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건영통신원의 네버엔딩스토리] 윤석민 새 둥지 볼티모어 쇼월터 감독은 ‘리빌딩의 달인’

  • 스포츠동아
  • 입력 2014년 2월 19일 07시 00분


■ 쇼월터의 오뚝이 같은 야구인생

비운의 선수시절 딛고 36세때 양키스 사령탑
젊은피 수혈 성공…AP선정 ‘올해의 감독상’
다이아몬드백스도 리빌딩 성공…100승 견인
오리올스 맡은 후 ‘14년간 승률5할 실패’ 깨
팀 재건 1인자 입증…2018년까지 연장 계약


류현진(27·LA 다저스)에 이어 2번째로 한국프로야구에서 메이저리그로 직행을 추진한 윤석민(28)의 볼티모어 오리올스 입단이 18일(한국시간) 공식 확정됐다.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소속의 오리올스는 3차례(1966·1970·1983년) 월드시리즈를 품에 안았고, 리그 정상은 6번 차지했다. 그러나 같은 지구의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기세에 밀려 1998년부터 14년 연속 승률 5할에 미치지 못하는 암흑기도 겪었다. 2632연속경기 출전 기록을 세운 ‘철인’ 칼 립켄 주니어가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남아있는 오리올스는 명장 벅 쇼월터(58)에게 지휘봉을 맡긴 이후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을 조금씩 재현하고 있다. ‘리빌딩의 달인’으로 알려진 쇼월터 감독의 오뚝이 같은 야구인생을 살펴보자.

● 원리원칙주의자

쇼월터 감독은 선수의 몸값이나 명성에 의존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텍사스 레인저스 감독으로 부임한 첫 해인 2003년 쇼월터 감독은 애너하임 에인절스와의 개막전 선발투수로 박찬호를 지목했다. 바로 전해, 당시 투수로는 최대 규모인 5년 6500만달러라는 초특급 대우로 레인저스에 입단한 박찬호는 부상에 시달리며 9승8패(방어율 5.75)에 그쳤지만, 에이스 예우 차원에서 투입한 것이다. 그러나 박찬호는 2.2이닝 동안 6실점하며 고개를 숙였다. 4월 한 달 동안 6경기에 선발로 나선 박찬호는 1승3패(방어율 7.16)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부상자명단에 올랐다. 그해 박찬호가 다시 마운드에 오른 것은 6월 8일 몬트리올 엑스포스전이 유일했다. 그 경기마저 2이닝 4실점(3자책)으로 조기에 강판당해 일찌감치 시즌을 접었다. 이후 쇼월터 감독은 박찬호에게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쇼월터 감독은 1956년 5월 23일 플로리다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23년간 고교 교사와 교장으로 근무했다. 대학 시절 풋볼선수로 명성을 떨쳐 피츠버그 스틸러스의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지만, 안정된 가정을 꾸려나가기 위해 운동선수 대신 교직을 택했다.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쇼월터 감독의 대쪽같은 스타일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 비운의 선수생활

치폴라주니어칼리지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인 쇼월터는 야구 명문 미시시피주립대로 옮긴 뒤 전미 올스타에 뽑히며 스타덤에 올랐다. 특히 1977시즌 타율 0.459로 팀 역사상 최고 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메이저리그 신인드래프트 5라운드에서 양키스에 뽑혔지만 빅리그의 장벽은 매우 높았다. 마이너리그에서 타율 0.297, 17홈런, 336타점을 올렸지만 메이저리그 무대를 전혀 밟아보지 못하고 은퇴해야 했다. 그의 앞길을 가로막은 선수는 현재 LA 다저스의 감독을 맡고 있는 돈 매팅리였다. 중장거리 타자로 명성을 떨친 매팅리와 달리 1루수 쇼월터의 배팅파워는 인상적이지 못했다. 무명선수 시절의 설움은 훗날 명지도자로 도약하는 밑거름이 됐다. 은퇴 후 양키스 산하 싱글A 감독을 맡아 2년간 114승이나 거두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1987년 포트로더데일 양키스 감독으로 85승63패를 기록하며 리그 1위를 차지했고, 1989년에는 더블A 최우수 감독까지 거머쥐며 양키스 구단 수뇌부의 눈에 띄었다.

● 30대 양키스 감독

1990년부터 양키스 코칭스태프로 합류하며 선수 시절 해내지 못한 메이저리그 입성의 꿈을 이룬 쇼월터는 불과 2년 만인 1992년 스텀프 메릴의 뒤를 이어 양키스 사령탑으로 임명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36세. 자타가 공인하는 메이저리그 최고 명문팀이었지만 양키스는 1981년 이후 포스트시즌 진출과 인연을 맺지 못하고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다. 1991년에도 71승밖에 거두지 못하자 양키스는 스타플레이어들을 무분별하게 영입하던 기존 방식을 버리고 진 마이클 단장과 30대인 쇼월터 감독에게 팀 재건 작업을 일임했다. 그 혜택을 본 선수가 버니 윌리엄스, 데릭 지터, 호르헤 포사다, 마리아노 리베라, 앤디 페티트 등이었다. 젊은 피를 수혈한 양키스는 1994년 승승장구를 거듭했지만 파업으로 시즌이 중단되면서 포스트시즌조차 무산됐다. 그러나 탁월한 지도력을 인정받은 쇼월터는 AP통신 선정 아메리칸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받았고, 이듬해 올스타전 지휘봉을 잡는 영예를 안았다. 양키스는 1995년 와일드카드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1981년 이후 14년 만의 가을잔치였지만, 디비전시리즈에서 시애틀 매리너스에 2승3패로 무릎을 꿇자 양키스는 쇼월터에게 결별을 통보했다. 후임 조 토리 감독이 이끈 양키스는 1996년부터 5년 동안 4번이나 월드시리즈 정상을 차지해 새로운 전성시대를 열었다.

● 팀 재건의 1인자

양키스와 재계약을 하지 못했지만 신생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쇼월터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2년간 조련 과정을 거쳐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다이아몬드백스는 첫 해인 1998년 65승(97패)을 거두며 실력차를 실감해야 했다. 이후 랜디 존슨, 아르만도 레이노소, 토드 스토틀마이어, 스티브 핀리 등 베테랑급 선수들을 수혈한 뒤 1999년 100승 고지에 우뚝 서며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디비전시리즈에서 마이크 피아자가 이끈 뉴욕 메츠에게 덜미를 잡혔다. 이듬해 기대와는 달리 85승에 그치자 쇼월터는 팀을 떠나야 했다. 공교롭게도 다이아몬드백스는 쇼월터가 떠난 후 봅 브렌리 감독이 창단 4년째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이라는 전대미문의 위업을 달성했다.

2년간 ESPN에서 해설가로 활약한 쇼월터는 2002년 10월 레인저스와 계약했다. 첫 해 71승을 거두며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꼴찌에 그친 레인저스는 간판스타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양키스로 이적시키며 새판 짜기에 나섰다. 그러나 레인저스에서 4시즌 동안 서부지구 4팀 가운데 3위에 그친 것이 최고였다. 쇼월터는 4년 만에 또 해고를 당했다.

쇼월터에게 오리올스가 손을 내민 것은 2010년 7월 30일. 후안 사무엘 전 감독의 뒤를 이은 쇼월터는 오리올스가 거둔 57승 중 34승을 책임지는 인상적 모습을 보였다. 2012년 5월 2일에는 개인통산 1000승을 따냈는데, 상대팀이 양키스여서 더욱 의미가 깊었다. 그해 93승을 거둔 오리올스는 14년 연속 이어져 온 ‘승률 5할 달성 실패’ 기록을 끊어내며 당당히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레인저스를 단판승부에서 제압한 뒤 양키스와의 디비전시리즈에서도 3승2패로 승리를 거둔 쇼월터는 생애 2번째로 아메리칸리그 최우수감독으로 선정됐고, 2018년까지 오리올스와 계약연장에 합의했다.

손건영 스포츠동아 미국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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