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호

신석호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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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신석호 전무입니다.

kyle@donga.com

취재분야

2024-04-16~2024-05-16
남북한 관계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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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7%
인사일반7%
정치일반3%
문화 일반3%
언론3%
교육3%
  • [신석호 기자의 우아한]청년을 향한 ‘통일 대박론’ 대 ‘평화 대박론’

    “청년 세대에게 ‘민족’ 통일이라는 표어가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통일주역세대가 될 청년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통일의 담론은 무엇이 있을까요?” 23일 화정국가대전략강좌에 참석한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정치학 전공 4학년 박기범 학생이 서면 질의서 두 번째 질문으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동아일보 부설 화정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가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주최한 이날 강좌의 연사는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노무현 정부 당시 국가안보회의(NSC) 상임위원장과 통일부 장관을 지낸 그는 통일과 정치(민족)에 대한 물음에 평화와 경제(협력)이라는 키워드로 답했습니다. 그가 자문하고 있는 현 정부의 대북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우선 전문을 소개합니다.“저도 제 아이들에게 민족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이 들어서 젊은 대학생들을 위해서 못쓰는 글이지만 쉽게 한번 ‘통일을 보는 눈’이라는 책도 써 봤습니다. 저는 민족이 굉장히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남들에게나 다 강요하거나 강조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한테요.그러나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오로지 3면 바다만을 가지고 대한민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들어간 경제발전을 했습니다. 명색이 반도국가고 명색이 기마민족이고 북방민족인데, 북방을 가로막힌 채로 이정도의 성장과 경제적인 발전을 했다면 바로 우리의 본원의 고향인 북방을 향해서 우리가 이 막혀진 철조망을 뚫고 나아가서 경제협력을 하고 문화협력으로 미래 유라시아 대륙으로 나간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이건 경제학자가 아니라도 감이 오는 것 아닙니까. 저는 통일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통일은 어차피 후대가 결정하고 남북간에 전쟁 안하고 협력하며 사는 세상, 이게 일단 목표입니다. 평화와 경제가 목표입니다. 남북간에 평화와 협력은 바로 여러분, 지금 말한 서울대 정치학과 학생들이 우리 사회의 주역이 되고 주역되기 위해서 취직하러 앞으로 4년 뒤에 나갈 때 여러분의 취직자리가 생기는 먹거리다, 남북협력과 남북관계 뚫는 것이 우리의 먹거리고 우리 경제의 미래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북한하고 협력하고 북한 사람들과 대화해 보고 어떨 땐 가르쳐야 하고 어떨 땐 그들에게 배울 것도 있겠지요. 그러다 보면 아 우리가 하나의 민족이구나. 그때 가서 느끼셔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과거 이명박 박근혜 정부도 ‘북한의 변화가 청년들에게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다만, 공식적으로는 합의에 의한 평화통일을 이야기했지만 암묵적으로는 ‘그래서 (남한이 북한을 흡수하는) 통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이른바 ‘통일 대박론’에는 지금의 북한 정부가 소멸되고 남한이 한반도의 정치적 경제적 결정권을 모두 장악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습니다. 반면 현 정부는 흡수통일론이 북한을 자극하고 긴장을 유발해 통일을 더디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휴전선 이북 지역의 정치와 경제를 지금처럼 북한 김정은 정권이 장악하며 핵을 포기한다는 것을 전제로, 정상국가 북한 정부와 교류하고 협력한다는 구상입니다. 그래서 현 정부는 이 전 장관의 말대로 통일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은 비유하자면 ‘평화 대박론’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전 정부와 현 정부는 청년들에게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질문을 한 박기범 학생의 생각은 어떨까요. “무력충돌의 가능성을 수반하는 보수진영의 흡수통일론은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현 정부의 남북한 평화론 접근법은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의 전제가 되는 북한의 핵 포기 가능성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여섯 차례의 핵실험 가운데 네 번을 김정일 사후, 김정은 치하에 했는데, 본인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핵무력 완성을 과연 쉽게, 또 완전히 포기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박기범 학생은 두 번째 질문에 앞서 “김정은 체제/정권의 기반이자 김일성 3대 부자의 목표이던 핵무기를 과연 북한이 포기할 수 있는가”라는 첫 번째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이 전 장관은 “김정은은 경제를 위해서 비핵화 하려는 것이지만 자기가 원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협상이 진행되지 않으면 핵을 가지려고 할 것이다. 둘을 계속 저울질을 할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이날 청중석에서도 “북한은 핵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인데 우리 정부가 너무 빨리 많은 것을 양보하려고 한다”는 의견성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 2018-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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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 언론교류 이전에 고민해야 할 세 가지[신석호 기자의 우아한]

    북한 안내원들이 기자에게 평양 도심 속 판자촌을 보여준 것은 마지막 일곱 번째 방문 때인 2007년 11월이었다. 세상에나…. 1960년대 동독이 지어주었다는 도심 지역 고층 건물들도 늘 낡고 위험해 보였지만 아파트와 건물 숲 속에 아직 재개발되지 않은, 걸인들이나 살 법한 판자촌 단지가 숨어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난생 처음 보는 처참한 광경은 사진에서나 본 듯한 6·25전쟁 직후를 연상시켰다. 안내원이 말했다. “신 선생. 그냥 보기만 하고 찍지는 마시라우요. 물론 쓰지 않을 것으로 압니다. 당이 부지런히 노력했지만 아직 이런 곳들이 조금 남아있는 거요.” 2002년부터 한 해 한두 번 평양을 방문해 취재하는 동안 이런 당부는 일상이었다. 한 번 두 번, 방북 횟수가 늘어날수록 조금 조금 더 북한의 속살을 볼 수 있었지만 본 것을 모두 쓸 수는 없었다. 아마 그랬다면 2002년 6월 첫 방북이 마지막 방북이 되었을 것이다. 하루하루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남루한 행색의 북한 주민들, 위대한 지도자 동지의 얼굴을 가슴에 차고 인민들에게 군림하는 권력자들, 그들이 힘겹게 공존하는 ‘공산당과 노동자의 천국’을 서구 언론의 저널리즘 원칙에 따라 본 대로, 들은 대로 글로 옮겼다면, 주제는 ‘이 체제는 이러이러 하니 하루 빨리 저러저러 해야 한다’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쉬운 그것이 답은 아니었다. 아무나 올 수 없는 곳으로 초대해 준 남북의 초청자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지만 갈수록 사명감이 커졌다. ‘지금 기사 한두 건 화끈하게 쓰는 게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가능한 많이 와서 봐야지. 그래서 먼 훗날에라도 내가 본 것을 세상에 알려야지. 그렇게라도 이 닫힌 공간에 바깥세상을 알리고 작은 권력에 집착하는 권력자들을 변화시켜야지…. 그래서 ’7·1경제관리 개선조치와 종합시장 도입 이후의 북한 경제 개혁현장 르포‘라는 실용적인 주제에 집중했다. 그들이 나의 방북을 허락한 이유이기도 했다. 언제나 그들이 보여주기로 한 것만 볼 수 있었지만, 주기적인 방문을 통해 북한 경제의 미세한 변화를 잡아내려고 노력했다. ’묘향산 입구 텃밭에 포전(개인 텃밭) 푯말이 작년엔 하나에서 올해는 열개로 늘었네. 평양 개선문 앞 매대(거리 간이상점)에 작년에는 없던 이동식 냉장고가 들어왔네.‘ 등등 정치적으로 민감하지 않으면서도 전달할 사실들이 많았다. 2012년 1월부터 2년 가까이 AP통신 평양지국장을 지낸 한국계 미국인 진 리 씨(우드로윌슨센터 한국센터장)도 비슷한 고민과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기자가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던 2014년 현지에서 만난 그는 취재를 위해 북한 당국자들과 협상하는 일이 매우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무엇을 취재해 어떤 보도를 하는지 자유세계에서 허용되는 기본적인 언론 자유가 제한되고 보고 들은 것을 모두 쓸 수 없는 상황은 오해와 비난을 부르기도 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미국 언론계에서는 ’AP통신이 북한 당국과의 관계를 의식해 정치범 수용소로 상징되는 열악한 인권 상황 등 북한 체제의 부정적인 측면을 눈감거나 호도하고 있다‘는 제기되기도 했다. 장황하게 과거사를 늘어놓는 이유는 최근 한국 매체들이 경쟁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남북한 언론교류가 근본적으로 ’북한 당국과 관계를 맺는 일‘이라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교류의 상대방인 ’북한과 평양의 당국‘은 자유세계의 국가와 민주적인 정부와는 다르다. 결론적으로 북한과의 언론교류는 보통 국가간 언론교류의 일반성보다는 특수성이 더 많다는 것이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북한은 현재 김정은이라는 최고지도자가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독재국가다. 형식적으로는 조선노동당이 지배하는 현실사회주의 국가이고 모든 매체는 관영이다. 노동당 선전선동부의 지휘를 받는 모든 매체는 당과 최고지도자와 당의 권위를 위해 일한다. 그들의 저널리즘은 오로지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는 우리가 아는 열린 세상의 저널리즘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이야기다. 물론 김정은에게 진정성이 있다면, 향후 전개될 비핵화 과정에서 북한의 민주화와 개혁 개방이 진전되기를 기대한다. 북한이 인권 문제를 해결하고 ’정상국가‘로 변모해가는 과정에 북한의 언론관도 정상화될 되기를 바란다. 최고지도자와 당의 권위를 해치더라도 진실이라면 보도하는 민영 매체가 나오고 남한을 포함한 외부 매체들의 자유로운 접근과 취재도 허용되는 상황 말이다. 하지만 우선 당장 북한 당국은 남한 언론들의 제안과 요구를 모두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북한학계에서는 이를 ’북한 체제의 수용능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언론교류는 정보의 소통을 의미한다. 독재체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다. 남한 언론과의 교류는 자칫 독재 체제의 이완을 가져올 수 있다. 남한 기자를 받아들이는 것도, 북한 기자를 남한에 보내는 것도 그렇다. 그것이 체제에 줄 다양한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조직을 투자해 통제와 감시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남한 기자를 받아들인다면 도대체 어디까지 접근과 취재, 보도를 허용할 것인지, 북한 기자를 남한에 보낸다면 그들을 어떻게 선발하고 감시할 것인지에 대한 내부적인 기준 마련도 필요할 것이다. 우리 언론계도 준비를 하고 능력을 키워야 한다. 북한 당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최대한 사실과 진실에 접근하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어떤 주제에 집중하고 어떤 주제는 피해야 하는지를 가릴 줄 알고 북한 당국자들을 설득해 사실과 진실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는 전문기자 육성과 취재 시스템 구축도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평양 발 보도들이 서구 저널리즘의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잠정적인 기간 동안 생길 문제에 대한 공론화와 사회적인 합의도 필요하다. 대한민국 언론의 평양 발 기사와,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 등 탈북자들의 증언이 다르다면, 매체의 신뢰도 자체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평양 현지 발 기사의 특수성을 이해해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런 저런 상황들을 감안하면 남북언론교류는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충분한 고민과 준비의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취재 하듯 경쟁적으로 북측의 문을 두드리기보다 개인과 조직, 국가적 차원에서 충분한 성찰을 통해 장기 플랜을 마련하는 지혜와 안목이 필요할 때다.신석호 동아일보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이 기사는 한국언론재단이 발행하는 월간 ’신문과 방송‘ 7월호에 실렸습니다>}

    • 2018-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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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재에도 번창하는 북한 휴대전화 시장…이유는? [신석호 기자의 우아한]

    “신선배, 북한에 있는 제 취재원과 휴대전화로 통화했는데, 북한이 내년부터 개인단위 경작제도를 전국적으로 확대한다고 합니다.” 2004년 12월 막 수습을 마친 주성하 탈북기자가 이런 보고를 해왔습니다. 2002년 7월 이른바 ‘7·1경제관리 개선조치’로 시작된 김정일 판 개혁개방이 속도를 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북한 접경지역의 취재원은 사실상 목숨을 걸고 북한 내부에 진행되는 경제 변화를 주 기자 편에 알리려 했던 것입니다. 2004년 4월 김정일을 노린 용천역 폭발사고 이후 당국이 개인 휴대전화 사용을 강하게 단속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 취재원은 그런 북한 경제의 변화가 가속화되길 바라는 바램에 위험을 감수했을 겁니다. 북한 경제 전문가들을 교차 취재한 결과 통화 내용이 60%이상 맞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주 기자와 함께 단독 보도를 했습니다(2004년 12월 6일자 A1, 5면). 이후 ‘북한, 가족단위 경작제 도입(2005년 1월 4일자 A1, 4면)’, ‘北, 물품 國定가격 없앤다…이르면 내달부터 기업개혁(2005년 1월 17일자 A1, 5면)’ 등 타 언론사 기사를 앞서 나간 단독기사들이 주 기자와 ‘북한 취재원’간의 휴대전화 통화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최근 ‘북한의 이동통신 연구: 전략변화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정진 KT 남북협력사업개발TF 부장(전 개성공단 지사장)에 따르면 당시는 북한 이동통신 발달사의 네 단계 가운데 세 번째에 해당하는 시기였습니다. 네 시기는 바로 ①당국의 공식 서비스가 개시되기 전 음성적으로 중국의 단말기를 들여와 사용하던 1차 불법사용의 시대(2002년 이전) ②당국이 공식 서비스를 했다가 용천역 폭발 사고로 중단하기까지 1차 공식 서비스 시대(2002~2004년) ③다시 당국의 허가 없이 단말기를 몰래 들여와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사용하던 2차 불법사용의 시대(2004~2008년 말) ④당국이 이집트 오라스콤과 제휴해 공식 서비스를 재도입하고 확장의 준비를 마친 2차 공식 서비스 시대(2008년 말 이후)입니다. 이 박사가 집중적으로 분석한 시기는 마지막 네 번째입니다. 2008년. 아버지 김정일이 뇌혈관계 질환으로 쓰러지고 북한 최고지도부 내부에 후계 논의가 시작되어 결국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과 김정은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큰 흐름이 시작된 때입니다. 그래프에 나타난 것처럼 이후 북한 이동통신 가입자는 한 번의 후퇴도 없이 증가하게 됩니다. 이 분야를 관장하는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 따르면 2009년 6만9261명이던 가입자 수는 2011년 200만 명을 넘어 2016년 360만6000명으로 급증했습니다. 현재는 4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2008년 12월 이집트의 오라스콤을 끌어들여 ‘고려링크’라는 이름으로 이동통신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2011년 순수 자국 회사인 ‘강성네트’를 제2 이동통신사로, 2015년에는 ‘별’이라는 제3 이동통신사를 잇달아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이 박사는 논문에서 아버지 김정일 시대에는 용천역 폭발 사고 등 내부요인에 의해 가다 서다를 반복하던 북한 이동통신 사업이 김정은 시대 들어 일관되게 성장일로를 걷는 현상과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 핵심인 정치적인 양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김정일의 이동통신 전략은 체제안위(정치)가 우선이고 단절적이고 폐쇄적인 형태라면 김정은의 그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경제발전(경제)을 목표로 지속적이고 개방적인 전략으로 변화하고 있다. 김정일이 자신을 노린 2004년 용천역 폭발사고 이후 이동통신 서비스를 중단했지만 김정일은 2011년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불어닥친 ‘아랍의 봄’ 파동에도 이동통신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학대한 것은 상징적인 사례다.” 2009년 11월 30일 화폐개혁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의 사회주의 계획경제 회복 시도를 했다 낭패를 본 김정은이 이후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경제의 시장화와 분권화, 화폐화 현상을 방임하고 있는 것에서도 원인을 찾습니다. “(김정은 시대 들어) 전국적인 광통신망의 구축, 고려링크의 자본주의적 마케팅 활동, 주민들의 시장활동에서 휴대전화가 경쟁력 확보의 수단화, 과시형 수요 등의 결합으로 이동통신 가입자는 단기간에 팽창을 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원인은 김정은 정권이 이동통신 사업을 통해 주민들이 몰래 축적해 온 달러를 수취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 박사는 지적합니다. “북한 당국에게 이동통신은 공식적으로 국내 경제에 스며든 외화 및 자금을 주민들의 저항 없이 획득할 수 있는 합법적인 수단이 되었다. 이동통신은 효율적인 국가재정의 확보, 통치자금의 마련을 가능하게 하여 통치자의 권력안정에 이바지하게 한다.” 쉽게 말해 정부가 직접 돈벌이에 나서 이동통신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서비스 이용료를 받아 재정을 확충하고, 겹겹이 둘러싸인 국제사회의 제재망 속에서도 재정능력을 일부라도 유지한다는 겁니다. 2009년 화폐개혁을 통해 강제적으로 사적 영역의 달러를 수탈하려 했지만 저항에 부딪히게 되자, 휴대전화와 같은 유용한 경제 수단과 서비스를 제공함하고 그 대가로 달러를 뽑아내는 ‘스마트한 전략’을 쓰고 있다는 것이죠. 이런 구조는 국제사회의 제재가 강해질수록 북한 내 이동통신 서비스는 확대될 수밖에 없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휴대전화를 통한 소통의 활성화는 정보의 유통을 촉진시키고, 강고한 독재의 시스템에 균열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김정은 정권에게 휴대전화는 양날의 칼인 셈입니다. 미국에 한 비핵화 약속 이행을 미적대고 있는 김정은 정권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 국제사회가 제재의 끈을 계속 죄어야 하는 이유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 2018-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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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엔 북핵 결의안에 CVID 못박은 건 노무현 정부였다[신석호 기자의 우아한]

    동아일보 기사 검색 시스템에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불가역적인 핵의 폐기) 용어를 검색 해보니 2004년 1월 4일자 기사가 처음이었습니다. 본보 기자가 미국의 대북정책과 관련한 신년 시리즈 취재차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국가안보회의 당국자는 “대북정책의 최종목표와 대북 인센티브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다. 북한이 이를 실행하면 북한의 우려를 해소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2003년 1월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되자 자신들의 대북정책이 전임 빌 클린턴 행정부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며 이 용어를 만들어 낸 것으로 전해집니다. 미국 측은 6자회담 과정에서 이를 공식 제기했습니다. 2004년 2월 25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제2차 회담에서 북한이 CVID 원칙을 받아들이라고 압박한 것입니다. 하지만 북한 측은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미국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제재 해제와 북미관계 정상화, 평화협정 체결, 한반도 비핵지대화 등과 같은 구체적인 행동을 보장하라면서 ‘북한판 CVID’를 들고 나왔습니다(송민순 전 외교통상부장관의 ‘빙하는 움직인다’ 92쪽). 당시 노무현 정부도 회담의 진전을 위해 CVID를 다른 표현으로 대체하자고 미국 정부에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동아일보 2004년 5월 24일자에 따르면 정부 관계자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CVID란 용어 자체에 집착하기보다는 그 내용을 현실적으로 실현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미국 측에 이런 의견을 전달했다”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동아일보에 따르면, 북한은 “CVID 용어를 사용하는 한 협상에 진전은 없을 것”이라고 참여국들을 압박했습니다. 결국 중국과 러시아도 한미일에 “북한에 대한 ‘문턱’을 낮춰 달라”고 요구했고, 이에 한국 정부가 호응한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은 CVID 원칙에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부시 행정부의 공화당뿐만 아니라 존 케리가 대선 후보로 나선 민주당도 그 해 7월 26~29일 열린 전당대회를 앞두고 발표한 정강정책에 CVID원칙을 명기했습니다. 공화당과 민주당이 한목소리였던 셈입니다. 하지만 6자회담의 진전을 원했던 부시 행정부도 결국 한 발짝 물러섰습니다. 2005년 7월 26일 5차 회담 개막사에서 당시 미국 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담당차관보는 CVID 대신에 북한이 ‘영구적이고 충분히, 그리고 검증가능하게’ 핵을 폐기할 것을 결정하면 북한의 안보우려와 에너지 관련 요구를 논의할 준비가 있다고 발언했습니다. 결국 2005년 9·19공동성명에는 CVID라는 표현이 ‘한반도의 검증가능한 비핵화’라고 축소돼 겨우 들어갔습니다. 북한의 외교력이 승리한 것입니다. 6일 발표된 싱가포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의장 성명에서 지난해 들어갔던 CVID가 빠지고 완전한 비핵화(CD)라는 반쪽도 안 되는 표현이 들어갔습니다. 북한은 지난해 핵무력 완성국면에서 어쩔 수 없이 뒤집어썼던 CVID의 멍에를 벗어 던진 것입니다. 그동안 북한이 참석한 가운데 아시아 이웃 국가들이 역내 현안을 논의한 결과를 반영한 ARF의 의장성명은 북한에 강력한 또래압박(peer pressure)으로 기능해 왔습니다. 역시 북한의 외교적 승리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한미 양국은 4·27판문점 정상회담과 6·12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선언문에 CVID를 관철하지 못하고 CD로 물러선 상태였습니다. 이번 ARF회담에서 정부는 CVID 표현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하면서 이보다는 4·27판문점 정상선언문에 들어가고 6·12싱가포르 정상 공동 성명이 인용한 CD 표현이 들어가는 것을 더 선호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전문가들은 2006년 10월 9일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 노무현 정부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에 처음으로 CVID원칙을 넣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 것에 비추면 지금 상황은 아이러니 하다고 지적합니다. 5일 뒤인 14일 채택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1718호는 ‘북한이 핵프로그램과 대량살상무기(WMD)를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방식으로 포기(abandon)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한 외교 소식통은 “당시 이 문구를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참여국은 한국과 부시 행정부의 미국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후 지난해 북한의 6차 핵실험 이후 나온 유엔 안보리 결의안 2397호까지 CVID 표현은 빠지지 않고 들어갔습니다. 물론 핵·미사일 도발에 대응한 유엔 결의안 채택은 회담 성사를 위해 북한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남북이나 북-미 정상회담, 6자회담 등과는 다소 성격이 다릅니다. 하지만 북한이 말로만 비핵화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행동으로 증명할 때까지 문재인 정부의 비핵화 비전과 목표도 노무현 정부가 설정한 CVID여야 하는 역사적 이유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 2018-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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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착 상태 빠진 北美…비핵화 협상 번번히 실패한 세 가지 이유[신석호 기자의 우아한]

    평창 겨울올림픽이 한창이던 2018년 2월 19일. 제8회 화정 국가대전략 월례강좌에 연사로 초대된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은 문득 ‘파시(波市)’라는 다소 생소한 단어를 화두로 올렸다. 파시. 어떤 물고기가 많이 잡힐 때 어촌에 들어서 사람들이 북적대다가 그 물고기가 잡히지 않으면 쓰레기만 남기고 돌연 사라지는 비상설 어물전을 말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분신인 여동생 여정이 특사로 내려온 뒤였던 당시 상황을 비유해 현 장관은 “지금이 남북관계의 파시다. 오랜만에 큰 장이 선 것”이라고 말했다.●롤러코스터 탄 한반도 정세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지금.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과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을 계기로 정점에 달했던 김정은의 2018년 대외 평화공세와 한반도 정세의 긍정적 전환은 당초 기대에 못 미치는 양상이다. 모든 면에서 실망스러운 싱가포르 북-미 정상 합의 이후 북-미간 비핵화 논의는 말 그대로 교착 상태다. 회담 전 “원샷으로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회담 직후부터 태도를 바꿨다. 7월 17일 백악관에서 기자들에게 “비핵화에 제한시간도 속도도 없다. 프로세스가 진행될 뿐”이라며 김정은의 ‘단계적 동시적 해법’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은 많은 이들을 고민하게 만든다. 현재의 한반도 정세를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현 전 장관이 말한 파시가 끝나버린 상황인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전후해 트럼프 행정부의 아마추어리즘이 드러나면서 북한 비핵화란 전략적 목표는 아예 물 건너 간 것인가? 아니면 북한 비핵화라는 대물을 거래하는 커다란 파시에 참가한 상인과 소비자들이 잠시 숨을 돌리고 더위를 식히며 더 큰 흥정을 준비하고 있는 시간인가? 그래서 지금은 칼 폰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설파한 ‘전략적 목표를 향한 전술적 휴지기’인가? 앞이 안 보일 땐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라고 했다. 북한이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2017년 7월 4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급 화성-14형을 발사한 직후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을 시작으로 출발한 화정 국가대전략 월례강좌. 싱가포르 정상회담 직후인 2018년 6월 마크 내퍼 주한 미 대리대사의 강연까지 1년간 강좌에 나선 연사 12명의 발언을 중심으로 현 상황을 복기해 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그 1년의 절반은 한반도에 전쟁 위기를 조성했던 북한의 전략도발국면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김정은이 대외에 전방위 대화공세를 폈던 기간이었다. 숨 가빴던 한반도 정세를 따라 한 달에 한차례 진행됐던 강좌에 나선 현인들의 발언들은 지금의 상황을 예견했거나, 지금의 상황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될 혜안으로 가득했다. 북한의 전략도발 국면 막바지였던 2017년 12월 11일 제6회 강좌에 연사로 나선 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은 김정은의 2018년 평화공세 가능성을 이렇게 예상했다. “김정은의 신년사에 어떤 내용이 담길 것 같으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북한이 핵무력을 완성해서 협상준비가 되었다고 하면 트럼프는 딜 메이킹의 천재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빅 딜을 생각할 수도 있다. 김정은이 미국과 핵국가 대 핵국가로 협상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던져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할지는 모르겠다.” 김정은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신년사 이후 두 달 만에 2018년 2월 연사로 나온 현 전 장관은 당시 “북한과 미국 간의 ‘큰 타협’이야말로 유일한 대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큰 타협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정교한 로드맵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한미가 충분히 사전에 협의해 심도 있는 논의를 해야 한다. 둘째, 협상 시간을 한정해야 한다. 협상을 과거처럼 2~3년 끌 수는 없다. 2~3개월이면 충분하다. 셋째, 기존의 제재 해제가 협상의 전제조건이어서는 안 된다. 제재는 계속하면서 가야 한다.”●엉성한 로드맵, 북한에 끌려가는 미국 모두가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된 ‘큰 타협’이 나올 것으로 전망했고 기대했다. 하지만 7월 18일 현재 상황은 답답함을 넘어 암울할 정도다. 앞의 두 전제조건은 이미 싱가포르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4개항의 실천조항이 담긴 북-미 정상합의에서 우선 정교한 로드맵을 만들지 못했다. 한미간 합의도 없어 한국 정부조차 당황했다. 이후 북-미 비핵화 협상에서 미국은 북한에 질질 끌려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비핵화에 시한 없다” 발언은 김정은의 대책 없는 시간 끌기로 악화된 여론을 무마해보려는 군색한 해명처럼 들린다. 현 전 장관의 지적 중 오로지 마지막 조건만 살아있다. 협상의 조건으로 기존 제재를 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싱가포르 회담 직후인 6월 18일 열두 번째 연사로 나선 마크 내퍼 주한 미국대사 대리는 싱가포르 합의에 대한 대내외의 비판을 의식한 듯 이렇게 강조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강조했던 것처럼 북한 비핵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제재는 여전히 유효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과거와 달리 과정에 대한 단계적인 조치(제재해제 등 보상)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2018년 11월 중간선거, 2020년 11월 재선에 북한 비핵화 이슈를 활용하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인 접근에 대한 우려는 도발국면부터 있었다. 2017년 11월 27일 다섯 번째 연사로 나온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전 청와대외교안보수석비서관)의 지적이 대표적이다. “한 가지 걱정은 트럼프가 완전한 비핵화(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enuclearization)를 공언하고 있고 지금은 결기가 대단해 보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입장이 약화될 가능성 높다. 임기가 있고,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이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자기 임기 내내 원하는 조건이 아닌 경우에는 계속 거부하면 된다. 트럼프가 시간이 흐를수록 입장이 약화되면 초조한 나머지 핵 동결로 타협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비핵화 공약 없는 동결 수용여부를 둘러싸고 한·미·일 공조체제가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과거 비핵화 협상 실패의 세 가지 이유 김정은의 현란한 대외적 이미지 정치 속에서 당장이라도 비핵화와 체제보장을 교환하는 ‘큰 합의’가 이뤄질 것으로 보였던 상황이 왜 갑자기 교착 상태에 빠진 것일까.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한계를 가장 적나라하게 제시한 사람은 올해 4월 18일 열 번째 연사로 나온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었다. 그는 그동안 북한 비핵화 협상이 왜 번번이 실패했는지에 대해 세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먼저 북한의 비핵화 실패의 배경은 동북아라는 지정학에 원인이 있다. (비핵화된 북한의) 미래 비전에 대한 양국(미국과 중국)의 이해가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70년에 걸친 불신이다. 북한의 카드와 미국의 카드는 같은 종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이 무슨 핵을 갖고 있고 어떤 물질을 갖고 있는지 신고하고 폐기하고 검증하라고 요구한다. 이는 물리적으로 분명한 행동들이다. 그런데 북한이 미국에 요구하는 것은 다분히 절차적이고 제도적인 것들이다. 어느 누가 먼저 카드를 내놔야 한다. 그런데 북한은 미국에 대해 ‘뭘 믿고 내 목숨이 걸린 물건을 내놓겠느냐’고 하고, 미국은 ‘우리가 어떤 나라인데, 북한의 협박에 굴해서 먼저 양보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반복하면서 양측의 카드가 불신과 비대칭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세 번째로 북한과 미국의 국내 정치가 협상에 엄청나게 작용하고 있다. 1994년 미국과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에 경수로를 지어주고, 북-미 수교를 하고, 북한은 핵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래서 당시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이 김정일한테 편지도 썼다. 그런데 북한에서 핵 포기를 하기로 한 뒤 들고 나온 게 선군정치다. 북한 내의 반발 때문에 선군정치가 등장했다는, 그런 분석이 나와 있다. 북한 내에는 북한 정치가 있다. 미국은 또 어떤가. 클린턴이 합의한 것은 부시가 다 바꾸고 폐기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했던 것을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다 바꿨다. 국내 정치가 다 왔다 갔다 한다. 상대 입장에서 보면 약속을 하지만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약속을 해도, (이를 뒤집는) 그런 국내정치가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1년을 통틀어 미중관계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더 컸다. 첫 연사였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그레이엄 엘리슨 교수가 ‘예정된 전쟁’이라는 저서에서 거론한 ‘투키디데스 함정’을 언급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미중 양국을 숙명적으로 세계적 차원의 경쟁 관계로 보기 때문에 아태 지역에서 미중 패권 관계가 심해질 것이라 전망한다”고 말했다. 중국 전문가인 서진영 고려대 석좌교수(2017년 8월 22일 2회 강좌)는 “(베이징 하계 올림픽을 개최한) 2008년 이후 중국이 완전히 달라졌다. 목소리가 강해지고 터프해졌다. 영토와 주권과 관련해서 거칠게 나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북한이 국제사회에 대해 가지는 불신에 대해 윤영관 전 외교통상부장관(2017년 9월 28일 3회 강좌)은 “우리가 전달해야 하는 메시지는 통일도 정권교체도 아닌 북한의 비핵화라는 정책 체인지임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핵을 포기한다면 다른 모든 것들은 당신들이 원해는 대로 해라’라는 일관된 메시지를 보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김희상 한국안보문제연구소 이사장(2017년 8월 25일 4회 강좌)은 북한의 내부정치 문제를 근거로 “북한에 저런 체제가 존재하는 한 핵미사일을 폐기할 리도, 할 수도 없을 텐데 그 체제는 그대로 두고 ‘핵미사일 폐기’에만 매달렸으니 애초부터 가능할 리가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핵문제는 남한에 의한 통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므로 체제를 그대로 두고 북한 비핵화를 목표로 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이야기다. 이와는 달리 현 정권의 외교정책 브레인인 문정인 연세대 특임교수(2018년 5월 24일 11회 강좌)는 북한과 미국 모두 과거와는 다른 행동패턴을 보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북한이 그러한 전술(과거와 같은 살라미 전술, 대화와 도발의 이중전술 등)을 추구한다면 이번 합의 전체가 위험에 빠지게 되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과거의 패턴과 죄와 벌의 반복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분명히 군사 행동과 전쟁 가능성을 키우면서 또 다른 위기로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인지, 한국과 미국은 북한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고 북한은 이러한 과거의 관행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중략). 다행히 역사 속의 인물이 되고 싶어 하는 개인적 욕망과 국내 정치적 이유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미 정상회담을 성공으로 이끌고 싶어 할 것이다. 과거와 다른 파격적인 행보를 기대해 보는 이유다.”●외교안보에 초당적 단합 필요 한반도 정세에 대한 분석과 전망이 엇갈리는 가운데 상황이 현재에 이른 데는 우리 모두의 책임, 특히 정치권의 과오가 크다는 자성론도 나왔다. 김형오 전 국회부의장(2018년 1월 23일 7차 강좌)의 일갈이다. “우리가 북한에 약한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정치의 책임이 가장 크다.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탕발림과 분홍빛 정책을 내세웠다. 미국만 믿고 동맹 조약 위에서 잠자다 보니 핵과 미사일 앞에서 생존을 위협 받게 됐다. 아직도 잠에서 덜 깬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여전히 걱정스럽다. 누군들 평화를 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북한의 말만 믿고 대비를 하지 않는다면 기울어진 운동장은 완전히 엎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향후 문제 해결에 있어서 정치권의 단합과 한목소리 내기가 중요하다는 것이 대부분 현인들의 결론이었다. “여야 할 것 없이 외교안보에 있어선 초당적 단합이 필요하다. 솔직히 말하면 세계 언론이나 세계 사람은 한국의 정당을 안 본다. 무슨 당이 있는지도 모르고 오직 한국만으로 바라본다. 우리 모두 부강,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향해 힘을 합치자. 우리가 힘을 합치면 못할 것이 없다.”(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오늘 날과 같은 초비상 시기에 맞는 필요한 자세는 정치권의 단합이다. 모든 정치인들이 똘똘 뭉쳐서 외교적으로 기막힌 수를 내어도 될까 말까 한 상황이다. 국내 정치에 몰두해서 외교 문제를 놓고 싸운다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외교안보 부처가 긴밀히 협력하고 총체적으로 조율돼야 한다. 바깥에 나가는 메시지가 단일한 소리로 나와야 국민들의 신뢰를 받고 한국의 외교가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받을 수 있다.”(윤영관 전 외교통상부 장관) 현인택 송민순 전 장관은 강좌에서 “우리는 북핵문제에 운명이 걸려있는 당사자이므로 강대국들에 대해 우리가 할 말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이 운전자론이건 무엇이건 말이다. 그런 연장선에서 굳건한 한미동맹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데 보수와 진보를 떠나 12명의 연사 대부분의 인식이 일치했다. 윤영관 전 장관은 “협상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한국의 이익이 철저하게 반영될 수 있게 상황을 만들어 가야 한다. 미국과의 긴밀한 공조 아래 협상단계에서의 로드맵을 만드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많은 관찰자들이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서 협상의 주도권은 트럼프가 아닌 김정은이 쥐게 되었다고 우려한다. 굳건한 한미동맹이 교착된 북-미 회담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을지는 다음 1년의 화정 국가대전략 강좌를 통해 면밀히 지켜봐야 할 과제인 것 같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화정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 연구위원·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 2018-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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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경협? 리스크 검토부터 하셔야죠![신석호 기자의 우아한]

    4·27남북정상회담 및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남북경협 재개에 대한 재계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경협 재개의 전제조건인 북한 비핵화를 위한 북-미 대화가 교착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아직은 “남북경협 사업은 아직 너무 많은 위험(risk) 에 둘러싸여 있다”는 비관론이 큰 상황이다. 20일 본보 미래전략연구소가 개최한 경협 워크숍이 ‘북한 비즈니스 밑그림그리기’라는 잠정적인 제목을 단 것은 그런 이유다. 남북경협이 당장은 현실화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과거 20년의 사례를 통해 남북경협에 수반되는 위험은 무엇이며 어떻게 분류할 수 있는지, 그것은 통상적인 경제활동에 수반되는 위험처럼 관리(manage)할 수 있는가를 미리 고민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하는 20일 워크숍에서 ‘대북 비즈니스의 기회와 리스크’라는 제목으로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의 경협 성패 사례를 2018년 현재에 대입해 본 내용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인생에는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건강을 잃을 위험, 배우자를 일찍 잃을 위험, 고령화에 따라 ‘돈 없이 오래 살 위험’ 등이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수익을 추구하는 투자에도 다양한 위험이 따른다. 신용을 잃을 위험, 유동성 부족에 빠질 위험, 사기를 당할 위험 등이다. 각종 투자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수익이라고 한다면 뜻대로 수익을 내지 못할 각종 불확실성을 일반적으로 위험이라고 말한다. 주식값이 내릴 위험은 작은 것이고 회사가 망할 위험은 큰 것이다. 투자의 귀재 존 보글을 구지 인용하지 않더라도 예상 수익이 높을수록 위험이 크다(High Risk, High Return)는 것은 상식이다. 투자 기간이 길수록 위험도 커진다. 장기 채권의 이자율이 높은 이유다. 그런 위험을 사전에 예방하거나 합리적인 수준으로 줄이는 것을 위험관리(Risk Management)라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위험을 수량화 할 수 있어야 한다. 위험을 계산할 수 없으면 헤지를 할 수 없고 따라서 수익도 계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북경협의 위험은 어떤 종류가 있고, 그것은 관리 가능한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3년 6월 중소기업진흥공단이 경협기업가들을 설문조사한 결과 남북경협에 따르는 위험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정치적 위험(63.4%)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북미관계와 남북관계가 나빠지거나 북한 국내정치가 불안해질 가능성을 말한다. 경영권과 기업 자율성 확보에 대한 불안 등 경제적 위험(7.9%)이 뒤를 이었다. 투자보장, 상사분쟁 해결 등 제도와 실행력에 대한 법적 제도적 위험(4.6%)이 가장 적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05년 5월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유사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물류수송 통신 전력 등 인프라 미비(31.2%), 북측 상대 기업의 태도, 자금 판로 사정 등 기업 내부적인 문제(29.8%), 북한 핵 문제 등 정치 외교적인 위험(17.0%), 우리 정부의 남북경협에 대한 지원 등 행정적인 문제(10.6%), 4대 경협합의서에 따른 후속조치 등 경협 제도적인 문제(7.1%)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경협 초기였던 2003년에 비해 정치적 위험에 대한 우려는 작아졌지만 현장에서 실제 겪은 문제에 대한 불만이 커진 것으로 풀이된다.필자는 2005년 당시 경협 기업인들을 직접 만나 현장에서 느끼는 구체적인 위험이 무엇인지 인터뷰를 했다. 크게 네 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인프라’ 위험으로 낙후된 전력 및 도로시설 등에서 오는 손실 가능성을 말한다. 예를 들면 용기와 수송로가 없어서 양파가 풍년이라도 썩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변심’ 위험은 북측의 상대방이 갑자기 말을 바꿀 위험이다. 상부 보고만을 위한 ‘한탕주의’ 식 협상과 계약 후 표변 등으로 인한 손해를 말한다. 세 번째 ‘무지’ 위험은 상대가 경제 및 경영을 모르기 때문에 부딪히는 낭패다. 시장원리에 맞지 않는 과도한 임금을 요구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마지막 ‘단절’ 위험은 갑작스런 교통과 통신 중단 사태를 말한다. 경협 기업들은 남북관계 단절이나 북한 내 급변사태로 인적 왕래가 끊어지고 연락이 두절되는 사태에 늘 신경을 곤두세운다고 했다. 하지만 인터뷰 대상 기업들이 모두 같은 위험에 노출되어 사업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화인통상을 운영했던 김찬구 회장의 경우 위험의 정도가 커서 사업을 포기한 경우다. 당시 경협사업 경력 16년이었던 김 회장은 미국 교포로서 1989년 처음으로 방북해 2004년까지 59차례 방북하며 다양한 경협 사업을 추진했다. 선박수리소와 골뱅이와 가리비양식장, 농구화공장, 봉제완구 공장, 농산물 가공공장, 러시아 어장 진출 사업 등 다양한 업종에 손을 댔다. 주력 기업은 ‘평양 순평 완구공장’으로 1995년 평양 용성구역에 공장 설립해 4년 동안 운영하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북측과의 불화로 운영을 중단했다.2005년 5월 인터뷰했던 그는 ‘무지’ 및 ‘변심’의 위험을 관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북측 상대방은 상부 보고만을 위한 ‘한탕주의’ 식 협상과 계약을 한 뒤 무리한 선(先) 투자 요구를 하며 끝내 표변했다는 것이다. 시장원리에 맞지 않는 과도한 임금을 요구하고 및 협상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교체당하는 일이 반복되었다.반면 (주)엘칸토의 만경대구두공장은 2005년 당시 다양한 위험을 잘 관리하며 성업을 하고 있었다. 1994년 김용운 회장이 진출을 시도해 1997년 김찬구 회장의 주선으로 광명성총회사와 설비투자 및 임가공 사업 계약을 맺었다. 2005년 11월 인터뷰 당시 회사는 법정관리 상태였으나 대북사업은 계속되고 있었다. 우선 ‘인프라’ 위험을 잘 관리한 것이 주효했다. 제화업은 특성상 반수동, 반자동 설비를 사용해 전기의 양과 질의 영향을 덜 받았다. ‘단절’ 위험도 미리미리 관리했다. 원자재 운반 등에 평양-남포 간 고속도로를 이용해 교통 두절 위험 줄였다. 평양 현지를 오가느라 기획과 생산, 유통까지 시간(리드 타임)이 많이 걸리는 점을 감안해 유행을 타지 않는 남성화만 생산했다. 전체 구두 생산량의 10%만 북한에서 생산했다. 여기에 지식격차(knowledge gap)를 이용한 지속적인 교육과 기술이전도 북측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술만이 중국을 이기고 살아남을 길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일방적으로 공정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통해 근로자의 이해 놓였다고 한다. 8년 동안 일관된 모습을 통해 상호 신뢰를 형성했다는 것이다.㈜프렉코의 휴대전화부품 사업도 2005년 당시로서는 성공사례였다. 2000년 북한사업진출단을 구성한 이 회사는 삼천리총회사와 정밀금형 임가공 사업 계약 체결했다. 하지만 국내 경기 침체 및 업종전환에 따라 금형사업을 일시 중단하고 2004년 삼천리총회사와 새 사업인 휴대전화 부품(힌지) 제작사업을 시작했다. 2005년 당시 평양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을 중국과 국내외 대기업에 공급하고 있었다. 책임자였던 조봉현 당시 부사장(현 기업은행경제연구소 부소장)은 “물고기를 잡으려면 물고기의 마음을 읽어야한다는 점에 착안해 최고지도자인 김정일 위원장이 좋아할만한 사업을 찾는데 주력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2001년 중국 방문 이후 이동통신사업에 지대한 관심을 피력한 점에 주목해 최근 첨단 기술이전 욕구를 자극한 것이 주효했다. 비전에서 액션플랜까지 기업 활동의 전 과정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주고 컨설팅을 해줬다. 이처럼 2005년 현재 남북경협의 현장에는 관리와 통제가 가능한 위험과 그렇지 않은 위험이 혼재되어 있다.하지만 2006년 10월 북한이 첫 핵실험을 하면서 정치 경제정책을 보수화하고 2008년 남한에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 퍼주기 논란이 컸던 상황에서 2008년 7월 11일 금강산에서 관광객 박왕자 씨가 북한군의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금강산 관광사업이 중단됐다. 2010년 3월 26일 북한의 천안함 폭침 사건에 따른 정부의 5.24 조치에 따라 내륙 경협이 전면 중단됐다. 2016년 1월 6일 북한의 4차 핵실험과 2월 7일 장거리로켓 발사 실험에 따라 마지막 남은 경협 사업인 개성공단마저 폐쇄됐다.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2018년 1월부터 김정은이 전방위적인 대외 평화공세에 나서면서 남북경협 재개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지만 아직 불확실성이 너무 큰 상황이다. 우선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교착상태에 빠진 것으로 보이는 북미 비핵화 대화의 향배가 가장 큰 변수다. 과연 김정은의 ‘완전한 비핵화’ 약속은 진정성이 있는가? 그렇지 않을 경우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김정은을 설득하거나 강압해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를 관철할 능력이 있는가? 비핵화가 진전되지 않는 경우 북한을 겹겹이 둘러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는 풀리지 않을 것이며 개별 기업들이 이를 뚫고 경협의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유엔 안보리 제재와 미국 등의 단독 제재에 남한의 단독제재 내용을 파악하는 것만도 국제법률가를 동원해야 할 정도의 난해한 작업이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혹여 북한 비핵화가 진전되고 제재가 풀려 사업기회가 오더라도 과연 과거처럼 남한이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다시 차지할 수 있을까? 중국 러시아 등과의 전략적 경쟁관계에서 ‘남한은 인프라나 깔고 돈은 그들이 벌 위험’이 새로 추가될 수도 있다. 북한의 전략적 목표일 수도 있는 ‘핵을 가진 평화(nuclear peace)’가 현실화되어 핵 보유도 비핵화도 아닌 ‘어정쩡한 북한 비핵화’ 상황에서 경협이 일부 재개된다면? 최근 제3국 등에서 북측 인사들을 접촉한 남측 기업인과 인도적 지원단체 인사들은 “공부 좀 다시 해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하는데 그것이 ‘우린 이제 핵보유국이 되었으니 10년 전과 다른 더 돈 되는 계획을 가져오라’고 배짱을 부리는 것이라면? 앞에서 열거한 것들을 질적으로 능가하는 새롭고 강력한 위험이 남북경협에 암운을 드리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 2018-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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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탐사보도 다음은 문제 해결 저널리즘’

    2018년 세계편집인포럼(WEF) 이틀째인 7일 포르투갈의 휴양도시 에스토릴 콩그레스. 세계 언론인들과 교류하던 중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프랑스 스파크뉴스의 플로리안 몰라드-콜론. 동아일보가 올해로 3년째 참여하고 있는 임팩트저널리즘데이(IJD) 프로젝트를 홍보하기 위해 날아온 참이었다. 독자들에게 문제점만 던지는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하자는 ‘솔루션 저널리즘’의 기치 하에 동아일보를 비롯한 세계 50여개국 대표 신문사들이 참여하고 있는 IJD 프로젝트는 6년째를 맞은 올해 멀티미디어 서비스 제공에 힘을 기울였다. 솔루션저널리즘과 멀티미디어와의 시너지를 추구하는 셈이다. 독자들이 이 프로젝트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지구촌의 문제점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퀴즈로 테스트해 볼 수 있다. 그의 안내로 들어가 보니 ‘세계에서 축구장 27개 넓이의 숲이 사라지는 시간 단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처음으로 나왔다. ‘한 시간’을 답으로 꼽았지만 틀렸다. 정답은 ‘1분’. 난개발로 인한 산림 황폐화 문제점을 일깨우기 위한 문제였다. 이를 포함해 다양한 지구촌 문제에 대한 해답을 기사로 내놓은 올해 6월 16일 임팩트저널리즘데이를 앞두고 스파크뉴스 측은 참여 언론에 ‘자사 홈페이지에 동일한 안내문을 올려 각국의 문제해결에 동참하고 있는 개인과 단체를 모아보자’고 제안했다. 세계에서 모두 1000여 건이 접수됐고 이 가운데 100여 건은 실제 기사화 될 예정이라고 한다. 행사의 정식 발표 중에도 기존 사실보도나 탐사보도를 넘어선 콘스트럭티브 저널리즘(건설적인 저널리즘·constructive journalism)이 소개됐다. 덴마크의 율릭 해거롭 콘스트럭티브 인스티튜트 최고경영자는 이날 ‘저널리즘 되 띄우기(reboot)’ 세션 발표를 통해 “탐사보도로 사회의 숨겨진 문제점을 파헤친다면 콘스트럭티브 저널리즘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라며 “둘은 한 쌍이 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에 따르면 탐사보도가 ‘어제’를 다룬다면 콘스트럭티브 저널리즘은 ‘내일’을 다룬다. 비난하는 대신 영감을 주고, 누가 왜 그랬는지 보다 ‘어떻게, 무엇을’에 집중한다. 비판보다는 흥미를 유발하는 스타일을 추구한다. 기자는 판사가 아니라 촉진자의 역할을 한다. 기사의 초점도 악당과 피해자 보다 해결책과 베스트 프렉티스에 집중한다. 현재 동아일보와 함께 IJD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세계 50여 개 신문사 외에 영국의 가디언, BBC 등도 독자적인 콘스트럭티브 저널리즘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해거롭 최고경영자는 소개했다. 그는 “5년 후에 세계 언론계의 흐름을 바꾸는 것이 목표”라고 소개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재단이 지원했습니다에스토릴(포르투갈)=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kyle@donga.com}

    • 2018-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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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년 뉴스룸 프런티어를 가다

    “워싱턴포스트(WP)의 팟캐스트(podcast)를 매일 듣고 있어요. 정말 좋아요. 더 중요한 건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란 거예요.” 7일 포르투갈 휴양도시 에스토릴 콩그레스센터에서 열린 2018년 세계편집인포럼(WEF) 이틀째. ‘뉴스룸 2020’ 세션 첫 연사로 나선 미국 WP의 제시카 스탈 오디오 콘텐트 담당 에디터는 자사의 팟캐스트 사업을 집중 홍보하던 도중 한 구독자의 편지를 소개했다. 그는 “팟캐스트는 소비층이 매우 두텁다. 지난해 24%의 미국인이 이용하고 있고, 올해는 26%, 약 7300만 명이 사용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미국은 물론 세계의 신문사로 평가받는 이 회사가 오디오팀을 따로 두고, 팟캐스트 콘텐츠를 생산하는 이유다. 한국언론재단의 지원으로 2박 3일 동안 포럼 전과정에 참석한 한국 기자들에게 이 세션은 미래 한국 미디어 산업의 발전을 위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2020년은 동아일보가 10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이 세션에서는 팟캐스트 서비스와 같은 새로운 멀티미디어 채널 개발과 디지털 모바일 디자인 혁신, 이를 위한 인력개발 및 조직혁신 등이 논의됐는데 이들 3대 주제는 이번 포럼 전체의 화두이기도 했다. 아마존의 창립자 제프 베조스가 인수한 이후 디지털 모바일 혁신에 몰두해 온 WP가 디자인과 동영상에 이어 팟캐스트 오디오 뉴스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있는 상황은 ‘듣는 뉴스’에 눈을 떠가고 있는 한국 언론계에도 시사하는 점이 많았다. 전날 세션에서 브라질의 RBS미디어그룹은 디지털 모바일 혁신을 위해 TV방송과 종이신문의 영상과 텍스트 콘텐츠에 라디오의 음성 서비스를 모두 통합한 유료 사이트 개발 사례를 소개했다. 혁신적인 디자인과 간결한 문체로 디지털 모바일 독자들을 끌어 모으고 있는 악시오스(AXIOS)의 알렉시스 로이드 최고디자인책임자(CDO)는 “우리는 뉴스 콘텐츠가 제작, 유통, 소비되는 전 과정에서 편의성을 추구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세운 원칙은 덜어내기(subtraction)”라고 소개했다. 디지털 모바일 기사와 디자인에서 불필요한 것, 핵심적이지 않은 것을 덜어내 기자들과 에디터들이 중요한 뉴스에 집중하도록 하고 독자들은 쉽고 즐겁게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악시오스의 디지털 모바일 뉴스 페이지는 ‘똑똑한 간결성(Smart Brevity)’을 추구하고 있다. 페이지 상단에서부터 헤드라인, 멀티미디어, 기사 요약, 그리고 핵심(axiom)을 짧은 문장으로 순서대로 보여 줘 별도의 클릭없이 콘텐츠를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이를 위해 문체를 혁신했다. 통상적인 인터넷 기사보다는 짧지만 SNS 글보다는 긴 문장에 ‘왜 그것이 중요한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등을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부분을 꼽고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친구에게 말하듯이 자연스럽게, 중요한 것 한 가지씩만 명확하게 쓰라는 원칙 등을 강조하고 있다. 알렉산드라 보샤트 로이터 전략 개발 담당은 뉴스룸 혁신 과정에서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현대 미디어가 기술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정작 사람의 문제에는 소홀하다”며 “사람들로 이뤄진 뉴스룸을 잘 경영하는 것이야 말로 언론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여서 인력관리에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제시하는 10가지의 구체적인 방안들은 한국 언론계에도 시사하는 대목이 많았다. ①디지털 모바일 혁신을 한다며 기존 신문기자들을 코너로 몰지 말 것 ②AI 기사도 중요하지만 신문기자들에게 공포를 주지 말 것 ③기자들을 번 아웃(burn out) 시키지 않도록 업무를 조절할 것 ④인센티브 구조를 조정할 것 ⑤신문기자들과 외부 전문가의 전문성을 잘 조합할 것 ⑥조직의 다양성을 유지하며 소통을 늘릴 것 ⑦다른 회사가 한다고 따라하지 말 것 ⑧일의 양을 줄이고 대신 더 잘 할 것 ⑨그 조직만의 가치와 전략을 잘 조합할 것 ⑩조직원들이 스스로 사랑하는 일을 하도록 할 것 등이다. 이번 포럼에는 전세계에서 700명의 언론인들이 참여해 정보와 지혜를 교환했다. 뉴욕타임스(NYT)와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유수의 전통미디어와 함께 구글과 페이스북 등 SNS 서비스 뉴미디어들도 참여했다. 미국 뉴욕타임스 부회장인 마이클 골든 세계신문협회장은 “언론은 더 많은 역할을 감당해야 하지만 언론의 자유는 많은 공격에 처했다”며 “언론을 위협하는 모든 것에 협업과 연대로 맞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마다 시상되는 ‘자유의 황금펜 상’은 마약과의 전쟁을 핑계로 인권을 침해하는 두테르테 정권에 맞서 싸우는 필리핀 ‘Rappler’ 최고경영자 마리아 레사(여)에게 돌아갔다. 그는 6일 열린 시상식에서 “당신은 어떤 것을 지켜내기 위해 싸우도록 강요받는 상황에서야 비로소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 알게 된다”는 명연설을 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포르투갈 정부도 행사를 적극 지원했다. 현지 주간지 엑스프레소는 포럼의 전 과정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했다. 에스토릴(포르투갈)=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kyle@donga.com}

    • 2018-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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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고독한 독재자’ 김정은, 왜 세상 밖으로 나왔나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8년 여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건강을 회복한 어느 날. 그와 여동생 김경희, 그녀의 남편 장성택과 김정은이 식사를 겸한 가족회의를 열었다. “(후계자는) 정은이가 좋다고 생각한다.”(김정일) “분별도 없는 아이에게 어떻게 이 나라의 운명을 맡긴단 말입니까.”(김경희) 이에 김정은은 화를 내며 들고 있던 젓가락을 던지고 나가버렸다. 일본 도쿄신문의 북한전문기자인 저자가 탈북자들의 말을 인용해 소개한 김정은 후계자 지명 일화다. “달리 대신할 인물이 없다. 무엇보다도 본인이 의욕을 보인다”는 김정일의 설득이 먹혔다는 것이다. 2012년 ‘안녕하십니까? 김정남입니다’를 낸 저자가 김정은을 파헤쳤다. ‘그는 광기와 고독의 독재자인가’라는 부제에서 보듯이 김정은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북한이 평창 겨울올림픽에 참가한 올해 2월 쓴 서문에서는 “2018년에 들어 북한은 한국과 가까워지려 하고 있지만 이것은 시간을 벌려는 것”이라고 추정한다.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진 북한의 비핵화 평화공세에 대해서는 “한반도에서 살얼음판 위를 신중히 걷는 듯한 위험한 날들이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1999년 도쿄신문 서울지국장으로 부임해 20년 가까이 북한과 한반도 문제를 추적해 온 베테랑답게 한 인간으로서 김정은과 그의 뿌리인 김일성 김정일 약사(略史), 김정은의 핵·미사일 및 대미(對美), 경제 정책 등을 폭넓게 다뤘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18-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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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신석호]김정은 날자 뜨고 지는 가설들

    지난해 북핵 위기 국면에서 북한과 미국의 비핵화 대화 가능성을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은 서재진 전 통일연구원장이었다. 9월 25일 한 강연회에서 “북핵 위기 상황인 지금이 북핵 폐기를 위한 절호의 기회”라며 “머지않아 6자회담 같은 다자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당시가 어떤 땐가. 열흘 전인 15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 화성-12형을 발사하자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1일 새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북한 경제 봉쇄’를 지시했다. 23일 밤에는 전략폭격기 B-1B 편대를 동해 북방한계선(NLL) 이북 공해상으로 진격시키는 최고의 군사적 압박도 시도했다. 모두가 한반도 제2의 전쟁을 우려할 때였다. 암흑 속에서 여명을 본 것은 ‘세계체제론’이라는 이론적 프리즘을 통해서였다. 그는 2004년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이론에 북한 문제를 대입해 이렇게 주장했다. ‘세계는 하나의 자본주의 체제다. 어떤 나라가 그 체제에 들어가 달러 경제의 혜택을 누릴지는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결정한다. 6·25전쟁 이후 북한은 여러 차례 미국에 세계체제로 가는 티켓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북한은 미국이 외면할 수 없는 카드를 찾아들었다. 바로 핵 개발이다.’ 이런 논리로 한때 풍미했다가 사실상 폐기되는 듯했던 ‘북핵 대화용’ 가설은 12일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앞두고 화려하게 부상했다. 가설에 따르면 북한에 핵 개발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미국의 인정을 받기 위한 수단이다. 미국이 북한에 세계체제 입장 티켓을 발급한다면 핵은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폐기될 예정이었다는 것이다. 최근 상황을 독재자의 생애주기와 경험(the life cycle and experience of dictatorship) 가설로 설명하는 이들도 많다. 김일성종합대 출신인 아버지 김정일이 50대 후반이 되고 나서야 제한적이나마 개혁과 개방에 나섰던 것과 달리 스위스에서 유학한 젊은 지도자 김정은은 7년의 짧은 내부 장악을 거쳐 자신이 꿈꿔온 새로운 대외관계를 실천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정은과 트럼프 대통령이 공동성명에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라는 명확한 목표는 물론이고 그 종착역에 이르는 시간표와 기착역도 구체적으로 담아내지 못한 채 싱가포르를 뜨자 역풍이 커지고 있다. 공동합의문이 완전한 비핵화를 명시했지만 미국 내에서는 ‘북핵 보유용’ 가설이 다시 비상하고 있다. “돼지가 하늘을 날면 모를까(Not until pigs fly) 북한 비핵화는 불가능하다”며 북한이 9·19공동성명을 이행할 가능성이 없다던 2006년 로버트 조지프 전 미 국무부 비확산담당 차관의 발언이 다시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전국에 숨겨 놓은 핵·미사일 시설을 미국이 정말 다 찾아낼 수 있느냐는 ‘탐지능력’ 문제와 폐쇄적인 북한이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수준의 사찰과 검증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수용능력’ 문제도 여전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 군사훈련 중단 발언이 촉발한 국제적인 논란은 과연 우리가 북한이 요구하는 비핵화 대가를 지급할 수 있느냐는 ‘지불능력’ 문제에 다시 불을 지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제 시작일 뿐이고 김정은의 비핵화 진정성을 믿는다”고 이번 합의문을 정치적으로 포장하는 데 애썼다. 하지만 북핵이 ‘대화용’인지 ‘보유용’인지를 둘러싼 오래된 논쟁도 재점화된 것으로 보인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 2018-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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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탐구]태영호 “영어 열심히 배우라는 어머니 덕분에 지금 한국에 와 있어”

    《 “김영철은 지금 본인의 능력에 넘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정치군인에 불과한 그에게 북-미 외교와 남북 관계 총책이라는 지금 자리는 분에 넘칩니다. 물론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지만, 나중에 숙청될 운명이 될 수도 있어요.” 역시 외교관 출신 엘리트답게 최근 북-미 대화의 판을 보는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56)의 눈은 예리했다. 지난달 27일 기자와 두 번째 만난 그는 북한 비핵화 북-미 대화 과정에서 불가피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평양 관료정치 갈등’을 한동안 역설했다. 》  “대화가 잘될 때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 삐걱거리면 곧바로 당 조직지도부가 검열에 들어갑니다. 핵문제의 기술적인 부분을 잘 모르는 김정은과 김영철이 잘못 내린 결정이 많을 텐데, 김정은 지시에 따른 것이라도 책임은 김영철이 지게 됩니다. 최고지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고 김정은은 뒷짐 지고 모른 체하겠죠.” 이런 합리적인 추정의 역사적 근거들은 지난달 출간한 ‘태영호 증언: 3층 서기실의 암호’에 넘쳐난다. 실제로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대남협상의 전면에 나섰던 최승철(통일전선부 부부장)과 뒷선에서 지휘했던 한시해(전 유엔 주재 대사)와 권희경(전 주러시아 대사), 이명박 정부 시절 남북 관계에 발을 들였던 류경(국가보위부 부부장)도 총살을 당했다. 그는 “지금 현 상황을 외무상이자 대미협상 베테랑인 이용호가 끌고 나간다면 상당히 오래가겠지만 김영철이 운전하고 있어 언제 갑자기 멈추어설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 현장에 국제 전문가들을 초대하겠다고 남측에 밝혔다가 뒤늦게 철회한 것이 대표적인 ‘삑사리’ 사례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 김영철이 뉴욕을 통해 워싱턴에 입성하기 전날인 1일. 기자와 다시 만난 태 전 공사는 “김정은을 만나더라도 그의 비핵화 진정성을 제대로 파악하면서 천천히 가더라도 한 걸음 한 걸음 잘 확인하고 가야 후회하지 않는다. 주변 보좌관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조언하고 싶다고 말했다. 두 차례의 만남 사이에 북-미 관계만큼이나 큰 변화가 그에게 있었다. 그의 증언록을 읽고 전화를 걸어온 5촌 아저씨 A 씨를 지난달 29일 만난 것이다. 기적처럼 남한에서 혈육을 찾고, 그를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과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사진까지 얻은 그는 그날 밤늦도록 “너무 행복하다”는 문자메시지를 기자에게 연발하며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30일자 동아일보에 단독 보도된 것을 보고 많은 지인이 축하 전화를 해왔어요. 그중에 목사님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제일 어려울 때 신의 가호가 함께한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기도했거든요. 따라서 앞으로 당신과 가족이 하는 모든 일이 잘될 겁니다. 신이 함께하시니까요’라고요.” A 씨도 흡족해하며 전화를 걸어와 고향인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내려온 80대 친구들이 향우회를 하고 있다며 함께 가자고 했다. 지난해 11월 첫 인터뷰를 한 뒤 세 번의 만남 동안 태 전 공사 가족의 교육열을 실감했다. 증언록 곳곳에는 외국에 부임할 때 규정을 피해 자식을 함께 데리고 가서 교육하려는 아버지 태영호의 눈물겨운 노력이 기록되어 있다. 스스로 “국가의 특혜를 많이 받으며 잘나갔다”는 그가 2016년 8월 탈북한 것도 두 아들을 자유로운 환경에서 더 잘 가르치겠다는 일념에서다. 한국에 와 국정원 안가에서 지내는 6개월 동안 태 전 공사는 두 아들과 동아일보 등 한국 대표 신문의 사설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매일 두 시간씩 가졌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는 데 신문 사설만 한 교재가 없다’며 게으름을 경계한 결과 아들들은 한국 사회의 구조와 현안에 익숙해진 상태에서 사회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교육열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분명했다. 증언록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힘 있는 집 아이들은 다 영어학부를 신청한다. 앞으로는 영어가 대세라는 뜻이다”라며 “러시아어를 배워야 소련에라도 가지, 미국 놈 말은 배워 뭘 하느냐”던 아버지를 설득해 아들을 평양외국어학원 영어학부에 보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한국에 와 이제 민간인의 몸이 된 자신에게 뭘 하라고 다그쳤을지 가끔씩 생각하곤 한다. ‘잘 먹고 잘살려고 한국에 온 것이 아니다. 노예 상태인 북한 주민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자유와 풍요로움을 선사하기 위해 투쟁하러 온 것이다’라는 결심으로 공무원 신분이나 다름없는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직을 과감하게 벗어 던진 것도 그런 고민의 결과다. 우선 이해될 듯하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한국 사회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요즘도 주요 신문 사설을 모아 소개하는 휴대전화 앱을 빼놓지 않고 본다는 그는 “신문마다 같은 사안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을 보면서 한국 사회의 다양한 토론 문화를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침마다 채널A의 ‘돌직구쇼’를 즐겨 보며 한국 사회 내의 다양한 쟁점과 입장에 대해서 간접경험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진보와 보수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관찰 결과를 내놓았다. “진보는 선전에 능하고 개인과 조직들이 매우 전략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봅니다. 4·27 정상회담만 보더라도 보는 것이 믿는 것(Seeing is Believing)이라는 구호를 들고 생중계를 통해 김정은의 이미지를 바꾸어 놓지 않았습니까? 독재자 김정은이 하루아침에 근사한 젊은 지도자로 탈바꿈하지 않았는가 말입니다.” 그는 “진보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바탕인 시민단체 네트워크들을 잘 활용하는 것 같다”며 “반면 보수는 목소리들이 잘 모아지지 않는다. 몇몇 정치인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조직들이 지도자를 잃자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형국”이라고 했다. “상대적으로 풍요한 보수 진영 인사들은 사회적인 논쟁에 굳이 참여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반면 진보 진영은 이른바 ‘헝그리 정신’으로 뭉치는 것 같아요. 창출된 소득을 이제는 시민사회에 평등하게 나눠주어야 한다는 지금 정부의 생각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다가 그리스처럼 되는 것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김정은의 비핵화 진정성을 믿지 않는다. 증언록에 따르면 북한은 이미 2016년 5월 제7차 노동당대회에서 2017년까지를 핵무력 완성 시기로, 2018년부터는 ‘핵보유를 위한 평화환경의 조성 시기’로 정했다. 핵보유국이 되는 과정은 인도와 파키스탄 모델을 따르기로 했다. 단기간에 핵과 미사일 발사 시험을 마무리 짓고 동결 선언을 한 다음 평화 공세를 벌여 자연스럽게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일부 전문가라는 사람들에 의해 알려지고 해석되는 북한의 생각과 모습은 진짜 북한과 너무 차이가 납니다. 예를 들어 일부 전문가가 북한이 핵·미사일 능력을 다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데는 동의하면서도 몇 개 숨겨놓은 핵무기는 정치적 레버리지가 되지 못해 한국이나 일본에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애써 자위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비핵화로 포장된 핵보유국이 되려는 김정은의 전략에 말려드는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는 “누군가는 있는 그대로의 북한 실상을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 내가 그 소임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구체적인 방안도 구상해 놨다. 그를 따르고 지원하는 지인들이 옆에서 힘이 되고 있다. 지난달 27일 모임도 그의 새 출발을 응원하기 위해 지인들이 만든 자리였다. 그도 나도 무신론자이지만 그에게 외쳐줬다. “신의 가호가 함께할 것입니다. 본디 인간이 하늘이니까요.”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 2018-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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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영호, 김정은 체제 비판 자서전 출간 후 ‘국정원 연구소’ 전격 사퇴

    북한 김정은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한 자서전 ‘3층 서기실의 암호’를 출간한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가 23일 오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 사표를 제출했다. 연구원 측은 태 전 공사의 사표를 즉시 수리했다. 이에 앞서 북한은 태 전 공사의 자서전 내용과 국회 발언 등을 문제로 삼아 문재인 정부에 조치를 요구했다. 태 전 공사의 한 측근은 “14일 국회 발언에 대해 북한이 거세게 항의하고 국내에서도 논란이 일자 사직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에 대한 불안한 마음 때문인지 예정된 일정들을 취소한 상태”라고 전했다. 태 전 공사는 사직 이후 저술활동에 집중하면서 자서전을 외국어 판으로 내는 등 북한 체제의 문제점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일에 매진할 것으로 알려졌다. 태 전 공사는 이날 국회에서 자유한국당 심재철 의원이 주최한 남북관계 전망 토론회에 참석해 14일 “핵 폐기는 북한 체제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북한의 진정한 핵 폐기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김정은에 대해 “성격이 대단히 급하고 즉흥적이며 거칠다”고 묘사하면서 2015년 자라 양식공장 현지지도 직후 지배인 총살 사건 등을 언급했다. 대남 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는 19일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 등을 겨냥해 “남조선 당국은 사태가 더 험하게 번지기 전에 탈북자 버러지들의 망동에 특단의 대책을 취해야 할 것”이라고 다시 요구했다. 태 전 공사는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6년 8월 영국에서 가족과 함께 망명해 한국에 정착한 뒤 연구원에서 근무해왔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대외활동의 범위와 내용 등을 놓고 원구원 측과 종종 갈등을 빚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연구원 측은 “그의 대외활동은 전적으로 그의 자유의사에 맡겼다”고 반박해 왔다.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 2018-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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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은 IMF 회원국이 될 수 있을까?[신석호 기자의 우아한]

    2006년 6월 처음 미국 뉴욕을 방문했을 때 새벽마다 수십 명씩 무리지어 맨해튼 센트럴파크를 자전거로 누비는 젊은이들이 특히 좋은 볼거리였다. 세계 금융의 본산지인 뉴욕의 위상을 감안할 때 저들 중 상당수는 월가에서 일하는 야심만만한 젊은이, 즉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명명한 ‘전자 투자가’들일 가능성이 컸다. ‘아! 북한이 문을 열면 저들이 각종 금융회사와 펀드들의 대북 투자를 결정하겠구나’ 생각하니 존재감이 달라보였다. 북한 경제 공부를 좀 더 하고 나서 국제금융업계의 대북 투자를 결정하는 주체는 뉴욕의 민간 투자자가 아니라 세계 정치의 중심 워싱턴 DC에 본부를 둔 국제통화기금(IMF),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을 필두로 하는 세계은행(WB) 그룹 임을 알게 됐다. 이 국제금융기구들이 글로벌 공적자금을 조성하는 등 초기 투자 여건을 마련하고, 그 결과 투자에 따르는 위험이 헤지(분산)된 후에야 민간 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이 국제금융기구의 일반 금융지원은 회원국에게만 적용된다. 회원국이 될 자격은 대주주인 미국이 사실상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북한이 국제금융기구의 금융 지원을 받으려면 백악관과 재무부의 최종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뜻이다. 1944년 브레튼우즈 협정을 통해 IMF와 IBRD 등을 만든 미국은 IMF를 사실상 ‘지배’한다. 미국은 IMF 지분 17.46%를 보유한 최대주주이며 189개 회원국 중 유일하게 거부권도 행사한다. IBRD 역시 미국이 최대주주(지분율 16.88%)다.<그래프> 주요 7개국 IMF 및 IBRD 지분율 IMF는 국제 금융체계의 안정을 위해 설립된 정치적 성격의 기구다. 하지만 북한과 같은 저개발국 원조 및 장기 저리 자금 대출은 세계은행이 좌지우지한다. 북한이 세계은행 회원국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IMF에 가입해야 한다. IMF 가입은 ‘총 투표권 수의 3분의 2 이상을 가진 과반수 이상 위원의 참석과 찬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실상 총재 선임 권한을 가진 미국이 승낙하면 나머지 주요 국가들이 추인하면서 가입이 이뤄진다. 최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행보에 따라 북한의 IMF 가입설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비핵화에 대한 대가로 IMF 가입 길을 터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북한의 IMF와 세계은행 가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주요 포스트에 한국계가 포진하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1997년 한국의 IMF 구제금융 협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아시아태평양 담당국장은 이창용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아시아개발은행(ADB) 수석 이코노미스트다. 한국계인 김용 전 다트머스대 총장 역시 6년째 세계은행 총재로 재직 중이다. 김 총재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임명했음에도 트럼프 정권 출범 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워싱턴 국제금융계에서 “이창용과 김용이 있을 때 북한이 IMF와 IBRD 식구가 되는 것이 낫다”는 평가가 심심찮게 나오는 이유다. 김용 총재는 2013년 11월 22일 당시 워싱턴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기자를 포함한 일부 특파원단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 문제에 ‘정치적 돌파구’가 생길 때 세계은행은 언제든 (북한 사업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세계은행)는 북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찾을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을 추적하고 있다. 돌파구만 생기면 우리가 매우 빨리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다”며 “이를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한국개발연구원(KDI) 및 한국의 다른 전문가들과 가깝게 일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당시 북한은 3차 핵 실험(2013년 2월)을 한 뒤 국제 사회와 대화 국면을 조성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김 총재가 강조한 북한 문제의 ‘정치적 돌파구’란 북한이 핵·미사일 프로그램 개발을 포기하고 개혁과 개방을 통해 국제 사회의 건전한 일원이 되는 정치적 변화였다. 김 총재는 이 때 세계은행이 IMF, ADB 등과 함께 북한 재건을 위한 장기 저리 자금을 지원하는 ‘큰 손’ 역할을 하겠다는 뜻을 천명한 셈이다. 세계은행은 당시 개설한 한국 사무소와 중국 베이징 사무소를 통해 북한 가입에 대비한 사전 준비 작업을 벌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더라도 IMF, IBRD, ADB 등에 가입해 장기 저리의 현금 지원을 받으려면 상당기간 과감한 내부 경제 개혁부터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임을출 연구교수는 2007년 12월 통일연구원을 통해 발행한 ‘국제금융기구의 북한 개입’ 보고서에서 “북한은 먼저 제도나 정책 개선과 관련된 국제사회의 규범과 원칙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주요 전제 조건인 ‘공공 거버넌스(governance)’의 개선과 관련해서는 “(지원 자금에 대한) 투명하고 책임성 있는 공적 관리 능력이 필수”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IMF 한국 대리이사를 지낸 최광해 우리금융경영연구소 대표대행은 “오랜 내전을 겪어 사실상 무정부 상태인 소말리아도 IMF 회원국인 것을 보면 북한의 가입이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결국 미국이 허락하느냐가 중요하다”며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하겠다는 진심을 보이는 것이 관건”이라고 했다. 국제금융계에서는 북한이 확실한 비핵화 의지를 보이고 미국이 이를 허용하더라도 IMF 회원국이 되는데 필요한 통계 작업, 심사 등을 감안하면 최소 2, 3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신속한 민간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북한의 IMF 가입 전이라도 한국, 일본, 유럽연합(EU) 등과 함께 북한개발신탁기금(트러스트 펀드)을 우선 조성할 가능성이 크다. 세계은행이 이 기금을 대신 운영하면서 북한 개발의 초기 자금을 제공하고 각국 민간 금융회사와 펀드 등이 뒤따라오는 동안 북한의 IMF와 세계은행 가입이 마무리되면 본격적인 국제 공적자금이 투입된다. 이는 북한경제 재건 비용 및 한반도 통일비용에 대한 한국 정부와 민간의 장기 부담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위원장이 확실한 비핵화 의지를 가졌다면 미국과의 물 밑 협상에서 IMF 가입을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도 이를 협상 카드로 활용할 것이다. 결국 열쇠는 김 위원장이 쥐고 있다. 과연 그의 진심은 어디에 있을까.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 2018-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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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신석호]분단의 문턱을 넘은 김정은에게

    은둔의 북한 3대 세습 후계자였던 당신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그날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2010년 10월 10일 노동당 창건일 열병식에서 당신은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김일성광장 주석단에 올랐지요. 이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물려받게 된 절대 권력자였지만 아직 세상이 궁금한 것 같은 앳된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공교롭게도 같은 날 새벽 세상을 떠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부음기사를 쓰다 조선중앙TV 속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 할아버지가 만든 ‘주체 사상’의 이론가였고 2대 세습 후계자였던 당신의 아버지가 싫어 1997년에 서울로 망명한 황장엽은 사망 열흘 전 나를 만나 당신에 관한 유언을 남겼습니다. “벌써부터 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는 것은 이르지, 그럼. 이제 막 얼굴을 드러냈을 뿐이니 시간을 가지고 좀 지켜보자우. 그가 잘해서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이끌고 가면 칭찬을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비판을 하면 된다 이거우.” 이후 지금까지 그 유언을 따르려 노력했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동안 칭찬보다는 비판을 더 많이 했습니다. 아버지를 여의고 6년 4개월 동안 당신의 말과 행동은 아버지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측면에선 더 과격하게 국제사회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당신을 키워준 것이나 다름없는 고모의 남편과, 당신을 피해 이역만리를 떠도는 배다른 친형의 목숨을 잔인하게 거뒀습니다. 헌법에 핵보유국임을 명시하고 2016년 1월 6일 4차 핵실험 이후 2년 가까이 핵 무력 완성 놀음을 벌여 한반도를 전쟁의 위협에 떨게 했습니다. 오늘 당신은 한반도 분단의 상징인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문재인 대통령과 악수하며 활짝 웃었습니다. 도보다리 위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며 진지하고 솔직한 인상을 전하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2007년 이후 11년 만에 남북 정상이 서명한 ‘판문점 선언’엔 기대했던 구체적 ‘북한 비핵화’ 방법론이 담기지 않았습니다. 억울할지 모르지만 세계에는 당신의 비핵화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습니다. 마크 내퍼 주한 미국대사 대리는 최근 기자와 당신 문제를 놓고 토론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내심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옛 소련과 대화하면서 ‘신뢰하라 그러나 검증하라(Trust but Verify)’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북한 김정은)엔 ‘불신하라 그리고 검증하라(Distrust and Verify)’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도권을 잃지 말라’는 게 당신의 원칙인가 본데, 그 점에선 성공하고 있다고 평가해 드리겠습니다. 이른바 전문가들도 당신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북한의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당신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명심하십시오. 국제사회는 대화로 시간을 벌고 다시 도발에 나서는 김 씨 집안의 생존술을 더 이상 참아줄 인내심을 잃었습니다. 반대로 당신이 정말 핵 없는 정상 국가를 만들고 개혁개방의 길을 선택한다면, 힘을 보탤 마음의 준비가 된 듯합니다. 그땐 모두가 황장엽의 유언처럼 당신을 칭찬할 것입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 2018-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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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 ‘현재핵 포기해 진정성 보이라’ 요구한 듯[신석호 기자의 우아한]

    북한 노동당전원회의의 21일 발표는 가장 최근 북미간 합의인 2012년 2·29합의(이른바 윤달합의)보다 앞서나간 측면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핵과 미사일 발사 시험의 유예(모라토리엄)만 약속했는데 이번에는 풍계리 핵실험장의 폐기가 포함됐습니다. 물론 당시 포함되어 있었던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등은 빠져 있지만, 향후 북미협상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논의될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북미협상을 통해 제거되어야 하는 북한 핵을 통상 현재 핵, 미래 핵, 과거 핵으로 구분합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현재 핵은 붕어빵을 만드는 불판, 과거 핵은 이미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 둔 붕어빵, 미래 핵은 향후 붕어빵을 만들 수 있는 밀가루 반죽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비밀 접촉 과정에서 김정은에게 “북미 정상회담 전에 현재 핵에 대한 포기 선언을 해 미국인과 전세계인들에게 진정성을 보이라”고 요구한 것으로 보입니다.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 2018-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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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의 시리아 공습, 북한의 생각은?[신석호 기자의 우아한]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시리아의 화학무기 기지 공습을 북한 김정은 정권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14일 오전(한국 시간) 공개된 이번 작전이 북한의 비핵화 의지와 다가올 북미 정상회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15일 오전 방송된 채널A의 시사보도프로그램 ‘선데이모닝쇼’에 출연해 김정은의 마음 속을 상상해 봤습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

    • 2018-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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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처럼… 김정은도 남북정상회담 앞두고 베이징으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첫 방중은 꼭 18년 전 아버지 김정일의 첫 중국 방문 당시와 비슷한 점이 많다.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2인자 시절인 1983년 중국을 방문했지만 1994년 김 주석이 사망하고 1997년 노동당 총비서, 1998년 국방위원장 자리를 차지해 공식적인 최고지도자가 된 뒤인 2000년 5월 29일 처음으로 베이징(北京)을 찾았다. 이번과 마찬가지로 북한과 중국은 김정일 방중의 전 과정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김정일이 전용열차인 ‘1호 열차’를 타고 베이징에 와 다음 날인 5월 30일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그의 귀국길이 시작된 31일 베이징 주재 서방 외교관들을 통해서였다. 김정은이 다음 달 문재인 대통령과의 사상 세 번째 남북 정상회담을 한 달 앞두고 있는 것처럼 김정일도 김대중 대통령과의 역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을 한 달도 채 남기지 않고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4월 1일자)는 김정일의 깜짝 방중 목적에 대해 “남북 정상회담에 임하는 북한의 입장, 향후 국제관계 변화와 중국의 지속적인 지원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서방 외교관을 인용해 전했다. 이번 김정은의 방중이 남북 정상회담과 5월로 예정된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양국의 전략적 소통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8년 전 김정일은 베이징에 2박 3일 동안 머물며 톈안먼(天安門) 망루에 오르고 롄샹(聯想)그룹 컴퓨터 생산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25일 평양을 출발해 중국 단둥(丹東)시를 넘어 26일 베이징에 도착한 김정은 일행이 27일 바로 귀국할 경우 18년 전 김정일과 비슷한 2박 3일 중국에 체류하는 같은 일정이 된다. 김정일의 2∼7차 방중 사례에 따르면 일정이 더 길어질 수도 있다. 김정일은 2011년 12월 17일 사망하기까지 여섯 차례 더 방중하는 동안 베이징에서의 정상회담 앞뒤로 중국 지역을 여행해 최장 8박 9일(2006년 1월 10∼18일) 동안 체류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남북 및 북-미 회담 준비에 바쁠 김정은은 짧은 실무 방문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몇 가지 공통점을 제외하면 김정은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18년 전과 판이하다. 당시 북한은 핵 실험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상태였고,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도 대화를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북한은 여섯 번이나 핵실험을 했고 미국 본토를 공격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을 눈앞에 둔 상태다. 김정은은 완전한 비핵화냐 미국의 군사공격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막다른 교차로에 서 있다. 생전 김정일을 베이징에 불러들여 ‘중국식 개혁개방’을 다정스럽게 촉구했던 중국은 2013년 시진핑(習近平) 주석 취임 이후 거듭된 김정은의 만행에 후원국으로서의 외교적 지원을 포기하다시피 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국제사회의 반응 역시 아버지 김정일의 집권 초기 방중을 ‘북한의 정상국가화’를 향한 좋은 신호로 받아들였던 과거와 달리 시큰둥한 상황이다. 실제로 집권 초기 김정일에게 중국 방문은 김씨 일가 세습 독재라는 낡은 정치 틀을 유지하면서 경제에 시장 메커니즘을 조금씩 이식하는 ‘북한식 개혁개방’의 현장 학습이었다. 김정일은 첫 방중 뒤 1년이 채 안 된 2001년 1월 15일부터 5박 6일 동안 중국 서부 해안가 경제 개혁개방 특구의 상징인 상하이(上海) 푸둥지구 등 첨단 산업 금융도시를 방문했다. 그는 “천지개벽할 정도로 변했다”며 덩샤오핑(鄧小平) 주석이 추동한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음을 털어놓았다. 이듬해인 2002년 7월 1일 ‘경제관리 개선조치’와 2003년 종합시장 허용 등의 조치로 구체화했다. 스텔스 기능 등 최첨단 보안장비를 갖췄다고는 하지만 열차를 이용한 장거리 여행은 김정일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했다. 2004년 4월 3차 방중에서 김정일은 새로 취임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회담하고 톈진(天津) 등의 경제시설을 방문했다. 하지만 귀국 하루 뒤 용천역 폭발 사고를 보고받았다. 2010년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주민 2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당시 사고가 “김정일 암살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공식 보도했다. 2005년 가을을 고비로 이전의 경제 개혁개방을 뒷걸음질시키는 가운데 이뤄진 이후 네 차례의 방중은 늙고 쇠한 정치인 김정일의 내리막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2005년 국제사회와 9·19공동성명을 발표한 직후인 2006년 1월 네 번째 방중에 나섰던 그는 10월 9일 돌연 1차 핵실험을 하며 돌아올 수 없는 ‘핵보유국 놀음’을 시작했다. 2008년 8월 뇌혈관계 질환으로 쓰러졌다 일어난 뒤 세 번의 방중은 죽음을 눈앞에 둔 노정치인의 바깥나들이와 다름없었다. 사망 직전인 2011년 5월 마지막 중국 여행에서 그는 휠체어에 의존한 채 대부분의 시간을 전용열차 안에서 보냈다. 신석호 기자·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 2018-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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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근길 한반도] 김정은의 첫 방중…18년 전 김정일 때와 닮은 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첫 방중은 꼭 18년 전 아버지 김정일의 첫 중국 방문 당시와 비슷한 점이 많다.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2인자 시절인 1983년 중국을 방문했지만 1994년 김 주석이 사망하고 1997년 노동당 총비서, 1998년 국방위원장 자리를 차지해 공식적인 최고지도자가 된 뒤인 2000년 5월 29일 처음으로 베이징(北京)을 찾았다. 이번과 마찬가지로 북한과 중국은 김정일 방중의 전 과정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김정일이 전용열차인 ‘1호 열차’를 타고 베이징에 와 다음 날인 5월 30일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그의 귀국길이 시작된 31일 베이징 주재 서방 외교관들을 통해서였다. 김정은이 다음달 문재인 대통령과의 사상 세 번째 남북 정상회담을 한 달 앞두고 있는 것처럼 김정일도 김대중 대통령과의 역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을 한 달도 채 남기지 않고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4월 1일자)는 김정일의 깜짝 방중 목적에 대해 “남북 정상회담에 임하는 북한의 입장, 향후 국제관계 변화와 중국의 지속적인 지원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서방 외교관을 인용해 전했다. 이번 김정은의 방중이 남북 정상회담과 5월로 예정된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양국의 전략적 소통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8년 전 김정일은 베이징에 2박 3일 동안 머물며 톈안먼(天安門) 망루에 오르고 롄샹(聯想) 그룹 컴퓨터 생산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25일 평양을 출발해 중국 단둥(丹東)시를 넘어 26일 베이징에 도착한 김정은 일행이 27일 바로 귀국할 경우 18년 전 김정일과 비슷한 2박 3일 중국에 체류하는 같은 일정이 된다. 김정일의 2~7차 방북 사례에 따르면 일정이 더 길어질 수도 있다. 김정일은 2011년 12월 17일 사망하기까지 여섯 차례 더 방중하는 동안 베이징에서의 정상회담 앞뒤로 중국 지역을 여행해 최장 8박 9일(2006년 1월 10~18일) 동안 체류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남북 및 북미 회담 준비에 바쁠 김정은은 짧은 실무 방문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몇 가지 공통점을 제외하면 김정은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18년 전과 판이하게 다르다. 당시 북한은 핵 실험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상태였고,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도 대화를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북한은 여섯 번이나 핵실험을 했고 미국 본토를 공격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을 눈앞에 둔 상태다. 김정은은 완전한 비핵화냐 미국의 군사공격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막다른 교차로에 서 있다. 생전 김정일을 베이징에 불러들여 ‘중국식 개혁개방’을 다정스럽게 촉구했던 중국은 2013년 시진핑(習近平) 주석 취임 이후 거듭된 김정은의 만행에 후원국으로서의 외교적 지원을 포기하다시피 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국제사회의 반응 역시 아버지 김정일의 집권 초기 방중을 ‘북한의 정상국가화’를 향한 좋은 신호로 받아들였던 과거와 달리 시큰둥한 상황이다. 실제로 집권 초기 김정일에게 중국 방문은 김씨 일가 세습 독재라는 낡은 정치 틀을 유지하면서 경제에 시장 메커니즘을 조금씩 이식하는 ‘북한 식 개혁개방’의 현장 학습이었다. 김정일은 첫 방중 뒤 1년이 채 안 된 2001년 1월 15일부터 5박 6일 동안 중국 서부 해안가 경제 개혁개방 특구의 상징인 상하이(上海) 푸둥지구 등 첨단 산업 금융도시를 방문했다. 그는 “천지개벽할 정도로 변했다”며 덩샤오핑(鄧小平) 주석이 추동한 중국의 개혁 개방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음을 털어놓았다. 이듬해인 2002년 7월 1일 ‘경제관리 개선조치’와 2003년 종합시장 허용 등의 조치로 구체화했다. 스텔스 기능 등 최첨단 보안 장비를 갖췄다고는 하지만 열차를 이용한 장거리 여행은 김정일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했다. 2004년 4월 3차 방중에서 김정일은 새로 취임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회담하고 톈진(天津) 등의 경제시설을 방문했다. 하지만 귀국 하루 뒤용천역 폭발 사고를 보고받았다. 2010년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주민 2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당시 사고가 “김정일 암살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공식 보도했다. 2005년 가을을 고비로 이전의 경제 개혁·개방을 뒷걸음질시키는 가운데 이뤄진 이후 네 차례의 방중은 늙고 쇠한 정치인 김정일의 내리막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2005년 국제사회와 9·19 공동성명을 발표한 직후 2006년 1월 네 번째 방중에 나섰던 그는 10월 9일 돌연 1차 핵실험을 하며 돌아올 수 없는 ‘핵보유국 놀음’을 시작했다. 2008년 8월 뇌혈관계 질환으로 쓰려졌다 일어난 뒤 세 번의 방중은 죽음을 눈앞에 둔 노 정치인의 바깥나들에 다름 아니었다. 사망 직전인 2011년 5월 마지막 중국 여행에서 그는 휠체어에 의존한 채 대부분의 시간을 전용열차 안에서 보냈다.신석호 기자·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 2018-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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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신석호]김정은 공국(公國)

    며칠 전 선배의 장모상에 조문을 갔다가 일군의 법학 교수들과 대화를 나눴다. 많은 주제가 오갔지만 단연 김정은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 전망이 관심사였다. 대체로 낙관보단 우려가 많았는데 A 교수의 질문은 북한학 박사급이었다. “도대체 북한이 바라는 체제 보장이라는 게 뭔가요? 미국이 안 때린다는 약속은 그렇고, 대대로 원한에 사무친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을 테러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것도 포함되는 건가요?” 이 문제를 두고 북한학계에선 북한 체제에 ‘수용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말로는 그토록 원하는 북-미 수교와 경제 지원을 북한 스스로가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른 정치·경제적 개혁과 개방이 김씨 3대 세습독재의 취약성을 증가시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우선 ‘미국이 쳐들어온다. 그래서 핵·미사일을 가져야 한다. 그때까지는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다’는 그간 김씨 3대 세습 독재자들의 거짓말이 탄로 난다. 미국을 따라 자유세계의 사람과 돈이 유입되고 이제 살 만해진 북한 주민들이 ‘정치도 좀 바꿔보자’고 나서면 김정은 일가의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 요컨대 최근 북-미 대화 정국에서의 핵심은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로 경제위기에 처한 김정은이 어디까지 정치적 리스크를 감내할 것인지에 있다. 그래서 북한은 미래의 협상자원인 비밀 핵·미사일 시설을 최대한 숨긴 채 제재를 풀기 위한 협상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미국은 ‘탐지능력’의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김씨 3대가 북한 곳곳에 꽁꽁 숨겨놓은 핵·미사일 시설을 어떻게 다 찾겠다는 말인가? 북한은 찔끔찔끔 하나씩 공개하며 건건이 값을 매기는 ‘살라미’의 천재다. 설령 김정은이 ‘통 크게’ 모든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공개했다 치자. 이젠 한국의 ‘지불능력’이 문제다. 북핵 문제 해결에 전향적이었던 민주당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낸 뒤 경수로 건설에 들어가는 비용은 한국에 떠넘겼다.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며 동맹국들을 상대로 군사비 증액과 통상협정 개정을 요구하는 트럼프 정부가 어떻게 할지는 안 봐도 뻔하다. 고공 지지율을 자랑하는 문재인 정부지만 청년 일자리와 은퇴자 노후 보장에 써야 할 재정을 밑도 끝도 안 보이는 북한 개발에 돌릴 수 있을까? 북한도 미국도 한국도 능력에 부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비관적인 결론에 이를 무렵 듣고 있던 B 교수가 “너무 비관적인 이야기만 말고, 무슨 좋은 수가 없느냐”고 인간적인 질문을 던졌다. 순간 잠재의식 속을 뱅뱅 맴돌던 한 가지 아이디어가 의식 속으로 떠올랐다. “북한의 지금 체제를 100% 그대로 보장해 준다는 전제에서만 자유로워지면 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유럽의 작은 공국(公國) 같은 모델을 꿈꿔볼 수는 있습니다.” 김정은이 평양 도심 지역 내로 주권을 한정하고 대대로 김씨 일가에 충성해 온 로열패밀리만 데리고 산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 한국 등 5개국은 평양 ‘김정은 공국’의 안보와 안전을 보장한다. 미국이 중국과 함께 그곳의 비핵화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외 지역의 핵·미사일 탐지 및 제거는 천천히 하면 된다. 한국은 자체 신용으로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월가의 각종 민간 펀드를 끌어올 수 있다. 김정은 공국 유지비쯤이야 해방된 북한 지역 개발 이익으로 조달할 수 있다. 김정은이 원하는 체제 보장이 ‘김씨 왕조의 영속’이라면, 그다지 비현실적인 대안도 아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

    • 2018-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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