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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중 역사학계가 ‘일제 공동 항쟁사’ 연구에 나선다. 한국과 중국의 공동 항일 투쟁을 양국 학계가 함께 연구하는 것은 처음이다. 지난달 방한한 중국 시진핑 주석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제안한 ‘항일전쟁과 광복 70주년 공동 기념’에도 긍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시준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장은 지난달 25일 장이화(姜義華) 푸단대 교수를 만나 ‘일제침략에 대한 공동항전 연구’를 함께 추진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광복 직후 중국 공산화로 관계가 단절되면서 지금껏 항일투쟁에 대한 학술 교류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은 최근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세운 데 이어 시안에 광복군 제2지대 주둔지 표석을 건립하는 등 항일 공동전선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에 이미 착수한 상황이다. 장 교수는 중국 근현대사 권위자로 푸단대 종신 교수이며 이번 프로젝트에는 고려대에서 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쑨커즈(孫科志) 푸단대 교수가 합류해 양측 연구자의 다리 역할을 할 예정이다. 한 원장은 장 교수를 만난 자리에서 “시 주석의 제안대로 광복 70주년을 공동 기념하려면 양국이 일본과 맞서 싸운 역사적 사실을 학술적으로 먼저 규명할 필요가 있다”며 “공동 연구팀을 만들어 내년부터 향후 5년간 자료를 함께 수집하고 연구총서를 발간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장 교수는 “임진왜란까지 포괄해 일본의 침략사를 전반적으로 다루자”고 추가 제안했다. 양측은 예산과 인력의 한계를 감안해 우선 일제 침략사에 집중하고 장기적으로 임진왜란까지 연구주제를 넓히기로 했다. 중국과 한국의 공동 항일투쟁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오랜 기간 전개됐다. 핵심 축은 한인들이 몰려 있던 만주지역이었다.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침략 당시 장쉐량(張學良)을 비롯한 이 지역 군벌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철수했다. 먼저 공산당과 내전에 힘을 집중하고 나중에 일제와 싸워야 한다는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주석의 지침에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만주지역 중국인들은 급한 대로 구국대와 자위대, 호로군 등 의용군을 조직했는데 정규군이 아닌 만큼 한인들과의 협력이 절실했다. 실제로 중국 공산당이 여러 의용군을 묶어 1936년 결성한 ‘동북항일연군’에 적지 않은 한인이 합류했다. 중국 국민당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했다. 장제스는 1943년 11월 카이로 선언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의 양자회담에서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등 외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 역시 1940년대 장제스에 쫓겨 옌안(延安)으로 근거지를 옮겼을 때 자신들의 점령지 안에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왔다. 북만주의 한국독립군과 남만주의 조선혁명군도 중국 측과 긴밀한 협조 관계를 맺었다. 한 국책 연구기관 관계자는 “일본 정부를 자극할 수 있는 만큼 국사편찬위원회 등 정부 연구기관이 나서는 것보다 민간 대학이 참여하는 게 적절할 수 있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연일 국내 최다 관객 기록을 세우고 있는 영화 ‘명량’이 관객 1600만 명을 넘어섰다. 이 영화의 투자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는 “24일 오전 8시를 기준으로 누적 관객 1604만8634명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지난달 30일 개봉 이후 26일 만이다. 영화계는 조만간 1700만 관객 고지도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명량’은 23일까지 총 1231억 원의 매출을 올려 할리우드 영화 ‘아바타’가 갖고 있는 국내 최대 매출액 기록(1284억 원)도 이번 주 중반 경신할 것으로 예상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인기 오락 TV프로그램인 ‘개그콘서트’는 코너당 최대 5분의 시간이 주어진다. 이 시간 안에 관객들을 웃기지 못하면 다음 방송분을 기약할 수가 없다. 전통적인 서사(내러티브) 방식으로는 도저히 승부를 걸 수 없고 순간순간 유머를 터뜨려야 살아남는다. 반면 1980년대 코미디 프로그램 ‘유머 일번지’는 서사식 콩트가 대부분이었다. 전후 맥락을 이해해야 웃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김형곤이 회장으로 출연한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은 비룡이라는 재벌그룹 회의실을 배경으로 정치, 사회 현상을 풍자해 눈길을 끌었다. 회장 역의 김형곤이 한 임원에게 “저거 처남만 아니면 (자르는 건데)…”라고 면박을 주는 장면은 ‘정실 인사’로 점철된 우리 사회를 은근히 꼬집는다. 유머 일번지에서 개콘으로 코미디의 코드가 바뀐 것처럼 이 책은 순간순간의 흐름에 집착하는 최근의 사회 문화적 흐름을 짚었다. 원제목 ‘Present Shock’는 미래학의 대표작인 앨빈 토플러의 ‘미래 쇼크(Future Shock)’를 교묘하게 비틀었다. 미래학자들이 상상한 미래가 이제는 현실이 되었는데, 정작 사람들은 눈앞에 쏟아지는 온갖 정보의 흐름을 쫓아가는 데 급급한 상황이다. e메일과 트위터 피드, 페이스북 업데이트 등이 스마트폰 알림을 통해 쉴 새 없이 우리 삶을 파고드는 사이 반성과 숙고는 잊혀져 간다. 전통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주된 수단이던 ‘스토리텔링’마저 들어설 여지를 주지 않는다. 저자는 “우리가 도달한 미래에서 스토리가 산산이 흩어졌으며 ‘현재 충격’의 징후를 겪기 시작했다”고 진단한다. 예컨대 범죄 과정은 물론이고 동기까지 찬찬히 규명하는 ‘셜록 홈스’를 대신해 살인이 벌어진 순간을 최첨단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연하는 미드(미국드라마) ‘과학수사대(CSI)’가 각광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플롯 사이의 개연성도 묻히기 십상이다. 큰 성공을 거둔 미드 ‘프렌즈’는 1회부터 같은 동네 커피숍에 우연히 모인 동갑내기들이 시시껄렁한 농담을 건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들이 왜 모였는지, 과거가 어땠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스토리가 형해화된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리얼리티 쇼’다. 정해진 각본이나 대사 없이 특정한 상황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카메라만 돌리면 된다. 여러 명의 작가와 배우들을 쓸 필요가 없다 보니 방송사는 비용을 아낄 수 있다. 그러나 시청자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기 위해 출연자 개인의 불행을 이용하는 등 프로그램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뉴스도 ‘현재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다. 24시간 실시간 뉴스를 공급하는 CNN이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을 날것 그대로 전달하자 정치권은 신속한 결정을 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정부는 특정 이슈를 진득하게 연구하지 못하고 임기응변으로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저자는 무엇보다 정보기술(IT)이 자아를 분열시키는 ‘디지털 분열’을 우려한다. 저자는 오전에 무인공격기로 중동지역을 폭격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식사하는 조종사들의 삶을 예로 든다. 조사 결과 이들은 실제 전쟁터에 나간 군인들 이상으로 정신적 불안과 스트레스를 겪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군인과 아기를 품는 아버지라는 두 가지의 정체성을 동시에 조화시키는 게 그만큼 힘들어서다. 사람은 컴퓨터처럼 완벽하게 멀티태스킹을 수행할 순 없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빨간 기와집(가와다 후미코 지음·오근영 옮김·꿈교출판사)=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배봉기 할머니(1914∼1991)의 삶을 그렸다. 저자는 1977년 배 할머니를 만나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처음으로 들었다. 배 할머니는 1944년 가을 오키나와 도카시키 섬의 위안소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전후 다른 위안부들과는 달리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버려졌고 어떤 배상이나 위로도 받지 못한 채 1991년 쓸쓸히 세상을 등졌다. 저자가 담아낸 배 할머니의 증언은 일본 정부의 부인과는 달리 당시 일본군의 관리와 통제 아래 위안소가 설치 운영됐다는 점을 과장도 꾸밈도 없이 보여주고 있다. 1만4800원.}

칠순을 넘긴 불문학자가 40년 동안 끈질기게 추적한 ‘동해 명칭’의 진실을 집대성했다. 서정철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동료 불문학자인 부인 김인환 이화여대 명예교수와 ‘동해는 누구의 바다인가’(김영사)를 최근 출간했다. 이 책은 동해 관련 연구서 가운데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될 예정이다. ‘일본해가 아닌 동해가 맞다’는 학계 주장은 그동안 꾸준히 나왔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다룬 학술서는 거의 없었다. 사학이나 지리학 전공자가 아닌 불문학자가 책을 펴낸 것도 이례적이다. 서 교수는 일본해 표기가 독도 영유권 분쟁과 긴밀히 연결돼 있기 때문에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 우익들이 “일본해에 떠 있는 섬이 일본 영토인 건 당연하다”는 논리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역사적으로 일본해 대신 ‘북해(北海)’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이들이 일본해 표기의 역사적 연원으로 내세우는 1602년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는 당시엔 일본인들의 관심을 끌지도 못했어요. 게다가 외국인인 마테오 리치의 지도를 끌어들이는 건 외래명보다 토착명이 우선한다는 국제 지명 기준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반면 동해 명칭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만 모두 29번 거론될 정도로 우리 역사에 깊이 녹아 있지요.” 일본인들이 일본해 명칭을 지도에 본격적으로 표기한 건 1905년 러일전쟁 직후로 역사가 불과 100여 년밖에 안 된다. 이에 비해 동해는 기원전 4세기경 나온 산해경과 같은 중국 고대 지리서에 이미 기록돼 있다. 불문학자인 그가 전공과 상관이 없는 동해 연구에 빠지게 된 계기가 뭘까. “프랑스 유학 시절이던 1966년 베르사유 궁에서 우연히 한반도 고지도를 본 게 운명적인 만남이었습니다. 프랑스어로 ‘Mer Orientale’(동해)이라고 적힌 걸 보고 사학이나 지리학을 전공하는 유학생들에게 알려줬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더군요.” 그는 한국외국어대 교수로 부임한 후인 1975년 다시 파리를 찾아 고지도 수집에 뛰어들었다. 서 교수는 “낮에는 전공인 불문학을, 밤에는 지도 연구를 병행하는 이중 생활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1990년 동해연구회 창립멤버로 들어가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서 교수가 지난 40년간 사재를 털어 모은 자료는 고지도 180여 장, 고서 20여 권에 이른다. 이 중 1737년 프랑스 당빌이 만든 고지도와 1630년 네덜란드 블라외가 제작한 세계수로지도는 세계적으로 구하기 힘든 희귀본이다. 오랜 시간 공을 들인 분신과도 같은 자료들이지만 서 교수는 2000년 서울역사박물관에 이를 모두 기증했다. “40년간 애지중지하며 모아온 자료를 넘기는 데 아쉬운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계속 모으다 보니 나중에는 오히려 심적으로 짐이 되더라고요. 제가 모은 것이지만 결국 공공의 자산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집안에 마소 세 마리를 먹일 한 단의 건초도 마련하기 어려운 지경이네. 자네 집에 여분의 건초가 있을 듯해서 노복을 보내네. 얻을 수 있겠는가?” (1696년 3월 16일)“긴요하게 쓸 데가 있어서 그러니 참마 한두 단을 보내줄 수 없겠는가? 숯 서너 말도 얻었으면 하네.” (1698년 3월 23일) 》 17세기 조선시대 정치·사상계의 거두 서계 박세당(1629∼1703)이 60대 후반 이후 제자 이정신에게 쓴 편지 중 일부다. 산과일과 참마, 숯은 물론이고 마소에게 먹일 풀까지 온갖 살림살이를 부탁하는 내용이다. 소론의 영수로 송시열과 맞서다 나이 마흔에 이조판서를 내버린 대쪽같은 성품이었지만 말년의 생활고를 홀로 감당하기는 벅찼다. 두 아들이 모두 숨지면서 일흔이 넘는 고령에도 일곱 명의 가족을 보살펴야만 했다. 극심한 흉년이 들었던 1690년대 말 이런 부탁은 웬만한 친척조차 들어주기 힘든 것이었지만 이정신은 성심껏 스승을 모셨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박세당의 ‘서계유묵(西溪遺墨)’ 가운데 이정신 등에게 쓴 편지를 번역해 처음 공개했다. 서계유묵은 박세당의 후손들이 생전 그의 시문과 편지를 모아 1750년경 낸 서첩으로, 사료로서 가치가 높아 2010년 보물 1674호에 지정됐다. 김학수 한중연 국학자료연구실장은 “조선시대 문집이 주로 고인의 공적인 삶을 다룬 반면 서계유묵은 박세당의 인간적인 면모와 민낯을 솔직하게 담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아들을 잃은 아픔을 피 끓는 부정(父情)으로 토해낸 글은 지금도 절절하게 다가온다. “죽은 아들을 지난 윤달 땅에 묻었는데 슬프고 괴로운 마음을 감당하기가 어렵네. 날이 가고 달이 가도 살고 싶은 마음은 더 줄어드니 이를 어찌 하겠나”(1686년 6월 5일) 큰아들 태유가 1686년 봄 39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숨진 뒤 이정신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비통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로부터 3년 뒤 작은아들 태보마저 인현왕후의 폐출을 반대하다 유배를 떠나던 도중 목숨을 잃었다. “이 몸에 죄가 쌓여 하늘의 화가 이토록 극심하니 가슴이 미어지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네. 통곡하는 외에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1689년 6월 5일) 산전수전 다 겪은 대학자로서 제자를 아끼는 마음도 남달랐다. 특히 불혹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이정신에게 낙향을 권하는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들려준 사연이 이채롭다. 청운의 뜻을 막 펼치려는 제자에게 왜 하필 스승은 귀거래사를 써 준 걸까. ‘歸去來兮 請息交以絶遊 世與我而相違 復駕言兮焉求(돌아왔구나! 바라건대 세상과 사귐을 쉬고 벼슬길을 끊어버리리라. 세상과 나는 서로 어긋났으니 다시금 멍에를 매어 무얼 구하겠는가).’ 시를 쓴 도연명이 팽택 현령을 그만두고 낙향할 때 나이가 마흔. 공교롭게도 박세당이 관직을 버리고 양주 석천동(현 경기 의정부시)에 은거했을 당시 나이도 마흔이다. 평소 도연명을 흠모하던 박세당이 일부러 40세에 맞춰 낙향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분석이다. 조정에서 치열한 당파싸움을 겪었던 박세당은 벼슬살이의 괴로움을 일찍이 깨닫고 있었다. 김 실장은 “박세당은 제자인 이정신도 조정에서 수없이 부침을 겪을 것을 내다보고 언제든 버거운 짐을 내려놓을 것을 미리 당부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명나라에서 사과의 의미로 칙사를 보내와 강화조건을 전달했소. 7, 8월쯤에는 반드시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오.”(1593년 6월 9일 아내에게 보낸 편지) “강화교섭과 상관없이 진주성을 공략한 뒤 남해안에 성을 쌓으라.”(같은 해 5월 22일, 부산에 파견된 장수에게 보낸 편지) 서로 상반된 뉘앙스의 두 편지는 모두 한 사람이 썼다. 주인공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내에게 당장이라도 명나라와의 강화회담이 끝날 것처럼 썼지만, 정작 휘하 장수에게는 전쟁을 계속 독려하고 있다. 도요토미는 누구에게 진심을 털어놓은 걸까. 김경태 박사가 최근 발표한 ‘임진전쟁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화조건 연구’ 논문에 따르면 도요토미가 명나라와 강화회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며 체면치레에 급급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잇단 패전으로 궁지에 몰린 도요토미는 1593년 5월 명나라 칙사와 본격적인 강화협상에 들어갔다. 당시 그는 조선 왕자를 인질로 제공하고 명나라 황녀와 혼인을 맺으며 조선 영토의 절반을 넘기라는 등의 7가지 강화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왜군이 남해안까지 후퇴한 상황에서 조선과 명나라가 이를 모두 거부하자 2년이 지난 1595년 5월 도요토미는 조선 왕자만 보내면 다른 조건과 상관없이 강화에 응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조선 왕자를 인질로 받아 백성들 앞에서 최소한의 체면이라도 세우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조선 조정의 강력한 반발로 이마저도 수포로 돌아가자 결국 명나라와 일본은 조선통신사와 명나라 사절단(책봉사)을 일본에 보내는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명나라의 책봉사 파견소식을 전해들은 도요토미가 이를 크게 반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도요토미는 막판까지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며 군사들을 다그쳤다. 대외적으로는 요구 수준을 낮추며 계속 강화를 추진했으나 내부적으로는 긴장을 팽팽하게 유지하는 양면전략을 쓴 것이다. 김 박사는 이런 태도가 패전에 따른 자국 내 비판 여론을 단속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분석했다. 실제로 난부 노부나오라는 다이묘는 한 편지에서 “도요토미가 명나라에 조선 4도를 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데 주변에서 직언을 하는 자가 없다”고 하는 등 내부 불만이 점점 확산되고 있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지난달 3일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회담은 백악관과 국제 금융가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한국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참여해 달라는 시 주석의 제안 때문이다. 미국은 즉각 발끈했다. 정상회담이 열리기도 전에 우리 정부에 AIIB 참여에 반대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중국은 집요했다. 왕이 외교부장에 이어 시 주석까지 나섰다. 미국을 대신해 새로운 세계 금융질서를 세우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신설 은행에 자본출자를 해달라는 게 뭐 그리 대수냐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금융을 통해 전 세계의 실물경제를 지배하는 오늘날의 경제 메커니즘을 감안하면 미중 양국의 치열한 신경전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세계 금융을 틀어쥐고 있는 미국의 통화정책이 전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중국 금융 전문가답게 미국 정부에 대한 날선 비판이 곳곳에 있다. 저자의 논리는 이렇다. 역사적으로 화폐가치 하락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해 빈부격차를 더 확대시킨다. 그런데 이것은 세금을 내지 않고 더 많은 소비를 누리려는 부자들의 탐욕에서 비롯된다. 문제는 최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무지막지한 양적완화(QE3) 정책이 전 세계적 화폐가치 하락을 유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세계 기축 통화인 달러화의 위상만 지켜내면 된다. 막대한 재정적자가 발생해도 달러화를 무제한 찍어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뜩이나 경기침체를 겪고 있는 다른 나라는 미국의 양적완화로 환율변동에 따른 피해까지 감수해야 한다. 저자는 본문에서 “QE3 정책은 미국이 자국 위기를 다른 나라에 전가하기 위해 부린 수작”이라고까지 표현했다. 더구나 넘치는 화폐 유동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피해는 고스란히 빈자들의 몫이다. 2011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월스트리트 반대 시위가 대대적으로 벌어진 이유다. 저자는 유동성 공급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조만간 금리상승으로 자산거품이 꺼지는 금융위기를 피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며 지속 시간이 길수록 더 참담한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인류사에 반복적으로 나타난 재난을 다시 한 번 재연하는 꼴일 뿐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배흘림기둥’으로 장중한 기품을 더하는 ‘부석사 무량수전’. 고려시대 사찰로 국보 18호에 지정된 1급 문화재이지만 기둥이 파손되고 곳곳에 물이 샌다. 이로 인해 연목과 추녀가 이미 부식됐고 공포(栱包)에 금까지 갔다. 이미 6년 전 구조 안전진단을 받는 등 문제점이 드러났지만 사후관리는 여전히 부실하다. 문화재청이 국보, 보물 등 문화재 7393건을 조사한 결과 이 중 22.8%(1683건)가 구조적 결함이 있거나 즉각 보수가 필요한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재청은 훼손 정도와 관리 상태에 따라 조사대상 문화재를 A(양호)∼F(즉시조치)등급으로 분류했는데 무량수전은 이 가운데 다섯 번째인 E(보수정비 필요)등급이었다. 앞서 문화재청은 숭례문 부실 복원 논란이 불거지자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5월까지 지방자치단체들과 함께 야외에 있는 지정 문화재와 사찰, 서원, 문중 등 유물 소장처 47곳을 대상으로 실태 점검을 벌였다. 결함이 발견된 D, E, F등급 문화재 1683건은 각각 ‘정기 및 상시 모니터링’(D등급) 183건(2.5%), ‘보수정비 필요’(E등급) 1413건(19.1%), ‘즉시 조치’(F등급) 87건(1.2%)으로 각각 조사됐다. F등급에 국보는 없고 울산 울주군 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 등 보물 10건이 포함돼 있다. 이와 별도로 환구단(사적 157호)을 비롯한 128개 문화재는 소방 설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화재가 났을 때 대처하기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동양 여러 나라도 서양 선교사를 용납하여 맞아들이는 게 해로운 일이 없다는 것을 거듭해서 타이르면 반드시 온 나라가 두려워하여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조선 조정이 가톨릭을 탄압한 신유박해(1801년) 당시 신자 황사영이 청나라 구베아 주교에게 쓴 ‘황사영 백서’의 한 대목이다. 이 비밀 편지에는 수백 명의 가톨릭교도가 순교한 신유박해의 상황과 대책 등이 적혀 있다. 폭 62cm의 흰색 비단에 무려 1만3311자의 한자가 정자체로 빼곡히 적혀 있어 절박했던 황사영의 심경이 그대로 전해진다. 황사영은 이 백서를 인편을 통해 중국 베이징으로 보내려다 의금부에 적발돼 순교했다. 특히 백서 중에 가톨릭 박해를 막기 위해 청나라 군대까지 동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들어 있어 이후 조정의 탄압은 더 가혹해졌다. 이 백서는 고종이 가톨릭 포교를 허용한 뒤 1894년 뮈텔 대주교에게 전달됐다. 이어 1925년 로마에서 조선인 순교자 79위 시복식이 열린 것을 계기로 교황청으로 넘어갔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천주교 서울대교구와 함께 8일부터 10월 31일까지 ‘서소문·동소문 별곡’ 특별전을 연다. 교황청 민속박물관이 소장한 황사영 백서 등 유물 5점을 비롯해 총 400여 점의 천주교 역사 유물이 대거 전시된다. 박물관은 이 전시회를 올해 말 열 계획이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소식이 전해지자 일정을 앞당겼다. 박물관이 전시 주제로 잡은 서소문(현 서울 중구 서소문동)과 동소문(종로구 혜화동)은 조선시대 한양 도성에 자리 잡았던 문으로 우리나라 가톨릭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작지 않다. 서소문은 천주교 최대 순교지로 한국 성인 103위 가운데 44위가 이곳에서 숨을 거뒀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복미사를 집전하기 직전에 참배할 곳도 서소문 순교지다. 동소문 역시 최초의 남자 수도원인 베네딕도회 백동수도원이 설립된 곳으로 가톨릭 인재양성의 요람이었다. 현재도 가톨릭대 신학대와 동성중·고등학교, 혜화동 성당 등 천주교 시설들이 몰려 있다. 가톨릭이 국교인 필리핀 노동자들이 정기적으로 벼룩시장을 여는 곳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회에선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듬해인 1910년 3월 뤼순 형무소에서 쓴 친필 붓글씨도 볼 수 있다. 왼손 약지를 끊고 찍은 선명한 손도장과 힘 있는 붓글씨로 쓴 ‘경천(敬天)’이라는 두 글자가 강렬한 인상을 준다. 최근 서울대교구에 기증됐다. 서소문 밖 만초천에 있던 다리였던 ‘소의교’ 교각도 전시된다. 만초천 복개로 다리가 없어졌지만 끝내 남은 교각 하나가 최근 하수관에서 우연히 발견됐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베드로 이후로 2000년간 280여 명의 교황이 가톨릭을 이끌었다. 그동안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른 교황도 있었지만 세속의 군주보다 더 잔혹하고 죄악에 찌들었던 교황들도 있었다. 영국 역사가인 저자는 이단 논란을 비롯해 신성 로마제국, 바티칸 시국에 이르기까지 역대 교황들의 행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외교관 출신인 저자는 이 책을 준비하느라 꼬박 25년이 걸렸다. 교황들의 업적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의 역사적 사건과 연관해 이들의 진정한 면모까지 풀어냈다. 일반적으로 가톨릭에서 교황권은 마태복음 16장을 근거로 사도 베드로에서 시작됐다고 본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의문을 제기한다. 로마의 주교를 교황으로 삼는 가톨릭의 전통을 돌이켜볼 때 베드로는 주교를 지낸 적이 없어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 중에서 여자 교황 조안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조안이 출산으로 여성임이 드러나 자리에서 쫓겨나자 후임자인 베네딕토 3세부터 교황 선출 시 구멍이 뚫린 의자에 앉아 고환을 확인하는 전통이 생겼다는 얘기다. 포르모소 교황의 사후 재판 일화는 충격적이다. 스테파노 6세가 896년 이미 장례를 치른 전임 포르모소 교황의 시신을 파내 생전에 입던 제의를 입히고 정식 재판을 받게 한 사건이다. 포르모소 교황은 위증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사제품을 비롯한 생전 그의 모든 행위가 무효화됐다. 그의 시신은 로마 테베레강에 버려졌다. 역사상 최악의 교황은 알렉산데르 6세가 꼽힌다. 15세기 교황을 지낸 그는 문란한 성생활을 즐겼고 아들들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줬다. 그는 정조를 지킬 것을 설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정부를 거느리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반면 자신을 죽이려 한 암살자를 용서한 교황도 있었다. 1981년 성 베드로 광장을 지나던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무신론자 메흐메트 알리 아으자가 총을 쐈다. 수술을 받고 목숨을 건진 교황은 아자를 용서한다고 발표한 뒤 1983년 감옥에 있던 그를 만났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아베 정부의 집단적 자위권 결정은 민주주의 룰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이를 바로잡으려면 아베 정권을 타도하는 수밖에 없다.” 지난달 30일 한국을 찾은 마키노 에이지 호세이대 철학과 교수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우경화 움직임을 강하게 비판했다. 칸트 철학 권위자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연구하고 있는 마키노 교수는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초청으로 방한했다. 마키노 교수는 백종현 서울대 교수와 ‘동아시아의 칸트철학’을 최근 펴냈다. 그는 서울대 강연에서 요미우리나 산케이와 같은 보수 언론은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과거사 반성에 전향적이던 언론들마저 아베의 논리를 따라가는 등 일본 사회 전반이 우경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마키노 교수는 우경화의 원인을 일본인들의 정신구조에서 찾았다. 그는 우선 버블경제 붕괴에 따른 이른바 ‘중류(중산층) 의식’의 퇴조를 꼽았다. 소득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국민들이 장래에 대한 희망을 잃고 무력감에 빠지면서 정부나 정치에 대한 비판의식이 무뎌졌다는 것이다. 아베 정권의 역사인식에 대해 다수의 일본인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이유다. 마키노 교수는 “일본 국민들이 5년 전 민주당 정권에 큰 기대를 품었지만 결국 실망이 컸고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더욱 커졌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불편한 진실을 보거나 듣거나 말하지 않는다는 일본인 특유의 정신구조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왜곡된 정신구조에서 벗어나려면 입시 위주에서 벗어나 철학이나 문학, 역사, 과학 등 다방면에서 균형 잡힌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보기술(IT) 발달로 시중에 유통되는 정보량이 넘치면서 정보의 우선순위나 활용방법에 대한 대중의 판단력이 떨어진 것도 원인으로 봤다. 마키노 교수는 “급격화 정보화로 인해 지혜가 모습을 감추고 콘텐츠라는 이름의 단편적 지(知)가 대중을 휩쓸고 있다”며 “주체적인 사고능력이 약해지다 보니 우경화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못 느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칸트 철학자로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대한 의견도 밝혔다. 마키노 교수는 “안중근의 이론은 칸트의 영구평화론과 맥이 닿으면서도 실현 가능한 대안을 담았다는 점에서 좀 더 현실적인 접근이었다”고 평가했다. 일본에선 테러리스트로 폄하되는 안중근을 연구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그는 “호세이대 지하 서고에서 안중근의 공판 속기록을 접하고 관심을 가졌다”며 “그의 무죄를 주장한 미즈노 요시타로 변호사가 호세이대 출신인 것도 묘한 인연”이라고 덧붙였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경제발전의 공(功)이 큰가, 인권탄압의 과(過)가 큰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둘러싸고 이 같은 논쟁을 벌이고 있는 한국처럼 러시아에서도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에 대한 재평가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을 이기고 전후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키웠다는 찬사와 더불어 히틀러보다 더 악랄한 살인 독재자라는 비판이 공존한다. 1990년 설문조사에서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본 러시아인은 10% 미만이었지만 불과 15년이 지난 2005년에는 50% 이상으로 치솟았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가 극심한 경기 침체를 겪으면서 스탈린 시대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이 책은 러시아의 이런 현상과 맞물려 스탈린의 최대 치부인 ‘굴라크(강제 노동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이들이 풀려난 뒤 어떤 삶을 살았으며 소련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추적한다. 미국 역사학자인 저자는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닌 제3자로서 당시 비극을 당사자들의 인터뷰와 서면 조사 등을 통해 그려냈다. ‘600만 명 vs 1600만 명.’ 히틀러에 의해 살해된 유대인과 굴라크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의 수다. 스탈린이 죽은 1953년에만 550만 명이 굴라크와 감옥 등에 갇혀 있었다. 굴라크가 20여 년이나 지속된 데다 위치도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등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아직도 정확한 희생자 수를 알지 못한다. 나치의 만행 못지않게 최악의 대량학살과 인권유린이 자행됐지만 굴라크는 아우슈비츠에 비해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스탈린 사후 권력을 쥔 차기 지도부도 공범이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스탈린이 죽고 3년 뒤 공개 석상에서 그를 정면으로 비판한 흐루쇼프 역시 다른 지도자들에 비해 정도는 덜했지만 굴라크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더구나 NKVD(KGB의 전신)나 검찰관, 그리고 이들의 끄나풀처럼 희생자들을 굴라크로 떠민 조력자는 수백만 명에 달했다. 이들은 굴라크 희생자들의 사회적 지위는 물론이고 집과 땅, 심지어 아내들까지 차지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과거사 청산’의 과정은 지난했다. 굴라크 죄수들의 석방은 스탈린이 숨지고 3년이 지나서도 아주 더디게 진행됐다. 1954년부터 흐루쇼프가 실각한 1964년까지 불과 70만∼80만 명의 굴라크 피해자만 복권됐다. 나머지는 글라스노스트(개방) 등을 들고 나온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기까지 2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생존자는 물론이고 그 자녀들까지 취업과 여행 제한 등 각종 사회적 불이익을 겪었다. 저자는 “스탈린 사후 많은 생존자가 상황이 더 악화될까봐 두려움에 떨었다. 살아남은 ‘인민의 적’은 결국 모두 처형될 것으로 믿었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귀환자와 자녀들은 과거를 숨기거나 가명을 쓰는 이중생활을 했다. 굴라크에서 살아남은 예브게니야 긴즈부르크 같은 유명 작가도 발각될 것을 우려해 신랄한 내용이 담긴 회고록 초안을 불태웠다. 스탈린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시대에 와서 다시 부상하고 있는 것은 러시아가 잃어버린 강대국의 지위를 되찾으려면 국가에 자원을 집중시키는 스탈린식 방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어서다. 저자는 말한다. “스탈린 시대의 범죄를 둘러싼 정치적 투쟁은 분명 더 격렬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희생자들의 기나긴 귀환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비록 내 어린 딸에게 무심코 건넨 실언이지만 약속대로 집을 사주겠다.” 1596년 성종의 4대손으로 임진왜란 공신이었던 이경검은 분재기(分財記·재산 상속문서) 한 장을 썼다. 당시 9세에 불과한 어린 딸 효숙에게 한양 명례방(明禮坊·지금의 서울 필동)에 있던 25칸짜리 저택을 물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한산 이씨 종가의 분재기인 ‘이경검 부부 별급문기(李景儉 夫婦 別給文記)’를 번역해 최근 공개했다. 분재기에 따르면 장자 상속의 원칙을 깨고 이경검이 어린 딸에게 비싼 저택을 물려주게 된 사연이 이채롭다. 이경검은 딸 효숙을 무척 아꼈다. 그는 임진왜란으로 부서진 집을 고치면서 딸을 업고 다니며 공사를 감독했다. 그는 어느 날 집에 들어서며 딸에게 “수리를 마치면 이 집을 주겠다”며 농담을 건넸다. 하지만 효숙은 이를 진심으로 믿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 집이 생겼다고 자랑했다. 이를 물정 모르는 딸의 애교로 치부하고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이경검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주(周)나라 성왕 때 고사를 언급하며 “부모와 자식 간의 믿음보다 중한 게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말실수라도 딸이 약속으로 받아들였다면 지켜야 한다”고 선언했다. 주 성왕은 어린 시절 동생과 소꿉놀이를 하다가 농담으로 동생을 제후로 봉하겠다고 했고 이후 왕위에 오른 뒤 그 말을 지켜 드넓은 땅을 내주었다. 이경검도 바로 분재기를 작성했다. 혹시 자식 간 재산 분쟁이 불거질 것을 대비해 분재기 끝에 ‘자식들은 이 상속에 불평을 품지 말라’는 단서조항을 두고 장남인 안국의 수결(사인)까지 받았다. 이로부터 9년 뒤 효숙은 영의정 이산해의 손자인 이구와 결혼하면서 이 집을 혼수로 가져갔다. 22세에 남편을 잃은 그는 1636년 충남 예산군에 마을을 개척하고 새로 집을 짓는 등 여장부로서 삶을 살았다. 효숙이 예산에 지은 집이 ‘수당고택(修堂古宅)’으로 그의 10대손이자 구한말 항일 운동가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수당 이남규(1855∼1907)가 이 집에서 태어났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학질을 물리치는 법, 한 무리의 용이 사는데 머리가 9개, 꼬리가 18개다. 무엇을 먹고 사느냐고 물으니 학질 귀신을 잡아먹는다고 했다. 용의 형상을 그린 부적을 만든 뒤 이를 복용하라.’ ‘닭을 찌는 법, 닭을 솥에 넣어 삶아내고 그 물에 염교와 온갖 나물을 넣어….’ 사주를 보거나 부적을 쓰는 방법, 성병 치료법, 찜닭 만들기 등 이색적인 내용이 적힌 17세기 초반의 조선시대 가정규범(家庭規範)이 발견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올 3월 고령 박씨 문중에서 넘겨받은 고문헌 200여 점 중에서 박광선(1562∼1631)이 쓴 가정규범을 최근 찾아냈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 집안마다 살림 요령을 적어 대대로 전하는 요람(要覽)이 있었지만, 한 권이 온전히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박광선은 스승인 내암 정인홍을 따라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활약했으며, 광해군 시절 북인 정권의 핵심인물로 왕세자를 가르쳤다. 한때 200여 명의 노비를 거느릴 정도였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역적으로 몰려 그와 그의 아들이 사형을 당하는 등 집안 전체가 몰락했다. 이번에 발견된 가정규범은 총 200쪽 분량으로 1610년경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리학의 거두 퇴계 이황을 비판하고 실용적 학풍을 추구한 남명학파답게 박광선의 가정규범은 기존 사대부들의 공식 문집에선 볼 수 없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병을 쫓기 위한 부적 제작법과 가족들의 사주를 기록한 ‘일가오주(一家五柱)’가 대표적이다. 오주는 태어난 연, 월, 일, 시(사주)에 외모를 더해 운수를 점치는 것을 뜻한다. 솥을 집 안에 들여놓을 때 길일(吉日)을 정하는 법과 사당을 지을 때 피해야 할 터까지 소개돼 있어 성리학을 신봉한 사대부들도 실생활에선 전통신앙에 의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사대부들이 요리를 아녀자의 일로만 치부해 무관심했다는 생각은 편견인 셈이다. 각종 질병에 대한 민간처방과 구구단과 같은 자녀교육법 등 실생활에 유용한 비법들도 망라돼 있다. 피부병을 예방하기 위해 석창포(石菖蒲)와 소금을 섞어 목욕물을 만드는 방법과 버짐(백선·白癬)을 치료하기 위한 약재도 소개돼 있다. 특히 버들잎과 창포 잎사귀를 넣어 달이는 임질 치료제가 포함돼 눈길을 끈다. 성(性)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렸던 당시 풍속에 비춰보면 이례적이다. 안승준 한중연 책임연구원은 “이 가정규범은 성리학적 도덕규범에 얽매인 문집과 달리 사대부의 진솔한 모습을 엿볼 수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며 “특히 한자로 표기하기 어려운 조리법의 경우 상당수 한글로 돼 있어 조선 중기 한글사 연구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근 열린 ‘마루야마 마사오 탄생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한국 학자 30명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반대하는 공동성명을 냈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1914∼1996)는 생전 일본 군국주의를 비판했던 대표적인 정치 사상가다. 박충석 이화여대 명예교수, 김홍우 서울대 명예교수 등은 성명서에서 “평화헌법의 핵심을 훼손한 이번 결정은 입헌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며 “아베 신조 정권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결정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어 히라이시 나오아키 도쿄대 명예교수와 마쓰자와 히로아키 홋카이도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낸 성명을 지지한다고 덧붙였다. 마루야마의 직계 제자인 두 교수는 “일본이 지켜온 평화원칙을 한 정권이 자의적으로 바꾸는 건 민주주의와 입헌주의 원리를 위반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8m가 넘는 대형 화폭에 웅장한 기암괴벽들이 이어져 있다. 그러나 단순한 산수화가 아니다. 계곡 사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마꾼부터 뱃사람, 농사꾼에 이르기까지 생업에 종사하는 서민들의 삶이 지극히 세밀한 필치로 묘사돼 있다. 이들을 둘러싼 아름다운 산수는 무릉도원을 보는 듯 몽환적인 느낌마저 준다. 국립중앙박물관이 29일 ‘산수화, 이상향을 꿈꾸다’ 특별전에서 선보이는 이인문의 대표작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의 한 장면이다. 이인문은 동갑내기였던 김홍도와 더불어 18세기 조선의 대표적인 궁중 화원으로 손꼽힌다. 강산무진도가 재밌는 건 자연에 파묻힌 낙원을 그리면서도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내세운 실학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절벽 위와 아랫마을 사람들이 도르래에 밧줄을 달아 물품을 주고받거나, 수차(水車)로 방아를 찧는 모습, 깔끔한 항구 접안시설 등이 그렇다. 자연과 문명이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상향을 담고 있는 셈이다. 전시장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김홍도의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 역시 이번 전시회에서 강산무진도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대작이다. 깊은 산골 한가운데 자리 잡은 기와집에서 거문고를 뜯거나 평상에 누워 사색에 잠긴 선비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평안해진다. ‘자연 속의 삶을 삼공(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높은 벼슬과도 바꿀 수 없다’는 제목이 와 닿는다. 중앙박물관이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중국 상하이박물관, 일본 교토박물관에서 들여온 42점의 중국과 일본 산수화도 눈여겨볼 만하다. 중국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그림으로 옮긴 ‘귀거래도(歸去來圖)’는 청나라 건륭제가 감상평을 손수 남길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다. 작가 미상으로 중국 원나라 혹은 명나라 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온통 청록색으로 그린 버드나무와 뭍을 배경으로 도연명이 배를 타고 귀가하는 장면을 그렸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는 도연명 옆으로 서책이 한 아름 실려 있다. 자연과 학문을 벗 삼아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이 담긴 듯하다. 이 밖에 이번 전시회에선 중국 명나라 때 거장인 문징명(文徵明)과 동기창(董其昌), 일본의 도미오카 뎃사이의 산수화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관람객들은 주요 전시품에 대한 설명을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내려받을 수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그는 물리학자다. 인기 절정의 걸그룹 멤버인 딸을 두고 있다. 1989년 공산권 붕괴 직후 치열한 내전이 벌어진 아르메니아에 들어가 연구활동을 벌였다. 취미는 동화책 집필과 도자기 로봇 만들기, 파스타 요리하기, 깨진 앤티크 수집 등이다. 무엇 하나 범상치 않은 별난 주인공은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54)다. 그의 딸은 인기그룹 2NE1의 리더 씨엘(본명 이채린)이다. 이 교수가 새로 낸 책 ‘나는 자꾸만 ‘딴짓’하고 싶다’(웅진서가·사진)는 다양한 취미생활을 중심으로 삶의 이야기를 풀어낸 독특한 에세이다. 이 교수는 책 머리말에 “지금까지 내 삶이란 게 ‘물리학이라는 전공과 여타 딴짓’이 전혀 구분되지 않는 일상이 아닌가”라고 적었다. 지난달 말부터 프랑스 낭트에 머물고 있는 이 교수와 전화로 인터뷰를 했다. ―낭트에는 무얼 하러 갔나. “동료 프랑스 과학자의 초청을 받고 낭트대에서 비행기에 들어갈 신재료를 찾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내 전공이 마이크로파인데 이걸 이용한 특수 현미경으로 탄소물질을 관찰하고 있다.” ―물리학과 전혀 상관없는 취미가 많은 것 같은데…. “물리학만 24시간 파헤칠 수도 있겠지만 자유롭게 다른 걸 하고 싶을 때가 있더라. 그런데 딴짓을 하더라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노는 게 아니라 뭔가 공부를 하려고 노력한다. 골동품 하나를 감상해도 배경에 깔린 역사를 알면서 나만의 관점을 가지려고 한다. 그리고 이런 활동들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여러 상상을 할 수 있어 물리학적 영감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책에도 썼지만 일본에 있을 때 지도교수에게 선물 받은 연필 깎는 기계가 있다. 전압 110V용이어서 사용하지 못하고 그냥 책상에 모셔놓고 있는데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가기 전 이걸 보면서 7년간의 일본 유학생활을 돌이켜보고 여러 상상도 하면서 머리를 푼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다양한 골동품을 수집하는 것 같던데…. “뭔가 얘깃거리가 있고 영감을 주는 물건이면 뭐든 사온다. 그게 깨진 도자기라도 상관없다. 지난 주말에는 벼룩시장에 가서 달걀을 예쁘게 깨는 조리도구와 파스타 삶는 그릇, 양파를 써는 기구를 사왔다. 얼마 전 같이 지내고 있는 프랑스 동료 교수한테 포도주 병따개를 선물 받아서 기분이 좋았다.” ―책에 나오는 사진과 삽화를 직접 작업했다고 들었다. “예전에 딸 채린이에게 한글을 가르치려고 사인펜으로 동화책을 만든 적이 있다. 스토리는 어린 두 딸을 재울 때 내가 멋대로 지은 얘기를 바탕으로 했다. 여기에 살을 좀 붙여서 아예 동화책 ‘박치기 깍까’를 펴냈는데 나중에 영어와 일본어, 프랑스어,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이번 책 사진은 내 아이폰5로 모두 찍었다. 촬영한 다음에 바로 편집자에게 전송할 수 있어 편했다.” ―앞으로 또 뭘 해볼 건가. “요리책을 내거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웹툰을 통해 물리학 얘기를 쉽게 풀어보고 싶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천재 시인 이상(李箱)이 25세에 쓴 절절한 러브레터를 22일 최초로 공개한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문학평론가)가 이상의 연작시 ‘오감도’의 미발표작은 1936년 발표된 연작시 ‘역단(易斷)’과 ‘위독(危篤)’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국내 이상 연구의 권위자인 권 교수는 24일 서울 종로구 통인동 ‘이상의 집’에서 열리는 특별강연에서 이상이 1935년 고 최정희 작가에게 쓴 러브레터와 함께 문학계의 오랜 관심을 끌어온 오감도 미발표작에 대해 설명할 예정이다. 24일은 오감도가 세상에 나온 지 꼭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21일 만난 권 교수는 “오랜 연구 끝에 1936년 가톨릭청년, 조선일보에 발표된 연작시 ‘역단’ 5수와 ‘위독’ 12수 등 17수가 오감도의 미발표작이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밝혔다. 이상은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15번에 걸쳐 오감도 연작시를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했다. 본래 30여 수를 지어놨지만 “시가 너무 난해하다”는 독자들의 거센 항의로 중간에 연재를 그만두는 수모를 겪었다. 이에 따라 끝내 빛을 보지 못한 미발표작 10여 수가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오감도는 우리나라 모더니즘 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로, 이상이 스스로 ‘조선의 악의 꽃’이라고 부를 정도로 애착을 가졌다. 이 연작시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수학 기호와 도형을 중간에 넣는 등 파격적 작품이었다. 권 교수가 최근에 펴낸 ‘오감도의 탄생’(태학사)에 따르면 역단과 위독은 모두 한자를 병용하고 띄어쓰기를 무시한 산문체로 오감도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또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자신을 그리는 등 소재도 오감도와 긴밀히 연결된다. 권 교수는 “오감도 연작의 경우 시마다 별도 제목 없이 숫자를 붙여 구별했지만 역단과 위독은 연작 전체의 제목이면서 동시에 개별 시의 제목이기도 했다”며 “역단과 위독이 큰 틀에서 오감도의 일부로 묶여 있었다가 별도로 발표하면서 제목을 나중에 붙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오감도의 미발표작을 찾아 나선 건 17년 전인 1997년. 이상과 함께 ‘구인회’ 멤버였던 소설가 박태원의 회고록에서 오감도 미발표작이 있다는 내용을 읽은 뒤였다. 회고록에는 이상이 오감도 연재 중단 직후 “왜 (나를)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 년씩 뒤떨어지고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중략) 2000점에서 30점을 고르는 데 땀을 흘렸다”고 언급한 사실이 적혀 있다. 오감도와 역단, 위독을 하나로 놓고 보면 이상의 시 주제가 거시적인 관점에서 점차 자기 내부로 바뀌게 됨을 알 수 있다. 권 교수는 “오감도 4호부터 변화의 조짐이 엿보이는데 위독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얘기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상은 일본에서 숨을 거두기 한 해 전인 1936년 10월 위독을 발표한다. 권 교수는 “서양 학자들이 이상의 시와 소설을 접하고 그의 문학적 상상력에 감탄했다”며 “이상은 식민지 한국 근대문학의 후진성을 극복한 작가”라고 강조했다. 이상 문학의 세계화를 꿈꾸는 권 교수는 28일 미국으로 출국해 1년간 버클리대에서 한국 문학을 강의할 계획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나는 별 이유도 까닭도 없이 자꾸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서 죽을 뻔했습니다. (중략) ‘정희’야 나는 이제 너를 떠나는 슬픔을, 너를 잊을 수 없어 얼마든지 참으려고 한다.”(이상의 러브레터 중 일부) 눈을 다시 떴을 때에 거기 ‘정희’는 없다. 물론 여덟시가 지난 뒤였다. 정희는 그리 갔다. 이리하여 나의 종생(終生)은 끝났으되 나의 종생기(終生記)는 끝나지 않는다.(이상의 소설 ‘종생기’)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문학을 이끈 시인이자 소설가 이상의 러브레터가 처음 발견됐다. 이를 계기로 그의 소설 ‘종생기’에 등장하는 ‘정희’가 연서(戀書)의 주인공인 최정희 작가(1912∼1990)를 모델로 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상의 친필 편지는 동료 작가 김기림과 안회남, 동생들에게 쓴 편지 10편만 알려져 있을 뿐 러브레터가 공개된 건 처음이다. 이상 연구의 권위자로 편지를 직접 분석한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문학평론가)는 △편지의 글씨체가 영인문학관에 보관된 이상의 친필 유고와 일치하고 △편지 끝 부분에 ‘李箱(이상)’이라는 한자로 사인이 돼 있는 데다 △최정희가 생전에 “이상에게서 편지를 여러 통 받았지만 모두 찢어버렸다”고 말한 점을 들어 이상의 편지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권 교수는 편지 본문에 시골생활 등이 언급된 걸 감안할 때 이상이 25세이던 1935년 12월에 편지를 쓴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최정희는 23세의 젊은 이혼녀로 잡지사 삼천리에서 만난 시인 파인(巴人) 김동환(1901∼?)과 사귀고 있었다. 그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연극무대에 섰고, 이후 귀국해 조선일보와 삼천리 기자로 활동했다. 이미 시인 백석에게도 러브레터를 받는 등 젊은 시절 빼어난 외모와 지성으로 청년 문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최정희가 이상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그의 사랑은 비극으로 치달았다. 이상은 이 편지를 쓰고 2년 뒤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일본에서 쓸쓸히 숨을 거둔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러브레터는 열정적이면서도 애잔하다. 최정희가 끝내 자신의 구애를 외면하자 이상은 “당신은 내게 커다란 고독과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을 준 사람입니다. 이젠 당신이 이상하게 미워지려고까지 합니다”라고 썼다. 이어 “당신 앞엔 나보다도 기가 차게 현명한 벗이 허다하게 있을 줄을 안다”며 “이제 내 마음도 무한히 흩어져 당신 있는 곳엔 잘 가지지가 않습니다”라고 실연의 아픔을 토로했다. 하지만 이상은 편지에서 최정희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끝내 감추지 못했다. 차마 전달하지 못한 이전의 편지글을 소개한다면서 “나는 진정 네가 좋다. 웬일인지 모르겠다. 네 작은 입이 좋고 목덜미가 좋고 볼따구니도 좋다”는 솔직한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편지를 건넬 당시 이상은 연작시 ‘오감도’를 발표한 직후로 문단에서 한창 이름을 알릴 때였다. 그러나 직접 운영한 제비다방이 경영난 끝에 문을 닫고, 연인 금홍과도 이별하는 등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다. 그의 편지에는 오랜 정신적 좌절에서 벗어나 ‘당신(최정희)을 위해’ 다시 글을 쓰겠다는 다짐이 들어 있다. 권 교수는 “이상이 사실상 폐인 생활을 접고 잠시나마 글쓰기에 다시 나설 수 있었던 건 최정희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권 교수는 이상의 단편소설 ‘종생기’가 최정희를 모티브로 한 작품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소설 속 여주인공인 정희(貞姬)가 최정희와 이름이 같고, 가족을 위해 일하는 직장여성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재밌는 건 소설에선 현실과 정반대로 정희가 주인공 ‘이상 선생’을 사랑하고 러브레터를 보낸 것으로 묘사돼 있다는 점이다. 소설 속 정희는 다른 남성과 동시에 사귀는 등 이중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권 교수는 “이번 연서의 발견으로 ‘종생기’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돼 문학사적으로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권 교수는 24일 이상 관련 문학행사가 열리는 서울 종로구 통인동 ‘이상의 집’에서 ‘오감도 80주년 기념 특별강연’을 갖고 이상의 러브레터를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