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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헤어진 후 박인숙 씨의 인생은 180도로 달라졌다. 월남자의 딸은 아무 기회도 얻을 수 없었다. “인민학교 5학년 때 군(郡) 수학 올림픽에서 1등을 하였지만 약속된 상품은 나오지 않았다. ‘월남쟁이’ 딸이 1등을 해 떠들썩한 게 정치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게 이유였다. 다음 날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쟤는 아무리 잘해도 쓸데없다’라고.” “1957년 인민학교를 졸업하면서 최승희무용학교 음악과에 추천받았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보고 싶은 아버지였건만 나에게는 아버지란 존재가 아예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내 맘대로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어머니에게 왜 아버지를 붙잡지 못하고 잃어버렸느냐고 철없이 엉엉 울었다.” 그런 박 씨에게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너는 알아야 한다. 남이 한 발자국 걸어갈 때 너는 열 발자국 뛰어야 한다는 것을….” “(중학교) 졸업식 날. 최우등생 호명과 상장 수여식이 있었다. 수상자 3명 중 나는 없었다. 나는 8학년까지 한 번도 최우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성분이 나쁘다고 억지로 빼놨던 것이다. 눈물이 났다. 눈물이 안 나는데 엉엉 운 적은 많았어도 눈물이 나는데 울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반동일지라도 (내가) 최우등이야. 그렇지 않은가.” “이사할 때 아이들이 기차를 따라오며 소리쳤다. ‘잘 가라. 다시 만나자. 인차(곧) 오너라.’ 며칠 뒤 ○○이가 왔다. 그날 밤 일로 학교 민청총회에서 두들겨 맞았다는 것이다. 열아홉 살까지 한마을에서 살던 죽마고우와 헤어지며 우는 것도 반당적 행위라니….” “졸업생 3분의 1이 대학에 갔지만 나는 1인자였어도 추천을 못 받았다. 어머니 몰래 울고 또 울었다. 어머니는 마치 자기가 죄지은 사람처럼 눈치를 살피곤 하였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지난달 28일 북한에 돌아가 남쪽을 비난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한 박인숙 씨(67)의 삶은 말 그대로 남북 분단으로 빚어진 우리 민족 비극의 축소판이다. 그가 한국에 남겨두고 간 수기엔 6·25전쟁 당시 피란 도중 뜻하지 않게 이산가족이 된 순간부터 반동으로 몰려 핍박을 받아야 했던 월남자 가족의 설움, 북한 식량난에 따른 대량 탈북과 중국에서 체포된 뒤 강제 북송돼 고문 받은 내용 등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또 남북 이산가족이 만났을 때의 정서적 차이와 재산권 문제로 인한 갈등도 고스란히 들어 있다. 동아일보는 박 씨가 자신의 삶을 정리해 꼼꼼히 기록한 수기와 수첩 내용이 전쟁의 비극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를 포함해 우리 국민 전체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판단해 수기 내용을 상·하로 나눠 소개하기로 했다. 다만 그의 한국생활과 친척 이야기는 관련 당사자의 신변안전과 명예를 고려해 쓰지 않기로 했다. 》 “내 유년기 기억의 첫 장을 꽉 채워 줬던 이 이야기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인 1950년 겨울에 있었던 일이다.”박인숙 씨의 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동네 아이들과 줄넘기를 하던 그는 어른들이 무리 지어 가는 것을 보고 따라갔다.“군대들이 줄지어 앉은 멋진 자동차가 서서히 들어오고 큰 길 량(양) 옆에는 꽃다발을 든 사람들도 있고,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엉거주춤 서서 흔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불안한 몸가짐을 하고 한 줄로 서 있었다. 그것이 이 땅을 피로 물들이고 1000만 이산가족을 만든 전쟁의 시작이었음을 내 어찌 알았으랴!”그가 처음 본 국군의 인상은 공포였다. 박 씨의 할머니는 누군가의 집을 묻는 국군에게 부지깽이로 방향을 가리켰다는 이유로 총살될 뻔했다.“국방군 2명이 할머니를 밭에 세워놓고 권총을 겨누고 노발대발하지 않는가!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긋는 것처럼 소름이 쫙 끼쳐 왔다. 나는 달려가 할머니를 붙잡고 ‘우리 할머니 죽이지 마세요’라고 애원했다. 동네 어른들이 나와 빌고 또 빌었다. 다행히 할머니는 사경에서 구원됐다.” 박 씨는 당시 할머니에게 달려가다 넘어져 생긴 상처를 볼 때마다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떠올리곤 했다.평생 잊지 못할 국군도 있었다. 발바닥에 물집이 생긴 박 씨를 ‘하나도 따갑지 않게 해 주겠다’고 능청스럽게 속이고 물집을 터뜨린 뒤 성냥불로 지져 치료했다. 기절초풍하며 울었지만 효험이 있었는지 그날부터 박 씨는 뛰어다닐 수 있었다. 그는 과자와 사탕을 주기도 했다.“나는 오빠가 마냥 좋았다. (그는) 내가 맛있게 먹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 하늘을 쳐다보며 명상에 잠겨 있다가도 나를 불러 노래도 배워(가르쳐) 주었다. 그 노래는 아버지와 이(북)쪽과 저(남)쪽으로 갈리어 그리울 때마다 혼자 애달피 부르곤 하던 노래였다.”서로 다른 얼굴의 군인이 공존하는 전쟁은 어른들에겐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하룻밤이 지나면 세상이 바뀌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이었다.“네 분이 모여서 무슨 논쟁을 그렇게 하시는지 위험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끝날 줄 몰랐다…. ‘엄마 이겨라, 아빠 이겨라. 엄마 이기면 내 가운뎃손가락에 딱 붙어라’ 추워서 오들오들 떨면서도 동생은 이런 장난을 하고 있었다. 옆집 동원이 아버지가 달려와 ‘아이구, 박 의사님, 어째 이러구들 있습네? 온 동리가 다 떠나가는데 빨리 가시기우!’”논의 끝에 박 씨 가족도 피란길에 올랐다. 아버지와의 이별이 기다리는 것도 모른 채 무조건 피란민 행렬에 묻혀 떠밀려 갔다. “식구들을 잃을까 봐 두리번거리면서 고함치는 소리도 들렸다. 할머님에게 칭찬받기를 좋아했던 나는 발구에 타지 않고 그냥 걷겠다고 떼를 써 얼마쯤 가다가 지쳐 아버님의 등에 업혀 갔다. 그때 일곱 살이었던 내가 악돌이였다고 후에 할머님이 회고하시는 것을 들었다.”짧았던 피란길은 어느 강 앞에서 끝났다. “사람들이 아우성치고 있어 가까이 가 보니 작은 배에 수십 명이 타고 강을 건너려는 것이었다. 맨 마지막이 우리 차례였는데 워낙 식구가 많아 절반밖에 탈 수 없었다. 나눠 타고 가면 되지 않겠냐는 말에도 아버님이 그렇게 하시지 아니하였다. 여기서 헤어질 수야 없지 않나. 모두 그 배를 타고 갔더라면 아버님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을….”배는 돌아오지 않았고 강을 건너지 못한 박 씨 가족은 다시 고향집으로 향했다. 그때 마주친 피란민 행렬 속에서 누군가 달려 나와 “아이구, 이게 박 의사 아닙니까?” 하고 알은체했다. 그 말을 마침 주위에 있던 국군 헌병이 들었다.“‘박 의사란 게 누군가’ 하면서 헌병이 총탁(총의 개머리)으로 아버지를 밀쳤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아우성치며 쫓아가려 하였으나 사람들을 헤치고 나갈 수 없었다. 아이들은 울고 있었다. 남쪽으로 다시 가면 어디선가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그것이 (아버지와) 영영 이별이었다.”아버지를 찾으려고 고향으로 가는 길 대신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 박 씨 가족을 산에서 내려온 누런 군복의 군인(인민군)들이 막아섰다.“‘여러분 어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인민군과 중국지원군이 재진격했습니다.’ 밤새 세상이 또다시 바뀌었다. 아버지를 어데 두고 시체들을 넘고 넘어 돌아오는 나의 마음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박 씨는 탈북한 뒤 2006년 8월 서울에서 꿈에 그리던 아버지를 찾았지만 이미 정신을 잃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마지막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그가 찾아뵌 지 20여 일 만에 그의 아버지는 딸이 온 사실도 모른 채 한 많은 이 세상을 등졌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 조선중앙TV는 지난달 28일 박인숙 씨가 평양 중심부의 고급 아파트에서 아들 내외와 함께 살게 됐다고 선전했다. 박 씨가 자기 집 고급 장롱을 열어보는 장면도 방영했다. 북한의 파격적인 선전으로 미루어볼 때 박 씨가 받은 ‘혜택’은 김정은의 승인을 받은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별한 잘못이 없는 한 박 씨 가족은 계속 평양에서 거주할 가능성이 높다. 박 씨를 처벌하면 전 주민을 대상으로 선전한 ‘김정은 은덕정치’가 결국 ‘보여주기 쇼’였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대신 박 씨는 앞으로 북한 전국을 순회하면서 김정은의 배려를 선전하고, 한국으로 향한 탈북자들의 ‘비참한 처지’를 증언하는 강연자로 활동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박 씨와 유사한 사례는 예전에도 있었다. 1996년 한국에 입국했다가 2000년 북한으로 되돌아갔던 탈북자 남수 씨는 “그를 용서해주라”는 ‘김정일 방침’에 따라 고향에서 목욕탕을 경영하기도 했다. 그는 이후 전국을 돌면서 탈북을 막는 강연을 했지만 2003년 아들을 데리고 재탈북해 한국에 돌아왔다. 1996년 탈북한 최승찬 씨는 한국의 한 은행에서 대리로 일하다가 2005년 재입북한 후 용서를 받고 개성컴퓨터센터에 취직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일성대 졸업·2001년 탈북)}

《 부푼 꿈을 안고 찾아온 땅에서 그녀는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월남한 아버지가 재력가라는 소식에 목숨 내걸고 탈북했지만 와보니 아버지는 병상에서 의식을 잃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복형제는 그를 가족으로 여기지 않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일자리를 찾아 전전하던 때 북에서 청천벽력이 날아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부부와 손녀가 어머니의 탈북 사실이 드러나 평양에서 황해북도의 한 오지 농장으로 추방돼 전기도 없는 토굴 같은 집에서 보위부원의 철통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들을 위해 강제북송과 고문 등을 이겨내며 탈북해 한국에 왔고 아들을 위해 억척스럽게 한 푼 두 푼 돈을 벌던 그녀는 절망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외롭고 병든 몸과 눈물뿐이었다.북한으로 돌아가 지난달 28일 평양에서 기자회견을 연 탈북여성 박인숙 씨의 이야기다. 동아일보는 박 씨가 서울에서 노트와 수첩에 자필로 남긴 수기와 일기, 사진 등을 최근 단독 입수했다. 》박 씨의 수기엔 아들에 대한 죄책감이 곳곳에 배어 있다. “너(아들)에게 죄 짓는 내 인생을 용서해라. 중국에 와서 아버지 만나 돈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 그만 이성을 잃고 넘어왔다… 혈육을 다 버리고.” “내 아들(을) 망가뜨려 놨는데 사돈께 미안하고 며느리와 분이(손녀로 추정)에게 지은 죄, 눈물이 바다가 된다.”박 씨는 입국한 2006년부터 아들의 추방소식이 전해진 2008년까진 자신을 희생해 아들을 살린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아들을 지옥에 둔 어머니에겐 더이상 천국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천국, 아들의 곁을 찾아 다시 떠났다. 자신이 북한 당국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 아들이 복권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자신의 재입북이 아들의 삶에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목숨을 내건 것이다.수기를 보면 그의 재입북은 일각의 주장처럼 보위부의 협박에 따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의 수기엔 2010년부터 북한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먹고 준비했던 흔적이 엿보인다. ‘한국 자살률 세계 1위…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낳은 결과’ ‘내 집 마련 11.7년’ ‘한강 투신자살 매일 2.4명’ ‘장군님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보았다’ 등 북에 돌아가 한국을 비난하고 북의 지도자를 찬양할 내용을 정리해 두었다. 실제로 그는 이번 기자회견에서 이런 주장을 펼쳤다.그의 결단 뒤에는 월남자의 딸로 살면서 북한 체제에서 갖은 고초를 겪었던 개인적 과거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남긴 수기는 1950년 눈 내리는 겨울 아버지와 헤어지던 장면부터 시작됐다.박 씨의 아버지는 광복 전 일본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엘리트였다. 광복 후 청진의과대학장이던 박 씨의 아버지는 1950년 당시 6세이던 박인숙을 등에 업고 피란길에 올랐다가 국군에 강제 징집돼 가족과 헤어졌다. 가장을 잃은 박 씨 가족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박 씨의 수첩을 보면 ‘아버지를 잃게 한 미국’을 증오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역설적으로 아버지와 함께 월남한 박 씨의 맏오빠는 미국에서 교수를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박 씨의 아버지는 남쪽에서 국군 군의관으로 시작해 서울에서 유명 의대 학장을 지냈다. 북에 5남매를 남겨두고 온 그는 남쪽에서 재혼해 다시 2남 2녀를 낳은 것으로 알려졌다. 남에서 낳은 막내아들은 3선의 박모 전 국회의원이다.북에 남은 박 씨의 가족은 월남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갖은 박해와 차별을 받았다. 박 씨는 학교에서 8년간 최우등생이었고 군 수학올림픽에서 1등을 하기도 했지만 대학은커녕 야간대학에도 갈 수 없었다. 음대에 가고 싶어 평양음대 학장까지 찾아갔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박 씨는 1964년부터 함북 청진 나남제약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가정을 이루고 아들을 낳아 평범한 주부로 살았다.하지만 2001년 남편이 사망하고, 아들은 13년간 군 복무를 마친 뒤 박 씨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평양음대에 입학하자 박 씨는 남쪽의 아버지와 오빠를 찾아 아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기 위해 탈북했다. 그의 일기장 첫 장에는 ‘남행열차’ 가사와 악보가 적혀 있어 남쪽으로 오려는 강한 열망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가 만난 아버지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고 딸이 찾아왔다는 사실도 모른 채 20여 일 뒤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박 씨는 “실현가능성조차 희박한 사선의 길을 넘어 아버님을 찾아왔건만 한마디 말조차 나누지 못한 채 하늘과 땅으로 서로 갈리었다”고 일기에 적었다. 자신을 외면하는 이복형제를 대상으로 부친 소유의 재산분할 소송도 생각했지만 국회의원인 이복동생이 피해를 볼까봐 행동에는 옮기지 않았다고 했다.박 씨는 서울 송파구의 한 임대주택에서 살면서 지하철 청소원, 노인 간병인 등을 전전하며 어렵게 살았다. 지난해 2월 지하철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에 중상을 입었지만 다리를 절면서도 90세 노인의 간병을 다녔다. 외롭고 쓸쓸한 그는 고향과 아들이 그리웠다. “나는 잘 먹고 산다. 그러나 내가 두고 온 땅 공기 물 친척 거리 모두 함께 숨쉬던 것들이 다 북에 있다. 그로부터 오는 ○○감!” 그가 남긴 수첩 속 한 대목이다.북한은 박 씨의 귀환을 ‘김정은식 은덕정치’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주민들의 탈북 의지를 꺾을 좋은 호재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평일에 불과 6시간 방영하는 조선중앙TV를 통해 무려 1시간 13분간 박 씨의 기자회견을 내보내는 파격을 선보였다.북한 대남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도 1일 그를 ‘돌아온 탕자’에 비유하면서 “극적인 인생과 더불어 만인의 심금을 울려주는 저 화폭 앞에서 감히 누가 북 인권에 대해 떠들 수 있겠는가”라고 주장했다. 기자회견장에는 아들과 딸도 함께 복권돼 참석했다. 박 씨의 모험은 그가 북한의 선전용 제물이 되면서 일단 외형적으로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기자는 박 씨에게 피해가 갈 우려 때문에 취재한 상세한 내용 중 민감한 대목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일성대 졸업·2001년 탈북)}

세상을 바꾸는 정보기술(IT) 혁명의 불길이 세계에서 가장 폐쇄된 북한에도 거세게 불고 있다. 휴대전화가 100만 대 이상 팔리는 등 각종 최신 문명 기기들이 빠르게 보급되며 북한 사회가 서서히 변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27일 북한 IT 실태를 보여주는 사진들을 단독 입수했다.대북 소식통들과 탈북자들에 따르면 북한에는 최근 ‘삼지연’이라는 독자 브랜드의 태블릿PC가 보급됐다. 이 태블릿PC는 인터넷에 접속할 수는 없지만 백과사전, 외국어사전, 게임, e북, 지도서비스 등의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부품을 수입해 북한에서 조립한 것인지, 중국 기업이 제조해 북한에서 소프트웨어(SW)만 내장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주체(主體)’를 강조하는 북한이지만 이 태블릿PC에 내장된 소프트웨어 명칭은 모두 영어다. 한 탈북자는 “북한의 IT 용어는 거의 다 영어로 쓴다. 남쪽에 와서 오히려 전문 분야 SW가 한국말로 돼 있어 낯설었다”고 말했다.한 컴퓨터 매장을 촬영한 사진을 보면 미국의 HP와 델은 물론이고 대만의 에이서 제품이 판매되고 있다. HP 컴퓨터의 경우 판매가격은 61만5000원이다. 이는 북한 암시장 환율로는 150달러에 해당한다. 북한 돈 60만 원은 북한 일반 노동자 100년 치 공식 월급보다 많은 액수다. 그럼에도 평양시민의 절반 이상은 이 정도의 구매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비슷한 기능의 컴퓨터가 현재 한국에서 55만∼65만 원 선에 판매되고 있다. 북한 모 대학 강의실 사진을 보면 학생들의 책상에 LG전자가 생산한 모니터 수십 대가 놓여 있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북한에서 한국 브랜드의 TV나 컴퓨터는 더이상 낯선 제품이 아니다.북한이 2010년 말 도입한 전자결제카드는 한국의 현금카드와 유사한 기능으로 집적회로(IC) 칩과 카드번호 등이 국제사회에서 흔히 쓰는 것과 동일하다. 정식으로 보급한 제품은 아니지만 MP4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중국산 휴대용 DVD 재생기기도 전기 공급이 제한적인 북한에서 한 번 충전으로 영화 한 편 이상을 볼 수 있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당국의 불시 가택수색을 피해 숨기기 쉬워 한국 드라마 등 외국 영상물 보급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각종 IT 기기의 유입은 ‘조선이 없는 지구는 없다’는 북한 당국의 주장과 달리 북한도 결국은 지구의 한 국가임을 보여주는 사례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우리가 아는 평양은 출신 성분이 좋은 충성계층이 모여 사는 도시이다. 평양에는 배급과 전기 공급, 살림집 건설 등 지방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특혜가 집중돼 왔다. 북한은 ‘평양공화국’과 그들을 먹여 살리는 ‘지방공화국’으로 나뉜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굶주린 지방에서 정권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도 평양시민들은 정권에 충성을 다할 것이고 지방에서 봉기가 일어나도 평양은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외부에서 바라보는 상식이다.과연 그럴까. 과거엔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평양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변하고 있다.평양의 생활수준은 지방에 비해 매우 높다. 배급제 붕괴 후 대외무역과 뇌물 상납으로 부를 쌓은 사람들이 평양에 모여 있다. 이는 사회주의 제도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북한이 더 부패해지길 바라고 배급제 시절로 돌아가길 가장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평양시민들이다.평양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려면 컴퓨터, 휴대전화, DVD플레이어가 필수적이다. 이런 기기들은 정보 유통을 가속화하고 외부 문명을 빠르게 보급시킨다. 북한에서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가장 많이 보급되고 한국 문화를 가장 많이 모방하고 있는 곳이 바로 평양이다.해외에 나가는 외화벌이 노동자의 80% 이상도 출신 성분이 좋은 평양시민 중에서 뽑힌다. 지난해 중국을 방문한 북한 주민 15만 명의 대다수는 평양시민들이다. 외부세계를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전근대적 시스템에서 살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깨닫게 된다.당국의 통제가 가장 먹히지 않고 가장 자유분방한 도시도 다름 아닌 평양이다. 생활총화나 강연회 같은 과거 주민 세뇌를 위한 회의들도 평양에선 이미 돈만 내면 쉽게 빠질 수 있는 형식상 의례가 된 지 오래다. 주민 수탈이 가장 어려운 곳도 평양이다. 과거 김정일이 지시했다는 각종 ‘수탈 금지 방침’을 방패처럼 내밀며 저항하는 데다 권력층이 많아 강제로 빼앗기도 어렵다.하지만 지방의 변화는 평양에 비하면 매우 굼뜨다. 평양에 살다 몇 년 전 지방으로 이주했던 한 탈북자는 “배급이 끊긴 지 오랜 지방에서 오히려 과거 사회주의적 시스템이 더 잘 유지되는 데 깜짝 놀랐다”라고 말했다. 회의가 꼬박꼬박 열리고 각종 노력동원과 무리한 수탈도 큰 반항 없이 집행되고 있었단다. 아마 평양에서 그랬다면 당장 거센 반발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지방 주민들에겐 외부세계가 어떻게 사는지 깨달을 수단과 능력도, 자신을 억누르는 간부들에게 맞서 반항할 힘도 없다. 그저 3대 세습은 당연한 일이고 대를 이어 충성해야 하며 정권에 불만을 터뜨리면 당연히 감옥에 가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북한에선 진짜 공산주의자는 농촌에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하긴 당장 내일 굶어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겐 먹을 것 이외의 생각은 사치다.위의 탈북자는 “내가 본 평양시민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살길을 찾아 도망갈 사람들이지만 오히려 지방 사람들이 나라를 지킨다며 목숨 걸고 싸울 것 같았다”라고 고백했다. 평양의 충성심은 역설적으로 평양에 베풀어진 과도한 특혜가 좀먹어 버리고 있다. 최근에도 북한은 해외에 대규모 인력파견을 시작했다. 이 역시 최대 수혜자는 평양시민들이 될 것이다. 충성심이 사라진 평양의 다음 모습을 관찰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주성하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

북한 김정은 정권이 경제개혁을 위해 내각에 특별조직을 신설하고 부총리급 인사를 책임자로 임명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정은 정권이 2000년대 초 ‘경제관리 개선조치’와 같은 비중 있는 경제개혁을 시행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가속화하는 첫 경제개혁 준비중국의 정통한 대북 소식통들은 25일 “북한 김정은(노동당 제1비서)의 특별 지시에 따라 올해 초 내각 산하에 ‘경제관리방식 개선을 준비하는 소조’(개선소조·추정 명칭)가 꾸려졌고 노두철 부총리(사진)가 조장”이라며 “북한 내부에서는 이르면 8, 9월에 경제개혁 방안이 나온다는 기대가 높다”고 밝혔다. 또 다른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은 경제문제 해결에 적극적 자세를 갖고 있다”며 “경제와 관련해 내각의 권한과 책임이 대폭 강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주중 한국대사관의 분석 결과 올해 1∼5월 5개월 동안 최영림 내각 총리는 41회의 경제 관련 시찰을 다녔다. 지난해 같은 기간(9회)에 비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 이에 앞서 13일 조선중앙TV는 평양에 있는 인민대학습당에서 26일 오후 4시 ‘사회주의 경제관리 방법을 개선하는 데서 나오는 몇 가지 문제’라는 주제로 김일성종합대 염병호 박사의 강의가 열린다고 보도했다. 특히 북한은 지난해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이후 나흘밖에 되지 않아 국상(國喪) 기간이었던 지난해 12월 21일 무려 7개의 경제법령을 개정했다. 이 법령은 외국인 투자유치 정책에 관한 것들이다. 개선소조 조장에 임명된 노 부총리는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2003년 북한 다른 간부에 비해 비교적 젊은 나이인 59세에 부총리로 발탁됐다. 2009년에는 국가계획위원장까지 겸직해 사실상 경제담당 부총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노 부총리는 북한에서 실력파 간부로 인정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경제개혁 책임자로 발탁된 것은 경제 분야를 총괄하면서 쌓은 경험을 평가받은 것으로 보인다. ○ 농업개혁이 핵심북한 경제개혁의 출발점이자 핵심은 무엇보다 농업분야다. 이 때문에 경제개혁 방안을 마련 중인 개선소조는 농업개혁을 심도 있게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대북 소식통은 “북한은 농민이 다수인 농업국가”라며 “경제개혁 중 농업개혁, 특히 농지의 사적 소유를 어디까지 인정해 농민의 자발성을 이끌어낼지가 핵심”이라고 밝혔다.전문가들에 따르면 북한 농업개혁 시나리오는 크게 3가지다. 먼저 현행 협동농장을 유지하면서 생산 과정 및 생산물 처리 등의 자율성을 크게 보장하는 것. 즉 국가는 협동농장에 과제로 할당한 생산물만 요구할 뿐 나머지는 농장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다. 2002년 7월 1일 ‘경제관리개선조치’를 농촌으로 연장하는 것과 유사하다. 당시 이 조치는 공장 및 기업소에 경영 자율성 부여 및 수익에 따른 분배 차등화, 임금 인상 등의 개혁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나타난 생산 증가 효과는 크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나마도 곧 조치 자체가 유야무야됐다.두 번째는 협동농장 대신 20명 안팎의 농장원으로 구성된 분조나 5, 6개 분조로 구성된 작업반 단위로 생산단위를 더 작게 나눠 자율성을 주는 것이다. 협동농장 책임제보다는 증산효과가 커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마지막은 중국과 같은 개인농 허용이다. 북한 일각에서는 부분적인 개인농 허용에 대해서까지 논의가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대북 소식통은 “중국도 개혁개방을 시작할 당시 농업국가였고 서서히 농지의 사적 소유라는 모험을 시작했다”며 “북한 내부는 파격적인 개혁정책을 기대하는 분위기”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많은 북한 전문가는 개인농 허용이 전면 도입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급격한 정치사회적 파장을 북한체제가 흡수하기 어렵고 공동소유인 농기계, 소와 같은 생산도구에 대한 분배도 어렵다.북한이 농업개혁을 실행에 옮긴다면 이는 북한체제에 커다란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0년 전의 7·1경제관리개선조치는 공장 기업소에 경영 자율성을 부여한다고 했지만 북한의 거의 모든 공장 기업소가 가동을 멈춘 상태에서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농업의 경우 땅과 인력만 있으면 생산물이 나오기 때문에 자율화를 어느 정도 보장하면 당장 생산물 증산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한 북한 전문가는 “아무리 낮은 수준의 조치가 취해진다 해도 변화를 갈망하는 북한 주민의 희망이 일부분은 충족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베이징=이헌진 특파원 mungchii@donga.com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신석호 채널A기자 kyle@donga.com}

미국 개신교계의 최대 교파인 남침례교가 167년 교단 역사에서 처음으로 흑인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했다. 또 교단 이름에 ‘남부’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도 함께 내렸다. 이 같은 조치는 ‘백인’과 ‘남부’로 표현되는 교단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적극적인 변화와 개혁을 이루겠다는 선언으로 풀이된다. 남침례교는 20일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에서 연차 교단 대의원총회를 열고 흑인인 뉴올리언스 소재 애버뉴 침례교회 프레드 루터 담임목사(55·사진)를 새 총회장으로 선출했다. 침례교회 내 남부파가 노예제도를 반대하던 북부와 결별하고 남침례교단을 조직한 1845년 이래 흑인이 수장을 맡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루터 목사는 총회장 수락연설과 기자회견에서 “소수인종에게 문을 활짝 열어 다 함께 하는 교회를 세우는 데 전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총회는 또 ‘남침례교’라는 교단 명칭을 ‘큰사명침례교’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각 교회에 부여하는 안건도 통과시켰다. 백인 중심의 보수적이고 배타성이 강한 ‘남부’의 부정적 이미지를 감안한 결정으로 보인다. 남침례교는 신자가 약 2000만 명으로 미국 개신교계 최대 교파다. 지난 10년간 개신교 내 다른 교파의 신자 수가 준 데 비해 남침례교는 오히려 신자 수가 늘어났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올 2월 아프가니스탄에서 꾸란을 태웠다가 현지의 대규모 항의시위를 촉발시켰던 미군 병사 7명이 형사 판결이 아닌 가벼운 행정 처벌만 받을 예정이다. 단순한 실수였다는 조사 결과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워낙 민감한 사안이어서 아프간 주민들의 분노가 이번 판결을 계기로 또다시 터져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AP통신 등 미국 언론들은 19일 미군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미군 수사당국이 사건에 연루된 육군 6명과 해군 1명에 대해 징계 처분을 권고했다고 보도했다. 조사 결과에 대한 최종 결정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지만 형사고발은 하지 않고 임금 삭감과 추가 업무수행 제한 등의 행정 처벌만 받게 될 것이라는 것. 이 병사들은 2월 아프간 카불 북부 바그람 공군기지에서 도서관의 낡은 책들을 폐기 처분하던 중 4권의 꾸란도 함께 소각장에 넣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분개한 아프간 주민들은 전국적인 항의시위를 벌였고 미군 병사들에 대한 공격도 잇따랐다. 그 결과 최소 6명의 미군 및 군사고문, 수십 명의 아프간 병사가 숨졌고, 시위대 수십 명도 목숨을 잃었다. 사건 발생 직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각 군 사령관이 수차례 사과성명을 신속하게 발표했다. 그럼에도 미 당국은 이 사건이 유감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현지 문화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실수에 불과하다는 방침을 견지했고 관련자 처벌에서도 그러한 방침을 고수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17일 실시된 그리스 2차 총선에서 제1당으로 부상한 신민당의 안도니오 사마라스 당수는 20일 “신민당과 사회당, 민주좌파 등 3개 정당이 연합해 내각 구성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신민당의 129석과 사회당의 33석, 민주좌파의 17석을 합하면 새 정부는 총 179석을 확보해 전체 의석 300석 중 과반을 차지하게 된다. 사마라스 당수는 이날 오후 4시 카롤로스 파풀리아스 그리스 대통령과 만나 정부 구성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음을 보고한 뒤 총리로 공식 임명됐다. 사마라스 신임 총리는 연정 구성이 타결된 뒤 가까운 시일 내에 유럽연합(EU)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중앙은행(ECB)과의 구제금융 조건 재협상을 공식 요청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그리스 연립 정부 구성 소식에 뉴욕 증시 등 세계 주요 증시는 일제히 상승세를 나타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유럽 5개국 순방에 나선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 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66)가 14일 첫 방문지인 스위스에서 기자회견 도중 탈진해 보좌관의 부축을 받으며 회견장을 떠났다. 이날 디디에 부르크할터 스위스 외교장관과 함께 기자들과 만나 웃음 띤 표정으로 앉아서 이야기를 하려던 수치 여사는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며 “4시간 반 시차에 적응하지 못해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라고 말했다. 이어 책상 아래로 허리를 숙여 달려온 보좌관과 잠깐 이야기를 나눈 그는 기자회견을 중단했다. 보좌관의 부축을 받으며 회견장을 떠난 수치 여사는 이날 저녁에 예정된 만찬도 취소했다. 하지만 수치 여사는 15일 오전 스위스 연방의회를 방문하는 등 예정된 일정을 다시 시작했다. 수치 여사는 3월에도 총선 유세 중 탈진과 구토증세를 보여 3일 동안 집에서 쉬었다. 수치 여사는 14일부터 2주간의 일정으로 스위스 아일랜드 프랑스 영국 노르웨이를 방문한다. 그가 유럽을 찾은 것은 24년 만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시리아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 학살이 갈수록 잔혹해지고 확산되면서 학살의 행동대로 나선 친정부 민병대 ‘샤비하’의 실체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민간인을 상대로 AK-47소총을 난사하고 날이 넓은 칼인 마체테를 휘둘러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고 있다.샤비하는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 보호를 위해 육성된 친위 민병대 조직으로 약 6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지난달 25일 어린이 49명을 포함해 민간인 108명이 학살당한 ‘훌라 대학살’ 직후 생존자들이 학살을 자행한 사람들이 정부군이 아니라 군복에 하얀 운동화를 신은 민병대 샤비하라고 전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시사주간 타임에 따르면 샤비하는 시리아 내 소수 종교분파이자 알아사드 가족이 속해 있는 알라위파 젊은이들로 구성돼 있다. 알아사드 대통령의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 집권 시기인 1970년대 말부터 1980년 초 서부 라타키아 지방에서 마약, 디젤차량, 전자기기 등의 밀수업을 통해 성장한 조직으로 상인들에게 보호세 명목으로 돈을 강탈하는 등 지역 마피아로 악명을 떨쳤다.샤비하라는 이름은 유령이라는 뜻의 아라비아어 ‘샤바’에서 유래했다. 고급 외제차가 드물던 당시 시리아에서 ‘샤바’라는 별칭으로 불린 독일 고급 승용차 ‘메르세데스벤츠 600’을 몰고 다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슬람 수니파가 다수인 시리아에서 소수 시아파의 분파인 알라위파는 전체 인구의 12%에 불과하다. 이들은 서부 산악지대에서 가난하게 살며 수니파에게 멸시와 학대를 받아왔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후 시리아를 점령한 프랑스가 수니파의 반란을 막기 위해 알라위파를 군에 대거 기용하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당시 군 요직에 진출한 하페즈 전 대통령도 이를 기반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후 알아사드 정권은 다수 수니파를 통제하기 위해 샤비하를 정권의 비호세력으로 키웠다. 미국 오클라호마대의 시리아 전문가 조슈아 랜디스 씨는 “이들은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로 천대받다가 알아사드의 대리인이 돼 지금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며 “어느 누구도 대들 수 없다”고 설명했다.영국 텔레그래프가 입수한 샤비하 사진을 보면 이들은 대부분 근육질의 건장한 남성들이다. 라타키아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 모사브 아자위 씨는 “그들은 마치 괴물 같다. 대부분 거대한 근육과 턱수염을 가졌으며 키가 크고 위협적이다. 이들은 근육을 키우기 위해 스테로이드 약품을 복용하기도 한다”고 했다. 검은 티셔츠와 군복바지 차림인 이들 중에는 알아사드 대통령의 얼굴을 문신으로 새겨 충성을 보이는 남자들도 있다.주애진 기자 jaj@donga.com}

탈북자들에 대한 태국 주재 한국대사관 여직원들의 욕설과 반말 파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현지 외교관과 국가정보원도 이미 그 같은 실태를 일부 파악하고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지난해 5월 태국 이민국 수감시설 내의 탈북자들 감방에서 방장을 맡았던 A 씨는 13일 동아일보 기자에게 “지난해 6월 한국에 도착해 (국정원)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태국에서 여직원들에게 당한 수모와 현지 감방 실태에 대해 얘기해줬다”고 말했다. 같은 시기에 태국 감방에 있었던 탈북자 B 씨는 “지난해 5월 대사에게 항의 편지를 썼다. 그후 현지에 파견돼 있는 정보기관원이 찾아왔다. 그는 사과를 하고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이 그런 고발을 한 이후에도 여직원들의 폭언은 계속 이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해외공관 직원들이 탈북자들에게 폭언을 하거나 무성의하게 대한다는 폭로는 수년 전부터 국군포로 출신을 비롯해 사회적으로 주목받은 탈북자들의 입을 통해 간헐적으로 제기돼왔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문제의 여직원들은 스스로를 ‘선생님’이라고 지칭하면서 사실상 ‘간수’처럼 탈북자들을 징벌했다는 증언들도 잇따르고 있다. 외교통상부는 13일 여직원들의 업무는 탈북자 신원조사와 한국어 통역 지원에 국한돼 있다고 밝혔지만 이들이 부여된 업무 이상의 권한을 행사해온 것으로 보인다.지난해 12월 태국 수감시설에 있었던 C 씨는 “여직원들이 나타나면 누워있던 할머니를 비롯해 모든 여성이 꼿꼿이 정좌자세를 취해야 했고 목욕하다가도 황급히 뛰쳐나와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선생님 앞에서 태도가 불손하다’고 나이를 불문하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주장했다.탈북자 D 씨는 “한국에 입국해서 하나원에 입소한 뒤 앞짐을 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면서 “태국에서 그 여직원들 앞에서 차렷 자세로 있지 않고 앞짐을 지면 욕설을 들었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선 앞짐이 욕을 먹는 일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수감시설에 있었던 E 씨는 이 여직원들이 탈북자들이 맨발로 생활하는 감방에 신발을 신고 드나들었다고 주장했다.태국 이민국에선 남성 탈북자와 여성 탈북자가 분리돼 있는데 간혹 3일에 한 번 돌아오는 쇼핑날에는 수감시설 내 슈퍼를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E 씨는 “한번은 아들과 함께 왔다 분리 수감된 한 어머니가 슈퍼에 갔다 아들을 우연히 만나게 됐는데 단지 멀리서 지켜봤다는 이유로 여직원이 그 여성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고 연대 책임으로 함께 왔던 여성들까지 늦게 한국에 보내겠다 위협했다”고 증언했다. 감방에 많을 때는 200여 명 넘게 수용돼 있다 보니 누울 자리조차 없어 탈북자끼리 자리싸움을 벌이고 감정이 격해지는 일도 많다. 2010년 여름 탈북여성끼리 싸우던 중 한 여성이 거울조각을 들고 다른 탈북자를 찔러 사망하게 한 일도 벌어졌다. 이때 피가 감방 벽과 천장에 튀었는데 1년 넘게 지난 지난해 12월 당시까지 피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기자가 인터뷰한 탈북자 가운데 8명이 주장했다.E 씨는 “탈북자들 사이에선 ‘그걸 쳐다보고 교훈을 얻게 하기 위해 지우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 돌았다. 하지만 여직원들이 실제로 그런 지시를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탈북자들이 한국에 입국하기 전 거치는 동남아 국가 중 한 곳인 태국의 한국대사관 여직원들이 탈북자들에게 반말과 욕설을 일삼아왔다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현지 대사관은 계약직인 이 여직원들에게 불법 입국 혐의로 태국 이민국 산하 구금시설에 수감된 탈북자들의 관리를 맡겨왔다.북한 고위급 간부 출신인 한 80대 탈북자 A 씨는 12일 동아일보 기자에게 “지난해 5월 20대 중반의 여직원으로부터 ‘야, 너 여기 왜 들어와 있어’ 등의 말을 듣고 억울한 마음에 대사에게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으나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고 주장했다.같은 시기에 수감돼 있었던 50대 탈북자 B 씨는 “A 씨가 비좁은 공간에서 더위에 견디지 못해 결핵 환자가 격리돼 있던 방에 들어가자 한 여직원이 100여 명의 다른 탈북자 앞에서 A 씨에게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퍼부었다”고 회상했다.B 씨는 “대사관 여직원들은 탈북자들을 나이 불문하고 늘 반말과 욕설로 대했다”며 “나는 감방 비품을 마음대로 옮겼다는 이유로 같은 방에 있던 아들과 헤어져 흑인 구금자 등이 수감돼 있는 외국인 감방으로 옮겨져 보름이나 있었다. 대사관 여직원으로부터 ‘대한민국이 너 같은 쓰레기를 받는 곳은 아니다’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주장했다. B 씨는 “목숨 걸고 자유를 찾아왔는데 딸 나이 정도의 여성에게서 ‘야, 너’라고 불리며 일방적으로 하대를 받아 죽고 싶었다”고 말했다. B 씨의 아내는 “수모를 견디기 힘들어 ‘차라리 한국에 안 가겠다’고 하자 ‘그럼 평생 감옥에 갇혀 있으라’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이들과 다른 시기에 수감된 탈북자들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비슷한 주장을 했다. 지난해 3월 수감돼 있었던 탈북 여성 C 씨는 “여직원들이 나타나면 수백 명의 탈북자가 모두 일어나는 등 예우를 해주었다”면서 “남성 직원 2명은 탈북자들을 점잖게 대하려 노력했지만 여직원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말했다.한 여직원은 학력 경력 등 신상자료를 쓰는 어머니뻘의 탈북 여성에게 서류를 집어던지며 “그 나이 먹도록 글도 제대로 못 쓰냐”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C 씨는 주장했다. C 씨는 “이들이 왔다 가면 감방이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얼어붙지만 반항하면 처벌로 한국 입국일이 늦어져 비좁은 감방에 그만큼 오래 있어야 해 어쩔 수 없이 참고 지냈다”고 말했다.▼ 탈북자 관리, 외교관 대신 계약직에 맡겨 논란▼ 전문지식-소양 의문… 대사관 “욕설 사실무근”지난해 9월 수감돼 있었던 탈북 여성 D 씨는 “한국에 가려고 어쩔 수 없이 반말과 폭언을 참고 있었고 한국이라는 나라는 원래 그런가 하고 생각했는데 한국에 와보니 정말 말도 안 되는 학대를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여직원들은 사선을 헤쳐 온 탈북자들이 만나게 되는 한국의 첫 얼굴이다. 그런데 따뜻하게 맞아줄 줄 알았던 한국의 아가씨들이 북한 보위부원 못지않은 반말과 욕설로 맞이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고 덧붙였다.탈북자 E 씨는 반말과 인격 모독이 일상화되자 탈북자들이 “이럴 바에는 차라리 북으로 다시 돌려보내 달라”고 항의했다고 주장했다.이 같은 주장에 대해 주태국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간혹 오해는 있을 수 있지만 탈북자들을 최대한 배려해주고 친절하게 맞아주려 노력하기 때문에 반말이나 욕설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부인했다.탈북자들의 이 같은 주장은 올 2월 탈북자 강제북송 반대여론이 확산되기 이전의 상황에 대한 것이다. 탈북자들은 한국에 입국해도 몇 달간의 조사와 3개월의 하나원 과정을 거쳐야 사회에 나오기 때문에 올 들어 동남아 수감시설에 있는 탈북자들을 대하는 현지 공관 직원들의 태도가 어떤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인할 수 없다.주태국 대사관 관계자는 탈북자들이 폭언 당사자로 지목한 여직원들이 지금도 근무 중이라고 말했다. 이 여직원들은 현지공관이 채용한 계약직 행정원 신분으로 준공무원의 처우를 받고 있다고 외교통상부는 설명했다. 이들이 국가 간의 민감한 외교사안인 탈북자 문제를 처리하는 데 요구되는 전문지식과 소양을 교육받았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외교관이 다뤄야 할 탈북자 처리를 계약직 직원에게 맡기는 것은 탈북자 문제에 대한 외교부의 안이한 자세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중국을 거쳐 동남아 국가로 입국한 탈북자들은 해당 국가에서 불법 밀입국자로 이민국 구금시설 등에 잠정 억류되어 있다가 한국에 온다. 태국을 통해서도 매년 1000명 이상의 탈북자가 들어오고 있다.외교부 조병제 대변인은 “문제의 여직원들로 지목된 사람들에게 확인 조사했는데 절대로 그런 적이 없다고 한다”며 “지금까지 우리의 판단은 탈북자들이 과장된 진술을 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뒤 시신을 감쌌던 수의로 알려져 진위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토리노의 수의’가 중세 때 만들어진 가짜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교회 사학자 안토니오 롬바티 교수(포폴라레대)는 “토리노 수의는 수세기 동안 예수의 것으로 숭상받아 왔지만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한 지 1300년가랑 흐른 뒤인 14세기경 터키에서 만들어진 가짜”라며 “토리노의 수의는 중세 기독교 국가들에서 유포됐던 수많은 수의 가운데 하나일 뿐으로 당시에는 이런 유의 수의가 40개나 있었다”고 발표했다고 영국 데일리메일이 10일 보도했다. 롬바티 교수는 “대다수 수의는 프랑스 대혁명 때 파손됐다”며 “이들 중 일부에는 어떤 형상이 그려져 있었고 일부는 혈흔과 비슷한 얼룩도 있었지만 나머지는 순백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옥스퍼드대에서 1988년 실시한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실험에서도 토리노의 수의는 1260∼1390년에 제작됐다는 결과가 나왔다. 1898년 이탈리아 사진가 세콘도 피아가 왕의 허락으로 이 수의를 촬영했다가 촬영 원판에 칼로 찔리거나 고문을 당한 것으로 보이는 알몸 상태로 수염이 난 남자의 앞모습과 뒷모습 형상이 나타나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수의가 진짜라고 믿는 사람들은 예수의 형상이라고 주장했다. 수의를 보관하고 있는 이탈리아 토리노성당이 2010년 44일간 공개했을 때 무려 213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갔다. 한편 바티칸 당국은 수의가 진품인지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언급한 바 없으며 과학자들에 한해 실험용 샘플을 제공해 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페루에서 한국인 8명 등 승객 14명을 태우고 비행하다 6일 실종된 헬리콥터의 위치가 페루 공군에 의해 파악됐다. 그러나 헬기를 동원한 해당 지역의 수색작업은 현지 기상 악화로 중단됐다. 주페루 한국대사관의 김완중 공사는 7일 “페루 공군이 실종 헬기에 장착됐을 것으로 보이는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장치가 보내는 신호의 좌표를 찾아냈다”며 “위치는 실종 헬기의 출발지인 마수코와 도착지인 쿠스코 사이”라고 밝혔다. 김 공사는 “7일 오전 11시경 신호를 추적하기 시작해 실종된 지 약 23시간 만인 오후 4시경 정확한 좌표를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페루 공군이 잡아낸 GPS 신호의 좌표는 ‘와야와야’로 불리는 지역으로 남부 잉카유적지인 쿠스코에서 60km가량 떨어져 있고 고도가 4725m에 달하는 고산 밀림지대다. 현지 경찰은 7일 오후 2시 50분경 헬기를 띄워 이 일대를 수색했지만 실종 추정 지역에 구름이 잔뜩 낀 데다 진눈깨비마저 내려 수색을 시작한 지 몇 시간 만에 헬기를 철수시켰다. 육상에서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는 경찰들도 30cm 이상 눈이 쌓여 있어 현장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현지 기상이 8일 오전(한국 시간 8일 저녁)부터 좋아져 집중적인 수색이 재개된 것으로 알려졌다. 실종 헬기에는 삼성물산 등 한국인 기업체 직원 8명과 외국인 직원 1명, 조종사 등 모두 14명이 탑승했다. 실종 헬기에 탑승한 한국인 8명은 6일 오전 마수코에서 수력발전소 건설 후보지를 시찰한 뒤 오후 4시 반경 헬기를 타고 쿠스코로 복귀하던 중 이륙한 지 1시간 만에 관제소와 교신이 끊긴 채 실종됐다. 페루 당국은 실종자들의 휴대전화로 연락을 시도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현지에서는 기체가 추락할 경우 나오는 자동신호 발사가 감지되지 않아 헬리콥터가 비상착륙을 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실종자들이 살아 있을 가능성도 보인다. 문제는 춥고, 먹을 것도 없는 고산지역에서 실종된 지 이틀이 지난 상태여서 실종자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빠른 시간 안에 구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고 헬기는 14, 15명이 탑승할 수 있는 일명 ‘시코르스키’로 불리는 ‘S-58ET’ 기종으로 1975년에 제작돼 37년이나 운행된 노후 헬기로 확인됐다. 1990년 엔진을 새것으로 교체한 전력이 있지만 그동안 사고 이력은 없다. 실종 헬기를 운용해 온 ‘헬리쿠스코’사는 1990년대 설립된 소규모 헬기 관광업체로 남부 쿠스코 등에 사무소를 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지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이 헬기가 사고가 난 적은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기체 결함보다는 기상악화로 추락 또는 불시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2009년 숨겨두었던 아들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었던 가톨릭 사제 출신의 파라과이 대통령에게 또 다른 숨겨진 자식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페르난도 루고 대통령(61·사진)의 변호사인 마르코스 파리나 씨는 5일 “루고 대통령이 과거 북부 산페드로 주에서 가톨릭 사제로 활동하던 시절 아들을 낳은 사실을 인정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외신은 전했다. 이 같은 사실은 42세의 한 여성이 “지금까지 루고 대통령으로부터 양육비를 지원받았으나 2개월 전부터 대통령 측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언론에 고발하면서 알려졌다. 이 여성은 “10년 전 남편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루고 사제를 만났다가 아들까지 낳았다”고 주장했다. ‘빈자의 아버지’라는 이미지를 업고 2008년 4월 당선된 루고 대통령은 지금까지 ‘숨겨진 자식’과 관련해 4명의 여성으로부터 소송을 당했다. 이 중 두 명은 유전자(DNA) 검사 결과 친자가 아닌 것으로 판명 났다. 하지만 루고 대통령은 2009년에 당시 26세 여성이 제기한 소송에 대해선 그녀의 두 살짜리 아들을 자식으로 인정했다. 특히 주교의 신분으로 그 여성이 미성년자였던 16세 때부터 성관계를 맺어온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더욱 커졌다. 루고 대통령은 2008년 사제직을 떠났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지난달 미국 의회에서 북한인권법을 5년 연장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2004년 제정된 이 법은 2008년에 한 번 연장된 뒤 이번에 또 한 번 연장됐다. 한국 국회에서 북한인권법안이 두 번 폐기되고 최근 3번째로 발의된 것과는 비교된다. 하지만 미국의 북한인권법이 상징적 차원을 넘어 8년간 어떤 실질적 변화를 가져왔는가를 따져보면 실망스럽기 그지없다.북한인권법 채택 이후 미국이 받아들인 탈북자는 지난달 중순까지 불과 129명. 매년 평균 20명도 안 되는 셈이다. 지난해 10월부터 올 5월 중순까지 8개월 동안 북한인권법에 따라 미국에 정착한 탈북자는 고작 5명이다. 미국은 매년 전 세계에서 수만 명의 난민을 받아들이지만 정작 탈북자에 대해서는 적대국가에서 왔다는 이유로 까다로운 난민승인 심사를 벌여 절차가 수년씩 걸리기 예사다. 이 때문에 미국으로 가려다 포기하고 한국에 온 탈북자가 허다하다. 한국은 2004년 이후 1만7000명이 넘는 탈북자를 받아들였다. 미국이 북한인권법에 따라 매년 2400만 달러씩 책정한 예산이 과연 몇 %나 쓰였는지, 북한인권특사가 어떤 성과를 만들었는지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2006년 북한인권법을 제정한 일본 역시 뭘 했다고 내세울 만한 게 없다.미국과 일본에서 떠들썩하게 북한인권법이 통과될 때 큰 기대를 가졌던 탈북자들이지만 아직도 그 기대를 품고 있는 사람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최근 새누리당의 몇몇 의원이 발의한 북한인권법도 미국과 일본의 전례를 참고해야 한다. 외교통상부에 북한인권대사를 만들면, 혹은 통일부 장관이 북한인권 기본계획을 세우면 북한의 열악한 인권이 얼마나 개선될지는 아무도 모른다.새누리당의 북한인권법에 대응해 민주통합당은 교류 협력과 인도적 지원을 강조하는 법안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렇다면 사실 해법은 그리 어렵지도 않다. 새누리당도 교류 협력과 인도적 지원은 반대하지 않는다. 민주당 인사들도 북한인권의 심각성에 대해선 공감한다. 그러면 두 당이 서로 타협해서 뺄 건 빼고, 보충할 건 보충해서 교류 협력과 인도적 지원도 하고 북한인권 개선을 위한 실질적인 지원도 하는 법안을 만들면 되는 일이다. 타협 없이 내 것만 옳다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정쟁에 국민은 질렸다.새누리당 일각에서 북한인권법 찬성 여부를 종북 검증의 잣대로 삼으려는 움직임에 대해선 더구나 납득할 수 없다. 과거 한나라당이 북한인권법 통과에 팔짱을 끼고 있었던 사실을 국민은 망각하지 않았다.북한인권법 제정 못지않게 시급한 것은 제대로 된 북한인권기록보존소의 설립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만 제대로 운영돼도 북한 인권침해의 가해자들을 크게 위축시킬 수 있다고 본다. 북한 인권침해 사례를 최초로 기록하기 시작한 민간단체인 북한인권정보센터의 연구원들은 9년째 박봉 속에서도 고군분투하며 엄청난 자료를 축적해 놓았다. 솔직히 이런 활동을 북한인권법이 없어서 지원하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국회에서 법안 하나가 통과된다고 북한인권이 갑자기 좋아질 순 없다. 정부와 민간의 의지와 다각적이고 꾸준한 실천 활동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슬프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 가지 사례만 들어보자. 미국의 대통령은 여러 번 탈북자들을 백악관에 초청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남쪽에 온 탈북자가 2만4000명에 이르는 동안 그들을 만나 가슴 아픈 이야기에 귀 기울여준 대통령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주성하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

임수경 의원. 저는 탈북자의 한 사람입니다. 당신이 탈북자들을 향해 던진 욕설을 듣고 저도 처음엔 분노했습니다.하지만 지금은 당신을 불쌍히 여깁니다. 제가 보기엔 당신은 참 비운의 여인입니다. 세운 ‘공’에 비해 이처럼 바가지로 욕먹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3년 전 저는 ‘’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 저는 당신을 ‘북한 주민들의 정신적 해방에 큰 기여를 한 공로자’라고 했습니다. 당신의 목적이 무엇이었든 북한 주민들은 ‘탈남(脫南)’한 당신을 통해 한국의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1980년대 말 북한 사람들이 아는 남조선은 ‘헐벗고 굶주리는 미제의 식민지’였습니다. 사람 못 살 그러한 곳에서 청바지에 면티를 입고 날아온 당신의 모든 행동과 발언은 너무나 거리낌 없었고 독재 사회에서 기죽여 살아온 흔적이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남한 당국이 판문점을 통해 돌아가겠다는 당신의 요구를 수용해준 것은 상상 못할 일이었습니다. 당신이 분단선을 넘는 날 북한 주민들은 슬퍼했습니다. 저 정도의 ‘대역죄인’이라면 8촌까지 멸족될 것이라는 것이 북한 주민들이 유일하게 아는 상식이었습니다. 심지어 한국을 누구보다 잘 아는 대남 담당 기자들도 서울을 방문했다가 당신의 집을 불시에 찾아갔습니다. 임수경의 가족이 무탈하게 살고 있다는 한국 언론의 보도를 그들조차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피해는커녕 북한 중앙당 간부들보다 더 풍요롭게 잘사는 당신 가족의 모습을 북한방송을 통해 지켜보면서 북한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재판을 받는다는 소식, 감옥에서 조카에게 썼다는 편지, 그리고 3년 만에 석방됐다는 소식을 신문을 통해 접하면서 북한 주민들은 남조선이 당국의 선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임을 알았습니다.당신이 감옥에서 석방된 지 2년 뒤부터 북한은 수많은 아사자를 낸 고난의 행군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수십만 명이 탈북했습니다. 사실 탈북자들을 변절자라고 한다면 당신은 그들이 변절하는 데 아주 지대한 공을 끼친 일등 공신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평양에 왔을 때 10대였던 저는 당신을 보면서 처음으로 당국의 선전에 의문을 품게 됐고 결국 훗날 탈북해 한국에까지 왔습니다.북한 주민들은 당신을 보면서 남조선이 파쇼독재 국가가 아님을 알았는데, 당신은 지금도 한국이 독재국가라 주장하는 이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보고 탈북까지 했는데, 당신은 탈북자들에게 변절자라고 합니다.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습니까. 이제 반대로 당신에게 우리 탈북자들을 보면서 생각을 바꾸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탈북자에게 입힌 상처 말로는 못 씻어 北참상에 진정 가슴 아파해야 용서받아” ▼당신은 국회에 입성하자마자 개성공단 방문 신청서를 냈지요. 꼭 북한에 가길 바랍니다. 당신에게 ‘통일의 꽃’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준 북한 대남부서는 지금까지도 남쪽을 ‘반통일 파쇼독재’라고 끊임없이 비난하고 있습니다. 파쇼독재하에서 누구보다 탄압을 받아야 할 당신이 국회의원이 되고, 반통일 정권이 당신이 국회에 입성하자마자 북에 보내주는 것을 보면 북한 당국의 백만 마디 비난이 무색하게 될 것입니다. 가서 직접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실태를 몸으로 생생히 보여주길 바랍니다.당신이 지금 대중의 비난을 받는 이유는 역사가 당신에게 부여한 사명과 다른,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반대쪽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박수 받아야 할 사람들을 미워하고, 함께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추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라도 당신이 자기가 설자리를 깨닫는다면 당신을 포위하고 있는 한 줌의 북한 추종 세력에게서 풀려나는 대신에 남북 수천만 대중의 박수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이 그랬듯이 북한이 탈북자들도 원할 경우 판문점을 통해 돌아갈 수 있는 곳으로, 재판도 받고 감옥에서 편지도 쓰는 곳으로, 더 나아가 전근대적 연좌제가 철폐된 곳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은 당신에게도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탈북자들에게 입힌 상처는 미안하다는 말로 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숨 걸고 탈북한 용기를 격려하고, 독재와 세습 아래 굶주려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의 참상에 가슴 아파하고 그들을 그렇게 만든 자들에게 함께 분노한다면 그때는 탈북자들이 당신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현충일인 6월 6일은 북한에선 조선소년단 창립일이다. 해마다 이날이 되면 북한의 각 학교들은 체육대회를 열거나 소풍을 간다. 그런데 창립 66주년인 올해는 사상 최대 규모로 다양한 행사가 열릴 예정이어서 주목된다.조선소년단은 일반적으로 만 7세경부터 의무적으로 가입해 14세까지 활동하는 학생조직으로 목에 맨 붉은 넥타이가 상징이다. 소년단 가입을 통해 북한 어린이들은 처음으로 조직생활을 시작한다. 북한은 3일부터 8일까지 6일간 전국에서 무려 2만 명의 소년단 대표를 평양으로 불러 모아 역대 최대 규모로 소년단 창립 66주년 행사를 열 예정이다.북한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나진시 소년단 대표들은 김정은 동지께서 보내주신 사랑의 특별 비행기를 타고 왔다”거나 “행사 준비가 모두 끝났다”고 연일 보도하고 있다. 열악한 북한 교통편을 감안할 때 소년단 대표 이송으로 당분간 일반 주민의 이동은 제한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김정은이 유원지와 동물원 시찰에 나섰던 배경도 소년단 행사에 참가한 학생대표들에게 다양한 행사를 보여주기에 앞서 점검차 방문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광산 채탄공의 아들, 벌목공의 아들, 염소 방목공(목동)의 아들, 평범한 농민의 자녀와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 심지어 전과자의 자녀도 대표로 선출됐다”고 북한 매체들이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는 것은 눈에 띄는 대목이다. 이전까지는 평양에서 학생 행사를 하면 주로 간부나 부잣집 자녀들이 대표로 참가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김정은 체제가 과거에 비교적 홀대했던 학생 축제를 성대히 여는 이유는 북한 체제의 세대교체가 빨리 진행되고 있으며 신세대들의 국가와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김정은이 계급 출신에 관계없이 차별 없는 통치를 하겠다는 의지를 선전함으로써 새 지도자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현재 소년단원은 1998년부터 2005년 사이 태어난 학생들이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이후에 출생한 이 세대는 김일성의 통치는 경험하지 못한 세대다. ▼ 배급제 붕괴로 장마당 세대 세뇌는 힘들듯 ▼부모들이 장마당에서 장사하는 것을 보고 자라난 이들 ‘장마당세대’는 개인주의가 강하고 어느 세대보다 황금만능주의도 팽배하다. 또 교육 시스템이 붕괴된 이후에 성장했기 때문에 조직생활에도 익숙하지 않다.17세에 군에 입대하는 북한에서 현재 14세인 소년단원은 3년 뒤 입대한다. 고난의 행군 기간 성장하면서 개인주의적 성향이 커지고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이 사라진 새 세대가 군에 입대하면서 북한군의 정신무장이 점차 무너지고 있다고 탈북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걸핏하면 상관에게 대드는가 하면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김정은은 체제를 지탱해줄 신세대의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것과 동시에 부모들의 마음을 잡으려는 포석으로 대규모 환심성 행사를 열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가 배급제도가 붕괴된 현 상황에서 장마당세대를 겨냥한 세뇌는 쉽지만은 않을 것으로 보인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