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균형 등 경제외적 판단… 정치 외풍에 재정 건전성 악화 우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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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타 제도 20년만에 전면 개편]


기획재정부가 3일 내놓은 예비타당성조사(예타) 제도 개편 방안은 정부가 각종 재정 투입 사업의 권한을 틀어쥐고 속도를 내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사업 시작 여부를 결정하는 평가의 문턱을 대폭 낮출 뿐 아니라 최종 결정권도 기재부 산하 재정사업평가위원회에 두기로 함으로써 정부 곳간을 활짝 개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재부는 “공정하게 평가하겠다”지만 정작 공정성을 확보할 장치는 마련하지 않아 정치권의 입김에 휘둘리기 쉽다는 우려도 있다.

○ 기재부에 예타 승인권한 집중

예타는 1999년 제도 도입 이후 재정 낭비를 막는 안전판 역할을 했다. 반면 지방자치단체들은 남부내륙철도, 신분당선 광교∼호매실 연장 등 숙원 사업의 발목을 잡는다는 불만을 쏟아냈다. 최장 3년까지 걸리는 조사기간도 사업 시행의 걸림돌로 지목됐다.

예타 제도 개편이 수면으로 떠오른 것은 경기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 올 1월 23개 지역사업에 예타를 면제하면서부터다. 2월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 균형발전을 위해 예타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힘을 보탰다.

이날 발표된 제도 개선 방안의 핵심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담당했던 경제성, 정책성, 균형발전분석 중 정책성, 종합평가 부문을 떼어내 기재부 내 재정사업평가위원회 분과위원회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분과위에 정치권이나 정부 입김이 작용할 위험이 높다는 점이다. 분과위는 민간위원으로 구성되지만 위원은 정부가 선임한다. 종합평가 결과를 최종 심의, 의결할 재정사업평가위원회에도 정부 인사가 다수 포함된다. 기재부 2차관이 평가위원장을 맡고 국토교통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해양수산부 등 관계부처 실장들이 당연직으로 참석한다. 기재부 연구용역을 주로 수행하면서 정책 코드를 맞춰 온 조세재정연구원에 경제성 분석 기능을 나눠준 점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바뀐 예타 제도 아래서는 경제성 부족으로 통과가 어려웠던 비수도권 광역시도 지역사업이 좀 더 수월하게 승인될 것으로 보인다. 비수도권은 종합평가에서 불리했던 경제성 비중을 축소(30∼45%)하고 수도권보다 유리한 균형발전평가 비중을 강화(30∼40%)하기 때문이다. 수도권 사업은 균형발전평가를 없애고 경제성 비중(60∼70%)을 높였다. 수도권 사업에 유리한 경제성 비중이 높아지고 불리한 균형발전평가가 없어져 오히려 유리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 정부는 “경제성 평가 결과가 사업시행 기준에 근접한 일부 수도권 사업에는 유리할 수 있다”면서도 “실제 시뮬레이션 결과 사업 시행 여부가 바뀌는 사업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지역 낙후도’ 감점 제도도 없어진다. 이에 따라 그동안 주변 시군보다 낙후하지 않아 평가에서 감점을 받았던 지방 광역시가 유리해졌다.

○ 지자체 일제 환영… 정치권 민원 프리패스 우려도



지역과 정치권에서는 이번 예타 제도 개편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울산시 관계자는 “전국시도지사협의회 등 지자체장 모임이나 중앙정부와 만나는 공식 석상에서 예타 제도 개선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냈다”면서 “지금까지 비수도권은 경제성 평가를 통과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대전시와 충남도 등도 “경제성 평가 비중이 줄면서 예타에서 유리해졌다”면서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반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역별로 민원이 쏟아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균형발전을 이유로 지역 사업을 대거 승인해줄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정부도 “이번 개편으로 가장 혜택을 많이 보는 곳은 대구 대전 부산 등 지방 거점도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제도 개편으로 지역균형 발전엔 어느 정도 도움이 되겠지만 재정건전성의 보루 역할을 하던 ‘안전핀’이 빠질 수도 있다는 지적을 내놓는다. 지금까지 예타 심사는 재원 조달 가능성 등 사업성이 주요 평가 기준이었다. 하지만 ‘정책효과’ 항목이 새로 만들어지며 주민 생활여건 영향, 안정성, 환경성 등의 사회적 가치가 평가 항목에 포함됐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항목들이 평가 기준에 포함되면서 지역 정치인과 정부의 민원성, 선심성 사업이 여과 없이 통과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예타가 형식적 절차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개편안과 함께 국회에 계류 중인 국가재정법 개정안까지 통과되면 500억∼1000억 원의 중(中)규모 사업을 통제할 수단까지 일거에 사라진다는 관측이 적지 않다. 개정안은 현재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인 예타 대상 사업 기준을 1000억 원 이상으로 올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이날 성명에서 “혈세 낭비를 중단하고 예타를 통과하고도 실패한 사업들의 문제점을 분석하라”며 “건설·운영비로 수십 년간 국가 예산을 필요로 해 국가 미래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총선을 염두에 두고 지역 사업 통과 가능성을 높여 기대감을 갖게 하려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세종=최혜령 herstory@donga.com·송충현 기자
#예비타당성조사 제도 개편#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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