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기홍]‘국정원 촛불’이 시들한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5일 01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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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사회부장
이기홍 사회부장
요즘 광화문 청계광장 주변에선 국정원 댓글 사건 규탄집회가 연일 열린다.

좌파 진영 일각에선 2008년 광우병 괴담 파동때 벌어졌던 촛불집회가 재현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 2007년 대선패배후 침잠했던 좌파진영이 광우병 공포를 무기삼아 전열을 가다듬었듯이, 이번에는 국정원 규탄이라는 깃발아래 재결집하려는 기세다. 근 반년넘게 속으로만 삭혔을 대선패배의 울분, 보수정권에 대한 반감을 폭발시킬 창구를 찾은 것이다. 비교해보면 2008년 촛불집회에 비해 이번에는 더 명분이 있다. 2008년 촛불의 심지가 광우병 괴담이라는 모래사장에 꽂혀 있었던데 비해 이번에는 국정원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라는 실체가 있다.

그런데 2008년 주부, 청소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것과 달리 요즘 시민들은 대부분 무심한 표정이다. 호응이 약한데는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좌파진영은 국정원 사건에는 '입으로 들어가는 광우병 공포'처럼 감정을 자극할만한 격발고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자체 분석을 하며 대책을 강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분석도 일리가 있는 대목이 있지만 보다 근본적 이유는 다른데 있다고 본다.

2008년과 달리 이번엔 국민들이 사안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다. 2008년 촛불집회 초기엔 난무하는 광우병 괴담과 좌파언론의 선동으로 국민들이 진실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이번엔 검찰 수사를 통해 사건의 실체를 봤다. 국민들은 문제가 심각한 정도, 위법행위의 경중을 나름대로 판단했을 것이다.

"국정원장이 말씀자료를 통해 종북세력이 다시 집권하면 안된다고 강조했고, 이를 선거개입 지시로 받아들인 대북 심리전단 직원들이 야권 대선 후보들을 비방하는 댓글을 올렸으며, 그런 댓글이 73개 확인됐다"는게 검찰 수사결과 요지다.

여기서 좌파 운동권과 중도성향 국민들의 반응 방식이 갈린다. 좌파는 '①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했다 ②따라서 대선은 부정선거였다 ③따라서 박근혜 정권은 정통성이 없다'는 논법을 주장한다. 그런 논리에 따라 '박근혜 퇴진' '당선무효' '국정원이 만든 대통령'등의 구호를 내세운다.

하지만 중도성향의 국민들은 ①국정원의 선거법 위반은 민주주의에서 용납해서는 안되는 범죄다 ②하지만 위반 내용은 선거에 영향을 미칠 정도가 아니었다 ③따라서 부정선거 운운하거나 대정부 투쟁으로 몰아갈 사안은 아니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관측된다. 즉 '국정원 선거개입'이라는 자극적 '카피'에만 휩쓸리지 않고, 내용을 입체적으로 같이 보는 것이다.

촛불집회장 인근을 지나던 대학생은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마음먹고 선거에 개입하려했다면 수개월동안 70명이 올린 야당 후보 비방 댓글이 수십개에 불과했겠느냐"고 말했다. 사실 73개의 댓글은 혼자서 1시간이면 올릴 수 있는 수준이다. 물론 검찰이 찾아내지 못한 것도 있겠지만, 그렇다해도 수십만, 수백만 건의 댓글이 숨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검찰이 밝혀낸게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야권이 진심으로 의심한다면 국정조사가 아니라 특검을 요구했어야 한다.

은폐의심을 받는건 검찰로선 억울한 일일 것이다. 필자는 검찰 특별수사팀이 '정치적 고려'를 많이 했다고 본다. 여기서 얘기하는 정치적 고려는 과거 횡행했던 권력 눈치보기와는 다른 개념이다. 즉 △검란 등으로 땅에 떨어진 검찰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한다는 절박함 △국정원의 정치개입은 반드시 근절시켜야한다는 소명감 등이 수사팀의 수사태도와 법리 판단에 영향을 미친 정황이 있다. 축소수사는 커녕 의욕 과잉, 시대정신 과잉이라고 지적해도 무방할 만큼 적극적인 의지가 수사과정과 법리판단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댓글 숫자가 적다고 해서 국정원의 잘못이 가벼운 것은 결코 아니다. 국정원 직원들이 정치적 댓글을 달았다는 것은 엄벌에 처해야할 사안이다. 정치적 중립 의무와 본분을 망각한 행위다.

권력하수인이라는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는 국정원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은 대오각성했다던 상습 성폭행 전과자가 성추행을 저지른 것과 마찬가지다. 비록 추행의 내용이 손 한 번 만진 것이라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국민들은 국정원의 위법행위로 우리 민주주의의 토대가 흔들렸다고, 대선이 부정선거였다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경중을 따지고 사안을 다층적이고 입체적으로 판단하는 국민의 수준과 단선적 비약논법에 매몰돼 있는 좌파 운동권의 수준 차이가 여기서 빚어지는 것이다.

필자는 국정원 사건을 보면서 대도(大盜) 조세형을 떠올렸다. 지난 4월 서초동 빌라에 침입한 그는 한밤중에 온동네 다 들리게 유리창을 깨는 바람에 붙잡혔다. 정치개입이라는 고질병을 치유하지 못한채, 허접한 수준의 댓글을 달다 망신당한 아마추어 정보기관의 모습에서 "그게 프로가 할짓이냐"며 자신을 꾸짖던 대도의 자탄이 들려온다. 사안의 경중과 전후맥락을 무시한채 '3·15 버금가는 부정선거'라고 외치는 좌파 운동권에게서도 고질병의 집요함을 본다.

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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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댓글 사건#촛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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