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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북핵 위기 국면에서 북한과 미국의 비핵화 대화 가능성을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은 서재진 전 통일연구원장이었다. 9월 25일 한 강연회에서 “북핵 위기 상황인 지금이 북핵 폐기를 위한 절호의 기회”라며 “머지않아 6자회담 같은 다자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당시가 어떤 땐가. 열흘 전인 15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 화성-12형을 발사하자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1일 새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북한 경제 봉쇄’를 지시했다. 23일 밤에는 전략폭격기 B-1B 편대를 동해 북방한계선(NLL) 이북 공해상으로 진격시키는 최고의 군사적 압박도 시도했다. 모두가 한반도 제2의 전쟁을 우려할 때였다. 암흑 속에서 여명을 본 것은 ‘세계체제론’이라는 이론적 프리즘을 통해서였다. 그는 2004년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이론에 북한 문제를 대입해 이렇게 주장했다. ‘세계는 하나의 자본주의 체제다. 어떤 나라가 그 체제에 들어가 달러 경제의 혜택을 누릴지는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결정한다. 6·25전쟁 이후 북한은 여러 차례 미국에 세계체제로 가는 티켓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북한은 미국이 외면할 수 없는 카드를 찾아들었다. 바로 핵 개발이다.’ 이런 논리로 한때 풍미했다가 사실상 폐기되는 듯했던 ‘북핵 대화용’ 가설은 12일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앞두고 화려하게 부상했다. 가설에 따르면 북한에 핵 개발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미국의 인정을 받기 위한 수단이다. 미국이 북한에 세계체제 입장 티켓을 발급한다면 핵은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폐기될 예정이었다는 것이다. 최근 상황을 독재자의 생애주기와 경험(the life cycle and experience of dictatorship) 가설로 설명하는 이들도 많다. 김일성종합대 출신인 아버지 김정일이 50대 후반이 되고 나서야 제한적이나마 개혁과 개방에 나섰던 것과 달리 스위스에서 유학한 젊은 지도자 김정은은 7년의 짧은 내부 장악을 거쳐 자신이 꿈꿔온 새로운 대외관계를 실천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정은과 트럼프 대통령이 공동성명에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라는 명확한 목표는 물론이고 그 종착역에 이르는 시간표와 기착역도 구체적으로 담아내지 못한 채 싱가포르를 뜨자 역풍이 커지고 있다. 공동합의문이 완전한 비핵화를 명시했지만 미국 내에서는 ‘북핵 보유용’ 가설이 다시 비상하고 있다. “돼지가 하늘을 날면 모를까(Not until pigs fly) 북한 비핵화는 불가능하다”며 북한이 9·19공동성명을 이행할 가능성이 없다던 2006년 로버트 조지프 전 미 국무부 비확산담당 차관의 발언이 다시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전국에 숨겨 놓은 핵·미사일 시설을 미국이 정말 다 찾아낼 수 있느냐는 ‘탐지능력’ 문제와 폐쇄적인 북한이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수준의 사찰과 검증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수용능력’ 문제도 여전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 군사훈련 중단 발언이 촉발한 국제적인 논란은 과연 우리가 북한이 요구하는 비핵화 대가를 지급할 수 있느냐는 ‘지불능력’ 문제에 다시 불을 지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제 시작일 뿐이고 김정은의 비핵화 진정성을 믿는다”고 이번 합의문을 정치적으로 포장하는 데 애썼다. 하지만 북핵이 ‘대화용’인지 ‘보유용’인지를 둘러싼 오래된 논쟁도 재점화된 것으로 보인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 “김영철은 지금 본인의 능력에 넘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정치군인에 불과한 그에게 북-미 외교와 남북 관계 총책이라는 지금 자리는 분에 넘칩니다. 물론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지만, 나중에 숙청될 운명이 될 수도 있어요.” 역시 외교관 출신 엘리트답게 최근 북-미 대화의 판을 보는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56)의 눈은 예리했다. 지난달 27일 기자와 두 번째 만난 그는 북한 비핵화 북-미 대화 과정에서 불가피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평양 관료정치 갈등’을 한동안 역설했다. 》 “대화가 잘될 때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 삐걱거리면 곧바로 당 조직지도부가 검열에 들어갑니다. 핵문제의 기술적인 부분을 잘 모르는 김정은과 김영철이 잘못 내린 결정이 많을 텐데, 김정은 지시에 따른 것이라도 책임은 김영철이 지게 됩니다. 최고지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고 김정은은 뒷짐 지고 모른 체하겠죠.” 이런 합리적인 추정의 역사적 근거들은 지난달 출간한 ‘태영호 증언: 3층 서기실의 암호’에 넘쳐난다. 실제로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대남협상의 전면에 나섰던 최승철(통일전선부 부부장)과 뒷선에서 지휘했던 한시해(전 유엔 주재 대사)와 권희경(전 주러시아 대사), 이명박 정부 시절 남북 관계에 발을 들였던 류경(국가보위부 부부장)도 총살을 당했다. 그는 “지금 현 상황을 외무상이자 대미협상 베테랑인 이용호가 끌고 나간다면 상당히 오래가겠지만 김영철이 운전하고 있어 언제 갑자기 멈추어설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 현장에 국제 전문가들을 초대하겠다고 남측에 밝혔다가 뒤늦게 철회한 것이 대표적인 ‘삑사리’ 사례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 김영철이 뉴욕을 통해 워싱턴에 입성하기 전날인 1일. 기자와 다시 만난 태 전 공사는 “김정은을 만나더라도 그의 비핵화 진정성을 제대로 파악하면서 천천히 가더라도 한 걸음 한 걸음 잘 확인하고 가야 후회하지 않는다. 주변 보좌관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조언하고 싶다고 말했다. 두 차례의 만남 사이에 북-미 관계만큼이나 큰 변화가 그에게 있었다. 그의 증언록을 읽고 전화를 걸어온 5촌 아저씨 A 씨를 지난달 29일 만난 것이다. 기적처럼 남한에서 혈육을 찾고, 그를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과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사진까지 얻은 그는 그날 밤늦도록 “너무 행복하다”는 문자메시지를 기자에게 연발하며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30일자 동아일보에 단독 보도된 것을 보고 많은 지인이 축하 전화를 해왔어요. 그중에 목사님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제일 어려울 때 신의 가호가 함께한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기도했거든요. 따라서 앞으로 당신과 가족이 하는 모든 일이 잘될 겁니다. 신이 함께하시니까요’라고요.” A 씨도 흡족해하며 전화를 걸어와 고향인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내려온 80대 친구들이 향우회를 하고 있다며 함께 가자고 했다. 지난해 11월 첫 인터뷰를 한 뒤 세 번의 만남 동안 태 전 공사 가족의 교육열을 실감했다. 증언록 곳곳에는 외국에 부임할 때 규정을 피해 자식을 함께 데리고 가서 교육하려는 아버지 태영호의 눈물겨운 노력이 기록되어 있다. 스스로 “국가의 특혜를 많이 받으며 잘나갔다”는 그가 2016년 8월 탈북한 것도 두 아들을 자유로운 환경에서 더 잘 가르치겠다는 일념에서다. 한국에 와 국정원 안가에서 지내는 6개월 동안 태 전 공사는 두 아들과 동아일보 등 한국 대표 신문의 사설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매일 두 시간씩 가졌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는 데 신문 사설만 한 교재가 없다’며 게으름을 경계한 결과 아들들은 한국 사회의 구조와 현안에 익숙해진 상태에서 사회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교육열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분명했다. 증언록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힘 있는 집 아이들은 다 영어학부를 신청한다. 앞으로는 영어가 대세라는 뜻이다”라며 “러시아어를 배워야 소련에라도 가지, 미국 놈 말은 배워 뭘 하느냐”던 아버지를 설득해 아들을 평양외국어학원 영어학부에 보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한국에 와 이제 민간인의 몸이 된 자신에게 뭘 하라고 다그쳤을지 가끔씩 생각하곤 한다. ‘잘 먹고 잘살려고 한국에 온 것이 아니다. 노예 상태인 북한 주민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자유와 풍요로움을 선사하기 위해 투쟁하러 온 것이다’라는 결심으로 공무원 신분이나 다름없는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직을 과감하게 벗어 던진 것도 그런 고민의 결과다. 우선 이해될 듯하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한국 사회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요즘도 주요 신문 사설을 모아 소개하는 휴대전화 앱을 빼놓지 않고 본다는 그는 “신문마다 같은 사안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을 보면서 한국 사회의 다양한 토론 문화를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침마다 채널A의 ‘돌직구쇼’를 즐겨 보며 한국 사회 내의 다양한 쟁점과 입장에 대해서 간접경험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진보와 보수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관찰 결과를 내놓았다. “진보는 선전에 능하고 개인과 조직들이 매우 전략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봅니다. 4·27 정상회담만 보더라도 보는 것이 믿는 것(Seeing is Believing)이라는 구호를 들고 생중계를 통해 김정은의 이미지를 바꾸어 놓지 않았습니까? 독재자 김정은이 하루아침에 근사한 젊은 지도자로 탈바꿈하지 않았는가 말입니다.” 그는 “진보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바탕인 시민단체 네트워크들을 잘 활용하는 것 같다”며 “반면 보수는 목소리들이 잘 모아지지 않는다. 몇몇 정치인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조직들이 지도자를 잃자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형국”이라고 했다. “상대적으로 풍요한 보수 진영 인사들은 사회적인 논쟁에 굳이 참여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반면 진보 진영은 이른바 ‘헝그리 정신’으로 뭉치는 것 같아요. 창출된 소득을 이제는 시민사회에 평등하게 나눠주어야 한다는 지금 정부의 생각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다가 그리스처럼 되는 것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김정은의 비핵화 진정성을 믿지 않는다. 증언록에 따르면 북한은 이미 2016년 5월 제7차 노동당대회에서 2017년까지를 핵무력 완성 시기로, 2018년부터는 ‘핵보유를 위한 평화환경의 조성 시기’로 정했다. 핵보유국이 되는 과정은 인도와 파키스탄 모델을 따르기로 했다. 단기간에 핵과 미사일 발사 시험을 마무리 짓고 동결 선언을 한 다음 평화 공세를 벌여 자연스럽게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일부 전문가라는 사람들에 의해 알려지고 해석되는 북한의 생각과 모습은 진짜 북한과 너무 차이가 납니다. 예를 들어 일부 전문가가 북한이 핵·미사일 능력을 다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데는 동의하면서도 몇 개 숨겨놓은 핵무기는 정치적 레버리지가 되지 못해 한국이나 일본에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애써 자위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비핵화로 포장된 핵보유국이 되려는 김정은의 전략에 말려드는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는 “누군가는 있는 그대로의 북한 실상을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 내가 그 소임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구체적인 방안도 구상해 놨다. 그를 따르고 지원하는 지인들이 옆에서 힘이 되고 있다. 지난달 27일 모임도 그의 새 출발을 응원하기 위해 지인들이 만든 자리였다. 그도 나도 무신론자이지만 그에게 외쳐줬다. “신의 가호가 함께할 것입니다. 본디 인간이 하늘이니까요.”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북한 김정은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한 자서전 ‘3층 서기실의 암호’를 출간한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가 23일 오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 사표를 제출했다. 연구원 측은 태 전 공사의 사표를 즉시 수리했다. 이에 앞서 북한은 태 전 공사의 자서전 내용과 국회 발언 등을 문제로 삼아 문재인 정부에 조치를 요구했다. 태 전 공사의 한 측근은 “14일 국회 발언에 대해 북한이 거세게 항의하고 국내에서도 논란이 일자 사직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에 대한 불안한 마음 때문인지 예정된 일정들을 취소한 상태”라고 전했다. 태 전 공사는 사직 이후 저술활동에 집중하면서 자서전을 외국어 판으로 내는 등 북한 체제의 문제점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일에 매진할 것으로 알려졌다. 태 전 공사는 이날 국회에서 자유한국당 심재철 의원이 주최한 남북관계 전망 토론회에 참석해 14일 “핵 폐기는 북한 체제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북한의 진정한 핵 폐기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김정은에 대해 “성격이 대단히 급하고 즉흥적이며 거칠다”고 묘사하면서 2015년 자라 양식공장 현지지도 직후 지배인 총살 사건 등을 언급했다. 대남 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는 19일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 등을 겨냥해 “남조선 당국은 사태가 더 험하게 번지기 전에 탈북자 버러지들의 망동에 특단의 대책을 취해야 할 것”이라고 다시 요구했다. 태 전 공사는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6년 8월 영국에서 가족과 함께 망명해 한국에 정착한 뒤 연구원에서 근무해왔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대외활동의 범위와 내용 등을 놓고 원구원 측과 종종 갈등을 빚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연구원 측은 “그의 대외활동은 전적으로 그의 자유의사에 맡겼다”고 반박해 왔다.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2006년 6월 처음 미국 뉴욕을 방문했을 때 새벽마다 수십 명씩 무리지어 맨해튼 센트럴파크를 자전거로 누비는 젊은이들이 특히 좋은 볼거리였다. 세계 금융의 본산지인 뉴욕의 위상을 감안할 때 저들 중 상당수는 월가에서 일하는 야심만만한 젊은이, 즉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명명한 ‘전자 투자가’들일 가능성이 컸다. ‘아! 북한이 문을 열면 저들이 각종 금융회사와 펀드들의 대북 투자를 결정하겠구나’ 생각하니 존재감이 달라보였다. 북한 경제 공부를 좀 더 하고 나서 국제금융업계의 대북 투자를 결정하는 주체는 뉴욕의 민간 투자자가 아니라 세계 정치의 중심 워싱턴 DC에 본부를 둔 국제통화기금(IMF),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을 필두로 하는 세계은행(WB) 그룹 임을 알게 됐다. 이 국제금융기구들이 글로벌 공적자금을 조성하는 등 초기 투자 여건을 마련하고, 그 결과 투자에 따르는 위험이 헤지(분산)된 후에야 민간 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이 국제금융기구의 일반 금융지원은 회원국에게만 적용된다. 회원국이 될 자격은 대주주인 미국이 사실상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북한이 국제금융기구의 금융 지원을 받으려면 백악관과 재무부의 최종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뜻이다. 1944년 브레튼우즈 협정을 통해 IMF와 IBRD 등을 만든 미국은 IMF를 사실상 ‘지배’한다. 미국은 IMF 지분 17.46%를 보유한 최대주주이며 189개 회원국 중 유일하게 거부권도 행사한다. IBRD 역시 미국이 최대주주(지분율 16.88%)다.<그래프> 주요 7개국 IMF 및 IBRD 지분율 IMF는 국제 금융체계의 안정을 위해 설립된 정치적 성격의 기구다. 하지만 북한과 같은 저개발국 원조 및 장기 저리 자금 대출은 세계은행이 좌지우지한다. 북한이 세계은행 회원국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IMF에 가입해야 한다. IMF 가입은 ‘총 투표권 수의 3분의 2 이상을 가진 과반수 이상 위원의 참석과 찬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실상 총재 선임 권한을 가진 미국이 승낙하면 나머지 주요 국가들이 추인하면서 가입이 이뤄진다. 최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행보에 따라 북한의 IMF 가입설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비핵화에 대한 대가로 IMF 가입 길을 터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북한의 IMF와 세계은행 가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주요 포스트에 한국계가 포진하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1997년 한국의 IMF 구제금융 협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아시아태평양 담당국장은 이창용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아시아개발은행(ADB) 수석 이코노미스트다. 한국계인 김용 전 다트머스대 총장 역시 6년째 세계은행 총재로 재직 중이다. 김 총재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임명했음에도 트럼프 정권 출범 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워싱턴 국제금융계에서 “이창용과 김용이 있을 때 북한이 IMF와 IBRD 식구가 되는 것이 낫다”는 평가가 심심찮게 나오는 이유다. 김용 총재는 2013년 11월 22일 당시 워싱턴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기자를 포함한 일부 특파원단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 문제에 ‘정치적 돌파구’가 생길 때 세계은행은 언제든 (북한 사업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세계은행)는 북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찾을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을 추적하고 있다. 돌파구만 생기면 우리가 매우 빨리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다”며 “이를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한국개발연구원(KDI) 및 한국의 다른 전문가들과 가깝게 일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당시 북한은 3차 핵 실험(2013년 2월)을 한 뒤 국제 사회와 대화 국면을 조성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김 총재가 강조한 북한 문제의 ‘정치적 돌파구’란 북한이 핵·미사일 프로그램 개발을 포기하고 개혁과 개방을 통해 국제 사회의 건전한 일원이 되는 정치적 변화였다. 김 총재는 이 때 세계은행이 IMF, ADB 등과 함께 북한 재건을 위한 장기 저리 자금을 지원하는 ‘큰 손’ 역할을 하겠다는 뜻을 천명한 셈이다. 세계은행은 당시 개설한 한국 사무소와 중국 베이징 사무소를 통해 북한 가입에 대비한 사전 준비 작업을 벌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더라도 IMF, IBRD, ADB 등에 가입해 장기 저리의 현금 지원을 받으려면 상당기간 과감한 내부 경제 개혁부터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임을출 연구교수는 2007년 12월 통일연구원을 통해 발행한 ‘국제금융기구의 북한 개입’ 보고서에서 “북한은 먼저 제도나 정책 개선과 관련된 국제사회의 규범과 원칙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주요 전제 조건인 ‘공공 거버넌스(governance)’의 개선과 관련해서는 “(지원 자금에 대한) 투명하고 책임성 있는 공적 관리 능력이 필수”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IMF 한국 대리이사를 지낸 최광해 우리금융경영연구소 대표대행은 “오랜 내전을 겪어 사실상 무정부 상태인 소말리아도 IMF 회원국인 것을 보면 북한의 가입이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결국 미국이 허락하느냐가 중요하다”며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하겠다는 진심을 보이는 것이 관건”이라고 했다. 국제금융계에서는 북한이 확실한 비핵화 의지를 보이고 미국이 이를 허용하더라도 IMF 회원국이 되는데 필요한 통계 작업, 심사 등을 감안하면 최소 2, 3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신속한 민간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북한의 IMF 가입 전이라도 한국, 일본, 유럽연합(EU) 등과 함께 북한개발신탁기금(트러스트 펀드)을 우선 조성할 가능성이 크다. 세계은행이 이 기금을 대신 운영하면서 북한 개발의 초기 자금을 제공하고 각국 민간 금융회사와 펀드 등이 뒤따라오는 동안 북한의 IMF와 세계은행 가입이 마무리되면 본격적인 국제 공적자금이 투입된다. 이는 북한경제 재건 비용 및 한반도 통일비용에 대한 한국 정부와 민간의 장기 부담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위원장이 확실한 비핵화 의지를 가졌다면 미국과의 물 밑 협상에서 IMF 가입을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도 이를 협상 카드로 활용할 것이다. 결국 열쇠는 김 위원장이 쥐고 있다. 과연 그의 진심은 어디에 있을까.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은둔의 북한 3대 세습 후계자였던 당신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그날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2010년 10월 10일 노동당 창건일 열병식에서 당신은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김일성광장 주석단에 올랐지요. 이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물려받게 된 절대 권력자였지만 아직 세상이 궁금한 것 같은 앳된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공교롭게도 같은 날 새벽 세상을 떠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부음기사를 쓰다 조선중앙TV 속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 할아버지가 만든 ‘주체 사상’의 이론가였고 2대 세습 후계자였던 당신의 아버지가 싫어 1997년에 서울로 망명한 황장엽은 사망 열흘 전 나를 만나 당신에 관한 유언을 남겼습니다. “벌써부터 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는 것은 이르지, 그럼. 이제 막 얼굴을 드러냈을 뿐이니 시간을 가지고 좀 지켜보자우. 그가 잘해서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이끌고 가면 칭찬을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비판을 하면 된다 이거우.” 이후 지금까지 그 유언을 따르려 노력했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동안 칭찬보다는 비판을 더 많이 했습니다. 아버지를 여의고 6년 4개월 동안 당신의 말과 행동은 아버지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측면에선 더 과격하게 국제사회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당신을 키워준 것이나 다름없는 고모의 남편과, 당신을 피해 이역만리를 떠도는 배다른 친형의 목숨을 잔인하게 거뒀습니다. 헌법에 핵보유국임을 명시하고 2016년 1월 6일 4차 핵실험 이후 2년 가까이 핵 무력 완성 놀음을 벌여 한반도를 전쟁의 위협에 떨게 했습니다. 오늘 당신은 한반도 분단의 상징인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문재인 대통령과 악수하며 활짝 웃었습니다. 도보다리 위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며 진지하고 솔직한 인상을 전하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2007년 이후 11년 만에 남북 정상이 서명한 ‘판문점 선언’엔 기대했던 구체적 ‘북한 비핵화’ 방법론이 담기지 않았습니다. 억울할지 모르지만 세계에는 당신의 비핵화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습니다. 마크 내퍼 주한 미국대사 대리는 최근 기자와 당신 문제를 놓고 토론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내심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옛 소련과 대화하면서 ‘신뢰하라 그러나 검증하라(Trust but Verify)’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북한 김정은)엔 ‘불신하라 그리고 검증하라(Distrust and Verify)’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도권을 잃지 말라’는 게 당신의 원칙인가 본데, 그 점에선 성공하고 있다고 평가해 드리겠습니다. 이른바 전문가들도 당신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북한의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당신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명심하십시오. 국제사회는 대화로 시간을 벌고 다시 도발에 나서는 김 씨 집안의 생존술을 더 이상 참아줄 인내심을 잃었습니다. 반대로 당신이 정말 핵 없는 정상 국가를 만들고 개혁개방의 길을 선택한다면, 힘을 보탤 마음의 준비가 된 듯합니다. 그땐 모두가 황장엽의 유언처럼 당신을 칭찬할 것입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북한 노동당전원회의의 21일 발표는 가장 최근 북미간 합의인 2012년 2·29합의(이른바 윤달합의)보다 앞서나간 측면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핵과 미사일 발사 시험의 유예(모라토리엄)만 약속했는데 이번에는 풍계리 핵실험장의 폐기가 포함됐습니다. 물론 당시 포함되어 있었던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등은 빠져 있지만, 향후 북미협상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논의될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북미협상을 통해 제거되어야 하는 북한 핵을 통상 현재 핵, 미래 핵, 과거 핵으로 구분합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현재 핵은 붕어빵을 만드는 불판, 과거 핵은 이미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 둔 붕어빵, 미래 핵은 향후 붕어빵을 만들 수 있는 밀가루 반죽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비밀 접촉 과정에서 김정은에게 “북미 정상회담 전에 현재 핵에 대한 포기 선언을 해 미국인과 전세계인들에게 진정성을 보이라”고 요구한 것으로 보입니다.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시리아의 화학무기 기지 공습을 북한 김정은 정권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14일 오전(한국 시간) 공개된 이번 작전이 북한의 비핵화 의지와 다가올 북미 정상회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15일 오전 방송된 채널A의 시사보도프로그램 ‘선데이모닝쇼’에 출연해 김정은의 마음 속을 상상해 봤습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첫 방중은 꼭 18년 전 아버지 김정일의 첫 중국 방문 당시와 비슷한 점이 많다.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2인자 시절인 1983년 중국을 방문했지만 1994년 김 주석이 사망하고 1997년 노동당 총비서, 1998년 국방위원장 자리를 차지해 공식적인 최고지도자가 된 뒤인 2000년 5월 29일 처음으로 베이징(北京)을 찾았다. 이번과 마찬가지로 북한과 중국은 김정일 방중의 전 과정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김정일이 전용열차인 ‘1호 열차’를 타고 베이징에 와 다음 날인 5월 30일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그의 귀국길이 시작된 31일 베이징 주재 서방 외교관들을 통해서였다. 김정은이 다음 달 문재인 대통령과의 사상 세 번째 남북 정상회담을 한 달 앞두고 있는 것처럼 김정일도 김대중 대통령과의 역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을 한 달도 채 남기지 않고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4월 1일자)는 김정일의 깜짝 방중 목적에 대해 “남북 정상회담에 임하는 북한의 입장, 향후 국제관계 변화와 중국의 지속적인 지원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서방 외교관을 인용해 전했다. 이번 김정은의 방중이 남북 정상회담과 5월로 예정된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양국의 전략적 소통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8년 전 김정일은 베이징에 2박 3일 동안 머물며 톈안먼(天安門) 망루에 오르고 롄샹(聯想)그룹 컴퓨터 생산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25일 평양을 출발해 중국 단둥(丹東)시를 넘어 26일 베이징에 도착한 김정은 일행이 27일 바로 귀국할 경우 18년 전 김정일과 비슷한 2박 3일 중국에 체류하는 같은 일정이 된다. 김정일의 2∼7차 방중 사례에 따르면 일정이 더 길어질 수도 있다. 김정일은 2011년 12월 17일 사망하기까지 여섯 차례 더 방중하는 동안 베이징에서의 정상회담 앞뒤로 중국 지역을 여행해 최장 8박 9일(2006년 1월 10∼18일) 동안 체류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남북 및 북-미 회담 준비에 바쁠 김정은은 짧은 실무 방문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몇 가지 공통점을 제외하면 김정은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18년 전과 판이하다. 당시 북한은 핵 실험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상태였고,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도 대화를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북한은 여섯 번이나 핵실험을 했고 미국 본토를 공격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을 눈앞에 둔 상태다. 김정은은 완전한 비핵화냐 미국의 군사공격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막다른 교차로에 서 있다. 생전 김정일을 베이징에 불러들여 ‘중국식 개혁개방’을 다정스럽게 촉구했던 중국은 2013년 시진핑(習近平) 주석 취임 이후 거듭된 김정은의 만행에 후원국으로서의 외교적 지원을 포기하다시피 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국제사회의 반응 역시 아버지 김정일의 집권 초기 방중을 ‘북한의 정상국가화’를 향한 좋은 신호로 받아들였던 과거와 달리 시큰둥한 상황이다. 실제로 집권 초기 김정일에게 중국 방문은 김씨 일가 세습 독재라는 낡은 정치 틀을 유지하면서 경제에 시장 메커니즘을 조금씩 이식하는 ‘북한식 개혁개방’의 현장 학습이었다. 김정일은 첫 방중 뒤 1년이 채 안 된 2001년 1월 15일부터 5박 6일 동안 중국 서부 해안가 경제 개혁개방 특구의 상징인 상하이(上海) 푸둥지구 등 첨단 산업 금융도시를 방문했다. 그는 “천지개벽할 정도로 변했다”며 덩샤오핑(鄧小平) 주석이 추동한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음을 털어놓았다. 이듬해인 2002년 7월 1일 ‘경제관리 개선조치’와 2003년 종합시장 허용 등의 조치로 구체화했다. 스텔스 기능 등 최첨단 보안장비를 갖췄다고는 하지만 열차를 이용한 장거리 여행은 김정일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했다. 2004년 4월 3차 방중에서 김정일은 새로 취임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회담하고 톈진(天津) 등의 경제시설을 방문했다. 하지만 귀국 하루 뒤 용천역 폭발 사고를 보고받았다. 2010년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주민 2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당시 사고가 “김정일 암살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공식 보도했다. 2005년 가을을 고비로 이전의 경제 개혁개방을 뒷걸음질시키는 가운데 이뤄진 이후 네 차례의 방중은 늙고 쇠한 정치인 김정일의 내리막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2005년 국제사회와 9·19공동성명을 발표한 직후인 2006년 1월 네 번째 방중에 나섰던 그는 10월 9일 돌연 1차 핵실험을 하며 돌아올 수 없는 ‘핵보유국 놀음’을 시작했다. 2008년 8월 뇌혈관계 질환으로 쓰러졌다 일어난 뒤 세 번의 방중은 죽음을 눈앞에 둔 노정치인의 바깥나들이와 다름없었다. 사망 직전인 2011년 5월 마지막 중국 여행에서 그는 휠체어에 의존한 채 대부분의 시간을 전용열차 안에서 보냈다. 신석호 기자·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첫 방중은 꼭 18년 전 아버지 김정일의 첫 중국 방문 당시와 비슷한 점이 많다.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2인자 시절인 1983년 중국을 방문했지만 1994년 김 주석이 사망하고 1997년 노동당 총비서, 1998년 국방위원장 자리를 차지해 공식적인 최고지도자가 된 뒤인 2000년 5월 29일 처음으로 베이징(北京)을 찾았다. 이번과 마찬가지로 북한과 중국은 김정일 방중의 전 과정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김정일이 전용열차인 ‘1호 열차’를 타고 베이징에 와 다음 날인 5월 30일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그의 귀국길이 시작된 31일 베이징 주재 서방 외교관들을 통해서였다. 김정은이 다음달 문재인 대통령과의 사상 세 번째 남북 정상회담을 한 달 앞두고 있는 것처럼 김정일도 김대중 대통령과의 역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을 한 달도 채 남기지 않고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4월 1일자)는 김정일의 깜짝 방중 목적에 대해 “남북 정상회담에 임하는 북한의 입장, 향후 국제관계 변화와 중국의 지속적인 지원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서방 외교관을 인용해 전했다. 이번 김정은의 방중이 남북 정상회담과 5월로 예정된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양국의 전략적 소통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8년 전 김정일은 베이징에 2박 3일 동안 머물며 톈안먼(天安門) 망루에 오르고 롄샹(聯想) 그룹 컴퓨터 생산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25일 평양을 출발해 중국 단둥(丹東)시를 넘어 26일 베이징에 도착한 김정은 일행이 27일 바로 귀국할 경우 18년 전 김정일과 비슷한 2박 3일 중국에 체류하는 같은 일정이 된다. 김정일의 2~7차 방북 사례에 따르면 일정이 더 길어질 수도 있다. 김정일은 2011년 12월 17일 사망하기까지 여섯 차례 더 방중하는 동안 베이징에서의 정상회담 앞뒤로 중국 지역을 여행해 최장 8박 9일(2006년 1월 10~18일) 동안 체류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남북 및 북미 회담 준비에 바쁠 김정은은 짧은 실무 방문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몇 가지 공통점을 제외하면 김정은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18년 전과 판이하게 다르다. 당시 북한은 핵 실험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상태였고,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도 대화를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북한은 여섯 번이나 핵실험을 했고 미국 본토를 공격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을 눈앞에 둔 상태다. 김정은은 완전한 비핵화냐 미국의 군사공격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막다른 교차로에 서 있다. 생전 김정일을 베이징에 불러들여 ‘중국식 개혁개방’을 다정스럽게 촉구했던 중국은 2013년 시진핑(習近平) 주석 취임 이후 거듭된 김정은의 만행에 후원국으로서의 외교적 지원을 포기하다시피 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국제사회의 반응 역시 아버지 김정일의 집권 초기 방중을 ‘북한의 정상국가화’를 향한 좋은 신호로 받아들였던 과거와 달리 시큰둥한 상황이다. 실제로 집권 초기 김정일에게 중국 방문은 김씨 일가 세습 독재라는 낡은 정치 틀을 유지하면서 경제에 시장 메커니즘을 조금씩 이식하는 ‘북한 식 개혁개방’의 현장 학습이었다. 김정일은 첫 방중 뒤 1년이 채 안 된 2001년 1월 15일부터 5박 6일 동안 중국 서부 해안가 경제 개혁개방 특구의 상징인 상하이(上海) 푸둥지구 등 첨단 산업 금융도시를 방문했다. 그는 “천지개벽할 정도로 변했다”며 덩샤오핑(鄧小平) 주석이 추동한 중국의 개혁 개방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음을 털어놓았다. 이듬해인 2002년 7월 1일 ‘경제관리 개선조치’와 2003년 종합시장 허용 등의 조치로 구체화했다. 스텔스 기능 등 최첨단 보안 장비를 갖췄다고는 하지만 열차를 이용한 장거리 여행은 김정일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했다. 2004년 4월 3차 방중에서 김정일은 새로 취임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회담하고 톈진(天津) 등의 경제시설을 방문했다. 하지만 귀국 하루 뒤용천역 폭발 사고를 보고받았다. 2010년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주민 2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당시 사고가 “김정일 암살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공식 보도했다. 2005년 가을을 고비로 이전의 경제 개혁·개방을 뒷걸음질시키는 가운데 이뤄진 이후 네 차례의 방중은 늙고 쇠한 정치인 김정일의 내리막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2005년 국제사회와 9·19 공동성명을 발표한 직후 2006년 1월 네 번째 방중에 나섰던 그는 10월 9일 돌연 1차 핵실험을 하며 돌아올 수 없는 ‘핵보유국 놀음’을 시작했다. 2008년 8월 뇌혈관계 질환으로 쓰려졌다 일어난 뒤 세 번의 방중은 죽음을 눈앞에 둔 노 정치인의 바깥나들에 다름 아니었다. 사망 직전인 2011년 5월 마지막 중국 여행에서 그는 휠체어에 의존한 채 대부분의 시간을 전용열차 안에서 보냈다.신석호 기자·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며칠 전 선배의 장모상에 조문을 갔다가 일군의 법학 교수들과 대화를 나눴다. 많은 주제가 오갔지만 단연 김정은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 전망이 관심사였다. 대체로 낙관보단 우려가 많았는데 A 교수의 질문은 북한학 박사급이었다. “도대체 북한이 바라는 체제 보장이라는 게 뭔가요? 미국이 안 때린다는 약속은 그렇고, 대대로 원한에 사무친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을 테러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것도 포함되는 건가요?” 이 문제를 두고 북한학계에선 북한 체제에 ‘수용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말로는 그토록 원하는 북-미 수교와 경제 지원을 북한 스스로가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른 정치·경제적 개혁과 개방이 김씨 3대 세습독재의 취약성을 증가시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우선 ‘미국이 쳐들어온다. 그래서 핵·미사일을 가져야 한다. 그때까지는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다’는 그간 김씨 3대 세습 독재자들의 거짓말이 탄로 난다. 미국을 따라 자유세계의 사람과 돈이 유입되고 이제 살 만해진 북한 주민들이 ‘정치도 좀 바꿔보자’고 나서면 김정은 일가의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 요컨대 최근 북-미 대화 정국에서의 핵심은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로 경제위기에 처한 김정은이 어디까지 정치적 리스크를 감내할 것인지에 있다. 그래서 북한은 미래의 협상자원인 비밀 핵·미사일 시설을 최대한 숨긴 채 제재를 풀기 위한 협상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미국은 ‘탐지능력’의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김씨 3대가 북한 곳곳에 꽁꽁 숨겨놓은 핵·미사일 시설을 어떻게 다 찾겠다는 말인가? 북한은 찔끔찔끔 하나씩 공개하며 건건이 값을 매기는 ‘살라미’의 천재다. 설령 김정은이 ‘통 크게’ 모든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공개했다 치자. 이젠 한국의 ‘지불능력’이 문제다. 북핵 문제 해결에 전향적이었던 민주당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낸 뒤 경수로 건설에 들어가는 비용은 한국에 떠넘겼다.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며 동맹국들을 상대로 군사비 증액과 통상협정 개정을 요구하는 트럼프 정부가 어떻게 할지는 안 봐도 뻔하다. 고공 지지율을 자랑하는 문재인 정부지만 청년 일자리와 은퇴자 노후 보장에 써야 할 재정을 밑도 끝도 안 보이는 북한 개발에 돌릴 수 있을까? 북한도 미국도 한국도 능력에 부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비관적인 결론에 이를 무렵 듣고 있던 B 교수가 “너무 비관적인 이야기만 말고, 무슨 좋은 수가 없느냐”고 인간적인 질문을 던졌다. 순간 잠재의식 속을 뱅뱅 맴돌던 한 가지 아이디어가 의식 속으로 떠올랐다. “북한의 지금 체제를 100% 그대로 보장해 준다는 전제에서만 자유로워지면 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유럽의 작은 공국(公國) 같은 모델을 꿈꿔볼 수는 있습니다.” 김정은이 평양 도심 지역 내로 주권을 한정하고 대대로 김씨 일가에 충성해 온 로열패밀리만 데리고 산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 한국 등 5개국은 평양 ‘김정은 공국’의 안보와 안전을 보장한다. 미국이 중국과 함께 그곳의 비핵화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외 지역의 핵·미사일 탐지 및 제거는 천천히 하면 된다. 한국은 자체 신용으로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월가의 각종 민간 펀드를 끌어올 수 있다. 김정은 공국 유지비쯤이야 해방된 북한 지역 개발 이익으로 조달할 수 있다. 김정은이 원하는 체제 보장이 ‘김씨 왕조의 영속’이라면, 그다지 비현실적인 대안도 아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
10년 전 그곳에 갔을 땐 오늘날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다음달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마주 앉을 것으로 보이는 판문점 평화의 집 남북회담장은 역사의 무거움이 두 어깨에 그대로 내려앉는 듯 긴장이 가득했다. 이명박 정부 첫 해인 2008년 6월 28일 통일부 출입 기자 신분으로 고려대와 숙명여대 대학원생 20여 명과 함께 공동경비구역(JSA)을 방문했을 때였다. 다음 달 11일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 사망 사건으로 남북관계가 절단 나기 전이었지만 북한 군부는 이미 한국 정부의 3통(통행, 통신, 통관) 합의 불이행을 근거로 ‘금강산 관광사업과 개성공단사업 위기론’을 들고 나오고 있었다. 북한은 그 달 24일부터 오전에 개성공단에서 남측으로의 인력과 물자 이동을 막기 시작했다. 일행은 JSA에 들어가기 전 유엔군사령부의 최전방 경비대대인 ‘캠프 보니파스’에 들린 뒤 서약서에 사인부터 해야 했다. 유엔군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방문은 적대지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며 북한 도발의 결과로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 어떤 불평이 있더라도 유엔군 사령부 전방기지에 돌아온 후 제기한다”며 사인하라고 했다. 학생들은 1976년 ‘도끼만행사건’과 1984년 소련인 망명 때의 총격사건 등 북한의 도발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며 분단의 현장을 체험했다. 중립지역에 속하는 평화의집은 문재인 정부는 물론이고 이명박 박근혜 정부때도 남북회담장으로 자주 사용됐다. 올해 1월 9일 고위급회담과 17일 고위급회담 차관급 실무회담이 이곳에서 열렸다. 박근혜 정부 3년차인 2015년 8월 열린 김관진 당시 국가안보실장과 홍용표 통일부 장관과 황병서 북한 인민군 총정치국장, 김양건 노동당 비서 간의 남북 고위당국자 접촉도 이곳에서 진행됐다. 하지만 이곳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는 것은 처음이다. 실용을 강조했던 이명박 정부는 출범 직후 이곳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자는 아이디어를 제기했다. 2009년 8월 김대중 대통령 빈소에 북측 조문단이 내려오면서 정상회담 논의가 이뤄졌지만 가을 싱가포르 비밀접촉의 합의 이행이 무산되면서 정상회담 자체가 이뤄지지 못했다. 평창겨울올림픽으로 미뤄진 한미연합군사훈련의 끝 무렵에 열리게 되는 제3차 남북정상회담은 그 내용만큼 형식도 전 세계의 주목을 끌 것으로 보인다. 판문점에서의 정상회담이 정례화 되면 양 정상이 과도한 의전과 비용 부담을 덜고 실무적인 만남을 자주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해서 남북 분단과 대결의 상징적인 장소였던 판문점과 평화의 집이 통일과 민족 화해의 산실로 거듭나길 기원한다. 희망이 현실이 될지는 오로지 3·5합의에 대한 김정은의 진정성 여부에 달려있다.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北核(북핵) 解決(해결)은 우리의 召命(소명)입니다.”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김정은을 만나는 특사로 평양행 비행기를 탔다는 뉴스 특보를 듣자마자 6년 전 직접 얻은 그의 저서를 다시 펼쳐봤다. 동국대 북한학 박사 출신인 그가 2012년 2월 24일 이화여대 교수실을 찾은 기자에게 건네며 속표지에 적어준 글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1993년과 2003년 시작된 북핵 1, 2차 위기를 소재로 ‘북한의 선군외교 연구: 약소국의 대미 강압외교 관점에서’라는 학위 논문을 쓴 그는 자신이 국정원 3차장으로 재직했던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 맺어진 2·13합의와 10·3합의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무력화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북한을 끌어안고 미국과 대화시켜 둘의 구원(舊怨)을 풀어주면 ‘북핵 해결’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2012년 12월 대선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지원하며 정치의 길에 들어섰다. 주군이 선거에 져 다시 4년여 인고의 시간을 거친 그는 최순실 국정 농단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라는 순풍을 만나 지금의 자리까지 날아올랐다. 급기야 김정은에 대한 첫 남한 특사단의 핵심 인사가 된 그는 ‘북핵 해결은 소명’이라는 초심을 잃지 않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국정원을 떠나며 북한학 박사가 된 뒤 9년여 동안 상황이 악화된 나머지 자신의 특기인 대화와 협상만으로 문제를 풀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정보 수장이 된 뒤에도 남북 대화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한동안 “쉽지 않다. 전망이 밝지는 않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현직 시절 평생을 외교 현장에서 보낸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역시 지금 상황을 외교로만 풀 수 있다는 기대에 의심을 가진 지 오래됐을 법하다. 평양 방문이 처음인 그 역시 취임 이후 핵개발과 저지를 둘러싼 북-미 간의 치열한 물밑 외교전과 군사분계선을 가운데 두고 벌어지는 군사적 긴장 상황을 청와대 지하 벙커에서 몸소 체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이들은 둘을 ‘대북 협상 전문가’와 ‘허버트 맥매스터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연결되는 대미 외교라인’이라고 치켜세우고 있지만 그건 절반뿐이다. 분단국인 대한민국의 국정원장은 대화와 협상뿐만 아니라 치열하고 교묘한 대북 공작을 통해 북한 3대 세습체제를 이완시키고 개혁 개방과 통일의 길에 들어서도록 할 의무도 갖는다. 국가안보실장 역시 북-미의 외교적 중매자 역할과 동시에 북한이 레드라인을 넘어 미국의 군사적 공격을 자초하는 절명의 상황에 동맹국을 도와 작전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하는 안보 수장 역할도 맡고 있다. 물론 겹겹의 제재에 달러가 마르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핵·미사일 기지 폭격과 참수 위협에 시달리는 평양의 초대자들은 ‘약자 코스프레’ 작전으로 나올 것이다. ‘공화국의 핵무력은 미제의 침략전쟁을 막기 위한 자위용’이라고 강변할 것이다. 그러곤 특사단의 1박 2일을 김씨 3대 세습체제의 유지를 위한 선전에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두 사람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상황을 마음으로 반대했다. 하지만 이미 군사분계선을 넘은 그들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싶다. “대통령의 특사단으로 예의는 갖춰야 하겠지만, 부디 대한민국의 안보와 정보 수장이라는 본분과 존엄을 잊지 마시오.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권한과 책임으로 그들이 두려움을 가질 수 있도록 하세요. 세계가 지켜보고 있고, 역사가 후대에 남길 것입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
“北核(북핵) 解決(해결)은 우리의 召命(소명)입니다.”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김정은을 만나는 특사로 평양행 비행기를 탔다는 뉴스 특보를 듣자마자 6년 전 직접 얻은 그의 저서를 다시 펼쳐봤다. 동국대 북한학 박사 출신인 그가 2012년 2월 24일 이화여대 교수실을 찾은 기자에게 건네며 속표지에 적어준 글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1993년과 2003년 시작된 북핵 1, 2차 위기를 소재로 ‘북한의 선군외교 연구: 약소국의 대미 강압외교 관점에서’라는 학위 논문을 쓴 그는 자신이 국정원 3차장으로 재직했던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 맺어진 2·13합의와 10·3합의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무력화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북한을 끌어안고 미국과 대화시켜 둘의 구원(舊怨)을 풀어주면 ‘북핵 해결’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2012년 12월 대선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지원하며 정치의 길에 들어섰다. 주군이 선거에 져 다시 4년 가까운 인고의 시간을 거친 그는 최순실 국정농단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라는 순풍을 만나 지금의 자리까지 날아올랐다. 급기야 김정은에 대한 첫 남한 특사단의 핵심 인사가 된 그는 ‘북핵 해결은 소명’이라는 초심을 잃지 않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국정원을 떠나며 북한학 박사가 된 뒤 9년여 동안 상황이 악화된 나머지 자신의 특기인 대화와 협상만으로 문제를 풀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정보 수장이 된 뒤에도 남북 대화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한동안 “쉽지 않다. 전망이 밝지는 않다”고 입에 달고 다녔다. 현직 시절 평생을 외교 현장에서 보낸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역시 지금 상황을 외교로만 풀 수 있다는 기대에 의심을 가진 지 오래됐을 법하다. 평양 방문이 처음인 그 역시 취임 이후 핵개발과 저지를 둘러싼 북-미 간의 치열한 물밑 외교전과 군사분계선을 가운데 두고 벌어지는 군사적 긴장 상황을 청와대 지하 벙커에서 몸소 체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이들은 둘을 ‘대북 협상 전문가’와 ‘허버트 맥매스터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연결되는 대미 외교라인’이라고 치켜세우고 있지만 그건 절반뿐이다. 분단국인 대한민국의 국정원장은 대화와 협상뿐만 아니라 치열하고 교묘한 대북 공작을 통해 북한 3대 세습체제를 이완시키고 개혁개방과 통일의 길에 들어서도록 할 의무도 갖는다. 국가안보실장 역시 북-미의 외교적 중매자 역할과 동시에 북한이 레드라인을 넘어 미국의 군사적 공격을 자초하는 절명의 상황에 동맹국을 도와 작전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하는 안보 수장 역할도 맡고 있다. 물론 겹겹의 제재에 달러가 마르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핵·미사일 기지 폭격과 참수 위협에 시달리는 평양의 초대자들은 ‘약자 코스프레’ 작전으로 나올 것이다. ‘공화국의 핵무력은 미제의 침략 전쟁을 막기 위한 자위용’이라고 강변할 것이다. 그러곤 특사단의 1박 2일을 김 씨 3대 세습체제의 유지를 위한 선전에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두 사람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상황을 마음으로 반대했다. 하지만 이미 군사분계선을 넘은 그들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싶다. “대통령의 특사단으로 예의는 갖춰야 하겠지만, 부디 대한민국의 안보와 정보 수장이라는 본분과 존엄을 잊지 마시오.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권한과 책임으로 그들이 두려움을 가질 수 있도록 하세요. 세계가 지켜보고 있고, 역사가 후대에 남길 것입니다.”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
1908년 4월 영국 자유당 정부의 상무장관으로 첫 각료직을 시작할 당시, 33세의 윈스턴 처칠은 ‘진보적 자유무역주의자’였다. 보수당의 보호무역주의에 반대해 자유당으로 옮긴 그는 ‘사회 개혁가’로 불릴 만큼 진보적인 노동정책 입법에 나선다. 노동자의 소득 안정을 위해 영국판 노사정협의체를 만들고, 일자리 확보를 돕는 직업소개소를 만드는 것 등이다. 이런 정책엔 예산이 필요했다. 하지만 레지널드 매케나 해군장관은 사회복지보다 독일의 해군력 증강에 대비한 군비를 증강할 때라며 번번이 방해했다. 화가 난 처칠은 그해 8월 15일 유명한 ‘스완지 연설’을 통해 “영국과 독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믿음을 퍼뜨리는 이들은 욕을 먹어야 한다”며 “양국 간엔 이익 충돌이 없다”고 반박했다. 1910년 내무장관을 거친 처칠은 다음 해 해군장관이 되어서야 매케나의 말이 사실임을 깨닫고 마음을 바꾼다. 매케나의 후예가 되겠다고 다짐한 그는 해군 조직을 정비하고 전함 등 전투력을 증강하는 데 전력했다. 과거의 자신처럼 사회복지를 명분으로 뒷다리를 거는 동료 의원들에게 “당장 사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 일쑤였다. 지난해부터 매월 셋째 토요일 오후 4시에 처칠의 전기를 강독하는 ‘셋토네’ 심포지엄을 진행하고 있는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는 “처칠의 현명한 정치적 표변 덕분에 영국은 1차 세계대전(1914∼1918년)에서 독일 해군을 물리칠 준비를 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원래 자리가 바뀌면 말이 달라지는 법이지만 처칠은 영국의 안보와 이익을 위해서라면 도덕적인 비난을 감수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독일에 항복한 프랑스 비시 정부가 1940년 6월 자신의 만류에도 히틀러에게 함대를 넘겨주기로 결정하자 격침을 단행했다. 프랑스 해군 1200명의 생명을 앗았지만 옛 친구가 영국에 함포를 들이대는 비극을 막았다. 같은 해 11월 독일군이 영국 코번트리시를 폭격할 것이라는 암호를 해독했지만 시민 희생을 각오하고 공습경보를 내리지 않았다. 독일군의 암호를 풀 수 있다는 비밀을 숨기는 게 국익에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처칠에게 ‘가장 암울한 시절’이었던 당시 대다수 영국인들은 그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고전적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의 태두인 한스 모겐소는 ‘국가 간의 정치학’에서 “동기는 개인과 국가의 권력 강화라는 편협한 것이었으나 외교정책은 전임자들보다 도덕적 정치적으로 나았다”고 평가했다. 전임 총리 네빌 체임벌린이 아돌프 히틀러에 유화정책을 편 것은 “도덕적으로 나았을지 몰라도 수백만 인류에게 유례없는 재앙을 가져왔다”고 갈파하면서. 처칠은 1950년 12월 하원에서 “유화정책 자체는 좋은 것일 수도 나쁜 것일 수도 있다”며 “국력이 약하거나 공포 때문이라면 소용도 없고 오히려 치명적이다. 하지만 강한 힘이 뒷받침된다면 관대하고 고상하며, 평화를 위한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이라고 정의했다. 처칠이 살아있다면 최근 문재인 정부의 대북 유화정책에 박수를 보낼 듯하다. 겹겹이 제재에 달러가 마른 북한의 궁핍한 상황을 이용해 ‘관대하고 고상하게’ 개혁개방과 비핵화를 이끌어 낼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다만 강한 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단서를 잊지 말아야 한다. 김정은은 새해 매력 공세가 먹히지 않으면 다시 군사모험주의로 돌아설 가능성이 크다. 다시 우리를 조롱할 경우 미국도 모르게 ‘코피 작전’보다 더한 군사적 응징에 나설 수 있음을 말과 행동으로 주지시킨 뒤 필요할 경우 실행할 결기를 다져야 할 때다. 국가안보를 위한 지도자의 표변은 무죄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
아직은 1985년 데자뷔다. 김여정의 방한으로 절정에 이른 김정은의 신년 대남 평화공세는 1985년 9월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예술공연단 교환 방문으로 정점에 이른 할아버지 김일성의 그것과 유사한 대목이 많다. 북한은 특대형 도발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1983년 10월엔 미얀마 아웅산 묘지 폭발 사건 하루 전이었다. 2016년 1월 6일 4차 핵실험을 시작으로 2년간 전략 도발을 계속한 북한은 지난해 말 핵무력의 완성을 선언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불쑥 내민 손을 남한이 받아들인 계기도 있다. 1984년 남한 수해였고, 9일 개막한 평창 겨울올림픽이다. 당시 남북도 수차례 공식 비밀 회담을 벌였다. 행사 진행을 전후해 북측의 허담 대남 담당 비서가 서울에 와 전두환 대통령을 만났고 장세동 안기부장이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김 주석과 전 대통령의 정상회담까지 논의됐던 남북 대화 국면은 그러나 1986년 1월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평양은 팀스피릿 한미 연합 군사훈련의 중단을 요구했고 서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측은 애당초 진정성이 없었다. 훗날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김 주석은 1984년 5월 에리히 호네커 동독 서기장에게 “로널드 레이건 미 행정부의 주한미군 군사력 증강을 막기 위해 대화를 제의한 것”이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최근 김정은의 속셈도 지난해 등장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군사적 압박 정책을 완화하고 겹겹이 쌓인 국제사회의 제재를 풀어 보려는 것이 분명하다. 북측은 이미 한미가 4월 이후로 연기한 키리졸브 한미 연합 군사훈련의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올해 남북 대화도 평창 올림픽과 함께 끝날 운명인가. 최근 제3국에서 북측 관계자를 만난 한 대북 소식통의 전언은 다소나마 희망을 갖게 한다. 지난해 말 평양에서는 향후 대외관계 전략과 관련해 논쟁이 있었고 지금의 제재하에서는 경제가 1년도 못 버틸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는 것이다. 소식통은 “북한 최고지도부도 핵 문제를 이대로 계속 가지고 갈 수 없으며 미국과의 대화가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실제로 신년사 이후 김정은은 남한의 마음을 얻고 대외적으로 평화 이미지를 심는 데 자신의 정치적 자원을 그야말로 ‘통 크게’ 쏟아붓고 있다. 서해 직항로를 날아 대한민국의 대문인 인천공항에 내린 전용기에 PRK-615라는 편명을 달아 2000년 남북 정상회담 합의사항 준수를 강조했다. 전날 평양에서 열린 건군절 열병식에선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공개하지 않고 생중계도 포기하는 등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8일 한국에 도착한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 등이 연일 대북 강경 발언을 내놓고 있는 것도 물밑으로 전해지는 북한의 태도 변화를 읽었기 때문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1월 중간선거 승리를 위해 ‘고분고분한 북한’이 필요하다. ‘미국 보수 강경파’들의 반발을 달래며 북한과 대화 테이블에 앉기 위해서는 ‘우리가 강하게 몰아붙이니까 북한이 나왔다’는 명분을 만들 필요가 있다. 김정은은 미국의 선거 결과를 볼 때까지 시간을 끌며 다음 수를 두고 싶겠지만 목까지 차오른 제재 때문에 그럴 여유가 없다. 우리가 평창 이후 북-미 대화 국면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다. 반대로 김정은이 1985년 할아버지처럼 한미 훈련을 핑계로 핵·미사일 전략 도발로 돌아선다면? 선거를 앞둔 트럼프 행정부가 ‘코피 작전’ 이상의 군사조치에 나설 수도 있다는 게 워싱턴의 기류다. 그것은 또 다른 거대한 한반도 정세 변화의 시작이 될 것이다.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
아직은 1985년 데자뷔다. 김여정의 방한으로 절정에 이른 김정은의 신년 대남 평화공세는 1985년 9월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예술공연단 교환 방문으로 정점에 이른 할아버지 김일성의 그것과 유사한 대목이 많다. 북한은 특대형 도발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1983년 10월엔 미얀마 아웅산 묘지 폭발 사건 하루 전이었다. 2016년 1월 6일 4차 핵실험을 시작으로 2년간 전략 도발을 계속한 북한은 지난해 말 핵무력의 완성을 선언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불쑥 내민 손을 남한이 받아들인 계기도 있다. 1984년 남한 수해였고, 9일 개막한 평창 겨울올림픽이다. 당시 남북도 수차례 공식 비밀 회담을 벌였다. 행사 진행을 전후해 북측의 허담 대남 담당 비서가 서울에 와 전두환 대통령을 만났고 장세동 안기부장이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김 주석과 전 대통령의 정상회담까지 논의됐던 남북 대화 국면은 그러나 1986년 1월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평양은 팀스피릿 한미 연합 군사훈련의 중단을 요구했고 서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측은 애당초 진정성이 없었다. 훗날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김 주석은 1984년 5월 에리히 호네커 동독 서기장에게 “로널드 레이건 미 행정부의 주한미군 군사력 증강을 막기 위해 대화를 제의한 것”이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최근 김정은의 속셈도 지난해 등장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군사적 압박 정책을 완화하고 겹겹이 쌓인 국제사회의 제재를 풀어 보려는 것이 분명하다. 북측은 이미 한미가 4월 이후로 연기한 키리졸브 한미 연합 군사훈련의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올해 남북 대화도 평창 올림픽과 함께 끝날 운명인가. 최근 제3국에서 북측 관계자를 만난 한 대북 소식통의 전언은 다소나마 희망을 갖게 한다. 지난해 말 평양에서는 향후 대외관계 전략과 관련해 논쟁이 있었고 지금의 제재하에서는 경제가 1년도 못 버틸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는 것이다. 소식통은 “북한 최고지도부도 핵 문제를 이대로 계속 가지고 갈 수 없으며 미국과의 대화가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실제로 신년사 이후 김정은은 남한의 마음을 얻고 대외적으로 평화 이미지를 심는 데 자신의 정치적 자원을 그야말로 ‘통 크게’ 쏟아붓고 있다. 서해 직항로를 날아 대한민국의 대문인 인천공항에 내린 전용기에 PRK-615라는 편명을 달아 2000년 남북 정상회담 합의사항 준수를 강조했다. 전날 평양에서 열린 건군절 열병식에선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공개하지 않고 생중계도 포기하는 등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8일 한국에 도착한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 등이 연일 대북 강경 발언을 내놓고 있는 것도 물밑으로 전해지는 북한의 태도 변화를 읽었기 때문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1월 중간선거 승리를 위해 ‘고분고분한 북한’이 필요하다. ‘미국 보수 강경파’들의 반발을 달래며 북한과 대화 테이블에 앉기 위해서는 ‘우리가 강하게 몰아붙이니까 북한이 나왔다’는 명분을 만들 필요가 있다. 김정은은 미국의 선거 결과를 볼 때까지 시간을 끌며 다음 수를 두고 싶겠지만 목까지 차오른 제재 때문에 그럴 여유가 없다. 우리가 평창 이후 북-미 대화 국면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다. 반대로 김정은이 1985년 할아버지처럼 한미 훈련을 핑계로 핵·미사일 전략 도발로 돌아선다면? 선거를 앞둔 트럼프 행정부가 ‘코피 작전’ 이상의 군사조치에 나설 수도 있다는 게 워싱턴의 기류다. 그것은 또 다른 거대한 한반도 정세 변화의 시작이 될 것이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
최근 ‘전직 외교관 100인의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올린 조원일 송종환 최병구 전 대사 등은 유튜브에도 자신의 얼굴과 주장을 담은 동영상을 공개했다. 시국선언문에서 주장했던 대로 문재인 정부의 친중 성향 외교정책을 비판하고 이로 인해 소원해지는 한미관계에 대해 강한 우려를 나타냈다. 이들은 시국선언문 문안도 소셜미디어상에서 온라인으로 조율해 서명했다고 한다. 당시 선언문을 보도한 기사나 유튜브 영상에 댓글을 단 사람들은 보수적인 중년 이상 남성 누리꾼들이 주류인 것으로 보인다. 모바일과 디지털을 통한 즉각적인 반응으로 미루어 매우 활동성이 강했다. 일군의 중견 언론인은 최근 인터넷TV와 언론사를 만들어 사이버 공간에서 보수적 담론을 발신하고 있다. 이런 현상들을 보면서 문득 2016년 겨울 한국사회를 휩쓴 촛불시위 당시를 떠올리게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능과 독선, 최순실의 국정 농단은 비록 잘못됐지만 대한민국 산업화 세력의 가치와 성과, 정통성까지 깡그리 휩쓸려간다고 생각한 이들은 ‘태극기 부대’라는 이름으로 토요일마다 서울 세종대로 사거리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집에서 TV를 보며 울분을 터뜨리던 옛 친구를 불러낸 수단은 바로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의 전유물이던 디지털 플랫폼이었다. 폴더형 휴대전화를 스마트폰으로 바꾸고, 동주민센터 무료 강좌를 수강하며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계정을 연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20일 오후 태극기를 들고 광화문광장을 점령한 이들은 북한 김정은의 신년 대남 ‘매력 공세(charming offensive)’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사이버 대응을 하고 있다. 상황은 2002년 대통령선거 전날인 12월 18일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가 노무현 당시 새천년민주당 단일화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을 때를 연상시킨다. 노 후보가 선거날 새벽 정 대표의 집 앞에서 발길을 돌리던 장면에 공분한 젊은 진보 누리꾼들은 휴가를 즐기려던 친구들을 휴대전화 메시지로 투표장에 불러냈다. 이때의 ‘쾌거’를 대대로 공유, 발전, 확산시켜온 결과가 지금 문재인 정부의 강고한 사이버 지지 세력 아닐까. 우파 마르크시스트인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가 살아 있었다면 한국 정치에 ‘사이버 진지전(陣地戰)’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할 것 같다. 유명한 ‘옥중 서신’에서 그는 ‘왜 마르크스의 예언과 달리 자본주의가 발달한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답은 ‘이들 나라의 사회주의 전위당(vanguard party)은 시민사회 영역 곳곳에 진을 치고 있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기구들과의 전쟁에서 패하기 때문에 국가 영역에는 근처에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와 언론, 출판과 교육계 등을 통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 미국과 유럽의 노동자 대중은 후진 농업국가였던 러시아의 대중처럼 순진하지 않았던 것이다. 2002년 대선 이후 한국의 중요 선거는 정당과 후보의 오프라인 집회가 아니라 사이버 공간에서의 여론전에 결과가 좌우되고 있다. 도대체 왜 졌는지도 모르고 이회창 후보의 정계은퇴를 바라봐야 했던 한국 보수는 역설적으로 박근혜 정부의 몰락 속에서 다음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론을 찾은 셈이다. 하지만 보수의 사이버 진지 전력에는 치명적인 약점들이 있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고립 분산적인 네트워크들은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있다. 탄핵 사태로 붕괴된 기성 보수 정치권은 이들의 구심점 역할을 못 하고 있다. 과연 그들은 사이버 진지전에서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
최근 ‘전직 외교관 100인의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올린 조원일 송종환 최병구 전 대사 등은 유튜브에도 자신의 얼굴과 주장을 담은 동영상을 공개했다. 시국선언문에서 주장했던 대로 문재인 정부의 친중 성향 외교정책을 비판하고 이로 인해 소원해지는 한미관계에 대해 강한 우려를 나타냈다. 이들은 시국선언문 문안도 소셜미디어 상에서 온라인으로 조율해 서명했다고 한다. 당시 선언문을 보도한 기사나 유튜브 영상에 댓글을 단 사람들은 보수적인 중년 이상 남성 누리꾼들이 주류인 것으로 보인다. 모바일과 디지털을 통한 즉각적인 반응으로 미루어 매우 활동성이 강했다. 일군의 중견 언론인은 최근 인터넷TV와 언론사를 만들어 사이버 공간에서 보수적 담론을 발신하고 있다. 이런 현상들을 보면서 문득 2016년 겨울 한국사회를 휩쓴 촛불시위 당시를 떠올리게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능과 독선, 최순실의 국정 농단은 비록 잘못됐지만 대한민국 산업화 세력의 가치와 성과, 정통성까지 깡그리 휩쓸려간다고 생각한 이들은 ‘태극기 부대’라는 이름으로 토요일마다 서울 세종대로 사거리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집에서 TV를 보며 울분을 터뜨리던 옛 친구를 불러낸 수단은 바로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의 전유물이던 디지털 플랫폼이었다. 폴더형 휴대전화를 스마트폰으로 바꾸고, 동주민센터 무료 강좌를 수강하며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계정을 연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20일 오후 태극기를 들고 광화문광장을 점령한 이들은 북한 김정은의 신년 대남 ‘매력 공세(charming offensive)’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사이버 대응을 하고 있다. 상황은 2002년 대통령선거 전날인 12월 18일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가 노무현 당시 새천년민주당 단일화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을 때를 연상시킨다. 노 후보가 선거날 새벽 정 대표의 집 앞에서 발길을 돌리던 장면에 공분한 젊은 진보 누리꾼들은 휴가를 즐기려던 친구들을 휴대전화 메시지로 투표장에 불러냈다. 이때의 ‘쾌거’를 대대로 공유, 발전, 확산시켜온 결과가 지금 문재인 정부의 강고한 사이버 지지 세력 아닐까. 우파 마르크시스트인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가 살아 있었다면 한국 정치에 ‘사이버 진지전(陣地戰)’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할 것 같다. 유명한 ‘옥중 서신’에서 그는 ‘왜 마르크스의 예언과 달리 자본주의가 발달한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답은 ‘이들 나라의 사회주의 전위당(vanguard party)은 시민사회 영역 곳곳에 진을 치고 있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기구들과의 전쟁에서 패하기 때문에 국가 영역에는 근처에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와 언론, 출판과 교육계 등을 통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 미국과 유럽의 노동자 대중은 후진 농업국가였던 러시아의 대중처럼 순진하지 않았던 것이다. 2002년 대선 이후 한국의 중요 선거는 정당과 후보의 오프라인 집회가 아니라 사이버 공간에서의 여론전에 결과가 좌우되고 있다. 도대체 왜 졌는지도 모르고 이회창 후보의 정계은퇴를 바라봐야 했던 한국 보수는 역설적으로 박근혜 정부의 몰락 속에서 다음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론을 찾은 셈이다. 하지만 보수의 사이버 진지 전력에는 치명적인 약점들이 있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고립 분산적인 네트워크들은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있다. 탄핵 사태로 붕괴된 기성 보수 정치권은 이들의 구심점 역할을 못 하고 있다. 과연 그들은 사이버 진지전에서 성과를 낼 수 있을까.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kyle@donga.com}
지금부터 조선노동장 위원장이시며 국무위원회 위원장이며 최고사령관 당과 국가 군대 최고령도자 김정은 동지께서 주체107 2018년 새해 즈음하여 하신 신년사를 보내드리겠습니다.사랑하는 온 나라 인민들과 영명한 인민군 장병들 동포 형제 여러분!오늘 우리 모두는 근면하고 보람찬 노동으로 성실한 땀과 노력으로 지난간 한해에 자신들이 이루어 놓은 자랑스런 일들을 커다란 기쁨과 자부심 속에 감회 깊이 추억하며 새로운 희망과 기대를 안고 새해 2018년을 맞이합니다.나는 희망의 새해를 맞이하면서 온 나라 가정의 건강과 행복 성과와 번영을 축원하며 우리 어린이들이 새해 소원과 우리 인민 모두가 지향하는 아름다운 꿈이 이뤄지길 바랍니다.동지들! 겹쌓이는 난관과 시련 속에서도 언제나 변함 없이 당을 믿고 따르는 강인한 인민의 진정어린 모습에서 큰 힘과 지혜 얻으며 조국번영의 진군길 힘차게 달려온 지난 한해를 돌이켜보면서 나는 얼마나 위대한 인민과 함께 혁명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에 가슴 뜨거워집니다.나는 강고하고도 영광스러운 투쟁의 나날의 뜻과 마음을 같이하며 당의 결심을 지지하고 받들어 반만면 민족사에 특이할 기적적 승리를 안아온 전체 인민들과 인민군 장병들에게 조선노동당과 공화국 정부의 이름으로 충심으로 되는 감사와 새해 인사를 삼가 드립니다.나는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 남녘의 겨레들과 해외 동포들 침략 전쟁을 반대하고 우리의 정의의 위협에 굳은 연대성을 보내준 세계 진보적 인민들과 벗들에게 새해 인사를 보냅니다.동지들 2017년은 자력자강의 동력으로 사회주의 강국 건설사에 불멸의 이정표를 세운 영웅적 투쟁과 위대한 승리의 해였습니다.지난해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의 반공화국 고립 압살 책동은 극도에 달하였으며 우리 혁명은 유례없는 엄혹한 도전에 부닥치게 되었습니다. 조성된 정세와 전진도상에 가로놓인 최악의 난관 속에서 우리 당은 인민을 믿고 인민은 당을 결사옹위하며 역경을 순경으로 화를 복으로 전환하며 사회주의 강국 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룩하였습니다.우리는 지난해의 장엄한 투쟁을 통하여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서 열어주신 주체의 사회주의 한길을 따라 끝까지 나아가려는 절대 불변의 신념과 의지, 전체 인민이 당의 두리에 굳게 뭉친 사회주의 조선의 일심단결을 내외에 힘있게 과시하였습니다.지난해 우리 당과 국가와 인민이 쟁취한 특출한 성과는 국가 핵무력 완성의 역사적 대업을 성취한 것입니다. 바로 1년 전 나는 이 자리에서 당과 정부를 대표하여 대륙간 탄도로케트 추진 사업이 마감 단계에서 추진 중임을 공표하였으며 지난 한해 동안 그 이행을 위한 여러 차례의 시험 발사들 안전하고 투명하게 진행하여 확고한 성공을 온 세상에 증명하였습니다.지난해 우리는 각종 핵운반 수단과 함께 초강력 열핵무기 시험도 단행함으로써 우리 총적 지향과 전략적 목표를 성과적 성공적으로 달성하였으며. 우리 공화국은 마침내 그 어떤 힘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강력하고 믿음직한 전쟁 억제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국가의 핵 무력은 미국의 그 어떤 핵 위협도 분쇄하고 대응할 수 있으며 미국이 모험적인 불장난을 할 수없게 제압하는 강력한 억제력으로 됩니다.미국은 켤고 나와 우리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걸어보지 못합니다.미국 본토 전역이 우리 핵 타격 사정권안에 있으며 핵 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항상 놓여 있다는 것, 이는 결코 위협이 아닌 현실임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우리는 나라의 자주권을 믿음직하게 지켜낼 수 있는 최강의 국가 방위력을 마련하기 위해 한평생을 다 바치신 장군님과 위대한 수령님의 염원을 풀어들었으며 전체 인민이 장구한 세월 허리띠를 조이며 바라던 평화수호의 강력한 보검을 틀어쥐었습니다.이 위대한 승리는 당의 병진노선과 과학중시 사상의 정당성과 생활력의 뚜렷한 증시이며 부강 조국 건설의 확고한 전망을 열어놓고 우리 군대와 인민에게 필승의 신심을 안겨준 역사적 장거입니다.나는 생존을 위협하는 제재와 봉쇄의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우리 당의 병진 노선을 굳게 믿고 절대적으로 지지해주고 힘있게 떠밀어준 영웅적 조선 우리 인민에게 숭고한 경의를 드립니다.나는 또한 당 중앙의 구상과 결심은 과업이고 진리이며 실천이란 것을 세계 앞에 증명하기 위해 온 한해 헌신분투한 우리 국방과학자들과 군수노동계급에게 뜨거운 동지적 인사를 보냅니다.지난해 국가경제 발전 5개년 전략수행에서도 커다란 전진을 이룩하였습니다.금속공업의 주체화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여 김책제철연합기업소에 우리식의 산소열법 용광로가 일떠서 무연탄으로 선철 생산을 정상화할 수 있게 되었으며 화학공업의 자립적 토대를 강화하고 5개년 전략의 화학고지를 점령할 수 있는 전망을 열어놓았습니다. 방직 공업 신발과 편직 식료공업을 비롯한 경공업 부문의 많은 공장들에서 주체화의 기치를 높게 들고 우리의 기술 우리의 설비로 여러 생산공정의 현대화를 힘있게 벌여 인민소비품의 다종화 다양화를 실현하고 제품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담보를 마련하였습니다.기계공업 부문에서 자력갱생의 기치를 높이들고 과학기술에 의거하여 당이 제시한 새형의 뜨락또르와 화물자동차 생산목표를 성과적으로 점령함으로써 인민경제의 주체화 현대화와 농촌 경리의 종합적 기계화를 더욱 힘있게 다그쳐 나갈 수 있는 튼튼한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농업 부문에서 과학농법을 적극 받아들여 불리한 기후조건에서도 다수확 농장과 작업반 대열을 내리고 예년에 보기 드문 과일풍작을 안아왔습니다.우리 군대와 인민은 웅장화려한 려명 거리와 대규모의 세포지구 축산기지를 일떠세우고 산림복구 전투 1단계의 과업을 수행함으로써 군민대단결의 위력과 사회주의 자립경제의 잠재력을 과시하였습니다.만리마속도 창조를 위한 벅찬 투쟁 속에서 새로운 전형 단위들이 연이어 태어났으며 수많은 공장 기업소들이 연간 인민경제 계획을 앞당겨 수행하고 최고 생산년도 수준을 돌파하는 자량을 떨쳤습니다.지난해 과학문화 전선에서도 성과를 이룩하였습니다. 과학자 기술자들은 사회주의 강국 건설에서 나서는 과학기술적 문제들을 해결하고 첨단분야 의 연구과제들을 완성하여 경제발전과 인민생활 향상을 추동하였습니다.사회주의 교육체계가 더욱 완비되고 교육환경이 보다 일신되었으며 의료봉사조건이 개선되었습니다. 온 나라의 혁명적 낭만과 전투적 기백으로 들끓게 하는 예술공연 활동의 본보기가 창조되고 우리의 체육인들이 여러 국제경기들에서 우승을 쟁취하였습니다.지난해 이룩한 모든 성과들은 조선노동당의 주체적인 혁명노선의 승리이며 당의 두리에 굳게 뭉친 군대와 인민의 영웅적 투쟁이 안아온 고귀한 결실입니다.공화국의 자주권과 생존권 발전권을 말살하려는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의 제재봉쇄 책동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악랄하게 감행하는 속에서도 자체의 힘으로 남들이 엄두도 내지 못할 빛나는 승리를 달성할 바로 여기에 우리 당과 인민의 존엄이 있고 커다란 긍지와 자부심이 있습니다.나는 지난해 사변적인 나날들에 언제나 당과 운명을 함께하고 부닥치는 시련과 난관을 해치며 사회주의 강국 건설위업을 승리적으로 전진시켜온 전체 인민들과 인민군 장병들에게 다시 한번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동지들. 올해 우리는 영광스러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창건 7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최대의 애국유산인 사회주의 우리 국가를 세계가 공인하는 전략국가의 지위에 당당히 올려세운 위대한 인민이 자기 국가의 창건 70돌을 창대히 기념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의의깊은 일입니다.우리는 주체조선의 건국과 발전 행로의 빛나는 영웅적 투쟁과 집단적 혁신의 전통을 이어 혁명의 최후 승리를 이룩할 때까지 계속 혁신 계속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공화국 핵무력 건설에서 이룩한 역사적 승리를 새로운 도약대로 삼고 사회주의 강국 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새로운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혁명적인 총 공세를 벌여 나가야 합니다.혁명적인 총 공세로 사회주의 강국 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새로운 승리 쟁취하자, 이것이 우리가 들고 나가야 할 혁명적 구호입니다.모든 일꾼들과 당원들과 근로자들은 전후 천리마 대고조로 난국을 뚫고 사회주의 건설에서 일대 앙양을 일으킨 것처럼 전인민적인 총공세를 벌여 최후발악하는 적대 세력들의 도전을 짓부수고 공화국의 전반적 국력을 새로운 발전 단계에 올려 세워야 합니다.국가 경제발전 5개년 전략 수행의 세 번째 해인 올해 경제전선 전반에서 활성화의 돌파구를 열어 제껴야 하겠습니다.올해 사회의주의 경제 건설에서 나서는 중심 과업은 당 중앙위원회 제 7기 2차 전원회의가 제시한 혁명적 대응전략의 요구대로 인민경제의 자립성과 주체성을 강화하고 인민생활을 개선 향상시키는 것입니다.인민경제의 자립성과 주체성을 강화하는데 총력을 집중해야 합니다. 전력공업 부문에서 자립적 동력 기지들을 정비 보강하고 새로운 동력자원 개발에 큰 힘을 넣어야 합니다.화력에 의한 전력생산을 결정적으로 늘이며 불비한 발전 설비들을 정비 보강하여 전력손실을 줄이고 최대한 증산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여야 합니다.도들에서 자기 지방의 특성에 맞는 전력생산 기지들을 일떠 세우며 이미 건설된 중소형 수력 발전소들에서 전력생산을 정상화하여 지방 공업 부문이 전력을 자체로 보장하도록 하여야 합니다.전 국가적인 교체 생산 조직을 짜고 들며 전력낭비 현상과의 투쟁을 힘있게 벌여 생산된 전력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된 바람을 일으키도록 하여야 합니다.금속공업 부문에서는 주체적인 제철 제강 기술을 더욱 완성하고 철 생산 능력을 확장하며 금속 재료의 질을 결정적으로 높여 인민경제의 철강제 수요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금속공업 부문의 필요한 전력 철정광 무역탄 갈탄 화차와 기관차 자금을 다른 부문에 앞세워 계획대로 어김없이 보장하여 다음에 철강재 생산 목표를 무조건 수행하며 금속 공업의 주체화를 기어이 완성하여야 하겠습니다.화학공업 부문에서 탄성하나화학공업창설을 다그치고 촉매 생산기지와 린비료공장 건설을 계획대로 추진하며 탄산소다생산공정을 개건 완비하여야 합니다.기계공업 부문에서는 금성뜨락또르 공장과 승리자동차 연합기업소를 비롯한 기계공장들을 현대화하고 세계적 수준의 기계 제품들을 우리 식으로 개발 생산하여야 합니다.나라의 자립적 경제 토대가 은을 낼 수 있게 석탄과 광물 생산 철도 수송에서 연대적 혁신을 일으켜야 합니다. 특히 철도 운수 부문에서 수송 조직과 지휘를 과학화 합리화하여 현존 수송능력을 최대한 효과있게 이용하며 철도의 군대와 같은 강한 규율과 질서를 세워 열차의 무사고 정시 운행을 보장하도록 하여야 합니다.올해의 인민생활 향상에서 전환을 가져와야 합니다. 경공업 공장들이 설비와 생산공정을 노력절약형 전기절약형으로 개조하고 국내 원료와 자제로 다양하고 질 좋은 소비품들을 더 많이 생산 공급하며 도심 군들에서 자체의 원료원천에 의하여 지방 경제를 특색있게 발전시켜야 합니다.농업과 수산전선에서 앙양을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우량종자와 다수확 농법, 능률적인 농기계들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이고 농사를 과학기술적으로 지어 알곡 생산 목표를 반드시 점령하며 축산물과 과일 온실남새와 버섯 생산을 늘여야 합니다.배무이와 배수리 능력을 높이고 과학적인 어로전을 전개하며 양어와 양식을 활성화하여야 하겠습니다. 올해에 군민이 힘을 합쳐 원산갈마해양관광지구 건설을 최단기간 내에 완공하고 삼지연군 꾸리기와 단천 발전소 건설, 황해남도 물길 2단계 공사를 비롯한 주요 대상 건설을 다그치며 살림집 건설에 계속 힘을 넣어야 합니다.산림 복구 전투 성과를 더욱 확대하면서 이미 조성된 산림의 보호관리를 잘 하는 법과 함께 도로의 기술 상태를 개선하고 강하천 정리를 정상화 하며 환경보호 사업을 과학적으로 책임적으로 하여야 합니다. 인민경제의 모든 부분과 단위들에서 자체의 기술역량과 경제적 잠재력을 총 동원하고 증산 전략 투쟁을 힘있게 벌여 더 많은 물질적 재부를 창조하여야 합니다.자립경제 발전의 지름길은 과학기술을 앞세우고 경제작전과 지휘를 혁신하는데 있습니다. 과학연구 부분에서는 우리식의 주체적인 생산공정들을 확립하고 원료와 자재, 설비를 국산화하며 자립적 경제구조를 완비하는데서 재기되는 과학기술적 문제들을 우선적으로 풀어나가야 합니다.인민경제 모든 부문과 단위들에서 과학기술 보급 사업을 강화하며 기술혁신 운동을 활발히 벌여 생산장성에 이바지하여야 하겠습니다.내각을 비롯한 경제지도 기관들은 올해 인민경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작전안을 현실성있게 세우며 그 집행을 위한 사업을 책임적으로 완강하게 내밀어야 합니다.국가적으로 사회주의 기업 책임관리제가 공장 기업소 협동단체들에서 실지 은을 낼수있도록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사회주의 문화를 전면적으로 발전시켜야 하겠습니다. 교원 진영을 강화하고 현대 교육 발전 추세에 맞게 교수 내용과 방법을 혁신하며 의료봉사 사업에서 인민성을 철저히 구현하며 우리의 설비와 기구, 여러 가지 의약품 생산을 늘여야 합니다.대중체육 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우리식의 체육 기술과 경기 전법을 창조하며 만리마 시대 의 우리 군대와 인민의 영웅적 투쟁과 생활, 아름답고 숭고한 인간미를 진실하게 반영한 명작들을 창작 창조하여 혁명적인 사회주의 문학예술의 힘으로 부르조아 반동문화를 짓눌려 버려야 하겠습니다.전사회적으로 도덕기강을 바로 세우고 사회주의 생활 양식을 확립하며 온갖 비사회주의적 현상을 뿌리뽑기위한 투쟁을 드세게 벌여 모든 사람이 고상한 정신 도덕적 풍모를 지니고 혁명적으로 문명하게 생활해 나가도록 하여야 합니다.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선인민혁명군을 정규적 혁명무력으로 강화발전 시키신 70돌이 되는 올해의 인민군대는 혁명적 당군으로서의 면모를 더욱 완벽하게 갖추어야 하며 전투훈련을 실전환경에 접근시켜 강도높이 조직 진행하여 모든 군종 병종 전문병 부대들에 일당백의 전투대를 만들어야 합니다.조선인민 내무군은 계급투쟁의 날을 예리하게 세우고 불순 적대분자들의 준동을 적발분쇄하며 노동적위군 붉은청년근위대는 전투정치 훈련을 힘있게 벌여 전투력을 백방으로 강화하여야 합니다.국방공업 부문에서는 제8차 군수공업대회에서 당이 제시한 전략적 방침대로 병진노선을 일관하게 틀어쥐고 우리식의 위력한 전략무기들과 무장장비들을 개발 생산하며 군수공업의 주체적인 생산구조를 완비하고 첨단 과학 기술에 기초하여 생산공정들을 현대화하여야 합니다. 핵무기 연구 부문과 로케트 공업 부문에서는 이미 그 위력과 신뢰성이 확고히 담보된 핵탄두들과 탄도로케트들을 대량생산하여 실전배치하는 사업에 박차를 가해 나가야 합니다.또한 적들의 핵 전쟁 책동에 대처한 즉시적인 핵반격 작전 태세를 항상 유지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정치 사상적 위력은 우리 국가의 제일 국력이며 사회주의 강국 건설의 활로를 열어 나가는 위대한 추동력입니다. 우리 앞에 나선 투쟁과업들을 성과적으로 수행 위해서는 전당을 조직사상적으로 더욱 굳게 단결시키고 혁명적 당풍을 철저히 확립하여 혁명과업 건설 사업 전반에서 당의 전투력과 영도적 역할을 끊임없이 높여 나가야 합니다.모든 당 조직들이 당의 사상과 어긋나는 온갖 잡사상과 이중규율을 절대로 허용하지 말고 당중앙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전당의 일심단결을 백방으로 강화하여야 합니다.전당적으로 당세도와 관료주의를 비롯한 낡은 사업방법과 작풍을 뿌리 빼고 혁명적 당풍을 확립하기 위한 투쟁을 강도 높이 벌여 당과 인민 대중과의 혈연적 연결을 반석같이 다져 나가야 합니다.당조직들은 해당 부문 단위들의 사업이 언제나 당의 사상과 의도 당정책적 요구에 맞게 진행되도록 당적 지도를 강화하며 정치사업을 확고히 앞에우고 사상을 발동하는 방법으로 사회주의 강국 건설에서 나서는 문제들을 성과적으로 풀어 나아갸 합니다. 전체 군대와 인민을 당의 두리에 사상의지적으로 굳게 묶어세워 무엇보다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당과 생사 운명을 함께하며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하여 한 몸 바쳐 싸워나가도록 하여야 합니다.당 근로단체 조직들과 전문기관들은 모든 사업을 일심단결해 강화하는데 지향시키고 복종시켜 나가야 합니다.인민들의 요구와 이익을 기준으로 사업을 설계하고 전개하며 인민들 속에 깊이 들어가 고락을 같이하며 인민들의 마음 속 고충과 생활상 애로를 풀어줘야 합니다.모든 것이 부족한 때일수록 동지들 사이, 이웃들 상이에 서로 돕고 진심으로 위해주는 미풍이 높이 발양되도록 하여야 합니다.오늘의 만리마 대진군에서 영웅적 조선인민의 불굴의 정신력을 남김 없이 폭발시켜야 합니다. 당 근로단체 조직들은 모든 근로자들이 애국주의를 심장에 새기고 자력갱생의 혁명정신과 과학기술의 원동력으로 만리마속도 창조대전에서 끊임없는 집단적 혁신을 일으켜 나가도록 하여야 합니다.일꾼들과 당원들과 근로자들이 천리마의 대진군으로 세기적인 변혁을 이룩한 전세대들의 투쟁정신을 이어 누구나 시대에 앞장에서 힘차게 내달리는 만리마 선구자가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동지들, 지난해에도 우리 인민은 민족의 지향과 요구 맞게 나라의 평화를 지키고 조국통일을 앞당기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공화국의 자위적 핵억제력 강화를 막으려고 감행되는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의 악랄한 제재 압박 소동과 광란적인 전쟁 도발 책동으로 하여 조선반도에 정세는 유례없이 악화되고 조국 통일의 앞길에는 보다 엄중한 난관과 장애가 조성되었습니다.남조선에서 분노한 각계각층 인민들의 대중적 항쟁에 의하여 파쇼통치와 동족대결에 메달리던 보수 정권이 무너지고 집권세력이 바뀌었으나 북남관계에서 달라진 것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오히려 남조선 당국은 온 겨레의 통일지향에 역행하여 미국의 대 조선 적대시 정책에 추종함으로써 정세를 험악한 지경에 몰아넣고 북남 사이의 불신과 대결을 더욱 격화시켰으며 북남 관계는 풀기 어려운 경색국면에 처하게 되었습니다.이런 비정상적인 상태를 끝장내지 않고서는 나라의 통일은 고사하고 외세가 강요하는 핵전쟁의 참화를 면할 수 없습니다.조성된 정세는 지금이야말로 북과 남이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북남관계를 개선하며 자주통일의 돌파구를 열기 위한 결정적인 대책을 세워 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절박한 시대적 요구를 외면한다면 어느 누구도 민족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 없을 것입니다.새해는 우리 인민이 공화국 창건 70돌을 대경사로 기념하게 되고 남조선에서는 겨울철 올림픽 경기대회가 열리는 것으로 하려 북과 남에 다 같이 의의있는 해입니다. 우리는 민족적 대사들을 성대히 치루고 민족의 존엄과 기상을 내외에 떨치기 위해서도 동결상태에 있는 북남관계를 개선하여 뜻깊은 올해를 민족사에 특기할 사변적인 해로 빛내어야 합니다.무엇보다 북남사이의 첨예한 군사적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조선반도의 평화적 환경부터 마련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전쟁도 아니고 평화도 아닌 불안정한 정세가 지속되는 속에서는 북과 남이 예정된 행사들을 성과적으로 보장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서로 마주앉아 관계개선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할 수도, 통일을 향해 곧바로 나갈 수도 없습니다.북과 남은 정세를 격화시키는 일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하며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적 환경을 마련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하여야 합니다.남조선 당국은 온겨레의 운명과 이땅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미국의 무모한 북침 핵전쟁 책동에 가담여 정세 격화를 부추길 것이 아니라 긴장 완화를 위한 우리의 성의있는 노력에 화답해 나서야 합니다.이 땅에 화염을 피우며 신성한 강토를 피로 물들일 외세와의 모든 핵전쟁 연습을 그만둬야 하며 미국의 핵장비들과 침략 무력을 끌어들이는 일체의 행위들을 걷어 치워야 합니다.미국이 아무리 핵을 휘두르며 전쟁 도발 책동에 광분해도 이제는 우리에게 강력한 전쟁 억제력 있는 한 어쩌지 못할 것이며 북과 남이 마음만 먹으며 능히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막고 긴장을 완화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민족적 화해와 통일을 지향해 나가는 분위기를 적극 조성하여야 합니다. 북남 관계 개선은 당국만이 아니라 누구나 바라는 초미의 관심사이며 온민족이 힘을 합쳐 풀어나야가 할 중대사입니다. 북과 남사이 접촉과 내왕 협력과 교류를 폭넓게 실현하며 서로의 오해와 불신을 풀고 통일의 주체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다해야 할것입니다.우리는 진정으로 민족적 화해와 단합을 원한다면 남조선의 집권 여당은 물론 각계각층 단체 들과 개별적 인사들을 포함하여 그 누구에게도 대화와 접촉 내왕의 길을 열어 놓을 것입니다.상대방을 자극하면서 동족 간의 불화와 반복을 격화시키는 행위들은 결정적으로 종식되어야 합니다. 남조선 당국은 지난 보수정권 시기와 다름없이 부당한 구실과 법적 제도적 장치들을 내세워 각계층 인민들의 접촉과 내왕을 가로막고 남북통일 기운을 억누를 것이 아니라 민족적 화해와 단합을 도모하는데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북남 관계를 하루빨리 개선하기 위해서는 북과 남의 당국이 그 어느 때보다 민족 자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시대와 민족 앞에 지닌 자기의 책임과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북남관계는 언제까지나 우리 민족 내부의 문제이며 북과 남이 주인이 되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북남 사이에 제기되는 모든 문제는 우리민족끼리 원칙에서 풀어 나가려는 확고한 입장과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남조선 당국은 북남관계의 문제를 외부에 들고 다니며 청탁하여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오히려 불순한 목적을 추구하는 외세에게 간섭할 구실을 주고 문제 해결의 복잡성만 조성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지금은 서로 등을 돌려대고 자기 입장이나 밝힐 때가 아니며 북과 남이 마주앉아 우리민족끼리 북남 관계 개선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그 출로를 과감하게 열어 나가야 할 때입니다. 남조선에서 머지 않아 열리는 겨울철 올림픽 경기대회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민족의 위상을 과시하는 좋은 계기로 될 것이며 우리는 대회가 성과적으로 개최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대표단 파견을 포함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으며 이를 위해 북남 당국이 시급히 만날 수도 있습니다.한 핏줄을 나눈 겨레로서 동족의 경사를 같이 기뻐하고 서로 도와주는 것은 응당한 일입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민족자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우리민족끼리 해결해 나갈 것이며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내외 반통일세력의 책동을 짓부시고 조국통일의 새 역사를 써 나갈 것입니다. 나는 이 기회에 해외의 전체 조선 동포들에게 다시 한번 따뜻한 새해 인사 보내면서 의의 깊은 올해의 북과 남에서 모든 일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동지들 지난해 국제정세는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파괴하고 인류에게 핵참화를 들씌우려는 제국주의 침략 세력과는 오직 정의의 힘으로 맞서야한다 우리 당과 국가의 전략적 판단과 결단이 천만 번 옳았다는 것을 뚜렷이 실증하였습니다.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책임있는 핵강국으로서 침략적인 적대 세력이 우리 국가의 자주권과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나라나 위협도 핵으로 위협하지 않을 것입니다.그러나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파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응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는 우리나라의 자주권을 존중하고 우리를 우호적으로 대하는 모든 나라들과의 선린우호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것이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새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적극 노력할 것입니다.동지들. 2018년은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승리 해로 될 것입니다.새해의 장엄한 진군길이 시작되는 이 시각 인민의 지지를 받기고 있기에 우리의 진군은 필승불패라는 확신으로 나는 마음 든든하며 전력을 다하여 인민의 기대에 기여이 보답할 의지를 더욱 굳게 가다듬게 됩니다.조선노동당과 공화국 정부는 인민의 믿음과 힘에 의거하여 주체혁명 위업의 최후 승리를 이룩할 때까지 투쟁과 전진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전체 인민의 존엄 높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는 사회주의 강국의 미래를 반드시 앞당겨 올 것입니다.모두다 조선노동당의 영도에 따라 영웅조선의 기상을 떨치며 혁명의 새 승리를 향하여 힘차게 앞으로 나아갑시다.<끝>}
2012년 10월에 낸 저서의 에필로그를 다시 읽으면서 미래 예측의 어려움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5년 뒤에도 김정은 체제가 존속한다면’이라는 제목으로 그해 12월 선거에서 당선될 남한 새 대통령의 후임이 결정되는 이달(실제로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5월로 당겨짐)까지의 북한을 전망했다. 북한학 지식에 기자의 상상력을 가미하는 ‘학문-저널리즘적 추측(acadenalistic guessing)’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 기교를 부려 봤지만 맞은 예측보다 틀린 억측이 더 많은 것 같다. “장성택이 조카(김정은)에 의해 철직을 당한다면, 정책 실패가 아니라 인사 실패일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한 대목은 얼추 맞았다. “이전과 다른 획기적인 변화는 어렵다”거나 “이명박 정부 이후 시작된 남한과의 거리 두기는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본 것도 마찬가지다. “중국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면서 핵개발을 놓고 미국과 신경전을 벌이는 정책 기조를 유지할 것”이란 전망은 반만 맞았다. 아버지 김정일처럼 계획경제와 시장경제를 오락가락할 것이란 전망은 틀렸다. 일관되게 시장 메커니즘의 확대를 유지하고 있다.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는 북한의 미래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늘 북한을 예측하려는 모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 과정에 미처 알지 못했던 북한의 어떤 부분을 파악할 수 있고, 대응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2018년 새해를 앞둔 보통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북한의 미래는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미국이 전쟁을 일으킬 것인가’와 ‘김정은이 두 손 들고 대화로 나올 것인가’. 1년 뒤 또 후회할 각오를 하고 전망을 해보자. 우선 지난해 1월 6일 4차 핵실험으로 시작된 2년간의 북한발 전략 도발 국면은 내년 어느 시점에 끝날 가능성이 높다. 북한 스스로 ‘핵 무력 완성을 이뤘다’고 주장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책으로 치면 한 장(章)이 끝난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 장이 어떻게 끝나고 어떤 장이 어떻게 시작될지가 문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인적 경제적 피해를 각오하고 무력행사에 나서기는 어렵다고 본다. 올해 1월 취임한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최고의 압박과 개입’ 정책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전략적 인내’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한 다자 제재와 미국 제재 △중국 압박하기 △한미일 공조체제 강화 △무력시위 등 10가지 정책수단으로 이뤄진 대북제재 레짐(regime)의 틀은 오바마 행정부 시절에 형성된 것 그대로다. 다만 오바마와 달리 무력 사용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말로 위협하면서 10가지 정책수단을 조금씩 진전시켜 온 것이 트럼프 대북정책의 실체다. 미국이 무력 사용을 할 수 없다고 김정은이 핵·미사일을 완성시켜 들고 무한정 버틸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통산 10번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결의인 2397호는 역대급 무관심 속에 22일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하지만 이번 결의로 북한의 유류 반입량은 원유와 정제유를 합해서 이전(950만 배럴)의 절반 이하(450만 배럴)로 떨어졌다. 당과 군 등 권력기관의 달러 수입원은 이제 거의 막혔다. 1990년대 초 소련이 미국에 맞먹는 핵·미사일을 들고도 망한 것은 소비에트 제국을 유지하는 데 너무나 많은 달러를 낭비했기 때문이다. 그 여파에 따른 북한의 ‘고난의 행군’ 경제난은 소련발 무상 및 우호가격 원유공급 중단이 촉발했다. 핵·미사일을 실전배치한다고 원유와 달러가 굴러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그래서 시간은 북한 편이 아니다.신석호 국제부장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