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명옥의 세상읽기]「이대입구」의 아줌마

  • 입력 1997년 3월 8일 08시 51분


스트레스가 쌓여서 괜히 오백원짜리 머리핀이라도 한 개 사고 싶은 때가 있다. 왠지 마음이 허전하거나 반대로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나는 학교 앞을 찾는다. 많은 사람이 흔히 「이대입구」라고 부르는 곳. 내게는 학창시절의 추억이 서려있는 편안하고 익숙한 거리다. 이십년 전 합격 통지서를 받고 등록을 하고 배지를 사면서 「드디어 나도 대학생이 되는구나」 실감을 했지만 당시 어려웠던 집안 형편 때문에 얼마나 우울한 첫 걸음을 했던가. 이젠 대학생이니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해방감이 엉뚱하게도 핸드백 구두 옷 그리고 멋진 헤어스타일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추운 길을 맨다리로 다닐 순 없어 부츠는 하나 사야할텐데』 이렇게 투덜거리며 가자미 눈을 해가지고 다녔지만 내가 바랐던 입학 선물은 끝내 받지 못했었다. 그래도 막내딸이라고 싸구려 부츠로 기분을 맞춰주셨던 아버지. 퇴직 후에 마땅히 할 일도, 돈도 없으셨던 그 마음도 아랑곳하지 않고 딱 두번 신고는 신발장에 처박아버렸지. 이젠 그 구둣방도 아버지도 없는데…. 지금도 그곳은 쇼핑거리로 통하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에는 그야말로 유행의상의 집산지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양장점의 위치와 이름을 훤히 다 외워버리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런 곳에서 비싼 옷을 맞춰 입었던 친구들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한창 기세등등했던 20대. 나 잘난 줄만 알았던 그때는 학교 앞에서 보는 아줌마들에게 실쭉거렸다. 『아니 애까지 데리고 여길 왜 오는 거야. 학교를 다녔으면 그때로 끝난 거지. 학교 앞에 온다고 다시 젊어지나』 속으로 그렇게 함부로 지껄였던 말을 지금도 내가 그대로 되받는 아줌마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 거리에서 활력을 얻는다. 이십년 전 되도록 멋있게 책을 들고 강의실이 아닌 미팅 장소로 달려가던 그 당시의 내 모습을 상상해보고 웃는다. 3월, 또 다시 찾아온 새학년 새봄에 새내기들은 학교앞을 활보할 것이다. 아아 부러워라. 그 자유와 낭만. 그리워라 그 젊음. 그러나 나는 생각해 본다. 꽃은 한번 피기는 힘들어도 지기는 쉬운법. 언젠가는 저들도 나처럼 「그때 그 젊은날」을 그리워하며 이 거리를 찾으리라. 정말 시간이 무섭다. 한 일은 하나도 없는데 남은 시간은 자꾸만 짧아진다. 문득 붉디붉게 핀 선운사의 동백꽃을 보러가고 싶다. 꽃잎이 뚝뚝 땅에 떨어지기 전에. 차명옥<방송작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