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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전 일본 미야기(宮城) 현 이시노마키(石卷) 시. 기차에서 내리자 시립병원 신축 공사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5년 전 동일본 대지진으로 지진해일(쓰나미)이 밀려왔을 때 이 병원 환자 150여 명이 고립됐다가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구출됐다. 사고 이후 안전한 장소를 찾아 새로 건물을 올리는 중이라고 했다. 이시노마키 시는 쓰나미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주민 3700여 명이 숨졌다. 일본 전체 사망자의 20%에 해당한다. 평야 지대의 약 30%가 침수됐다. 아직도 복구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시내 남쪽 히요리야마(日和山) 공원에서는 여전히 황무지로 남은 해안가 피해 지역과 곳곳의 공사 현장이 눈에 띄었다. 한쪽에 참사 전 주택가 사진이 붙어 있었다. 같은 곳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옆에서 피해 지역의 모습을 바라보던 한 노인은 몇 번 한숨을 내쉬더니 눈시울을 닦으며 자리를 떴다.○ “지금도 수면제 안 먹으면 잠 못 자” 이시노마키에서도 가장 피해가 컸던 곳은 굴, 미역 등을 양식하던 연안 지역이었다. 조선족 출신으로 이시노마키 오시카 반도에 정착해 굴 양식 등을 하던 안도 마유코(安藤眞由子·53) 씨는 5년 전 쓰나미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었다. 그는 “쓰나미가 왔을 때 ‘아,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눈앞이 캄캄해지고 패닉 상태에 빠져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딸이 ‘위로 올라가야 산다’고 해 정신없이 움직였다”고 회상했다. 안도 씨는 당시 충격으로 자율 신경에 이상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5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만 놀라면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린다.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다. 굴 양식을 재개하기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그동안 생계를 충당하기 위해 보험회사에 다니기도 했지만 몸 상태가 나빠져 1년 동안 병가(病暇)를 냈다. 그는 “재해의 기억이 몸에 새겨져 있어 처음에는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것도 힘들었다. 지난해 말부터 겨우 당시의 경험을 말할 수 있게 됐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 중에는 지금도 신경쇠약, 우울증 등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 피해가 컸던 미야기 이와테(巖手) 후쿠시마(福島) 현에서 재해 후유증으로 자살한 사람은 정부 집계로 지난해 11월 말까지 154명에 달한다. 아사히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시노마키의 가장 큰 가설주택 단지의 경우 주민 약 2500명 중 250명가량이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기약 없는 가설주택 생활… 재기의 노력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안도 씨는 조금씩 기운을 차리며 주변 임시주택에 사는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과 ‘사쿠라회’를 만들었다. 서로의 아픔을 나누면서 수세미, 카드 등을 만들어 자원봉사를 하러 왔던 지인들에게 팔고 있다. 그는 “재해 전 오시카 반도에 7000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절반도 채 안 남았다”며 “어떻게든 서로 도와가면서 아픔을 극복하고 쓰나미에 대한 것을 잊지 않도록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오가타지구부흥협의회 사무국장인 하마하타 미키오(濱畑幹夫·57) 씨는 텔레비전 토론회에 출연해 정치인들에게 쓴소리를 했던 지역 내 유명 인사다. 이시노마키 외곽에서 컨테이너 카페를 운영하는 그는 지역 부흥과 피해자 자활을 위해 부인과 함께 가설주택 거주 여성들을 모아 손수건을 만들고 있다. 2일 그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만난 하마하타 씨는 “대지진 후 도쿄 등으로 빠져나가는 이들도 많지만 이곳을 지키며 노력하는 것이 동북지역의 긍지”라며 “마진이 박하다 보니 손수건을 만들어도 적자지만 다들 열심히 일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피 과정에서 손발이 언 채로 얼굴만 가린 채 바닥에 누워 있던 시신 수십 구를 목격했다. 오가타 초등학교에서 무더기로 희생된 아이들을 봤을 때는….” 한국 출신으로 2006년 결혼과 함께 이시노마키에 정착했다가 쓰나미로 집을 잃은 곤노 리카(今野李花·47) 씨는 5년 전을 회상하며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곤노 씨는 “이후 비좁은 가설주택에 5년째 살고 있다. 한참 동안 우울증에 시달렸고 스트레스 때문에 자살 충동이 일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당시 기억을 떠올리면 며칠 동안 귓가에서 쓰나미가 다가오는 소리, 도움을 청하는 소리가 들려 잠을 못 이뤘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11월부터 일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웃을 수 있게 됐고 당시 일도 조금은 얘기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대지진이 터진 뒤 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가설주택에 거주하는 이들이 18만 명이나 된다. ▼ “엉터리 피난 매뉴얼 따르다… 어린 학생들 74명 숨져” ▼아물지 않은 오가와초등교의 상처… “세월호 유족들 내달 방문 추진” “구할 수 있었던 귀중한 목숨이 희생됐습니다.” ‘작은 생명의 의미를 생각하는 모임’의 사토 도시로(佐藤敏郞·53) 대표의 목소리에서는 희미한 분노가 느껴졌다. 그는 2011년 지진해일(쓰나미)이 학교를 덮치면서 발생한 ‘오가와 초등학교 참사’ 때 초등학교 6학년 딸을 잃었다. 당시 미야기 현 이시노마키 시에 있는 이 학교에서는 학생 108명 중 74명, 교사 13명 중 1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학교는 해안에서 4km 떨어진 곳에 있어 대피할 시간이 충분했다. 하지만 학교 측이 45분 동안이나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아 놓고 시간을 낭비하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다. 교육위원회 조사 결과는 ‘매뉴얼 사회’인 일본의 어두운 면을 드러냈다. 피난 매뉴얼에는 ‘높은 곳’이라고만 나와 있을 뿐 구체적인 장소는 명시돼 있지 않았다. 시 매뉴얼도 학교까지 쓰나미가 밀려오는 것을 상정하지 않았다. 일부 교사들이 뒷산으로 대피하자고 했지만 “나무가 쓰러질 수 있다”는 반론이 나와 무산됐다. 마침 교장은 학교에 없었다. 중학교 교사였던 사토 씨는 강연을 다니며 참사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언론을 통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던 사토 씨는 “최근 세월호 유가족 일부가 사고 5년을 맞아 3월 11일에 오가와 초등학교를 방문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이시노마키=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지인의 소개로 일본 미야기(宮城) 현에 건너온 김일광 씨(41·사진)는 일본인 아내 마유코(眞由子) 씨와 결혼해 딸(11)과 이란성 쌍둥이(7)를 얻었다. 트레일러 기사로 일하며 부지런히 돈을 모았고 2010년에는 센다이(仙臺) 시 미야기노(宮城野) 구 가모 지역에 집도 지었다. 이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 대피방송 듣고도 뭔지 몰랐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5분. 김 씨는 집에서 저녁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부인은 생활비에 보태겠다면서 시급 800엔(약 8400원)을 받는 커튼 공장에 일하러 나간 터였다. 갑자기 땅에서 큰 진동이 느껴지며 냉장고 등 가전제품들이 쓰러졌다. 밖에 뛰쳐나가니 흔들리는 전봇대가 보였다. 동일본 대지진 5년을 맞아 2일 센다이 시내의 한 식당에서 기자를 만난 김 씨는 “세상의 끝이구나 싶었다”면서 당시를 회상했다. 진동이 멈추자 스피커에서 ‘쓰나미가 온다’는 대피 방송이 흘러나왔다. 쓰나미가 뭔지 몰랐던 김 씨는 부인을 찾으러 공장에 갔다. 운동장에 모여 설명을 듣는 모습을 보고는 ‘집에서 기다리겠다’는 손짓만 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는 “다들 초등학교 옥상으로 대피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별생각 없이 아내가 오면 같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아내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김 씨는 “차에 넣을 기름을 구할 수 없어 자전거를 타고 아내를 찾으러 돌아다녔다”며 “한 체육관에 아내와 비슷해 보이는 시신 사진이 있었는데 화장이 너무 진했다. 그렇게 말하니 자위대에서 수습한 시신에 화장을 해준다며 관을 열어 보자고 했다”고 말했다. 안에는 아내 마유코 씨의 시신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시신 발견을 도와준 직원은 현지에 파견된 한국 구조팀원이었다. 한국 음식을 해 주면 “힘이 난다”면서 좋아했고 남편을 위해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웠던 아내였다. 남한테 싫은 소리를 못 하는 성격이었고, 자신을 위해서는 돈 한 푼 허투루 쓸 줄 몰랐다. 김 씨는 관 앞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다. 세 자녀가 어른이 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돌봐주겠다고. 인터뷰 도중 몇 번이나 눈가를 훔치던 김 씨는 “엄마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이들 보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그는 이와테(巖手) 현 구지(久慈) 시의 처가에서 3개월가량 머물며 정신을 차렸다. 장인은 “손자를 돌보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며 회사를 그만뒀다. 그는 아이들을 처가에 두고 센다이 시내의 발전소 관련 회사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김 씨는 “처음엔 집에서 혼자 음식을 할 때마다 눈물이 났지만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들이 위안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언젠가 아이들과 함께 살고 싶어 새 집도 지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힘들지만 매일 아이들과 전화하고 운동하면서 이겨내고 있다”고 담담한 심정을 밝혔다.○ “남편 잃고 매일 눈물” 결국 귀국 선택 한국 외교부에 따르면 2011년 당시 지진과 쓰나미로 목숨을 잃은 한국인은 식민지 시절 일본에 와서 국적을 바꾸지 않은 조선적(朝鮮籍)을 포함해 모두 12명이다. 하지만 일본인 가족을 잃은 경우를 포함하면 숫자는 더 늘어난다. 유가족 중에는 김 씨처럼 일본에 남은 이들도 있지만 한국으로 돌아간 경우도 적지 않다. 정영희(가명·47) 씨는 2007년 일본에 와서 일본인 남편과 결혼식을 올렸다. 문화 차이 등으로 일본 시부모와 같이 살아가기가 쉽지 않았지만 “힘들 테니 너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남편의 따뜻한 말에서 위안을 얻었다. 이혼 위기가 있었을 때도 남편은 “내가 이해해주지 않으면 아내가 일본에서 살 수 없다”며 부모를 설득해 결혼 생활을 이어 갔다. 그러던 중 2010년 말 유방암이 발병했고 림프샘 제거 수술을 받았다. 힘든 투병 생활을 보내던 중 3월 11일이 됐다. 지진 직후 놀라서 남편에게 ‘괜찮냐’는 메시지를 보냈더니 ‘나는 괜찮은데 부모님이 걱정’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내가 가 보겠다’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더 이상 답이 없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남편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장례를 마친 시부모는 며느리 정 씨에게 “도장과 통장을 갖고 오라”고 했다. 남편 사망으로 배우자 체류 자격이 사라진 만큼 유족연금 등을 포기하고 한국에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정 씨는 재판을 선택했고 승소했다. 재판으로 받은 돈으로 작은 가게도 차렸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이미 만신창이가 됐다. 정부가 마련해 준 가설주택 생활은 쉽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거나 혼자 운전을 할 때마다 남편 생각에 눈물 흘린 적도 많았다. 정 씨는 결국 남편과의 추억이 있는 일본을 떠나 2013년 말 영구 귀국했다. 그는 현재 유방암이 재발해 투병 중이다. 결혼 이민을 연구해 온 이선희 도호쿠(東北)대 동북아시아연구센터 연구원은 “쓰나미 피해를 입은 도호쿠 지역에는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 여성 상당수가 결혼 후 정착했다”며 “쓰나미로 남편을 잃은 뒤 체류 자격이 없어져 시가에서 얼마 안 되는 돈을 받고 돌아간 이들도 있다”고 설명했다.센다이=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2011년 3월 11일 오후 4시 일본 미야기(宮城) 현 센다이(仙臺) 시. 지진해일(쓰나미) 경고 방송을 듣고 정신없이 달리던 재일동포 김일광 씨(41·사진)의 눈에 대피 장소인 나카노(中野) 초등학교가 들어왔다. 이웃들은 이미 대부분 대피한 뒤였다. 조금만 더. 김 씨는 부인 마유코(眞由子) 씨의 손을 잡고 길을 재촉했다. 이제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할 무렵 뒤에서 벼락이 치는 듯 엄청난 소리가 들렸다. “쿠콰과광.” 돌아보니 10m 높이의 흙탕물 파도가 덮쳐오고 있었다. 김 씨는 부인을 끌어안으며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온통 암흑천지였고 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팔을 내저으니 차가운 물이 느껴졌다. 나뭇가지와 기와 등을 헤치고 밝은 쪽으로 헤엄쳐 가니 둥근 금속 물체가 보였다. 초등학교 체육관의 농구 골대였다.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골대를 잡고 버티며 숨을 쉬었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점차 물이 빠지면서 주변 모습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체육관 안은 물살에 쓸려 온 자동차와 쓰레기로 뒤범벅인 상태였다. 시체도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여기가 지옥이구나’라고 생각하며 김 씨는 눈을 감았다.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지 5년이 지났다. 리히터 규모 9.0 지진과 쓰나미로 1만8500여 명이 사망하고 40만 동 가까운 건물이 피해를 입은 대참사였다. 후쿠시마(福島) 원자력발전소 사고의 파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당시 재해로 가족과 집을 잃고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삶을 꿋꿋하게 이어나가는 피해자들의 이야기와 원전의 현재 상황, 대지진이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 등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센다이·이시노마키=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일본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폭발물을 설치한 혐의를 받고 있는 한국인 전모 씨(28)가 경시청에서 “화약을 사용한 장치를 설치해 큰 소란을 일으키고 싶다고 생각했다”며 범행 동기를 진술했다고 산케이신문이 11일 보도했다. 전 씨는 지난해 11월 23일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 구 야스쿠니 신사 남문 화장실에 화약을 넣은 금속 파이프를 설치해 폭발시킨 혐의를 받고 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경시청 공안부는 신사에 무단 침입했다며 건조물 침입 혐의로 기소했던 전 씨에게 건조물 손괴 및 화약류취급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10일 추가 기소했다. 건조물 손괴 혐의가 적용된 것은 화장실 벽에 설치됐던 금속 파이프가 바닥에 떨어진 뒤 폭발과 함께 2m 가량 튀어 올라 천장을 뚫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경시청은 현재 한국 경찰에 협력을 의뢰했으며 이를 통해 화약 등의 입수 경로를 조사하고 있다. 전 씨는 지난해 12월 9일 화약 성분이 든 검은색 가루 1.8㎏을 갖고 재입국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전 씨는 경찰 조사에서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이 합사된 것에 대해 개인적인 불만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 10일 일본 닛케이평균주가가 전날에 이어 장중 4% 이상 하락하는 등 약세를 보인 끝에 2.31% 하락한 15,713.39엔에 마감됐다. 일본 증시가 15,000엔 선까지 밀린 건 2014년 10월 30일(15,658.30엔) 이후 약 1년 4개월 만이다. 한편 재닛 옐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이날 글로벌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을 언급하며 “미국이 금리 인상 속도를 늦출 수 있다”고 밝혔다. 》 9일 오후 일본 도쿄(東京) 쇼핑 일번지인 긴자 중앙로의 한 은행. 정기예금 금리 인하를 알리는 안내문 앞에 자전거를 세우던 음식점 종업원 마쓰오 에미(松尾繪美·33) 씨는 ‘마이너스 금리’ 얘기를 꺼내자 손사래부터 쳤다. “일본은 20년 넘게 디플레이션을 경험하고 있어요. 소득이 늘지 않는 이상 금리를 찔끔 내린다고 소비가 늘어나지는 않습니다. 나부터 돈을 빌려 집을 사거나 더 쓰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중국과 산유국 등의 경기 불안으로 일본 국민의 ‘디플레 마인드’가 심해지자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지난달 29일 중앙은행에 예치하는 민간은행 예금에 0.1%의 수수료를 받겠다고 발표했다. 소비와 투자를 늘리기 위해 극약 처방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마쓰오 씨처럼 기자가 만난 일본 사람들은 금리가 떨어진다고 돈을 더 쓸 생각은 없다고 단언했다.○ “일은이 뭐라 하든 예금통장은 지킬 것” 오사카(大阪) 시의 자영업자 나카노 요코(中野葉子·53) 씨는 “일본은행이 뭐라고 말해도 예금통장을 지킬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주변에 경제 버블 당시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실패한 사람이 적지 않다”며 “오랜 디플레의 영향으로 주택과 주식을 투자 대상으로 보는 일본인은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주부인 다케다 지하루(武田千春·53) 씨도 “아베노믹스로 경기가 좋아졌다고는 하는데 주변에서 실감한다는 사람은 찾을 수 없다”며 “남편 월급이 오른 것도 아니고 부동산 시세가 올랐다 해도 나하곤 관계없는 일이라 소비를 늘리거나 투자를 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요미우리신문이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마이너스 금리가 경기 회복으로 이어질 것’이란 답변은 24%에 그쳤다. 두 배에 가까운 47%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일본은행 출신인 다케우치 아쓰시(竹內淳) 일본경제연구센터 주임연구원은 “성장 전망이 약화된 상황에서 금리 인하가 투자와 소비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며 “수익을 낸 기업들도 해외에 투자하지 국내에선 돈을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본 시중은행들은 요즘 매일 금리를 내리고 있다. 소니은행은 보통예금에 연 0.001% 이자를 준다. 1000만 원을 맡길 경우 1년 후 100원을 이자로 주는 것이다. 수익성이 악화된 은행은 수수료 인상을 검토하고, 자금을 굴릴 데가 마땅치 않은 보험사는 보험료 인상을 검토하고 있다. 연기금도 수익성 악화로 고전하고 있다. 살림살이에 안 좋은 뉴스만 쌓이고 있는 것이다.○ “일은(日銀)의 오산” vs “끝까지 간다” 마이너스 금리로 주가가 오르고 엔화 가치가 안정될 것이란 기대도 사라진 지 오래다. 주가는 찔끔 올랐다가 연일 폭락하고 있고 엔화도 강세로 돌아섰다. 무제한 돈을 풀어 주가를 올리고 엔화 약세를 통해 경기를 부추기는 아베노믹스의 원리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동북아연구실장은 “디플레이션 지속 우려도 커지고 있어 아베노믹스는 당초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여기에 국채 장기 금리까지 마이너스로 떨어지며 금융시장 혼란이 극에 달하자 주요 조간신문은 10일 일제히 ‘일은의 오산’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마이니치신문은 사설에서 “일은의 마이너스 금리가 오히려 시장에 불안을 확산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은 총재는 “금융 완화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4일 중의원)라며 마이너스 금리를 옹호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도 10일 중의원에서 “구로다 총재를 신뢰한다”며 그에게 힘을 실어 줬다. 다이와증권의 나가이 야스토시(永井靖敏)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구로다 총재는 마이너스 금리 폭을 확대하며 최후까지 금융 완화 정책을 밀고 나갈 가능성이 크다”며 “연간 물가상승률 2% 목표를 위해 무리하게 금리를 낮추다 결국 새로운 버블을 만들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한미 금융 당국에도 불똥 일본 증시 폭락으로 국내 금융시장도 빨간불이 켜졌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10일 오후 금융경제 상황 점검회의를 열고 “(일본을 포함한) 선진국 금융시장이 연휴 전보다 더 불안정한 모습”이라며 “시장 변동성이 과도하게 확대될 경우 정부와 협력해 안정화 조치를 취하는 등 적극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재닛 옐런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10일(현지 시간) 하원 금융위원회 청문회 출석에 앞서 “금리 인상 속도를 늦출 수 있다”고 밝힌 것도 중국과 산유국 경제의 부진에 일본 경제에도 이상 신호가 켜진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그는 “미국 국내 요인과 외국 요인이 모두 미 경제에 리스크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정임수·김성규 기자}

“1919년 2·8독립선언을 준비하던 일본 유학생 송계백은 거사 직전 몰래 귀국해 당시 중앙학교(현 중앙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송진우 현상윤 선생, 인촌 김성수 선생을 만났습니다.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계획을 알게 된 이들이 ‘우리가 가만히 있어서 되겠느냐’며 본격적으로 나서 3·1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8일 오전 일본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 구 재일본한국YMCA회관에서 열린 2·8독립선언 제97주년 기념식. 이종찬 광복회 이사는 축사를 하기 전 기자와 만나 2·8독립선언에서 3·1운동으로 이어지는 거사의 태동에 깊숙이 관여했던 인촌 선생 등 애국지사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 달 후 3·1운동이 벌어지는 도화선이 됐고,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 2·8선언 과정은 긴박했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젊은 엘리트들은 97년 전 이날 학우회 임원 선거를 구실로 조선기독교청년회관 1층 강당에 유학생들을 모았다. 사전에 인쇄한 2·8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는 이미 일본 정부와 각국 대사관, 일본 신문 및 잡지사에 보낸 뒤였다. 귀국 후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백관수 선생이 학생들 앞에서 “우리 민족에 민족자결의 기회를 주기를 요구한다”며 독립을 선언했다. 이어 김도연 선생이 “이 모든 항목의 요구가 실패할 때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해 영원히 혈전을 선포한다”며 결의문을 낭독했다. 강당은 박수 소리로 가득 찼으며 결의문은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이며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이 이사는 “세계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면 보통 변방에서 시작돼 중앙으로 확대되는데 일제 침략의 중심지인 도쿄 한복판에서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한 것은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당시 주동자들이 경찰에 체포됐지만 남은 이들은 경시청 바로 앞 히비야 공원에서 2월 12일과 24일 연이어 집회를 열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고 강조했다. 또 “일제에 순종했더라면 조선에 돌아와 떵떵거리며 살았을 유학생들이 이를 포기하고 일어선 것은 대단한 일”이라며 “3년 후인 2019년에 100주년이 되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이 이사와 함께 유흥수 주일대사, 이낙연 전남지사 등이 참석했다. 위제하 오성규 애국지사와 독립유공자 후손을 포함해 200여 명이 기념식장을 가득 메웠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중국 외교부는 7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해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고 밝혔다. 화춘잉(華春瑩) 외교부 대변인은 7일 저녁 외교부 홈페이지에 올린 기자 문답식의 발표를 통해 류젠민(劉振民) 부부장이 지재룡 주중 북한대사와 만나 북한이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해 위성을 발사한 것에 대해 중국은 문제를 제기하고, 중국의 원칙적인 입장을 표명했다고 밝혔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달 6일 북한이 4차 핵실험을 했을 때도 그날 밤 늦게 지 대사를 외교부로 초치한 바 있다. 중국 관영 중앙(CC)TV도 이날 저녁 춘제(春節·설날) 전야 특집 방송인 ‘춘제완후이(晩會)’ 도중 외교부가 지재룡 대사를 초치한 사실을 진행자의 멘트로 소개했다. 앞서 일본 NHK는 중국 외교부 청사에 이날 오후 2시 20분 경 지재룡 대사의 전용차량이 도착했으며 30분 가량 머물다가 떠났다고 보도했다. NHK는 “중국 외교부가 북한이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탄도 미사일 기술을 사용한 발사를 강행한 것에 대한 유감을 북한 대사관 간부에게 직접 전달하고 한반도와 지역의 긴장을 높이는 행위를 자제하도록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화 대변인은 7일 정오에 발표한 대변인 발표에서도 “국제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해 발사를 강행한 데 대해 유감을 표시한다”고 밝힌 바 있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일본 정부는 7일 오전 9시 반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 소식이 전해지면서 긴박하게 움직였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발사 소식이 전해진 직후 기자단 앞에서 “반복해서 자제를 촉구했음에도 발사를 강행한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며 “핵 실험에 이은 미사일 발사는 명확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위반이며 일본의 안보에 매우 심각한 도발 행위”라고 밝혔다. 아베 총리는 이어 오전 10시 15분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재무상,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 나카타니 겐(中谷元) 방위상,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무상 등이 참석한 가운데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개최하고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대응 방안을 점검했다. 아베 총리는 또 낙하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한 조치를 지시했고 이에 따라 일본 전국 낙하 우려가 있는 지역에서는 확성기 방송이 실시됐다. 항공기 선박의 안전 등 후속조치에도 만전을 기할 것을 지시했다. 스가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오전 9시 31분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으며 발사체가 5개로 분리됐다”며 “일본 영토 내 낙하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NHK에 따르면 발사체 중 첫 번째는 오전 9시 37분 한반도 서쪽 150㎞ 서해에 떨어졌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오전 9시 39분 한반도 남서쪽 약 250㎞ 지점 동중국해 해상에 떨어졌다. 네 번째는 오전 9시 45분 일본 남쪽 약 2000㎞ 지점인 태평양에 떨어졌으며 마지막 부분도 오키나와 상공을 통과해 남쪽으로 계속 날아갔다고 한다.도쿄=장원재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중국 군용기 2대가 지난달 31일 제주도 인근 상공을 비행하면서 한때 한국의 방공식별구역(KADIZ)을 침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1일 한국 군 당국과 일본 방위성 통합막료감부(한국의 합동참모본부에 해당)에 따르면 중국군 정보수집기 Y-9 1대와 조기경보기 Y-8 1대가 전날 제주도 남서쪽 이어도 상공에서 KADIZ 안으로 진입했다. 이에 한국 군 당국은 무선통신을 이용해 이들 중국기에 KADIZ 침입 사실을 알리는 경고 방송을 했다. 중국기들은 자신들이 중국 소속이며 적대 의도가 없다는 사실을 밝히고 곧바로 KADIZ를 빠져나갔다. 중국 군용기들은 이후 계속해서 일본 쓰시마(對馬) 섬 남동쪽과 독도 남동쪽 인근까지 비행했다가 다시 그 경로를 통해 중국 쪽으로 돌아갔다. 중국 군용기들은 KADIZ를 빠져나간 뒤 독도 동쪽 일본 방공식별구역(JADIZ)으로 침입해 비행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자위대 전투기를 긴급 발진시켜 중국 군용기에 대응하기도 했다. 한국군 당국자는 “중국군은 KADIZ를 실수로 스쳐 지나가는 수준으로 경유했지만 JADIZ로는 의도적으로 들어가 한참 머문 것으로 추정된다”며 “JADIZ에서의 무력시위가 원래 목적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중국 군용기가 자국 영공까지 침입하지는 않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NHK는 두 군용기가 동해상에서 기수를 돌려 오후에 동중국해로 돌아갔다고 보도했다. 교도통신은 중국 군용기가 이런 경로로 비행한 사실이 확인된 것은 처음이라며 정보 수집을 위한 움직임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요미우리신문도 “방위성은 중국에 의한 정보 수집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현재 동해상에는 북한의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에 대비해 해상자위대 이지스함이 출동해 있다. 일본 방위성은 중국 군용기들의 비행 목적을 분석하고 있으며 추후 재발을 막기 위해 경계감시 활동을 강화할 방침이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손효주 기자}
미국과 중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가 최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비공개로 접촉한 것으로 확인됐다. 1일 베이징 소식통에 따르면 미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인 성 김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겸 대북정책특별대표가 지난달 28∼29일 베이징을 방문해 중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인 우다웨이(武大偉) 외교부 한반도사무특별대표와 만났다. 두 사람의 회동 시점은 지난달 27일 존 케리 미 국무장관과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이 베이징에서 회담을 갖고 대북 제재 방안을 논의한 직후다. 양측은 6일 4차 핵실험을 강행한 북한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차원의 제재 수위를 집중 논의한 것으로 관측된다. 하지만 케리 장관과 왕 부장 간 회담이 별 성과 없이 끝나면서 후속 논의 성격의 6자회담 수석대표 접촉도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요구하는 강도 높은 제재에 반대하는 중국은 안보리 논의를 늦출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1일 중국이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 시점을 춘제(春節·설날) 연휴(7∼13일) 이후로 미루자고 관련국에 제안했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강한 제재를 요구하는 한미일 등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라고 분석하면서 중국 뜻대로 제재 결의 채택이 이달 중순 이후로 미뤄지면 대북 압박의 동력이 상실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결의안 채택이 춘제 연휴 이후로 미뤄지면 핵실험 이후 40여 일이 지나게 된다. 북한의 1∼3차 핵실험 때는 안보리 결의안 채택까지 수일∼3주 정도 걸렸다.베이징=구자룡 bonhong@donga.com /도쿄=장원재 특파원}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강제 연행의 증거가 없다는 공식 입장을 최근 유엔에 제출해 지난해 말 한일 양국 간 합의 정신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처사라는 비난이 일고 있다. 일본은 위안부 내용을 교육 과정에 반영하는 문제에도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일본 정부는 2월 15일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제63차 회의를 앞두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한 답변서를 제출했는데 여기에서 위안부 강제 연행 사실을 부인했다. 31일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답변서에 따르면 “1990년대 초 이후 관련 부처와 기관이 보유한 자료,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서류, 전직 군 관련 인사들과 위안부 관리자 증언, 한국 측에 의해 수집된 증언 등에 대한 전면적 조사를 했다”며 “군과 관헌에 의한 위안부 ‘강제 연행(forceful taking away)’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도 지난달 18일 국회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강제 연행한 증거가 없다”고 말했다. 일본 교과서에 위안부 관련 내용을 반영할 것이냐는 질문에도 “일본은 국정 교과서 제도를 채택하고 있지 않아 정부가 답변할 위치에 있지 않다”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대신 지난해 말 한일 외교장관이 발표한 합의 전문을 영어로 번역해 첨부하고 “일본 및 한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음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외교부는 31일 “일본군 동원, 모집, 이송의 강제성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국제사회가 명확히 판정을 내린 사안”이라고 반박했다.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 조숭호 기자}
인구 노령화가 심각한 일본에서 애완견 수가 크게 줄고 있다. 31일 일본 언론은 애완동물푸드협회에서 발표한 전국 애완동물 사육 실태 조사 결과를 인용해 전국의 애완견이 991만7000마리로 전년보다 4.1% 감소했다고 보도했다. 애완견은 2008년 1310만 마리나 됐지만 이후 급속히 줄어 7년 만에 25%나 감소했다. 협회 측은 “독신자와 노인 계층이 늘면서 손길이 많이 가는 애완견 뒤처리를 해 주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일본 인구는 2008년을 정점으로 현재까지 110만 명 이상 줄었다. 앞으로도 인구가 줄 것으로 예상돼 애완동물의 인기도 예전 같지 않다. 주인이 나이 들어 요양시설에 입소하면서 도살 처분되는 애완견이 늘고 있다. 애완 고양이는 987만4000마리로 전년보다 줄었지만 감소 폭(0.9%)은 애완견보다 크게 작았다. 손이 많이 가는 애완견에 비해 애완 고양이는 생활 스타일이 독립적이어서 노령 인구와 독신자들이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협회 측은 “고양이는 산책도 필요 없고 비용 면에서도 부담이 적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 애완 고양이와 애완견 수의 격차는 2013년 113만 마리에서 2014년 38만 마리, 지난해 4만 마리로 급속히 줄었다. 올해는 애완 고양이 수가 애완견을 앞지를 것으로 보인다. 애완동물 업계에서는 애완 고양이 수요가 꾸준하다는 점을 감안해 가게 전면에 고양이를 배치하는 등 ‘대표선수’를 교체하는 곳도 늘고 있다. 애완동물이 정서적으로 고령자에게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강조해 눈길을 끌고 있다.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미국이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의 한반도 배치 필요성을 제기해 온 가장 큰 이유는 북한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미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한국에 주둔 중인 주한미군과 그 가족의 생명은 물론이고 미 본토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을 정도로 북한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군 수뇌부는 지난해부터 북한의 핵탄두 소형화 및 경량화 기술이 미 본토를 위협할 만큼 발전하고 있다고 경고해 왔다. 한동안 수면 아래에 잠겨 있던 사드 한반도 배치론이 워싱턴 정가에서 대세를 형성하게 된 계기는 6일 북한의 4차 핵실험이었다. 에드 로이스 미 하원 외교위원장은 11일 기자와 만나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수정이 불가피하다. 필요하면 한반도에 사드를 배치해 한미 양국을 지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도 13일 미 하원 청문회에서 “이제라도 한반도의 사드 배치 논의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미 정부에 촉구했다. 하지만 중국은 요지부동이다.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29일 정례 브리핑에서 “중국 정부는 유관 국가(한국)가 (사드 배치 문제를) 신중하게 처리하기를 희망한다”며 사드 한반도 배치 가능성에 대해 강하게 경계했다. 사드 한반도 배치가 현실화될 경우 지난해 9월 박근혜 대통령이 국제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무릅쓰고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 참석해 가며 다져 놓은 한중 관계가 어느 정도 금이 갈 것으로 우려된다. 실제로 중국 관영 매체들은 연일 ‘사드 배치 불가론’을 외치고 있다. 관영 환추(環球)시보는 27일자 사설에서 “사드를 배치해 중국을 압박한다면 중국의 안전 이익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며 “한국이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대가를 치를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강력 경고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은 4차 핵실험에 뒤이은 북한의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나카타니 겐(中谷元) 방위상은 예정돼 있던 오키나와(沖繩) 방문 계획을 취소한 채 도쿄에서 비상 대기 중이다. 나카타니 방위상은 북한 탄도미사일이 궤도를 이탈해 일본 영토에 떨어질 가능성에 대비해 자위대에 ‘파괴조치 준비명령’을 내렸다. 이미 이지스함을 북한과 가까운 해역에 배치해 요격 태세를 갖췄다.워싱턴=이승헌 ddr@donga.com /베이징=구자룡 /도쿄=장원재 특파원}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이번 필리핀 국빈 방문은 지난해 6월 일본을 국빈 방문한 베니그노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의 강한 요청으로 이뤄졌다. 아키노 대통령은 어머니인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과 함께 1986년 일본을 찾아 일왕을 만난 인연이 있다. 하지만 일왕의 일정을 보면 이번 방문은 아키노 대통령과의 만남보다는 태평양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목적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4월 팔라우 방문의 ‘후속편’인 셈이다. 당시 일왕은 비행기를 타기 전 “태평양에 떠 있는 아름다운 섬들에서 이렇게 슬픈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현지에 도착해선 미국과 일본 위령비에 모두 헌화했다. 일본에서 일왕이 외국을 방문하는 것은 연 1회 정도에 불과하다. 올해 83세로 고령인 일왕의 경우 2014년에는 아예 해외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전후 70년을 맞은 지난해부터 다시 제2차 세계대전 격전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번 필리핀 방문 배경에 대해 공보 담당인 다카시마 하쓰히사(高島肇久) 외무성 참여(자문역에 해당)는 “전쟁은 되풀이돼선 안 되며 이에 대해 강한 감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왕이) 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일본 언론은 이번 방문을 ‘위령의 여행’이라고 부르고 있다. 태평양전쟁에서 희생된 필리핀인은 111만 명, 일본인은 51만8000명에 이른다. 일왕의 행보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우경화 행보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나온다. 일왕은 공식석상에서는 처음으로 지난해 8월 15일 열린 전몰자 추도식에서 “깊은 반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12월 생일 기자회견에서는 “과거 전쟁에 대한 것을 충분히 알고 깊이 생각하는 것이 일본의 장래에 지극히 중요하다”고 말했고 민간인 희생을 언급할 때 감정이 고조돼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일왕의 이번 방문에 대해 필리핀 언론은 호의적인 편이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만찬이 열리는 대통령궁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일왕과의 접견을 요구했다. 이들은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국가 배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과의 경제협력을 우선시하는 아키노 대통령은 지난해 일본 방문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노력을 평가한다는 반응을 보여 피해자들의 분노를 샀다. 피해자 단체인 ‘릴라 필리피나’에는 위안부 피해자 174명이 등록돼 있었으나 지금은 고령으로 104명이 사망해 70명이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귀국(貴國·필리핀) 내에서 일본과 미국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귀국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다쳤습니다. 우리 일본인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며, 이번 방문에서도 이것을 깊이 마음에 두고 하루하루 여정을 보낼 생각입니다.”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27일 마닐라 대통령궁에서 열린 베니그노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과의 만찬에서 과거 일본의 잘못을 기억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고 28일 일본 언론이 전했다. 현직 일왕으로는 최초로 필리핀을 방문한 그는 이 자리에서 “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 세대가 전쟁에 대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아키노 대통령은 “1962년 일왕이 왕세자 신분으로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필리핀 국민들이 과거에 경험한 아픔을 생각하면 나를 어떻게 맞아줄지 불안했다’고 말했다”는 옛 일화를 들어 화답했다. 이날 만찬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얘기도 나왔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헤르미니오 콜로마 필리핀 대통령궁 대변인은 “아키노 대통령과 일왕이 일본군 50만 명의 유해를 일본으로 송환하는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고 밝혔다. 만찬이 열리는 동안 대통령궁 앞에서는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의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일왕은 이날 마닐라에 있는 ‘무명전사의 묘’를 찾아 전쟁에서 희생된 필리핀인들에 대해 2분가량 고개 숙여 애도를 표했다.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일본의 헤이트스피치(혐오 발언)가 위험한 이유는 제노사이드(집단 학살)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자크 리타 유엔 소수자문제특별보고관(사진)은 25일 일본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 구 변호사회관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인간의 존엄을 부정하는 헤이트스피치를 막기 위한 법적 규제가 필요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자크 보고관은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 권리가 아니다. 국제법에 따라 제한돼야 한다”며 일본 정부의 대응을 촉구했다. 현재 혐오 시위 규제 법안이 일본 국회에 제출돼 있지만 집권 자민당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며 법안 처리에 협조하지 않고 있다. 그는 “‘○○인은 바퀴벌레’라는 식의 발언이 거듭되면 점차 상대를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고 죄의식 없이 상대 집에 불을 지르게 된다”고 말했다. 또 “인권 교육을 강화하고 전담 독립 기관을 설치해야 한다. 여론 지도층은 혐오 발언을 단호히 배격한다는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연 후 기자와 만난 이자크 보고관은 전날 도쿄 시내 한류타운인 신오쿠보(新大久保)를 방문했다면서 “재일 한국인 아이들이 이지메(집단 따돌림)를 당한다는 말에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행사에 참석한 기타무라 사토코(北村聰子) 변호사는 “일본은 1923년 간토대지진 때 유언비어 때문에 한국인을 학살한 경험이 있다”며 “1910년 한일병합 후 생긴 차별 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전했다. 오타 다케요시(大田健義) 변호사는 “최근 자민당 의원이 ‘위안부는 직업 매춘부’라고 말한 것도 혐오 발언의 일종”이라고 비판했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피해자는 물러서게 해놓고 돈 몇 푼에 입을 막으려 해? 절대로 안 되지. 너무 분하다. 왜 이렇게 잘못된 합의를 했는지 알고 싶어 왔다.”(이옥선 할머니·90세) “고생한 우리를 빼놓은 채 합의를 할 수 있는가. 일본 정부는 우리가 죽기만 기다린다. 일본 국민은 잘못 없어. 아베가 무릎 꿇고 사죄해!”(강일출 할머니·89세) 26일 일본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 구 중의원 제1의원회관에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지난해 12월 28일 한일 정부의 합의를 규탄하고, 70여 년 전 고통스러운 과거를 생생하게 증언했다. 두 할머니는 열여섯 나이에 울산과 경북 상주에서 각각 끌려가 중국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광복 후 중국에 살다 1999년과 2000년에 영구 귀국했다. 부산이 고향인 이 할머니는 “돈이 없어 학교도 못 갔다.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할 때 심부름 갔다가 돌아오는데 남자 둘이 앞뒤로 서더니 아무 말 없이 팔을 한 쪽씩 붙잡고 끌고 갔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위안부는 사람도 아니었다. 매일 맞고, 찢기고, 피를 흘렸다. 도망가니 건방지다고 다리를 칼로 찍었다.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남아 있다”며 팔을 걷어 상처를 보였다. 이어 “우리가 말하는 게 진짜 증언인데 일본 정부는 거짓말이라 한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냐”며 절규했다. 강 할머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비판했다. 그는 “아베 총리는 우리를 보러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왜 국민들에게 미루나. 일본 정부가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왜 아베가 나서서 사죄하지 않느냐”라고 소리쳤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 이전 문제에 대해서도 완강했다. “누구도 손 못 댄다. 왜 소녀상을 탓하고 외국에도 못 만들게 하느냐.”(이 할머니) “우리를 죽여 놓을지, 소녀상을 없앨지 둘 중 하나로 말하라.”(강 할머니) 할머니들과 함께 일본을 방문한 안신권 ‘나눔의집’ 소장은 “소녀상은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일본 국회의원을 통해 아베 총리 면담도 신청할 것”이라고 했다. 기자회견 후 할머니들은 같은 건물에서 300여 명의 일본 시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당시 경험을 증언했다. 이 할머니는 “하루 24시간 40∼50명을 어떻게 접대하겠는가. 거절하면 죽였다. 위안소가 아니라 사람 잡는 도살장, 사형장이었다”고 했다. 강 할머니는 “강제로 끌려가면서 맞은 흔적”이라며 모자를 벗고 머리에 난 흉터를 보였다. 또 “우리가 바보인가. 오늘 정부에서 아무도 안 왔다. 너무한 것 아니냐”며 “사죄를 하려면 똑바로 해야 한다. 이번 사죄는 무효”라고 강조했다. 행사에 참석한 쓰루오카 히로코(鶴岡紘子·38) 씨는 “증언을 들으면서 피해자 동의 없이 합의한 양국 정부에 분노했다”며 “과거를 제대로 알아야 앞으로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중국과 일본의 정부와 중앙은행이 올해 안에 경제·금융 문제를 논의할 협의체를 출범시키기로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26일 중일 두 나라는 3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양국 각료급 인사들이 참가하는 고위급 경제대화를 열고 협의체 창설 문제를 논의한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양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정기적으로 대화하는 틀을 만드는 것은 처음”이라고 전했다. 일본에서는 외무성 재무성 경제산업성 내각부 일본은행이, 중국에서는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외교부 재정부 런민(人民)은행이 참여한다. 최근 경제 성장세가 주춤한 중국과 아베노믹스를 내세운 일본이 경제를 매개로 손을 잡는 모양새여서 한국이 소외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중일 양국은 협의체에서 새로운 틀에서 5년을 내다보는 협력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가장 큰 관심사는 중일이 통화스와프 협정을 다시 체결할지 여부다. 통화스와프는 비상 경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통화를 서로 빌려줘 금융시장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양국은 2002년 3월 협정을 체결했다가 2012년 센카쿠(尖閣) 열도 국유화로 관계가 나빠지면서 2013년 9월 협정이 중단됐다. 통화스와프 협정이 재개되면 중국은 경제위기 우려를 덜 수 있고, 일본은 중국발 경제위기로부터 자국을 보호하고 세계 경제에도 공헌했다는 점을 내세울 수 있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일본 집권 자민당이 26일 한국 정부에 주한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의 조기 철거를 요구하라고 자국 정부에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지지통신에 따르면 자민당 외교부회와 외교·경제연계본부 등은 이날 합동회의를 열고 “(소녀상은) 재외 공관의 안녕과 존엄을 해치는 것”이라며 “조기에 철거하도록 한국 측에 요청해야 한다”고 정부에 요구하기로 했다. 이날 채택된 결의안에는 “(지난해 말 이뤄진) 일한 양국의 합의를 강력히 지지한다”는 전제가 붙었지만 상당 부분은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를 좀 더 압박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한국 정부가 설립할 위안부 지원 재단에 일본이 내기로 한 10억 엔(약 102억 원)에 대해서는 “진정한 목적에 부합하도록 한국 정부와 진지하게 협의하고 일본 국민에게 설명할 책임을 다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한국의 역사 인식에 대해 “사실과 다른 경우 정정을 요구하라”는 문구도 들어갔다. 강제 징용 문제에 대해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주장을 계속할 것”을 요구했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20일 일본 도쿄(東京) 아카사카미쓰케(赤坂見附)에 있는 가전매장 빅카메라 5층. 캡슐커피머신을 파는 매장에 들어서자 흰색 로봇인 ‘페퍼’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고는 팔을 벌리며 “멋진 선물을 주는 게임을 같이하지 않을래요”라고 물었다. 가슴에 달린 터치패드를 눌러 승낙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반가움도 표시했다. 터치패드에 나온 퀴즈에서 정답을 고르니 두 팔을 휘저으며 “멋지다”고 감탄한 페퍼는 다양한 커피머신을 소개했다. “저는 로봇이라서 커피를 못 마시는 게 답답하다”며 ‘투정’ 부리는 모습은 마치 공상과학영화에 나오던 로봇처럼 자연스러웠다. 페퍼는 IBM의 인공지능(AI) 소프트웨어인 ‘왓슨’을 탑재해 인간의 감정을 학습하고 자신의 감정도 표현할 수 있다. 지난해 6월부터 판매된 소프트뱅크의 서비스 로봇 페퍼는 한 대에 19만8000엔(약 206만 원). 여기에 클라우드서비스(외부 서버에 저장된 정보를 주고받는 서비스)와 보험을 합하면 3년간 한국 돈으로 1000만 원 이상 든다. 하지만 만들기가 무섭게 매달 1000대가 팔려 나갈 정도로 인기다. 커피 주문을 받고, 은행 점원이나 결혼식 들러리 역할, 노인들의 말벗도 되어 준다. 융합기술의 결정체인 AI 기술이 인간의 삶 속으로 성큼 다가서고 있다. 페퍼와 같이 로봇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쓰는 구글의 G메일 등까지 적용되면서 관련 시장이 연간 20%씩 성장하고 있다. 과거 꿈으로만 여겨졌던 일들이 최근 사물인터넷(IoT)과 클라우드서비스 등 다양한 정보통신기술(ICT) 분야가 융합하면서 현실화하고 있다. ○ 일상으로 들어온 AI 기술 현재 AI 분야에서 가장 앞선 기술을 갖춘 기업은 미국 IBM이다. IBM의 왓슨은 이미 2014년 1월 상용화돼 36개국에서 의료 금융 스포츠 분야 등 100여 개 기업이 사용하고 있다. 일상에서 AI 기술이 적용된 사례는 구글의 G메일이다. 구글은 AI 기술을 적용해 스팸메일의 99.5%를 걸러낸다. 스팸메일을 걸러내는 기존의 방식이 특정 단어나 기호가 있는 메일을 막는 ‘규칙형’이라면 현재는 사용자들이 스팸으로 처리한 메일의 형태를 분석해 스스로 학습해 진화하는 AI의 한 종류인 ‘딥 러닝’ 방식을 활용한다. 이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데이터가 축적돼 스팸메일을 걸러내는 정확도는 높아진다. 중국의 인터넷 기업인 바이두의 자율주행차 팀도 지난해 AI 기술을 이용해 베이징(北京) 도로에서 총 30km를 운전자 없이 주행했다. 김재필 KT경제경영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국내에서 가장 앞선 삼성전자가 AI 스타트업을 수백억 원을 투자해 인수했지만 미국 중국의 정보기술(IT) 업체들이 수조 원씩 쓰는 것에 비하면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패스트 팔로’ 전략 어려워져 AI는 지난 수년간 IoT와 클라우드(Cloud) 기술, 빅데이터(Big data) 모바일(Mobile) 분야를 통칭하는 이른바 ‘ICBM’ 기술이 성숙 단계에 접어들면서 현실화가 가능해졌다.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저장 분석하는 기술이 급속히 발전해 서로 융합되면서 기계가 스스로 학습하고 판단과 추론까지 할 수 있게 됐다. AI 분야의 특징은 축적된 데이터에 따라 기술과 서비스 수준이 크게 좌우돼 선발자를 따라잡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데이터가 쌓일수록 AI는 더욱 영리해지고, 이미지나 음성 인식률은 높아진다. 서비스가 좋아져 이용자가 늘면 데이터가 더욱 축적돼 다른 회사와의 기술 격차가 커진다. 먼저 진출한 글로벌 IT 대기업들의 ‘승자 독식’ 현상이 가속화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한국 기업이 과거 ‘패스트 팔로(빠른 추격자)’ 전략으로 스마트폰이나 자동차 분야에서 성공을 거뒀을 때와는 산업 구조가 달라진 셈이다. 차원용 아스팩미래기술경영연구소장은 “구글의 자율주행차가 지난해까지 280만 km를 주행한 것은 도로 상황 데이터를 축적해 자율주행차의 AI를 학습시키기 위한 것”이라며 “대규모 데이터를 확보할 수 없는 한국 기업들은 불리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현대차의 도로 실제 주행거리는 5km에 불과하다. ○ 장기적인 정부 지원 필수 미국이 AI 분야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장기적인 투자 덕분이었다. 미 국방부 산하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2008년부터 AI 칩 개발에 나섰다. 뇌과학 분야를 선점하겠다는 ‘브레인 이니셔티브’를 내세운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매년 AI 분야의 예산을 늘리고 있다. 유럽연합(EU)과 일본, 중국도 AI 분야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책을 내놓고 있다. 국내 벤처기업들은 한국 정부도 AI 분야에서 장기적인 투자 기반을 조성하는 정책을 내놔야 한다고 조언한다. AI 기술로 의료데이터를 분석하는 ‘뷰노’의 김현준 이사는 “투자를 받으면 당장 성과와 이익을 내라고 압박하는 한국 분위기에서 장기적인 연구가 필요한 AI의 원천기술을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한편 AI 기술의 발전으로 일자리가 사라지고, 판단하기 어려운 가치와 관련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상진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AI 기술이 해킹 범죄나 사이버 전쟁에 활용될 가능성도 있어 이에 대한 고민과 대비책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세진 mint4a@donga.com·곽도영 기자/ 도쿄=장원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