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인터뷰 "총리직 제의 처음엔 아버님이 반대"

  • 입력 2003년 6월 3일 15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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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총리는 취임 100일 앞둔 2일 밤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가진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그동안 밝히지 않았던 근황과 공직자 시절의 경험들을 들려주었다.

인터뷰는 심규선 정치부장이 진행했고, 저녁 7시부터 만찬을 곁들여 3시간 가량 진행됐다.

-고교 국어교과서에 등장하는 수필 '신록예찬'을 쓴 이양하 선생의 작품에 <경이, 건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 부분은 고건 총리의 어린 시절을 가리킨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 이양하 선생의 작품에 <경이, 건이>라는 대목이 있다. 이 선생은 당시 서울대 문리대 학장으로 계셨으며 나와는 이런저런 인연이 많다.

대학(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시절 나는 학생 회장에 출마했다. 당시 조선일보 유근일 전 논설주간이 같이 다녔는데, 대학신문에 공산당 선언문을 집어넣었다가 정간됐다. 나는 당시에 몰랐다가 동대문경찰서에서 끌려가 고생하기도 했다. 유 전 주간의 아버지는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뒤 김일성 대학교수로 있었다.

학생회장에 출마하면서 대학신문을 복간한다고 공약을 내걸고 학생회장에 당선됐다. 학교당국에서 복간은 해 주겠다면서 '신문 이름을 바꾸라'고 요구했다. <새 세대> <낙산> 등 2개안을 갖고 학장이던 이양하 선생을 찾아뵈었다. 그래서 신문은 <새 세대>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아직도 전에 다니시던 허름한 동네(종로구 자택 부근) 목욕탕을 찾나?

"그렇다. 총리 되더니 호텔로 다닌다고 이야기를 들으면 곤란하지 않겠나(웃음).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이사는 왔지만 지금도) 조그만 소형차를 타고 다닌다.

운전은 내가 직접 하지는 않는다. 총리실에서 스크랩 해 주는 기사뭉치를 들고 탄다. 정부에서 가판 신문을 안 읽으니 저녁 땐 잠을 충분히 자지만, 이젠 아침에 읽어야 할 거리가 많아서 너무 바쁘다."

-70년대 전남지사 시절에 읍면장 230여명과 대작한 경험이 있다고 들었다.

"만 37세때 전남지사로 취임했다. 먼저 주민들과 주파수를 맞춰야했다. 요즘은 코드를 맞춘다고 하지?

(새마을 운동이 한창 진행되던 상황에서 그와 관련한) 2박3일간 수련회를 열었다. 진로 소주를 곁들인 불고기 파티였다. 젊은 도지사가 50, 60대 읍면장에게 친해질 요량으로 차례로 술잔을 따랐다. 한 10, 11명 정도나 따랐을까. 한 분이 <그럴 수 있느냐. 따르기만 하고, 술잔은 받지 않느냐>며 반배(返杯·술잔 돌려주기)가 시작됐다. 당시 전남지역에 읍면이 230여개 됐으니까 처음 10분을 뺀 220여분과 대작한 셈이다. 물론 거의 시늉만 한 것이지만 꽤 술을 마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날도 다른 사람 신세 안지고 내 발로 걸어나왔다."

(이때 배석한 박종열 보좌관이 추가 설명을 했다. 고 총리댁엔 가훈으로 10계명 같은 것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술 잘 마신다는 것을 알리지 말아라'는 것이 있다는 것. 고 총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말없이 웃기만 했다.)

-총리직 제의받고 처음엔 부친께서 반대하셨다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내 운전기사 밖에 모를텐데. 내가 혼 좀 내야겠네(웃음).

아버님은 올해 98세, 내년이 만 99세인 백수(白壽)를 맞으신다. 아버님은 동아일보가 내는 시사월간지 <신동아> 기자를 하셨다.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를 나오고 대학원을 다닐 때다. 신춘문예에도 당선됐고. 소설가 염상섭 등과 함께 활동했다. (박종열 보좌관 첨언).

아버님이 처음에는 내가 총리직을 맡는 것을 반대하셨다. 아들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를 따지셨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엔 "맡아서 하라"고 하셨다. 그땐 아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문제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총리는 공직자로선 가장 뛰어난 인물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성공의 뒤안에는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제 역할을 못했을 것이란 평가가 있을 텐데.

"60점을 평균으로 잡아본다면 나는 60점 짜리 남편, 40점 짜리 아버지다. 1938년생인 나는 결혼도, 첫 아이도, 공직생활도 일찍 시작했다. 만 23세인 61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해 첫 아들을 가졌다. 70년대 말 전남지사로 부임할 때 첫째가 서울 사대부중에 다닐 때였는데 당시 관행과 달리 광주로 함께 내려가자고 했다. 다른 공직자는 보통 가족은 서울에 남고, 본인만 관사생활을 했던 시절이다. 아들 학교엔 전학 가는 학생이 없는 바람에 전학서류 양식도 없었다. 그 바람에 아들은 중학교 전학할 때 2개월간 학교를 못다니기도 했다."

-총리제의는 어떻게 받았나.

"노 대통령측에서 선거 이틀 뒤에 신계륜 의원(이후 당선자 비서실장)을 내게 보냈다. 또 선거 10일 전에는 김원기 고문이 나를 찾아왔다. 김 의원은 내가 서울에서 중학교에 입학 후 피난시절 부산에서 다녔던 학교의 1년 선배로 가까운 편이다. 서울 여전도회관에 있는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노 후보가 당선되면 총리로 기용하겠다고 제안하면서 지지성명을 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내가 총리할 수도 없고, 지지표명도 할 수 없다고 했지.

당시 나는 서울시장을 그만두고 국제투명성기구 한국지부장(Transparency International Korea)을 맡고 있었다. 이 조직은 정치성을 배제해야 하는 곳이다. 나는 당시까지 당적을 유지했는지도 몰랐다. 서울시장 입후보 할 때 국민회의에 입당하고 공천 받았는데, 민주당으로 당이 바뀌었으니까. 당적 여부를 확인하려고 유인태 정무수석(당시 민주당 종로지구당 위원장)에게 전화했는데, 유 수석은 나보다도 모르더라(웃음). 내가 여차여차해서 당적 정리해야 하겠다고 말했다.

그후 1개월 쯤 지나서 결국 수락했다. 신계륜 의원이 다시 찾아와 총리를 제안했다. 그 이전에 신문에선 누군가 말했는지, 내 이름이 거명됐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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