념적 스펙트럼의 왼쪽 극단으로까지 활짝 열렸고, DJ에 비해 훨씬 과격한 인사들이 위원회, 단체, 방송사 등에 진입해 현대사를 재단하고 사회의 정체성을 흔들었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낡은 우파들이 교회, 지역 등의 인연을 업고 숱한 자리를 차지해 역사를 되돌리려 했다. 국민은 투표를 통해 어느 장수에게 성문을 열어줄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러면 장수 주변에 몰려 있는 광대한 세력이 입성할 것이다. 그 속에는 수준 이하의 세력이 우글대겠지만 선거가 다가올수록 그들을 솎아내는 힘보다는 진영 확대 본능이 더욱 강하게 작용할 것이다. 모독당하는 진보와 보수 가치 모두가 안쓰럽다.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7월 중순경 정모 씨(25)는 “배가 고프다”며 서울 은평구 녹번동의 한 교회를 찾았다. 교회 목사는 밥을 내주고 “나중에 밥 사먹어라”며 용돈 30만 원까지 줬다. 젊은 나이에 노숙인으로 떠도는 것이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사의 따뜻한 마음은 보은(報恩) 대신 절도로 되돌아왔다. 3주 뒤 정 씨는 다시 이 교회를 찾아 관리인이 없는 틈을 타 사무실에 놓여 있던 노트북과 서랍 속 현금을 훔쳐 달아났다. 정 씨는 지난해 6월부터 최근까지 서울 서대문구 종로구 도봉구 등의 교회와 성당 6곳을 돌며 9회에 걸쳐 모두 1100만 원 상당의 금품을 훔친 전문 절도범이었다. 이 교회들은 정 씨가 배가 고프다고 찾아가면 음식을 내줬던 곳이다. 정 씨는 낮에 교회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면 나와 노트북과 디지털카메라 등을 훔치는 수법을 주로 사용했다. 정 씨는 9일 지난해 교회에서 물건을 훔쳤던 절도범과 비슷한 사람이 교회 근처를 배회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붙잡혔다. 당시 그는 교회 3층에 있는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서울 서대문경찰서는 정 씨에 대해 상습절도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12일 밝혔다. 무전취식, 절도 등 전과 18범인 정 씨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일하기 싫어 계속 노숙생활을 해왔다”고 말했다.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바닥에는 털이 다 벗겨진 개 3마리가 널브러져 있다. 바로 옆에서 도축 차례를 기다리던 백구는 낯선 기자를 봐도 짖기는커녕 눈도 마주치질 못한다. 조금 전 다른 개가 도살되는 걸 본 백구는 완전히 질려 있다. 콘크리트 가건물 바닥에 널브러진 전기충격기와 털을 제거하는 원통형 기계는 보기만 해도 살벌하다. 옆 방 철창 속에선 개 10여 마리가 울부짖고 마당에는 무쇠 가마솥 5개가 김을 뿜어낸다. 올여름 동아일보 기자가 찾아간 서울 근교 야산의 도축장 풍경이다. 연간 200만 마리 무참히 도축 개고기 피크시즌이 지나갔다. 이제 좀 차분하게 '개고기'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계절이 됐다. 사실 개고기 찬반처럼 승패나 결론을 내기 힘든 논쟁도 드물다. 개 논쟁을 벌일 만큼 우리 사회가 한가한 상황도 아니다. 사람 먹고 살기도 힘들고 흉악범죄 때문에 불안한 세상 아닌가. 하지만 지금도 곳곳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개 사육과 도축 광경은 우리 사회의 야만성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우리 사회에선 연간 200만 마리가 넘는 개가 식용으로 도축되지만 개의 도축과 유통, 위생관리를 규제하고 관리하는 법 조항은 없다. 주무 행정기관도 없다. 축산물위생관리법상 개는 가축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 말 닭 등 가축으로 규정된 13종은 도축에서부터 유통 전반에 걸쳐 법령의 규제와 감시를 받으며, 허가받은 작업장에서만 도축할 수 있다. 개도 가축에 포함시키면 법의 통제를 받지만 동물보호단체들은 반대한다. 식용으로 키우는 동물을 뜻하는 가축에 개를 포함시키면 '개고기를 합법화해주는 격이 된다'는 게 반대 논리다. 결국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개는 무허가 건물, 야산, 전통시장 등에서 마구잡이로 도축된다. 위생관리도 거의 방임상태다. 일부 식용견 사육장의 열악한 환경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배설물 치우기가 편하다는 이유로 '뜬창'에서 기르는 곳도 있다. 뜬창은 바닥이 공중에 떠있는 창살 우리다. 사람이라면 창살에 배겨서 10분도 앉아 있지 못할 좁은 공간에서 개들은 짧은 일생을 보내다 도축장으로 끌려간다. 도축장으로 운반할 때는 철망속에 던져 구겨넣다시피 한다. 손님이 원할 경우 일부러 망치로 때려잡는 곳도 여전히 남아있다고 한다. 최근 채널A의 '이영돈 PD 논리로 풀다' 취재팀이 르포한 한 사육장의 개들은 온통 오물에 뒤덮인 채 피부병을 앓고 있었다. 주변엔 항생제 병이 수북했다. 사육장 주인조차 "나라면 안 먹는다"고 할 정도다. 이처럼 잔혹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선 법과 제도의 개입이 불가피하다. 동물보호법을 강화해 적극적으로 법집행을 해야 한다. 동물보호단체들도 '전부 아니면 전무'식의 접근법을 재고해야 한다. 도축 및 유통조건을 법으로 규제하는 것을 '개고기 합법화'로 간주해 반대만 하는 동안 아무런 개선이 이뤄지지 않은 채 수많은 개가 처참히 도살되고 있다. 가축으로 규정하지는 않되 축산물위생관리법 제3장 '위생관리'를 개와 고양이 등에도 적용한다는 조항을 신설하는 등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 개고기 찬반 논쟁은 앞으로도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야 해결될 문제다. '소, 돼지, 물고기는 먹으면서 왜 개는 안 되느냐'는 식의 단선적 주장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풀잎도 생명이고, 벌레도 생명이고, 물고기도 생명이고, 돼지도 생명이고, 소도 생명이고, 개도 생명이다. 생명은 모두 소중하지만 모든 동물을 같은 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지능과 감성, 교감능력의 스펙트럼에서 고등동물로 갈수록 그 생명을 빼앗을 때의 명분과 인간에게 주는 유용성이 비례해서 커야만 한다. 개는 그 스펙트럼에서 가장 고등동물 쪽에 있으며 많은 사람이 친구처럼, 가족처럼 여기는 동물이다. 비위생적 환경부터 개선해야 물론 개를 식용하기 위해 키운 가축이라고 여기는 이들의 식습관, 그리고 생업으로 개고기를 취급하는 이들의 생존권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장기적으로는 금지하는 방향으로 가되 일단은 그 중간에서 현실적 개선책을 찾아야 한다. 외국인의 시선은 더이상 의식할 필요가 없다. 개고기를 먹든, 반대하든 지금 같은 야만은 더는 방치해선 안 된다. 그것은 우리사회의 잔혹성의 순화, 미래에 문명사회를 이끌어갈 청소년의 정서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타인과 다른 생명체에 대해 감정이입을 하고 측은지심을 느끼는 능력은 한 사회의 따스함과 문명의 진화 정도를 보여주는 척도다.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알베르 카뮈의 어린시절. 할머니는 손자에게 뒤뜰의 닭 한 마리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할머니는 부엌칼로 닭의 머리를 자르고, 그릇으로 피를 받았다. 그 장면은 소년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른이 된 카뮈는 1957년에 '단두대에 대한 성찰'을 썼다. 단두대 처형의 야만성을 고발하는 그 감동적인 글은 사형제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지금까지도 고전으로 읽힌다.만약 당신이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면 사형제의 야만성을 고발하는 작품은 카뮈의 글만이 아니다. 미국 영화 '데드 맨 워킹'에서 숀 펜(매슈 역)이 사형되기 직전 남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살인은 나쁘다는 것입니다. 주체가 누구든, 그게 나이든, 여러분이든, 정부이든 말입니다"라는 말이나, 한국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슬픈 눈의 사형수(강동원이 연기)가 집행장으로 끌려가는 장면은 사형제의 잔혹성을 감성적으로 보여준다. 필자도 같은 생각이었다. 무심코 밟힌 벌레의 몸부림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절절한데, 사람의 목숨에 이르면 그 소중함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을까, 한 명 한 명이 소(小)우주이며 절대적 가치인데… 국가가 생명을 앗아가는 것을 어떻게 쉽게 찬성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 사형집행을 둘러싼 논란의 실상을 취재하면서, 카뮈의 성찰은 어쩌면 지난 시대에 국한된 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적 이념적 음모가 깔린 처형이 난무하고, 범죄의 진실을 가려낼 과학이 미비했던 시대의 웅변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진실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한둘이 아니다. "처형된 사람들 중에는 교화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무고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라고 카뮈는 반문했다. 전문가들은 이제 무고한 사람이 사형될 가능성은 거의 제로로 봐도 좋을 만큼 수사기법이 발달했고 재판부가 사형을 선고하는 기준도 매우 엄격해졌다고 말한다. 물론 현재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사형수 60명 가운데 누명을 쓴 사람이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21명을 죽인 유영철, 10명을 죽인 강호순이 진범이 아닐 가능성이 있을까. 0.00…1%의 가능성이라도 억울한 사형이 없도록 하기 위해선 앞으로 더욱 엄격해질 사형 선고기준에 비춰봐도 이의가 전혀 없을 수준의 흉악범에 대해 우선적으로 집행하면 된다. 사형제 반대 영화 속 사형수들은 한결같이 운명의 장난에 의해 주범으로 몰린 선한 청년들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현재 사형수 60명은 1인당 평균 3.4명을 죽였다. 대부분 진범임을 시인했다. 숀 펜이 연기한 사형수가 강호순이었다면, 강동원이 연기한 사형수가 유영철이었다면 영화의 감동은 어땠을까. 사형제가 정치·이념적 목적을 위해 남용될 가능성도 이젠 없다. 인혁당 사건, 조봉암 사형 같은 사법살인이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재연될 가능성을 말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사형제에 반대하는 이들은 사형이 범죄예방 효과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반대의 통계도 있다. 설사 예방효과가 없다 해도 이는 사형제의 존립 이유를 오해한 것이다. 사형제의 첫째 근거는 피해자를 대신한 국가의 응징, 정의와 형평의 구현이다. 이는 죽은 피해자가 우리와 함께 살았던 시절 서로 약속한 것이다. 만약 당신이나 내가 살인마에 의해 억울한 죽임을 당할 경우 남은 사람이 응징을 통해 그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풀어주자는, 내가 당하면 당신이 그 원한을 풀어 달라는 당부이고 약속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족에게 "사적 보복은 하지 말라. 국가가 이성적 절차에 의해 징벌하겠다"고 약속한 것이기도 하다. 만약 사형수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이가 있다면 이는 법무장관이나 사형제 폐지론자가 아닌 피해자 가족들이다. 모든 피해자 가족이 용서해주라고 청원할 경우 사형집행을 미루는 제도를 마련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법무장관에게는 확정판결 이후 6개월 이내에 집행해야 한다는 법규정을 무시한채 자비를 베풀 권한이 없다.피해자 가족만 사형수 용서권한 가져 정부는 사형집행을 하지 않는 이유로 외교문제를 들지만 관료적 발상에 불과하다. 필자가 6일 "사형집행을 재개할 경우 실질적으로 어떤 외교적 불이익이 있을지"를 문의했지만 정부 담당자는 별다른 예시를 들지 못했다. 유엔인권이사회 등에서 부담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이는 사형제를 실시하는 미국 일본 등의 외교관들은 늘 감수하는 일이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문제"라는 청와대의 논리는 더욱 옹색하다. 사형제에 대한 의견 통일은 어느 사회이든 불가능하다는 걸 청와대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사형집행 목소리가 거세지자 반대론자들은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한다. 그야말로 낙인찍기이며 어불성설이다. 우리가 잊고 있던, 모두가 방기하고 있던 피해자들에 대한 약속과 책임을 김점덕이, 서진환이, 고종석이 환기시켜 준 것임을 정말 모른다는 말인가.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