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법원 “범죄자라도 ‘잊혀질 권리’ 있다” 첫 인정…논란 예상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28일 15시 55분


코멘트
법을 어겨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범죄자라도 ‘잊혀질 권리’가 있으며 사생활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판결이 일본에서 나와 논란이 일고 있다.

일본 사이타마 지방법원은 지난해 12월 원조교제를 한 남성이 자신의 체포에 관한 인터넷 기사와 게시물 등을 삭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이는 판결을 내렸다고 28일 교도 통신 등이 보도했다. 교도통신은 “인터넷상에 남아 있는 개인정보를 ‘잊혀질 권리’로 인정해 삭제를 인정한 것은 일본에서 처음”이라고 전했다.

이 남성은 2011년 여고생과 원조교제를 한 혐의로 체포됐으며 매춘 및 아동 포르노 금지법 위반으로 50만 엔(약 550만 원)의 벌금을 냈다. 일본에서는 미성년자가 아닌 이상 범죄 혐의가 있는 단계부터 실명을 보도하는 것이 원칙이어서 그의 실명과 대략적인 주소가 언론 에 보도됐다. 인터넷 게시판 등에 기사가 퍼졌고 누구나 구글로 검색할 수 있었다.

이 남성은 지난해 “잘못을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하는데 지장이 크다. 인격권을 침해했다”며 기사 등 삭제 가처분 신청을 냈고 같은 해 6월 사이타마지방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대해 구글이 취소 소송을 제기하자 법원은 지난해 12월 “범죄의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어느 정도 기간이 경과한 후에는 과거의 범죄가 사회로부터 ‘잊혀질 권리’가 있다”며 삭제를 명령했다.

고바야시 히사키(小林久起) 재판장은 “체포 사실이 보도되며 사회에 알려진 사람도 사생활이 존중돼야 하며 재생을 방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판시했다. ‘표현의 자유와 이용자의 알 권리’를 주장하며 맞서 온 구글은 판결에 대한 의견을 내지 않고 항소했다. 교도통신은 “현재 해당 남성의 체포 기록은 검색되지 않는 상태”라고 전했다.

인터넷상의 ‘잊혀질 권리’를 둘러싼 논쟁은 일본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진행 중이다. 유럽사법재판소(ECJ)는 2014년 자신의 빚 문제와 재산 강제 매각 사실이 언급된 기사의 링크를 삭제해 달라는 스페인 변호사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한국은 일본과 달리 범죄 혐의자의 실명을 제한적으로만 보도하기 때문에 범죄자의 잊혀질 권리를 둘러싼 논쟁이 적은 편이다. 성범죄자의 경우 판결에 따라 최대 10년 동안 이름, 주소 등의 신상을 공개하고 있지만 네티즌이 이를 다른 게시판에 퍼 나르거나 언론이 보도하는 것은 금지돼 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선 ‘잊혀질 권리’를 인정한 판례가 없다. 2013년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에 연루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 당시 변호인단이 “탈퇴한 트위터 계정의 정보를 당사자의 동의 없이 빅데이터 업체가 수집해 보관하는 건 ‘잊혀질 권리’를 침해한다”고 주장했지만 이와 관련한 구체적 법률이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법원에 따르면 범죄자가 언론 보도의 사실 여부를 두고 소송한 적은 있지만, 보도가 사실인데도 잊혀질 권리를 주장하며 기사를 지워달라고 소송을 한 판례는 없다.

인터넷 흔적 삭제 전문 업체인 산타크루즈캐스팅컴퍼니 김호진 대표는 “누리꾼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쓴 글은 당사자가 타당한 사유를 들어 요청하면 포털 등 서비스업체들이 삭제해주고 있다”며 “일부 의뢰인은 언론 기사도 지워달라고 요청하지만 언론사가 자발적으로 지워주지 않는 한 삭제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잊혀질 권리가 세계적 추세인 만큼 대법원 내부에서도 외국 판례 등을 연구하며 활발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최근 방송통신위원회는 일반인의 ‘잊혀질 권리’를 보장하는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있으며 삭제 범위와 주체 등에 대해 논의가 진행되고 되고 있다.

도쿄=장원재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조동주기자 djc@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