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민병선]1994와 1984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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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선 문화부 기자
민병선 문화부 기자
‘응답하라 1994’(응사)가 막을 내렸다. 드라마가 인기를 끈 이유는 뭘까? 아마도 지난 세월에 대한 향수 마케팅에 성공했기 때문인 것 같다. 제작진은 왜 하필 1994년에 주목했을까? 이때는 한국 현대사에서 주목할 만한 일들이 일어난 시기이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고 형식적 민주주의가 완성되며 우리 사회는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대학에서는 민중가요 대신 ‘서태지와 아이들’ 같은 대중문화가 득세하고 이전 세대에 비해 자유분방한 ‘X세대’란 용어가 등장했다. 경제는 활황이어서 대학생들은 취업 걱정이 없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사람들에게 이때는 정치적으로 자유로웠고 문화·경제적으로 윤택했던 인생의 ‘화양연화’ ‘호우시절’이었던 셈이다. 기자도 이때 대학을 다녔고 군복무를 마쳤다.

하지만 좋은 때는 딱 1997년까지다. ‘응사’의 전작인 ‘응답하라 1997’은 호시절의 마지막 기억인 셈이다.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겪으며 삶은 팍팍해졌다. 구조조정, 가족해체, 취업난 같은 낯선 말들이 삶을 짓눌렀다. 1994년 아련한 낭만의 자리는 생활전선의 치열함으로 대체됐다.

요즘 기자의 휴대전화는 ‘응답하라 1984’로 바쁘다. 지인들끼리 연락을 공유하는 애플리케이션인 ‘밴드’에 가입하라는 문자가 여기저기에서 온다. 대학, 고교, 중학교 등 주로 학교 동창회가 밴드의 주류다. 1990년대 유행하던 인터넷 모임 ‘아이러브스쿨’의 모바일 버전인 셈이다. 여러 모임 중 제일 애착이 가는 데는 초등학교 동창회. 기자가 다닌 시골 초등학교는 1984년 6학년이 120여 명밖에 안 되는 작은 학교였다.

‘응사’의 ‘삼천포’ ‘쓰레기’ ‘빙그레’ ‘칠봉이’처럼 기자는 동창들을 별명으로 기억한다. 칠칠이, 꽁치, 멍멍이, 짠지, 곰땡이…. 아마 친구들도 나를 이름보다 ‘병아리’란 별명으로 기억할 것 같다. 그런데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잠시 둘러본 초등학교 방에는 익숙한 별명 대신 낯선 이름들이 있었다. 개명한 동창들이었다. 종순이는 현정이로, 정자는 정하로, 현순이는 서현이로 이름을 바꿨다. 금철이도 의정이가 됐다. 보험회사 영업사원인 의정이에게 금철이란 촌스러운 이름은 영업에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바뀐 이름들에서 이들이 겪은 지난 세월의 어려움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다. 친구의 인생도 1994년과 1997년을 통과하며 우여곡절을 겪었겠지.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고치고 싶었을 만큼 인생은 신산들로 얼룩졌겠지. 1984년의 추억을 떠올리는 밴드에서조차 개명한 이름을 쓰는 걸 보면…. 이들의 지나온 삶이 곧 한국의 현대사인 셈이다.

초등학생 때 기자가 “이름이 촌스럽다”며 놀렸던 여자 동창들이 있었다. 이들 중 몇몇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연락이 닿지 않는다. 1994년에 대학은 다녔는지, 1997년에 남편이 실직하지는 않았는지…. 이름은 바꿨는지 혹은 그대로인지…. “응답하라! 춘자야, 숙향아….”

민병선 문화부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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