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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별 관찰을 좋아해 천문학 탐사를 하다 국내 최대 망원경을 제작하는 회사의 창업자가 된 저자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그림 속 별에 관해 쓴 책이다. 저자는 2007년 한국에서 전시된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을 처음 본 뒤 고흐에게 반한다. 2011년 ‘론강의 별밤’을 본 다음엔 고흐가 그린 하늘과 별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됐다.저자는 고흐가 프랑스 생폴 드 무솔에 머물렀던 1889년 여름, 아를에 머물렀던 1888년 9월에 관한 여러 기록을 조사하고 현장을 답사한다. 책은 이곳의 천체 사진과 고흐가 남긴 편지 등 기록물, 하늘의 각도, 시간 변환 등을 활용해 고흐가 어떤 하늘을 그렸을지 추측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저자는 ‘밤의 카페테라스’의 하늘에 비친 여름철 대삼각형 별자리를 직접 관찰하고, ‘론강의 별밤’ 속 북두칠성을 보면서 그림에 관한 호기심을 풀어간다. 이어 ‘별이 빛나는 밤’ 속의 별자리가 정말 양자리인지, 언제 그린 것인지에 관한 나름의 가설을 펼친다. 저자는 그림 속 별자리가 양자리가 아니며, 통상 논의되는 6월이 아닌 7월 하순에 그린 것이라고 주장한다.미술사에서 고흐의 작품은 야외에서 직접 풍경을 보고 그렸던 인상파 화가들의 작업과 달리 그것을 본 감흥을 표현한 ‘후기 인상주의’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화가가 ‘정확히 무엇을 보고 그렸냐’보다는 ‘화가가 받은 느낌’에 예술적 가치가 있다. 하지만 천문 전문가의 관점에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과학적으로 추론해 가는 과정은 흥미롭게 느껴진다.명작은 보는 사람마다 끊임없는 해석의 여지를 열어주는 의미가 있다. 그런 점에서 천체에 애정을 가진 저자가 자신을 고흐에게 투영해 그림 속 하늘을 풀어가는 과정이 독특하다. 만난 적도 없는 먼 거리, 먼 시대에 살고 있던 화가의 삶을 연구하고 그 흔적을 샅샅이 추적하게 만드는 예술의 힘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흔히 ‘자유’라는 단어를 말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모습은 이렇습니다.넓게 펼쳐진 들판을 마음껏 뛰어다니거나, 아무런 장애물 없이 하늘을 나는 사람.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상상하죠.앙리 마티스(1869~1954)의 작품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것도 이러한 자유입니다.역동적으로 원을 그리며 뛰는 사람들을 그린 ‘춤’이 대표적이죠.이 ‘춤’을 그리기 전 마티스가 낙원을 상상하며 그린 작품이 있는데요. 바로 ‘삶의 기쁨’입니다.오늘 이 작품을 통해 마티스가 자유로운 표현을 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프랑켄슈타인 같은 ‘낙원’‘삶의 기쁨’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낙원을 주제로 한 그림입니다.그림 속에는 울긋불긋한 들판 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람들이 한가롭게 누워 있거나,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고, 애정 표현을 하고 있죠.시각부터 청각, 촉각을 자극하는 이 그림을 마티스의 작업실에서 처음 본 동료 화가 폴 시냐크는 기겁했습니다.“지금까지 내가 좋아했던 마티스가 완전히 퇴보했다. 2.5m 폭 캔버스에 이상한 인물들을 엄지손가락만 한 두꺼운 선으로 칠하고, 화면 전체를 엷은 색조로 칠했다. 심혈을 기울여 칠한 색이지만 내 눈엔 역겨웠다.”1906년 프랑스 파리 앵데팡당 전시장에 걸렸을 때 반응은 더합니다. 이곳을 찾았던 딜러 베르트 베이의 회고입니다.“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화난 관객의 고성, 놀란 사람들의 웅성임, 비명 같은 비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모든 소리는 마티스의 그림을 조롱하며 어슬렁거리는 군중이 내는 것이었다.”왜 이런 반응이 나왔을까? 이 그림의 인체 표현이나 원근법 사용이 아카데미 그림에 익숙한 관객에겐 ‘엉터리’로 보였기 때문입니다.자세히 보면 오른쪽 아래 분홍빛 남녀와 중앙의 두 여성, 그 뒤로 군무를 추는 사람들의 크기가 비율이 맞지 않습니다.또 그림 속 인물들은 마치 뼈가 없는 고무 인간처럼 신체 비율이 제각각이죠. 각 인물을 본 시점이 전부 다르고, 인체를 그리는 기준도 다른, 마치 프랑켄슈타인처럼 짜깁기 된 그림으로 보였던 것입니다.내재적 질서가 만든 음악모두가 이 그림을 싫어했던 것은 아닙니다.20세기 초 미술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수집가 레오 스타인은 이 전시를 본 뒤 ‘삶의 기쁨’을 소장했습니다.또 러시아 수집가이자 마티스의 중요한 후원자가 될 세르게이 슈킨은 이 그림을 계기로 마티스에게 강한 관심을 갖습니다.시끄럽게 비난하는 사람들 뒤에서 그 진가를 알아보는 예술가도 많았죠. 그중 한 명은 파블로 피카소.피카소는 스타인의 집 거실에 걸린 ‘삶의 기쁨’을 보고 자극을 받아 ‘아비뇽의 여인’을 그립니다.이 작품이 시간이 지나며 찬사를 받게 된 것이 단순히 원근법, 해부학 등 과거의 규칙을 벗어났기 때문일까요.여기서 더 생각해 봐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마티스가 고군분투를 거쳐 이 그림에서 나름의 ‘내재적 질서’를 세웠다는 점입니다.그 질서의 중요한 규칙 중 하나는 선과 색이 만드는 리듬입니다.‘삶의 기쁨’ 앞에 선 관객은 가운데 군무를 추는 사람들이 그리는 원이 조금씩 모양을 달리하며 크게 울려 퍼지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그 원은 인물들의 포즈, 몸 바로 옆에 그려진 두꺼운 선, 겹겹이 쌓인 색면 등 다양한 요소로 변주되고 있습니다.편견 없는 눈을 가진 소수의 사람은 이 음악을 느끼고, 고유의 질서가 뿜어내는 신선한 아름다움을 즐겼던 것입니다마음대로 할 자유의 조건여기서 내재적 질서가 중요한 이유는, 마티스가 ‘원하는 대로 그리는 자유’를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는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자유’란 모든 장애물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뛰어노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가능했음을 ‘삶의 기쁨’은 보여주고 있습니다.만약 마티스가 원근법과 해부학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그리기만 했다면 그건 낙서에 불과하고 말았겠지요.마티스는 대신 프란시스코 고야, 빈센트 반 고흐, 폴 세잔, 시냐크 등 ‘다른 길’을 만들었던 작가들을 연구하며 자신만의 규칙을 만듭니다.이 과정에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했죠. 마티스는 동료 화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작품의 반응이 나쁘다고 작업을 멈추면 그때부터 비판이 정당화된다”며 “신념이 확실하다면 모든 문제는 오로지 작업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쓰죠.미술사가 힐러리 스펄링은 “노동은 마티스 가족의 가훈이자 만병통치약이었다”고 마티스 전기에 씁니다.‘삶의 기쁨’이나 ‘춤’ 속의 무한한 자유는 치밀한 계산과 오랜 고민의 산물입니다.마티스는 “남들은 나에게 ‘대담하다’지만 난 그저 다른 식으로 그리지 못했던 것”이라며 “자유는 남들과 똑같은 방식을 택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의미”라고 합니다.그러면서 “자유는 나의 재능이 이끄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하죠. 이 자유를 위해 마티스는 새로운 건물을 짓듯이 ‘나만의 길’을 견고하게 쌓았습니다.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그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마티스가 빈 캔버스에 쌓은 단단하고 자유로운 선율 앞에서 명상해 보는 건 어떨까요?※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근대 화가 박수근(1914∼1965)이 보낸 연하장(사진)이 60여 년 만에 화가의 고향인 강원 양구군으로 돌아왔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은 20일 “박수근 연하장 등을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에 기증했다”고 밝혔다. 재단은 박수근이 미국인 지인 로버트, 산드라 마티엘리 부부에게 1962년 12월 보낸 연하장과 연하장 봉투, 같은 해 열린 개인전 리플릿 등 3점을 마티엘리 부부로부터 기증받아 미술관에 전달했다. 연하장에는 박수근이 산드라 마티엘리에게 보낸 판화 그림이 부착돼 있다. 이 판화는 연을 날리는 두 사람을 묘사했다. 같은 형태의 연하장으로 박수근이 미술사학자 최순우와 동료 화가 이응노에게 보낸 것이 전해진다. 재단은 “마티엘리 연하장은 1962년 12월이라고 발송 연월이 적힌 편지봉투가 함께 있어 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박수근 개인전 리플릿’은 1962년 주한미군 서울기지사령부 도서관에서 열린 전시에 관한 것이다. 전시회와 작가 정보, 출품작 제목과 금액이 적혀 있다. 리움미술관도 같은 리플릿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번 기증본엔 작품명 11점이 더 기록돼 있다. 재단 관계자는 “이 11점은 전시 도중에 새롭게 출품된 작품으로 당시 전시가 큰 호응을 얻었음을 말해준다”고 설명했다. 기증품은 다음 달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의 ‘박수근 작고 60주년 기념 특별전’에서 공개될 예정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분주히 일을 처리한다. 평범한 워킹맘처럼 보이는 브렌다. 하지만 아들인 매튜의 변호사 로버트가 등장하자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한다. 매튜는 연쇄 강간을 저질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범죄자였기 때문이다.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다음 달 2일 개막하는 연극 ‘그의 어머니’가 19일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에 있는 연습실을 공개했다. 매튜를 지칭하는 ‘그’의 엄마인 주인공 브렌다를 맡은 배우 김선영은 30분이란 짧은 시연 동안 여러 감정을 폭발시키는 연기력을 선보였다. 브렌다는 ‘아들을 강간범이 되도록 조장한 엄마’로 묘사된 기사를 보고 억울함에 치를 떤다. “다음 카드를 고심하자”는 변호사의 말에 “이 상황이 게임이냐”며 거부감을 드러낸다. ‘평범한 엄마로 보여야 하니 둘째 제이슨과 함께 다니라’는 조언에 고민하는 것도 잠시. 곧 하교한 제이슨에게 “엄마랑 같이 마트 가자”고 하는 뻔뻔함도 보인다. 격정적인 감정과 무거운 침묵이 교차되는 장면 내내, 관객은 ‘강간범 엄마가 저래도 되는 거야’라는 반감과 혼란을 느낀다. 김선영이 이 무대에 도전하기로 한 이유도 바로 이런 ‘난해함’ 때문이었다고 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선우 엄마 선영으로 잘 알려진 그가 연극 무대에 서는 건 2018년 ‘낫심’ 이후 7년 만. 오랜만에 돌아온 무대인 만큼, 일부러 어려운 작품을 고르고 싶었단다. 김선영은 “이 여자를 연기하면 내가 죽어 나겠다 싶어 무대에 오르기로 했다”고 말했다. “매 순간 이 여자의 감정을 고민해요. 아들을 비난하며 연민하고, ‘내가 잘못 키웠나’ 죄책감도 느끼고, 혹시 아들이 누명을 쓴 건 아닐까 지푸라기를 잡으려는 마음까지. 대본을 읽고 또 읽는 중입니다.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서울대를 갔을 텐데….” 연기의 관건은 ‘비호감 인물’인 브렌다에게 관객이 얼마나 감정이입을 하게 만들 수 있느냐다. 연극계에서도 연기파 배우로 유명했고, 2014년 창단한 극단 ‘나베’에서 연기 디렉팅을 해온 그이지만 “아직도 브렌다를 새롭게 이해해 가는 과정에 있다”고 털어놨다. 대사 몇 줄을 두고 밤새워 씨름하며 새로운 감정을 깨치고 있다고 한다. “처음엔 브렌다를 너무 이해해서 비호감 인물인 걸 뒤늦게 인지해 당황했어요. 지금은 ‘아들을 잘못 키운 죄책감’을 몰랐다는 걸 깨닫고 열심히 공부 중이에요.” 김선영과 공연예술아카데미 동기이기도 한 류주연 연출은 “학생 시절 주인공을 맡아 달라 했는데 70대 유모역을 하고 싶다더니 화장실에서 혼자 할머니 걸음을 연습하던 배우가 김선영”이라며 “그때도 동료들에게 ‘잠잘 시간이 있냐’며 타박한 노력형 인간이었는데 지금도 여전하다”고 했다. 류 연출은 “가해자 가족의 심리는 우리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아주 난처한 감정인데 문학과 예술이기에 그러한 심리를 파헤쳐 볼 수 있다”고 했다. 김선영은 이 작품을 고른 또 다른 이유로는 “무대에서 꼭 하고 싶었던 것이 나오는데, 그걸 말하면 스포일러가 돼 공개할 수 없다”며 “그 장면은 공연장에서 확인해 달라”고 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분주히 일을 처리한다. 평범한 워킹맘처럼 보이는 브렌다. 하지만 아들인 매튜의 변호사 로버트가 등장하자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한다. 매튜는 연쇄 강간을 저질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범죄자였기 때문이다.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다음 달 2일 개막하는 연극 ‘그의 어머니’가 19일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에 있는 연습실을 공개했다. 매튜를 지칭하는 ‘그’의 엄마인 주인공 브렌다를 맡은 배우 김선영은 30분이란 짧은 시연 동안 여러 감정을 폭발시키는 연기력을 선보였다.브렌다는 ‘아들을 강간범이 되도록 조장한 엄마’로 묘사된 기사를 보고 억울함에 치를 떤다. “다음 카드를 고심하자”는 변호사의 말에 “이 상황이 게임이냐”며 거부감을 드러낸다. ‘평범한 엄마로 보여야 하니 둘째 제이슨과 함께 다니라’는 조언에 고민하는 것도 잠시. 곧 하교한 제이슨에게 “엄마랑 같이 마트 가자”고 하는 뻔뻔함도 보인다. 격정적인 감정과 무거운 침묵이 교차되는 장면 내내, 관객은 ‘강간범 엄마가 저래도 되는 거야’라는 반감과 혼란을 느낀다.김선영이 이 무대에 도전하기로 한 이유도 바로 이런 ‘난해함’ 때문이었다고 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선우 엄마 선영으로 잘 알려진 그가 연극 무대에 서는 건 2018년 ‘낫심’ 이후 7년 만. 오랜만에 돌아온 무대인 만큼, 일부러 어려운 작품을 고르고 싶었단다. 김선영은 “이 여자를 연기하면 내가 죽어 나겠다 싶어 무대에 오르기로 했다”고 말했다. “매 순간 이 여자의 감정을 고민해요. 아들을 비난하며 연민하고, ‘내가 잘못 키웠나’ 죄책감도 느끼고, 혹시 아들이 누명을 쓴 건 아닐까 지푸라기를 잡으려는 마음까지. 대본을 읽고 또 읽는 중입니다.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서울대를 갔을 텐데….”연기의 관건은 ‘비호감 인물’인 브렌다에게 관객이 얼마나 감정이입을 하게 만들 수 있느냐다. 연극계에서도 연기파 배우로 유명했고, 2014년 창단한 극단 ‘나베’에서 연기 디렉팅을 해온 그지만 “아직도 브렌다를 새롭게 이해해 가는 과정에 있다”고 털어놨다. 대사 몇 줄을 두고 밤새워 씨름하며 새로운 감정을 깨치고 있다고 한다.“처음엔 브렌다를 너무 이해해서 비호감 인물인 걸 뒤늦게 인지해 당황했어요. 지금은 ‘아들을 잘못 키운 죄책감’을 몰랐다는 걸 깨닫고 열심히 공부 중이에요.”김선영과 공연예술아카데미 동기이기도 한 류주연 연출은 “학생 시절 주인공을 맡아 달라 했는데 70대 유모역을 하고 싶다더니 화장실에서 혼자 할머니 걸음을 연습하던 배우가 김선영”이라며 “그때도 동료들에게 ‘잠잘 시간이 있냐’며 타박한 노력형 인간이었는데 지금도 여전하다”고 했다.류 연출은 “가해자 가족의 심리는 우리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아주 난처한 감정인데 문학과 예술이기에 그러한 심리를 파헤쳐 볼 수 있다”고 했다. 김선영은 이 작품을 고른 또 다른 이유로는 “무대에서 꼭 하고 싶었던 것이 나오는데, 그걸 말하면 스포일러가 돼 공개할 수 없다”며 “그 장면은 공연장에서 확인해 달라”고 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물 샐 틈 없이 꽉 찬 캔버스, 여러 장의 그림을 겹겹이 쌓아 올린 듯한 어지러운 형상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떠들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시끄러운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그림. 18일 전남 광양시 전남도립미술관에서 만난 작가 래리 피트먼(사진)은 이렇게 설명했다.“제가 태어난 미국의 앵글로·색슨 백인 문화권에서는 장식이 내용 전달을 방해하는 군더더기로 여겨져요. 그런데 제가 자란 라틴 문화권에서는 장식 그 자체가 이야기이자 콘텐츠죠. 이 점을 저는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피트먼은 군더더기를 없애는 미니멀리즘 예술이나 물건을 가져다 놓는 설치 미술이 유행한 1960, 70년대 미국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미국인이지만 콜롬비아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남미에서 보낸 그는 스페인어가 ‘모국어(母國語)’다. 작품은 멕시코시티를 걷는 듯한 시끌벅적함에 손이 미끄러질 듯 매끄러운 마감이 더해져 미국과 남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듯하다. 그의 작품 40여 점이 이날 개막한 개인전 ‘래리 피트먼: 거울 & 은유’에서 공개됐다. 전시는 작가가 최근 14년간 만든 작품들을 크게 네 가지 주제별로 엮었다. 첫 번째 전시장은 작가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표현한 ‘사념체(思念體)’ 연작으로 구성됐다. 두 번째 전시장은 ‘녹턴’과 ‘카프리초스’ 연작이 전시된다. ‘카프리초스’ 연작은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인간사의 어두움을 표현한 동명 연작을 미 시인 에밀리 디킨슨과 엮었다. 피트먼은 “디킨슨이라고 하면 로맨틱한 시로 알려졌는데, 여기서는 그의 어둡고 강한 시를 결합했다”고 설명했다. 세 번째 전시장에선 시끌벅적한 도시를 향한 애정이 펼쳐진다. ‘알 기념비가 있는 도시’ 연작을 볼 수 있는데 폭 10m가 넘는 대작도 있다. 작가는 “사람들은 흔히 시골이 더 좋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엔 도시가 더 포용적이고 즐겁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작품 속에서 도시의 형태는 낡아 부서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경쾌한 색채가 이 광경을 즐겁게 만든다. 도시 사이사이에 동그랗고 밝은 알들이 가로등처럼 반짝인다. 피트먼은 “알은 가능성을 의미한다”며 “도시가 가진 잠재력에 대한 오마주”라고 했다. 마지막 전시장에선 팬데믹 시기 어두운 곳에서 밝은 희망을 기대하는 연작 ‘아이리스 숏’ 등이 소개된다. 놀라운 건 이 모든 복잡한 그림들을 작가 혼자 컴퓨터 도움도 없이 아날로그로 완성했다는 점이다. 피트먼은 “보통 작가들은 제목을 나중에 붙이지만, 나는 제목부터 시작한다. ‘이걸 그리자’라고 나와의 계약을 맺고 그다음 즉흥적으로 화면을 채워 나간다”고 했다. 저 넓은 화면을 혼자서 채우는 게 힘들진 않을까.“저더러 좋은 기술의 도움을 왜 받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많아요. 저도 아는데, 내 손으로 했을 때 가장 내 마음에 드는 결과가 나오는걸요.” 6월 15일까지.광양=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술가 이불(61)이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글로벌 메가 갤러리인 하우저 앤드 워스의 전속 작가가 됐다. 하우저 앤드 워스는 19일 “서울의 갤러리 BB&M과 협력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예술가 이불의 공동 전속 갤러리가 된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발표한다”고 밝혔다. 하우저 앤드 워스는 1992년 스위스에서 설립해 세계 18개 지점을 거느린 ‘메가 갤러리’다. 루이스 부르주아(1911~2010), 알렉산더 콜더(1898~1976) 등 서양 근현대 미술 거장의 작품을 관리하고 있다.마크 파요 하우저 앤드 워스 대표는 “이불 작가는 자타공인 당대 가장 뛰어난 한국의 예술가”라며 “엄격한 개념을 바탕으로 재료에 섬세하게 접근하고 이를 깊은 휴머니즘과 결합해 발전을 거듭하며 매번 새롭고 흥미로운 길을 열어 온 작가”라고 평가했다. 이어 “40년간 초기의 감각적인 퍼포먼스에서부터 개념적 경계를 확장한 설치 작품까지 선보이며 선구자로서 차세대 예술가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갤러리는 28일부터 30일까지 열리는 아트바젤 홍콩에 이불 작가의 조각과 회화 2점을 선보일 예정이다. 또 2026년 하우저 앤드 워스 뉴욕 갤러리에서 이불 작가의 첫 전시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이불 작가는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썩어가는 물고기 작품인 ‘장엄한 광채’(1997)를 전시했으며, 이후 퍼포먼스와 설치를 통해 인간 문명의 허약함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루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9월 12일에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의뢰로 미술관 정문 파사드에 조각 연작 ‘롱테일 헤일로’를 공개했다. 이 작품은 6월 10일까지 전시된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물 샐 틈 없이 꽉 찬 캔버스, 여러 장의 그림을 겹겹이 쌓아 올린 듯한 어지러운 형상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떠들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시끄러운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그림. 18일 전남 광양시 전남도립미술관에서 만난 작가 래리 피트먼은 이렇게 설명했다.“제가 태어난 미국의 앵글로·색슨 백인 문화권에서는 장식이 내용 전달을 방해하는 군더더기로 여겨져요. 그런데 제가 자란 라틴 문화권에서는 장식 그 자체가 이야기이자 콘텐츠죠. 이 점을 저는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피트먼은 군더더기를 없애는 미니멀리즘 예술이나 물건을 가져다 놓는 설치 미술이 유행한 1960, 1970년대 미국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미국인이지만 콜롬비아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남미에서 보낸 그는 스페인어가 ‘모국어(母國語)’다. 작품은 멕시코시티를 걷는 듯한 시끌벅적함에 손이 미끄러질 듯 매끄러운 마감이 더해져 미국과 남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듯하다. 그의 작품 40여 점이 이날 개막한 개인전 ‘래리 피트먼: 거울 & 은유’에서 공개됐다.전시는 작가가 최근 14년간 만든 작품들을 크게 네 가지 주제별로 엮었다. 첫번째 전시장은 작가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표현한 ‘사념체’(思念體) 연작으로 구성됐다. 두 번째 전시장은 ‘녹턴’과 ‘카프리초스’ 연작이 전시된다. ‘카프리초스’ 연작은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인간사의 어두움을 표현한 동명 연작을 미 시인 에밀리 디킨슨과 엮었다. 피트먼은 “디킨슨이라고 하면 로맨틱한 시로 알려졌는데, 여기서는 그의 어둡고 강한 시를 결합했다”고 설명했다.세 번째 전시장에선 시끌벅적한 도시를 향한 애정이 펼쳐진다. ‘알 기념비가 있는 도시’ 연작을 볼 수 있는데 폭 10m가 넘는 대작도 있다. 작가는 “사람들은 흔히 시골이 더 좋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엔 도시가 더 포용적이고 즐겁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작품 속에서 도시의 형태는 낡아 부서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경쾌한 색채가 이 광경을 즐겁게 만든다. 도시 사이사이에 동그랗고 밝은 알들이 가로등처럼 반짝인다. 피트먼은 “알은 가능성을 의미한다”며 “도시가 가진 잠재력에 대한 오마주”라고 했다.마지막 전시장에선 팬데믹 시기 어두운 곳에서 밝은 희망을 기대하는 연작 ‘아이리스 숏’ 등이 소개된다. 놀라운 건 이 모든 복잡한 그림들을 작가 혼자 컴퓨터 도움도 없이 아날로그로 완성했다는 점이다. 피트먼은 “보통 작가들은 제목을 나중에 붙이지만, 나는 제목부터 시작한다. ‘이걸 그리자’라고 나와의 계약을 맺고 그다음 즉흥적으로 화면을 채워 나간다”고 했다. 저 넓은 화면을 혼자서 채우는 게 힘들진 않을까.“저더러 좋은 기술의 도움을 왜 받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많아요. 저도 아는데, 내 손으로 했을 때 가장 내 마음에 드는 결과가 나오는걸요.” 6월 15일까지.광양=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흔히 ‘자유’라는 단어를 말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모습은 이렇습니다. 넓게 펼쳐진 들판을 마음껏 뛰어다니거나, 아무런 장애물 없이 하늘을 나는 사람.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상상하죠.앙리 마티스(1869∼1954)의 작품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것도 이러한 자유입니다. 역동적으로 원을 그리며 뛰는 사람들을 그린 ‘춤’이 대표적입니다. ‘춤’을 그리기 전 마티스가 낙원을 상상하며 그린 작품이 있는데요. 바로 ‘삶의 기쁨’입니다. 오늘 이 작품을 통해 마티스가 자유로운 표현을 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프랑켄슈타인 같은 ‘낙원’‘삶의 기쁨’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낙원을 주제로 한 그림입니다. 그림 속에는 울긋불긋한 들판 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람들이 한가롭게 누워 있거나,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고, 애정 표현을 하고 있죠. 시각부터 청각, 촉각을 자극하는 이 그림을 마티스의 작업실에서 처음 본 동료 화가 폴 시냐크는 기겁했습니다.“지금까지 내가 좋아했던 마티스가 완전히 퇴보했다. 2.5m 폭 캔버스에 이상한 인물들을 엄지손가락만 한 두꺼운 선으로 칠하고, 화면 전체를 엷은 색조로 칠했다. 심혈을 기울여 칠한 색이지만 내 눈엔 역겨웠다.”1906년 프랑스 파리 앵데팡당 전시장에 걸렸을 때 반응은 더합니다. 이곳을 찾았던 딜러 베르트 베이의 회고입니다.“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화난 관객의 고성, 놀란 사람들의 웅성임, 비명 같은 비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모든 소리는 마티스의 그림을 조롱하며 어슬렁거리는 군중이 내는 것이었다.”왜 이런 반응이 나왔을까? 이 그림의 인체 표현이나 원근법 사용이 아카데미 그림에 익숙한 관객에겐 ‘엉터리’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보면 오른쪽 아래 분홍빛 남녀와 중앙의 두 여성, 그 뒤로 군무를 추는 사람들의 크기가 비율이 맞지 않습니다. 또 그림 속 인물들은 마치 뼈가 없는 고무 인간처럼 신체 비율이 제각각이죠. 각 인물을 본 시점이 전부 다르고, 인체를 그리는 기준도 다른, 마치 프랑켄슈타인처럼 짜깁기된 그림으로 보였던 것입니다.내재적 질서가 만든 음악모두가 이 그림을 싫어했던 것은 아닙니다. 20세기 초 미술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수집가 레오 스타인은 이 전시를 본 뒤 ‘삶의 기쁨’을 소장했습니다. 또 러시아 수집가이자 마티스의 중요한 후원자가 될 세르게이 슈킨은 이 그림을 계기로 마티스에게 강한 관심을 갖습니다.시끄럽게 비난하는 사람들 뒤에서 그 진가를 알아보는 예술가도 많았죠. 그중 한 명은 파블로 피카소. 피카소는 스타인의 집 거실에 걸린 ‘삶의 기쁨’을 보고 자극을 받아 ‘아비뇽의 여인’을 그립니다.이 작품이 시간이 지나며 찬사를 받게 된 것이 단순히 원근법, 해부학 등 과거의 규칙을 벗어났기 때문일까요. 여기서 더 생각해 봐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마티스가 고군분투를 거쳐 이 그림에서 나름의 ‘내재적 질서’를 세웠다는 점입니다.그 질서의 중요한 규칙 중 하나는 선과 색이 만드는 리듬입니다. ‘삶의 기쁨’ 앞에 선 관객은 가운데 군무를 추는 사람들이 그리는 원이 조금씩 모양을 달리하며 크게 울려 퍼지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 원은 인물들의 포즈, 몸 바로 옆에 그려진 두꺼운 선, 겹겹이 쌓인 색면 등 다양한 요소로 변주되고 있습니다. 편견 없는 눈을 가진 소수의 사람은 이 음악을 느끼고, 고유의 질서가 뿜어내는 신선한 아름다움을 즐겼던 것입니다.마음대로 할 자유의 조건여기서 내재적 질서가 중요한 이유는, 마티스가 ‘원하는 대로 그리는 자유’를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는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자유’란 모든 장애물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뛰어노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가능했음을 ‘삶의 기쁨’은 보여주고 있습니다.만약 마티스가 원근법과 해부학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그리기만 했다면 그건 낙서에 불과하고 말았겠지요. 마티스는 대신 프란시스코 고야, 빈센트 반 고흐, 폴 세잔, 시냐크 등 ‘다른 길’을 만들었던 작가들을 연구하며 자신만의 규칙을 만듭니다.이 과정에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했죠. 마티스는 동료 화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작품의 반응이 나쁘다고 작업을 멈추면 그때부터 비판이 정당화된다”며 “신념이 확실하다면 모든 문제는 오로지 작업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쓰죠. 미술사가 힐러리 스펄링은 “노동은 마티스 가족의 가훈이자 만병통치약이었다”고 마티스 전기에 씁니다.‘삶의 기쁨’이나 ‘춤’ 속의 무한한 자유는 치밀한 계산과 오랜 고민의 산물입니다. 마티스는 “남들은 나에게 ‘대담하다’지만 난 그저 다른 식으로 그리지 못했던 것”이라며 “자유는 남들과 똑같은 방식을 택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유는 나의 재능이 이끄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하죠. 이 자유를 위해 마티스는 새로운 건물을 짓듯이 ‘나만의 길’을 견고하게 쌓았습니다.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그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마티스가 빈 캔버스에 쌓은 단단하고 자유로운 선율 앞에서 명상해 보는 건 어떨까요?※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은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발송됩니다. QR코드를 통해 구독 신청을 하시면 e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서울 종로구 상명아트센터 갤러리는 17일부터 27일까지 이연종 개인전 ‘순백의 신비, 곰배령(The Mystery of Pure White, Gombaeryeong)’(사진)을 개최한다. 치과의사로 뒤늦게 사진에 입문한 이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강원도 점봉산 곰배령의 흰 꽃들을 포착한 흑백 작품 40여 점과 8폭 병풍 작업을 선보인다. 이 작가는 “사계절 세찬 바람이 부는 환경에서 자라나 마주한 흰 꽃들의 기품 있는 단아한 모습을 담고자 했다”고 밝혔다. 22일 오후 2시에는 작가와의 대화 행사도 열린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일제강점기인 1942년 강원 강릉에 들어선 옛 함외과의원 건물. 2층짜리 벽돌집 내부로 들어서면 여러 색의 나무로 만들어진 바닥, 벽, 계단과 고풍스러운 샹들리에, 직사각형 창문이 그대로 남아 시간 여행을 떠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평소엔 개방되지 않는 이곳이 현대미술 작품 전시장이 되어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 14일 개막한 제3회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GIAF25) ‘에시자, 오시자’는 강릉의 숨은 보석 같은 공간에서 펼쳐진다.● 전시장으로 탈바꿈한 옛 병원과 여관올해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은 모든 전시 장소가 걸어서 오갈 수 있을 만큼 가깝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1957년 생겨난 여인숙인 ‘일곱칸짜리 여관’, 1958년 교회 건물로 지어졌다가 공연장으로 탈바꿈한 ‘작은공연장 단’, 강원도 유일 독립·예술영화 전용관인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 등이 대표적이다. 명주동 가구 골목을 중심으로 전시장인 ‘강릉대도호부 관아’와 ‘일곱칸짜리 여관’ ‘창포다리’ 등은 모두 도보 10분 이내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명주동은 1950년대 교회와 여인숙, 병원이 있는 중심지였으나, 지금은 오래된 공간을 개조한 카페나 게스트하우스가 눈에 띈다. 천천히 걸으며 특색 있는 건축물과 골목길이 있는 동네를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GIAF는 2023년 2회 전시에서도 도시의 숨은 장소를 발굴해 눈길을 끌었다. 강릉의 가장 오래된 시장인 동부시장의 옛 해물탕집, 과거 양곡창고로 쓰였던 ‘옥천동 웨어하우스’ 등이 화제를 모았다.● 버려진 강아지, 목조각으로 살아나다전시작 중에선 윤석남의 ‘1,025: 사람과 사람 없이’가 눈에 띈다. 유기견을 돌보며 살아가는 이애신 할머니로부터 영감을 얻어 버려진 강아지 1025마리를 채색 목조각으로 만들었다. 그중 367점이 강릉대도호부 관아 옆마당에 설치됐다. 그간 미술관에서 대규모 설치로 선보인 적 있지만 야외에서 보면 느낌이 색다르다. 개막 첫날부터 작품 옆에서 사진을 찍는 시민들을 여러 차례 볼 수 있었다. 홍이현숙, 흐라이르 사르키시안의 작품도 이곳에서 전시된다.미술인들이 특히 관심을 갖는 작품은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에서 상영되는 싱가포르 출신 작가 호추니엔의 영상 작품 ‘변신술사’(2025년)다. 호추니엔은 ‘변신’을 주제로 자신이 만들었던 작품 5점을 엮어 총 99분 길이로 상영한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스파이 같은 존재들의 이야기를 감각적인 편집으로 엮었다. 이 밖에 정연두, 이양희, 서다솜, 안민옥, 이해민선, 키와림(김기훈 김들림), 김재현 작가가 전시에 참여했다. GIAF는 지역민이 공간과 전시를 설명하는시티도슨트와 시티가이드 서비스가 운영된다. 전시 기간 일부 참여 작가들의 공연과 워크숍엔 지역민들도 참여할 수 있다. 흑표범 작가가 지난해 선보인 퍼포먼스 워크숍 ‘뱀, 물, 새의 연습’은 올해부터 지역 초등학생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확장, 운영된다. 전시 기획은 3회째 박소희 총괄감독이 맡았다. 페스티벌 제목은 강릉 단오제에서 하늘과 땅의 존재들을 불러 모으는 구호에서 따왔다. GIAF를 주최하는 파마리서치문화재단의 박필현 이사장은 “미술이 도시재생에도 일익을 담당할 수 있다”며 “예술을 매개로 강릉의 매력과 문화를 알리고 싶다”고 밝혔다. 4월 20일까지.강릉=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몰려든 부서(물고기)떼는 작은 어촌을 희열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가난한 곰치 일가에도 만선의 행운이 찾아오지만 기쁨도 잠시. 선주 임제순이 밀린 뱃삯 반값으로 고기를 모두 빼앗고 내일부터 배를 묶겠다고 통보하는데….’1964년 7월 국립극단의 제37회 공연으로 무대에 올랐던 ‘만선(滿船)’의 당시 프로그램 북에 실린 줄거리 일부다. 표지엔 쓰러져 갈 듯한 어촌 풍경과 함께 ‘1964년도 10만 원 현상 희곡 당선작!’이라는 문구도 적혀 있다. 극작가 천승세(1939∼2020)의 작품으로 문학 교과서에도 실린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 창작희곡 ‘만선’. 올해로 초연 61년을 맞은 이 작품이 6일부터 다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환갑의 세월 동안 내공을 쌓은 ‘만선’은 무얼 가득 싣고 2025년 항구로 돌아왔을까.●올가미 같은 현실에 맺힌 비극7일 찾은 연극 무대는 여전히 인물들의 비극적인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었다. 곰치네 초가집은 삐뚤어져 있고, 무대 바닥은 경사를 넣어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표현돼 있다. 언덕 위에서 임제순이 흰옷을 입고 걸어 내려와 불가능한 조건을 내거는 모습, 바람이 세게 부는데도 곰치가 욕심을 부리며 돛을 두 개나 이고 언덕을 오르는 모습 등은 곰치 일가가 맞닥뜨린 ‘올가미 같은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올해 무대는 사실주의적 연극을 주로 선보여온 심재찬 연출에 제31회 이해랑연극상 수상자인 이태섭 무대디자이너가 무대를 맡았다.곰치 일가가 맞닥뜨린 조건은 ‘만선’을 해야만 벗어날 수 있지만, 극복해야 하는 변수는 너무나 많다.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물고기 떼의 움직임, 몇십 분 단위로도 바뀌는 파도와 바람, 그리고 날씨까지. 그럼에도 곰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만선만 하면 된다, ‘이기면 된다’는 생각으로 불합리한 계약을 받아들인다.더 빛나는 건 배우들이었다. 배우 김명수는 힘이 가득 실린 목소리로 ‘곰치’의 고집을 잘 보여줬다. ‘구포댁’을 연기한 정경순은 운명의 파도에 휩쓸리며 자식까지 잃는 어머니의 한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악덕 선주 임제순’으로 열연한 원로 배우 김재건의 노련함 역시 돋보였다. ●60년 세월, 삶은 나아졌을까극 중 곰치의 아들 도삼은 “외국 사람들은 배에 기계를 달아 고기 떼를 훤히 보고, 날씨도 탐지한다”며 “원시적으로 고기를 잡으려면 남의 큰 배보다 작더라도 내 배를 타자”고 아버지에게 반항한다. 하지만 곰치는 “뱃놈이 물을 무서워하면 안 된다”, “큰 고기로 만선 하는 맛은 역시 중선배다”라며 이를 무시한다. 급격한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빚어지는 세대 갈등과 빈곤과 같은 비극적인 서민의 현실이 잘 버무려졌다. 올해 연극은 굳이 대사를 현대화하지 않고 60년 전 쓰였던 그대로 살려냈다. “쐐기처럼 톡톡 쏜다”, “임제순이 속도 칡넝쿨이제”, “아저씨 넉살엔 얼음 속 굼벵이도 춤춘당께” 등에선 오리지널의 말맛이 여실히 살아있다. ‘만선’의 꿈을 산산조각 낸 폭풍우가 부는 장면은 무대를 넘어 객석까지 거센 비바람과 파도가 휘몰아치는 듯 몰입감 있는 연출을 보여줬다. 바뀐 대목도 있다. 시대적 변화에 맞춰 슬슬이나 구포댁 등 여성 캐릭터는 원작보다 훨씬 주체적인 면모를 보인다. 다만, 60년 전 곰치의 모습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의지’와 ‘고난’으로 이해됐다. 하지만 2025년 관객들에겐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는 ‘고집’으로 느껴질 수 있지 않을까. 30일까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통통하고 빨간 볼에 동그란 눈매의 사랑스러운 코흘리개 아이를 카메라에 담은 ‘미라이짱’. 2011년 일본에서 사진집으로 발간돼 12만 권 이상 팔리며 국내에서도 화제를 모았던 연작을 찍은 사진가 가와시마 고코리의 작품 300여 점을 선보이는 전시 ‘사란란’이 최근 서울 종로구 서울미술관에서 개막했다.‘미라이짱’은 일본 니가타현 사도가섬의 시골 마을에 사는 당시 세 살배기 단발머리 소녀의 일상을 담은 작품이다. 아이는 가와시마 작가의 친구의 딸. 작가는 짧게는 3일, 길게는 열흘씩 친구 집에 머물며 일상을 담았다. 이 사진을 블로그에 올렸다가 화제가 되자 사진집까지 발간하게 됐다. 이번 전시는 미라이짱이 프랑스와 영국, 핀란드 등 유럽으로 여행을 떠난 모습을 담은 ‘보컬리즈(Vocalise)’ 연작도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선 작가가 서울에 머물면서 촬영한 사진들도 선보인다. 미술관 측에서 전시를 기획하고 섭외 요청을 했는데, 작가가 마침 한국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작가의 친구이자 배우인 우스다 아사미와 겨울을 배경으로 찍은 ‘S(e)oulmate’ 연작, 최초 공개하는 ‘사랑랑’ 연작 등이 전시된다. ‘사랑랑’이란 제목은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어 ‘사랑’과 ‘사람’을 조합해 만들었다. 다만 전시 제목은 한국어가 서투른 작가의 귀에 들렸던 대로(사란란) 썼다고 한다. 을지로 골목길의 풍경 사진도 눈에 띈다. 10월 12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통통하고 빨간 볼에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한국에서도 사랑을 받았던 ‘미라이짱’의 사진가 가와시마 고토리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가 최근 서울에서 개막했다. 서울 종로구 서울미술관에서 10월 12일까지 열리는 ‘사란란’전은 가와시마의 작품 300여 점을 소개한다. 여기에는 사진집이 12만 권 이상 판매되고 한국에서도 수년간 일본 도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던 연작 ‘미라이짱’도 포함된다.‘미라이짱’은 일본 니가타현 사도가섬 시골 섬마을에 사는 세 살배기 단발머리 소녀의 일상을 담고 있다. 이 소녀는 가와시마 작가 친구의 딸로 작가는 짧게는 3일, 길게는 열흘 동안 친구의 집에 함께 머물며 아이의 일상을 담았다. 이 사진을 블로그에 올렸다가 화제가 되면서 사진집을 발간하기에 이르렀다.전시장에서는 ‘미라이짱’이 프랑스, 영국, 핀란드 등 유럽 여행을 떠난 모습을 담은 ‘보컬리즈’(Vocalise) 연작도 볼 수 있다. 자신이 살던 곳과 완전히 다른 풍경에 놓여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는 ‘미라이짱’, 그런 아이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지하 1층 전시장에서 만나는 ‘BABY BABY’ 시리즈는 대학생 시절 작가가 친구의 모습을 4년 동안 담은 것으로, 작가가 처음으로 낸 사진집이자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된 작품이다. 매력적인 얼굴과 이를 돋보이게 하는 배경, 햇빛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작가 특유의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은 일본 배우 나가노 타이가, 대만 배우 야오 아이닝과 함께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서’ 등의 연작으로도 이어진다.특히 이번 전시는 작가가 서울에 머물면서 기록한 사진들도 함께 선보인다. 미술관 측에서 전시를 기획하고 작가에게 섭외 요청을 했는데, 작가가 마침 한국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후문이다. 작가의 친구이자 배우인 우스다 아사미와 겨울을 배경으로 찍은 ‘S(e)oulmate’ 연작, 또 최초 공개하는 연작 ‘사랑랑’ 등이 전시된다. ‘사랑랑’이라는 제목은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어 ‘사랑’과 ‘사람’을 조합해 만들었다. 다만 전시 제목은 한국어가 서투른 작가가 처음 적었던 대로(‘사란란’)다. 을지로 골목길을 다니며 담은 풍경, 서울에 머물며 팬에서 친구가 된 양익준 감독의 모습 등이 눈에 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파키스탄계 미국인으로 희곡을 써서 퓰리처상을 받은 ‘엘리트’. 그러나 현실에서는 백인들에게 ‘테러리스트의 민족’으로 배척당하는 이민자. 그리고 또 한쪽에선 무슬림의 배타적 면모를 비판했단 이유로 ‘무슬림의 정체성’을 지지하지 않는 미국인이라 비판받는 인물. 소설의 주인공은 아야드 악타르. 9·11테러 이후 심해진 이슬람 혐오로 느끼게 되는 정체성의 혼란을 그린 희곡 ‘수치’로 퓰리처상을 받은 저자처럼, 악타르도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다. 결국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 인물. 저자와 이름이 같다 보니 독자는 마치 자전적 에세이를 읽는 착각에 자꾸 빠진다. 하지만 실은 교묘히 허구가 섞여 있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창작은 바로 저자의 아버지다. 파키스탄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 온 아버지는 1993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심장 주치의로 잠시 일한 적이 있다. 부동산을 비롯한 각종 투자에 손을 대며 언제나 ‘돈’과 ‘실익’을 따진다. ‘기회의 땅’ 미국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트럼프가 공개적으로 이민자를 배척하는데도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 남몰래 그에게 표를 던진다. 그런 아버지는 “불가능하리만큼 강해지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자신, 부채나 진실, 역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자신”과 “고국에 버리고 온 파키스탄 자아보다 더 많은 걸 담을 수 있음을 보여줄 이미지”를 트럼프에 투사하는 인물이다. 이런 아버지와 더불어 빚으로 돈을 버는 무슬림 ‘리아즈’도 있다. 리아즈는 대출 평가 사업을 하며 빚을 팔아 자본을 굴리는 시스템을 운영한다. 그를 통해 빚과 자본이 국경을 넘는 권력이자 논리가 돼 하층 계급의 삶을 파괴하는 과정을 목격한다. 동시에 악타르 역시 리아즈가 소개한 주식으로 커다란 부를 거머쥔다. 이렇게 “성장하는 건 공동체가 아닌 자본 자체이며, 빚이 수단이자 지배 논리인” 시스템(리아즈)과 그 환상을 좇는 사람(아버지)을 보여주며, 소설은 “돈이 활력의 중심에 있었지만 이제는 최고의 가치로 군림하게 된” 미국 사회를 비춘다. “이제 우리에게 돈은 노동의 목적이 아니라 여가의 목적”이며 “영화 줄거리를 말하기 전에 박스오피스 순위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외야수의 타율을 보기 전에 그가 받는 보너스에 관심 갖는” 사회 말이다. 다른 한편에선 미국에 살다가 고국으로 돌아가 무슬림의 독립을 지지했던 ‘라피트’도 있다. 이 인물을 통해 소설은 미국과 파키스탄의 약탈적인 관계를 역사적인 르포로 풀어낸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소설은 악타르를 중심으로 ‘이민자의 나라’로 여겨졌지만 거대한 벽이 도사린 미국의 실상을 그려내고 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조명하는 것은 뭘까. 트럼프라는 인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국 사회 혹은 자본주의의 복잡한 양상이다. 이른바 ‘아메리칸드림’을 둘러싼 환상과 적나라한 민낯. 주인공은 이렇게 되뇐다. “트럼프는 일탈이나 이상 현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허용한 것을 보여주는 인간 거울이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오늘은 이집트 출신 현대미술가 와엘 샤키와 나눈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샤키는 십자군 전쟁을 마리오네트로 재현한 연작 ‘십자군 카바레’(2010~2015), 신화를 재구성한 ‘알 아라바 알 마드푸나’(2012~2016) 등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카셀 도큐멘타, 샤르자 비엔날레,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 PS1 등 주요 국제전이나 기관에서 전시했고,지난해에는 베니스비엔날레 이집트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역사를 주제로 한 대규모 음악극 ‘드라마 1882’(2024)를 공개했죠.감각적인 영상미와 스토리, 또 수십 명의 배우가 등장하는 규모로 눈길을 끌었고, 프리뷰 기간에는 이집트관 앞에 길게 줄이 늘어서기도 했습니다.그런 그가 한국에 들고 온 작품들은 이들과는 사뭇 다른 초기작입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슈퍼마켓에서 꾸란을 외는 작가의 모습이 담긴 20년 전 작품 ‘동굴’, 유명 TV쇼를 패러디해 정치적 사건을 다룬 ‘텔레마치’ 시리즈 등인데요. 최근의 대규모 프로덕션과 다른 작은 규모에 날것의 화면이 전시장에 펼쳐집니다.처음엔 ‘내가 알던 샤키의 작품이 맞나?’ 싶지만 이야기를 나눠보니 ‘이런 출발점에서 대표작이 나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인터뷰였습니다.20년 전 만든 ‘동굴’,내 자화상 같은 작품- 20년 전 만든 작품 ‘동굴’을 한국에서 다시 보니 어떤가요?“기쁘고 즐거워요. 이 작품은 자화상으로 생각하고 만든 것이고, 제 직접적인 경험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저는 2004년 터키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잠시 살았는데, 이때 터키는 유럽 연합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이슬람주의자들이 충돌하며 큰 정치적 긴장이 생겨나고 있었어요.이 무렵 저도 정체성에 대해 많이 고민했죠. 나의 종교적인 배경(이슬람)과 세속적인 세계(유럽 연합)를 관련지으려다 나온 것이 이 작품입니다.작품 속에 등장하는 슈퍼마켓은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가든 거의 동일한 상품을 찾을 수가 있어요. 이런 세계의 똑같은 시스템 속에서 저는 꾸란의 ‘동굴’ 장을 연결하기로 했습니다.꾸란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는 자신의 땅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힘과 지식을 얻을 수 있고, 그런 다음 자신의 땅으로 돌아와 선을 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기본적인 아이디어입니다.그중에서도 ‘동굴’ 이야기는 마을에서 핍박받는 외부자의 이야기를 다루는데요. 외부자들이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했고, 신은 이들을 동굴에서 수백 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잠에 들게 만듭니다.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이들이 깨어나자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은 이 사람들을 신의 기적의 증거로 믿게 되었죠.“- 이 내용을 왜 슈퍼마켓에서 말하려고 한 건가요?“그게 나의 자화상이었기 때문이에요. 예술가로 다른 문화권의 여러 곳을 여행하고 무언가를 하려고 노력하는데, 그 모든 것은 자본주의의 우산 아래 있어요. 마치 어느 나라나 상품이 똑같은 것처럼요.그런데 이집트에서 태어나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서 살았던 저는 그것과는 다른 모든 기억을 내 안에 가지고 있죠. 그래서 꾸란의 내용을 끊기지 않고 원테이크로 외워서 말하는 제 모습을 담기로 한 것입니다. 만약에 중간에 틀리거나 까먹으면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했죠.이 작품 속 모습이 지금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약간 어려 보이기만 할 뿐…“- 그렇게 슈퍼마켓에서 꾸란을 외웠던 이유는, 당시 처했던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나 두려움도 있었나요? “아니요. 제가 처한 상황이나 나에 대해 이해하려는 하나의 방법이었어요. 다른 작품들도 기본적으로 ‘이해’라는 개념에서 출발해요.예를 들어 ‘텔레마치’ 연작은 제가 어린 시절 자주 보았던 독일의 유명한 TV쇼인데요. 이런 TV쇼를 보는 것과 같은 시기에 이집트에서 대통령 암살 사건(안와르 사다트(1918~1981)가 제4차 중동전쟁 승리 기념 퍼레이드를 하다 습격당하는 것이 중계됐고, 그 후 호스니 무바라크(1981~2020) 독재 정권이 30년간 통치했다)이 일어났죠. 어린 시절 TV에서 그 두 가지를 보았던 느낌이 제 안에 남아 있었지만, 어떻게 표현할지는 몰랐죠. 그걸 이해하기 위해 영화를 만든 것입니다.- ‘동굴’을 만들고 나서 나에 대해 좀 더 이해했다. 그런 만족감이 들었나요? “솔직히 말해서 제일 놀라운 건 처음 그 작품을 했을 때는 터키의 상황에 관해 표현한다고만 생각했는데요. 왜냐면 터키에는 인구 97%가 무슬림이고 어디에나 모스크가 있고 모두가 아랍어로 기도해요. 그런데 터키인들 대부분은 아랍어를 할 줄 모르죠.그러니까 그 언어를 모르면서 어떻게 신자가 될 수 있을까? 그런 궁금증에서 출발한 거였어요.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터키에서 전시했을 때 아주 많은 공감을 사고 인기를 끌었는데, 그 후 국제적으로도 아주 여러 곳에서 전시가 됐어요. 그 이전에 베니스 비엔날레에도 참가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전시한 작품보다 더 많은 반응을 얻었죠. - 저는 그러한 상황을 잘 모르지만 이 작품이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들어왔어요. 왜냐면 지금 광화문에 가봐도 성경을 외우고 다니는 사람을 볼 수 있거든요. 그런 맹목적이고 낯선 기분을 이 작품에서 느꼈습니다. “네. 다만 이 작품에서 제가 그 종교를 믿는지 안 믿는지에 대해서는 표현하지 않았어요. 기자처럼 정장을 차려입고, 꾸란을 암송하는 방식도 리포터가 말하듯이 건조하게 읊었죠. 또 종교적인 느낌이 아니라 텍스트의 내용 자체를 말하려고 했어요.”‘더 나은 곳 향한 욕망’,종교와 역사, 시대를 넘는 공통된 꿈- ‘동굴’ 작품은 슈퍼마켓에서 꾸란을 외는 모습을 라이브로 담아서 곁눈질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볼 수 있는데, ‘텔레마치 교외’는 독일 밴드를 이집트 마을에 갑자기 가져다 놓아요. 이렇게 예상치 못한 상황에 돌발적인 것을 넣어 반응을 보는 걸 즐기나요?“네, 그런 것이 항상 흥미롭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작품을 만들 때 저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가 “사회 시스템이 정말로 진화하고 발전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느냐”거든요.유목민 사회, 농경 사회, 도시 사회 사이의 시스템과 상황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저는 유심하게 봐요. 그 변화는 흰색이 검은색이 되듯 갑자기 변화하는 건 아니고 서서히 일어나는 것이죠.이런 것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제 성장 배경에도 영향이 있어요. 저는 기본적으로 농업사회인 이집트에서 태어났고, 사막 유목민 사회인 메카에서 성장기를 살았어요. 어린 시절의 겪은 다른 문화들이 항상 제겐 의문스러웠어요.”- 그래서인지, 서로 다른 문화에서 공통되는 무언가를 찾고 싶어 한다는 느낌도 받아요. 실제로도 그런가요?“제 생각에 저의 작업에서 주된 것은 전환기의 사회, 전환기의 문화를 번역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아요.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진화하려는 꿈’이 있죠. 이 꿈은 항상 같은 것이에요.십자군 전쟁의 역사에서도 그랬고, 사다트 대통령 암살에서도. 또 베네치아에서 선보였던 ‘드라마 1888’에서도 그래요. 항상 사회는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싶어 해요.”- 결국 모든 것은 ‘욕망’에 관한 이야기군요.“발전하고 싶은 욕망은 인류의 공통된 것이죠.”- 그러니까 ‘동굴’에서 슈퍼마켓을 선택한 것도 마찬가지네요.“네. 이민이라는 것도 그래요. 한 사람이 다른 곳으로 ‘이민’가는 이유는 힘과 지식을 얻기 위해서이고, 그것이 심지어 꾸란에도 나와요. 꾸란에서 말하는 것도 결국은 ‘발전하려는 욕망’이죠.”- 그런 점에서 1층에 전시된 애니메이션 작품 ‘알 아크사 공원’이 생각나네요. 눈에 보이는 건물은 욕망이 응축된 것 같은데 그걸 위태롭게 만들고 있잖아요.“작품 속에 등장하는 건물은 ‘바위의 돔’인데 이 작품은 ‘끝나지 않는 영원한 순환’의 아이디어로 시작한 거예요. 우리가 놀이공원에 가면 기구가 멈춰야 입장할 수 있으니 그걸 계속 기다리잖아요. 그런데 영상 속 놀이기구는 영원히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돌고 돌죠.다른 작품 ‘알 아라바 알 마드푸나’에도 절대 끝나지 않는 이야기가 나와요. 이야기가 약간씩 바뀌긴 하지만 처음으로 돌아가고, 약간 바뀌고 처음으로 돌아가요.그런 이야기 중 하나는. 마을 지도자가 여왕과 결혼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혼식을 올리고 여왕은 지도자의 목을 베어 시장에 던져요. 마을 전체가 날뛰며 여왕을 죽이려 하지만 협상이 시작되고, 죽은 지도자의 형제가 여왕과 결혼하기로 해요. 마을은 환호하고 결혼식을 올리면 여왕은 또 남자의 목을 베어 시장에 던집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되죠. 역사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고요.“- 2025년에 당신의 자화상을 그린다면 어떻게 할 것 같나요?“글쎄요. ‘동굴’ 작품의 의미가 지금은 많이 달라져서… 우선은 가장 단순한 드로잉에서부터 시작해 볼 것 같아요.”-20년 전 작품과 지금이 변한 것 없다고 처음에 말했던 작가는 마지막엔 ‘많은 것에 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둘 다 맞는 말이지요. 크게 보면 달라진 게 없고, 가까이서 보면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르고, 다르지만 비슷한 것들이 돌고 돌면서 만들어지는 세상사. 그게 와엘 샤키가 보여주고 있는 인간사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드는 인터뷰였습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영화 ‘어벤져스’ 시리즈 등에서 토르 역할을 맡았던 할리우드 배우 크리스 헴스워스가 최근 한국을 방문했던 사진을 공개했다. 헴스워스는 6일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한국에서 찍은 사진 여러 장을 게재하며 “최근 촬영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리미트리스2’의 비하인드 신”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한국은 기대 이상이었다”며 “이번 시즌은 건강과 장수, 웰빙에 대한 지식을 찾아 떠난 놀라운 글로벌 여정이었다”고도 했다. 공개한 사진에서 헴스워스는 종합격투기 선수 출신인 방송인 김동현을 상대로 복싱 연습(사진)을 하고 있다. 군복을 입고 한국 군인들과 씨름을 하거나 한국 길거리를 다니는 사진들도 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즐거운 나의 집은 항상 즐겁기만 할까?’ 밥을 먹기 위해 온 식구가 모여 앉는 식탁 위 식기에 전선을 주렁주렁 연결해 전기를 통하게 한다. 치즈 강판을 커다랗게 만든 모양의 침대를 놓고, 무언가를 가려야 할 파티션에는 철조망을 달아 버린다.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을 비틀어 관객이 불안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현대 미술가 모나 하툼의 작품들 이야기다. 일상을 도와줄 거라 믿었던 것들의 배신. 1980년대부터 그가 보여준 ‘불편함’은 미술계를 사로잡았다. 영국 테이트모던과 프랑스 퐁피두센터, 미국 뉴뮤지엄과 독일 카셀 도쿠멘타,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 등에서 수십 년에 걸쳐 조명되고 있다. 올해는 런던 바비컨센터에서 자코메티와 2인전을 앞둔 하툼이 갤러리 전시로 한국을 찾았다. 하툼은 개인전 개막을 하루 앞둔 4일 서울 강남구 화이트큐브에서 동아일보와 만나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이 정말 그런지 질문을 던져 보기 위해 일상의 사물을 활용한다”고 했다.“집에서 쓰는 가구는 ‘몸’과 관련 있죠. 앉거나, 눕거나, 기대도록 만든 것이니, 작품에 몸을 표현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가구를 보고 저절로 자기 몸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툼의 작품 앞에 서면 관객은 상상에 잠긴다. 이번 전시에 나온 ‘무제(휠체어 II)’(1999년)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차갑고 딱딱한 휠체어다. 특히 누군가 잡고 밀어야 할 손잡이는 칼날처럼 만들었는데, 보는 순간 ‘저 손잡이를 잡으면 얼마나 아플까’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무언가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함은 한 사람이 다른 나라나 문화권에 갈 때 겪는 감정이기도 하다.“늘 살던 곳을 떠나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하죠. 주변에 보이는 전부가 불확실하고, 이전엔 괜찮았던 것이 여기선 그렇지 않아요. 무언가를 마주할 때 ‘이게 나를 반길까? 아니면 거부할까?’라는 불안이 항상 있어요.”흥미로운 건 이런 불안한 감정이 수동적 태도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색색의 유리로 만든 수류탄이 있는 작품 ‘정물(의약품 캐비닛) VI’처럼, 가만히 있지만 함부로 만지면 폭발할 것 같은 폭력성이 있다. 하툼은 이런 요소들이 “아름답고 매혹적이지만 불길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며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정말로 항상 안정적인지 의문을 제기하고 표면 너머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던 무언가가 무너지고, 오래된 가치관이 무너지며, 자고 일어나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확실성. 그건 이제 모든 세계인이 마주한 현실이 됐다. 팔레스타인인으로 레바논에서 태어나 영국 국적을 갖고 있는 하툼은 “작품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해서 출발하지만 군더더기를 없애는 것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감정을 느끼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하툼은 1997년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해 7차례 그룹전으로 국내에 작품을 선보였지만, 한국 방문은 처음이다. 그는 “인사동에서 마음에 드는 한지를 발견해 잔뜩 샀다”면서 “다른 골동품점에도 흥미로운 게 많았는데 문을 닫아 제대로 볼 수 없었다”며 아쉬워했다. ‘일 말고 다른 건 한국에 궁금한 게 없었냐’고 묻자 그는 두 팔을 쫙 뻗더니 “다이소!”라며 웃었다. 한국의 일상 속 물건에서 하툼은 어떤 영감을 얻었을까. 답은 새 작품이 나올 때쯤 알아볼 수 있겠다. 4월 12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즐거운 나의 집은 항상 즐겁기만 할까?’밥을 먹기 위해 온 식구가 모여 앉는 식탁 위 식기에 전선을 주렁주렁 연결해 전기를 통하게 한다. 치즈 강판을 커다랗게 만든 모양의 침대를 놓고, 무언가를 가려야 할 파티션에는 철조망을 달아 버린다.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을 비틀어 관객이 불안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현대 미술가 모나 하툼의 작품들 이야기다.일상을 도와줄 거라 믿었던 것들의 배신. 1980년대부터 그가 보여준 ‘불편함’은 미술계를 사로잡았다. 영국 테이트모던과 프랑스 퐁피두센터, 미국 뉴뮤지엄과 독일 카셀 도큐멘타,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 등에서 수십 년에 걸쳐 조명되고 있다. 올해는 런던 바비컨센터에서 자코메티와 2인전을 앞둔 하툼이 갤러리 전시로 한국을 찾았다.하툼은 개인전 개막을 하루 앞둔 4일 서울 강남구 화이트큐브에서 동아일보와 만나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이 정말 그런지 질문을 던져 보기 위해 일상의 사물을 활용한다”고 했다.“집에서 쓰는 가구는 ‘몸’과 관련 있죠. 앉거나, 눕거나, 기대도록 만든 것이니, 작품에 몸을 표현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가구를 보고 저절로 자기 몸을 떠올리게 됩니다.”하툼의 작품 앞에 서면 관객은 상상에 잠긴다. 이번 전시에 나온 ‘무제(휠체어 II)’(1999)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차갑고 딱딱한 휠체어다. 특히 누군가 잡고 밀어야 할 손잡이는 칼날처럼 만들었는데, 보는 순간 ‘저 손잡이를 잡으면 얼마나 아플까’라는 생각이 떠오른다.무언가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함은 한 사람이 다른 나라나 문화권에 갈 때 겪는 감정이기도 하다.“늘 살던 곳을 떠나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하죠. 주변에 보이는 전부가 불확실하고, 이전엔 괜찮았던 것이 여기선 그렇지 않아요. 무언가를 마주할 때 ‘이게 나를 반길까? 아니면 거부할까?’라는 불안이 항상 있어요.”흥미로운 건 이런 불안한 감정이 수동적 태도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색색의 유리로 만든 수류탄이 있는 작품 ‘정물(의약품 캐비닛) VI’처럼, 가만히 있지만 함부로 만지면 폭발할 것 같은 폭력성이 있다. 하툼은 이런 요소들이 “아름답고 매혹적이지만 불길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며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정말로 항상 안정적인지 의문을 제기하고 표면 너머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안전할 것이라고 믿었던 무언가가 무너지고, 오래된 가치관이 무너지며, 자고 일어나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확실성. 그건 이제 모든 세계인이 마주한 현실이 됐다. 팔레스타인인으로 레바논에서 태어나 영국 국적을 갖고 있는 하툼은 “작품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해서 출발하지만 군더더기를 없애는 것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감정을 느끼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다.하툼은 1997년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해 7차례 그룹전으로 국내에 작품을 선보였지만, 한국 방문은 처음이다. 그는 “인사동에서 마음에 드는 한지를 발견해 잔뜩 샀다”며 “다른 골동품점에도 흥미로운 게 많았는데 문을 닫아 제대로 볼 수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일 말고 다른 건 한국에 궁금한 게 없었냐’고 묻자 그는 두 팔을 쫙 뻗더니 “다이소!”라며 웃었다. 한국의 일상 속 물건에서 하툼은 어떤 영감을 얻었을까. 답은 새 작품이 나올 때쯤 알아볼 수 있겠다. 4월 12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현대 미술가 피에르 위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휴먼 마스크’는 인간의 가면을 쓴 원숭이가 주인공이다. 긴 머리카락 가발을 쓰고 치마를 입고 있어 뒷모습만 보면 체구가 작은 소녀 같지만 팔과 다리엔 털이 수북하다. 이 원숭이가 돌아다니는 곳은 원전 사고로 황폐해진 일본 해안 도시 후쿠시마의 어느 식당. 그 안에서 원숭이는 훈련 받은 대로 부엌과 식탁을 오가며 의미 없는 일을 하거나 가만히 허공을 응시한다.‘휴먼 마스크’를 비롯해 위그가 최근 10여 년간 제작한 작품 12점을 공개하는 전시 ‘리미널(Liminal)’이 지난달 27일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개막했다. 사람과 비슷하지만 사람이 아닌 원숭이처럼, 위그는 인간이 되려다 만 ‘이상하고 아름다운 괴물들’을 작품 속에 펼쳐 놓았다. 전시 제목 ‘리미널’은 “생각지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를 일컫는다. 작가는 전시장 입구에 임신한 사람의 배를 본뜬 조각 작품(에스텔라리움)을 놓아뒀다. 앞으로 관객이 보게 될 작품들이 온전한 형태가 아닌, 배 속에서 무언가로 변하고 있는 ‘중간 상태’의 것들임을 암시한다. 이어 전시 제목과 같은 영상 작품(리미널)이 보이는데, 얼굴이 텅 빈 사람의 형체가 등장한다. 이 형체는 전시장에 설치된 센서가 감지하는 데이터에 따라 움직임이 조금씩 달라진다. 다른 대부분의 작품들도 정해진 서사 없이 전시 기간 수집되는 데이터에 따라 변화하는 형태로 제작됐다. 전시를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 쓰고 걸어 다니는 금색 마스크 ‘이디엄’에도 센서가 달려 있다. 마스크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하는 듯 기존 언어가 아닌 소리를 만들어낸다. 전시 소개 서문은 ‘변화’라는 설정을 강조하지만, 작품과 전시장이 빚어내는 불길하고 쓸쓸한 분위기도 흥미롭기가 그 못지않다. 앞을 보기 어려울 정도로 어둡게 만들어진 1층 블랙박스 전시장 한쪽 수조에는 콩스탕탱 브랑쿠시(1876∼1957)의 조각을 본뜬 얼굴 형상을 등껍데기 대신 메고 있는 소라게가 걸어 다닌다. 브랑쿠시의 조각조차도 소라게에겐 다른 소라 껍데기와 같은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지하 1층 전시장의 대형 영상 작품 ‘카마타’는 흙 바닥에 놓인 해골을 기계가 관찰하는 모습을 담았다. 그런데 그 해골의 형상이 바닥을 향해 쓰러진 듯 엎드리고 있어, 화산재가 덮친 폼페이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언젠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난 뒤 그 흔적만 남은 세계를…. 7월 6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