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점잖은 양반 문집에 이런 내용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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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 조선시대 ‘가정규범’ 발견
가족 사주 보기… 부적 쓰는 법… 성병 다스리는 약재…

한글사 연구에도 큰 도움 피부병을 예방할 수 있는 목욕법과 임질을 치료할 수 있는 약재(오른쪽 빨간 선)를 소개한 
17세기 박광선의 ‘가정규범’ 원문. 성(性)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리던 조선시대 풍속에 비춰볼 때 이례적인 내용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제공
한글사 연구에도 큰 도움 피부병을 예방할 수 있는 목욕법과 임질을 치료할 수 있는 약재(오른쪽 빨간 선)를 소개한 17세기 박광선의 ‘가정규범’ 원문. 성(性)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리던 조선시대 풍속에 비춰볼 때 이례적인 내용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제공
‘학질을 물리치는 법, 한 무리의 용이 사는데 머리가 9개, 꼬리가 18개다. 무엇을 먹고 사느냐고 물으니 학질 귀신을 잡아먹는다고 했다. 용의 형상을 그린 부적을 만든 뒤 이를 복용하라.’

‘닭을 찌는 법, 닭을 솥에 넣어 삶아내고 그 물에 염교와 온갖 나물을 넣어….’

사주를 보거나 부적을 쓰는 방법, 성병 치료법, 찜닭 만들기 등 이색적인 내용이 적힌 17세기 초반의 조선시대 가정규범(家庭規範)이 발견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올 3월 고령 박씨 문중에서 넘겨받은 고문헌 200여 점 중에서 박광선(1562∼1631)이 쓴 가정규범을 최근 찾아냈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 집안마다 살림 요령을 적어 대대로 전하는 요람(要覽)이 있었지만, 한 권이 온전히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박광선은 스승인 내암 정인홍을 따라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활약했으며, 광해군 시절 북인 정권의 핵심인물로 왕세자를 가르쳤다. 한때 200여 명의 노비를 거느릴 정도였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역적으로 몰려 그와 그의 아들이 사형을 당하는 등 집안 전체가 몰락했다. 이번에 발견된 가정규범은 총 200쪽 분량으로 1610년경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리학의 거두 퇴계 이황을 비판하고 실용적 학풍을 추구한 남명학파답게 박광선의 가정규범은 기존 사대부들의 공식 문집에선 볼 수 없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병을 쫓기 위한 부적 제작법과 가족들의 사주를 기록한 ‘일가오주(一家五柱)’가 대표적이다. 오주는 태어난 연, 월, 일, 시(사주)에 외모를 더해 운수를 점치는 것을 뜻한다. 솥을 집 안에 들여놓을 때 길일(吉日)을 정하는 법과 사당을 지을 때 피해야 할 터까지 소개돼 있어 성리학을 신봉한 사대부들도 실생활에선 전통신앙에 의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사대부들이 요리를 아녀자의 일로만 치부해 무관심했다는 생각은 편견인 셈이다.

각종 질병에 대한 민간처방과 구구단과 같은 자녀교육법 등 실생활에 유용한 비법들도 망라돼 있다. 피부병을 예방하기 위해 석창포(石菖蒲)와 소금을 섞어 목욕물을 만드는 방법과 버짐(백선·白癬)을 치료하기 위한 약재도 소개돼 있다. 특히 버들잎과 창포 잎사귀를 넣어 달이는 임질 치료제가 포함돼 눈길을 끈다. 성(性)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렸던 당시 풍속에 비춰보면 이례적이다.

안승준 한중연 책임연구원은 “이 가정규범은 성리학적 도덕규범에 얽매인 문집과 달리 사대부의 진솔한 모습을 엿볼 수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며 “특히 한자로 표기하기 어려운 조리법의 경우 상당수 한글로 돼 있어 조선 중기 한글사 연구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조선시대 가정규범#양반 문집#사주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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