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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동안 원형(原形) 논쟁이 지속되고 있는 석굴암의 제 모습을 밝혀 줄 논문이 나왔다. 19세기 말 석굴암 중수 공사를 기록한 상량문을 정밀하게 분석한 것으로 중수 공사 전에는 지금과 달리 목조전실(木造前室) 등 목구조물이 없었다는 내용이어서 학계에 큰 파장이 예상된다. 목조전실의 유무는 석굴암 원형 논쟁의 핵심이다.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30일 학술 등재지인 ‘보조사상’에 발표 예정인 논문 ‘석굴암 석굴 중수상동문(重修上棟文·1891) 연구’에서 1891년 진행된 석굴암 중수 공사의 성격을 새로 밝혀냈다. 상동문은 상량문과 같은 말이다.○ “원래는 없던 목구조물, 1891년 새로 세워” 최 교수는 논문에서 “당시 공사에서 목구조물이 없던 석굴암의 외양을 목조 전각으로 이뤄진 보통 절과 같은 모습으로 변형시켰다”라며 “공사 주체가 유가적(儒家的)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동양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인 상동하우(上棟下宇·위 마룻대와 아래 서까래)를 고집하며 돔 부분에 기와를 얹고 팔부중상이 있는 부분을 목조로 장식한 것”이라고 밝혔다. 최 교수가 새로 번역하며 주목한 상량문의 내용은 “새로운 모범(新規·신규)을 통해서 초창(草創·사업을 처음으로 일으킴)함이다”를 비롯해 여러 군데다. 그는 “신규, 초창과 같은 표현은 이 불사가 중수 이전의 형태와 다르다는 점을 명백히 한 것”이라고 말했다. 1891년 중수 공사의 목적은 “용궁(龍宮)의 제도가 거의 복구되었다. … 대장(大壯)의 송(頌)을…”이라는 상량문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최 교수는 “‘용궁의 제도’는 중국문화권의 전통적 사원 건축 양식인 ‘상동하우’를 가리킨다”며 “‘대장의 송’은 대들보를 놓고, 서까래를 드리운 모양인 주역의 대장괘(大壯卦)를 강조한 것”이라고 했다. 현재 석굴암은 1960년대 보수 공사에서 입구에 목조 전실을 새로 세우고, 팔부중상이 있는 전정(前庭)부 상단도 목구조로 덮은 상태다. 최 교수의 주장이 옳다면 19세기 말의 원형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난해한 문체로 주목 못 받아” 상량문은 1924년 일본인 학자에 의해 원문이 공개되고 1963년 목조전실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다시 세상에 알려졌지만 그동안 그 가치에 주목한 이가 드물었다. 1969년 ‘신동아’ 기고로 원형 논쟁을 촉발한 남천우 서울대 교수도 상량문에 대해 “내용이 너무나도 추상적인 표현이고, 구체적으로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 건 거의 없다”고 했다. 1960년대 석굴암 공사를 총괄한 황수영 전 동국대 교수(작고·전 동국대 총장·문화재위원장)가 상량문 전문을 해석해 저서 ‘석굴암’(열화당)에 실었지만 주석을 달지 않았고, 별다른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최 교수는 “상량문이 주목받지 못한 건 변려문(騈儷文)이라는 고급 문체로 쓰여 번역이 어려운 특성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최치원 연구의 권위자로 2400쪽 분량의 ‘한국유학통사’(전 3권)를 내기도 했던 고문(古文) 전문가다. 상량문이 다시 주목받은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성낙주 석굴암미학연구소장은 책 ‘석굴암, 법정에 서다’(불광출판사) 등을 통해 “상량문은 귀중한 사료임에도 묻혔다”며 “‘도끼질이요 톱질이요(斧彼鉅彼)’ 등의 표현이 목공 작업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해 준다”고 말했다. 성 소장은 최 교수의 해석과는 반대로 “상량문은 이전의 목조 전각이 허물어진 것을 재건한 사실을 담고 있다”고 봤다. 그러나 최 교수는 기존 번역에 오류가 적지 않다고 했다. 황 교수의 기존 번역에는 “새로운 모범(新規·신규)을 통해서”가 “새로운 규모로”로 돼 있다. ‘규(規)’를 규모라고 본 것이다. 최 교수는 “조선시대 건축 관련 다른 문헌에도 ‘신규’는 새롭게 모범을 세운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제야 겨우 옛 모습(구관·舊貫)에 비길 만하다”고 돼 있는 번역도 최 교수는 “구관(舊貫)은 ‘옛 모습’이 아니라 ‘옛 관례’를 따랐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최 교수는 1891년 중수 공사에서 본존불이 있는 주실의 돔 위쪽에 기와를 새로 덮었다는 것도 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상량문의 ‘견보(牽補)’는 ‘견라보옥(牽蘿補屋)’의 준말로 담쟁이덩굴을 끌어다가 새는 지붕을 덮는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라며 “당시 공사에서 기와를 덮었다는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황 교수의 기존 번역에는 이 부분이 “앞으로 계속 보완해야 하리라”고 돼 있다.○ “1960년대 공사도 원형 벗어나” 석굴암은 20세기 초 주실 천장 앞쪽이 무너지는 등 폐허처럼 변해 가던 것을 1910년대 일제가 보수했는데 지금과 달리 목조전실을 만들지 않았고, 전정부도 개방했다. 하지만 1960년대 목조 전실을 세우자 원형에서 벗어났다는 지적과 그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목조 전실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목조 전각이 그려진 ‘골굴석굴도’ 등을 근거로 내세웠고, 반대 측에서는 이 그림이 인근의 천연 석굴 사원인 골굴사를 그린 것이라고 반박했다. 최 교수에 따르면 지금까지 발견된 상량문 이전의 고문헌 중 석굴암에 목구조물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불국사사적’(1708년)에서는 “석불사를 창건하였는데, 토목 공사와는 무관하게 순전히 다듬은 돌을 가지고 짜서 석조감실(石龕)을 만들었다”고 돼 있다. 동아일보를 통해 최 교수의 논문을 미리 본 과학사학자 문중양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단언키 어렵지만 논리 전개가 설득력이 있어 큰 신뢰가 간다”며 “19세기 말의 혼란 상황에서 원형을 훼손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는 해석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그동안 학계에서는 상투적이고 과장된 표현이 많다는 이유로 상량문을 소홀히 여겼지만 이는 변려문의 특성을 모르기 때문”이라며 “1891년 공사에서 본디 노천(露天) 상태이던 전정부를 목조건축으로 장식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 파란만장한 ‘1891년 상량문’ ▼ 1963년 보수공사 하다가 간이화장실 문짝서 발견617字 중 160字 잘려나가… 崔교수 “판독엔 문제 없어”석굴암의 원형에 대한 중요 정보를 담고 있는 ‘석굴 중수상동문’은 일제강점기 보수공사 도중에 발견됐지만 이후 종적을 감췄다가 1963년 보수공사 도중 석굴암 경내의 간이 화장실 문짝에 붙어 있는 상태로 발견됐다. 최영성 교수가 이번에 상량문 전문을 번역 주석하며 살펴본 결과 본문은 617자인데 처음과 마지막 부분이 잘려나가는 등 확인할 수 없는 글자가 160자다. 최 교수는 “이 부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가 공개한 내용에 의지할 수밖에 없지만 문리상 판독에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상량문의 작성자는 손영기(孫永耆)다. 최 교수는 “‘와룡암계첩(臥龍庵(결,계)帖·1859년)에 손영기로 추정되는 인물이 소개돼 있다”며 “‘조선국 영남좌도 경주부 동해가(東海上)에 살며 별호를 ‘구지산거사(九芝山居士)’라고 했다”고 밝혔다. 중수공사비를 댄 이는 조(趙) 순상(巡相)이라고 나온다. 최 교수는 “‘순상’은 ‘순상국(巡相國)’의 줄임말로 관찰사 겸 순찰사의 별칭”이라며 “1891년 이전 20년 동안 경상도 관찰사 겸 순찰사를 지낸 ‘조 씨’는 풍양 조씨 세도가 집안의 조강하(趙康夏·1841∼?)밖에 없다”고 말했다. 상량문이 기록한 공사는 석굴암이 아니라 인근 암자의 중수였다는 학설도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까지 ‘석굴’(현재 석굴암)과 ‘석굴암’(인근 암자)을 구분했고, 상량문은 명칭에서 석굴 중수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최 교수의 이번 논문은 일제강점기 석굴암 보수 공사의 결과처럼 목조전실 없이 전정부를 개방한 것이 옳다고 보지만 당시 공사에서 석굴암을 시멘트로 뒤집어씌우는 등의 잘못까지 옳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석굴암의 원형과 별개로 석굴암의 보존을 위해 최적이 무엇인지도 중요하다. 석굴암이 19세기 말까지 목조전실 없이 개방돼 있던 게 옳다 해도 보존에 악영향을 준다면 전실이 필요할 수도 있다. 목조전실 탓에 통풍이 안 돼 내부에 습기가 차는 현상이 악화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확실히 검증된 것은 아니다. 1971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실사를 통해 “(목구조 공사를 통해) 전실(전정부)의 석상이 비바람에 직접 닿지 않게 됐고, 결빙과 해동의 영향을 받지 않아 보호에 큰 도움을 줬다”고 평가했다. 성낙주 석굴암미학연구소장도 저서에서 “전실 없이 개방된 구조는 동물이 드나들고 새똥이 쌓이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는 저서 ‘나라의 정화, 조선의 표상’에서 “일본은 석굴암 보수공사를 통해 조선의 과거와 현재를 대비시키면서 문명화된 일본이 조선의 옛 영화를 되찾아 줬음을 과시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 대 1은 선(線)이다. 하지만 셋이 만나면 면(面)이 되고, 넷이 만나면 입체가 된다. 1 대 다(多), 다 대 다 형식으로 화제의 인물과 이슈를 만나는 ‘집단토크쇼’를 시작한다. 내부자 또는 외부자의 ‘돌발 토크’도 있다. 동아닷컴(www.donga.com)과 동아일보 문화부 페이스북에서도 인터뷰 내용을 동영상으로 볼 수 있다.》 사회성 있는 영화들이 당대 한국인의 의식을 보여준다면 감동과 웃음을 무기로 관객의 마음을 파고드는 윤제균 감독(48)의 영화는 한국인의 무의식을 드러낸다. 국내 두 명 뿐인 ‘쌍천만’ 감독인 그는 최근 자신이 이끄는 JK필름 제작 영화 ‘공조’가 관객 781만 명을 기록하며 또 한 번 ‘장타’를 날렸다. ■ 탐색전“제목도 그냥 ‘김일’로 하면 되겠는데?” 본격 인터뷰 며칠 전 JK필름 멤버들과 저녁을 함께했다. 윤 감독은 프로레슬러 김일(1929∼2006)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며 ‘흥분’해 헤드록을 걸고 머리를 쥐어박는 선수의 표정과 신음까지 흉내 냈다. 그건 영락없이 1970년대 작은 흑백TV 앞에서 넋이 나간 아이의 얼굴이었다. 이건 가면이 아닐까?■ 소문과 진실17일 서울 강남구 JK필름 사무실을 찾았다. ‘국제시장’이 2015년 베를린 영화제에 진출했다는 소문(?)부터 확인했다.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받았는데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정말인지. “제 억울한 부분 중 하납니다. 윤제균 하면 상업 영화, 흥행 영화만 만드는 감독이니까 영화제하고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 같아요.” ―윤 감독의 영화는 “싼마이(3류를 뜻하는 속어)” “재미있는데, 그게 끝이다”는 평도 있었습니다. “한 십년 넘었나요? 아내가 인터넷 댓글을 보고 ‘대성통곡’을 하더라고요. ‘한국 영화계를 위해 윤 감독 당신 같은 쓰레기는 떠나라’는…. 그런데, 결과에는 다 원인이 있잖아요. 제가 그런 의견이 안 나올 정도로 영화를 잘 만들었으면 악플이 안 달렸겠죠. 요즘은 좋은 ‘선플’들이 많아요. 하하.” ―이제 익숙해질 법한데요. “제가 소심하고 여린 편입니다. 욕먹고 기분 좋은 사람 없잖아요. 저는 상업영화지만 웰메이드를 만들려고 온 힘을 다 바치거든요. 장면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투자자들 설득해서 감독에게 돈을 더 쓰라고 하기도 하지요. 흥행이 될까, 안 될까를 기준으로 삼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영화의 완성도지요.”■ 진짜냐?그는 평소 인터뷰에서 “항상 내려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연예인스러운’ 답변을 해 왔다. ―내려갈 준비를 어떻게 한다는 건가요. “‘해운대’ 제작할 때 빚이 10억 원이 넘었습니다. 집 잡혀 투자하는 상황이었죠. 아내에게 ‘여보, 우리 신혼 때 마포 아현동 10평짜리 반지하에서 3년 살았잖아. 이번 영화 망하면 다시 반지하로 가야 돼’ 했더니 그래도 괜찮다고 하더군요. 신혼 시절 집이 좁다뿐이지 행복했고, 별 불만이 없었어요. 지금도 잘 안되면 반지하로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연출할 때 스태프 이름을 다 외운다’는 것도 잘 믿기지 않습니다. 200명은 될 텐데…. “연상 기억법이 있어요. 촬영 현장은 서너 달 같이 지내는데 분위기가 안 좋으면 그게 지옥입니다. 이름 외우는 노력만으로 천국이 되는데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면 별로 힘든 일은 아닙니다.”■ 까칠한 질문‘두사부일체’ ‘색즉시공’을 비롯해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를 주로 만들던 그는 아이가 생긴 뒤에는 거의 12세, 15세 등급의 영화를 만든다. 첫째 아들이 중학교 1학년이다. ―첫째가 성(性)에 한창 관심 많을 나이인데, ‘색즉시공’ 보고 싶다는 얘기 안하는지요. “아마 아빠가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를 잘 모를 겁니다.(웃음)” ―나중에는 알 텐데요. “결국 보겠죠. ‘색즉시공’에는 분명히 담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어요. ‘사랑은 장난이 아니고, 임신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아들이 보더라도 아빠로서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같이 볼 건가요?) 그럼요. 성에 대해 제가 가르치는 게 좋겠지요.”■ 인생사 새옹지마 광고회사에 다니던 그는 5년 내내 광고 제작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4년은 서류 작업을 하는 전략기획팀에서 일했다. “외환위기 뒤인 1998년 회사에서 돌아가며 한 달 무급 휴직을 시켰어요. 여행 갈 돈도 없으니 집에서 쓴 시나리오가 ‘신혼여행’이죠. 이듬해 우연히 공모전 광고를 보고 냈는데 당선됐어요. 강제 휴직과 수중에 돈이 없던 우연이 겹쳐 지금의 제가 있는 거지요.” ―운이 좋았던 건가요. “주어진 상황에서 진짜 최선을 다했어요. ‘두사부일체’ 시나리오는 회사 다닐 때 썼는데, 서너 달 동안 하루 4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어요. 밤 12시부터 새벽 3시까지 쓰고, 다시 출근했죠.”■ 떼돈?윤 감독은 최근 CJ E&M에 JK필름 지분 51%를 넘겼다. 떼돈을 벌었다는 소문도 있다. ―얼마나 벌었나요. “말 안 하기로 했는데…. 많이 벌었죠. 임차료 걱정 없이 영화 만들려고 근처에 4층 규모의 사옥을 준비하고 있어요. 해외에 나가니 메이저 투자배급사들이 저를 만나주지도 않아요. 거의 ‘누구냐, 넌’ 이런 식이라…. 그래서 CJ와 손을 잡은 거지요. 영어 영화를 만들어 시장을 해외로 넓히고 싶습니다.”■ 인터뷰 후기윤 감독은 “수많은 인터뷰를 했지만 이번이 가장 긴장됐다”고 했다. 하지만 불편할 수 있는 질문에도 시종일관 여유가 넘쳤고, ‘쌍천만’ 감독답지 않게 소탈했다. 그게 노력으로 만들어낸 얼굴이라 해도 이 정도 일관되면 대단하다 싶다. 윤 감독은 “3대가 손잡고 보면서 행복해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조종엽 jjj@donga.com·장선희 기자}

미중 사이의 지역 내 긴장이 고조되고 있지만, 한국이 전쟁의 당사자가 될 소지가 없지 않다는 걸 실감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신간 ‘전쟁의 문헌학’(열린책들·사진)을 낸 전쟁사학자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교수(42)를 최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만났다. 김 교수는 “우리는 여전히 청나라가 동중국해 일대에 가져다준 ‘200년 평화’의 기억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북으로는 여진족, 남으로는 왜구를 막는 게 조선의 기본적인 군사전략입니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일본과의 관계도 정상화되면서 두 가지 외침을 방비하는 게 정책에서 빠져 버립니다. 그 시기 만들어진 기억이 지금까지도 한국의 전통인 것처럼 내려오는 것이지요.” 우리는 6·25전쟁을 겪지 않았던가. “그 경험은 국제 정세에 대한 관심보다 ‘북괴’에 대한 증오, 즉 한반도 안의 인식에 머물렀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북방정책을 펴고 중국과 수교할 때 국내에서 반대가 별로 없었던 것도 그 방증입니다.” ‘전쟁의 문헌학’의 부제는 ‘15∼20세기 동중국해 연안 지역의 국제 전쟁과 문헌의 형성·유통 과정 연구’다. 조선 후기에 유통된 일본의 군사, 병학(兵學) 정보를 총정리했다. 일본에서 쓰인 ‘격조선론’ ‘본조무림전’ 등이 실학자 이덕무를 비롯해 조선 후기 지식인들 사이에서 꽤 널리 읽혔다는 것도 밝혀냈다. 김 교수는 “전쟁은 텍스트의 생산과 유통을 추동했다”며 “여전히 한국과 중국 중심인 한국학의 영역을 확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드 논란을 묻자 김 교수는 “사드가 미사일을 다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제 한국은 약소국도 아니고 동맹이 원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한국을 포기할 리 없다는 건 ‘한반도는 소중하다’는 유아적인 발상일 뿐입니다. 북한도 중국에 대해 그런 착각을 하고 있지요.” 사드 보복에 관해서는 “일본은 이미 겪은 일”이라고 했다. 수만 명의 중국인이 반일 시위를 벌이며 베이징의 일본 상점을 때려 부수는 등의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일본은 자원 수입처와 시장 다변화 등으로 대응했다는 것이다. 고려대 일문학과 출신인 김 교수는 임진왜란의 군담소설을 연구하다가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이 일본에서 널리 읽혔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전쟁사로 방향을 틀었다. 일본의 국립 문헌학 연구소인 국문학 연구자료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메이지유신 이전 일본에서 만들어진 모든 책을 수집한다’는 게 목표인 이 연구소에서 2006∼2010년 마이크로필름을 1만 점가량 읽고 검토했다고 한다. 그가 일본에서 낸 첫 책인 ‘이국 정벌 전기의 세계’(2010년)로 30년 전통의 ‘일본 고전 문학 학술상’을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받았다. “평화를 지향하지 않고, 분쟁을 통해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있는 게 엄연한 현실입니다. 전쟁은 인간 행동의 근본적인 측면이고 미연에 방지하려면 잘 알아야 하지요. 그러나 한국에서는 전쟁사가 특수한 분야처럼 인식돼 있습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국사학자 노태돈 서울대 명예교수, 철학자 강영안 서강대 명예교수를 비롯한 석학들의 대중 강연을 들을 수 있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가 다음 달 1일부터 열린다. ‘석학과…’는 매년 30회 이상의 강연이 열리는 순수 인문학 강좌로 올해 10년째를 맞는다. 올해 강좌는 노 명예교수가 ‘삼국통일전쟁과 그 영향’이라는 주제로 문을 열고, 이어 강 명예교수가 ‘일상의 철학’을 주제로 강연한다. 이어 최유찬 전 연세대 교수, 김정희 원광대 교수, 성태용 전 건국대 교수 등이 강연자로 나선다. 올해부터는 인문학 온라인 강좌도 병행된다. 추후 유튜브 등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오프라인 강좌도 한국연구재단 기초학문자료센터 홈페이지 등에서 볼 수 있다. 행사를 주관하는 한국연구재단은 “삶의 새로운 가치를 찾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깊이 있는 인문학적 가치를 탐구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연은 토요일 오후 2∼4시 서초문화예술회관(서울 서초구 강남대로) 아트홀에서 열린다. 단, 노태돈 명예교수의 1강은 서울교대 종합문화관에서 열린다. 수강료는 무료다. 수강신청은 전화(인문학대중화 사무국 02-739-1223)와 인터넷(인문공감 홈페이지 inmunlove.nrf.re.kr)으로 하면 된다. 접수일 당일 마감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서울에 벚꽃이 만발하는 다음 달 8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앞 한강변에서 가수 자이언티와 에픽하이 등이 공연하는 벚꽃축제가 열린다. ‘라이프플러스 벚꽃피크닉페스티벌 2017’이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이 행사는 한화그룹 6개 금융계열사 공동 주최로 로이킴, 에릭 남, 볼빨간사춘기, 어쿠스티, 소심한 오빠들, 이해리 등이 출연한다. 이날 낮 12시부터 8시간 동안 진행되며 인터넷()에서 2일까지 진행되는 이벤트에서 티켓을 경품으로 받아야 입장할 수 있다. 한강변 야외 피크닉 라운지와 벚꽃 테마의 마켓, 푸드트럭도 운영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하고 있는 병풍 속 그림에서 다산 정약용(1762∼1836)이 강진 유배 시절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새로운 시 3수가 발견됐다. 정민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는 계간지 ‘문헌과 해석’에 발표할 예정인 논문을 통해 “19세기 병풍 ‘표피장막책가도’에 그려진 시첩에서 다산의 것으로 보이는 시들이 발견했다”고 19일 밝혔다. 정 교수에 따르면 병풍에 그려진 책상 위의 서첩에 ‘산정에서 대작하며 진정국사의 시에 차운(次韻·남의 운자를 써서 시를 지음)하다’(山亭對酌次韻眞靜國師)라는 시가 적혀 있다. “… 흔들흔들 나무 집은 원래 속세 벗어났고/둥실둥실 뗏목 정자 내 몸을 붙일 만해/ 모두들 남방은 살기 좋다 말하더니/술 익고 생선 살져 또 서로를 부르누나.” 또 ‘산정에서 꽃을 보다가 또 진정국사의 시운에 차운하다(山亭對花又次眞靜韻)’라는 제목 아래에는 시 두 수가 적혀 있다. 첫 번째 시에는 ‘자하산인(紫霞山人)’, 두 번째 시에는 ‘다창(茶창)’이라는 지은이 이름이 쓰여 있다. 자하산은 강진의 다산초당이 있던 귤동 뒷산의 다른 이름이고, 진정국사는 강진 만덕산 백련사에 머물렀던 스님 천책(1206∼1294)을 가리킨다. 정 교수는 “차를 좋아하고 남방에 산 적이 있으며 자하산인이란 별호를 썼던 사람은 정약용뿐”이라고 말했다. 실제 시첩은 전하지 않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067년 2월 21일 ‘역사 속의 오늘’(오메가 고 편집). “2017년 오늘 한국에서는 인간과 인공지능이 ‘번역 대결’을 펼치는 촌극이 벌어졌다. 인간은 지문 몇 개를 번역하는 데 무려 50분이나 걸렸음에도 인공지능에 ‘승리’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통·번역 서비스가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통역사는 적지 않은 수익을 올렸고, 고가의 통역료를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이 서비스를 이용했다. 이 대결에서 공정한 룰은 인간과 인공지능이 ①같은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②시간당 얼마나 많은 양을 ③정확하게 번역하느냐가 되어야 했지만, 당시 기준은 ③밖에 없었다. ①은 로봇과 인간을 막론하고 에너지와 토지의 사용에만 세금을 물리는 오늘날은 당연한 발상이지만 당시는 사람이 일을 하면 오히려 ‘소득세’란 걸 냈던 시대다.(심지어 재화와 용역의 가치를 더하면 ‘부가가치세’를 냈고, 그냥 사람이면 세대주에 부과하는 ‘주민세’도 있었다.) 대결은 영역이 위축돼 가는 걸 견딜 수 없었던 인간들의 ‘자위’였다. ‘인지부조화’라는. 지극히 인간적이지만 지금은 사라진 단어의 용례로 전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05호에선 칠십 노모가 마흔이 넘은 아들의 발을 씻겨주고 있다. 교통사고로 척추를 상한 아들은 … 맞은편 206호에선 혼자 사는 주정뱅이 영감이 … 204호 양 씨 방 현관문이 빠끔 열려 있다. 정확히 3년 후 이 남자는 입안에 약을 한 줌 털어 넣고 … 202호 여자는 마침 혼자서 팔뚝에 인슐린 주사를 놓고 있는 참이다.”(‘세상의 모든 저녁’에서) 프랑스 파리 시몽크뤼벨리에 거리의 한 아파트에는 거주자들뿐 아니라 사물들까지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인생 사용법’·조르주 페렉) 한국 쪽방촌 노인들은 어떨까. ‘살아온 얘기를 쓰면 대하소설이 나온다’지만 진짜 소설이 나왔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5·18민주화운동 소재의 명작 ‘봄날’(1997년)의 작자가 3년 만에 낸 이 소설집은 쪽방촌 노인들처럼 스스로는 말할 수 없는, 억눌린 이들의 이야기다. 이전 소설집 ‘황천기담’(2014년)에서 설화적 상상력을 선보였던 저자는 다시금 비극적 현대사에서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우리가 잊고 있는 이들에 주목한다. 아들이 외환위기 뒤 파산과 이혼 끝에 어이없는 죽음을 맞은 아버지는 아내마저 먼저 떠나보내고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흔적’) 6·25전쟁이 끝날 무렵 ‘산사람’들을 따라 올라간 형이 지리산 골짜기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자 아버지는 일손을 놓아버린다.(‘세상의 모든 저녁’) 1950년 초가을 새신랑이던 초임 순경은 인민군과 함께 이웃 섬에서 건너온 ‘몽둥이패’에게 맞아죽었다.(‘이야기집’) 아내의 아버지는 오래전 새벽에 논에 나가다 집 앞 도로에서 뺑소니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간이역’) 구순 잔치 대신 60년 전 바다에 빠져 죽은 두 아들의 넋을 건지는 굿을 한 소설 속 노파처럼, 작가도 소설로 억울한 망자들의 넋을 건진다. “저 평범한 골짜기, 숲, 해변, 모래밭, 웅덩이, 개울, 고목나무, 우물 하나에도 저마다의 이름과 이야기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이야기집’) 금간 술병 하나도 그저 허섭스레기가 아니다.(‘세상의 모든 저녁’) 고독사로 시신이 부패해 가는 왕년의 떠돌이 옹기쟁이가 과거 ‘지상에 남은 마지막 사람’을 생각하며 바닥에 작은 새를 그려 넣었던 술병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굴곡과 요철로만 이어진 비포장길, 그나마도 출구 없는 막다른 길”의 인생을 산 이들에 대한 애정이 소설 전반에 배어 있다. 표제작은 구원이 없는 이야기다. 한 노숙인의 투신자살 기사로 시작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몽둥이패’(서북청년단) 두목에게 겁탈당한 어머니로부터 태어났다. “몽둥이패에 끌려가 수중고혼이 된 그 젊은 사내가 … 어째선지 아이는 얼굴조차 본 적 없는 그 새신랑이 자신의 진짜 아비였더라면, 하고 내심 바란 적이 많았다.” 베트남전에서 정신적 외상과 함께 고엽제 피해를 입은 그는 세월호 참사 뉴스를 본 뒤 ‘괴물’을 목격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철커덩 철커덩, 또는 쿵쾅쿵쾅 달리는 기차 안에서 이미 죽은 아내(흔적) 또는 곧 죽을 아내(‘간이역’)와 함께 있다. 현실에서는 열차가 목적지에 닿을 것이지만 소설은 그 순간에 멈춘다. “다음 세상에선 … 나무로, 풀 한 포기로, 꽃 하나로 그렇게 피어났다 사라지고 싶소.”(‘흔적’) 소설의 구원이란 그런 것이겠다. 작가의 완숙한 필력은 소설을 넘어 ‘잊지 않을게’라는 말의 윤리를 되새기게 만든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2004년) 등으로 일했던 ‘거물 운동권’인 저자(63)가 현대사를 보는 좌파적 민족주의 사관을 비판한 강연을 정리한 교양서다. 대한민국을 ‘태어나서는 안 됐을 나라’라고 보는 이들은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농지개혁이 제대로 됐다고 보지만 저자는 박명림 연세대 교수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며 이를 반박한다. “그런데 국가에서 40% 세금을 거두어갔답니다. 지주가 그냥 국가로 바뀐 것입니다. … 농민들이 사실은 소유권이 없는 거지요.” 반면 남한은 명분보다 실질을 중심으로 농지개혁을 했다. ‘유상몰수 유상분배’로 하되 소출의 30%를 5년 동안 내면 되는, 농민에게 지극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농지개혁은 친일파의 다수에게서 경제적인 토대를 완전히 몰수해버렸다. “제헌국회 의원들은 전국적 명망이 있고 당선될 만큼 덕망이 있는 분들이었고, ‘악질 친일 모리배’는 주로 경찰 간부들에게만 해당합니다.” 저자는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었던 인촌 김성수 선생을 ‘당대의 조정자’로 평가했다. “인촌은 한민당의 실질적인 오너였지요. 그런데 대세로서 농지개혁을 받아들입니다. 최대 지주 김성수 선생이 하자고 하니까 중소 지주들이 꼼짝없이 따를 수밖에 없는 거지요.” “… 독립운동가들 전부 김성수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덕을 많이 베풀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그의 한계를 비판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의 족적을 지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선 자리가 그가 닦아놓은 기반 위에 있기 때문이지요.” 저자는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한 신익희, 조봉암 중심의 역사 서술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저자는 부마항쟁을 비롯한 여러 사건으로 투옥된 적이 있고, 1992년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장 등을 지냈다. 자신의 관점을 ‘뉴 레프트’라고 소개한다. ‘후진국형 진보’인 ‘올드 레프트’를 넘어서자는 얘기다. “민족주의 사관은 학문적으로는 도저히 지탱하기 힘든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현실에서 힘이 너무나 큽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흔치 않은 이력이다. 초등학교를 절반밖에 못 다녔지만 예술사회학 박사가 돼 만만찮은 저작을 펴냈다. 젊은 시절 혁명을 꿈꿨고, 중년에는 한 대통령의 당선에 일익을 맡았고 지금은 중견기업의 대주주다. 최근 ‘인간 본성의 역사’(에피파니·사진)를 낸 홍일립(본명 홍석기·61) 박사를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서재에서 만났다.책 ‘인간…’은 웬만한 사전 두께(7cm)다. 동서양의 고대부터 현대, 철학·사회과학과 생물학을 넘나들며 인간 본성에 대한 관념의 역사를 전개한다. 469명의 이론가가 등장하고 참고문헌만 총 1596종이다.》 “침팬지를 수십 년 동안 관찰하면 성악론자가 되고, 보노보의 공감 행동을 보면서 성선론에 기운다면 생물학적 증거란 과연 믿을 만한 것일까요?” 책에는 인간 본성을 과학으로 규정하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계속 등장한다. 그는 “지금의 사회생물학이나 진화심리학은 가치가 개입된 추정, 기대, 비유로 가득 찬 ‘가설들의 꾸러미’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흡혈 박쥐가 자기가 먹은 피를 토해서 배고픈 동료를 먹이는 것에서 이타성이 동물적 기원을 갖는다고 보는 건 비약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지닌 의식적 감정이입의 증거나 순수한 이타적 동기의 증거는 다른 어떤 동물에게서도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동물에게서 찾으려는 건 태산같이 쌓여 있는 주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보조 재료나 포장지로 완제품을 만들려는 일이지요.” 이력에 관해 거듭 묻자 홍 박사는 손사래를 치다가 자기 얘기를 띄엄띄엄 풀어놨다. 그의 삶에는 빈곤과 극단적 이데올로기 대립, 경제 성장, 민주화와 정권 교체 등을 수십 년 사이에 겪은 우리 현대사의 여러 얼굴이 각인됐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 학업을 중단한 뒤 4학년 2학기에 다시 들어갔다. 한글은 4학년 때 익혔다. 고교 1학년을 중퇴한 뒤 입주 가정교사로 일하다 연세대 사회학과에 76학번으로 입학했다. 대학에서는 칸트를 탐독하면서 외국서적을 번역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사실 그는 아주 가까운 가족이 월북해 신상에 이른바 ‘빨간 줄’이 가 있었다. “공부 말고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마르크스주의를 접했다. 인터넷으로 ‘홍일립’을 검색하면 일본 학자가 쓴 자본론 해제인 ‘국제무역의 정치경제학’(1984년)이 등장한다. 일립(一笠·삿갓 하나)은 오래된 필명이다. 뜻을 묻자 “삿갓을 쓰면 부조리한 세상이 보이지 않아서”라고 했다. 1984년 대학원에 입학했다. 사복경찰 ‘백골단’이 도서관에 들어와 그의 옆자리에서 공부하던 학생의 긴 머리채를 잡고 머리를 책상에 내리꽂았다. “공부고 뭐고 다 필요 없다 싶었지요.” 결국 이듬해 경기도의 한 공장에 들어갔다. “공산주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죠. 용어는 그랬지만 인권이 존중받는 민주사회를 꿈꿨던 겁니다.” 조직에서 지도급 위치를 맡았다. 알 만한 386세대 운동권이 그의 후배들이다. 합법적 활동을 가장하기 위해 여론조사연구소 현대리서치를 세우기도 했다. 1991년 ‘지하 생활’을 정리했다. 옛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노태우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결심의 계기가 됐다. “‘소비에트가 무너지는구나, 어렵겠구나’ 생각이 들었죠.” 아내와 단칸방 살림을 했던 그는 1993년 ‘먹고살려고’ 화장품 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는 지난해 매출 2000여억 원의 중견 기업으로 성장했다. 1998년 새정치국민회의에서 정세분석국장으로 일했고, 여론조사회사 폴앤폴을 세웠다가 2000년 봄 총선 뒤 월간지에 ‘영남권 후보론’을 기고했다. 홍 박사는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캠프의 총괄기획실장을 맡아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을 이끌었다. 노 대통령 당선 전후 ‘반미하지 말라’ 등의 건의를 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을 전후로 해서 한국 사회에서 권력이나 부, 명예가 있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어느 순간 그런 세계와 ‘안녕’하고 싶더군요.” 2010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속을 멀리하겠다고 마음먹고 집필을 결심한 게 이번 책이다. 가난과 풍요, 운동가와 기업가의 궤적이 뒤섞인 그의 삶은 일견 모순적이다. 그러나 그게 또 한국 현대사 아니겠는가. “나름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생각하고, 운이 좋아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하고 싶었던 일은 대강 다 한 것 같아요. 이제 ‘잊혀진 인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낯설고 종잡기 어렵다. 소설가 윤해서 씨(36)가 등단 7년 만에 낸 첫 소설집 ‘코러스크로노스’(문학과지성사) 이야기다. ‘카오스의 소설’이라는 뒤표지 홍보 문구처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싶다가도, 거대한 막막함과 정면으로 마주하려 애쓴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윤 씨를 13일 만났다. ‘코러스크로노스’는 ‘시간합창’이라는 뜻으로 단편 ‘테 포케레케레’에 나오는 방의 이름이다. ‘테 포케레케레’는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말로 ‘미지의 어둠’이라고 했다. 익숙한 소설 서사를 기대했다가는 낭패다. ‘약 20억 년 전, 최초의 진핵세포가 등장했다’로 시작해 ‘문장에서 시간이 사라진다 … 나는 오직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를 건너뛴다’와 같은 문장을 거쳐 ‘… 왜상 속에서 왜상이. 끝없이 흔들린다. 탕,’으로 끝난다. 2011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게재했던 동명 소설의 문단 순서 등을 바꿔 소설집에 새로 실었다. 윤 씨는 “처음 발표할 때는 ‘테 포케레케레’의 뜻도 밝히지 않고 순서도 뒤섞어 소설 자체를 ‘미지의 어둠’으로 만들려 했는데, 너무 어둠 속에 남겨졌다”며 “‘편곡’을 달리해 봤다”고 말했다. 단편 ‘홀’에서는 어떤 남자의 눈을 갖게 된 여자가 등장하고, ‘오늘’에서는 한 남자가 점점 사라진다. 윤 씨는 “삶 자체가 시와 소설, 삶과 죽음, 음악과 문학의 경계에서 흔들리고 있는데, 글을 쓸 때는 그런 경계가 무화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이 도시에 남아 어느 날 몬트리올에서 온다. 어느 날은 모스크바에서, 쿠샤다스에서, 탄자니아에서 온다.…”(‘아’에서) 소설은 제주의 사려니숲, 알제리의 수도, 남태평양의 보라보라 섬 등을 오간다. 윤 씨도 네팔의 설산,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 볼리비아의 우유니 호수로 여행을 다녔다고 했다. 불모지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묻자 윤 씨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는 일상에서 잃어버린, 우주 속의 존재라는 감각이 선연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등단작 ‘최초의 자살’은 변호사, 외판원 등이 인류가 생겨났을 무렵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인류는 동굴벽화를 그릴 때부터 존재했고, 그런 긴 시간이 앞으로도 있겠죠. 1981년 태어난 나도 그 모든 시간을 같이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 시간의 결을 그려 보고 싶다고 할까요.”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이 네 자는 실을 필요가 없다. 가경(嘉慶) 병진년(1796년) 겨울에 내가 규장각 교서로 있었는데, 임금께서 몰래 명하시기를 ‘운서는 책을 펴서 문득 상서롭지 않으면 모름지기 밀어내야 한다’고 하셨다. … 신(臣) 용(鏞).” 1796년 정조가 다산 정약용(1762∼1836)에게 내린 운자(韻字) 사전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에 다산이 덧붙여 쓴 것이다. 다산은 이 책에 빼거나 더할 사항을 위의 여백에 붉은 먹으로 썼다. 다산의 친필을 비롯한 저술 가장본(家藏本·종가 소장본)과 서화 등이 대거 공개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경기 성남시 분당구)은 미공개 자료 다수를 포함한 다산 관련 학술자료(저술류 28점, 시문·서화·고문서류 12점)를 20일부터 한중연에서 전시한다. “은혜를 입고 갚지 않는 것은 고인이 비유컨대 우석(雨石)이라 한다. 빗물이 흙에 떨어지면 흙은 비를 품으니 이로 말미암아 오곡백과가 생겨나고 잎이 자라 그 꽃을 피움으로써 비의 본래의 뜻에 보답하는 것이다.” 이번에 전시되는 산재냉화(山齋冷話)의 한 구절이다. 다산이 자신의 수기치인(修己治人) 사상을 피력한 친필이다. 다산이 드물게 사용한 호 ‘철마산초(鐵馬山樵)’의 인장이 찍혀 있다. 다산이 후학에게 ‘멘토링’한 친필 ‘현진자설(玄眞子說)’도 전시된다. 제자에게 두꺼비와 호랑이의 예를 들어, 자기 장점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라는 내용이다. “두꺼비는 … 땅이 얼더라도 깊이가 몇 자가 되어 몸이 얼지 않는다. 일을 도모함에 미리 마음 씀씀이를 부지런히 했기 때문이다.” 안승준 한중연 고문서연구실장은 “비단 바탕에 쓴 글씨가 단아하면서도 내면 세계가 잘 드러나, 보물로 지정된 ‘하피첩’에 견줄 만하다”고 말했다. 그림을 거의 남기지 않았던 다산이 그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산수도도 있다. 남종화(南宗(화,획)) 계열의 수묵산수도로, 위쪽에 정약용이 칠언절구 제시(題詩)를 썼다. 그림의 아래쪽 귀퉁이에 정조의 부마인 홍현주(1793∼1865)의 소장인이 찍혀 있다. 다산의 문인 제자 아들 손자들의 종합 시문집 ‘유수종사시권(游水鍾寺詩卷)’도 공개된다. 무엇보다 경세유표(經世遺表) 시경강의(詩經講義) 상서고훈(尙書古訓)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간행된 여유당전서의 저본이 된 가장본들이 다수 전시돼 눈길을 끈다. 경세유표 등은 1925년 홍수 당시 물에 젖은 흔적이 완연하고 다산이 친필로 교정한 흔적이 있다. 한중연은 기존 소장본 26점과 기탁분을 합쳐 다산 저술의 3분의 2 이상을 원본으로 보유하게 됐다. 이번에 공개되는 자료들은 김영호 전 유한대 총장(한중연 석좌교수)이 2015년 한중연에 기탁한 189점(저술 166책, 시문·서화·고문서 등 23점) 중 일부다. 김 전 총장은 연세대 실학연구교수로 일하던 1970년대부터 다산을 연구하며 사비로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그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70년대 어느 날 다산 자료가 보따리로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대전까지 택시로 한달음에 내려갔던 기억이 난다. 땅 팔고 빚내서 사 모으다 보니 집에서 쫓겨날 지경이 되기도 했지만 한국학의 보고(寶庫)를 찾았으니 다행”이라며 웃었다. 한중연은 17, 18일에는 국제 학술회의 ‘세계사 속의 다산학’도 개최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프랑스 노동법에 기대어 한국 정부를 상대로 부당해고 소송을 내 이긴 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이야기다. 2005년 프랑스에서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을 준비하던 저자는 파리에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한국 대표부의 어시스턴트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해 일하게 된다. 이후 7년 동안 대표부에서 ‘행정원’으로 일했던 저자가 본 대한민국 외교부 해외 공관의 민낯이 책에 그대로 드러난다. 대표부 관료들은 개인적인 식사를 하고 마치 OECD 본부 국장이나 과장급 인사를 만난 것처럼 꾸며 영수증을 총무과로 넘겨버렸다. “직위가 높을수록 이런 사례가 많았는데, 제 가족이나 친구들과 외식을 하고 공적인 일로 점심을 먹은 것처럼 위장술을 썼다. … 보는 내가 다 민망했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자신들은 특수한 계층이기 때문에 그런 남용도 권리라고 떳떳하게 믿고 있었다.” 관료들은 의전에는 철두철미했다. ‘의전의 고수’였던 한 관료는 한국에서 높은 사람이 출장을 온다고 하면 미리 식당 4군데를 예약해 뒀다가 나머지 3군데는 펑크를 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한 식당 지배인으로부터 “더 이상 예약을 받지 않겠다”는 항의에 가까운 통보를 받기도 했다. 대표부 건물은 부자 동네인 파리 16구에서도 요지에 있다. 원래 대기업 에어버스 회장 소유의 대저택을 한국 정부가 산 것이다. 저자는 “OECD에서 위상이 우리보다 높은 북유럽 국가들은 오히려 건물 한 층을 세내어 사용할 뿐”이라며 “국민의 세금을 절약해주는 그들의 자세가 기특해 보인다”고 말한다. 그래도 외교관들이니 외국어에는 능통하지 않을까. “아주 가끔, 3년 가뭄에 콩 하나 나듯 프랑스어를 하는 외교관이 부임하기도 하는데, … 간단한 의사소통만 가능할 뿐 복잡한 법적·행정적 업무를 실행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재외공관의 행정업무는 현지 채용된 프랑스 직원이나 저자처럼 프랑스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한국계 직원들이 맡는다. 모두 비정규직인 이들은 ‘직원’이 아니라 ‘행정원’이라고 불린다. “행정원 주제에” “가서 행정원 하나 데려와!” “그까짓 행정원 따위가”라고…. 이런 분위기에서 저자는 2011년 한 상관으로부터 폭언과 밀침 등을 당한다. 대표부는 저자가 외교부 장관에게 편지를 써서 알린 뒤에야 이 직원에게 형식적인 징계를 내린다. 저자가 소송을 준비하자 대표부는 저자를 해고했다. 저자는 대표부를 상대로 부당해고 소송을 내 승리하지만 대표부는 외교관 면책특권을 무기로 배상금 지불을 하지 않고, 반만 내겠다고 하기도 한다. 저자는 청와대에 민원을 내고, 대표부는 대통령의 파리 방문을 앞두고서야 배상금 지불에 동의한다. 글에서 감정을 좀 덜어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화낼 만한 사람에게 화내지 말 것을 기대하는 것 또한 온당치는 않겠다. 한국 국적의 저자를 지켜준 건 프랑스 노동법이었다. 한국과 대비되는 프랑스의 노동 문화가 우리의 현실을 새삼 돌아보게 만든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공재 윤두서(1668∼1715)의 인장이 찍힌 해남 윤씨 집안의 초간보(初刊譜·처음 간행된 족보)가 확인됐다. 박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연구실 선임연구원은 “보길도(전남 완도군 보길면)의 고산 윤선도(1587∼1671) 후손 집안에서 초간보를 포함한 고문헌 11점을 최근 수집했다”고 7일 밝혔다. 박 연구원에 따르면 이 족보는 1702년 간행됐으며 남녀 구분 없이 출생 순서대로 후손을 적고, 딸의 후손도 이름을 적는 초기 족보들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다. 해남 윤씨 초간보는 몇 개가 더 있지만 윤두서의 소장인이 찍힌 건 이것이 유일하다. 원림(園林)으로 유명한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가 병자호란 당시 항복 소식을 접하고 제주도에 가던 도중 은거한 곳이다. 윤선도는 보길도에서 경주 설씨인 작은부인을 뒀고, 그 후손들이 대대손손 살아왔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지은 낙서재(樂書齋)의 고도서는 일제강점기 상당수가 흩어졌고, 남아 있는 것을 이번에 수집한 것이다. 박 연구원은 “종가인 녹우당(綠雨堂)이 아니라 보길도에서 발견된 점이 매우 흥미롭다”며 “보길도의 해남 윤씨 후손들은 서파(庶派)로서 설움도 있었겠지만 족보를 300년 이상 소중하게 간직해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족보는 윤두서가 보길도에 머무르며 보려고 가져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윤선도의 시문집인 고산유고(孤山遺稿)의 필사본과 윤선도가 봤을 것으로 보이는 정개청(1529∼1590)의 우득록(愚得綠)도 발견됐다. 발견된 고산유고는 별집으로 연작 시조인 산중신곡(山中新曲)이 담겨 있다. 정갈한 한글로 쓰였으며 1791년 이후 간행된 것을 후손이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우득록은 호남 사림의 맥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서인이 남인을 공격하는 데 근거로 사용됐던 저술이다. 박 연구원은 “남인이었던 윤선도는 서인에 맞서 왕권 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 년의 유배 생활을 했다”며 “윤선도가 보길도에 두고 봤던 책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 밖에 묘지 관련 송사 자료 등 고문서도 여러 점 기탁됐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나는 지금 환자복을 입고 영원한 부재를 눈앞에 두고 있다. …직업으로부터, 철학으로부터, 모든 물질적·사회적·관념적 속박과 구속으로부터는 물론 애착으로부터도 해방되어….” 최근 ‘문학사상’에는 ‘남기고 싶은 말―박이문을 대신하여’라는 특이한 형식의 글이 실렸다. 투병 중이라 글을 쓸 수 없는 ‘지성의 참모총장’ 박이문 포스텍 명예교수(87)를 대신해서 미다스북스 대표 류종렬 씨(51)가 쓴 글이다. 비록 ‘박 교수의 생각은 아마 이럴 것’이라고 짐작한 내용이지만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을 고려하면 실제 박 교수가 썼을 법한 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봐도 될 듯싶다. “죄송스럽게도 첫 책에서 오탈자가 쏟아져 나와 가슴이 철렁했는데 교수님은 웃으면서 ‘괜찮다’고 하시더군요.” 류 씨가 20여 년 전 당대출판사 편집장으로 기획, 편집을 맡은 첫 책이 박 교수의 책이었다. 류 씨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많은 ‘좌우의 지성인’을 만났지만 편집자로 박 교수님을 계속 뵈면서 ‘인격이 이렇게 훌륭한 분이 얼마나 될까’ 싶었다”고 회상했다. “박 교수님은 문학 철학 예술철학 환경철학 미학까지 인식론과 실존철학의 전 영역을 폭넓게 아우른 한국 인문학의 거장이면서 동서양 철학의 바탕 위에서 자신의 철학을 정립해 독보적 업적을 내셨지요.” 미다스북스는 지난해 2월 박이문 인문학 전집(전 10권)을 냈다. 중소규모 출판사 경영자로서는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다. 1년 새 전집 초판(1000질)이 모두 나갔다. 미다스북스는 지난달 26일 박 교수의 88세 생일을 맞아 양장본이던 전집을 보급판으로 다시 냈다. “박 교수님은 20세기 이래 현대철학의 화두인 현상과 실재, 존재와 의미 간의 변증법적 통일을 시도한 ‘둥지의 철학’을 창시했습니다. 한국 인문학의 척박한 토양에서 피어난 창조적 지성의 꽃이죠.”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기미 3·1운동은 우리 민족정기를 민중의 토대 위에 꽃피게 한 장엄한 역사의 한 페이지였습니다. 본사에서는 전국적으로 3·1유적보존운동을 일으켜 3·1정신을 영원히 우리 민중의 가슴속에 새겨두고자 합니다. 이 운동은 남녀노소, 전국의 모든 애국동포의 협력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동아일보가 창간 45주년을 맞은 1965년 4월 1일자 1면 사고(社告)다. 동아일보는 1932년부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적보존운동을 벌이는 등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한 사업을 일제강점기부터 계속해왔고, 3·1운동 기념비 설립 사업도 그 연장이었다. 또한 3·1운동의 결과물로 생겨난 동아일보이므로 이 같은 사업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동아일보는 사고를 낸 뒤 기념비 건립을 위한 유적지 조사를 국사편찬위원회와 합동으로 추진했다. 기념비 건립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견해에 따라 기념비건립위원회도 구성했다. 연구와 현지답사 등을 거쳐 첫 결실로 1971년 8월 15일 전북 이리(현 익산시) 역전광장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열었다. 이리에서는 1919년 4월 4일 정오 수천 명의 군중이 장터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뒤 시위에 들어가려 하자 일본군이 발포해 88명이 그 자리에서 순국하고 5명은 체포돼 총살당했다. 비문은 이희승이 짓고, 글씨는 서희환이 썼고, 조각은 김영중이 맡았다. 비용 130만 원 중 50만 원은 동아일보가 냈고, 나머지는 이 지역 유지들이 모금했다. 1970년대에는 충북 영동, 강원 횡성, 전북 남원 등 전국 9개 지역에 기념비가 세워졌고, 1980년대에도 설립 사업은 계속 추진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고조선의 강역 논란부터 최근의 한일 역사교과서 논쟁까지 우리 역사의 쟁점 24가지를 각 분야의 대표적 교수와 쟁쟁한 연구자 23명이 전근대, 근대, 현대편으로 나눠 썼다. 책은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부각해 내러티브를 살리면서 역사의 이면을 끄집어낸다. ‘3·1운동 서로 다른 세 개의 기억’ 꼭지를 보자. 3·1운동의 의의는 흔히 전 민족적 항쟁, 민족자결주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립으로 요약되는데, 이로써 충분한 것일까. 필자이자 근대편을 기획한 이기훈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는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건 국가 혹은 국민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라고 말한다. 글은 경기 안성의 농민 이덕순, 함경도 북청 출신의 일본 유학생 양주흡, 전라도 장산도 출신으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인텔리 청년 장병준이 바라본 서로 다른 3·1운동의 기억을 교차시킨다. 이덕순은 경성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한 뒤 ‘조선 민족’이라는 말을 처음 실감하고 고향에 내려와 4월 1일 격렬한 시위를 주도한다. 농민들은 양성면 주재소와 원곡면사무소를 불태운다. 농촌의 시위에서는 풍물을 치기도 했고, 멍석으로 만든 깃발을 휘날리기도 했다. 이 교수는 “농민공동체의 유대관계 위에서 재현된 격렬한 농민 저항의 양상을 보여 준다”며 “농민 투쟁의 마지막 단계라는 성격도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민란의 전통 위에서 만세 시위는 폭동이면서 축제인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거나, 당시 농민은 민족적 주체라기보다 파편화된 민중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소개한다. 양주흡과 장병준은 ‘조선의 혁명이 곧 독립’이라고 봤다. 미국과 영국이 필리핀과 인도를 독립시키지 않는 점을 들어 일본 유학생들이 낙관적 전망을 경계한 걸 보면 3·1운동 주도자들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패전국에만 적용된다는 점을 무시했다는 통념은 잘못임을 알 수 있다. 이 교수는 “3·1운동의 역동성과 다양성은 오늘날 촛불 집회와도 유사하다”며 “당대인들의 가슴속에는 민족이나 독립이라는 단어로는 모두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자라고 있었다”고 말했다. 책에는 편별로 8가지 쟁점이 담겼다. 평범한 독자의 눈높이에서 쓰여 어렵지 않게 읽힌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경위도상 독도의 위치가 일본의 영토가 아닌 것으로 해양 경계선이 그려진 19세기 말 일본 검정 교과서가 새로 발견됐다. 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은 영남대 독도연구소가 지난달 27일 영남대에서 연 세미나에서 ‘고지도에 나타난 한일 경계선과 독도 영유권’을 발표하고 이 교과서에 담긴 지도 사진을 공개했다. 지도는 1891년 일본의 소학교(초등학교)에서 사용된 ‘소학지리서(小學地理書)’에 담겼으며, 지리서 표지에는 ‘메이지 24년 7월 4일 각출판(刻出版)’이라는 글과 함께 문부성 검정을 통과(濟·제)했다고 쓰여 있다. 지도상에 독도가 그려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위선과 경선을 통해 그 위치를 확정할 수 있다. 이 소장은 “근대적 경위선과 함께 해양 경계선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독도의 위치는 해양 경계선을 기준으로 명확히 한국 쪽”이라고 말했다.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도 28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개소 3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일본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 지리교육자이자 학자인 야즈 쇼에이(矢津昌永)가 편찬한 지리교과서와 지리부도를 분석했다. 한 교수는 발표문에서 “1905년 2월 일본의 독도 강점 이전 일본 문부성에서 공식 검정을 받은 그의 지리교과서와 부도들에는 독도가 일본 영토에서 명확하게 제외됐다”고 밝혔다. 일례로 야즈 쇼에이가 집필하고 문부성이 검정한 1899년 중지리학외국지용(中地理學外國誌用) 외국지도의 아세아(亞細亞) 지도에도 일본 국경선이 명확히 그어져 있는데 독도는 제외돼 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해외에 있는 우리 고문헌 상당수는 소장 기관이 중국의 것으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그런 경우 중국 문헌 서고 전체를 뒤져야 할 수도 있습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가 최근 일본 교토대에서 한국학 자료 귀중본을 대규모로 발견하면서 해외 고문헌의 학술적 가치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2005년부터 일본, 중국의 대학과 사찰 등에서 20여 차례 우리 고문헌을 조사한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연구실장은 27일 전화 통화에서 “일본 교토대처럼 한국학 자료가 ‘문고’로 따로 정리돼 있는 건 다행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왕실의궤 등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해외 유물이 사회적으로 주목받은 데 비해 고문헌은 학술적 가치가 큰데도 상대적으로 가려진 측면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특히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 간 한국학 자료 등은 당대에도 중요하다고 분류됐던 것들이어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안 실장은 “필사본이나 초서로 쓰인 고문헌 중 중요한 게 많은데 판독을 못 해 묻혀 있는 것도 적지 않다”고 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자료에 따르면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중앙도서관, 한국서지학회 등은 1991∼2016년 해외 전적 조사를 벌여 미국 일본 프랑스 영국 등에서 1만6903종 7만9170책의 목록을 조사했다. 그러나 고문서는 책으로 만들어진 성책본보다 낱장으로 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전체 규모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해외 유물이 알려지면 일부에서 앞뒤 맥락을 따지지 않고 ‘환수해야 한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은 우리 연구팀의 고문헌 등 자료 조사에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해외 기관이 소장 자료 공개를 꺼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해외 유물이라고 모두 부정한 경로로 유출된 것도 아니다. 이번에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 가장본(家藏本·다산 집안에 소장된 본) 등이 발견된 교토대 ‘가와이 문고’도 가와이 히로타미 박사(1873∼1918)가 구매하거나 기증받는 방법으로 수집한 자료다. 이런 점에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과 교토대의 협력은 여러 면에서 모범 사례라는 평가가 나온다. 연구팀은 교토대의 신뢰를 바탕으로 수장고 안에 들어가 자료를 조사, 실측, 촬영했다. 박영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연구팀이 자료 목록 조사에 그치지 않고 초서를 정자로 바꾸는 ‘탈초’를 하고, 해제를 달아 이미지와 함께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하는 일을 꾸준히 한 점을 교토대가 좋게 평가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고려대와 교토대는 소장 자료에 관한 공동 연구도 하고 있다. 정우봉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장은 “해외 주요 한국학 자료 소장처의 신뢰는 1, 2년 사이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주요 한국학 자료를 조사해 공개하는 일은 장기적인 시각에서 지속적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이번 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의 조사에서는 국내 조선 상업사 연구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문서 등 고문서가 다수 발견됐다. 책으로 묶인 ‘성책본(成冊本)’ 250여 책과 낱장 문서 3500여 점 등이다. 대표적인 것이 19세기 면주(綿紬·명주)를 팔던 상인들이 남긴 자료다. 국가에 면주를 납품하던 면주전 상인과 왕실, 호조의 관계, 면주전 운영 실태 등이 드러난다. 1738∼1873년 작성된 주민등록신고서와 주민등록등본 역할을 했던 한성부 주민의 준호구도 다량 확인됐을 뿐 아니라 서울 양반의 재산 운영과 경제 규모를 볼 수 있는 분재기도 나왔다. 안승준 한중연 고문헌연구실장은 “국내에 남아 있는 고문서는 영남과 호남의 지방 양반 가문 자료가 대부분인 데 비해 ‘가와이 문고’ 고문서에는 한성부 주민 자료가 많아 사료적 가치가 크다”며 “국내에는 상업 문서가 극히 드물어 이번 발견 자료는 상업사 연구의 중요 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조선시대 동래 왜관(倭館)의 풍속과 풍경을 일본인이 그린 두루마리 ‘조선도회(朝鮮圖繪)’도 발견됐다. 왜관 건물의 명칭이 하나하나 기록돼 있고 동래부사와 대마도 참판사의 연회, 왜관에 온 일본인이 용두산에서 호랑이를 사냥하는 모습, 시장 풍경 등이 세세하게 그려져 있다. 종옥전(宗玉傳)을 비롯해 국내에는 없는 유일본 한글 소설과 희귀 이본(異本) 소설도 발견돼 국문학 연구의 중요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연구팀은 가와이 박사가 수집했지만 가와이 문고의 현재 목록에는 빠져 있는 서적 70여 종도 새로 발견하고 서지 목록을 작성했다. 이 소설들에는 독자의 감상 등이 함께 기록돼 있어 가치가 크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