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신석호]워싱턴에서 종이 없이 살아가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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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호 워싱턴 특파원
신석호 워싱턴 특파원
지난달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박원순 서울시장은 특파원단과 만나 “각종 보고서와 자료를 모아서 3공 파일로 묶는 일이 낙이요 즐거움”이라고 했다. 박 시장의 이날 발언 가운데 가장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다. 나 역시 서울에서 그랬기 때문이다.

2002년 가을 북한 공부를 시작한 뒤부터 논문 작성에 도움이 될 만한 기사와 자료를 A4용지에 출력해 주제별로 3공 파일에 끼우는 일은 작은 행복이었다. 2005년부터 2년 동안 잠시 취재 현장을 떠나 있을 때 사무실 책장에 꽂아 놓은 ‘특대형 3공파일’은 족히 30권은 될 것 같다. 2008년부터 통일부와 외교부를 출입하면서 각종 보도자료와 북한 정보 등을 모아서 책을 쓰는 데 활용했다. 종이 덕분에 일도 공부도 잘했다.

하지만 2012년 12월 워싱턴 특파원으로 부임한 뒤 지금까지 종이와는 사실상 결별 상태다. 업무 환경 자체가 ‘페이퍼리스 스타일(paperless style)’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매일 많은 양의 영문 텍스트를 읽어야 하기 때문에 솔직히 모든 자료를 출력해서 빨간 펜으로 중요한 내용에 줄을 그을 여유가 없다. 보통 컴퓨터로 읽다가 기사가 되는 부분은 문서 프로그램에 ‘복사해서 붙이기’를 한 뒤 직접 번역한다.

기사를 쓰기 위해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과 크리스토퍼 힐 전 6자회담 수석대표 등이 쓴 몇 권의 회고록을 샀지만 대부분 아마존의 킨들 프로그램으로 보는 e북들이다. 종이 책이 싫거나 비싸서가 아니고 오로지 속보 경쟁 때문이다.

종이 책은 출간일 오전 9시(한국 시간 오후 10시)에나 서점에 나오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편집국의 초판 마감시간 전에 기사를 보낼 수가 없다. 사전 구매한 e북은 출간 당일 0시(오후 1시)에 컴퓨터로 도착한다. 졸린 눈을 부비며 밤새 읽어야 한다. 하루 일찍 기사를 보내려면 어쩔 수가 없다.

초판 기사 송고를 마치는 오전 4시쯤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 종이신문이 집 정문 현관 앞으로 배달되지만 기사 송고에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이 유력지들은 종이 신문 1면에 실릴 단독 기사들을 통상 전날 오후 5시 이후에 온라인판에 미리 올린다. 나중에 받아 보는 종이 신문은 구문에 가깝다.

미국 사회 자체도 종이 사용에 너그럽지 않은 것 같다. 워싱턴 싱크탱크들이 여는 세미나에 가보면 종이로 된 유인물은 발표자 약력 정도가 고작이다. 우리처럼 발표문까지 출력해 나눠주는 인심 좋은 곳은 거의 없다. 세일 기간 월마트에 가면 가정용 프린터를 싸게는 30달러(약 3만2000원)에 살 수 있다. 하지만 잉크와 인쇄용지는 한국보다 몇 배나 비싸다.

한국에선 이번 국정감사를 앞두고 정부가 자료 복사 비용으로 40억 원을 썼다는 기사를 읽었다. 문득 종이와 결별할 수밖에 없었던 워싱턴 생활이 머릿속을 스치면서 한국의 의원님들처럼 아직 누군가가 출력해준 종이 보고서를 받아보는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종이 사용이 낭비는 아니다. 박 시장이 만든 3공 파일들에서는 정책도 나오고 책도 나올 것이다. 하지만 종이 국감자료는 대부분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고 하니 일회용 의전을 위해 국민 세금을 불사르는 일이다. 언제부턴가 정부는 기자들에게 국감자료를 CD에 담아 전달해왔다. 우리 의원님들도 ‘종이 없는 국감’을 해볼 용의는 없는가.

신석호 워싱턴 특파원 kyle@donga.com
#박원순 서울시장#종이#페이퍼리스 스타일#국정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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