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룡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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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9월 18일 07시 00분


김응룡 감독. 스포츠동아DB
김응룡 감독. 스포츠동아DB
■ ‘실향민’ 김응룡 감독의 추석 나기

“통일 되면 고향집 바로 찾을 것 같아
명절마다 야구하는 게 그나마 위안”


“죽기 전에 꼭 한번은 가보고 싶은데….”

한화 김응룡 감독(사진)은 실향민이다. 6·25를 겪었고 1·4후퇴 때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미처 넘어오지 못한 어머니, 형제들과 생이별을 했다. 김 감독의 나이 열 살 때 일이었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이산가족’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살아온 지도 어느덧 60여 년. 강산이 6번이나 바뀔 만큼 긴 시간이 흘렀지만, 김 감독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변함이 없다. 일가친척이 한데 모이는 한가위가 되면 북에 남겨두고 온 가족이 더 보고 싶어진다. 김 감독은 “실향민이라는 게 원래 명절 때 쓸쓸하고 외로운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래도 죽기 전에는 꼭 한번 고향에 가고 싶은데…”라며 먼 산을 바라봤다.

김 감독의 고향은 평양 인근인 평안남도 평원군이다. 어릴 때 뛰놀던 동네, 가족과 함께 오순도순 모여 살던 집이 모두 손에 잡힐 듯 눈에 선하다. 김 감독은 “열 살 때 내려왔으니까 생생히 다 기억난다. 만약 통일이 돼서 고향에 가게 되면 집은 바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웃고는 “그런데 산소가 어디 있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난다. 아버지 따라서 산소를 갔던 기억은 있는데 거기가 어디인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세월은 야속하게도 전광석화처럼 흘러버렸고, 기억도 조금씩 지워져가고 있다.

김 감독은 해태 사령탑을 역임하면서 한국시리즈 우승 9번을 일궈낸 명장이다. 이후 삼성 감독과 사장을 거쳐 올해 한화 감독을 맡고 있다. 그러나 평소 생활은 ‘과연 프로야구 최초 1500승을 일궈낸 감독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검소하다. 김 감독의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화가인 첫째 딸 혜성 씨와 음악가인 둘째 딸 인성 씨도 각자 분야에서 성공을 거뒀지만 ,‘사치’라는 단어는 모르고 산다. 김 감독은 이전 스포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딸들이 미국에 있을 때 오랜만에 만나 옷을 좀 사주려고 했더니, 백화점에서 100불(달러)짜리 옷을 만지작거리다 결국 10불, 20불짜리 옷을 딱 하나 고르더라”고 귀띔한 적이 있다.

이처럼 김 감독이 검소한 생활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지인에 따르면, 김 감독은 “어머니와 형제들은 북한에서 고생하는데, 나만 남쪽으로 내려와 편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아 미안하다. 덕분에 내가 잘 된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한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도, 따뜻한 집에서 쉴 때도 김 감독은 북에 있는 가족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그나마 위안은 ‘야구’를 선택하면서 설날이든, 추석이든 명절에는 늘 운동장에서 선수들과 보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김 감독은 “어머니는 이제 돌아가셨겠지. 산소는 있나 모르겠다”면서도 “그래도 야구를 해서 (가족이 보고 싶어지는) 명절 때 늘 운동장이었다. 올해는 추석 당일에 경기가 없지만, 그동안은 경기하느라 바빴으니까 추석이고 뭐고 없었다. 야구선수라는 게 원래 그런 것 아니겠나”라며 자세를 곧추세웠다.

한가위에는 보름달을 보고 소원을 빈다. 김 감독의 소원은 역시나 “죽기 전에 고향땅 한 번 밟아보는 것”이다. 김 감독은 마치 하늘 높이 떠있는 휘영청 밝은 달이 휴전선을 뛰어넘어 혹 살아있을 가족에게 ‘나는 잘 있다’는 소식이라도 전해주면 좋겠다는 듯 아련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이어갔다. “통일이 돼야 고향 땅을 한번 밟아보지. 죽기 전에 꼭 한번은 가야 하는데…. 나 살아있을 때 되려나.”

홍재현 기자 hong927@donga.com 트위터 @hong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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