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 몰린 도요토미, 체면 살리려 이중플레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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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나라와 협상땐 강화조건 낮추고 부하에겐 전쟁 독려
김경태 박사 임진왜란 논문서 밝혀

“명나라에서 사과의 의미로 칙사를 보내와 강화조건을 전달했소. 7, 8월쯤에는 반드시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오.”(1593년 6월 9일 아내에게 보낸 편지)

“강화교섭과 상관없이 진주성을 공략한 뒤 남해안에 성을 쌓으라.”(같은 해 5월 22일, 부산에 파견된 장수에게 보낸 편지)

서로 상반된 뉘앙스의 두 편지는 모두 한 사람이 썼다. 주인공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내에게 당장이라도 명나라와의 강화회담이 끝날 것처럼 썼지만, 정작 휘하 장수에게는 전쟁을 계속 독려하고 있다. 도요토미는 누구에게 진심을 털어놓은 걸까.

김경태 박사가 최근 발표한 ‘임진전쟁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화조건 연구’ 논문에 따르면 도요토미가 명나라와 강화회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며 체면치레에 급급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잇단 패전으로 궁지에 몰린 도요토미는 1593년 5월 명나라 칙사와 본격적인 강화협상에 들어갔다. 당시 그는 조선 왕자를 인질로 제공하고 명나라 황녀와 혼인을 맺으며 조선 영토의 절반을 넘기라는 등의 7가지 강화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왜군이 남해안까지 후퇴한 상황에서 조선과 명나라가 이를 모두 거부하자 2년이 지난 1595년 5월 도요토미는 조선 왕자만 보내면 다른 조건과 상관없이 강화에 응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조선 왕자를 인질로 받아 백성들 앞에서 최소한의 체면이라도 세우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조선 조정의 강력한 반발로 이마저도 수포로 돌아가자 결국 명나라와 일본은 조선통신사와 명나라 사절단(책봉사)을 일본에 보내는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명나라의 책봉사 파견소식을 전해들은 도요토미가 이를 크게 반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도요토미는 막판까지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며 군사들을 다그쳤다. 대외적으로는 요구 수준을 낮추며 계속 강화를 추진했으나 내부적으로는 긴장을 팽팽하게 유지하는 양면전략을 쓴 것이다.

김 박사는 이런 태도가 패전에 따른 자국 내 비판 여론을 단속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분석했다. 실제로 난부 노부나오라는 다이묘는 한 편지에서 “도요토미가 명나라에 조선 4도를 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데 주변에서 직언을 하는 자가 없다”고 하는 등 내부 불만이 점점 확산되고 있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도요토미#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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