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신석호]분단의 문턱을 넘은 김정은에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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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은둔의 북한 3대 세습 후계자였던 당신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그날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2010년 10월 10일 노동당 창건일 열병식에서 당신은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김일성광장 주석단에 올랐지요. 이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물려받게 된 절대 권력자였지만 아직 세상이 궁금한 것 같은 앳된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공교롭게도 같은 날 새벽 세상을 떠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부음기사를 쓰다 조선중앙TV 속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 할아버지가 만든 ‘주체 사상’의 이론가였고 2대 세습 후계자였던 당신의 아버지가 싫어 1997년에 서울로 망명한 황장엽은 사망 열흘 전 나를 만나 당신에 관한 유언을 남겼습니다.

“벌써부터 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는 것은 이르지, 그럼. 이제 막 얼굴을 드러냈을 뿐이니 시간을 가지고 좀 지켜보자우. 그가 잘해서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이끌고 가면 칭찬을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비판을 하면 된다 이거우.”

이후 지금까지 그 유언을 따르려 노력했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동안 칭찬보다는 비판을 더 많이 했습니다. 아버지를 여의고 6년 4개월 동안 당신의 말과 행동은 아버지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측면에선 더 과격하게 국제사회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당신을 키워준 것이나 다름없는 고모의 남편과, 당신을 피해 이역만리를 떠도는 배다른 친형의 목숨을 잔인하게 거뒀습니다. 헌법에 핵보유국임을 명시하고 2016년 1월 6일 4차 핵실험 이후 2년 가까이 핵 무력 완성 놀음을 벌여 한반도를 전쟁의 위협에 떨게 했습니다.

오늘 당신은 한반도 분단의 상징인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문재인 대통령과 악수하며 활짝 웃었습니다. 도보다리 위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며 진지하고 솔직한 인상을 전하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2007년 이후 11년 만에 남북 정상이 서명한 ‘판문점 선언’엔 기대했던 구체적 ‘북한 비핵화’ 방법론이 담기지 않았습니다.

억울할지 모르지만 세계에는 당신의 비핵화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습니다. 마크 내퍼 주한 미국대사 대리는 최근 기자와 당신 문제를 놓고 토론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내심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옛 소련과 대화하면서 ‘신뢰하라 그러나 검증하라(Trust but Verify)’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북한 김정은)엔 ‘불신하라 그리고 검증하라(Distrust and Verify)’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도권을 잃지 말라’는 게 당신의 원칙인가 본데, 그 점에선 성공하고 있다고 평가해 드리겠습니다. 이른바 전문가들도 당신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북한의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당신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명심하십시오. 국제사회는 대화로 시간을 벌고 다시 도발에 나서는 김 씨 집안의 생존술을 더 이상 참아줄 인내심을 잃었습니다. 반대로 당신이 정말 핵 없는 정상 국가를 만들고 개혁개방의 길을 선택한다면, 힘을 보탤 마음의 준비가 된 듯합니다. 그땐 모두가 황장엽의 유언처럼 당신을 칭찬할 것입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북한#비핵화#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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